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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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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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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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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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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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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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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도시들의 공동 난제- 주차의 어려움(3)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현재 외국에서는 주차장이 일종 산업으로 부상해 주차장을 건설하는 것은 돈을 버는 장사에 못지 않고 있다. 하지만 중국내에서는 투자를 해도 그만큼 비율의 수입을 창출할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주차장 건설은 흥성할 수가 없게 되고 있다. 2006년 광주시에서는 단기간의 건설계획(2006-2010년)에 관한 중대사항을 시인대에서 심의, 2010년까지 해마다 5개씩, 25개의 공공주차장을 더 건설하여 전 시내에 도합 5290개의 주차자리를 더 늘이기로 하였다. 하지만 2006년에 5개 곳을 선정한 후 그 이듬해부터 더는 공공주차장의 지점과 건설에 대한 해당 정보가 없었으며 그 5개의 공공주차장 역시 건설한다고 선정만 해놓고 아직까지 착공하지도 않고 있는 상황이다. “주차장을 건설하자면 원가가 많이 들고 수익효과가 낮기에 주차장건설에 적극성이 없는 것이다. 새로 건설되는 주차장이 없으니 주차의 어려움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는 북경시 인대대표이며 시 교통발전연구센터의 곽계부의 지적이다. 지난 정월 초닷새날, 이 날은 북경시민 반선생한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이 날 그는 자가용을 몰고 동4환의 한 상가를 찾아 물건을 사려하다가 상가가 있는 거리 입구에서 차가 막혀 한 시간 이상 기다려서야 겨우 물건을 살 수가 있었다. 이에 “그 상가를 다시 찾아가도 자가용을 몰 것인가?” 라는 물음에 반선생은 쓴 웃음을 지으며 “그래도 차를 몰고 가는 것이 낫다”면서 물건을 사면 주차비를 감면받을 수 있다고 했다. 북경시 교통발전연구센터 주임 곽계부에 따르면 현재 북경시의 많은 시민들은 집문만 나서면 크고 작은 일에도 자가용을 몰고 가는 습관이 있는바 중요한 원인은 그래도 자가용을 몰고 나가면 돈이 적게 들기 때문이다. 북경시 교통발전연구센터의 조사데이터에 따르면 2005년 북경시 시민들의 73%가 자가용을 몰고 나가도 주차비를 물지 않았고 2010년에는 무료주차 비율이 86%에까지 달했다고 한다. 현재 중국 도시들의 상황을 보면 상가에 가서 물건을 사거나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 무료주차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는 상가거나 식당의 주인이 마음이 고와서라기보다는 고객을 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아울러 이런 상가의 물건과 식당의 료리는 보편적으로 값이 바싸기 마련이었다. 주차를 무료로 하는가 아니면 수금해야 하는가? 이를 놓고 절대 대부분 사람들이 무료주차를 희망한다. 하지만 조사연구에 따르면 진정한 무료주차는 존재하지 않았거니와 존재할 수가 없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주차수금료가 비싸면 돈이 많은 사람한테만 편리를 주게 된다면서 질의를 표한다. 이는 일정 정도에서는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돈많은 사람은 5성급 호텔에서 식사하고 돈이 적은 사람은 길가의 음식점에서 식사하며, 돈 많은 사람은 별장에서 살고 돈이 적은 사람은 셋집에서 산다”는 이론과 마찬가지로 주차문제 역시 절대적 공정이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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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09
  • 조선족을 선족이라 약칭해서는 안돼
    [동포투데이] 일부 한족들은 일상생활에서 조선족을 “선족(鲜族)”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서류자료, 기관공문, 신문잡지, TV프로에서도 “선족(鲜族)”이라는 두 글자가 빈번히 나타나며 일부 조선족음식점의 간판도 “선족음식점(鲜族餐厅)” 으로 표기되여 있는가 하면 일부조선족도 스스로 "我是鲜族人" (나는 선족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기도 하는데 이는 우리 민족의 굴욕적인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다.그 역사를 돌이켜보면 1910년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은 우리 삼천리 금수강산을 강점하고 급급히 우리 민족을 말살하여 완전히 일본인과 동화시키려 시도했다. 그러면서 일제는 “내선융합”, “내선일치(内鲜一体)”와 “내선여일” 등 주장의 식민화한 정책으로 일본과의 합병을 감행하였는데 여기서 “내”는 일본을 가리키고, “선”은 당시 조선을 가리켰던 것이다. 또한 일어에서 “태양”을 나타내는 “조(朝)”라는 신성한 글자를 조선사람들이 쓸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 일제는 또 우리 민족의 이름과 말 대신 전적으로 일본이름에 일본말까지 쓰는 법을 제정하여 억압했는데 이때부터 우리 삼천리 강산은 완전히 일본의 한개 성으로, 또 우리 부형들은 “선족”으로 되였던 것이다. 그후 일제는 또 중국을 침략하고 일본인은 1등민족, 선족은 2등민족으로 제정해 3등민족인 한족과 조선족 사이에 민족 리간을 시키기도 했는바 당시 중국인들은 조선족을 꺼려하고 심지어 “얼꾸이즈(二鬼子-둘째 일본악귀)”라고 욕설까지 하였다.때문에 “선족”이란 절대 조선족의 약칭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제강도들이 우리 민족에게 들씌운 기시와 오멸, 치욕과 탄압의 낙인이 찍힌 대명사이다. “선족”의 유래가 이러할진데 우리는 어찌 스스로 자신을 “선족”이라고 부르겠는가?사실 중국정부는 일찍 1951년에 소수민족의 이름과 그 부름에 대하여 정령을 발포해 함부로 시기, 오멸하는 뜻이나 그 작법을 엄금하도록 하였고 또 소수민족 약칭은 그 민족의 첫 글자를 쓰도록 규정했다. 례를 들어 몽골족은 몽족(蒙族), 위글족은 위족(维族)으로 한어로 약칭한다. 그러므로 우리 조선족의 약칭은 마땅히 조족(朝族)이라야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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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08
