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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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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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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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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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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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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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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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잡문] 세상살이와 취미생활
    ■ 연변 리포터 김철균 불현듯 “조물주”가 참 위대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우리 인간을 놓고 보더라도 머리 하나에 눈, 귀, 코구멍이 각각 둘 씩이고 몸뚱아리에도 손 둘, 발 둘 등으로 대칭되니 얼마나 기묘한가?! 또한 인간 몸뚱아리의 둘 씩 있는 이 물건은 이렇게 서로 대칭되면서도 “상부상조”한다. 예하면 바줄을 당길 때 두 손은 엇바꿔 바줄을 쥐며 힘을 가하고 길을 걸을 때 두발 또한 엇바꿔 내디디면서 앞으로 전진하며 두 귀와 두 눈 역시 각각 오른 쪽 혹은 왼 쪽의 사물과 소리를 분별하며 보고 듣고 하기도 한다. 그럼 세상만물이 처음부터 이렇게 됐을까? 아니라는 생각이다. 생존을 위해 진화되면서 인간의 오늘도 이렇게 된것이라 점치게 된다. 그럼 우리의 옛조상 할아버지들인 유인원이 오늘의 인류로 되기까지는 수천수만갈래의 진화를 거쳤을 것이며 현재의 우리의 삶 역시 계속되는 진화속에 있을 것이 아닐까? 가령 그것이 맞다면 현재 우리가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것이나 또 다른 삶의 형태인 취미 - 즉 요즘의 유행어로 말한다면 레저생활도 진화과정의 일종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하다면 나 역시 뭇인간들처럼 무수한 진화속에서 오늘의 내가 “창조”됐다고 터놓고 싶어진다. 지난 세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비록 형수님의 슬하에서 자랐지만 별로 생활적 압력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 헌데 내가 뭐 다혈질인지는 몰라도 취미가 좀 다각적인 것 같았다. 뭐든지 하고 싶으면 하는 성질이었다. 동관악기인 트롬베트를 전공해 음악가로 되고 싶었고 미술을 전공해 멋진 화가로도 되고 싶었다. 또한 사내애면서도 부뚜막일에 각별히 집착했던 모양이던지 형수님이 뭘하면 그 모양새를 따느라고 무척이도 신경을 썼다. 한번은 형수님이 계란에 부추를 섞어 볶았는데 나도 그대로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어느날 형님과 형수님이 퇴근하기 전에 일찌감치 계란을 먼저 볶아내고는 부추를 함께 넣었다. 헌데 암만 봐도 물이 적은것 같아 물을 좀 넣었더니 글쎄 부추란 야채에서 물이 나오면서 계란부추요리인 것이 아니라 계란부추국이 돼버렸다… 내가 이렇게 부지런하다고 하면 남들은 혹간 공부도 잘했으리라 여길 것이다. 허나 천만에다. 한번은 화학시험을 57점을 맞아 형한테 야단맞은 적도 있었으니 어느 정도인 것을 알 것이다. 또 있다. 사내로서 밖에서 뛰여다니고 망치를 쥐고 뚝딱거리며 못이나 박는 일은 죽도록 질색이었다. 그러니 취미가 다 방면이란 것도 새빨간 거짓말로 되고 있다. 그건 그렇고 한편 내가 공부는 하지 않고 엉뚱한 곳에 자꾸 신경을 쓰니 형님은 “누가 네가 해주는 음식을 먹자고 하던?”라고 하며 공부만 하라고 강요해댔다. 헌데 들을 놈이 들어줘야지 형님도 용빼는 수가 없었다. 나중엔 형님도 “어쩔수 없어 지금이 어디 공부를 하는 세월이라구. 공부를 잘해도 대학에 못가겠는데 뭐” 하면서 포기했다. 그러니 난 제딴에는 형님이 나의 취미를 인정해 주는 줄 알고 더욱 외딴 일에 열을 올렸다. 그림을 그릴라치면 밤이 새도록 도화지를 펴놓고 이른바 “초상화”를 그린다 했고 트럼베트를 불라치면 윗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도록, 동네방네서 귀를 막고다니도록 불어댔으며, 또한 영화(당시는 TV가 없었음)에서 식당요리사들이 채써는 걸 보고서는 그대로 잽싸게 칼질을 해대느라 흉내내다가 칼에 손을 벤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긴 지금은 딱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당시 나한테도 이른바 이상과 개성이란 것이 있는 것 같았다. “남들이 다 하는걸 하면 성공하기 어렵다”, “악사나 화가는 멋지고 요리사는 잘 먹을 수 있다” 등등으로 말이다. 헌데 나는 그중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하고 오늘날 요꼴, 요모양이 됐다. 후회되는가? 그런 것도 없다. 오히려 취미가 여러 종이 되니 써먹을 곳이 많아 좋기만 하다. 예하면 내가 소고기 꽃등심으로 불고기를 하거나 생신한 꽃게를 갖고 무침을 해서 남들한테 선보였을 때 그들이 맛있게 먹어주면 그 이상 즐거운 일이 없었다. 또한 어린 딸애한테 가요 “아리랑”, “고향의 봄” 등을 오선보로 일필휘지해줬더니 딸애가 눈이 동그래졌으며 딸애학교에서 부모와 함께 제작하라는 소제작작품을 만들 때, 그제날 내가 타던 선박 “코리안스타”호를 모양내서 만들어 줬더니 뭐 주급이란던지 국가급이라던지 하는 상도 탔단다. 그외 현재 내가 기자이니 딸애의 작문지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한바탕 제자랑을 늘여놓았더니 어쩐지 좀 게면쩍기도 하다. 평생 반장 한번 해보지 못한 놈이 자랑은 무슨 개떡같은 자랑인가! 하지만 사람마다 다 있는 것이 아닌 이런 “재간”이 있으니 큰 전문가는 되지 못해도 밑바닥 인생으로 살아 가기에는 이전엔 별로 거침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또 이한 모든 것도 내가 처음부터 알고 있은 것이 아니라 이른바 노력하는 “진화속”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그렇다. 취미로 익히고, 살아가기 위해 배우고, 또 자랑하기 위해 숙련시키고 말이다. 화제는 다시 서두로 돌아간다. 내가 이렇게 저렇게 몇가지 취미가 있다면 어떤 어르신들은 참 별난 취미생활이 있는 것 같다. “조물주”가 만들어준 건강하고 영활한 몸뚱아리와 총명한 영혼을 별로 좋은 일에 쓰는 것 같지를 않고 있다. 국녹을 타먹는 이가 절로 인생을 개척하는이를 보고 무능하다고 비웃는가 하면 남을 헐뜯는데도 재간이 가지각색이다. 남이 일을 잘하면 그 사람을 라이벌로 여기면서 헐뜯고, 남한테 좀 불행이라도 생기면 잘코사니를 부르며, 심지어 남의 아내의 발이 큰 것마저 그런 사람한테는 커다란 “이슈”가 돼버린다. 왜 그렇게 살까? 한편 어떤 사람들은 남을 위해 사는 “재간”은 별로 없고, 자아업무에도 게으르고, 제로(령)이지만 엉뚱한 두뇌는 아주 발달된 것 같다. 사회기반을 만들고 울타리를 두르고 지도자한테 질러주고 여하튼 사교술은 “외교부 장관”의 버금으로 간다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참 이상한 취미, 과연 언제까지 그렇게 살런고? 한편 그런 사람들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 “강한 사람은 질투를 하지 않는다. 질투하는 사람을 보면 꼭 어딘가 부족하거나 약한 곳이 있다”고 했다. 일리가 있다. 살아야 하니까, 그렇게라도 살아야 하니까, 심리평형이라도 잡아야 하니까 말이다. 인류사회란 모순과 갈등, 사람 사이의 같지 않은 취미에 따라 각종 질투와 오기가 있기 마련이다. 중국이 그런가 하면 외국도 그렇고, 남자가 그런가 하면 여자도 그러하다. 다만 우리가 사는 이 지역사회가 좀 더 심하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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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4
  • [단편소설] 전쟁과 칠성영감의 여인들
    □ 김철균 올해 85세인 칠성영감이 오랜 투병생활 끝에 며칠 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임종전 칠성영감의 부탁으로 안노인은 한국에서 사는 한 80대(87세)의 안노인과 60대 초반의 한 남성을 초청했다. 임종을 앞두고 칠성영감은 손을 내밀어 한국에서 온 여인 윤씨와 마지막까지 자신의 곁을 지켜준 마누라 오씨의 손을 동시에 잡아 주었다. “한국에서까지 와준…임자가 고맙수. …임자한테 미안하구려. 그리고… 여보 피붙이 한명 없이 … 마지막까지 나를 거들어 주어 고맙수. 당신…한테… 당신한테 더욱 미안하구려…” 그러고는 다시 한국에서 온 60대 장정 박씨의 손을 잡고 마지막 부탁을 했다. “두… 어머니의 남은 …인생을 너한테…너한테 맡긴다. …애비로서 부끄럽다만…” …… 1 칠성영감이 태여난 곳은 조선 전라도 남원지방의 어느 한 시골이었다. 당시 일제시대라 여느 가정이라고 살림이 넉넉할리 만무했지만 칠성이네 가정은 더욱 가난했다. 때문에 칠성이는 17살 되도록 장가갈 엄두도 못냈다. 한살 아래인 여동생 봉녀(애명)가 머리얹을 나이가 됐건만 칠성이 때문에 매파가 문턱이 닳도록 찾아와도 그냥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밤, 마을동쪽 홰나무아래에서 모기불을 피워놓고 한담하던 중 문득 칠성이의 송아지친구인 석동이가 기발한 착상을 내 놨다. “칠성아, 우리 이러다간 평생 총각딱지 뗄 수 없능기라. 우리 이러믄(이러면) 아주 멋질 것 같응기라. 니와 방아칸집 금돌이 그리구 나 모두 누이들이 있으니 서로 엇바꿔 누이들한테 장가들면 어떠항기라. 허긴 금돌이한테는 두살 많은 누이라지만…헤헤헤.” 석동이의 뜻인즉 칠성이가 금돌의 누나 윤삼월한테 장가들고 석동이가 칠성의 여동생 박봉녀한테 장가들고 금돌이 또한 석동의 여동생인 함인애한테 장가든다는 이른바 “누이바꿈”이었다. 칠성이로 말하면 서운했지만 아주 그럴듯 했다. 부모님한테 엿주었더니 부모님 역시 칠성의 생각과 같았다. … 약 한달 뒤 이들 세 친구는 같은 날에 혼례식을 올렸다. 그날 밤 사랑채에 신혼방을 차려놓고 한방에 든 칠성이네 내외간- “나이 두살이나 더 먹구 서방님 모시기가 부끄럽구만이라.” “아니 나야 뭐 좋기만 한디. 없는 집안에 들어온 임자가 고맙기만 항기라.” …… 이는 백연해로를 약속한 이들 부부의 첫 대화였다. 