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사람들
Home >  사람들

실시간뉴스
  •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투기 저지 투사, 양이원영 의원
    [동포투데이] 탈원전 운동가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양이원영 의원은 현재 더불어민주당 후쿠시마 원전 해양투기 저지 대책위원회 간사를 맡아 이 방면의 대표적인 국회의원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양이 의원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투기 저지를 위해 의정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지난해 8월부터이다. 양이 의원은 야당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후쿠시마 원전 해양 방류 저지 대응단을 조직하여 4월 6일 일본을 방문했다. 대응단은 “오염수 방출하면 우리 국민의 먹거리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지 우려된다.”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이번 방문을 두고 여권에서는 ‘빈손 외교’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양이원영은 “정부가 나서지 않으니 국회가 나선 것”이라고 받아쳤다. 실제로 한국 정부는 도쿄전력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계획을 발표한 이후 줄곧 미온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사회적으로 ‘정부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를 승인 것 아니냐?’는 여론이 들끓자 한국 정부는 ‘지지도 찬성도 한 적이 없다.’고 변명했다. 한국 정부가 후쿠시마 원전 해양 방류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거나 찬성한 적은 없으나 침묵해 온 것은 사실이다. ‘침묵은 오염수 방류 공범’이라는 것이 양이 의원의 생각이다. 양이 의원을 비롯한 오염수 방류 저지 대응단은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에 분노하여 이번에는 머나먼 유럽 영국에 날아갔다. 런던 현지 시간으로 9월 16일(토) 오후 4시 더불어민주당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투기 대책총괄위원회 우원식 의원, 송기호 정책기획 본부장은 국제해사기구(IMO) 방문하여 현직 임기택 사무총장과 차기 사무총장으로 내정된 아르세뇨 도민게즈 국장을 1시간 40분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대응단은 “미래세대와 해양 생태계를 위해 일본 정부가 허용한 후쿠시마 원전 해양 방사성 폐수 투기는 런던의정서 법률 체계에 따라 즉시 중단돼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서한을 전달하고 또 다음과 같은 우려 사항을 말했다. 먼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가 최소 30년에서 앞으로 100년 이상 투기될 가능성이 높아 장기간 해양투기에 의한 누적 영향으로 먹이사슬을 통한 생태계 피해를 우려. 두 번째로 바다에 방사성 오염수를 투기하지 않는다는 대안 즉 육상에 보관하거나 수증기 증발 등 다양한 대안에 대해 검토하지 않고 가장 비용이 들지 않는 방법으로 바다를 오염시키는 결정을 한 것에 대한 우려. 마지막으로 원전사고로 인한 오염수 해양투기는 나쁜 선례가 되어 인류와 미래세대 모두의 자산인 바다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 대응단은 또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투기와 관련해 가장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한국과 일본이 협의가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국제해사기구가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다. 왜 양이 의원을 비롯한 오염수 해양 방류 대응단이 이렇듯 동분서주하면서 적극 나설까? 만약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응해왔더라면 야권 의원들이 ‘설자리’는 별로 없을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양이 의원을 비롯한 야당 대응단의 동분서주는 한국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도쿄전력 1차 오염수 방류 3개월 전쯤 한국 정부는 사회여론의 압박이 거세지자 시찰단을 일본에 보냈다. 5월 21~26일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한 시찰단은 단장인 유국희 원자력안전원장을 비롯해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 원전·방사선 전문가 19명, 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 해양환경 방사능 전문가 1명까지 총 21명으로 구성되었다. 정부 시찰단 인원수는 방대하나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해냈는지에 대해서 국민들이 의문을 표할 정도로 말 타고 꽃구경하다 온 것 아니냐는 시선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시찰단 명단조차 밝히지 않고 공명정대하지 못하고 어물어물 쉬쉬하면서 일본 방문을 진행했으니 국민들의 비판은 정부가 자초한 것이라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도쿄전력은 10월 5일부터 2차 방류를 시작한다는 계획을 지난 9월 28일에 발표했다. 한국 정부는 1차 방류 때와 같이 지난 4일 국무조정실을 통해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 소속 전문가를 후쿠시마 현지로 파견한다.’고 밝혔고 “우리 정부는 지난 1차 방류 때와 마찬가지로, 방류 관련 실시간 데이터와 도쿄전력이 시료 채취 및 분석 후 공개하는 정보 등을 철저히 모니터링한다.”고 말했을 뿐 방류 자체에 반대한다는 목소리는 여전히 내지 않고 있다. 한때 윤석열 대통령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두고 “일본에서도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한 것은 아니다. 지진과 해일이 있어서 피해가 컸지만 원전 자체가 붕괴된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방사능 유출은 기본적으로 안 됐다.”고 말했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에 대한 한국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는 윤석열 대통령의 과거 발언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추측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를 일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데 비해 한국 정부는 반대는 고사하고 야권과 일부 시민단체의 반대 목소리에 수산물 오염은 괴담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대통령과 여당 대표를 비롯한 관료들이 수산시장을 방문하여 회를 먹는 쇼까지 벌이고 있다. 지금도 그렇거니와 앞으로도 윤석열 정부 임기 내에는 정부 차원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에 반대하는 입장은 없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윤석열 정부에 오염수 방류 반대를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호랑이와 가죽 흥정을 벌이는 것과 같이 황당한 짓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한국 전체가 손을 놓고 강 건너 불구경할 수는 없다. 양이 의원 같은 분들을 비롯해 시민사회가 적극 나서야 하고 중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주변국과의 긴밀한 협조와 공조가 매우 필요하다.
    • 뉴스홈
    • 국제뉴스
    • 아시아
    2023-10-29
  • [단독 인터뷰] 강창일 전 주일대사 “일본은 하나를 준다고 똑같이 하나를 내주는 나라가 아니야”
    [동포투데이] 얼마 전 G7 정상회담이 마무리되었다. 개최국인 일본의 초대를 받아 한국도 참석했는데, 이를 두고 단절됐던 한일관계가 회복 및 정상화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 사이에 쌓여있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생각하면 한일관계를 마냥 낙관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2011년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생겨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약 130만 톤의 해양 방류와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금을 일본 기업 없이 마련하겠다는 강제징용 배상 문제, 갈수록 도가 지나치는 독도 영유권 문제까지.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한국인이라면 쉬이 넘어갈 수 없는 이슈가 산적해 있다. 이러한 해묵은 역사문제부터 최근 있었던 G7을 주제로 일본에 정통한 강창일 전 주일대사(현 동국대 석좌교수, 4선 국회의원과 한일의원연맹 회장 역임)와 일문일답을 진행하며,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 한국이 취해야 할 태도와 한국에 미칠 영향에 대해 들어보았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검증, 피해국도 포함되어야 - 일본의 오염수 방류 문제, 어떻게 생각하나 오염수 방류는 환경뿐 아니라 인간의 생명과도 직결된 문제다. 그러므로 바다 환경 전문가, 세계보건기구(WHO), 국제해사기구(IMO), 그린피스 등 환경 전문가가 오염수 검증에 관여해야 한다. 그래야만 객관성이 담보된다. 그런데 국제원자력기구(IAEA)로만 검증한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시료 채취도 안 되는 시찰단을 보낸다? 결과에 대한 신뢰도 어려울 뿐더러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대만, 동남아 등 많은 국가가 피해를 입을 걸로 예상되는 국제적인 문제인데, 그렇게 간단하게 접근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 일본에서는 지속적으로 오염수가 인체에 해를 줄 수준은 아니라고 하던데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는 확인 또 확인을 거쳐야 한다.