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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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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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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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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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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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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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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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묘한 세계대백과(11)달은 어디에서 왔는가?
    달은 어디에서 왔는가? 달은 우리 지구에서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성구(星球)이며 밤하늘에서 우리가육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명랑한 천체이다. 그럼 달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미국의 “아폴로”호 비행접시가 갖고 돌아온 달의 암석표본을 화험해본 결과 사람들은 달이 지구보다 더 나이가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때문에 과학자들은 달은 가능하게 원래 하나의 태양주위를 도는 소행성이었다가후에 지구쪽으로 접근했으며 지구의 자기마당 반응에 의해 지구의 위성으로 되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감측에따르면 달과 태양계의 소행성 사이의 평균 밀도가 매우 접근해 있지만 이는 지구와의 밀도와는 다르다. 다른한 방면으로 달의 궤도와 지구의 궤도가 같은 평면에 있지 않다는 것으로서 비록 달과 지구가 “친밀”하고 “가깝다”지만 확실히 “낳아준 어머니”는같지 않다는 것이다. 달에 대한 요해가점차 심입됨에 따라 사람들은 달에는 인류가 생존함에 있어서 필요한 산소가 결핍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최근미국 화학가들은 일종 방안을 개발, 그것인즉 달에 있는 일종 광석을 가열하거나 전기를 통하여 산소를얻어 사람들이 그 곳에서 호흡하게 하고 또한 로켓의 연료로 쓴다는 것이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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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5-31
  • 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 (시리즈 7)
    ■ 김철균“1950년 6월 25일은 마침 일요일이었다. 평소같으면 일요일엔 아침에 늦잠을 잘 수 있었으나 그날은 새벽 날이 밝기전에 모두 기상하게 했다…”적정이 있으니 전시상태에 진입하라는 명령이었다. 아버지에 따르면 그날은 새벽부터 비가 구질구질 내렸다고 한다. 그렇듯 지꿎은 날씨에 아버지네가 진지에 들어가 전투태세를 마친 뒤 얼마 안되어 마침내 새벽 4시가 되자 천둥이 울듯 포소리가 요란하게 울렸고 붉은 신호탄들이 38선 상공의 여기 저기서 하늘로 올랐다. 한동안 지축을 뒤흔드는 포격이 지속되더니 뒤이어 또 탱크들이 굉음을 울리며 남으로 향했다. 드디어 최고사령부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한다.“남조선 괴뢰군 옹진반도로 북침 개시, 전 전선에 거쳐 반격할 것!”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때의 진격개시 암호는 “폭풍”이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상급 작전지휘부에서는 알 일이고 아버지네는 그런 건 알리 만무했다. 그저 명령에 따를뿐이었다. 인민군은 탱크의 뒤꽁무니를 따르며 남으로 쳐내려갔다. 얼마 뒤 “38선”이라고 쓴 나무패쪽과 철조망이 나타나자 진격의 선두에 선 탱크들은 그것을 짓뭉개면서 진격로를 개척했다. 한국군의 진지는 인민군 포병들의 조준사격에 하나 둘씩 하늘로 날아났고 군인들은 죽은 건 죽고 살아남은 사병들은 뿔뿔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인민군의 진격은 파죽지세였다. 38선을 돌파한 뒤 미구에 진격하는 인민군 앞에는 웬 강이 나타났다. 아버지는 아마 그 강이 소양강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설명에 따르면 인민군 선두부대가 강을 건너려고 하니 포탄이 우박처럼 날아왔고 강 남안에서는 한국군들이 진을 치고 인민군의 도하를 막고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간, 인민군은 탱크부대의 엄호하에 한국군을 쉽게 물리치고 강을 건넜다. 이렇게 38선을 돌파한 그날로 인민군은 춘천, 홍천을 지나 원주의 북쪽고지 코밑까지 밀고 내려갔다. 이어 진격부대 앞에는 또 한갈래의 강물이 나타났다. 강물은 깊고도 물살에 몹시 거세여서 진격로에 있어서의 커다란 장애로 됐다. 당시 38선에서 후퇴한 한국군은 바로 이 강을 천연방어선으로 간주하고 진지를 구축했던것이다. 한국군은 이 천연방어선을 이용하여 결사적인 저항을 했다. 미구에 어디선가 미군기까지 날아와 마구 기관총소사를 했다. 미공군은 인민군의 진격을 저애했을뿐만 아니라 보급로를 마구 끊어놓을 잡도리었다. 더군다나 인민군의 진격을 가로막는 한국군은 명성이 자자한 “왕패부대”인 한국군 “백호부대”었다. 맹목적으로 공격만 하다간 사상자만 낼뿐이었다. 인민군은 날 어둡기를 기다렸다가 별동대를 조직하여 몰래 강을 건너서는 한국군진지 코밑까지 침투해들어갔다. 새벽녘이 되자 한국군은 다리를 폭파하려고 폭약을 나르는 것이었다. 인민군별동대는 즉각 따발총을 휘두르면서 다리를 폭파하러 나온 한국군을 섬멸했다. 뒤이어 강북쪽에 있던 주력부대도 총 공격을 발동했다. 인민군 별동대는 주로 교두보에 진을 치고 있는 한국군을 조준사격으로 섬멸, 주력부대의 교두보 탈환을 유력하게 지원했다. 한국군은 다리폭파목적이 뜻대로 되지 않자 다리위에 폭약을 되는대로 던지고는 퇴각했다. 다리는 한쪽모퉁이만 조금 파괴되었을뿐이었다. 인민군은 노도와 같은 기세로 다리를 건넜다. 계속해서 인민군 선두부대가 파죽지세로 원주시가지에 쳐들어가니 미처 퇴각하지 못한 국군만이 남아 건물을 엄페물로 저항할뿐이었다. 하지만 인민군포가 조준사격으로 몇개 거점을 날려보내자 나머지 국군들은 모두 백기를 들고 투항했다. 인민군은 계속 승승장구로 진격하여 전쟁이 터진 이튿날 저녁 무렵에 원주를 완전히 장악했다. 뒤이어 아버지네 부대에는 휴식정돈명령이 떨어졌다. 그날 밤 아버지네가 원주 시가지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무기와 탄약을 정리하는 한편 휴식을 취할 때 갑자기 콩볶는듯한 총소리와 더불어 포탄이 여기저기에 날아와 터지었다. 아버지네는 한국군의 꼬임에 들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군단지휘부에서 아버지네더러 원주 시가지에서 휴식하게 한 것은 “범을 굴에서 끌어내기 위한 전술”이었다.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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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5-30
