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3(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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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칠레 강진 300명 여수감자 탈옥, 군대 긴급출동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외신에 따르면 (한국시간으로 4월 2일) 칠레 연해에서 8.2급의 강진과 그로 인한 해일이 발생한 후, 진앙지와 가장 가까운 칠레 북부도시 이키케에서 300명 여수감자들이 탈옥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중국신문망이 보도했다. 칠레 경찰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탈옥한 300명 여수감자들중 16명이 다시 잡혀온 상태이다. 칠레정부는 이미 300명의 무장역량을 파견하여 도시질서를 수호하고 있으며 100명의 폭력방지경찰들이 이 지역으로 파견된 것으로 신문은 전했다. 한편 이키케주에서는 경찰력을 파견하여 이 지역의 주유소와 슈퍼마켓을 보호하고 있다고 이키케 주장이 이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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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아프리카
    2014-04-04
  • 한국에서 체험한 만원짜리 관광코스
    ■ 리성욱 (중국조선족대모임 공모작품) 한국유람길에 오른 우리 부부가 인천항 제 1국제터미널에 도착한 것은 바로 4월 1일 오전 10 시였다. 아침부터 재수 좋게 날씨가 아주 좋았다.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었고 아시아에서도 으뜸간다는 인천대교가 우리의 머리위를 가로 타고 멀리 하늘과 바다사이에 머리를 파묻어 끝이 없었다. 인천항 터미널 바로 남쪽 문앞에서 우리는 24호선 공공버스를 타고 동인천역에서 내려 거기서 또 다시 지하전철 1호선을 갈아 타고 부천역까지 간후 곧바로 부천남부지역에서 월세를 맡고 사는 나의 여동생네 집으로 찾아갔다. 이미 출근했는지 그들은 집에 없었다. 우리는 나의 여동생이 사전에 전화로 알려준 곳을 뒤져 열쇠를 찾은후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갔다.우리는 짐들을 대충 정리해 놓고는 이내 꿈나라로 들어갔다. 연길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은 2박3일,기차와 배를 엇갈아 타고 오느라고 심신 모두가 피로로 꽉 찼기때문이었다. 그 이튿날 우리는 여러가지 일 보러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골목에서 대통로로 나가는 동안 눈에 보이는 것이란 온통 벽에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간판과 광고판들뿐이였다.거기서 이상하도록 특이한게 광고판 내용보다도 간판 내용들이였다.“엉터리 생고기” “장어랑 아나고 바람 났네—해물 칼국수,아나고 전문집” “씽씽 노래방” “담쟁이—추억의 포차, 호프,소주,막걸리”등등 별의별 내용들이 다 있었다. 이라고 씌여있는 커다란 이마트(E-Mart)앞 길 남쪽 지하철 입구로 들어가 우리는 예정대로 부천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타고 신길역까지 간후 다시 5호선 전철을 환승한 후 오목교역까지 가서 내렸다. 전철 출구를 나와 다시 서쪽 방향으로 약 500메터가량 걸어 가니 길 왼쪽켠에 에스오일(S-Oil)이란 글이 쓰여 있는 주유소가 보이였다. 바로 그 주유소 옆에 있는 5층 건물벽에 란 커다란 간판이 걸려져 있었다.건물 2층에 바로 행정사 사무실이 있었는데 중국조선족들이 경영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곳은 오목교에 있는 “출입경관리소(본관)”은 아니였다. 우리가 행정사를 찾은 목적은 H-2비자를 받고 3년간 한국을 드나들던 아내의 재입국 신분증을 새것으로 다시 발급받으려는 목적이였다. 헌데 중국인 신분증을 중국에 있는 집에 두고 가지고 오지 않았기에 훗날 팩스로 부쳐 온 다음 다시 신청히기로 하고 거기서 커피 한잔을 얻어 마시고는 발길을 돌렸다. 우리는 다시 전철을 타고 부천에 온후 SK휴대폰 서비스사에 찾아가서 아내가 지난번 출국시 정지시켜 놓았던 휴대폰을 다시 열고는 곧바로 맞은편에 있는 “하나투어려행사”를 찾아 가서 제주도 관광 신청을 했다. 2박 3일 관광비용이 두사람 합해 75만원이 나왔다. 우리는 이미 약속한 친구를 만나러 서울 동대문시장으로 갔다. 높다란 빌딩이였는 데1,2층 모두가 도매시장이였다.실로 그곳은 말이 시장이지 실상은 엄청난 규모의 물류집산지였다.그 넓고도 높은 건물안엔 많은 원단들과 의류 부품들로 꽉 차 있었고 도처에 사람들로 붐비였다.특히 인상깊은 것은 시장 안에서 여기저기로 짐을 배달하는 일꾼들이 보였는데 그들이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사용했던 지게를 메고 짐들을 운반하고 있었다.가까이서 지게를 보니 얼마나 오래 사용했는지 반들반들 빛까지 났다. 동대문시장밖 대통로 위에서도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란 역시 지게 위에 숱한 원단을 싣고 고속으로 달리는 오토바이들이였다.어쩌면 현대화 운수공구에 옛날 지게를 장착해 사용한단 말인가? 사람의 등에나 작은 오토바이 뒤에 좀 더 많은 짐을 싣고 좁은 길을 빨리 오가자면 지금의 이 방법이 최선인듯 싶었다.중국에서도 짐을 싣고 다니는 오토바이는 많이 보았지만 모두 광주리 같은 것들이 아니면 넓은 널판자 따위들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였다.효율적으로 볼 때 지게와는 비교도 안된다. 비록 중요한 대발명도 아니고 조금만 머리를 굴러도 생각할 수 있는 아이디어 같지만 이러한 아이디어가 하나 둘 모이면 효율이 높아지는 것이다. 우리는 동대문시장 동쪽에 우뚝 서 있는 옛 성문앞에서 기 념사진 몇장 찍고 동대문시장 북쪽 길옆 지하전철 4호입구로 갔다.