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4(토)
 
 
■김철균
 
( 3 )위에서도 자주 언급되다싶이 순자의 가정은 워낙 생활이 풍족하지 못하였다. 신흥소학교 동쪽의 17평방미터밖에 안되는 비좁은 집에 식구가 많았고 또 남편 김용환 한명의 노임으로 살아가다보니 생활이 어렵다는 건 불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거기에 문화혁명 기간 남편이 갇히어 노임이 제대로 발급되지 않은데다 순자마저 위생학교 기숙사식당의 임시일자리에서 나오다보니 수입내원이 줄어들어 매일 매일의 식생활을 이어대기가 극난이었다.
 
당시 순자한테는 자식 6명이나 딸려 있었다. 큰 아들 영남이, 큰 딸 영순이, 둘째 딸 영옥이, 셋째 딸 영애 그리고 둘째 아들 경남이와 셋째 아들 김진 이렇게 연연생 혹은 2-3년 터불씩 여럿이 되었고 모두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었으며 사회에 진출해 직장에 다니는 자식은 단 한명도 없었다.
 
이 정도로 말하면 순자 한사람만 쳐다보는 이 가정의 상황에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당시 뭐 생활적 여유가 있는 가정이 몇 집 안되고 거개가 힘들고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은 건 사실이었으나 순자네 가정은 더할 나위가 없이 근근득식의 계속이었다. 한창 클 나이었던 둘째 딸 영옥이는 영양실조로 얼굴이 노랗게 되었고 둘째 딸 영옥이는 역시 영양실조로 15살 어린 나이에 머리가 새하얗게 되어 “백모녀”란 별명을 가지게 되었으며 둘째아들 경남이는 누가 “뭘 먹었느냐”고 물을 때마다 “푸대죽”이라고 대답하여 별명조차 “푸대죽”으로 되고 말았다. 푸대죽이란 말 그대로 시래기와 옥수수 가루를 마구 섞어갖고 끓인 죽으로서 그 때 그 시기 아주 오랫동안 순자네 집에서는 그 푸대죽이 주식으로 되었으며 밥을 해먹을 때가 아주 적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혹시 위생학교에서 교직원들한테 뭔가를 나누어도 독재대상이 된 김용환한테는 늘 몫이 없었다. 그 때 중학교 이상의 학교들마다 거의 모두가 농업실천기지가 있었는데 연변위생학교에도 그런 기지가 있어 거기에서 수확되는 벼, 옥수수와 콩은 흔히 학교 교직원들이 나누기가 일쑤였다. 인당 그닥 많이 차례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입쌀 한알이 귀한 세월이라 그것은 어려운 가정생활에 큰 보탬이 되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용환이네 가정은 항상 제외되었다.
 
처음에 순자는 학교에서 그런 나누기를 한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불평의 말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워낙 공짜를 싫어하고 공짜와는 담을 쌓고 살아왔던 순자는 가난해도 절대 그런데는 손을 안 내민다고 단언했던 터였다. 헌데 나중에 볼라니 그렇게 간단하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당시 위생학교에는 김용환처럼 “독재대상”이 된 교직원이 11명이 되었는데 순자네뿐 아니라 그런 가정들이 모두 학교의 “나눠가지기”명단에서 제외됐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가정의 몇몇 아낙네들이 찾아가 제기했으나 학교지도부에서는 “오류분자”의 가정은 제외된다면서 번번히 면박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순자는 자기네만 가지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불공정했다. 순자는 학교내에서 배척받고 있는 모든 가정을 위해서라도 자기가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한번은 학교에서 학교둘레를 막은 널판자 배자를 뜯고 벽돌담장을 쌓으면서 뜯어낸 널판자들을 교직원들한테 나눠주게 되었는데 이 역시 김용환을 비롯한 11세대 독재대상자의 가족은 그 명단에서 제외였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순자는 그 11세대 가정의 “권익”을 위해 무작정 위생학교 지도부를 찾아갔다.
 
“뭐?! 배자를 뜯어낸 널판자를 달라구? 동무는 그래 ‘오류분자’가정에서 그걸 가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오?”
 
“뭐가 ‘오류분자’ 가정인가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의 남편 김용환 선생은 당의 훌륭한 아들로서 건국초기 연변의 위생사업을 개척한 선구자중의 한사람이예요. 당신들이 뭔데 당의 훌륭한 간부인 김용환 선생을 가두어 놓은 것도 모자라 이런 나눔에서도 우리와 같은 가족을 외면하는가요. 그 심보는 뭔가요? 당과 모주석께서 이러라고 당신들한테 시킵데까?”
 
“이 동무가 이거, 왜 함부로 당과 모주석을 욕보게 하지 마시오. 그리고 그만 말하시오. 듣기 싫소.”
 
사무실일군이 손을 내저었지만 순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단 말을 시작하자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왔다.
 
“아니, 계속 말해야 하겠습니다. 그래 누가 당과 모주석을 욕보게 하는가요. 바로 당신같이 무지막지한 사람들이야말로 당과 모주석을 욕보게 하는 사람들인 거예요. 당과 모주석께서는 극소수의 나쁜 놈들을 제외하고는 광범한 인민대중과 단결하라고 했습니다. 그래 저희들 가족들까지 나쁜 놈들이란 말입니까? 어디 한번 대답해보시요. 당신들이 이렇게 우리 가족들까지 계속 무시하고 배척해 보세요. 그러다가 그 가족들이 정말 앙심을 품고 나쁜 사람들 켠으로 넘어갈 때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때는 당신들같은 사람들 모두가 역사의 심판대에 오를 것이예요……”
 
이 때 40대쯤 되어보이는 간부 한명이 문을 떼고 들어서다가 순자와 사무실일군이 언쟁을 하는것을 보고는 그 사무실일군을 불러냈다.
 
그 40대의 간부가 사무실일군을 불러내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순자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약 10분 뒤 다시 사무실로 들어온 그 일군은 한결 부드럽게 어투를 바꾸며 순자네를 비롯한 그 11세대 가정의 집주소를 일일이 체크하는 것이었다.
 
그 사무실일군과의 설전에서 순자는 일단 승리하였다.
 
순자가 밖으로 나오자 위생학교의 목수일을 하던 리동무가 감탄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가 어쩌면 그렇게도 정치를 잘하십니까? 그 사무실일군은 말 마디가 막혀 한 마디도 못하더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라고 하며 엄지손가락을 내미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가 2일 후 위생학교에서는 실제로 순자네를 비롯한 11세대 가정에 널판자를 실어다 주었다. 헌데 순자네 집에 실어온 널판자는 운전수가 집에서 일정한 거리가 있는 큰 길옆에 부리웠고 또한 순자네 집에 제때에 알리지 않은데서 길가던 사람들이 불쏘시개용으로 하나 둘씩 주어가기 시작했다. 얼마 후 순자가 소식을 듣고 나왔을 때는 별반 남아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순자는 큰 길가에 널판자를 부리워놓은 운전사도, 또한 그 널판자를 하나 둘씩 주어가는 사람들도 탓하지 않았다. 워낙 공짜에 큰 욕심이 없는 순자로서 다만 문화혁명의 피해대상인 그 11세대 가정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한 것으로 만족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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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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