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8(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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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문화 자조모임은 낯선 서울생활의 활력소
    - 자조모임으로 다문화가족 간 네트워크 구축 및 적극적인 사회 참여 ‣ 자기역량개발, 가족관계 향상, 문화예술 활동, 지역사회 봉사 등 다양한 활동 실시 - ’13년에 이어 ’14년에도 우수 자조모임에 활동비·활동장소 등 지원 ‣ 25개 우수 자조모임 대상 5개월 동안 단체별 40만원 활동비 지원 - 市, 다문화가족이 지역사회에서 당당히 활동할 수 있도록 든든한 버팀목 될 터…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다문화 자조모임이 낯선 타지에서 언어·문화적 차이로 인하여 정착의 어려움, 사회 및 가정 적응 스트레스 등을 겪고 있는 결혼이민자들에게 친구들을 사귀고, 여가 활동을 함께 하면서 사회구성원으로 당당히 설 수 있도록 톡톡히 도움을 주고 있다. 마포구 중국 전통춤 자조모임「T.G.M」에서 활동 중인 중국 출신 결혼이민자 위엔위홍(거주 기간 11년차)은 “한국에 친구도 없고, 아는 사람이 없어서 외롭고 힘들어 1년에 10개월은 중국에서 보내고 2개월만 한국에 있었어요. 그런데 자조모임에 참석하게 되면서 같은 나라 언니, 동생들도 사귀고, 편안하게 모국어로 대화도 할 수 있어 스트레스도 풀고 너무 좋아 요즘에는 중국에 안가고 한국에서 계속 지내고 있어요. 또 중국 전통 춤을 통해 중국 문화를 알릴 수도 있어 너무 좋아요.” 라고 밝혔다. 베트남 출신 결혼이민자 딤후왠(거주기간 11개월)은 “임신 8개월이라 베트남 음식을 먹고 싶은데, 남편이 베트남 음식을 싫어해요. 혼자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가 없어 힘들었는데, 자조모임을 통해 다른 임산부들과 함께 베트남 음식을 요리하고, 이야기도 나누며 산전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었어요.” 고 말했다. 서울시는 결혼 이주여성들이 함께 모여 정을 나누며 다양한 취미활동을 통해 정서적으로 교감하고 나아가 지역사회에서 활발히 활동할 수 있도록 ’13년도에 처음 시작된 다문화가족의 자조모임 지원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14년에는 자조모임이 단순한 정서적 교류의 장을 넘어 모임을 통해 결혼이민자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25개 우수 자조모임을 선별하여 활동비와 모임장소 등을 지원하고 있다. 선정된 자조모임은 5개월 동안 활동비 40만원과 모임장소를 지원받으며, 모임장을 주축으로 자조모임이 스스로 활동할 수 있도록 자조모임장을 대상으로 리더십 교육도 실시할 예정이다. 자조모임은 결혼이민자, 배우자, 일반시민 등 최소 8명 이상으로 구성되며, 각 자조모임은 월 2회 이상 정기모임 및 수시모임을 통해 자기역량강화, 문화예술 활동, 재능 기부 봉사활동 등 다양한 활동 하게 된다. 상반기에 활동이 우수한 자조모임은 하반기에도 지속적으로 지원할 예정이다. 서대문구「무지개 약손」자조모임은 결혼이민자들이 내국인 여성들과 함께 혈액순환을 돕는 약손 마사지를 배우고, 사회복지관 등에 방문하여 약손 마사지 봉사활동을 하며, 주민들의 다문화에 대한 인식을 향상시키고, 지역사회 참여 봉사 활동을 할 예정이다. 은평구「뿌잉뿌잉 동화나라」동화구연 자조모임은 다양한 국적 결혼이민자들이 모여 2012년부터 지속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금년도부터는 서울시의 지원에 힘 입어 월 3회 이상 모여 연습을 하고, 장애인 복지관 등에서 동화 구연 봉사 활동을 할 예정이다. 동작구 다사모(다문화가족을 사랑하는 모임) 자조모임은 한국인 배우자 10명이 근무 시간 외에 월1회 모여 부모역할, 자녀 학습 방법 공유 등 자녀 바른 선장과 긍정적 학교생활에 도움을 주고, 배우자간의 유대감 형성으로 상호상담, 자립적 안정적인 생활 지원 활동 할 예정이다. 윤희천 서울시 외국인다문화담당관은 “거주기간이 짧은 결혼이민자들이 한국에 온지 오래 된 결혼이민자들과 만나 멘토․멘티 활동을 통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지역사회에서 당당힌 활동 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자조모임을 지속적으로 지원하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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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5
  • 막내한테 각별했던 어머니의 그 사랑
    ■ 현룡선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추억이 있기 마련이랄가? 지천명에 들어서면서 나는 가끔씩 홀로 방안에 조용히 앉아 과거에 대한 회포에 잠기는 시간을 가져보군 한다. 그때마다 지금껏 나에게 사랑을 베풀어온 자애로운 어머니가 눈앞에 떠오르면서 가슴이 뭉클해나고 눈가에 이슬이 맺혀오군 한다. 그도 그럴것이 자식이 많았건만 나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각별했으니말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여나던 해는 1961년, 바로 우리 나라가 3년 재해로 극히 어려울 때였다. 그때 나를 낳은 어머니는 지나친 영양실조로 근본 젖 한방울 낼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어머니는 좁쌀죽물로 젖을 대신, 간혹 나는 동네 애기엄마들의 젖을 빌어먹기도 하였지만 하여튼 당시 나는 동네의 여느 애들보다 더욱 어렵게 자랐다 한다. 나는 6남매중 다섯째였으며 그 고난의 년대에 태여나서인지 늘 앓군 하여 어머니의 속을 무던히 썩이였다. 내가 7살나던 해로 기억된다. 어느날 어머니의 일손을 돕는다며 비자루를 들고 장판구들을 쓸던 나는 갑자기 어지럼증으로 눈앞이 캄캄해나며 그만 쇼크하고말았다. 나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 집과 가까이에 있는 신흥위생원으로 가게 됐다. 의사는 나의 기색을 살펴보고 또 맥을 짚어보고하더니 영양실조로 인한 빈혈증이라 진단을 내렸다. 내가 점적주사를 맞는동안 어머니는 마음이 퍽 속상했던 모양이였다. 어머니는 안색이 파랗게 질려갔고 몇번이나 이런 말을 곱씹는것이였다. “엄마가 너에게 미안하구나. 빚진게 너무 많구나.” 그때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었다. “엄마, 왜 울어요? 울지 말아요.”