거기엔 한자로 된 간판들이 건물벽에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 ,,,,등등 한국속 연길이 따로 없었다. 연변 사투리 쓰는 조선족 또한 많이 보였다. 연길에 있을 땐 중국조선족들이 그냥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업종에서 막일한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요즘들어 이삼십대의 젊은 조선족 고급인재들이 유명회사에 입사하고 있다는 등의 뉴스를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등 뉴스도 가끔 들은 적은 있었지만 영업을 하는 조선족들도 이렇게 많을 줄은 정말로 몰랐다.우리 부부를 포함해 일곱 일행은 친구의 초대로 그 곳에 있는 에 들어갔다.그 뀀점 사장님도 역시 중국 연길 태생으로 성이 박씨였다.나의 친구와 절친한 사이라 우리와 한상에 앉아 술잔을 나눴다.박사장님은 뀀점에서는 “참이슬”과 맥주 “카스”등 한국상품은 물론 조선족을 즐겨찾는 여러 종류의 중국술도 수입해 팔고 있다고 소개했다. 비록 중국에 있을 때 자주 먹어보던 음식들이였지만 서울에서 연길 양고기뀀 구이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더 기분이 좋았다.나중에 박사장님은 우리가 중국에서 한국관광을 왔다는 것을 알고 잘 놀고 가라며 근처에 있는 노래방까지 안배했다. 저녁 늦게야 친구들과 헤여진 우리 부부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빔밥집에 들어 가 무우깍두기에 콩나물비빔밥을 시켜먹었다. 여기 콩나물비빔밥은 참 맛이 좋았다. 한국요리사의 작식 기술이 뛰어나 그런지 아니면 . 식사후 우리는 운동도 할겸 도보로 청계천으로 갔다. 밤이 깊었지만 청계천은 등불이 환해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다. 팔짱을 낀 젊은 남여 모습도 심심찮게 띄였다.청계천은 물이 하도 맑아 어두운 밤에도 물속에서 노니는 고기떼들을 볼 수 있었다. 물위엔 물오리인지 원앙새인지 쌍쌍이 짝을 맞춰 헤엄치고 있었다..하늘에 정말로 칠선녀가 있다면 그들은 꼭 이렇게 멋진 곳에 내려와 미역을 감으면서 신나게 놀았을 것이다.참으로 청계천의 밤은 황홀했다.우리는 그날 저녁 청계천에서 많은 사진을 찍으며 즐겼다. 늦은 밤 우리는 전철을 타고 부천으로 돌아와 부천남부 자유시장내에 위치한 가계를 찾아갔다.여동생의 말에 따르면 여기서도 재입국 신분증 재발급 신청을 대리해주고 있단다. 때는 이미 밤12시가 넘었지만 아직도 시장안은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우리는 가게 사장님이 알려준대로 나의 안해 재 입국신분증 신청에 필요한 증명사진 찍으러 지하통로로 갔다. 자동 사진기가 있었다. 돈만 내면 선 자리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것이였다. 잠간 돌아 다니면서 찾아 보니 지하통로 한쪽 옆에 예쁜 꽃천에 둘러싸인 사진기계가 보이였다. 안해는 꽃천 문을 열고 들어가 지정된 의자에 앉았다.그러자 스피카에서 부드러운 말투로 사진찍는 요령을 알려준다.가격표에 정해진대로 동전을 투입하자 무인 자동사진기계가 작동을 시작했다. 눈은 어느 쪽을 바라 보라, 턱은 어느 쪽으로 살짝 돌리라,사진을 찍으니 움직이지 말라,“찰칵!” 샤타를 누르는 소리가 나자 화면에 방금 찍은 사진 모습이 나타나고 그것이 마음에 드느냐고 물어 본다. 그렇다고 하자 몇촌짜리 사진을 찍으려는가고 또 물었다. 우리가 2촌짜리 사진이라고 하자 화면의 어느 버튼을 누르라고 지시한다.우리가 그 버튼을 누르니2분도 안지나 사진 3장이 사진기계속에서 스르르 밀려 나왔다. 티끌만한 흠집도 없는 표준사진이였다.참으로 신기했다. 예상밖에 사진을 쉽게 찍고 여동생네 집으로 다시 가는중 한 아줌마가 우리손에 전단 한장을 쥐여 주었다. 우리는 무엇인지 보지도 않고 손에 돌돌 말아든채로 집에 들어갔다. 몸을 간단히 씻고 자리에 누워 그 전단지를 펼쳐 보았다. 에서 특별행사를 한다는 전단지였다. “하얀 달빛에 흐드러진 벚꽃향에 흠뻑 젖어 들고 섬진강 물길따라 사랑과 추억이 영글어 가는 곳!” “쌍계사 벚꽃 축제----섬진강 화개 장터 산수유축제로 초대” 행사특가1인당 1만원이고 “관광코스는 아침(차내식) —섬진 강변---중식 (불고기전골) ---산수유축제---쌍계사 십리벚꽃-- -화개 장터—저녁(찰밥)—귀가”라는 것이였다.그 전단 뒷면에도 광고가 있었는데 거기엔 “거가대교 해저터널로 초대” 특별행사가격은 1인당 1.5만원이라고 씌여 있었다.아무리 적게 추산해도 하루 관광요금이 일인당 3~4만원이 들 것 같은데 이렇게 적은 돈으로 관광을 할 수 있다는게 참 마음에 끌렸다.논의 끝에 우리는 관광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매부에게 이 일을 말하였다.그는 다시 한번 확인해 보겠다며 전단지에 밝힌 전화번호를 꾹꾹 눌러 문의한다.답변은 싼 값으로 초대하는 것은 특별행사 특가이고 다른 뜻은 없다고 알려 주었다. 우리는 확실하다고 판단하고는 밥도 먹지 않고 부천남부역 새천년 웨딩홀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관광버스에 올랐다. 그 버스에 이미 여럿 사람이 앉아 있었다.그들도 전단지를 보고 관광길에 나섰다는 것이었다.어쩐지 기분이 좀 이상야릇한 감이 났다. 부천,서울지역에서 부산까 지 먼 길인데 단돈 만원으로 우리를 밥까지 먹여주면서 관광시켜 준다니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뭐가 뭔지 딱히 몰랐다. 버스에서 우린 김밥으로 아침을 에때웠다. 가는 길에서 여행사 과장이라고 자칭하는 한 곽씨성 여자가 하는 말이 원래 가기로 했던 거가대교대신 쌍계사로 간다고 하였다.그러자 몇 몇 사람이 왜서 거가대교로 가지 않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그들은 이미 쌍계사에 갔다왔기에 거가대교로 가겠다는 것이였다.이에 그 여자는 관광 손님이 원래 적은 데다가 두곳으로 나뉘여 간다면 양쪽 차가 모두 사람 몇명 밖에 싣지 못해 여행사에서 감당해야 할 손해가 매우 크다고 설명했다.그 여자의 말이 일리가 있었는지 더 이상 잡음은 나오지 않았다. 버스가 부산행 고속도로 휴계소에 도착하였다. 운전기사와 그 여자가 차에서 내려 어디론가 갔다오더니 거가대교로 갈 사람들은 차에서 내려 다른 버스를 환승하라고 알려 주었다. 7,8명이 내리고 나니 우리가 앉은 45명승 최신형 관광버스엔 모두 28명밖에 남지 않았다. 