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4(토)
 
■ 연변 리포터 김 철 균
 
未标题-1.gif늘 도수높은 안경을 걸고 다니는 길성 선생은 올해 76세이다. 76세라면 나이가 많은 편일까? 옛날 같으면 많다 할 수 있겠으나 요즘엔 그닥 많다고 할 수도 없다.   
 
간 밤에 길성선생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자신이 70대 로인이 아닌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군인이었고 함께 살고있는 여인 또한 지금의 마누라가 아니었으며 “류쾌이챈(六块钱)” 하며 한족 말을 하는 여인 즉 한족 처녀었다. 
 
길성 선생은 머리를 도리질했다. 뭔가 뒤죽박죽인 “도깨비꿈”인듯 싶었다. 하지만 그 꿈 역시 “아닌 밤중의 홍두깨”는 아니었다.   
 
이 이야기는 지난 세기 60 연 대 초 강소성 무석에 있는 중앙군위 직속으로 된 해방군 문화학교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시 이 문화학교는 부대간부 내의 문맹을 퇴치하기 위해 세워진 학교었다. 건교 초기었던 그 때 모집된 학원생은 도합 1000명 가량었지만 시험에 합격되어 선발된 학원생은 얼마 안되고 거개가 조선전쟁에 갔다온 군인들로 부대계급은 높으나 문화수준이 제로인 학원생들이었다. 그 중 심양군구에서 시험에 합격되어 입학한 길성이의 문화수준은 앞자리 10명안에 들 정도었다. 그리고 조선족은 유독 그 혼자 뿐이라 자연스레 모든 학원생들의 관심인물이었다. 
 
모든 사생들이 길성이를 “멋진 총각(帅小子)”이라고 놀려주고 있었으며 특히 여학생들이 더했다. 아니 여학원생들은 길순이를 놀려주는 것이 아니라 길성이한테 은근한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는 그녀들의 눈길만 보아도 보아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성이는 반에서 6 명 밖에 안되는 여학원생 중 “왕순자”란 이름을 발견했다. 그래 한족도 순자란 이름이 있단 말인가?
 
“쑈왕, 쑈왕의 이름이 어쩐지 조선족의 이름 같구만.”
 
어느 날 길성이가 묻자 왕순자는 제법 근사하게 애교에 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맞아요. 전 워낙 조선인이었거든요. 왜 걸 묻죠.”
 
“그럼 어찌되여 성은 왕씨인 거요?”
 
그제야 순자는 비교적 정색해하며 자신의 이왕지사를 털어놓는 것이었다. 
 
왕순자에 따르면 그녀는 조선에서 태여났었다. 일찍 조선전쟁 당시의 어느 날 유엔군의 폭격에 어느 한 가정집이 불길에 휩싸였고 죽어있는 남정과 주부가운데 6 살 짜리 어린 여자애가 울고 있었다. 이 때 불을 끄러 달려왔던 어느 한 지원군 장군이 그녀를 발견, 옷을 벗어 여자애한테 씌워준 뒤 주위를 살피다가 여자애를 돌 볼 어른이 없음을 알게 되자 바로 여자애를 안고 군부대로 돌아오게 됐다. 그 뒤 장군은 그 조선인 여자애를 슬하에서 키우다가 귀국 당시 아예 양딸로 입양하기로 정하고는 중국으로 데려왔던 것이다. 
 
그 장군인즉 바로 당시 상해 경비사령부의 왕육생(王六生) 정위었다. 그 사연을 알게 되자 길성이는 순자가 여느 여학생과는 어딘가 다르게 보였다.  얼마 안되어 길성이와 왕순자는 친한 사이로 됐다. 아니, 키가 크고 얼굴까지 준수한데다 문화수준까지 높은 길성이한테 순자가 더 적극 접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편 20대 초반의 길성이한테 이성의 출현은 그로 하여금 복잡한 모순 속에서 헤여 나오지 못하게 했다. 그는 자신의 가난한 가정을 생각, 가정을 위해서도 그렇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너무 일찍 이성과 접근하면 안 된다고 여겼다. 꼭 공부를 열심히 하여 보다 출세한 뒤에야 이성을 생각하고 앞날의 가정에 대해서도 염두에 둬야 한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순자가 너무 좋았다. 가정환경도 우월했지만 그 녀의 활달한 성격과 노상 실 웃음이 담겨 있는 그 녀의 얼굴이 더욱 좋았다. 
 