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위험하지 않다는 신뢰 가능한 객관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 게다가 이 문제와 전혀 관계없는 미국, 캐나다에서 검증할 게 아니라 피해국의 전문가가 검증단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 일본은 IAEA 외에 특정 국가에 검증을 허용하지 않는데, 한국의 시찰을 수용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시찰이야 누구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시료 채취도 못 하는 시찰은 의미가 없다. 시찰이 아니라 ‘검증'을 해야 한다. 게다가 일본에서는 중요한 자료를 절대 내놓지 않아서 객관적인 사실 확인이 불가한 상황이다. - 이번 시찰단 구성, 어떻게 되는지? 정부 기구 사람들이 있다고는 하는데 누군지 구체적으로 명단 공개도 안 한다.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여기서 지금 제일 문제인 건, 한국 정부가 일본의 오염수 방류를 기정사실화 한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방류를 전제로 하고 시찰단 파견을 한 것 같다. 이렇게 되면 결국 한국이 일본 오염수 방류 문제에 있어 들러리 선다는 이야기밖에 안 된다. - 그렇다면 이번 시찰, 신뢰할 만한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기대하기 어렵다. 시찰 결과도 분명 큰 이상 없다고 결론지어질 것이 뻔하다. 시료 채취도 안 되는 시찰단이 다녀와서 발표하는 결과에 대해서 신뢰할 수 있겠나. - IAEA에서도 후쿠시마 오염수 처리 과정을 검증 중이다. 이 결과는 어떻게 예상하는지? 이 역시 마찬가지다. 문제없다고 할 것이다. 일본 정부 발표를 보면 결과는 나온 것 같다. ▶ 강제 징용 배상 문제, 멀티 트랙 접근법 필요 - 강제 동원 피해자에게 ‘제3자변제' 방식으로 배상하기로 했다. 이러한 행보를 어떻게 보나. 잘못된 행보라고 본다. 일본 정부를 동참시켜서, 일본 기업에 사과를 받아야 한다. 피해자들의 명예가 걸린 문제다. 그런데 제3자변제 방식을 통한 배상은 피해자들을 고려하지 않은 방식이다. 일본 가해 기업이 아닌, 제3자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배상하는 방안인데 일본의 자발적 사과를 끌어내긴 커녕 우리 정부가 먼저 나서서 피해자들과 원만한 해결을 보겠다는 것이다. 이런 모양새는 말이 안 된다. -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너무 성급한 결정이♘다. 한일관계 정상화도 좋지만 이런 역사 문제엔 절차와 과정이 중요하지 않나. 피해자 의견과 국민 여론을 수렴해 진행해야 하는데, 그런 과정이 없♘다. 그러니 여론이 좋지 않을 수밖에 없다. - 강제 징용 배상 해법에 피해자가 빠져선 안 된다. 해법 마련, 어떻게 해야 하나. 일본과 꾸준히, 계속해서 협상을 진행해야 한다.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물밑 작업을 지속해 일본 기업이 동참하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과거를 직시하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를 없던 일로 치부하는 건 매국과 다를 게 없다. - 국익과 역사 문제,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면 한국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몇십 년 동안 역사는 역사, 경제는 경제, 안보는 안보 이렇게 각각 멀티 트랙으로 접근했다. 잘 유지되고 있♘고 앞으로도 멀티트랙으로 진행되♘어야 했는데 갑자기 모두 일원화시키며 과거 역사를 없애버렸다. 이는 결국 역사를 팔아버린 집단이 되는 것과 다름없다. 한국 국민에겐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 잠재된 어떤 정서가 있다. 물론 일본 여행도 잘 가고, 일본 문화도 좋아하지만, 과거사는 다른 문제다. 그러므로 경제는 경제대로 역사는 역사대로 멀티트랙으로 접근해야 한다. ▶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는 G7 정상회의 - 의장국인 일본의 초청을 받아 G7 정상회의에 참석하게 됐다. 한국이 일본의 초청을 받은 배경은 무엇인가. 한국도 G7 정상회의에 4번 참석한 이력이 있다. 그만큼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다. 그래서 당연히 초대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만 초대받은 게 아니라 호주, 인도, 인도네시아. 베트남, 코모로, 쿡 제도 등 엄청 많은 국가가 초대됐더라. 이번 정상회의 주인공은 일본의 기시다 총리와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조연 그 어디쯤이었을 거다. - G7 정상회담에서 후쿠시마산 식재료가 제공됐다고 하던데. 일본에서도 후쿠시마산 농산물은 잘 안 팔린다. 아마 방사능 전부 체크해서 안전한 음식만 갖다 놨을 거다. 술은 증류수라 괜찮다고 하는 술과 안전한 음식 몇 개만 준비한 걸로 알고 있다. 후쿠시마산 물도 안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후쿠시마산 식재료가 정상회의 식탁에 올라 안전하다는 식으로 어필하고 있다. - 원폭 희생자에 대한 참배 일정도 있었다. 한일 정상 참배는 처음이라던데. 이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대통령이 가는 건 당연한 건데, 기시다 총리가 간 게 중요하다. 그게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아마 기시다 총리가 윤 대통령을 배려해서 원폭 희생자 참배 일정을 진행한 게 아닐까 싶다. 이 참배 일정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에 있는 원폭 피해자 14명이 히로시마로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정부에 전달했다. 히로시마 참배 일정 때 만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런데 정부 쪽에서는 회신도 없고 가타부타 아무런 이야기도 없었다고 한다. 결국 히로시마로 향했던 한국 원폭 피해자들은 다시 눈물을 흘리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피해자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참배를 진행한 거였다면, 한국에서 온 원폭 피해자들도 만나고 이야기를 들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진정성을 보여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G7 정상회의 후, 여당에서는 ‘국격을 높였다' 야당에서는 ‘들러리 선 꼴밖에 안 된다'라고 의견이 갈리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국가의 위상을 높인 건 없고, 한미일 회담을 아주 짧게 약식으로 진행했는데 정식으로 길게 진행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한다. - G7 정상회의 참석이 한국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하나. 딱히 변할 건 없어 보인다. 얻은 것과 손해 본 것 모두 없다. 다만 이번 회담을 통해 친미, 친일 구도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 올해 상반기에 나타난 중국무역적자, 친일본 행보와 관련이 있나. 안보 문제는 미국, 경제는 중국과 협력 관계를 다져왔다. 그런데 이번 회담과 일련의 사건을 통해 경제마저도 친미/친일이 된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을 배제함으로써 ‘신냉전체제의 구축이다’와 같은 비판도 있었다. 다행히 이번 정상회의 때 중국에 원한 살 발언은 안 했지만, 국가 이익이 걸린 경제 문제이므로 항상 신중해야 한다. - 이에 대한 주변국의 견해는 어떤가. 주변국의 견해에 앞서 중요한 건 All of nothing이다. 경제적으로 수많은 나라가 엮여 있다는 소리다. 그러므로 앞서 계속 말한 것처럼 경제는 경제대로, 안보는 안보대로, 성격에 따라 트랙을 나눠 멀티로 접근해야 한다. ▶ 독도 문제, 과잉 대응하지 않는 것이 답 - 일본이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일본 고유영토’로 지칭하고 있다.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입장이 더욱 강경해지고 있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독도 문제는 해결이 어렵다. 당장 할 수 있는 대처 방법은 독도 문제를 시끄럽게 다루지 않는 것이다. 일본이 원하는 게 바로 ‘분쟁'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독도 문제를 이슈화해서 세계에 알림으로써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끌고 나가려는 것이다. - 그렇다면 한국이 독도를 지키기 위한 영유권 주장은 어떻게 해야 하나. 지나치게 대응하지도, 예민하게 반응하지도 말아야 한다. 일본은 우리나라가 반응하길 원하고 있다. 그래서 계속 자극을 하는데, 독도 문제는 국제 분쟁으로 끌고 가면 안 된다. 독도문제가 이슈화되면 전 세계 사람들은 사실관계 확인을 떠나 ‘독도는 일본 땅인가?’라고 생각해버릴 수 있다. 그러니 독도 문제는 크게 반응하지 않는 게 좋다. - 독도 영유권에 대한 국제 사회의 인식은 어떠한가. 다행히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 한국의 독도 영유권 강화를 위해 국가와 사회가 해야 할 일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과잉 대응을 하지 않는 것. 무시가 답일 수도 있다. ▶ 한일관계, 큰 문제는 없을 것. 다만… - 통큰 양보를 하고도, 일본 측 태도 변화를 끌어내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이나. 윤 정부가 일본을 몰라서 그렇다. 일본은 하나를 준다고 똑같이 하나를 주는 나라가 아니다. 오히려, ‘배 째라 버텼더니 이것들이 깨갱하는구나' 하면서 더 큰소리를 친다. 그러므로 일본과는 논쟁과 논의를 지속하며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반대로 문제를 해결할 명분을 주는 것도 방법이다. - 한일 관계 전망에 대해 어떻게 보나. 우리의 요구를 관철하고, 일본의 입장도 헤아리는 식으로 가면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인 문제만 없으면 된다. 인적 교류는 이미 잘 이뤄지고 있고, 일본과는 기술 등 협력할 여지가 많다. 일본은 강압적으로 하지 않고, 한국도 비굴하게 굴지 않으면 된다.
