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7(토)
 
 
■ 김철균
 
“고운 사람 미운데 없고 미운 사람 고운데 없다”는 속담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려서부터 순자는 매우 이쁘게 생긴데다 거기에 마음이 착하고 활달했으며 노래도 잘 불렀다.
 
그 때도 동네 사람들은 농촌의 힘든 모내기나 가을걷이 그리고 낟알털기같은 일을 할 때마다 여러 집 일군들을 합쳐서 한집 한집씩 돌아가며 일을 해주군 했다. 그렇게 모두들 함께 뭉쳐서 일을 하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 해도 그닥 힘들지 않았고 그만큼 빨리 축 났으며 또한 여럿이 어울려서 일을 하면서 농담도 하고 노래도 부르니 그만큼 일터의 분위기도 좋아졌기 때문이다.
 
마을사람들은 힘든 일을 할 때마다 순자를 불러서는 노래를 부르게 했다. 그것은 순자가 그만큼 노래를 잘 불렀거니와 이쁘게 생겼고 또한 마음씨가 착해 동네사람들과 잘 어울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마을사람들이 부를 때마다 순자는 한번도 짜증을 내지 않고 동네사람들앞에 자주 나서군 했다. 당시 순자는 아는 노래들이 많기도 했다. 민요로는 “도라지”, “노들강변”, “아리랑”, “조선팔경”으로부터 현대계몽기가요인 “고향의 봄”, “반달”, “고향하늘”과 “오빠생각” 등으로 아는 노래가 부지기수었다. 그 중 그래도 아주 잘 부르고 즐겨부르던 노래가 바로 “오빠생각”이었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타고 서울 가면서 / 비단구도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울건만
 
서울가신 오빠는 소식이 없고 / 나무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
이렇게 순자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일군들속에서는 박수소리와 더불어 “재청”소리가 함성처럼 터져나왔다. 그러면 순자는 주저없이 그 “재청”에 응해 계속 노래를 불렀는데 어떤 날에는 10컬레 이상이나 불러 목이 쉴 때도 있었다.
 
“명기어른, 딸 하나를 정말 잘 키웠수다.”
 
“아이구, 윤씨! 저 애가 크면 총각들 애간장이나 태우게 만들겠수그려.”
 
“참, 나두 저런 딸 한명 있었으면 좋겠구만. 저 윤씨, 저 딸애를 우리 집에 주지 않을려우?”
 
마지막으로 딸비위를 하는 여인은 아들만 5명이나 있는 아낙네었다.
 
이렇게 마을사람들이 찧고 박고 하는 동안 순자의 어머니 윤씨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수걱수걱 일만 했다.
 
기실 순자의 어머니 윤씨는 딸애가 노래부르기에 재미를 붙이는 것에 대해 조금도 달갑지가 않았다. 아니, 한사코 뜯어말리는 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보, 딸년한테 소리(노래)나 하게 하고 앞으로 풍각쟁이로 만들겠수? 아니면 가야금을 뜯는 기생년으로 만들겠수?”
 
윤씨의 말에 김명기어른도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동감이었다.
 
“그러게 말이우다. 나도 걔가 풍각쟁이로 되는 걸 원치 않는다만 자기가 그렇게 좋아하는걸 어떻게 하겠수? 다 팔자소관이 아니겠수? 옛날에 아버지가 남한테 퍼만 주면서 가산을 다 말아먹더니 나도 그렇고 저 애도 아마 그런가 보구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앤 고생할 팔자인 것 같수다. 그리고 사람의 팔자란 하늘이 정했다 하거늘 어떻게 사람의 힘으로 고칠 수 있겠수?”
 
“글쎄 말이웨다.”
 
어머니 윤씨는 점도 치고 사주팔자도 보면서 무던히도 딸의 팔자때문에 속을 말없이 썩이군 했다. 이상한 것은 어떤 점쟁이들은 “애가 고생할 팔자”라고 했으나 사주팔자를 보는 어떤 미신쟁이들은 “애가 고생은 하겠으나 남편과 자식복은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말속에 말을 남기군 하였다.
 