한편 체통이 우람지고 얼굴까지 준수한 칠성에 비해 삼월이는 나이 두살 더 많은데다 그 때 벌써 눈언저리에 잔주름이 가기 시작한 것이 흠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칠성이한테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가난한 팔자에 장가를 든 것만 해도 기쁘기만 했다. 가난속에서도 그들의 신혼생활은 달콤했다. 하지만 이런 생활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칠성를 비롯한 동네 젊은이들이 학도병에 끌려가게 됐던 것이다. … 마모루모 세무루모 꾸로가네노 우까베루 시로조따노 미나루 (싸움도 지킴도 떠오르는 강철성의 힘이요) 독우까베루 소노 시로 히노모또노 미꾸니노 요모오 마모루베시 (떠오르는 그 성의 힘으로 태양의 근본 황국의 사방 지킬 것이리) … 일본군가(일명: 군함행진곡)가 주악되는 가운데 경성역(지금의 서울역)은 일장기로 숲을 이루었고 반자이(만세)소리가 역광장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아들이나 남편을 전선으로 내보내는 조선인 어머니와 안해들은 땅을 치며 통곡했다. 기적소리가 길게 울리자 칠성이네를 앉힌 군용열차는 서서히 플래트홈을 빠져 나갔다. “서방님, 와 나 빈몸으로 남겨두구 떠나는깅라? 부디 살아서 돌아오랑께…” 그 때까지 삼월이한테는 태기가 없었다. 2 조선인학도병을 실은 군용열차는 10여일 가량 달리다가 지나땅(중국)의 광주에 도착했다. 거기서 칠성이네는 다시 군함에 올라 남쪽으로 향했다. 며칠 뒤 군함이 입항한 곳은 버마(지금의 먄마)의 어느 작은 항구였다. 조선인학도병들은 인차 진지에 배치되었다. 그들의 임무는 인도, 방글라데쉬와 버마 삼각지대에 진지를 구축하고 동맹군의 상육을 저지시키는 것이었다. 칠성이네가 포진한 후 며칠 안되어 과연 동맹군의 폭격기편대가 하늘을 뒤덮더니 융단식 폭격을 퍼부었다. 군막사가 날아나고 아름드리 나무가 뿌리채로 뽑히면서 폭격은 기승을 부렸다. 일본군 스츠키 이치로 중대장이 인솔하는 일본군은 며칠동안 지속되는 동맹군의 폭격에 30% 이상이 저승사자가 됐다. 그리고 보급로가 끊어진데다 창고가 폭격에 불타면서 식양도 바닥났다. 이어 동맹군 함정들의 무차별한 함포사격이 4시간 동안 지속되던 끝에 드디어 동맹군의 상육이 개시됐다. 동맹군의 전술은 대량의 물양공세로 일본군 진지를 초토화시킨 뒤에야 상육하는 것이었다. “진지를 사수하라. 육탄으로 미군을 막으라. 나중엔 옥쇄까지 각오하라.” 스츠키 중대장이 악에 받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지만 일본군 진지가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칠성이는 난생 처음 전쟁을 경험하는지라 무서웠다. 아니 무섭다기보다는 일본군을 위해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동맹군이 진지에 오르기 시작하자, 부분적 사병들만 날창을 꼬나들고 결사적으로 저항할 뿐 조선인 학도병들을 비롯한 대부분은 총을 버리고 줄행랑을 놓았다. “사수하라, 육탄으로 막으라. 도망하면 즉결처분이다.” 아니나다를가 스츠키 중대장은 도망치는 사병들을 쏘아 죽이었다. 하지만 도망치는 사병들의 무리는 계속 이어졌다. 신변에 사병 한명도 없게 되자 스츠키 중대장은 탄약 한알이 남은 권총으로 자신의 정수리를 겨누었다… 도주병들이 진지를 떠나 다른 정글속에 들어서자 동행한 사병은 겨우 6병뿐이었다. 나머지는 살상됐거나 실종된 것이 분명했다. “지나땅으로 간다. 그곳은 우리 황군의 대후방이다. 황군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 지나땅에서 재정비해 다시 출격한다.” 6명뿐인 패잔병은 일본군 상등병 다즈치가 인솔했다. 말이 인솔이지 누구도 다즈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 지치고 허기지고 까딱할 기운도 없었지만 모두가 기계적으로 걷고 있을뿐이었다. 북상 3일째 되여 선후로 일행중 2명이 졸도해 죽자 다즈치가 허리춤에서 단도를 빼들더니 시체의 엉덩이살을 베여내서는 불에 굽는 것이었다. “야 이놈 조센징, 너 이걸 먹어라. 먹어야 산다. 네가 죽으면 나 너의 살점도 먹을 수 있어.” … 아무리 굶었다고 어떻게 사람의 고기를 먹을 수 있담?! 칠성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즈치를 쳐다 보는 것만도 무서웠다. 죽어가는 자가 계속됐다. 며칠 지나 또 2명이 죽자 칠성이는 더는 지켜볼 수가 없었다. 인육으로 배를 채운 다즈치보다 굶은 자기가 먼저 죽는다는 건 불보듯 뻔했다. 칠성이는 죽은 자의 고기를 굽고 있는 다즈치한테 덮쳐 들어서는 단도로 그의 목부위를 향해 죽어라고 찍어댔다. 다즈치의 목에서 선지피가 비린내를 풍기며 콸콸 쏟아졌다. 이윽하여 다즈치는 온몸을 몇번 떨더니 인차 축 늘어졌다. 칠성이는 단도를 땅에 꽂으며 주저 앉았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은 칠성이는 단도로 땅을 파서는 다즈치와 기타 2명의 사병을 묻어 주었다. 마지 못해 다즈치를 죽인 칠성이었지만 그는 죽은 자를 묻어 주었다. 이는 다즈치에 대한 그의 마지막 예의였다. … 그 뒤 칠성이는 산열매로 요기하고 뱀도 잡아먹으면서 그저 기계적으로 걷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작은 골짜기를 벗어나자 앞이 탁 트인 개활지가 나타났다. 작은 논과 몇 채의 인가도 보였다. 순간 칠성이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 3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타고 서울 가면서 / 비단구도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 이 노래는 어릴 때 삼월이가 즐겨 부르던 동요였다. 헌데 크면서 부르지 않던 이 노래를 삼월이는 다시 부르게 되었다. 분명 칠성이가 사무치게 그리워서였다. 그러다가도 삼월이는 자기보다 두살 어린 서방을 두고 “우리 오빠 말타고”란 대목을 부를 때면 몰래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그날 따라 아침부터 날씨가 화창하더니 돌배나무위에 앉은 까치가“깍깍”하고 울어댔다. (오늘은 웬 기쁜 일이 있다구 까치마저 울어대능기라?…) 아니나다를가 점심무렵 자전거 방울소리가 나더니 배달부가 사립문가에 나타났다. 분명 기쁜 소식인 것 같았다. 삼월이는 재차 “우리 오빠 말타고”를 흥얼거리며 배달부를 반겼다. 배달부는 정색해하며 전보 한통을 내밀었다. 이에 삼월이는 전보문을 받다 말고 배달부를 쳐다보았다. 글 읽을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읽어줄 것 없능기라. 댁에 학도병에 간 사람 있수? 버마전선에서 전사했다는 전보문잉기라.” 배달부는 투명스레 내뱉고는 휑하니 자리를 떴다. 순간 삼월이는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것 같더니 앞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 칠성이의 “장례”를 치른 이튿날 시가어른인 박씨영감은 삼월이를 앉혀놓고 무거운 입을 열었다. “너한테는 참 안됐다만 널 보면 내 맘이 더욱 심난항기라. 칠성이는 박씨네 하나밖에 없는 대들보 아들이라. 아들없는 집에 며느리를 그냥 둘 수 없능기라. 그렇다고 서방의 씨를 받은 것두 아니구…” 박씨영감은 뒤 말을 잇지 않았으나 삼월이는 어른의 뜻을 알만 했다. 삼월이는 그날로 시가를 나왔다. 시어머니가 며칠만 있으며 마음을 가라앉인 다음 떠나라고 만류하는 것도 마다했다. 그렇다고 어디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말그대로 그냥 살고 싶지를 아니했다. 삼월이는 그 길로 동구밖의 늪으로 향했다. 늪가에 이른 그녀는 하늘에 향해 간단히 용서를 빌고는 치마를 뒤집어 쓴채 늪에 뛰어 들었다. 그러나 삼월이는 죽을 팔자가 아니었다. 얼마 후 삼월이가 눈을 뜨니 자신은 중국인 외토리인 장서방네 참외밭 오두막에 누워 있었다. “왜 날 살렸수?!…그냥 내버려 둘거지 왜 살렸느냐 말잉기라.” “이렇게 좋은 임자를 어떻게 죽게 나눈다 했소! 히히… 이 새뽀얀 살결 좀 보라 했소. 나 처음 임자같은 여자의 속살 봤다 했소.” 당시 삼월은 요해 부분만 제외하고는 온 몸이 발가 벗기운채로였다. 장서방이 그 녀의 옷을 벗긴 후 해볕에 말리고 있었던 것이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한 삼월이는 에라 모르겠다 하며 장서방한테 운명을 맡겨 버렸다. 그런데 장서방과의 운우지정도 오래 나누지 못했다. 손가락 까딱하지 못하도록 삼월이를 아끼고 고와하던 장서방마저 얼마 뒤 온역으로 하루 아침 새에 덜컥 죽어버렸던 것이다. 삼월이는 더는 고향에서 살 수 없었다. 동네사람들은 남자 둘이나 꺾어 먹은 여자라고 등을 돌렸고 친정집 부모님조차 가문의 망신을 시킨 딸을 용납할 수 없다며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녀는 받아주지 않는 친정집을 향해 절을 한 후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고향을 떠났다. 그렇다고 전번처럼 죽고 싶은 마음은 꼬물만큼도 없었다. 4 한편 바로 그럴 즈음 칠성이는 중국 - 버마국경의 중국측 어느 시골의 한 중국인농가의 온돌 위에 누워 있었다. 며칠전 국경을 넘은 뒤 쓰러진 칠성이는 중국인 곽씨여인에 의해 기적적으로 구원되었다. 당시 곽씨여인이 칠성이를 업고 집에 들어서자 그녀의 부친은 “쑈르번(小日本ㅡ일본쪽바리의 뜻)”을 집에 들인다고 호통치다가 “물”하고 입을 여는 칠성의 말을 듣고서야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중의인 곽노인은 칠성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일본말이 아니란 정도는 일고 있었다. “쩌머양, 호이댄러마?(어때요, 좀 나아졌어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칠성이는 곽씨여인의 말이 몹시 관심어린 어조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칠성에 대한 곽씨여인의 정성은 지극했다. 그녀는 미음을 끓여주기도 하고 계란을 삶아주기도 했으며 부친이 처방해주면 산에 올라 약초를 캐서는 직접 닳여 칠성이한테 대접하기도 했다. 칠성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춰섰다. 바깥출입을 할 수 있게 되자 칠성이는 바람을 쏘일 겸 산기슭이나 호수가를 산책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곽씨여인은 함께 동행해 주군 했다. 둘은 언어가 통하지 않았으나 손시늉으로 얼마든지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칠성이가 낚시를 하다가 대어 한 마리를 잡아올리자 곽씨여인은 탄성을 지르며 칠성의 목에 매달리더니 키스세례를 퍼붓는 것이었다. 둘은 대뜸 한덩이로 됐다. 아무리 목석같은 칠성이었지만 그 역시 젊었으며 여자를 아는 남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곽씨여인과 매번 “사고”를 치고 나면 뇌리에는 또 한명의 여인 삼월이가 떠올랐다. 아무리 살갑고 어여쁜 곽씨라지만 칠성이를 놓고 볼 때 중국인 여성인 그녀와 함께 고향에 나타날 자신이 없었고 삼월이를 쫓아내고 곽씨여인을 안방에 들일 용기는 더욱 없었다. 칠성이는 몇번이고 속심말을 그녀한테 털어 놓으려다가 그만 두었다. 