    • 뉴스홈
    • 국제뉴스
    • 아시아
    2023-05-29
  • [인터뷰] 박동웅 구로구의장, “구민과 더불어 외국인 주민도 살기 좋은 구로 만들 것”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한국은 노동력 공백에 따른 이주노동자와 국제결혼에 의한 결혼이민자의 증가로 사실상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월보를 보면 장단기 체류 외국인은 2021년 6월 말 기준 1,981,035명이다. 그중 서울시 구로구에 체류하고 있는 25,316명 외국인 주민 중 18,190명이 중국동포이다. 기자는 지난 4일 구로구의회 7대 후반기 부의장으로 또한 3선 의원으로서 지역발전과 의정활동에 열정을 바치고 이번 제8대 의회에서도 후반기 의장으로 지역주민은 물론 외국인 주민 민원이 발생한 곳은 어디든지 달려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박동웅 의장을 만나 그동안 의정활동 그리고 앞으로의 중국동포 및 외국인 주민 관련 정책과 지원계획에 대해 들어 봤다. 다음은 박동웅 구로구의회 의장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Q. 현재 시행 중에 있거나 계획 중인 중국동포 관련 사업은? A. 한국 국적을 가진 아이들은 보육료를 국가에서 지원을 해주는데 대한민국 국적이 아닌 중국동포 아이들은 어린이집을 다닐 때 보육료를 전액 자비로 부담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안산에서는 아마 시행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제 구로구도 내년부터 보육료 20%가량 지원해주는 사업을 하려고 한다. 현재 한국에 있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외국인 주민 자녀들을 조사해보니 약 천명 조금 넘는데 그 아이들에 대해 우선 보육료 20% 정도 지원해주고 차후에는 그냥 100% 지원하는 쪽으로 준비해 나갈 예정이다. 그래서 올해 최초로 이와 관련한 예산 편성을 준비하려고 한다. 한 해에 7억 정도 예산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Q. 구민들이 반발할 것 같은데? A. 그런 분들도 있지만 우리끼리만 살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글로벌시대,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만으로 먹고사는 것이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서울에서 구로만, 구로구 사람들만 뭉치는 것도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동포분들도 다 같은 한민족이고 외국인이던 한국인이던 차별 없이 함께 사회에 흡수돼서 생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주민들에게 잘 이해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Q. 지역주민과 중국동포 간 소통과 화합에 대한 모범 답안이 있다면? A. 가리봉을 중심으로 구로구는 중국동포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구로구에는 다문화 정책과가 있는데 중국동포들뿐만 아니라 베트남이라든가 필리핀 일본 등 이주민 정책을 총괄하고 있다. 우리 동포들도 명예 통장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고 또 구로구에는 봉사단이 매우 많다. 이를테면 구로 4동 같은 경우는 다문화 봉사자들이 야간 순찰도 하고 있고 다문화 경노당도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는 구로구가 소통을 많이 하고 있는 편이다. 근래 산발적으로 좀 많이 하고 있는데 향후에는 체계적인 시스템 상에서 동포들과 구청 간에 소통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Q. 현재 가장 시급한 현안과 해결책은? A. 현재 구로구에는 이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중에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분들이 중국동포들이다. 과거 코로나 이전에는 우리 동포들이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장사가 잘 안되는 등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에 대한 것은 우리가 추정할 수 있지만 정책은 정확한 수치를 갖고 하는 것이기에 다문화 정책과에서 우리 동포사회 실태 파악을 다시 해서 제도 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 Q. 상호우호도시 연변조선족자치주와 문화교류 계획은? A. 한국의 수출 규모를 보면 중국과의 교역이 미국을 앞서 나가고 있다. 그리고 중국에는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계시고 또한 중국과 한국 사이에 문화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문화적인 이해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연변과 교류(공무원 교류)를 했지만 사실 문화 교류라고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향후에는 여러 중국 도시와 자매결연을 맺어서 서로 간 문화를 교류하고 우리 축제 때 해당 국가 도시의 전통적인 문화행사를 유치할 수 있도록 하고 또 거꾸로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떤 축제라든가 행사가 있을 때 우리 구로구에서도 문화예술단이 가서 공연을 할 수 있는 그런 교류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Q. 임기 내 꼭 이루고 싶은 것은? A. 현재로서는 일단 코로나19 사태가 빨리 안정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대한민국 자체도 K-방역을 통해서 그냥 열심히 뛰고 있지만 우리 구로구에서도 구로구만의 어떤 방향 시스템을 잘 구축해 구로구가 코로나19에서 좀 더 안전한 도시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 할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안정돼야 구로에서 사업하시는 분들도 안정적으로 사업을 할 수 있고 지역경제도 활성화 될 것이다. Q. 중국동포에 대한 이해정도는? A. 한 예로 아마 한국사람 중에서 가장 양꼬치와 고량주를 많이 먹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정말 좋아한다. 젊었을 때 사실 한국에서 투자 목적으로 중국에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여러 가지 어떤 사정 때문에 결국 못 들어간 경험이 있다. 개인적으로 도시계획 전공이다 보니 연변은 물론 선양, 광저우, 칭다오, 상하이, 홍콩, 마카오 등 중국의 많은 도시들을 다녀봤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중국에 대한 이해도는 많다고 생각하고 중국 양꼬치를 중국동포보다도 내가 더 많이 먹는다고 감히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Q. 중국동포에 한 말씀 부탁한다면? A. 한국에서 돈을 벌어서 고향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는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충 그냥 돈을 벌고 살다가 중국으로 가면 된다는 인식보다도 역시 우리 조상의 뿌리는 한국이기 때문에 한국이 잘 돼야 동포사회도 잘 될 수 있다는 생각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은 한민족으로 역할을 한다면 지역주민들과 잘 화합할 수 있고 이제 동포들이 중국에 들어가서도 한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생활할 수 있다고 본다. 구로구의장으로서 향후 그 어떤 정책이나 개인적인 꿈도 있겠지만 중국 동포들이 구로구에 와서 잘 살고 여기에서 내가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그런 도시가 구로구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할 생각이다.
    • 사람들
    2021-09-09
