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4(토)
 


 ■ 김철균


1966년 순자는 연변위생학교 지도부의 배려로 학교 기숙사식당의 임시직원으로 배치받았다. 이른바 가정에 잔밥들이 많고 생활이 어려운 김용환 교원의 가정에 대한 학교지도부의 특별배려라고 할 수 있었다.

 

임시직원 – 언제부터인지는 딱히 알수 없으나 중국땅에서 임시직원이란 신조어가 나타나기 시작해서부터 임시직원은 정식직원들이 늘 “색안경”을 끼고 업신 여기는 직종의 하나로 굳어져버렸다. 또한 노임은 정식직원보다 훨씬 적으나 하는 일은 정식직원에 곱절 많고 힘든 직종으로 되군 했다. 순자 역시 맡은 일이 많았다. 기숙사 칸마다 불을 때주고 복도의 청소를 해야 했으며 그것을 마치면 식당에 가서 밥을 그릇에 담아 교직원과 학생들한테 공급하는 일까지 맡아해야 했다. 하지만 일이 몸에 밴 순자는 자기가 맡은 임무를 다 하고도 오히려 일을 더 찾아했다. 남들의 말을 빈다면 일을 찾아서 하고 또 “싱거운 걱정”까지 하군 했다. 예하면 부모가 없이 삼촌집에서 자라다가 위생학교로 온 학생의 단추를 달아주고 옷과 양말을 기워준 일, 감기에 걸린 학생한테 입쌀죽을 쑤어준 일과 위생학교 기숙사에서 기거하는 학생들한테 일본어를 배워준 일 등으로 한순간도 손에서 일거리를 놓으면 속에 탈이 생길 지경이었다.

 

이 모든 것은 비록 자질구레한 일 같았지만 자그마한 이런 것들이 흔히 남들을 깊이 감동시키군 했다. 당시 기숙사식당으로 출근하는 40대의 여인들중 자식이 외지에서 대학공부를 하는 이도 몇명 있었다. 평소에 그들은 순자한테 임시직원이라고 흔히 “색안경”을 끼고 보면서 자주 차별시하다가도 일단 순자의 재능에 대한 말만 나오면 “우리 아들이 공부하는 학교의 기숙사에도 순자아주머니처럼 착한 여성이 있으면 좋으련만”하고 탄복하기도 했다.

 

이러한 것들을 두고 순자는 남들이야 자기를 차별시하든 춰주든 일절 개의치 않았고 그저 수걱수걱 일하는 것으로 응부하군 하였다. 출근은 가장 먼저 하고 퇴근은 제일 나중에 하였으며 기숙사에 있는 시간은 줄곧 일에만 몰두하군 하였다.

 

헌데 순자가 이 기숙사식당으로 출근하여 몇달간 지나자 이상한 현상이 생겼다. 이곳 기숙사식당도 여느 단위의 종업원식당처럼 밥과 국을 공급하는 창구가 몇개씩 있고 그 창구앞에 학생들과 독신교직원들이 줄을 서서 밥과 국을 타가게 되어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다른 사람이 밥과 국을 공급하는 창구보다 순자가 밥과 국을 공급하는 창구앞에 독신교직원들과 학생들이 흔히 기다랗게 줄을 서기가 일쑤였다. 또 어떤 학생들은 다른 창구앞에 줄을 섰다가도 눈치를 보다가 슬며시 빠져나와서는 순자가 밥과 국을 공급하는 창구앞에 기다랗게 선 줄 뒤에 다시 서기도 했다.

 

알고 본즉 밥을 떠줄 때 순자는 자기의 자식한테 밥을 떠준다는 마음으로 밥그릇에 정량표준대로 담아주었던 것이다. 당시 순자의 마음이라면 식당이 밑지지 말아야 하겠지만 학생들도 배곯는 일이 적어야 한다는데서였다. 

 

하긴 순자가 처음부터 밥을 그렇게 담아서 공급한건 결코 아니었다. 기숙사식당에서 하루이틀 일하다보니 밥이 엄청나게 많이 남아버리는 현상을 자주 봤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그 하얀 밥들이 구정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이 어떤 세월인데 저 아까운 밥을 저렇게도 많이 구정물에 처넣다니?! 차라리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들과 독신교직원들이 한숟가락이라도 배불리 먹게 하면 안되겠는가?)

