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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김정룡(다가치 포럼 대표) 현시대 유명 정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샤무엘 헌탕턴 교수는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을 출간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냉전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냉전 시대 인간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진영의 이념에 각각 속해 있었다. 냉전이 종말 된 미래사회에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다른 귀속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속처가 바로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라고 제시하였다. 그가 말한 귀속처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과거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실제로 탈냉전 후 지구촌의 인간무리들은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에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전 해외 화교 화인들 중 고국을 못 마땅해하는 사람들도 개혁개방 이후 즉시 돌아서서 고국에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아세아 최고 부자 리카싱(李佳成)이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사기당하면 어쩌냐?’고 말리자 그는 ‘사기당해도 고향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인데 사기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은 남다른 배포가 있는 법이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曜) 전 총리는 본래 반공자였다가 개혁개방 이후 유교 전도사를 자칭하고 나서 중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이념을 탈피하여 민족문화에로 회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가 공자였는데 이것은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1990년 초 동구권에서 있었던 코소보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무튼 세상은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미 새로운 역사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촌의 흐름을 역행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이다. 동서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 베트남도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문화로 굴러가고 있다. 오로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것은 남북한이다. 1990년 베이징아세아게임 때 한국관광객이 대량 백두산투어에 나섰다. 그때 한국여행사 에스코트 00사장이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참 세월이 놀랍게 변했어요. 우리가 중국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 구경을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어요. 이 추세대로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북통일도 10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자 매체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그 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요원해지다못해 요즘은 아주 적대관계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전에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시중에서는 모두 뜬금없는 발언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아닌 이념타령이라고 공격하기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발언이 확실히 케케묵은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라니?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을 갖고 논쟁 중이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사망할 당시에는 침략당한 약소국가들에서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우선이지 이념과 사상이 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반파시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이념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할 일이 하도 없어서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문제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을 최대 이슈로 들고나왔는지?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 진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타령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종북좌파타령을 70년 동안 벌여오다가 요즘에는 종북좌파 타령이 질리기도 하고 그 실체도 주목을 받기가 조금 약발이 떨어져 친중좌파 공격으로 방향을 틀고 화살을 돌리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엘리트들이 참여하고 있는 카톡방에 가입한 적이 있다. 카톡방은 흔히 그렇듯 좋은 정보도 나누고 서로 필요한 교류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인간무리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취향이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면 골머리가 아파난다. 어느 한 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는 ‘윤비어천가’를 올렸는데 조선 창시자 이성계를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는 ‘어천가’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로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을 이렇게 신을 찬양하듯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은 빨갱이고 북한 간첩이다. 나라를 북한에 팔아 먹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리 좌파 성향을 지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설마 나라를 팔아먹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친미를 확실하게 하면 다른 분야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문재인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굳건하게 박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신을 찬양하듯 하는 행위는 필자와는 하도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일은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기름 개구리를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다가 물을 넣고 끓여 먹는다. 한 분은 친중좌파들을 개구리 산 채로 튀겨먹고 끓여먹듯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미친 아낙네의 악담보다 더 저질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기를 해 버렸다. 종북좌파 타령이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친중좌파 타령이든 모두 같은 이념타령이다. 이런 이념타령이 시중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념논쟁을 때가 아닌 것이라 하거나 뜬금없는 일이라는 지적은 헛발 짚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공산주의 빨갱이 타령이 심각한데 진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무엇을 대상을 공격하려면 그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격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 공산주의 빨갱이 공격은 실체를 모르는 막무내식이어서 안타깝다. tvn방송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동안 출연을 가장 많이 했던 최진기 강사가 있었다. 그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이다.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고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노동 분배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이다. 최진기 강사는 이 공산주의 핵심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아마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이 있고 그 돈을 자녀가 학비로 사용하는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어 내놓은 이론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 스타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것인가?”고 희죽거리면서 공산주의를 형편없는 애들장난처럼 매도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가 최진기 강사의 말처럼 그렇듯 유치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구촌 반 되는 인간무리가 추종했겠는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고도의 의식을 갖추면 타인의 능력과 비교하지 않고 또 타인의 노동기여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의 능력껏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사회는 물질이 풍부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불필요한 물질을 탐내지 않고 사치를 탐내지 않는 전제하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물질이 풍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뜻은 사상이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자의 부친은 평생 당지서를 맡았는데 사상이 붉다못해 둘째 아들이 휴학하는 해에 참외 밭을 대신해 보게하고는 아들이 생산대 참외를 먹었다고 하여 장부에 가을에 떼어내게 기입해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자랄 때 동네 어른들이 늘 저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의 부친은 진짜 빨갛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진기의 자칭 최고 강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이 수준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제도로서 실천은 실패했지만 그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이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의 현실. 언제 가야 통일되고 하나가 되어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날 것인지? 민족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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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4
  • 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 철 민(논설위원) 한·중·일 해양 안전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처리 문제가 24일 일본 정부의 바다 방류 개시와 더불어 또 새로운 논쟁거리를 몰아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행위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나라들로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인 중국과 한국(정당과 사회단체 등), 북한 등과 거리가 멀지만, 남태평양 도서국의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시작해서 240일이면 중국 연해에 도착한다며 정부로부터 국민 매 개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결정을 국제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의 전면 중단을 발표하였다. 한국 언론도 한국의 여러 해산물 시장이 거의 텅 비어 있어 어부들은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주도 동문어시장에서 20년 넘게 해산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예전에는 오전 10시경과 오후 5∼7시(두 시간대)에 장사가 안될 때도 시장은 붐볐지만, 요즘은 손님이 없는 텅 빈 고속도로”라며 “코로나19 기간에는 장사가 더 잘됐다”라고 우려했고 한국 서부 해안 도시 군산 출신의 한 어민은 “내일 해산물 경매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라며 “해산물 소비량이 4분의 1로 줄었고 가격도 더 낮아질 것 같다”라고 탄식했다. 부산종합어시장에서는 조기 한 박스가 보통 4만 원 또는 5만 원에 팔리는데, 전국 해산물의 약 30%가 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23일)에는 조기 한 박스가 정상가의 절반 이하로 판매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주요 해산물인 멸치는 평소보다 10~20% 정도 가격이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일본이 이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방류를 개시한 것은 지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면서 핵 오염수 방류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인류에게 핵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외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기로 한 일본의 결정을 알게 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있는 한 비정부기구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 피지 수바에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은 해외의 국가와 사회단체의 규탄은 물론 일본 자국 내 어민 단체와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1945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교도통신은 24일 원폭 피해자 후손들로 구성된 일본-전국 원폭 피해자 2세 단체 연락 협의회가 나가사키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쿠시마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히로시마가 견딜 수 없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총리 관저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성명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은 부모들이 방사능 영향으로 고통받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했고, 자신들도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라며 “정부와 도쿄전력이 책임을 지고 육상에서 보존·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이루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도 높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은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감찰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IAEA의 권위성과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이 기구의 분석과 결론 모두를 믿는 건 아니다. 특히 IAEA 역시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에 대해 명확한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IAEA 역시 사상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수치나 분석을 통해서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시작이나 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례로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는 그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음 우리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군다나 믿을 수 없다는 추리가 나온다. 일본인을 두고 말하자면 좋게 말하면 “총명하다”하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잔머리를 잘 굴린다” 혹은 “비열하고 간교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기타 태평양 지역 국가와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것도 아주 음융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과 명분 등으로 말이다. 조선 왕조의 명성황후 음해 사건, 중국 대만 강점과 한일 합방 그리고 지난 세기 30~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감언리설로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1920년대 말의 만주에서의 황구툰(皇姑屯) 사건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등을 분석 조명해보면 당시 일본이 강하다기에 앞서 음흉하고 뻔뻔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시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담판함과 아울러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부로 믿어서는 큰 코 다친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종합적으로 일본을 평가하면 일본인의 겉면을 보면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같은 한국인과는 달리, 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중국인과는 달리 또한 거만하지만 우쭐대지는 않는 서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한테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국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역대의 독일 총리들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오늘 현재도 기나긴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까지 뜯어고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두고 각국은 여러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는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 두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 궁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일종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은 자국민들한테 미칠 손실보다는 일본과 정부 사이의 마찰을 우려하는 듯한 양상이다… 한편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에 대해 지금 과학적이고 안심할 수 있다는 학술적 수치는 있으나 그 영원성을 장담하는 언사는 한 마디도 없다. 어찌 됐든 일본의 핵 오염수는 방류하지 않는 것이 방류하는 것보다는 ‘명지한 선택’이라 보여지며 방류하는 것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대로 좋은 결과는 제로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가령 앞으로 방류 과정에 혹시라도 일본 자국 혹은 주변국들에 피해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그때 가서 아무리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라 해도 결코 일본을 위해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의 위망은 일락 천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2023년 8월 24일, 이날은 인류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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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5
  • 독도는 ‘무주지(無主地)’ 섬이 아니었다.