  • 中, 98세 “쿵푸 할머니” 온라인 돌풍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최근 한 지역 모임에서 무술을 시연하는 98세 중국 “쿵푸 할머니”의 동영상이 유튜브에서 44만 번 이상 조회되고 4,500개 이상의 좋아요가 쏟아지는 등 순식간에 히트를 치고 있다. “쿵푸 할머니”의 팬들은 “98세에도 걸을 수 있을까. 쿵푸가 장수의 관건일지도 모른다”는 메시지를 올렸다. 심지어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도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에 대해 "쿵푸 정신은 늙지 않는다"고 언급하며 주목했다. 본명이 장헥셴(張鶴仙)인 “쿵푸 할머니”는 2017년에 이미 명성을 얻었지만 거의 10년 동안 고향인 저장(浙江)성 닝하이(寧海)현 장컹(張坑)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이 영상이 유튜브에 퍼지자 조카딸은 “할머니는 이제 중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유명하시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키는 약 1.5미터이다. 그의 쿵푸 동작은 유창하고 걸음걸이는 꾸준하다. 할머니의 마을은 쿵푸와 오랜 관계를 맺어왔고 할머니는 5살 때 중국 남부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무술 스타일인 장복싱의 6대 계승자였던 아버지로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어릴 때는 매일 연습했다. 지금은 나이도 들고 힘도 예전보다 줄었지만 아직 원기 왕성하다”고 말했다. “쿵푸는 폭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고 필요할 때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평생 농부인 할머니는 이웃들과도 잘 지낸다. 막내아들인 펑은 “어머니는 항상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어머니는 마을에서 결혼을 앞둔 사람들을 돕고 바느질도 하고 요리도 한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3남 1녀를 두고 있으며 모두 닝하이현에서 근무하고 있다. 닝하이현은 마을에서 차로 약 40분 거리에 있다. 할머니는 남편이 사망한 2012년부터 혼자 살고 있다. 할머니의 삶은 평범하지만 잘 짜여져 있다. 할머니는 아침 5시에 일어나서 매일 세 끼의 요리를 하는데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해산물이다. 점심을 먹고 나서 가끔 친구들을 찾아가서 수다를 떨기도 한다. 오후에는 쿵푸 연습을 한다. 장컹 마을은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할머니의 집은 산비탈에 있기 때문에 식료품을 사러 나가거나 친구를 만나러 갈 때 등산이 필요하다. 언덕을 오르면서 꾸준히 하는 운동이 할머니가 정력이 왕성한 원인일 수 있다. 펑은 “어머니에게 도시에서 함께 살기를 요청했지만 어머니는 혼자 사는 것을 즐겼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어쩌면 할머니를 자유롭고 편안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쿵푸 할머니”는 아버지의 장복싱 스타일을 주말과 휴일에 집에 오는 손주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최근 이웃 마을의 초등학교에서 무술 수업을 개설했다는 소식을 접한 할머니는 자원해서 아이들을 지도하고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 펑은 어머니와 가족들은 “쿵푸 정신을 젊은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고 그것이 그들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 사람들
    2021-08-16
  • 중국에서 캉테로 불리는 조선족 축구선수 김경도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1992년 11월 18일, 김경도(진징다오·金敬道)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김경도도 매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시절 김경도는 축구에 대해 잘 몰랐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뛰어 노는 과정에서 축구에도 약간의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약간의 재능을 보였다. 연변은 축구의 전반적인 환경이 다른 곳과 다르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방과 후 첫 오락으로 축구를 한다. 이러한 축구 환경에서 많은 우수한 축구인재들이 배출되었다. 김경도는 2003년 옌볜(延邊)의 쑹칭링(宋慶嶺) 축구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인 축구 전문 훈련을 시작했다. 진징다오의 부모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한국으로 떠났으며 이러한 환경에서 김경도는 독립적이고 힘든 일을 잘 견디는 품성을 키웠다. 2008년 청소년대표팀에 뽑혀 첫 국제대회를 치른 김경도는 눈부신 활약으로 그해 U-20 대표팀에 발탁됐다. 2009년에는 U-20 대표팀 주장을 맡아 사상 두 번째로 국가대표팀 소수민족 주장 자리에 올랐다. U-20 대표팀 시절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2009년 김경도는 시리아와의 경기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포지션에서 2골을 넣으며 팀의 다음 라운드 진출을 도왔다. 김경도는 경기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이니에스타라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경기가 끝난 뒤 기자가 이니에스타와 연락해 상대방이 사인 유니폼을 선물한 것도 김경도를 오랫동안 기쁘게 했다고 한다. 2010년 김경도는 연변FC에 입단해 클럽 생활을 시작했다. 부모님도 곁에 안 계시고 이제 막 입단한 뒤라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김경도는 늘 팀 동료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봐야 만 했다. 마침 외사촌형인 박성(퍄오청·樸成)이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동생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퍄오청은 이때로부터 김경도를 돌보기 시작했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한국에 일하러 갔고 나는 연변FC에서 선수로 뛰었지만 돈을 많이 벌지 못했다. 박성은 오래 전부터 축구를 했다. 그는 돈을 괜찮게 벌었고 보너스도 받았다. 그때 나는 그의 집에 짐을 풀었다. 그는 나를 위해 많은 것을 사주었고 체육관에 갈 수 있도록 돈도 대주었다. 그리고 내가 U-20 대표팀에 합류했을 때 그는 다른 선수들이 좋은 휴대폰과 명품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나에게 그것을 다 사주었다. 나중에는 또 휴대폰과 아이패드까지 사주며 축구를 잘하라고 격려 했다” 이는 사촌형인 박성에 대한 김경도의 평가다. 오늘도 두 사람은 여전히 절친한 사이로, 중국 슈퍼리그에서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2011년 코스타리카와의 평가전에서 김경도는 벤치에서 나와 성인 남자 국가대표팀 데뷔를 알렸다. 이번 국가 대표팀 경험으로 김경도는 중국 슈퍼리그에서 쟁탈하는 인기 선수로 됐다. 2013년 이 쟁탈전에서 승리한 산둥 루넝(山東魯能)은 연봉 100만 위안, 이적료 800만 위안에 김경도를 영입했다. 하지만 루넝 합류 이후 김경도는 그렇다 할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고, 궈안과의 첫 경기에서 비정상적인 플레이로 결국 팬들의 욕설이 쏟아졌다. 다행히 동료들이 그를 격려했고 그가 힘을 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익숙한 포지션이 아니다 보니 김경도의 플레이는 매우 어색했다. 김경도의 가장 좋은 포지션은 미드필더와 풀백이다. 하지만 그런 위치에서도 김경도는 팀과 감독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달리기와 부상 스틸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많은 칭찬을 받았고, 팬들은 점차 그를 받아들였다. 그해 그는 좋은 활약을 펼쳤고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했다. 2016년, 마가트 감독은 김경도를 완전히 재탄생시켰다. 마가트는 유명한 "악마 감독"이다. 그는 선수들의 세부 사항에 대한 요구 사항이 매우 높았다. 그는 김경도가 수비형 미드필더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를 풀백으로 변경 시켰다. 김경도는 당시 마가트 감독이 자신에 대한 요구사항이 높았다고 밝혔다. 그는 "내가 공을 빨리 잡아 다른 사람이 못 따라온다며 볼을 잡으면 상대 측면 수비수를 상대로 돌파하라고 했다. 처음에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우싱한(吳興涵)이나 류빈빈(劉彬彬) 같은 빠른 스피드 돌파가 없었다. 나중에 하오준민(蒿俊閔)의 도움으로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해 시즌 김경도는 윙백 포지션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고 루넝에서 가장 빛나는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은사 마가트 감독은 안타깝게도 팀의 부진한 경기력으로 인해 해고되었다. 김경도 역시 그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암울한 순간을 맞았다. 2016년 ACL 8강 1차전 서울 방문경기를 앞두고 몸에 살코기 성분이 들어 있는 것으로 밝혀져 소변검사 양성 판정을 받아 60일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다. 이때부터 고기는 거의 먹지 않고 음식에 신경을 썼던 김경도는 충격도 컸지만 선수 생활과 컨디션 유지에는 큰 힘이 됐다. 그 해 김경도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맞았다. 2016년 11월 13일 김경도가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왕융퍼(王永珀), 왕통(王彤), 송룡(宋龍) 등 동료들이 대거 참석해 축하하였으며 루넝도 공식 홈페지를 통해 결혼 축하와 함께 김경도 부부의 백년해로를 기원했다. 