대부분 60,70세 이상의 노인들이였고 그 이하는 매우 보기 힘들었다. 버스는 우리를 싣고 남으로 남으로 계속 질주하였다. 경기도 수원시를 스쳐지나 충청남도 천안시로,거기서 또 충청북도 청주시를 스쳐지나 청원시와 대전광역시로,그 다음 또 다시 충청남도지역에 들어와 금산시에 도착하였다. 이미 점심때가 다 되였다.버스는 산길을 타고 어느 시골마을로 들어가 섰다..모두들 길에서 지치고 갈증이 나서 차에서 내리기 바쁘게 화장실로 달려 갔고 마실 물을 찾아서 꿀꺽꿀꺽 마셨다. 몇 분후 그 여자가 모두들 어서 모이라고 불러 놓고는 여기가 금산 시의 특산이자 명작인 흑홍삼(黑红参)기지의 판매처라고 알려 주면서 이제 곧 흑홍 삼연구소 박사님의 강의를 듣는다고 했다.우리가 강의실에 들어가 자리잡고 앉자 한 젊은 남자가 흑홍삼 액을 시식하라며 우리들 주위로 분주히 돌아다녔다. 삼냄새가 세게 났다. 박사님은 강의를 곧 시작하였다. «……흑홍삼이란 인삼과 홍삼처럼 고혈압환자가 복용 할수 없는 것이 아니라 저혈압을 올려주고 고혈압을 낮춰주고 면역력을 조절해 주는 특효가 있다»는 것이였다. 박사님의 강의 내용을 들어보면 흑홍삼은 확실히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오면서 본 가장 좋은 약이었다.박사님의 강의가 끝나자마자 공장장님이 들어오더니 흑홍삼을 사라고 홍보를 시작한다.현재 시중가격은 얼마인데 직매장 가격은 시작가격보다 매우 싸다면서 많이 사면 작은 포장의 흑홍삼을 하나 더 증송한다는 것이었다. «아이구 어머니,얼마나 값 싸세요, 어서 사세요,몸에 대단이 좋은 것입니다!»허나 너무나 엄청난 가격이였다.1차 구매량 금액은 16 만원부터 23만원 좌우였다.모두들 놀라서 눈이 둥그래졌다. 이때 수명의 여자들이 욱 몰려 들어와 손님 한명도 빼놓지 않고 흑홍삼을 사라고 선전했고 현금없어도 신용카드만 있으면 열두달 할부도 가능하다고 마구 들이댔다.나는 그만 당황해서 가지고 온 돈이 적어서,중국에서 왔기에 신용카드가 없다는 말로 찰거마리처럼 달라붙는 그 여자들을 물리쳤다.. 그래도 어르신 몇분이 흑홍삼을 좀 샀기 때문에 우리는 문밖에 나올 수 있었다. 밖에 나온 사람들의 얼굴은 대부분 찜질방에서 금방 나온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고 땀방울이 대롱대롱 달려있었다. 우리가 그다음 도착한 곳은 이였다. 점심 시간이여서 문을 닫았기에 또 다시 차를 돌려 다른 마을에 있는 로 갔다. 거기서 모귀현 박사님이 우리에게 끼토산에 대하여 강의를 해주셨다. «끼토산이란 끼틴과 끼토를 합하여 만들어 낸다.끼틴이란 게,새우등 해산물의 껍데기에서 채집하여 만들어 내는데 끼틴과 끼토를 합하여 제약하면 끼토산 약품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였다.또 «이 끼토산은 사람의 몸의 피를 맑게 해 주고 콜레스트롤을 낮게 해 주어 동맥 경화를 예방하고 중풍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박사님의 강의가 끝나자 역시 어디선가 많은 여자들이 몰려와 약을 사 가라고 한바탕 성화를 부렸다.연달아 두번째로 당했지만 그래도 면역력이 생겼는지 모두들 태연하게 잘 대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점심은 좀 늦었지만 금산구역의 에서 불고기 전골에 밥을 간단히 먹었다.식사후 우리가 식당을 나올 때 또 관광버스 두대가 들어 서더니 숱한 사람들이 식사하러 들어오는 것이였다.어찌된 영문인지 모두들 말 한마디도 없었고 모두 검은 연기에 그을린 것처럼 얼굴색이 어두웠다. 버스에 올라 탄 우리는 이제는 쌍계사로 곧바로 가겠지하고 무거운 짐을 벗은듯 휴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누군가 키드득 키드득하면서 웃음 소리를 내였다.그 소리에 모두들 서로 머리를 돌려 살펴 보면서 얼굴에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버스는 부르릉 거리면서 고속을 내여 달리는 것 같더니 삑하고 소리를 내면서 또 정거를 하는 것이였다. 차에서 내리고 보니 아까 점심에 왔다갔던 이였다.곽과장은 시간이 얼마 없다면서 모두들 빨리 직매장 강의실로 들어 가라고 재촉했다.그제야 여행사의 진의를 깨달은 사람들은 직매장에 들어가기 싫어 너도 나도 화장실로 향했다.하지만 곽씨성 여자는 인내심있게 한명 한명 설득해 한사람도 빼놓지 않고 강의실에 모두 끌어들였다.그러면서 하는 말이”손님들이 동작이 늦으면 그만큼 관광할 시간이 적어진다”고 했다. 강의실은 살림집처럼 구들위에 바닥재를 쭉 펴 놓아서 그 우에 풍덩 들어 앉으면 됐다. 우리를 기쁘게 맞아준 사람은 키가 9척이나 되고 몸이 우람져 씨름군같이 생긴 사나이였는데 커다란 검정테 안경에 우렁우렁한 목소리를 가진 유머감이 넘치는 사람이였다.그는 우리를 보자 환한 얼굴에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또 다시 한번 «안녕하세요!»하고 소리쳤다.그런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그러자 «아이쿠 어머니!어제 밤에 싸웠어요?»그래도 아무 대꾸도 없었다. «아참,깜박 잊었구만!어머니 이재 금방 흑홍삼판매장과 삼성제약 끼토산연구소로 갔다 왔지요?그렇지요?……당했구나,당했어!ㅉㅉㅉ……억수로 당했구나!……거기서 많 이 당했지요?» 그러자 «예!»하고 모두들 대답하는 것이였다. «괜찮아,괜찮아,여긴 아무것도 사지 않아도 괜찮아요!여기는 저의 아버지가 옛날 부터 사슴을 기르다가 그 농장을 저에게 넘겨 준 것이여서 여기서는 그저 편하게 저 의 강의만 들으면 돼요»라고 말했다.그제야 모두들 안심하고 희희닥닥거리면서 편하게 자리에 앉아서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그는 손에 백센치가 거의 되는 녹용을 들고 강의했다. «……록용의 제일 끝머리는 분골이라고 하는데 사람의 머리에 좋고 치매를 예 방하고 정신을 맑게 해주며 분골에서 아래로 내려 가면서 세개 부분으로 나뉘는데 상대,중대,하대라고 한다.상대는 중심 부분이 검고 겉 부분이 붉으며 사람의 욕 (欲)을 올려 주는 작용을 한다.중대는 사람의 피를 만들어 주고 하대는 뼈를 돕는 다.……» 강의 도중 그는 예쁜 아가씨 몇명을 불러들이더니 여러분들께 자기네가 직접 만들었다는 록용술을 대접하라는 것이였다. 