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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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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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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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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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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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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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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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지명과 연변지명①왜랑동부터 워렁바위골까지
    [동포투데이] 지명 속에는 그 땅에 정착하여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사람들의 눈에 비친 자연모습들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고 우리문화 속에 스며든 외래문화의 영향이나 문헌에는 나와 있지 않은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찾아낼 수도 있다. 최초의 地名을 적을 시기에 음운체계가 다른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어떤 것은 비슷한 음을 취해 적기도 했고 어떤 것은 뜻을 취해 적기도 했다. 그 가운데 허다한 지명은 철저하게 소리를 취한 음차(音借))를 위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원래의 뜻과는 더욱 더 거리가 먼 지명들이 생겨났다. 중국 길림성 연길시 소영향에는 와룡동이 라는 마을이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중소학교 도덕교양자료집으로 편찬한《내 고향연변》의 해설에 따르면 1907년 국자가 서쪽 교외의 와룡동 마을에 창동강습소가 세워졌고 1935년 학교 졸업생들이 와룡동 산비탈에 사은기념비(师恩纪念碑)를 세웠다고 기술하고 있다. 1986년 연길시 지명위원회에서 편찬한 연길시 지명지에는 마을 서쪽 산세가 마치 누워있는 용의 자세를 방불케 하여 와룡동(卧龙洞)이라고 명명하였다고 적고 있다. 허나 예로부터 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은 와룡동을 왜랑동으로 불러왔다. Wehe 돌(石头)의 관형어 Wehengge의 (石头的) 만주어 음을 정확하게 전하고 있다. 와룡동은 사실상 왜랑동으로서 돌이 많다는 만주어 음역이다. 토박이 노인들은 어릴 때 상발원에서 마을로 올라가는 산기슭에 돌들이 널려있어 숨바꼭질 하던 옛 이야기를 종종 꺼내 군 한다. 와룡동 서쪽에 위치한 소백석구(小白石)와 동쪽에 위치한 석마동(石磨洞) 모두가 돌이 들어있는 지명으로서 와룡동의 지명과 그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풀이 된다. 사실 연변지명가운데 와룡동이라고 명명한 곳이 여러 곳이 보인다. 용정시 개산툰 부근의 와룡동도 밭에 돌들이 많아 발에 자주 걸렸다고 한다. 이 지역 노인들도 와룡동을 왜랑동으로 불러 왔다. 와룡동에서 서쪽으로 5리쯤 올라가면 돌볏이 라는 마을이 나타난다. 예전에 돌볏마을은 웃 돌볏와 아래 돌볏로 나누어 지여 있었는데 60년대 초에 웃 돌볏가 폐촌으로 사라졌다. 웃돌볏 마을은 두만강 연안에서도 역사가 오랜 마을이다. 옛 사람들은 갔어도 그 역사의 발자취는 그대로 살아남는다. 오래 전에 이미 폐촌으로 된 웃돌볏 마을 뒤 산에는 아직도 커다란 너럭바위로 쌓여진 거대한 산봉이 돌탑처럼 우뚝 솟아있다. 마치 수없이 많이 부서지고 깨어지면서도 자신의 꿈을 찾아 치열하게 살아왔던 이주민들의 너럭바위처럼 무거운 삶들이 그대로 녹아내려 굳어진 듯이 파란만장한 세월 속에 잃어버린 마을의 영원한 이정표로 남아 그 자리를 외로이 지켜 서있다. 연변의 화룡시 서성진 와룡촌은 산에 둘러싸여있는 꽤나 골이 깊은 산간마을이다. 지금은 마을들을 통합하여 와룡촌으로 불리우지만 예전에는 와룡촌 마을과 가까운 곳에 어랑촌 이라고 부르는 자그마한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에서 와룡(whe)과 어랑(olhe)이란 지명은 모두 바위를 나타내는 말로서 이 지역 지형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만주어에서 바위의 의미를 가지는 wehe는 여진어에서 olhe로 나타나고 있다. 돌과 바위로 유명한 함경북도 명천군의 아감면과 경성군의 어랑면 지명은 모두 여진어의 olhe라는 음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새겨진 것들이다. 한국지명에는 언뜻 보면 만주어 wehe와 여진어 olhe라는 문자가 들어있지 않지만 꼼꼼히 따지고 보면 돌과 바위의 뜻을 지닌 지명에 숨어 들어있다 .전라남도 영암군 ‘월출산’의 명칭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백제 때는 월나악(月奈岳), 고려 때는 월생산(月生山), 조선시대는 ‘월출산(月出山)’이라 불렀다고 적고 있다. ‘月奈>月生>月出’으로 변화했는데 두 번째 글자만 ‘奈>生>出’로 오랜 세월 두고 바뀐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영암군 지명도 백제 때에는 월나군(月奈郡)이었는데 통일신라 때에 영암군(靈巖郡)으로 바꾸었다고 했다. 월출산 지명 月奈岳과 영암군 지명 月奈郡은 만주어에서 바위를 뜻하는 wehe 왜랑이란 음과 근접되여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동석(動石)은 월출산 구정봉 아래에 있다. 특히 층암(層巖) 위에 서있는 세 개의 돌은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는데, 서쪽으로는 산마루에 붙어 있고, 동쪽으로는 절벽에 임해 있다. 군의 이름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는 영암(靈巖)군이라는 지명은 이 신령한 바위에서 유래했다는 말로서 月奈는 Wehe 돌(石头)의 관형어 Wehengge의 (石头的) 만주어 음과 근접하고 있어 월출산(月出山)의 옛 지명 月奈岳과 영암군(靈巖郡)의 옛 지명 月奈郡은 바위산 바위고을이라는 의미를 정확하게 전하고 있다. 전라북도 진안군 옛 지명도 옛 문헌들을 뒤적인 결과 희한하게도 월랑(月良 혹은 越浪)으로 적어 있다. ‘월랑’은 백제시대에 부르던 월량(月良)이란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현재도 진안의 대표적인 경관을 ‘월랑팔경(越浪八景)’으로 부르고 당지 주민들은 여전히 월랑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진안의 팔경을 꼽은 ‘월랑팔경’ 중에서 으뜸가는 마이산은 바위산으로서 진안군 지명도 이 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면 월랑은 만주어wehe 음과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서울시 종로구 송월동(松月洞)은 송정동(松亭洞)의 「송」과 월암동(月岩洞)의 「월」자를 따서 송월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여기에서 월암(月岩)동은 원래 워렁바위라 하였고 이 바위가 있는 동네를 워렁바위골, 한자로는 월암동月岩이라 적어 왔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출판한 <<고지도를 통해 본 서울지명연구>>에서는 보름달처럼 둥글게 생긴 큰 바위가 있으므로 붙인 이름이라고 풀이하고 있으나 만주어의 wehe 라는 바위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지명에 사용된 한자들은 그 본래의 뜻과는 관련이 없이 발음만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당시의 지명을 의미로서가 아닌 소리에 따라 한자로 옮겨 적은 것이다. 