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3(목)
 

dspdaily_com_20140411_115403.jpg■ 김철균

한국사람들은배를 타는 사람들을 두고 거의 한결같이 “배놈”이라고 부른다. 육지의 친구들은 잘 모르겠지만 호화여객선이든작업선이든 여하튼 배를 1년 간이라도 타본 사람이들은 자기들이 그 무슨 으시댈만한 “배님”이 아니라아주 천한 “배놈”이란걸 곧바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배놈의세계도 다층차인 것만은 사실이다. 마구루배라는 “참치선”,  “채낚이선”과 “트롤선” 등 작업선을 타는 선원들의 노동강도나 환경조건을보면 하늘아래 저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나 싶게 그들의 생활은 힘들고 지겹고 짜증난다. 그러나 산뜻하게정복을 차려입고 각 부서에 따라 자기의 직책만 수행하는 유람선이나 상선의 근무원들을 놓고 보면 누구나 다 부러워할 정도로 턱이 높고 신사다웠다. 하지만 그들 역시 돈에 얽매여 부모처자를 떠나서 생활해야만 하는 고독하고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바다의 짠물과 해풍에 푹 절어서 육지에서는 도무지 적응할 수 없는 기구한 사람들, 이 모든 것은 작업선의 잡부들이나 여객선의 1등 항해사나 모두 마찬가지였다. 똑같이 “배놈”이란 범주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럼 “배놈”의 세계란 과연 어떠한 것일가?
 
“태풍호”에 있던 나날
 
우리가 제일먼저 승선한 선박은 한국 선일해운주식회사의 타카뽀트라고 부르는 견인선이었다.

우리가 라틴아메리카의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항에서 구소련선박 “프리오카츄샤”호에 편승하여 포클랜드군도 해상에 도착한 것은 1991년 3월 30일 새벽녘이었다. 그러니깐우리가 3월 18일에 연길을 떠났으니 꼭 13일만이었다. 그 때까지 우리가 침대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데갑자기 소련배의 엔징이 툭 꺼지더니 미구하여 갑판에서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슨 난리가났는나 하여 급기야 갑판으로 뛰쳐 나갔더니 소련배는 이미 파도가 잔잔한 어떤 해협에 들어와 있었고 수십척을 헤아리는 대중형 선박들이 앵카(닻)을 내리우고는 사처에 정박해 있었다. 이 때 누군가 “포클랜드에 다 왔다!”하고 소리질렀다. 순간 나의 가슴은 뭉클해났다. “드디어 올 곳으로 왔으니 2년이란 고역이 곧바로 시작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머리속이 착잡해났다.

그 때 수많은큰 선박들이 정박해있는 가운데 그 사이를 비집고 다니면서 다른 배와 자주 접선하는 작은 배 한척이 보이었는데 소련배에 함께 올랐던 한국선원들의말에 의하면 그 배는 1000톤도 될가 말가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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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그 보잘것 없는 배에 우리가 오를 줄이야 뉘알았으랴.

그 배의 네임(이름)이 바로 “태풍호”였다. 그배는 위낙 부두에서 수만톤씩이나 되는 큰 선박들을 밀어주는데 쓰이게 만들어졌는데 한국 선일해운에서는 그 배를 개작하여 큰 선박들이 실어오는 물, 기름과 부식 그리고 탁송품같은 것을 받아서는 다른 어선에 공급하는데 써먹었다.그런대로 돈벌이는 꽤나 잘 된다고 했다.

“배놈”의생활이 고되다더니 그다지도 고될 줄은 우리는 “태풍호”에 승선해서야 절감했다. 그 배의 시스템은 하루 24시간 줄곧 스템바이(대기상태)였는데일단 접선신호가 있기만 하면 밥을 먹다가도 뛰쳐 나가야 하고 잠을 자다가도 일어나야 했다. 그래도 전임선장 강××가 있을 때는 배접선시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필요 없으니 (접선시 선수와 선미에 7~8명이면 충분했는데 그 때 태풍호에는 중국선원과 한국선원 도합 20명도넘었음) A,B조로 나뉘여 6시간씩 교대하여 작업하라고 했기에그닥 고되지는 않았다. 헌데 후임 선장 김××가 부임되어 오면서부터 배 기강을 바로 잡는다면서 무작정그 것을 다시 고쳐 다 함께 대기상태에 있게 했다. 그러다 보니 접선작업을 할라치면 무리지어 나갔지만그저 서있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반면에 한시간도 시름놓고 깊은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자골치거리는 연이어 발생하였다.

무엇보다도먼저 목욕하기가 힘든 그 것이었다. “태풍호”에는 선장방에 딸린 욕실외 욕실이라고는 하나뿐이었는데 20여명이 작업하고 들어오면 욕실앞은 줄을 서야 했다. 거기에 한국선원들이먼저 목욕을 하고 나면 또 접선신호가 울리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갑판장은 우리가 목욕을 자주 하지 않는다면서밥을 먹다가도 수절을 팽개치었고 우리가 들어있는 침실에도 냄새가 난다면서 눈알을 굴려댔다. 우리라고왜 매일 목욕하고 옷을 세탁해 입기가 싫겠는가. 헌데 환경이 도무지 그 것을 허락지 않는데는 무슨 용빼는수가 있는가. 거기에 목욕을 하지 않으면 중국되놈, 돼지같은놈들, 하다가도 또한 물을 많이 쓴다고 자주 욕실에 자물통을 잠궈놓는 것도 갑판장이었다.

하여 우리와 갑판장사이에는 이런 사소한 일로 하여 자주 언쟁이 벌어졌다. 어느날 배에서는 작업이 뜸한 틈을 타서 술파티가 있었다. 술이 몇순배돌아 모두들 얼근히 되자 우리 연변선원들 중에서 나이가 비교적 많은 양일선씨가 갑판장과 걸고 드는 것이었다.

“당신들은일본사람들한테서 과학적 관리와 방법을 배운 것이 아니라 사람을 괴롭히는 것부터 배웠다구요.”
“너, 이 자식 뭘보고 하는 소리야?”
“그래 50년전에 일본 쪽바리들이 당신들을 대하던 식으로 지금 당신들이 우릴 그렇게 천대하는 것이 아닌가요?!”
“너 이놈, 뭐 어쩌고 어째? 어디라고 감히 말대꾸질이냐?” 하며 갑판장이 양일선씨의 멱살을 잡고 때리려던 찰나, 갑자기 배접선신호가울렸다. 하지만 일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바로 그날밤 자정이 퍽 지난 뒤 갑자기 울리는 비상벨소리에 우리는 또 접선하는가 해서 뎃기(갑판)로 뛰쳐 나왔다. 허나 접선은 아니고 갑판의 희미한 등불아래에는 갑판장이노기등등해 서있었다.