나 또한 너무나도 어린지라 어머니의 말뜻을 리해하지 못하고 어머니가 흐느끼니 리유없이 따라 울었다. 그후의 나날에 어머니는 여러 자식들중 나한테 각별한 관심을 돌려오셨다. 당시 그 많은 식구들이 아버지 혼자로임에 매달려살다보니 생활난에 쪼들리기가 일쑤였다. 어머니는 식량사정이 어려워 밥을 지어도 밑에 감자를 썰어 납작하게 깔고는 그우에 옥수수쌀을 얹고 맨우에 입쌀을 조금 얹어서 짓군 했다. 그러면 이밥과 옥수수밥을 섞어 먼저 아버지그릇에 담고 다음 나의 그릇에 담았으며 그 다음 입쌀 한알 없는 옥수수에 감자투성이인 밥을 다른 형님누나들과 함께 나눠드시군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색다른 반찬만 있으면 어김없이 따로 그릇에 담아 나한테 특별히 안겨주군 했다. 어머니는 내가 다른 집 애들과는 달리 키가 작고 몸이 약한것이 젖을 못먹고 자란탓이라고 하면서 자신은 자식한테 큰 죄를 진 못난 엄마라고 장탄식하군 했다. 그 죄책감을 떨쳐버리느라 어머니는 나한테 늘 지극정성을 다했으리라. 아직도 나의 기억속에 좀체로 잊혀지지 않는 한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지난 세기 70년대초 아마 내가 소학교 2학년때였을것이다. 어느날 학교에서 운동대회를 하였는데 학부모 한명씩 참석하게 하였다. 운동경기가 반쯤 진척이 됐고 점심시간이 되자 학급의 애들은 저마끔 자기 부모를 찾아 나무아래의 시원한 그늘에 앉아 점심을 먹게 되였다. 어머니는 도시락으로 이밥에 콩나물반찬을 준비했었다. 우리 집 생활형편에서는 일년에 몇번쯤이나 먹어볼수 있을가싶은 고급반찬이였다. 헌데 나옆에 앉은 아이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돼지고기반찬을 아주 맛나게 먹고있는것이였다. 구수한 고기냄새가 나의 코구멍안을 살살 간지럽히고있었다. 그 세월 돼지고기는 아주 희귀했다. 명절이 돌아와야 집집들에서 표를 가지고 살수 있었는데 한사람당 몇냥씩밖에 차례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가정들에서는 심한 경제난으로 몇달에 한번씩이나 먹어볼수 있는 돼지고기도 사지 못하다보니 표는 그냥 남아 다른 집에 주기까지 했다. 나는 그 아이가 먹는 돼지고기반찬이 너무도 먹고싶어 침을 꿀꺽 삼키며 부러운 눈길로 넉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어머니가 나의 한팔을 확 끄잡아당겨서야 나는 제정신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나를 외면하는 어머니의 두눈에는 벌써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어머니는 죄진 사람처럼 고개를 푹 떨구고 아무 소리없이 가냘픈 두어깨를 들먹이고있었다. 내가 그토록 돼지고기반찬이 먹고싶어 침을 흘리고있을 때 나를 그처럼 애지중지했던 어머니의 마음은 오죽 아팠으랴. 철없던 그 시절 나는 어머니의 그 마음을 다 읽을수 없었다. 그후 오래지 않아 나의 생일날이 돌아오게 되자 어머니는 매일 강변에 나가 모래와 자갈을 치는 부업을 했다. 전에도 어머니는 가끔씩 강변에 나가 그런 푼돈벌이를 해서는 집살림에 보탰다. 사실 찜통더위속에서 자갈을 치는 일은 그야말로 고역이여서 아버지로부터 우리 형제들이 한사코 말렸지만 어머니의 고집을 꺽지 못했다. 어머니는 섬약한 녀인의 몸으로 남성들도 힘들어하는 일을 며칠간 견지해서 돈을 벌었다. 그 돈 한푼한푼에는 어머니의 피땀이 고스란히 슴배여있었다. 드디여 내 생일날이 돌아왔다. 어머니는 여러해동안 모아두었던 돼지고기표 여러장을 갖고 시장에 가더니 내가 그토록 먹고싶어하던 돼지고기를 큰 덩어리채로 사왔다. 그날 저녁, 구수한 돼지고기국 냄새가 집안에 감돌았고 온집식구가 기분좋게 밥상에 마주앉았다. 어머니는 다 익은 돼지고기를 칼도마우에 놓고 썰어 큰 그릇에 가득 담아 밥상에 올렸다. “네가 지난번 운동대회때 그렇게도 먹고싶어했는데 오늘 생일날 실컷 먹어라.”어머니는 손수 젖가락으로 고기 한점을 짚어 간장에 뚝 찍어서는 내입에 넣어주며 말씀하셨다. “야, 맛있다!” 나는 감탄을 련발하며 냠냠 맛있게 먹어댔다. 그 시각 어머니는 분명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것 같았다. 어찌나 기분이 즐거웠으면 나의 볼에 뻑뻑 뽀뽀까지 해주셨다. 그때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오늘 그날의 그 정경만은 기억속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류수같은 세월이 흘러 나도 이젠 나이 50세를 넘겼고 딸애도 이젠 나의 키를 넘어서고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아직도 그렇게 끔찍히 아끼고 감싸안아주고싶은 응석둥이아들로 남아있다. 인젠 85세 고령의 년로한 몸이여서 시름시름 앓는 형편이면서도 짬만 있으면 집에서 나의 빨래감부터 찾는다. 극구 말려도 어머니의 고집을 못말려낸다. 어머니는 또 나와 함께 식사할 때면 부지런히 내가 즐겨먹는 반찬을 내 밥그릇에 집어놓아주시군 한다. 돌이켜보면 어머니는 그 옛날 젖이 나오지 않아 나한테 젖 한방울 먹이지 못했던 그 일이 내내 마음에 걸렸었던것 같다. 긴긴세월이 흘러간 오늘에 와서도 어머니의 마음속에는 그 일이 평생의 빚으로 맞혀오고있는것이였다. 아! 부모란 바로 이런 존재로구나. 순간, 나의 두눈에 이슬이 맺혔다. 눈앞의 모든것이 뿌옇게 보였다. 미구하여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쓱 씻고나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니, 어머니는 왜 다른 자식과는 달리 이다지도 나를 사랑합니까?” 어머니는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말씀하셨다. “다른 원인이 없지, 너는 내자식이기때문이란다.” 어머니의 이런 말씀에 접한 나는 또다시 눈앞이 부옇게 흐려났다. 평생 자신의 모든것을 자식들에게 끊임없이 바쳐왔음에도 그에 대한 보답은 꼬물만치고 바라지 않는 어머니이시다. 정녕 자식에 대한 책임을 다 하신 어머니이시다. 까놓고말해서 나는 지금껏 어머니한테서 너무 많이 받은 대신 엄청 많은 빚만 지면서 살아왔다. 나에 대한 어머니의 다함없는 사랑이 자꾸 하늘처럼 높이 쌓여만 가니 자식으로서는 도저히 갚을수 없는 사랑의 빚을 질수밖에 없다. 늦기는 하지만 이제라도 내가 어머니한테 해드려야 할일은 오직 효도일뿐이다. 어머님 고맙습니다. 너무 수고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 아들은 어머니한테 효성을 다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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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4
  • [잡문] 세상살이와 취미생활
