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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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속재창호기능사시험, 중국동포들 대거 응시, 무엇을 남겼나?
    • 기존 500명 정도 보았던 시험을 8천명 넘게 응시해 • 불합격자들 '시험관리감독 허술했다'며 한국산업인력공단 대상으로 재시험을 요구하는 소송 움직임도 일어•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해 F-4로 전환하면 "자격증 관련 일만 할 수 있다 해서 일자리 찾는데 어려움 많다"며 " 이는 동포를 기만하는 것"이라는 불만도 커질 듯 지난 12월 28일 학원가는 바짝 긴장했다. 필기시험이 없는 금속재창호기능사 시험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1년에 한번 있는 이 시험의 응시생은 500여명 수준이었다. 그중 합격률은 50~60% 수준, 그러나 지난해 금속재창호기능사가 재외동포(F-4) 자격변경 종목에 포함되는 과목이 되자, 지난해 하반기때 학원들은 필기시험에 취약한 중국동포들에게 가장 따기 쉬운 기능사시험 종목으로 각광받으면서 일명 ‘뜨는 종목’이 되었다. 그 결과 창호기능사 시험 대비 학원들이 늘어났고, 한 학원에 최소 100명에서 300명이 등록해 12월초에 있는 시험준비를 하였다. 학원비도 학원마다 차이가 났다. 75만원에서 120만원, 상대적으로 재료비값이 많이 들어간다. 그것까지 치자면 100~150만원, 필기시험이 없다하지만 집중력을 갖고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험일을 앞둔 한달 전부터는 하는 일도 접고 시험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그렇게 따지면, 최소 300만원 이상은 투자하는 셈이다. 그래도 동포들에겐 어느 기능사시험보다 수월하다는 것이 금속재창호였다. 그 결과 8000여명이 시험에 응시해 약 40% 합격률을 보였다(이것은 공식적인 발표가 아니다)고 하여 창호기능사반을 운영한 학원들은 그나마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방문취업(H-2) 5년 만기를 앞둔 중국동포들은 국가기술자격증(기능사) 소지자에게 재외동포(F-4) 체류자격을 부여해준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재외동포 자격을 취득하면 출국하지 않아도 되고 자녀초청도 할 수 있고, 여러 가지 특혜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F-4로 자격변경하면 방문취업(H-2) 자격으로 일할 수 있는 곳에서 일을 못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려준 곳이 없다. 금속재창호기능사 시험을 본 중국동포 김영철(41)씨는 지난 12월 28일 시험합격소식을 듣고 재외동포 자격변경을 하러 출입국관리사무소로 달려갔더니 ‘재외동포 자격으로 변경하면 금속재창호 분야에서만 일할 수 있다“고 하는 바람에 자격변경 신청을 보류한 상태이다. 다행히 그의 H-2 체류기간이 1년 더 남아있었다. 김씨는 6년간 용접일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용접기능사 시험을 볼 것이지 왜 창호기능사 시험을 보았냐?”는 질문에 그는 “필기시험이 없고 취득하기 쉬운 자격증이라고만 생각했지 재외동포 자격으로 변경하면 이 일만 해야 한다는 것은 몰랐다”고 답한다. 김씨는 용접일을 계속 할 거라고 밝혔다. 반면 금속창호분야에서 4년간 일해왔다는 장모씨는 창호기능사 시험에 합격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재외동포 자격으로 변경해도 계속 일을 할 수 있고, 재외동포로서 한국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30대 중반의 이경호씨는 동포세계신문이 기능사자격시험 관련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간담회를 갖는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를 해왔다. “두달 동안 정말 열심히 준비했는데 학원이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아 불합격되었다”며 그는 불만을 토로했다. 올해 10월이면 5년 만기가 되지만 그는 일찌감치 기능사자격증에 관심을 둔 편이다. 건설업 목수일을 다년간 했기 때문에 창호기능사 시험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시험당일 학원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모기장틀을 설치해 보라’는 주문에 당황하게 되어 결국 시험에 불합격되었다는 것이다. 이씨가 다닌 학원은 200명 정도 수강생이 있었는데 다른 곳보다 불합격자가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씨는 “학원이 교포심리를 이용하여 돈벌이를 한 것밖에 안된다”며 학원의 부실교육을 질타했다. 종목을 수시로 바꿔 운영하는 학원실태도 들을 수 있었다. 평택에서 거주하는 김창수씨(54) 이야기다. 한국생활 10년차 되는 김창수씨는 주로 토목건설에서 일해왔다. 평택에 있는 종합건설회사에서 과장으로 진급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토목기계에 자신감이 있어 지난해 8월 농기계기능사 시험을 보고 합격했다. 그때 농기계기능사 시험을 가르친 학원에는 중국동포 150여명 정도가 학원비 120만원을 내고 수강을 하였는데, 합격자는 11명에 불과했다. 이로인해 수강생들의 환불소동이 크게 일어났다. 이에 학원측은 금속재창호기능사 시험반을 급히 꾸려 환불대신 70만원만 받고 창호기능사 시험공부를 시켜준다는 말로 환불을 요구하는 동포들을 설득하였다. 그래서 동포들 상당수가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창호기능사반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지켜본 김창수씨는 “F-4로 변경하여도 농기계 분야로 일자리를 찾기도 어렵고 이 제도에 대해서 문제가 많다고 본다. 학원측의 문제도 많다"며 “기능사 취득으로 재외동포 자격을 부여해준다는 것은 부실 학원들만 생기게 하고 불법취업활동을 할수밖에 없도록 하는 동포를 기만하는 정책이다”며 강하게 불만을 토로했다. 또다른 현상으로는, 수험생이 500명 수준에서 8천명으로 갑자기 늘어난 바람에, 급조하여 마련된 시험장소마다 환경이 다르고 시험감독도 일관적이지 않아서 억울하게 불합격된 수험자들이 많이 발생했다며 한국산업인력공단을 대상으로 재시험을 요구하는 소송 바람도 불고 있다는 것이다. @동포세계신문 제284호 2013년 1월 8일 발행
    • 화제뉴스
    2013-01-09
  • 中 CCTV 올 음력설야회 사회자명단 확정
    올 음력설야회 사회자명단 확정 2013년 cctv 음력설야회 사회자 명단이 1월 7일 확정되였는데 주군, 리영, 동경, 필복검,싸베닝,리사사가 뱀띠해 음력설야회사회를 맡게 된다.