“지난 밤술 처먹은 놈들 몽땅 나왔!”
이에 우리들태반이 모두 술을 마신지라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 속에는 멋을 모르고 나온 한국선원 박영재씨도 끼어들었다.
“야 이 놈, 너도 중국 되놈이냐? 어서 침실로 들어가지 못할까?”

이어 갑판장은 양일선씨를 불러 내고는 한바탕 닦아세우는 것이었다.

“야, 너 이 개새끼야! 예가 어딘줄 알고 불평 불만이야? 여기가 너희들 중국인줄 아느냐? 한국선박에서 한국사람의 술 처먹고왜 한국사람과 술주정 부리냐 말이야?”

이렇게 한동안일장훈계를 하고 난 갑판장은 우리 모두한테 두시간동안 제자리에 서있게 하는 벌을 주는 것이었다. 얼마나어이없는 일인가?! 설사 양일선씨가 한 말이 예의가 없고 과분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양일선씨혼자서 당해야 할 일이지 우리 중국조선족 선원 모두가 이런 기합을 당해야 하다니.

남극이 바라보이는포클랜드는 우리 연변과는 달리 해마다 이 곳의 봄일 때면 그곳은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겨울의 영하 20도를 오르 내리는 맵짠 날씨에 그것도 모두가 침대에서 겉옷만 입고 나온 몸으로 두시간동안이나기합을 당할라니 우리는 모두 동태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한국선원 김대학씨는 어선에 비하면 그러한 벌은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긴 어선에서는 중국선원들이 꾀를 부리거나 말썽을 일으키면 영하 30도 되는 어창에 한두시간씩 가두어 둔다고 하니까.

그 일이 있은후부터우리는 쩍하면 그와 비슷한 벌을 받군 하였다. 갑판장 먼저 밥술을 들어도 그렇고 그한테 “님”자를 붙이지않아도 그랬으며 한국사람을 조선사람이라 불러도 그랬다.

하지만 참는 것도 한계가 있고 곪으면 터지기 마련이다.

한번은 소련선박에서어선으로부터 냉동물고기를 받아싣게 되었는데 적사일군이 모자라 우리가 거기에 가서 돈벌이 삼아 작업하게 되었다. 헌데소련배에는 침실이 모자라 부득불 통로바닥에서 자야 한다기에 우리는 덮는 모포와 침대에 까는 해면자리를 가져가야 했다. 그래서 우리가 짐을 싸들고 소련선박으로 건너가려 할 때 술에 얼근히 취한 갑판장이 그것을 보더니 노발대발하는것이었다.

“야, 이놈 개새끼들아! 좋은 자기의 돈벌이를 하러 가면서 왜 허락도 없이그걸 함부로 갖고 가는거야? 당장 방에 갔다두고 꺼져라.”

우리는 억이막혔다. 본선에서도 자기가 깔고 덮고 하던 것인데 그런 것마저 허락받아야 한단 말인가?

허나 빌붙는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허락없이 가져 가는 건 잘못 되었지만 소련배에 가서 어떻게 맨봉당에서 자겠느냐, 좀 봐달라 하고 사정하였다. 특히 그 때 나는 고질이었던 치질이도졌기에 더구나 찬 곳에서 잘 수가 없었다. 그랬건만 갑판장은 막무가내였다. 참는다고 봐줄 갑판장이 아니었다. 또한 잘못도 없이 계속 굽어들수도 없었다. 나중에 꺾어지고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시비는 캐고 봐야 했다. 나는 튕길듯이 후닥닥 일어나서는 선장방으로 찾아갔다. “우리가 뭐돈에 미쳐서 가는 줄 압니까?! 선박에서 배치하니 가며 또한 그 벌어오는 돈도 우리만이 가지는 것이아니고 전체 선원들이 똑같이 나누는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최저한도로 잠자리 조건만은 보장해야 할 것이아닙니까? 그래 이것도 같은 동포요, 피줄이요 하며 너스레를떨던 한국사람들의 양심입니까?”

이렇게 내가이치에 맞게 따지고 들자 선장도 뜻밖인 모양이었다.

“보숭, 보숭(갑판장), 방송을 듣는 즉시 선장방에 올라와 보이소.” 헌데 선장의호출을 받고 올라온 갑판장은 자기는 그런 적이 없다고 한사코 나눕는 것이었다.
“김군, 어찌된 영문이야?”
선장은 나를무섭게 쏘아 보았다. 이 때 쏘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기관장이 차마 볼 수 없었던지 일어나며 나를두둔해 주는 것이었다.
“보숭, 당신 나살이나 처먹었다는게 이렇게 시치미를 뗄 수가 있어? 당신그러는걸 나도 봤단 말이야. 그래 이 교포친구가 터무니없이 당신을 헐뜯는다고 생각해? 당신 어쩜 그럴 수가 있는가 말이여.”

기관장의 그 말 한마디에시비는 대번에 갈라졌다. 선장은 진짜 노한 것 같았다.

“회사본부에서는교포선원이라 해서 절대 차별시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어. 그런 회사정신이 당신같은 사람들 때문에엉망으로 되고 있단 말이야. 앞으로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솔선수범하이소. 알겠습니까?”
“예, 예,  알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역시 선장앞에서는쩔쩔매여 급신거리는 갑판장이었다.

기관장, “태풍호”같은 분위기가 험악한 선박에도 좋은 사람은 있었다. 그는이전에도 우리와 가끔씩 팔씨름도 하고 우스개도 곧 잘 했다. 특히 우리의 봉급이 250달러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자 회사에서 너무한다, 너희들이 진짜욕본다, 너희들이 영국배나 스페인배로 도망가라. 거긴 일도힘들지 않고 급여도 더 많은가 하면 인간사이의 차별도 심하지 않다. 한국사람들의 본질을 몰라서 한국선박에다 올랐느냐. 그것이 바로 잘못됐다며 늘 우리한테 깨우쳐주군 했다. 나는그 말이 어쩐지 나쁘게는 들리지는 아니했다. 좋은 사람은 기관장 한분만이 아니였다. 남몰래 사과 한알이라도 우리들 손에 쥐여주는 주방장 김진해씨, 위험한일에는 우리를 제쳐놓고 자기가 나서는 나어린 제1갑판원 설복진씨 또한 소주 한병이라도 생기면 언제나나부터 찾군 하던 뚱보총각 박영재군, 참 마음씨만은 비단같은 친구였지.

