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9(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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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9.18사변》반일시위 확대
    [동포투데이]중국에서 다오위다오(센가꾸)렬도를 둘러싼 정세가 악화되는 가운에서 반일시위가 확대된다고 중국언론들이 전했다. 반일시위는 이미 100여 개 도시에로 확대되었다.1931년에 일어난 《9.18 사변》 때문에 정세는 더 복잡해지고 있다. 그때 일본 관동군이 중국 동북부 목단강(현재 명칭 심양)주변에서 철길을 폭파하고 중국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해 만주가 강점하자 극동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폭발했다.반일시위가 진행되는 중국의 도시들에는 무장한 경찰이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일부 시위참가자들은 중화인민공화국 창시자 모택동의 초상화를 들고 일본에 대해 강경조치를 취할 것을 당국에 강력히 요구했다.베이징 주재 일본대사관앞에서는 1000여 명이 시위를 벌이고 있으며 6개의 경찰부대가 동원되여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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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19
  • 중국 배우 255명 댜오위다오 사건에 대한 성명 발표
    [동포투데이]인민망(人民网)의 9월 17일 보도에 따르면 중국라디오TV협회 배우위원회 회원인 260명의 중국 배우들은 일본의 댜오위다오(钓鱼岛) 국유화 사건에 대해 성명을 발표해 국가의 주권과 영토를 수호하기 위해 당중앙, 국무원, 중앙군사위원회, 국가해양국 등의 정부부서에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이번 성명에 따르면 조국의 존엄과 중화민족의 대의를 보호하기 위해 중국의 배우들은 결단코 중국 정부의 영토수호 정책을 적극 지지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중국라디오TV협회 배우위원회는 중국 배우들이 자원해서 결성한 전문조직으로 비영리성 조직의 성격을 띠고 있다. 2012년 9월 10일 일본 정부는 중국 측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댜오위다오 국유화를 선포했으며 이는 중국 영토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행위로서 중국 측의 강한 반발에 부딪치게 됐다. 이는 중일 관계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세계 평화에도 저촉되는 것이다. 중국 배우위원회는 이에 대해 강력한 불만과 분노를 표시하며 이 같은 성명을 발표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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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18
  • 中 전국적으로 9.18 망국의 한을 잊지 말자는 반일 시위 열려
    [동포투데이]9월 18일은 81년 전 일본이 중국 동북에서 침략전쟁을 벌인 날로서 81년이 지난 오늘날 중일 관계는 재차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 원래 올해는 중일 양국이 수교를 정상화 한 지 40주년이 되는 해이나 일본 정부는 중국 측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댜오위다오(钓鱼岛)의 국유화를 선포했다. 이는 중국의 영토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행위로서 중국 국민들은 이에 강력한 분노를 느끼고 있다. 이로 인해 9.18 일본의 중국 침략 사건이 더욱 부각되게 됐다. 이 날 중국에서는 전국적으로 9.18 기념행사를 가지며 반일 감정을 촉발시켰다. 