    2013-01-09
  • 어머님의 마지막 행차
    어머님의 마지막 행차 글/훈이 우리어머닌 아들없이 맨딸만 다섯이지만 딸, 사위들이 한결같이 모두 무던해서 어머니께서만 원하신다면 어느집에 계셔도 무방한 일이다. 하지만 어머니 자신이 팔십고개를 훨씬 넘긴 지금까지도 떠돌아 다니시기 소원이니까 말려내는 재간이 없다. 지난봄 우리집에서 떠나가신 어머니께서 사방 수천리 땅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네언니네 집을 차례로 거쳐 다시 우리집에 오시겠다는 기별을 보내 왔을때는 나무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가을이였다. 그러니까 평균 한집에 두달씩도 안있은 셈이다. 이번에나 우리집에 안착 하시려는지 팔십고령 로인을 홀로 내놓는다는 것도 말이 안되지 해서 번마다 모셔가고 모셔오고 해야하니 출근족인 우리로서 어찌 번거롭지 않을수 있겠는가? 하여 어머닐 만나자 난 다짐부터 받아 냈었다. “어머니, 이번에 우리집에 가시면 어디로도 드티지 마시고 영 있으세요. 누가 보고프면 전화로 오라해서 만나 보시고요.” “응 그러마! 이제 며칠 더살겠다구 오구갈새 있겠냐? 이번엔 너네 집에서 죽어야지.” 한데 우리집에 오신지 석달이 되여오자 또 안절부절 못하신다.그러시든 말든 시침을 뚝떼고 며칠간 모르쇠를 댔더니 아마 참지 못하시겠던지 그날 저녁 식사때 드디여 우리한테 말씀 하신다. “야들아 난 아무래두 연변에 가야겟다. 아들이문 그게 큰 아들인데 간날에 죽어두 큰 딸집에 가는게 원칙이지.” 큰언니네 집에 가시고 싶을 때마다 꼭 방패처럼 내들군 하시는 어미니의 당당한 리유였다. 난 저으기 성이 났다. 아무리 친딸이라 믿고 그럴테지만 어쩌면 이리도 애먹이는가 말이다. 거퍼 백날 시름 놓을새 없으니! “어머니두. 참 답답합니다. 연변이 뭐 문앞이라구 두석달에 한번씩 다니시나요? 왕복 삼천리길에 번마다 차비만 해도 거의 천원씩 널면서… 게다가 또 열흘 청가는 맡아야 하지 어머니 모시고 세네번씩 차를 갈아 타느라면 얼마나 고생이라고 젊은이들 처지두 좀 생각해 주셔야지요.” “그러게 이번엔 거기가 죽는다지 않느냐?” 한풀꺽인 어머니의 말씀이셨다. “이젠 스무번두 더 했을 그소리 누가 믿나요? 어디가두 아들집이 아닌바에 인제 한곳에 정해놓은 집이 있어야지 자꾸 다니니까 마음이 들뜨셔서 어느집두 당신집 같지 않고 그래서 며칠 안계시면 또 떠나고 싶은 겁니다. 그렇게 끝없이 떠돌다가 객사라두 하시면 어쩔려구 그래요?!”역증이 잔뜩 나던 참이라 난 참지 못하고 생각나는대로 마구 다 내 쏘았다. “글쎄 나두 그래서 한집에 눌러 있자 맘먹었다가두 그게 잘 안된단 말이다. 당장 래일이라두 죽겠는데 생각되문 금시 조급해지면서 어서 바삐 한번씩만 더 보구 싶은걸 어쩌겠냐? 다한번씩 보구나문 죽을것 같다가두 죽어지지 않으니 또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보구 싶구 너두 나중에 늙어봐라. 자식손군 있는대로 골고루 다 보구 싶단 말이다.. 언제든지 그 마지막이 있으련만 사람 목숨이 왜 이리두 질긴지 후유…”그제는 풀이 완전히 꺾인 어머니시라 련이어 땅이 꺼지게 한숨을 지으시며 몸을 일으켜 침실로 향하신다. 그제껏 말이 없던 남편이 날 나무란다. “야 당신두 엔간하다. 어머니가 뭔죄를 지으셨다구 한곳에서 감옥살이 하시겠나. 가고 싶은데가 있으시문 자꾸 다녀야지. 어머니 괜찮아요. 딸의 말 듣지 말아요. 래일 제가 어머님을 연변에 모셔다 드릴겁니다. 늙구 볼게 있나 제맘대루 할래기지. 나두 늙으문 남의 말 안들을 참인데 어머니가 당신말 꼭 들어야겠구만?” 그렇잖아도 어머니의 처량한 한숨 소리에 내가 너무 심했나 측은한 생각이 들던 참이라 나는 남편의 그소리에 변명조로 말했다. “ 너무 자주 다니려니까 힘든걸 어떡해요?” “그래두 그렇지. 당신 글러 먹었어. 자식 이쁘다구 키웠다가 그런 멋두 없이 뭘 하겠나? 백번이라두 안많다. 어머니가 뭐 천년만년 살아 계실까? 사망해 보라. 모시고 다니고 싶어두 방법 없잖은가? 생전일때 그만치 힘든것두 영광이구 행복이라. 번마다 이게 어머니의 마지막 요구라구 생각해 봐. 그래두 짜증이 나겠구만?!” 남편의 일장 훈시에 난 가슴을 탁치는 생각이 있었다. 고향에 있는 큰시형네 집에 가셨던 칠십 고령의 시어머니께서 그해 겨울 우리집에 오시고 싶어 하신다는 기별을 받고서도 우린“이제 따뜻한 봄이 오면…”하고 미루었었는데 그 따뜻한 봄이오자 글쎄 덜컥 시어머니의 사망부고를 받은 것이다. 그래서 그이와 나는 가슴속에 영원한 유감과 죄책감을 남기게 되였었다. 그렇게 급히 세상 뜨실줄 알았더면 기별 받자 모셔오는 건데…. 하지만 예고없이 가는 인생, 뉘라서 그 앞날을 예측할수 있으랴! 그런즉 어머니라고 례외일까? 아침 풀잎에 맺힌 이슬이요 서산 마루에 턱을 고인 해와도 같은 신센데. 이제 어머니께서 다니시면 몇번 더 다니실까? 