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8(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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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에 공짜가 없다 사기행각 1 2 3
    근래에 입국한 중국조선족들이 아래와 같은 사기행각에 경각성을 높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제공하기로 한다. 1. 장한평 《나눔의 사람》들은 다단계 방법으로 중국 조선족들로부터 740억원이라는 거액의 돈을 사기했다. 회원들만 3000여명, 관련된 친족들은 1만여명이라고 한다. 몇명의 악덕업주들이 법적처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조선족를 위주로 여전히 군자동, 청담동 일대에서 이전의 방식대로 화장품, 고기능 이불, 건강식품, 불법치료기를 판매한다. 2. 불법건강검진센터에서는 무료로 조선족들에게 건강검진을 해준다. 허나 의료기기를 임의로 조정하여 모든 검사받는 사람들이 100%로 건강이 좋지 않다. 이들 센터에서 판매하는 약으로만이 그들의 병을 완전 치료할수 있다고 한다. 3. 서울대 입구쪽에 《한화로 34만원을 입금하면 다음주부터 평일에는 매일 1만원씩 통장에 입금된다. 340만을 입금하면 매일 10만원씩 입금된다 》고 하는 다단계가 있다. 소문에는 악덕업주가 이미 도망한 상태라고 한다. 4. 중국 모 부동산회사라고 자칭하는 회사에서는 《지금 한화로 60만원을 입금하면 반년후에 한화로 600 만원을 준다》고 한다. 영국려행사라 하는 곳은 《지금 한화로 26만원을 입금하면 반년 후에 한화로 500만원을 준다 》고 한다. 5. 90 년대 중국 현지에서 한국사기군들이 ( 브로커 ) 위명려권 ( 일명, 머리바꾸기 가짜 려권)을 일인당 10만원 (한화 1800 만 )으로 무려 50억원을 사기쳤다. 6. 지금 한국에서 일부 려행사나 행정사는 한화 500만원 혹은 1000 만원을 주면 위명려권을 합법려권으로 만든다고 한다. 법무부에서는 이런 정책이 전혀 없으니 중국식대로 돈만 내면 모든 일을 마무리할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7. 불법체류자나 위명려권자에게 영주권이나 합법려권을 준다거나 단속한다고 하면서 가짜 경찰이나 가짜 출입국 공무원이 나타나 금품을 요구한다. 8. 근래에 남의 집을 월세로 맡아 전세로 보증금을 갈취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월세를 줄 담당자가 아니면서도 ( 가짜 부동산 ) 전월세 보증금을 사기하거나 계약이 만기되였는데도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는 집주인이 적지 않다. 9. 지난해 19차례나 《주유 상품권》으로 동포들을 유혹하여 한화 5억여원을 갈취한 이모씨를 구속하고 일당 3명의 행방을 추적중이라는 소식도 있다. 10. 본인의 학력을 불문하고 3개월간 90만원만 내면 모두 F-4 로 변경할수 있다는 설이 있다. 본 학원에서 학습하면 누구든지 전부 책임지고 F―4 로 변경시켜주며 안되면 100% 로 환불한다고 한다. 학원에 등록만 하고 학교에 나오지 않아도 F―4로 된다고 한다.이상의 사기들은 도망가려는 꼼수다. 13.한국남자와 결혼하였거나 결혼준비상태에 있는 중국조선족녀성과 불륜관계를 맺은 뒤 몰카로 동영상이나 사진을 만들어 거액의 금품을 갈취한다. 14. 《길림신문》 에 따르면 연변주 공안국이 길림성, 료녕성, 복건성, 산동성, 광동성 공안국과 협력해 5개 보이스 피싱의 조직원 68명을 검거하였는데 그중 한국인이 11명이고 대만인이 1명이다. 동결한 금액은 320만원 ( 한화 5억 7600만원 ) 이다. 일년사이 사기친 금액은 5000만원이라고 한다. 한국형 보이스 피싱이 수출하여 한국은 물론 중국 동북 특히는 연변이 피해가 극심하다. 15.가리봉시장 입구에서 공짜 꿀병, 공짜 미역, 공짜 밥주걱을 주면서 흑마늘, 천마 등을 만병통치약이라고 판매한다. (기실은 건강식품이다. 원가격의 10배 ) 16. 금시계, 우산, 옷, 칼세트, 제주도려행권 (비행기표 )등을 공짜로 준다고 하면서 홍삼이나 건강식품 혹은 기타 상품을 판매한다. (원가격의 10배 ) 환불하지 못하면 조폭을 리용한다. 17. 지하활동실 ( 마작실 )은 도박으로 신고대상이니 일단 경찰의 수사에 걸리면 전부 몰수한다. 중국의 습관으로라면 적은 돈으로 마작을 하는것은 아주 정상이고 합법이다. 하기에 전국의 《로인활동실》은 전부 마작이 위주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한국은 아니다. 한국의 지하마작실엔 꼼수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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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0-29
  • 연변팀 마지막 경기 0대2로 패.