기관장한테서들을라니 갑판장 역시 그닥 독한 양반은 아니라 했다. 듣는바에 의하면 한국선박은 사관선원과 부원선원으로나누는데 해양대학같은 전업을 졸업한 선원은 사관에 속하고 그런 학력이 없이 배를 탄 선원은 부원에 속했다. 그렇다면갑판장과 조기장, 주방장은 부원선원중에서 경력이 제일 긴 선원들로 그 직에 종사하는바 나이는 많지만 (선장보다도 나많은 이들이 많음) 급별과 봉급은 사관의 3항사나 3기사와 같기에 이런 이들의 불평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쩍하면 부하들과 역정을 내군 했는데 “태풍호” 갑판장도 그런 범주에 속했다. 또한 갑판장이 우리 중국선원들과 더욱 호통을 치는데는 그럴만한 다른 사연도 있었다.

그것인즉 갑판장의부친은 6.25 당시 전라도 어느 경찰서의 경찰관이었는데 국군과 연합하여 남로당 빨치산을 토벌할시 그들의기습을 당하는 가운데서 빨치산의 날창에 찍혀 죽었다고 한다. 하여 갑판장은 어릴 적부터 모친한테서 반공선전을들을대로 들은지라 공산당에 대해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원한을 우리한테서풀어서야 될말인가. 하여 갑판장이 우격다짐으로 우리를 억누르려 하였지만 나는 나대로 그한테 굽어들지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선장이나 기관장을 찾아가 시비를 캐군 하여 도리어 그가 골탕을 먹게 하군했다. 물론 한 인간을 고자질한다는 건 그다지 광채롭지 못한 일이긴 하지만 약자가 살고 버티려면 어쩔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힘겨룸을 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헌데 선일해운에서두번째로 큰 선박이라는 “코리안스타(KORAN STAR”호가 포클랜드해상에 들어오자 늘 대바른 소리를잘하던 내가 선참으로 그 배에 추천받아 승선할줄이야 뉘 알았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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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스타”호와 그 사람들

“태풍호”에서배척받고 추방당해 다른 배로 전선한줄로만 알았던 것인데 그 “코리안스타”호가 그토록 멋지고 그 곳의 사람들 또한 그다지도 친절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못하였다.

그럼 갑판장의눈밖에 난 내가 어찌하여 제일 먼저 팔리여 그 멋진 선박에 승선하게 되였을까? 알고 보니 누가 어느배에 팔려 승선하는가는 근본 “태풍호”의 갑판장한테는 권리가 없었다. 갑판장이 다 뭔데 그런 권리까지다 있담. 순간 우리 일행중의 어떤 이들이 좋은 배에 팔리려고 갑판장한테 코밑치성을 하던 일들이 생각나(한 친구는 나의 웅담분까지 훔쳐서 갑판장한테 알랑방구를 먹였음)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진상은 이러이러했다. 이 때 “태풍호”와“코리안스타”호가 자주 접선하면서 물건을 주고 받는 사이와 우리가 “코리안스타”호에 가서 전재(转载)작업을 하는 동안에“코리안스타”호의 선장과 기관장이 몰래 우리 일행의 일거일동을 지켜봤는데 진작 누구를 받고 쓰는가 하는 의논까지 있은 모양이었다. 하다면 신장 162센치미터에 불과하고 체중도 55킬로그람 남짓한 내가 어떻게 그들의 눈에 들었을까? 듣는바에 의하면그때 “코리안스타”호에는 싸롱뽀이라고 일컫는 선원자리가 모자랐는데 직책은 주방장의 일을 거들어주는 외에도 선장,기관장의 방청소, 세탁 등을 맡아하는 것이었다. 하기에팔힘이 세고 우람진 사람보다 예의 바르고 깨끗하며 부지런한 사람이 적중했는데 거기에 내가 선정됐던 것이었다.

“코리안스타”호에승선하고 보니 배도 현대화한 신조선이었거니와 우선 그 곳의 사람들이 맘에 들었으며 특히 선장이 더욱 좋았다.

한번은 선장인 정유식씨와나 사이에는 이런 대화가 오갔다.

“여태껏 우리는공산권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눈도 퉁방울처럼 생기고 웃을줄도 모르며 싸움질만 일삼는 도깨비같이 생겼다고 여겨왔거든. 헌데 자네들을 보니까 군들도 역시 우리와 똑 같은 말을 하고 인정이 넘치는 사람들이었어. 참. 사상과 이념의 차이가 무섭단 말이야.”
“하긴 그렀습니다. 저희들도 이전에는 썩고 병든 남조선이요. 미제국주의가 살판치고 거지들이득실거리는 곳이란 선전을 줄곧 받아 왔거든요. 그러다 최근에야 한국이란 어떤 나라인가를 알게 되었답니다.”
“그랬었는가? 그럼 피차일반이었구만. 허허허…”

후에 내가정유식선장한테 “청년생활”, “천지(연변문학 전신)” 등 연변의 간행물에 실린 작품들과 한국 “선데이서울”에 발표된 “우리는 백두산에서 아리랑을 함께 불렀다”는수필을 보여 주었더니 그 때로부터 그는 나를 다른 눈길로 봐주었으며 늘 나한테 관심조로 이렇게 말해주군 했다.

“어때 할만해? 힘들고 억울하지? 힘들고 억울하면 진급해야 돼. 우리도 다 자네들처럼 힘들고 억울한 가운데서 크며 일해 오늘의 선장, 기관장으로된거야.”

한편 선장의말에 의하면 부원선원 중에서 예하면 갑판장과 기관장은 갑판원, 기관원으로부터 조타수와 조기원을 거쳐그 직에까지 이르려면 보통 10년 이상 배를 타야 하지만 싸롱뽀이는 잘만 하면 바로 주방장으로(필자는 배타서 6개월만에 주방장으로 됐음) 진급한다는 것이었다. 하기에 나는 더욱 최선을 다해 근무했는바 그것은결코 선장한테 알랑방구나 먹이려는 아첨은 아니었다.

“코리안스타”호에승선하고 보니 벌써 분위기가 “태풍호”와는 판판 달랐다. 우선 스켓줄부터 “태풍호”는 주로 남미주의포클랜드 해상에서 맴도는 작은 배였지만 “코리안스타”호는 비정기선이었고 본회사의 간판선박으로서 유럽을 비롯한 세계의 그 어느 곳에나 갈 수 있는배였기에 알짜 자질높은 선원들만 승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선장, 기관장으로부터 말단선원에 이르기까지 매일 수없이 만나도 “안녕하십니까?”, “수고들 해요”하는 인사말이 정답게 오갔으며 선원들 모두가 그 누구의 지시가 없어도 자기가 맡은 부서와 직책에따라 열심히 일하는 것이 곧 선박의 기풍이었다.