순자는 비교적 개방적이었다. 언젠가 얘기를 통해 상해 사람들이 개방적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직접 느껴보기는 처음이었다. 때는 바로 지난 세기 60 연대 초였지만 순자가 읽는 책을 보면 홍콩의 애정소설이 아니면 레브톨스토이의 “안나카레니나”, 이엘보이니치의 “등에” 그리고 시집으로는 부쉬킨의 “예프게니 오네킨” 등이었다. 
 
당시 길성이와 순자는 주로 일요일을 이용해 들놀이와 산책 등으로 데이트를 즐기군 했는데 순자는 일단 교정을 벗어나기만 하면 길순이와 팔을 끼군 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자주 길성이의 얼굴을 건드리며 깔깔 대기도 했으며 주위를 살피다가는 깜쪽같이 길성의 얼굴에 뽀뽀해주기도 했다. 그렇 때마다 길성이는 와들짝 놀라면서 얼굴이 달아 오르군 했으나 그렇다고 그 것이 싫지는 않았다.
 
길성이와 왕순자가 사귄지도 어느 덧 2 개 월이 넘었다.  그러던 어느 주말이 되자 순자는 일요일 날 상해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놀러 가자고 제의했다. 아버지인 왕정위가 길성이를 만나 보자고 한다는 거였다. 
 
순자의 제의에 길성이는 원간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이거 너무 이른 거 아니야?!”
 
“뭐가 이른가요. 남들 같으면 양가부모들의 만남(상견례)도 이뤄질 수도 있을 법한데요.”   
 
 “그래도…”  길성이는 뒤 말을 흐렸다.
 
솔직히 말해 그 시각 길성이는 자신이 순자 부모님들의 눈에 들지 못할까봐 두려웠다. 그 때까지 길성이 역시 혼사가 이뤄지자면 두 가정의 경제 및 사회적 지위 등이 엇비슷해야 된다고 부모님으로부터 많이 들어왔던 터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으나 길성이는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며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순자를 설득하여 이튿날의 행사를 미루게 하기로 맘 먹었다. 
 
헌데 이튿날 아침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노크소리가 나더니 왕순자가 숙소에 들어섰고 그 뒤로 웬 젊은 군인이 뒷따랐다. 
 
“아직도 기상하지 않았어요. 빨리 빨리 일어나 출발차비를 해요.”
 
순자의 뒤에 선 군인은 왕육생 정위의 운전사였다. 왕정위가 찦차까지 보내 오다니. 길성이는 차마 행사를 뒤로 미루자는 말을 입 밖에 내 번질 수가 없었다. 
 
그들이 차에 오르자 군용찦차는 부르릉 하고 시동이 걸리더니 앞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기사오빠, 이 남자가 어때요. 잘 생겼나요? 이 남자는 동북에서 온 조선족이래요.” 차안에서 순자는 쉴 새 없이 종알댔다. 그럴 때마다 운전사는 “예 아가씨”하며 순자한테 깎듯이 예의를 갖췄다. 
 
오전 10쯤 되자 길성이와 순자를 앉힌 찦차는 상해 경비사령부에서 멀지 않은 왕육생 정위네 집에 도착했다.  왕정위네 집은 중국 고대풍격이 독특한 단독주택이었다. 여러 개의 방이 딸려 있었고 그 때 세월에는 흔치 않은 수세식 단독 화장실도 있었다. 
 
길성이를 보자 순자의 어머니 왕부인은 유난히도 수다를 떨면서 이것 저것 묻는 것도 많았다.  한참 뒤 왕정위가 헛기침을 해서야 왕부인의 수다가 멈췄다. 