    고의적으로 져준 경기에 비해 더 보기 흉한 경기를 연변장백호랑이팀(이하 연변팀)이 펼쳐 팬들의 실망을 자아냈다. 10월 28일 용정해란강경기장에서 열린 2012 중국프로축구 갑급리그 최종 라운드경기에서 연변팀은 심양심북팀에 0대2로 패배, 10승 4무 16패란 수치스러운 성적으로 전반 시즌에 마침표를 찍었다. 시즌 초기 슈퍼리그 진출을 목표로 내건 팀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그야말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가 없다. 특히 이날 시즌 결속경기에서 보인 전체 팀과 감독진의 표현은 한마디로 엉망이었고 기전술은 물론 연변팀의 상징이었던 투지도 보이지 않는 경기라 개괄할 수 있었다. 연변팀은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갑급리그 잔류에 성공했다는 점에 내심 안도하고 내년 시즌을 대비(?)해 “화력”을 아낀 반면, 원정경기에 나선 심양심북팀은 전 연변팀의 절대주력이요, 핵심선수들이였던 문호일, 김경도를 선발진영에 포함시키며 참답게 경기를 운영하고 리드해나가는 등 판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날 경기에서 연변팀은 한남용, 한호, 한송봉 등 올해 시즌에 별반 얼굴을 보이지 않았던 “신진”들을 대거 출전시켰고 또한 후반에 들어서서는 선제골을 먹은 상황에서 팀의 간판공격수인 버지치를 쿠리바리와 교체, 퇴장시키는 등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작전을 구사해 팬들의 불만을 샀다. 조직적인 공방체계가 근본 보이지 않았고 예정된 시간을 소모하기 위해 그라운드를 뛰는 로봇을 방불케 했다. 연변팀은 후반전에 들어 경기 제60분경에 심양심북팀의 류락단에게 선제골을 허락한데 이어, 경기 84분경 외적선수 하쎄에게 추가골을 허락하며 0대2로 맥없이 무너졌다. 경기 결속 후 다년간 연변팀의 골수팬으로 살아온 정씨 노인은 “이런 맥아리 없는 경기는 처음”이라면서 이렇게 축구를 할 바엔 차라리 팀을 해산해 버리는 게 오히려 팬들한테 있어서 행복이라며 목소리를 높이기까지 했다. 올해 홈장경기를 한차례도 빼놓지 않고 현장을 찾았다는 리씨 성의 한족 축구팬은 “연변팀의 축구팬으로 살아간다는 건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하면서 오늘 연변팀의 경기를 보니 다음해 연변팀의 표현을 알 수가 있다며 도리머리를 저었다. 이날 경기 패배를 끝으로 연변팀은 총점 34점을 기록, 최종리그 순위 13위에 머물렀다. 신희윤기자
    • 스포츠
    2012-10-29
  • 삶의 등불
     지난 7월 21일, 중한문화교류협회의 사무국장 루비님이 한국에 온다고 하여 싱록수님이 조직한 모임에 가니 뜻밖에도 <연변일보>사의 장 경률 기자선생님을 만났었다. 1983년부터 룡정시 주재 기자로 계시면서 우리들의 통신 사업을 이끌어 주시던 분이신데 한국에서 만나니 그 기쁨 비할바 없었다. 저의 생애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희망을 안겨 준 것은 무엇이였던가? 그제날 일들이 주마등처럼 안겨왔다. 무산계금문화 대혁명의 격류속에 휘말려 정규적인 교육도 못 받고 중학교를 필업했다는 종이장 하나만 갖고 귀농의 대오에 가담한 저는 항상 배움의 갈증에 목말랐던차 제 마음을 비춰 준 등불이 있었으니 삶의 등불이라 하면 적절할 것이다. 1983년, ㄷ향 선전 사업을 책임지신 김송범님께서 각 촌에 2명씩 선발하여 통신원 학습반을 꾸렸었다. 그날 학습반에 참가하니 장 기자 선생님이 오셔서 통신원의 역할, 기사 쓰는 법, 그리고 짧은 기사 쓰고 원고 평의도 하였다. 그 당시 처음에는 인원이 많다가도 가을에 가면 이런저런 원인으로 떨어지고 몇 명이 견지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노루꼬리만한 소식이라도 기자 선생님들의 정성어린 수개가 없었더라면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와중에서 저는 통신원의 역할을 알게 되였으며 삶의 진가를 알게 되였다. 제가 어린 아들들의 공부 뒤바라지를 하면서도 ,연변 일보>, ,연변 녀성>등 해마다 구독하니 아들들도 힘내서 학습에 노력하였고 온 가정이 독서에 열을 올렸다. 저는 초등학교를 다니는 두 아들에게 학기말 시험을 치면 85점을 맞으면 5원을 장려해 주고, 95점을 맞으면 10원을 장려해 주고, 그 돈으로 향 공소합작사의 책매대에 데리고가 명인들의 이야기와 과학상식들을 사서 보게 하였으며 다른 것은 없어도 책꽂이는 넘쳤었다. 매일과 같이 일하여도 수입은 적고 힘들때는 사람사는 것이 너무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다가도 그래도 통신을 쓰게 되면 그래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고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느끼기도 했었다. 