한편 선박의입출항시의 일체 작업은 군대규율에 못지 않았다. 그럴 때면 한밤중이고 가리지 않고 언제나 선장이 직접조타실에서 지휘하군 했는데 선장이 “우현 10도” 혹은 “좌현 20도”하면 제1조타수가 그것을 복창하며 키를 돌렸고 선수(船着)와 선미(船尾)의 선원들도기계를 잡은 이, 바줄을 준비하는 이들로 분공이 명확했다. 그러다가선장이 일단 “선수, 기계를 돌려 바줄을 감앗!” 하거나“선미, 바줄감기 스톱!”하면 선원들도 그것을 복창하며 긴장하게일했다. 그야말로 인간의 정도 흐르고 엄한 규율도 있는 선박다운 선박의 시스템이었는바 모든 것은 휴식이휴식답지 않고 작업이 작업같지 않은 “태풍”호와는 비교도 안되었다. 참, 같은 회사의 선박을 사이에 이런 현저한 차이가 존재하다니. 그래서“배놈”인 선원들마저 송출시면 회사나 선박을 되게 고른다고 했다.

그외 생활시스템도사람한테 편리하게 꾸며져 있었다. 침실마다 선원 한명씩 들어있게 되여 있고 단독 샤와실이 갖춰졌는가하면 사무용테이블, 전화, 스피카, 벽시계 등 시설에 이불도 여름용과 겨울용이 따로 있었고 거기에 에어콘까지 달리어 날씨변화에 따라 더운 공기와찬공기를 엇바꿔 보내 주었으며 비디오관람실도 사관과 부원이 따로따로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우에서도 언급했지만더 좋은것은 “코리안스타”호의 선원들이었다. 내가 혹간 직책에 따라 고급사관(선장, 기관장, 1항사,1기사 및 통신장)들의 빨래를 하거나 그들의 방을 청소해 줄라치면그들은 매달 두세번씩 10달러 정도의 팁을 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며 하다 못해 깡통맥주나 콜라같은것을몇개씩 안겨 주고야 시름을 놓군 했다. 또한 외출시 택시값은 물론 술값은 언제나 그들이 돌아가며 부담했고혹간 우리가 값을 치를라치면 그들은 매우 언잖아하면서 “자네들이 여기서 남긴 돈을 중국으로 가져가면 큰돈이 되잖아? 남겨갖고 돌아채 아파트 장만한 뒤 장사라도 하면서 잘 살아보라구, 하지만우린 이 돈을 남겨 한국으로 가봤자 아무것도 아니야. 건 그렇다치고 우리가 어떻게 급여가 적은 교포들한테이런 것까지 다 부담시키겠어?!”라고 하며 기어코 제지시키군 했다. 또한선장인 정유식씨는 다른 선박이나 선식회사 및 대리점의 손님들을 접대할 때마다 옆에서 시중을 드는 나를 소개하며 “이 친구는 연변에서 알아주는 소설가라구요. 이 친구가 배를 타는건 단지 돈벌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안계를 넓히기 위해서래요”라고 극구 춰주는 것이었다.

그럴적이면한낱 애숭이문학도인 나는 무척 송구스럽기도 했지만 그 말이 그토록 싫게 들리지는 않았다.

특히 1991년 9월 3일 저녁은나의 “배놈”생활에 있어서 영원히 기념할만한 저녁이기도 했다.

그날이 바로우리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39주년 기념일이었는데 이전에는 그저 예사롭게 보내던 자치주생일이 그날따라웬일인지 자꾸만 뜻깊어 보이고 떠나왔던 고향이 사무치게 그리워났다. 그래서 끝내 참지 못하고 내가 그것을정유식 선장한테 여쭈자 그는 대뜸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반색했다.

“우리 한민족동포들이 중국에서까지 민족자치를 실시하며 산다니 참 장하다. 자네들이 그것을 잊지 않고 해외에서까지기념하려 하니 선장인 내가 어찌 보고만 있겠어?!”

그러고는 통신장이덕수씨한테 즉시 선원들을 모여놓고 술파티를 열라고 했다.

그날밤, 우리는 선장, 기관장, 통신장등 사람들이 부어주는 위스키를 돌아가며 받아마시고는 밤새껏 노래하고 춤추며 놀았다. 참, 어둠이 깔린 수평선우로 흰 물갈기를 날리며 미그러져 가는 우리네 선박 “코리안스타”호, 바로 그 일망무제한 바다와 외적선박에서 자치주생일을 쇤는 우리들, 우리가저가락장단을 두드려 대며 연변노래를 부르자 한국선원들은 연변에도 진짜 좋은 노래들이 많다면서 서로 배워달라는것이였다. 하여 우리가 “고향생각”, “동동타령” 등 노래를 그들한테 배워줄수밖에 없었다. 헌데 한수도 아니고 여러수를 어떻게 배워준담? 결국나는 팩시종이에 오선보를 긋고는 거기에 악보를 적기 시작했다. 그러자 고등학교시절에 음악공부를 좀 했다는 1항사 김형훈씨는 나한테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그저 볼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뿐만아니라 나는 또 내친 김에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는 선원 한명을 순식간에 속사해내여 나의 그림그리는 장끼도 펴보이어 그들 모두의 인기를 모으기도했다.

다른 한편“코리안스타호”의 선원들이 거의 하나같이 좋은 사람들이긴 하지만 녀자를 억수로 밝히는데는 다른 선박의 선원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그들 역시 “배놈”이란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듯 싶었다.

1991년 5월, “코리안스타”호가 포클랜드해상을 떠날 때 선원들한테는 모두특수작업비(전재비)가1800딸라씩 지급되었는데 이제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항에 입항하면 그 돈주머니를 풀어놓을 판이었다. 아니나다를가 배가 몬테비데오항에 입항하여 수속 절차를 밟자 선원들은 저녁밥을 먹기 바쁘게 샤와를 마치고는 정해둔세뇨리따(아가씨)한테 “입항신고”하러 간다며 앞다투어 외출길에나섰다.

그도 그럴것이야명주를 뿌려놓은듯 황홀한 몬테비데오의 잠들수 없는 밤, 거리마다 네온싸인이 반짝이고 간드러진 음악이잔잔히 흘러나오는 가운데 우리는 도처에서 아가씨들을 끼고 거리를 누비는 각종 피부를 가진 “배놈”들을 볼 수 있었다.

유흥업으로놓고 말하면 우루과이도 동남아와 마찬가지로 세계에서 이름난 곳이라 할수 있는 바 여자라면 오금을 못쓰는 한국선원들이 그 황홀한 세계를 지척에 두고배에서 외롭게 보낼리 만무했다. 사타구니 사이에 있는 그것이 노하여 저울대처럼 되는 판에.