  • 해외견문 시리즈(7)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
    ■ 김철균 1991년 6월초 우루과이 몬테비데오항을 출발한 우리네 원양선박 “코리안스타”호는 스페인 카나리아군도의 항구도시 라스팔마스를 향해 22노트 속도로 줄기차게 항행하고 있었다.그 때 나는 싸롱뽀이라고 일컫는 주방장조리수로 일하고 있었는데 승선한지 얼마 되지 않는지라 선박 상식 및 본선시스템 장악에는 거의 마이너스나 다름없었다.그러던 어느날 저녁이었다. 설겆이를 금방 끝낸 나는 이튿날 선원들이 마실 보리차물을 엘리베트에 싣고 주방아래층에 있는 냉장고로 가져가게 되었다. 그 100킬로그램도 잘되는 물통을 간신히 움직여 영하 10도가 넘는 생선고에 넣고 돌아서는 순간 나는 “아차!” 하고 비명을 질렀다. 워낙 이 냉장고의 출입문은 안쪽에도 비틀어 여는 손잡이가 있었댔는데 얼마 전에 그것이 끊어지는 통에 밖에서는 열 수 있지만 안에서는 도무지 열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와 주인장인 성이악씨는 조기장한테 용접해서 달아달라고 몇번이나 청구했으나 그가 바쁘다는 구실로 달아주지 않았기에 잠시 문틈에 각목을 끼워놓고야 드나들군 했다. 헌데 그날 밤 내가 깜빡 잊고 그것을 끼워놓지 않았기에 배가 파도에 흔들리면서 그만 문이 꽁꽁 닫겨버리고 말았다.그 때 내가 입고 있은 옷은 반팔적삼에 반바지었고 신은 슬리퍼, 그것도 오전이나 오후같으면 주방에서 일하던 내가 잃어졌다고 선내가 후닥닥 뒤집히도록 찾을 것이었으나 저녁식사까지 끝난 그 때에 와서 선원들이 나를 찾을 까닭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튿날 아침에야 실종된 나를 찾는다면 영하 10도가 넘는 냉장고안에서 속옷 바람인 내가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뒤이어 나의 몸은 추위보다도 죽음이라는 공포 때문에 무섭게 떨리었다. 일찍 어리적부터 갖은 고생을 다 겪어오면서도 삶에 대한 애착만은 그만큼 집요했던 내가 아니었던가?! 또한 고생끝에 낙이라는 말만을 믿었지 죽음이란건 생각조차도 해보지 못한 나였다. 아니, 나의 일생에는 죽음이라는 개념조차 영원히 있을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는터였다.헌데 이것이 무슨 꼴이란 말인가! 그것도 33살이라는 한창 나이에, 눈을 질끈 감고 2년만 참고 견디노하면 외화를 벌어 환고향해서는 옛말하며 살겠는데 운명은 왜 이다지도 나를 괴롭히는지. 죽기에는 너무나도 값없었고 슬프고 아까왔다. 며칠 전만 해도 몬테비데오의 디스코클럽에서 한 밤색머리 아가씨가 그렇게 칭칭 감겨드는 것도 그 개도 안먹는 돈과 서푼어치도 안가는 정조 때문에 오입 한번 못해보고 죽은 후에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얼마전에 나는 김아무개라는 고향친구 한명이 포클랜드바다에서 실종됐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역시 나처럼 주방에서 일했다는 그 친구, 얼마 안되는 땅만 부쳐서는 앓는 어머님과 두 자식의 뒤바라지를 도무지 할 수 없어 나이 40살 넘어 배에 올랐고 집에서는 다쳐보지도 못했던 칼도마와 식칼과 밥주걱을 잡아보게 됐던것이다. 성정이 고지식하고 말수가 적으며 남들이 말보루나 “8.8”표 담배를 피울 때도 “나야 뭐 자네들보다 입장이 다른게 아닌가”하며 몰래 집에서 갖고간 엽초를 굵직히 말아서 피우던 사나이, 하지만 마음씨만은 비단결처럼 고왔는바 누가 촐촐해하면 한밤중에라도 일어나 라면이나 빵같은 참을 만들어주군 한데서 연변선원들은 물론 밥투정을 많이 하는 한국선원들마저도 “모두가 김씨처럼 일한다면야”하며 좋아해주던 친구였다. 그 날밤도 그는 같은 회사의 선박끼리 접선하자 본선 선원들한테 김치라도 얻어다 먹이겠다고 두 선박사이에 임시로 놓은 다리를 건너갔던 것이다. 그런던 그 친구가 김치통을 들고 다리를 건너 돌아오다 바다에 떨어졌는지 아니면 그 무슨 꿈같은 환각에 빠져 스스로 차디찬 바다물속에 뛰어들었는지? 여하튼 두 선박을 발칵 뒤집었으나 없는걸 보면 바다에 떨어진 것이 분명했고 죽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 후 아무리 선박에서 의연금이 모아지고 고동을 울리며 애도를 표시하고 또한 보험회사측으로부터 거액의 보험금이 조달될테었지만 그것이 죽은 이한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며칠 안지나 선원들은 또 다시 웃고 떠들고 즐거움과 쾌락을 만끽할테고 선박 역시 스켓줄에 따라 제나름대로 운행했을 것이 아닌가!!…그러니 죽지 말아야 했다. 나는 위에서 듣지 못할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목이 터지도록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밖으로부터 어슴프레 들려오는 것이란 기관실의 엔진동음뿐 인척기라고는 없었다.나는 다시 냉정해졌다. 이렇듯 험악한 환경에서 살아나자면 몸이 얼지 말아야 했고 그러자면 몸을 움직이며 일해야 했다. 오직 그렇게 연장하는 시간이 길어야만이 구원될 희망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나는 냉장창고안에 채곡채곡 쌓여있는 생선박스를 나르기 시작했다…사람의 삶의 의욕이란 참으로 놀라왔다. 근 한시간이나 되는 사이에 나는 35킬로그램이나 되는 생선박스 100여개를 몇번이나 옮겨놓았는지 몰랐다. 이 구석의 것을 저 구석으로, 저 구석의 것을 다시 이 구석으로 이렇게 몇번 반복하니 얼굴에서는 땀이 흘렀고 반팔적삼도 흠뻑 젖었다.허나 삶의 희망은 갈수록 묘연하기만 했다. 게다가 땀이 흐르는 몸과는 달리 팔과 다리의 살은 닭살처럼 되었고 배가죽이 뒤잔등에 가 붙을 지경이었다. 또한 아무래도 죽겠는데 공연히 신고한다는 생각까지 들면서 도무지 힘이 나지를 않았다. 나중에는 팔과 다리의 살이 퍼렇다 못해 검푸른색을 띄더니 힘줄이 몽땅 한곬으로 굳어지는듯 했고 아래윗 입술이 꽛꽛해나면서 소리도 잘 나가지 않았다.사람이 죽는 과정이란 과연 이렇구나 하고 생각하니 그 다음부터는 내 인생이 슬픈지 아까운지를 분별할 수 없었고 그닥 고통스럽지도 않았으며 살려달라고 소리치고도 싶지 않았다. 다만 지나간 회포들이 활동사진처럼 되살아나면서 마음은 몹시 괴로와났다. 어릴 때 남의 집 살구나무에 올라가 살구를 훔치고도 나무가지까지 꺾어놓던 일, 평소에 친구들 사이에 이득을 더 보겠다고 옴니암니하던 일, 선박에 승선해서도 밥이 설었다고 투정질하는 기관장과 싸우던 일 모든 것이 마음에 걸렸다.인생이란 한번 가면 영영 다시 오지 않는 일장춘몽이라 살아있을 때 모든 애락을 즐기라고는 하지만 죽음과 시간을 다투는 그 때에 와서는 이승에는 뭘 남기고, 저승인 염라국에 가서는 뭘 선물하겠는가 하는 것이 몹시 걱정되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세상에 태어난다면 세상의 모든 이들한테 사랑을 주기 위해 진짜 자신을 희생할 것만 같았다. 병든 사람, 장애인, 버림받은 사람과 지어는 나와 등졌던 사람들과도 서로 아껴주고 양보하고 이해하면서 울고 웃으며 살고 싶었다. 