김경도의 감정 또한 매우 로맨틱하다. 그와 그의 아내는 서로를 수년간 알아왔다. 그들은 중학교 동창이었다. 그들은 학교 다닐 때 사귀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들은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났고 서로에게 좋은 감정이 생겨 함께하게 되었다. 2017년 김경도는 징계에서 풀려나 팀에 복귀했고 루넝은 리샤오펑(李霄鵬)감독을 영입했다. 리샤오펑이 부임한 뒤 팀은 파격적인 변신을 하지 않고 마가트 감독의 플레이 스타일을 이어갔다. 김경도 역시 익숙한 윙백 포지션을 유지했다. 이후 두 시즌 동안 김경도는 좋은 활약을 펼치며 타르델리 및 펠레와 매우 묵계적인 관계를 형성했으며 종종 도움을 주거나 득점하며 루넝의 측면에서 날카로운 킬러가 되었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2018시즌 김경도의 수치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시즌 29경기에 출전해 6골 6도움을 기록하며 경기당 평균 고강도 달리기, 스퍼트 횟수 1위, 경기당 평균 거리 2위, 가로채기 3위, 경기당 4위라는 맹활약으로 시즌 최고 인기 본토 선수상을 거머쥐었다. 이로써 김경도는 대표팀의 단골손님이 됐고 리피는 물론 가오훙보(高洪波), 리톄(李鐵) 등 본토 감독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되었다. 다만 리피 시절에는 김경도에 대한 요해가 부족해 기술적인 특성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고 김경도 역시 월드컵 예선경기에서 자신의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리피 감독 후임으로 2021년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리톄 감독은 카타르 월드컵 2차예선 40강전 몇몇 경기에서 김경도의 활용에 신경을 썼다. 김경도는 움직임이 좋고 수비 면적이 넓으며 공격은 날카롭다. 현재 김경도는 대표팀 10번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자격을 갖춘 '프리 맨'이 됐다. 곧 카타르 월드컵 3차예선인 12강전이 시작된다. 12강전에서 절대 주전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김경도는 계속 자신의 색깔을 살려 대표팀을 위해 몇 골을 더 넣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스포츠
    2021-07-28

실시간 사람들 기사

  • 고려인 돕는 활동 15년 넘게 펼쳐 온『너머』대표 김승력 씨
    [인터뷰=동포세계신문 김용필 편집국장]경기도 안산시 선부동 ‘땟골’은 고려인촌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집주인을 빼고는 세들어 사는 사람이 거의 다 고려인 동포라고 하다. 안산시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5천여명, 그 중 땟골에 2천명 가까이 사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대부분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서 온 사람들이고,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온 사람도 있다. 올해는 고려인 이주 150주년이 되는 해, 한국언론도 고려인을 조명하는 기사를 내고, 국회에서도 고려인을 위한 지원특별법 제정 문제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심지어 지난해 12월 27일엔 국회에서 고려인 이주 150주년 기념사업회 발족을 위한 세미나도 개최하는 등 관심이 무척 높아지고 있다. 이런 관심을 이끌어내는데 있어 지난 15여년간 현장에서 활동한 동포활동가인 김승력(46)씨를 빼놓을 수가 없다. 김승력씨는 1997년 10월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가서 13년간 고려인 지원활동을 펼치고, 2010년 한국에 와서는 한국에 온 고려인을 돕는데 모든 것을 다 바쳐 활동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기자는 지난 1월 3일 오후 안산시 선부동 땟골을 찾아갔다. 안산시 선부동은 중국동포가 많이 거주하는 원곡동과 바로 인접한 지역이다. 안산역과 가까운 원곡동은 다문화특구지역으로 지정될만큼 외국인 밀집거주지역으로 많이 알려진 곳이지만, 선부동은 외진 곳으로 겉으로 많이 드러나지 않은 곳이다. 고려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땟골’이라는 이름과 함께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마 김승력씨가 2011년 11월 처음 이곳에 와서 고려인을 위한 한글야학 교실을 열고, 임금체불, 산업재해 등 고충상담을 해주는 별별상담소를 열게 되면서 외부에 고려인촌의 실상이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 온 고려인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한국말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조선족동포들은 한국어 소통이 문제가 없기 때문에 쉽게 일자리를 찾을 수 있고, 어려움을 겪게 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도 많고, 한국생활에 빨리 적응할 수 있지만, 고려인 동포들은 한국말을 할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한국인도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고려인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도 찾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김승력씨의 역할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쉬운 일이 아닐텐데 어떻게 해서 고려인을 돕는 일을 하게 되었는지 들어보았다. 그는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다녔다. 20대 청년시절 그는 문학도 꿈을 키워갔고, 사회주의, 민족, 통일, 민주주의 등 문제를 놓고 고민도 많이 하게 되면서, ND계열, 즉 레닌주의에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학생운동에 참여를 하였다고 한다. 1991년 12월 소련이 붕괴된 후 러시아 사회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궁금하고, 또 러시아문학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그는 1997년 10월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있는 고리끼문학관 대학원 과정에 입학하였다. 마침 우수리스크대학 사범대학에서 한국어강사로 활동을 하게 되어 학비 면제에 약간의 생활비도 보조받으며 생활을 하였다. 1999년 5월경 한국의 민간단체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재외동포사업부에서 고려인 생활실태조사를 하는데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고려인 사역은 본격화 되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고려인 학생들을 만나지만 고려인 생활 내면을 알기는 어려웠죠, 우리민족서로돕기 의뢰로 고려인 실태조사를 하면서, 고려인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었어요.” 우수리스크에서 생활하는 고려인들은 군인들이 사용하고 떠난 군막사에서 생활할 정도로 아주 어려웠다고 한다. “전기도 끊어지고 물도 안들어오고, 유리창은 깨어져 있고, 거의 피난민과 같은 생활이었죠. 100가구, 200가구 … 엄청나게 많은데, 연해주는 엄청나게 추운 곳이잖아요. 이분들을 어떻게 도울수 있을까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재외동포사업부는 명칭을 동북아평화연대로 별도 단체를 만들어 지원활동을 펼쳐갔다. 김승력씨도 참여를 하였다. 그리고 2010년 10월까지 꼭 13년 동안 러시아에 살면서 고려인 돕기 활동을 펼쳐왔다. 그런데, 한국에 나와 다시 러시아로 들어가려고 하였지만, 러시아비자가 나오지 않아 못들어가고 한국에 눌러앉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김승력씨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도 러시아 비자를 받지 못하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러시아정부측에서 한국인들이 러시아땅에 들어와 고려인들을 한데 모아 집단을 이루게 하고 지원활동을 펼치는 것에 대해 경계를 하고 내린 조치로 보고 있다. “그 바람에 러시아에 모든 것을 두고 몸만 한국에 남게 되었죠, 어떻게 보면 오히려 잘 되었다. 이참에 다른 일을 하자, 이렇게 생각을 하였어요.” 러시아에서 13년간 고려인을 도와 온 그의 사역은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김승력씨는 러시아에 다시 못들어가게 되자, 강화도의 한적한 시골에 집까지 마련해 두고 그곳에서 글을 쓰며 보낼 참이었는데, 사업을 하는 고려인 친구의 통역을 도와주기 위해 안산에 와보게 되고는 한국에서 생활하는 고려인 동포들이 러시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렵게 생활하는 것을 보고는, 다시 고려인을 돕는 활동을 재개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어쩔수 없는 제 인생의 운명이라 생각했습니다.”김승력씨는 말한다. 그는 제일 먼저 고려인 동포들의 상황에 맞춰 땟골에 한글야학 교실을 열고, 상담소를 열고, 여기서 거의 생활하다시피 보내고 있다. 그가 만들어가는 공동체 이름은 『너머』이다. “국경 너머, 차별 너머”를 함축한 뜻이라고 한다. 또 상담소 이름도 별별상담소이다. “임금체불. 의료문제, 일자리 문제 등 별별 상담을 다 하다보니 별별상담소라고 정했는데, 또 생각해보니 동포들에게 희망을 주는 별 같은 공간이 되게 해야겠다 생각해 별별상담소라고 이름짓게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어떻게 유지해 나가느냐고 묻자. “일반인들이 십시일반으로 후원금을 내주어 유지해 가고 있다”고 말한다. 고려인 150주년을 맞이하여, 안산시에서도 고려인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국회 내에서도 고려인종합지원센터 설립 등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런 말들이 나오면 으레 여기 저기서 생색을 내며 달려드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마련이다. 15년 넘게 청춘을 바쳐가며 고려인 동포 지원활동을 해온 김승력씨의 노력이 헛되지 않게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 사람들