    ●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민간속설에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가령 이웃집에서 경사가 생기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안 좋은 일에는 같이 슬픔을 나누고, 급한 일이 생기면 이웃이 가장 먼저 달려와 돕는 등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삶을 영위해온데서 생겨난 속담일 터. 민간백성들의 삶은 대개 이웃끼리 화목한데 비해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구성된 국가의 경우 이웃나라끼리 사이는 그다지 화목하지 못하다. 바다를 사이 두고 이웃으로 살아온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좋은 때도 있었지만 서로 반목하는 일들이 더 많았고 지금까지도 해묵은 갈등들이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일본전범기업 강제징용 배상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새로운 갈등으로 부상하여 오랜 갈등들에 얹어져 가뜩이나 썰렁한 냉기를 더욱 차갑게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남아 내려온 갈등도, 새로 생겨나고 있는 갈등도 모두 일본 측의 책임이 크건만 정작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아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느 한 착실한 역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한반도는 서너 차례 모자라는 1천 번의 침략을 당해왔다고 한다. 무려 1천 번이나 침략을 당해왔으나 남을 침략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착한 민족인가? 누구인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백의민족은 맞기만 하고 때릴 줄 모르니 선천적으로 DNA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튼 그 1천 번 가운데서 일본의 침략이 다수였다. 일본은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기로 지구촌에서도 이름난 곳이다. 게다가 땅이 척박하여 먹을 것이 늘 부족했다. ‘제집’ 내에서 해결책이 안 보이니 눈을 ‘옆집’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약탈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가에 왜구의 노략질이 들끓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곡식도 빼앗고, 옷도 강탈하고, 여자도 납치해가고 등 눈에 보이는 쓸 만한 ‘물건’이면 전부 빠트리지 않고 싹쓸이해갔다. 백의민족의 전통인사말은 ‘무사한가?’인데 그 유래가 바로 빈번한 외침을 당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일본은 왜구의 노략질도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의 침략도 감행하였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한반도 식민화였다. 1592년 풍신수길이 발동한 임진왜란이 좋은 근거이다. 명나라 조선 파병 때문에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실패했으나 그 후 결코 한반도 식민화 정책은 포기하지 않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을 불러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큰 전쟁을 피하고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운동 측과 협상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 청나라 군과 일본군 모두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일본이 철회할 리가 만무했다. 청나라와 군대 철회로 갈등을 빚다가 드디어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그것이 바로 ‘중일갑오전쟁’이다. 일본을 ‘쌰오르번(小日本)’으로 하찮게 여겨왔던 청나라가 생각 밖으로 일본한테 패배한다. 조선을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게 하고 ‘독립문’까지 세워준 일본이지만 정작 조선은 독립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호랑이가 나간 자리에 승냥이가 들어온 셈이었다. 일본은 강대했던 청나라를 물리쳤으나 또 다른 강대한 적인 러시아와 맞붙어 싸워 이겨야 만주와 조선에서의 이권을 모두 독차지할 수가 있었다. 1904년 일본은 한반도에서 자기네가 마음에 드는 곳에 어디든 군사기지를 세울 권리가 있었다. 러시아와 맞붙으려면 동해바다 섬에 군사기지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하여 일본의 레이더망에 독도가 들어왔다.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 주장하면서 영토편입을 시도하고 시마네현(島根縣)에 지방고시를 알린다. 남의 나라 땅을 침략하고 그 땅을 ‘무주지’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드는 수법은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을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 활발하게 써 먹었던 수법이었다. 즉 일본이 유럽열강들한테서 배운 것을 조선침략에 활용했다는 뜻이다. 독도는 1905년 전에 과연 ‘무주지’였을까?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에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무주지’ 땅들이었을까?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무주지’라 주장하는 것일까? ‘발견자우선주의’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활용했던 것이다. ‘발견자우선주의’의 본뜻은 최초로 발견한 사람들이 소유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인데 백인들이 아메리카 땅을 발견하고 개척할 당시 수많은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결코 백인들이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다. 분명히 그 땅엔 인디언이라는 주인이 이미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식민지를 개척한 그 땅들에 주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발견하고 삶을 영위해온 원주민들이 거주해왔다. 그렇다면 왜 유럽열강들이 ‘발견자우선주의’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들었을까? 주인이 이미 있었는데 ‘무주지’라 주장하고 거기다 한 술 더 떠 ‘발견자우선주의’를 떠드는 근거는? 유럽열강들은 지구촌 곳곳에 살고 있는 인류 집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그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C’ 즉 기독교(Chrisianity), 문명(Civilization), 상업(Commerce)을 통해 식민지 정복을 정당화했다. 1455년 교황 니콜라오5세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의 영토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를 승인했다. 최초의 탐험시대부터 이미 그 땅에 인류가 살고 있든 말든 국가가 있든 말든 유럽열강들 중 그 누가 먼저 그 땅에 도착하면 자기네들이 주인이라는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를 적용했던 것이다. 독도는 1905년 이전에 조선의 소유이고 조선이 영유권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 공부에 가장 모범생이었던 일본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정당화로 써먹었던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 무기를 휘둘러 독도 영유권을 시마네현에 편입하는 고시를 알리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일본 소유로 편입되었던 것들을 바로 잡는 조항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등 제도들이 조선의 영유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의 지리는 육지와 3170 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섬마다 일일이 모두 표기할 수가 없었고 그때 독도가 빠져있었던 것을 일본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즉 이것 때문에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한국정부가 독도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군대가 주둔하여 관리하고 있다. 6.25 전쟁 때 한국군 36명의 용사가 독도를 굳건하게 지켜냈고 지금까지도 한국이 독도에 주둔하고 관리하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존재의 일차적인 이유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2016년 세월호사건과 지난해 10월 발생했던 이태원참사사건에 전체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정부가 국가의 존재이유를 방기했다는 것이다. 다음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도 국가존재의 주요 이유이다. 영토를 잃는 것은 안전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으로 명백한 우리 소유의 영토이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도는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확고한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해 나아간다.” 다만 걱정이 하나 있다. 일본정치주류세력인 우익이 줄곧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에 대해 올해만 세 번 한일 양국정상이 만난 자리에서 아무 언급도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과거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대일외교방침 때문일까? 일각에서는 이대로 나아간다면 일본이 독도를 완전히 빼앗아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관리 주장을 들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한다. 독도분쟁은 대한민국의 자존심 문제이다. 자존심을 잃으면 나라의 존재이유가 사라질 만큼 국민의 사기가 저하된다. 그러므로 독도만은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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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31
  • [기고] 전주국제영화제 정준호-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 투톱체제 성공을 바라며