그리고 전세계에 있는 화교들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일본의 댜오위다오 쟁탈 행위를 비난하고 나섰다. 중국 선양(沈阳)시 정부는 9월 18일 오전 9시 18분 경종을 울리는 행사를 가졌는데 방공경보를 3분간 울림으로써 81년 전의 치욕적인 망국의 한을 되새겼다. 이외에도 란저우(兰州), 쿤밍(昆明), 청두(成都) 등 도시에서도 경종을 울리고 방공훈련을 하는 등 9.18 관련 기념행사를 가졌으며 광시(广西), 안후이(安徽), 산시(山西) 등에서도 방공훈련을 가질 계획을 세웠다. 9월 16일 약 5000명의 홍콩시민들은 9.18 기념행사를 열어 댜오위다오 수호를 위한 평화시위를 벌였다. 한편 9월 12일 타이완 노동당, 중국통일연맹 등도 망국의 한을 잊지 말자는 구호를 외치며 일본의 댜오위다오 쟁탈 행위를 중단하도록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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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18
  • 어느 부부의 5년만의 만남
    철이른 장맛비가 쏟아지는 칠월 초 서울 종로 3가의 한식당에 갔다가 5년 만에 남편을 만나러 한국에 와 그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한 조선족 녀인을 만나게 되었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눠보니 그 여인은 중국 길림성 연변에서 왔다했다. 그 식당에서 홀서빙 일을 한지 나흘밖에 되지 않았다 한다. 때 마침 점심시간이 지난 후였기에 우리는 잠시나마 대화를 할 수 있는 여우가 있었다. 초면이지만 외지에 나와 고생많다는 위로의 말을 건네자 그녀는 자기가 고생하는 것보다 한국에 먼저 와있는 남편이 너무 안타깝고 안쓰럽다는 말로, 며칠 전 공항에서 남편을 만났을 때의 일을 슬프게 되뇌었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오래동안 헤어져있던 남편을 만날 수 있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출구를 나오니 북적이는 환영인파 속에서 한 남자가 내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었어요. 날 부르는 사람앞으로 다가가는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간절하게 상봉을 갈망했던 내 남편이 너무 몰라보게 변했기 때문이었어요. 5년 전 남편이 한국에 올 때만 해도 청춘처럼 젊었던 얼굴이 검게 변하여 주름살도 많아졌고, 흰 머리도 많이 났어요. 거기다 튼튼했던 체구가 무척이나 수척해진 것이 눈에 띄게 달라진 모습으로 변해있었어요. 5년 전의 내 남편 모습과는 너무 많이 달랐지요. 우린 5년만의 만남으로 간절한 감정이었지만, 남편의 변해버린 모습에 내 마음은 서글퍼졌고, 한국에 들어와 많은 고생을 한 남편이 측은하게 보였어요. 내가 가져온 짐을 끌고 앞서 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참으로 고생했나보구나’라는 생각에 눈물이 솟구쳤습니다.》 그녀는 내게 손수 물을 따라주면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 불과 며칠 전의 얘기를 풀어놓던 그녀의 눈시울은 어느새 붉어져 있었다. 기자는 지나가는 길에 잠깐 요기를 떼우기 위하여 들어간 식당이었지만 그녀의 사연에 진한 감동을 느꼈다. 마침 점심시간이 지난후여서 손님도 별로 없는 시간이었기에 그 여인의 사연을 더 들어보고 싶었다. 그녀와 남편은 공항철도를 타고 서울 시내로 들어와 다시 서울지하철로 갈아타고 20여 정거장을 간 후 안산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서야 도착한 곳은 올망졸망 낮은 빌라들이 줄지어 있는 좁다란 골목의 반지하방이었다. 비좁고 어두컴컴한 방이었지만 그래도 남편이 몇 년 동안 거처하고 있는 집이라 생각하니 그런대로 마음은 편해지더라 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남편은 봉투 하나를 내놓았다. 봉투를 손에 쥐어주던 남편은 한국돈 100만원이 들어있으니 한국에 있는 동안 알아서 쓰라고 했다. 그리고 이제 몇 달만 더 벌면 중국에 집 한 채 살 수 있는 돈이 되니 조금만 참아달라고 말하던 남편은 그제서야 허허 웃으면서《당신은 별로 변한 게 없구만. 아니 더 이뻐진 것 같아.》