두 아들을 도회지 학교에 보내고 공부 뒤바라질 할 때의 일이다. 그 때 봄엔 생산 계획을 세우고 닭알 가리를 높이 쌓아 올렸다가도 뜻밖의 자연 재해가 오면 일년농사 <나무아미타불>로 되여 버렸다. 2천년에는 양건종 담배 9무를 심고 콩,옥수수를 심어 정성스레 가꾸면서 수입을 늘리려고 밤낮없이 일했다. 아침 다섯시면 방학에 아들들을 데리고 도시락을 싸 갖고 담배를 따서 그날에 딴것은 그날로 달고 나면 저녁 8,9시에 집으로 오면서 알뜰하게 900줄을 걸어 놓아 90%는 완성한 셈이였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8월 16일이였다. 이날도 남편과 같이 일하고 점심을 먹고 쉬고 있는데 북쪽으로부터 검은 구름장이 몰려 오더니 억수로 퍼붓는 비는 강바닥에 넘쳐나고 제 남편이 2년생 암송아지를 몰고와 고삐를 넘겨주어 그 송아지를 끌고 언 덕에 올라서자 담배 달대는 한곳씩 착착 넘어지더니 비닐박막과 같이 둥둥 정처없이 떠내려 가는 것이였다. 그 송아지를 끌고 언덕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저는 언녕 수중고혼이 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생사 고비를 지나왔기에 아무리 고달파도,인생의 좌표는 흔들리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리게 하였다. 중국말 속담에<물은 30년 동쪽으로 흐르고 , 30년은 서쪽으로 흐른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는것 같다. 2007년,방문 취업 한국어 실무 시험을 쳐 합생격하고 추첨이 되여 2008년 한국에 왔었다.처음에는 식당에가 일했는데 주방이처음이고 말도 서툴어 스트레스도 엄청 받았었다. 하여 적성에 안 맞는다고 판단하고 그해 9월에 <요양 보호사>자격증을 따려고 도전하였다. 오전에는 강의를 받고, 오후에는 상가에 가 청소를 하면서 12월에 자격증을 땄었다.그때도 자신감을 갖고 살며 악착스레 일하고 생활에 신심을 가졌었다. 산 설고 물선 고장에서 살아 남으려면 법에 위반되지 않고 도박 마약.다단계등을 제쳐놓고 돈이 되는 일이면 파출부로도 열심히 뛰였다. 그렇게 일하다가 ㅈ간병 협회에 가입하여 맡기는 일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였더니 김 소장님이 가정집에 보내주어 1급 판정을 받은 할머니를 돌보다 돌아가신 후에도 86세 나는 그집 할아버지를 계속 돌보고 있다. 이렇게 걸어 온 과정에도 통신원을 하여 큰돈 버는건 아니지만 삶을 더 충실히 할 수 있었고 항상 신심을 갖고 도전할 수 있게한 리철억 선생님한테도 감사 드리고 이 시기에 우리들을 이끌어준 기자 선생님들과 ㄷ향 당위에도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 어디에 살던지 환경에 적응하고 사회에 쓸모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고 남은 생을 후회없이 살도록 애쓰고 싶다. 2012년 10월 26일 현만녀
    • 독자기고
    2012-10-27
  • 글쟁이의 가치관
    나의 글이 "연변녀성"에 실렸다니까 이웃집 리씨가 신기해서 물어왔었다. "언니,원고료는 얼마나 되나요?" 난 갑자기 대답이 궁해졌다. 사실 그 원고료라는 것이 하도 보잘 것 없어서 떠벌이기에는 조금 구차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원고료는 대체로 천자에 10원,그러니까 만자에 100원인가 그런것 같기도 하고.... 아니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똑똑히 따져 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기도 하다. 허나 나로서는 그 속에 돈으로는 도저히 환산 할 수 없는 커다란 보람이 있다. 지금은 컴퓨터를 하니까 글 쓰기가 많이 쉬워졌지만도 그건 요 몇해 사이의 일이고 그전엔 쭈욱 원고지에 펜으로 써야했었다. 헌데 생활속에서 어떤 글 소재하나를 찾아 내여 글로 엮어서 잡지사에 투고하기까지 다른 사람의 경우엔 어떤지 몰라도 워낙 글 밑천이 짦은 나는 적어서 10여번, 많을 땐 무려 2~30번은 수정해야 제가 읽어도 그럴듯한 문장이 완성된다. 펜으로 300자 원고지 한장을 옮겨 적는데 걸리는 시간은 6분, 그러니까 만자 좌우의 문장 하나를 다 옮기려면 적어도 3~4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열번 아니, 스무번 서른번쯤 수정한다 치자. 그렇다면 거기에 소요되는 시간은?........!!!!! 실로 어깨와 허리가 결리고 손목이 시큰거리고 온몸이 쑤신다.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절대로 그런 고생을 사서 할 리가 없으리라!! 허지만 그것을 우체통에 집어 넣고서 수험생이 두근 거리는 심정으로 입시 결과를 기다리듯이 애타게 기다리다가 드디여 자기의 문장이 몇월호에 나간다는 소식을 접했을때, 또 그 잡지를 직접 받아 들었을 때의 그 뿌듯한 감각을 어찌 말이나 글로 다 표달할 수가 있으며 천금을 주고 바꿀수가 있으랴!! 그래서 혹 누군가는 그깟 쥐꼬리만도 안되는 원고료가 어쩌고 저쩌고 비웃을른지 몰라도 글쟁이들은 한결같이 글쓰기에 중독이 되여 사는 것이다. 하니까 만약에 당신 주위에 나같이 조금 모자라는 글쟁이가 있다면 그 심정을 리해하고 원고료에 대해선 일절 묻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 글쟁이의 립장에서 그것을 밝히기가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지만 고상한 취미 생활에 대한 모욕감으로 많이 당혹스러운 것은 사실이니까 말이다./중국조선족대모임 게시판에서 발췌