  • 충격! 70여만종의 약 최저가 공장가격의 5~6배?(4)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현재 중국에서 외지에서의 진료비결재에 대한 문제가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으로 호북성에서는 이미 전 성내적으로 외지진료비 결재가 실행되고 있으며 이는 현재 전국적으로도 점차 해결하고 있는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외지진료에 대한 결재란 바로 B지역의 환자가 A지역에서 진료를 받은 뒤 그 지역에서 결재를 받는 것을 가르킨다. 이는 전자화를 통해 진료비가 결재되는 것으로 여러 방면으로 환자의 부담을 덜어주는 좋은 현상으로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각 지역마다에 따르는 정책차이와 가격의 차이가 존재하는 문제도 생길 수밖에 없다. 북경사람인 장전진은 사업관계로 외지에 체류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해 말, 그는 외지에 있는 사업지에서 2차례에 달하는 수술을 하면서 도합 4.6만위안의 자기의 돈을 먼저 쓰게 되었다. 그 뒤 그는 체류지의 의료보험부문으로부터 근근히 1.8만위안만 결제받게 되었다. 이는 지불된 치료비의 40%밖에 되지 않았다. 처음에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달통되지 않았다. 정맥주사, 대소변 화험 등 일련의 가장 기본적인 의료비용이 결제범위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후에 그는 북경시 사회보험국을 통해 북경시의 진료검사비가 전국에서 비교적 낮은 편이었다. 요해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의 많은 지역들에서 진료비수금표준을 조정, 북경시가 가장 낮은 편이었다. 때문에 외지의 진료수금비가 북경보다 높은 현상이 산생, 적어서는 수십위안의 차이가 나고 많게는 수백위안에 달하기도 한다. 당시 장전진이 외지에서 10여 일 간 입원해 있으면서 2차례의 수술을 받았는데 6장의 결제명세서가 나왔다. 당시 그의 결제명세서를 보면 보편적으로 자비부담 부분이 북경의 표준을 크게 초과하고 있었다. 이 외 이런 외지에서의 의료보험은 치료지역과 의료보험 참가지역의 목록범위가 일치하지 못한 폐단이 존재한다. 즉 의료보험지역에서 결제목록에 넣은 약이 치료지역에서는 결제목록에 들어가지 못하는 폐단으로서 많은 약들이 자비목록에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다음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은 당지인과 외지인에 대한 의료부문의 정책이다. 예하면 병을 보일 때 당지인은 먼저 의료보험카드를 내놓으면 치료가 가능하나 외지의 환자는 당지의 의료보험 카드가 없기에 먼저 자기의 돈을 지불하고 치료를 받은 뒤 나중에 결제받도록 되어 있다. 병원들에서는 이런 환자를 “현금환자”라고 부른다. 현재 의료보험부문들에서는 대부분 병원에 대한 의료보험 비용액의 정액관리를 하는 동시에 자비비율에 대한 제한관리를 하고 있다. 하지만 외지의 의료보험인원 및 공비의료인원은 병원의 의료보험정액지표를 점하지 않기에 흔히 외지 의료기구들의 “환영”을 가장 받고 있고 있는 상황이다. 왜냐하면 이런 외지환자들의 자비치료비율이 크게 높기 때문이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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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06
  • [기획]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2)
    ■김철균 이틑날 필자는 아들과 함께 서울시 금천구 시흥대로 147-1에 있는 동포투데이 신문사 사무실을 찾았다. 아들과 동행한 것은 서울의 교통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GK희망공동체 허을진 이사장님과 동포투데이 정경화 대표님이 반겨 맞아 주었다. 우리는 1년이 넘도록 교류하면서 사진을 통해 상대방의 얼굴을 익숙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무릎을 마주해 보기는 진짜 처음이었다. 두 분은 친절하고도 노력하는 분들이었다. 특히 GK 허을진 이사장은 10여년 전부터 중국조선족 대모임인 GK희망공동체를 운영해 왔고 현재는 동포투데이 대표이며 아내인 정경화 여사와 함께 이 인터넷신문의 편집과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었다. 한국에 진출한 중국조선족 중 언론방면에서는 기틀을 잡아가는 신문/간행물이라는 느낌이었다. 현재 (사) GK희망공동체는 수 천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으며 허을진 이사장이 정경화 여사와 함께 운영하는 동포투데이는 2011년 10월 2일 준비판을 낸 뒤 10월 24일 정식으로 개통된 종합성 뉴스 사이트로서 재외동포, 국제뉴스와 동북아 정세에 초점을 맞추면서 자율적이면서도 창의적인 네트워크 방식에 의해 운영되는 인터넷 언론사였다. 동포투데이는 한국 현지와 중국 등지에 특파기구를 두고 운영되고 있었으며 자체 기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언론사이기도 했다. 이 날 필자와 허을진 이사장 내외는 우리 한인언론인들의 사명을 두고 많은 교류를 가지었다. 물론 처음 만나는 장소라 술이 없을 수 없었고 애주가라고는 할 수 없어도 무척 술을 즐기는 필자가 어느 정도 더 마시기 마련이었다. 동포투데이 사무실에서 나온 필자는 아들과 함께 재차 아들이 운영하는 사무실로 갔다. 아들한테 급히 처리할 사항이 있어서였다. 헌데 필자가 문제었던 것이다. 아들은 사무실을 떠나면서 자기가 올 때까지 잠이나 자면서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헌데 한잠을 자고 나자 무료하기 그지 없었다. 여느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필자의 아들도 방에 전화를 설치하지 않은지라 아들이 언제 돌아오느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어디에 문의하려 해도 이 날(27일)은 마침 일요일이라 빌딩 10층내의 사무실들은 모두 문이 잠겨져 있었다. 한편 여느 젊은 이들과는 다르게 바삐 보내는 아들한테 이 아버지로서 짐이 되는 것이 미안했다. 아들은 밤 8시경에 돌아왔다. 아들은 아버지한테 “감옥생활”을 시켜 미안하다면서 도리어 사과했다. 뒤이어 나와 아들은 택시에 앉아 서울시 강동구 천호동에 있는 한 양고기꼬치영업집으로 갔다. 아들의 집이 그 근처에 있기 때문이었다. 아들은 휴대폰으로 4~5명의 친구들을 더 불러들였다. 이 중 3명은 한국의 젊은이들이었으며 모두 아들의 수하에서 업무를 하는 친구들이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필자한테 “아버님, 아버님” 하며 깍듯이 대했다. 한국 젊은이들의 예의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 날 아들은 휴대폰 한 대를 얻어와 필자한테 주는 것이었다. 휴대폰이 생기자 필자는 “자유의 몸”으로 되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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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03