자신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한테 차마 떠나겠다고 할 수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도망치는 것이었다. 어느날 밤 칠성이는 자기의 팔을 베고 달콤하게 자는 곽씨여인의 목에서 팔을 살며시 빼내고는 살금살금 문을 나섰다. 심한 자아모순속에 빠지면서 말이다. 5 그 몇년 뒤 칠성이는 조선인민군 군관이 되어 38선 부근에 나타났다. 칠성이로 말하면 자신의 뜻과는 다른 운명의 계속이었다. 몇년전 중국 광서에서 곽씨의 집을 도망쳐 나온 뒤 칠성이는 조선을 바라고 발길을 다그쳤으나 얼마 가지 못하고 국민당군에 붙잡혀 다시 군복을 입었고 항일전쟁이 승리함과 동시에 중원지구로 진출했으며 공산당이 인솔하는 팔로군과 총부리를 마주하게 됐다. 이어 국민당군이 팔로군(후엔 해방군)한테 수세에 몰리면서 칠성이는 팔로군한테 포로됐고 그 다음엔 전향해 해방군으로 됐다. 그렇게 남정북전을 하다가 1949년 4월 해방군에서 근무하는 기타 조선인 군인들과 함께 조선으로 나갔으며, 그 소속사단은 인민군주력으로 됐다. 1950년 6월 25일 새벽4시, 고요하던 38선 상공에 신호탄이 연속 솟아 올랐고 대포소리, 탱크 무한궤도의 굉음으로 복새판을 이루었다. 가슴에 끓는 피를 조국에 바치니/ 영예로운 별빛이 머리위에 빛난다// 나가자 인민군대 용감한 전사들아… 장비와 수적으로 우세인 인민군앞에서 한국군은 전투다운 전투 한번 치르지 못한 채 연이어 무너졌고 전쟁개시 3일만에 수도 서울이 인민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서울에 진출한 칠성이는 이제 오래잖으면 고향에 가서 부모님과 그립던 삼월이도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러던 칠성이는 너무도 생각 밖으로 서울시청 광장에서 삼월이를 만나게 됐다. 당시 삼월이는 어느 한 찻집의 레지로 생활하고 있었다. “해방된 남조선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할데 관한 법령”을 반포하는 모임에 참가했다가 칠성이를 만난 삼월이는 꿈이냐 생시냐 하고 믿지 못하는 모습이었고 칠성이 역시 서울에서 생활하는 삼월이를 보고 크게 놀랐다. 삼월이는 무작정 자기의 숙소로 칠성이를 끌었다. 칠성이 또한 군규율을 망각한 채 삼월이가 이끄는대로 몸을 맡겼다. 이튿날 칠성이가 부대로 귀속되자 마자 사단은 남쪽을 바라고 진격을 개시했다. 당시 인민군은 “진주, 전주, 광주로ㅡ 대전, 대구, 부산으로”란 슬로건을 내걸고 파죽지세로 남진했다. 서울을 떠나던 날, 칠성이는 삼월이의 손을 잡고 “이제 남조선 전체가 해방되면 임자와 함께 고향인 남원으로 내려가 아들 딸 낳으며 살련다”고 약속을 했다. 하지만 약속은 어디까지나 약속이였지 실천은 아니었다. 그해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육과 더부러 낙동강까지 진격했던 인민군은 포위되어 양쪽협공을 받는 수세에 몰렸으며 부득불 전반 전선에 거쳐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칠성이가 소속된 부대 역시 북을 향했으나 서울을 거치지 않고 원주 쪽으로 38선을 넘었다. 그 뒤 중국인민지원군의 입조참전으로 1951년 1월초 중조군대가 다시 서울을 재점령했으나 칠성이가 찾는 삼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 ※ 인생만년에 들어 칠성영감은 윤삼월여인과의 세번째의 상봉을 하게 됐다. 1992년 중한수교가 되면서 칠성영감은 고향인 한국의 남원을 다시 찾게 되었고 수소문끝에 윤삼월이 여전히 서울에서 살고 있으며 40대 초반의 아들과 함께 생활하고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40대의 아들, 그렇다면 6.25 당시 서울에서의 만남과 맞아 떨어졌다. 그때로부터 칠성영감은 과묵해졌다. 필경 자신의 피붙이는 있었으나 윤씨와의 재결합은 말도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에서 돌아온 칠성이는 민정부문에서 중매해준 여인 즉 지금의 오씨여인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장시기의 군인생활에서 여러 차례 부상을 당한 그가 생육능력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칠성이는 이 역시 자기의 운명이라고 여겼다. 그러다가 한국행을 통해 자기한테도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안 뒤부터는 많이 달라졌다. 한편 오씨녀인이 불쌍했다. 오랫동안 함께 살다보니 정도 들대로 든 모양이었다. 칠성영감의 인생을 돌이켜 보면 그는 다각역의 인물이었다. 처음엔 일본군 학도병으로 동맹군과 싸웠고 후엔 국민당군대로 팔로군과 싸웠으며 이어 다시 해방군에 편입돼 국민당군과 싸우다가 조선으로 간 뒤에는 유엔군과 같은 동포인 한국군과 싸우게 된 군인생활, 어떤 뜻에 의해서나 정치이념을 갖고 군인생활을 한 것이 아니었다. 여인들과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었다. 운명에 의해 윤삼월의 곁을 떠났고 광서에서는 곽씨와의 짧은 로맨스도 있었으며 후에는 오씨와의 만남도 이뤄졌다. 그외 “6.25” 당시 부상으로 후방병원에 입원했을 때 간호사 여인과 여차여차하게 관계가 있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이를 증명할만한 증거는 없다. 생전에 칠성영감은 마누라인 오씨한테 자신과 기타 여인들과의 관계를 두고는 단 윤삼월에 대해서만 알려줬을뿐 기타의 곽씨여인 등에 대해서는 함구무언이었다. 인생만년의 투병생활 중 칠성영감은 정신이 혼미할 때마다 이상한 소리를 내지르군 했다. 꿈속에 일본군 스츠키 중대장, 다즈키 상등병 그리고 중국 중원에서의 전투장면과 조선에서 피로 물든 낙동강전선 장면 등이 자주 떠 올랐는가 하면 윤씨, 곽씨와 오씨 등 여인들의 얼굴도 교차되여 떠오르군 했다. 어찌보면 이는 한편의 대하드라마와도 같았다. 여하튼 칠성령감의 남다른 생애는 특수한 시대에 생긴 일장풍운록이 아닐 수 없으며 우리 민족 력사의 한측면을 말해 주는듯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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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4
  • “애인시대”- 동강나는 가정들
    ● 현 룡 선 우리는 흔히 법률과 도덕을 잘 운운한다. 법률에는 형사법 혹은 민사법을 위반하면 그에 따른 해당판결이 적용된다고 명확히 규정되여있다. 하지만 어떤 사연은 법적추궁에까지 미치지 못하지만 뭇사람들의 적개심과 분노를 자아내고 질책을 불러온다. 그것인즉 가정에서 안해 혹은 남편이 제3자를 불러들여 혼인위기를 초래하는 등 사례이다. “아니, 뭐라구?!” C의 말을 듣고 나는 무척 놀라워했다. 후- C는 얼굴에 암울한 그늘이 잔뜩 비껴갖고 련속 한숨을 토해냈다. 너무나도 처량해보였다. C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적절한 말구절이 떠오르지 않았다. 계속하여 C는 속이 갑갑해났던 모양, 몇번 기침을 깇더니 드디여 분통을 터뜨렸다. “그동안 내가 혼자 모든것을 감당하면서 자식의 공부뒤바라지를 하며 가족만을 위해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C의 어조는 그닥 높지는 않았지만 절규처럼 들렸다. 나는 또한번 쓰라린 아픔을 느꼈다. 사실 한국으로 간 안해(한국체류날자 5년이 됨)로부터 며칠전 C한테로 전화가 걸려왔었다. “나 말이예요. 한국에서 애인을 사귄지 퍼그나 돼요. 죄송하지만 절 기다리지 말아요.” 누군들 이런 말을 듣고 분통이 터지지 않겠는가!오죽 마음이 아팠으면 C는 얼굴이 잔뜩 이그러져갖고 애꿎은 담배만 풀썩풀썩 태우고있었다. 그가 불쌍하고 가여워났으며 한편 불현듯 사랑의 배신자인 그의 안해에 대한 일종 형언할수 없는 혐오감이 엄습해왔다. 미구하여 C는 나한테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C에 따르면 그제날 안해는 무던히도 자기를 사랑하고 잘 공대했었다 한다. 그리고 마음씨가 아주 착하고 순진했으며 집문밖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비교적 전통적인 녀인 즉 남의 남자의 얼굴 한번 쳐다볼 용기마저 없는 그런 타입의 녀인이였다. 그런 그녀가 일단 집문밖을 나서더니 도저히 믿을수 없을만큼 앵돌아졌던것이다… 부지중 또 다른 사연이 내 머리속에 석연히 떠올랐다. “이제 와서 정말 후회되는구만. 내가 애인을 사귀지 않았어도…” 이는 A가 가정이 파멸되고나서 되풀이한 말이였다. A는 안해가 출국한 후 매일매일 무료한 나날을 보냈었다. 그한테 있어서 안해의 빈자리는 너무나 컸다. 밤이면 꿈틀거리는 성욕구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 A는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고 무도청에 다니기 시작, 어느날 오색령롱한 샌데리야 불빛이 명멸하는 무도청에서 한 녀인과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추다가 결국 어찌어찌하여 그 녀인과 눈이 맞았고 얼마후 드디여 A와 그녀와의 사이는 애인관계로 치닫게 되였다. A는 애인을 만날적마다 마치 첫사랑을 속삭이는듯 기분이 설레이였고 마음은 흡족하기만 했다. A의 돈지갑은 가끔씩 애인을 위해 통이 크게 열려지군 했다. A는 이따금씩 남몰래 애인을 자기의 집안에 불러들이군 했다. 그날도 두 사람이 한덩어리로 되여 한참 뒹굴고있을 때 갑자기 집문이 열릴줄이야. A의 불륜행위는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를 예의주시하여 친정집으로 드나들던 딸자식한테 덜컥 걸려들고말았다. A는 딸자식한테서 한바탕 질타를 받았다. 하지만 딸자식은 부모의 리혼을 원하지 않았기에 아버지의 불륜에 대해 눈감고 덮기로 했다. 그럼에도 A는 자신에 대해 반성은커녕 오히려 애인과 함께 부부처럼 거리에서 활보했는가 하면 지어 공개석상에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애인한테 아주 빠져들고 미쳐버린셈이였다.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드디여 A의 탈선행위는 한국나들이를 하는 누군가에 의해 그의 안해의 귀에까지 전해지게 되였고 A의 안해는 결국 남편의 불륜을 용서하지 않았다. A네 부부 역시 우에서 언급한 C네 부부처럼 워낙 금슬이 좋았었지만 불륜사로 인해 이 가정은 풍지박산나고말았다. 나는 담배 한가치를 천천히 태우며 사색의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생각을 더듬어보면 가정이란 배가 침몰되는 불행이 초래되는데는 애인을 사귀는 문제가 적지 않게 작용하고있었다. 부부가 떨어져 외롭게 살다보면 이성친구가 그리워지는것은 당연하다. 아직 젊은 남녀라면 더욱 그러할것이 아닌가?! 아무리 정직한 사람이라 해도 어찌 하루이틀도 아닌 몇년씩이나 홀몸의 세계에서 맴돌랴. 