공짜여서 모두들 작은 주전자에 가득 담은 술을 다 마시고 좀 더 달라고 해서 더 마셨다. 술이 배속에 들어가서 좀 쨍하게 될까말까 할 때 아가씨들이 허리춤에서 기록부를 꺼내 들고 손님과 일대일로 코를 딱 맞대고 앉아서 록용을 사라고 성화를 부리기 시작하였다.그제야 또 걸렸구나 하며 정신을 차리고 도망가려고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몸으로 문을 막아선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우리 부부는 다행이도 강의가운데서 튀어나온 “금산록용은 한국의 보물이고 명품이기에 수출을 국가적으로 엄금하고 있다”는 대목을 아가씨들한테 다시 들려주면서 중국신분증을 꺼내 흔들어보였기에 남먼저 문밖을 나올 수가 있었다. 그곳을 떠나 쌍계사로 가는 길에서 곽과장은 이제는 직매장 같은 곳으로 가지 않는다면서 오늘 약 산 사람이 셋밖에 안돼 여향사 손실이 매우 크다고 울상을 지었다. 이윽고 우리한테 한봉지씩은 꼭 사야 된다고 애원했다.사탕 봉지를 받고 상표에 붙은 가격을 보니 3천원정도밖에 안됐다. 우리 부부는 처음 이런 일을 당해 당황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미안한 감도 들어 집에 돌아갈 때 선물로 장만할겸 2만원을 주고 네봉지를 샀다. 버스는 마침내 구레시에 들어섰다.화개장터로 가는 길에서 곽과장이 또 입을 열 었다. 오늘 여러 분들을 여기까지 안전하게 모셔왔고 또 안전하게 차를 몰고 돌아가야 하기에 운전기사와 자기에게 수고비로 5천원씩 더 내라는 것이다.우리는 그들이 달라는대로 또 돈을 줄 수밖에 없었다.섬진강변을 따라 앞으로 나가면서 곽과장은 굳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려고 여러가지 우스개 소리도 해 보았고 섬진강 쪽배나루터 전설도 들려 주었다. 화개장터에 도착하였다.이미 해가 서산 마루에 걸려 인차 어둠이 깃들 것만 같았 다.우리는 화개장터를 대충 돌아 보았다. 장터 어구에서는 젊은 각설이 둘이서 흔들거리면서 노래를 하고 있었고 다른 한 곳에는 중년각설이 부부가 다음 무대를 준비하느라 분망하게 보내고 있었다.조용남이 노래를 불러 소문이 났다는 는 먹을 것이 없는 소문 난 잔치와도 같았다.이름뿐이지 아주 자그마한 시장이였다. 물건 이란 주로 약초가 많았고 작은 음식점 주인들은 서로 제집에 들어 오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우리가 다시 버스에 올라 앉으니 곽과장은 섬진강건너 쌍계사 십리 벚꽃축제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였다.리유는 지금 그쪽에 차가 많아서 길이 막혔다는 것이였다. «당신네들 이게 무슨 짓거리야? 이것은 유람이 아니고 사기다 사기!……어디 두고 보자,돌아가서 당신네를 고발할테다!” 한60대 어르신이 격분하여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그 분은 부인과 부인의 친구 셋이서 우리와 함께 관광길에 올랐던 것이다.그의 손은 노여움에 부르르 몹시 떨고 있었다.이에 곽과장은 운전기사와 뭐라고 상의하더니 다시 쌍계사로 간다고 알려주었다.전라도와 경산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위에 가로 놓인 무지개다리를 건너 버스는 천천히 쌍계사쪽으로 떠났다.차가 한꺼번에 몰려 길이 막혔다던 길에는 자동차 한대도 보기 힘들었다. 시간이 얼마 안지나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아름드리 벚꽃나무에 하얀 벚꽃들이 활짝 핀 모습이 어슴프레 보였지만 날이 어두워 벚꽃구경을 별로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곽과장은 손님들에게 저녁식사로 대접할 찰밥을 준비했다면서 자기를 도와 손님들에게 저녁을 공급할 분이 있으면 나오라고 했다.겨우 아줌마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나의 안해도 자리에서 일어나 거들어 주었다.식사 후 모두들 눈을 감고 잠을 청하고 있을 때 곽과장이 조용히 나의 안해를 찾아와 고맙다고 인사하면서 무엇인가 손에 살며시 쥐어주고 가는 것이였다.알고보니 흑홍삼 판매처에서 공장장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겠다던 홍삼세수비누 4개였다. 우리가 집에 돌아오니 이미 밤 11시가 지났었다.몸을 씻고 오늘 하루의 여행길에서 쓴 돈을 계산해보니 모두 6만3천원이었다.
    • 오피니언
    2014-04-03
  • 中, 한 소수민족부락 화재로 가옥 45채 잿더미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중국 귀주성 검동남묘족동족자치주 시병현의 한 부락이 3일 새벽, 화재가 발생해 가옥 45채가 불에 타 잿더미로 되었으며 촌민 430명이 피해를 입었다고 중국 신화망이 3일 보도했다. 목전까지 사망자, 부상자는 없는 것으로 전했다. 3일 새벽 2시 40분경, 시병현 마호향 평배촌 부락내에 화재가 발생했으며 현과 향 관계부분들과 촌민들이 필사적으로 화마와 싸워 5시간 만에야 큰 불이 꺼졌다. 초보적인 통계에 따르면 부락내 가옥 45채가 불에 타 잿더미로 되었으며 피해를 입은 부락민은 70세대에 430명에 달한다. 일부 식량들도 타버렸으며 목전까지 사망자, 부상자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목전, 민정 등 부문에서 긴급히 솜이불, 텐트, 라면 등 구급물자를 평배촌에 수송하고 있으며 화재원인 조사와 사후처리가 현재 진행중에 있다. 알아본데 따르면 평배촌은 시병현 마호향 육합지역에서 가장 큰 묘족부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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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뉴스
    • 아시아
    2014-04-03
  • [AFC] 포항 원정 경기에서 산둥 루넝에 4-2 대승
    포항은 지난 2일 산둥 루넝과의 원정 경기에서 4-2 대승을 거뒀다. 이 날 승리로 포항은 승점 8점(2승 2무)를 기록하며 4년 만에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ACL) 16강 진출의 가능성을 높였다.
