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09(일)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뉴스
  • 박태일 시/개산툰 구월
    개산툰 구월 박태일 모아산 질러 넘다 왼쪽으로 내려 서면 화룡에서 룡정에서 너른 평강 들 타고 내린 해란강 걸음걸음 고요하다 동성진 너머 리민 너머 옥수수 키잡이로 서서 파랗게 쏘다니는 구릉 마을 집들은 산협의 가난을 풀풀 날리고 창유리 깨진 틈으로 도닥도닥 옛말 드난다 개산툰 개산툰 구월은 두만강 건너 회령 산천 어디서 오득오득 개암이나 씹는 것일까 걸어 내리고 오르는 시장 마당 지난주 건너왔을 북녘 소식은 어느 집 낮술에 비틀거리고 있을까 아는 이 친척도 없이 나는 이 골짝에 갇혔다 장대교회 붉은 십자가가 국경 철책을 바라고 선 뒹겨장 빛깔 어두운 흙길 따라 룡정으로 연길로 나가는 버스는 그치고 택시 기사 둘 버드나무 아래 버드나무 그늘인 양 빈둥거리는 너머 두만강 수척한 물빛을 숨기며 개산툰 구월은 이제 입을 다문다. 박태일의 시집 '연변 나그네 연길 안까이'에서 발췌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4-06-09
  • 박태일 시/조양천
    조양천 박태일 마을 이층 숲 참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하양 여우가 존다 배달말 깨우친 누나와 배우는 애토끼 귀엣말 조심조심 걸음 옮긴다 마을 이층 숲 누가 들렀나 누가 한국서도 멀리 부산서 온 너구리 아저씨 여름 물골에 부들처럼 무성한 천자문 배우기 배달말 배우기 책고랑 따라 걷는다 살몃살몃 아침부터 한낮까지 동무들 와도 그만 그만 안 와도 여우는 졸음을 살대발처럼 내렸고 마을 이층 숲 계단 아래로 삼월 고슴도치 찬바람이 구른다 마주 선 소학교와 중학교 사이 전깃줄을 뛰는 참새 떼 양조장 굴뚝은 볼 부어 붉고 높아 집집 지붕 더 눌러 앉힌다 기차역 폐품장 흐린 담길은 부스럭스럭 수수 밭머리로 고개 돌리고 근들이술 두 집만 일찍 등을 밝힌 채 저녁 고양이 기다린다. 박태일의 시집 '연변 나그네 연길 안까이'에서 발췌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4-06-09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4-01-13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반도무용의 영원한 전설-최승희
    편집자의 말 : 최승희를 놓고 말하면 그녀의 정치적 이념과 사상성을 두고 논란이 많은 인물이다. 일찍 지난 세기 30-40년대 최승희가 침략확장에 광분하는 일본군을 위문하려고 중국대륙과 동남아 여러 나라에 다니며 공연한 것을 두고 역사학가들은 그녀를 친일파라고 지적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그녀가 장시기 동안 이북에서 활동한 것을 미루어 적색분자로 점찍기도 한다. 하지만 이 글은 최승희 그녀의 무용예술만 언급하면서 우리 한민족 무용 발전을 위해 각고한 노력을 했다는 사실만 나열하려고 한다. 이 글의 많은 내용은 구소련 간행물 <소련여성> 1948년 제3호에 실린 글임을 밝히는 바이다. ▲ 사진출처 : 인터넷 1911년 11월 24일, 최승희는 조선 경성(지금의 서울)의 한 의사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15살이 되던 해 최승희는 경성에 있는 <숙명여자고등학교> 보통 반을 나왔고 그 뒤 1926년 5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일본현대무용의 선구자인 이시이 바쿠가 세운 무용학교에서 공부했으며 3년 뒤 이 학교의 1번 무용수로 활약했다. 뿐만 아니라 얼마 안 있어 이 무용학교의 <수석 대리교사>로 선발되기도 했다. 1929년 조선으로 돌아온 최승희는 18세 나이에 조선의 첫 현대무용가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으며 그해에 무용연구소를 세우는 야심을 드러냈다. 그리고 1930년부터 1932년 사이에 세 번에 거쳐 전문 공연회를 개최, 대표작으로는 현대 조선민족 무용을 상징하는 <영산무(灵山舞)> 등이 있었다. 최승희의 무용에서 계발을 받고 후일 성공한 사람도 많았다. 대만의 유명한 무용가 임명덕(林明德)이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한사람이었다. 1936년 그는 최승희의 무용공연을 보고 일본에 가서 무용을 전공, 22세었던 1936년부터 8년이란 품을 들여 도쿄대학 예술학부와 이시이 바쿠의 무용학교를 오가면서 독일풍의 현대무용을 배웠고 1943년에 도쿄에서 개인 공연회를 가지었으며 그 뒤 대만으로 돌아가서는 무용 <예상우의무(霓裳羽衣舞)>와 <수사몽가(水社梦歌)> 등 미학정서가 짙은 무용작품을 무대에 올리면서 대만의 무용예술의 발전을 위해 중대한 기여를 했다. 한편 서방의 무용기교와 조선 전통무용의 정신주체를 결합시켜 조선 무용계에서 돌풍을 일으킨 최승희는 1937년 당시 세계적인 무용대가로 등극한 미국인 솔로몬 왜루크의 알선으로 미국을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주의 여러 나라와 유럽 등지를 방문하면서 100여차 공연, 공연은 1939년까지 지속되면서 무용논평원들과 당지 관중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심지어 부분적 간행물들에서는 “일본이 조선을 정복하였지만 최승희만은 정복하지 못하였다”라고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1939년 말, 조선으로 돌아온 최승희는 일제가 한복을 입고 공연하는 것과 민족무용을 갖고 무대에 오르는 것을 금지시키자 단연히 고국을 떠나 중국 북경으로 향했고 그 곳에서 중국무용을 연마하고 탐구하였다. 하지만 그 때로부터 최승희는 중국의 만주와 상해, 남경 등지를 돌며 이른바 황군을 위한 <위문공연>도 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는 한복을 입고 무대에 오르는 것을 탄압하는 일제가 싫어 조선을 떠난 최승희와는 다른 친일행위를 한 최승희로서 모순되는 면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당시 최승희의 무용을 두고 일제마저 고도로 인정했다는 것만은 의심할바가 없는 것 같다. ▲ 사진출처 : 인터넷 1946년 해방이 되자 최승희는 그 해 5월 귀국선으로 인천으로 돌아왔으나 한국에는 정착하지 못하고 7월에 문예평논가로 활약하고 있는 남편 안막을 따라 월북했으며 평양에서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세웠다. 이 후 최승희는 조선무용동맹 위원장으로 활약하면서 공훈배우 칭호 및 국기훈장 제1급 등을 받았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최승희는 북경으로 가서 중국의 중앙희극학원에 최승희 무용반을 설치하여 많은 제자들을 양성, 새 중국의 제1대 무용예술인들은 그 거개가 최승희가 양성해낸 인재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66년 최승희는 그녀의 마지막 무용작품인<고구려 무희>를 창작하여 무대에 올린 뒤 관중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최승희는 그 자신의 친일행위 및 평양에서의 사망 등으로 많은 미스테리를 낳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녀의 가정사 및 자녀의 행적 등도 아직은 알려진 바가 없으며 또한 그녀가 행운아인가 아니면 비운의 인물인가 하는 것도 판정하기 어렵다고 보아진다. 하지만 반도가 낳은 세계적인 무희- 최승희의 무용예술은 말 그대로 세계가 공인하고 있으며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8-01-30