배가 부두에정박해있는 사이, 그런 날은 계속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저녁, 본선의 한국선원 노주태씨가 나체쇼를 벌리는 위스키바에서 로시오라는 본지아가씨(몬테비데오에선 섹시하기로 이름난 창녀임)와 흥이 도도하게 술을 마시고있는데갑자기 웬 거친 손이 나타나 아가씨를 잡아일으켰다. 엉겁결에 쳐다보니 대만선원이었다. 이에 노주태씨 역시 술을 얼근히 잘된지라 네가 뭔데 하며 걸고 들었다.

이렇게 서로밀고 닥치고 하는 통에 그 안에 있던 한국선원과 대만선원들이 다 모여들면서 삽시에 두 파벌로 갈라졌다. 당장무리싸움이 벌어질 그 일촉일발의 시각에 마침 본선의 연변선원인 이용석씨가 조해사업에 나섰다. 알고 본즉그 로시오란 아가씨를 잡아일으킨 대만선원은 포클랜드해상에서 근무하는 채낚이(오징어낚시선)선의 선장이었는데 입항하든 안하든 그 아가씨한테 매달 미화 1000달러씩주기로 하고는 일잔 입항해서 찾아만 오면 그 아가씨가 모든 것을 제쳐놓고 그한테 “봉사”해야 한다는 “계약”까지 맺았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용석씨는 본선에도 중국선원 몇명 잘 되는데 중국사람들끼리 요만한 오해 때문에 싸우기까지는 할 수는없지 않느냐고 해석해서야 대만선원들도 그 말에 동감을 표시하며 물러가는 것이었다. 물론 그 아가씨를대만선장한테 양도하는 걸로 일단은 아퀴를 짓고 참 창녀 한명 때문에 무리싸움을 할번하다니 사내대장부로서의 제일 큰 수치가 아마 그런 것이 아닌가싶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통신장 이덕수씨가 정해둔 파트너를제쳐놓고 다른 아가씨를 끼고 술을 마시다가 하마트면 두 아가씨가 맞붙어 싸우게 할번 한 일, 2기사서춘철씨가 아가씨와 함께 호텔침대에까지 올랐지만 술을 억수로 마신데서 일을 성사하지도 못한 채 잠에 곯아떨어진데서 그 아가씨가 온밤 뜬눈으로 새게한 어처구니 없는 일, 하긴 고되고 짜증난 바다생활일에 곁에 녀자가 있으면 그 스트레스를 몽땅 줄 수있기에 “배놈”들이 여자를 찾게 된다는 건 남자로서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한국선원들의말마따나 좆빠지게 번돈을 며칠 사이에 몽땅 창녀들한테 처넣는다는건 한국선원 외에는 거의 없을 정도라니 한심하기도 했다. 빠지면 웬간한 기업도 삼킨다는 그 구멍이 어떤 구멍인데… 또한 남미의아가씨건 동남아나 심지어 아프리카아가씨건 모두가 한국선원이라면 미칠 정도로 좋아한다는데 그것은 결코 한국선원들이 멎져서가 아니었다. 그만큼 돈을 잘 쓰니 창녀들의 사냥물로 되었을뿐이다.

또 다른 한편한국선원들도 우리 연변의 조선족들과 마찬가지로 똘똘 뭉쳐 합심이 되는데는 확실히 타국선원들보다 못했다. 싸움이벌어져도 그랬다. 무리싸움만 붙으면 한국사람들중에는 눈치를 보며 살살 피해 도망가는 이가 많았다. 그 실례로 작업선과 화물선이 많이 정박하는 몬테비데오에서는 한국선원과 대만선원들 사이에 충돌이 자주 생겼는데그럴 적마다 한국선원들의 수는 싸움이 지속됨에 따라 줄어드는 반면 대만선원들의 수는 괴상한 휘파람소리만 나면 항구구역의 골목골목에서 뛰쳐나와 점점많아진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선원들도 자기들이 남과 1대 1로 붙으면 그 누구도 남한테 지지 않지만 일단 10대 10일 경우면 틀림없이 패한다고 승인했다. 1대 1과 10대 10의 정반대되는결과, 얼마나 묘한 비유이며 얼마나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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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리아립퍼”호는 노가다배?

내가 선원으로근무하면서 제일 마지막 반년가량 탄 배는 역시 선원해운의 “카나리라립퍼(KANALIA LiPo)”호였다.

1992년 10월 23일, “코리안스타”호가네델란드 로톨담항구에서 소련인들한테 팔리자 우리는 2년이란 선박근무계약기한이 차지 않았기에 비행기로스페인 라스팔마스에서 약 40일간 늘어지게 놀다가 그해 12월 12일에 소련선박에 편승, 대서양을 항행하다가 아프리카해상에서 본회사의 “카나리아립퍼”호에 전선(转船)근무하게 됐다.

그 배의 주요한스켓줄은 라스팔마스와 아프리카를 오고 가는 것이었는데 그 배에 승선하고보니 눈이 감길 지경이었다. 만든지 30년도 넘는다는 배는 외곽부터 원체 고물같아서 “똥배”란 말을 들을만 한데다 선원들 역시 꾀죄죄한 모양이 마치모두들 마약중독자(실제로 대마초나 마리화나 같은 마약복용자선원도 몇명 있었음)같은 상을 하고 있었다. 하긴 듣는바에 의하면 회사에서도 아프리카부근에서 근무하는 선박에는 선장으로부터 선원에 이르기까지 정선하지 않고 되는대로 보낸다고 말했다. 사람이란악렬한 환경에서 살다 좋은 환경으로 전환되면 몰라도 좋은 환결 즉 “코리안스타”호에서 근무하다가 “카나리아립퍼”호로 바꾸니 기분이 좋을리 만무했다.

