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3(금)
 

■ 김철균

푸르른 달빛이 파도에 부서지면/ 파이프에 꿈을 실은 첫사랑 마도로스// 뎃기에 기대서면 그날밤이 그립구나/ 항구마다 정을 두고 떠나온 사나이// 그래도 첫사랑 맺은이는 잊을 길 없네…
 
매번 이 한국가요를 들을 때마다 나는 지난 세기 90연대 초반에 원양화물선을 타고 세상이 작다하게 6대주 4대양을 누비던 마도로스 생활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마도로스ㅡ 마도로스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가없이 넓게 펼쳐진 바다와 로맨틱한 꿈을 주는 항구를 연상케 된다. 오늘은 태평양에서, 내일은 대서양에서 이 세상이 작다하게 주름잡고 다니는 바다의 신사, 아 얼마나 멋진 바다의 사나이들인가! 허나 마도로스인 우리들한테는 항상 낭만과 기쁨과 웃음만이 뒤따른 것은 아니었다. 고향과 부모처자를 떠난 외로움, 힘들고 짜증나고 지겨운 바다생활,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이 모든 것들은 배를 타는 마도로스였던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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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멀지 않은 “벙어리”

1991년 3월 18일, 연길역에서 출발한 우리 해외송출일군 12명은 이틀후인 3월 20일 아침 7시 30분에 중국 국제항공 보잉 747기에 올라 출국의 첫코스를 밟게 되었다. 스켓쥴은 베이징 ㅡ 홍콩 ㅡ 밴큐버(캐나다)ㅡ 토론토(캐나나)ㅡ 상파울로(브라질) ㅡ 몬테비데오(우루과이)ㅡ 포클랜드(영국점령지로 말빈군도라고도 함) 이렇게 쭉 잡혀 있었는데 비행기를 여러 번 갈아타고 마지막에 선박에 올라 정식 근무를 하도록 돼있었다.

연길에서 베이징 공항까지는 송출회사의 담당자가 책임져 주었기에 순조로왔고 홍콩의 치더공항(启德机场) 역시 중국인이 많은 곳이라 언어소통이 잘 되어 우리가 대륙에서 왔고 영어를 모른다고 하니 공항안내양이 우리를 이끌고 수속을 다 해주었기에 괜찮았다. 애로사항은 홍콩에서 이륙해서부터였다. 홍콩에서 캐나다 밴큐버까지의 비행시간은 20여시간, 중도에 참을 몇 번 주었는데 우리 일행 매 개인은 미화 20달러씩밖에 없는지라 누구도 그 참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스튜어디스(空中小姐)양이 “서비스”라고 알려 주었으나 그 말뜻을 알리 없는 우리는 한결같이 “노(NO)”하고 손을 내저어 스튜어디스양으로 하여금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우리는 우루과이까지 가면서 공항에서 파는 싸구려 빵을 사먹거나 집에서 갖고간 누룽지를 더운 물에 담궜다가 먹군 했다. 글쎄 코치가 있는가 영어 한마디 할줄 아는가 실로 세상에 귀가 멀지 않은 “벙어리”가 있다면 아마 우리었을 것이다. 공항마다 수속을 할 때면 숱한 질문을 받군 했는데 영어를 구사할줄 모르는 우리는 근근히 손형용이나 그림을 그려 가지고 그들과 뜻을 나누군 했다. 그래도 공항일군이 알아차리고 도장을 팍팍 찍어주던 일이 얼마나 고마왔던지…그리고 수속 뒤에 그들은 꼭 “땡큐베리마취(대단히 고맙습니다)”라고 했는데 거기에 우리는 인사는커녕 멍해서 대답하지 못하는가 하면 어떤이는 제딴이야 주인인양 고개부터 끄덕이군 했다.

애간장 태우는 일도 있었다. 캐나다 토론토 공항에서 있은 일이다. 당시 우리 일행중 박학철이란 젊은이가 있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공항일군이 우리 다른 사람은 다 대기실로 들어가게 하면서도 유독 그한테만은 그의 얼굴과 여권을 대조해 보더니 이것 저것 꼬치꼬치 캐고들면서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과 뭔가 의사소통을 하려고 했으나 아무리 손질로 형용하고 해도 그들은 그냥 머리를 가로 저으며 “노, 노”라고 할뿐이었다. 어떻게 한담?……