라며 꼬옥 안아주더란다. 그녀는 5년 만에 만난 남편이었기에 술도 한잔 할 겸 반찬 몇 가지를 정성스레 요리하여 밥상에 올려놓았건만, 남편은 그 요리보다는 맨 밥에 고추장 한 숟가락 떠 넣어 쓱쓱 비벼대더니만 순식간에 밥그릇을 비웠다. 다음 중국에서 가져온 술 한 병을 따더니 한국에 오느라 수고했다는 말과 고향 친척들 근황과 안부를 묻고 연거푸 몇 잔을 비우더니 술병 절반을 축냈다. 숟가락을 놓은 남편은 곧바로 드러누워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피로에 지쳐 쓰려져 잠이든 남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의 볼에는 측은함과 고마움이 녹아있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설거지를 끝내고 남편 곁에 누운 그녀는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몇 년간 집을 떠나 있는 남편 곁에 오고 보니 마음만 쓰라려 한없는 눈물만 나왔다. 깊은 잠에 빠져있던 남편은 이튿날 새벽 5시에 자리를 차고 일어나 대충 세수만 한 후, 집에서 편히 쉬고 있으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집을 나섰다. 그녀는 그 날부터 숨막힐 듯한 독수공방으로 지루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이틀 동안 그렇게 집에만 있다 보니 남편에게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을 나간 남편은 한밤중에야 귀가를 했는데, 얼마나 피곤했던지 자리에 눕자마자 코를 골곤했어요. 제가 중국에 있을 때는 남편이 돈을 보내오면 별 생각이 없이 받아 쓰곤했는데 직접 와보니, 정말 그 돈은 남편의 피땀으로 번 돈이란 걸 피부로 느끼게 되었어요. 매일 남편이 일하러 나간 후 저는 안절부절 못했어요. 도무지 가만 앉아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집근처에 일자리를 찾던 중 이 식당에 오게 되었어요. 며칠 동안이라도 일해 비행기표 살 돈을 장만하려고요.》 그렇게 애틋한 사연을 정리한 그녀는 밝은 모습으로 설걷이를 해야 한다며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저는 남편이 준 돈을 아직 한 푼도 쓰지 않았어요》라며 수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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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18
  • 고향 방문기
    지난 6월 11일, 오매불망 그리던 고향 방문의 길에 올랐다. 부동산 매매 계약을 하는 길이라 별로 준비할 사이도 없었다. 한국에 배를 타고 온 저로서는 처음 비행기를 타보는 행운을 지녔다. 인천공항에서 오후 세시에 서서히 푸르른 하늘로 날아 올랐다. 뭉게뭉게 핀 구름들은 비행기 날개 밑에서 뒤로 미끌어질듯 멀어져 가고 저의 마음은 날듯이 개운하고 감개무량하기만 하였다.아~~ 사람들의 위대한 발명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고 고도의 과학과 문명이 발전한 세상에 살고 있음이 감사하기만 하다. 한 시간쯤 되여 연태 래산 비행장에 도착하니 귀에 익은 중국어방송이 울려 왔다. 마중나온 조카의 자가용을 타고 바다가의 도시를 신 나게 달렸다. 확트이게 뻗은 아스팔트길, 하늘을 치솟듯 일떠선 고층건물들은 즐비하게 들어섰다. 이튿날 시간상 관계로 조카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고 13일 밤 열시에 연길행 남방 항공에 탑승했다.연길에서 받은 첫 인상은 사람들의 표정이 여유로와 보이고 자유로운 형상이 제일 유표하게 안겨왔다.고향의 한 그루의 나무, 한 채의 건물도 신선하고 멋지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마음 속에 지워 버릴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의 고향이라고 했는가 싶다. 연길에 도착하니 기온이 섭씨13도여서 긴팔 내의를 입고 다녀야 했다.