한편 선원들모두가 게을렀다. 배가 일단 아프리카 나라들에 입항하여 기름을 받을 때면 편안하기를 기름양과 질을 체크하는당직외 모두가 처박혀 자기가 일쑤였는데 밤낮으로 연속 잠이 올리가 없었다. 그러니 선원들 모두가 먹고마실 궁리만 하였다. 얼마나 좋은 배인가! 하지만 당시의주방장인 나한테는 그것이 도리어 고역으로 되였다. 선원들은 먹고마시며 놀다가 자고 한참 실컷 잔 뒤또 먹고 마시고 해서 좋았겠으나 나만은 그 음식들을 만들어 차려주고 설거지하느라고 죽을 지경이었다. 그외아프리카란 동네는 선박으로 올라오는 부식품들이 깨끗이 포장되지 못한 건 물론 종자탓인지 모두 개량종이 아니고 토종이어서 예하면 마늘은 쥐잇빨 같았고배추 역시 시래기같은데다 흙모래가 많아 그것을 다듬노라면 품이 많이 들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그 무슨파티까지 많으니 어찌 짜증나지 않겠는가. 특히 배가 나이지리아의 와리항이나 위스키포항 및 베네트항 같은곳에 입항할 때면 본선 선원들과 깜둥이 아가씨까지 합쳐 보통 30~40명씩 한곳에 어울려 처먹군 했는데매일밤 개나 칠면조같은 것을 잡아놓고 술파티를 벌이기에 하루 네끼씩 음식을 만들리가 일쑤였으며 나는 늘 잠이 모자라군 했다. 그 지긋지긋한 먹고 마시는 배기풍, 선원들의 부식비를 아껴 올라온부식량에 따라 계획적으로 살림살이를 해야만 하는 내가 그것을 좀 제지시키려 해도 선장부터 그토록 먹고 마시기에 악돌이고서야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선장이야기가나왔으니 말이지 그와 함께 근무하는 사이에 그야말로 울지도 웃지도 못할 에피소트들이 많기도 했다.

선박이 일단아프리카로 들어가면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중국에서는 흔해빠진 두부라 할 수 있었다. 하여 배가한국선식점이 많은 라스팔마스에 입항해야 두부란 것을 맛볼 수 있었다. 한번은 라스팔마스에서 본선이 두부딱 한박스(두부란 오래동안 보관할 수 없기에)만 올렸는데선장이 지시하기를 그것을 매일 아침 한모씩 썰어 된장국에 넣으라는 것이었다. 참, 나도 필경은 인간인지라 두부가 긴장할수록 왜 고향서 모두부를 덮혀놓고 배갈을 마시던 생각이 그토록 나던지? 그래서 하루는 야밤중에 몰래 모두부 두모를 덮혀놓고는 중국선원인 양일선씨를 침실로 불러들였다. 그러고는 금방 위스키병을 터쳤는데 문득 선장이 문을 노크(선장은밤중에 속이 촐촐할적마다 주방장인 나를 찾았음)하는 것이었다. 선장이니문을 열어주지 않을 수 없어 들어오게 했더니 두부를 본 선장은 대뜸 눈알부터 굴리였다.

“너, 이 자식들 하긴 잘한다. 선장도 먹지 못하는 두부를 너희들이 처먹어?! 왜 시말서라도 쓰고 싶어그래, 이 놈팽이들!”

하지만 말을그렇게 해도 선장 역시 군침을 꼴깍 넘기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찮아도 진작 선장님을모실 타산이었습니다”,
“선장님, 술 한잔 드십시요”하고알랑방구를 먹였더니 그것을 마다할 선장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공짜라면 양재물이라도 마실 양반이 그 귀한두부안주를 물리칠손가. 선장은 연해연방 “그 두부 참 맛좋네. 자, 캪틴(선장)앞이라 주저말고어서 드이소”라고 하며 우리가 아까와서 조금씩 뜯어먹는 두부를 숟가락으로 뭉텅뭉텅 떠서는 자기 입에 처넣는 것이었다. 두부 두모는 삽시에 거덜이 났다. 그러자 선장은 또 두부를 덮혀오라고호령했다.

“주방장, 아까와할 것 하나도 없어요. 내 이 캪틴이 두부 좀 먹는 걸로 어느간이 큰 놈이 감히 말해.”

선장을 놓고말할라치면 종래로 호주머니에 담배를 넣고 다니는 법이 없었다. 그러다가 누가 담배를 피우면 “그 담배한가치 주이소”라고 했다가 상대가 담배곽을 넘기면 “뭐, 한가치면 되는데” 하면서도 능청스럽게 그것을그채로 호주머니에 넣고가기가 일쑤였다.

아마 1993년 초쯤으로 기억된다. 그때 본선은 아프리카에서 오래동안 떠돌아다니다가금방 라스팔마스로 선수를 돌렸는데 당시 선내상황은 부식은 물론 술과 담배마저 거덜이 날 지경이었고 밥은 나이제리아에서 올린 밭벼쌀(알량미)로 겨우 지어먹으며 항행했다.헌데 방정맞게도 항행도중 기관실의 발전기가 고장났는데 좀처럼 수리되지 않았다. 선내는 밤마다까막나라였고 선원들은 선수와 선미에 우등불을 지펴 타선의 항행에 신호를 보내었으며 밥조차 프로팬가스로 겨우 지어먹는 형편이었다. 그러다보니 담배는 진작 꽁초까지 주어서 피우는 신세였다. 헌데 파도세찬 포클랜드바다같으면 진작 배가 파도에 뒤집혀질 상황에 처했음에도 공짜를 좋아하는 선장의 악습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던 하루는 내가 선원들을 골려줄 심산으로 빈 “말보로”표 담배곽을 반팔샤쯔의 웃호주머니에 넣고 갑판으로나갔더니 선원들이 욱하고 몰려들어 한가치씩만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선장이 선손을 써서 갑채로 그것을채갔다. 헌데 맹랑하기로 그것은 빈갑이었다.

그통에 나는선장한테서 볼기짝 한매를 얼얼해나게 얻어맞았다.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담배가 있는 곽이든 빈곽이든 넣고 다니는건 나의 자유이고 또한 내가 뭐 선장한테 그걸 주자고나 했던가. 하지만 육지와 동떨어진 해상에서 그것도 선장이면 왕이고 법보다 주먹과 계급이 중요한 곳에 선장이 돼지라면 돼지이고선장이 죽으라면 죽는 흉내를 내야 하며 선장의 한마디면 내일이라도 보따리를 싸들고 강제귀국을 당하는 판에 억울한대로 참아야 했다.

억울한대로참고 열심히 돈벌이하다가 만기되어 귀국한 다음 내노라 하며 활개치면서 살고 싶었으니 말이다. 특히 나한테는하마터면 강제귀국을 당할 침통한 교훈까지 있었으니 말이다.

그것은 그때로부터 약 한달 전의 일이었다. 하루는 아프리카 해상에서 떠돌던 본선이 남미쪽에서 온 “사랑”호와접선했다. 그 때 나는 그 배에 친구인 최용식씨가 있기에 그한테로 건너가서 함께 술잔을 나누게 됐다. 그 때 나는 “카나리아핍퍼”호가 어떤 배란것을 알려주고 나서 주방장인 나의 고충을 토로하면서 어떤 배든 주방장끼리서로 바꾸어 갖고 근무환경을 좀 개변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동석했던 나의 주방조리원 녀석이 글쎄 그 후에 모든것을 고해바칠줄이야.