    독립영화의 요람 전주국제영화제가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로 전환해 정체성 확립과 대중성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지 관심을 받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는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민성욱 부집행위원장과 정준호 영화배우를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의결했고, 지난 26일 조직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은 시장실에서 위촉장을 전달했다. 마력은 동력의 단위로 높을수록 좋다. 이번 쌍두마차 체제가 앞으로 3년 동안 시너지 효과를 일궈낼 것으로 기대된다. 백제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 교수인 민성욱 신임 공동집행위원장은 전주국제영화제 출범부터 조직위의 사무국장 및 부집행위원장을 역임한 '지킴이'이고, 정준호 신임 집행위원장은 높은 인지도를 가진 대중성을 확보한 영화배우이기 때문. 어떤 조직이나 더 큰 발전과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시점이 있다. 세계 초일류 전자제품 회사로 대한민국을 빛내는 삼성이 만일 제일제당 시절처럼 사카린을 밀수해 설탕을 팔던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면 지금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202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비경쟁 위주로 실시됐고 올해 2022년 23회 영화제는 국제경쟁, 한국경쟁, 한국단편경쟁, 특별부문(한국 장편 다큐멘터리, 지역공모작품, 비경쟁 아시아 영화)로 진행되며 업그레이드 됐다. 2023년 24회부터 3년간 시행될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기존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보다 더 대중성을 일으켜 더욱 큰 소통을 통해 영화계 발전과 주최지인 전주 지역발전에 더 크게 기여하는 영광이 실현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쌍두마차 체제가 된 전주국제영화제는 전주시민의 선택을 받은 우범기 시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이끄는 마차다. 우 조직위원장이 전주시 발전을 위한 고뇌 끝에 내놓은 묘수라고 풀이된다. 시장은 시민의 행복과 시의 발전을 도모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에 대해 기대가 큰 반면에 걱정과 반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수립되자, 권해효 배우, 방은진·한승룡 감독이 이사직을 사퇴했다. 이사회에서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의결되었다고 사퇴하는 것이 영화제에 대한 진정성일 수도 있지만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지점이다. 고 자니윤(고 윤종승) 코미디언은 2013년 2월28일 해외동포들과 판문점을 방문한 후 가진 뒷풀이에서 "한국 사람들은 너무 똑똑해요.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이XX 안돼, 저XX 안돼 하는거에요. 일을 해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한국계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고 그의 인프라를 총동원해 조국 대한민국 관광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었으나 좌절된데 대한 의견으로 들렸다. 대한민국은 625전쟁 후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나라다. 지난 80년간 대한민국이 변화가 없었다면 우리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억압속에서 지옥살이를 하고 있었을 게 자명하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는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임기는 3년이다. 3년간 응원하고 3년 후 큰 성공과 발전을 이루면 박수를 치고, 변화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때 가서 비판해도 늦지 않다. 한국언론인연대 박상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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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30
  • "일본 Z세대 중국에 호감" 중국 호감도 세대별로 다른 원인
    ●오카다 미츠루(일본 저널리스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7일 방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3년 만에 처음으로 중·일 정상회담을 갖고 악화된 양국 관계를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기시다는 대중 관계 개선에서 반중 여론과 대중 강경 자민당 우파의 제약을 받고 있지만 반중 여론을 거론하면 일본의 Z세대(18~29세)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40% 이상으로 다른 연령층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Z세대의 정치적 의지가 선거의 키를 쥐고 있는 세계적 흐름을 보면 '반중 여론'과 '우파'에만 의존하는 기시다 외교가 위태롭다. 45분 동안 진행된 이번 일-중 정상회담은 3시간여에 걸친 중-미 정상회담에 비해 일본의 대중국 중요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일·중 정상은 회담에서 국방부 해상 및 항공 연락 메커니즘의 직통 전화선 조기 개통, 새로운 중일 고위급 경제 대화의 조기 개최, 새로운 중일 고위급 문화교류 협의 메커니즘 회의 조기 개최 등 몇 가지 공감대를 형성했다. 향후 중일관계 개선의 지표 중 하나로 정상 간 상호 방문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의 대중 관계 개선의 한 가지 저항은 '반중(反中)' 여론 고조다. 일본의 대중(對中) 인식 악화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각부가 매년 발표하는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에는 흥미로운 수치가 나온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발표된 조사에서 응답자의 20.66%가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지난해보다 1.4% 증가)고 답했다.그러나 연령별로는 Z세대 중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는 비율이 41.6%로 전체보다 배 이상 많았다. 60~69세 13.4%, 70세 이상 13.2%에 비해 Z세대는 중국에 대한 친근감이 높다. 그렇다면 왜 연령대에 따라 중국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싶다. 나는 젊었을 때(저자는 1948년생) 중국의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있었고,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속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타자' 위에 자신의 생각을 투영해 기대를 부풀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나 구미의 통치체계를 중국의 정치와 사회에 투영해 일본이나 구미의 기준으로 중국을 관찰하고 판단한다. 요즘 60~70대 일본인들이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Z세대는 생각이 다르다. 내가 가르친 대학생의 경우 태어나기도 전에 일본 경제가 침체에 빠졌고,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들이 철들었을 때 중국은 이미 미국을 추격하는 대국이 됐고 IT 기술에서 일본을 앞섰으며 애니메이션과 게임 품질에서도 일본을 추월하고 있다. 또 Z세대가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많은 곳에서 중국 유학생과 접촉할 기회가 종종 있다. 다시 말해 Z세대는 중국을 일종의 '대등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환상은 없다.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의 버팀목이 될 때 일본인 전체의 대중국 관념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쇠락이라는 역사적 변화, '탈아입구((脫亞入歐)'의식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대가 '2선 후퇴'하면 일본의 '반중' 여론도 달라질 것이다. 기시다 정권도 언제까지 반중 익찬 여론에 의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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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실시간 칼럼/기고 기사

  • “득”과 “실”은 항상 병존하는 법
    ■ 김철균 지난해 필자는 연변 주내 모 예술분야에서 근무하는 한 “친구”한테 중국 인민폐로 2만위안 정도 사기당했다. 어릴적 훈춘에서부터 함께 자라던 송아지 때의 친구한테 당했으니 분통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그 돈을 받으려고 그가 근무하는 예술단을 찾아다녀보기도 하고 변호사를 찾아 해당 법률자문도 해보았었다. 그러다가 올해에 들어와서는 단 한번도 그한테로 찾아가지 않았다. 그 돈을 받을 가망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가 그 예술단 직원으로 근무하는 한 법원에 기소해 법적으로 재정으로부터 지급되는 그 “친구”의 봉급을 동결하면 얼마든지 받을 수가 있었다. 그저 시간적으로 빠른가 늦은가 하는 차이가 있을뿐이었다. 올들어 내가 그를 찾아가지 않는건, 그한테 찾아다니는 정력과 시간이면 다른 일이라도 할 수 있겠다는 심리가 작용한 것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한테 시간과 기회를 주어 자신을 반성해보게 하려는 것도 있었으며 또한 바꿔놓고 빚진 인간으로서의 그의 입장을 생각해본 것도 사실이었다. 하다면 그가 나의 돈을 빌려간 것도, 갚지 못하는 것(노름을 했거나 다른 한 빚진 곳이 있거나)도 사연이 있을 것이며 이것 때문에 그 또한 심한 고통속에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도둑이 제발등 저리다”고 전화 한번 걸려와도 빚재촉 전화인가 하고 긴장할 것이고 거리를 나서도 누가 다가와 뒤덜미를 덜썩 잡을까봐 조심조심 하기 마련이 아니겠는가. 돈을 떼운 나는 발편 잠을 잘 수 있어도 그만은 심한 모순과 번민속에서 모대기며 뜬 눈으로 밤을 샐 수도 있었으리라… 잠깐, 이리고 보니 “문화혁명” 후기에 있은 일들이 갑자기 떠오른다. 1978년 여름, “문화혁명”으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입었던 우리 가정에도 “정책낙실”이 되었다. 아버지의 묘와 어머니의 묘를 합장하던 날, 촌의 여러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는데 그들 중에는 나의 부모님을 지독하게도 박해하던 사람도 몇명 있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나의 눈에는 불이 일었다. 10살에 아버지를, 11살에 어머니까지 잃고 세상의 버림을 받으며 숱한 고생을 감내해왔던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울컥 하는 원한을 참을 수 없어 우리한테 “용서”를 빌며 사죄하는 김××란 인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면서 주먹 하나를 날리려던 찰나, 당시 훈춘시병원의 부원장으로 근무하는 형님 김승균씨가 나의 팔을 잡으며 한사코 뜯어말리는 것이었다. “지금 저 사람들은 오히려 우리한테서 한두매 맞았으면 할거다. 그러면 맘이 편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극단적으로 ‘원수’를 갚으면 새로운 ‘원한’을 살 수도 있는 법이다. 넓은 가슴으로 그들을 대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도 생각이 있을 것이다…” 하긴 그랬다. 그들은 우리와 부딪치는 걸 몹시 꺼려했다. 길가에서 만나도 저만큼씩 피했고 혹시 모임에서 한 자리에라도 앉게 되면 그 모임을 파하기 전에 자리를 뜨군 했다. 그리고 간혹 피할 수 없을 장소이기만 하면 항상 얼굴에 어색하고도 “비굴함”과 비슷한 웃음을 바르면서 담배도 권하고 술도 따라주면서 그랬다. 거기에 한발 더 나아가 말한다면 몇해가 되지 않아 그런 사람들이 하나 둘씩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절명하더라 그 것이었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못된 짓을 많이 하고 어떻게 하늘아래서 허리 펴고 살 수 있느냐?! 하늘이 천벌을 내린 것이다” 라고들 했다. 하지만 필자는 “하느님”이 천벌을 내린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심한 번민과 자책과 고통속에서 병을 얻었고 또한 그것이 “암”이 되고 “불치의 병”이 되었다고 판단하고 싶었다. 한시기 “홍위병 사령”이요, 혁명위원회 주임이요 하며 사람을 개 패듯 하던 사람들, 하지만 그들의 마지막 길은 그렇게 쓸쓸했고 지어는 “애석”하기도 했다. 그래서 세상에 “자업자득(自业自得)”이란 사자성어도 생겨나오지 않았나 싶다. 또한 그때 나는 “득(得)”이 있으면 꼭 거기에 정비례가 되는 “실(失)”도 반드시 있게 된다는 철리도 깨닫게 되었다. 세상사를 보면 이러한 사례는 너무나도 많은 걸로 알고 있다. 18세기~19세기 당시 세계 곳곳에 식민지가 있다 해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영국도 이제는 세계패권을 미국한테 내놓은지 100년이 돼오고 있고 미국이란 “국제경찰”의 호시절도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다. 한시기 독재자로 유명했던 싸담 후쎄인, 무바라크와 카다피 등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자들도 최후의 운명은 모두 비참했다. 중국국내의 사정도 마찬가지이다. 시진핑 정권이 반부패의 화살을 날림에 따라 지난해에는 보이시라이가 도마위에 올랐고 올해는 저우융캉이 보이시라이의 뒤를 따라 법망에 걸려들었다. 보이시라이와 저우융캉ㅡ 한시기 얼마나 위풍을 날리며 제밖에 없노라 턱이 높았던 사람들이었던가. 그들이 지금 “가련한 신세”가 됐다. 보이시라이와 저우융캉의 실각, 이는 중국 반부패운동의 확실성을 긍정할뿐만 아니라 “득”이 있으면 반드시 “실”이 뒤따른다는 철리를 더욱 잘 설명해준다. 이는 인간 대 인간 사이도 마찬가지란 생각이다. 남한테 얻어맞아도 괜찮고 남한테 잃거나 사기를 다해도 속은 편하겠지만 남을 때렸거나 남의 것을 공짜로 가지고 또 사기를 친다면 남의 저주를 받기에 앞서 자신의 양심이 몹시 찔릴 수가 있는 것이다. 남한테 조금씩 밑지고 베풀고 또 조금씩 남을 생각하며 살자. 겉보기에는 바보인 것 같지만 그것이 제일 현명한 “인생철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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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22
  • 지구의 하소연 “인류, 내 건강 챙겨다우!”