  • 지난 세기 20-30년대 중국영화계의 황후 호접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올해 1월 20일은 지난 세기 20-30년대 중국 상해에서 “영화황후(电影皇后)”로 불리었던 호접(胡蝶)이 태어 난지 110주년이 되는 날이 된다. 이 날을 기념하면서 최근 상해시 촬영예술센터에서는 “접몽백년(蝶梦百年)”으로 명명된 호접의 영상역사 전시회(1월 20일-3월 18일)가 막이 올랐다. 전람에는 수십 년간 호접의 영화배우생애와 사생활 및 해외여행 중의 순간순간을 기록한 진귀한 사진 근 200점이 진열되었다. 그만큼 지난 세기 20-30연대 호접은 상해영화계의 유명스타였다. 당시 조선인 영화배우 김염(金焰)이 상해에서 “영화황제(电影皇帝)”로 떠올랐다면 호접은 “영화황후”로 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상해에서 일반 노동자의 월급이 20원 정도였다면 호접의 월급은 2000여원으로 일반 노동자 월급의 100배에 달했는바 이는 그녀의 몸값이 어느 정도였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 영화황후 호접의 영상역사 전시회의 포스터 1908년 스페인 예술인 엘 레마스가 상해에서 중국의 첫 영화관을 세웠다. 영화관은 홍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얼마 후 호서화(胡瑞华)란 이름을 가진 소녀가 찾아왔다. 영화관 보스는 대뜸 이 소녀를 보고 “바로 저 애이다”라고 탄성을 지를만큼 기뻐했다. 그것으로 이 소녀는 자신의 일생을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그녀가 바로 상해영화계에서 이름을 날린 호접이었다. 호접은 중국 영화사상 가장 명성이 높고도 전기적 색채가 농후한 여스타였다. 호접이란 이름은 중국영화계에서 일찍 알려졌고 장시기 동안 전해져온 이름으로서 중국영화계 스타중의 스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40여 년 간 영화배우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호접은 90여부의 영화에서 주역을 담당, 자주 “영화황후”로 등극하였으며 많은 영화팬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다싶이 하였다. 그리고 당시 영화팬들한테 있어서 호접은 단지 스타였을 뿐만 아니라 어느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이름이었으며 지어 당시 그녀를 숭배하는 것은 일종 문화이기도 했다. 호접의 고고성은 중화민족의 거대한 변화 및 영화업과 더불어 울리었다. 1908년 상해에서 출생, 그 해 광서황제와 자희태후가 선후로 죽었다. 그렇다면 호접의 일생은 중국의 봉건제왕제로부터 중화민국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까지 탄생하는 격변기를 지켜본 일생이었으며 그녀가 생을 마감하는 1989년은 중국 대륙과 대만 사이의 냉전시기이기도 했다. 호접이 태어날 때 부모는 철도부문에서 근무했다. 그러한 연고로 호접은 부모를 따라 상해, 북경, 천진, 중경과 광주 등 대도시를 거쳐 나중엔 광주에서 오래 동안 머물었다고 한다. 이렇게 거의 중국대지의 절반을 돌면서 그녀는 북경말은 물론 광동말과 상해말까지 유창하게 구사했고 견식면이 넓은데다 양호한 가정교양으로 자랐다. 이는 소녀시절의 호접으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연예사업을 위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 소녀시절의 호접(왼쪽 두 번째) 16살 때 부모를 따라 다시 상해로 돌아온 호접은 당시 중국영화학교의 제1기생으로 입학, 아울러 그녀의 예명 호접(胡蝶)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영화학교에서 학습하는 기간 호접은 다방면 재능을 익히기 위해 노력, 심지어 자동차운전기술과 기마기술까지 숙련되게 익히었으며 또한 당시 생활방식과 배우가 수요하는 기예를 장악하기 위해 촬영에 대한 연구에도 집념했다. 그녀는 자주 자신을 촬영하는 일꾼과 함께 촬영각도와 광선의 조절 등에 파고 들면서 촬영효과를 높이는데 많은 품을 들이기도 했다. 1926년 18살에 호접은 상해의 유명한 화보 “양우(良友)” 창간호 표지인물로 실리었다. 그해에 호접은 영화 “추선원(秋扇怨)”에 출연하면서 스크린생활의 진정한 첫 발자국을 떼었고 유명해시기 시작했다. 그 시기는 중국 영화의 탐색기술, 연기기술 및 시장 개척의 초보시기었고 또한 무성영화 시대었기에 배우의 표정예술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던 때였으며 배우 거개가 표정예술에 노력을 경주하던 시기었다. 당시 호접의 풍격은 이미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는바 동작성이 크지 않으면서도 진실한 것이 곧바로 관중을 끄는 매력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당시 상해의 “붉은 장미 화보(红玫瑰画报)”는 호접의 연기를 두고 “성정이 고요하여 그 속에 여자규수의 풍격이 있으며 왁작지껄이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지금 와서 호접이 출연한 영화들을 보면 거의 호접한테서 “크나큰 욕망”같은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녀는 최대한 그 무슨 “욕망”같은 것을 억제하면서 자신의 인성을 연기, 그 표현기교는 형언할 수 없는 경지에 달하게 한다. 평소에 영화관람을 별로 즐겨하지 않던 한 관중은 호접이 출연한 영화를 본 뒤 “호접이 출연한 배역이 아무리 조용하면 할수록 그 속에서 더욱 장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라고 소감을 밝히었다. 또한 1940년 중국 경극예술의 아버지인 매란방(梅兰芳) 역시 호접이 출연한 영화 “절대가인(绝代佳人)”을 보고 “호접의 연기는 어느 유파를 대표하는 것으로 그녀는 조용한 것을 장기로 삼아 관람자들한테 자신의 수양깊이를 보여준다”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1949년 호접은 영화 “금수천당(锦绣天堂)”에 출연하여 여주인공역을 담당, 이 영화는 중국의 첫 칼라영화였다. 1928년 호접은 다부작 영화 “불타는 홍련사(火烧红莲寺)”에 출연, 도합 18집으로 된 이 영화는 무협영화로서 당시 무협영화의 조류를 일으켰으며 티켓판매수입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 뒤 호접은 계속해 영화 “부자의 생활(富人的生活), “도화호(桃花湖”, “자유의 꽃(自由之花), “가수 홍모란(歌女红牡丹)” 등에 출연하면서 보다 실생활과 접근하는 인물로 많은 영화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1933년 3월 5일, 호접이 주역을 맡은 영화 “광류(狂流)”가 상해에서 첫 방영이 되면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영화는 1931년에 있는 특대 수재를 배경으로 사회의 최하층 사람과 상류사회 사람들간의 계급투쟁을 반영한 영화로서 특대 수재를 통해 민족위기를 경종하기도 했다. 당시 영화계의 평론가들은 이 영화야말로 중국영화의 새로운 노선을 개척했다고 대서특필했다고 한다. 호접의 행운은 동업계 영화인 중에서 그 생애가 가장 길고 출연차수가 많아서만이 아니다. 그녀는 수차례에 거쳐 영화계의 선구자로 되기도 했다. 1931년 호접은 중국영화계에서 선참으로 프랑스 백대영화회사와 합작하여 스크린에 출연했고 또한 중국의 첫 유성영화 “가수 홍모란”에 출연한 배우기도 했다. ▲ 영화배우 시절의 호접(촬영시기 미상) 호접의 배우생활은 1930연대에 들어 클라이막스로 치솟았다. 1935년 그녀가 주역을 맡은 영화 “자매의 꽃(姊妹花)” 등 몇부의 영화가 소련에서 있은 국제영화제에 선보이었고 선후로 독일, 프랑스, 스위스와 이탈리아 등 나라에서 방영되기도 했으며 그때마다 호접은 그런 나라를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도 했다. 이는 그녀의 생애에서 일대 화려한 대악장이기도 했다. 1935년 호접의 혼례는 당시의 중대한 문화적 대사였다. 친우들의 축복 외 영화계의 많은 인사들은 그녀가 앞으로 가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계속 나라와 영화계에서 기여하며 활약하는 “여대장부”가 되기를 기대했다. 특히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의 전신인 “의용군행진곡”의 작사자인 전한(田汉)은 한수의 시로서 호접으로 하여금 주방과 작별하고 영화에 매진하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혼 후 호접은 이러한 안목의 제약에서 벗어나기로 작심했다. 영화배우로는 전성기의 나이었지만 그녀는 점차 가정에 많은 정력을 쏟는 삶에 충실하기 시작했다. 즉 남편을 섬기고 자녀를 양육하는 것으로 제2의 인생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 조류였던 소위 진보여성 및 현대여성과는 다른 선택이었으며 그렇다고 남권사회에 얽매인 봉건여성의 선택인 것도 아니었다. 어찌 보면 당시 소위 가정을 버리고 “진보”만을 외쳐대는 극단적인 여성조류에 대한 일종의 반항었다. 일대 절색으로 20-30연대 중국의 영화계를 휩쓸었던 호접은 1989년 호접은 캐나다 밴큐버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20여 년이 지난 2016년 초 호접의 생전유품이던 진귀한 사진 50여점이 캐나다 밴큐버의 미술관(아시아부)에 전시되면서 사람들은 재차 민국시기의 이 영화황후를 머릿속에 떠올리었으며 이는 중국정부의 커다란 중시를 받기도 했다. 전시회가 끝난 후 밴큐버 미술과 아시아부의 총감인 정승천(郑胜天)은 중국영화사 연구원 이진(李镇)을 초청하여 그와 함께 수천부에 달하는 자료를 찾아 호접에 대한 자료를 수집, 도합 호접의 영화인생과 관련된 205점의 자료사진을 모아서는 그해 11월에 중국으로 돌아왔으며 1년여만의 준비과정을 거쳐 드디어 호접의 영상역사전시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게 되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8-01-27