왕정위 역시 굵직한 여송연을 몇 모금 빨더니 천천히 길성이한테 이것 저것 묻기 시작했다. 길성이는 공손히 사실 그대로 대답을 올렸다. 일찍 3살 때 아버지의 지게에 앉아 두만강을 건너 간도땅에 정착하던 것부터 농민가정 출신이며 가정이 가난하다는 것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말씀 올렸다. 
 
나중에 왕정위는 “가정이 가난하다는 건 그닥 중요하지 않는 거지”하며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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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식사를 마치자 왕부인의 제의하에 모두가 시내쇼핑을 갔다. 상해거리를 돌면서 왕부인은 특별히 길성이가 입을 양복 한 세트와 흰 와이셔츠, 양말 등을 사는 것이었다. 길성이로서는 난생 처음으로 입어 보는 양복이었다. 그가 양복을 입고 거울 앞에 서자 자신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밤 왕정위네 내외 그리고 길성이와 순자는 상해 국제호텔의 무도장으로 갔다. 오색영롱한 네온싸인이 반짝이는 속에서 순자와 함께 탱고를 추는 길성이의 모습은 너무나도 멋졌다. 
 
남들이 부러운 눈길로 길성이와 순자가 춤추는 모습을 바라 볼 때마다 왕부인은 “내 딸이 사귀고 있는 조선족군인이래요” 하며 자랑했다. 
 
길성이와 순자의 사랑은 점점 무르익어 갔다. 따라서 길성이가 상해에 있는 왕육삼 정위네 집으로 가는 차 수도 많아졌다. 왕정위네 가정에서는 길성이가 갈 적마다 맛갈스런 음식을 식탁에 올렸고 그럴 때마다 순자는 제일 맛있는 요리를 집어서는 부친 먼저 길성의 입에 넣어 주군 했다. 그러면 왕정위 또한 “이 계집애야, 아버지보다 이 친구가 먼저냐”하며 악없는 농작을 걸기도 했다. 대단히 흡족한 기색이었다. 길성이는 경제적으로도 이 가정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 당시 길성이가 받는 수당은 인민페 6원이었다. 그래서 순자는 흔히 길성이와 농작을 걸 때면 “류쾌이챈(六块钱)”이라고 부를 때가 많았고 나중에는 아예 그 “류콰이챈”이 길성의 대 명사로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류콰이챈”인 길성이는 왕부인의 관심으로 양복 외에도 와이셔츠와 고급내복 등이 여러 벌씩 갖추었고 보고 싶은 책도 사볼 수 있었으며 부모님께 얼마씩 용돈도 부칠 수 있었다.
 
길성이와 순자의 사랑은 점점 무르익어 갔다. 따라서 길성이가 상해에 있는 왕육삼 정위네 집으로 가는 차 수도 많아졌다. 왕정위네 가정에서는 길성이가 갈 적마다 맛갈스런 음식을 식탁에 올렸고 그럴 때마다 순자는 제일 맛있는 요리를 집어서는 부친 먼저 길성의 입에 넣어 주군 했다. 그러면 왕정위 또한 “이 계집애야, 아버지보다 이 친구가 먼저냐”하며 악없는 농작을 걸기도 했다. 대단히 흡족한 기색이었다. 길성이는 경제적으로도 이 가정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 당시 길성이가 받는 수당은 인민페 6원이었다. 그래서 순자는 흔히 길성이와 농작을 걸 때면 “류쾌이챈(六块钱)”이라고 부를 때가 많았고 나중에는 아예 그 “류콰이챈”이 길성의 대 명사로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류콰이챈”인 길성이는 왕부인의 관심으로 양복 외에도 와이셔츠와 고급내복 등이 여러 벌씩 갖추었고 보고 싶은 책도 사볼 수 있었으며 부모님께 얼마씩 용돈도 부칠 수 있었다.
 
한편 길성이는 순자와의 관계를 부모님한테 털어놓을 때도 되였다고 생각, 오는 음력설 기간 순자를 데리고 집에 다녀 오겠노라고 연변일보사에서 근무하는 둘째 형님한테 편지를 쓰기도 했다.
 