    ■ 이진숙 내 이름은 지구다. 70억명이 넘는 자녀를 둔 어머니이다. 내 나이는 50억살, 과학자들과 물어보니 내 수명은 100억살 좌우란다. 지금까지 나 지구의 기원과 형성에 대한 확답은 없지만 태양계의 기원과 밀접히 연계된다는건 분명하다. 만약 나와 세번째로 가까운 거리에 산다는 태양에 탈이 생겨 영향만 끼치지 않는다면 영존할 수도 있단다. 나도 태양계8개 행성에 속하니깐. 하지만 자식들이 지금처럼 계속 나를 괴롭히고 몸살나게 한다면 제명대로 살 것 같지 못하다. 중국 민간신화에 의하면 반고가 천지를 개벽하여 하늘과 땅이 생겨났다 한다. 태고시기 천지불변일 때 온 우주는 큰 달걀모양이었는데 그 속에 반고가 잉태되어 있었다. 1만 8000년 후에 잠에서 깨어나보니 어두컴컴한데다가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어 몹시 성난 반고는 도끼를 휘둘러 껍질을 깼다. 순간에 가볍고 맑은 것은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고 무겁고 어두운 것은 아래로 내려와 땅이 되었다. 반고는 발로 땅을 딛고 머리로 하늘은 받치고 1만 8000여년을 견디어내다 드디어 하늘과 땅이 더는 붇지 않았으나 그만은 기진맥진하여 죽게 되었었다. 반고가 죽은 후 그의 시체 모두가 세상 만물로 변하여 내가 애들을 키우기엔 너무도 충분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냐? 한창 중년나이에 온몸이 벌써 다 찌그러지고 힘 빠진 파파노파로 변해버렸구나! 입으로만 에미를 사랑할뿐 망가져가는 내 몸에 대해선 수수방관하고 속수무책이고 지어 불효자들은 난도질까지 하고있다. 알려주마, 이 어미를 떠나선 그 누구도 건강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을거다. 요즘 두루 신문 보고 TV를 보면서 하마트면 정신 잃고 쓰러질뻔 했다. 자식이란 놈들이 이렇게까지 할줄은 정말 몰랐다. 아무리 바빠도 한번쯤 내말에 귀를 귀울려주렴. 일하기 싫어 화학비료와 농약에만 매달려 농사짓고 채소 가꾸고 하더니 그 비옥하던 토양은 메마르고 황폐해지고… 농약을 듬뿍먹고 자란 곡식과 채소와 과일들, 그러니 너희들도 날마다, 끼니마다 독약을 먹고 있는 셈이다. 정말 속이 탄다. 게다가 인간생활의 주요 터전인 육지면적의 15프로가 이미 퇴화되었는데 중국에서만 날마다 10제곱미터의 토지가 사막화되어 간다는구나. 앞으로 너희들이 제대로 먹고나 살는지, 참 걱정이다. 물, 물은 생명수라 했다. 지구상에 물이 70%라지만 담수는 겨우 2.8%, 직접 먹을 수 있는 물은 1%밖에 안된대. 세계12억 인구가 물난에 허덕이는데 중국도 엄청 물 부족이란다. 인구의 증장, 생활향상, 사회의 공업화, 도시화…쓰레기들이 마구 강물에 버려지고, 출렁이며 흐르던 강물이 하나 둘씩 바닥을 드러내고 물고기마저도 오염에 떼죽음 당하고. 아, 아ㅡ 너무도 비참하다. 그리고 공업혁명 후 지구의 평균 온도는 6도 상승했고 지금도 매년 평균 0.2도씩 상승하는 추세란다. 북빈양이 녹는다는 등, 바다가 육지보다 높아간다는 등… 지구온난화에 따라 공기오염도 심해지는 판이다. 최근엔 또 뭐냐? 스모그 때문에 중국 도시들에서 난리가 났단다. 그것이 다 인간이 스스로 자초한 결과다. 공기중의 유해먼지가 왜 생겨나 사람의 건강을 위협하겠니? 사회발전만 집요하게 추구하고 환경보호를 뒤전으로 한 탓이지.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깨고, 제가 판 함정에 제가 빠져버린거지 뭐, 참 안타깝다. 생물들도 멸종의 위기를 맞고 있다. 지구상에 현존하는 생물은 500만종 내지 1억종인데 매년 5만여종이 멸종된다고 한다. 매년 730만제곱미터의 살림이 감소된다니 어찌 생태환경이 파괴되지 않겠나. 산에 가도 지저귀는 새소리 들을 수 없고 밤이면 농촌마을마다 요란하던 그 개구리합창단도 다 해산되고 없다.그 옛날 그 때가 너무도 그립다! 광산자원도 다 고갈되어 간단다. 석유는 50년 좌우, 석탄은 20~30년 좌우, 2020년에 이르면 지구상의 동, 석, 연, 금, 은 등 대다수의 광물자원이 채굴을 마감한다 한다. 어떻하지? 좀 두렵기도 하다. 오, 내 몸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망가졌지? 이제야 비로서 알았다. 70억명이나 되는 자식들이 어미가 이 정도 될 때까지 무심했으니 서글프기 그지 없다. 울고 싶다. 통곡하고 싶다. 문득 청개구리 이야기가 생각난다. 청개구리 7형제가 메라면 지고 엇박자만 치면서 한사코 엄마말을 안 듣길래 죽을 때 생각반대의 유언을 남겼다. 울며 통곡하던 7형제는 딱 한번이라도 엄마의 말대로 하자고 유언 그래로 강변에다 엄마를 묻었다. 그래서 비올 때면 떠내려갈까 후회하여 개골개골… 이쯤하면 자식된 너희들도 정신이 번쩍 들겠지. 입으로만 아니라 행동으로 진심으로 내 건강을 챙겨다우! 얘들아, 나도 젊어지고 건강해지고 싶다. 내가 건강해야 너희들도 건강해진다. 내가 오래 살아야 너희들도 행복하다. 지구-이 어미의 부탁 꼭 지켜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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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21
  • 나의 “한 300년 살아보기”
    ■ 김철균 나한테는 A라는 한 친구가 있다. 지난 세기 80연대부터 지금까지 쭉 가깝게 지내고 있으니절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몹시 착하고 의협심도 있어 친할만한 사람이었다. 헌데 그는 좀 부는 편이었다. 그가 한국에 가서 노가다로 뛸 때의 일이다. “나 말이야, 지금은 한국에 와서 노가다로 뛰지만 중국에 있을 때 잘 나가던 사람이었다구. 군복무 3년을 했고, 대학 2개를 나왔으며 국가기관의 공무원으로 10여년간 과장직에도 있어봤고 그러다가 그걸 때려치우고 부동산업에도 손을 대면서 꽤나 돈도 많이 벌었었는데 그만 8년만에 큰 사기를 당해 망했지만 말이야…” “그럼 아저씨, 올해 나이가 어떻게 돼요?” “얼마긴 얼마야? 마흔여섯이지…” “어머, 그럼 아저씨의 사업년한이 나이보다 더 많네요…” 이 글의 제목을 보면 왜서 “한 300년 살아보기”라고 달았는지 사람들은 궁금해할 것이다. 자고로 300년을 살아본 사람은 없었으니깐. 나 또한 이제 반백 정도인 사람이다. 그럼 왜 한 300년 살아본다고 하는걸까? 나의 고백을 적어본다.나의 고향은 중국 길림성 훈춘시 반석향 유정촌이다. 1957년 8월 26일, 태어날 때 나는 7남매 중 막내였고 당시 어머니가 42살, 아버지가 52살이었는데 가정이 째지게 가난한데다 아버지는 장기환자였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늦동이인 나를 두고 “귀엽게는 생겼는데 부모복은 없겠다”며 혀를 끌끌 찼다고들 한다. 아니나 다를가 나는 세살 때에 급성폐렴으로 거의 죽게 되었는데 약 한첩 지을 돈도 없는 나의 부모는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나를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나의 생명이 경각을 다투는 그 시각에 나의 5촌 숙부님이 송아지를 팔아 페니실린을 사왔고 그걸 한대를 맞고 나는 열이 내리면서 기적적으로 소생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태어나서 2년만에 죽음의 과정(기억은 없지만)을 경험해보게 되었다. 한편 나의 부모는 늦게 나를 본데다 명도 길지 못하였다. 후에 문화대혁명이 터지니 아버지는 “외국특무”란 루명을 쓰고 맞아서 사망했고 어머니도 매를 못이겨 훈춘강에 몸을 날려 자결하였다. 그러니 남들이 내가 부모복이 없겠다고 한 그 말은 너무나도 일찍 현실로 다가왔다. 그 뒤 나는 손위의 누나 둘과 함께 4년, 누나들이 시집가자 형님과 형수의 슬하에서 4년, 집체호에서 3년, 공장생활을 5년 하다가 결혼했지만 결혼생활 3년만에 이혼을 하여 아이와 단둘이 사는 홀애비로 되었다. 어려서 부모을 여의고 중년에 상처는 안했지만 이혼을 덜커덩 한거라 “팔자타령”도 할만 했다. 그 몇년 사이 나는 또 훈춘방송국에 편집원으로 일하다가 나왔었고 장사길에 나섰다가 꼴깍 망하기도 했다. 그 몇년 뒤에는 해외노무송출길에 나갔다가 근무를 마치고 귀국, 형편이 좀 펴이니 양고기산적집을 차렸다가 재차 망했다. 일이 안되었고 악성순환의 계속이었다. 나는 나의 인생을 걸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었다. 아니, 노력이라기보다는 발버둥질을 쳤다고 해야 더욱 적절할 것이다. 어릴 때는 뭘 전공하면 취미 혹은 남이 하니 덩달아 따라서 하는데 불과했지만 17-18세부터는 일종의 “이상”이란 것을 갖고 달라붙었다. 그림을 그려봤고 서예도 연마했으며 음악을 한답시고 입술이 터지도록 트럼벳을 불어대기도 했다. 그러다가 노무송출일군으로 해외에 나가서는 주방의 주방장 겸 요리사로 근무했고 지금은 편집기자랍시고 모 신문사의 일군으로 10여년채 출근하고 있다. 안해본 일이 거의 없었고 직종으로는 군대, 이발사외 학생, 농민, 노동자, 마도로스, 편집일군 그리고 오래는 해보지 못았지만 탄광의 채탄공 일도 한달가량 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 남들은 아파트 2-3채씩 갖고 있다고 하지만 나는 여태껏 단층집에서 살다가 이제 겨우 파가이주로 아파트를 분배받게 됐다. 그것도 추가된 면적의 집값을 물돈이 없어 마누라더러 한국에 나가 돈벌이를 하게 하고있다. 못난 놈, 그러니 지금은 또 작은 애와 함께 홀아비로 보낸다. 1983년에 첫 결혼을 한 뒤 지금의 두번째 마누라를 맞아들여서 그 28년 사이에 부부가 함께 한 집에서 생활한 세월은 그 50%나 될까? 인생살이에는 빵점이다. 나는 모험도 좀 즐기는편이다. 만미터 고공에서 자유낙하하는 그런 모험가는 아니지만 그 버금의 담량은 있는 것 같다. 내가 해상에서 마도로스로 근무할 때니까 1992년의 일이다. 그 때 나는 함께 출국한 동료선원의 이간질로 인해 한국인 조기장과 한바탕 크게 싸웠다. 둘 다 얻어터지고 멍이 들대로 들었다. 그런데 징계를 받은 쪽은 나였다. 일리가 있건 없건 내가 조선족이었으니 당해야만 했다. 강제귀국조치었다. 이제 스페인 라스팔마스항에 입항하면 보따리를 싸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강제귀국이란 당시 중국 조선족선원한테 있어서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었다.