    ■ 연변 리포터 김철균 불현듯 “조물주”가 참 위대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우리 인간을 놓고 보더라도 머리 하나에 눈, 귀, 코구멍이 각각 둘 씩이고 몸뚱아리에도 손 둘, 발 둘 등으로 대칭되니 얼마나 기묘한가?! 또한 인간 몸뚱아리의 둘 씩 있는 이 물건은 이렇게 서로 대칭되면서도 “상부상조”한다. 예하면 바줄을 당길 때 두 손은 엇바꿔 바줄을 쥐며 힘을 가하고 길을 걸을 때 두발 또한 엇바꿔 내디디면서 앞으로 전진하며 두 귀와 두 눈 역시 각각 오른 쪽 혹은 왼 쪽의 사물과 소리를 분별하며 보고 듣고 하기도 한다. 그럼 세상만물이 처음부터 이렇게 됐을까? 아니라는 생각이다. 생존을 위해 진화되면서 인간의 오늘도 이렇게 된것이라 점치게 된다. 그럼 우리의 옛조상 할아버지들인 유인원이 오늘의 인류로 되기까지는 수천수만갈래의 진화를 거쳤을 것이며 현재의 우리의 삶 역시 계속되는 진화속에 있을 것이 아닐까? 가령 그것이 맞다면 현재 우리가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것이나 또 다른 삶의 형태인 취미 - 즉 요즘의 유행어로 말한다면 레저생활도 진화과정의 일종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하다면 나 역시 뭇인간들처럼 무수한 진화속에서 오늘의 내가 “창조”됐다고 터놓고 싶어진다. 지난 세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비록 형수님의 슬하에서 자랐지만 별로 생활적 압력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 헌데 내가 뭐 다혈질인지는 몰라도 취미가 좀 다각적인 것 같았다. 뭐든지 하고 싶으면 하는 성질이었다. 동관악기인 트롬베트를 전공해 음악가로 되고 싶었고 미술을 전공해 멋진 화가로도 되고 싶었다. 또한 사내애면서도 부뚜막일에 각별히 집착했던 모양이던지 형수님이 뭘하면 그 모양새를 따느라고 무척이도 신경을 썼다. 한번은 형수님이 계란에 부추를 섞어 볶았는데 나도 그대로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어느날 형님과 형수님이 퇴근하기 전에 일찌감치 계란을 먼저 볶아내고는 부추를 함께 넣었다. 헌데 암만 봐도 물이 적은것 같아 물을 좀 넣었더니 글쎄 부추란 야채에서 물이 나오면서 계란부추요리인 것이 아니라 계란부추국이 돼버렸다… 내가 이렇게 부지런하다고 하면 남들은 혹간 공부도 잘했으리라 여길 것이다. 허나 천만에다. 한번은 화학시험을 57점을 맞아 형한테 야단맞은 적도 있었으니 어느 정도인 것을 알 것이다. 또 있다. 사내로서 밖에서 뛰여다니고 망치를 쥐고 뚝딱거리며 못이나 박는 일은 죽도록 질색이었다. 그러니 취미가 다 방면이란 것도 새빨간 거짓말로 되고 있다. 그건 그렇고 한편 내가 공부는 하지 않고 엉뚱한 곳에 자꾸 신경을 쓰니 형님은 “누가 네가 해주는 음식을 먹자고 하던?”라고 하며 공부만 하라고 강요해댔다. 헌데 들을 놈이 들어줘야지 형님도 용빼는 수가 없었다. 나중엔 형님도 “어쩔수 없어 지금이 어디 공부를 하는 세월이라구. 공부를 잘해도 대학에 못가겠는데 뭐” 하면서 포기했다. 그러니 난 제딴에는 형님이 나의 취미를 인정해 주는 줄 알고 더욱 외딴 일에 열을 올렸다. 그림을 그릴라치면 밤이 새도록 도화지를 펴놓고 이른바 “초상화”를 그린다 했고 트럼베트를 불라치면 윗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도록, 동네방네서 귀를 막고다니도록 불어댔으며, 또한 영화(당시는 TV가 없었음)에서 식당요리사들이 채써는 걸 보고서는 그대로 잽싸게 칼질을 해대느라 흉내내다가 칼에 손을 벤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긴 지금은 딱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당시 나한테도 이른바 이상과 개성이란 것이 있는 것 같았다. “남들이 다 하는걸 하면 성공하기 어렵다”, “악사나 화가는 멋지고 요리사는 잘 먹을 수 있다” 등등으로 말이다. 헌데 나는 그중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하고 오늘날 요꼴, 요모양이 됐다. 후회되는가? 그런 것도 없다. 오히려 취미가 여러 종이 되니 써먹을 곳이 많아 좋기만 하다. 예하면 내가 소고기 꽃등심으로 불고기를 하거나 생신한 꽃게를 갖고 무침을 해서 남들한테 선보였을 때 그들이 맛있게 먹어주면 그 이상 즐거운 일이 없었다. 또한 어린 딸애한테 가요 “아리랑”, “고향의 봄” 등을 오선보로 일필휘지해줬더니 딸애가 눈이 동그래졌으며 딸애학교에서 부모와 함께 제작하라는 소제작작품을 만들 때, 그제날 내가 타던 선박 “코리안스타”호를 모양내서 만들어 줬더니 뭐 주급이란던지 국가급이라던지 하는 상도 탔단다. 그외 현재 내가 기자이니 딸애의 작문지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한바탕 제자랑을 늘여놓았더니 어쩐지 좀 게면쩍기도 하다. 평생 반장 한번 해보지 못한 놈이 자랑은 무슨 개떡같은 자랑인가! 하지만 사람마다 다 있는 것이 아닌 이런 “재간”이 있으니 큰 전문가는 되지 못해도 밑바닥 인생으로 살아 가기에는 이전엔 별로 거침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또 이한 모든 것도 내가 처음부터 알고 있은 것이 아니라 이른바 노력하는 “진화속”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그렇다. 취미로 익히고, 살아가기 위해 배우고, 또 자랑하기 위해 숙련시키고 말이다. 화제는 다시 서두로 돌아간다. 내가 이렇게 저렇게 몇가지 취미가 있다면 어떤 어르신들은 참 별난 취미생활이 있는 것 같다. “조물주”가 만들어준 건강하고 영활한 몸뚱아리와 총명한 영혼을 별로 좋은 일에 쓰는 것 같지를 않고 있다. 국녹을 타먹는 이가 절로 인생을 개척하는이를 보고 무능하다고 비웃는가 하면 남을 헐뜯는데도 재간이 가지각색이다. 남이 일을 잘하면 그 사람을 라이벌로 여기면서 헐뜯고, 남한테 좀 불행이라도 생기면 잘코사니를 부르며, 심지어 남의 아내의 발이 큰 것마저 그런 사람한테는 커다란 “이슈”가 돼버린다. 왜 그렇게 살까? 한편 어떤 사람들은 남을 위해 사는 “재간”은 별로 없고, 자아업무에도 게으르고, 제로(령)이지만 엉뚱한 두뇌는 아주 발달된 것 같다. 사회기반을 만들고 울타리를 두르고 지도자한테 질러주고 여하튼 사교술은 “외교부 장관”의 버금으로 간다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참 이상한 취미, 과연 언제까지 그렇게 살런고? 한편 그런 사람들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 “강한 사람은 질투를 하지 않는다. 질투하는 사람을 보면 꼭 어딘가 부족하거나 약한 곳이 있다”고 했다. 일리가 있다. 살아야 하니까, 그렇게라도 살아야 하니까, 심리평형이라도 잡아야 하니까 말이다. 인류사회란 모순과 갈등, 사람 사이의 같지 않은 취미에 따라 각종 질투와 오기가 있기 마련이다. 중국이 그런가 하면 외국도 그렇고, 남자가 그런가 하면 여자도 그러하다. 다만 우리가 사는 이 지역사회가 좀 더 심하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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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4