갈증으로 목마른 사람한테는 우선 물이 수요되듯이 외기러기로 고독하게 살아가기란 참으로 힘든것, 그러기때문에 이런 부부들이 외도하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애인을 사귀다보면 호감이 생기게 되고 점차 떨어질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는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그것이 가정에 화근을 몰아와 비극이 초래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애인이 있는 사람마다가 리혼으로 이어지는건 아니지만 애인으로 인해 리혼률이 상승선을 긋고있는 점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어느 한 위대한 철학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것이 가정이고 가정만이 유일한 락원이며 불행한 가정이 많으면 사회는 필연코 암흑으로 변하게 된다”고 했다. 이는 리치에 맞는 말이다. 그만큼 가정은 금은보화와도 바꿀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금자리라 할수 있겠다. 돈때문에 현대판 “리산가족”으로 살아가는 길이 비록 고되더라도 이성관계에 있어서는 그래도 리지를 지키는것이 바람직한 자세인것 같다. 애인이란 그냥 친구와는 달리 유혹이 강한 자석과도 같은 존재이다. 한번의 접촉이 있으면 별스럽게 두번, 세번이 있게 되고 나중에는 벼랑가에 가닿게 된다. 그렇다면 이미 애인을 사귀여 둘관계가 달콤할지라도 가정의 안정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아쉽더라도 하루 속히 “굳바이”함이 명철한 처사가 아닐가? 그리고 “애인사귀기”에 앞서 가족이란 무엇이고 륜리도덕이란 무엇이며 특히 자식이 있는 부모라면 가정과 애인중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가는 구태여 말치 않아도 아주 자명한 일이라고 곱씹어 말하고싶다. 오늘날 “애인시대”가 급물살을 타고 우리한테로 다가오고있다. 내마음은 내내 초조하고 무겁기만 하다. 애인을 사귀는 행위는 물론 법률이란 천평으로 판을 가를 일이 아니다만 사회와 뭇사람의 분노를 자아내고 질책을 받아 마땅하며 량심적견지에서 말한다면 “옥살이”를 하게 해도 과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이곳저곳에서 적지 않은 가정들이 온역처럼 만연되는 애인붐으로 리혼이란 강진을 맞아 와그르르 무너져가고있다. 참으로 슬픈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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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28
  • [인생화제] 알다가도 모를 남성의 세계
    ■ 연변 리포터 김철균 1 중년남자 덕화한테는 조용하고도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다. 40세 중반을 넘어 섰음에도 얼굴은 물론 몸매 또한 아직 30대 초반의 맵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아이는 자기의 아이가 곱고 아내는 남의 아내는 이쁘다”고 덕화는 여전히 그 아내한테 썩 만족해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덕화가 바람기 있는 사내인 것도 아니었다. 기실 아내는 여느 여자한테 짝지지 않았고 그의 뜻을 곧 잘 따라주기도 했다. 헌데 왜 그런 아내가 자꾸 못 마땅해질까? 젊었을 때는 애를 키우고 살림을 춰세우느라고 다른 녀자와 아내를 별로 비교해 보지도 않았지만, 이젠 애도 대학졸업 후 사회에 진출하고 보니 어딘가 생각이 달라졌다. 그는 중년에 들어서면서 자주 번민에 빠지는 자신을 두고 몰래 반성해 보기도 했다. 하긴 덕화한테는 오래 전부터 애모해 오던 고중시절의 여동창생이 있었다. 활발하고 시를 잘 읊고 춤도 잘 추는, 그야말로 학급에서는 활약가였던 그런 동창생이었다. 하냥 웃는 듯한 얼굴이었고, 웃을 때마다 볼에 보조개가 생기군 했던 그녀, 덕화는 당시 마음이 약해 그녀한테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됐다. 지금도 덕화는 당시 슬쩍 리드만 해도 그녀가 자기한테 무너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고교시절 학급반장이었으며 축구선수었던 그는 그만큼 여고생들한테서 인기만점이었고, 은근히 딴 눈치를 보이는 여고생도 몇 명 잘됐다. 하지만 그 때도 교정에서의 연애는 금물이었던만큼 정치발전을 추구했던 덕화로서는 더욱 그녀한테 딴 눈길을 팔 겨를이 못됐다. 그러다가 고교졸업 후 이렇게 저렇게 서로 다른 지구로 하향하게 됐고, 그뒤 도시로 다시 올라온 뒤에도 그녀의 소식을 줄곧 모르다가 언젠가 그녀가 집체호에서 당지 농촌청년과 눈이 맞아 결혼했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듣고서야 덕화는 몹시 놀랐었다. 그렇게 생각은 간절했지만 이룰 수 없었던 사랑, 그래서인가 덕화의 마음속에는 중년이 될 때까지도 한쪽 구석을 그녀가 계속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애모의 불찌가 한순간에 사그라져 버렸으니 그 때인즉 지난 봄에 있은 동창모임에서었다. 그 때 모습을 드러 낸 그녀, 덕화가 그토록 애모하던 그 녀의 모습은 그제날 천진란만하던 소녀인것이 아니라 완전히 “러시아 아줌마”와 같은 여인이었다. 얼굴은 살이 잔뜩 올라 군턱이 져 옛날모습이 오간데 없는데다 커다란 젖가슴에 팔을 내걷고 소리를 질러대는 걸 보노라니 3 년 전 먹은 추어탕이 올라 오는듯 했다. “야, 무슨 개떡같은 소리라고 해라. 지금 돈이면 할배다 할배. 자 마셔라 마셔!” (저 여자가 그래 내가 20여년 전 그렇게도 마음속으로부터 그려오던 여인이었단 말인가?!) 차라리 그 모임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영원히 덕화 마음속의 우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덕화는 한동안 모진 허탈감에 빠졌다. 그토록 애모해 오던 여인이 글쎄 현재의 아내에 비해 그렇게도 무식하고 돈밖에 모르는 녀인이었던 것이다. 그 때로부터 덕화는 현재의 아내에 대한 관점을 달리했다. 2 다른 한 중년남자 순호는 문화거리에 있는 “OK 찻집”의 마담 여인의 매력에 마음이 끌렸다. 30대 후반의 여인답게 근사한 얼굴에 근시안경을 건 모습이 문화인다운 기질이 엿보이는듯 하기도 했다. 순호는 저도 몰래 퇴근 후마다 OK 찻집으로 발길을 돌리군 했다. 순호의 가정은 비교적 “여존남비”의 가정이었다. 딸 둘이 있었는데 아내까지 3명이 함께 늘 순호를 핀잔하군 했다. “누구네 남편은 얼마나 돈을 잘 벌고 부지런하오”, “어느 애의 아빠는 자녀와 대화를 잘 하오” 하는 식으로 집에만 들어서면 항상 궁지에 몰아놓군 했다. 순호는 이러한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졌다. 그러니 자연히 OK 찻집으로 발길이 가군 했고 그 때마다 마담 여인은 살갑게 맞아주면서 말동무가 돼주군 했다. 순호는 그 마담 여인과 마주앉으면 늘 마음이 편해졌다. 세상물정에 대한 얘기로부터 가정상황, 나중에는 심리고충까지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는 저도 몰래 자신이 그 마담 여인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더군다나 그 마담 여인 역시 남편과 사별하고는 외기러기의 신세었다. 그는 그녀한테 진짜 사랑을 고백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편 그는 무섭기도 했다. 이는 결코 자신의 아내를 버리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마음이 끌리면서도 감히 사랑을 고백할 수 없는 그녀가 어딘가 자기보다 너무나도 우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가령 그녀한테 맘속말을 털어놓았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또한 앞으로 “자아감각만은 좋군” 하면서 만나도 주지 않으면? 순호는 그 것이 무서웠다. 그는 차라리 마주앉아 얼굴이라도 기껏 보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현재가 좋다고 생각했다. 하긴 그녀가 어딘가 뜻을 내보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여자 혼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괴롭고 고독하고 힘든지 남성들은 알 수 없어요.” 이는 분명 그 마담 여인이 내비친 말이었다. 하지만 순호는 그 것이 자기한테 뭔가 바라는 말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 뒤에도 순호는 여전히 그 OK 다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여전히 그녀와 마주앉아 얘기를 나눴지만 그녀한테 츄피터화살을 날려 볼 생각은 털끝만치도 해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순호가 퇴근하자 바람으로 OK 다방으로 향했다. 헌데 다방문을 떼고 들어서니 웬 다른 여인이 카운터에 서있었던 것이다. “이젠 이 다방주인이 바뀌었어요. 그 언니는 이전의 단골이던 영철이란 남성과 새 가정을 뭇고 다방을 그만 뒀어요.” 그러면서 다방의 새 주인은 순호한테 메시지 한장 넘겨줬다. “순호씨, 더는 만날 수 없게 돼 아쉽군요. 지금은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했지만 기실 제가 처음 기다린 분은 순호씨었어요. 순호씨가 가정이 있는 분이라 차마 제쪽에서 먼저 말을 입밖에 내지 못했을 뿐이었죠. 하지만 지금의 남자도 괜찮아요. 운명의 신은 끝내 절 외면하지 않았는가 봐요…” 영철이란 역시 순호처럼 이 다방출입이 잦던 남자었다. 이혼하고 혼자 몸이란 걸 제외하고는 어디를 보나 순호한테 비길바가 못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순호가 담이 작은 연고를 마땅히 그의 품에 안겨야 했을 그녀가 결국 한차원 낮은 영철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3 중년남자 광철이는 워낙 회사의 중견으로 잘 나가던 사람이었다. 회사의 부총경리 겸 판촉부 부장이었으며 외모상으로 봐도 분명 매너가 있는 사나이었다. 그는 원체 여자직원들한테도 분촌을 가려 할 말만 하고는 쓸데 없는 잡담은 극력 삼가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제한되고 문화적인 공간에서의 그의 자제력에 불과했다. 하지만 운명의 희롱이라 할까? 광철이는 끝내 같은 회사의 12살 연하의 여인과 애매한 이성관계를 맺게 됐다. 사달은 완전히 1년 전 그들이 함께 에너지개발을 목적으로 한 러시야행 때문이었다. 러시아 원동지구의 모 시에 도착하여 상대측과의 담판이 진행되던 3일 째 되던 날의 밤, 각각 호텔 한방씩 차지하고 막 잠에 들려고 할 때, “딩동, 딩동”하는 초인종이 울리더니 문을 열자 바람으로 잠옷바람의 그녀가 엎어지듯 뛰어 들어오며 광철이한테 안겼다. “부장님, 저 혼자 방에 있을 수가 없어요. 너무나도 무서워요. 중국에서 온 장사군 사내들이 쉴 새 없이 괴롭혀요.” 워낙 그들이 그 도시에 도착한 날 밤부터 이 호텔에 들어있던 중국인 장사군 사내들이 갖은 구실을 대고 그녀를 희롱하러 들었는데 3 일째 되는 날 저녁에는 한시간이 멀다하게 초인종을 울리며 그녀한테 “애정공세”를 들이댔던 것이었다. 그렇게 되자 둘 다 준비가 없었고 원했던 일도 아니었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광철이와 그녀는 한 방에 들었으며 위에서 언급한대로 애매한 이성관계를 맺게 됐다. 남녀의 관계란 한 번이 있으면 두 번째가 있기 마련이다. 귀국한 뒤 그들 남녀의 관계는 급기야 봇물이 터진듯한 관계로 승화됐으며 얼마 안있어 처음에는 판촉부내 직원들 사이에서 쉬쉬한 소문이 들리기 시작하더니 끝내는 광철의 아내와 그녀의 남편한테까지 알려지게 됐다. 이렇게 광철이네 부부와 그녀의 가정도 하루가 멀다하게 싸움질이 잦던 중 그들 남녀는 막다른 벼랑가에 다닫자 어느 날 몰래 회사공금을 빼내 갔고는 실종됐다. 그들 남녀는 원래 계획했던 한국에로의 도피를 포기하고 동남아 모 국에 가서 은둔할 목적으로 운남의 어느 한 변강도시까지 갔었으나 거기까지 추적해온 경찰에 의해 나포됐고 둘 다 직무를 떼우고 감옥행을 하게 됐다. ※ ※ ※ 이상 3명 남자들의 경우 아내밖의 여자와의 사연의 측면은 각각 부동하며 그 결과도 서로 같지 않은 양상을 보였다. 덕화의 경우 한 때 옛 동창생을 그리다가 원점으로 돌아왔고 순호의 경우는 자신의 결단성 부족으로 “암펌”같은 아내의 구속에서 해탈되지 못했으며 광철이의 경우는 자아의지로는 불가능했던 불륜으로 나중에 감옥행까지 했다. 여기서 필자는 이런 남성들을 칭찬 혹은 책망 먼저 인생이란 진짜 뜻대로 되지 않는 고행이란걸 언급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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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28