月奈 月良 越浪 月岩역시 月달이나 浪 파도의 한자 의미와는 무관한 당시의 바위 wehe라는 소리를 옮겨 적은 것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지금까지 학자들은 月을 달 어음 변이 돌로 추정하고 지명을 해석하여 왔지만 月奈 月良 越浪 月岩의 소리 정체성에 주목하지 못하였다. 月奈 月良 越浪 月岩과 같이 옛 지명에 사용한 것이 여럿이 발견되고 이들 사이에 소리가 일정한 공통점이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를 실마리로 삼아 유사한 古地名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추정은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면 경상북도에 자리 잡은 불국사와 석굴암을 품고 있는 토함산(吐含山) 옛 지명 월함산(月含山) ,경기도 파주시 월롱역(月籠驛) 지명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이외에도 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승람)에 적혀있는 月良村面(경기도 이천부)이라는 지명, 이천시 부발읍에 있는 월량골(月凉 혹은 月浪) 지명이 이에 해당한다. 여진어의 olhe로 나타나고 있는 한국지명으로는 서울특별시 계남근린공원에 옮겨있는 우렁바위 ,전라남도 화순군 우렁바위이다. 한국에 어랑 만두라는 음식 이름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어랑이란 말은 산골을 말하는 뜻이고 어랑 만두는 그 지역에서 먹던 음식으로 알고 있으나 보다 더 정확한 뜻은 돌이나 바위가 많은 산간 지대를 말하며 어랑 만두는 이런 깊은 산간 지대에서 먹던 음식을 뜻한다. 이와 같이 지명 어원을 꼼꼼히 따지고 보면 우리 언어의 밑바닥에 스며든 북방민족의 여러 언어요소를 살펴보게 되고 여진족과 만족 거란과 몽고족이 우리와 가장 가까이 서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우리의 언어는 방대한 북방 언어계통에서 뻗어 나온 하나의 지류이다. 오늘 날에 와서 다시 돌이켜 보면 많은 북방소수민족들의 언어는 치열한 언어전쟁에서 이미 그 자취가 사라졌지만 함경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경상도 평안도 지명들은 그 지방의 언어와 더불어 거세찬 역사의 파도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우리 역사와 문화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이해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복잡하게 얽힌 지명들을 풀어나갈 수 있도록 관건적인 실 머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글 : 허성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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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17
  • 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7)
    우리는 작은 배를 타고 전복사육장으로 향발했다. 청산도의 전복사육장은 바닷가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었다. 전복사육장에 이른 우리는 사육장 이모 저모를 돌아본 뒤 사육장 일군이 건져올린 전복을 생 것 그채로 칼로 썰어서는 초장에 찍어 맛보았다. 물론 한두점씩 맛본 것이 아니라 양껏 먹을 수 있었고 술도 있었다. 나 또한 웬간히 술마시기를 좋아하는지라 또 전복안주가 푸짐한지라 약 반근 정도는 마신 것 같았다. 전복사육장에서 우리는 약 2시간에 거친 체험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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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09
  •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5)
    로마의 서류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이탈리아, 지점: 이탈리아 중부의 타이브강하류의 평원함의: 세계에서 가장 큰 로천박물관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753년에 어미승냥이가 구해주고 키워준 로모(罗慕)형제가 고대로마를 건립, 로마성은 그대로부터 고대로마제국의 발상지로 되었다. 기원전 1세기 로마는 방대한 로마제국의 서울로서 로마의 도시 문화와 건축은 쾌속발전을 이룩, 수많은 신선묘, 성당, 개선문, 기공주(记功柱)와 경기장 등이 건설되었다. 그리고 줄곧 로마제국과 이탈리아의 정치중심이었던 로마는 유규한 역사와 오래된 문화를 갖고 “영원한 도시”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개선문과 만신전 로마의 투수장(斗兽场)서쪽에는 기원 312년 콘스탄틴(君士坦丁)의 개선문이 있다. 콘스탄틴이 강적을 전승함과 더불어 제국을 통일한 것을 경축하여 세운 것이다. 개선문은 세개의 궁문이 있으며 개선문 전반 내외가 많은 조각들로 새겨졌 있다. 주제는 로마제국 각 시기의 중요한 사건들을 취급한 한부의 생동한 로마전쟁사이다. 만신전(万神殿)은 판테온(潘提翁) 신선전이라고도 하며 기원 2세기에 수건됐다. 고대로마 시기의 유일하게 보존돼 내려온 완정한 건축물이다. 만신전은 고대로마의 건축사들이 과학적인 계산방법과 정교한 건축예술을 표현한 건축사상의 기적이다. 잔혹한 투수장 고대로마의 투수장(斗兽场)은 정타원형으로 “대원형경기장”으로도 불리며 기원 80년에 착공, 유태인 전쟁포로 수만명의 신고끝에 10년이 되어서야 비로서 준공되었다. 여기서는 자극을 즐기는 로마귀족들이 야수와 야수, 야수와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 잔혹하게 박투하고 죽이는 장면을 구경하던 곳이었다. 그리고 이는 결국 노예계층의 반란을 불러 일으켰으며 고대로마 제국의 신속한 멸망을 초래하였다. 1084년, 게르만 사람들이 로마를 진공하면서 로마는 전쟁의 세례로 한차례 크게 받았고 이 투수장도 폐허로 되고 말았다.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7-05
  • 오묘한 세계대백과(36)
    중국의 소설 “서유기”에서는 손오공이 자기 몸의 털을 뽑아 훅- 하고 불자 순식간에 수많은 손오공이 나타나는 장면이 있다. 이는 진짜 신기했다. 기실 지금에 와서 생명복제의 기술은 더는 환상이 아니라 이미 현실로 되고 있다. 1996년 영국의 과학가들은 한마리의 양한테서 난세포를 채취하고 또 다른 한마리의 양한테서 유전물질의 보통 조직세포를 채취한 후 하나의 공각(空壳)내에서 결합시켜 하나의 성숙한 난세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난세포가 실험실에서 배태가 될 때 연구일군들은 그것을 다시 다른 제3의 양의 자궁안에 넣었다. 수개월후 제3의 양은 새끼양 “토리”를 낳았다. 토리는 세계에서 생명복제기술로 태어난 첫 양이었다. “토리”가 다른 양들보다 다른 점이라면 “토리”한테는 “아빠”가 없지만 “엄마”가 셋이 있다는 것이다. 생명복제는 복제, 복사 등으로서 원형의 물체 중에서 똑같은 복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며 그것의 외모와 유전인자가 원형과 완전히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런데 복제인간은 가능하게 매우 복잡한 사회적 윤리, 도덕 등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일부 생물기술이 발달한 나라들에서는 복제인간의 실험에 대해 금지령을 내리거나 엄하게 제한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7-05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3)