바로 이럴 즈음 대만의 장개석군대가 “대륙수복”을 부르짖으면서 복건지구를 비롯한 대륙에 무장도발을 자주 감행했고 길성이가 공부하는 학교에도 변화가 생겼다. 갑자기 수업정지 통지문이 벽보란에 나붙더니 어느 날 밤 전체 사생들을 집합시켜 놓고는 과반수의 학원생들을 군용트럭에 실어 어디엔가 이동시키 것이었다. 그리고 그 며칠 뒤 또 이상과 같은 집합이 있더니 재차 적지 않은 학원생들이 떠나갔다. 이렇게 되자 길성이와 순자도 긴장했다. 순자의 부친 왕육삼 정위한테 여쭤 보았으나 그 역시 이 학교와 소속이 다른 지라 알리 만무했다.
 
그러자 여자인 순자는 매일 울리만 했다. 길성이는 순자는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순자, 울지 말어. 갈라져도 잠시 뿐일거야. 우리 서로 갈라져도 마음만은 절대 변치 말자구. 그리고 서로 연락도 하고 말이야.”
 
어느 날 그들 둘은 학교 뒤에 있는 공원으로 향했다. 둘이서 자주 만나던 아름드리 홰나무밑으로 다가간 그들은 나무에 “영원히 변치 말자”는 글자를 새기고는 앞으로 누가 먼저 이 곳으로 오면 자기의 이름을 새겨 놓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가 어느 야밤 삼경 학교에서는 제 3 차로 학원생들을 집합시켜 놓고는 명단을 불렀는데 그 중에는 길성이의 이름도 포함됐다. 
 
길순이가 떠날 때 순자가 울면서 매달린 건 자질구레하게 늘여 놓을 필요도 없다. 사달은 길성이가 우는 순자를 달래다 보니 그만 상해에 있는 순자네 집주소를 적지 못한 것이었다. 
 
길성이는 트럭에 오른 뒤에야 “아차!”하며 자기의 실수를 통탄했다. 그리고 “왜 미리 주소를 적어 두지 않았던고”하며 자신을 꾸짖었다. 
 
이 실수는 후에 오래도록 길순이의 가슴아픈 후회거리가 됐다. 
 
※                         ※                       ※
 
그날 밤 무석에 있는 해방군 문화학교를 출발한 길성이이네 일행은 곧추 북경으로 향했고 북경에 도착한 후에는 장평현에 있는 북경공정병학원의 신입생으로 됐다. 당시 중앙군위에서는 소수민족 학원생들만은 복건전선에 보내지 않고 북경공정병학원에서 공부할 수 있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북경공정병학원에서 공부하는 기간 길성이는 연속 2 년 간 천안문광장에서 모주석의 검열을 받는 영광을 지니기도 했다. 이 역시 중국 조선족으로는 사상 첫 사람이 아닌가 싶다. 
 
한편 북경에 있는 기간 길성이는 못내 순자를 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군사학원생이란 자유롭게 출장다닐 수도 없는 상황, 그러다가 1964년 이 학원을 졸업하고 심양군구에 배치 받아서야 출장기회가 생겨 상해에 있는 왕육생 정위네 집을 찾아 갔더니 집에는 이미 다른 가정이 살고 있었고 왕육생 정위는 이미 1선에서 물러나 행방이 묘연한 상황이었다. 
 
그 뒤 어느 해엔가 길성이가 심양역 광장에서 무석 해방군 문화학교 시절의 동창생을 만나 순자의 행적을 탐문했더니 그녀는 이미 결혼했으며 심양군구의 어느 한 군병원에서 군의관으로 사업하고 있다는 것과 활달하던 그제 날과는 달리 몹시 과묵해졌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길성이는 순자한테 큰 죄를 지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때는 자신과 순자 모두가 이미 결혼한 몸, 그제 날의 로맨스에 연연하기보다 서로 각 자의 가정에 충실하는 것이 명지한 선택일 뿐이었다. 
 
길성 선생은 오랫동안 이 일을 감추고 있다가 최근에야 부인과 자녀들한테 공개했다. 부인과 만나기 전의 일이기에 계속 감출 일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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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문학] 길성 선생과 그의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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