  • 조선족 “호칭”보다는 “정체”가 더 중요해
    ■ 연변 리포터 김철균 최근 한국 새누리당 한기호 최고 위원이 중국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을 “조선족” 대신 “재중동포”바꿔 쓰자고 제안하면서 현재 중국 조선족에 대한 호칭을 두고 화제가 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특히 “일본에 사는 우리 동포는 재일동포, 미국에 사는 우리 동포는 재미동포라고 하는데, 중국 동포는 조선족, 러시아 동포는 고려인이라고 하는것은 일본인이 우리를 ‘조센징’이라고 부르는 것과 뭐가 다르겠냐”는 주장에 동감이었다. 그리고 한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 것을 주장할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필자의 다른 한면의 조심스러운 주장으로는 “호칭”보다는 “정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기실 전반 한반도를 놓고 볼 때 시대와 조대가 바뀜에 따라 국명도 자주 바뀌군 했으며, 또한 그 때마다 국민의 호칭도 바뀌군 했다. 예하면 고구려 시대엔 고구려인이라 했는데, 현재 적지 않은 중국인들은 여전히 우리 조선족을 “고려(老高丽)”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이씨조선 때는 “조선인”이라고 했으며 지어 일제시대에는 조선인을 “황국신민”이라고도 불렀었다. 즉 춘원 이광수 선생같은 어르신들도, 만주출신인 윤동주 시인같은 유명한 분들도 창씨개명을 했었다. 하지만 어찌했던간에 자신이 조선인이였음은 속일수 없었다. 다시 말해 냉수에 밥을 말아 먹고 또 그 물로 양치질하다가 그 것까지 마셔버리는 조선인의 습성을 버릴 수는 없었다. 또 1945년 일제의 멸망과 더불어 광복이 되고 미국과 소련에 의해 신탁통치가 반도의 남북을 지배하던 시기에는 “국명”이 남조선, 북조선 했고 1948년의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창립으로 남북국민(인민)들의 호칭은 각각 “한국인”과 “조선인”으로 되기도 했다. 호칭을 놓고 말하면 그때로부터 반도의 남북은 마땅히 상호 “한국인”과 “조선인”으로 불려져야 했겠지만 사실 그렇지를 못하고 있다. 지금도 한국에서는 북측의 사람들을 “북한사람”이라 하고 조선 역시 남측사람들을 “남조선사람”이라고 한다. 남과 북은 1991년 9월 18일에 함께 유엔에 가입했고 당시 남측을 대표해 유엔총회에 참가한 대한민국 노태우 대통령은 발언에서 “…우리의 형제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우리와 함께 유엔에 가입한 것을 축하한다”고 언급한 것으로 알고 있다. 또 2000년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면서 김정일 위원장과 “6.25공동선언”을 발표할 때는 남북이 각각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 김정일”로 서명한 것은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현재까지도 남과 북은 여전히 “북한”이요, “남조선”이요 하며 서로 상대방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호칭을 계속하고 있는 상황이다. 좀 어떻다… 광복직 후 상호 정부수립 전에 “남조선”이란 “호칭”은 있었어도 “북한”이란 “호칭”은 반도 역사상 없었던 걸로 알고 있다. 중국조선족을 놓고 말하면 여러 가지 성격을 띄고 있다고 할수 있다. 한국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재중동포”, “중국동포” 등으로 친절하게 불려질 수 있으나 조선족 자신의 입장으로 보면 “중국조선족”, “조선민족” 혹은 지어 “중국인”으로 불려질 수도 있다. 이는 중국 조선족의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다. 즉 일제 시대 “독립운동” 혹은 생활핍박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온 우리의 조상들은 자아 뜻이나 또 환경요소에 의해 중국인들과 더불어 항일투쟁을 했고 광복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자 자연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창립과 더불어 중국국적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어 세계적으로 단 하나밖에 없는 우리 한민족의 호칭중 하나인 “중국조선족”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중국조선족 스스로가 원해서도 아니고 한국이나 조선의 버림을 받아서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새누리당 한기호 최고위원이 중국조선족을 “재중동포”라고 제의한 것은 중국에 있는 한민족(조선민족)을 진짜 동포로 포옹하자는 뜻으로 반갑고 또한 한국인들의 입장으로 볼 때 절대 틀리지 않는 제의라 진짜로 박수갈채를 받을만 할 수 있다. 하다면 우리 중국 조선족의 입장으로 놓고 볼 때 중국 조선족이 “재중동포” 혹은 “중국동포”로 될 수 있을지언정 절대 “재중한국인” 혹은 “중국조선인” 등으로 될 수 없다는 얘기로 된다. 이는 역사적 원인으로 그럴 수밖에 없고 또한 중국조선족의 양심상으로도 그런 정의를 내릴 수밖에 없다. “이혼한 부모곁에 있지 못하고 중국으로 시집온 딸이 자신을 품어 주고 안아 주는 시부모를 배반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까? 하지만 호칭은 어디까지나 호칭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우리 몸에 배여 있는 한국인 및 조선인의 동질감과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지는 한민족의 습성은 음식, 민속과 스포츠 등 많은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호칭은 그냥 호칭일뿐이라는 생각이다. 중 국조선족이 “재중동포”면 어떻고 “중국의 소수민족”이면 어떠한가? 또 그냥 “중국인”이면 어떻겠는가? 그냥 우리가 소주에 김치쪼각을 안주하며 “아리랑”을 함께 부를 수 있다면 그까짓 호칭 따위를 놓고 옴니암니 할 하등의 필요가 없다는 조심스러운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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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24
  • 하늘위의 동네 제운산
    안휘(安徽)의 명산 제운산(齊雲山)은 중국 4대 도교의 산으로 기이한 산봉과 아찔한 낭떠러지, 아늑한 동굴, 꼬불꼬불 흐르는 계곡, 고요한 연못, 맑은 샘물 등이 어울려 비경을 이룬다. 수려한 산수속에 아담한 절과 건물들이 어울려 조화의 극치를 이루는데 운무가 끼면 선경 그대로이다. 저 멀리 산봉은 허리에 구름을 두르고 가까운 산허리나 정상의 건물은 하늘세상의 누각을 방불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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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19
  • 우리도 “윤동주 데이”를 만들자
    ● 김 혁(재중동포 소설가) 올해는 정월 대보름과 밸런타인데이가 같은 날로 겹쳤다. 민족의 전통명절과 젊은 이들의 모던한 기념일이 어우러 진것이다. 그런데 이 날은 또 다른 각별한 날이기도 했다. 100여년전 할빈역에서 민족 침탈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를 단죄한 안중근 의사에 대해 일본이 사형선고를 내린 날인것이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산화해 간 안중근 영웅. 하지만 젊은이들은 련인에게 줄 꽃다발이나 쵸콜렛 챙기고 저녁에 함께 할 레스토랑의 음식주문에 바빠 민족의 영령에 대한 관심조차 없다. 그러다 한국에서 한 대학교수의 제안에 의해 2월14일을 안중근 의사를 기억하는 날 “안중근 데이(day)”로 정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민족영웅을 추모하면서 밸런타인데이를 즐기고, 전통명절의 풍속을 이어가니 “일석삼조”의 시너지 효과를 볼수 있다는 참신한 아이디어 였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분위기에서 “애국”, “애족”, “기억”, “존경”, “사랑”등 다양한 의미를 담은 쵸콜렛과 꽃다발을 련인에게 선물하는 밸런타인데이는 왕년보다 더 큰 의미가 있는 날로 안겨 왔다. 해외의 동향을 보면서 따라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우리도 이참에 “윤동주 데이”를 만들어 보면 어떨가하는 바램이였다. 구관조(九官鳥)처럼 곧 남을 따라하기의 흉내짓이 아니다. 윤동주의 고향에서 태여난 필자로서는 그동안 윤동주의 생애를 장편소설화하는 등 그이에 관한 픽션과 논픽션 작품들을 집필하고 또 각 언론사들에 윤동주 추모 관련 행사보도를 빠치지않고 줄곧 대서특필해 왔었다. 그와중에 윤동주에 대한 기념과 추모가 아직도 미온(微溫)적인데 대해 안타까움과 유감을 머금던차 이번 발렌타이데이날의 참신한 아이디어에서 뒤미처 떠오른 생각이였다. 연변이 낳은 민족시인 윤동주에 대한 숭모사업은 고향에서 내내 이어졌음에도 그이의 아시아를 넘나드는 위상에 비해 아직 그 열기가 크지 못하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그나마 큰 영향력을 과시했던 권위간행물의 “윤동주문학상”은 10년간 유지되다 마무리 되고 지금은 몇몇 민간단체의 가상스러운 노력에 의해 우리는 윤동주를 때때로 기억하고 있다. 