    ■ 김철균 1986년에 순자의 남편 김용환은 연변위생연수학교 부교장직에서 물러나 정령 이직을 하게 되었다. 이직전 김용환은 몹시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그는 1980연대 초 연변위생학교로부터 새로 선 연변위생연수학교 부교장으로 임명돼 전근하였고 그와 중 연변 노간부대학, 연변대학 의학원 통신학부, 연변위생연수학교 등 교육기지를 건립하는 사업에 많이 참여했다. 그러다보니 장춘이나 북경으로 출장다니는 일이 잦았다. 출장이란 30-40대 젊은이들한테는 구경도 할겸, 밖에 나가 안계를 크게 넓히는 일로 여러 모로 유익한 점이 많으나 이퇴직을 앞둔 중노년들을 놓고 보면 가장 힘들고 귀찮은 일이기도 했다. 특히 수십년동안 마누라가 해주는 된장과 김치따위를 먹는데 습관이 된 사람들은 객지생활이 일종 곤혹이나 다름이 없었다. 용환 영감이 출장갈 때마다 순자는 각종 짠지와 김치 그리고 명란젓갈 같은 것을 반찬을 한보따리씩 만들어 보내어 용환 영감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 출장을 간 여러 일군들이 함께 밑반찬으로 밥맛을 돋구게 하여 항상 엄지손가락을 내들게 하군 했다. 이렇듯 이직전야까지 몹시 바삐 돌아치던 용환 영감은 이직하게 되자 갑자기 모든 것이 허전해졌다. 수십년간 자기가 맡은 사업에 충직하면서 팽이처럼 돌아치던 사람이 갑자기 일손을 놓으면 모두가 그렇게 되는 모양이었다. 한편 돌이켜 생각해 보니 지나온 수십년간 용환 영감은 모든 것을 당과 조직의 배치에 따르면서 사업했다. 자기의 뜻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말그대로 몸과 마음을 몽땅 조직생활에 바쳤던 것이다. 용환 영감은 이직한 지금부터라도 자기의 뜻에 맞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다시 배우고 해보고 싶었다. 그러자 어떤 노인들은 “이제부터라도 마작이나 사교무를 시작해도 얼마든지 배워낼 수 있다”며 손을 잡아끌었다. 그런 노인들 중에는 이전엔 확실히 규칙적인 생활만 하다가 퇴직하자 바람으로 다른 여러가지 취미생활을 시작한 분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 노인들의 말을 빈다면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또 “인생2모작”이라고 하는 노인들도 있었다. 용환 영감은 여러 가지로 고민했다. 여느 노인들처럼 무도장에 다니면서 이직후의 인생을 즐겨볼가고 생각을 해보았고 오토바이나 한대 갖춰갖고 낚시나 다닐까 하고 생각을 모아 보기도 했다. 무도장과 낚시, 용환 영감은 두가지 취미생활에 모두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두가지 다 재미가 짙은 취미생활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연길시 신흥가두 민부사회구역을 놓고 말하면 행정적으로는 신흥가두에 속하지만 지리적 위치는 연길시 북산가두와 아주 가까운 상황이다. 당시 연길시 북산가두에는 연길시 최초로 발기한 “뇌봉반”이 활약하고 있었다. 용환 영감은 그 “뇌봉반”이라는 그 사회단체에 큰 흥미를 느꼈다. 참 좋은 단체인 것 같았다. 북산가두 “뇌봉반”의 활동은 여러 가지 형식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자선자금을 모금하여 불우 이웃이거나 불우 학생을 찾아가 “사랑의 마음”을 전달하는가 하면 때로는 입을만한 옷견지들을 거두고 식품 따위를 준비해 가지고는 감옥을 찾아가 그 곳에서 복역하는 수감자들한테까지 따사로움을 전달하군 했다. 처음에 순자의 남편 용환 영감은 불우이웃이나 불우학생을 돕는데는 매우 적극적이고 동감이었으나 감옥의 수감자들한테까지 찾아 가는데는 썩 달통돼하지 않았다. “죄를 진 자들은 그 죄값을 치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뇌봉반”에서는 새해를 맞으며 연길시 공안국 노동교화소를 방문하게 되었다. 물론 여러 가지 동복과 식품 등을 푼푼히 준비해 가지고 말이다. 그 날 용환 영감도 순자한테 이끌려 따라가게 되었다. 교화소 내에는 별의별 개조대상들이 다 있었다. 도둑질을 하여 들어온 사람, 집단폭력에 가담했다가 붙잡혀 들어온 사람 그리고 마약밀매를 했거나 마약복용으로 들어온 사람 실로 형형색색 종종별별이었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개조대상들 중 20세 이하의 청소년이 각별히 많았고 그 가운데서도 조선족 청소년이 더욱 많은 비율을 점하고 있었다. 교화소의 책임일군에 따르면 청소년 범죄자들 대부분이 부모가 이혼했거나 양쪽 부모 혹은 한쪽 부모가 외국이나 국내연해지구로 떠난 가족의 자식들인바 이런 “결손가정”의 자식들이 가정의 사랑과 교육이 제때에 따라가지 못해 흔히 기로에서 헤매다가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이었다. 이런 결손가정의 자녀가 범죄의 길에 들어 서는 것을 보면서 교화소의 책임일군은 몹시 가슴이 아파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현재 조선족사회에 “결손가정”이 많은 상황에서 부모들이 단지 돈벌이에만 골몰하지 말고 자식교양에 보다 신경을 기울릴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날 용환 영감은 너무나도 애티나는 조선족 애 한명을 붙잡고 이것 저것 묻기 시작했다. “얘, 너 몇살이냐?” “열아홉살입니다.” “집에 누가 있느냐?” “전 집이 없습니다.” “집이 없다니?! 거 웬소리냐? 어디 다시 한번 제대로 말해봐라.” 용환 영감은 흠칫 놀랐다. “아버지와 엄마가 이혼했는데 아버지한테로 가면 아버지가 엄마한테로 가라고 하고 엄마한테로 가면 엄마가 또 아버지한테로 보내군 하여 별 수 없이 이혼한 집 애들끼리 되는대로 살다가 이 곳으로 들어 왔습니다.” “그래 무슨 잘못을 저질렀느냐?” “노래방에 가서 돈을 물지 않아 노래방 주인과 다투다가 몇이서 그 주인을 때려 놓아 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했습니다.” “그럼 치료비를 대주면 되지 않느냐?” “아버지와 엄마중 누구도 치료비를 대주지 않아 이렇게 들어 왔습니다. 전 이미 버려진 애랍니다.” 기가 막혔다. 아무리 이혼했다고 그 부모 중 누구도 자식을 돌보지 않다니?! 용환 영감은 한심한듯 혀끝을 찼다. 그날 밤 용환 영감은 순자의 손을 꼭 잡고 의미심장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 가정의 ‘숨은 영웅’은 바로 당신이요. 우리 가정에도 자식이 여럿인데 문화혁명 때 당신은 가정이 그토록 어려우면서도 자식들한테 사랑을 주면서 정말 잘 키웠소. 만약 그 당시 당신마저 흔들렸더라면 우리 자식들한테서도 오늘 낮에 본 그 애처럼 기로에 들어서 범죄를 저지르는 애가 없다고 어떻게 장담하겠소?! 자식이란 뉘집 자식이나 다 마찬가지요. 태어날 때부터 범죄의 길로 나갈거라고 이마에 써붙이고 나온 자식은 없단 말이요.” “당신 말씀 맞수다. 기실 교화소에 들어간 애들 중 적지 않은 애들은 불쌍하우다. 부모의 사랑과 교육이 따라가지 못하여 그렇게 된게 아니겠수? 그러게 우리라도 그런 애들한테 부모들이 주지 못한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요.” 순자의 말에 용환 영감은 동감인듯 머리를 끄덕이면서 앞으로는 가끔씩 교화소 같은 곳도 자주 찾아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한편 의료일군이기도 하였던 용환 영감은 이직 후에도 곧잘 자신의 특장을 발휘하였다. 그는 연길시와 주내 기타 시와 현을 돌면서 영예원과 양로원의 노인들한테 병을 봐주기도 하고 그들과 음식을 함께 나누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또한 간혹 자신의 파악없는 병종에 대해서는 자기의 사돈인 정규창 교수한테 소개하여 치료하게 했고 때로는 정규창 교수와 동행하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였다. 원래 살던 신흥소학교 동쪽 동네는 물론 새로 이사간 신흥가두 민부사회구역에서도 동네에서 누가 사망하기라도 하면 김용환 영감을 곧 찾군 하였다. 그럴 때마다 김용환 영감은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상가집의 후사를 처리해주군 했다. 2 연길시 신흥가두 농약공장 부근에는 두부장사로 생활을 이어가는 한족 부부가 있었다. 두부장사란 말그대로 풋 돈벌이었다. 매일 꼭두새벽에 일어나 두부를 앗아서는 남편은 북대시장 부근에 가서 팔고 아내는 두부방에서 팔고 하지만 들어오는 수입이란 얼마 되지 않았다. 거기에 공부하는 자식이 둘씩이나 있다 보니 두 학생의 뒤를 대다 보면 항상 생활을 이어대기조차 빠듯한 상황이었다. 