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3(금)
 


■ 허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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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서산업에서 나는 “폭발호”처럼 부자는 되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치부했다고 할수는 있었다. 일본에서 박사공부를 하는 아들의 뒤바라지를 하고도 집 한채를 마련했으며 용돈도 그닥 남부럽지 않게 쓸수 있었다. 한편 하도 까근하고 과학적인 관리를 한데서 실패가 적었고 또한 적시적으로 그것을 포기하고 정리한테서 빚더미에 올라앉는 위기는 만회했다.

그때는 이미 일본류학 3년째로 박사시험을 칠 날도 멀지 않았고 거기에 아들애가 적지 않게 아르바이트로 뛰면서 공부했는가 하면 또 장학금도 탔고 있었기에 부모로 된 우리의 부담은 상대적으로 많이 덜어진 셈이였다. 더이상 “제3산업”을 벌이지 않아도 될수 있었다.

하지만 동물사육업에 재미를 붙인데다 나는 미립이 텄고 경험도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이 사회에서 생활하자니 돈쓸 일이 많았으며 앞으로 로후에 들어서서 사람한테 어떤 일이 터질지 어떻게 알랴.

결국 나는 안해와 의론하고는 곰사육업을 벌여보기로 하였다. 안해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이였다.

나는 이번에도 곰을 사놓기에 앞서 서점에 가 곰사육에 관련된 책을 사다보면서 곰사육에 관련된 지식과 기초상식부터 익혔다.

곰사육을 시작할 때 우리는 사육장이 없다 보니 집안 객실에 굵은 철근으로 곰우리를 만들고는 그안에 곰 1마리를 가두고 키웠다. 곰사양장을 짓자면 큰 자금이 들어가기때문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곰사육장을 지을만한 자금이 없어서가 아니였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즉 곰사육양 역시 지난번의 해리서사육처럼 시장이 막힐 경우를 생각해서였다. 그도 그럴것이 만약 곰사육에 크게 투자해 곰사육장을 지었다가 그 산업이 얼마 안가 막을 내리게 되면 자칫 투자금도 뽑지 못할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었기 때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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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곰을 사육하면서 보면 조심해야 할것이 많았다. 곰(해리서도 마찬가지였음)이란 녀석은 강아지나 고양이와는 달리 주인을 알아보고 주인을 반기는 그런 애완동물이 아니였다. 먹거리를 주거나 혹은 가려워한다고 나무꼬챙이로 등을 긁어주거나 또는 목욕을 시킬 때도 까딱 조심하지 않으면 갑자기 주인한테 덮쳐들어 손을 물어놓거나 긁어놓기도 하군 했다. 그래서 나와 안해는 그 녀석한테 조금씩 다친적이 여러번 되였다. 그럴 때마다 우리 부부는 “이 주인도 알아보지 못하는 미련한 놈”하고 욕하군 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곰사육이란 이 산업을 포기하지 못하였다. 아니, 곰한테서 뽑아내는 웅담분을 파는 시장이 포화되지 않는한 그것을 계속 해야 했다. 그러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동물을 치다보면 머리속에 떠오르는 한가지 법칙같은것이 있었다. 즉 개, 고양이 등 애완동물은 귀여울 때가 많아 그것들을 고와하다 보면 가족 지어는 집식구처럼 느껴질 때가 있으며 적지 않은 가정들에서는 진짜 애완동물을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런 애완동물은 경제적 가치가 적었다. 적어도 웅담분을 제공하는 곰이나 알을 낳는 닭에는 비할수가 없었으며 오히려 자식한테 투자하는것처럼 돈을 때려넣는 경우가 허다했다. 례하면 먹는것이 사람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사람보다 더 비싼 육류같은것을 먹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곰이나 해리서 그리고 닭이나 게사니같은 동물이나 가금류는 절대 가족으로 생각할수 없는것들이다. 귀엽지 않고 애를 먹이기도 한다. 가끔씩 좋은것을 먹이고 병치료도 해주지만 그렇다고 그 비용이 애완동물한테 쓰는것과는 비길수 없었다. 반면에 곰처럼 미욱한것들은 주인한테 부를 창조해주고 있는것이다. 이는 묘한 대립적 관계가 아닐수 없었다. 만약 이것들한테 그 어떠한 공통점이 있다면 애완동물은 주인한테 즐거움을 선물하고 곰같은 미욱한 동물은 주인한테 경제적 가치를 제공한다는것으로 이 두가지 모두가 사람한테는 수요된다는 바로 그 점이라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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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사육업이 본격적인 궤도에 들어서고 또 거기에 일정한 비결이 생기고 미립도 트자 우리는 곰을 1마리로부터 5마리까지 늘였다. 곰사육업이 그냥 “흑폭풍”처럼 다가왔다 지나가는 그런 단기행위업종이 아닌것 같아서였다. 하긴 제3산업에는 단기행위를 거금을 투자를 하여 제꺽 본전을 뽑고도 큰돈을 버는것이 있는가 하면 보다 적은 돈을 벌더라도 원견성이 있고도 지구력이 있게 끌고나가는 산업항목이 별도로 있는것 같았다.