연길은 중심 도로의 건물들은새옷단장 하느라 인테리어가 한창이였고 연룡 도로도 확장건설에 열을 내고 있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 창립 60주년을 맞으며 일대 변혁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고향이 이렇듯 흥성거리니 우리 고향을 온 천하에 알리고 싶었다. 제가 살던 마을엔 하루밤만 묵었다.. 제집은 이웃이 봐주는 형편이라 앞집에 있는 한족 언니 집에서 맛나는 볶음채에 맥주를 마이며 그리운 이야기도 나누고 마을에서 생긴 일들 서로 간에 덕담들도 나누면서 끈끈한 우정을 나누었다.. 이웃 분들이 자기가 손수 낸 고추가루를 갖고 가라고 넣어주어 한국에 갖고 왔다. 고추가루를 먹을 때마다 자애로운 얼굴이 떠오르군 한다.시간을 아껴가며 볼 업무를 보고 년세가 지긋한 오빠를 만나고 석현에 있는 사촌 언니를 방문하고 도문에서 뻐스표를 떼고 검표를 하려는 순간 제 눈에 한 녀인이 보였다. 우리 중한의 무궁화님이였다. 사진으로 익힌 모습을 그리며 얼싸 안았다. 무궁화님은 훤칠한 키에 젊음을 자랑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 잠간 말을 나누고 떠났었다. 한가지 유감인 것은 지기님과 전화 통화만 하고 만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다. 후에 기회가 되면 회포를 풀어 보고 싶다.그리운 고향에 더 머물고 싶었지만 예약이 돼 있어 17일 오후 4시 30분에 북경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장백산을 경유하는 지라 손님들이 오르는데 사람들마다 건장한 모습에 려행용 트렁크를 끌고 오르는데 편안한 모습, 여유 있는 생활이 발목 잡았다. 전 아직 멋진 여행을 향수해 못 보았다. 이제 몇 년 일해 저의 노후 계획을 실현하면 신 나는 여행 즐기려고 구상 중이다.우리의 수도 북경은 웅장한 모습으로 더욱더 생기 있고 발전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런데 물가가 많이올라 있었다.중산 계층이 소비하는 물가지수, 그리고 명패 상품은 환률을 계산하면 한국과 비슷하였다.일본이 경영하는 华堂商场(화탕상점)에서 디자인이 마음 드는 원피스라면 500원이면 한국에서도 소화할 수 있었다. 하여 전 신이 해져 마트에서 싼다루 한 컬레 사 신고 말았다. 우리 국민들의 생활 수준이 더 좋아지길 바램을 가져 본다. 기본 노임 2,000원으론 살기 힘들 거라 생각된다.북경의 부동산은 아직도 천문 수자이다. 5환 이내는 아직도 비싸다. 제 아들이 사는 대산자 구역도 침실 둘, 거실이 있는 집 한 채를 사려면 2백만이 된다고 한다. 월급을 받는 직장인들은 힘들었다. 북경 사람들은 모두 백만 부자이니 자호감을 느끼며 살고 있었다. 언제면 부동산이 백성들이 용납할 수 있는 수준으로 돌아 올지 모를 일이다. 아파트는 지은 다음에도 정상적으로 보수해야 그 수명이 길건데 쓰기만 하고 그렇지 않으니 마음이 좀 착잡해 났다. 저의 견해이니 참고로 해 주었으면 한다.짧은 여행에서 얻은 소감 이로써 끝내면서 문명하고 발전한 사회를 건설하려면 비교가 있어야 부족점을 알고 더 멀리 날 수 있다는 도리를 알게 된다고,, , /현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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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17
  • 시 간
    오늘도 여섯시에 잠에서 깨여났다. 일어 나면 첫 번째 일과는 컴퓨터를 켜고 제가 제일 사랑하는 카페에 출석 신고를 하고 짤막한 글을 올리기도 한다. 그다음 오늘 할 일을 간단히 구상해 본다. 오전엔 시간이 있기에 간단히 신문도 보고 일어 공부도 잠간 한다. 나이 먹고 웬 공부냐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겨울에 <노인 심리 상담사>란 민간 자격증을 따고 보니 그건 한 장의 종이일 뿐이고 그 학원들은 돈벌이로만 활용하지 실제 배양 능력이 없다는 걸 알고 노령 사회에 먼저 진입한 일본에 대해 알고 싶고 노인 복지에 대한 글을 읽고 싶고 하여 2월 하순부터 <히라가나>로부터 시작하여 <가타가나>를 한자씩 배워 인젠 상용 단어를 익혀가고 있으며 며칠 후면 회화로 들어 가려고 한다. 하루 24시간, 그 누구에게도 차레진 시간이지만 시간을 쪼개고 시간을 알맞게 사용하니 그 의미또한 깊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사회가 발전하는 이 시대에 발 맞추어 이미 쓰던 핸드폰을 스마트폰으로 바꾸었다. 