  • 남의 눈으로 본 “청년경찰”
    ●김인섭 영화 “청년경찰”이 빚어낸 논란이 그냥 발효하고 있다.한국 땅에서 차별과 수모를 받으며 누적된 상처가 긁히어 발로되는 아픔일 것이다.   영화가 조선족을 악역으로 내세우고 애꿎은 대림동마저 마적굴로 만들어 500만의 관객에게 전염성 메시지를 건넸으니 혈한을 쏟던 조선족들이 침묵으로 일관할 수 없다. 그들은 이미 한국 생활의 부조화 단계를 뛰어넘어 지역 사회에 융합되고 지역민들과 화합을 이루는 새 시대를 열었는데 이 친구들이 지엽으로 나무숲을 가리는 시나리오를 꾸민 편협한 사고가 이상하다.꺼지는 불에 기름을 쏟고 ‘동족상잔’ 정서를 부추기는 행태이니 피해 당사자들과 지성인들의 반발은 리유가 충분하다. 이 작품을 반민족적이라 문책하면 도를 넘지만 그의 사촌 친척이라면 모자람도 없다.   대림동은 재한 조선족들이 ‘코리안 드림’을 펼치며 일궈낸 집거지로서 한국에서 일명 차이나타운이라고도 부른다. 그들은 몇십년간 설음을 이겨내며 생계 전쟁을 거치면서 여기는 이미 한국,중국,조선족 문화가 어울린 독특한 문화지역으로 변신하였으며 미래 한국의 다문화사회 모델이라는 긍정적인 기대도 부풀고 있다. 물론 조선족들의 범죄나 후진적 작태들이 오래동안 이슈화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초기 적응이라는 원시 수준을 뛰어넘어 지역사회 건설에 책임지는 성숙된 이방인으로 변신하고 있다.그런데 “청년경찰”이라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다.   오늘 한국 속의 조선족 사회 형성은 주류사회의 드팀없는 지원,지지와 지도가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단언한다. 조선족들도 병주고향(竝州故鄕)을 건설한다는 진지한 감정으로 자체 도덕 개선의 절박성을 인식하며 주인적 자태로 나서고 있다. 현실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단점을 들추고 침소봉대식으로 과장하며 동족 화합의 숲에 악병(恶病) 바이러스를 뿌려댄다.자기보다 나은 사람이면 환대하고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이면 멸시하는 한국 사회의 저급문화의 발현이라고 지성인들이 말하고 있다.   지난 50,60년대 한국이 어렵던 시기 수많은 한국 남녀들이 독일에 건너가 그 나라 사람들이 기피하는 광부와 간호사로 되어 핏땀을 쏟으면서 가난한 조국에 종잣돈을 만들어 보냈다. 수만으로 헤아리는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에 매혹되어 쓸만한 수단은 다 부려가며 가난한 조국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또 중국을 내놓고도 미국,유럽 지역에서 한국인들의 범죄가 쟁점으로 되어 한국에 먹물을 들씌우던 무색할 통양(痛痒)도 수없이 있었다. 이것은 오늘 조선족의 '코리안 드림'과 궤적(轨迹)을 같이 하는 한국 역사의 단면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제작진들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명철한 사고로 조선족의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각설하고, "청년경찰"을 도문질타(到门叱咤)할 때 삶의 개선을 위해 찾아간 조선족들은 그 나라의 법질서와 국민들에 책임을 지는 신실한 자태가 있었던가 성찰이 있어야 한다. 지연,혈연,인연 등등 연고 문화가 뿌리깊고 혹독한 상하서열과 위계질서를 지켜야 하는 한국 땅이었다. 자기 치부를 감추는 가추불외양(家丑不外扬)심리와 아니꼬운 남이면 흉을 가배로 불궈놓는 속심은 인간 본성의 일부분이다. 어느 외인이던 그 공동체 속에서 불미스런 행위를 저지른다면 냉대는 말말고 공격의 과녁이 되고 동네북이 되는 현실은 자연스러운 인간세태이다. ‘한가마밥을 먹은 사람이 한울음을 우는’ 필연성도 당연한 인지상정으로 각인되고 있다. 그럴진대 재한 조선족들고 같은 처지면 똑 같아 진다는 역지개연 (易地皆然) 의 당위성으로부터 영화의 매개 측면을 고루 인식하고 만약 내라면 어떻겠나 관대하게 헤아려봐야 할 것이다.   현재 조선족 사회는 한국에 정착하는 추세를 이루고 있으며 많은 경제,문화,예술 단체들도 이미지 개선과 소통,상생,화목을 위하여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대림동이 ‘조선족 수도’로 격상한다는 소문도 파다하다. 뭐라해도 한국 땅은 조선족들에게 있어서 매력이 넘치는 땅이 틀림없다. 그렇다면“청년경찰”을 향해 진상 규명과 시비 판단을 호소할 때 영화 소재를 제공한 당신은 무었이었던가를 동시 고민해야 마땅하다. 특히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종시속(从时俗)의 고마운 실천이 관철되였던가를 내성(内省)하고 반성해야 한다.    언행범절의 곱냐밉냐에 따라 ‘주러 와도 미운 놈 있고, 가지러 와도 고운 놈 있다’는 세속의 도리는 따져볼 만한 리치이다. 조선족들에게 ‘가지고도 고운 놈’이 되는 지혜가 없을 것인가.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7-12-31
  • 연집강과 연길지명
    ● 허 성 운 지금까지 연길지명을 두고 많은 국내외 학자들은 나름대로 의미를 풀어내고 그 안에 담긴 뒷이야기를 적어왔었다. 하지만 연길지명에는 사람을 경악케 하는 섬뜩한 이미지가 음밀하게 숨겨져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일본어로 연길을 음역하면 엔기쯔로 발음되나 훈독하면 노부요시로 발음된다. 여기서 말하는 노부요시라는 단어는 옛날에 보검을 만드는 일본장인 이름으로서 그가 만든 류몬노부요시라는 보검은 일본에서 오래전부터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노부요시라는 언어에는 무사가 기를 칼끝에 응집시켜 그 기가 검을 타고 밖으로 뻗어 나오게 되어 예리한 칼날이라는 숨은 뜻이 배여 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광복 전에 룡정에 별명이 노부요시라는 한 일본 경찰서서장이 있었는데 늘 자신의 군도가 노부요시 보검처럼 단단하고 예리하여 대적할 적수가 없다고 자랑하며 다녔기에 그 별명이 붙여졌다. 1945년 가을 소련군에게 잡혔다가 구치소에서 남모래 뛰쳐나온 경찰서장은 집으로 돌아와 어린 딸을 총으로 쏴 죽인 후 주택에다가 불을 지른 후 군도로 할복하여 자살하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그가 놓은 불은 이튼 날에 가서야 겨우 진화되었다. 그럼 이런 일본 검의 섬뜩한 그림자는 어떻게 되어 연길지명에 비껴졌을까. 역사를 거슬러 연길지명을 꼼꼼히 캐고 보면 1900년 로시아가 만주에 침입하여 중국동북지구를 짓밟고 1901년 일본을 비롯한 열강 세력이 청 정부를 압박하여 신축조약을 체결한 뒤 이듬해 10월 26일 청 정부가 연집강(煙集崗)에 연길청(延吉廳)을 세우면서 연길이란 지명이 등장한다. 연집煙集이라는 한자음의 소리를 바탕으로 연길(延吉)이라는 문자로 고치여 표기한 것이다. 그리고 연길이라는 지명이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09년 연길청을 연길부로 고치고 1912년 연길현으로 개명한 후에 여러 역사 기록에 대량으로 나타난다. 