바로 그 때 우리 일행 중 일어를 좀 하는 최용식이란 젊은이가 일본인 한분을 데리고왔다. 이렇게 되어 최용식과 일본인 그리고 캐나다 공항일군 3명이 3자 대화가 오고 갔는데 물론 최용식과 일본인은 일어로, 일본인과 공항일군은 영어로 대화했다. 대화끝에 그제야 공항일군은 박학철의 여권에 도장을 찍어 주더니 대기실로 들여보내는 것이었다. 그 뒤 알고보니 박학철의 여권중의 사진은 머리를 짧게 깎은 탈모사진이었지만 당시의 박학철은 머리를 길게 기른데다 여권사진을 찍을 때에 비해 몸이 많이 뚱뚱해졌고 거기에 코수염까지 무성하게 자랐으며 사진에는 20대 초반으로 보였다면 실제 인물은 거의 40대가 돼 보였으니 공항일군이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기실 아무 것도 아닌 오해였다. 하지만 박학철은 물론 일행 중 단 한명도 영어를 할줄 아는 이가 없으니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외국인들이 우리 중국사람을 얼마나 비웃었겠는가?! 영어를 알면 세계 그 어디를 가든지 기본상 언어소통에는 별문제지만 다른 말 특히 조선말 같은 건 국경만 넘으면 거의 쓸모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우리 일행 중 적지 않은 친구들의 짐속에는 비누와 치약같은 것을 2년간 쓸 수 있는 분량을 갖고 간 이들이 많았다. 그들의 말로는 외국에 가면 모든 것이 비싸기에 그렇게 갖고 왔다고 하였다. 일리는 있었으나 후에 볼라니 그러한 생필품은 선박에서 모두 무료로 공급하는 것들이었으니 모두가 불필요한 것들이었다. 또한 비행기에서 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그 안에 있는 비누나 휴지같은 것을 되는대로 가방속에 챙겨넣은 이들도 많았다. 참, 어처구니가 없다고나 할까? 당시 비행기 승무원들이 얼마나 웃었을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창피스럽고 얼굴이 뜨거워 나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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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목격한 서양인세계

우리가 목적지인 우루과이 몬테비데오공항에 도착한 것은 꼭 베이징을 떠나 34시간만이었다. 헌데 베이징에서 그 전 날 아침에 떠나 이튿날 저녁에 몬테비데오공항에 도착했는데 몬테비데오공항의 달력을 보니 여전히 3월 20일이었다. 이에 우리 일행 중 몇몇은 “어제 베이징을 떠날 때 20일이었는데 왜 여긴 오늘도 20일인가” 하면서 의아해했다. 세계 여러 나라들의 시간적 차이를 모르는 그들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론만이 아닌 실제적으로 그 시간적 차이를 보는 순간, 오묘한 지구론 학설을 새삼스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몬테비데오공항에는 선박회사 대리점 일군 2명이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가 입국수속을 마치고 나오자 그들은 우리의 여권을 거두더니 한명 한명씩 점검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공항일군들과 마찬가지로 여권과 매개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씩 대조해 보더니 마침내 우리들더러 봉고차 2대에 나뉘여 앉게 하고는 마침내 몬테비데오의 밤거리를 헤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밤에 보는 몬테비데오의 거리었지만 매우 깨끗했다. 차창밖으로 내다 보노라니 거리의 행인들은 거의 모두가 한가롭게 거닐고 있었으며 몹시 행복하고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특히 손을 꼭 잡고 산보하는 노부부도 가끔씩 보였는데 머리가 백발일뿐 옷차림새 같은 것은 젊은이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더없이 깨끗해 보였다.

한편 당시만 해도 우리 일행 12명은 베이징에도 다녀보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일 정도로 그야말로 “촌티”가 다분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다보니 그렇듯 황홀하고도 번영스러운 외부의 세계와 갑자기 접촉하니 별의별 “촌티”가 나는 말을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먼저 화룡에서 온 최××씨가 울상을 하면서 “우리가 이렇게 잡혀가 그냥 무리죽음을 당하는 것이 아닐까? 가지 말라고 하는 어머니의 권고를 귀등으로 흘려보내고 왔는데 대체 어떻게 돼가는거야?!”라고 하며 울상을 하더니 개산툰에서 온 양××씨는 길가에 줄지런히 주차돼 있는 길다란 승용차 행열들을 보고는 “우루과이의 수도이니까 이 나라에 그 무슨 대형행사가 있는 모양이야. 그렇찮으면 어떻게 이많은 승용차들이 모일 수가 있어?!”라고 하는 것이었다.

하긴 그때 지난 세기 90연대 초기만 해도 연변밖을 크게 벗어나 보지 못한 우리로서는 그러한 광경을 눈으로 직접 목격해 보기는 난생 처음이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약 40분간 달리던 봉고차는 어느 한 5-6층 되어보이는 건물앞에서 멈춰섰다. 공항에서 우리를 맞던 2명의 일군은 우리를 데리고 건물안으로 들어갔다. 그 곳은 바로 우리가 머물게 될 호텔이었다.

