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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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엄마가  우리곁을  떠난지도  2년이란  시간이  거의  흐르지만  불효자식인  이 막내  아들은  이제야  천국가신  어머님께  이  편지를   올립니다.  어머니는  10남매중  맏딸로  태여나시고    아래로  줄줄이  태여난  아홉  동생들을  위해  그토록  가고싶은  학교도  못  다니시며  동생들  뒤바라지 하면서 고생하셨죠.  어머니는  한해 건너  태여나는  동생들  업어  키우면서도  잠시라도  쉴틈이  있으시면  그  시간을  리용하여  조선어 공부와  수학  공부를  자습했었다죠?  그토록  배움에 불타는  어머니의  모습에  감동된  외할아버지께서  어머니를  학교에  입학  시키셨다죠.  학교에  입학한어머니는  뛰여난  성적으로  전  학년에서   1등을  차지했었죠.
 
우수한  성적으로  상급학교  시험에  합격되였지만  소아마비인  어머니는  그  당시  장애자들은  상급학교에서  받지않는다는  리유로  아쉽고  쓸쓸한  마음으로  학업을  포기하고  남평진  방송소  방송원으로 취직하셨죠. 어머니는  남평에  조그마한  세집을  맡고  열심히  맡은바  사업을  하시면서  동생들  뒤바라지  하셨죠.  남의집  부모들은   자식들이  상급 학교에  붙지못해    한숨만 풀풀  쉬는데  원래부터  총명한  집안탓인지  엄마의  동생들은  시험을  치기만해도  척척  잘도  붙어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고민에  빠지셨습니다.
 
그때  화룡현  고중에  다니던  큰외삼촌이  배고픔에  못이겨 다  헤진옷과 거의다  째진신을  신고  화룡으로부터  도보로  걸어서  남평의  엄마집으로  오자  너무나도  초라한  동생을  보신  어머니는  우선  큰삼촌을  배불리  먹여놓고  아껴  저축해  두었던  얼마안되는  로임과  그시기엔  젤로  값비싸고  고급 외투라는  니즈옷을  팔아  삼촌의  웃옷과  아래옷,  그리고  신까지  사  신겨놓고  멋지게  때벗이한  큰삼촌을  보시고  "어......내  큰동생 원래부터 이렇게  멋지나?"  하시면서  농담까지  하셨다면서요?  그시절  배고픔에  못이긴   삼촌들과  이모들은  방학만  되면  적은  로임타면서  사업하는  엄마한테  그래도 월급쟁이라고  자그마한  집에  오구작작  모여들면  어머니는  의젓하고도  이쁘게  성장해가는  삼촌들과  이모들를   위해  날마다  개학때까지  한가마의  이밥과    두부를  앗아서  방학동안  만포식  시키셨답니다. 
 
고난의  대약진 시기가  오자  어머니는  그  시대의  승진으로  인한  야망으로  하여  백성들을  못살게  굴며  늑대  잡았다면  호랑이  잡았다고 몇갑절  부풀려   방송  하라는  공사  간부들의  핍박에  못이겨  단연히  정든  일터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촌  부녀주임  사업을  맡아하시다가  부지런하고  마음착한  우리  아버지를    만나서  결혼하고  다  찌그러져가는  오막살이  집에서  우리  4남매를낳아  키우면서  낮이면  어린시절  동생들을  위해  배워두었던  재봉기술로  온동네사람들의  옷을  도맡아싶이  재봉틀에  앉아  하시고  밤이면  새끼꼬는  기계로  아픈다리  통증을  참아가면서  열심이  돈을  벌어  우리를  키우셨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엄마를  조롱하듯 그토록  건강하시던  아버지가  생산대  목재  나르는  트랙터에  나무운반하다  그만  까막골  고개에서  차가  넘어지는  바람에  적재함의  나무우에  타셨던  아버지는 목재통에 머리깔려 나어린  우리  4남매를  남겨두고  44세의  젊은  나이로  너무나도  일찍히  이세상을  떠나셨죠.
 
청천벽력같은  이소식에  어머니는  너무도  놀라  심장마비로  까무러  치셨다가 아버지를  잃고  슬피 우는 나어린  우리  4남매.를  바라보시고  비장한  각오로,  가냘픈  여자의  혼자몸으로  우리  4남매의  공부뒤바라지를  하느라  낮에는  소아마비의  지친  다리를  이끌면서  도거리맡은  수전과  한전을  다루시고  형님  누나들  공부뒤바라지  위하여  돼지치기와  닭치기도  하셨고  밤에는   새끼꼬는  기계와  재봉침과    씨름하며   우리들을    키우셨습니다. 
 
어머니,  지금도  생각납니다.  소학교시절  그때  전  학교  학생들  모두  줄뛰기줄을  갗췄는데  유독  누나만이  사지못했던일을,   줄뛰기  시합하는날,  줄뛰기  사달라고  칭얼거리는 누나에게  자신이  꼬던  새끼줄을  썩뚝  끊어  주시던  일을,  누나는  그때  그  새끼줄로 300여개를 뛰고  전교  일등을  했엇죠.   더뛸수도  있는것을  새끼줄이  닳아  끊어지는  바람에....  끊어만  안졌었다면  더 뛸수도  있었겠죠.
 
누나의  그때  그  말에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형님  누나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제가소학교에  다니게되자  늘어만  가는  학잡비 때문에  어머니는  로과  두메산골로부터  머나먼  심양과  길림을  오가면서  장애자의  몸으로  보따리  장사,  약장사와  명태장사  하시면서  우리  뒤바라지  해주시며  열차칸에서 단돈 5전씩하는  얼음과자도  아까워  안사드셨죠?  그리고  뇌성마비로  태여난  저에게  항상  생활에관한  신심과  용기를 주시고  형님이  학교  필업하고  은행에  안배  받으니  화룡시가지에다 조그마한  상점도  꾸려  주시고  또  음악을  좋아하는  저에게  아글타글  모아두었던  주머니돈을  털어  전자풍금도  사주어  저더러  작곡의  길에  들어서게  하셨죠?
 