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다행이라고 할까? 당시 내가 징계를 받던 앙골라 해상에서 라스팔마스까지 항행하려면 거의 20일이란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강제귀국에서 벗어나려면 모험도 필요했다. 징계를 받던 그날 밤, 나는 부식창고안에서 빵, 사과, 물, 소세지, 위스키, 맥주 등 먹고 마실 수 있는 부식은 가득 꺼내서는 침대밑에 넣었고, 그 다음 주방과 창고의 열쇠를 인계한 후 침실문을 안으로 닫아 걸었다. “단식투쟁”이었다. 그러자 처음에 선장 등 한국선원들은 “자식, 뭘 단식을 해?! 멍청한 놈, 언제까지 버티는가 좀 보구려”라고 하며 코방귀를 뀌더니 3일이 지난 후부터는 선장부터가 불안해지며 얼굴표정이 심각해지더라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만약 단식으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선장은 그 책임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장은 처음에는 통신장을 보내 나한테 설득을 시작하더니 나중엔 1항사까지 보내어 나의 마음을 움직여보려 했다. 하지만 나는 “선장이 오기 전에는 그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는다”고 버티면서 침실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약 5일 가량 지난 어느날 밤, 선장이 나의 침실문을 노크하더니 “조리장, 그만 하이소. 우리 좀 대화해봅시다. 나 선장이 조리장에 대한 징계를 해제하기로 했어요. 자, 그만 문 좀 열어주이소”라고 사정하는 것이었다. 나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 시간을 질질 끌었고 문틈으로 들여보낸 진짜 징계를 해제한다는 선장의 각서까지 받은 뒤에야 침실문을 열어주었다. 그 동안 나는 단식은커녕 먹을 것을 실컷 먹었고 숱한 책을 읽었으며 밀려온 잠도 늘어지게 자버렸다. 나의 그 모험은 성공적이었다. 헌데 나의 대부분의 모험은 충동적일 때가 많았다. 앞뒤를 재지 않을 때도 많았다. 그러다보니 성공차수보다 실패차수가 더욱 많기 마련이었다. 그 사례로 귀국한 뒤 연길에서의 시장조사를 거치지 않고 음식업을 벌였다가 꼴깍 망한 것 등으로 여러 건이 된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어쩐지 글의 주제와 좀 벗어난 감이 든다. 여하튼 나의 “한 300년 살아보기”란 사는 날자보다 삶의 내용에 그 무게를 담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다. 말하자면 초년에 부모를 잃고 고생한 걸 말할라치면 두 세 사람이 일생동안 당한 고생에 맞먹는 것 같다. 세살적에 폐렴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는가 하면 마도로스시절에는 본인 실수로 영하 20여도 되는 냉장창고에 갇혀 동사할뻔한 일도 있으니 죽음의 과정도 두번 넘겨봤다.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마누라를 두 번 만났으니 그 것도 사람마다 겪어보는 일은 아닐테고 또한 마도로스 시절에는 36개 나라의 50여개의 항구에도 드나들었다. 1.62메터의 키에 58킬로그람의 체중을 가진 보통에도 못미치는 사내치고는 그야말로 범상치 않는 경력창조자이니 “300년 살아보기”란 말도 나올상 싶다. 옛 사람들은 “걸어온 길 몇천리, 걸어갈 길 몇만리”라고 했다. 나는 지금 고중에 다니는 17살짜리 늦둥이를 키우고 있다. 어쩌면 아직도 내 나이와는 상관없이 인생초반이란 감이 들 정도이다. 하다면 더욱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으며 계속 발버둥질을 쳐야 할 것 같다. 적어도 늦둥이인 나를 낳아놓고 일찍 저 세상으로 간 나의 부모님처럼은 되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도 무르익히고 있다. 그러니 삶의 내용상 “300년 살아보기”를 실천에 옮기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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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16
  • 남과 북 모두 열광하던 광복 그리고 열망하는 통일
    ■ 김철균 지금으로부터 69년전인 서기 1945년 8월 15일의 정오무렵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국, 영국, 지나(중국), 소련 등 4개국의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는 일본천황 히로히토의 방송연설과 더불어 조선은 광복을 맞아왔다. 순간, 3천리 금수강산의 3천만 동포는 환희로 들끓었다. 도시에서는 시민들이 거리에 뛰쳐나와 인파를 이루었고 조용하던 시골마을에도 사람들은 마을회관같은 곳에 모여들었으며 어른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환호하자 어린 것들조차 영문도 모르는채 어른들과 한동아리가 됐다. 도시에서, 시골에서 아니, 3천리강산의 도처에서 “만세!” 3창과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토록…”이 미아리쳤다. 그랬다. 1910년의 “한일합방”과 더불어 장장 36년간이나 일제의 군화에 짓밟히며 신음하던 우리 민족이었다. 짓눌리고 기시받았고 “내선일체(内鲜一体)”란 강권정치에 의해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의 말과 글을, 나중엔 이름마저 빼앗겼으며 수많은 젊은이들이 “학도병”으로 일제놈들의 “탄알받이”로 되었고 역시 수많은 앳된 소녀들이 “근로봉사대”, “정신대” 또는 위안부로 끌려가 몸이 만신창이 되도록 유린받았던 우리 민족 36년의 수난사였다. 그랬다. 일제에 의한 망국노가 되기 싫었기에 1907년 조선의 밀사 이준은 네덜란드 헤이그의 한 호텔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끝내 분사의 길을 택했고 이상설 등은 간도에서 “서전서숙”을 차려놓고 민족교육을 춰세우는 것으로 독립의 길을 시도하기도 했었으며 김좌진, 홍범도 등 독립군들은 무장항일로 “조선독립”의 길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 뒤에도 만주에서는 항일빨치산, 중경에서는 한국독립군, 태항산에서는 조선의용군 등 항일부대들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을 부르며, 광복의 그 날을 바라며 간고하고도 피어린 항일무장투쟁을 견지하였었다. …… 드디어 1945년 8월 15일의 일력과 더불어 이룩된 조선의 광복 ㅡ 하지만 “만세” 소리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의 열창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리 민족한테는 새로운 비극의 서막이 열리기 시작했다. 미소 두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의해 그어진 38선 ㅡ 그 것은 일제의 식민지 시대에서, 강대국이 지배를 받는 다른 한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점이었으며 곧바로 비극의 시작이고 도화선이었다. 38선 ㅡ 그 것은 남측이 바라던 것도, 북측이 바라던 것도 아니었다. 3천만 겨레가 바라던 것은 더욱 아니었다. 통분하고 원망스럽고 치욕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광복은 우리 민족 스스로 쟁취해 이룩한 것이 아니라 강대국에 의해, 강대국의 도움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것이 바로 약하고 힘없는 약소민족의 운명이었다. 강대국끼리 무심히 협의를 주고 받으며 그어놓은 38선, 그 것 때문에 3천리 강산은 두 동강이 나고 단일 민족이던 우리 민족은 2개의 나라로 갈라져야 했으며 국가도 하나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이었다. 아, 산이 막혀 못오시나요/ 아, 물이 막혀 못오시나요… 저주의 선 38선, 원한의 38선 ㅡ 한반도 중간을 뭉텅 자른 그 것 때문에 사상과 이념이 다른 2개의 분열국가가 지구상에 나타났고 그것 때문에 동족상잔의 “6.25”가 터졌으며 또한 그 것 때문에 같은 민족끼리 서로 욕하고 저주하며 69년이 지난 오늘도 남의 비웃음까지 받고 있지 않는가?! 이제 한해만 더 지나면 한반도가 분열된지도 70년이 된다. 70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하물며 늙고 병들고 또 새 생명이 태어나고 하는 인간세상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말그대로 하늘이 눈물을 흘리고 땅이 몸부림칠 지경이다. 이제 밤을 자면 통일에 대한 새로운 진전이 있는가 눈으로 살피고 귀를 기울려도 아무런 희소식도 없다. 오히려 그 무슨 남측의 “한미군사연습”이요, 북측의 “미사일 발사”와 “핵개발”에 관한 뉴스로 신문을 도배하고 방송이 떠들어댄다. 오, 남과 북 우리 모두가 열망하는 통일 ㅡ 왜 힘들고 분단의 골을 점점 깊어만 가는걸까? 그리고 밤만 자면 점점 고착돼가는 분단, 대체 하늘을 원만해야 되나, 땅을 원망해야 되나 아니면 우리 민족 자체를 원망해야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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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14
  • 여성에 대한 관심과 보호는 전 사회적인 책임