아, 나한테 다시 한번 삶의 권리가 부여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죽음이란 거의 결정해 놓은거나 다름 없었다. 헌데 어떻게 죽는가 하는 것이 나한테있어서는 자못 중요한 마지막 과제로 남아 있었다. 남들이 말을 빈다면 죽을 바엔 심술이라도 피우고, 예하면 보리차물안에 오줌이나 똥이라도 내갈기고 죽을 수도 있었지만 그건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아니, 그건 그렇다 하고 나는 거리에 아무렇게나 내버려진 시체처럼 몸을 꼬부리거나 네각을 쫙 벌리고 죽을 수가 없었고 그런 몰골을 찍은 사진을 고향사람들한테는 더욱 보일 수가 없었다. 죽어서 저승으로 가더라도 어엿한 모습으로 염라대왕과 만나야 했다.나는 카톤박스를 냉장고바닥에 몇벌 펴놓고는 억망이 된 옷과 몸과 머리칼을 다듬었다. 그러고는 비장한 결심으로 죽기 전의 제일 마지막 일, 쇠꼬챙이로 페인트칠을 한 벽에 유서란것을 쓰기 시작했다.유서 곧 닥쳐오게 되는 죽음을 앞두고 나는 죽음이 무서운 것보다 살아생전에 계획했던 일들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하여 몹시 괴롭다. 바로 이 시각 나는 시간을 헛되히 흘러보낸 그제 날이 몹시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단 하루의 한시간과 1분 1초과도 소중히 여기고 좋은 생각과 좋은 말 그리고 좋은 일을 많이 했더라면 죽더라도 조금은 위안이 되겠지만 인젠 늦었다…여기까지 써내려가던 나의 눈앞은 급기야 밝아졌다. 글쎄 내가 유서라고 쓰던 벽 오른쪽에 숱한 버저들이 붙어있었던 것이다. 나는 마치 힘으로 되는 일처럼 그 버저들을 죽어라고 눌러됐다. 아니나 다를가 이윽해서 윗층으로부터 투닥투닥하는 발걸음소리가 들리더니 드디어 냉장고문이 확 열리였다.제일 먼저 뛰어들어온 사람은 통신장 이덕수씨와 용정에서 간 기관원 김영림군, 그 다음의 일은 나는 감감부지었다……워낙 본선의 냉장창고, 어창, 기름탱크안, 기관실 등 위험구마다에는 모두 비상용버저들이 달려 있었는데 거기에는 SOS란 영문으로 된 구조신호 표시까지 적혀 있었고 그 소리는 또한 사무실, 조타실과 1항사의 침실에까지 울리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기실 아무렇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숱한 신고를 하며 유서를 쓰는 추태극까지 벌였으니 누구를 탓하랴. 무식한 자신을 탓하는 수밖에 없었다.그 일이 있은 후부터 나는 모든 행동에서 술덤벙 물덤벙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자신을 죽음과 연결시키면서 조심하게 되었고 항상 앞날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그날 밤도 나는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무슨 충동을 받았는지 후닥닥 일어나서는 되는대로 글줄을 내갈기기 시작했다.하나님한테 올리는 편지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아들인 기독교신자는 아니지만 저의 일생은 철두철미한 당신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에 못지 않는 색채를 띠고 있는 것 같습니다.초년에 조실부모하고 중년에 상처하고, 만년에 자식을 앞세우는 것이 인생의 3대 불행이라 했은 즉 저의 인생이 아마 그런가 봅니다.비록 비천한 인생이었건만 저의 삶의 의욕은 그 어느 인간보다도 강했습니다. 의사로 돼보고도 싶었고 미술가와 음악인으로도 돼보고 싶었으며 커서 자립해서부터는 작가로 돼보려는 꿈에 자리를 굳히고 대학 통신학부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헌데 모든 것은 그 개도 안 먹는다는 돈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백지상태에서 이룩된 결혼, 무직업자인 안해와 제 2세의 탄생,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서 돈과 인생이 그토록 얼기설기 얽혀있을 줄은 저는 참으로 몰랐습니다.그 뒤 저는 잠시 작가로 되려는 꿈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가정도 이끌지 못하는 주제에 글을 쓰는 작가로 된다는 건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었으니깐요. 하기에 저는 먼저 경제혁명부터 해야 했었습니다. 또한 문학탐구에 노력한 대가면 저는 장사도 훌륭히 잘해낼 수 있으리라 굳게 믿는터였습니다. 허나 문학수업이 힘든가 하면 경제혁명 역시 뜻밖으로 곱절 힘들었습니다. 등치고 간 뻬먹는 각양각색의 간상배들, 저의 처세술로는 도무지 그들을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 결과는 뻔했습니다. 여편네와의 이혼과 엄마와 떨어진 불쌍한 자식, 매일 술과 한숨으로 희스테리적으로 살아온 인생, 벌자던 돈은 못벌고 명성만 납작하게 된 것이 그 때의 저의 자화상이었습니다. 그러자 우리의 사회는 물론 저의 친척과 형제들마저 저를 외면하였습니다.개도 급하면 담장을 뛰어 넘는다고 결국 저는 작가가 아닌 “배놈”으로 되고 말았습니다.며칠 전에도 저는 죽을번한 고비를 넘었습니다.마도로스 “배놈”으로 있는 동안 앞으로 또 이런 죽을 고비를 몇번이나 넘어야 할는지? 허나 저는 이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모험이 있어야 성공이 있고 세상을 돌아보아야 안계도 트이는 것이 아니겟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요. 이 세상 여러 인종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저처럼 비행기를 수십시간씩 타고 대양 건너 대륙을 가로 지른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되며 그 중 저처럼 글깨라도 되는 사람은 더욱 몇이나 되겠습니까? 특히 제가 승선한 “코리안스타”호는 비정기선으로서 세계의 그 어느 곳이든지 다 갈 수 있으니 저한테 이처럼 좋은 기회가 두 번 다시 없을 줄을 저는 잘 알겠습니다.그러니 제가 작가로, 되려 하는 것보다도 저의 모든 생활이 서로 하여금 글을 쓰도록 핍박하는 것 같습니다.저는 꼭 다시 글을 쓸 것입니다. 아니, 제가 다 쓰지 못하면 후세들이라도 계속 쓰게 할 것입니다.지금 북으로 가면서 날씨는 점점 무더워집니다.이제 며칠후면 곧바로 라스팔마스에 입항한다는데…아, 피곤하군요. 열렬한 기독교신자가 아닌 이상 저도 내일의 근무 때문에 잠을 자야 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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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5-30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11)