 

그래서 자기의 창구앞에서 밥과 국을 타가는 학생과 독신교직원들한테 밥을 꾹꾹 눌러 정한 표준대로 담아주기 시작하였는데 그것 역시 옆사람들의 눈치가 보이어 옆사람과는 등을 돌리고 몰래 담아주군 하였다. 하지만 옆사람들이 그 눈치를 모를리가 만무했다. 우선 순자의 창구앞에 기다랗게 줄을 서는 것도 이상했고 순자의 앞에 놓인 대야의 밥이 눈에 뜨이도록 크게 축이 나는 것을 봐도 분명했다. 이른바 임시직원인 처지에 “생색”을 내는 순자를 보고 의논이 분분했다. 어떤 일꾼들은 이해하여주었지만 어떤 일군들은 “누군 생색을 낼줄 몰라서 그러나” 하며 입을 삐쭉거리기도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일이 끝나자 식당관리원이 언짢은 기색으로 순자를 불렀다.

 

“학생들한테 밥을 많이 주는걸 나무람할바는 아니지만 순자아주머니가 창구를 맡은후부터 밥이 모자랄 때가 자주 있다고 하더군요. 우리 이곳은 마음치레를 하는 곳이 아니랍니다. 항상 수입과 지출의 평형을 잡아야 하니깐요.”

 

“잘못했습니다. 양해하여 주십시오. 그저 학생들이 한창 먹을 나인지라 모두가 나의 자식들 같아서요. 그리고…”

 

순자는 밥을 한대야씩 버릴 때가 많았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리미는 것을 겨우 참았다. 임시직원 신분에 그런 일에까지 참견하랴 싶어서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순자는 학생들한테 밥과 국을 떠줄 때마다 옆사람들의 눈치가 여간만 보이지 않았다.

 

5

 

순자가 위생학교 기숙사식당에서 임시직원으로 일한지도 어언간 2년철을 잡았다.


그 사이에 우리 중국력사상 전례없는 문화대혁명이 터졌고 연변위생학교에도 해방군 선전대가 진주하였다. 문화대혁명과 해방군선전대의 학교진주 등은 이미 당의 11중 3차 전원회의후에 전면 부정된 역사이다. 하지만 당시 해방군선전대의 장병들은 비록 상급의 지시에 의해 학교로 진주했고 또 이른바 “좌파지지행동”을 하였지만 대부분 소박하고 인정이 짙고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순자 역시 문화혁명기간 남편마저 “외국특무”란 루명을 쓰고 갇혀있는지라 말을 안했지만 그 문화혁명에 대해 썩 좋은 감정이 없었지만 그 해방군선전대의 장병들만은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순자는 그 해방군선전대 성원가운데 김장희라고 불리우는 조선족군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일부러 찾아 이말 저말 하던 중 그가 길림지구의 유수현에서 온 사람이며 교묘하게도 남편 김용환과 같은 경주김씨라는 것이었다.

 

당시 남편마저 “외국특무”란 루명을 쓰고 갇혔기에 순자가 정신상, 생활상에서 받은 압력은 몹시 클 수밖에 없었다. 출근하면 몇몇 아낙네들은 늘 “외국특무”의 가족이라고 순자를 말밥에 올렸고 집으로 돌아오면 모든 것이 순자의 손만을 기다렸다. 가정이란 필경 여자와 남정들이 할 일이 따로 있다고 하는데 순자의 가정은 이전에도 순자가 많은 가정일을 도맡아했지만 남편이 갇히고 보니 더욱 그랬다. 아니 그것보다 남편이 없는 가정은 공허하기 그지 없었다. 부부가 함께 있으면 속심말도 하고 서로 의지하기도 하련만 순자는 모든 것을 혼자서 생각하고 결단을 내리고 행동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듯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항상 자신이 봉착한 곤란과 애로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는 순자였다. 그 때 순자는 해방군선전대로 위생학교에 진주하여 기숙사생활을 하는 김장희 군인을 보며 집을 멀리 떠나 몹시 고생하는 것 같아 안쓰러워보였다. 그래서 여러번 색다른 음식을 만들어놓고 그를 청하였으나 김장희는 번마다 사절하였다. 인민군대에는 “3대규율과 8항주의”가 있기에 절대 민간인의 가정에 들어가 밥술을 들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순자마저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항이었다. 한편 그래서인가 김장희군인이 더욱 돋보이었다. 남들은 “해방군이 연변의 실정을 몰라가지고 한쪽켠 조직의 편에 서서 다른 한쪽켠을 진압한다”고 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상급의 지시에 의해서이지 군인들의 뜻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번은 가두의 아낙네들 몇몇이 군인 한명을 놓고 욕하고 손사태질을 하면서 집중공격을 할 때 순자는 그 아낙네들을 뜯어말리며 “임자네 아들도 군대라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 아니냐”며 설복을 하기도 했다.

