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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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김만(金曼)-그녀는 중국의 저명한 표현예술가이자 “오페라 여왕”으로 등극한 조선족 여가수이다. 그녀는 노래를 잘 부르고 춤 잘 추는 천부적인 재능과 자신의 피 타는 노력으로 중국 오페라무대에서 제3대의 “강누나(중국의 여혁명가 강설금)”역을 성공적으로 부각하여 중국 오페라 계를 들썽하게 하였으며 제10기 중국 전국 정치협상회 위원, 전국 정협 과학·교육·문화·위생·체육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현재 김만은 중국 베이징대학 오페라연구원 원장으로 중국 오페라분야에서의 인재양성 및 수준급 작품창작을 위해 모든 심혈을 아끼지 않고 있다.

 

김만- 그녀야말로 중국오페라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끊임없이 추구하는 예술사업가임에 분명하다.


꿈의 스타트는 고향의 산간벽지서

 

어릴 때의 김만은 흑룡강성 소흥안령(小兴安岭)의 평정산(平顶山)하의 아름다운 산간벽지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해마다 여름이 오면 그 곳의 모든 것은 황홀하기만 했다. 푸른 산정을 맴도는 흰구름, 돌돌 흐르는 시내물과 울창한 임해- 모든 것은 그녀로 하여금 절로 흥얼거리게 하였으며 때로는 목청껏 외치면서 노래를 부르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도 김만은 성악가로 될 수 있는 자기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소녀의 첫 꿈 역시 가수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

 

"저는 아주 수수한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어릴 때의 기억에 따르면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건강이 몹시 좋지 않았기에 전 장차 커서 의사로 되려는 생각을 많이 가졌지요. 그러다 어느 정도 자랐을 때 전 세계명작 ‛잔 다르크(1412년 1월 6일 ~ 1431년 5월 30일),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인)’란 책을 읽고 나라를 지키는 혁명가로 될 꿈을 가졌으며 또한 과학가로 될 이상도 가졌었지만 예술가로 될 생각은 없었죠. 하지만 노래와 춤은 역시 저와 연분이 있은 모양이었고 운명은 결국 저로 하여금 예술의 길을 선택하게 하였죠. 현재 저는 제가 예술의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해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자신이 중국의 오페라사업에 투신한 것에 대해 행운으로 느끼고 있어요.”

 

오페라 무대에서의 “강누나”- 김만

1981년 김만은 중국인민해방군 공군정치부 문공단 시험에 합격되어 자신의 예술생애를 시작하였다. 한편 이 해에 그녀는 베이징 수도체육관에서 열린 제4회 “가요의 벗 음악회”에서 저명한 조선족 작곡가 김봉호가 작곡한 가요 ‛금실 북과 은실 북(金梭和银梭)’을 불러 일거에 중국 음악계에서의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또한 중국의 유명한 오페라  “강누나”에서의 주인공으로 되는 행운을 지니게 되었다. 1981년- 예술계에 갓 입문한 김만은 첫 스타트부터 중국 국내의 유명가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가 있었다.

 

“1984년 공군정치부 문공단에서 제3차로 오페라 ‛강누나’을 무대에 올릴 때 전 재차 주인공으로 선택받게 되었죠. 당시 시간이 긴장하고 임무가 막중하였기에 전 20여 일간이나 두문불출하고 주인공이 맡은 노래와 극본대사를 익히기 위해 연습을 하고 또 하군 하였어요.”

 

그 20여 일이 지난 뒤 김만은 재차 ‛강누나’역을 성공적으로 맡아하였으며 1981년의 공연에 비해 더욱 성숙성을 보여 주기도 했다. 또한 이 성과로 하여 1991년 중국 희곡계의 최고상인 제9회 매화상을 받아 안기도 하였다.