  • 남북화해와 우리 한민족, 언론인들의 사명
    ■ 철 민 이번에 한국 서울에서 열린 2015 세계한인언론인대회에 참가하고 보니 감수가 깊었다. 세계 여러 나라와 지역에 널려 살면서도 각종 어려움과 제약성을 받으면서도 한국과 우리 민족을 세계에 알리고 있는 한민족언론인들, 그들을 통해 배운 것이 많았고 또한 그들을 통해 세계에 대해 더 깊이 알 수 있게 되었다. 유감스러운 것도 있었다. 한민족 언론인이라 할 때, 마땅히 평양의 언론인들도 참가했어야 하겠건만 이런 장소에서 평양 언론인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 모임에 참가한 언론인들 중 알게 모르게 남북화해에 이롭지 못한 언사가 있는 것 같았다. 하다면 본문에서는 “남북화해와 한민족 언론인들의 사명”이란 제목으로 좀 말해보련다. 언론사나 언론인이라 하면 정부와 협력하고 정부를 도와 나라의 경제 및 문화 발전을 추동해 나가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언론인을 “당의 후설(后舌)”이라고 한다. “당의 후설”이라 수긍이 가는 표현이다. 특히 중국은 여러 당의 참여하에 공산당이 정치와 기타 분야를 주도하는지라 민주와 집중을 조화롭게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심이 있어야 한다는 원칙 하에서 그렇다고 설명이 된다. 하지만 중국 역시 한시기 과도하게 이를 강조한 시대가 있었다. 즉 좌적 경향이 창궐하던 시기에 당이 노선적으로 착오를 범할 때 언론인들도 이 착오노선의 “로봇”이 된 것이다. 사례로 지난 세기 50연대 말경, 이른바 “대약진” 운동을 벌이던 그 시대엔 벼 낱가리에 올라앉아 해에 담뱃불을 붙이는 미술작품이 있었는데 머리가 조금이라도 냉철한 사람이라면 이런 그림을 그릴 수도 없거니와 이를 언론지에 발표할 수도 없다는 건 아주 당연한 것이다. 이는 중국의 사정이니까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을련다. 오늘의 주제는 한반도 남북의 언론인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선 한반도 남과 북의 국호를 놓고 말하련다. 한반도의 남과 북, 북과 남은 유엔에 등록된 국호가 분명 있는 것이다. 지난 세기 말엽 남북이 공동으로 유엔에 가입할 때 한국은 “대한민국”으로 조선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등록이 되었으며 당시 유엔대회에 참가한 노태우 대통령은 분명 “이 북의 형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유엔에 참가한 것에 대해 열렬한 축하를 보낸다”고 밝히었다. 이는 이 북의 주권에 대한 한국의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그리고 2000년 당시 김대중 전 한국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할 때 상호 서명한 공동성명에도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으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로 기재되어 있다. 헌데 유감스럽게도 남과 북은 유엔에 등록된 국호대로 서로 불러주지 않는다. 이른바 자기들이 만들어낸 이름 “북한” 혹은 “남조선”이라 부른다. 이는 서로가 상대의 자존심을 짓밟는 언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놓고 어느 한 한국의 국민이나 이 북의 인민의 입에서 나온다면 그런대로 이해하겠으나 정부의 고위관원들한테서 쏟아져 나오고 언론사들 또한 그대로 표현한다. 이는 남이나 북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한국이 사정을 놓고 보면 중국 대륙도 나라요, 홍콩이나 대만도 나라요 표기할 때가 많다. 이는 한중 수교 시 언급된 것으로서 당시의 한중공동성명에서는 분명 한국이 대만이 중국을 대표할 수 없다는 것이 천명되었었다. 현재 중국에서는 대륙, 대만 이렇게는 될 수 있으나 대만이 절대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국 언론사들의 이러한 표기에 대해 중국이 결코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냥 모르는 척 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이 대국이고 너그럽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만약 이를 놓고 중국정부가 한국정부에 항의한다면 한국정부만이 난처한 것이다. 그 외 방송사라 할 때 억양에 따라 상대방의 기분이 180도로 달라질 때가 있다. 1979년 10월 당시 박정희 한국대통령이 김재규가 쏜 총에 맞아 조난당하자 평양방송은 “박정희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기사를 방송, 아나운서의 억양이 아주 흥분되었으며 어딘가 통쾌해하는 듯한 어조였다. 김재규가 박대통령을 총으로 쏜 것은 테러나 암살에 가까운 범죄행위인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이는 테러나 암살 행위는 자본주의 체제나 사회주의 체제나를 막론하고 공동히 반대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애석해 하지는 못할망정 기뻐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하긴 조선의 체제상 어떤 제약성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런 기사를 작성하고 방송한 당사자는 분명 언론인이었던 것이다. 현재 중국의 언론은 제약성이 많고 부족 점과 일부 폐단도 있다. 하지만 중국의 언론은 한반도의 남과 북을 똑 같이 존중한다. 남은 “한국”이라 불러주고 북은 “조선”이라 불러준다. 그리고 중국의 기분에 나쁜 보도를 할 때에도 이 원칙만은 변함이 없다. 이렇게 외국 언론인들이 인정하는 남 혹은 북의 국호를 한반도 남북의 언론인들은 왜 그대로 불러주지 못하는지 이해하기 진짜 어렵다. 언제인가 금강산에서 한국 KBS와 조선중앙 TV가 공동으로 “열린 음악회”를 펼친 적이 있었다. 당시 KBS의 사회자는 “남과 북”, “북과 남”하고 상대방의 자손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분위기를 잘 잡아간 것으로 알고 있다. 