호텔 카운터에서 등록을 마치자 우리는 각각 자기들이 묵을 방으로 들어가 행장을 풀었다. 장기간 비행기를 타서였던지 나의 발은 몹시 부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샤워부터 하고는 슬리퍼를 끌고 카운터로 향했다. 피곤한데다 샤워까지 하고나니 목이 말랐던 것이다. 그래서 물을 좀 얻어 마시려고 말이다.

여기서 또 우스운 에피소드가 한 단락이 있다. 내가 카운터 아가씨를 보고 물을 마시는 흉을 하며 “워터”라고 말하자 그 아가씨는 “워터? 오우, 아구와”라고 했다. 그러자 나는 이에 반박이라도 하듯 “노, 워터”하며 손질발질을 해댔다. 이에 그 아가씨는 한참 나를 훑어보더니 머리를 흔들더니 따라 오라고 손짖을 했다. 그래서 따라간 결과 그것은 내가 든 방이었는데 아가씨가 곧바로 냉장고를 열더니 곧바로 물병을 꺼내주는 것이었다.

여태껏 싸루려 여관방에나 들어보았지 고급호텔에는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호텔방마다 냉장고가 있고 또한 물을 포함한 여러 가지 음료수과 과일 등이 있다는 것을 알리 만무했던 것이다. 그리고 출국할 때 영어를 좀 아는 친구를 통해 영어로 물을 “워터”라고 부른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이 스페인어로 “아구와”라는 것을 역시 알리 만무했다. 그러니 그 카운터 아가씨가 “아구와”라고 하자 “노”하며 “워터”라고 곱씹었으니 한심했다.

후에 알고 보니 남미의 우루과이 등 적지 않은 나라들은 한시기 스페인의 통치를 받았기에 지금도 관방언어는 스페인언어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밤이 깊어지자 호텔 로비에는 이상하게 생긴 여자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 녀들은 우리를 보더니 눈을 껌뻑하지 않으면 스쳐지나가면서 옆구리를 툭 다쳐놓군 했다. 왜 그러는거지? 우리가 그녀들을 경계하며 피하려고 하자 그녀들은 오히려 깔깔 웃어 대면서 “꼬레안노, 꼬레안노(스페인어- 한국사람)”하면서 공개적으로 추파를 던져대는 것이었다.

그제야 소위 성개방이라는 자본주의사회의 실체를 점차 실감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가 이튿날 아침 일어나 호텔앞 광장을 거닐노라니 술에 잔뜩 취해 몸도 가누지 못하는 아가씨들이 남자들의 부추김을 받으며 호텔문을 나서는 모습이 적지 않게 눈에 띄기도 했다. 그 녀들은 우리를 보더니 또 “꼬레안노, 꼬레안노”하며 지껄이더니 우리가 응대도 하지 않자 이번에는 “꼬레안노, 이 씨팔놈아!”라고 한국말까지 섞어가며 고함을 질러대는 것이었다. 아마 우리를 한국선원으로 착각을 한 모양이었다.

우루과이에 도착한 이튿날 밤 우리는 호텔에 든 한국선원들한테 이끌려 몬테비데오에 중심가에 자리잡은 한 댄스바에 가보았는데 거기에 들어서자 초저녁에는 그저 남녀가 어울려 디스코같은 춤만 추던 것이 야밤이 되자 몇몇 나체녀들이 커다란 젖가슴을 흔들어대며 춤을 추기도 하고 자신의 성기를 이용해 여러 가지 묘기를 부리는 등 갖가지 추태를 부리기도 했다. 그야말로 시골 촌구석에서 여태껏 살아오다가 갑자기 다른 세계에 들어서 보았다고나 할까?

한편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우리는 상가들을 돌면서 구경하던 중 고객들이 상가내를 마음대로 돌면서 물건을 고르는 등 “희한한 일”도 목격했는데 지금 와서 보면 그것이 곧바로 슈퍼마켓이었다. 하긴 그때 우리가 슈퍼마켓이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지라 희한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몬테비데오에 도착한 3일 후 드디어 우리는 소련선박 “프리오 카츄사”호에 편승하여 선박에 승선하여 근무하게 될 목적지인  포클랜드 해상으로 향했다. 이상한 것은 우리가 몬테비데오에 도착했을 때(3월 20일)는 중국의 초봄과는 달리 그 쪽은 가을이었으며 한창 락엽이 흩날리는 계절이었고 소련선박에 편승하여 남쪽으로 가면서 날씨는 점점 추워졌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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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견문 시리즈 (5)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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