하물며 우리 자매들을 키우고 공부시키느라 평생 고생하신 어머님께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에 그리운 딸 사위 손군들을 얼마만에 한번씩 만나 보시려는게 그리 과분한 요구도 아니잖은가? 누구누구를 불러온대도 어머닌 또 못온이가 그리우실테고. 그러니 어머니 자신이 직접 가셔서 한두달씩 함께 있으시면서 실컷 그립던 정도 나누시고 천륜지락을 누리시기 보담 통쾌 할수가 있을까? 두석달에 한번씩 다닌다고 해야 다섯 자매가 일년에 한번씩만 어머닐 모시고 다니면 그만인걸 어머니더러 참고 한집에 꾹 눌러 있으라 하다니? 수시로 마지막이 될수도 있는 팔십 고령의 로인이 아직도 끝없이 고생 시킬거라 여기고 짜증내는 내가 남편의 말대로 글러 먹어도 단단히 글러 먹은 것이다. 며칠후 나와 함께 길떠나시는 어머닌 어린애 같이 기뻐 하신다. 하지만 이것이 어쩌면 나한테는 어머니와의 마지막 행차로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난 코마루가 찡해 나는 것을 어쩔수 없었다. 지난 일기를 정리하다가 이걸 발견해서 여기에 올립니다. 어머님께서는 그후에도 이년쯤의 늘 마지막 같은 행차를 이어 가시다가 어느날 부턴가 맥이 진하셨고 드디어 99년 2월 2일에 세상을 뜨셨습니다. 저의 남편은 2004년 2월 18일에, 연변에 계시던 저의 큰언니는 2006년 1월 18일에 각각 돌아 가셔서 이글속에 아기자기 등장했던 여러 사람 가운데 지금은 저만이 살아 았습니다. 인생의 허무함을 가슴 저리게 느끼고, 있을때 잘해야 한다는 것이 만고 불변의 진리임을 다시한번 깨닫게 합니다.울님 여러분. 인생은 그렇게 무상한 것이니 부디 있을때 눈앞에 보일때 잘하시면서 마음 아픈 후회같은 걸 남기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 문학살롱
    2013-01-06
  • 박지성 중국 프로축구무대에 나타날가
    영국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중인 한국 축구선수 박지성(32세)에 대한 중국 프로축구의 영입전쟁이 또 시작됐다고 외신이 전했다. 한국의 스포츠동아 등 언론은 다수의 중국 언론들이 3일 중국 슈퍼리그팀들이 박지성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어 현재 박지성에 400만딸라 수준의 년봉을 제시할것이며 2년 계약을 원하고 있는것으로 드러났다고 덧붙였다. 유럽 빅 클럽에 못지 않은 막대한 자금을 등에 업은 중국 프로축구팀들은 그동안 박지성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보여왔다. 실제로 광주 항대프로축구팀은 구단주가 박지성에게 백지수표를 제의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을 정도이다. 현재 박지성에 대해 가장 적극적인 팀은 산동 로능축구팀인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박지성은 5일 밤 11시(중국시간) FA컵 64강전 웨스트 브로미치 알비온 FC와의 경기에 출전할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무릎 부상때문에 한동안 경기에 나서지 못했지만 지난 3일 첼시 FC와의 프리미어리그 원정 경기에서 후반 막판 교체 투입돼 약 5분간 그라운드를 누볐다.
    • 스포츠
    2013-01-05
  • 인민루니 정대세 한국 수원삼성팀에 이적
    조선축구대표팀의 공격수인 《인민 루니》 정대세(28세)가 한국프로축구 K리그 수원삼성의 유니폼을 입는다. 한국 수원삼성구락부에 의하면 정대세가 빠르면 7일 입국해 메디컬 테스트를 받은뒤 곧바로 입단 절차를 밟게 된다고 피로했다. 수원은 쾰른과 이적료 30만유로에 합의를 봤다. 정대세의 년봉은 4억원(한화)수준인것으로 알려졌다. 정대세는 일본 프로축구 가와사끼 프론탈레를 거쳐 지난해 초 독일 분데스리가 쾰른으로 이적했다. 조선대표팀의 주전 공격수로 활약하는 정대세는 소속팀의 주전 경쟁에서 밀려 좀처럼 출전 기회를 얻지 못해 새로운 둥지 찾기에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정대세는 지난해 11월 한국 K리그의 수원과 울산 등 이적료와 년봉을 감당할수 있는 기업형 구단에 이적을 희망하는 제안서를 보냈다. 협상 초기 100만딸라에 이른 이적료는 수원과 협상 과정에서 30만딸라까지 떨어졌지만 중간에 대전 시티즌이 영입전에 뛰여들면서 난항을 거듭했다. 하지만 정대세가 수원이외의 팀으로는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결국 수원이 애초 협상액보다 1억원(한화) 가량 오른 30만 유로에 쾰른과 이적료 협상을 마무리했다. 한국 수원삼성에 입단한 정대세는 2013년 아세아챔피언스리그 소조에서 중국프로축구 귀주인하와 한소조에 속해 귀주축구팬들이 현장에서 인민루니의 풍채를 볼수있게 되였다.