  • [단편소설] 전쟁과 칠성영감의 여인들
    □ 김철균 올해 85세인 칠성영감이 오랜 투병생활 끝에 며칠 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임종전 칠성영감의 부탁으로 안노인은 한국에서 사는 한 80대(87세)의 안노인과 60대 초반의 한 남성을 초청했다. 임종을 앞두고 칠성영감은 손을 내밀어 한국에서 온 여인 윤씨와 마지막까지 자신의 곁을 지켜준 마누라 오씨의 손을 동시에 잡아 주었다. “한국에서까지 와준…임자가 고맙수. …임자한테 미안하구려. 그리고… 여보 피붙이 한명 없이 … 마지막까지 나를 거들어 주어 고맙수. 당신…한테… 당신한테 더욱 미안하구려…” 그러고는 다시 한국에서 온 60대 장정 박씨의 손을 잡고 마지막 부탁을 했다. “두… 어머니의 남은 …인생을 너한테…너한테 맡긴다. …애비로서 부끄럽다만…” …… 1 칠성영감이 태여난 곳은 조선 전라도 남원지방의 어느 한 시골이었다. 당시 일제시대라 여느 가정이라고 살림이 넉넉할리 만무했지만 칠성이네 가정은 더욱 가난했다. 때문에 칠성이는 17살 되도록 장가갈 엄두도 못냈다. 한살 아래인 여동생 봉녀(애명)가 머리얹을 나이가 됐건만 칠성이 때문에 매파가 문턱이 닳도록 찾아와도 그냥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밤, 마을동쪽 홰나무아래에서 모기불을 피워놓고 한담하던 중 문득 칠성이의 송아지친구인 석동이가 기발한 착상을 내 놨다. “칠성아, 우리 이러다간 평생 총각딱지 뗄 수 없능기라. 우리 이러믄(이러면) 아주 멋질 것 같응기라. 니와 방아칸집 금돌이 그리구 나 모두 누이들이 있으니 서로 엇바꿔 누이들한테 장가들면 어떠항기라. 허긴 금돌이한테는 두살 많은 누이라지만…헤헤헤.” 석동이의 뜻인즉 칠성이가 금돌의 누나 윤삼월한테 장가들고 석동이가 칠성의 여동생 박봉녀한테 장가들고 금돌이 또한 석동의 여동생인 함인애한테 장가든다는 이른바 “누이바꿈”이었다. 칠성이로 말하면 서운했지만 아주 그럴듯 했다. 부모님한테 엿주었더니 부모님 역시 칠성의 생각과 같았다. … 약 한달 뒤 이들 세 친구는 같은 날에 혼례식을 올렸다. 그날 밤 사랑채에 신혼방을 차려놓고 한방에 든 칠성이네 내외간- “나이 두살이나 더 먹구 서방님 모시기가 부끄럽구만이라.” “아니 나야 뭐 좋기만 한디. 없는 집안에 들어온 임자가 고맙기만 항기라.” …… 이는 백연해로를 약속한 이들 부부의 첫 대화였다. 한편 체통이 우람지고 얼굴까지 준수한 칠성에 비해 삼월이는 나이 두살 더 많은데다 그 때 벌써 눈언저리에 잔주름이 가기 시작한 것이 흠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칠성이한테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가난한 팔자에 장가를 든 것만 해도 기쁘기만 했다. 가난속에서도 그들의 신혼생활은 달콤했다. 하지만 이런 생활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칠성를 비롯한 동네 젊은이들이 학도병에 끌려가게 됐던 것이다. … 마모루모 세무루모 꾸로가네노 우까베루 시로조따노 미나루 (싸움도 지킴도 떠오르는 강철성의 힘이요) 독우까베루 소노 시로 히노모또노 미꾸니노 요모오 마모루베시 (떠오르는 그 성의 힘으로 태양의 근본 황국의 사방 지킬 것이리) … 일본군가(일명: 군함행진곡)가 주악되는 가운데 경성역(지금의 서울역)은 일장기로 숲을 이루었고 반자이(만세)소리가 역광장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아들이나 남편을 전선으로 내보내는 조선인 어머니와 안해들은 땅을 치며 통곡했다. 기적소리가 길게 울리자 칠성이네를 앉힌 군용열차는 서서히 플래트홈을 빠져 나갔다. “서방님, 와 나 빈몸으로 남겨두구 떠나는깅라? 부디 살아서 돌아오랑께…” 그 때까지 삼월이한테는 태기가 없었다. 2 조선인학도병을 실은 군용열차는 10여일 가량 달리다가 지나땅(중국)의 광주에 도착했다. 거기서 칠성이네는 다시 군함에 올라 남쪽으로 향했다. 며칠 뒤 군함이 입항한 곳은 버마(지금의 먄마)의 어느 작은 항구였다. 조선인학도병들은 인차 진지에 배치되었다. 그들의 임무는 인도, 방글라데쉬와 버마 삼각지대에 진지를 구축하고 동맹군의 상육을 저지시키는 것이었다. 칠성이네가 포진한 후 며칠 안되어 과연 동맹군의 폭격기편대가 하늘을 뒤덮더니 융단식 폭격을 퍼부었다. 군막사가 날아나고 아름드리 나무가 뿌리채로 뽑히면서 폭격은 기승을 부렸다. 일본군 스츠키 이치로 중대장이 인솔하는 일본군은 며칠동안 지속되는 동맹군의 폭격에 30% 이상이 저승사자가 됐다. 그리고 보급로가 끊어진데다 창고가 폭격에 불타면서 식양도 바닥났다. 이어 동맹군 함정들의 무차별한 함포사격이 4시간 동안 지속되던 끝에 드디어 동맹군의 상육이 개시됐다. 동맹군의 전술은 대량의 물양공세로 일본군 진지를 초토화시킨 뒤에야 상육하는 것이었다. “진지를 사수하라. 육탄으로 미군을 막으라. 나중엔 옥쇄까지 각오하라.” 스츠키 중대장이 악에 받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지만 일본군 진지가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칠성이는 난생 처음 전쟁을 경험하는지라 무서웠다. 아니 무섭다기보다는 일본군을 위해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동맹군이 진지에 오르기 시작하자, 부분적 사병들만 날창을 꼬나들고 결사적으로 저항할 뿐 조선인 학도병들을 비롯한 대부분은 총을 버리고 줄행랑을 놓았다. “사수하라, 육탄으로 막으라. 도망하면 즉결처분이다.” 아니나다를가 스츠키 중대장은 도망치는 사병들을 쏘아 죽이었다. 하지만 도망치는 사병들의 무리는 계속 이어졌다. 신변에 사병 한명도 없게 되자 스츠키 중대장은 탄약 한알이 남은 권총으로 자신의 정수리를 겨누었다… 도주병들이 진지를 떠나 다른 정글속에 들어서자 동행한 사병은 겨우 6병뿐이었다. 나머지는 살상됐거나 실종된 것이 분명했다. “지나땅으로 간다. 그곳은 우리 황군의 대후방이다. 황군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 지나땅에서 재정비해 다시 출격한다.” 6명뿐인 패잔병은 일본군 상등병 다즈치가 인솔했다. 말이 인솔이지 누구도 다즈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 지치고 허기지고 까딱할 기운도 없었지만 모두가 기계적으로 걷고 있을뿐이었다. 북상 3일째 되여 선후로 일행중 2명이 졸도해 죽자 다즈치가 허리춤에서 단도를 빼들더니 시체의 엉덩이살을 베여내서는 불에 굽는 것이었다. “야 이놈 조센징, 너 이걸 먹어라. 먹어야 산다. 