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4(토)
 
엄유운(严幼韵) ㅡ 그녀는 민국시기 자가용을 몰고 교정으로 드나드는 “복단대학의 꽃”이었다.  

첫 남편이 일찍 사망한 것 외에는 그의 출신, 경력, 용모와 학력 등은 모두 사람들한테 부러움을 주었다. 민국시기 엄유운은 복단대학의 첫기 여대생이였고 전란시기에는 국민정부 외교관의 부인이었으며 중국의 근현대사를 견증하는 옛상해의 마지막아가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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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유운은 절강 녕파의 출신으로 지난 9월 108세 생일을 쇠었다. 다세기를 살아오면서 그녀의 아름다움은 점점 퇴색해가고 있지만 그녀한테 보관되어 있는 몇장의 사진들은 여전히 황홀했던 그제날 그녀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복단대학 교정의 “사랑스런 꽃”

 
1925년 엄유운은 호강대학(沪江大学)에 입학했다가 2년 뒤에 복단대학 상업학부에 전학, 복단대학의 첫 여대생으로 되었다. 당시 엄유운은 정안사(静安寺)에 거주, 대학과 비교적 먼거리 되는 곳에서 살고 있었다. 그 때 그녀는 자기의 자가용에 앉아 학교로 드나들었다. 집에서 그녀한테 운전기사를 배치했던 것이다. 그 시기 엄유운 역시 차를 몰줄 알았기에 자주 운전기사가 옆에 앉고 그녀가 차를 몰군 하였다. 그 시기 그녀가 모는 자가용의 번호는 “84”번이었다. 이 번호를 두고 당시 어떤 남학생들은 영어 “eighty four”를 상해방언으로 발음하며 “사랑스런 꽃”이라고 하였다.

엄유운은 워낙 생김새가 이뻤으며 거기에 부친 또한 상해 남경로에서 비단옷가게를 운영하였기에 그녀는 아빠의 가게에서 늘 각종 비단옷을 골라 입을 수 있었다. 때문에 당시 엄유운이 매일 바꿔입는 복장은 항상 가장 앞서가는 패션이어서 눈부실 정도였다. “사랑스런 꽃”이란 그녀의 말도 그냥 온 것이 아니었으며 재빨리 복단대학 교정내에 파급되었고 그녀의 사진은 당시 상해의 이름난 잡지의 표지에도 실리게 되었다.

엄유운은 공부에도 아주 큰품을 들였다. 대학에서 그녀는 많은 것을 배웠으며 특히 영어공부에서의 성적이 아주 높았다. 이는 후일 그녀가 외교사업을 함에 있어서의 아주 훌륭한 토대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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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는 “녕파방” 개척의 선구자 

엄유운의 가족을 말하자면 그녀의 조부 엄신형부터 시작해야 한다. 엄신형의 고향집은 현재의 상해 강북구 장교가두의 비시촌에 있었는데 이 곳은 당시 엄씨가족의 대본영인 수지산장(寿芝山庄)이 있는 곳이었다.

엄신형은 중국 근현대사에 있어서 매우 이름있는 실업가로서 일찍 항주에서 호설암이 개설한 신원은루(信源银楼)의 비서로 있었고 호설암의 소개로 이홍장한테 추천되어 중용을 받기도 했다. 후에 엄신형은 소금업을 경영하여 많은 재부를 축척하였으며 회화와 서법에서도 큰 재능을 보이었다. 특히 갈대밭 그림을 잘 그리어 소문놓았는데 현재 녕파에는 전문 그의 그림을 연구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엄신형은 주로 민족 공상업과 금융업을 발전시켰다. 1887년 그는 백은 5만냥을 투자하여 녕파만에 중국의 첫  기계타면공장을 세웠고 후에는 상해에 투자하여 밀가루공장과 기름공장을 세웠으며 1902년에는 상해의 첫 상업단체인 상해상업회의공소의 초대총리로 되기도 했다.

녕파시 정협 문사위 특별위원이며 원 상해시 강북구 문사위 책임자였던 사진성 선생에 따르면 엄신형 선생은 다년간 금융업과 공상업을 발전시키는 가운데서 녕파적 인사들을 자기의 주위에 흡입하여서는 “녕파방”을 구성, 낡은 식의 상업망을 근대식 기업가단체로 개조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녕파방”의 개척 선구자였다.

한편 엄신형 선생은 딸 둘과 한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 엄자균은 개명한 상인으로 가업을 진일보 확대하였다. 바로 그런 가정환경속에서 엄유운이 태어나고 자라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와 그녀의 언니들인 엄채운과 엄연운 모두 중국의 제1대로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이었다. 

엄유운의 첫 결혼

엄유운과 첫 남편 양광생의 만남은 역시 “사랑스런 꽃”과 연관이 있었다.

양광생 역시 한 상업가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19세기 말에 상해에서 견직업에 종사, 양광생이 처음 엄유운을 볼 때는 그녀가 바로 “사랑스런 꽃” 승용차를 운전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양광생은 일종의 호기심을 갖고 엄유운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두 같은 모임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 때 양광생은 친구의 소개로 엄유운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열렬하게 그녀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1929년 9월 6일, 엄유운과 양광생은 혼례를 거행, 10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거행된 혼례는 당시 매스컴에서 다투어 보도하는 화제로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찍은 혼례사진이 신문에 발표되자 당시 상해에서는 많은 청년남녀들이 보을 따는 패션으로 되었다. 또한 이 사진은 근 한세기가 지난 오늘에는 여전히 옛상해의 혼례문화를 반영하는 견증자로 되고 있다.

