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 김철균


유엔군 인천상륙 및 인민군의 후퇴

아버지가 고상철에 의해 구원되어 부대로 돌아온 뒤 얼마 안있어 평양의 최고사령부로부터 뜻하지 않던 명령이 하달됐다. 전반 전선에 변수가 생겨 주력부대의 전략적 퇴각이 시작되기에 아버지네 부대는 이튿날 아침 즉 9월 17일까지 진지를 고수하다가 후퇴하라는 것이였다.

 

그렇찮아도 당시 낙동강전선의 인민군부대들은 마지막 한방울의 전력까지 쏟아가며 전투를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부산쪽으로는 유엔군이 계속 증가되고 있는 한편 인민군은 후방공급이 끊어진데다 인원보충도 되지 않는, 그야말로 억지로 견지하고 있었으며 더는 진공할 수도, 그렇다고 후퇴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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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퇴명령은 바로 이러한 때에 떨어졌다.

 

뒤이어 유엔군의 대규모적인 공습과 포격이 개시됐다. 그 잡도리를 보아 인민군의 진공을 견제하려는 반격과 기습인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인민군을 밀어 붙이려는 전면적인 공세였다. 아버지네 부대는 옹근 하루낮과 하루밤을 이어가며 한국군과 싸웠다. 병력이 모자라자 예비연대는 물론 아버지를 포함한 정찰병 그리고 부상병조차 총을 쏠 수 있는 인원은 몽땅 진지에 배치되었다.  

 

한밤중까지 싸우다가 일단 한국군이 물러가자 인민군은 새벽녘의 어둠을 이용하여 고지에서 물러났다.

 

고지에서 내려온 아버지네 부대는 주력부대를 따라잡기 위해 죽기내기로 뛰었다고 한다. 이렇게 단숨에 20여리나 뛰고 보니 기진맥진한 나머지 그 때는 호랑이가 달려든대도 까딱 할 것 같지 못했다는 것이 아버지의 회고였다. 한국군 추격부대를 얼마간 떨구어 놓았다고 판단한 뒤에야 숲속에서 휴식명령을 내렸다. 인민군 사병들은 솔잎과 압축과자를 섞어가며 요기를 하였다. 그러다가 서로 마주보는 순간 모두가 웃음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며칠간 세수 한번 못한채 초연에 그을리다보니 원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리 만무했다.

 

낮이 되자 하늘에는 미군비행기들이 나타났고 모두가 한결같이 기수를 북으로 돌렸으며 남쪽으로부터 들려오는 포소리도 점점 가까워졌다.

 

부대는 길을 다그쳐 얼마 후 주력부대를 따라잡았다.

 

주력부대를 따라잡자 새로운 동원이 있었다. 내용인즉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인천으로부터 상륙하여 중부지대를 차단하고 있으니 대부분의 인민군부대가 유엔군의 포위속에 들었다는 것, 유생역량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뒤꽁무니의 유엔군을 뜯어놓고 하루 속히 38선을 넘어 북으로 가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사태는 자못 심각했다. 듣는 바에 따르면 대전을 지키고 있던 인민군대가 전라도 방면으로부터 퇴각하는 인민군주력을 엄호하기 위해 필사적인 저항을 했으나 쌍방의 현저한 전력대비에 힘이 딸려 대전을 내주어 전라도 부대들이 산속으로 들어갔는가 하면 서울을 고수하고 있던 인민군부대 역시 연희고지를 육탄으로 막으며 저항하고 있으나 미군부대의 막강한 화력을 막을 수 없어 서울함락 역시 일보직전이라 했다. 서울이 함락되기 전에 시간을 다투어 38선쪽으로 퇴각해야 그만큼 손실을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퇴각하는 길도 쉬운 것이 아니였다. 아니 지난 2 개 월 전 남진할 때보다 더 힘겨운 노릇이었다고 한다. 낮에는 공습이 피해 산에 숨어야 했고 또한 꼬리를 물로 달려드는 한국군과 싸우면서 퇴각해야 함과 아울러 후방보급은 물론 최사령부와의 모든 연락을 할 수 없었기에 곱절 간고했다.

 

이렇게 자체로 모든걸 분석하고 장악하면서 겨우내 원주부근까지 다 닿았지만 그 때의 원주 역시 한국군의 수중에 넘어간 뒤었다. 가뜩이나 얼마 되지 않았던 인민군 원주수비부대가 서울쪽으로부터 밀려드는 유엔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퇴각했던 것이다.

 

원주의 유엔군들이 바로 인민군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었다. 그야말로 인민군은 앞 뒤로 협공을 받는 극히 불리한 상황에 처했다. 그 때 인민군의 원 계획은 될수록 원주의 유엔군을 피해 에돌아 북으로 가기로 돼있었지만 식량과 약품이 거덜난 상황에서 그대로 행동하다가는 당장 굶어죽을 사병이 반수 이상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한편 정찰결과 원주에 유엔군이 들어오긴 했으나 시간이 길지 않아 발을 튼튼히 붙이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그 수자도 얼마되지 않았다. 그리고 인민군 역시 38선을 넘기 전야의 마지막 전투를 치러볼 욕심도 없지는 않았다고 한다.

 

인민군은 일부 부대를 배치하여 남쪽으로부터 오는 유엔군을 견제하는 한편 병력을 집중하여 불의습격으로 원주에 돌입했다. 아니나 다를가 원주의 유엔군들 역시 인민군이 그렇게도 빨리 원주 부근에 나타나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한 모양, 미처 진지에 들어가 보기도 전에 인민군에 의해 섬멸되고 말았다. 그 전투에서 인민군 부대는 얼마간의 탄약과 식량 등을 로획하여 자신을 무장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전투에서 아버지는 불행하게 부상당하여 평양에 후송됐다가 다시 신의주를 거쳐 당시 교하에 있은 조선인민군 제 2 야전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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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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