●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중국 연변작가협회에서 시상하는 화림문학상이라는 상이 있다. 이상은 연변작가협회에서 몇해에 한번 꼴로 시상하는, 독립운동가 이화림의 이름을 따서 만든 상이다.
나는 1994년 중편아동력사소설 “거북구슬”로 제3차 화림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상을 잊을 수 없는 건 나의 첫 중편이고 첫 역사소설이며 또 관행대로 그 상의 수상을 계기로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에 입회할 수 있었기때 문이다.

▲독립운동가 이화림
민속절이 열리는 운동장의 가녁에 곤색 옷에 하얀 운동모를 눌러쓴 가녀린 몸매의 한 노파가 앉아있었는데 대련의 한 문학도가 그가 바로 이화림할머니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어줍게 다가가 연변에서 왔으며 화림문학상의 수혜자라고 인사를 드렸다.. “연길에서 왔다고?” 반색하며 할머니는 나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말그대로 신인때이라 어리뜩하기 짝이 없었던 나는 할머니와 몇 마디를 나누지 못했고 사진 한 장도 남기지 못하고말았다. 하지만 지금도 그 존함이 나오면 당시 하얀 운동모, 안존한 얼굴의 노파가 떠오르군한다.
사건의 주인공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 날 윤봉길을 도와 삼엄한 검문검색을 통과한 양장을 한 27살의 여인이 바로 이화림이었다.
이화림 녀사는 홍구공원거사에 처음부터 마지막 까지 직접 개입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항일사에 두고 두고 전해 질 두 거사에 직접 참여한 역사의 증인으로 되었다.
독립운동에 투신해 상해로 가다
이화림은 심한 재정난을 겪고 있는 조직의 부담을 덜기 위해 나물장사, 빨래, 수놓기 등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고 푼돈을 모아 활동 경비로 썼다. 그러면서 밀정 처단, 연락활동 등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여 김구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이화림은 그야말로 김구에게 있어 비서이자 한인애국단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테러단으로는 조선의 해방과 혁명을 이룰수 없다는 “고민”으로 계속 함께 싸우자는 김구의 만류를 뿌리치고 혁명의 기지 광주로 떠났다.
<백범일지>에 이화림 이야기가 빠진 것은 그녀에 대한 김구 선생의 인간적 서운함이 작용했던 것 같다.
이화림은 법학부에서 2학기 동안 공부한뒤 의학부로 옮겨 대학부속병원 견습 간호사로 일하면서 의학공부에 메진했다.
남경에서 이화림은 민족혁명당 부녀대 부대장직을 맡아 주로 의료보건사업에 주력했다. 부녀대는 조선녀성의 조직화, 중국녀성들과의 통일전선결성을 목표로 항일선전활동을 폈다. 이때 이화림은 이집중과 가정을 이룬다.
조선의용군은 전투가 없는 날이면 감자밭을 일구고 모택동의 대생산운동에 발맞춰 방직공장, 병원, 리발소, 상점 등을 차려서 직접 운영하는 자립활동을 했다. 태항산 기슭에는 돌미나리가 많았다. 이화림은 녀성대원들을 이끌고 돌미나리를 캐여 김치도 담그고 볶아서 반찬을 만들었고 도토리를 주워다가 삶아서 가루를 내어 먹기도 했다. 하루는 나물을 캐면서 노래를 지어 동료 대원들에게 가르쳐주고 그 날 점심시간에 합창공연을 했다. 민요「도라지」에 맞춰 가사를 새로 지은 「미나리타령」이 그 것이다.
미날,미날,돌미나리
태항산 골짜기의 돌미나리
한 두 뿌리만 뜯어도
대바구니가 찰찰 넘치누나
에헤야 데헤야 좋구나
어여라 뜯어라 지화자자 캐어라
이 것도 우리의 혁명이란다
이화림은 1943년 봄부터 병원에서 일하다가 그해 조선의용군이 연안으로 이동하자 1944년 4월 연안으로가 다음해 1월 연안 의대에 입학하여 못다한 의학공부를 시작했다. 이화림은 연안에서 열화충천하는 대생산운동에도 참가하고 군정대학 교장 수하에서 자료간사사업도 하였으며 조선의용군 무정총사령의 파견을 받고 중국의과대학에서 공부도 하였다.
공부와 생산로동을 병행하는 고된 생활이엇지만 이화림은 근면과 열성으로 이를 감당해 나갔다. 뿐만아니라 격주에 한 번씩 현지 주민들에게 당 정책과 시사문제를 해결하고 보건위생상식을 가르쳤다. 서툰 중국어이긴했지만 주민들은 그의 이야기를 무척 흥미있어 했다. “일본놈들은 언제 투항하나요?”, “국공합작을 또 하나요?”에서부터 “감기는 왜 걸리나요?” 등등 벼라 별 질문을 들이대도 이화림은 짜증내는 일이 없이 일일이 해설 해 주군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한 뒤 조선의용군은 동북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화림은 그대로 남아 의학공부를 계속하기로 했다.
무정장군은은 이화림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동무를 의대에 보낸 건 앞으로의 우리 혁명사업에 전문훈련을 받은 의학자들이 필요하기 때문이요. 지금 항일전쟁이 승리했지만 우리 앞에는 더 간고하고 복잡한 혁명과업들이 나서고 있소. 무산혁명은 일조일석에 승리할 수 없는 장기적인 사업이고 혁명이 승리한후엔 간고한 건설사업이 우리를 기다리게 될 것이요. 동무는 절대 의학공부를 중도에 폐하지 말고 잘 배운다음 우리 부대에 돌아오도록 하오. 그때 가서 남들이 동무를 놓지 않아도 내가 꼭 동무를 데려가겠으니 안심하오.”
항전은 끝났지만 그녀에서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이화림은 중국에서 련이어 벌어진 공산당과 국민당의 전쟁에도 뛰어 들었고 전후에는 새로 성립된 중국의 의료보건사업에 정력을 몰부었다.
1952년 와방점 후방병원 기술과 과장으로, 심양의사학교 부교장으로, 국가교통부 위생처 기술과장으로 일하였으며 1956년 중앙당학교를 졸업하고는 연변위생학교 교장, 연변조선족자치주 위생처 부처장, 위생국 부국장을 지냈다.
이화림은 임종전에도 유언을 남겨 자기의 마지막 전재산인 5만 위안을 대련시조선족학교에 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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