    • 스포츠
    2013-01-05
  • 박근혜 한국 력사상 첫 녀성대통령으로 당선
    박근혜 한국 력사상 첫 녀성대통령으로 당선 서울 12월 20일발 신화통신: 한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20일 새벽 공포한 결과에 의하면 한국 새누리당 대통령후선인 박근혜가 19일 거행한 한국 제18기 대통령선거에서 미약한 우세로 민주통일당 후선인 문재인을 이기고 한국 다음 임기 대통령으로 당선되였으며 한국 력사상 첫 녀성대통령으로 되였다.한국 중앙 선서관리위원회는 당지 시간으로 20일 새벽 5시에 최종통계결과를 공포했다. 박근혜와 문재인은 각기 51.6%와 48%의 득표률을 획득했는데 박근혜는 1577.3100만장의 선거표를 획득하고 문재인은 1469.2609만장의 선거표를 획득해 량자의 선거표 차이는 108.0491만장이다. 이번기 대선의 득표률은 75.8%에 달해 17기 대선의 63%와 16기 대선의 70.8%를 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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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뉴스
    • 중동·아프리카
    2012-12-21
  • 연변아줌마는 별로예요!
    연변아줌마는 별로예요! 줄곧 한국행을 꿈 꿔왔던 나에게 기회를 준것은 2007년에 시행된 무연고동포 방문취업제시험제도였다.10년만에 친정아버지를 인천공항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때문이다. 그래도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가끔씩 화상채팅으로 아버지의 모습을 뵙기도 했고 목소리도 듣긴 했었지만 당시 공항에서 우리 부녀의 만남은 이산가족상봉 그 자체였다. 그해 한국에 첫 발을 들여놓은 나는 공항리무진을 타고 당시 아버지가 살고 계셨던 서울의 한 단칸세방에 행장을 풀고그 다음날 동네 파출사무실에 등록을 한후 본격적인 한국생활을 시작했다. 첨에 내가 시작한 일은 ____. 그땐 아무것도 할줄 몰랐으니 가는 집마다 바닥쓸고 유리닦고 손님이 가면 상치우고 짬짬이 컵 씻고 하는 일은 다 나한테로 돌아왔다. 하루종일 손님들의 심부름에 홀언니들의 뒤치닥거리에 몸은 고달프고 녹초가 되였지만 주머니에 들어있는 5만5천원이란 돈을 생각하면 웃음집이 흔들거렸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마냥 가볍기만 했다. 매일 이렇게만 벌면 몇년후에 떼부자가 될것만 같은 생각에 어떤 달에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한적도 있다. 내가 한국에 온 목적이 돈을 벌려는 것이어서 일이 힘든건 그래도 괜찮았다. 하지만 같은 중국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지역이 다르다고 무시하는건 도저히 참을래야 참을수가 없었다.한번은 어느 보쌈집에 일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일찍 출근해 바닥청소 거의 마감하고 있는데 홀직원인듯한 예쁘장한 아가씨가한들거리면서 출근한다. «안녕하세요?»하면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그 아가씨는 옷 갈아입으러 들어갔다.보아하니 스물대여섯 돼 보였다. 근데 옷 갈아입고 나온 그 아가씨가 소주뿌려가면서 테이블을 닦고 있는 나에게로 다가와서 하는 말이 «아줌마도 중국에서 오셨죠? 중국 어디에서 오셨어요?» 였다.말투 들어보니 나처럼 중국에서 온 아가씨인듯 하여 무척 반가웠다. «나는 연변에서 왔는데 아가씨는 어디서 왔어요?»당시 삼십대 후반이였던 나보다 훨씬 어린 여자애였지만 그래도 초면인지라 예의상 존댓말을 썼다.근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예쁜 얼굴에 실망의 빛이 어리면서 얼굴표정이 딱 굳어지더니 «아, 그래요? 전 연변사람이 별루예요.»라고 하면서 몸을 홱하니 돌려서 가버리는것이였다. 순간 나는 너무나 당황하여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그냥 넘어가야 하나? 아니면 어린애한테 뭐라고 지적해줘야 하나? 하고 갈등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초간...나의 자존심은 뿔부터 난 못된 송아지를 용서할수 없었다.나는 일하고 있는그 아가씨에게 다가가서 손으로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얘, 연변사람인 내가 너한테 피해를 준 일 있니?»«아니요, 없어요.»«그렇다면 무엇때문에 연변사람이 별루라는거니?»아가씨는 당연한걸 물어본다는듯이 «우리 동네에서는 연변사람은 몽땅 사기꾼이라고 소문이 자자해요. 그래서 나도 연변사람 싫어해요.»라고 또박또박 당당하게 말하는것이였다.«헉! 어린것이! 이마에 피도 안 마른것이?!» 된방망이에 뒤통수 맞은 기분이라고 해야할까? 당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때 기분을 상상도 못할것이다. «얘, 그 이쁜 얼굴로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는게 아니다. 그러면 너네 동네사람들은 연변사람이 아닌 너처럼 다 그렇게 할말 못할 말 못가리고 툭툭 내뱉니?» 이렇게 말한후에도 나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어찌 다른사람이 팥을 콩이라 한다고 너도 같이 따라서 콩이야 하고 말하니? 나이도 어린게 이렇게 이상지하 모르면 못 써! 우리 엄마도 연변사람이지만 자식교육 이렇게 시켜서 내보내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연달아 쏘아붙이고는 돌아서서 내 할일만 했다. 시간이 좀 지나고 «욱ㅡ»했던 기분이 좀 가라앉으니 «아, 내가 나이 어린애한테 너무 심하게 했나?»라는 자책감도 없지 않아 기분이 찜찜했다. 아침부터 이런 일이 있었는지라 그 아가씨와 나는 일에 관한 말을 빼고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고, 둘다 뿌루퉁한 기분으로 하루 일을 마무리했다. 