윤동주의 시집, 론문집, 윤동주의 동시비 역시 그들 민간단체에서 펴내고 건립했다. 정부의 지원으로 근년들어 윤동주 생가가 크게 보수 되는 등 반가운 거동이 일고 있지만 해외의 윤동주 언덕, 윤동주 기념관, 윤동주 시비 조성, 윤동주 축제, 윤동주 관련 책자의 출간, 윤동주 뮤지컬과 연극의 개봉등 내내 이어지는 방흥미애 (方兴未艾)의 열기에 비하면 고향인 연변은 아직도 그 숭모사업이 활약상을 펼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세월에는 그무슨 기념일들이 그야말로 소털처럼 많다. 재래로 절기가 부여한 기념일, 자신과 부모와 친지, 친구들과 관련된 대소사의 기념일외에도 왕년에는 듣도보지도 못했던 만천하의 기념일들까지도 모조리 챙기고 지어 없는 기념일까지 만들어가면서 누린다. 기억해야 할 날이 많은것을 나쁘다고 할수는 없다. 문제는 사회가 물질화에 빠져들면서 향락에만 젖어드는 기념일들이 란무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의 의미로 소중히 보듬는 기념일 대신 우리가 정작 지내고 있는것은 향락주의에 젖어 질펀한 매일매일 이어지는 기념일들이다. 때문에 윤동주와 같은 고향을 빛낸 선각자들을 기리는 날이 따로 없음은 부끄러움이요, 응당 이제라도 그 기념일을 챙겨야 한다는것이다. 고향의 터전을 닦고 그를 빛내여 오늘에 이르게 한 이들을 잊지않고 기리는것은 우리들 모두의 책무라고 본다. 이는 우리 삶의 터전인 사회공동체를 지탱하는 핵심가치이자 근본원칙이다. 그 가치를 소중히 할줄 모르고 지어 무감각한 민족은 그로서의 명분과 리유를 찾기 힘들다. 이러한 기념일을 통해 민족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하고 산화해 간 그들의 력사적 업적을 제대로 알아야 할것이고 그들에 대한 고마움을 느껴야 할것이다. 그이들의 고귀한 정신과 업적을 기리는 마음을 모아 그 뜻을 잊지 않고 계승발전시켜 우리의 공동체 사회가 목전의 진통을 엎누르고 더 크게 도약하는 계기로 만들어야 할것이다. 날을 받아(탄생일, 서거일 혹은...) 경건한 마음으로 그이의 생가나 묘소를 찾거나 그이의 주옥같은 시 한줄을 읊조리는 행위들을 통해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 모두가 자호할만한 민족시인의 존재를 알고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실천하는 기회가 될것이다. 2월16일 오늘이 바로 윤동주가 일제 감옥에서 생체실험의 의혹을 남긴 채 비명에 간 날이다. 97년전, 북간도 명동촌의 춥디 추운 겨울의 마지막 날(12월 30일)에 태여나 북간도의 첫 근대교육기관인 명동학교, 룡정의 미션계 학교들인 광명과 은진중학을 나와 경성의 연희전문에 진학했고 그후 일본류학길에 올랐다가 일제의 마수에 유린당한 시인은 한줌의 재로 고향에 돌아와 그가 즐겨 거닐었던 동산마루에 묻혔다. 스물아홉에 갔지만 그를 낳은 고향, 그가 학문을 닦았던 경성 지어 그를 숨지게 한 “적국” 일본에서 조차 숭모해 마지않고있는 민족의 “시성” 윤동주이다. 천형(天刑)처럼 짊어지고 평생을 살아온 문학적 열망과 민족애로 북간도 오지의 한 문학지망생이 민족 최고의 시인으로 떠올랐으며 그렇게 엮여진 그의 작품은 알알이 진주처럼 값지고 빛나오르고있다. 그리하여 시인이 “하늘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읊조렸던 룡정의 하늘은 오늘도 맑고 시인이 묻힌 동산 마루 무덤에는 오늘도 "보람처럼 봄풀이 무성"하다. 닥쳐오는 어려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내면서 순수한 마음과 투명한 감수성으로 한 시대를 갈파하고 량심을 노래한 윤동주,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이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간 윤동주, 그런 학우(學友)같은, 형님같은, 애인같은 윤동주를 우리 어찌 잊을수가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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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18
  • 싱글이 좋은 이유
    미국의 인터넷매체 비즈니스인사이더는 지난 주말 밸런타인데이(14일)를 맞아 싱글에 관한 편견을 깨기에 앞장 서고 있는 "싱글리즘"의 저자이자 심리학자인 벨라 드파울로 UC 샌타바버라 교수의 주장과 함께 "과학적으로 입증된 싱글이 좋은 리유"를 소개해 눈길을 끌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각종 연구에서 싱글이 기혼자보다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더 건강하다고 나타나는데 다음은 이 중 수긍할 만한 3가지 리유를 나열한 것이다. 첫째, 심장 건강에 좋다. 2006년 7월 5일 자로 게재된 "결혼과 가족 저널"(Journal of Marriage and Family)에 따르면 8년간 중년남녀 9000여명을 대상으로 건강상태를 분석한 결과, 심장병에 걸릴 위험이 가장 낮은 사람은 한번도 결혼한 적이 없는 사람들로 확인됐다. 이 기간 중 계속 싱글이였거나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는 그 차이가 크지 않았지만 재혼이나 리혼, 사별한 사람들은 심장질환에 걸릴 위험이 현저하게 높았다고 한다. 둘째, 날씬한 몸매를 유지한다. 18~64세 남녀 1만 3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싱글들은 기혼자나 리혼한 경력이 있는 사람보다 운동량이 더 많았다.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마찬가지 결과를 보였다. 이는 싱글이 기혼자보다 본인의 외모를 신경 쓰거나 자녀가 없기 때문에 자신 만의 시간을 가질 여유가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4년간 호주에서 녀성을 대상으로 시행한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이들의 일상 활동량은 결혼을 기점으로 현저히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연구 결과는 2003년 "미국 예방의학저널"(American Journal of Preventative Medicine)과 2004년 "결혼과 가족저널"(Journal of Marriage and Family), 2010년 "신체활동과 건강저널"에 실렸다. 셋째, 사회적 관계가 강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결혼한 친구들과 관계가 소원해졌다고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드파울로 교수는 "실제로 여러 연구를 통해 기혼자는 싱글보다 친구나 가족, 이웃들과의 관계에 소원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한다. 이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함께 사는 동거 커플들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결혼하면 자신의 형제자매와 연락이 뜸해지는 것도 관련 연구로 밝혀졌다. 결혼과 동거는 사랑과 관심이 오직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싱글은 친구나 형제자매, 부모와 감정적으로 더 많이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결과는 2004년과 2012년 "결혼과 가족저널"(Journal of Marriage and Family)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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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18
  • [실화문학] 길성 선생과 그의 첫사랑
    ■ 연변 리포터 김 철 균 늘 도수높은 안경을 걸고 다니는 길성 선생은 올해 76세이다. 76세라면 나이가 많은 편일까? 옛날 같으면 많다 할 수 있겠으나 요즘엔 그닥 많다고 할 수도 없다. 간 밤에 길성선생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자신이 70대 로인이 아닌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군인이었고 함께 살고있는 여인 또한 지금의 마누라가 아니었으며 “류쾌이챈(六块钱)” 하며 한족 말을 하는 여인 즉 한족 처녀었다. 길성 선생은 머리를 도리질했다. 뭔가 뒤죽박죽인 “도깨비꿈”인듯 싶었다. 하지만 그 꿈 역시 “아닌 밤중의 홍두깨”는 아니었다. 이 이야기는 지난 세기 60 연 대 초 강소성 무석에 있는 중앙군위 직속으로 된 해방군 문화학교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시 이 문화학교는 부대간부 내의 문맹을 퇴치하기 위해 세워진 학교었다. 건교 초기었던 그 때 모집된 학원생은 도합 1000명 가량었지만 시험에 합격되어 선발된 학원생은 얼마 안되고 거개가 조선전쟁에 갔다온 군인들로 부대계급은 높으나 문화수준이 제로인 학원생들이었다. 그 중 심양군구에서 시험에 합격되어 입학한 길성이의 문화수준은 앞자리 10명안에 들 정도었다. 그리고 조선족은 유독 그 혼자 뿐이라 자연스레 모든 학원생들의 관심인물이었다. 모든 사생들이 길성이를 “멋진 총각(帅小子)”이라고 놀려주고 있었으며 특히 여학생들이 더했다. 아니 여학원생들은 길순이를 놀려주는 것이 아니라 길성이한테 은근한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는 그녀들의 눈길만 보아도 보아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성이는 반에서 6 명 밖에 안되는 여학원생 중 “왕순자”란 이름을 발견했다. 그래 한족도 순자란 이름이 있단 말인가? “쑈왕, 쑈왕의 이름이 어쩐지 조선족의 이름 같구만.” 어느 날 길성이가 묻자 왕순자는 제법 근사하게 애교에 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맞아요. 전 워낙 조선인이었거든요. 왜 걸 묻죠.” “그럼 어찌되여 성은 왕씨인 거요?” 그제야 순자는 비교적 정색해하며 자신의 이왕지사를 털어놓는 것이었다. 왕순자에 따르면 그녀는 조선에서 태여났었다. 일찍 조선전쟁 당시의 어느 날 유엔군의 폭격에 어느 한 가정집이 불길에 휩싸였고 죽어있는 남정과 주부가운데 6 살 짜리 어린 여자애가 울고 있었다. 이 때 불을 끄러 달려왔던 어느 한 지원군 장군이 그녀를 발견, 옷을 벗어 여자애한테 씌워준 뒤 주위를 살피다가 여자애를 돌 볼 어른이 없음을 알게 되자 바로 여자애를 안고 군부대로 돌아오게 됐다. 그 뒤 장군은 그 조선인 여자애를 슬하에서 키우다가 귀국 당시 아예 양딸로 입양하기로 정하고는 중국으로 데려왔던 것이다. 그 장군인즉 바로 당시 상해 경비사령부의 왕육생(王六生) 정위었다. 그 사연을 알게 되자 길성이는 순자가 여느 여학생과는 어딘가 다르게 보였다. 얼마 안되어 길성이와 왕순자는 친한 사이로 됐다. 아니, 키가 크고 얼굴까지 준수한데다 문화수준까지 높은 길성이한테 순자가 더 적극 접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편 20대 초반의 길성이한테 이성의 출현은 그로 하여금 복잡한 모순 속에서 헤여 나오지 못하게 했다. 