당시 우리가 생산해낸 웅담분은 주로 한국으로 많이 수출되였다. 연변특산으로는 한국행을 하는 사람들이 한국인들한테 선물하기엔 제격인 모양이였다. 그외 우리는 아들이 있는 일본과 딸이 있는 북경에도 웅담분을 적지 않게 보내주어 적지 않은 판로를 개척했다. 그리고 당시 우리가 생산해낸 웅담분은 잡질이 적고 순도가 높아 고객들한테서 호평이 좋았으며 한시기 한국나들이하는 사람들이 다투어 사가는 특산품으로 되기도 했다. 어찌보면 “공급이 수요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정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여기까지 오노라니 고생스러운건 사실이였다. 질병예방에도 신경써야 하였지만 사료장만이 여간 여러운것이 아니였다. 곰이란 녀석은 먹기를 엄청 많이 먹었다. 해리서를 사육할 때처럼 여겼던 내가 크게 오산한 셈이였다. 게다가 마리수가 5마리다보니 더욱 그랬다. 특히 겨울철에 먹을거리가 제일 걱정거리였다.

우리는 해마다 겨울철이 다가오면 우리는 당근, 수박, 사과와 개미 등을 대량 구입했고 옥수수도 3000근 이상씩 구입해서는 일반 개인집의 김치움보다는 5-6배가 더 큰 움안에 보관해야 했는가 하면 돈을 절약하기 위해 교외의 배추밭과 과수원을 오르내리면서 배추와 사과배 이삭을 줏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손을 얼구기도 했고 차림을 하고 나선 꼴이 말이 아닐 때도 많았다.

그리고 해리서를 키우면서 손실을 본것처럼 공사육에서도 큰 손실을 본적도 있었다. 우리는 1993년부터 2012년까지 약 20년간 곰사육을 했었는데 선후로 곰 3마리가 죽어나가기도 했다. 그중 한마리는 뇌진탕에 걸려 죽었고 한마리는 설사를 맞아 앓다가 죽었으며 또 다른 한마리는 집에서 키우는 식물을 뜯어먹은것이 중독되면서 죽기도 했다. 그때 200근이 넘는 곰 한마리가 2만원씩 했으니 6만원을 손실본 셈이였다. 그 6만원 ㅡ 그것은 큰 기업인으로 놓고 말하면 새발의 피도 되나마나 했겠지만 작은 규모로 곰사육업을 하는 우리한테 있어서는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였다.

하긴 이렇듯 고생스런 나날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아들딸의 뒤바라지를 성공적으로 할수 있은것도 사실이였다. 바로 이런 우리의 고생과 헌신으로 의해 딸 영혜가 이젠 북경에서 일본회사에 출근하며 보람찬 나날을 보내고 있고 아들 영동이 또한 박사모를 쓰는것으로 일본류학생활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한동안 일본의 모 대학에서 교편을 잡다가 이젠 당지의 모 회사에서 출근하며 회사중견으로 립지를 굳힌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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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영동이가 박사학위를 취득할 당시 아들은 우리 부부를 초청해 일본구경을 시키기까지 했다. 아들이 일본에 없다면 언제 우리 부부가 일본나들이를 할 생각이나 할수 있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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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석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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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전부터 많은 사람들로부터 “일복이 있는 사람”이란 말을 자주 들어왔다. 그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닌것 같다. 왜냐하면 지나온 나의 일생을 놓고 보아도 나는 항상 시간이 넉넉하거나 한가할 때가 없었다. 초기 부대생활을 할 때에는 뭔가를 배우느라고 늘 시간의 부족함을 느꼈고 북경공정병학원을 졸업한 후에는 배운것을 실천하느라고 항상 바삐 보냈으며 그뒤 뻐스공장에서 “로동개조”를 할 때거나 연길시라지오방송국으로 전근한 다음에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그중 한가지 빼놓을수 없는 일이 있다면 1996년 4월 우리 3형제가 “고향정”이란 주제를 갖고는 룡정시 석정향 중성촌에 고향에 다녀온 그것이다.

당시 우리는 여러가지 준비를 했다. 우리 삼형제는 각각 호주머니를 털어서는 촌로년협회에 기부할 자금을 마련했고 또 연변예술학원 지도부와 련계해서는 가수 박춘희 등 20명으로 구성된 예술소분대를 청하기도 했다.