처음이라 사용법을 몰라 전화 번호가 시도 때도 없이 걸리는 일도 있었지만 아들들과 카카오톡으로 교제하니 기쁘고 친구들과도 교제하니 이처럼 문명의 시대에 살고 있음에 감사하고 오늘도 건강함에 감사하며 제 철에 맞는 이쁜 옷들도 입고 다닐 수 있음에 감사하고 저의 년령에 맞는 일거리, 노인 복지 사업에 한 몫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맡은 일을 정성껏 일하며 제가 설계한 노후 준비를 완성한 후에는 언제나 듬직하고 미더운 남편과 같이 해외 여행도 가려는 계획도 갖고 있으며 인생의 천륜지락도 누리고 싶다. 오늘도 아름다운 구상을 무르익히며 인생의 발걸음을 가볍게 걸어가고 있다. 붉게 하늘을 물들이는 저녁 노을이 더 아름답다고,,,,
    • 독자기고
    2012-09-17
  • 피할수 없는 생존경쟁 돌입
    □ 리영수 피할수 없는 생존경쟁이 시작됐다. 대 성도셀틱전을 0대1 패배로 마친 김광주감독대행이 “매 경기를 강급보위전 같은 각오로 나서겠다”고 밝혔다. 그만큼 갈길이 바쁘다. 올시즌 최하위 두개 팀이 강등된다. 현재 연변팀은 15위 팀과 승점 3점 차이로 언제든지 희비가 엇갈릴수 있다. 팀 매각, 을급리그 전전 등 아픈 력사가 있는 연변팀이여서 생존을 위한 부담이 더욱 크다. 연변팀은 이제 북경리공, 광동일지천, 중경력범, 심수홍찬, 심양심북 등 팀들과의 5껨 경기를 남겨두고있다. 상황이 썩 좋지 않다. 중경력범팀은 슈퍼리그 진출을 내심 노리는 팀이고 기타 4개 팀은 강급권에서 허덕이는 팀들이다. 경기마다 고전이 예상된다. 북경리공, 중경력범, 심양심북 등 팀들과의 홈경기가 있게 되는데 이 3껨 경기에서 2승을 거둔다면 갑급리그 잔류는 물론 여유있게 시즌을 마무릴수 있다. 이제부터 최소한으로 상병을 줄이고 선수들도 반칙에 상당히 조심해야 할것으로 보인다. 생방송도 안되는 갑급리그인만큼 상상 이외의 일들이 모두 발생할수 있다. 시즌이 막바지에 접어들며 원정에서의 점수 챙기기가 상당히 어려운 실정인만큼 홈에서의 세 경기에 큰 중시를 돌려야 한다. 한편 성세호대한 응원전을 펼쳐 선수단의 사기를 북돋아주는것도 십분 필요하다. 연변축구팬협회 류장춘회장 등이 올시즌 남은 3껨 홈경기에서 굵직한 응원을 윽벼르고있어 기대가 된다.서로의 책임소재를 묻기에 앞서 이제 모두가 단합해 난관을 타개해나가야 한다. 우선 살아남아야 후일도 도모할수 있는것이다. 프로 축구팀이 없는 연변은 너무나 슴슴하다.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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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17
  • 연변팀 0대1로 성도셀틱팀에 분패
    —연변팀 0대1로 성도셀틱팀에 분패 연변장백호랑이팀(이하 연변팀)이 15일 오후 3시 30분 성도 쌍류기지 스포츠쎈터에서 열린 2012 중국축구 갑급리그 제25륜 경기에서 전반전 39분경 성도셀틱팀 왕개선수에게 결승꼴을 내주며 0대1 분패를 당했다. 이날 승리로 성도셀틱팀은 승점 34점으로 8위권에 진입, 강급권에서 완전히 해탈됐다. 반면 연변팀은 강급권 수렁에 깊숙이 빠져들게 되였다. 경기초반부터 량팀은 경기의 중요성을 감안해서였던지 득점사냥에 열을 올렸다. 25분경 이반 보직선수의 강슛이 성도팀 꼴문 기둥을 살짝 비켜가 아쉬움이 컸다. 일진일퇴의 공방이 이어지며 “중원”싸움이 매우 치렬했다. 39분경 빼여난 움직임을 보여주던 성도셀틱팀의 외적용병 요한슨(20번)이 연변팀 좌측변선을 허물며 문전에 공을 올렸다. 문전에 대기해있던 왕개선수(6번)가 득점으로 련결, 이날 결승꼴을 터뜨렸다. 전반전은 성도셀틱팀이 1대0으로 앞선채 마감됐다. 후반 시작과 함께 연변팀은 필승 의지를 드러냈다. 상대를 몰아붙이며 경기를 펼쳤다. 59분경 최영철선수가 강홍권선수 대신 투입되며 공격력량이 강화됐다. 64분경 상대 키퍼와 1대1 슛기회가 주어졌지만 득점이 무산돼 땅을 쳐야 했다. 76분경 김광주감독대행은 이반 보직선수를 빼고 쿠리바리선수를 출전시켰다. 85분경 쿠리바리선수에게 절호의 득점기회가 있었지만 상대 꼴키퍼의 선방에 막혔다. 이후 4분간의 경기보충시간까지 파상공세를 펼친 연변팀이였지만 굳게 잠긴 성도셀틱팀의 꼴문을 열지는 못했다. 경기결속뒤 김광주감독대행은 “경기 흐름상, 내용상 비교적 만족할만한 경기였지만 결과가 패전으로 이어져 매우 아쉽다”고 말하면서 “남은 5껨의 경기를 한껨한껨 잘 치러나가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오는 22일 오후 3시, 연변팀은 북경리공팀을 룡정시해란강경기장에 불러들여 일전을 펼치게 된다. 연변일보 리영수기자