    • 독자기고
    2012-10-24
  • 조선영화주간 가동식 연길서
    상영식 테프를 끊는 지도자들 연길시라지오영화텔레비죤방송국 김상룡 가동식 사회 주정부 부주장 민광도 축사 조선영화수출입사 오형철 사장 축사 조선영화촬영소 저명한 배우이며 영화 <홍길동>주역인 리영호와 조선영화문학 창작사 저명한 창작가 김은옥이 관중들과 대면 연변방송에 따르면 2012 조선영화상영주간 가동식이 오늘 오전 연변좌안영화성에서 있었다. 2012 조선영화상영주간은 길림성라지오영화텔레비죤방송국, 연변라지오영화텔레비죤방송국, 연길시라지오영화텔레비죤방송국과 조선영화수출입사에서 공동으로 주최했다. 조선영화상영주간은 10월 23일부터 27일까지이며 매일 4개 시간대에 나눠 <꽃파는 처녀>, <한 녀학생의 일기>, <형제의 정>, <소원>, <평양 날파람>등 다섯부의 영화를 상영하게 된다. 가동식에서 조선영화촬영소 저명한 배우이며 영화 <홍길동>주역인 리영호와 조선영화문학 창작사 저명한 창작가 김은옥이 관중들과 대면했다. 가동식에 이어 조선예술영화 <한 녀학생의 일기>가 상영되었다.
    • 연예·방송
    2012-10-23
  • 녀성스타들의 최고의 신체부위 선정
    ◆ 가장 아름다운 가슴을 가진 공리. 그녀의 몸매는 전통미와 완벽미의 전형이라고 할수 있다. 그녀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풍기는 우아한 정취는 그 어떤 녀성스타도 그녀를 따라가지 못하고있다. 영화 《양귀비》에서 그녀의 풍만한 가슴은 이 영화를 성공으로 이끈 중요한 요인중 하나가 되였다.◆ 가장 아름다운 어깨를 가진 림지령. 림지령은 우아한 몸매와 천사같은 얼굴을 가진 완벽한 미인이다. 각종 행사에서 어깨와 등을 훤히 드러낸 옷차림은 그녀를 더 요염하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 가장 아름다운 눈을 가진 범빙빙. 전설속의 선녀처럼 예쁜 눈을 가진 그녀는 요염하고 섹시한 매력을 풍긴다. 범빙빙은 100년에 한번 나올수 있는 절세미녀로 손꼽히고있다. 범빙빙의 아름다움은 예쁜 눈에 있다.◆ 가장 아름다운 얼굴형을 가진 장백지. 장백지는 연예계의 진귀한 꽃으로 불리우고있다. 비록 라체사진파문을 겪기는 했으나 여전히 아름답다. 그녀의 오관은 아름다운 얼굴에 조화롭게 분포되여있어 사람들에게 감탄을 자아낸다.◆ 가장 아름다운 이마를 가진 송가. 송가는 드라마 《흐린 달, 어렴풋한 새》에서 10억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다. 지금까지도 남자주인공이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던 모습은 여전히 시청자들의 마음속에 가장 진실한 사랑장면으로 남아있다. 그녀의 밝고 깨끗한 이마는 미인은 세월이 변해도 여전하다는 인상을 준다.◆ 가장 아름다운 입술을 가진 서기.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면 서기는 절세미녀에 속하지는 않으나 패션의 대명사라고 볼수 있다. 섹시미인으로 통하는 그녀는 입술이 가장 아름답다. ◆ 가장 아름다운 턱을 가진 주신: 주신은 여러 작품의 주인공으로 출연해 성공적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든 스타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아래턱이 성형한것인가 의심하고있으나 그녀의 예전작품들을 보면 줄곧 이런 아름다움을 가지고있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 가장 아름다운 다리를 가진 막문위. 그녀의 가장 큰 매력은 길게 뻗은 다리일것이다. 그녀는 아름다운 다리를 선보이는 기회를 잃지 않으려고 춤을 출 때 높은 의자에 앉아 다리동작을 간판동작으로 삼고있다. ◆ 가장 아름다운 목을 가진 장자이. 장자이는 영화 《게이샤의 추억》에서 아름다운 자태와 솜씨로 뛰여난 기녀로 출연하였다. 녀성의 목을 가장 섹시한 부위로 보는 일본에서 장자이의 목은 전세계의 인정을 받았다.◆ 가장 아름다운 쇄골을 가진 장만옥. 장만옥은 천성적으로 아름다운 쇄골을 가졌다. 쇄골은 자고로 절세미녀의 지상 기준으로 감정되여왔다. 그녀의 우아한 기질은 섹시한 쇄골에 있다.《중국오락보》
    • 연예·방송
    2012-10-23
  • 아, 눈물나게 슬픈 내 마지막 발악이여!