그날, 우리 3형제와 예술학원의 예술소분대가 중성촌에도착하자 마을사람들은 촌구락부에 모여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마침 그때는 진달래가 피는 계절이라 촌에서는 진달래꽃을 꺾어와서는 구락부의 무대를 장식하기도 했다.

“고향정”활동모임에서는 촌민위원회 주임의 발언과 촌로년협회 회장 등 여러 사람들의 발언에 이어 예술소분대의 공연이 펼쳐졌다. 그러자 촌민들속에서는 자주 탄성이 터졌다. 특히 박춘희가수가 건들건들한 목소리로 조선족민요를 부르자 촌민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흥겨워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시골구석에서 처음으로 구경하는 전업예술단의 공연이 아닐수 없었다.

그날 오후 예술학교 소분대와 기타 사람들은 다 연길로 돌아갔지만 활동조직자들인 나 그리고 둘째형님과 셋째형님은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하루밤 묵기로 하였다. 촌에 보다 더 실질적으로 좋은 일을 하기 위해 촌간부들과 토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날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의론했다. 하다면 촌을 위해 도대체 어떤 좋은 일을 해야 하는가?

의론중 문득 셋째형님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놨다. 곧바로 오래지 않아 “6.1”절이 다가오기에 그때 촌아이들한테 연길구경을 시키자는것이였다. 그러자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찬성했다. 그날밤 우리는 촌아이들한테 연길구경을 시킬 때 필요한 절차와 각자가 맡을 임무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토론하기도 했다.

드디여 1996년 6월 1일이 닥쳐왔다. 때마침 그해 연길시인민경기장에서 “6.1”절 경축대형활동모임이 있었는데 우리는 연길시교육국과 련계하여 룡정시 석정향에서 오는 애들과 교원 및 학부모 등 100여명이 앉을 장소를 마련했다.

그날 석정향에서 온 학생, 교원과 학부모는 약 80명이 됐으며 우리가 사전에 장소를 마련했기에 그들은 아주 쉽게 연길시인민경기장에 입장했고 또한 경축활동의 모든 장면들을 구경할수가 있었다.

점심때가 되자 애들과 학부모 그리고 교원들은 연길시인민경기장에서 그닥 멀지 않은 우리 집에 가서 식사하기로 하였다. 당시 우리 집은 140여평방메터가 되는지라 80명이 식사하는데는 별 불편이 없었다.

그날 점심은 애들과 학부모들이 갖고온 도시락과 우리 집에서 준비한 음식들로 마련되였다.

이어 오후에는 시간이 있게 되자 우리는 애들한테 연길시신화서점을 참관시켰다. 당시 신화서점 지도부에서는 촌어린이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을뿐만 아니라 수백권에 달하는 책을 애들한테 기증했다. 참으로 고마운 신화서점 지도부일군들이였다.

그날 저녁이 되자 우리는 애들과 학부모 및 교원들을 우리 3형제의 집에 배치하여 식사하고 또 주숙하게 하였는데 주숙하는데는 아무래도 좀 자리가 모자란것 같아서 연길시 하남가두의 독보조 장소를 빌려쓰기도 했다.

이튿날 새벽, 우리는 애들과 학부모 등을 데리고 연변일보사 인쇄공장을 찾아가 신문인쇄현장을 참관시켰다. 둘째형님인 허길룡씨가 연변일보사에 재직이였기에 사전에 련계했던것이다.

아침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또한 애들을 데리고 연길공항으로 갔다. 모두 사전에 련계했던것이다. 연길공항에서우리는 애들한테 공항내부와 비행기내부 등을 참관시켰으며 비행기의 리착륙장면도 구경시키였다.

연길공항까지 구경시키고 나니 점심때가 되였다. 그러자 우리는 연길동북아호텔로 향했다. 그시기 우리 허씨종친회의 허순자녀사가 동북아호텔의 총경리로 있었기에 그가 80명에 달하는 애들과 학부모 및 교원들한테 무료로 점심 한끼를 제공하기로 했던것이였다. 참으로 나의 일을 자기의 일처럼 생각하면서 도와준 허순자녀사였다. 나는 이번 집필기회를 빌어 현재 연길시에서 일본료리집을 운영하고있는 허순자녀사한테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
그번 활동에서 나와 둘째형님 그리고 셋째형님은 적지 않은 돈을 팔기도 했다. 전문용 뻐스 2대를 세내여 애들과 학부모 및 교원들이 타고다니게 했고 또한 식사를 제공하는데도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를 두고 형님들과 나는 물론 형수 두분과 나의 안해도 불쾌해하는 내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촌애들을 위해 늦게나마 좋은 일을 한것으로 하여 무척 기뻐하는 모습들이였다.

한편 그때의 활동은 연변일보에 게재되기도 하고 연변TV에 방송되기도 했는데 연변일보의 기사는 둘째형님인 허길룡씨가 직접 쓴것이였다. (연재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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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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