    • 스포츠
    2012-09-17
  • 독도(다께시마)지위와 관련하여 혼돈하는 한국과 일본
    2012년 여름에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오랜 력사를 가진 령토분쟁으로 급격히 악화되였다. 분쟁대상은 동해에 있는 바위섬이다. 유럽인들은 포경선《레 리앙쿠르》의 이름을 따서 이 섬을 리앙쿠르섬이라고 불렀다. 이 포경선 선원들이 1840년에 이 섬을 발견하고 지도에 기록했다. 그러나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은 유럽인들보다 훨씬 오래전에 이 섬에 대하여 알았다고 주장한다. 현재 이 섬은 한국 경상북도 울릉도구에 속해있으며 한국식으로 독도로 불리우고 있다. 일본인들은 다께시마라고 부르면서 시마네현 오끼구에 속한다고 간주하고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섬을 관리하는것은 한국인들이며 여기에는 경찰과 행정당국, 등대지기들이 있다. 일본은 다께시마가 시간적으로 대부분 일본에 소속되여 있었다는 근거를 들면서 이 섬을 반환할것을 요구한다. 한편 한국은 일본과의 사이에는 독도와 관련한 그 어떤 령토분쟁도 없으며 있을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독도는 지금도 한국에 속해있으며 항상 한국에 속해있었기때문이라는것이다. 쌍방은 서로 령유권을 주장하면서 력사기록들, 지도, 조약들을 론거로 제시하고있다. 그러나 무소속 전문가들인 죤 반 다이크, 전갑영, 김영구는 이 문건들을 가지고서는 독도의 소속문제를 정확히 해명할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요구는 부분적으로 력사기록들과 우산도가 있는 지도에 기초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우산도가 바로 독도, 혹은 리앙쿠르섬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일본은 우산도는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에 더 가까이 있는 죽도이며 다께시마(독도)는 력사적으로 마쯔시마라는 이름으로 불리웠으며 일본에 속해있었다고 주장한다. 일본측은 섬의 명칭이 애매한것을 리용하여 12세기부터 벌써 독도에 대하여 알고있었다는 한국학자들의 주장을 의심한다. 문건, 지도, 사변들에 관해서도 두 나라 학자들의 견해가 어긋나는 것이다. 실례로 1905년에 일본은 리앙쿠르섬, 즉 다께시마를 그 주변에서 물고기잡이를 하던 일본인들의 요청에 따라 시마네현에 소속시켰다. 이 사변에 대하여 일본과 여러 나라 언론들이 즉시 전했다. 일본은 국제공동체가 침묵을 지키자 그것을 이 령토에 대한 일본의 령유권을 인정하는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때로부터 얼마후 한국은 일본에 완전히 병합되였으며 따라서 독도지위와 관련한 문제는 사라졌다. 자주권을 잃은 한국은 섬의 반환을 요구할 권리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망으로 독립을 쟁취한후에야 한국이 그렇게 요구했다. 1951년 9월 미국주재 한국대사 유장연은 미국무장관 딘 에치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준비되고 있는 일본과의 강화조약에서 일본이 한국의 령토, 그리고 합병전에 한국의 령토였던 섬들, 즉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독도, 파랑도에 대한 령유권을 포기할데 대해 박아넣을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얼마후에 미국인들로부터 받은 회답에는 《미국정부는 일본이 포츠담선언에 지적된 령토들에 대한 주권을 공식 최종적으로 포기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는 포츠담선언조항을 접수했다는 사실을 쌘 프랜씨스꼬강화조약에 박아넣어야 한다고 간주하지 않는다. 다께시마, 혹은 리앙쿠르바위로도 알려진 독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바위섬들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료에 의하면 이 섬들은 한국의 부분으로 간주되지 않았으며 1905년부터 일본시마네현오끼행정구의 관할하에 있었다. 