    장가간 아들이 구촌이 된다더니 한족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인 아들이 어미와 원쑤로 되는게 아닌가 요즘은 그런 생각이 자주드는 나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은 둘도없이 착한 효자이지만 한족말만 하는 며느리를 너무 이뻐하는 아들이 공연히 미울 때가 더러 있으니까 괘씸한 생각에 그런것 같다. 당초에 대학에 붙어 북경으로 떠날때 나는 아들한테 단단히 부탁을 했었다. 꼭 우리민족 여자친구를 사귀라고… 그만치 우리부부는 민족심이 한결 같았다. 하긴 한족지구에 외홀로 섞여사는 신세에 민족심마저 없었다면 우리집 다섯식구는 진작에 다 한족으로 동화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토록 우리는 악을쓰고 자기가 조선족임을 애들한테 주입시키면서 힘들게 여기까지 왔다. 나와 남편이 다니는 직장에서 조선족은 우리둘 뿐이고 애들이 다니는 소학교 중학교 다가 한족학교 뿐이었다. 그러니까 우리집 식구들이 자기말을 할 기회가 밖에서는 영인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집에 돌아와 식구들 뿐일때는 꼭 우리말만을 하도록 애들한테 단속을 엄하게 했었다. 적어도 자기가 조선족임을 우리 생전에 아랫세대가 잊게하면 안된다는게 애들 아빠의 철같은 知照지조였었다. “집에선 한족말을 하면 절대로 안된다. 꼭 우리말이다. 알았어?!” 그렇게 하는데는 다른 원인도 있었다. 부모자식이나 노소구분이 전혀 안되는 너나들이 한족말은 예절면에서도 너무 우리말하고 차이가 컸었다. 또 계획적으로 우리글 잡지와 신문 같은것도 많이 주문해서 보았고… 우리가 단속을 잘한 것인지 아니면 아빠엄마 말을 유난히 잘들은 탓인지는 몰라도 애들은 실로 우리말에 능한데다 엄마인 내가 배워준 약한 밑천으로 우리글로 된 신문잡지 같은 것도 좀씩 읽을 줄을 알게 되었었다. 우리같이 한족지구에 홀로 섞여사는 사람들치고 나같은 이세도 우리말을 전혀 모르는 이들이 대다수인데 삼세대가 우리말에 글까지 안다는 것은 실로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만족을 할수가 없었다. 애들이 크면 또 기어이 조선족 사위에 조선족 며느리만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부부의 오랜 염원이고 욕심이었던 것이다. 딸애는 별로 애먹이지 않고 우리의 염원대로 돈도 잘벌고 사람도 참한 조선족 총각한테 시집을 갔다. 한데 큰아들이 대학교 이학년때에 덜컥 한족여자 친구를 사귀게 된것이다. 그게 너무도 서운해서 난 며칠밤을 잠도 자지 못했다. 하지만 그냥 민족이 다른 한가지 내놓고 어느조건도 아들한테 짝지지 않는 처녀인데다 아들이 그처럼 죽고 못 사는데 억지로 떼여 놓을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조건을 걸었다. “우리글과 우리말을 배우도록 해라.” 그때는 내아들이 좋아서 기어이 시집오고 싶었던지 금방 대답을 했던 며느리였다. 하지만 시집을 오고 보니까 배부르고 그래서 뱃장이 생긴건가 쉬운말 한마디도 배울세라 한다. 밥 먹으면서도 그냥 남편하고만 남의 말을 지껄이고 시어미의 말은 남편이 통역을 해주기를 기다리거나 무시하기가 일쑤고…물론 한족말에 능한 나이지만 약속을 어기는 며느리가 미워서 편한 내말을 두고 며느리를 위해 그말을 하기도 싫은지라 심술스레 그냥 우리말만을 고집하며 살다보니 집안 분위기가 이상할 때도 많았었다. 그날은 내가 해준 밥을 맛있게 한공기 제꺽 비우는 며느리를 향해서 내가 또 우리말 한마디 했다. “며늘아, 밥 더 먹어라!”물론 어안이 벙벙해하는 며느리한테 이번엔 내가 통역을 해주었고 며느리는 한결같이 제말로 사양을 한다. 그래서 내가 하루 한마디씩이라도 우리말을 배우라 하니까 한다는 소리가 안 배운다고 필요 없다고 그러는 것이었다. 요런 괘씸한것 같으니라고! 참말로 배우기 싫고 그래서 안 배우더라도 시어미의 말에 일단은 배우겠습니다. 어머님께서 가르쳐 주세요 그렇게 헛대답이라도 해야 예절일 건데 그냥 데늠식으로 단방에 거절을 하다니?! 그래서 내가 아들한테 “저런 어미가 아이를 낳아 키우면 이제 네 후대는 완전데늠이 되겠다.” 했더니 아들놈이 한다는 소리가 더구나 희한하다. “되면 됐지! 그게 우리 중국에서 뭐 이상한 일입니까?” 지금 생각하면 나와 아들의 모순은 그말에서부터 시작이 된것 같다. 얼마전에 며느리가 아기—내손녀딸을 낳았다. 한데 아기 이름을 짓는 일이 또 문제로 된 것이다. 내가 이런저런 이름이 어떠냐고 하면 아들 며느리 둘다 그냥 도리질을 하면서 맘에 안든다고 한다. 