    ■ 김철균 일전, 중국조선족커뮤니티“중국조선족대모임”에는 “중국 인민대표, 여성의 출산휴가 3년으로 연장 제안”이란 신화사 기사가 번역되어 게재되었다. …밤에 빈번히 일어나고 낮에 제시간에 출근해야 하며 할 수 없이 아이를 부모님이나 가정부한테 맡기고…이 것은 대부분 직장 여성들이 출산 후 직면하고 있는 현상이다. 왕유쥔(王幼君) 베이징시 인민대표대회 대표, 베이징워치奇)테이터시스템주식회사 CEO가 여성의 출산휴가를 3년으로 연장하고 사회보험은 3년의 출산보조금을 제공하거나 재정부에서 보장 자금을 제공하는 것으로 유아 가정의 긴장한 생활현상을 개선할 것을 제안했다… 여성의 출산휴가 98일을 3년으로 늘이자는 제의안 놀랍고도 획기적인 제안이었다. 당분간 가능할지는 알 수 없으나 아주 훌륭한 제안인 것은 틀림없으며 이를 제안한 인대 대표의 시각이 서민층 특히 애를 낳아 키우는 여성들한테 돌려졌다는 것이 보다 귀감으로 되고 있다. 헌데 이 기사가 발표되자 인터넷을 통한 찬반양론이 불거지면서 공방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허다한 댓글들은 그냥 찬반양론으로 자신의 일가견을 피로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기와 견해가 맞지 않은 상대를 속된 말로 비난하거나 나중에는 인신공격도 서슴치 않아 몹시 유감스러웠다. 인터넷에 댓글을 달아 자신이 견해를 표현하는 건 아주 정상적이며 누구나 다 그럴 자격이 있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서로 비방중상하고 인신공격까지 하는 건 어디까지나 용속적인 표현이며 그 자신의 자질과 인격을 나타낼뿐이다. 특히 서로 헐뜯는 우리 민족의 열근성이 노출되는 것 같아 더욱 안타까웠다. 기실 인민대표대회에서 제안되는 것이라 해서, 또한 합리한 것이라 해서 그 전부가 통과되고 실행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 제안한 것이 그 자리에서 통과되고 래일 실행에 옮겨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3년 후 혹은 5년 후에 통과되고 실행되는 것도 수두룩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인민대표대회에서 제안된 사항들을 보면 그 제안이 합리한 것 여하가 첫째일 것이고 둘째로는 그 것이 현실적으로, 나라 및 지방에서 실행이 가능한가 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로 될 것이며 급한 것과 급하지 않은 것 역시 선후구분이 따로 있을 것이다. 필자가 인정하건대 왕유쥔 베이징시 인대 대표의 제안이 가능여하를 떠나서 그 제안이 확실히 국민대중의 실제 생활을 담았다는 것만은 틀림 없다. 그리고 그 제안이 가능성은 적어도 50% 이상이라고 전망한다. 현재 우리 중국은 크게 발전했다. 불과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면서 우리 세대에는 영원히 자가용과 인연이 없을줄로 알았었지만 그 것이 요 몇년째 현실화로 되고 있다. 또 인류의 발전은 바야흐로 우주관광의 시대까지 열 전망이다. 그러니 여성한테 베푸는 출산휴가 3년이란 제안은 완전히 가능한 일이며 다만 3년내의 일인가 아니면 5년내의 일인가 하는 시간적, 세월적 차이만 있을뿐이라는 생각이다. 그외 여성에 대해 특히 출산여성에 대해 나라적으로, 사회적으로 관심하는 무드가 조성돼야 한다는 일가견이다. 그제날 모저우둥(毛泽东)이 여성을 “절반하늘”이라고 평가한 진정한 뜻을 잘 모르겠다. 진짜 남성들과 똑 같이 하늘 절반씩 떠메고 있다고 한 건지? 아니면 남성들이 전반 하늘을 메고 있을 때, 여성은 전반 하늘의 절반 정도를 떼멜 수 있다는 뜻인지? 또 그 것도 아니라면 남성과 여성의 인구가 엇비슷하니 그냥 여성들의 인권상 절반 권리는 있다고 해서 그렇게 말한 것인지?…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정치적으로나 인권상으로는 몰라도 여성들이 약자인 것만은 사실이다. 많은 작가들이 “여성은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을 많이 인용해왔으나 어머니가 강하다는 건 정신상, 특히 자녀를 보호하고 양육하는 것에서는 강하지만 신체적으로도 강하다고 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현재 사회적으로 관심과 보호를 받아야 할 부류는 노인과 아동 그리고 장애인과 여성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할 때 출산여성은 더욱 관심과 보호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 것도 말로만이 아니라 출산휴가 늘이기 등으로 실제적으로 관심과 보호를 받아야 할 것이다. 현재 나많은 우리 조선족 여인들한테는 다른 민족 여인들에 비해 등이 굽었거나 풍습 혹은 류마티스로 다리 등을 잘 쓰지 못해 고생하는 여인들이 특히 많다. 이는 우리 조선족 여인들이 자녀를 출산한 뒤 가정의 시부모나 남편의 관심과 보살핌을 잘 받지 못했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출산 뒤 늘어났던 골격들이 제자리에 자리잡기 전부터 쌀을 일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하다보니 다 그렇게들 된 것이 아닐까? 가령 여성들의 “출산휴가 3년 제안”을 극구 반대하는 이가 있다면 혹시 여성들한테서 큰 상처를 받은 남성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분적 여인의 그릇된 행위를 갖고 전반 여성들을 몰아세우는 것은 지적인 남성들이 취할 자세가 아니다. 적어도 가정에 등이 굽었거나 류마티스 등으로 고생하는 어머니 혹은 할머니가 계시는 사람이라면 도무지 그런 반대주장은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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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14
  • [칼럼] 사형수에 대한 사형집행을 촉구한다
    ■ 이상권/채권추심전문변호사사무소 이틀전 중국에서 한국인 마약범 2명에 대해서 사형을 집행했다. 이에 대해 한국정부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중국은 한국의 입장을 철저히 무시하고 한국인에 대한 사형을 아무렇지도 않게 집행했다. 이에 대해 한국정부는 어떻게 대응해야할까? 한국정부가 이에 대해 할 수 있는 대응책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이라면 현재 한국에 미결수로 수용되어 있는 중국인 사형수인 왕리웨이와 박경수에 대한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다 한국정부는 이들에 대한 사형집행을 조속히 해 줄 것을 촉구한다. 한편 한국은 중국정부의 과단성있는 형집행을 본받아야 한다. 현재 1997년 김영상 정부에서 사형을 집행한 이후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 17년간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결코 잘하는 일이 아니며 법치주의를 확립하고 국민들에게 법치주의를 각인시키기 위해서는 엄정하게 법을 집행해야 한다. 사형판결을 받은 사형수들에 대해 즉각적인 사형집행은 법치주의의 기본이다. 이런 저런 강력범죄가 생길 때마다 여론을 들끊는다. 김해 여고생 살인사건, 울산 묻지마 살인사건, 현재 사형을 받은 사형수들의 사건들을 들을 때마다 사회는 들끓는다. 세월호 사건이 있은 후 책임자들을 여러면 사형을 시킬 것 같은 분위기다, 하지만 실상은 지난 17년간 사형판결을 받은 사형수들의 사형집행까지도 하지 않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이런 가운데 사람들은 형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아무리 사람을 여러명 죽여도 대한민국에서는 최소한 사형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악독한 범죄를 만들어내는데 일등 공신일 것이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최소한 사람을 여러명 살해한 사람이나 악랄하게 살해한 범죄자들에게 사형선고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사형이 선고된 범죄자들에 대해서는 이를 집행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그동안 사형집행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실질적 사형폐지국가가 되었다’고 좋아하는 자들이 있다. 대부분의 먹물을 먹은 인간들은 사형폐지론을 주장한다, 사형은 범죄인과 집행자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주장을 한다. 형벌이란 원래 반 인권적인 것이다. 다른 사람을 여러명 살해하거나, 혹은 악락한 범죄자들에게 인권이 있을 수 없다. 사형집행인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주장에까지 이르면 궤변에 가깝다. 사형폐지론의 가장 강한 논거는 ‘오판가능성’이다. 다른 어떤 형벌은 오판을 하면 이를 배상하면 그만이지만 사형은 되돌릴 수 없으므로 사형을 폐지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그 자체로서는 타당하다. 하지만 그런 오판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범죄인은 사형을 선고하지 않고 무기형을 내리면 그만이다. 지금 사형판결을 받은 범죄인들은 정말 사형판결을 받기에 합당하고, 모든 증거가 명백한 경우가 아니면 사형판결을 받지 않는 구조가 되어 있다. 정말 거르고 거른 자들만이 사형판결을 받는다. 그런데 사형판결을 내려놓고 사형집행을 하지 않는 것은 국가의 직무유기일 뿐이다. 한편으로는 세월호사건과 같은 사건이 터지거나 악랄한 범죄가 생길 때마다 여론이 들끊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판결이 선고된 사형수에 대해서조차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다. 이런 나라가 법치주의 국가이며, 이런 나라가 과연 국민들의 법을 엄정히 지키기를 원하는 국가일까 의문이다.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의 법무부는 사형수들에 대한 사형집행을 조속히 할 것을 촉구한다. 김영삼 정부가 잘 한 일은 그나마 사형수의 사형을 집행한 일이다. 