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dspdaily_com_20140420_215540.jpg◐ 허길성


(전번기 계속) 연길시라지오방송국방송중계소의 건립공정은 내가 이 단위에 입문하자마자 가동되였다.


우선 방송중계소를 세우자면 그 설계방안부터 나와야 했다. 그런데나 본인이 예전에 북경공정학원에서 기계및건축공정설계를 전공했지만 방송중계의 설계만은 아주 생소했고 이 방면에 들어서는 우리 모두가 초보자였다. 그러니 대도시들에 있는 방송중계소를 참관하면서 이런 설계들에 대해 전문적으로 학습해야 했다.


어쩔수 없이 나는 연길시라지오방송국에 출근한 며칠뒤부터 출장을 다녀야 했다. 출장에 대해 말하면 심양군구 공정병사령부에 있을 때 많이 다녔고 또 연길에 와서도 부대에 있을 때는 팔도, 훈춘 등지를 자주 다녔었다. 그리고 총각시절에는 출장다니는것이 그닥싫지 않았다. 홀몸이고 부담이 없으니 기분이 좋은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결혼하고 또 자녀 둘씩이나 있고 보니 출장다니는것이 썩 좋은 일만은 아니였다.


출장가면 고생할 때가 많았다. 특히 음식이 입에맞지 않아 애를 먹는 경우가 허다했다. 음식이란 그래도 같은 된장국이래도 집에서 안해가 끓여주는것이제일 입에 맞고도 구수했다는것을 나는 결혼뒤에야 진정으로 터득할수 있었던것이다.


안해는 나를 극진히도 보살폈다. 매번 출장을 갈때마다 나의 트렁크속에 고추장, 명란젓갈과 말린 누룽지 등을 넣어주군 했으며 때시걱을 절대 거르지 말라고간곡히 부탁하는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 출장간 뒤 매일 아침마다 함께 간 동료들이 나의 려관방으로몰려오기가 일쑤였다. 모두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였다. 그리고그럴 때마다 동료들은 나의 안해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는 한편 나를 부러워하는 기색도 력연했다.


그러던중 나는 실로 10여년만에 처음으로 북경출장길에오르게 됐다. 도문 – 천진행 기차를 타고 천진에 도착한뒤 천진에서 기차를 다시 갈아타고 북경으로 향하는 등으로 그때의 출장은 비행기는 고사하고 기차를 타고 가는것도 몹시 번거로웠다.


북경에 도착하니 그때까지만 해도 북경은 옛모습 그대로였다. 북경역도그대로였고 천안문광장과 그 광장을 가로지르는 장안가 량측의 건물들도 거의 그 모습 그대로였으며 장안가로 흐르는 거대한 자전거물결도 10여년전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그 10년사이 크게 변한것이 있었다. 바로 사람들의 모습이였다. 개혁개방을 맞으면서 사람들 거의 모두가얼굴에 웃음기가 어리여있었고 그 걸음걸이는 씩씩하고도 활기찼다.


북경에 오게 되자 나는 문득 만나고 싶은 한사람이 있었다. 그가바로 북경공정병학원시절의 동창생이였고 지금은 외교부에서 근무한다던 그 량희원이란 사람이였다.


북경에서 국가외교부를 찾아가는것은 그닥 힘든 일이 아니였다.1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북경의 주요 거리에 대해선 거의 손금보듯 잘 알고있는 나였다.

 

2


국가외교부 정문앞에 이르자 초병 2명이 버티고 서있었다. 그들은 내가 나타나자 나의 신분을 확인하고는 찾아온 용건부터 물었다. 이에 나는 량희원이란 그 친구와 북경공정병학원 시절의 동창생이dspdaily_com_20140420_215621.jpg라고 나서 이번에 어쩌다 수도 북경으로 왔던 김에한번 꼭 만나보려 한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초병은 “그분은 지금 사무가 몹시 바쁘기에 될수록그의 사무에 방해가 되지 말아줬으면 한다”며 그닥 마뜩치 않아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럼 그한테 전화라도 걸어주면 안되겠는가고 사정했다. 그러자초병은 할수 없었던지 초소안에 들어가 전화를 거는것이였다. 그 초병은 “연변에서 허길성이라고 하는 중년남성이찾아왔는데 아는가”고 확인하고 난 뒤 만날 의향이 있는가고 했다. 그러고 나서야 초병은 나한테 돌아서며거수경례를 붙이고는 “손님, 미안합니다. 공무가 공무인만큼…조금만기다려주십시오”라고 했다.