상대방의 국호를 제대로 불러주지 않았지만 필경 화해와 통일을 시도하는 것으로서 보는 이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하다면 이런 시도가 지속된다면 경제와 문화의 교류를 포함한 남북관계에 물코가 트이면서 나중에는 통일이란 민족대업도 가능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다. 하긴 그 기간 천안함 침몰사건, 연평도 포격사건 및 탈북자들의 대북 전단 살포 등 불쾌한 사건들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화해와 교류와 협력을 위한 시도와 노력만은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인정된다. 통일은 남과 북이 모든 원하는 일이다. 진짜 이를 원한다면 상대방을 헐뜯고 상대방이 자존심이 상하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함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통일은 먼 앞날의 일일 수도 있다. 현재 남과 북의 앞에 놓인 과제는 통일보다는 화해를 통해 그동안 막혀버렸던 모든 교류를 회복하고 서로 마주 보며 손을 잡는 일이다. 이렇다고 할 때 상대방을 존중해야 함은 더욱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 앞장에는 우리 언론인들이 앞장서고 여론 선도를 잘 해야 할 것이다. * 외부 기고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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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03
  • [기획] 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 (1)
    ■ 김철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라랑 고개를 넘어간다 … 이는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세계적인 명곡이다, 또한 사상과 이념을 떠나 8000 우리 민족이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이기도 하다. 2015년 4월 25일, 필자를 싣고 중국 연길공항을 이륙한 아시아나 z352 항공편은 요녕반도의 대련쪽까지 날다가 다시 기수를 황해(서해)로 돌리었다. 필자가 한국행을 하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 아니다. 지난 세기 90연대 초, 마도로스로 한국 선일해운의 송출선을 타고 선후로 부산, 울산, 인천에 상륙하여 ˝아시아의 4마리 용˚중의 하나였던 한국의 모습을 구경하기도 했었다. 그러니 이번의 한국방문은 20여년만에 다시 찾게 된 코리아이기도 했다. 한국속의 조선족 인천공항에서 내리자 공항의 규모에 재차 놀랐다. 공항규모가 무지무지 하게 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깨끗했으며 공항직원들은 한결같이 친절했다. 동행을 했던 연변일보 논설부 박정일 부장도 동감이었다. 우리는 공항버스에 올라 서울로 향했다. 경인고속도로를 따라 서울로 오는 동안 화창한 봄속에서 약동하는 한국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인천으로부터 서울로 들어가는 버스에 올라 보는지라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한강다리를 건너면서 63빌딩을 볼 수 있었고 이어 한국 KBS방송국의 본관건물, 서울역 및 서울시청 등 낯익은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우리가 내린 곳은 명동이었다. 명동에서 내리자 박정일씨의 4촌형이란 분이 마중을 나와있었다. 명동은 서울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특히 아까 명동에서 내릴 때 많은 중국인 여행객들이 내리었고 명동 골목에 들어서니 사처로부터 귀에 익은 중국말들이 들이었다. 화장품 가게를 찾는 사람들과 “싸구려¨를 부르는 목소리 중 자주 중국말들이 들리어 인상적이었다. 이어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박정일씨의 4촌 형이 운영하는 부대찌개집 “송탄¨이었다. 한국의 연예인인 강호동씨가 추천한다는 식당이었으며 명동에서도 중심에 위치해있었다. “송탄¨에 들어서자 몇개의 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손님들이 보이었는데 박정일씨의 4촌 형에 따르면 이 날은 일요일이기에 손님이 적으며 평소에는 손님들이 꽉 찬다는 것이었다. 또한 줄을 서서 남들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부대찌개집 “송탄¨에서 한참 있을라니 서울에서 생활한다는 박정일씨의 친구 4명이 선후로 들이닥치었다. 우리는 술을 마시며 삼겹살을 구워먹기 시작하였다. 서울에서 고향분들을 만나 함께 술을 마시니 감개가 무량했다. 한참 뒤 서울에서 사업하는 나의 아들이 연락을 받고 달려왔다. 나의 아들은 서울에서 액세서리 장사를 하고 있었고 며느리는 화장품 장사를 하고 있었다. 박정일씨의 친구들은 나의 아들을 반겨맞아 주었다. … 식사가 끝나자 우리는 서로 갈라지었다. 박정일씨는 자기의 친구들과 함께 다른 곳 으로 향했고 나는 아들과 함께 아들이 차린 사무실을 구경하기로 하였다. 아들이 차린 사무실은 서울 남대문 근처에 있는 삼신빌딩 10층에 있는 10호였다. 그러니 1010호인 셈이었다. 아들한테 절로 감탄이 갔다. 나의 아들은 올해 33살이다. 사실 아들은 공부를 많이 못했었다. 17살에 사회를 나와 를 나와 여러번 사고를 쳐 나로 하여금 무척 속을 썩이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20살 좌우부터 셈이 들자 더는 나로 하여금 속타게 하는 일이 없었다. 절강 의오에서 힘든 한국회사생활을 견디어 냈으며 몇년 전부터 한국에 진출해서는 스스로자아창업에 나섰던 것이다. 이런 아들이 있음으로 하여 나는 몰래 자호감이 생겼다. 하지만 아들은 첫시작에 불과했다. 명동에서 생활하는 박정일씨의 4촌 형을 비롯해 한국에는 사업에서 성공한 조선족이 많았다. 특히 서울에는 성공한 조선족들이 많다고 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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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01
  • 21세기는 한글 시대, 한류 문화의 시대