두부장사를 한다지만 그들 부부는 두부도 다 팔고 나머지가 있어야 그 것을 먹군 했다. 다른 육류나 기타 철따라 나오는 남새같은 것은 더욱 사먹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저 맨 밥에 간장을 놓고 먹을 때가 많았다. 순자는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 부부가 감탄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측은해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하여 가끔씩 그 한족 부부네 집에 다니면서 일을 거들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반찬거리 같은 것을 사다주기도 했다. 그러자 적지 않은 조선족들은 순자의 이런 거동을 나무람했다. “한족들은 없어서 저렇게 먹는 것이 아니웨다. 그 사람들은 돈이 있어 가지고도 습관상 저렇게 산다우.” 그런 얘기들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수천년을 내려오면서 가난 때문에 아끼고 절약하는 습관이 몸에 밴 한족들이었다. 남들이 잘살아도 그 것을 탐내지를 아니하고 뭔가를 먹고 싶어도 돈지갑을 쉽게 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개혁개방과 내수촉진의 나라의 경제책략과도 맞지 않게 아끼기만 하다가 나중에는 돈의 가치를 상실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돈을 도자기속에 넣어 땅속에 묻었다가 그것이 몽땅 썩어버린 일, 자식 몰래 돈 만위안을 옥수수 뒤주 속에 감추었는데 후에 그것을 알리 없는 자식들이 옥수수와 함께 돈까지 알곡분쇄기에 넣어 산산히 쪼각이 난 일…이러한 사례가 있는가 하면 또 어느 해 겨울엔가는 연길역 부근에선가 내지에서 왔다는 한 걸인에 동사했는데 그의 몸속에 수천위안의 현금이 감춰져 있었다는 이야기도 한시기 연길에서 화제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사례는 조선족보다는 한족들한테서 많이 나타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순자는 두부장사를 하는 그 한족 부부네 사정만은 그 예외라고 생각했다. 그들 부부는 있으면서도 아끼며 간장반찬에 밥을 먹는 그런 유형은 절대 아니었다. 사람이 오래 살면 별 희한한 일을 다 겪게 된다는 말이 있다. 바로 그 두부장사를 한족 부부네 집으로 드나들면서 순자 역시 소설에서나 있을만한 스토리가 있었다. 음력설을 앞둔 어느 겨울날 오후에 있은 일이다. 그 날 순자는 시내에 나갔던 김에 두부장사를 하는 그 한족부부네 집에 들렸다. 음력설이 코앞으로 다가오니 그들 부부를 두고 어딘가 궁금해서였다. 순자가 들어서니 부부는 두부를 앗느라 새뾰얀 김이 서린 가운데 분주히 오갔다. 두부방을 경영하는 이들을 보면 여름철에는 하루에 한차씩 두부를 앗는데 그치지만 겨울철에는 보통 하루에 2차씩 두부를 앗군 했다. 특히 그 당시는 음력설 전야어서 많은 가정들에서 설에 먹을 두부를 미리 사기에 구태여 앗은 두부를 장마당으로 가져가지 않아도 앉은 자리에서 다 팔 수 있었다. 순자가 들어서자 그들 부부는 일손을 멈추며 반색을 했다. “오늘도 몹시 바삐 돌아치는구만.” “예, 음력설기간엔 두부를 하지 않기에 요즘 많이 해놓고 팔지 못하면 뚱뚜포(冬豆腐)를 해야 하기에 말입니다.” “그럼 음력설을 쇨 준비는 다했수?” 이에 그들 부부는 머뭇거릴 뿐이었다. 순자는 벽쪽에 있는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가 순자의 예견처럼 소금에 절인 배추와 간장그릇 그리고 역시 소금에 절인 마늘장아찌가 있는 외 아무 것도 없었다. “나 좀 어디에 다녀오리다.” 의아해하는 한족 부부의 눈길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온 순자는 곧추 북대시장으로 향했다. 음력설전야라 북대시장안은 설 쇨 물건을 구입하느라고 사람들로 복새통을 이뤘다. 사람들은 보통 돼지고기 20근, 소고기 20근 그리고 냉동수산물과 과일 등은 박스채로 샀다. 평소엔 극도로 아끼다가도 일단 음력설만 되면 통이 크게 물건구입을 하는 한족들이었으니 시장의 상인들마다 설기간이면 1년 매출액의 50%를 올린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이렇듯 음력설만은 1년간 모았던 돈주머니를 풀어 놓는다는 한족들 풍속이었으나 아직 설 쇨 물건도 구입하지 않고 있는 그 두부방의 한족 부부한테는 확실히 말못할 사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시장에서 순자는 소고기 5근, 명태 5-6마리와 약간의 남새를 사갖고는 다시 두부장사를 하는 한족부부네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많지는 않았지만 그들 부부가 설날 두 자식과 함께 단란히 모여앉아 설을 쇨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순자가 들어서며 시장에서 사온 것들을 내놓자 한족 부부는 너무나도 송구스러워하며 몸둘 바를 몰라했다. “아주머님, 우리 젊은 사람들이 아주머님네 집으로 뭘 사들고가야 하는건데 이게 뭡니까? 번마다 이러시면 우린 어쩝니까?” “나의 적으마한 성의이니 받아주게나. 명태 한마리라도 자네들한테 사주는 것은 모두 마음이 내켜서 하는 것일세.” 이 때 출입문이 열리더니 순자의 남편 용환 영감이 들어섰다. “아니, 영감이 어떻게?!” 놀라워 하기는 용환 영감도 마찬가지었다. 내외가 이 한족 부부네 두부방에서 마주치리라고는 순자나 영감이나 모두 아주 상상밖이었다. 용환 영감의 손에도 비닐꾸러미가 두 개나 들려 있었다. “아주버님, 아까 이 아주머님도 숱한 걸 사왔는데 또 이렇게 사오다니 정말 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묘한 것은 이 두부방에서 마주치리라고는 두 내외는 물론이었고 이 두부방의 한족 부부도 여태껏 순자와 용환 영감이 내외간이라는 것을 아주 꿈밖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순자와 용환 영감은 서로가 서로를 모르게 이 두부방의 한족 부부한테 도움의 손길을 뻗쳤는데 이는 연변이라는 이 지역사회를 장식하는 민족단결의 아름다운 스토리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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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05
  • 제2차 세계대전 시 “해방자들”의 성폭행 기록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올해는 제2차 세계대전 결속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70년전 소련홍군은 미군과 더불어 독일, 프랑스 등 나라의 인민들을 도와 그들로 하여금 나치스의 독재에서 해탈되어 “해방의 자유”를 누리게 했다. 1944년 여름부터 유럽대륙에서 동맹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당시 미국은 여러 전장에서 “해방자”라는 거룩한 형상으로 유럽대륙의 곳곳에 나타났고 독일군은 패전을 거듭하였으며 최종 유럽대륙은 나치스의 잔혹한 통치에서 벗어났다. 그 뒤 허다한 문인들은 미군에 대한 찬양의 필묵을 아끼지 않으면서 “나젊고 영준한 남아들이 압박으로 시달리는 국토를 해방하였다”고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년간 육속 폭로되는 자료들을 보면 점령지에서의 미군의 행위를 보면 그 이미지가 그닥 광채롭지 못하였으며 소련홍군 역시 독일을 점령한 후 소름에 끼치는 행위를 많이 감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여인들을 숨겨 두어라” 미국사병들은 유럽에서 대담하게 “성쾌락”을 즐기었다. 영국에 진출한 뒤 이들 건장하고 자신감이 넘치며 정력이 왕성한 젊은이들은 쵸콜렛, 나일론 양말과 비누 등 작은 예물로 당지의 소녀들을 유혹, 매춘소녀가 적지 않았다. 로만디 등륙 전야, 런던의 많은 나이트클럽과 스탠드바에는 많은 미군들이 출입, 이들은 주흥이 도도해지자 거리에서 “사냥감”을 물색하였으며 가격을 정하고는 군외투를 가리고는 총망히 “교역”을 마치군 하였다. 당시 한 미군사병은 친구한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현재 우리는 ‘두번째 전장’을 개척하고 있네. 나는 밤장막이 드리운 영국공원에서의 장면을 도무지 형용할 수가 없네. 