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포커스] 멕시코 몬테레이 BBVA 스타디움에 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 한국 선수들은 그라운드에 주저앉았다. 일부 선수들은 유니폼으로 얼굴을 감쌌고, 주장 손흥민은 한동안 전광판만 바라본 채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전광판에는 '대한민국 0-1 남아프리카공화국'이라는 결과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한국은 조별리그 A조에서 체코를 2-1로 꺾으며 기분 좋게 출발했지만 이후 멕시코와 남아공에 연이어 0-1로 패하며 1승 2패(승점 3), 골득실 -1로 조 3위에 머물렀다. 조별리그를 가장 먼저 마친 한국은 다른 조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고, 통계업체 옵타(Opta)는 한국의 32강 진출 확률을 31.51%로 하향 조정했다. 조별리그 1차전 직후 97% 이상으로 평가됐던 진출 가능성이 불과 며칠 만에 급락한 것이다.
첫 경기 승리 당시만 해도 한국은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48개국 체제에서는 12개 조 1·2위와 성적이 좋은 조 3위 8개 팀이 토너먼트에 진출하는 만큼 승점 3을 확보한 한국은 남은 두 경기에서 승점 1만 추가해도 32강이 유력하다는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나 개최국 멕시코전 패배가 흐름을 바꿨고, 마지막 남아공전에서는 공격과 수비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결정력 부족과 조직력 흔들림이 동시에 나타났고, 후반 실점 이후 끝내 경기 흐름을 되찾지 못했다. 손흥민과 이강인을 중심으로 한 공격진도 상대 밀집 수비를 끝내 무너뜨리지 못하며 무득점으로 대회를 마감했다.
문제는 이후였다. 에콰도르, 보스니아, 스웨덴, 파라과이가 승점 4로 '최고의 3위' 상위권을 선점했고, 세네갈은 이라크를 5-0으로 대파하며 골득실에서 한국을 넘어섰다. 이란 역시 조별리그 3무(승점 3·골득실 0)로 한국보다 앞섰다. 한국은 가까스로 8위권을 유지했지만 남은 J·K·L조 결과에 따라 순식간에 탈락권으로 밀려날 수 있는 상황에 놓였다.
한국은 이제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수 없다. 남은 조별리그에서 경쟁국들이 승점을 잃거나 특정 결과가 나와야만 32강 진출이 가능하다. 월드컵 본선에서 다른 나라 경기 결과만 바라보며 경우의 수를 계산해야 하는 현실은 한국 축구가 처한 냉혹한 위치를 보여준다.
이번 대회는 한국의 부진뿐 아니라 48개국 월드컵 체제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도 드러냈다. 조별리그를 먼저 마친 팀은 다른 팀들의 결과를 기다려야 하지만, 뒤늦게 경기하는 팀들은 필요한 승점과 골득실을 모두 계산한 뒤 경기에 나설 수 있다. 일정 자체가 공정성 논란을 낳는 셈이다.
'최고의 3위' 제도 역시 논란거리다. 일부 조에서는 무승부만으로 두 팀이 함께 토너먼트에 오를 가능성이 생기면서 공격보다 계산이 우선되는 경기 운영이 가능해졌다. 승리를 위한 축구보다 실리를 위한 축구가 늘어나고, 경우에 따라서는 경기 자체보다 순위 계산이 더 큰 관심사가 되는 역설도 나타났다.
물론 이번 위기의 가장 큰 책임은 한국 자신에게 있다. 유리했던 조별리그를 스스로 놓쳤고, 두 경기 연속 무득점 패배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공격 전개는 단조로웠고, 경기 흐름을 바꿀 전술적 대응도 부족했다. 세대교체 과정에서 경험과 활동량의 균형을 찾지 못한 점 역시 숙제로 남았다.
그러나 이번 월드컵은 한국 축구의 한계와 함께 FIFA가 추진한 48개국 체제의 허점도 동시에 드러낸 대회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대회 규모 확대는 더 많은 국가에 기회를 제공했지만, 그 이면에는 복잡한 경우의 수와 형평성 논란, 이른바 '계산 축구'라는 새로운 부작용도 함께 낳았다.
한국이 극적으로 32강행 막차를 탈지, 조별리그에서 발길을 돌릴지는 남은 경기 결과에 달려 있다. 다만 결과와 관계없이 이번 대회는 한국 축구에는 냉정한 성찰을, FIFA에는 월드컵 확대 개편의 공정성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는 과제를 동시에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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