    ■김종택(한글학회 회장) 글자는 단순히 말을 적는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문화를 창조하고 경제를 창조하고 정치를 창조하는 무서운 힘이 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가 나라가 커서, 인구가 많아서 세계 문명을 주도한 것이 아니다. 고대이집트 상형문자에서 발전한 최초의 온전한 소리글자인 희랍문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문자로 소크라테스 ,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을 논하고 정치학,수사학을 하면서 세계 문명을 주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문자가 도시국가 라티움에 들어가 로마자로 정비되었기 때문에 중세 천년 로마대제국을 건설 할 수 있었고 이글자를 북해의 작은 섬나라가 받아들였기 때문에 대영제국을 건설하면서 근세이래 세계문명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글자의 힘을 교육의 힘이 되고 정치 경제의 힘이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한국인은 한국어로 말하고 듣고 한글로 쓰인 글을 읽고 쓸 수 있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 같지만 이것처럼 놀라운 사실은 없다. 온 세상에서 자기 나라말과 글을 자연 스럽게 알아듣고 자연스럽게 쓰고 읽을 수 있는 국민은 우리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것은 광복 이후 한글이 나라 글자의 구실을 하고부터이니 우리에게도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이런 한글의 힘, 교육의 힘이 바탕이 되어 오늘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적·문화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눈을 돌려 생각해 보자. 우리에게는 거저 주어지다시피 한 그 국어 능력을 얻기 위하여 중국인은 평생을 바쳐 노력하고 있다. 한자가 어렵다고 간자체를 만들어 쓰고 있지만 옳은 소리글자가 아니므로 있는 어휘의 수만큼 글자를 배워야 한다. 초증학교에서 2,500자를 배우고 중학교에서 1,000자를 더 배워도 신문은 커념 주변의 안내 표지판도 제대로 읽을 수 없다. 교양인으로 살려면 최소 5,000자는 배워야 하는데, 그것이 어찌 만만한 일인가. 반복학습을 하지 않으면 잊기 마련이니 그들은 평생을 글자 공부를 하면서 살아야 한다.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오랜 세월을 두고 시대마다 지역마다 제멋재로 정착한 무질서한 한자 차용 표기가 일상화되었기 때문에 같은 한자라도 그때마다 지방마다 음이 다르고 뜻이 달라 일일이 가나로 음을 달지 않으면 읽을 수도 없고 뜻을 알 수도 없다. '日本'이라 써 놓고 어떤 때는 '닙뽄' 이라 읽고 어떤 때는 '니혼'이라 읽어야 하고 또, '海老'라 써놓고 전혀 당치않은 소리 '에비'라고 읽고 전혀 당치않은 뜻 '새우'를 익혀야 하니 그것이 어찌 정상적인 한자의 쓰임새라 할 것인가. 우리 어린이들이 '고맙습니다.'라 말하고 쓸 때 일본의 어린이들은 '有難'이라 쓰고 '아리가또'라 읽는 법을 배워야 하니 어찌 그게 쉬운 일인가. 역시 중학교, 고등학교를 나와도 읽고 쓰는 국어 생활을 자연스럽게 할 수 없다. 경제선진국이 된 도시국가 싱가포르도 국어교육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영어와 중국어, 말레시아어를 공용어로 하고 있지만 영어를 쓰는 사람도 옳은 영어를 알지 못하고 영어와 중국어의 혼종인 '싱글리시'쓰고 있으며 중국어를 쓰는 사람도 북경어와 광동어가 달라 소통이 어렵고 말레시아어를 쓰는 사람도 다른 언어를 알아 듣지 못한다. 그러니 신문, 방송도 사용 언어가 다를 수 밖에 없다. 작은 나라지만 참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다. 이런 혼란은 필리핀과 인도에서 더 극심하다. 두 나라 다 영어를 공용어로 정해 놓고 있지만 수십 개의 민족어를 아울러 공용어로 허용하고 있다. 영어로 말하고 읽을 수 있는 국민이 10%에도 미치지 못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면에서 미국도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약 15%에 달하는 주민이 영어를 듣고 말하지 못한다고 하니 국어교육이 편할 리 없다. 언어를 통합하지 못하면 한 나라의 국민으로 의식을 통합할 수 없으니 그것이 어찌 작은 문제인가. 우리도 광복 이전까지는 한자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 일본어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같은 땅에 살아도 사람값이 달랐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한국어를 말하고 쓰는 당당한 하나의 국민이 되었다. 우리의 정체성인 우리말 우리글을 쓰면서 함께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거기에 경쟁력을 더 하기 위하여 영어를 배우고 중국어를 배우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우리말과 글을 지키는 것이 나를 지키고 우리 역사를 지키는 길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서 글이 얼마나 우수한 글자인지 알아보기로 하자. 나는 매일 지하철 5호선을 타고 출퇴근하고 있다. 역마다 한글로 지명을 쓰고 그 밑에 로마자로 적어 놓았다. 필경 외국인들에게 지명을 알리기 위해서일 것이다.'신길'역에 'singil'은 '산길'이라 읽을 것이다.그러나 이것은 '상일'역을 적은 것이다. 우리 생각일 뿐 '신길' 인지 '싱일' 인지 '산길' 인지 도무지 분간 할 수 없는 것이다. 한글은 소리마디와 글자마디가 일치하기 때문에 그런 혼란이 있을 수 없다. 흔히 영어 알파벳이라 불리는 로마자는 소리글자이기는 하되 글자를 보고도 읽을 수 없는 반벙어리 소리글자이다. 'a' 자 하나만 하더라도 낱말에 따라서 예닐곱 가지의 다른 소리로 읽힌다. '아'(apart)로 읽히기도 하고, '어' (about)로 읽히기도 하고 '애' (and)로 읽히기도 하고, '오' (all)로 읽히기도 하고, '에이' (april) 로 읽히기도 하니 소리글자이기는 하되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소리글자이다. 그러나 단어마다 그 소리가 무엇인지 발음 부호가 필요한 것이다. 발음부호가 필요 없는 국어사전이야말로 한글의 우수성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다. 또, 한글은 글자 모양이 비슷하면 소리값이 비슷하다. ㄱㅋㄲ, ㅂㅍㅃ, ㄷㅌㄸ 글자 모양이 비슷하니 소리값이 비슷하다. 그래서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것이다. 그런데 로마자 C,K,G,Q는 모양이 전혀 다른데 소리값이 비슷하니 그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 한글은 필요에 따라 가로쓰기, 세로쓰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로마자나 아랍문자는 가로쓰기만 , 만주문자·몽골자는 세로쓰기밖에 할 수 없다. 나는 대학원 재학시절 만주문어를 공부한 적이 있다. 같은 자모라도 단어의 어두에 오는 경우와 어중에 오는 경우 , 어말에 오는 경우 글자 모양이 전혀 달라 종강에 이르도록 알파벳을 분간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소리글자인 한글은 우리 한류 문화와 함께 필연코 세계로 흘러갈 것이다. 고대 희랍문자가 최소의 소리글자로 고대 서양 문화를 이끌었듯이, 중세로마자가 천 년 로마 문명을 이끌었듯이, 근세 영어 알파벳이 세계문명을 주도했듯이 한글은 필연코 21세기 세계 문명을 이끄는 위대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세계의 변방이 아니라 한류문화의 중심에 있다. 