그날 나는 그 아가씨한테 연변사람에 대한 인식을 바꿔주려고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더욱 열심히 뛰여다니다보니 결국에 녹아나는건 내 몸뚱아리뿐이였다. 그 후에도 나는 일다니면서 연변 아줌마 신분때문에 같은 중국조선족끼리 무시당하고 따돌림당한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어떤 연변언니들은 누가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면 그냥 길림에서 왔다고 조언하기도 한다. 나는 연변에서 태여났고 해란강옥토벌에서 나는 쌀을 먹고 자랐는데 무엇때문에 내가 연변사람이라는 사실을 숨겨야 하는가! 연변지역의 조선족들이 관내 조선족들보다 먼저 코리안드림의 물결에 합류한 것도 아니다. 터놓고 말해 1990년초반 한국에 연고 있어 실현한 코리안드림 얼마나 될가. 근데 한국에서의 조선족 이미지가 나빠진 것을 같은 조선족끼리 연변사람들한테만 그 책임을 돌리려하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고 이해할래야 할 수 없었다. 한국으로 보내준다며 사기 등 온갖 몹쓸 짓을 한 불법브로커들이 살판쳤던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런 브로커들이 다 연변사람인것도 아니지 않는가! 한국 본토박이도 있고 관내 조선족들가운데도 이런 브로커가 있다. 연변사람일지라도 그들은 수십만 연변조선족가운데 한낱 소수점에 불과한 존재이다. 우리 조선족은 지구촌 세계각지에서 모래알처럼 흩어져서 살지만 마음만은 하나로 융합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살고 있는 지역이 다르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서로간에 얼굴붉히고 배척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조선족이 글로벌경제시대로 진출하고 있는 지금 조선족은 단결 화합하여 타향에서의 생활을 잘 마무리하고 자신들의 아름다운 락원을 꾸려가야 한다.나에게서 호된 소리를 들었던 그 아가씨가 그날 이후로 연변사람에 대한 생각이 좀 바뀌였을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앞으로라도 «나는 연변에서 왔어요!»라고 떳떳하게 말할것이다.김 송 화 (중국조선족대모임 응모작품)
    • 문학살롱
    2012-12-17
  • 자존심을 붙안고 몸부림치던 나날에
    자존심을 붙안고 몸부림치던 나날에 김 미 선 1992년 5월 12일, 나는 남들처럼 빚을 내서 한 보따리 되는 중국약을 사 가지고 희망의 꿈에 한껏 부풀어 천진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푸른 물결이 끝도 없이 무연히 펼쳐있는 바다도 처음 보았고 커다란 물고기 세마리가 곡예를 하듯이 공중에 솟구치는 것도 처음 보았다. 드디어 우물안의 개구리가 세상 구경 나왔다고 해야 할가? 내가 산 배표는 3등선실인데 노란 장판을 깔아놓은 넓은 방에서 사람들이 기쁨에 들떠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야단법석이다. 지금도 눈에 선한것은 선실에서 본 한국영화 “장군의 아들”이였는데 너무 재미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한국영화를 접했다. 우리와 같은 글,같은 말을 쓰고 있다는 것 자체에 친밀감이 들었다. 인천부두에 도착했지만 아직 새벽이라 해관 사무원들이 출근하지 않아 우리는 계속 배우에서 멀거니 몇시간을 더 보낸후 한국땅을 밟게 되었다. 나는 본래 별 걱정 없는 직장생활을 했었다.그럭저럭 먹고살기는 괜찮았으나 그냥 저축이 없이 빠듯한 생활에 환멸을 느끼던 차 “직장에 적을 두고 나와 창업할 수 있다” 정책이 나왔다. 고민끝에 나는 직장에서 나와 자영업으로 돈을 벌기로 했다. 그해가 바로 1987년이었다. 식당도 해보고 멀리 관내에 가서 쵸콜렛 등 식품을 구입해 식품상점에 되넘겨 팔기도 하다가 침직기계 몇대를 사놓고 집에서 침직품 생산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직장인들의 월급이 고작 인민폐 70원좌우였으나 유행에 맞는 털실세타 하나를 연구개발하면 하루에 300원이상 벌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한국행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 와서 먼저 간 곳은 서울 전철역이었다.한보따리나 되는 약을 당장 팔야야 하기 때문이다. 젊은 아줌마들이 앞에 약들을 널어 놓고 앉아 있었다. 약장사하는 중국동포들이 적게 쳐도 이백명정도는 되었다.나도 자리를 찾아 앉아 그들처럼 약들을 차려놓고 앉으면 되는판이다.가방을 든채 몇번이나 돌고 돌았지만 손바닥만한 체면때문에 풍덩 물앉아 약을 팔 수 있는 마음의 준비는 도저히 없었다. 결국 약가방을 메고 다시 돌아왔고 생각끝에 일자리나 얻어 돈을 벌자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노원구의 한 음식점에 취직을 하였다. 한달 월급이 한화로 45만원이였다. 가지고간 약들은 후에 친구에게 헐값에 팔아넘겼다. 삼계탕을 하는 작은 음식점이라서 주인장과 내가 주방에서 일하고 그 안주인되는 이쁘장한 아줌마는 안방에서 화장하고 항상 어디론가 나갔다가 저녁에야 들어오군 했다. 그래서 나는 주방일 이외에 집청소도 도맡아야 했다. 그 집에 딱 한달 있었는데 거짓말보태 눈물 한동이는 흘렸을 것이다. 두고온 자식과 부모생각에 눈물이 났지만 더욱 화나는 것은 안주인의 횡포였다. 지금에 와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었지만 급별과 신분에 관계없이 평등했던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살아왔던 나로서는 안주인한테 말을 들을 때마다 억울하고 분해서 구석진 곳에 숨어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내가 받은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으면 열흘동안이나 배변을 보지 못하였을까?! 그것이 속에서 독이 되어 죽은 사람도 있다 하던데. 한달동안의 월급을 손에 쥐고 나는 가방을 챙겨 그 집을 나오려고 했다. 그러자 안주인이 나를 신고해 중국에 붙잡혀 가게 만들겠다고 방방 떨었다. 