원래 우리민족 예의대로 한다면 부모가 애 이름을 짓는게 도리고 그 이름이 개돌이나 쌍년이나 그런 천한 이름이라도 자식된 입장에선 수긍할수 밖에 없을 것이지만 문화환경이 완전히 다른 중국땅에서 그건 너무 억지이니까 맘 내키지 않는대로 난 양보하기로 했다. 그럼 너들이 애 이름을 짓되 우리말로 부르기가 이상하면 절대로 안된다 그렇게 조건을 걸었고 일부러 조선말 신화자전까지 사다가 아들한테 주었던 것이다. 헌데 그날 전화 통화를 하다가 물었더니 지들끼리 지어서 호적 등록까지 했다는 애 이름이 천낙(탠눠天诺)이란다. 우리말로 부르기가 안됐고 부드럽지도 않은 이름인데다 천한 글짜와도 동음이고 또 당나귀와도 친척인듯한 이름이 어찌해도 내 맘에는 안드는지라 아들보고 뭐라 했더니 서른살이 넘은 아들을 너무 간섭한다고 내 딸이름 내가 좋으면 그만이고 호적에 조선족일뿐 조선족 행세를 할수도 없는데 이름이 조선말로 듣기 싫은들 무슨 상관이냐고 한바탕 내쏘는지라 나도 당장에 할말을 잃었다. 하지만 생각하니 그래도 괘씸한지라 이미 대답을 했으면 한대로 조선말로 듣기도 부르기도 좋은 이름을 지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은게 잘못인 줄도 모르고 네쪽에서 도리여 말이 많으냐 나도 한바탕 했다. “저는 어머님의 의사를 충분히 존중 했습니다.” 그렇게 아들은 울먹이면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사실 애 이름이 우리말로 부르기 이상할 것을 고려해서“은이”라는 예쁜 조선족 애명을 지어 나더러 부르라고 했었던 것이다. 한데 호적에 올린 이름이 내맘에 들지 않아서 잔뜩 화가난 나에게 그게 먹혀들 리가 없다. “야 이 민족의 배신자 놈아! 내 손녀딸 이름을 당나귀라구 지어 놓구두 어미 의사롤 존중했다는 말이 나가느냐?!” 전화 통화가 그쯤 되니까 서로가 격해져서 아들은 전화 저쪽에서 울고 나도 이쪽에서 씩씩거리다가 제풀에 화나서 울고 그렇게 서로가 아이이름 때문에 실로 불쾌한 하루를 보냈었다. 사실 서른살이 넘을때까지 아들은 실로 내말을 100% 존중해 주는 효자이다. 그래서 나도 아들한테 씻지 못할 죄를 진일이 있다. 아들이 고중에서 문리과를 선택할때 내뜻대로 성적표를 분석하고 문과를 하라고 시켰었고 대학지원을 할때는 또 조선족 며느리 삼기가 편할것 같은 내 생각으로 일지망을 중앙민족대학에 쓰도록 한것이다. 아니라면 아들은 지금쯤 기자가 아닌 의사로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것 때문에 아들은 두고두고 원망을 하고 있고 그래서 사실은 엄마인 내가 이제라도 조금 기죽어야 하는데도 민족심 하나에서 만은 죽어도 아들한테 양보하고 싶지 않으니까 야단이 아닌가?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니까 아들의 말에 전혀 도리가 없는것은 아니였다. 아이는 북경에서 자라야하고 또 조선족학교가 아닌 한족학교를 다녀야 하는터에 한족말 이름이 듣기가 좋고 부르기 좋으면 그만이다. 그 이름이 우리말로 불려질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니까 이름 때문에 이리도 야단하는 나역시 어찌보면 오바하고 있는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상황을 미루어 추측 하건대 어차피 언젠가는 중국 대륙에서 사라져 가야할 우리민족의 운명이고 그것이 내집에서 지금 시작이 되는 시점이니까 이상할 것도 없지만, 민족심으로 악을쓰고 여기까지 온 이세대로서 지금부터 그 꼴을 보려니까 울화가 번지고 그래서 한바탕 되도 않을 발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 눈물나게 슬픈 내 마지막 발악이여!!/훈이
    • 독자기고
    2012-10-23
  • 서역으로 간 조선족 귀국의학박사
    2012년 8월,닝샤(宁夏)회족자치구 인민병원 임상의학진단센터가 새롭게 가동되었다. 중국 대서북지역에서 가장 선진적인 설비를 갖춘 이 임상의학진단센터의 책임자인 박문화씨는 미국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지내다가 귀국한 조선족 여박사이다. 1968년 길림성 연길에서 출생한 박문화는 1991년 연변의학원을 졸업하고 연변병원에 배치되여 임상검진사업에 참가했다. 