한글이 바탕이 된 한류 문화의 힘은 끝없이 세계로 퍼져 나갈 것이다. 10여년 전 인도네시아의 문자가 없는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배워 그들의 말을 적는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젠 지나간 이야기일 뿐이다. 지금 세계에는 1,000여 곳이 넘는 대학에 한국학과가 개설되어 있고 세종학당을 비롯하여 4,000여 곳이 넘는 공식, 비공식 기관에서 한글과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중국절강성에 있는 월수외국어대학 한국학과는 재학생이 1,600여 명이 넘는데 이와 비슷한 대학이 중국에만 250여 곳이 있다. 몽골의 경우는 30여 개에 달하는 모든 대학에 한국학과가 개설되어 있고 한국어, 한글을 가르치는 초등학교도 적지 않다. 한국어, 한글 한류문화의 열풍은 지난해 (2014) 한국어 능력시험에 응시한 외국인이 61개 나라에서 17만 명에 달하는 것만 보아도 한글, 한국어, 한류문화에 대한 열풍이 얼마나 뜨거운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에 걸쳐 굶주린 백성이 되어 세계에 흩어진 700만이 넘는 해외 동포들은 그대로 한글문화를 전파하는 파수꾼이 될 것이다. 세계 방방곡곡에 흩어진 동포들이 발간하는 우리말 한글 신문을 정부는 더욱 책임 있게 후원하고 가꾸어야 할 것이다. 이들이 우리 세종학당과 유기적으로 협동 할 때 세계속의 한글의 시대, 한민족 한류 문화의 시대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찬란하게 우리앞에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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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01
  • [인물연구] 윤봉길 신변의 여인- 이화림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중국 연변작가협회에서 시상하는 화림문학상이라는 상이 있다. 이상은 연변작가협회에서 몇해에 한번 꼴로 시상하는, 독립운동가 이화림의 이름을 따서 만든 상이다. 나는 1994년 중편아동력사소설 “거북구슬”로 제3차 화림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상을 잊을 수 없는 건 나의 첫 중편이고 첫 역사소설이며 또 관행대로 그 상의 수상을 계기로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에 입회할 수 있었기때 문이다. ▲독립운동가 이화림 이화림녀사를 만나본 것은 연변일보사에 입사하여 문화부 기자로 뛰던 1994년경이었다. 대련시 조선족문화관에서 조선족 민속절을 개최했는데 취재차로 대련에 갔다가 그이의 존안을 뵈었다. 민속절이 열리는 운동장의 가녁에 곤색 옷에 하얀 운동모를 눌러쓴 가녀린 몸매의 한 노파가 앉아있었는데 대련의 한 문학도가 그가 바로 이화림할머니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어줍게 다가가 연변에서 왔으며 화림문학상의 수혜자라고 인사를 드렸다.. “연길에서 왔다고?” 반색하며 할머니는 나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말그대로 신인때이라 어리뜩하기 짝이 없었던 나는 할머니와 몇 마디를 나누지 못했고 사진 한 장도 남기지 못하고말았다. 하지만 지금도 그 존함이 나오면 당시 하얀 운동모, 안존한 얼굴의 노파가 떠오르군한다. 1932년 4월 29일 아침, 상해의 홍구(虹口)공원.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기념행사가 열리는 식장에 스프링 코트 차림의 남자와 세련된 양장 차림의 한 젊은 여인이 도시락과 물통을 들고 들어섰다. 여인은 남자가 공원안으로 무사히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다음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날 상해는 발칵 뒤집혔다. 스프링코트차림의 남자가 도시락 폭탄을 던져 상해주둔군 일본군 총사령관 시로가와 대장 등 일본인 수십명이 폭사하고 부상을 당한 거사가 발생한 것이다. 사건의 주인공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 날 윤봉길을 도와 삼엄한 검문검색을 통과한 양장을 한 27살의 여인이 바로 이화림이었다. 1932년, “한인애국단”은 두 차례 테러작전으로 일본침략괴수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세인을 놀래웠는데 윤봉길 폭탄투척사건 이 일기 몇 달 전인 1월 8일에는 이봉창 의사가 도꾜로 건너가서 일본천황 히로히도를 요격하여 혼비백산시킨 바 있는데 당시 김구의 명을 받고 이봉창 의사가 폭탄을 숨겨 운반한 그 특제 “훈도시”를 만들어준 사람 역시 이화림녀사였다. 원체 윤의사의 홍구공원 의거에는 이화림 녀사가 윤의사와 부부로 변장해 식장에 들어가기로 돼 있었다. 이에 따라 두 사람은 사전에 공원내 지형을 살펴보고 거사 지점까지 잡아 놓았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이녀사가 일본어를 잘 모르는 데다 두 사람이 함께 행동하면 노출될 념려가 있다는 염려로 취소되고 결국 윤의사 혼자 거사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이화림 녀사는 홍구공원거사에 처음부터 마지막 까지 직접 개입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항일사에 두고 두고 전해 질 두 거사에 직접 참여한 역사의 증인으로 되었다. 독립운동에 투신해 상해로 가다 이화림은 1905년1월 6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리춘실, 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교원학교에 다닐무렵, 평양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된 역사문학연구회에 들어가 사회주의사상을 익혔다. 열네 살 때 "3.1"운동에 참가했으며1927년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다. 1930년 3월 압록강을 건너 중국 상해로 갔다. 상해에 도착한 이화림은 이동해라고 이름을 바꾸고 백범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자원했다. 이화림은 심한 재정난을 겪고 있는 조직의 부담을 덜기 위해 나물장사, 빨래, 수놓기 등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고 푼돈을 모아 활동 경비로 썼다. 그러면서 밀정 처단, 연락활동 등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여 김구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이화림은 그야말로 김구에게 있어 비서이자 한인애국단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테러단으로는 조선의 해방과 혁명을 이룰수 없다는 “고민”으로 계속 함께 싸우자는 김구의 만류를 뿌리치고 혁명의 기지 광주로 떠났다. <백범일지>에 이화림 이야기가 빠진 것은 그녀에 대한 김구 선생의 인간적 서운함이 작용했던 것 같다. 1932년 늦가을, 이화림은 의열단의 추천을 받아 광주 중산(中山)대학 법률학부에 입학했다. 