연자延字가 길자吉字가 연희延喜정 연평延平교 등 연길의 주요 거리 다리 건축물 이름도 일본인들의 속셈에 따라 연길지명에 초점을 맞추어 표기되어 있다. 사실 연길의 최초의 지명을 따지고 보면 개척초기에 화전민들이 화전 밭을 일구면서 연기와 안개가 자오록이 덮여 있었다는 의미로 연집강煙集崗이란 땅 이름이 기원되어 있는데 그 후 사용한 연길지명과 뒤섞이면서 화전민의 역사는 운무 속에 가리어 오늘날까지도 이렇다 할 역사기록 한줄 남기지 못한 채로 세월의 비바람 속에 씻기여 사라지어 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 예로부터 연집강 구역은 뒤로 깃대봉을 사이에 두고 두 평풍(병풍의 방언)산이 둘레를 감싸고 바람을 막아주는데다가 그 안에 경사도가 완만한 구릉지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어 그야말로 천혜의 화전적지로 손꼽힌다. 완만한 경사지를 따라 개척초기에는 땅막집들이 감자처럼 여기저기에 박혀있고 그 사이로 석인골 태암 등지에서 흘러내리는 냇물이 남계마을 부근에서 연집강을 이루며 굽이굽이 휘돌아 남으로 부르하퉁하에 흘러든다. 경사진 화전 밭은 한쪽 발을 아래로 펴 딛고 한쪽 발은 구부려 허리를 펴고 일하는 모양이 되어 일 하는데 덜 피로 할뿐만 아니라 땅의 경사도에 따라 화전 불길이 세어지거나 약하게 조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세기말 뾰죽산아래 안방마을이라는 옛 동네에는 불붙이고래 라고 부르는 지명이 있었는데 최씨 성을 가진 사람이 화전을 하다가 산불을 내여 그 불이 평풍산을 타고 타올라 몇 십리까지 불길이 번진 적이 있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마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화전을 할 때 습기가 있는 눅눅한 날 밤을 골라 불꾸러미를 만들어 불을 지른다. 밤바람이 산 정상에서 아래로 불기 때문에 그리고 날이 어두워야 날아오르는 불티가 보이여 불길을 공제하기가 쉽다고 한다. 불을 생솔가지로 두드려서 막는데 밭 절반 넘어 불이 내려가면 밑에서 위로 맞불을 놓아 불이 잘 타오르게 하고 두 불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저절로 불이 꺼지게 하였다. 개척 초기에 화전민은 산신령을 절대적인 존재로 믿어 왔었다. 지금의 리민촌은 지난세기 30년대에 일제가 신흥촌 집단부락을 만든 곳인데 그 전에는 채영이라고 불렸다. 마을 부근에 큰 복개산 작은 복개산이라 부르는 곳이 있었는데 본래 산신령에게 고사를 지내던 곳인데 그 후에 공동묘지로 변하였다. 연집강 구역은 화전민의 삶의 문화가 무르녹아 흐르던 곳이다. 이 지역의 숫둘고래 부싯돌밭 삼밭고래와 같은 명칭들은 지난세기까지 해도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널리 알리어졌던 땅 이름들이다. 그 옛날 화전민은 떠돌이 삶을 살면서 약초도 캐고 짐승도 잡았다. 이 지역 황초고래 방초고래 같은 지명은 오래전부터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생겨난 명칭들이다. 연집강 구역은 두만강 강변과는 달리 생산된 작물을 회령 종성 온성으로 옮기는데 시간과 비용 그리고 위험이 따르기에 아예 산 여불때기(함경도 방언 비탈진 산기슭)밭 가장자리에 감자 움 같은 굴을 깊이 파서 저장하였고 겨울철에는 잡은 곰 가족을 벗겨 옷을 해 입고 곰처럼 구새 먹은 통나무 속에 들어가 잠을 자기도 하였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연무가 자오록이 뒤덮여 있는 연집강 지명에는 혹독한 세상과 맞서 치열하게 살아왔던 옛 선인들의 꺼지지 않는 삶의 불씨가 깜빡이고 빨갛게 연분홍 천지꽃이 물드는 산언저리에 안녕을 기원하던 화전민의 그 순박한 눈동자가 어리여 있다. 만일 석인골에 묻혀있던 돌사람이 입이 달려서 엉키고 설키여 있는 연길지명을 묻는다면 과연 어떤 답이 나올까. 하지만 석인골 있던 그 돌사람도 반세기 전에 어디론가 가뭇없이 사라지어 행적조차 묘연하니 연길지명 속에 감추어진 그 정체는 언제가야 사람들 앞에 드러날까. 화전민들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아로새겨진 연집지명이 일제 침략자의 칼자루에 휘둘리어 연길지명으로 뜯어 고쳐지는 과정은 서글픈 우리 과거사가 숨겨지어 있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7-10-13
  • '청년경찰'과 조선족의 자세
    ● 김인섭 영화 "청년경찰"이 남긴 어두운 여운이 아직도 남아있다. 영화 제작자들은 흥행 효과와 인기 영합에 무게를 두고 사회적 후과에 대한 참작이 부족하였다며 모호한 사과도 표시한다. 그러나 조선족을 어두운 이미지로 포장하고 애꿎은 집거지마저 범죄의 소굴로 묘사하면서 500만 관객을 낚아내여 동족 화합을 꺼꾸로 돌리는 악효과를 초래하여 대중의 분노를 유발하고 이성을 흐리게 하였다. 색안경이 걸린 시선과 무리한 추리로 작성된 시나리오다. 고난에 찬 조선족 생활상에서 부정적 일면을 골라내여 과장기법을 기묘하게 써가며 사회 전체에 먹물을 뿌려댄다. 자기보다 약한 타민족과 이방인을 차별시하는 제노포비아(仇外心理) 요소가 아직도 한국사회 저변에 뿌리가 깊다며 지성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질타한다. 그러나 서로간의 이해와 양해가 깊어가는 오늘에도 구시대 배타주의가 문화시장에서 유령처럼 떠다니는 현실은 우리의 고민을 부르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동향에 대하여 과분한 감성적 해석이 필요없다. 그것은 한국사회에서 점멸(点灭)하는 편협한 사고로서 민족 화합과 세계화를 지향하는 주류사회에 휘말려있을 뿐이다. 시대 흐름이 이러하니 우리는 되술래잡기나 ‘이에는 이(以牙还牙)’ 식 앙갚음 역공을 들이댈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에게 보내는 하나의 비판 정보로 수용하는 것이 성숙된 사고가 아닐가 본다. 필경 한국땅에서 현지인들의 눈을 수없이 찌프리게 하였다는 전력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특히 립장을 바꾸어 생각한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철학으로 "청년경찰" 사건을 냉철히 생각해야 한다. 지난날 한국에서 발생하였던 여러건의 조선족 강력범죄는 조선족 이미지에 사정없이 악영향을 끼치였고 그 여파가 상당히 남아있다. 어느 사회에도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개별건이지만 타인에 대비하여 범죄 비례가 낮고 극소수라는 사실로 자신을 위안할 수 없다. 우리는 현지인들과 권익이 부동한 이국의 집단으로서 내국인과 비동류 관계에 처한 ‘손님’임을 명기해야 한다. 손님이 주인집에서 악행을 저질렀다면 주인보다 천백배의 질책을 받을 것은 인간세상의 지극한 당연지사이다. "청년경찰"은 민족 화합과 중한 두 나라 공동 발전을 저애하는 반작용적 문화상품이다. 여기서 묘사된 조선족의 일그러진 모습은 순수한 파괴적 비판으로서 우리가 뜨거운 항의를 제출하는 건설적인 반비판도 지극히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의 창을 활짝 열고 비판, 반비판과 자기비판을 동시 진행하는 개명하고 정의로운 행동으로 생동한 조화마당을 조성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이렇다면 조선족은 숙성한 모습으로 세인 앞에 용립(耸立)할 것으로 보아진다. 비판을 거부하는 심리는 인간이 고유한 본능이다. 그러나 ‘비판이 싫다면 비판을 달갑게 받으라’는 이성적 교시가 우리 민족 비판의 문화 속에 뿌리 내리기를 기원한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7-10-12
  • 민족문학사의 텃밭에 더불어 피고지고- 김혁