    대왕궁의 서류 소속 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태국, 지점: 방콕시 중심 함의: 수백년간 거쳐 내려온 태국의 궁정건축예술을 집대성한 궁전 대왕궁은 “대황궁” 혹은 “고궁”이라고도 하는데 방콕의 소피야하와 미남하의 합수목에 있으며 그 부지면적은 약 22만평방미터에 달한다. 대왕궁의 건축물은 1782년에 건설하기 시작, 태국 방콕왕조의 1세부터 8세까지 사용하던 왕궁이다. 궁전은 1784년 제일 먼저 일떠선 궁전으로 아마린궁(阿玛林宫)이 건설되었는데 라마 1세가 궁내로 입주하였다. 그 뒤 역대 군주들이 부단히 대 왕궁을 확건함에 따라 비로서 현재의 규모를 가지게 되었다. 대왕궁은 아마린궁, 차크리궁전(节基宫), 두싯 마하 프라삿궁전 (律实宫) 등 몇몇 특색이 구비한 궁전으로 포함되었는데 전반 건축물은 휘황하고도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문물이 집중되었고 정원은 그림과 같은 환경을 이루고 있다. 섬라식풍격 대왕궁은 일련의 섬라식(暹罗式)풍격의 건축물로 구성되어있다. 궁정건축은 흰색을 위주로 네 둘레의 담장은 높이가 약 5미터, 길이가 1900미터에 달하는 흰색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아마린궁, 차크리궁전 (节基宫), 두싯 마하 프라삿궁전 (律实宫) 등 몇몇 특색이 있는 궁전은 동쪽으로부터 서쪽으로 늘어 섰는데 일색의 록색타일로 지붕선을 긋고 있으며 자홍색기와로 지붕을 덮고 있어 마치 지붕에 날개가 돛친 듯 하기도 하다. 그리고 대왕궁 내부는 부각된 벽화들로 벽체를 이루고 있으며 진주를 박아넣은 아름다운 옥돌들로 눈부실 정도이다. 자태가 각이한 세개의 궁전 세개의 궁전 중 차크리궁전은 3층으로 된 건축물로 대왕궁의 주전당으로 옥상의 세개의 뾰족 추형탑은 절기궁의 가장 눈길을 끄는 특색으로 되고 있다. 두싯 마하 프라삿궁전 역시 아주 특색이 있다. 궁의 정면은 십자형으로 궁내에는 역대 태국 국왕과 왕비들의 골회가 안치되어 있다. 그 외 아마린궁은 태국 군주가 부하들을 접견하는 궁전으로 현재 여전히 국왕 등극시 의식을 거행하거나 기타의 경축활동도 벌이군 한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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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5-23
  • 해외견문 시리즈(6)젊은 마도로스의 수기
    ■ 김철균 남미주의 포클랜드해상, 내가 동료들과 함께 소련선박 “프리오까츄사”호에 편승하여 포클랜드 해상에 도착해 20여일간 그 곳에서 장기조업하는 한국 선일해운의 “태풍호”에 올라 근무하다가 다시 선일해운에서 두번째로 큰 선박인 “코리안스타”호에 전선(转船)한 것은 1991년 4월말이었다. 연변에서는 4월이라면 한창 아지랑이 피여나면서 바야흐로 해동이 되는 봄철이지만 서경 60도, 남위 50도 되는 남미주이 최남단에 위치한 포클랜드군도는 그 때가 바로 겨울철에 들어서는 계절이었다. 8월까지 겨울이 무려 5개월이나 지속된다는 포클랜드ㅡ 그렇다면 9월부터 봄, 여름, 가을 이렇게 계절이 바뀌어진다는 말인데 그것이 우리 연변과는 딱 정반대되는 적도 이남의 특이한 계절이었다. 그리고 우리 중국은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이렇게 남쪽으로 갈수록 더워지지만 그 곳은 남쪽으로 갈수록 추워지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 때 “코리안스타”호는 한창 작업선으로부터 냉동오징어를 받아싣는 전재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본선의 선원이래야 24명, 거기서 선장, 기관장과 주방장을 빼면 전재일군이래야 21명뿐이었다. 헌데 그 21명마저 A, B, C조로 나누다보니 한개 조에 고작 7명뿐이었다. 그리고 이 3개조가 교대작업을 해야 했다. 즉 A조와 B조가 두개 어창에서 동시에 작업하는 사이에 C조는 4시간 휴식하다가 A조의 작업이 끝나면 교대를 받고 A조 또한 4시간 휴식하고는 B조를 교대받고…이렇게 매개 조가 8시간 일하고 4시간씩 휴식하는데 그 휴식하는 4시간 사이에 세수하고 밥을 먹고 잠도 자야 했다. 이렇게 하루 24시간 중 16시간씩이나 일하면서 연속 작업을 들이대는 선박은 포클랜드해상에서는 오직 한국선박들뿐이었다. 사람들은 어선은 작업조건이 열악하고 노동강도가 엄청나게 크기에 탈만한 선박이 못된다고 했다. 헌데 유독 전재작업시만은 우리 냉동운반선의 작업이 몇 배나 더 간고하였는바 어선에서 그런 일은 일 같지가 않았겠지만 우리들만은 그것이 생사박투나 다름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선은 선원이 많은데다 300 ㅡ 400톤쯤 되는 화물을 우리한테 넘겨주기만 하면 그만이었지만 우리는 그 수자를 갖고는 냉동어창의 하나도 채울 수가 없었다. 그러니 또 다른 어선과 접선을 해야 했는데 적재량이 8000여톤이 되는 우리의 선박 주위에는 매일과 같이 4 ㅡ 5척의 어선들이 몰켜 있으면서 화물의 전재작업을 재촉하군 했다. 한척의 어선에서 넘겨주는 화물을 다 받아실으면 또 다른 한척이 들이닥치는 것이 마치 가렬처절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선원 7명이 30여명이 넘겨주는 화물을 다 받아실으면 또 새로운 30여명의 “공세”가 개시된다. 이렇듯 거듭되는 “공세” 앞에서 우에서 떨어지는 냉동물고기에 얻어맞아 머리가 터지는 사람, 지치다 못해 작업교대 후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사람 등으로 별의별 사람이 다 있었다. 그러다가 스페인 선박이나 타이완의 선박일 경우라면 그들이 화물을 넘기는 속도가 늦기에 그래도 윤번으로 1명씩 잠간이나마 숨을 돌릴 수가 있지만 한국어선일 경우에는 어림도 없었다. 짐을 단 크레인(기중기)이 어찌도 빨리 넘어오는지 원래의 것을 채 쌓기도 전에 자꾸만 넘어와 작업이 늘 혼란에 빠지기가 일쑤였고 또한 간신히 쌓아놓은 것이 배가 파도에 기우뚱거리면서 무너져내릴 때면 너무나도 억이 막혀 막 앉아서 통곡하고만 싶었다. 그러다보니 우리 선박에서는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다 일해야 했다. 왜냐하면 육지같으면 일군을 얼마든지 보충받을 수 있겠으나 바다에서는 단 한명의 일군도 보충받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또한 21명 선원들이 누구나 다 크게 작게 상한 상황에서 그 어느 누구를 딱히 돌볼 수도 없었다. 그 가운데서 1항사, 통신장, 냉동사와 주방장은 다른 여느 선원들보다 곱절 더 수고해야만 했다. 1항사와 통신장은 작업은 작업대로 하면서도 전반 작업량과 화물의 질 등을 완벽하게 체크해서는 서류를 작성하여 하루에 한번씩 본부에 팩시를 날려야 했고 냉동사는 매 어창의 냉동상태를 수시로 살펴야 했으며 주방장은 하루 세끼의 정식을 끓이는 외에도 세시간에 한번씩 라면 혹은 빵같은 참을 만들어서는 선원들한테 공급해야 했기에 잠이란 거의 잘 수가 없었다. 심지어 선박의 마스터로 불리우는 선장과 기관장도 이 때만은 말단선원과 다름이 없었다. 선장은 두툼한 방한복에 진눈까지를 흠뻑 맞으며 크레인을 조종하기도 하고 호르래기를 불면서 지휘하기도 했으며 기관장은 반질반질한 기름옷을 입고 엔진룸의 운행을 담당하는 한편 수시로 어창에 내려와 화물을 나르기도 했다. 이쯤이면 사람들은 진눈까비가 흩날리는 포클랜드 해상의 작업현장에 대해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이렇듯 고양이발도 빌려쓸 바쁜 환경속에서 우리 중국 조선족선원들은 밥술을 놓기가 바쁘게 잠에 곯아 떨어졌지만 한국선원들은 사타구니가 근질거려 그것을 해소할 구멍수를 찾군 하였다. 때마침 머나먼 우루과이로부터 창녀들을 실은 원정봉사선박 한척이 포클랜드 해상으로 들이닥쳤는데 이는 섹스에 굶주린 한국선원들의 두눈을 화등잔처럼 만든 것은 불보듯 뻔했다. 그날도 내가 금방 밥술을 놓은 뒤 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선박의 2등 기관사인 서춘철씨가 찾아왔다. “여보게 연변김씨, 갑시다. 오늘 오래간만에 장가나 한번 들어 봅시다요.” 허나 잠에 빠지면 꿈을 꿀 사이도 없는데 무슨 여가에 여자를 다 밝히랴. “뭐, 장가요? 2기사님은 그것이 아직도 힘 있는가요? 