지금까지 한국은 이 섬들에 대한 령유권을 제기한적이 없다.》라고 씌여져있었다. 사실 쌘 프랜씨스꼬강화조약에는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며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의 령토에 대한 려유권을 포기한다고 지적되여 있다. 그러나 문건에는 독도가 지적되지 않았으며 이것은 일본으로 하여금 미국인들이 이 령토를 일본의 소속으로 남겨둔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몇년동안 미군은 다께시마를 시험장으로 리용했다. 그러다가 1954년에 미국인들이 독도를 떠난후 한국군이 이 섬을 차지했다./외신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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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아프리카
    2012-09-16
  • 이해하면서 삽시다
    참 간사한게 사람마음인가 본다. 한국에 있을때는 불법체류자라고 쩍하면 단속이다 뭐다 우리를 들볶으면서 괴롭힌다고 한국정부에 그리도 불만이 많았던 나였다. 하지만 귀국해서 날이 갈수록 그게 아니다.고작 우리연변땅의 두배밖에 안되는 작은 땅덩이! 거기에 자국민 오천만도 인구밀도가 중국의 세배도 더 되는터에 탈북자들과, 교포들을 망라한 외국인 백만까지… 실로 골치아프지 않을수가 없으리라. 더구나 외국인 백만은 거의다가 노동력이니까 아무리 그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을 해서 돈을 번다지만 취업율에도 막대한 손실을 주고 있는게 사실이다.한데도 한국정부는 그냥 공제의 목적으로 단속이다 그렇게 형식으로 소리만 높일 뿐, 진짜로 못살게 굴었던 적은 참말로 없었던것 같다. 체류법대로 엄격히한다면 이잡듯이 뒤지고 수단방법 가리지 않을수도 있다. 여하튼 딱 잡자고만 맘먹으면 우리가 무슨 수로 숨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런적은 참말로 없었다. 내가 아는 사람중에 잡혀서 귀국한 몇몇은 다가 술마시고 누구와 싸움질해서 말썽을 일으키거나, 여자들은 또 못나게도 지들끼리 헐뜯고 싸우다가 누구에겐가 고발을 당해서 한꺼번에 쌍으로 잡힌이도 있으며, 돈있는 한국 남자를 꼬셔서 바람을 피다가 그 부인한테 잡혀서 개망신하고 귀국한이도 있고 또 누구는 같은 교포끼리 어느 하나가 한국인들한테 알랑방구로 달라붙어서 교포들을 왕따나 시키고 괴롭히다가 미움을 사서 제사람들한테 고발을 당한이도 있다.…..그러루한 일이없이 그냥 부지런히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착하게 열심히 일하고 본분을 지키는 사람들은 십여 년씩 스스로 맥이 진해서 못할때까지 얼마든지 숨어 지내면서 돈들을 벌고 있는 것이다.민약에 중국땅의 1%도 안되는 그 작은 땅덩이에 우리교포들의 자유왕래까지 허용한다면 한국땅은 폭발이라도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여러 가지로 저애한다고 해도 사실은 약삭빠르고 갈만한 이들은 거의다 한국에 갔으니까. 지금 한국내에 머무르고 있는 우리 중국교포들만해도 수십만이 되는데 나처럼 한국가서 있다가 귀국한 이들 역시 적은 수가 아니리라고 본다.그러니까 사람은 냉정해야 한다고 했으리라. 생각할수록 한국정부의 시책이 난 그래서 이해가 된다. 이제는 덮어놓고 그들이 인정머리 없다고 그냥 우리를 인정해 주지 않는게 잘못이라고만 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다.그냥 간단한 생각으로 우리집이 비좁은데 갑자기 손님이 많이 쓸어온다면 어떻겠는가 말이다. 그게 아무리 귀한 손님이라도, 제일로 가까운 친척, 그래 시집간 친딸이 손군들을 앞세우고 놀러 왔다고치자. 적어도 정상적인 생활리듬이 깨져서 오래되면 지겨울 때가 왜 없을까? 집이 널찍하고 인심이 나는 쌀독도 넉넉하고 그렇다고 해도 손님이 너무 많이 자주 다니는건 누구라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그러니까 그런 도리 아니겠는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고 이번엔 그 손님이 주인집의 경제래원에까지 영향을 준다면 손님 때문에 진짜로 못살 때를 만나는 게 아닐까 싶다.