그런데서 나는 본선 선원들의 흉을 봤다는 이유로 기관장과 조기장을 비롯한한국선원들한테서 실컷 얻어맞고도 주방의 국자로 조기장을 때려 얼굴에 흉터를 만들어놓은데서 선장의 제의하에 강제귀국처분을 받게 됐다. 후에 알고 보니 나의 주방조리원 녀석이 그 주방장자리와 주방장이 매달 더 받는 수당금 100달러가 탐나서 중국선원끼리 금이 가는 그 따위 짓을 했던 것이다. 괘씸한녀석, 하지만 그따위 강제귀국결정에 순순히 두손을 들 내가 아니었다.

나는 일단은사건의 전부를 써서 보관한 뒤 그날 밤부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물론 그 때까지도 주방창고의 열쇠가나의 손에 있었던만큼 남몰래 사전에 숱한 라면과 빵과 과일 및 음료수따위를 침대밑에 감춰둔 뒤 그랬으니 단식은 무슨 말라빠진 단식, 그러자 과연 바빠난 것은 선장이었다. 선박이 항구에 입항하여 나를강제하선 시키려면 일주일은 더 있어야 할텐데 내가 단식에 들어 갔으니 인명사고라도 나면 도리어 강제소환될건 선장(회사준칙에 의하면 일단 선박에서 인명사고가 나면 사고원인을 밝힌 뒤면 선장의 책임범위내의 사고라면 선장의 강제소환은 물론 몇년간의 본회사 선장자격을취소함)이었으니 말이다. 하기에 그 이튿날부터 갓 주방장으로진급한 녀석이 선장의 령을 받고 일은 하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밥만은 먹어달라고 끼니마다 나의 침실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허나 거기에 넘어갈 나인가. 너 이 놈들 나를 알기를 뭘로 아는건고? 나는 방문을 기어코 열어주지를 아니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통신장, 그 다음에는 1항사…그러다가끝내 선장이 내 방문앞에 다가섰던 것이다.

“여보게 김군, 이런 일에 생명까지 내걸 필요는 없잖아. 우리도 교포들이 강제귀국을당하면 어떻게 된다는걸. 다 잘 알고 있어요. 김군이나 나이 캡틴이나 모두 문화인이니까 이번 일을 없었던 걸로 치고 다시 손잡고 잘해 봅시다.”

선장까지 이렇게나오니 더는 버틸 필요가 없었다. 후에 알고 보니 회사의 압력도 있었거니와 갓 진급한 주방장 녀석의밥하는 솜씨가 영 말이 아니어서 선원들이 늘 제때에 식사하지 못했는가 하면 선밥 혹은 죽밥을 먹어 불평이 많았기에 선장도 부득불 이 중국교포선원한테두손을 든 모양이었다.

이렇게 소위단식이란 허울밑에 밀렸던 잠까지 실컷 자면서도 끝내 “승리”하여 다시 주방장자리를 되찾은 나였건만 그런 방법은 계속 취할 것이 못된다는 걸 나는잘 알고 있었다.

선장 역시자존심이 있는 인간이니 악이 나면 나중엔 무슨 짓인들 다 할 수 있겠으니 말이다.

……화제는 다시 돌아와 그렇게 해상에서 하루하루를 표류하던 중의 어느 날 본선은 근처로 항행하는 러시아 선박(그 때는 소련이 해체된 뒤)에 구조신호를 보낸 뒤 그들과 접선해서는약간의 부식을 보충받게 되었다. 접선작업이 끝나 부식을 넘겨받은 뒤 미구하여 모두들 한쉼 쉬려는데 불현듯러시아선박의 선교에는 선글라스를 낀 한 어여쁜 금발머리아가씨가 나타났다. 치마바람을 날리며 배전에 기대선그 모습, 툭 튀어 나올듯한 가슴과 둥근 히프, 첫눈에 벌써매우 성감이 짙은 여인임이 확연했다. 아, 사막의 오아시스런가. 얼마나 보고 싶었던 아가씨었더냐, 더군다나 아프리카에서는 보기 힘든젊고 아름다운 백인아가씨, 그러자 그 미끼를 놓칠 선장 강아무깨가 아니었다. 선장이 미화 100달러짜리 한장을 흔들어 보이자 그녀도 대뜸 반응을보이며 건너 오라고 손짓하는 것이었다. 헌데 전기가 없는 본선인지라 크레인(기중기)을 돌릴수 없었고 러시아 선박에서도 곯려 주느라고 그러는지그 때만은 도와주지 않았다. 선장은 자그마한 체구에 빼빼 마른 사내였는데 여러 선원들이 극구 말리는데도불구하고 배와 배틀 연결하는 바줄에 매달렸다. 하건만 에익, 세상에어디에 이런 망신이다 있담, 글쎄 술과 여자를 되게 밝히는 선장한테 팔다리힘만은 없었던지 그는 인차첨범하고 바다물속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본선의 선원들은 구명대를 던져준다 줄사다리를 드리워 준다하며 선내가 들썽하게 법석댔지만 러시아선원들은 웃음보를 터뜨리며 손벽을 쳐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느 곁에 카메라까지 들고 나온 이까지 다 있었다.

선박에서의선장은 일개 사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선박의 형상이고 존엄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선장은 선박의 아버지라는설도 있다. 헌데 선박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선장이 그러할진대 그 배의 분위기를 구태어 더 설명해 무엇하랴. 그리고 선원들 거개가 여자를 좋아하듯이 말이다.

선장도 필경육욕을 가진 사내인만큼 그 예외일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선박들에서는 선장이 직접 여자들 찾아헤매는실례가 극히 적었다. 예하면 1991년 6월말 내가 승선했던 “코리안스타”호가 태국의 방콕에 입항했을 때 아가씨 60여명이배에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선장은 3층에 있는 자기의 침실에서 근본 내려오지를 않았다. 그러다가 1항사가 이쁜 여자 한명을 물색해서 보내니 선장 역시 모르는척하며그날밤을 즐겼던 것이다. 하다면 선장이란 그만한 무게가 있어야 할텐데 “카나리아립퍼”호의 선장한테서는도무지 그런 무게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가씨들이 배에 오르면 자기가 나서서 이쁜 여자를 골라 챙긴다거나아가씨와 관계할 때 쓴 콤돔을 아무곳에나 나뒹굴게 한다거나 지어는 빵과 커피를 가져다 달라는 아가씨의 심부름을 자기가 직접 한다거나 하는 행위를보면 저 사람 머리가 돌아도 크게 돌고 있다는 느낌부터 들군 했다. 특히 본선의 발전기가 고장나 기관장과그 부하들이 플래시(전지불)를 켜들고 밤낮으로 땀을 흘리며일하는 그 비상시기에 그랬으니 선장으로는 크게 실망가는 인간임에 분명했다. 글쎄 지나치게 나쁜 사람이라고는할 수 없었으나 여하튼 선장감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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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놈”생활의 그제날을 추억하며
 
배를 여러번타보노라면 참 육지에서는 도무지 믿기 힘든 희한한 일도 많이 겪게 되고 따라서 배울 것도 많으며 또한 회사별로,선박별로 제각각 자기 선박으로서의 특점이 따로 있었다. “태풍호”을 타고 보면 일이 힘든반면에 돈벌이가 좋았고 “코리안스타”호를 타고 보면 돈벌이는 그닥지 않지만 일이 신사스럽고 세계 각지를 메주밟듯 주름잡기에 안계를 넓힐 수 있었으며“카나리아립퍼”호는 돈벌이나 구경할거나 다 그닥잖지만 먹고마시고 오입질하기는 천하제일이라 할만치 좋은 배였다.