저의 그것은 진작 쓸모없는 고기덩어리가 돼버렸는걸요.” “아하, 그래도 그 힘은 따로 있다니깐. 왜 돈이 없어 그래요? 자, 내가 돈주머니를 풀어헤칠테니 어서 갑시다.” 그러면서 그는 그 배에 가면 나이트클럽처럼 꾸민 홀에서 창녀들이 출연하는 쇼를 벌리는데 나체춤을 추는가 하면 직접 남녀가 어울려 섹스를 하는 장면도 있고 남녀가 즐길 수 있도록 방도 호텔방처럼 꾸민 방이 많다면서 이는 해상에서 고생하는 마도로스들을 위한 특별위문봉사나 다름없다고 했다. 순간 나의 머리속에는 태평양전쟁시기 수많은 반도의 여성들이 “정신대”로 끌려가 일본군들의 놀이개로 됐다는 책을 읽은 기억이 떠올랐다. 하나는 강제로 끌려갔고 하나는 자원에 의한 것이나 모두가 돈의 노예로 된 창녀들의 운명,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더욱 그 곳으로 갈 수가 없었다. 헌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섹스에 시달리면서도 한국선원들은 일은 일대로 했다. 하긴 세계에서 한국인들처럼 술도 잘 마시고 여자도 되게 밝히는 인종도 많지 않겠지만 그래도 한국은 자기 나름대로 크게 발전한 건 사실이며 이것이 곧바로 노동을 사랑하는 한국인 근성의 결실인듯 싶어진다. 이렇듯 숨가쁘던 26일이 지나 본선은 드디어 8000톤이란 해상전재작업을 끝마치고는 포클랜드를 떠나게 되었다. 헌데 그때까지 우리 선박의 적재량과 비슷하고 또한 일도 거의 동시에 시작했던 소련선박은 작업량의 절반을 좀 더 완수했을 뿐이었다. 소련 선원들은 덩치도 우리보다 더 컸고 수자도 본선보다 훨씬 더 많았지만 한국선원들의 놀라운 작업속도를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알고 보면 그것은 크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우선 소련선박에서는 선장, 당비서와 보안담당 그리고 잡부아줌마들이 벌써 작업을 탈리하지만 본선에서는 선장 혼자서 이 세사람의 일을 대체하고 있었고 한국선박에는 빨래하고 청소하는 잡부아줌마들이 없기도 했거니와 있다 해도 편히 놀게 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또한 소련선원들은 일을 하다가도 위스키 병나발을 부는가 하면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예사로운 일로 되었는데 그것은 지난 세기 70연대에 우리가 매일같이 대회전을 부르짖으면서도 뚱딴지 같은 소근장활동과 대비판을 하던 것과 형식이 다를뿐 성질은 그렇게도 비슷했다. 하지만 한국인들한테는 노동이면 곧 노동이지 절대 다른 것일수 없다는 것이 천성적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 실례로 한국해운회사들에서는 흔히 일본같은 나라들에서 페선시킨 선박들을 가져다 수리해서 몰고 다녔는데 선일해운만 해도 선령이 20년 이상되는 선박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했다. 수리해서는 몰고, 몰다가는 또 수리하고 여하튼 한국인들처럼 쉴 사이 없이 일하는 인종도 세계사에 드물 것 같았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5-23
  • 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 (시리즈 6)
    ■ 김철균 동난전야 1950년 6월 10일을 전후하여 아버지가 소속된 조선인민군 제7군단내에는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한다. 서해쪽 옹진반도 부근의 38선에서 자주 남북간의 충돌이 생기고 있으며 한국군쪽에서 수차 북을 향해 도발을 감행한다는 소식이 전해옴과 동시에 아버지네가 있는 동부에서는 우리 인민군부대가 38선쪽으로 집결되고 있었으며 아버지가 소속된 7군단 역시 원산에서 금화쪽으로 이동하였다. 금화에 도착하니 포탄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포진지의 포들은 모두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금화에 도착한 군사단은 인차 며칠간 먹을 수 있는 건량을 나눠주고는 인차 진지에 돌입해 전투태세를 갖추었다고 한다. 그 때까지 평양에 있는 최고사령부에서는 여전히 “남조선괴뢰군이 북침 가능성이 크니 격퇴할 준비을 잘 갖추라”는 명령이 자주 하달됐다. 당시 부대에는 한가지 노래가 유행되었는데 아버지한테서 들은 바로는 그 가사는 다음같다. 오랫동안 이곳 소식 전해주지 못했소38선이 이 아들이 건강합니다사나이답게 싸워서 사나이답게 죽으리부모님께 다시 한번 맹세합니다무궁화꽃 피는 앞산위의 소나무소나무는 이 아들의 절개랍니다눈날리는 겨울밤, 빗뿌리는 여름밤이 아들이 용감하게 싸워 이겼소……그러던 어느 날, 평양으로부터 한 고위급 장군이 아버지네 7군단으로 찾아왔다고 한다. 그 때 누군가 그 장군이 중국 팔로군에서 포병퇀장을 하던 무정 장군이라 했다. 무정 장군 ㅡ 아버지로서는 자주 들어보던 인물이었지만 지척에서 보기는 처음이었단다. 무정 장군은 7군단 장병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했다.“동무들, 동무들은 중국에서 나온 부대이기에 전투경험이 아주 풍부할 것이라 믿어지오. 조국에 나온 뒤 현재 많은 면에서 차별 받고 또 섭섭한 일도 많겠지만 참기를 바라오. 모든 것은 조국의 이익을 염두에 두란 이 말이오. 그리고 당신들 모두가 조국통일이란 이 대업을 이루기 위하여 조국에 진출했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랄뿐이오……”(조국통일이라니 그럼 전쟁이 기필코 터진단 말인가?! 그럼 전쟁이 터지면 곧바로 통일전쟁이고, 남조선에서 북진할 수도 있고 우리가 쳐내려갈 수도 있단 말인가?!)당시 아버지의 뇌리속에는 오만가지 추측이 들었다고 한다. 결국 아버지는 남에서 쳐올라오든, 북에서 쳐내려가든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판단이 서게 됐던 것이다. 그리고 무정 장군이 다녀간지 얼마 안되어 인민군협주단의 위문공연단이 아버지네 7군단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거기에서 아버지는 인민군협주단 인솔자인 원 팔로군 출신의 정율성이란 사람도 보게 되었다. 팔로군 행진곡과 조선인민군 군가를 지은 유명한 음악가 정율성, 헌데 아버지가 본 정율성은 많이 젊은 사람이었고 인물도 아주 수수한 편이었단다. 저렇게 수수한 사람이 어떻게 두 나라 군대의 군가를 다 지었지? …한편 밤만 되면 인민군 부대들이 육속 38선 부근에 집결했다. 거기에는 20여대씩 편대를 무은 탱크부대도 있었다. 전쟁은 기필코 일어날 것이었다. 단 시간문제였고 어느 쪽에서 먼저 도발하는가가 수수께끼였다… 드디어 1950년 6월 24일 저녁, 부대는 생활개선을 했다. 사병당 육류로 만든 요리 4그릇씩 차례졌고 4명당 술 한병씩 배분됐다. 실로 오래간만에 있은 생활개선이었다. 하지만 진작 중국에서 전쟁의 세례를 겪어보았던 아버지와 동료들은 그것이 불안해났던 것이다. 그것은 결코 까닭없는 생활개선이 아닐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밤 아버지네는 부대의 명령에 의해 여느 때보다도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며 다르다면 옷을 입은채로 잠자리에 든 그 것이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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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5-22