1938년 양광생은 필리핀 주재 중국영사관의 영사로 부임되었다. 그러자 엄유운은 1939년초에 3명의 딸을 데리고 마닐라로 가서 남편과 합류하였다. 당시 총영사의 부인으로서 엄유운은 직접 영사관내의 모든 장식을 설계하고 그 작업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그가 명예주석으로 있는 필리핀 화교부녀협회는 금은장신구를 헌납하는 운동을 발기하여 애국헌금활동을 펼치었으며 전선의 전사들을 위해 100만개에 달하는 구급의료도구를 만들기도 했다. 비록 힘들었지만 남편을 위해 이런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엄유운의 그 나날들은 보람이 있었다.

한대의 피아노로 고통스런 나날을 동반하며

엄유운이 딸들과 함께 귀국한 뒤 1942년 1월 2일, 마닐라가 일제에 의해 함락되고 양광생은 일제에 의해 구금되었으며 그해 4월 17일 양광생과 기타 7명의 중국외교관들은 무참히 살해되었다.

하지만 엄유운은 오랫동안 남편의 생사를 모르고 있다가 1945년 전쟁이 끝난 뒤에야 남편이 일제에 이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일찍 어릴 때부터 세상에 부러운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랐고 고생이란 거의 겪어보지 못한 엄유운이었건만 돌변된 운명앞에서 그녀는 모든 아픔과 비애를 이겨내는 생활의 강자로 되었다. 그녀는 조난당한 기타 외교관들의 아내들과 함께 야채를 심고 신을 만들었고 울안에는 닭과 돼지도 치면서 생활하였고 세 딸을 키워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줄곧 낙관적인 심태를 유지했으며 마음이 허전할 때면 피아노앞에 앉아 추억의 음악을 치면서 한곡씩 부르기도 하였다.

지금도 엄유운은 당시를 추억하면서 “남편이 없는 상황에서 애들을 살리고 키우려면 용감해질 수밖에 없었으며 생활을 직시하며 살아야 했었다”고 말하군 한다.

두번째 남편 고유균과의 행복한 만년

1959년, 엄유운은 저명한 외교가인 고유균(顾维钧)과 멕시코에서 결혼등록을 하였다. 그해 엄유균은 54세었고 고유균은 71세었다.

고유균과 엄유운의 첫 만남은 1946년 7월 고유균이 주미대사로 지내던 시기었다. 당시 미국으로 간 엄유운은 여권이 만기가 되어 중국대사관으로 찾아갔다가 고유균을 알게 되었고 당시 고유균은 엄유운을 위해 직접 국민정부 외교부에 여권연기 신청을 해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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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후 고유균은 장기간 외국에 있으면서 국제법관으로 지냈고 두 남녀는 오랫동안 서로 떨어져 살아야만 했다.

그 뒤 고유균과 결혼하여 함께 있게 되자 엄유운은 훌륭한 가정주부로, 간호사로 또한 훌륭한 비서의 역할을 하면서 고유균을 돌봐주었으며 매일 아침, 고유균이 기상하면 우유를 풀어주었고 그의 아침식사부터 저녁식사까지 직접 자기가 만든 것으로 대접하군 하였다.

고유균과 엄유운은 26년간 함께 생활, 고유균은 1985년에 타계했는데 향년 97세였다. 생전에 고유균은 자기의 양생심득에 대해 3가지를 담론하면서 “산보, 소식과 부인의 관심”이라고 개괄했다.

향수 치고 하이힐 신는 108세의 노인

“어머니는 올해 108세예요. 어머니는 특별히 흥성한 것을 좋아하거든요. 그리하여 딸들이 매일 어머니에게 활동을 배치해주는거죠.”
이는 엄유운의 둘째딸 양설란이 하는 말이다. 엄유운의 둘째딸 양설란은 올해 77세이고 언니 양뢰맹은 82세었다.

양설란에 따르면 엄유운은 기억력이 좋아 아직도 책을 읽고 마작도 논다고 하며 특히 친구를 사귀기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매일 일기도 쓰는가 하면 이미 미국에서 영어로 쓴 책도 한권 출판했다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엄유운의 전화번호책에는 자주 이용하는 전화번호가 수십개가 있었는데 108세가 되는 노인이 그걸 거의 암송하고 있었다. 또한 수십년래 줄곧 개변하지 않은 습관이 있다면 노인은 아직도 하이힐을 신고 있었으며 향수를 치고 있었다.

엄유운의 세딸 모두 출중한 여인들이었다. 장녀 양뢰맹은 편집원출신으로 “사랑이야기”, “키신져의 회억록” 등 250여권의 책을 출판했으며 일찍 미국 저명한 쌍일출판사의 주필을 맡아한적도 있었다. 차녀 양설란은 기업가로서 일찍 1989년 미국 제너럴모터스사(通用汽车公司)의 유일한 화상 부총재를 지니기도 했었다. 그리고 삼녀 양천은은 한시기 부동산개발을 하면서 명성을 떨치었으나 애석하게도 어머니 먼저 저 세상으로 갔다고 한다. 

사진 글 출처 : 신화넷  김철균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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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해있는 “옛상해의 마지막 아가씨”ㅡ 엄유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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