    ● 김 혁(재중동포소설가) 8월 15일 그날, 문인들과 함께 윤동주 생가에서 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활동을 마치고 돌아 오던 귀로에서 수상소식을 접했습니다. 10대에 등단하여 문단이 제정 한 문학상을 두루 수상했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해외에서 날아 온 희보(喜報)에 또 한 번 문학도 시절 첫 문학상을 수상했을 때처럼 저으기 격정에 꺼둘리는 나를 느꼈습니다. 금번의 수상작인 “춘자의 남경”은 조선족 문단에서 처음으로 되는 위안부 소재의 장편소설입니다. 불과 수십 년 전에 한국과 중국의 우리의 할머니 세대들은 일본군의 추악한 만행의 희생자로 전락되었습니다. 수십 만의 여린 하얀 꽃들은 누런 제복의 일본군에 끌려가 청춘을 검게 유린당했습니다. 소설의 들머리에 나는 지난 세기 일제가 자행한 북간도 지역에서 일어난 장암동 대참안을, 말미에는 고도(古都) 남경에서의 대학살사건을 필묵으로 세세히 재현했습니다. 그 나락에서 몸부림쳤던 우리 겨레의 수난을 눈물로 적었습니다. “춘자의 남경”은 중국작가협회에서 번역지지작품으로 선정되여 이미 번역을 마쳤으며 곧 우리말과 중국말로 출간되게 됩니다. 한국에서도 일전 출간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동안 오로지 문학에 매진하면서 느낀 바이지만 우리 조선족은 비록 광대한 중국땅에서 변강의 오지에 위치해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 문학의 지정학적 위치는 “변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주민족으로서의 중국조선족은 지난19세기 후반부터 고향을 잃은 설음을 안고 통한의 강을 건너 중국으로 이주하여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청국인들의 땅에서 개간을 시작하고 일제와 항쟁하면서 새로운 기원을 열었습니다. 거치른 땅의 개척과 피어린 항쟁의 와중에도 “이역 하늘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들의 “거친 꿈”은 문학의 한 형태로도 만개되었습니다. 이 무렵 안수길, 강경애, 최서해 등이 이 곳을 주무대로 문학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온 겨레가 애대하는 윤동주도 바로 이 곳에 태줄을 묻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족 작가 김창걸과 시인 이욱 등을 배출했으며 이들이 바로 조선족 문학의 비조(鼻祖)로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문단에는 또 “조선족의 루쉰”으로, “구 소련의 량심” 솔제니친과도 비견되는 “조선족문학의 거목” 김학철 옹이 있습니다. 이들이 이룩한 눈부신 문학적 유산은 한민족 디아스포라 문학의 한 전형이 되였고 이들은 한민족 문학사의 텃밭에 더불어 장려(壯麗)한 꽃으로 피어 올랐습니다. 조선족 문학은 한민족 문학과 정신적, 문화적 연계를 확보해 오면서 중국의 역사 변천과 그 속에서 영위하고 있는 조선족의 삶을 나름의 서정과 서사의 힘으로 보여주어 왔습니다. 그러할진대 이질적 문화를 수용하면서도 우리 문화를 승계하고 다시 모어로 담아내는 우리 조선족문인들의 고심이야말로 더욱 값진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의 수상에 저는 더 다른 가치와 소중함을 부여 해 봅니다. 그날 우리 문인들은 복원 된 명동학교 옛 터에서 윤동주네가 불렀던 교가를 목청껏 열창했습니다. 이 시각 그 교가의 한 구절이 떠 오르는군요. 흰 뫼(백두산)가 우뚝 솟아 은택이 호대한/ 한배검(단군)이 깃 치신 이 터에 /그 씨앗 크신 뜻/ 넓히고 기르는... 필대를 올곧게 고누고, 민족을 위한 일에 일필(逸筆)하고저 하는 저의 소명의 의지에 격려의 감로수를 부어준 한국문인협회에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7년 9월 1일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7-09-03
  • 청년경찰과 조선족
    ●석운우 어김없다. 한국영화에 또 다시 조선족이라는 클리셰가 사용됐다. 지난 수년간 한국영화에 등장하는 조선족은 어김없이 범죄자였으며 그 모습 또한 점점 뚜렷하고 과감하게 묘사되고 있다. 결국 한국영화에서는 어째서 조선족을 악랄한 범죄자로 묘사해야 하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고 이성적인 판단이 조금은 흐려지는 분노감마저 유발한다. 무책임하게 자행하고 있는 한국영화의 조선족 이미지 사용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얼마 전 액션/코믹 장르라는 '청년경찰'이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액션과 코미디라는 장르를 이해하고 아무리 웃음으로 장면들을 승화시키려고 해도 쉽게 되지 않았다. 불가능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청년경찰은 무례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지독하게 무례한 영화다. 영화 줄거리는 두 명의 경찰대생이 납치당하는 여자를 구출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담고 있다. 물론 여기에도 문제는 존재한다. 남자의 도움이 없으면 탈출이 불가능한 여자를 내세움으로써 여성을 사회적 약자로 치부하는 이 영화는 젠더 평등을 실현하고자 하는 현대 사회의 방향성과 정반대를 보고 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인종이나 민족을 차별하는 제노포비아(Xenophobia) 요소에서 기인한다. 위에 말한 대로 이 영화는 액션 장르가 포함되어 있다보니 주인공과 싸울 악당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 악당이 뜬금없이 조선족이라는 것이다. 대체 조선족을 사람이나 납치하고 죽이려고 하고 장기적출까지 서슴지 않는 대상으로 보는 것은 이 영화를 제작한 감독이 생각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라는 물음이 들게 한다. 조선족은 영화 '황해'를 시작으로 한국 영화에서 그릇된 시선을 받으며 등장했다. '황해'의 주인공이 돈을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살인청부업자의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다. 영화 '신세계'에서는 이름도 없는 그냥 연변 거지다. 이 인물들 역시 돈을 위해서 여자를 잔인하게 폭행하고 납치에 살인까지 자행하는 인물들이다. 다른 영화에서도 조선족의 역할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쯤 되니 문제가 심각해졌다. 조선족을 멋대로 인식하고 판단하고 잣대질하면서 전부를 싸잡아 시궁창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자국인을 해하는 악당이 타국인이었으면 하는 이기적이면서 터무니없는 욕심으로 만들어진 피해자는 조선족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황해'나 '신세계'가 제법 잘 만들어진 영화임에는 이견이 없다. 인간의 본성과 탐욕, 배신 등 감정표현들이 괜찮은 방식으로 나열되어 있으며 배우들의 열연은 영화와 잘 어울렸다. 그렇다고 하여도 영화를 보고 난 뒤에 남았던 찝찝함은 가시지를 않았다. '황해', '숨바꼭질', '신세계'로 이어진 조선족의 악당 이미지는 이번 청년경찰에 들어서서 결국 정점을 찍어버렸다. 애꿎은 대림동까지 범죄자들이 거주하는 소굴로 만들어버렸다. 이러한 각인을 누구도 책임지지는 않고 있다. 물론 조선족을 경계하는 한국사회의 사고를 전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 한국에서 일어난 끔찍한 살인 사건이 조선족 출신에 의해 자행됐다는 사실을 묵과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 사건이 조선족의 연대책임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을 지금의 한국영화에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자행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이러한 상처는 다른 영화를 통해 약간이나마 치유를 받는 것이 전부이다. '내 이름은 칸'이라는 영화는 인종이나 민족이 차별을 당함으로써 겪는 아픔에 대해서 조선족을 대신해 말해준다. '9.11 테러' 이후 미국 내에서 무슬림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고 주인공과 가족들은 그로 인해 피해를 보게 된다는 줄거리의 영화로써 악행을 저지른 그 당사자나 집단이 아님에도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탄압과 멸시를 받는 사람들이 겪는 아픔을 묘사한 이 영화야 말로 한국영화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다. '청년경찰'을 연출한 김주환 감독은 시사회 때 “냉전 때의 미국은 늘 구소련을 적대자로 그려냈다. 지금 한국 사회를 얼어붙게 하는 대상을 찾다 보니 극적 구조상 이렇게 됐다. '신세계' 이후 많은 영화들에서 이런 묘사들이 등장한다. 편견이라기보다는 영화적 장치로 너그럽게 봐주시길 바란다.”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김 감독은 본인이 만들어 놓은 무책임한 장치가 조선족에게 얼마나 큰 아픔을 주고 있는지 모른다. 그 영화적 장치로 인하여 생긴 편견들과 싸우는 것은 온전히 조선족의 몫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냉전시대의 미국이 소련을 바라봤던 시점을 한국이라는 국가가 조선족을 바라보는 시점에 대입하는 것 또한 비이성적인 대입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조선족을 무너뜨려야 할 적으로 보는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국영화는 진지하게 그에 대한 대답을 내놓아야만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7-08-29