    2014-01-29
  • 조선족 민요가수 변영화 "스타킹" 전율시켜
    조선족 가수 변영화 씨가 18일 오후 방송된 SBS 예능프로그램 "놀라운 대회 스타킹"(이하 스타킹)에 출연해 놀라운 가창력을 자랑하며 멋진 무대를 보여줬다. 1월 18일 방송된 SBS "놀라운 대회 스타킹"(이하 "스타킹")에서는 조선족 민요가수 변영화가 출연해 새타령을 불렀다. 변영화는 자신만의 독특한 음색으로 새타령을 불렀으며 특히 고음 부분을 깔끔하게 처리해 MC들과 게스트들을 전율케 했다. 변영화 무대가 끝난 후 강호동과 게스트들은 소름끼친다는 감상평을 남겼다. 특히 리정은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올 수 있느냐"라며 변영화 노래실력에 놀라움을 표했다. 김종민과 레인보우 재경이 변영화 고음을 따라했으나 변영화만큼의 실력을 보이지 못해 웃음을 자아냈다. 이날 변영화 씨는 "스타킹"에 출연한 것에 대해 "많이 떨린다. 중국 친구들과 지인들은 "스타킹"을 굉장히 좋아한다. 강호동 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이렇게 만나게 돼서 영광"이라고 말했다. 이어 "김종민 씨도 성격이 좋은 걸로 유명하다"라고 강조해 웃음을 자아냈다. 변영화 씨는 중국무대에서 조선민족 민요를 널리 알리고 있다. 변영화 씨는 민요를 부르게 된 것에 대해 "11살 때부터 연변대학 예술학원에 입학해서 남도민요를 시작했다"라며 "할아버지, 할머니가 경상도 분이셨다. 할머니가 고향을 그리는 마음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면 민요를 해야 한다고 자주 말씀하셨다"라고 설명했다. <중국 중앙방송>
    • 사람들
    2014-01-23
  • [자랑스런 한국인]통역봉사 30년,기네스 인증 받은 기인 이해영
    한때는 누구도 거들떠보지않던 구두닦이가 일약 세계기네스의 인증을 받은 기인이 되었다면 누가 믿을까? 허나 30여년을 하루와 같이 통역봉사를 해오면서 놀라운 기적을 창조한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통역기인으로 이름난 이해영 선생(67). 일전 기자는 종로의 한 아늑한 빌딩 커피숍에서 그를 만나는 행운을 가지게 되었다. 30년전 미국의 한인들 축제 통역봉사 계기가 되어 “1956년에 한국은행 부지점장으로 있던 아버지가 일본에 발령이 되면서 저도 일본에 가게 되었는데 결국 일본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하였고 7년동안 열심히 공부해 일어와 독일어를 괜찮은 수준으로 장악하였습니다. 65년도엔는 한국에 돌아와 단국대학에 입학하였고 74년도에 영어를 더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갔지요.” 장기간 통역봉사를 하면서 연마한 자부심에서일까, 거의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자신의 지나간 경력을 말하는 이해영 선생의 목소리는 나이답지않게 창창했다. 그는 미국의 어느 한 한인들 축제에 통역을 해 달라는 초청이 있어 가게 되었느데 그날 미국의 상·하원 의원 및 주지사들의 통역을 서 처음 영어실력을 인정받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1988년 서울올림픽때 한국관광공사의 추천을 받아 정식 통역봉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그후 이 선생은 2002한·일월드컵, 대전 엑스포, 이천 도자기 축제, 세계태권도 대회, 베이징 올림픽대회 등 굵직한 행사에 통역봉사자로 나서 활약하였으며, 결국 대통령 표창장과 문화관광부장관 표창장까지 받는 영광을 안게되었다. 비록 현재는 세계의 인증을 받는 통역기인으로 되었지만 그는 한때 미국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화장실 청소, 잔디깎는 일, 지어 구두닦는 일까지도 마다하지않았던 고달픈 인생경력에 대해 술회하기도 하였다. 30여년간 3만여시간의 통역봉사 기록 보유 이해영 선생과 담화를 나누면서 가장 궁금한 점이 있었다. 자원 봉사자도 먹구 살아야하는데 수입이 없이 어떻게 사는가 하는것이였다. 이에 대한 이해영 선생의 답복은 자원봉사자라 할때 그어떤 수입도 있으면 안된다는것이였다. 단지 국가에서 주는 1만5000원이라는 실비라는게 있는데 돈이 적기에 리무진도 못탄다고 했다. 때로는 식사비로 일당 7000원 줄때가 있으나 사실 이 돈으로는 하루 3끼를 먹기에는 역부족이라 했다. 이 선생은 가정의 생계는 주로 부인이 하고 있어 눈물겹도록 고마울뿐이라고 했다. 요해한데 의하면 이해영 선생은 30여년간 통역봉사에 종사한 시간이 3만여시간에 달한다. 그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평균 하루에 3시간 이상 봉사한 셈이다. 이와같은 사실은 여러 재외공관과 해당부문 및 기네스사업본부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공식 인정 되었는데 그 조사 과정이 무려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한다. 이로하여 이선생은 동시통역봉사자로 세계최장최고시간 기록 보유자로 된것이다. “기네스의 인정을 받는다는게 어찌 쉬운일이겠습니까. 그동안 한번이라도 팁을 받았다거나 수입을 얻었다는게 드러나면 기네스의 인정을 받을 수 없는거지요.” 이해영 선생의 의미심장한 말이였다. 자원봉사자는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려야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되자,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자”는것이 이해영 선생의 좌우명이었다. 이러한 생활신조는 없는 사람을 도와주라는 할아버지의 유언으로부터 다진것이라 그는 덧붙혔다. 사실 3개국 이상의 언어로 동시통역할 수 있는 수준이면 호텔업이나 다른 전문업에 종사할 경우 300 아니면 500만원 지어 더 높은 급여를 받을 수 있는것만 사실이다. 허나 이 선생은 자신이 여직 봉사에 몰두할 수 있었던것은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릴 수 있었기때문이라고 말했다. 통역봉사는 국가에서 수요하고 사회가 필요하기에 자신은 자부감을 느낀다고 하였다. 통역봉사를 하면서 그가 이룩한 성과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대통령과 국가 유관부문으로부터 받은 표창장과 감사패, 훈장 등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2008년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을 비롯, 2차례나 대통령 취임식에 특별 초청되어 외국 귀빈을 안내하는 영광을 지니기도 했다. 현재는 경기도자원봉사센터 홍보대사로 있으면서 매일 남양주 몽골문화촌과 홍릉, 수원 화성 등 관광지에서 외국인들을 안내하고 있다. “인증”에서 “등재”를 위해 그는 오늘도 열심히 뛰고 있다 요즈음 겨울철에 접어들면서 이해영 선생은 3시간 이상의 봉사 시간을 완수하느라 바쁘다. 별로 큰 행사도 없고 추운 날씨에 관광객들도 얼마 없다. 그는 매일 봉사대상을 찾는라고 전화 20여통씩 건다고 했다. 어느 곳이든 단 1명의 외국인이라도 도움을 요청하면 곧 한밤중이든 새벽이든 달려간다고 했다. 성수기에는 눈코뜰새 없이 다망하여 끼니를 떼울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한다. 이에따라 그의 봉사 기록과 시간은 매일 누적된다. 날마다 새로운 기록이 갱신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세계기네스의 인증이지 등재는 아닙니다. 등재를 위해서는 더욱 많은 노력을 해야합니다. 저는 평생에 반드시 통역봉사분야의 기네스기록을 창조할것입니다. ‘인증’에서‘등재’로 바뀔날이 반드시 올것입니다.” 이해영 선생의 확신성 있는 다짐이다. 그는 아직 8∼10년은 문제없다면서 건강이 허락될까지 열심히 뛸것이라 말했다. /길림신문해외판 전춘봉 기자 quanchunfeng@yahoo.co.kr
    • 사람들
    2014-01-22
  • 영화계를 빛내고있는 조선족감독