그러건 말건 순자는 순자대로 여전히 노래에 큰 취미를 가지고 용정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마을의 언니와 오빠들한테서 자주 졸라 노래를 배우군 했다. 그리고 워낙 총명해서인지 몇번 따라하지 않고도 가사를 암송내고 곡도 제대로 넘길 수가 있었다.
노래를 잘하는 강점은 순자가 학교에 붙을 때도 큰 작용을 했다. 육도소학교에 가서 입학시험을 치던 날 순자는 웬간한 산수문제를 풀고 간단한 문장을 줄줄 읽은 외에도 교장선생님이 노래를 불러보라고 하니 연속 세컬레나 불러 교장선생님과 기타 선생님들의 인상속에 남게 했다.
 
3
 
 순자가 공부를 할 수 있은 건 결코 집이 유족해서가 아니었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순자의 아버지 김명기 어른은 조선에서 살 때인 부친세대시기부터 가세가 기울리기 시작했고 간도 대문동에 정착할 때는 완전히 평민과 다름없는 계층으로 되었다.
 
그 때만 해도 여자애들한테 공부를 할 수 있게 하는 건 용정이나 국가가(연길)같은 도회지에서 사는 가정들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고 가난한 시골에서는 거의 꿈도 꿀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독립활동가의 후손인 김명기 어른은 부친으로부터 받은 영향때문에서었던지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죽은 큰 딸 숙자한테도 서당공부를 하게 했고 어린 딸 순자도 글공부를 할 수 있게 하였다. 그것도 대문동에 학교가 없기에 학교가 있는 육도촌(지금의 신화촌)에 방을 얻어주면서까지 말이다. 그만큼 전주 김씨 양반후손인 김명기 어른은 어리무던하면서도 뼈대가 있는 남정이었다. 
 
소학교에 붙어서 처음에 순자를 포함한 조선인 자식들은 그래도 조선글을 배울 수 있었다.
 
아름다운 우리 나라/ 살기 좋은 우리 나라// 금은보화 넘쳐나는/ 3천리 금수강산…
 
그리고 조선 경성으로부터 왔다는 한 총각선생님으로부터 몰래 조선의 “태극가”를 배우기도 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무궁화 3천리 화려강산/ 조선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존하세…
 
당시 간도에서 사는 조선인들은 몸은 비록 간도에 담고 있었지만 하루 빨리 망국노의 삶을 끝내고 독립된 조선에 돌아가 살아야 한다는 협애한 민족주의 의식이 농후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 중에는 간도땅이 기름져 농사가 잘되며 조밥이나마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해서 두만강을 건너온 사람도 있었지만 조선이 일본에 의해 병탄된 후 왜놈들의 등살에 못이겨 피해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기에 반일정서가 아주 강한 편이었다.
 
그러나 간도 역시 1931년의 “9.18사변”이후 일제의 천하가 되었다. 일본이 싫어 그들을 피해 두만강을 건너왔지만 간도땅에 와서까지도 왜놈들의 수모를 당해야 했다. 작고 힘없는 약소국가의 백성들이라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일제한테 그저 당하고만은 있지 않았다. 밤만 되면 동네사람들은 가끔씩 그제날 조선독립을 위해 간도지방의 산야를 주름잡던 홍범도, 김좌진 등 독립군장군들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반일투쟁과 조선독립을 연결시키군 하였다.
 
(생략)
……
한편 지난 세기 40연대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침략행위는 극에 달하였다. 일제의 침략정책이 가심화 됨에 따라 재만조선인들의 처지는 더욱 비참하게 이그러져갔다.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약탈에 이어 이제는 인권말살도 노골화되어갔다.
 