    • 스포츠
    2014-04-03
  • [AFC] 전북, 10명이 뛰고도 광저우 1-0 제압
    [동포투데이] 전북현대는 2일 전주월드컵경기장서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G조 4차전 광저우와 홈경기서 10명이서 뛰는 악조건 속에서 레오나르도의 결승골에 힘입어 광저우 에버그란데(중국)를 물리쳤다. 전북현대는 광저우와 함께 2승 1무 1패(승점 7)를 기록했지만 두 팀 간의 득실차에서 밀려 조 2위에 머물렀다. 전북은 지난 3차전 원정경기서 1-3으로 패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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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3
  • 경기경찰, ‘어벤져스 2’ 촬영 교통 혼잡,불편 최소화 주력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경기지방경찰청(청장 최동해)은 할리우드 영화 ‘어벤져스 2’의 의왕 계원대학로 촬영과 관련하여, 경찰․모범운전자․제작사측 안내요원 등을 집중 배치하여 교통 혼잡을 줄이고 시민들의 불편을 최소화 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지난 3월 30일 마포대교를 시작으로 ‘어벤져스 2’의 한국 촬영이 시작되어 다음 주인 4. 7(月)과 4. 9(水) 양일간 06:00∼18:00까지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 계원대학로(약 400m 구간)에서 촬영이 진행된다. 경찰에서는 촬영장소 인근도로에 교통안내소 10개소를 설치하고 사전 우회로 및 임시주차장을 확보하여 교통 혼잡 및 운전자들의 불편을 최대한 줄일 계획이다. 이를 위해 지난 3월 24일 부터 주변도로 300여 곳에 교통안내 홍보 플래카드 설치를 마쳤으며 촬영당일 경찰․모범운전자․제작사 안내요원 등 140여명을 배치하여 우회도로 및 버스 우회노선 안내 등을 하고 촬영 종료 후 교통 혼잡해소 시까지 지속적으로 현장 교통관리를 실시 할 예정이다. 또한 촬영기간 다소 교통 불편이 있을 수 있으므로 사전 우회로 및 변경된 버스노선을 확인하고 교통요원 안내에 따르는 등 시민들의 협조를 당부했다. 교통안내와 관련된 자세한 정보는 경기지방경찰청 및 의왕시 교통정보센터 홈페이지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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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3
  • 한국, 성장호르몬이 주입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한국 정부는 6월부터 질파테롤 성장호르몬이 주입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재개한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사료에 섞은 성장호르몬 문제는 미국에서 비디오가 공개된 이후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가축들이 힘겹게 움직이는 장면이 담긴 비디오 상영물에서 성장 호르몬 섭취 이후 건강상 장애를 일으키는 이상 징후들이 포착됐다. 한국 정부는 지난해 수입 고기에서 질파테롤을 발견된 이후 미국산 쇠고기 수입 금지 조치를 채택했다. 한국 농림축산식품부는 성명을 통해 6월부터 정부는 쇠고기 수입을 허가할 계획인 가운데 질파테롤 양이 수입된 전체 쇠고기 양의 10억분의 1을 초과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캐나다에서 허가되는 10억분의 2보다, 미국에서 허가되는 10억분의 12보다 적은 양이라고 덧붙였다. 한 쿼터당 10만이 넘지 않는 범위내. 이는 캐나다에서 허가된 10억당 2보다 적고 미국 10억 12분위보다 적은 양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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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3
  • [수기] 풀린 수수께끼
    ■ 이진숙 그게 어느 해였던가! 아무튼 한해가 막 저물어가던 추운 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주방에서 한창 저녁을 짓고 있을 때 “띵뚱-”하고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앞치마에다 젖은 손을 대충 문지르면서 나는 부랴부랴 급기야 문을 열었다. “아이구, 웬일이지? 어쩌면 연락도 없이 이렇게…반갑구나. 어서 들어와.” 고중졸업을 앞두고 학교를 먼저 떠나간 동남이와 승철이었다. 허겁지겁 애들의 손을 막 잡으려는데 동남이가 두손에 받쳐 든 고압가마를 내 손에 넘겨 주었다. “선생님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려고 왔습니다. 이건 닭곰이고요.” “와-” 나는 애들처럼 소리치며 놀라움과 기쁨의 탄성을 올렸다. 어른이 된 후에도 잊지 않고 찾아오는 학생들의 그 마음에서 어찌 교원이 된 긍지와 자호를 느끼지 않을 수 있으랴?! 지금도 그 날의 감동을 떠올리면 가슴이 뜨거워난다. 나는 서둘러 요리 두어가지를 만들어서는 맥주와 함께 식탁에 올렸다. 잇따라 고압가마뚜껑을 열었다. 흰김이 모락모락 피여오르면서 향긋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너희들 남자애 맞니?” “식으면 맛이 없죠.” “하하하…호호…” 눈물나도록 고마운 제자들의 진심은 마지막까지 그들을 잡아주지 못한 자책감과 미안감으로 하여 마음이 괴로워났다. “자, 마시자! 너무너무 고맙다. 그리구 미안해.” 셋은 맥주잔을 들었다. “선생님, 우리 때문에 정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잔 또 한잔…그렇게 그시절, 그 이야기들이 보물처럼 터져 나온다. 술을 마시고 토하기까지 하여 자습시간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던 일, 파벌싸움에 참가하여 온 학교를 들썽이었던 일… “한번은 선생님께서 회의하러 가시면서 반장인 저에게 오후의 자습관리를 부탁했는데 글쎄 제가 앞장서서 분필 뿌리기를 시작해서…선생님은 고양이한테 생선가게 맡겼다며 노발대발하셨죠.” 승철의 말이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하하하…호호…” “전 공부하기 싫어했기에 꾸지람도 많이 들었죠. 문과와 이과를 나눌 때 ‘넌 이과반이나 가라’고 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에 얼마나 무안했던지…” 동남이가 말끝을 흐리우면서 히쭉 웃어보였다. “정말 서운했겠구나. 그래도 이렇게 찾아와주니 고맙구나.” “아닙니다. 우린 선생님을 믿고 이해하니깐요.” 