  • 지배굽이와 개산툰
    ● 허성운 어릴 적에 밤하늘에 보이는 별빛이 수백 년 전에 출발한 것이고 또 지금 별에서 출발한 빛이 수백 년 뒤에야 사람들에게 나타난다는 글을 책에서 읽어 본적이 있다. 그 옛날 샘물터에 내려앉은 총총한 별빛들이 파묻힌 개산툰 땅들을 두루 밟으며 걷고 있노라면 땅속에 묻힌 샘터 별빛들은 두만강 강물처럼 흘러 흘러서 마음속에 흘러든다. 재난과 가난이 먹장구름처럼 드리워 캄캄했던 그 옛날에 가진 것 하나 없이 빈주먹으로 꿈 하나를 보따리에 넣고 별빛처럼 깜빡이는 삶의 섬광(閃光)을 따라 두만강을 넘어 연변 땅으로 퍼져 들어와 함경도 사람들의 특유의 그 끈질긴 노력으로 메마른 땅을 기름진 옥토로 가꾸어왔다. 오늘날 다시 되돌아보면 그 시기 수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첫 발자국을 들여 놓았던 곳이 바로 개산툰이다. 사람들은 흔히 개산툰(开山屯)이란 지명을 산이 열린 곳에 자리 잡았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자를 풀이하여 단순하게 해석하여 왔다. 석문에서 형제봉이 돌문처럼 서있고 그 돌문을 나서면 산이 쫙 열린 듯 광소, 광종, 선구 자동 등 마을들이 별처럼 널려있어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허나 개산툰 지명은 사실 20세기 2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야 쓰이기 시작한 지명으로서 1933년도 광궤철도로 바꿔 놓으면서 역 명칭으로 정식으로 불리였고 그 후 차츰 역전 부근 지역을 뜻하는 지명으로 고착되었다. 그 시기 개산툰 지명은 절과 관련되어 있는 명칭으로 풀이 된다. 개산툰 역에서 산 굽이를 에돌아 들어가면 애민촌이라고 부르는 마을이 나타나는데 옛날에는 이 골짜기를 절골 이라고 불러왔고 사료에서는 개문사 사동으로 표기되어 있다. 두만강을 사이 두고 행인평(애민1대)과 마주하여 있는 조선 상삼봉 형제바위 밑에도 절이 자리 잡고 있어 이 두 곳 사람들의 발길이 서로 끊이지 아니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거기에 세월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두만강 양안의 이런 큰 절과 이름 모를 암자들 이를테면 20세기 초에 탄앞 (애민7대)마을에 있었던 개인 절집 같은 암자들이 옹기종기 들어 앉아 스님들의 독경소리가 산골짜기를 메웠었던 적이 있었다. 절이 세워지기 전에도 산이야 그 가슴을 열고 있었지만 특히 절이 세워진 후에야 산이 열렸다고 하는 开山 의미를 짚어보면 그것은 어두운 산에 문명의 등불을 밝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개산툰 지명을 절골의 이름 있는 사찰 혹은 이름 없는 암자의 기와 파편에서 찾을 수도 있으나 보다 과학적으로 풀이한다면 빛이 밝아온다는 뜻으로 통하는 불교적 색채를 지닌 지명으로 바라보게 된다. 어원적으로 한자 개(开)를 풀이하면 열리다 는 단순한 어미로 풀이 되지만 북방언어체계에서 바라보면 개(开)자 음은 빛(光)을 뜻한다. 개똥벌레는 몽골어에서는 gerelt horhoi 빛이 나는 벌레라는 뜻을 지니고 만주어에서 gerhen은 빛을 말하고 만주어 gehun는 햇빛이 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우리말에서 날이 갠다는 뜻과 동일하다. 이제 다시 개산툰 지역 지명들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광서 연간에 이 지역에 녕원보를 세우고 그 아래에 개운사 개태사 개화사 개문사와 같이 개(开)자로 시작되는 사(社)들과 광소사 광종사 광덕사 광화사와 같이 광(光)로 시작되는 사(社)들 지명이 나타난다. 맨 앞 글자에 개(开)와 광(光)자가 절묘하게 대응되어 붙여진 이 지역 지명들은 모두 빛을 나타내는 의미가 유난히 돋보이며 한 계열을 이루어 정체성을 띤 지명으로 보여 진다. 이런 맥락에서 광복 전 광개촌 명칭과 해방 후 광개향 이라고 부른 지명이 이런 의미를 잘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과거 두만강 양안은 울창한 나무들이 우거져 있어 그 경치가 아름다웠다. 두만강에는 강을 따라 이동하는 뗏목이 경관과 어우러지면서 수려한 산수풍정과 조화를 이뤄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펼쳐 놓았다. 거기에 달빛 밝은 밤이면 고기잡이배들의 불빛이 두만강 강변에 어리여 아름다운 야경을 이루었다. 뫼(山)가 열리여(开) 두 팔을 쫙 벌리고 뭇 중생을 품 안으로 받아들여 힘없이 사는 백성의 삶을 어루만진다. 산이 열리고 절이 서니 꽃이 더 아름답게 피고 생명이 더 화사하게 움트는 법이다. 우리가 그 시기 개산툰을 희망의 빛 동네라고 부르게 되는 것은 호천개의 김영렬 선교를 중심으로 북관(北關, 북간도) 12종도로 부르는 이들이 별빛처럼 간도 각지로 퍼져 나가 최초로 서구문명을 연변 땅에 전파였기에 가능하다. 연변 최초의 천주교는 개산툰의 호천개에서 공동체를 이루는 기틀이 마련되어 연변 전역으로 뻗어나가 대교동이 세워졌고 삼원봉본당과 용정본당이 설립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리동촌 강백규와 같은 유명 인사들이 일찍이 이곳에 학교를 세우고 문명의 등불을 켜놓았기에 개산툰은 어두운 세상에 수많은 이주민들의 발길을 밝혀주는 빛의 등대로 거듭날 수가 있었다. 그런데 개산툰이란 지명해석은 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개산툰 원래의 지명은 무엇이라고 불렀을까 하는 핵심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천도경편철도 변천사는 개산툰 지명 연혁과정을 밝혀주는 유익한 자료가 된다. 이 자료에 따르면 개산툰은 최초에 地坊으로 표기되고 그 후 図們江岸으로 적혀 있고 나중에 開山屯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1920년대를 전후하여 일본인들이 쓴 여행기에서는 地坊洞 이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작가 이문열이 쓴 불멸2에서는 안중근이 처음으로 간도에 들어선 지점을 화룡현(和龍縣) 지방전(地坊典)이라고 쓰고 있다. 먼저 図們江岸이라는 이름을 살펴보기로 하자. 천도경편철도는 운행초기에 민간업체들이 주도로 맡았기에 재력이 충족치 못하여 개산툰과 상삼봉 사이의 다리조차도 가설 못하고 배나 도르래로 화물을 운송하였다. 그러던 어느 해 콩과 잡곡이 산처럼 쌓여 적치되자 속이 탔던 화물운송사에서 돈을 내여 다리를 놓아 운송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 시기에 잠간 쓰였던 図們江岸이라는 역명은 사실 콩과 잡곡이 산처럼 쌓인 역이였기에 응당 豆満江岸이라고 표기해야 한다고 예전 로인들은 주장하여 왔다. 북간도지역은 콩의 원산지의 하나로서 중국 역사책인 당서에는 발해 사람들이 메주를 성처럼 쌓아 놓았다고 적고 있다. 천도경편철도를 이용하여 일본은 연변의 콩을 유럽에 대량 수출하여 엄청난 이익을 얻었다. 이제 마치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서로서로 엉키고 설키여 마구 뒤엉키어 있는 개산툰 지명을 풀어낼 수 있는 관건적인 실마리로 地坊이라는 지명을 살펴보자. 