미구하여 그 외교부 주건물의 출입문쪽에서 한 중년남성이 나타났다. 그 남성은 머리를 들고 우리가 서있는 대문쪽 한번 바라보더니 인차 부랴부랴 걸어오는것이였다.


그가 가까히 다가와서야 그제날 량희원의 모습이 조금 알리는듯 했다. 그 역시 한참이나 나를 뜯어보더니 그제야 “동창생 허길성동무구만”하며 와락 나를 끌어 안는것이였다.


량희원은 나를 몹시 반겼다. “허동무, 정말 마침 잘 왔소. 방금 어디론가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던 참이였는데 만약 나갔더라면 진짜 자네가 초병들한테 괄시당할번 했소. 하지만 저 초병들을 원망하지는 마오. 국가외교부는 국가의 기밀단위라그들도 어쩔수 없이 출입자단속을 엄하게 할뿐이오.”


“그래그래 그렇구말구.”


아무리 국내의 “촌변두리”인 연변에서 상경했지만 그만한 상식마저 모를 내가 아니였다. 나는 량희원을 따라 건물 2층에 있는 그의 집무실로올라갔다.


량희원의 집무실은 그닥 화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외교관의 집무실답게 기품이 있었다. 그의 사무상에는 중화인민공화국 국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가꽂혀있었다. 이는 그가 전문 조선담당 외교관임을 여실히 증명했다.


이어 그가 사무상우에 있는 초인종을 누르자 인차 녀비서 한명이 들어왔다.


“커피 두잔.”


녀비서는 우리 두사람한테 고개를 까딱하고 인사하고는 나갔다.아주 세련된 모습이였다.


그 사이 그는 나한테 담배 한가치 권했다. 그때는그 담배가 무슨 담배인지 모르고 피웠지만 후에 알고보니 그 담배가 바로 유명한 명표담배 “말보루”였다. 그리고이윽하여 우리는 녀비서가 타온 커피도 마셨는데 이는 내가 생전 처음으로 마셔보는 커피였다.


우리는 한동안 지난 세기 60년대 당시 북경공정병학원에서갈라진 후의 일과 최근년간의 사업상황 및 가정생활 그리고 자녀들의 상황 등을 서로 주고 받으며 한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얼마후 점심때가 가까워오자 나는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량희원동무, 우리 밖에 나가 식사나 하면서 계속얘기하기요.”


그때 나는 점심식사는 내가 그한테 대접할 타산이였다.


헌데 그는 급해하지 말라며 계속 나한테 이것저것 묻는것이였다.

(아니, 이 친구가혹시 자기더러 돈쓰게 할가봐 이러나?! 아무리 시골인 연변에서 왔어두 내가 그처럼 짠 사람은 아닌데?…)


그러나 나는 그를 오해해도 크게 오해했던것이다.


시계바늘이 11시20분을 가르키고 그가 초인종을 누르자 또 아까 들어왔던 그 녀비서가 나타났다. 량희원은서랍에서 메뉴판을 꺼내들더니 몇가지 료리를 체크해서는 그 녀비서한테 넘겨주는것이였다.


녀비서는 역시 종전대로 고개를 까딱하고 인사하고는 방에서 나갔다.


미구하여 량희원의 사무실옆에 딸린 응접실 탁상에는 3-4가지의볶음료리가 올랐다.


“허동무, 여기에 여러가지 술이 있는데 어떤 술을좋아하는지 한병 골라보오.”