네가 죽으면 나 너의 살점도 먹을 수 있어.” … 아무리 굶었다고 어떻게 사람의 고기를 먹을 수 있담?! 칠성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즈치를 쳐다 보는 것만도 무서웠다. 죽어가는 자가 계속됐다. 며칠 지나 또 2명이 죽자 칠성이는 더는 지켜볼 수가 없었다. 인육으로 배를 채운 다즈치보다 굶은 자기가 먼저 죽는다는 건 불보듯 뻔했다. 칠성이는 죽은 자의 고기를 굽고 있는 다즈치한테 덮쳐 들어서는 단도로 그의 목부위를 향해 죽어라고 찍어댔다. 다즈치의 목에서 선지피가 비린내를 풍기며 콸콸 쏟아졌다. 이윽하여 다즈치는 온몸을 몇번 떨더니 인차 축 늘어졌다. 칠성이는 단도를 땅에 꽂으며 주저 앉았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은 칠성이는 단도로 땅을 파서는 다즈치와 기타 2명의 사병을 묻어 주었다. 마지 못해 다즈치를 죽인 칠성이었지만 그는 죽은 자를 묻어 주었다. 이는 다즈치에 대한 그의 마지막 예의였다. … 그 뒤 칠성이는 산열매로 요기하고 뱀도 잡아먹으면서 그저 기계적으로 걷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작은 골짜기를 벗어나자 앞이 탁 트인 개활지가 나타났다. 작은 논과 몇 채의 인가도 보였다. 순간 칠성이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 3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타고 서울 가면서 / 비단구도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 이 노래는 어릴 때 삼월이가 즐겨 부르던 동요였다. 헌데 크면서 부르지 않던 이 노래를 삼월이는 다시 부르게 되었다. 분명 칠성이가 사무치게 그리워서였다. 그러다가도 삼월이는 자기보다 두살 어린 서방을 두고 “우리 오빠 말타고”란 대목을 부를 때면 몰래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그날 따라 아침부터 날씨가 화창하더니 돌배나무위에 앉은 까치가“깍깍”하고 울어댔다. (오늘은 웬 기쁜 일이 있다구 까치마저 울어대능기라?…) 아니나다를가 점심무렵 자전거 방울소리가 나더니 배달부가 사립문가에 나타났다. 분명 기쁜 소식인 것 같았다. 삼월이는 재차 “우리 오빠 말타고”를 흥얼거리며 배달부를 반겼다. 배달부는 정색해하며 전보 한통을 내밀었다. 이에 삼월이는 전보문을 받다 말고 배달부를 쳐다보았다. 글 읽을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읽어줄 것 없능기라. 댁에 학도병에 간 사람 있수? 버마전선에서 전사했다는 전보문잉기라.” 배달부는 투명스레 내뱉고는 휑하니 자리를 떴다. 순간 삼월이는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것 같더니 앞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 칠성이의 “장례”를 치른 이튿날 시가어른인 박씨영감은 삼월이를 앉혀놓고 무거운 입을 열었다. “너한테는 참 안됐다만 널 보면 내 맘이 더욱 심난항기라. 칠성이는 박씨네 하나밖에 없는 대들보 아들이라. 아들없는 집에 며느리를 그냥 둘 수 없능기라. 그렇다고 서방의 씨를 받은 것두 아니구…” 박씨영감은 뒤 말을 잇지 않았으나 삼월이는 어른의 뜻을 알만 했다. 삼월이는 그날로 시가를 나왔다. 시어머니가 며칠만 있으며 마음을 가라앉인 다음 떠나라고 만류하는 것도 마다했다. 그렇다고 어디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말그대로 그냥 살고 싶지를 아니했다. 삼월이는 그 길로 동구밖의 늪으로 향했다. 늪가에 이른 그녀는 하늘에 향해 간단히 용서를 빌고는 치마를 뒤집어 쓴채 늪에 뛰어 들었다. 그러나 삼월이는 죽을 팔자가 아니었다. 얼마 후 삼월이가 눈을 뜨니 자신은 중국인 외토리인 장서방네 참외밭 오두막에 누워 있었다. “왜 날 살렸수?!…그냥 내버려 둘거지 왜 살렸느냐 말잉기라.” “이렇게 좋은 임자를 어떻게 죽게 나눈다 했소! 히히… 이 새뽀얀 살결 좀 보라 했소. 나 처음 임자같은 여자의 속살 봤다 했소.” 당시 삼월은 요해 부분만 제외하고는 온 몸이 발가 벗기운채로였다. 장서방이 그 녀의 옷을 벗긴 후 해볕에 말리고 있었던 것이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한 삼월이는 에라 모르겠다 하며 장서방한테 운명을 맡겨 버렸다. 그런데 장서방과의 운우지정도 오래 나누지 못했다. 손가락 까딱하지 못하도록 삼월이를 아끼고 고와하던 장서방마저 얼마 뒤 온역으로 하루 아침 새에 덜컥 죽어버렸던 것이다. 삼월이는 더는 고향에서 살 수 없었다. 동네사람들은 남자 둘이나 꺾어 먹은 여자라고 등을 돌렸고 친정집 부모님조차 가문의 망신을 시킨 딸을 용납할 수 없다며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녀는 받아주지 않는 친정집을 향해 절을 한 후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고향을 떠났다. 그렇다고 전번처럼 죽고 싶은 마음은 꼬물만큼도 없었다. 4 한편 바로 그럴 즈음 칠성이는 중국 - 버마국경의 중국측 어느 시골의 한 중국인농가의 온돌 위에 누워 있었다. 며칠전 국경을 넘은 뒤 쓰러진 칠성이는 중국인 곽씨여인에 의해 기적적으로 구원되었다. 당시 곽씨여인이 칠성이를 업고 집에 들어서자 그녀의 부친은 “쑈르번(小日本ㅡ일본쪽바리의 뜻)”을 집에 들인다고 호통치다가 “물”하고 입을 여는 칠성의 말을 듣고서야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중의인 곽노인은 칠성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일본말이 아니란 정도는 일고 있었다. “쩌머양, 호이댄러마?(어때요, 좀 나아졌어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칠성이는 곽씨여인의 말이 몹시 관심어린 어조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칠성에 대한 곽씨여인의 정성은 지극했다. 그녀는 미음을 끓여주기도 하고 계란을 삶아주기도 했으며 부친이 처방해주면 산에 올라 약초를 캐서는 직접 닳여 칠성이한테 대접하기도 했다. 칠성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춰섰다. 바깥출입을 할 수 있게 되자 칠성이는 바람을 쏘일 겸 산기슭이나 호수가를 산책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곽씨여인은 함께 동행해 주군 했다. 둘은 언어가 통하지 않았으나 손시늉으로 얼마든지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칠성이가 낚시를 하다가 대어 한 마리를 잡아올리자 곽씨여인은 탄성을 지르며 칠성의 목에 매달리더니 키스세례를 퍼붓는 것이었다. 둘은 대뜸 한덩이로 됐다. 