중산대학은 손중산이 세운 종합대학으로 본래 광동대학이었다가 손중산의 사후 그를 기리기 위해 중산 대학으로 이름을 바꾼 곳이다. 중산대학에는 조선인 학생들이 상당 수 있었는데 그 중 대부분이 광주봉기에 참가할 정도로 혁명운동의 산실역할을 했다. 이화림은 법학부에서 2학기 동안 공부한뒤 의학부로 옮겨 대학부속병원 견습 간호사로 일하면서 의학공부에 메진했다. 한편 1935년 7월, 남경에서는 김원봉(金元鳳)이 의열단을 비롯한 5개 단체를 통합하여 민족혁명당을 창립했다. 김구의 애국단과 중국공산당 소속 조선인이 참여하지 않아 명실상부한 민족유일단은 못 되었지만, 중국을 무대로 활동하는 여러 세력들을 통합한 민족혁명당의 의의는 매우 크다. 민족혁명당은 1942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과 함께 임시정부의 양대 축을 이룬다. 이화림은 1936년 1월 민족혁명당에 입당하여 남경으로 갔다. 남경에서 이화림은 민족혁명당 부녀대 부대장직을 맡아 주로 의료보건사업에 주력했다. 부녀대는 조선녀성의 조직화, 중국녀성들과의 통일전선결성을 목표로 항일선전활동을 폈다. 이때 이화림은 이집중과 가정을 이룬다. 조선의용대에 참가하다 중일전쟁이 한창인 1938년 10월 10일, 한구(韓口)에서 조선민족전선련맹의 무장부대로 조선의용대가 창설 되었다. 조선민족전선 연맹은 조선민족혁명당(김원봉), 조선민족해방운동자연맹(김성숙 등), 조선혁명자연맹(유자명, 유림), 조선청년전위동맹이 련합한 좌파연합체다. 그 무렵 김구는 한국국민당(김구), 한국독립당(조소앙 등), 조선혁명당(지청천, 일명 이청천 등)등이 모인 우파연합체 광복단체연합회를 이끌고 있었다. 1939년 3월, 이회림은 조선의용대 본부가 옮겨가 있는 계림으로 가서 부녀대 부대장이 되었다. 당시 조선의용대는 300여명의 대원이 3개 지대와 부녀대, 3.1소년단으로 편성되어 있었으며 부녀대의 주된 활동은 선전사업이었다. 조선의용대의 선전활동은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던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적의 진지 바로 앞까지 접근해서 “염전반전(厭戰反戰)”정서를 불러 일으키는 공작을 벌렸고 항일투쟁정서를 높이는 가극을 공연하기도했다. 이같은 선전활동에서 이화림과같은 녀성들의 활약이 특히 두드러 졌다. 1940년 11월 열린 조선의용대확대간부회의는 국민당이 소극적으로 항일하는 형세에서 조선의용대는 팔로군의 항일근거지로 가야만 전도가 있다는 견해로 합치되여 화북지방으로 주 전장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우선 20여명의 선발대가 락양으로 파견되었는데 이화림은 이 선발대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 이때 이화림은 전신무장을 하고 일본군진지 앞에 몸을 숨긴 채 메가폰을 들고 일본군에게 선전하거나 삐라 같은 선전물을 적 진지 안에 뿌려넣는 등 무장선전전을 수행한며 낙양으로 향했다. 1942년5월에 있은 반소탕전후 조선의용대의 활동중심지는 팔로군 129사단이 주둔중인 태항산(太行山)으로 옮겨 졌다. 이화림은 조선인 간부들을 위한 훈련반에 들어가 중국혁명사, 중국공산당의 항일방침 등을 공부하고 부녀대 대장이 되었다. 그무렵 태항산 근거지의 생활은 무척이나 어려웠다. 적들의 진절머리 나는 소탕속에서 전사들은 군사훈련도 하고 정치문화학습도 하였다. 당시 의용군부녀대 대장 겸 의사로 있은 이화림도 사회과학원 간부양성반에서 반년동안 배우면서 전투생활을 하였다. 곡식이 제대로 나지 않는 산악지대여서 보통 강냉이가루에다 겨를 섞어 먹었는데 강냉이가루마저 없으면 겨만 먹어야 했다. 조선의용군은 전투가 없는 날이면 감자밭을 일구고 모택동의 대생산운동에 발맞춰 방직공장, 병원, 리발소, 상점 등을 차려서 직접 운영하는 자립활동을 했다. 태항산 기슭에는 돌미나리가 많았다. 이화림은 녀성대원들을 이끌고 돌미나리를 캐여 김치도 담그고 볶아서 반찬을 만들었고 도토리를 주워다가 삶아서 가루를 내어 먹기도 했다. 하루는 나물을 캐면서 노래를 지어 동료 대원들에게 가르쳐주고 그 날 점심시간에 합창공연을 했다. 민요「도라지」에 맞춰 가사를 새로 지은 「미나리타령」이 그 것이다. 미날,미날,돌미나리 태항산 골짜기의 돌미나리 한 두 뿌리만 뜯어도 대바구니가 찰찰 넘치누나 에헤야 데헤야 좋구나 어여라 뜯어라 지화자자 캐어라 이 것도 우리의 혁명이란다 대원들은 모두 이 노래를 좋아했다. 특히 “이 것도 우리의 혁명이란다”하는 구절을 마음에 들어했는데 당시 대원들이 갖고 있던 “황무지 일구고 산나물 캐는 것이 혁명인가”하는 회의감을 떨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화림은 1943년 봄부터 병원에서 일하다가 그해 조선의용군이 연안으로 이동하자 1944년 4월 연안으로가 다음해 1월 연안 의대에 입학하여 못다한 의학공부를 시작했다. 이화림은 연안에서 열화충천하는 대생산운동에도 참가하고 군정대학 교장 수하에서 자료간사사업도 하였으며 조선의용군 무정총사령의 파견을 받고 중국의과대학에서 공부도 하였다. 공부와 생산로동을 병행하는 고된 생활이엇지만 이화림은 근면과 열성으로 이를 감당해 나갔다. 뿐만아니라 격주에 한 번씩 현지 주민들에게 당 정책과 시사문제를 해결하고 보건위생상식을 가르쳤다. 서툰 중국어이긴했지만 주민들은 그의 이야기를 무척 흥미있어 했다. “일본놈들은 언제 투항하나요?”, “국공합작을 또 하나요?”에서부터 “감기는 왜 걸리나요?” 등등 벼라 별 질문을 들이대도 이화림은 짜증내는 일이 없이 일일이 해설 해 주군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한 뒤 조선의용군은 동북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화림은 그대로 남아 의학공부를 계속하기로 했다. 무정장군은은 이화림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동무를 의대에 보낸 건 앞으로의 우리 혁명사업에 전문훈련을 받은 의학자들이 필요하기 때문이요. 지금 항일전쟁이 승리했지만 우리 앞에는 더 간고하고 복잡한 혁명과업들이 나서고 있소. 무산혁명은 일조일석에 승리할 수 없는 장기적인 사업이고 혁명이 승리한후엔 간고한 건설사업이 우리를 기다리게 될 것이요. 동무는 절대 의학공부를 중도에 폐하지 말고 잘 배운다음 우리 부대에 돌아오도록 하오. 그때 가서 남들이 동무를 놓지 않아도 내가 꼭 동무를 데려가겠으니 안심하오.” 전재산을 민족에 기부하다 항전은 끝났지만 그녀에서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이화림은 중국에서 련이어 벌어진 공산당과 국민당의 전쟁에도 뛰어 들었고 전후에는 새로 성립된 중국의 의료보건사업에 정력을 몰부었다. 1952년 와방점 후방병원 기술과 과장으로, 심양의사학교 부교장으로, 국가교통부 위생처 기술과장으로 일하였으며 1956년 중앙당학교를 졸업하고는 연변위생학교 교장, 연변조선족자치주 위생처 부처장, 위생국 부국장을 지냈다.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시기 억울한 죄장을 뒤집어 쓰고 박해를 받다가 1978년에 중앙조직부의 도움으로 억울한 누명을 벗었다. 연변자치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 기관당위 상무위원으로 있었고 대련시 정부시찰원, 대련시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84년에 이직,휴양했다. 이직 후 이화림은 소박한 가장집물에 1950년대부터 입어 오던 옷을 입어가면서 아껴먹고 아껴써서 알뜰히 모은 노임 2만여원을 1985년 한 번에 정부에 바쳤으며 1986년에는 아동작품작가들을 장려하도록 1만2천 여원을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아동문학상기금회에 기부하였다. 스무 살 꽃다운 처녀에서 아흔살 할머니가 되기까지 혁명가로 중국 대륙을 누비며 족적을 남겼던 이화림은1999년 2월 10일 14:30분에 대련에서 영면했다. 향년 95세였다. 이화림은 임종전에도 유언을 남겨 자기의 마지막 전재산인 5만 위안을 대련시조선족학교에 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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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26