 

한편 이 오페라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김만은 늘 격정에 넘치군 했다. 그만큼 오페라 ‛강누나’가 그녀한테 주는 영향은 아주 컸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 오페라의 매 인물과 내용에 대한 감수가 깊어질 수록 전 무대에서의 강설금에 대해 끈끈한 정을 느끼군 했어요. 강설금은 견정하고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 혁명가인 한편 온화하고 위대한 어머니기도 했어요. 그의 매력은 늘 저를 감화시키군 했으며 그의 정신은 늘 저를 고무하기도 했었죠.”

 

무대를 떠나 단연히 “하해”

 

오페라 ‛강누나’에서의 성공은 김만한테 예술생애에서의 크나큰 영예를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새로운 차원에서의 도전을 생각했다. 이를 위해 그녀 김만은 단연히  “하해”의 길을 선택했다.

 

“90년대 초기 전 공군정치부 문공단을 떠나 ‛하해(下海)’를 결심했어요. 제가 무대를 떠난 건 예술과 작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고 저의 예술생애에서 한번 중국오페라의 새로운 변혁을 시도하기 위해서였어요. 당시 많은 사람들이 절 미쳤다고 했어요. 공군정치부 문공단은 저의 큰 밥그릇과 같은데 그곳을 떠나 어떻게 살 수 있느냐 말이었어요. ‛하해’- 그것으로 하여 확실히 저의 위치가 180도로 달라졌어요. 공군문공단에서의 저는 스타였으나 그 곳을 떠나니 일반인에 불과했어요. 하지만 저는 꿈을 위해 악전고투하기 시작했어요. 음식점을 차려보기도 하고 부동산업계에 투신하기도 했으며 또한 국외의 대형그룹과 손잡고 일을 벌여 보기도 했었죠. 이 과정에 그야말로 인생의 희노애락이 많았었요.”

 

중국 대륙의 고풍격예술 전승인으로

 

2000년에 이르러 김만은 자신의 자금을 털어 문화산업회사를 차림과 동시에 오페라  “강누나”를 개편하여 한차원 업그레드화하였다. 한국의 뮤지컬과 비슷한 형식으로 만들었다. 이는 합창, 중창, 독창을 음악주체로 하였고 부드럽고도 소박한 무드속에서 “강누나”에 대한 예술적 형상을 부각하는 것이었다. 김만은 뮤지컬의 형식과 오페라 “강누나”의 기질을 아주 유기적으로 잘 배합하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미 무대에 올렸던 작품을 재현한다는 자체가 실패작이라고 하면서 많은 질의를 던졌어요. 하지만 저는 우선  ‛강누나’란 오페라에 대해 아주 깊은 감정을 갖고 있었거든요. 다음으로 전 중국오페라의 발전과 변혁을 위해 형식을 창신하고 내용을 잘 짜면 역시 상상밖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확신하였어요. 이전에 공군정치부 문공단에서 공연할 때면 대부분 티켓을 선물하였지만 저희들 문화산업회사에서는 전국을 순회하면서 티켓을 판매하였죠. 그리고 전통오페라는 배우와 악사가 많았고 게다가 무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원가가 들어갔지만 뮤지컬 형식으로 작품을 만드니 원가가 적게 들었어요. 또한 전 적지 않은 생기발랄한 젊은 오페라 배우들을 육성하기도 하였으며 2년간 10여 만위안의 투자로 근 100회의 공연을 할 수 있었으며 원가를 뽑고도 얼마간의 이윤을 올리기도 했어요. 이는 당시로서는 진짜 쉽지 않은 일이었죠. 후에 우리는 이런 모식으로 또 ‛당의 딸’이란 뮤지컬 형식의 작품 등 여러 개의 작품을 무대에 올려 아주 좋은 사회적 효과를 보았었요.”

 

김만- 그녀가 시장경제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낸 독특한 무대는 사회 각 계의 뜨거운 찬양을 받았으며 많은 매스컴들에서는 김만을 “대륙에서 선참으로 고풍격의 문화산업을 창출해낸 사람”이라고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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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대학 오페라연구학원 조선족 원장 김만-오페라 공연

 

본분 지키며 중국오페라 발전시킨다

 

뮤지컬 형식의 무대작품을 성공시킨 동시에 김만은 적지 않은 우수한 오페라 배우들을 육성시켰으며 그들은 모두가 각 오페라 극단의 기둥배우로 성장하였다. 그 과정은 험난하고도 힘들었다.