  • 해외견문 시리즈 (5)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
    ■ 김철균 푸르른 달빛이 파도에 부서지면/ 파이프에 꿈을 실은 첫사랑 마도로스// 뎃기에 기대서면 그날밤이 그립구나/ 항구마다 정을 두고 떠나온 사나이// 그래도 첫사랑 맺은이는 잊을 길 없네… 매번 이 한국가요를 들을 때마다 나는 지난 세기 90연대 초반에 원양화물선을 타고 세상이 작다하게 6대주 4대양을 누비던 마도로스 생활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마도로스ㅡ 마도로스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가없이 넓게 펼쳐진 바다와 로맨틱한 꿈을 주는 항구를 연상케 된다. 오늘은 태평양에서, 내일은 대서양에서 이 세상이 작다하게 주름잡고 다니는 바다의 신사, 아 얼마나 멋진 바다의 사나이들인가! 허나 마도로스인 우리들한테는 항상 낭만과 기쁨과 웃음만이 뒤따른 것은 아니었다. 고향과 부모처자를 떠난 외로움, 힘들고 짜증나고 지겨운 바다생활,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이 모든 것들은 배를 타는 마도로스였던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귀가 멀지 않은 “벙어리” 1991년 3월 18일, 연길역에서 출발한 우리 해외송출일군 12명은 이틀후인 3월 20일 아침 7시 30분에 중국 국제항공 보잉 747기에 올라 출국의 첫코스를 밟게 되었다. 스켓쥴은 베이징 ㅡ 홍콩 ㅡ 밴큐버(캐나다)ㅡ 토론토(캐나나)ㅡ 상파울로(브라질) ㅡ 몬테비데오(우루과이)ㅡ 포클랜드(영국점령지로 말빈군도라고도 함) 이렇게 쭉 잡혀 있었는데 비행기를 여러 번 갈아타고 마지막에 선박에 올라 정식 근무를 하도록 돼있었다. 연길에서 베이징 공항까지는 송출회사의 담당자가 책임져 주었기에 순조로왔고 홍콩의 치더공항(启德机场) 역시 중국인이 많은 곳이라 언어소통이 잘 되어 우리가 대륙에서 왔고 영어를 모른다고 하니 공항안내양이 우리를 이끌고 수속을 다 해주었기에 괜찮았다. 애로사항은 홍콩에서 이륙해서부터였다. 홍콩에서 캐나다 밴큐버까지의 비행시간은 20여시간, 중도에 참을 몇 번 주었는데 우리 일행 매 개인은 미화 20달러씩밖에 없는지라 누구도 그 참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스튜어디스(空中小姐)양이 “서비스”라고 알려 주었으나 그 말뜻을 알리 없는 우리는 한결같이 “노(NO)”하고 손을 내저어 스튜어디스양으로 하여금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우리는 우루과이까지 가면서 공항에서 파는 싸구려 빵을 사먹거나 집에서 갖고간 누룽지를 더운 물에 담궜다가 먹군 했다. 글쎄 코치가 있는가 영어 한마디 할줄 아는가 실로 세상에 귀가 멀지 않은 “벙어리”가 있다면 아마 우리었을 것이다. 공항마다 수속을 할 때면 숱한 질문을 받군 했는데 영어를 구사할줄 모르는 우리는 근근히 손형용이나 그림을 그려 가지고 그들과 뜻을 나누군 했다. 그래도 공항일군이 알아차리고 도장을 팍팍 찍어주던 일이 얼마나 고마왔던지…그리고 수속 뒤에 그들은 꼭 “땡큐베리마취(대단히 고맙습니다)”라고 했는데 거기에 우리는 인사는커녕 멍해서 대답하지 못하는가 하면 어떤이는 제딴이야 주인인양 고개부터 끄덕이군 했다. 애간장 태우는 일도 있었다. 캐나다 토론토 공항에서 있은 일이다. 당시 우리 일행중 박학철이란 젊은이가 있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공항일군이 우리 다른 사람은 다 대기실로 들어가게 하면서도 유독 그한테만은 그의 얼굴과 여권을 대조해 보더니 이것 저것 꼬치꼬치 캐고들면서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과 뭔가 의사소통을 하려고 했으나 아무리 손질로 형용하고 해도 그들은 그냥 머리를 가로 저으며 “노, 노”라고 할뿐이었다. 어떻게 한담?…… 바로 그 때 우리 일행 중 일어를 좀 하는 최용식이란 젊은이가 일본인 한분을 데리고왔다. 이렇게 되어 최용식과 일본인 그리고 캐나다 공항일군 3명이 3자 대화가 오고 갔는데 물론 최용식과 일본인은 일어로, 일본인과 공항일군은 영어로 대화했다. 대화끝에 그제야 공항일군은 박학철의 여권에 도장을 찍어 주더니 대기실로 들여보내는 것이었다. 그 뒤 알고보니 박학철의 여권중의 사진은 머리를 짧게 깎은 탈모사진이었지만 당시의 박학철은 머리를 길게 기른데다 여권사진을 찍을 때에 비해 몸이 많이 뚱뚱해졌고 거기에 코수염까지 무성하게 자랐으며 사진에는 20대 초반으로 보였다면 실제 인물은 거의 40대가 돼 보였으니 공항일군이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기실 아무 것도 아닌 오해였다. 하지만 박학철은 물론 일행 중 단 한명도 영어를 할줄 아는 이가 없으니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외국인들이 우리 중국사람을 얼마나 비웃었겠는가?! 영어를 알면 세계 그 어디를 가든지 기본상 언어소통에는 별문제지만 다른 말 특히 조선말 같은 건 국경만 넘으면 거의 쓸모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우리 일행 중 적지 않은 친구들의 짐속에는 비누와 치약같은 것을 2년간 쓸 수 있는 분량을 갖고 간 이들이 많았다. 그들의 말로는 외국에 가면 모든 것이 비싸기에 그렇게 갖고 왔다고 하였다. 일리는 있었으나 후에 볼라니 그러한 생필품은 선박에서 모두 무료로 공급하는 것들이었으니 모두가 불필요한 것들이었다. 또한 비행기에서 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그 안에 있는 비누나 휴지같은 것을 되는대로 가방속에 챙겨넣은 이들도 많았다. 참, 어처구니가 없다고나 할까? 당시 비행기 승무원들이 얼마나 웃었을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창피스럽고 얼굴이 뜨거워 나군 한다. 처음 목격한 서양인세계 우리가 목적지인 우루과이 몬테비데오공항에 도착한 것은 꼭 베이징을 떠나 34시간만이었다. 헌데 베이징에서 그 전 날 아침에 떠나 이튿날 저녁에 몬테비데오공항에 도착했는데 몬테비데오공항의 달력을 보니 여전히 3월 20일이었다. 이에 우리 일행 중 몇몇은 “어제 베이징을 떠날 때 20일이었는데 왜 여긴 오늘도 20일인가” 하면서 의아해했다. 세계 여러 나라들의 시간적 차이를 모르는 그들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론만이 아닌 실제적으로 그 시간적 차이를 보는 순간, 오묘한 지구론 학설을 새삼스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몬테비데오공항에는 선박회사 대리점 일군 2명이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가 입국수속을 마치고 나오자 그들은 우리의 여권을 거두더니 한명 한명씩 점검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공항일군들과 마찬가지로 여권과 매개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씩 대조해 보더니 마침내 우리들더러 봉고차 2대에 나뉘여 앉게 하고는 마침내 몬테비데오의 밤거리를 헤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밤에 보는 몬테비데오의 거리었지만 매우 깨끗했다. 차창밖으로 내다 보노라니 거리의 행인들은 거의 모두가 한가롭게 거닐고 있었으며 몹시 행복하고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특히 손을 꼭 잡고 산보하는 노부부도 가끔씩 보였는데 머리가 백발일뿐 옷차림새 같은 것은 젊은이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더없이 깨끗해 보였다. 