그 이후 정권들은 이토록 무책임하고, 직무유기를 하는 자들의 무엇 때문에 정권을 잡고, 무엇 때문에 장관직에 오른 것인가? 사형수에 대한 사형집행 하나를 하지 못하는 무능한 자들은 다 물러나야 한다. 손에 피를 묻히기 싫은 자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에 올라갔는가? 손에 피를 묻히기 싫은 자라면 초야에 묻혀 살면 된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아무도 하지 않는 나라, 자신의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도 아무런 비난을 받지 않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고 희생양을 찾기 위해 날뛰고 있지는 않은가? 세월호와 같은 사건을 일으킨 것은, 이런 식의 온정주의 법무행정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과던성없는 법무행정이, 과당성업는 국가가 끊임없는 범죄를 만들어내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있는가? 우리는 정말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엽기적이고 악랄한 범죄에 대해서 분노하는가? 끊이지 않는 사건사고들,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서 분노하는가? 그렇다면 지금은 마땅히 집행해야 할 사형을 집행할 때이다. 중국은 한국인 마약사범을 처형했다면, 한국은 사형집행을 미룬 모든 사형수를 일거에 사형집행해야 하며, 그럼으로서 중국인 사형수 왕리웨이와 박경수에 대해 사형을 반드시 집행해야 한다. 글 : 이상권 대표변호사/채권추심전문변호사사무소, 채권추심전문변호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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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10
  • '위안부'와 조선민족 남자
    최근 언론에는 <위안부>소리가 여느 때보다 많이 오르고 있다. 진짜 <위안부>를 관심하는 것인지?! [정치인들의 눈 가림인지•••] < 위안부>는 세계 백여 개 나라, 몇 백 개 민족 속에 조선(한국)과 조선민족에게만 속하는 특유의 <전 용어>이다. < 위안부>는 한 세 기전 일본이 조선을 멸하고 조선과조선민족사내들에게 들씌운 치욕의 오강이다.. 나는 일본 애들 말하지 않는다.조선민족 여성들이 강 족에게 끌려 다닌 적이 처음이고, 일본애들 뿐이가? 예전부터 나는 조선민족사내들을 말한다. 나도 조선사내지만... 사내란 게 제 나라, 제 여자를 지키지 못하여 나라가 망하고 그 많은 아녀자들이 오랑캐들에 끌려 다니며 치욕 당했는가?! 역사상 그것도 한번 아니고... ... 세계 백여개 나라 몇 백 개 민족에 이런 일이 있었던가?! 왜 세계 그많은 나라, 민족 중에 유독 조선과 조선민족에게만 <위안부>가 있고, <위안부>란 딱지가 붙는가?! 조선,한국,중국조선족들이 사유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슬쩍 살펴보면 왜(外)족에 쫓기고 강적을 섬기며 동족끼리 살육하는 세월이었다고 본다.(지금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조정이 부패무능하고 관리, 양반들이 늘 기생, 여자들을 차고 강가, 숲 속을 누비며 북, 장단 속에 <놀아보자,오늘을 놀아보자. 오늘을 지나 보내면 놀아 볼 시간이 없거니>를 꼬부랑 외치며 아녀자들 치마속에 묻혀 삶의 <낙>을 향수하며 세월을 보낸다. 덕으로 이웃나라, 민족에게 큰 땅덩이를 다 때웠고 쪼고만 조선반도로 몰 리였다. 후로는 바다건너 작은 섬나라 일본 애들에게 망하는 꼴이 됐고 민족에게 [위안부]란 세계에 둘도 없는 치욕적인 단어도 얻게 되였다. 현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나라가 분열되고 혈육이 갈라져 사는 민족이다. 그 현황에서도 한시도 한 피 줄타고 난 형제를 비방하고 멸하지 못하여 이를 갈고 있다. 조선민족이 반성하고 사고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잍본을 규탄하고 배상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우리여성들이 제 남자들을 원망하고 그들에게서 배상을 받아야 한다고 본다, 조선민족남자들이 나라를 굳건히 지키고 제 여자를 잘 보호하였으면 그 여자들이 왜(外)족들에게 끌려 다니며 굴욕을 당 하 였게는가? ! 조선사내들이 제 책임을 다 하였으면 조선나라 조선민족에게 세상에 둘도 없는 <위안부>란 치욕적인 딱지가 붙어 겠 는가?!조선민족사내들이 똑똑하고 잘하였으면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일본 애들이 사과할 것이 아니라 조선민족사내들이 우리여성들에게 심심히 허리 굽혀 사과해야 한다고 본다. 왜,조선민족이 이렇게 되였는가? 왜,조선민족에게 <위안부>란 세계에서 둘도 없는 치욕적인 단어가 붙게 되였는가?! 전체 조선민족이 사유해 볼 일이라고 본다. 부끄럽게 떠들썩거리지 말고 숙고해보아야 한다고 본다. 한국경기도안성에서 여때 여건이 안 되여 써놓아 던 글을 이제야 올려 본다. 글 : 소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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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01
  • 중국인의 꿈 그리고 조선족의 꿈
    ■ 곽승지 "나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것이 중화민족의 근대 이래 가장 위대한 꿈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의 꿈(中國夢)'에 대해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처음 한 말이다. 2012년 11월 29일 베이징 천안문광장 옆 국가박물원에서 열린 부흥지로(復興之路)란 전시회를 참관한 직후 행한 시 주석의 이 말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중국 또는 중국인의 미래를 점치는 단서가 되고 있다. 시 주석은 이듬해 3월 제12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中國夢에 대해 재차 언급함으로써 이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중국은 1970년대 말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개방 정책을 통해 경제발전을 추진한 이후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역대 지도자들은 다양한 표현을 통해 중국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에 대한 비전을 말해 왔다. 후진타오(胡錦濤)의 조화사회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정책에 대한 비전을 넘어 중국인의 꿈(희망)에 대해 최고지도자가 언급한 것은 시 주석이 처음이다. 시 주석의中國夢에 대한 말이 주목받는 이유이다. 시 주석이 말한中國夢의 핵심은 '다 같이 부유해 지는 것'이다. 청화대 리시광(李希光) 교수는 시진핑의中國夢의 핵심내용이 다 같이 부유해지는 것으로 다수의 대중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취지로 한다고 말한다. 중국공산당이 절대다수 인민대중들의 강렬한 요구인 '다 같이 함께 부유해지는 개혁발전의 길'로 나아가 인민대중들이 진심으로 공산당을 옹호하게 만드는 것이中國夢이라는 주장이다. 주목되는 것은 시 주석의中國夢이 미래의 중국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동양적 화합과 조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적인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홀로 7%대의 고속성장을 이어가고 있는 중국이 더불어 잘사는 미래를 꿈꾸고 있다는 것은 중국인은 물론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中國夢은 중국인의 화합과 조화를 넘어 전 세계의 화합과 조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꿈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시 주석의 결의에 찬 표정에서中國夢이 꿈을 넘어 현실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다. 그 믿음은 중국인들 스스로 그 꿈을 향해 전진하도록 추동할 것이다. 그래서 꿈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미래는 꿈꾸는 자의 몫이라는 말 또한 꿈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미래는 다르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물론 꿈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꿈을 향해 부단히 앞으로 나아갈 때만 현실이 된다. 그러나 당장은 꿈을 꾸고 그 꿈을 말해야 한다. 꿈을 이루는 방법의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꿈을 말하며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은 막연하나마 자신의 미래에 대해 꿈을 꾸며 살아간다. 비록 당장의 삶이 고단해 하루하루 숨 가쁘게 살아갈지라도 꿈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 그러면 조선족 개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서 조선족의 꿈은 무엇일까? 단언컨대, 조선족의 진취적 기상과 적극성으로 볼 때 중국공민으로서 조선족 개개인의 미래는 창창할 것이다. 하지만 집단으로서 조선족의 미래에 대해서는 기회론과 위기론이 맞서고 있다. 조선족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급변하는 시대상황 하에서 조선족 개개인만 있고 집단으로서 조선족의 미래에 대한 꿈(비전)을 그리지 못한 탓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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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01