    장률프로필: 영화감독, 1962년 생. 길림성 연변대학 중문학부 졸업. 주요 영화작품: “11세” (2000), “당시” (2004), “망종” (2005), “이리”(2007), “중경” (2008) 등.주요수상: 부산국제영화제,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페사로영화제, 베소울국제영화제, 시네마누보 필름페스티벌 등 다양한 국제영화제에서 수상. 제12회부산국제영화제에서 《뉴 커런츠상(아시아 신인작가상)》을 수상한 장편독립영화 《궤도》의 감독인 연변텔레비죤방송국 김광호이다.영화 “서서 자는 나무”(2부작)는 오늘날 중국 조선족 일반 시민의 일상을 다루면서 생명과 금전, 사랑을 주제로 도덕과 욕망사이, 사랑과 도덕의 갈림길에서의 현대인들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박준호감독:“력도산의 비밀”, “철인 왕진희” 등 영화를 제작 김혁:국제미니영화축제 최우수감독상 수상복건성장주시에서 열린 제1차금해협국제미니영화축제에서 조선족청년영화감독 김혁은 단편영화 《WHO ARE YOU》(你是谁)로 최우수감독상을 수상하였고 그의 작품은 최우수녀주연상까지 배출하여 또다시 중국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다."〈〉"(괄호들), "사신"(私信), 그림영화 "소마의 려행기"(小马旅行记) 등 3편의 작품이 2011년 할빈빙설제영화축제에서 "최우수시각효과단편상"(获得最佳视觉效果短片奖)을 수상,그중 "사신"(私信)은 제1차 미니영화제(首届微电影节)에서 "최우수공예단편상", "2011년도 최우수시대정신원창작영화상"(2011年度评选 "最具时代精神原创影片")을 수상하였다. "소마의 려행기"는 또 "맑스미래영상제"(玛克思未来影像节)에서 "미래정신상","최우수네트워크서비스류단편상"(最佳互联网服务类短片奖)을 수상하는 등 영예를 지녔다. 조선족 유명록가수 최건 감독 영화 특별상 받아 중국의 유명록가수 조선족 최건이 감독제작한 처녀작 영화 "남색 뼈"(蓝色骨头)가 지난 16일 막을 내린 제8회 로마국제영화제에서 특별추천상을 받았다.중국에서 유일하게 영화제에 참가해 수상한 "남색 뼈"는 최건이 처음으로 감독을 맡은 작품이라는데 그 의미가 크다. 영화의 내용도 음악과 관련되여 록음악을 좋아하는 남자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녀가수를 알게 되면서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서 우연히 부모들의 옛날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발견하게 되는것을 다루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점은 한 영화에서 4가지 풍격의 "남색 뼈" 노래를 들을수 있는것이다.<인민넷>
    • 사람들
    2014-01-18
  • [강북경제연구소 홍성남 ]나는 민생의 택시기사였다
    “아니 국회의원에 떨어졌다고 택시기사를 하신겁니까?“네. 2012년 강북 을 총선에서 실패한 후 낙선의 아픔과 민생 탐방, 두 마리 토끼를 잡은 후회없는 선택이었습니다.“강북경제 연구소 홍소장을 처음 인터뷰하면서 물은 기자의 질문에 호탕하게 웃는 그의 모습이 오히려 진지했다.“ 그럼 앞으로도 정치가의 길을 가려는 계획엔 변동 없나요?”“저는 우리 사회의 리더가 되시는 분들은 한번 꼭 택시 기사를 경험 하시길 추천합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보시면 더 국민들과 다가 갈수 있는 것처럼 익명성이 보장되는 한평의 택시 안 공간에서 주고받은 손님들과의 대화는 진정한 소통이자 심신의 고단한 체험이기에 서민들과 애환을 공유하고 파악하는 좋은 기회입니다.”마라톤으로 다져진 건강과 강인한 그의 눈빛에선 정객이라기 보다 자상한 아저씨 같은 따스한 인간미가 흘렀다.홍소장은 특히 앞으로도 서민들이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나라를 위해 미력하나마 헌신하고 싶다며 특히 중국에서 오신 수많은 동포들을 위해서도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많이 찾아 보는게 당연한 일 아니냐며 취재를 반겼다.한반도 선진화재단의 박세일 이사장님이 이끄시는 남산걷기대회에도 친지들과 함께 꼭 나와보라고 당부하는 홍소장은 언론인. 시인. 정치인 타이틀로 활동해 오는 동안 늘 사람의 인연을 강조해왔다고 한다.“갑오년은 혼돈의 시대입니다. 주변 광풍의 흐름을 바로잡아 선진통일과 선진조국을 이뤄내야 할 시기가 온 것입니다. 이 신문의 독자들이시며 이 땅에 오신 중국 동포들께서도 같이 관심을 가져주시면 고맙겠습니다.”앞으로 다른 계획은 없냐는 기자의 질문에 홍소장은 기다렸다는듯 “제가 이번에 책을 냅니다. 한번에 네권의 책을 집필하다보니 참 힘들었지만 보람도 있었습니다. 마치 제가 106일간의 택시 운전 민생 탐방을 한것과 같은 맥락으로 보시면 됩니다. 책을 통해 더 소통하고 싶었습니다.”그가 건네주는 초대장을 보니 네권의 책이 소개되어있다.*삼국지 영웅들의 인연,*인생과 관상*택시 운전과 정치*시집 장무상망.그중에 장무상망이 무슨 말이냐고 기자가 묻자 추사 김정희 선생의 세한도를 예로 들면서 가장 어렵고 힘들 때 함께 해준 사람이 진정한 벗이라는 의미라면서 동포 투데이 신문과 함께 하는 분들과 취재 기자에게도 늘 장무상망 하겠다며 출판기념회에 꼭 참석해주길 부탁했다.강북 경제연구소 홍성남 출판 기념회일시:2014년 2월 12일(수) 오후 3시~5시장소: 서울 컨벤션웨딩홀 2층(강북구 미아역 5번 출구)동포투데이 홍준표 기자
    • 사람들
    2014-01-16
  • [인터뷰]오복(치아)의 마술사 김태영 원장
    “어릴 때부터 병원가서 주사 맞는게 제일 싫었어요.” 의사가 된 계기가 궁굼해서 물어본 기자에게 주는 첫 답변이다. “그런데 왜 어떻게 실력있는 치과의사가 되셨나요?” 서울대 화학과 졸업후 대학원 석사과정 시절 고르지 못한 치아 교정을 위해 치과를 다니다 우연히 치과에 가지런히 진열된 치아 모델들을 보며 유난히 공작과 모형만들기를 좋아하던 어린시절이 떠올랐단다. 만약 자신이 직접 치아를 만들면 더 편하고 쓰기좋게 만들텐데 그런 생각이 들어 서울대 화학 석사 학위를 끝으로 다시 치과대학원에 입학 수석졸업과 동시에 치의학 석사학위를 따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지인의 추천으로 선배의사의 병원에 부원장으로 취임해 여러해 실무를 하면서 너무 많은 고객들이 독점적인 의료서비스를 원하게 되자 결국 독립하게 되어 개원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만들기 좋아하고 남달리 조각에 소질이 있던 김원장은 서울대 의대 가라고 권유받았지만 병원냄새랑 주사를 기피하던 트라우마 때문에 결국 중도에서 진로를 바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킨 유능한 여성이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는 다이아몬드를 가공하는 것처럼 더 세밀하고 정교해야 하는 치과의사야 말로 자신이 택한 최상의 선택이라며 아프고 힘든 분들에게 자신의 정성으로 맑고 행복한 웃음을 드릴 때가 의술인으로서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심미분야는 자신에게 가장 장점인 분야로 내꼽는다. 웃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려면 치아가 우선 가지런히 건강해 보여야한다는 얘기다.. 예부터 치아는 오복중에 으뜸으로 꼽았다. 그 오복을 자신이 익힌 의술로 무한 변신을 시켜주고 싶은게 포부라며 방긋 웃는 여의사의 미소가 상큼했다.. 특히 동포투데이 취재를 무한 영광으로 감사하다며 김원장은 옥수동의 선배 치과병원에 부원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중국 동포들과의 많은 치료 경험과 교류가 이런 귀한 인연이 될줄 몰랐다며 기뻐했다. “ 그분들중 의료보험이 안되시던 분들 때문에 원장님과 상의해 더욱 친절하게 잘해드린게 지금도 뿌듯해요.” 기자가 건네준 명함을 다시 보면서 감회에 젖는 김원장의은은한 입가에선 따뜻한 동포애가 잔잔하게 빛났다. “중국 동포들께서 2호선 주변에 많이 살고 계신다고 들었어요..저희 병원은 지하철 5호선, 9호선이 병목되는 여의도역 증권가 중심이기 때문에 오시기에도 편하실 거예요.” 어느새 찾아올지도 모를 치아환자들을 위한 친절한 교통안내를 하는 사이 대기실에 걸린 웃는 예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오시는 분들이 저 웃는 예수를 보시면 너무 마음이 편하고 하루가 즐거우시대요. 그래서 유명한 화가분의 작품을 위탁 전시하고 있답니다.” 아픔을 참고 찾아온 분들에게 웃음과 기쁨을 듬뿍 선사하는 치아의 마술사가 되고 싶었다는 김태영원장의 섬세하고 정밀한 치료에 반한 고객들이 먼 곳에서도 지인들까지 소개하여 데리고 올 때마다 미안해서 그 지역 가까운 치과병원을 권하기도 한다는 그런 마음의 의사였다. 끝으로 동포투데이 신문사 분들과 고국에 오신 수많은 중국 조선족 동포 여러분들께 지면을 빌어 새해 인사와 함께 그중에서도 오복인 치아 복을 축원드림을 전해달라고 당부하는 김태영원장. 그림이 있는 치과. 갤러리 바이 태는 그야말로 치아가 좋아야 건강할 수 있고 오복을 누리게 된다는 한국인의 속담과 더불어 동포 투데이 독자들에게 도움되는 상생관계가 될 것임을 기대해 본다. 동포투데이 홍준표 기자
    • 사람들
    2014-01-08
  • 조선족 과학자 김홍광 중국과학원 원사로 당선
    조선족 과학자 김홍광 연구원이 중국과학원 원사로 당선되였다. 중국과학원이 공포한 2013년 중국과학원 원사에 53명 중국적 과학자와 9명 외국적 과학자가 선정되였다. 중국과학원 공정열 물리연구소 조선족 과학자 김홍광이 중국과학원 기술과학부 원사로 당선되였다. 1957년생인 김홍광 원사는 중국과학원 공정열물리연구소 학술위원회 주임을 맡고 있다. 1998년 그는 중국과학원 “백인계획”에 입선되고 1999년에는 국가 걸출청년 기금상을 수상했으며, 국가 973 프로젝트 수석과학자로 선정되였다. 현재는 중국 공정열물리학회 부이사장 겸 비서장, 중국 동력자원연구회 상무이사, 중국과학기술협회 제8기 전원위원회 위원 등 사회직무를 력임하고 있다. 김홍광 원사는 에네르기 동력시스템과 CO2 통제 분야에서 세개 측면의 독창성 연구를 진행했다. 그는 연료화학 능제급 리용과 저에네르기CO2 포집원리를 규명하고CO2 포급에 관한 화학련 연소동력시스템을 독창적으로 제기했다. 이 학술성과는 관련 국제 최고학술회의인ASME IGTI의 최우수 논문으로 선정되였다. 김홍광 원사는 국가자연과학 2등상, 하량하리 과학기술진보상, 중국과학원 자연과학 2등상, 석유공업부 과학기술진보 1등상 등 수상경력을 가지고 있다.