  • [기고] ‘대포’ 를 쏘지 말자
    ■ 박병재(청양서 수사과 경장) ▲ 박병재 경장. ‘대포’(大砲)는 화약의 힘으로 포탄을 멀리 내쏘는 무기를 말한다. 국어사전에 명확히 정의되지 않고 여러 가지 유래가 있지만 결국 ’다른 사람의 명의‘라는 의미로 널리 쓰이고 있다. 흔히 전쟁터에서 쓰는 대포가 언제부터인가 대포폰, 대포통장, 대포차로 골칫거리 범죄수단을 지칭하는 데 쓰이고 있다. 경찰에서는 큰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이러한 ’3대 대포물건‘ 근절을 위해 수사전담팀을 경찰서별로 설치하여 특별단속을 하고 있다. 특히 경찰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보이스피싱, 전화대출 사기를 뿌리뽑기 위해 1,000만원 이상 고액 피해가 발생한 경우 전국 지방경찰청에 ‘전화금융사기 전담팀’을 신설, 검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기범죄의 피해자는 대부분이 서민,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로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고 해마다 피해사례가 증가하고 있어 어떻게 하면 피해를 예방할 수 있는지 그 해답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 현실적인 문제이다. 그동안 경찰과 각종 언론에서 지속적으로 정부기관을 사칭하거나 가족납치를 빙자하는 유형을 비롯하여 ‘신용등급이 낮다며 보증보험료 요구, 신용정보 조회기록 삭제비 요구, 저금리대출 알선료 요구, 향후 채무불이행시 채권추심비용 요구, 비정상 대출에 따른 이자 선납요구, 대출조건으로 휴대전화 개통하는 유형’ 등 범죄수법 및 범죄 피해사례와 방지요령 등을 홍보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역부족인 것 같다. 이러한 여러 피해예방 대책을 모른다 하더라도 한 가지만 기억하자. ‘상대방은 모르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행동에 옮기기 전에 한번쯤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의심이 간다면 경찰이나 관계기관에 반드시 문의해서 피해를 예방해야 하겠다. 또한 지난 04.16.부터는 전기통신사업법이 개정되어 담보목적 또는 대출․대부조건으로 휴대전화 개통하는 행위, 금융사기 등에서 전화번호를 공공기관 번호 등으로 조작하는 행위를 처벌하고 있다. 이제 ‘대포물건’ 근절을 위해서는 경찰의 노력만으로 한계가 있으니 전 국민이 각별한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하며, 이러한 대포물건으로 인한 불법행위를 알고 있을 경우 경찰관서 등에 신고해 줄 것을 당부드리고 싶다. 이제 제발 대포는 그만 쏘자. http://hgilbo.com/news/view.php?idx=4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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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21
  • 중국도시들의 공동난제 주차의 어려움(2)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북경시 5환구역의 모 소구역에 살고 있는 진모는 지난 음력설 전야에 소구역 개발상으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게 되었다. 즉 자동차 주차자리를 사야 하는데 필요한 수속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그가 자동차 주차자리값 15만원을 낸지 3개월이 지나서였다. 자동차 주차자리를 사야 하는가 사지 말아야 하는가를 두고 진모는 큰 고민을 하였다. 기실 그가 이 소구역에 입주한 뒤 5년이 되는 기간 이 소구역에 있는 지하주차장은 임대를 주었지 팔지는 않았었다. 그 임대비는 연간 3120위안으로 매달 260위안씩 내면 되었다. 하지만 주차자리를 사면 50년간 이 주차자리가 자신의 것으로 되는 한편 거기에 매달 물업비 120위안에 370위안의 관리비까지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것 때문에 소구역의 많은 사람들은 자동차를 길옆에 세울지언정 지하주차장 자리를 사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진모는 자동차 주차자리가 있으면 많이 편리한데다 또한 50년간의 재산권증을 가지기에 이를 악물고 이 주차자리 하나를 샀다. 한편 자동차 주차자리의 재산권증을 놓고 시민들은 반신반의하고 있다. 정주시 주차장관리센터의 부주임 장손에 따르면 정주시 많은 소구역에서도 자동자 주차자리를 “판매”하고 있으며 업주는 1차적으로 많은 돈을 바치고 있다. 하지만 영수증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면 앞으로 분규가 생겨 해결하려고 해도 의거가 없으며 주차장 자리를 산 시민들이 손해를 볼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소구역의 자동차 주차자리권은 도대체 누구한테 속하는 것인가? 물권법 제74조에는 건축구역내에 있는 자동차 주차자리 혹은 차고는 우선 입주자의 수요를 만족시켜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하다면 건축구역내의 주차자리 혹은 차고는 당사인 입주자들과 협의한 후 판매 혹은 임대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입주자들 공유로 된 길 혹은 기타 장소에 자동차 주차자리를 만든다면 이는 입주자들의 공유로 되는 것이다. 하지만 법률종목에는 이것이 분명하지 못하다. 현재 이로 인한 분규가 거의 모든 소구역마다 생기고 있는 상황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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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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