그가 어느 한 궤에 달린 유리미닫이를 열자 그 안에는고급술만 수십병이 있었다. 나는 두눈이 휘둥그래질수밖에 없었다. 당시 나의 생활수준은 아무때건술생각이 나면 마실수 있을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자기의 돈으로 한병에 수십원씩 하는 술을 사먹을 수준은 아니였으며 한병에 수백원씩 하는 더구나 쳐다볼엄두도 못내는 상황이였다. 그런데 량희원은 이렇듯 수백원씩 하는 고급술을 수십병씩 진렬해놓고 마시다니…말그대로 나와 량희원은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사는 존재인것만 같았다. 


“빨리 한병 골라잡으라니까. 뭘 그리 구경만 하오?!”


나는 아무래도 마시는바 하고는 좋은 좋은 술을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며 귀주의 모태주 한병 골라잡았다.


이어 우리는 탁상에 마주앉았다. 량희원의 말에 따르면그를 비롯한 많은 외교관들은 아주 특별한 사정외에는 일반적인 식당이나 료리집같은 공개장소로 드나들지 않는다고 했다. 혹시 술에 취한 뒤 외교관원의 형상을 망가뜨리거나 실수로 비밀루설을 하는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 했다. 그러면서 나한테 될수록이면 생활외 자신의 사업에 대해서만은 적게 물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이에 나는 그의 사업에 대해서만은 일절 묻지 않기로 했다. 나역시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한편 나는 그가 좋아하겠는지도 묻지 않은채 그저 나의 성의대로 가방안에 있던 고추장과 명란젓갈그리고 도라지무침 등을 내놓았다. 그러자 대뜸 희색이 만면하여 그는 대단히 반가워했다.


“허동무, 이거 참 좋은거요. 이걸 진작 내놓을거지. 참.”


량희원은 볶음료리는 별로 다치지도 않고 내가 내놓은 반찬만 골라집었다. 그러고는 이마에 돋은 땀을 연신 닦으면서 “어허, 참 맛이 있소. 조선족은 그래도 얼큰한 반찬을 먹어야 군이 뚝 떨아진다니까” 라고 하며 하던 말을 자주 곱씹군 했다.


술이 몇순배 돌자 그는 속심말도 털어놓는것이였다. 그는북경공정병학원에 있을 때 내가 북경대학으로 가는것을 거절하였기에 자신이 선택될수 있었다고 하면서 그때의 일을 회고하는것이였다.


“그때 북경대학에 전학한 후 나를 데려갔던 그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는데 당시 그분들이 진짜 욕심냈던학생은 자네 허동무였다더구만. 만약 그때 자네가 응했더라면 내가 선택되지 못했을수도 있었을게 아니우?…그러다 후에 북경대학을 졸업하고 외교부에 배치받게 되자 어쩐지 자네한테 미안한 생각까지 다 들더군. 그래서 언젠가 한번은 수소문해 자네를 찾아본다고 했는데 말이야…”


그는 진정성이 고인 어조로 말했고 나 또한 그때의 일은 나 자신이 선택한 일이기에 그럴 필요가없다고 손을 내저었다.


“여보게 희원이, 그게 다 내가 선택한것이라네. 자네가 왜 미안해할거 있다구 그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와 나의 현실생활을 비교해보노라니 나 자신이 형언할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그도 그럴것이 그와 나는 아주 극적인 대조를 이뤘다. 나는 그한테자아소개를 할 때 연길시라지오TV방송국 TV방송중계소 서기로근무한다는 말만 하고 뻐스공장에서 로동개조를 할 때의 일을 밝히지 않은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다. 문화혁명시기에 겪은 나의 고초에 대하여동창생 량희원이 어떻게 알수 있으랴.


10여년만에 만난 동창생이였으니 우리 둘은 할 얘기들이 많고 또많았다. 이렇게 술이 마시며 얘기를 나누다보니 꽤나 시간도 흘렀다. 그리고나도 꽤나 주량이 있는 사람이였지만 량희원 역시 주량에 들어서는 두번째라고 한다면 서러워할 애주가였다.