  • 50대의 인생과 우리들의 사명감
    ■ 김철균 올해 내 나이는 57주세, 오래잖아 60대에 들어서지만 그래도 아직은 분명한 50대라 할 수 있다. 50대의 인생ㅡ 인생 반세기 넘어 살아오다 보니 참 희로애락이 많았고 느끼는 점도 많으며 또한 이제 남은 인생에서 해야 할 사명감으로 어깨가 무거워질 때도 많다. 50대의 인생ㅡ 우리는 특수한 시대에 태어났고 그러한 시대에서 살면서 또 그러한 시대가 만든 특수한 세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현듯 우리는 시대가 만든 “희생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중국으로 놓고 보면 우리 50대가 태어나던 시대가 각종 정치운동이 가장 심하던 시기였다. 대약진, 반우파운동 등 운동열이 심했나 하면 지난 세기 60연대 초기에는 우리 중국이 가장 큰 기아에 시달리던 시기였기도 했다. 그리고 1964년 필자가 소학교에 입학하여 2년이 지나자 “문화혁명”이란 것이 터져 그 때로부터 10년간 배움의 가장 “황금계절”을 놓치고 말았으며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됐을 때는 배움의 “황금계절”이 훌쩍 지나간 뒤었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의 50대들도 엇비슷하다는 생각이다. 6.25 전쟁 뒤에 태어난 한국의 50대들은 우리처럼 정치운동의 “희생품”으로는 되지 않았으나 “보릿고개”의 배고품을 겪었고 공부할 나이가 되었지만 학교문도 가보지 못한 문맹이 수두록했다. 또한 그 50대중 적지 않은 여인들은 동년시기 쌀 몇가마니 값으로 외국에 팔려가지 않으면 안되었고 남성들은 뼈가 채 굳기도 전에 중동의 건설장으로, 먼 바다의 참치선으로 송출되어 손바닥에 장알이 박히도록 일해야 하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편 우리 50대들은 조상들로부터 물질적으로 물려받은 것이 거의 없다. 한창 공부할 나이에 밭김을 매고 부모를 대신해 동생을 업어키우고 또한 성인이 되기 바쁘게 “지식청년”이 되어 농촌으로 쫓겨가지 않으면 공장의 임시공으로 노루꼬리만한 노임봉투를 받아서는 그대로 부모한테 바치군 하던 우리였다. 또한 나이가 들어 장가를 가 분가라도 하게 되면 재산이래야 고작 색시가 갖고온 이불장에 가마솥 2개, 그리고 찬장(식장) 하나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재 우리의 아래 세대들은 완전히 다르다. 부모의 덕으로 호의호식하면서 배고품과 헐벗음이란 무엇인지조차 모르며 자랐고 또한 나이가 들어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부모가 모든걸 다 해준다. 아파트에 모든 가전제품 그리고 요즘엔 아들 가진 집에서 아파트를 사주면 딸 가진 집에서는 자가용을 산준다고들 한다. 그뿐이 아니다.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을 키우는 것 역시 부모의 몫으로 된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세대에서는 꿈이나 꿔보았던가?! 분가하면 “성냥갑”같은 세집으로 나가고 자식을 낳아도 그 자식을 꿍져업은채 자전거를 타고 출근해야만 했던 우리였다. 어찌보면 우리 세대는 억울한 세대이다. 조상들로부터는 물질적으로 물려받은 것이 거의 없지만 아래 세대한테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움을 물려줘야 하는 의무감과 그들이 낳은 자식까지 뒤바라지 해줘야 하는 의무감으로 아직도 아글타글하며 살고 있는 50대들이 허다한걸로 알고 있다. 또한 그러면서도 이것이 우리 세대의 운명이요, 마땅히 해야 할 사명감으로 간주되고 있다. 아래 세대한테 물질적으로 풍요로움을 물려주어 그들한테만은 우리 세대가 겪어왔던 고생과 풍파가 없도록 한다는 것은 아주 고귀한 생각이며 이를 놓고 시야비야 문장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 세대가 아래 세대한테 아주 중요한 것을 물려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윗세대가 우리한테 물려주었던 “간고분투하고 부모한테 적게 의거하고 모든 것을 자아 스스로 개척하고 해결해나가던 그런 정신”을 물려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제날 전등불도 없는 두메산골 집체호에 자식을 맡기고도 눈물로 돌아서며 자식한테 “독립의식”을 심어주던 윗세대들이었다. 큰 아들이 장가를 들어도 아래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아들딸들 때문에 장가가는 아들 자신이 “홀로서기”를 하게 했으며 손군이 생겨도 역시 그것들 때문에 외면했던 윗세대들이었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 얼마전 버스에서 젊은 여성은 그냥 홀몸이었고 친정어머니쯤 보이는 50대 여성이 아이를 업고 있는 것을 보고 충격적이었다. 최근 들어 이러한 현상을 너무나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자식이 보다 덜 고생하게 하려고 자식의 집을 청소해주고 빨래해주고 손군까지 맡아 키워주는 50대들이 아주 허다하다. 세상사란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제 세월이 흐르면서 나 자신한테 그 어떤 불상사가 생기고 자연적으로도 어떤 재난이 덮쳐들지도 모른다. 특히 우리가 언제까지고 아래 세대들을 “껴안고 돌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을 “껴안고 돌볼기”보다는 그들로 하여금 “고생이란 것이 뭔지를 알게 하고 고생을 이길 수 있는 정신력을 키우게 하는 것”이 우선시돼야 할 것이다. 그리고 50대인 우리한테도 인생이 있다. 매양 자식들한테 매여살 수는 없고 우리 자체의 인생을 즐길 시간도 가져봐야 할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청춘, 제한된 인생 – 우리의 인생은 나 자신의 것이지 결코 아래 세대한테 꿰여있는 “실”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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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26
  • [김혁 칼럼] 톱스타 탕웨이 열애설과 “만추”
    ● 김 혁(재중동포 소설가) 영화 “색계”로 알려진 톱스타 탕웨이가 열애설과 함께 결혼소식을 전했다. 탕웨이의 회사측은 보도자료를 통해 그녀가 한국 김태용 감독과 올 가을께 결혼한다고 발표했다. 팬들로 말하면 메가톤급 소식이였다. 중국의 최대 포털사이트인 “시나닷컴”은 탕웨이의 결혼 소식을 메인에 걸었는데 여기에 누리군들의 20만 개가 넘는 댓글이 달리며 이들의 결혼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을 보였다. 탕웨이의 또 다른 대표적 영화인 “만추”를 통해 인연을 맺은 김태용 감독과 탕웨이는 영화 작업 이후에도 좋은 친구로 지내왔으며 2013년 가을, 광고 촬영을 위해 탕웨이가 내한 했을때 “남재여모”의 연인으로 발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1979년 절강성 온주시에서 태여난 탕웨이는 2004년 베이징미스유니버스 (环球小姐)선발에서 5위를 차지하면서 두각을 나타냈고 2006년 리안 감독의 영화 “색계”의 여주인공으로 출연하여 유명 배우의 반렬에 올랐다. 2007년 영국에서 희극 연기를 단기로 공부했으며 2008년 홍콩 정부의 "우수인재입경계획"을 통과하여 홍콩 신분증을 얻었다. 2011년, 영화 “만추”로 “백상예술대상”, “올해의 영화상” 및 “부산영화평논가협회상”에서 각각 세번의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중국 여배우가 되었다. 여기서 “만추”는 한국에서 너무나 잘 알려진 영화로써 한국의 몇세대의 애정관에 영향을 끼쳐왔다. 이미 4번이나 리메이크돼 영사막에 올랐다. 이제는 연인이 된 김태용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중국의 탕웨이와 한국의 현빈이라는 글로벌 스타들의 호흡으로다시 리메이크 되여 화제를 모았었다. 현빈, 탕웨이 모두 훌륭했지만 김태용 감독의 연출은 가히 독보적이었다.그러한 감독이였기에 14억 중국인의 연인인 탕웨이와 현실판 애정동화를 구축할수 있은듯 하다. 중국에서 “만추”는 할리우드와 중국영화의 공세속에서도 개봉 3주차에 상영회수가 무려 1,600회에 달해 중국에서 개봉된 한국 영화중 최고 흥행기록을 세우면서 “만추” 돌풍을 일으켰다. 영화 “만추(晚秋)”는 지난해 중문소설로도 번역, 출간되였다. 조화출판사 출간으로 된 소설은 살인죄로 복역중인 모범여죄수가 특별휴가중 범죄자 연하남을 만나 이룰수없는 사랑에 빠지는 비극적 로맨스물이다. 소설에는 영화속 정채로운 장면들이 사진으로 수록됐다. 때문에 글속에 담겨 있는 섬세한 감정 표현은 물론 글만으로 느낄수 없는 수려한 풍경과 세련된 영상미까지 한꺼번에 보여준다. 영화를 보지 못한 독자도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얻을 수 있다. “만추”, 늦은 가을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사계절 언제라도 감동을 줄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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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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