아무리 목석같은 칠성이었지만 그 역시 젊었으며 여자를 아는 남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곽씨여인과 매번 “사고”를 치고 나면 뇌리에는 또 한명의 여인 삼월이가 떠올랐다. 아무리 살갑고 어여쁜 곽씨라지만 칠성이를 놓고 볼 때 중국인 여성인 그녀와 함께 고향에 나타날 자신이 없었고 삼월이를 쫓아내고 곽씨여인을 안방에 들일 용기는 더욱 없었다. 칠성이는 몇번이고 속심말을 그녀한테 털어 놓으려다가 그만 두었다. 자신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한테 차마 떠나겠다고 할 수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도망치는 것이었다. 어느날 밤 칠성이는 자기의 팔을 베고 달콤하게 자는 곽씨여인의 목에서 팔을 살며시 빼내고는 살금살금 문을 나섰다. 심한 자아모순속에 빠지면서 말이다. 5 그 몇년 뒤 칠성이는 조선인민군 군관이 되어 38선 부근에 나타났다. 칠성이로 말하면 자신의 뜻과는 다른 운명의 계속이었다. 몇년전 중국 광서에서 곽씨의 집을 도망쳐 나온 뒤 칠성이는 조선을 바라고 발길을 다그쳤으나 얼마 가지 못하고 국민당군에 붙잡혀 다시 군복을 입었고 항일전쟁이 승리함과 동시에 중원지구로 진출했으며 공산당이 인솔하는 팔로군과 총부리를 마주하게 됐다. 이어 국민당군이 팔로군(후엔 해방군)한테 수세에 몰리면서 칠성이는 팔로군한테 포로됐고 그 다음엔 전향해 해방군으로 됐다. 그렇게 남정북전을 하다가 1949년 4월 해방군에서 근무하는 기타 조선인 군인들과 함께 조선으로 나갔으며, 그 소속사단은 인민군주력으로 됐다. 1950년 6월 25일 새벽4시, 고요하던 38선 상공에 신호탄이 연속 솟아 올랐고 대포소리, 탱크 무한궤도의 굉음으로 복새판을 이루었다. 가슴에 끓는 피를 조국에 바치니/ 영예로운 별빛이 머리위에 빛난다// 나가자 인민군대 용감한 전사들아… 장비와 수적으로 우세인 인민군앞에서 한국군은 전투다운 전투 한번 치르지 못한 채 연이어 무너졌고 전쟁개시 3일만에 수도 서울이 인민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서울에 진출한 칠성이는 이제 오래잖으면 고향에 가서 부모님과 그립던 삼월이도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러던 칠성이는 너무도 생각 밖으로 서울시청 광장에서 삼월이를 만나게 됐다. 당시 삼월이는 어느 한 찻집의 레지로 생활하고 있었다. “해방된 남조선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할데 관한 법령”을 반포하는 모임에 참가했다가 칠성이를 만난 삼월이는 꿈이냐 생시냐 하고 믿지 못하는 모습이었고 칠성이 역시 서울에서 생활하는 삼월이를 보고 크게 놀랐다. 삼월이는 무작정 자기의 숙소로 칠성이를 끌었다. 칠성이 또한 군규율을 망각한 채 삼월이가 이끄는대로 몸을 맡겼다. 이튿날 칠성이가 부대로 귀속되자 마자 사단은 남쪽을 바라고 진격을 개시했다. 당시 인민군은 “진주, 전주, 광주로ㅡ 대전, 대구, 부산으로”란 슬로건을 내걸고 파죽지세로 남진했다. 서울을 떠나던 날, 칠성이는 삼월이의 손을 잡고 “이제 남조선 전체가 해방되면 임자와 함께 고향인 남원으로 내려가 아들 딸 낳으며 살련다”고 약속을 했다. 하지만 약속은 어디까지나 약속이였지 실천은 아니었다. 그해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육과 더부러 낙동강까지 진격했던 인민군은 포위되어 양쪽협공을 받는 수세에 몰렸으며 부득불 전반 전선에 거쳐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칠성이가 소속된 부대 역시 북을 향했으나 서울을 거치지 않고 원주 쪽으로 38선을 넘었다. 그 뒤 중국인민지원군의 입조참전으로 1951년 1월초 중조군대가 다시 서울을 재점령했으나 칠성이가 찾는 삼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 ※ 인생만년에 들어 칠성영감은 윤삼월여인과의 세번째의 상봉을 하게 됐다. 1992년 중한수교가 되면서 칠성영감은 고향인 한국의 남원을 다시 찾게 되었고 수소문끝에 윤삼월이 여전히 서울에서 살고 있으며 40대 초반의 아들과 함께 생활하고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40대의 아들, 그렇다면 6.25 당시 서울에서의 만남과 맞아 떨어졌다. 그때로부터 칠성영감은 과묵해졌다. 필경 자신의 피붙이는 있었으나 윤씨와의 재결합은 말도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에서 돌아온 칠성이는 민정부문에서 중매해준 여인 즉 지금의 오씨여인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장시기의 군인생활에서 여러 차례 부상을 당한 그가 생육능력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칠성이는 이 역시 자기의 운명이라고 여겼다. 그러다가 한국행을 통해 자기한테도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안 뒤부터는 많이 달라졌다. 한편 오씨녀인이 불쌍했다. 오랫동안 함께 살다보니 정도 들대로 든 모양이었다. 칠성영감의 인생을 돌이켜 보면 그는 다각역의 인물이었다. 처음엔 일본군 학도병으로 동맹군과 싸웠고 후엔 국민당군대로 팔로군과 싸웠으며 이어 다시 해방군에 편입돼 국민당군과 싸우다가 조선으로 간 뒤에는 유엔군과 같은 동포인 한국군과 싸우게 된 군인생활, 어떤 뜻에 의해서나 정치이념을 갖고 군인생활을 한 것이 아니었다. 여인들과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었다. 운명에 의해 윤삼월의 곁을 떠났고 광서에서는 곽씨와의 짧은 로맨스도 있었으며 후에는 오씨와의 만남도 이뤄졌다. 그외 “6.25” 당시 부상으로 후방병원에 입원했을 때 간호사 여인과 여차여차하게 관계가 있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이를 증명할만한 증거는 없다. 생전에 칠성영감은 마누라인 오씨한테 자신과 기타 여인들과의 관계를 두고는 단 윤삼월에 대해서만 알려줬을뿐 기타의 곽씨여인 등에 대해서는 함구무언이었다. 인생만년의 투병생활 중 칠성영감은 정신이 혼미할 때마다 이상한 소리를 내지르군 했다. 꿈속에 일본군 스츠키 중대장, 다즈키 상등병 그리고 중국 중원에서의 전투장면과 조선에서 피로 물든 낙동강전선 장면 등이 자주 떠 올랐는가 하면 윤씨, 곽씨와 오씨 등 여인들의 얼굴도 교차되여 떠오르군 했다. 어찌보면 이는 한편의 대하드라마와도 같았다. 여하튼 칠성령감의 남다른 생애는 특수한 시대에 생긴 일장풍운록이 아닐 수 없으며 우리 민족 력사의 한측면을 말해 주는듯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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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4
  • 주한 외국인을 위한 자생 동호회 활동 지원
