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제3회 인생선택
 
 
■김철균
 
1945년 8월 6일 아침 8시경, 미국의 B29형 비행기 편대가 일본 히로시마 상공의 만미터 고공에서 몇바퀴 배회하더니 인류 사상의 첫 원자폭탄 1매를 투하했다.
 
당시 32만 8000여명의 인구를 가진 이 도시는 삽시에 폐허로 되었고 도합 11만 8000여명의 희생자를 냈다.
 
3일 뒤 미국의 B29형 폭격기 두대가 재차 일본의 군수공업기지인 나가사키에 출격, 두 번째의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역시 도시를 재더미로 되게 한 동시에 수많은 희생자가 나타나게 했다.
 
이어서 8월 9일, 즉 대 일본선전포고를 한 이튿날 소련홍군은 5550여대이 탱크, 3440여대의 비행기와 2만 6100여문의 대포 그리고 도합 157만 7700여명의 막강한 병력으로 운집, 세 갈래로 나뉘어 만주와 조선 지역으로 진출하며 파죽지세로 일본군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들이댔다. 소련홍군의 공세는 그해 4월 독일본토의 베를린을 진격할 때의 속도를 초과하였다. 
 
한시기 천하무적이라던 일본황군의 방선은 미국과 소련 이 두 동맹국이 합세하자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미국의 원폭투하와 소련홍군의 밀물공세에 더는 버텨낼 수 없게 된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점심 마침내 동맹군의 투항조건을 접수하고 천황 히로히토의 공개방송으로 항복을 선언했다.
 
일본천황 히로히토의 공개방송 내용
 
(소화 20년 8월 15일)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서 시국을 수습코자 충량한 신민들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국, 영국, 지나(중국), 소련 등 4개국의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제국신민의 강녕을 도모하고 만방공영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자 함은 황조황종(黄祖黄宗)의 유범으로서 짐은 이를 삼가 제쳐두지 않았다.
 
일찍 미국과 영국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원래 짐의 뜻이 아니었다. 그런데 교전한지 이미 4년이 지나 짐의 육해군 장병의 용전(勇战), 짐의 백관유사(百官有司)의 여정(励精), 짐의 일억 중서(衆庶)의 봉공(奉公), 등 각각 최선을 다했음에도 전국(战局)이 호전된 것은 아니었으며 세계의 대세 역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적은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빈번히 무고한 백성들을 살상하였으며 그 참해(惨害)는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우기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뿐더러 나아가서는 인류의 문명도 파각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짐은 무엇으로 억조의 적자를 보호하고 황조황종의 신령에게 사죄할 수 있겠는가. 짐이 제국정부로 하여금 공동선언에 응하도록 한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다.
 
짐은 제국과 함께 비명(非命)에 쓰러진 자 및 그 유족을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찢어진다. 또한 전상(战伤)과 재화(灾祸)를 입어 가업을 잃은 자들의 후생(厚生)에 이르러서는 짐이 우려하는 바가 크다.
 
생각하건대 금후 제국이 받아야 할 곤난은 물론 심상치 않고 신민의 충정도 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짐은 시운이 흘러가는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 이로써 만세(万世)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 이로써 짐은 국체(国体)를 수호할 수 있을 것이고 신민의 적성(赤诚)을 믿고 의지하며 항상 신민과 함께 할 것이다. 만약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함부로 사단을 일으키거나 혹은 동포들끼리 서로 배척하여 시국을 어지럽게 함으로써 대도(大道)를 그르치고 세계에서 신의를 잃는 일은 짐이 가장 경계하는 일이다.
 
아무쪼록 거국일가(举国一家)자손이 서로 전하여 굳건히 신주-일본의 불멸을 믿고 책임은 무겁고 길은 멀다는 것을 생각하여 장래의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 도의(道义)를 두텁게 하고 지조(志操)를 굳게 하여 맹세코 국체의 정화(精华)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进运)에 뒤지지 않도록 하라.
 
신민은 어러한 짐의 뜻을 명심하여 잘 지키도록 하라.
 
천황의 공개방송은 반성하는 어투가 아니었다. 어딘가 괴변을 부리는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천황의 항복방송은 필경 포츠담 회담의 선언을 받아들이며 항복한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일본천황의 항복방송에 용정에 있는 일본인 주택구역은 울음바다로 되었다. 땅에 엎드려 천황의 방송내용을 전달받은 일본인들은 “대일본 제국이 투항하다니 믿을 수 없다”, “아니다. 뭔가 방송이 잘못됐다. 한창 잘못됐다”며 땅을 쳤으며 지어는 할복자살한 군인도 몇명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소수의 친일주구 외 모든 조선인들은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
순자네가 사는 동네에서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8월 15일 오후였다. 용정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마을로 돌아온 한 중학생으로부터 이 소식을 얻어들었던 것이다. 일본이 망하면서 일본인교장이 운영하던 용정의 중학교들도 무기한 방학을 해버렸으며 소련홍군이 이미 연길과 용정에까지 들이닥쳤다는 것이다.
 