그날 나는 누구에게 선물하려고 두었던 비싼 다이어트약 4곽을 몽땅 주고 그집을 나올 수가 있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의정부에 있는 음식점이었다. 거기서 한 일년을 하니 일부 단골 손님들이 나를 보고“ 어~ 이 아줌마 많이 세련됐네.”하고 말하는것을 가끔 들었다.그 말을 들으면서 한국 온후 일년간은 시골 암탉을 시내 장에 갔다 놓은 꼴을 보여줬을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푸후~ 하고 웃음이 나가기도 하였다. 불법체류하는 조선족 티를 내지 않자면 한국말을 빨리 배워야 했고 주인의 잔소리를 안듣자면 온 신경을 다 모아 일을 빈틈없이 깔끔하게 해야만 했다. 한국 음식점에서 일하는 목적이 두가지였는데 돈을 버는것이 하나이지만 그보다 중요한것은 번 돈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서 근사한 음식점 하나 차릴 목적에 한식 만드는 기술을 배우려는 생각도 있었다. 한번은 회사내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 사장이 가까이에 있는 또 다른 식당도 운영하고 있었다. 내가 일하는 식당은 아침 40명, 점심 100명, 저녁에 40명에 밤 12시에 20여명이 식사하였다.사모님이 점심에 와서 잠간 거들어주고 오후에 가고 나면 나 혼자서 했는데 일하는 것보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그래도 혼신을 다해 일했더니 가끔식 돌아보고 가던 사장님이 회사 노조에서 내가 하는 음식이 입에 맞는다고 칭찬하더라고 알려주면서 월급 십만원을 올려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후 식당일에 지겨움을 느낀 나는 안산에 있는 시화공단의 한 작은 회사에취직했다. 강철로 만든 각종 출입문, 간판, 매대, 또 용처를 알 수 물건들을 주문을 받아서 뼁끼 칠을 하는 공장이였다. 공장에는 또 한국에 온지 한달도 채 안되는, 김철이라고 부르는 흑룡강에서 온 조선족 남자가 있었다.처음에 그는 공장의 류수작업이 습관이 안된 모양이었다. 중국에서 한가하게 일하던 습관때문에 휴식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작업대 뒤에 가서 혼자 담배를 피우고 나올 때면 류수작업에 차질이 빚어지군 했다. . 그러던 어느 날. 일은 터졌다. 회전하는 줄에 닦아 놓은 물건들을 걸어야 하는데 물건이 또 미처 따라가지 못했다. 바로 이때 «야, 이 씨팔 놈아. 다른 사람들 일하는게 안 보여? 너만 피곤하냐. 너 같은 놈하고 일하다가 내가 스트레스 받아 못 산다. …..» 깜짝 놀라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평소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싸움질을 잘하는 최씨성의 한국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나오는 김철을 향해 삿대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철이가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데 그 소리가 나오기 바쁘게 최씨가 김철이의 뺨을 철썩하고 후려친다. 김철이의 뺨은 순식간에 붉게 달아 올랐다. «또 싸움이야, 그만두지 못해!» 언제 들어 왔는지 사무실에 있던 장과장이 최씨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그 광경을 보는 나의 마음속에는 뭔가 부글부글 끓어 번지고 있었다. 남들이 일하는 시간에 혼자서 담배를 피운 김철의 잘못도 있지만중국동포라고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최씨가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최씨가 마음 먹고 나를 무시하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그의 달라진 어투나 행동에서 감지할 수 있었다. 한 두번은 참을수 있으나 중국동포를 사람취급 하지 않는 그의 언행을 보면서 나의 마음은 독으로 번져지고 있었다. (기회를 보자. 네가 입이 열이라도 할말이 없을때까지 기다리자.) 얼마 안 가서 그 기회가 오고야 말았다. 최씨가 무거운 쇠문짝을 받쳤던 스츠로프를 돌아서 일하는 나를 향해 걷어찼다. 스츠로프는 나에게 맞쳐왔고 그것이 아프지는 않지만 나는 그 기회를 놓칠수가 없었다.홱 돌아서는 찰나에 최씨가 곁에 있는 친구에게 입을 비쭉이면서 너털웃음을 웃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빽 소리 질렀다.«이것을 왜 나한테 걷어차는거예요?!»«왜? 내가 차고 싶으면 차는거지 그게 어떻단 말인데?» 최씨는 의기양양해서 소리쳤다.«이런것을 함부로 차 저한테 맞혔으면 사과를 해야 하는거 아닙니까? 그러고도 웃어대는 저의가 무엇이예요?» 내가 소리 질렀다. 공장은 기계소리 때문에 거리가 좀만 떨어져도 들리지 않기에 혼신을 다 해 소리 칠 수밖에 없었고 나는 독을 품고 있는 상태였다. «야. 이 씨팔년아. 내가 웃고 싶으면 웃지. 너 때문에 내가 참아야 되는거니? 안 그래 .» 여전히 희죽거리는 그한테 나는 별렀던 포탄을 터뜨렸다. «야, 너 부모가 있니? 너같은것도 아들이 있다고 밖에 나가 남들하고 말하겠지?!»이것이 내가 터뜨린 첫 번째 폭탄이였다.«이 미친 년이 부모는 왜 욕 보이는거니?» 최씨는 그래도 효자일수는 있었다. 길길이 날뛰면서 나한테 때릴듯이 다가 왔다. 나의 고사포가 울리기 시작하였다. «야, 너 학교라는데 다녀 봤니? 너 부모 교육이라는걸 받아 봤니? 인피쓰면 다 사람인줄로 아는데. 천만에! 분명히 알아 둬! 너보다 못한 사람은 이세상에 없어, 중국에서 살면서 소수민족이지만 너처럼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은 종래로 못 봤어. 이 개보다 못한 물건짝아! 대한민국에 너 같은 야만인이 있다는 것이 내가 다 창피스럽다. ……………» 또박또박, 높은 톤으로 내뱉는 나의 목소리에 공장은 가동을 뭠췄고 언제 들어 왔는지 사무실의 장과장을 비롯한 공장안의 모든 사람들이 소리를 죽이고 빙둘러 서 있었다. 나한테 다가왔던 최씨가 슬금슬금 자기 자리를 가고 있었지만 나는 따라가면서 계속 고사포를 쏘아댔다. 