순자가 소학교 4학년이 되자 학교에는 일본인 교장이 부임됐다. 이와 더불어 학교의 분위기는 더욱 험하게 변했다. 교직원은 물론 학생들까지 항일에 대한 말은 일절 입밖에 내지 못하였다. 지어 조선글을 쓰고 조선말을 입에 올리는 것마저 허락되지 않았으며 이를 위반하면 귀쌈을 맞거나 벌을 서군 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몰래 진주항을 기습하여 미국의 태평양함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으며 이것을 시작으로 태평양전쟁이 전면적으로 폭발하였다.
 
이와 더불어 학교내에서는 일본의 대륙진출과 “대동아성전”을 가송하는 이른바 웅변모임이 도처에서 있었고 대 일본제국의 군가들이 보급되었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학도병으로 전쟁터에 끌려나가기 시작했다.
 
“천황페하의 황국신민으로 된 젊은이들이여, 지금 천황페하의 무적의 황군은 넓고 넓은 지나(중국)대륙의 절반 이상과 동남아의 많은 지역은 물론 저기 저 남태평양의 인도네시아, 필리핀과 사이판 등 나라와 많은 섬들을 점령하였고 지금 바야흐로 대양주의 오스트랄리아에로의 진격 전야에 있다. 천황페하의 황군은 승전에 승전을 거듭하고 있으며 아메리카의 양키군대는 무적황군에 쫓겨 풍지박산이 되고 있다. 천황페하의 황국신민으로 된 젊은이들이여, 태평양성전은 서방열강들의 속박과 억압에서 아시아 민족을 해방시켜주는 정의의 전쟁이다. 태평양 성전의 최후 승리는 눈앞에 박두해있다.
 
아시아인종이 열강들의 속박과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모두가 일본의 성전에 궐기하라. 천황페하 반자이! 대 일본제국황군 반자이!”
 
守るも攻むるも黒鉄の まもるもせめるもくろがねの
浮かべる城ぞ頼みなる うかべるしろぞたのみなる
마모루모 세무루모 꾸로가네노 우카베루 시로조따노 미나루
(싸움도 지킴도 떠오르는 강철성의 힘이요)
 
浮かべるその城日の本の うかべるそのしろひのもとの
皇国の四方を守るべし みくにのよもをまもるべし
독우까베루 소노 시로 히노모토노 미쿠니노 요모오 마모루베시
(떠오르는 그 성의 힘으로 태양의 근본 황국의 사방 지킬것이리)
 
真鉄のその艦日の本に まがねのそのふねひのもとに
仇なす国を攻めよかし あだなすくにをせめよかし
마가네노 소노 후네 히노모토니 아다나스 꾸니오 세메요까시
(강철의 그 함선은 우리 황국 위협하는 적 격멸할것이리)
 
石炭の煙は大洋の いわきのけむりはわだつみの
竜かとばかり靡くなり たつかとばかりなびくなり
이와기노 께무리와 와다츠미노 따츠카또 바카니 나비쿠나리
(석탄의 연기는 떠오르는 룡처럼 나붓길것이고)
 
弾撃つ響きは雷の たまうつひびきはいかずちの
声かとばかり響むなり こえかとばかりどよむなり
따마우쯔 히비키와 이카즈찌노 꼬에가또바까리 도요무나리
(발포음은 천둥소리 되어 대양에 울려퍼지리)
 
万里の波濤を乗り越えて ばんりのはとうをのりこえて
皇国の光輝かせ みくにひかりかがやかせ
망리노 하토오 오 노리코에떼 미쿠니노 히카리 카가야카세
(만리의 파도를 타고넘어 우리 황국의 빛을 밝혀나가세)
……
당시 조선에는 물론 간도의 곳곳에서도 이와 같이 목에 피대를 세워가며 이른바 “대동아성전”을 위해 “열변”을 토하는 자들과 “일본군 군가(일명: 군함행진곡)”를 부르며 광란적으로 설쳐대는 자들이 많았다. 모두가 단말마적인 발악이나 다름이 없었다.
 