만약에 그렇게 못살때를 만나는 상황이 나한테 닥친다면 체면이고 뭐고 어디 있겠는가 몽둥이를 들고서라도 미운 손님을 얼른 쫓아내야지. 그런데도 대한민국정부는 우리한테 그런적은 없지 않는가? 그냥 문명하게 점잖게, 단속이라는 허울로 조금 자유행동을 구속하는정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사실은 아니였다. 내가 알기로 해마다 돌아오는 연말연시 단속때면 그냥 외출을 조금 삼가면 그만이다. 찾아다니면서 따라다니면서 괴롭히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그게 어때서? 지금와서 생각하면 그것도 재미였지 싶다. 우리가 어머니고국에 찾아갔으니 외가에 간 셈인데 외손녀 외손자들이 너무 설칠 때면 꽥 고함을 질러서라도 조금 기죽이는 일은 얼마든지 이상한게 아니잖은가. 그렇다고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가 외손군들을 미워서 그랬을까, 또 그랬다고 우리한테 외가집이 원쑤로 될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래도 마냥 그리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에 외삼촌과 이모들!!감사하면서 살면 행복하다고 했던가? 그래서 난 우리교포들께 권고하고 싶다. 지겹도록 많이 몰려간 우리들한테 한국정부는 그만하면 참말로 인도적으로 잘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리저리 숨어 지내면서도 그래서 한국간 우리동포들 어느 누구라도 돈은 벌지 않았는가. 그리고 솔직히 나도 불법체류자 되어보아서 알지만, 불법체류자들이 돈은 오히려 더 많이 모은다. 일체 연장수속이다 세금이다 교육이다 그게 없는데다 집에 올수 없으니까 적어도 몇 번의 비행기 왕복 티켓값에 남들이 집다니는 시간에 쉬지 않고 번 돈이라도 더 남지 않았는가 말이다.그런데 어쩌라고? 돈도 많이 모으고 그냥 합법적인 신분도 달라. 세상엔 그렇게 좋은일만 있는게 절대로 아니다 한쪽이 좋으면 어느 한부분은 조금 모자람을 참아야 하는법. 맛있는걸 배불리 먹고 운동도 안 하고 편히 지우면 뚱보가 되여서 미운 몸매로 살아야고 배고픔을 참고 이악물고 다이어트에 운동을 하느라 고생하면 또 예쁜 몸매로 살 수 있는것과 같이 고통과 향수는 언제나 반반이다.몰려간 인간이 하도 많으니까 밉게 노는 인간들도 사실은 적지 않다. 도둑질하는놈 강도질 하는놈에 심지어는 중국에서는 끔쩍도 못하던 성폭행에 살인까지….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잇발이 갈리고 등골이 써늘한터에 그래도 한국정부는 우리교포들한테 그렇다고 다 싸잡아서 못살게 굴지는 않았다. 일부 악의를 품은 한국인들이 듣기 구차한 욕을 해서 우리한테 상처는 주지만도 우리식구들이 잘못을 했으니까 욕만큼은 또 감내해야 한다고 본다.성문에 불이 붙으면 뒤뜰의 연못에도 화가 미치거늘 도리없이 한패거리라고 몰아서 족친다면 억울해도 하는수 없이 맞아 줘야 하는터에 그냥 욕만 먹으니까 그래도 맞기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맘속에 상처도 어쨌든 상처는 상처지만 몸에 생채기 나는것보단 구차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어쩌겠는가 그게 우리 중국 교포인것을….. 내가 잘못하지는 않았지만 우리함께 간 일행 중 누군가가 그런 못된 짓을 했으니 욕할때는 그냥 아무개가 아니고 중국교포 네글짜가 앞에 딱 붙으니까 전체가 팔리고 욕을 함께 먹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손님이 손님을 더 싫어한다고 했으리라. 하지만 손님 가운데 미운 손님이 더러 섞이는것도 어쩔수 없는 일이다. 어차피 나쁜 사람은 인구비례로 어디나 다 존재하는 것이니까 체로 치거나 찍어서 맛을 보고 일일이 다 솎아내는 수는 없다.그래서 우리는 여러 가지로 다 이해하면서 살아야 한다. 세상은 이럴수도 저럴수도 있는법이라고. 그러면 우리도 속편하고 기분이 많이 가벼워질 것이다.동포들이여! 넉넉한 마음씨와 이해는 우리 자신한테 행복과 편함을 주는 것이지 절대로 남을 위한 것이 아니다. /훈이
    • 독자기고
    2012-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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