한편 당시만 해도 우리 일행 12명은 베이징에도 다녀보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일 정도로 그야말로 “촌티”가 다분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다보니 그렇듯 황홀하고도 번영스러운 외부의 세계와 갑자기 접촉하니 별의별 “촌티”가 나는 말을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먼저 화룡에서 온 최××씨가 울상을 하면서 “우리가 이렇게 잡혀가 그냥 무리죽음을 당하는 것이 아닐까? 가지 말라고 하는 어머니의 권고를 귀등으로 흘려보내고 왔는데 대체 어떻게 돼가는거야?!”라고 하며 울상을 하더니 개산툰에서 온 양××씨는 길가에 줄지런히 주차돼 있는 길다란 승용차 행열들을 보고는 “우루과이의 수도이니까 이 나라에 그 무슨 대형행사가 있는 모양이야. 그렇찮으면 어떻게 이많은 승용차들이 모일 수가 있어?!”라고 하는 것이었다. 하긴 그때 지난 세기 90연대 초기만 해도 연변밖을 크게 벗어나 보지 못한 우리로서는 그러한 광경을 눈으로 직접 목격해 보기는 난생 처음이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약 40분간 달리던 봉고차는 어느 한 5-6층 되어보이는 건물앞에서 멈춰섰다. 공항에서 우리를 맞던 2명의 일군은 우리를 데리고 건물안으로 들어갔다. 그 곳은 바로 우리가 머물게 될 호텔이었다. 호텔 카운터에서 등록을 마치자 우리는 각각 자기들이 묵을 방으로 들어가 행장을 풀었다. 장기간 비행기를 타서였던지 나의 발은 몹시 부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샤워부터 하고는 슬리퍼를 끌고 카운터로 향했다. 피곤한데다 샤워까지 하고나니 목이 말랐던 것이다. 그래서 물을 좀 얻어 마시려고 말이다. 여기서 또 우스운 에피소드가 한 단락이 있다. 내가 카운터 아가씨를 보고 물을 마시는 흉을 하며 “워터”라고 말하자 그 아가씨는 “워터? 오우, 아구와”라고 했다. 그러자 나는 이에 반박이라도 하듯 “노, 워터”하며 손질발질을 해댔다. 이에 그 아가씨는 한참 나를 훑어보더니 머리를 흔들더니 따라 오라고 손짖을 했다. 그래서 따라간 결과 그것은 내가 든 방이었는데 아가씨가 곧바로 냉장고를 열더니 곧바로 물병을 꺼내주는 것이었다. 여태껏 싸루려 여관방에나 들어보았지 고급호텔에는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호텔방마다 냉장고가 있고 또한 물을 포함한 여러 가지 음료수과 과일 등이 있다는 것을 알리 만무했던 것이다. 그리고 출국할 때 영어를 좀 아는 친구를 통해 영어로 물을 “워터”라고 부른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이 스페인어로 “아구와”라는 것을 역시 알리 만무했다. 그러니 그 카운터 아가씨가 “아구와”라고 하자 “노”하며 “워터”라고 곱씹었으니 한심했다. 후에 알고 보니 남미의 우루과이 등 적지 않은 나라들은 한시기 스페인의 통치를 받았기에 지금도 관방언어는 스페인언어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밤이 깊어지자 호텔 로비에는 이상하게 생긴 여자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 녀들은 우리를 보더니 눈을 껌뻑하지 않으면 스쳐지나가면서 옆구리를 툭 다쳐놓군 했다. 왜 그러는거지? 우리가 그녀들을 경계하며 피하려고 하자 그녀들은 오히려 깔깔 웃어 대면서 “꼬레안노, 꼬레안노(스페인어- 한국사람)”하면서 공개적으로 추파를 던져대는 것이었다. 그제야 소위 성개방이라는 자본주의사회의 실체를 점차 실감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가 이튿날 아침 일어나 호텔앞 광장을 거닐노라니 술에 잔뜩 취해 몸도 가누지 못하는 아가씨들이 남자들의 부추김을 받으며 호텔문을 나서는 모습이 적지 않게 눈에 띄기도 했다. 그 녀들은 우리를 보더니 또 “꼬레안노, 꼬레안노”하며 지껄이더니 우리가 응대도 하지 않자 이번에는 “꼬레안노, 이 씨팔놈아!”라고 한국말까지 섞어가며 고함을 질러대는 것이었다. 아마 우리를 한국선원으로 착각을 한 모양이었다. 우루과이에 도착한 이튿날 밤 우리는 호텔에 든 한국선원들한테 이끌려 몬테비데오에 중심가에 자리잡은 한 댄스바에 가보았는데 거기에 들어서자 초저녁에는 그저 남녀가 어울려 디스코같은 춤만 추던 것이 야밤이 되자 몇몇 나체녀들이 커다란 젖가슴을 흔들어대며 춤을 추기도 하고 자신의 성기를 이용해 여러 가지 묘기를 부리는 등 갖가지 추태를 부리기도 했다. 그야말로 시골 촌구석에서 여태껏 살아오다가 갑자기 다른 세계에 들어서 보았다고나 할까? 한편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우리는 상가들을 돌면서 구경하던 중 고객들이 상가내를 마음대로 돌면서 물건을 고르는 등 “희한한 일”도 목격했는데 지금 와서 보면 그것이 곧바로 슈퍼마켓이었다. 하긴 그때 우리가 슈퍼마켓이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지라 희한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몬테비데오에 도착한 3일 후 드디어 우리는 소련선박 “프리오 카츄사”호에 편승하여 선박에 승선하여 근무하게 될 목적지인 포클랜드 해상으로 향했다. 이상한 것은 우리가 몬테비데오에 도착했을 때(3월 20일)는 중국의 초봄과는 달리 그 쪽은 가을이었으며 한창 락엽이 흩날리는 계절이었고 소련선박에 편승하여 남쪽으로 가면서 날씨는 점점 추워졌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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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5-18
  • 오묘한 세계 대백과(10)명랑한 금성
    금성은 밤하늘에서 찬란한 금빛을 뿌리는데 태양과 달 외 우리가 지구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밝은 빛을 내는 별이 바로 금성이다. 그럼 금성은 어찌하여 이렇듯 밝을까? 원래 금성은 태양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기에 태양복사가 금성의 빛을 반사하여 기타의 별들의 빛보다 더 많아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금성이 특별히 밝은 원인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 외 금성의 외면에는 한층의 두꺼운 운무층이 깔려 있다. 그것은 75% 이상의 태양빛을 반사되게 하여 금성으로 하여금 늘 금빛찬란하게 한다. 금성은 명랑할 뿐만 아니라 매우 부지런하다. 금성은 저녁이면 제일 먼저 하늘에 나타나기에 사람들은 금성을 “장경성(长庚星)”이라고 부르며 또한 아침에도 제일 마지막에 사라지기에 “계명성(启明星)”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관찰계산에 따르면 금성의 공전주기는 약 224.7일이 되지만 자전주기는 도리어 243일이 되어 금성의 “하루”는 날이 갈수록 더 길어진다고 한다. 금성은 또한 태양계에서 유일하게 역향자전하는 대행성이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편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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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5-18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10) 성소피아성당