또한 조선에서는 “내선일체(内鲜一体)”란 슬로건(口号)으로 수많은 남성청년들과 처녀들이 학도병, 정신대로 되여 전선에 끌려가기도 했다.
놈들의 총알받이와 수욕해소 도구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
한편 조선에 이어 간도에서도 해괴한 일이 발생했다. 조선인의 이름을 몽땅 일본식이름으로 바꾸는 이른바 창씨개명으로 “황국신민”이 되는 추태까지 벌어졌다. 그 창씨개명에 대한 선전 또한 한시기 3.1운동시 조선독립선언에 서명했던 춘원 이광수 등 이른바 유지인사들까지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으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순자도 창씨개명 때문에 당시의 이름인 기숙(순자의 원래 이름)으로 불리우지 못하고 기슈구로 고쳐졌다. 조선인으로서 당당한 조선이름이 있어도 그 이름을 쓸 수 없는 황당한 시대, 그것이 바로 당시 나라를 잃은 조선인들의 운명이었다.
 
또한 학교에서는 공부하는 시간보다 군사훈련을 내용으로 하는“체육시간”이 더 많아졌다. 워낙 달리기, 그네뛰기와 널뛰기 등 체육운동에는 취미와 소질이 있었고 교내의 대열검열 시마다 늘 학생대표로 선발되어 검열대에 올라가 교장선생님한테 경례를 올린 후 검열대호를 지휘하군 하던 순자였지만 어쩐지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하는 대열짓기, 날창찌르기, 포복전진과 방공호 들어가기 등 훈련만 강요하는 “체육시간”이 점점 싫증이 났다. 취미성이 없는데다 너무나도 엄격하고 포악성이 내포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학하여 하숙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순자의 몸은 먼지투성이 아니면 진흙투성으로 되기가 일쑤였고 그 지친 모습은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순자의 아버지 김명기 어른은 육도촌에 있는 세방에 왔다가 순자가 온몸이 먼지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참, 세상이 망할려니 별 해괴한 일을 다 보는군, 학교라는 것이 웬 당치도 않는 군사훈련이란 말이냐? 그리고 계집애들이 군사훈련을 해서는 쌈터로 나간단 말이냐?! 안되겠다. 너 내일부터 학교에 나가질 말거라.”
 
아버지 김명기 어른은 이렇게 왜놈의 말을 하고 왜놈의 글을 배우는데다 이번에는 왜놈의 군사훈련까지 강요하는 학교가 점점 못마땅한지라 딸을 순자를 퇴학시킬 타산까지 하고 있던터라 드디어 퇴학이란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
 
순자 역시 군사훈련이 힘들고 싫증나는 건 마찬가지었다. 훈련이 서툴어도 매맞았고 일본군가를 잘 부르지 못해도 욕을 얻어먹기가 일쑤였으며 일본인교관의 험상궂은 낯판대기는 보기만 해도 무서워났다. 하지만 순자는 퇴학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비록 이전에 비해 공부하는 시간이 현저하게 줄어든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공부하는 시간만은 재미가 있었다. 일본어로 공부하는 것도 상관없는 것 같았다.
 
그만큼 순자는 공부에 푹 빠져 있었다. 성적도 매우 우수했다. 언젠가 한번은 순자가 전 학급에서 종합 1등을 하였었다. 헌데 당시 일본인 교원은 조선인 학생이, 그것도 여학생한테 1등을 주기 몹시 싫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2등을 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머리를 썩썩 긁으며 궁리해낸 것이 2등을 한 일본인 학생 교쇼진과 순자한테 공동 1등이란 점수를 주는 것이었다.
이렇듯 순자가 공부에서 전 학교적으로 독특하게 우수한지라 결국 아버지도 순자를 퇴학시키려던 마음을 접게 되었다.
 
소학교를 다니는 6년간 순자는 공부를 잘하기도 했거니와 지각과 조퇴란 단 한번도 없었으며 6년간 만개근생으로 표창받기도 했다. 이는 전 교내적으로 순자가 유일한 학생이었다.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 (3)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