그래, 교원에 대한 신임과 리해가 애들 맘속에 뿌리 내렸다는것보다 더 큰 영광이 또 어디 있으랴. “사실 선생님의 꾸지람을 많이듣던 애들은 대체로 공부를 잘해 선생님들의 총애를 받던 애들보다 더구나 선생님을 잊지 못해 합니다.” “정말입니다. 후날 선생님을 만나도 꼬박꼬박 인사도 잘하구요.” 둘은 맞장구를 쳤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던차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불쾌하던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한번은 연변병원 ××과에 병보이러 갔었는데 마침 부주임의사가 앉아 있었다. 이윽고 내차례가 왔다. 나는 힐끗 쳐다보던 의사가 “××에서 오셨죠”하고 친절하게 물었다. “예-” 나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중학교에 있었습니까?” “예.” 순간 뭔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때 담임은 아니였어도 학년에서 손꼽히는 학생이고 작문을 잘써서 몇번이나 그가 쓴 작문을 모범작문으로 읽어주고 총애했던 그 학생, 하지만 머리속에서 이름까지는 딱 찍혀 떠올랐다. 그는 증상을 묻더니 처방을 쏙쏙 써서 훌 넘겨주는 것이었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한 것 같아 그 무슨 잘못이나 저지른 것처럼 얼굴이 막 뜨거워났다. (어쩌면 그럴 수가? 그래 잊어야지) 나는 그 날의 일을 지워 버리고 싶은 생각에 고개를 흔들면서 사념에서 깨여났다. “선생님, 취했습니까?” “너희들 말을 듣다보니 뭔가 쭉 생각이 나서…그런데 한가지 좀 묻자. 금방 동남이가 한 말이 내겐 수수께끼었는데 왜서일까?” “그건요, 나같은 애꾸러기들은 ‘우리 선생님’을 ‘나의 선생님’이라 생각해요. 저와 싱갱이질하면서 몰부운 심혈을 나중에 알았으니깐요.” “맞아요. 공부를 잘하는 애들은 선생님은 우리 모두의 선생님이고 ‘내’가 우수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답니다.” 둘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똑같은 생각을 말했다. 오, 그렇구나.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알았다!” 나는 여태껏 “나”와 “우리” 사이에 그런 비밀이 있는걸 정말 몰랐지. “자, 마시자!” 우린 또 맥주를 한잔씩 굽냈다. 나는 또 그들의 오늘과 내일에 대해 묻기도 했다. “지금 우리는 부지런히 배우고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앞으로 연변 땅에서 우리 이름도 함께 빛내렵니다. 두고 보세요.” 그들의 호기찬 말에 나는 너무도 대견스러웠다. “난 너희들을 믿는다. 잘해봐!” 그후 세월은 또 흘렀다. 말그대로 동남이와 승철이는 자기 업종에서 바야흐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동남이는 미용업계에서 활약하면서 박사학위까지 따냈고 승철이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계통에서 전문가수준의 인재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이 글을 마감하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인재이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는 말 천만지당하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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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14-04-03
  • 여성가족부, 세계적인 인터넷 기업 구글과 협력방안 논의
    - 수잔 포인터 구글 아시아‧중동‧아프리카‧러시아 정책 총괄과 면담 가져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조윤선 여성가족부장관은 방한 중인 수잔 포인터(Susan Pointer) 구글(Google) 아시아·중동·아프리카·러시아 정책 총괄과 4월 2일(수) 오후 여성가족부에서 구글의 기술과 플랫폼을 활용한 협력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면담을 가졌다. 조윤선 장관은 특히 “보다 건강한 인터넷 환경을 만들고자 하는 구글의 노력에 감사드린다. 구글의 인터넷 유해 콘텐츠 차단 기술, 가족들이 안전하게 인터넷을 이용하기 위한 안전도구와 유튜브 등 다양한 디지털 플랫폼을 활용하면 건전한 인터넷 환경 조성과 더불어 시의적절한 정책 메시지 확산이 가능할 것”이라며 여성·청소년·가족정책 홍보를 위해 구글과 협력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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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3
  • 해외견문 시리즈(1) 대서양의 진주 - 라스팔마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남아프리카공화국 항구도시 더반에서 출항해 희망봉기슭을 에돌아 북쪽으로 계속 항행하노라면 대서양 바다의 진주로 불리우는 카나리아군도의 라스팔마스를 거치게 된다. 라스팔마스 아름다운 항구도시이다. 유럽땅이지만 위도가 아프리카주와 가까이에 있고 또한 대서양난류의 영향으로 사시장철 꽃이 필수 있는가 하면 눈내리는 날을 거의 볼 수 없는 것이 이 곳이 특징이다. 한편 라스팔마스는 대서양에서 조업하는 수많은 작업선과 이 곳을 지나는 원양화물선들이 반드시 거치게 되는 관문으로서 한국선원들은 이를 두고 “제2의 부산”이라고 친절히 불러주기도 한다. 라스팔마스 – 아름다운 항구도시이다. 바다에서 해가 뜨고 바다에서 해가 지는 곳, 아열대기후의 영향으로 사시절 따스한 날씨가 계속되고 야자수가 우거진 거리를 벗어나면 곧 해안선과 해수욕장이 펼쳐지며 무역선이 드나드는 항구에 들어서면 낭만과 로맨스가 엮어지는 청춘의 도시이다. 1990연대초 내가 승선했던 선박 “코리안스타”호의 스켓쥴이 라스팔마스와 아프리카 및 유럽 쪽이 비교적 많은 까닭에 우리는 그 곳에 자주 입항했고 인상 또한 꽤나 깊었다. 본선이 라스팔마스항에 처음 입항한 것은 1991년 6월초의 어느 날 저녁 무렵이었다. 배가 부두에 대이기 전 그닥 멀지 않는 해상에서 보는 라스팔마스는 한폭의 화려한 수채화를 방불케 했다. 노란색, 분홍색, 새하얀 색의 건물들은 산기슭과 산꼭대기까지 올리뻗으며 지은데서 일종 입체형태를 이루고 있었고 저 멀리 해수욕장에는 수많은 남녀들이 한데 어울려 노니는 것이 보이었다. 그 때 본선은 라스팔마스항 빤따랑부두에 정박하였다. 그날 저녁 우리 일행이 아무런 상육수속도 없이 항구입구를 벗어나자 곧바로 시내가 펼쳐졌는데 이럴 변이라구야. “대서양상회”, “민족촌식당”, “무궁화 백화점” 등 수많은 우리 글 간판들이 유표하게 한눈에 안겨와 진짜 한국의 어느 한 항구도시에 오지 않았나 하는 착각을 줄 지경이었다. 