그날 산에서 약재를 캐던 순자는 어쩐지 마을 쪽에서 이상하게 떠들썩하기에 웬일이 일어났다 싶어 부랴부랴 산에서 내려왔다. 마을에 내려오니 사람들 얼굴마다 활기가 넘쳤고 몇몇 조무래기들마저도 “만세!”를 부르며 마을길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집안에 들어서니 아버지가 농궤속에 깊숙히 감추어두었던 태극기를 꺼내놓고 있었다. 아버지는 태극기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리였다. 
 
아버지의 입에서는 낮았지만 웅글진 “태극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
광복이 됐다. 저주받을 왜놈들은 쫓겨갔고 세상이 바뀌었다. 그리고 온 동네가 열광했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일제의 핍박에 못이겨 쪽지게에 짐을 싣고 두만강을 건너왔던 간도조선인한테 있어서 광복의 함의는 너무나도 컸다.
 
(광복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어린 순자는 어른들과는 달리 광복이란 그 뜻에 대해 다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젠 더는 일본놈들의 성화를 받지 않고 또한 조선말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데서 그 역시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얼마 후부터 많은 조선인가정들에서 조선으로 돌아가는 바람이 일었다. 어떤 동네는 절반 이상의 조선인들이 마을을 떠나 동네 전체가 텅비다 싶이 되기도 했다.
이어서 한동안 문을 닫았던 학교들도 하나 둘 수업을 회복하였다. 물론 조선인이 교장을 맡았고 한동안 폐지되었던 조선말교육도 회복되고 말이다.
 
하지만 순자는 인차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학교에 다니기 싫어서가 아니라 서발막대기 휘둘러도 거칠 것 없는 집안사정을 손금보듯 잘 아는 그로서는 차마 학교에 가겠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기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으로 돌아갈 때 순자의 아버지도 그들과 함께 따라갈 타산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순자의 아버지 김명기는 인차 단념했다.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 전염병에 걸린 순자와 둘째아들의 병을 치료하느라고 집안에서 팔 수 있는 물건은 다 팔아버리고 많은 빚까지 지다보니 조선에 돌아가 정착할 재산은 고사하고 두만강을 건너갈 노비마저 없는 상황이었다.
 
한편 소학교의 최우등생이던 순자는 어디까지나 다시 공부를 할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체로 학비를 마련할 목적으로 거의 매일이다싶이 산으로 다니며 개암이나 버섯을 따고 약재도 캐군 하였다.
 
어느날 순자가 산비탈에서 땀을 흘리면서 괭이로 약재를 캐고 있는데 용정으로 통하는 신작로 쪽에서 여학생들의 명랑한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자유의 강산에서 우리 자라고/ 평화의 낙원에서 꽃피려 하는// 새 나라 어린 동무 노래부르자/ 세상에 부려울 것 그 무엇이냐
……
아, 얼마만에 들어보는 우리 조선사람의 노래인가?
 
순자는 격동된 심정을 억제하지 못한채 괭이를 집어던지고 무작정 여학생들이 오는 쪽을 향해 달려 내려갔다.
 
“얘들아, 아까 너희들이 부르던 그 노래는 누구한테서 배운거니?”
 
“음, 우리 학교에 새로온 선생님이 배워주었는데 이젠 학교에서는 일절 일본말을 하지 않고 조선말만 한단다.”
 
“그래, 너 기숙이는 공부도 잘하고 노래도 잘 부르는데 너도 우리와 함께 학교에 다니면 얼마나 좋겠니?”
 
“…?!”
 
순자는 자기의 심정을 그다지도 잘 알아주는 애들이 눈물겹도록 고마워났다. 그는 잇빨자리가 나도록 입술을 옥물었다.
 
“알았어, 나도 너희들처럼 꼭 학교에 다시 다닐 날이 있어거야.”
 
그날 저녁, 순자는 소학교 때 갖고다니던 책보자기속에 깊숙히 감추었던 작은 보자기를 꺼내서는 아버지앞에서 그것을 헤쳐놓았다. 그 동안 약재를 캐고 버섯을 따서 번 돈이었다.
 
“아버지, 그 동안 제가 모은 돈이예요. 전 옷을 해입는 것도 싫고 맛있는 걸 사먹는 것도 싫으니 제발 절 학교에 가게 해줄래요?! 아버지 이 딸이 이렇게 빕니다.”
……
한동안 말없이 엽초만 태우며 버들광주리를 틀던 아버지는 드디여 용단을 내렸다.
 
“네 소원이 정 그러하다면 그렇게 하려므나. 이 애빈들 왜 널 공부시키고픈 마음이 없겠느냐?”
 
“네?! 그러세요? 아버지 감사합니다. 꼭 공부를 잘해 출세하여 앞으로 부모님께 효도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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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연재]한 여인의 인생변주곡 (5) 인생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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