    해외문화홍보원, 주한외국인유학생협회 등 7개 주한 외국인 관련 자생동호회 선정, 지원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문화체육관광부 해외문화홍보원은 주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문화 소개나 한국 이미지 제고 활동을 하고 있는 민간 자생동호회 7개를 선정하여 지원한다. 해외문화홍보원은 현재 주한 외국인이 150만 명에 달하고, 외국인 강사, 이주민 등의 주한 외국인 계층 다변화와 같은 홍보환경 변화에 부응하기 위하여 정부가 직접 추진하는 사업 이외에도 민간 및 자생 활동기관들과의 다양한 협력 방안을 모색해왔다. 이번에 지원을 받게 되는 자생 동호회는 2004년 다음카페에 ‘나의 외국인 친구들’을 설립하여 10여 년간 한국 젊은이들과 주한 외국인들의 소통과 문화 나눔을 위해 꾸준히 활동해오면서 회원 수를 33,000여 명을 확보하고 있는 ‘옴니 코리아’, 1900년 조선 왕실의 자문 역할을 하던 외국 외교단의 친목 단체로 출발하여 지금까지 각종 한국 문화유적지 탐방, 한국 문화 강연, 한국도서 번역사업 등의 활동을 추진해 오면서 오프라인 회원 수만도 500여 명에 이르는 ‘왕립아세아학회’, 2011년 설립하여 말레이시아, 베트남, 필리핀 등 각국 유학생 동호회 및 각 대학 유학생회를 연계 조직하여 이들 대상으로 한국문화 소개나 언어 교환 프로그램을 체계적으로 추진해 온 ‘주한외국인유학생협회(KINSA)’ 등이다. 해외문화홍보원은 이번 사업이 그간 온 오프라인을 통해 주한 외국인 대상 문화 홍보활동을 자발적으로 추진해 온 동호회들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해외문화홍보원은 이 지원사업이 완료되는 연말에는 동호회들이 추진한 사업의 성과를 발표하고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하여, 이 사업의 지속적인 성장 및 발전 방안을 모색해나갈 계획이다. ※ 지원 대상 단체 및 지원 사업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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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4
  • 중국, 순 자산 10억 달러 부자 152명
    ―세계적으로 두 번째로 많은 국가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미국의 저명한 경제잡지 “포브스”가 일전 공포한 2014년 전 세계 억만부자 순위에서 중국의 억만부자 수가 세계적으로 두 번째로 많으며 순 자산이 10억 달러가 넘는 부자 152명이 전 세계 부자순위에 들었다고 중국신문망이 4일 보도했다. “포브스”에 따르면 2014년 홍콩의 장가실업그룹의 창시자 겸 이사회 주석 리가성이 순 자산 310억 달러로 지난해와 같은 수준, 세계부자순위에서 20위를 차지했고 “오문의 새로운 도박왕”으로 불리우는 홍콩의 가화국제그룹 주석 려지화는 순 자산 220억 달러로 세계부자순위 제28위를 차지, 홍콩의 항기부동산 주석 리조기는 순 자산 196억 달러로 세계부자순위에서 제35위를 차지했다. 중국대륙에서는 중국대륙의 제1부자 완건림이 순 자산 151억 달러로 전 세계 부자순위 제64위, 텅쉰 수석집행관 마화텅이 순 자산 134억 달러로 전 세계 부자순위 제80위, 바이두회사 이사장 리언굉이 순 자산 121억 달러로 전 세계 부자순위 제91위, 와하하그룹의 이사장 종경후는 순 자산 116억 달러로 전 세계 부자순위 제94위를 차지했다. 2014년 전 세계적으로 순 자산 10억 달러를 초과한 부자는 1645명으로 순 자산 총액 6조 4000억 달러에 달했는바 지난해의 5조 4000억 달러보다 대폭 증가했다. 그중 미국의 억만부자 수가 세계적으로 가장 많아 순 자산이 10억 달러가 넘는 부자가 492명이나 돼 기타 나라를 훨씬 초과했다. 중국의 부자총수는 세계적으로 두 번째로 많아 순 자산이 10억 달라가 넘는 부자가 152명이였고 다음은 러시아로 순 자산이 10억 달러가 넘는 부자가 111명이였다. 과학기술의 번영과 강한 증시의 힘을 입어 2014년 전 세계 억만부자 총수는 사상 가장 많았는바 새로 268명 부자가 순 자산 10억 달러 관을 넘었다. 한편 전 세계 재부가 새로운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는바 알제리, 리투아니아, 탄자니아, 우간다에서 처음으로 순 자산 10억 달라 부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최고부자” 나이제리아의 알리코 단코테가 순 자산 250억 달러로 처음으로 전 세계 부자순위 앞 25위에 들었다. “포브스”에 따르면 SOHO중국유한회사 총재 장흔과 룡호그룹 이사장 오아군은 순 자산 37억 달러로 전 세계 부자순위 408위에 올랐고 감옥에 들어가 있는 국미전기의 창시인 황광유의 순 자산은 15억 5000만 달러였다. 지역으로 보면 2014년 아시아에 순 자산 10억 달라가 넘는 부자가 도합 444명이 있고 유럽에는 미국 외 억만부자가 가장 많은 지역으로 도합 468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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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4
  • 미국 제1부인 미셸 3월 중국 방문
    - 중국 제1부인 펑리위안과 회동할 예정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부인 미셸 여사가 3월 19일―26일간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 중국의 교육과 청년들의 생활을 고찰하고 중국 시진핑 주석의 부인 펑리위안과 회동할 예정이라고 백악관의 발표를 인용해 4일 중국신문망이 전했다. 프랑스 통신사 AFP에 따르면 미셸은 현지시간으로 3일 아침 백악관사이트 블로그를 통해 그녀의 중국방문을 선포, 미국 젊은이들이 주목해줄 것을 희망했다. 이날 백악관은 미셸 부인은 3월 20일―23일 북경에 체류해 있으면서 북경시의 한 대학교와 한 고등학교를 방문하고 26일 성도에 가 당지의 한 고등학교를 참관한다고 밝혀 이번 미셸 여사의 중국행이 교육에 초점을 두었음을 시사했다. 알아본데 따르면 2009년 말,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할 때 미셸 부인은 개인사정으로 동행하지 않았다. 헌데 이번에 미셸 부인의 중국 방문에 오바마 대통령은 동행하지 않고 두 딸애 마리아와 샤샤 그리고 미셸 여사의 모친 로빈슨이 함께 한다. 미셸 부인은 백악관 블로그에서 중국은 지구상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이고 국제무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 이번 방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중국 방문기간 중국 학생들과 중국의 생활을 담론하고 미국과 미국의 전통을 담론할 것이며 특히 교육의 중요성을 담론할 것이라고 밝혔다. 알아본데 따르면 이번 중국행을 준비하기 위해 미셸 부인은 3월 4일 워싱턴의 한 중문항목의 초등학교를 참관하고 학생들의 중국어공연과 중국어학습 과정을 관람한다. 한편 미셸 부인은 백악관 블로그를 통해 그녀의 중국행을 제때 제때에 보고하게 된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번 주 말에 유럽과 사우다아라비아를 방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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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4