일명 “코리아타운”이라고도 하는 이 거리에 들어서자 아니나 다를가 숱한 한국선원들이 활개치며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어느 상가의 스피카에서는 한국가수 설운도의 “떠나가는 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등대불이 깜빡깜빡 배길따라 춤을 추는 밤/ 쌍고동을 울리며 가는 배 현해탄을 떠나가는 배// 자갈집아줌마가 손흔드는 밤/ 내 친구 다시 돌아 손 흔드는 밤// 정이 들었어 정이 들었어 눈물지으며 떠나가는 배/ 또 만나요 또 만납시다 손흔드며 떠나는 형제… 뒤이어 우리가 들어선 곳은 대서양상회였다. “아이구, ‘코리안스타’호의 아저씨들이군요. 어서 오세요.” 주인아줌마는 본선의 한국선원들을 잘 아는 듯 했다. 이어 우리가 차탁에 둘러앉자 그녀는 우리한테 커피와 맥주 중 요구대로 공급했는데 돈 한푼 받지 않았다. 대서양상회에서 우리 일행은 많은 선박에서의 생필품과 도서 등을 사고는 그 아줌마와 굳바이를 했다. 거기서 나오자 날은 이미 어두워져 거리는 황홀한 등불들로 오색영롱했다. 우리는 그 길로 택시에 앉아 싼타까따리나 공원광장으로 향발, 그 곳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시계초침이 8시 30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그 때의 공원광장은 이미 숱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로천에 식탁을 둘러놓고 술을 마시며 여가수의 팝송을 듣는 손님들과 맨봉당에 돛자리를 펴고 앉아서는 목사의 설교를 듣는 신자들, 또한 현지처와 함께 배회하는 선원들로 밤분위기는 짙어만 갔다. 그날 밤 우리는 싼따까리나 공원광장에서 자정까지 술을 마시며 팝송과 쏘프라노 가수의 노래를 흠상하다가 귀선했다. 2 그 이튿날 오후 1항사가 식당안에 있는 공고란에 뭔가 써내려 갔다. 그 것을 읽어본즉. 금일 저녁 갑판 및 기관 부서당직자와 전체 선원들은 단체행동을 할 것이오니 식사 후 선원마다 샤와들 마치고는 외출복 차림으로 대기하여 주십시오. 1항사 6월 ×일 나는 그 집단행동이란 것에 대해 몹시 궁금했다. 1항사한테 물어봤으나 그가 가보면 알 것 아니냐면서 알려주지 않았다. 혹시 교회같은 곳에 가려는 것은 아닌지? 그러다가 뒤 따라온 통신장한테 물어봤더니 오늘밤은 좀 자극적인 곳을 찾을 것이니 가보면 끝내줄 것이라 했다. 저녁식사 후 내가 주방장 함께 부랴부랴 설걷이를 마친 뒤 샤와하고 외출복차림으로 나가보니 진작 버스 한대가 대기하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둘이 오르자 마자 버스는 “부르릉”하고 시동을 걸었다. 버스가 당도한 곳은 싼타까따리나쪽에 있는 호텔강촌의 한식관, 거기서 우리는 또 띠를 풀어놓고 마시기 시작했다. 모두들 저녁식사 뒤라 입맛이 별반 당기지 않으련만 그곳의 불고기와 참치사시미 그리고 깍두기 등은 어찌도 맛있게 만들었던지 주방장조수인 나는 진짜 두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음식을 파한 뒤 우리는 또 버스에 앉아 진정한 목적지인 무에그랑데쪽의 소극장으로 갔다. 거기에 도착하자 번쩍번쩍하는 네온싸인속에 여자나체광고가 유난히도 안겨왔다. 티켓은 인당 2000페스타(20불), 좌석에 앉자 요구에 따라 콜라나 맥주 한깡통씩 차례졌다. 듣는 바에 따르면 그 외 더 요구하면 한 깡통에 또 1000페스타씩 받는다기에 우리는 될수록 깡통맥주 하나를 갖고 조금씩 입에 대는 시늉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대는 여느 극장의 무대와는 달리 원탁형으로 꾸며졌는데 출연자들의 탈의실, 휴식실외 3면에 관중들이 앉기로 되어 있었으며 그 곳에서의 촬영은 일절 엄금이었다. 공연이 시작됐다. 첫 종목은 10여쌍의 남녀가 나와서 추는 스페인 민속춤이었고 그 다음의 것은 스프라노가수의 독창이었다. 특히 그 쏘프라노가수의 두번째의 노래는 어딘가 듣던 곡이었다. 자세히 생각을 더듬은즉 그 것이 유명한 “선구자”가 아닌가.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이는 일종 한국선원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종목임에 틀림없었다. 비록 스페인어로 번역했지만 가사중 “일송정”, “해랑강”, “선구자” 이 세 단어만은 음역한 것으로서 그 것이 같은 곡에 다른 가사를 붙인 것이 아니란 것을 인차 알 수 있었다. 참, 그 옛날 간도의 용정에서 불려졌다는 그 “선구자”의 노래, 그 것을 오늘 대양 건너 그 스페인땅에서 듣노라니 자못 감개무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헌데 한국선원들의 자극적인 것이란게 고작 이 것인가? 양대가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파는 격이 아닌가? 하지만 그 것은 착각이었다. 몇 종목의 춤노래가 끝난 뒤 무대가 차츰 어두워지더니 드디어 알몸으로 실 한오리 걸치지 않은 아가씨가 무대에 나타났다. 금발머리에 곡선미가 뚜렷한 체형, 뭘 발랐는지 그 흰 피부는 왜 그리도 윤기나는지?… 뒤이어 검은 협객복장을 한 사나이 한명이 숱한 칼을 철사끈에 꿰매들고 나타나서는 그 알몸아가씨를 널판자가 대인 벽에 세우는 것이었다. 또 시중군 한명이 나와 사나이의 눈에 검은 천을 두르는 것이었다. 아니 저 아가씨를 과녁으로 삼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 천사같은 아가씨를 향해 칼을 뿌리다니. 소름이 꽉 끼쳤다. 그러건 말건 그 사나이는 아가씨를 향해 칼 재주를 피워대기 시작했다. 첫 칼은 머리위에 꽂히고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칼은 목 양측에 박히고 그 다음의 칼들은 양측 겨드랑이밑과 허리양쪽켠 그리고 양쪽다리 사이로 면바로 실수없이 가 박히었다. 그 아슬아슬한 종목이 막을 닫자 그 다음은 웬 한국아가씨가 역시 알몸으로 서커스표현을 했고 뒤이어 아까 그 칼앞에 섰던 아가씨가 또 나와 갖가지 해괴망칙한 기교를 피워냈다. 그 것은 주로 그녀의 성기를 이용하여 표현하는 기교였다. 그 걸로 맥주병 뚜껑을 따는가 하면 거기에 전등알을 밀어넣어 불이 반짝하고 켜지게도 했으며 또 거기에 노끈 한오리가 달려 있었는데 글쎄 그 것을 당기니 그 노끈을 따라 숱한 대못, 가위, 면도날 등이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음 그녀는 어떤 둥근 탁자같은데 눕는 것이었다. 그러자 누군가 나와 그녀의 성기속에 닭알 하나를 밀어 넣었는데 이윽해서 그녀가 소리를 지를 적마다 닭알 하나씩 빠져 나오더니 나중에 한바구니가 꼴똑 차는 것이었다… 공연의 마지막 종목은 두 남녀의 사랑을 제재로 한 무지컬이었다. 그 슈제트는 다음과 같았다. 남편있는 한 여인이 몰래 군사내와 사랑을 속삭인다. 하루는 남편이 없는 틈을 타서 그녀는 그 사내를 집으로 끌어 들이기고는 벌고 벗고 섹스파티를 벌인다. 