    성 소피아성당의 자료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터키, 지점: 이스탐불 함의: 고대토이기건축예술의 걸작임 성 소피아성당(圣索菲亚大教堂)성당은 기원 325년에 세워졌는데 콘스탄티황제가 지혜의 신인 성 소피아를 모시기 위해 세운 것으로 세워진지 9개 세기 후엔 청진사로 고쳐졌다. 하기아 소피아성당은 수차의 수난을 거쳤는바 이스탐불의 역사와 끈끈히 인연을 맺어 왔다. 이스탐불의 가장 큰 성당으로 하기아 소피아성당은 터키에서 가장 대표성을 띤 종교건물이며 고대건축예술의 걸작이기도 하다. 수난역사의 견증 소피아성당의 운명은 수차 파란곡절을 겪었다. 기독교성당이 선지 900년후인 1453년, 오스만제국의 터키사람들이 이스탐불을 점령, 수단 무하메드(穆罕默德) 2세가 명령을 내려 이 교회당을 청진사로 고치라고 하였으며 교회당 주위에 네개의 높다란 선례탑을 세우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성 소피아성당의 모습으로서 건축풍격상의 분열은 이 수난의 역사를 견증해주고 있다. 1935년, 성 소피아성당은 터키의 국가박물관으로 되었다. 조형이 독특한 성당 하기아 소피아성당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높은 성당이다. 성당의 꼭대기에는 40개의 창문이 있다. 해빛이 성당 내를 비출 때면 전반 대청은 유난히 밝고 명랑하다. 그리고 성당의 부분적 곳에는 바닥에 그리스식 십자가조형을 채용했으며 공간에 여러 개의 작은 기둥이 있는 외 대형 대청에는 아무런 기둥도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문과 벽과 작은 원주기둥 등이 설계상 서로 분담하여 커다란 중량을 받아내면서 큰 기둥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이로하여 신도들은 더욱 아름답고도 성스로운 천계(天界)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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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5-15
  • 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시리즈 5)
    ■ 김철균 대남정찰 아버지가 소속된 조선인민군 제 7 군단은 원산에 도착한 즉시로 긴장한 훈련에 돌입하였다. 훈련은 야간기습, 지뢰제거 및 포위섬멸과 고지점령 등이였는데 어쩐지 이상했다는 것이 아버지의 추억이었다. 조국을 보위하려면 저격전, 진지전 및 참호파기 등이 위주인 것이 상식이었지만 그것과는 정반대인 모양이었다. 한편 아버지네 부대는 가끔씩 밤중이면 원산항에 가서 군수물품 하역작업에도 동원되었었는데 군함에 싣고온 군수물품은 전부 탱크, 대포와 기관단총 및 따발총과 탄약 등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어딘가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바로 그럴즈음 1949년 5월초, 한국군내 2명의 대대장이 각각 자기의 대대를 이끌고 월북귀순하는 일이 발생했으며, 평양방송을 통해 “남조선 괴로군이 북진통일을 부르짖고있다”는 것도 자주 듣군 했다. 남조선군이 북진해온다면 인민군은 반드시 그들을 저격하는 훈련을 해야할텐데 왜 훈련하는 건 그것과는 정반대지?아버지한테는 그때로부터 전쟁은 기필코 터진다는 예감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밤, 아버지와 기타 2명의 사병한테 특수명령이 하달됐다. 즉 그날밤으로 38선을 넘어가 원주까지 통하는 교통요도의 다리와 한국군 진지배치 등을 정찰해오라는 것이었다. 그날밤 밤의 장막을 이용해 아버지네 일행 3명이 38선을 넘어 산발을 타고 약 20리 정도 걸었을가 할 때 날이 희붐히 밝아왔고 앞에는 고향의 두만강과 거의 비슷한 폭으로 됨직한 강이 보이였고 다리도 있었다. 아버지네 일행 정찰병들은 다리를 사진으로 찍으면서 그 주위의 병력배치를 살폈다. 얼핏 봐서는 다리 양측에 그저 4명의 보초만 있을뿐 토치카같은 강한 화력망은 없어보였다. 아버지네 일행이 약 한시간 정도를 숲속에 엎드린채 주의깊게 살폈으나 다리쪽에서는 여전히 별다른 동정이 없었다. “남조선 군대의 경비가 몹시 허술해 보입니다.” “아니,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어. 보이지 않는 초소가 꼭 어디에 있을거야.”동료의 말에 아버지는 좀 더 살펴보자고 했다. 아니나 다를가 과연 얼마후 빈 통조림통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다리주위의 사처에서 한국군 사병들이 모여드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왁작지껄 떠들면서 소란스러웠다. 아마 아침식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대충 짐작해도 20여명은 푼히 되는듯 싶었다. 전시도 아닌데 다리 하나를 놓고 군인 20여명이나 지키다니? 이 다리의 전략적위치를 알 수 있었다. 아버지네 정찰병들은 보다 더 지켜보기로 했다. 화력망을 더 정확히 파악해야 했고 강의 수심도 알아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식사를 마친 한국군 사병들은 재차 어디론가 제각각 사라졌다. 다리위는 또 새벽녘처럼 고요했다. 그러자 동료 정찰병 2명은 또 이젠 그만 관찰하고 돌아가자고 졸라댔다. 아버지 역시 더 이상 알아낼 방법이 없는지라 돌아가기로 했다. 바로 이 때 다리 남쪽으로부터 군인들을 가득 실은 군용트럭 2대가 나타나더니 다리목에 와서 멈춰섰고 곧바로 그 군인들이 차에서 뛰어내리는 것이었다. 이는 한국군측에서도 전쟁에 대해 뭔가 낌새를 챘으며 이 다리만은 결사적으로 리용하려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니 꼭 이 다리에 대해 더 알아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버지가 직접 나섰다. 아버지는 기타 2명의 동료한테 뭔가를 지시하고는 자신이 직접 모험하기로 작심했다. 아버지는 숲에 몸을 숨기면서 강가로 접근한 후 돌을 던져 수심의 깊이를 관찰, 다행히도 수심은 사람의 키를 넘을 것 같지 않았다. 이어 아버지는 교두보를 지키고 있는 한국군 초병을 향해 권총 두방을 쏘았다. 한국군 화력망을 시탐하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가 한국군 토치카들에서 불을 내뿜었는데 교두보에 있는 토치카 말고도 산기슭의 여러 군데 보이지 않는 화력망이 배비돼 있었다. 아버지는 나무뒤에 몸을 숨기고는 그 토치카들의 위치를 그려넣었다. 한편 숲속에 숨어있던 아버지의 동료 2명도 총을 쏘며 아버지를 엄호했고 아버지는 민첩하게 몸을 움직이며 산등성이에 매달렸다. 이어 밤이 되자 아버지네는 강을 건너 계속 남으로 향하면서 교통요도와 한국군의 막사, 포진지 등을 정찰, 원주시가지가 보이는 산마루에 도착한 후 다시 귀로에 올랐다. 그것이 바로 6.25 발발 직전인 1950년 6월 중순경이었다. (다음기 계속)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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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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