말을 마친 나는 그자리에서 로동복을 벗어 버리고 숙사로 들어가 나의 물건들을 챙겼다. 그리고 곧장 사무실로 들어갔다. 밖에서 금방 들어온 사장님이 장과장한테서 방금 벌어진 일을 회보받고 있었다. «사장님,저 인제 일을 그만 두겠습니다.»«아줌마 그러지마요. 아줌마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물러서는거예요?아줌마가 가면 아줌마가 잘못했다고 승인하는것밖에 안 되잖아요.»«저 불법체류이기 때문에 저 사람이 고발하면 잡혀가요. 그러니 다른 일자리를 찾으렵니다. 그 동안 관심해 주어서 고마웠어요.»그러자 사장님은 나를 자리에 앉혀주며 최씨가 신고 못하게 조치를 취할 것이라면서 안심하고 일하라고 다독여주었다.나는 다시 공장으로 돌아 갔다. 이튿날부터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길이 변한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최씨의 친구인 고씨와 리씨도 “아줌마 중국에서 변호사한거 아니야?!” 하고 우스개를 했고 우리는 함께 통쾌하게 웃을 수가 있었다. 한국에 갔다왔기 때문에 우물안의 개구리였던 내가 너무나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돈도 많이 벌었다. 서로 다른 체제에서 살아왔던 거리감때문에 많은 오해도 있었지만 피는 물보다 진한 친정집 같은 감정은 그 누구도 무마할 수가 없다. 내가 흘렸던 눈물과 내가 힘들어 했던 그 나날들이 내가 보다 성숙된 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의 주춧돌이었다. 吉林省 延吉市 金 美 善(중국조선족대모임 한국생활수기 응모작품)
    • 문학살롱
    2012-12-17
  • 나의 유학생활은 열정으로
    2001년 3월20일,김포공항에 내리면서 한국을 처음으로 체험하게 되었다.할아버지 고향이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이다. 어릴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 곁에서 자란 장자로서 소년 시절부터 “남조선”에 대해 생소하지는 않았다. 할아버지는 중국 연길에 계실적 매일 저녁 주무시기전엔 라디오를 틀고 KBS방송을 듣군 했다. 1910년대 쪽박차고 중국에 이주했지만 고국에 대한 그리움은 잊지 못한채 한국 뉴스를 즐겨 듣고 한국에 있는 친척을 찾는 프로그램도 빼놓지 않고 듣곤 했다. 이런 할아버지 영향을 받아서인지 한국이 낯설고 머나먼 나라로 생각되지 않았고 한번쯤은 가보았으면 원이 없겠다는 생각도 했다. 1999년,나는 연변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연변1중에서 영어교사로 2년 지냈다. 우연한 기회에 경희대 정보통신대학원 진용옥원장님을 알게 되었다. 정보통신 분야에서 유명한 학자이시다. 그때 당시 중국 현지 언론을 통하여 정보통신 분야에서 한국이 선진국이라는 뉴스를 많이 접하였다. 정보통신 공부를 하여 벤처기업을 설립하자는 꿈을 가지고 나는 성스러운 교사 직업을 그만 두고 한국 유학의 길을 선택하였다. 연변1중은 조선족고등학교에서 최고의 명문고등학교라 대우도 아주 좋았다. 그런 좋은 직장을 그만두는 나를 친척, 친구들이 다시 한번 잘 고려하라며 만류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나의 결정을 꺾을 수가 없었다. 북경에서 비자 승인을 받고 한국으로 떠났다. 15명의 연변 청년들이 경희대정보통신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나의 비자가 늦게 승인받은 바람에 그들과 떨어져 역시 비자땜에 출발이 늦어진 한 형님과 함께 동행하게 됐다. 김포공항에서 경희대학교 수원캠퍼스로 버스를 잡았다. 제일 처음으로 인상 깊게 본 것은 차창밖으로 보이는 까치 둥지이다. 정말이지 까치 둥지가 상상이외로 아주 많았다. 우리 속담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는 말이 있다. 나무위의 까치둥지는 나의 고향에서 볼 수 없는 풍경들이었다. 정보통신대학원 멀티미디어학과 전공을 선택한 나는 학부때 관련 지식을 공부하지 못했기에 선수과목 수업을 들어야 했다. 처음에는 교수님이 무엇을 얘기 하는지 알아 들을 수 없었다. 모르지만 듣고 또 듣고 용어사전 찾아가며 공부했다. 방학에도 다른 유학생들은 한과목을 선택하여 계절 수업을 들었지만 나는 두 개 과목을 선택하여 들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몇달간의 시간이 흐르자 제법 기초 용어를 대강 알아듣기 시작했다. 생활비도 문제다. 15명 조선족 유학생 친구들은 생활비와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했다. 주유소에서 시간당 2,500원 아르바이트생을 구한다는 주유소의 모집공고가 들어왔다. 한국 학생들도 방학에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 한다는 것을 들었다. 나도 중국 연변대학교를 다니면서 두달간 방도문회사에서 아르바이트 한적 있었다. 80키로그램이나 되는 문짝을 옮기고 설치하고 꽤나 힘들었지만 일반 근로자들의 생활을 체험하기 좋은 기회였다. 주유소에서 주는 돈은 적지만 생활비를 얼마간 충당할 수 있고 여건이 좋은 아르바이트 기회가 언제 생길지 모르니 일단 시작하고 보자는 마음에 주유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낮에는 공부하고 저녁9시부터 새벽 두시까지 주유소에서 일을 하였다. 방학 때는 오전에만 수업이 있어 그 나머지 시간은 주유소에서 열심히 일을 하였다. 주유소에서 두달 가까이 지내다가 벼룩시장에 나온 식당 홀서빙 광고를 보게 되었다. 일은 수업 끝난 후부터 저녁 11시까지여서 수업에 영향을 주지 않았고 주유소의 아르바이트 급여보다 두배 가까이 받는다. 아직도 처음 면접때 일을 생각하면 재미 있었다. 일라인 스케티트를 타고 식당앞에서 멈추고 신발을 바꿔 신고 식당으로 들어섰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식당 주인이 나를 보더니 무척 반가워 하였다. 자신도 일본 유학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주파수 대가 거의 같았는지 모르겠지만 식당일 시작하기 전부터 나한테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하였다. 