    • 사람들
    2014-01-01
  • 조룡남, 중한 서화명가 2014년 달력에 올라
    중국조선족 원로시인 조룡남선생이 북경예도묵향서화원(北京艺都墨香书画院)이 펴낸 중한 서화명가 2014년 소장달력 국제판(中韩书画名家2014典藏年历国际版)에 올랐다. 북경예도묵향서화원은 《중한 수교 21돐을 맞아 중국문화의 정수인 서화예술을 아세아주와 세계 예술시장에 널리 수출하는것은 중국문화계승자들의 미루어버릴수 없는 책임》이라고 달력출판경위를 밝혔다. 이와 함께 중한 문화교류를 추진할데 대한 한국예술계 인사들의 강렬한 념원에 호응하기 위해 특별히 2014년 새해를 맞으면서 중한 량국의 헌례특집인 중한 서화명가 2014년 소장달력 국제판을 만들게 되였다고 소개했다. 2014년 소장달력 국제판에는 조룡남시인의 문화략력과 함께 선생이 룡정비암산 반디불시비에 남긴《산석에 정이 있게 되는 날은 반디불의 불빛은 꺼짐이 없으리》(山石有情日 萤火无尽时)라는 정품시구서체, 출간저서, 시비(诗碑) 등이 소개되였다. 달력에는 조룡남시인외에도 중국서예가협회 명예주석이며 중국미술출판총사 편심인 심붕과 저명한 국화가인 류대위의 서화작품 및 재미 한국인 화가인 박성삼의 서화창작품들이 소개되였다. 이에 앞서 조룡남시인은 2013년에도 중국문화예술협회와 세계다원화연구회에서 주최한 2013년력인물 중국저명문예가에 선정되여 노벨상 수상자 막언과 함께 달력에 오르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조룡남시인의 10여수의 시작품들은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출판한 중소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였으며 시인은 길림성인민정부의 《장백산》 문예상 3차, 전국소수민족문학상 2차, 한국미래문학해외동포문학상, 카나다민초해외문학상 대상 등 다수의 수상경력이 있는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문화인물이다.<길림신문>
    • 사람들
    2013-12-25
  • "희망의 전도사가 되고 싶습니다”
    [동포투데이]홍준표 기자= 9년간 잠도 제대로 못자고 아파도이를 악물어가며 번 큰돈을 투자 잘못으로 한 번에 날리고도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선 인동초 같은 여자가 있다. 삼십대 초에 이혼한 후 6세 어린 딸을 남에게 맡겨둔채애랑 먹고 살기 위해분식점부터 시작해 갖은 고초를 겪어가며 돈을 모았다고 한다. 그런데 아구악착같이 그렇게 모은 돈은 조금 편하게 살아보자고투자한 것이 잘못되어한방에 날려버리고 다시 알거지 신세에서 모든 희망이 사라지자 빈털터리로절망의 늪에 빠져 자포자기 했던 때가 엊그제 꿈만 같다고 한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교통사고까지 당하자 그 포기마저 힘들게 된 병실에 위로차 찾아온 동네 이웃분의 소개로 반신 반의 시작한 화장품 컨설팅. 목발에 의지한채 샘플을 들고 찾아간 상가의 미용실 원장님을 시작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그녀는 지금도 사람이 일어나는 법을 배우기 위해 하늘은 넘어지고 다침을 주신다고 믿는다고 한다. 암담하던 당시 목발에 절뚝이는 몸으로 어디로 갈지 몰라 헤매던 일년 전 첫날을 기억하면 눈물부터 앞선다지만 지금은 회사의 제복아래 당당한 수입으로 머지않아 딸과 함께 이루어 갈 멋진 꿈에 부푼 케리어 우먼으로 변신했다. 그렇다면무엇이 그녀를 절망에서 희망의 전도사로 바꾸게 해준 것일까. 그것은 바로 메리케이라는 미국 화장품 회사를 만난 인연이라고 한다. 창업주인 메리케이 애시님께서 50년 전 설립해 가난하고 힘없는 전 세계의 여성들에게 경제적 자립기반을 주어 모두들 부자답게 살게 하겠다는 의지로 세우신 세계굴지의 대회사. 지금 37개국 여성들이 그 혜택 속에 살아간다. 한번 들어오면 도로 나가는 여성이 없을 정도로 국내에서도 일하기 좋은 10대 기업에 뽑힌 메리케이의 장점은 무엇일까. 바로 높은 보상과 낮은 자격유지. 게다가 변함없는 세계 최고의 품질로 한번 써본 이는 다시 찾고 또 찾게되는재구매라고 단언한다. “메리케이를 안만났다면 저와 제 딸은 지금쯤 고향 시골집에 내려가 아주 힘든 삶속에 살고 있을 거예요..하지만 이제 차도 사고 꿈도 생기고 앞으로는어려운 여성 분들에게 희망의 전도사가 되고 싶습니다.” 활짝 웃으며 인터뷰에 임하는 김영희씨의 말이다. “한국에 기회를 찾아 오신 수많은 동포 여성들에게도 기회를 드리고 싶습니다. 더구나 동포투데이는 중국동포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신다고 들었던 터라 제게는 큰 영광입니다. 고국 실정을 잘 모르시는 동포 여성들께 많은 힘이 되어드리고 싶습니다.“ 가진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돈이란필수 영양소이다. 특히 자아를 찾아 가며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있어서 경제적 자립은 더욱 중요한 안전망 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인터뷰에 응해주신 김영희씨가 꺼내보인 자신의 과거와 현재는 남들에게 포장되어 보이려는 허구가 아니라 역경을 극복하고 성공의 보금자리로 달려가는 희망전도사로서 한국에 오신 동포 여성들에게 드리는 최고의 선물일 것이다.
    • 사람들
    2013-12-22
  • 20대 100만 장자…게으른 부자는 없다
    2009년, 연변공업학교 자동차전업을 졸업한후 이학철씨(25세)는 고향에 돌아와 전문농장을 경영하면서 자신의 인생가치를 실현하고있다. “외국에 일하러 가든 외지로 일하러 가든 모두 돈을 벌기 위한것입니다. 사실 외지에 나가서도 돈을 벌수 있겠지만 돈을 버는 길은 꼭 한갈래 길만 있는것이 아닙니다. 무슨 업종에 종사하든간에 사업에 대한 애착을 갖고 부지런히 일하면 꼭 성공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화룡시 팔가자진 룡산촌에서 룡두산 학복농작물 재배전문농장을 경영하고있는 이학철씨의 얘기이다. “연변공업학교를 졸업한후 많은 동학들이 외지에 돈벌러 나갔지만 저는 직접 고향에 돌아와 전문농장을 꾸리게 되였습니다. 사실 아르바이트하면서 돈을 벌수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밑에서 눈치밥을 많이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부의 농업혜택정책에 힘을 얻고 전문농장의 길을 걷게 되였는데 독립적으로 사업을 전개하니 마음이 더욱 편합니다. 또 전문농장수입도 외지에서 일하는 사람 못지 않게 창출할수 있어 무척 긍지감을 느낍니다”고 이학철씨는 털어놓았다. 원래 전문농장을 경영하기전에 리학철이네는 10헥타르 정도의 밭을 부치는데 불과했고 자그마한 가공공장 한개를 운영했다. 하지만 2010년에 자연재해를 입으면서 촌에는 밭을 버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 한국출국바람이 불면서 많은 촌민들이 한국에 나가는바람에 가공공장은 더 이상 운영할수 없게 되였다. 하지만 이는 전문농장을 건설하는 기회로 되였다. 연변공업학교를 졸업한후 농업국에서 주최하는 각종 양성반에 수차례 참가했고 국가의 해당 혜농정책에 대해 깊이 요해했던 이학철씨는 전문농장을 경영하기로 결심하고 2010년부터 다른 사람의 경작지를 도급맡고 본격적으로 전문농장을 꾸려나갔다. 전문농장을 경영하며 부단히 짭짤한 수입을 창출함에 따라 그는 전문농장규모를 점점 확대해나갔다. 목전 그의 전문농장 수한전재배면적은 96헥타르에 달하고 일간 10톤을 가공할수 있는 쌀가공공장도 갖춘 상황이다. 이외 크고작은 농기계도 구전히 갖추고있다. 이학철씨는 “올해 농사가 지난해보다 매우 잘되여 순수입 70만원을 창출할 전망입니다. 금후 농장규모가 커짐에 따라 기계투입과 기초시설투입을 더욱 늘이고 기타 산업도 시작하여 다각화경영도 할 타산입니다”고 밝혔다. 목전 연변소산업을 시작하려 준비중인 그는 이미 15만원을 투자하여 400평방메터되는 소우리를 건설한 상황이다. 4년간 전문농장을 설립해 20대 100만 부자로 성장한 이학철씨는 “당시 전문농장을 금방 시작할 때에는 사실 저의 학업에 모든 심혈을 기울이고 힘겹게 농사일을 하며 고생하는 부모님을 도우려고 시작한것이였지만 현재 전문농장규모가 이렇게 커질줄은 전혀 생각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친구들의 주목을 크게 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친구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있습니다. 또 예전에는 농사일에 대해 모르는것이 많았지만 전문농장을 꾸리면서 농사일에도 더욱 익숙해졌고 농장규모가 커짐에 따라 성취감도 더욱 큽니다.”고 소감을 털어놓았다.
    • 사람들
    2013-12-04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