그날 우리는 한사람이 한병씩 다 마시고서야 자리를 파했다.


드디여 술자리가 끝나 내가 려관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그는 “술마신 친구를 그냥 돌려보낼수 없다”고하면서 기어코 자기의 침대우에 나를 눕히는것이였다. 그러고는 해당일군을 불러 친구 한명이 자기의 침실에서하루밤 자게 된다는것을 신고하고 등록하는것도 잊지 않았다. 


그때의 량희원은 전혀 술마신 사람답지 않게 아주 정규적일군의 사업자세를 보였다.


그 며칠뒤 나는 북경에서의 볼일을 다 보고 연길로 돌아가게 되였다.


그날 내가 북경역에 도착해 뻐스에서 내리자 불현듯 누군가 “허동무”하고 조선말로 부르는것이였다. 그 소리에 내가 사위를 둘러보니 바로 량희원이 대합실출입문쪽에서 손짓하는것이였다.


나는 웬간히도 놀랐다. 내가 연길로 돌아간다는것을어떻게 알고 왔단 말인가.


“아니, 자네 어떻게 알고 왔소?”


이에 그는 그날 술을 마실 때 내가 아무날에 연길로 돌아가게 된다고 말했다는것이였다. 기실 그날 내가 술을 마시면서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그한테 연길로 돌아가는 날자를 말했고 그 역시 그냥 머리를끄덕이며 지나가는 소리로 듣는듯 했으나 꼼꼼한 그가 그 말을 깊이 새겨들은것이 분명했다. 그때 나는량희원의 외교관다운 자질에 재차 한번 놀랐다.


이어 그는 찦차운전사를 시켜 차안에서 웬 커다란 트렁크 하나를 꺼내더니 나한테 내밀며 열어보라는것이였다. 열어보니 그안에는 몽땅 고급술이였다.


나는 어리둥절해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허동무, 뭘 그리 놀라는거요. 그날 보니까 자네도 나처럼 술을 좋아하는것 같더구만. 몽땅 연길로갖고 가서 친구들과 함께 마시오. 다만 친구들앞에서 나의 체면을 좀 세워주면 고맙겠구…”


아마도 그날 내가 궤안을 들여다보며 부러워한것을 그가 알아챈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 내가 “나는 마실 술도 모자란데 자네는 이렇게 진렬까지 해놓고 살군”하고 롱담삼아 말한것을 그가새겨듣고 나한테 몽땅 선물한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 친구의 성의가 무던히도 고마웠으며 수십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때의 일을 잊을수가 없다. 량희원 친구,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그때 정말 고마웠네. 

한편 연길시라지오발사탑을 세우는 동안 우리는 무척 고생을 했다. 당시 발사탑은 중앙인민방송국의 설계에 따라 건설되였는데 요구가 매우 높았다.그리하여 관건적인 설비는 북경 중앙인민방송국 산하의 기업에 가서 직접 가져오고 기타의 설비만 연변건축공사 기계공장을 통해 가공하게했지만 그것이 요구에 미달될 때가 많아 애를 먹었다. 그리하여 북경,장춘과 할빈 등 곳을 더 다니기도 했다. 한가지 사례를 든다면 지진과 번개를 방지하기 위해직경 120 메터내 땅속에 동선을 거미줄처럼 늘여야 하는데 3톤에달하는 동선이 수요되였다. 헌데 당시 연길실정에서는 동선 3톤씩구할수가 없었다. 아니, 설사 구할수 있다 해도 그 가격이어마어마할수 있기에 결국 우리는 비용절약을 목적으로 연길시안의 수구소를 돌며 페물속에서 동으로 된 물건을 몽땅사들였다. 그 다음엔 그것을 동선으로 뽑을 공장이 지방에 없으니 그것을 싣고 장춘의 철근가공공장에 찾아가 재가공으로 동선을 뽑아내기까지 했다. (연재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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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10) 일신의 에너지 발산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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