도도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두만강 푸른 물은 수많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오랜 세월 두고 천평벌을 무법으로 훑고 지난 간 옛터들은 폐허로 되고 아픈 과거를 흔적 없이 지워놓았다. 과거에 두만강은 웃 물학성과 아래 물학성 사이에 자동물과 호천개 강물을 받아들이면서 두 갈래 물줄기로 갈라지어 흘렸다. 아래 물학성을 기점으로 고섬까지 크고 작은 섬이 이어지다가 노째굽이에 이르러 다시 합치여 흘러 내려갔다. 그 시기에 지명과 더불어 생겼던 많고 많은 이야기들은 두만강의 푸른 물에 씻기어 서서히 잊혀졌다. 지금의 개산툰 기차역으로부터 종이공장일대에 이르는 산굽이를 따라 오랜 옛적부터 초라한 땅굴집과 농막집들이 띄엄띄엄 들어앉았는데 그 시기 아래 물학성 쪽을 바라보면 넓은 호수를 방불케 하였고 늙은이들은 이 일대를 지배굽이라고 불러왔다. 오늘날에 와서 지배굽이라는 땅이름은 역사 뒤안길에 사라진 죽은 지명으로 되어 있지만 개산툰 지명 연구에는 관건적인 실마리를 제공하고 먼지가 두텁게 쌓인 문헌자료에서 확실한 증거를 끄집어 낼 수 있는 귀중한 단서를 제공한다. 우에서 언급하였지만 한국에서는 안중근이 1907년 북간도에 들러선 첫 지점 지명을 화룡현(和龍縣) 지방전(地坊典)이라고 적고 있지만 지배굽이(地坊曲)로 표기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본다. 그리고 1920년대를 전후하여 일본인들의 만주 여행기에서 적은 地坊洞은 지배굽이를 저들 나름대로 한자로 옮긴 지명이다., 한 순간 속에도 천년 세월이 들어 있다는 말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단종실록편 (1455년) 기록에는 종성(鍾城) 서쪽 20리 강외江外 수주(愁州)라는 지명이 튕겨 나온다. 옛 문헌文獻에 기록에 따르면 강외江外 수주(愁州)가 개산툰 지배굽이로 추정된다. 만주어에서 근심愁 을 뜻하는 말로 jobocun 라고 하는 단어가 있는데 한자 愁의 단순한 근심걱정 뜻을 넘어 염려한다는 함의도 내포되어 있다. 함경도방언 자식 지배 쎄다는 말은 아들딸들에 대하여 어머니가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써서 걱정한다는 강한 모성애를 드러내는 뜻으로 만주어 jobocun와 그 뜻을 같이 하고 있다. 개산툰 옛 지명 지배굽이는 수주(愁州)라는 만주어 말로 풀이가 가능하다. 놀라운 것은 함경도 종성은 강내 江内 수주(愁州)로 표기되고 개산툰 일대의 수주(愁州)는 江外 수주(愁州)로 적혀 있어 마치 쌍둥이처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江外 수주(愁州) 지명표기는 16세기 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강내 수주는 후에 종성으로 그 명칭이 바꾸게 된다. 종성 시가지에 수항루라는 오랜 건물이 있는데 최초에는 뇌천각이라고 부렸고 장대將台로 썼다. 개산툰에도 장대將台로라는 지명이 있는데 개산툰 종이공장 세워지기 이전에 그곳에 우람진 바위들이 많았다. 그중 북바위라고 부르는 바위가 강가에 들어 앉아있어 고요한 밤이면 귀신 울음소리를 냈다고 로인들은 전하고 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강 양안에 쌍둥이처럼 나타난 지명은 종성의 금산(禁山)과 덕신향 큰산(金山 )지명 ,종성 함지산과 회경 막치기골 작은 함지산 지명, 종성 국시고개와 덕신향 상국시 석정향 중국시 월청향 하국시 등 지명들이다. 오늘날 지배굽이란 이름은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처럼 역사 속에 파묻히어 망각되어 온지도 어느덧 백년 세월에 가까워 온다. 과거의 지명흔적들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세월의 무상(無常)함속에 어둡고 우울하고 과묵한 옛 선인들처럼 지배굽이 옛 지명은 광채 잃은 눈빛으로 남산 언덕위에 앉아 물끄러미 천평벌과 개산툰 작은 시가지를 굽어보며 눈가에 그렁그렁한 이슬방울을 맺는다.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 한 방울 무게는 깃털처럼 가벼울 수도 있지만 때로는 바위덩어리보다 더 무거워서 일어서지 못하고 엎드려 울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연변 개산툰 지명 변천 과정을 다시 되돌아보노라면 오랜 세월 속의 쌓이고 쌓인 옛 선인들의 피와 땀과 슬픔과 한이 쏟아지어 무거운 눈물로 한 방울 한 방울 고여 흐르는 경우가 되겠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7-08-25
  • [칼럼] 경찰 공무집행 중 사고에 따른 개인 구제 제도 필요
    ●이치수 경찰이 범법자를 검거하는 공무집행 중 상대의 폭력을 제지하려다 전치5주의 상처를 입혔다면 이는 정당방위에 해당하는 것일까. 현행법상 이는 사적제제에 해당돼 처벌될 가능성이 많다. 상대의 위해행위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대응이 정당방위였더라도 처벌될 때가 있어서 법적 판단기준과 처벌수위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특히 가혹한 처벌에 따른 공적 구제제도가 전무해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형법 제 21조 1항에 명시된 정당방위란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행동을 말한다.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행위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벌하지 않고, 야간 기타 불안스러운 상태 하에서 공포, 경악, 흥분 또는 당황으로 인한 때에는 방위행위를 벌하지 아니한다고 정하고 있다.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취지로 행동했더라도 이견은 생긴다. 과거가 아닌 위협 행위를 끝내기 위한 정당방위 시행 시점의 행동이더라도 이에 대한 판단기준에 따라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한 경찰관이 주폭을 제지하다 합의금 5천만 원을 물어주고 소송에 시달린다는 기사가 22일 보도됐다. 지난 17일 경찰 인트라넷(내부 통신망)에 서울 한 지구대 소속 박모(34) 순경이 지난해부터 주폭(酒暴•술에 취해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과 소송전(戰)을 벌인다는 사연이 실린 데 따른 것이다. 주점에서 난동을 피운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박 순경은 만취 상태의 남성(34)을 지구대로 데려왔는데 이 과정에서 때릴 듯한 자세를 취한 남성을 제지하려다 목 부위를 밀쳐 넘어뜨렸다. 이 남성은 바닥에 부딪혀 머리 등에 전치 5주의 상해를 입었다며 형사와 민사소송을 냈고, 박 순경은 취객을 폭행한 혐의(특가법상 독직폭행)로 기소됐다. 박 순경은 형사합의금 5천만 원과 치료비 300만원을 물었으며, 지난 7월 법원으로부터 징역 6개월에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만취 남성이 위협적인 행동을 했지만, 박 순경이 주먹이나 팔을 잡는 방법으로 제압이 가능했다"고 봤다. 하지만 경찰 내부에서는 이 판결에 대해 "위협을 받는 찰나의 순간에 나온 대처에 너무 엄격한 잣대를 댔다"며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경찰의 공무 집행 중 범죄자로부터 위협을 당하는 경우는 부지기수인 것으로 알려진다. 일례로 2015년 기준 공무 집행 방해 사범은 1만4천556건에 달한다. 하지만 이에 적극 대응하다가는 민원과 소송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아서 경찰의 ‘무관용 원칙과 대응’ 대책은 매번 수포로 돌아갈 때가 많다. 정당방위란 부작용 및 악용의 폐단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서 엄격해야 한다. 반면 공적 영역에서의 사적 제재는 처벌받는 것이 당연하다. 이 경우, 그럼에도 의도와 상황에 따라 방어행위가 사적제재로 비친 것에 지나지 않는지는 법적 판단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공무집행 과정에서의 억울함을 구제할 길은 없는지 다시 한 번 고심해봐야 한다. 