누나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붙게되자  엄마는  누나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조선의  마른명태를  넘겨받아 심양시  해청시장에  갖다팔고  올때에는  옷을  되넘겨  가지고  화룡에다  팔아서  겨우  돈 마련하셨죠.  다른집에서는  자식들  대학에  붙었다면  새이불이요  새옷이요  하면서  요구되는건  다  사주지만  일찍  헴이든  누나는  원래  덮던  이불과 입던   옷을  깨끗이  빨고  헤진  옷과  양말은  저절로  바느실로  한뜸한뜸  깁는것을  보고  엄마는 누나몰래  돌아서서  눈물을  흘리셨죠. 
 
어머니는  가냘픈  여자의  몸으로  억센  남정들도  감히  엄두도  못내는  곰사양도  하셨고 .두부장사.  고기  장사도  하시면서  우리  형제들을  시집장가  보내시고  아파트까지  마련해  주셨습니다. 어쩌다  제작품이  당선되면  어머니는  동네방네   다니면서  이  못난  막내자랑도  하셨고   또  제가  장가  가서  두자식을  보게되자   고목에  핀  꽃이라면서  유난히   형님누나들의  자식보다도  제 자식들을  특별히  귀여워하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어느 생일집이나  군일집에  가셨다가도  맛좋은  음식들이  생기면  포장해  와서는  "네  형들은  단위  행사때나  동료들과의  회식에서 이런  고급  료리는  흔하게  먹어보지만  무직업인  너희들부부  어디가서  먹어  보겠니?  그래서  내가  이런거  생기면  너희들  줄려고  가져오는거란다."  라고  하시면서    보잘것없는  이  막내자식을  형들보다  몇갑절  더  사랑해  주시고  관심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고생하시면서  아들딸들  효성과  손자손녀들을  다 키워놓고 한창   복받을  나이에   어머니는  그만   암이란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어머니는  그  힘든  수술과  항암  치료를  받으시면서도  항상  불구자로  태여나게한  저에게  미안하다  하시면서  형님누나들  엄마  보러  올때면  항상  이 못난  막내를  잘  돌보라고  부탁하셨죠.
 
어머니.  그  아프신  몸으로  식사때면   어머니  드시라고  마련한  색다른  료리들을  절로 짚어서  제  밥공기에 친히  담아주시고   제가  안해에게  주눅들가봐  애  엄마를  조용히불러  앞으로  내가  없어도  우리  부부  두자식  거느리고 앞으로  들이닥칠 어떠한  난관도  꿋꿋이 이겨내며  잘  살아라고  신신당부  하시던일.
 
어머니는  1년 4개월   병마와  싸우다가  끝내  효험을  보지못하시고  2012년  5월 4일  한많은  이  세상을  하직하셨습니다.

어머니  유물을  정리하던날  침대밑에  몰래  치워두웠던  돈봉투를   꺼내보고  우리는 또   목메여오는  설음을  참지못하고  소리내여  천국가신  어머니를  부르며   통곡하였습니다.  세상떠나는  날까지도  이  못난  막내아들  위해  단돈  몇푼이라도  아껴  저에게  주려한   바보같지만 이세상  어느  어머니와도  비할수  없는  위대한  어머니.  양봉업을  하시다  벌떼들  습격을  받아  인사불성이  되셨던  어머니.  도거리  맡은  논밭에  농약을  치다가  농약  중독에  걸려  논밭에  까무러치셨던  불쌍한  우리   어머니.  과도의  피로와   간경화로  쓰러지셨다가도  자신이  쓰러지면  우리  네자식  굶주리고  공부못한다며  억센  의지로,오또기  정신으로   꿋꿋이 다시   일어나셨던   불쌍한  내  엄마.  한마디로  어머니는  구쏘련의 청년영웅  빠웰와도  더  강한분이시며  일본의  오신보다도  더  지혜롭고  총명한분이시고    중국의  장해적보다도  더  억세고  담대한  분이십니다.
 
어린  시절    그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아버지  없는  우리  형제들이 같은  또래의  친구들에게  주눅들가봐   밤낮으로   고된일에  지친  피곤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천사와도  같이  환한  미소  지으시며  우리를  대하시던  자애로운 우리    엄마, 남의집  부모들은  고생끝에  락을  보지만    한평생  이  못난 막내 자식위해 그토록 고생하시다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 어머니는  분명  천국에서  오늘도  우리를  굽어  보시겠죠?
 
정말로  진정  천국이라는  나라가  있다면  이땅에서  누리지  못한  락을  영원한  그곳에서  영생복락  누리시길  바라면서 오늘도 다시  돌아오지  못할 어머니를   그리면서  나훈아의  홍시를  목메여   불러봅니다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엄마가  생각이  난다
자장가대신  젖가슴을  내주던  울엄마가  생각이난다
눈이오면  눈맞을세라  비가 오면  비젖을세라
험한세상  넘어질세라  사랑땜에  울먹일세라.
그리워진다  홍시가  열리면  울엄마가  그리워진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겠다던  울엄마가  그리워진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찡하는  울엄마가  그리워진다.
 
어머니.  다음  생애란것이  있을가요?  정말  있다면  저는  다시  한번, 이번엔  엄마의  건강한  아들로  태여나서  이세상에서  하지  못했던  효도  실컷  하면서  어머니와함께    살고  싶습니다 <장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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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추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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