가게 사장이 일라인을 타면 위험하니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하였다. 웬 떡이냐라고 생각했다. 처음 면접 본 풋내기 유학생한테 이런 선물을 하다니. 참으로 감사했다. 그 생고기집은 테이블 여섯개 밖에 안되는 작은 식당이지만 고기도 최상급이고 소스도 일본에서 개발한 소스를 직접 사용하기에 저녁이면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이때면 가게 사장, 주방장, 그리고 홀서빙하는 나를 포함하여 세명은 바로 전쟁이다. 야채, 수저, 밑반찬, 숯불목탄 세팅부터 남은 그릇 주방까지 나르기가 나의 몫이다. 이것도 열정이 없으면 안된다. 열정을 가지고 내가 맡은 업무를 착실히 수행해 나갔다. 일년후,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에서 인턴 연구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우리학교에 전해졌다. 같이 온 조선족 유학생들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연구원에 보냈다. 행운스럽게도 유일하게 내가 선정되었다. 나중에 듣고 보니 영어를 전공한 것이 큰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사실 정보통신에 대한 이론 지식은 학교에서 그나마 공부하였으나 이 분야에서 눈을 뜬 건 사실 연구원에서 한중 통역을 하면서 시작하였다. 근무하는 기간 여러 연구원들과 일을 같이 하고 생활도 하면서 한국을 요해했고 많은 국제회의에 참석하면서 정보통신 첨단 기술 발전추세도 파악했다. 해외 정보 사업실에서 근무하는 동안 국제정음정보처리회의 (2002,심양)에서 “동북아과학기술정보교류 방안”을 제목으로 하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중국 Computer Network Information Center와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과의 네트워크 관련 교류를 추진하였고 슈퍼컴퓨터, 디지털도서관, 인체영상 분야의 통역을 진행했다. 2002년 12월 16일에는 중국문헌정보센터와 한국과학기술연구원과의 자원공유 교류 통역을 수행하였다. 중국에서 정보통신 관련한 분야의 용어를 접촉하지 못해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모르면 배우자.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다. 나는 열정으로 모든 것을 압도하였다. 전문용어가 무슨 뜻인지 모르면 중국 정보통신관련 연구원들과 물어보고 또한 번역한 결과를 한국 연구원들에게 의사전달이 맞는지 확인하였다. 과학기술 통역은 어떻게 보면 연구원들에게 하나하나 배우는 과정이었다. 그 때 당시 배움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발전된 모습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에 있으면서 한중 엘리트들과의 접촉가운데 정보통신관련 많은 새로운 것을 배웠고 또한 이러한 것들은 나의 소중한 경험으로 되었다.. 저자 곽용호
    • 문학살롱
    2012-12-17
  • 한국생활수기 모음집을 발간하며
    중한수교 20주년을 맞이하는 임진년 2012년도 저물어가는 시점입니다. 또한 중국조선족대모임 설립 10주년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이 시점에서 <중국조선족대모임>이 년초부터 추진해왔던 재한중국조선족의 한국생활 수기모음집을 한권의 책으로 묶어 출간하게 되어 여간 기쁘지 않습니다. 이 책에 수록된 수기모음집은 중국조선족이 한중수교로 모국이면서도 이국타향인 한국에 와서 생활하는 갖가지 체험담을 진솔한 이야기로 풀어 담은 소중한 이주생활기록들이라고 생각합니다. 29편의 주옥같은 글들은 조선족 개인의 이야기이지만, 분명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라 생각합니다. 현재 한국에서 생활하는 중국조선족이 50만명을 넘어서고 있다고 합니다. 과거 20년의 발자취를 뒤돌아볼 때 우리 중국조선족은 좀더 잘 살아보자는 목표를 갖고 기대에 부풀어 한국에 왔지만 문화차이가 많이 나는 낯선 땅에 와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 과정에 좌절도 있었고 안타까운 사연들도 많았고, 눈물겨운 일들도 많았던 것같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좌절에 머무르지 않고 시련을 잘 극복하고 이만큼 성숙한 조선족으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중국조선족도 생각이 깊고, 문장을 통하여 감동을 줄 수 있는 문화인임을 보여주는 것이 한국사회에서 중국조선족의 이미지를 높이는 소중한 일이라 생각하고 한국생활 수기를 공모하게 되었고, 책으로 내게 된 것입니다. 중국조선족대모임을 사랑해주시고 소중한 시간을 내어 글을 써주신 분들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책을 내어 선물을 드릴 수 있는 일뿐입니다. 또한 저의 바람을 잘 이해해주시고 기꺼이 책을 내는데 도움을 주신 밍밍(mingming)무료국제전화 임직원님들께 진심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쪼록 여기에 실린 한국생활수기가 널리널리 퍼져 많은 분들에게 읽혀지게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한국에 와서 열심히 생활하는 조선족의 삶이 진주알처럼 빛나고 조선족의 이미지 향상 뿐만 아니라 조선족과 한국인 간의 같은 피를 나눈 형제들로서 서로 이해하고 가까워지게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2년 12월 13일 신림동 사무실에서 중국조선족대모임 대표 허을진
    • 문학살롱
    201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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