그는 자신의 가난한 가정을 생각, 가정을 위해서도 그렇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너무 일찍 이성과 접근하면 안 된다고 여겼다. 꼭 공부를 열심히 하여 보다 출세한 뒤에야 이성을 생각하고 앞날의 가정에 대해서도 염두에 둬야 한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순자가 너무 좋았다. 가정환경도 우월했지만 그 녀의 활달한 성격과 노상 실 웃음이 담겨 있는 그 녀의 얼굴이 더욱 좋았다. 순자는 비교적 개방적이었다. 언젠가 얘기를 통해 상해 사람들이 개방적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직접 느껴보기는 처음이었다. 때는 바로 지난 세기 60 연대 초였지만 순자가 읽는 책을 보면 홍콩의 애정소설이 아니면 레브톨스토이의 “안나카레니나”, 이엘보이니치의 “등에” 그리고 시집으로는 부쉬킨의 “예프게니 오네킨” 등이었다. 당시 길성이와 순자는 주로 일요일을 이용해 들놀이와 산책 등으로 데이트를 즐기군 했는데 순자는 일단 교정을 벗어나기만 하면 길순이와 팔을 끼군 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자주 길성이의 얼굴을 건드리며 깔깔 대기도 했으며 주위를 살피다가는 깜쪽같이 길성의 얼굴에 뽀뽀해주기도 했다. 그렇 때마다 길성이는 와들짝 놀라면서 얼굴이 달아 오르군 했으나 그렇다고 그 것이 싫지는 않았다. 길성이와 왕순자가 사귄지도 어느 덧 2 개 월이 넘었다. 그러던 어느 주말이 되자 순자는 일요일 날 상해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놀러 가자고 제의했다. 아버지인 왕정위가 길성이를 만나 보자고 한다는 거였다. 순자의 제의에 길성이는 원간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이거 너무 이른 거 아니야?!” “뭐가 이른가요. 남들 같으면 양가부모들의 만남(상견례)도 이뤄질 수도 있을 법한데요.” “그래도…” 길성이는 뒤 말을 흐렸다. 솔직히 말해 그 시각 길성이는 자신이 순자 부모님들의 눈에 들지 못할까봐 두려웠다. 그 때까지 길성이 역시 혼사가 이뤄지자면 두 가정의 경제 및 사회적 지위 등이 엇비슷해야 된다고 부모님으로부터 많이 들어왔던 터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으나 길성이는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며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순자를 설득하여 이튿날의 행사를 미루게 하기로 맘 먹었다. 헌데 이튿날 아침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노크소리가 나더니 왕순자가 숙소에 들어섰고 그 뒤로 웬 젊은 군인이 뒷따랐다. “아직도 기상하지 않았어요. 빨리 빨리 일어나 출발차비를 해요.” 순자의 뒤에 선 군인은 왕육생 정위의 운전사였다. 왕정위가 찦차까지 보내 오다니. 길성이는 차마 행사를 뒤로 미루자는 말을 입 밖에 내 번질 수가 없었다. 그들이 차에 오르자 군용찦차는 부르릉 하고 시동이 걸리더니 앞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기사오빠, 이 남자가 어때요. 잘 생겼나요? 이 남자는 동북에서 온 조선족이래요.” 차안에서 순자는 쉴 새 없이 종알댔다. 그럴 때마다 운전사는 “예 아가씨”하며 순자한테 깎듯이 예의를 갖췄다. 오전 10쯤 되자 길성이와 순자를 앉힌 찦차는 상해 경비사령부에서 멀지 않은 왕육생 정위네 집에 도착했다. 왕정위네 집은 중국 고대풍격이 독특한 단독주택이었다. 여러 개의 방이 딸려 있었고 그 때 세월에는 흔치 않은 수세식 단독 화장실도 있었다. 길성이를 보자 순자의 어머니 왕부인은 유난히도 수다를 떨면서 이것 저것 묻는 것도 많았다. 한참 뒤 왕정위가 헛기침을 해서야 왕부인의 수다가 멈췄다. 왕정위 역시 굵직한 여송연을 몇 모금 빨더니 천천히 길성이한테 이것 저것 묻기 시작했다. 길성이는 공손히 사실 그대로 대답을 올렸다. 일찍 3살 때 아버지의 지게에 앉아 두만강을 건너 간도땅에 정착하던 것부터 농민가정 출신이며 가정이 가난하다는 것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말씀 올렸다. 나중에 왕정위는 “가정이 가난하다는 건 그닥 중요하지 않는 거지”하며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점심식사를 마치자 왕부인의 제의하에 모두가 시내쇼핑을 갔다. 상해거리를 돌면서 왕부인은 특별히 길성이가 입을 양복 한 세트와 흰 와이셔츠, 양말 등을 사는 것이었다. 길성이로서는 난생 처음으로 입어 보는 양복이었다. 그가 양복을 입고 거울 앞에 서자 자신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밤 왕정위네 내외 그리고 길성이와 순자는 상해 국제호텔의 무도장으로 갔다. 오색영롱한 네온싸인이 반짝이는 속에서 순자와 함께 탱고를 추는 길성이의 모습은 너무나도 멋졌다. 남들이 부러운 눈길로 길성이와 순자가 춤추는 모습을 바라 볼 때마다 왕부인은 “내 딸이 사귀고 있는 조선족군인이래요” 하며 자랑했다. 길성이와 순자의 사랑은 점점 무르익어 갔다. 따라서 길성이가 상해에 있는 왕육삼 정위네 집으로 가는 차 수도 많아졌다. 왕정위네 가정에서는 길성이가 갈 적마다 맛갈스런 음식을 식탁에 올렸고 그럴 때마다 순자는 제일 맛있는 요리를 집어서는 부친 먼저 길성의 입에 넣어 주군 했다. 그러면 왕정위 또한 “이 계집애야, 아버지보다 이 친구가 먼저냐”하며 악없는 농작을 걸기도 했다. 대단히 흡족한 기색이었다. 길성이는 경제적으로도 이 가정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 당시 길성이가 받는 수당은 인민페 6원이었다. 그래서 순자는 흔히 길성이와 농작을 걸 때면 “류쾌이챈(六块钱)”이라고 부를 때가 많았고 나중에는 아예 그 “류콰이챈”이 길성의 대 명사로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류콰이챈”인 길성이는 왕부인의 관심으로 양복 외에도 와이셔츠와 고급내복 등이 여러 벌씩 갖추었고 보고 싶은 책도 사볼 수 있었으며 부모님께 얼마씩 용돈도 부칠 수 있었다. 길성이와 순자의 사랑은 점점 무르익어 갔다. 따라서 길성이가 상해에 있는 왕육삼 정위네 집으로 가는 차 수도 많아졌다. 왕정위네 가정에서는 길성이가 갈 적마다 맛갈스런 음식을 식탁에 올렸고 그럴 때마다 순자는 제일 맛있는 요리를 집어서는 부친 먼저 길성의 입에 넣어 주군 했다. 그러면 왕정위 또한 “이 계집애야, 아버지보다 이 친구가 먼저냐”하며 악없는 농작을 걸기도 했다. 대단히 흡족한 기색이었다. 길성이는 경제적으로도 이 가정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 당시 길성이가 받는 수당은 인민페 6원이었다. 그래서 순자는 흔히 길성이와 농작을 걸 때면 “류쾌이챈(六块钱)”이라고 부를 때가 많았고 나중에는 아예 그 “류콰이챈”이 길성의 대 명사로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류콰이챈”인 길성이는 왕부인의 관심으로 양복 외에도 와이셔츠와 고급내복 등이 여러 벌씩 갖추었고 보고 싶은 책도 사볼 수 있었으며 부모님께 얼마씩 용돈도 부칠 수 있었다. 한편 길성이는 순자와의 관계를 부모님한테 털어놓을 때도 되였다고 생각, 오는 음력설 기간 순자를 데리고 집에 다녀 오겠노라고 연변일보사에서 근무하는 둘째 형님한테 편지를 쓰기도 했다. 바로 이럴 즈음 대만의 장개석군대가 “대륙수복”을 부르짖으면서 복건지구를 비롯한 대륙에 무장도발을 자주 감행했고 길성이가 공부하는 학교에도 변화가 생겼다. 갑자기 수업정지 통지문이 벽보란에 나붙더니 어느 날 밤 전체 사생들을 집합시켜 놓고는 과반수의 학원생들을 군용트럭에 실어 어디엔가 이동시키 것이었다. 그리고 그 며칠 뒤 또 이상과 같은 집합이 있더니 재차 적지 않은 학원생들이 떠나갔다. 이렇게 되자 길성이와 순자도 긴장했다. 순자의 부친 왕육삼 정위한테 여쭤 보았으나 그 역시 이 학교와 소속이 다른 지라 알리 만무했다. 그러자 여자인 순자는 매일 울리만 했다. 길성이는 순자는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순자, 울지 말어. 갈라져도 잠시 뿐일거야. 우리 서로 갈라져도 마음만은 절대 변치 말자구. 그리고 서로 연락도 하고 말이야.” 어느 날 그들 둘은 학교 뒤에 있는 공원으로 향했다. 둘이서 자주 만나던 아름드리 홰나무밑으로 다가간 그들은 나무에 “영원히 변치 말자”는 글자를 새기고는 앞으로 누가 먼저 이 곳으로 오면 자기의 이름을 새겨 놓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가 어느 야밤 삼경 학교에서는 제 3 차로 학원생들을 집합시켜 놓고는 명단을 불렀는데 그 중에는 길성이의 이름도 포함됐다. 길순이가 떠날 때 순자가 울면서 매달린 건 자질구레하게 늘여 놓을 필요도 없다. 사달은 길성이가 우는 순자를 달래다 보니 그만 상해에 있는 순자네 집주소를 적지 못한 것이었다. 길성이는 트럭에 오른 뒤에야 “아차!”하며 자기의 실수를 통탄했다. 그리고 “왜 미리 주소를 적어 두지 않았던고”하며 자신을 꾸짖었다. 이 실수는 후에 오래도록 길순이의 가슴아픈 후회거리가 됐다. ※ ※ ※ 그날 밤 무석에 있는 해방군 문화학교를 출발한 길성이이네 일행은 곧추 북경으로 향했고 북경에 도착한 후에는 장평현에 있는 북경공정병학원의 신입생으로 됐다. 당시 중앙군위에서는 소수민족 학원생들만은 복건전선에 보내지 않고 북경공정병학원에서 공부할 수 있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북경공정병학원에서 공부하는 기간 길성이는 연속 2 년 간 천안문광장에서 모주석의 검열을 받는 영광을 지니기도 했다. 이 역시 중국 조선족으로는 사상 첫 사람이 아닌가 싶다. 한편 북경에 있는 기간 길성이는 못내 순자를 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군사학원생이란 자유롭게 출장다닐 수도 없는 상황, 그러다가 1964년 이 학원을 졸업하고 심양군구에 배치 받아서야 출장기회가 생겨 상해에 있는 왕육생 정위네 집을 찾아 갔더니 집에는 이미 다른 가정이 살고 있었고 왕육생 정위는 이미 1선에서 물러나 행방이 묘연한 상황이었다. 그 뒤 어느 해엔가 길성이가 심양역 광장에서 무석 해방군 문화학교 시절의 동창생을 만나 순자의 행적을 탐문했더니 그녀는 이미 결혼했으며 심양군구의 어느 한 군병원에서 군의관으로 사업하고 있다는 것과 활달하던 그제 날과는 달리 몹시 과묵해졌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길성이는 순자한테 큰 죄를 지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때는 자신과 순자 모두가 이미 결혼한 몸, 그제 날의 로맨스에 연연하기보다 서로 각 자의 가정에 충실하는 것이 명지한 선택일 뿐이었다. 길성 선생은 오랫동안 이 일을 감추고 있다가 최근에야 부인과 자녀들한테 공개했다. 부인과 만나기 전의 일이기에 계속 감출 일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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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18
  • 대륙 "알리바바" "아마존" 을 제끼다.