이는 하나의 거대한 ‘전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더라도 1942부터 1945년 사이 미군은 영국에서 도합 126건의 강간사건을 저질었다. 상대적으로 볼 때 당시 영국은 교전국이 아니었기에 미군은 그래도 어느 정도 자제하는 모습이였다. 하지만 일단 영국해협을 건너 전쟁구역에 들어서자 “해방자”란 감투를 쓴 미군들은 한차례, 또 한차례의 “성쾌락”을 미친듯이 즐기었다. 당시 고향을 멀리 두고 떠나온 미군 관병들은 일단 시간이 흐르자 심리 및 생리적 압력을 이겨내기 힘들어 하였으며 또한 자신들은 프랑스를 위해 밑지는 일을 너무 한다고 여기면서 이 나라의 여성들은 미군을 위해 “헌신”할 의무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때문에 이들은 흔히 유혹이 실패하면 폭력적 수단으로 자기의 성욕을 해소하군 하였다. 당시 로만디 지역에서는 한가지 유행어가 전해졌는데 그 유행어인즉 “이전에 독일군이 오면 우리는 여성을 남성으로 위장시켰으나 현재 미군이 오니 우리는 여성을 숨기게 된다”였다. 미군사병들의 성행위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1945년, 로만디의 제2 대도시 르아브르(勒阿弗尔)항구에는 귀국을 준비하는 미군사병들로 가득했다. 이들은 귀국전의 마지막 “성욕해소”를 강행, 이들은 기혼여성을 포함한 모든 프랑스 여성을 성욕해소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공원, 건출물 페허, 공동묘지와 철길 등은 모두 청천백일하의 음란장소로 되었다. 그 나날, 원래 고요하던 르아브르는 대뜸 “제복을 입은 표객”들로 인해 난장판이 되었다. 이러자 골치가 아파난 르아브르 시장 피에르 바찬은 부득불 당지 미군지휘관인 웨이드 대령한테 편지로 “시민들은 심지어 공원에서 산보하지 못하고 공동묘지에 가서 고인을 기리지도 못한다. 조금만 조심하지 않아도 여성들은 미군의 성노리개로 된다”며 이런 현상을 제지시켜 줄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편지에서 피에르 바찬 시장은 미군들더러 교외에 있는 한 창녀촌으로 가게 해달라고 건의했으나 웨이드 대령의 거절을 당했다. 리유는 만약 이 소식이 미국으로 전해질 경우 군인들의 아내 및 연인들과의 관계에 해를 끼친다는 것이었다. 종족전쟁: 시작은 히틀러 계승은 스탈린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군의 작전능력은 세계가 공인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소련군의 난잡한 군기 또한 정시할 바였다. 1941년 스탈린은 전쟁발발 4개월 이래 소련군은 도합 175만명(희생 35만명, 부상 103만명, 실종 37만명)을 손실보았다고 발표하였다. 막대한 손실이었다. 한편 거대한 상망의 손실은 평민에 대한 무차별적인 보복으로 이어졌다. 자료에 따르면 소련군은 폴란드를 시작으로 반공에 진입하여 베르린 함락에 이르기까지 도합 200만명에 달하는 독일여성들을 성폭력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 속에는 윤간을 한 사례도 수두록했다. 성욕해소 대상자를 찾음에 있어서 소련군은 선택이 없었다. 피해자들로는 10세의 아동으로부터 80세 로인 및 출산을 앞둔 임산부들도 있었으며 베르린에서만도 도합 13만명에 달하는 여성들이 소련군의 성노리개로 되었으며 이중에는 후에 전 독일총리 리컬의 부인도 포함, 당시 그녀는 12살이었다. 그리고 이 중 만여명에 달하는 여성들은 수치감으로 모대기다가 자결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니모스토푸촌은 소련군이 최초로 점령한 독일영토었다. 피점령 당시 이 곳의 여성과 아이들은 거의 모두가 살해되었는데 당시 거리와 골목 그리고 교외에마저 살해된 싸늘한 시체로 깔렸으며 독일군인들은 십자가에 못박혀 피살당하거나 건물에 매달려 살해되기도 했다. 이는 순 종족전쟁이나 마찬가지었다. 종족전쟁으로 말하면 시작은 히틀러가 했으나 마무리는 스탈린이 한 셈이었다. 전쟁터에서 소련군의 군기는 대단히 엄했다. 교전시 소련군은 퇴각자만 나타나면 일률로 기관총 소사로 죽여버리는 것이 관습으로 되었다. 하지만 작전행동외 소련군의 군기는 대단히 허술했다. 거기에 소련군 사병 거개가 문화적 자질이 낮았기에 이들은 적대국가의 평민에 대해서까지도 난폭한 폭행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은 교화소에서 개조를 받고 있는 인원들에게 군복을 입혀 전장으로 내보내는 사례가 많았다. 당시 소련군 포병대위로 있었던 솔레니친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부대가 동프로이센으로 진군할 때 사병들은 독일여성들의 내의를 빼앗아 입고 또한 강탈한 물건을 탱크안에 넣었으며 또한 물건을 빼앗은 뒤 집 여주인들을 강간하였는가 하면 심지어 강간 뒤 살해하기도 했다. 강간은 인류문명사에서 가장 야만적인 행위로서 인류의 존엄과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며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가장 전형적인 범죄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문명사회는 강간행위에 대한 처벌이 줄곧 중하게 정해졌다. 히틀러의 독일군이 폴란드와 소련으로 진공할 때 이들은 도처에서 당지 여성들을 강간하였으며 아울러 대량의 비공개적인 “기원(妓院)” 설치하여 독일군을 “위로”하도록 하였다. 이러자 고도로 격분한 스탈인은 반공이 시작되자 제일 처음으로 한말이 “피값은 피로 받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른바 “승리자”이고 “해방자”란 허울밑에 벌어진 많은 사연들은 오랫동안 숨기어져 오다가 최근 20년 사이에 갈수록 많은 책들을 통해 폭로되고 있다. 즉 반세기 이상 침묵을 지켜온 피해자들이 분분히 침묵을 깨고 이 한단락의 역사에 대해 증인으로 나섰던 것이다. 독일군이 투항한 날자는 1945년 5월 8일이었다. 그 뒤 소련군 각 부대에는 사병들의 방종행위를 금지할데 관한 명령이 하달되었다. 이는 당시 독일주둔 소련군 총사령인 주코프 원수가 8월 3일에 하달한 것이다. 이는 소련군의 영예를 수호하고 독일국민들의 반항심리를 눅잦히기 위한 주코프 원수의 큰 결심이었다. 사진을 통한 새로운 발견 1945년 5월 2일, 베르린 전역은 종말을 고했다. 이러자 소련의 종군기자들이 대거 베를린으로 몰려 들었다. 당시 이미 공략된 베를린 제국빌딩 앞에 도착한 소련 타스사의 촬영기자 할제이프는 총포알 구멍투성이인 이 나치스 독일의 상징건물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영감이 떠올라 한장의 역사적 및 시대적 의의가 있는 사진을 남기기로 결심했다. 그는 소련군 3명을 찾아 합작촬영을 해줄 것을 요청, 그것인즉 이 3명 군인이 제국빌딩 꼭대기에 올라가 붉은 기를 꽂는 것이었는데 이 3명의 군인은 순순히 응해나섰다. 이 날 할제이프는 도합 30여장의 사진을 찍었고 이 중 한장을 선택하여 대외에 발표하였다. 이 한장의 사진이 소련 각 매체에 발표된 후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한장의 사진이 바로 소련이 나치스 독일을 정복한 상징이었기 때문이었다. 헌데 당시 이 사진이 세계를 뒤흔든 동시에 자상한 사람들에 의해 한가지 흠집이 발견되었다. 그것인즉 당시 촬영에 응한 한 군인의 양쪽 손목에 모두 시계가 채어져 있었다. 이는 그 소련군인이 당시 독일주민들한테서 강탈한 것임을 간접적으로 폭로한 것으로 되었다. 그 뒤 이 사진은 수정되어 발표될 때마다 그 소련군인은 한쪽 손목에만 시계를 차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결코 역사의 진실을 감출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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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30
  • 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6)