 

“문화산업회사에서 제자들을 이끌고 훈련할 때 저는 그들 모두가 성악기초가 있으리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하면서 한달 동안 정도 훈련시키면 모두 무대에 오를 수 있으리라 여겼어요. 하지만 실제로 실천에 들어가니 애로사항이 많았어요. 학원생이 많은데다 그들의 수준차이가 컸으며 많은 학원생들은 클래식 창법으로 중국노래를 부를 때 발음이 똑똑하지 못한 폐단이 있었으며 또한 표현상에서도 팔다리가 조화가 되지 못했죠. 오페라란 복잡한 예술이기에 완벽한 산업고리가 있어야 해요. 오페라에는 큰 부분으로 이론연구, 음악창작, 극본개편 및 배우선택, 연출, 무대미술, 조명 등이 따라가야 하고 또한 작은 부분으로는 관리, 녹음, 악보출판, 음향제품 발행, 선전판촉 등이 있어야 하며 매 고리마다 동시에 움직여야 해요. 헌데 이전에 중국 국내에는 오페라 배우를 전문 육성하는 전업이 없었거든요. 이는 저로 하여금 오페라 학원을 세워 중국식 클래식 창법과 중국식 오페라를 발전시킬 야망을 가지게 되었어요.”

 

김만의 생각과 베이징대학의 발전계획은 교묘하게도 일치하였다. 일련의 준비과정을 거친 뒤 2006년 중국 베이징대학 학술위원회에서는 김만이 교부한 오페라연구학원 건립방안을 통과시켰으며 5년 뒤인 2010년 베이징대학 오페라연구학원이 드디어 고고성을 울렸다.

 

“우리가 이 학원을 세운 목적은 첫째 광범한 범위로부터 오페라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고 둘째 중국오페라의 획기적은 발전을 가져오자는 것이었어요. 인재육성을 위하여 우리는 장일민(蒋一民), 대옥강(戴玉强) 등 국내외 우수한 성악가들을 교사로 초빙하였으며 우선 오페라 및 뮤지컬학부, 오페라사론연구학부, 오페라제작 및 관리 학부 등 3개 전업을 설치하였어요. 앞으로 우리는 계속하여 오페라창작, 연출, 무대미술 및 기술, 지휘 등 학부를 증설하여 비교적 완벽한 오페라 과학 및 교수과학연구 체계를 세울 타산이예요. 베이징대학의 우월한 학술환경하에서 우리는 이미 육속  ‛칭춘의노래(青春之歌)’,  ‛전학삼(钱学森)’,  ‛왕선(王选)’ , ‛송경령(宋庆龄) 등 작품을 성공적으로 무대에 올렸으며 올해 내로 이탈리아 로마에서 대형원형오페라  ‛무측천(武则天)’을 공연할 계획이에요,”

 

베이징대학 오페라연구학원 원장 직을 맡은 김만의 중임은 무겁고 압력은 클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 어떤 방면의 인재든 다 수요해요. 우리의 연구학원은 창립된지 금방 10년밖에 안되며 아직 성장기에 있어요. 때문에 사회의 인정을 받아야 하고 발전도 거듭해야 하는 두 가지 부담이 얹혀 있어요. 하지만 멀지 않는 장래에 베이징대학 오페라 학원은 부단히 경험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대학의 영예를 빛내일 것이고 중국 오페라 계에는 긍정코 많은 우수한 인재들이 출현할 것이며 중국오페라 또한 언젠가는 꼭 세계정상에 오를 것이예요.”

 

그렇다! 조선족 여원장 김만의 꿈 역시 언젠가는 꼭 현실로 도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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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향한 중국 대륙의 조선족 오페라 여왕 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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