    ■ 리포터 구자선여러분은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40인의 도둑과 알리바바를 알고 있을것이다.그런데 이 동화속 ‘알리바바’ 가 세상을 놀래키고 있으며 아마도 수년안에 그 이름이 전세계 가장 유명한 이름이 될것임을 확신한다.바로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알리바바가 지난해 처음으로 미국 이베이와 아마존의 규모를 넘어섰고 그 격차는 올해부터 훨씬 더 가파르게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전자상거래 분야에서도 무서운 기세로 폭풍 성장하고 있다. 최근 10년 사이 연평균 성장률은 100%를 훌쩍 넘는성장률로 전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일이다. 인터넷 가입률이 높아지고 스마트폰 기반의 모바일 기기 보급이 수직으로 늘고있기 때문이며 이런점에서 알리바바의 폭풍성장과 세계 1위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것이다. 이에 자극 받은세계 최대 온라인 쇼핑업체 아마존이 인터넷 강국인 한국에 상륙하기로 한 결정은 벌써부터 알리바바에 대한 경쟁구도에서 물러설수 없는 자존심의 다름 아니라 할것이다.중국 전자상거래 시장은 지난 10년간 연평균 120% 라는 경이적인 높은 성장세를 보였다. 지난해 시장 규모 1,900억 달러(약 212조원)로 전년 대비 66.5% 성장했다.중국 전자상거래 시장의 수직성장 배경에는 알리바바의 성공이 있다. 알리바바는 타오바오, 티몰 등의 계열사를 두고 온라인 쇼핑 시장을 주도해 나가고 있으며 2011년 말 기준 C2C(개인 간 거래:개인이 팔고 개인이 구매하는 방식) 시장에서 90.4%의 시장점유율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B2C(기업과 개인의 거래) 시장에서도 51.4%의 점유율을 차지하며 13억 중국 온라인 업계의 1인자로 그 위력을 떨치고 있으며 그 성공과 크기가 어디까지 이르게 될지 아직은 시작에 불과할 따름이다.여기에 알리바바의 창업주인 마윈 회장이 지난 5월10일 최고경영자(CEO) 은퇴를 선언하면서 알리바바가 증시 상장을 위한 준비 절차에 돌입한 것이란 소문이며 알리바바가 이미 세계 최대의 투자 은행인 미국 골드만삭스에 기업공개(IPO) 업무를 맡겼다고 한다. 이제 2014년 한해 미국 월가의 흐름은 “알리바바의 나스닥 상장”이란 초대형 이슈가 한해를 휩쓸며 FACE BOOK 이후 최대의 열기로 덥혀질 전망이다. 온라인 거래와 인터넷 홈쇼핑 등을 포함한 중국 내 전자상거래 규모가 2020년이면 43조8천억위안(약 8천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도는바 그때가 되면 이베이나 아마존과는 비교조차 할수 없는 세계 온라인 전자 상거래 업체의 블랙홀이 될것이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게 필자의 판단이다.또한 알리바바 연구센터는 지난해 전자상거래가 중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6%에 불과하였으나 2020년에는 16%까지 높아질 것으로 전망하지만 이는 최저 전망치에 불과하다. 중국 온라인 시장의 매력은 다음 4가지 분석에서도 나타난다. 첫째,온라인 매출 등을 포함한 온라인 시장 관심도및 호응도, 둘째,기술,·재정,·물류를 포함한 온라인 인프라의 구현 정도 셋째,디지털 환경 및 검열, 거래 규정을 포함한 관련 법령 정비, 마지막으로 소매 매출 위한 소비,구매 고객 시장 크기 4가지 지표로 평가한 이 자료에서 중국은 단연 1등으로 손꼽혔으며 지난해 이미 중국이 미국을 추월하고 전자상거래 시장의 선두 자리를 거머쥔 여세를 몰아 올해부터는 그 격차가 더욱 심하게 벌어질 것이다.중국 전자상거래 2020년 8천조원 전망온라인 소비의 급성장에는 스마트폰을 기반으로한 모바일을 구현하는 초고속 인터넷 보급이핵심이다. 2011년 중국의 인터넷 보급률은 38.3% 수준이었으나 2012년 42.1%까지 상승했다. 중국의 브로드밴드(광대역 통신망) 가입자 수는 지방의 인터넷 인프라가 개선되면서 2012년 말 기준으로 1억7800만명에 달했다. 인터넷 이용자 수도 5억6400만명에 이르게 되었다. 2012년 온라인 쇼핑 이용자 수는 전년 대비 21.4%가 증가해 2억4700만명에 이르렀다. 2012년 중국의 연간 1인당 온라인 이용자 소비 금액은 전년 대비 25% 상승해 5203위안(약 94만6천원)에 달하면서 온라인 거래를 통한 이용자의 지출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상승세를 타고 있다.알리바바가 거대 기업으로 성공할 수 있던 배경에는 중국 정부의 전자상거래 지원 정책이 있다. 중국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2011년 기준 알리바바를 포함한 중국 기업들의 C2C 시장 점유율은 99.4%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전자상거래 사업의 인허가를 대부분 자국 기업에만 내주고 있어 외국계 업체들은 중국 기업과 합작 설립 운영하거나 투자에 참여하여야 하는데 바로 야후와 재일교포 3세 손정의 씨의 소프트 뱅트가 알리바바의 대주주로 참여하여 60% 이상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사례인 것이다.구글에 밀려 생존조차 불투명 했던 야후와 소프트 뱅크 수뇌부들은 일찍이 미국에서의 피튀기는 생존과 사활보다 그당시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중국 온라인 시장에 주목하여 마윈 회장의 알리바바에 투자한 것이 불과 10 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전세계 온라인 상거래 업체의 절대지존이 되어가고 있는 알리바바의 전설을 이룬 1등 공신으로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알라바바는 2003년 설립 이후 더 많은 중국인들이 전자상거래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혁신을 모색해왔다. 우선 거래 수수료 무료 정책을 통해 판매자들의 온라인 판매 장벽을 없애면서 시장을 확대해나갔다. 둘째, '알리당당'이라는 메신저를 개발해 판매자와 구매자 간의 효율적인 거래가 가능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셋째, 사기거래 방지를 위해 '알리페이'라는 안심결제 기법을 개발 170 중국내 은행망을 통해 판매자와 구매자 간 “믿고 거래할수 있는 제도“ 로 보증해줬다. 이를 통해 의심많은 중국인들에게 안심하고 온라인 거래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 것이다.물론 중국 전자상거래에 있어서의 최대 화두는 빠른 배송 시스템 구축이다. 현재 알리바바는 현 중국 택배 물량의 60% 이상을 담당하고 있으며 폭발적 매출성장에 비례하여 빠른 택배의 배송망을 기하급수로 늘려가야 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가 될 것이다. 알리바바는 여기에 2020년까지 160 억 달러 (18조 원)를 투자해 중국 전역에 당일 배송 물류 네트워크를 구축한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알리바바는 중국에서의 성공을 기반으로 본격적인 해외시장 진출도 벌써부터 도모하고 있다. 홍콩, 대만, 싱가포르 그리고 말레이시아 위주로 시장을 확대하고 물류 및 결제 시스템 구축을 위한 파트너십도 계획하고 있다. 이와 함께 미국에서의 기업공개(IPO)에 대한 기대감이 천정부지로 치솟는데 그도 그럴것이 페이스 북이 2년전 나스닥 상장으로 기업가치가 1,500억 달러가 되었는데 중국에서 서비스가 되지 않고 수익모델도 아직까지 불안한 상태것을 감안하면 이미 아마존을 넘어선 세계최대의 온라인 시장의 절대 강자의 지위를 확보하였으며 지난해 이미 페이스북 보다 순이익을 훨씬 많이 기록한 알리바바에 온 지구촌의 자본가들이 얼굴을 외면할 까앍이 절대로 없기 때문이다.급변하는 온라인 시장 환경에서 혁신과 고객 만족은 생존의 문제다. 중국 전자상거래 시장의 빠른 외형적 성장 속에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혁신하고 변화하면서 고객 만족 극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알리바바를 전망하면서 알리바바의 성장과 성공이 미국을 넘어선 중국 대륙과 중국인의 성공 모습으로 자리매김 하길 기대해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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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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