박문화씨는 조선족 의학계의 쟁쟁한 전문가들인 선친과 오빠의 영향하에 의학연구에 대한 무궁무진한 정진을 멈추지 않았다. 2004년 7월 연변대학 의학원과 베이징대학 제1병원 감염질병과 박사연구생 과정을 졸업한 박문화씨는 이어 2008년까지 선후로 일본 삿포로(札幌)의과대 부속병원 소화내과와 미국 세인트 조셉(圣琼斯)병원 신경연구소에서 박사후 연구원 활동을 하면서 소화계통 종양발병과 치료의 분자기제연구, 자신면역성 질환의 발병기제와 치료에 관련한 연구성과들을 국제간행물에 육속 발표했었다. 의학실험에 몰두하고 있는 박문화박사(왼쪽) 2008년 11월, 박문화씨는 새로운 꿈을 안고 닝샤회족자치구 인촨(银川)으로 갔다. 닝샤회족자치구 인민병원은 2009년부터 '고차원 인재'영입 프로젝트를 가동해 국내외 우수 의학엘리트들을 광범위하게 초빙했다. 초빙 합격자들을 위해 직급대우를 높여주고 과학연구경비를 특별 제공하며 실험실과 연구조리원을 배치하는 등 업무 방면에 배려하는 한편 2천여만위안을 투입해 인촨시 중심지역에 주택 30채를 미리 장만했다. 또 매달 생활보조금 3~5천위안을 제외하고도 특별수당을 별도로 제공하며 호적을 올려주고 자녀들의 입학문제를 해결해주며 배우자의 직업을 배치해주는 등 파격적인 특혜조치로 국내외 수많은 인재들의 눈길을 끌었다. 2009년 1월, 인촨에서 열린 닝샤인민병원 '고차원 인재'면접시험에서 신청자 818명 중 박문화씨를 비롯한 14명이 합격했다. 박문화씨는 미국 세인트 조셉병원 신경연구소에서 3년간 박사후 연구를 진행하면서 신경면역성 질병의 발병기제와 간암의 유전자진단 등 방면에서 깊은 조예를 가진 드문 인재로 인정돼 닝샤인민병원 임상진단센터의 주임으로 초빙됐다. 닝샤인민병원의 임상진단과는 원래 설비가 낡고 기술과 관리수준이 후진적이며 전문일군들의 지식구조가 균형적이지 못해 임상진단과 질환치료에 만족스러운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었다. 박문화씨가 임직한 후 3년 남짓한 기간에 설비갱신과 인재초빙, 관리강화, 학과조정 등 일련의 개혁조치를 거쳐 닝샤인민병원의 암상진단업무는 일취월장으로 도약했다. 그가 관리하는 임상진단센터는 전 자치구에서 최초로 우세중점학과로 인정받고 2009년 국가자연과학기금위원회로부터 자금 후원 프로젝트를 비준받았다. 이는 닝샤인민병원 사상 처음으로 국가자연과학기금의 후원을 받는 프로젝트이다. 2010년 2월초 닝샤인민병원은 국가자연과학기금 프로젝트 신청에 성공한 공로를 표창해 귀국의학박사 박문화씨와 황건화씨에게 각기 10만원을 포상했다. 박문화씨가 이끄는 닝샤인민병원 임상의학진단센터는 현재 74명의 고학력 인재들로 구성된 전문학과를 이루어 4시간내 진단결과를 받아볼 수 있는 최첨단 임상진단센터로 급부상했으며 선후로 닝샤인민병원 선진단체, 우수의료학과, 싱샤회족지차구 '3,8홍기단체'로 선정됐다. 박문화씨도 닝샤인민병원의 선진개인, 10대 우수의사 칭호를 수여받고 닝샤청년과학기술상과 닝샤의학과학기술상을 수상했으며 2012년 5월에는 전국 '5.1'노동모범메달까지 받았다. 고향이 연변인 박문화씨는 "산좋고 물맑은 동북 고향을 떠나 대서북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인촨에서도 3년 넘도록 살다보니 이젠 퍼그나 정이 든다"면서 의학연구의 외곬인생에 대한 집착을 다시한번 보여주었다. / [CCTV.com 한국어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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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0-23
  • 인간의 부모사랑
    인간의 부모들은 내 새끼 하나 미운게 없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듯이 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부모마음이고 부모사랑이다. 그래서 부모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것 같다. 그런데 사실 부모들은 “편애”한다. 분명 제일 못난 자식을 가장 사랑한다. 그리고 막내를 가장 사랑한다. 그럼 못난 자식 사랑을 보자.여러 자식을 낳았는데 병신자식 하나 낳았다고 하자. 부모들은 바로 정상자식보다 이 병신자식을 “편애”한다. 왜서? 첫째, 병신자식에게 항상 죄스럽다. 병신자식 병신책임은 추호의 변론할 여지도 없이 전적으로 부모들 스스로에게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부모는 한평생 죄인으로 산다. 그래 속죄를 위해서라도 병신자식 더 사랑한다. 짐승은 병신새끼가 생기면 가차없이 버리는것이 상례다. 소가 송아지를 낳았다고 하자. 송아지가 어미소 몸에서 떨어져 일어나 걷지를 못하면 어머소는 병신새끼라 판단하고 그대로 간다. 