사적제재란 국가 또는 공공의 권력이나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 개인이나 사적 단체가 범죄자에게 벌을 주는 일이다. 즉 내가 상대에게 법익을 침해당하더라도 그 법익을 침해하는 것은 정당방위가 아닌 사적제재에 해당한다. 박 순경의 사례가 만약 상대의 위해 행위를 벌주기 위한 것이었다면 사적제재로서 처벌대상이다. 반면 그것이 아닌 단순 방어차원에서의 행위였고 상대의 피해여부를 가늠하지 못했다면 이는 또 다른 판단의 여지를 둬야 한다. 박 순경은 이번 사건의 합의금 마련을 위해 무리한 대출을 했고, 딱한 처지를 안 동료 경찰들이 십시일반 사비를 모아 모금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7일 인트라넷에 관련 글이 실린 뒤 이틀간 경찰 5천730명이 모금에 참여하면서 박 순경의 계좌에는 약1억4천만 원이 쌓인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내부에서는 공무를 집행하다 억울한 일을 경험한 경찰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 많았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공무집행방해사범에 대해서는 엄벌해야 한다. 이번 일을 계기로 공무집행 과정에서의 부담을 한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릴 것이 아니라 성격에 따라 공적 구제제도를 이용하도록 관련 대책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그래야만 경찰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책임과 사명감을 적극 발휘할 수 있다. 아울러 우리나라는 특히 음주로 인한 사건이나 사고에 대해서는 관대한 면이 있다. 우리 사회의 안녕과 질서 유지를 위해서 앞으로는 음주로 인한 사건 등은 가중 처벌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도 마련해 나갈 필요가 있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7-08-22
  • 모택동 왜 ‘유소기 제거’ 결심했을까? ④
    1965년 1월 3일, 제3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유소기가 재차 국가주석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이 날 모택동은 어느 한 작은 회의에서 이름은 밝히지 않고 유소기를 비판하였다. 그는 <4청> 공작대는 많은 인력으로 40일간이나 학습하면서 농촌으로 내려가지 않는다고 질책했다. 이에 유소기가 공작대가 집중적으로 학습하는 것은 우경주의를 반대하고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해석하자 모택동은 “뭐 우경주의를 반대하고 방지하는거라구?! 학습할 수록 멍청해지는 일군들이라구. 다른 사람의 우경은 반대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결과적으로 우경으로 나아가고 있다구”라고 하며 정면으로 유소기를 공격했다. “대중한테 의거하지 않고 여기저기 쏘다니기만 하니 결과는 뻔하지 않수?! 그리고 당신들이 제정한 두번째의 <10조>는 너무 길고 복작해.” 그러면서 모택동은 <4청>운동에 있어서 첫째 문건을 너무 많이 읽지 말고둘째 사람이 너무 많아서도 안되며 셋째 여기저기 쏘다니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중에 의거하고 소수의 나쁜 분자를 청산해야 한다. 문제가 있으면 청리하고 문제가 없으면 청리하지 말아야 하며 근거가 없으면 기어코 근거를 찾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1월 14일 모택동은 또 각 지구급 당위서기들이 모인 장소에서 다음과 같이쐐기를 박았다. “1963년 5월 항주회의에서 출범된 제1개 10조가 있는데 3개월이 지나 또 9월에 북경에서 뚱딴지같은 10조가 나왔다. 근근히 3개월 사이에 그렇게 많은 경험들이 누적될 수 있단 말인가?!” 이러면서 모택동은 북경에 있는 2개의 <독립왕국>을 엄숙하게 비판했다. 모택동이 가르키는 2개의 <독립왕국>이란 바로 중앙서기처와 국가계획위원회였다. 그러자 그 누구도 모택동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중앙에서는 부랴부랴모택동의 지시정신에 근거하여 문건들을 대폭 수정, 내용상 17조를 23조로 변경하였으며 제목을 <목전 농촌사회주의 교육운동 중에서 제출된 일련의 문제>라고 달았다. 이 23조는 1월 14일 회의에서 토론 통과되고 모택동의 심열을 거친 뒤 즉시 각 기층으로 발부되었다. 당시 모택동은 23조를 수정하면서 <4청 및 4불청간의 모순>과 <당내외 모순의 교차>란 제지법에 대해 신날하게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제기법은 사회상의 4청, 4불청간의 모순을 설명한 것도 아니고 당내외 모순의 교차에 대해 설명한 것도 아니다. 소위 4청 및 4불청은 지난날 역사상 그 어떤 사회에서도 사용했었고 소위 당내외 모순의 교차 역시 그 어떤 당파에서도 사용하던 것으로서 모두 오늘날 모순의 성질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이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 논법으로 될 수 없다. 이 글에서 모택동은 비록 유소기를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이를 계기로 모택동과 유소기의 쟁논은 이미 공개화되었으며 당과 나라의 대사를 관심하는 중상층 간부들은 모두 이를 두고 걱정했다. 그것은 모택동과 유소기 사이의 분규는 모택동과 팽덕회 사이의 분규와는 성질상 근본 다르기에 당의 분열을 초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자 회의 기간 주덕과 하룡 등 지도자들은 유소기를 찾아 전반 국면을 돌보아 심중할 것과 모택동을 존중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회의 후 중앙조직부 부장 안자문은 정치국과 서기처 동지들의 부탁을 받고유소기를 만나 “두분 주석사이에 모순이 생기면 전반이 혼란해집니다. 그리니 그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모주석과 충돌하면 안됩니다”라고 간청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유소기는 많은 동지들의 의견을 수렴하였다. 그는 주동적으로 모택동을 찾아가 담화하면서 자아비판을 하였으며 후에 재차 자기 집에서 연속 부분적 중앙 지도일군들이 참가한 생횔회의를 열고 자신이 모택동을 존중하지 못한 착오에 대해 검토하였고 여러 지도 일군들의 비판을 접수하였다. 하지만 모택동과 유소기 이 2명 주석간 사이에 생긴 분규의 흔적은 봉합되기가 힘들었다. 그 뒤에 있은 약 1년간 표면상으로는 유소기가 계속 중앙의 1선 사업을 주관한다고 하였지만 모택동은 더 이상 유소기와 중앙서기처와는 그 어떤 사업토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때로부터 모택동은 유소기를 제거할 결심을 하였으며 모택동과 유소기 사이의 분규는 결국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을 발동한 동기로 되기도 했다. 1966년 8월 5일 모택동은 <사령부를 포격하자>란 대자보에서 1964년 중앙 1선 지도자들의 형식적으로는 좌적이지만 실제로는 우적이었던 경향을 제기하다 싶이 모택동이 유소기 제거를 염두에 둔 것은 1964년부터였다는 분석도 있다. 그리고 1970년 모택동이 미국 작가이며 기자였던 스노를 회견했을 때 “주석님은 언제 유소기를 제거할 결심을 했는가?” 라고 묻자 “아주 일찍했다”고 하면서 1965년 1월 <23조>를 제정할 때 중간의 제1조에서 언급한 <4청>의 목표가 바로 당내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를 족치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1964년 말부터 1965년초 사이에 모택동은 수차례에 거쳐 자기 신변에 “중국의 흐루쵸프”가 있다고 언급, 그 “중국의 흐루쵸프”는 바로 유소기를 말한 것이었다. (끝) 편역: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7-07-21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