    ↑세계한인언론인연합회 전남 완도군 청산도 팸투어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완도에 도착했다. 드디어 육지로서는 한국의 최남단에 위차한 완도군에 도착한 것이다. 완도에 도착한 우리는 완도행 첫 코스로 완도 어귀에 있는 장보고기념관을 참관하게 되었다. 기념관은 옛날 수병들을 거느리고 왜적들의 침입을 물리는 장보고 장군의 업적을 기리어 지은 것이었는데 당시에 쓰던 배를 복원하고 또 기타의 많은 문물도 소장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의 해상전을 복원한 대형 목각화가 벽에 걸려 있었는데 그 조각이 대형적이고도 섬세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경탄케 했다. 기념관 참관에 이어 우리 일행은 기념관 1층에 있는 행사장에서 완도군 신우철 군수로부터 완도군의 현황과 전망에 대한 소개를 청취하였다. 신우철 군수에 따르면 완도군의 천연적인 해양보물고로서 완도군 주위의 바다에는 질좋은 김, 미역 외 전복 등 해양자원이 아주 풍부한 바 앞으로 완도군은 세계에서 가장 완정한 생태보존지역으로 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우리 언론인들한테 한국 전라남도 완도군을 널리 홍보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 날 우리가 행장을 푼 곳은 완도의 관광호텔이었다. 이 호텔은 바닷가에 건축되었는데 바닷물이 늘 호텔남쪽벽을 철썩 철썩 치고 있는 환경이 좋은 호텔이었다. 헌데 나와 박정일씨가 투숙한 방은 306호실로 바닷쪽을 향한 방이 아니어서 어딘가 서운하기도 했다. 이 날 저녁, 우리 일행은 완도군청에서 베푼 연회에 참가하였다. 연회상에는 역시 완도의 특산물인 전복을 비롯한 해산물로 풍성하게 올랐다. 또한 술은 완도에서 자체로 만들었다는 술도 연회석에 올랐는데 맛보니 좀 순한 편이었으나 우리 연변의 된장술이나 송이술 같은 맛이 좀 있는 것 같아 입에 맞았다. 이날 밤, 우리 세계한언의 회원 거의 모두가 앞에 나가 축배를 제의했고 그 제의 때마다 신우철 완도군수가 건배에 응했다. 꽤나 주량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렴, 우리 중국에는 “주량은 담량이고 담량은 생산량(酒量是胆量、胆量是产量)”이라는 말도 있다. 이 말이 과학적 도리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글에서는 가끔씩 써먹는 경우가 많다. 여하튼 이날 밤, 우리는 어느 정도 거나하게 마셨으며 나 역시 어떻게 호텔방에 올라와 쓰러졌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부분적 회원들은 밖에 나가 또 마셨다고 했다. 이튿날 아침, 나는 호텔옆에 붙은 해수사우나에 가 해수욕을 하였다. 해수였지만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궜다가 나오니 전날에 마신 술이 한결 깨는듯 했고 몸도 거뿐하였다. 이 날 우리 일행은 완도여객선 터미널에서 여객선을 타고 완도군 경내에 있는 청산도로 향했다. 이는 나를 놓고 말하면 20여년만에야 타보는 선박이었다. 다르다면 1993년 내가 탄 배는 냉동운반선이었고 오늘 내가 타는 배는 여객선이었으며 1993년의 나는 선원신분이었지만 오늘의 나는 여행객 신분이었다. 여객선이 출항하자 나는 어쩐지 20여년전에 있은 선원생활이 머리속에 갈마들었다. 당시에는 배를 타는 것이 짜증나고 힘겹던 것이었지만 오늘날 배를 타는 것은 일종 기분 좋은 일이어서 그런지 그 감회가 더욱 깊었다. 여객선의 항행시간은 50분가량, 그제날 내가 배를 타고 대서양이나 인도양을 가로 지르는 것에 비하면 배타는 것도 아니었다. 청산도에 이르러 우리는 우선 청산도 이곳 저곳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이곳에서 우리는 대면적의 유채꽃밭을 구경했고 또 옛날 왜놈들과 싸울 때 쌓았다는 돌담도 둘러보았으며 순 돌로 지은 집과 쌓은 담장으로 구성된 마을도 돌아보았다. 이어 우리는 바닷가에 우뚝솟은 범바위라는 곳을 가보았는데 거기에서 나와 동포투데이 허을진 대표가 대오에서 떨어지다 보니 버스를 놓쳐 약속 지점까지 약 1시간 가량 도보로 찾아오기도 했다. 그 때 나는 한바탕 꾸지람을 들을줄 알았었는데 생각밖으로 박수를 치는 것이었다. 도보로라도 대오를 찾아온 우리를 환영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동안 어리둥절했다. 점심을 먹은 뒤 우리는 인차 바닷가로 향했다. 전복사육장에 가서 체험하는 활동이 있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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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25
  • 오묘한 세계 대백과(35)
    일반적으로 아이는 엄마의 배속에서 태어 나지만 어떤 아이들은 처음부터 시험관으로부터 잉태되고 태어 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런 아이들을 “시험관영아”라고 부른다. 그럼 영아가 어떻게 시험관에서 태어 날 수 있을까? 우선 의사들은 생육할 수 없는 여성의 체내에서 성숙한 난자를 배육시킨 다음 그것을 추출해 내어 일정한 온도와 배양액이 있는 유리그릇 안에 넣어 둔다. 그 뒤 수요되는 남성의 체내에서 정자세포를 추출하여 이 유리그릇 안에 넣어 난자와 정자가 서로 결합하여 수정란이 되게 한다. 이어서 의사들은 그 배양액을 부단히 바꾸어 주면서 수정란이 자연적으로 분열 발육되게 한다. 그리고 그 수정란 발육이 많은 세포로 배태가 되면 의사는 그것을 다시 여성체내의 자궁안에 넣는다. 또 수개월간의 세심한 보살핌 속에서 건강한 아이가 태어난다.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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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24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4)
    차빈유적의 서류 소속대륙: 남아메리카, 소속국가 페루, 지점: 안카스성 함의: 마야문화의 발상지 하나임 차빈유적은 페루 안드스산맥 코르딜레라산의 동쪽비탈에 위치, 고대아메리카 마야문화의 발상지중 하나이다. 차빈문화의 흥성기는 기원전 1500년과 기원전 300년 사이 페루 안디스산의 고산협곡에서 발전해온 일종 문화이다. 차빈성내에는 종횡으로 교차된 긴 복도가 있다. 높고도 큰 난송묘(兰宋亩)와 태유(泰优) 피라미드가 있고 많은 석비조각들이 있다. 그리고 이곳의 비탈과 광장주위에는 모두 돌건물이며 절반 가량이 야수모습의 장식물로서 각이한 자태를 나타내고 있다. “U”자형 신무덤 코르딜레라(科迪勒)산의 동쪽언덕에는 두갈래의 강이 흐르는데 차빈유적중 가장 저명한 차빈 신무덤이 바로 이 두 강의 합수목 부근에 있으며 그것이 보존해 내려온 제일 오랜 제상건물은 바로 이 낡은 무덤이다. 낡은 무덤은 3개의 상호 연결된 토돈으로 “U”자형결구를 이루며 그 중 북부 토돈(土墩)의 높이는 14미터, 중부 토돈의 높이는 11미터, 남부 토돈의 높이는 16미메터이다. 그리고 낡은 무덤에는 성자들의 가장 존경을 받는 신석(朗松神石)이 있는데 높이가 4.53미터에 달하는 화강암거석이다. 특이한 조각 차빈의 석판조각은 차빈문화의 큰 특색이다. 차빈석판조각 중 가장 저명한 것은 신석(朗松神石)이다. 이 신석의 밑부분은 차빈신묘의 기지내에 묻혀 있으며 윗부분은 묘의 꼭대기에까지 달한다. 그리고 이 거석에는 한마리의 고양이가 입을 벌이고 잇빨을 드러낸 모습을 하고 있는데 머리에는 숱한 뱀으로 엉켜져 있으나 손과 발은 도리어 사람의 모습과 같은 생물로 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생물은 천당으로 올라갈 수도 있고 지옥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모종 신기한 생물이라고 인정, 이는 가능하게 모종 아마존지구에서 발원된 종교숭배일가능성도 있다.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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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24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2)