짐승에게는 이런 죄의식이나 속죄의식이 없다. 둘째, 부모들 눈에 병신자식은 항상 불쌍해 보인다. 정상자식들한테 밀려 먹을것도 옳게 못 얻어먹는것 같다. 그래서 항상 병신자식을 더 챙겨주며 병신자식을 잘 챙겨주라고 정상자식들을 닦달하기도 한다. 셋째, 부모들은 여러 자식들 가운데 자립하지 못했거나 제일 못사는 자식, 그리고 이른바 출세하지 못한 자식을 “편애”한다. 부모들에게 있어서 이런 못난 자식들은 하나의 보듬어야 하는 아픈 가시다. 다음, 막내사랑을 보자. 두말할것도 없이 부모들은 막내를 “편애”한다. 형들한테 밀려 먹을것도 못 얻어먹을가봐. 6형제에 막내로 태여난 나는 이 점을 절실히 느꼈다. 나는 아버지하고 항상 겹상을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시내에 나갈 때면 항상 나만 데리고 갔다. 그리고 식당에 데려가서는 만포식시킨다. 그리고 내가 형들과 싸울가 싶으면 항상 형들을 꾸짖는다. 짐승은 맏이고 막내고 하는 개념이 없다. 철저한 양육강식이 적용된다. 어미새가 벌레를 물어와 새끼들을 먹인다. 그런데 어머새는 먼저 낳고(형) 늦게 낳고(동생) 관계없이 벌레를 받아먹겠다고 가장 열심히 입을 크게 벌리고 앞으로 갖다 대는 놈에게 벌레를 먹인다. 한마디로 짐승의 인간과 다른 새끼사랑 어미돼지에게서 전형적으로 보게 된다. 가슴에 주렁주렁 젖꼭지를 단 어미돼지가 새끼들한데 젖을 먹이는 광경을 보라. 간단하다. 덜렁 드러누우면 다다. 그리고 눈을 지그시 감고있는 주제가 먹고싶으면 먹고 말겠으면 말라는 태도다. 돼지새끼들은 거저 자기가 알아서 재량껏 챙겨먹기다. 그래서 병신새끼나 “막내” 같은 약한 새끼들은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며 항상 젖을 옳게 못 얻어 먹어 비실비실하다. 그럼 왜서 인간과 짐승의 다른 새끼사랑의 갈림길이 생기는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은 랭철한 리성적인 존재이고 짐승은 비리성적인 본능적 존재이기때문이다. 그래서 천하의 부모마음은 다 똑같다는(可憐天下父母心) 가장 비리성적이고 맹목적일것 같은 부모의 사랑도 실은 아주 랭철한 리성적인 사랑이 밑받침되여있는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바로 이런 랭철한 리성적인 사랑이 집단무의식화 되여 있기때문에 무릇 인간으로 태여난 존재에 대해서는 인격평등의 보편적인 인도주의사랑을 베풀수 있다. 그리고 어른에 비해 어린이, 정상인에 비해 장애인에 대해서 보다 뜨거운 사랑을 베풀수 있다. 그래서 죄인에 대해서도 그 죄는 미워할수 있어도 그 사람은 미워할수 없는것이다.인간은 구경 우주의 정화, 만물의 령장. 분명 동물보다 고상하고 위대한 면이 있다.우상렬연변일보 2012-10-09
    • 문학살롱
    2012-10-15
  • 전 연변팀 선수 박성 차 도둑에 봉변
    중국프로축구 슈퍼리그 북경국안팀의 핵심 미드필더로 활약하고있는 전 연변팀의 조선족선수 박성이 차 도둑에 봉변을 당한 사실이 뒤늦게야 알려졌다. 지난 8일, 박성은 시나넷에 설치한 자신의 트위터에 “어제(7일) 승용차강도가 차 유리를 부순 뒤 나의 가방을 가져갔다. 지금 도둑의 심정이 어떤지 모르겠다. 하하! 아무튼 내 심정은 아주 좋다. 왜냐하면 ‘재산을 잃어버리면 화를 면한다(破财免灾-한국말로 액땜한다는 말)’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글을 올려 당시 자신의 심경을 밝혔다. 이 글을 본 네티즌들은 “아무튼 유쾌하다니 다행이다. 태도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사업이 순리롭기를 기대한다”, “중요한 물건을 절대 차에 두지 말라. 경험이다”, “진짜 대단한 낙관주의자이네!”, “돈은 몸 밖의 물건이다. 너무 집착하지 말고 잊어라”등 위안의 댓글로 도배했다.전 연변팀, 전 중국올림픽축구대표팀의 핵심선수로 활약했던 박성은 지난 2010년 300만 위안의 몸값으로 북경국안팀에 이적했다.지난해 발목부상에 시달렸던 박성은 올해 들어 아시아챔피언스리그와 슈퍼리그에서 총 5꼴을 기록하며 팀의 공방핵심으로 부상했다. 한편 박성은 올해 연초 “베엠베120i(宝马120I)”을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희윤 기자연변통보 2012-10-12
    • 스포츠
    2012-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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