작업선 즉우리가 말하는 어선일 경우도 마찬가지라 한다. 어선이란 일단 출항만 하면 보통 반년 이상씩 부두로 입항하지않는 것이 특징이고 생활 또한 고되기가 말이 아니란다. 어선을 타는 “배놈”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그들의손바닥에 썩살이 배겨 곰의 발처럼 두꺼워 주먹마저 쥘수 없게 된 것은 노상 그물을 당기는 작업만 하는데서 그렇게 된 것이고 그 작업의 힘든 정도를말한다면 그물을 당기느라 기운을 쓸적마다 뒤가 풀리어 방구가 절주있게 뿡뿡 하고 나온다 했다. 또한마구로배(참치선)에 승선한 선원들은 맞아대기를 하루 세끼밥먹듯 하는데 그것은 단지 선원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작업시간에 조는 선원들로 하여금 전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서란다. 그도그럴 것이 어떤 경우엔 2~3일씩 눈한번 붙히지 못하고 연속작업을들이대니 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외 침실안에 다락을 매고 한 침실에 10여명씩 처넣는 거주환경과 남새맛을 보려 해도 어쩌다 물고기를 받으러 오는 냉동운반선들이  날라줘야 가능한 식사조건 및 세상과 동떨어져사는외로운 생활,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어선을 타려 하는지? 알고보니어선을 타는 사람들의 속궁리 역시 따로 있었다. 우선 먼바다에 나가 오래있으면 여자가 없기에 돈쓸 곳이없어 돈이 모아지고(기실 일이 너무 고되기에 여자생각이 날리가 없고 그들의 제일 큰 소원은 잠이라도한번 싫컷 자보는 것임), 다음으로 한국선원들을 놓고 보면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경우엔 기본급여외에도많은 조합금(상여금)이란것이 붙는데 그 액수가 흔히 급여를초과하거나 그것의 몇배 될 때가 많기에 1~2년만 배를 타서 돈을 모으면 수수한 아파트 한채는 장만할수 있다 하니까 말이다. 헌데 중국선원들한테는 기본급여만 있고 조합금이 일절 없다고 하니 어쩐지 그것이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것 같았다. 그 것마저 없으니 중국선원들은 늘 물고기가 적게 잡히기를 바랐으며혹간 많이 잡히면 몰래 도로 그것을 바다에 처넣는다고 했다. 왜 그러질 않겠는가.

고기가 많이잡혀 보았자 한국선원들한테만이 좋을 뿐이지 그것을 정선하고 포장하고 냉동하면서 이득없이 고생만 죽게 하니 말이다.그러니 중국선원들이 몸을 아끼고 말썽을 부린다는 책망만을 하지 말고 그네들한테도 일정한 조합금제도를 실시하는것이 현명하고 바람직한처사라고 보아진다. 그것은 돈을 벌려는 중국선원들의 이익에는 물론 물고기를 많이 잡아 작업효율을 올리려는회사리익과도 관계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참, 돈 때문에 인간등급을매기는 제도,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독종이 인간이고 인간사회를 속세라고 하는 걸가?

총적으로 보아유람선을 타든 화물선이나 어선을 타든간에 그 승선한 선원의 흥취와 목적이 따로 있는 것이다. 마치 육지에서의탄광일이 위험하고 힘들어서 돈버는 재미에 일하는 탄부도 그렇고 나처럼 풋돈벌이도 되지 않는 글쟁이는 그 명예와 애착 때문에 머리를 쓰고 글을 만드는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육지의그 어떤 작업보다 “배놈”의 직업은 불쌍한 것이다. 하긴 옛날 한국이 못살 때는 “배놈”들도 그야말로멋진 마도로스답게 “배님”처럼 떠받들렸고 시집오려는 처녀들이 줄을 쳤다고 했으나 지금은 영 딴 세상으로 되었다.그 “배님”이 언제부터 “배놈”으로 됐는지는 알바 없으나 목하 한국에서는 선원이라 하면 “배놈, 배놈”하며시집오자는 여자가 거의 없는 상황이다. 하여 한국선원들한테는 장가 못간 남자들이 수두룩했는데 어떤 이들은아예 장가가는 것을 포기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하긴 장가들어 봤자 여자는 인차 도망갈 것이고 설사 도망가지않더라도 시름을 놓지 못하는 것이었다. 또한 “배놈”한테 시집오려는 여자가 있더라도 그 여자들의 자질과차원은 어느 정도이겠는가. 내가 승선했던 선박들에도 장가 못간 선원들이 수두룩했는데 그들 거개가 30대를 벗어난 상황이었다. 그들은 귀국할 때마다  임시여자를 데리고 몇달씩 동거하다가는 돈잎이떨어지면 또 다시 배타러 나오는데 그렇다고 배타기를 포기하고 육지에 발을 붙이려 해도 장기간의 “배놈”생활에 육지의 실정을 알지 못하기에 도무지적응할수 없었던 것이다. 개인사업을 벌려도 용두사미처럼 실패하기가 일쑤이고 많은 회사들에서도 “배놈”은쌍놈이라는 눈치를 보이며 잘 받아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선박을 비롯한 많은 선박들마다 다시는배타지 않겠다고 맹세를 30번도 더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배를 30년도 더 탔다는 해석으로 되는것이 아니겠는가. 여하튼 억울한 일이다. 아무리 “배놈”이라지만 마누라도 없이 육지를 떠나 한평생 바다생활만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배놈”은 불쌍하다.

우리 모두가밥먹을 때 농민형제들을 잊지 말듯이 물고기를 맛볼 때마다 일망무제한 바다에서 신고하는 “배놈”형제들을 다문 한번이라도 머리속에 떠올렸으면 하는마음과 기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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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견문 시리즈 (3) 2년 730여일, 선원생활의 그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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