 

재단사는 자기가 지은 옷을 남들이 즐겨입고 또 그 옷이 패션으로 되어 인기가 오를 때 가장 보람이 있고 요리사는 자기가 만든 음식을 손님들이 맛있게 먹을 때 가장 보람이 있다고 한다. 순자는 비록 재단사나 요리사는 아니였지만 자기의 성의가 타인한테 기쁨으로 돌아갈 때 제일 보람있는 인생의 진가를 제법 잘 체험하군 했다. 그러다보니 가정의 사정은 념두에서 깡그리 잊은채 남을 위해줄 때가 많았다. 

 

언젠가 한번은 순자가 학교식당에서 그냥 버려버리는 양배추뿌리를 주어서는 그것의 껍질을 발라내고 씹기 좋은 여린 속살만을 잘게 썰어 간장에 담궜다가 해방군선전대 장병들한테 내놓았다. 그러자 집에 청하면 깎듯이 사절하던 해방군장병들은 그것만은 받아주는 것이었다.

 

양배추뿌리로 만든 반찬을 먹어보던 군인들은 맛있다고 엄지손가락을 내밀더니 앞다투어 저가락질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양배추뿌리짠지를 담은 그릇은 순식간에 바닥이 났다. 군인들이 양배추뿌리짠지를 반찬으로 맛있게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순자는 내심으로 되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한편 양배추뿌리로 만든 반찬도 맛있게 먹는 군인들을 바라보면서 눈물이 나기도 했다. 저 사람들도 분명 부모님이 있으련만 그 부모님들이 저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파할까?

 

이튿날 순자는 배추김치, 영채와 깍두기 등을 한바게스나 담궈갖고 식당으로 가져갔다. 점심무렵 순자가 그 몇가지나 되는 김치를 내놓자 군인들을 포함한 교직원과 학생들 할 것 없이 모두 놀란 나머지 눈이 휘둥그렇게 되었다.

 

“아니, 순자아주머니! 김치를 여기에 몽땅 가져오고는 집식구들은 굶는답니까?”

 

“아주머니, 아주머니를 보노라니 선배들한테서 항일전쟁시기 동북의 한 조선인 어머니 얘기를 듣던 일이 떠오릅니다. 그 선배의 말에 의하면 저의 그 선배군인은 어느 한 전투에서 부상당하여 부대와 떨어지게 되었는데 이를 한 조선인 어머니가 발견하고 자기 집으로 부축하여갔답니다. 그러고는 약재를 캐여 민간요법으로 그 선배의 상처를 치료해주는 한편 딸과 약혼한 사위가 오면 잡아먹이려고 키우던 씨암탉까지 잡아서는 그 선배한테 먹이었답니다. 그뒤 그 선배는 상처가 재빨리 완쾌되여 부대를 찾아갈수 있게 되였답니다. 그 선배군인은 이 얘기를 몇번이나 저희들한테 해주면서 인민의 군대는 절대 인민을 떠날 수 없으며 군대와 인민은 물과 물고기와 같은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선배한테서 들은 얘기지만 저는 아주머니를 보는 순간 아주머니가 바로 그 어머니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아주머니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 해방군선전대 성원들은 아주머니의 이 이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말을 마친 해방군선전대 책임자는 순자를 향해 거수경례를 붙였다. 그러자 기타의 군인들 모두가 일렬로 차렷자세를 취하면서 순자한테 거수경례를 붙이는 것이었다.

 

이렇듯 한낱 임시직원인 순자였지만 기숙사식당의 일군들과 학생 및 독신교원과 해방군선전대의 장병들속에서의 인기는 아주 높았다. 그리고 모두들 애로사항같은것이 있을 때마다 곧잘 순자를 찾아 해결방도를 요청하군 했다.

 

그 중에는 이전에 순자를 고깝게 생각하던 여성일꾼들도 있었다.

 

오랜 시일이 지난 뒤 순자가 식당일을 그만두게 되자 해방군선전대의 김장희 군인은 순자를 진짜 형수님처럼 믿으면서 고향에 있는 가정의 애로사항을 털어놓기도 하고 문화혁명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면서 “김용환교원은 억울하게 갇혀있는 분이기에 앞으로 꼭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며 순자한테 용기를 내도록 하였다.

 

그는 후에 제대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도 연변위생학교에서 사업하던 때의 그 한단락의 생활을 잊지 못하여 김용환/김순자 부부한테로 자주 서신을 보내오면서 그 때의 일을 떠올렸다고 한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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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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