    ■ 김철균 1991년은 연변 조선족자치주 창립 39주년이 되는 해었다. 그 해의 8월 31일, 곧 다가오는 “9.3” 명절을 앞두고 연길시 당위와 연길시 정부에서는 연길시 노동자문화궁에서 전 시 범위로 된 민족단결 모범선진 표창대회를 성대하게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순자는 영광스럽게도 연길시 민족단결 모범개인으로 추천평의 되었다. 앞가슴에 붉은 꽃을 달고 표창받고 상장을 받아 안았으며 민족단결 모범개인들을 대표하여 대회에서 발언하기도 했다. 순자의 발언은 관중석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박수소리에 자주 중단되군 하였다. 주 정부 서쪽 동네에서 살면서 한족이웃들을 도와준 이야기, 건축공사장에서 임신중절수술을 한 한족 임시공(비정규직)과 일을 바꾸어 한 이야기 그리고 문영이를 알게 되고 그 애를 돌봐 준 이야기와 삼복염천에 6명의 한족자식들한테 골무떡을 해먹일 때의 이야기 등 사적은 수많은 참가자들을 감동의 도가니에 몰아 넣었으며 대회장으로 하여금 오랫동안 술렁이게 했다… 한편 대회에서는 또 모든 매스컴의 취재 초점으로 화제에 오를만한 한 젊은 여성도 나타나 무대에 올랐다. 그녀는 아직 한돌도 되지 않은 아기를 안은 채 좌우 관중석을 향해 곱게 인사를 하고는 자아소개를 하였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돈화시 화교풍습병전문병원에서 근무하는 이문영입니다. 그리고 아까 대회발언을 한 김순자 어머니의 한족양딸이기도 합니다.” 문영이가 자아소개를 하자 순간 장내는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오래도록 그치지 않았다. 박수소리가 즘즘해지자 문영이는 “세상에 둘도 없는 위대한 조선족 어머니에게 이 노래를 선물한다”면서 “세상에는 엄마가 좋아”를 불렀다. 세상에는 엄마가 좋아/ 엄마있는 아이는 보배 같지요// 엄마 품에 안기면 행복 끝이 없어요… 주석대에 오른 문영이는 눈물을 흘리며 이 노래를 불렀고 이를 바라보는 수많은 참가자들도 눈물을 흘리며 그 노래에 귀를 기울이였다. 그리고는 무대에 나란히 선 그들 모녀한테 관중전체가 기립하여 우렁찬 박수갈채를 보냈다. 여기저기에서 카메라 플랫시 불빛이 번쩍이었고 촬영기렌즈와 취재용 마이크가 이들 모녀한테 집중되었다. 바로 이 순간 순자는 문영이와 있었던 지나간 모든 사연들이 주마등처름 갈마들면서 가슴이 뭉클해 났다. …“북해상점”에 와서 우표와 편지봉투만 달랑 사던 문영이, 솜옷과 감기약을 사갔을 때 “마마(어머니)”하며 침대에서 일어나며 목에 매달리던 문영이, 냉면 한 그릇을 사준다고 할 때 그렇게도 천진란만하게 기뻐하던 문영이와 아들 내외가 사온 옷과 신을 주었을 때 그렇게도 감격으로 눈물을 흘리던 문영이…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돈화역에 도착했을 때 그렇게도 기뻐하며 눈물을 펑펑 쏟던 문영이, 그리고 자기가 낳은 아들 심붕곤이가 외 할머니를 닮았다며 그렇게도 기뻐하던 문영이…… 인생의 보람이란 과연 무엇이고 그것을 가늠하는 척도 또한 과연 무엇이더냐?! 바로 이 순간 순자는 인생의 보람이란 돈낟가리에 올라 있는 것도, 남들이 다 우러러 보는 명인이 되는 것도 아니요, 바로 자기처럼 불행한 사람한테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구해주고 밀어주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인생의 보람이라고 단언했다. 그랬다. 순자의 사회적 직위라면 연길시 중앙소학교와 신흥소학교의 총 보도원과 가두적십자회 주임직이 전부었다. 또한 정식직업도 없었고 당원도 아니었다. 한 시기 연길시 신흥가두의 많은 주임들은 김순자를 당원인줄로 착각하고 친절하게 “당원 할머니”라고 불러 주었다. 당원이 아닌 “당원할머니!”ㅡ 모두가 순자를 이렇게 친절하게 불러줄 때 이는 우리 모두가 사색하고 심사숙고하게 하는 여운을 남겨주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순자가 문영이를 비롯한 어려운 학생과 다른 사람들을 도울 때 가정에서의 갈등이 없은 것은 아니었다. 순자가 어려운 이웃을 도울 때, 문영이를 양딸로 삼고 그 애한테 온갖 사랑을 몰부을 때 자녀들한테서 “책망” 아닌 책망을 들을 때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순자는 “사람은 남한테 베푸는 것을 천직으로 삼아야 한다”는 철리로 가정구성원들을 교육하여 그들 모두가 남을 즐겨돕는 사람이 되게 하였다. 때문에 순자의 자식들은 한결같이 문영이를 친 동생처럼 대했고 그한테 대사가 있을 때마다 마치 자기의 일처럼 간주하고 발벗고 나서 주기도 했다. 모두가 순자한테서 이른바 “세뇌교육”을 받은 결과라고 해야 적절한 것 같다. 그 날 대회가 끝난 뒤 순자는 대회주최 측에서 차리는 연회도 마다하고 문영이와 함께 조용히 노동자문화궁에서 빠져 나왔다. 연회에 참가하여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는 것이 필경 나쁜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비행기처럼 너무 높이 둥둥 띄우는 것도 그닥 좋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날 만은 어쩐지 독한 술이라도 한잔 하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문영아, 오늘 너와 나 냉면 한그릇씩 사먹지 않을래?” “아이고요, 어머니도 참 또 한그릇만 달랑 사놓고 저만 먹게 할려구요.” 문영이는 눈을 곱게 흘기더니 “그러지 않아도 전 오늘 냉면 100그릇을 살 용의가 있어요”라고 하며 동을 달았다. 순자와 문영이가 큰 길쪽으로 나오니 거기에는 용환영감을 비롯한 모든 자식과 손자 손녀 등 온 가족이 총출동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날 가족일동은 연길복무청사에 들어가 특실을 도맡고 가족파티를 열었다. 용환영감과 나란히 앉은 순자는 술잔을 들어 영감의 술잔에 마주치며 “건배”를 불렀다. 환갑을 쇤 후에는 평소에도 영감과 함께 가끔씩 한잔씩 하는 순자였다. 순자가 영감과 잔을 마주치며 “건배”를 부르자 가족일동이 모두 일어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건강장수를 위하여”를 웨치며 잔을 굽냈다. 술을 몇잔 마시고 어느 정도 흥분된 순자는 저도 몰래 일어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꽃가지 쓸어안고 휘파람을 불어서 이 가슴을 전할소냐/ 이슬비 소리없이 느껴우는 한많은 // 봄밤이 그리워 그리워 그리워 웁니다 흘러간 옛노래를 부르는 순자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자신이 민족단결 모범개인으로 되어 표창받고 대회발언까지 한 날인데 왜 우시는걸까? 순간 이를 보는 문영이는 어떤 영문인지 몰라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살폈고 자식들도 어머니가 이런 장소에서 이렇듯 애환에 담긴 흘러간 옛노래를 부를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여태껏 이런 노래를 불러보는 모습을 처음 보기도 했다. 한평생 남편을 섬기고 자식을 키우고 거기에 또 남들까지 도우면서 낙천적으로 살아오던 어머니, 그동안 많은 고생을 하였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으나 어머니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있는 그 애환에 대해 자식들도 다는 알 수 없었다. 그것에 대해 가장 잘 알아주는 이는 그래도 오직 남편인 김용환 영감뿐이었다. 4 순자와 문영이 사이의 모녀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순자는 문영에 대해 아끼고 사랑하며 또 명절기간에 서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이고 선물이나 주고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순자는 문영이가 처사를 잘못하는 것이 보이면 타이르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엄하게 꾸중하기도 했다. 이는 문영이가 결혼하면서부터 더욱 그랬다. 그 만큼 순자는 자식을 사랑하면 자식이 밖에서 일처사를 잘하도록 교육을 잘해야 한다고 인정했다. 여기에 들어서 순자는 아들보다 딸들에 대해 더 엄하게 굴었다. 왜냐하면 딸이 시집간 후 시부모와의 관계, 시누이 및 시동생들과의 관계 등을 잘 처리해야 양쪽 사돈 사이가 더욱 화목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뜻이 잘맞고 생활수양이 높은 남녀라 해도 일단 결혼하여 생활하다 보면 이러 저러한 모순에 봉착하게 되고 때로는 네탈 내탈하며 다툴 때도 있기 마련이다. 문영이네도 마찬가지었다. 