  • 중국 문화전문가,"한국드라마열풍과 그 이유"
    지금 중국에서 한국의 드라마열풍이 불고있는 가운데 《별에서 온 그대》역시 인기몰이를 하고있다. 이에 관련해 《최근 들어 중국 대륙에서 한류가 불어치고있는데 유구한 력사를 갖고있는 중국 전통문화는 무엇때문에 이같은 뜨거운 인기를 얻지 못하고있는지 그 리유는 무엇이며 우리의 중국 전통문화는 어떻게 하면 널리 알릴수 있겠는가?》하는 화제가 제기되고있다. 이에 관련해 전국정협 위원이자 광동화원(广东画院) 원장인 허흠송(许钦松)은 광주일보(广州日报)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에서 불고있는 한류와 그 열풍의 리유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허흠송위원은 《문화를 널리 알리려면 당연히 많은 이야기거리가 있어야 한다》, 《광동에는 광동의 이야기, 중국에는 중국의 이야기가 있어야만 사회적 지지를 받고 창작품이 존중받을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드라마에서 가장 뛰여난 점은 스토리텔링으로 사람들을 쉽게 이야기속으로 끌어들이는것》이라며 《광동에는 력사적으로 많은 이야기거리가 있지만 이를 작품화하여 풀어내는 사람이 없다》고 지적했다.. 허위원은 《과거에는 영화의 엔딩자막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것이 시나리오 작가였으며 다음으로 감독, 배우였으나 현재는 모 회사 이름이 가장 먼저 나오고 시나리오작가는 조명, 미술 등과 같은 급으로 추락되여버렸다》며 《(음악계에서는) 많은 사람이 가수가 되길 바랄뿐 작사가나 작곡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며 (영화계에서는) 많은 사람이 감독, 배우가 되길 원하지만 시나리오작가가 되길 원하는 사람은 없다》고 현 문화세시풍토를 비판했다. 이어 《이같은 추세는 중국만의 특색을 살리는 창작품을 만드는데 있어 큰 손해를 입혔다》며 《이를 뒤엎으려면 사회적으로 창작품을 존중해야 하고 창작품은 당연히 리득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허위원은 마지막으로 《한국드라마의 한국적 스토리텔링은 (중국의) 젊은층을 쉽게 끌어들이는데 이는 한국드라마령역을 초월하여 (중국의) 문화적자존심에까지 상처를 입히고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문화적 자존심은 문화적자신심이 결여되는데로부터 상처를 입게 된다》, 《문화적자신감이 없으면 창작품이 나올수 없다》고 찍으면서 창작품에 대한 사회적지지를 호소했다.<출처: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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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4
  • 경찰청, 염전 등 일제수색으로 실종자 102명 등 370명 발견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권침해에 적극 대응하기로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경찰청은 지난 2월 4일 ‘신안 염전사건’ 발생 이후, 실종자 발견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권침해 행위에 엄정 대처하기 위해 2월 10일 부터전국 염전.양식장.축산시설 및 장애인시설 등 총 38,352개소를 대상으로 경찰.해양경찰.자치단체.고용노동청 등 관계기관 및 민간단체 등 총 34,064명이 참여한 가운데 실종자 발견을 위한 民官 합동 일제수색을 전개하였다. 경찰은 일제수색 결과 실종자 102명, 무연고자 27명, 임금체불 107명(체불액 12억 2천여만원), 수배자 88명 등 총 370명을 발견, 실종자와 무연고자는 가족과 보호시설에 인계하고 임금체불 件은 고용노동부에 통보 조치하는 한편 감금.폭행.횡령 등 불법행위를 저지른 업주들에 대해서는 1명을 구속, 18명을 불구속 입건하는 등 19명을 수사 중에 있다고 밝혔다. 유형별로 살펴보면, 발견된 총 370명 중에는 실종.가출인이 102명(28%), 임금체불 107명(29%), 무연고자 27명(7%) 등 사회적 약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장애인도 49명에 달하였다. 한편 경찰청 관계자는 이번 일제수색은 불법행위에 대한 경각심을 제고하고, 관련 제보를 유도하기 위해 공개 전면수색을 실시하였지만 앞으로는 사전예고 없이 관계부처와 수시로 수색할 예정으로 사회적 약자의 인권침해행위가 근절되는 순간까지 경찰을 비롯한 관계부처는 수색에 만전을 기할 것이라고 밝히며 주변 인권침해행위에 대한 국민의 적극적인 신고를 당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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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4
  • 인터넷 일간지 ‘동포투데이’ 구글 뉴스 송고 서비스 개시
    [동포투데이] 인터넷 일간지 동포투데이는 3월 1일 구글과 뉴스 송고 제휴를 성사시켰다. 동포투데이는 2013년 11월 13일부터 줌 인터넷, 다음(DAUM)과의 뉴스 전송 개발 작업을 완료하고 뉴스 송고를 시작했다. 이번 구글과 뉴스 송고 제휴를 통해 동포투데이의 뉴스가 구글을 통해 온라인의 지구촌 독자들에게 한걸음 더 가깝게 다가가게 되었다.동포투데이 뉴스는 다음(DAUM), 줌(ZUM), 구글( google.) 네이트(NATE)등 검색 포털사이트 뉴스 검색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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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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