두 사람 모두가 거의 빈손으로 결혼하다 보니 이러 저러한 생활고초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살아감에 있어서 돈이 아무리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라고 하지만 돈의 역할에 대해서는 무시할 수는 없었으며 아무리 시댁식구나 처가식구가 반갑다고 해도 부부와 자식 이렇게 단촐하게 생활하는 것이 더 편하고 자유로운 것은 사실이다. 이 면에 들어 문영이네는 원체 생활기초가 박약한데다 시댁식구들의 출입이 비교적 잦은 편이었다. 특히 시부모가 장기환자였는데 노인들은 왜서인지 그 몇명의 자식 중 문영의 남편인 심엽군한테 주로 의거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시부모가 교원인 남편한테 주로 의거하는데 대해 문영이는 아무런 불평도 없었다. 하지만 문영의 가정 역시 사정이 있기 마련이었다. 시부모의 생활비 혹은 병치료비 같은건 부부가 돈을 절약하여 얼마씩 보내드리는건 마땅한 일이나 집이 작다 보니 잠자리가 불편할 때가 많았다. 특히 병치료 때문에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두분 모두가 와서 며칠씩 체류할 때면 자연스럽게 짜증이 나군 했다. 거기에 결혼 후 문영이 또한 웬일인지 몸에 이탈 저탈 생기면서 모든 것이 여의치가 않은 상황이었다. 문영이는 가끔씩 순자앞에서 그런 고충에 대하여 털어놓군 했다. 그럴 때마다 순자는 “너, 시부모를 외면하면 안된다”, “사람이 나이 들면 병이 나기 마련이라 이럴 때 자식이 돌봐 드리지 않으면 누가 돌봐 드리겠느냐?!”, “노인한테 효도하는 면에서는 부모가 자식한테 훌륭한 본보기를 보여줘야 한다”는 식으로 반복적으로 일깨워 주군 했다. 모든 것은 큰 딸 영순이를 교육할 때와 다름이 없이 엄격하고도 조리성이 있었다. 몇 년 전 문영의 아들이 커서 대학교 시험준비를 할 때었다. 그때도 문영이네 집은 30여평방미터밖에 안되는 작은 집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아들 붕곤이가 대학교 시험준비를 할 때 시부모가 병치료 때문에 와있겠다는 것이었다. 애가 대학교시험준비를 하려면 독방이 있어야겠는데 시부모가 오면 그방을 내주어야 했다. 그러니 잠자리, 식사 등 많은 면에서 불편하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당시 시아버지의 병은 폐암이었다. 그러자 문영이는 가끔씩 남편과 바가지를 긁었으며 나중에는 부부 사이의 종종 말다툼도 생겼다. 물론 문영이는 혹시 연길에 와도 순자 어머니한테 부부 사이에 다투었다는데 대해서만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순자는 수심에 잠겨있는 문영이의 얼굴모습을 통해 꼭 심상치 않은 일이 있다고 단정했다. 순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문영이한테 일이 생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마음같아서는 자기 자신이 직접 돈화에 가서 문영이네 가정에 도대체 어떤 일이 생겼는가를 알아보고 싶었지만 그 때는 몸이 몹시 불편하여 나다니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어느날 순자는 자기 대신 큰 딸 영순이와 둘째 딸 영옥이를 돈화로 보내기로 하였다. 문영이네 가정상황을 알아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날 돈화에 도착한 영순이와 영옥이가 문영이한테 전화로 연락하면서 언니네가 돈화로 왔다고 알렸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문영이는 집으로 오지 말고 밖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집에 꼭 무슨 불쾌한 사연이 있으리라는 순자의 예감이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영순이와 영옥이는 어느 한 작은 음식점에서 문영이를 만났다. “너, 가정에 꼭 심상치 않은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구나. 왜 우리더러 집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거냐?” 영순이가 캐여묻자 문영이는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마침내 자초지종을 이실직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어떤 날에는 기분이 말째여서 집에도 들어가지 안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이에 영순이는 몹시 화가 동했다. “너, 도대체 왜 이러는거냐? 정말 내 동생 답지 않구나. 아무리 화나는 일이 있어도 집에 들어가야지. 집에 들어가 남편과 상론하여 좋게 해결하는 쪽으로 노력해야지 이게 뭐냐?!” “언니, 언니레를 실망시켜 죄송하지만 전 어쩔 수가 없어요. 시아버지의 병은 몹시 좋지 않은 병으로 다른 사람한테도 피해를 주는 그런 병이예요. 그리고 그보다 더 답답한건 애가 대학시험준비를 하는데 공부할 자리마저 없거든요.” “하지만 너 바꿔놓고 생각해 보아라. 만약 연길에 있는 어머니가 그런 병에 걸려 너희들 집에 가있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 “어머닌 다르죠. 어머니가 저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제가 어머니를 마다하겠어요?” “쯧쯧 이것봐라. 그러니 네가 속이 짧다는거란다. 그럼 이전에 너의 시아버지도 네 남편한테 아주 잘해주었을 것이 아니냐? 그러니 너의 시아버진 남편한테는 아주 소중한 분이란다. 부모가 있고 그 다음에 자식이 있다는 도리를 너 왜 모르는거냐?! 사람이 살다보면 힘들고 애가 탈 때가 어디 한두번이냐? 그렇다고 자기가 내키는대로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에 문영이는 별로 변명같은건 하지도 않았다. 언니 영순이의 말이 틀린건 아니었다. 하지만 영순의 타이름과 책망에 내심으로 설득된 것도 아니었다. 후에 문영이가 완전히 감화된 것은 역시 순자의 행동에서였다. 언젠가 문영이는 귀수술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순자는 그 소식을 듣자 바람으로 많은 영양제품을 사갖고 돈화로 찾아가 내놓았는가 하면 극성스레 간호해 주었으며 돌아올 때는 몸을 춰세우라며 돈 1000원까지 내놓았다. 순자는 문영이가 앓을 때마다 그렇게 처사했다. 그 때 순자는 이미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었다. 연로한 몸임에도 자식의 건강에 신경쓰는 순자어머니를 바라보며 문영이는 자신한테서 많은 것을 반성했다. 바꿔놓고 앞으로 아들 붕곤이가 장가를 들어 색시를 맞았을 때 그 색시가 자기를 홀대했을 경우를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 뒤 공무로 연길에 왔다가 순자어머니를 찾아온 문영이는 눈물을 흘리며 진정으로 참회하였다. “어머니, 그 때 어머니가 다녀간 후 여러번 궁리해 보았는데 제가 진짜 생각이 짧았어요. 어머니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더라면…” 뿐만 아니라 문영의 신랑 심엽군도 언제인가 일부러 연길로 찾아와서는 순자한테 자기 자신을 반성하기도 했다. “한시기 저와 문영이가 찧고 박고 한건 문영이의 잘못만이 아니랍니다. 기실 제가 당시 시아버지 때문에 부담스러워하는 문영이의 심정을 이해해 주지 못했고 잘 달래 주지도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장모님 그 때의 일을 갖고 욕하려면 절 욕해 주십시오.” “자네 그만 두게나. 난 이미 다 알고 있다네. 기실 내 딸 문영이가 한시기 생각이 짧아서 옹졸하게 처사했으니 오히려 내가 자네한테 미안할 따름일세. 여자들이란 머리칼만 길지 궁냥이 짧으니 자네 많이 양해해주게나.” 이렇듯 항상 자기의 자식을 책망하는 순자였지 절대 남의 집 자식을 욕하거나 책망하는 순자의 성미가 아니었다. 이는 또한 진정 문영이 친정어머니의 자세로부터 나오는 말이었다. 그랬다. 다만 문영이를 낳아주지 않았을뿐이지 순자는 문영의 친정 어머니인 것만은 분명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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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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