그런데 그 시각 남편이 돌아와 문을 두드리니 사내는 옷장 뒤에 숨는다. 남편이 들어오자 바람으로 옷을 벗으며 안해한테 덮쳐 들었고 이에 그녀는 거의 순종적으로 몸을 맡긴다. 다음 순간 옷장 뒤에 서서 둘의 섹스장면을 보는 사내는 불타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뛰쳐나와 도전을 건다. 둘은 칼 한자루씩 나누어 갖고 격투를 벌인다. 치열한 맞칼질 중 군사내가 점점 수세에 처하여 지게 될 무렵, 여인은 도리어 어떤 물건으로 남편의 머리를 까부신다. 쓰러져 죽는 남편과 깜짝 놀라 서있는 군사내, 마침내 엄연한 현실앞에서 그 남녀는 한차례의 격열하게 포옹을 한 뒤 함께 그 곳에서 탈출한다. …… 옛날의 강제혼인같은 것에 반항하여 참된 사랑을 추구하는 것을 담은 무지컬 같았는데 섹스장면같은 것은 직접 남녀가 어울려하는 것으로서 관중을 많이 끌기 마련이었다. 이로보아 전반 라스팔마스의 문화산업이란 것도 고상한 것과 방탕한 것이 “동거”하는 혼합체라고 해야 하겠다. 그외 라스팔마스에 대한 깊은 인상이라면 1992년 4월에 있은 등대탑해수욕장 견문이었다. 라스팔마스는 워낙 따스한 곳이었지만 본선선원들이 1박 2일을 목적으로 남쪽 등대탑쪽으로 갈수록 날씨는 점점 무더워났다. 듣는 말에 따르면 라스팔마스 도심과 등대탑쪽과의 기온차이는 10도 좌우라 했다. 그 것은 일명 라체해수욕장이라는 그 곳이 폭이 수백미터, 길이 20여리나 되는 백사장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해수욕장으로 되었고 숱한 관광객들이 모여들기 마련이었는데 그 거개가 서부유럽에서 온 관광객들이었다. 우리는 에이젠트가 알선해 준 호텔에서 행장을 푼 뒤 인차 수영복을 갈아입고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가 그 때는 이미 숱한 벌거벗은 남녀들로 해수욕장은 그 매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태양산밑의 둥근탁자에 앉아 커피나 음료를 마시는 나체의 남녀들, 자기의 성기를 활짝 드러낸 채 모래밭에 반듯이 누워 있는 아가씨들, 또한 나체의 몸으로 남녀가 뒤섞여 배구, 탁구, 배드민톤 등을 치는 이들도 있고 숱한 사람들이 둘러보는 가운데 백일하에 섹스쇼를 벌이는 곳도 있었다. 헌데 이상한 것은 서양인들은 타인의 성기에 대하여 그저 사람한테 달린 입, 코, 눈이나 귀처럼 생각하면서 음욕과 대상으로는 여기지 않는 것처럼 보이었으나 우리가 여인들의 나체를 갑자기 보니 왜 사타구니에 있는 그 것이 자꾸만 고개를 쳐들던지? 또한 섹스쇼같은 것을 벌이는 곳이 보이면 우리는 서로 더욱 잘 보려고 우르르 몰켜들기가 일쑤였고 서로 밀치면서 목을 빼들고 발굽치를 쳐들군 했다. 순간 나는 우리 연변에도 이런 나체해수욕장이나 나체쇼를 벌이는 곳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번 굴려 보았다. 보나마나 수습못할 치안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이 뻔했다. 그리고 소위 성해방에 대해서도 그랬다. 서양에서는 부부가 서로 성해방을 해도 별문제였지만 중국사회에서는 벌써 관념상 자신은 성해방하려 하나 자기의 안해나 남편이 성해방하는 것은 용서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왜냐하면 서양사회의 성해방은 흔히 부부사이의 만족되지 못한 부분을 타인을 통하여 향수하는 의식형태였지만 우리의 성해방은 부부일방에 대한 직접적인 배반으로 표현되며 그 뒤에는 치고 박고하는 싸움과 가정파산, 죄없는 고아의 출현 등 사회의 골치거리를 초래하기 때문이었다. 나체해수욕장을 거닐노라니 우습고도 재미나는 일도 가끔씩 생기군 했다. 글쎄 한번은 웬 서양인부부 비슷한 남녀가 다가오더니 그중 여인이 우리 일행중 한 선원의 남근을 가르키며 웃으면서 뭐라고 씨벌이는것이었다. 그것은 요렇게 작은 물건이 남자구실을 어떻게 할 수 있으며 여자한테 만족줄 수 있느냐 하는 모양, 헌데 그 뒤를 이어 그의 그 것이 급기야 발딱하며 버섯모양의 대가리를 쳐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자 이에 재미있다고 더욱 깔깔대며 웃어대는 여인과 한쪽 켠에 물러서서 흥미있게 구경하는 그 사내, 하긴 그 사내의 물건과 우리의 것을 비교해 볼라니 그 싸이즈가 확실히 먹음직한 가지와 고추의 차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그외 성기도 성기라겠지만 우리의 몸과는 달리 그들은 팔다리와 배꼽아래뿐 아니라 가슴팍까지 온통 털로 뒤덮여 있는 것이 우리보다는 퍽 사나이다와 보이기도 했다. 내가 만약 여인이라 해도 그런 품에 한번 안겨봤으면 하는 충동을 느낄만 했다. 그날 저녁, 선장은 우리한테 그 누구건 오늘밤 아가씨를 꼬셔 오기만 하면 섹스화대는 자기가 부담하겠노라고 했다. 그러자 선원들은 좋아서 득의양양해했다. 그도 그럴것이 낮에 나체해수욕장에서 본 여인들중 이쁘고 섹시한 아가씨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대낮이었으니 그렇지 밤이라면 몇번이고 아가씨를 골라잡고 덮쳐들었을 선원들이었다. 헌데 이 곳에서만은 선원들이 착각해도 크게 착각했다. 우리가 나이트클럽으로 간 뒤 선원들이 혼자있거나 순 아가씨들로 군체를 이룬 좌석에 찾아가서 꼬셨으나 극상해서 함께 촬영하거나 물마시는 것까지는 응했으나 섹스요청에는 한결같이 거부해 나섰다. 특히 2항사의 말은 좀 속되었던지 독일에서 왔다는 한 아가씨는 마시던 맥주를 그대로 2항사의 얼굴에 확 치는 것이었다. 보아하니 여기로 모여든 여인들 중 섹스를 목적으로 한 여인은 기본상 없는듯 싶었다. 이 것으로 우리의 선원들은 처음으로 이렇듯 훌륭한 곳에서 가장 고독한 밤을 보내게 되었다. 4 1992년 10월 네덜란드의 로톨담에서 본선 “코리안스타”호가 러시아인들한테 팔린 뒤 중국 조선족선원 4명은 또 다시 항공편으로 라스팔마스에 날아와 대기하면서 재 승선을 기다리게 되었으며 그 수십일간의 체류로 라스팔마스에 대해 더욱 고찰할 수가 있었다. 우선 라스팔마스에 거주하는 수천명의 한국인들에 대한 삶의 실태였다. 라스팔마스에 도착하자 그 곳의 이탈만대리점에서는 우리의 식사를 호텔강촌의 한식관에 배치하였다. 하여 오래간만에 팔자가 늘어져 하루 세끼 해주는 밥을 먹으면서 시내구경이나 하며 놀아 대는데 하루는 호텔강촌의 이횡권 사장님이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 뜻인즉 일당 3000페스타(30불)씩 줄테니 한식관 주방장 조수로 일할 수 없느냐는것, 이에 선박의 주방장출신인 내가 마다할 것이 아니었다. 헌데 육지에서의 그 일이 해상선박에서의 주방일보다 곱절 힘들고도 피곤할 줄이야. 그때 우리는 오전 9시가 좀 넘어 출근해서는 주방과 식당청소를 한 뒤 10시부터 정식 근무를 시작했는데 내가 맡은 분야는 마늘껍질을 발라내고 야채를 다듬고 고기를 썰어놓는 등 진짜 주방장이 요리를 하는데 있어서의 시중군이었다. 그러다가 일단 손님들이 들이닥치면 주방장의 요구에 따라 일하는 외에도 요리를 나르고 그릇을 씻기도 했으며 또한 그런 일도 없으면 하다 못해 유리를 닦거나 냉장고안의 얼음까기 등 일손을 놓을 사이가 없었다. 이렇게 자정까지 맴돌아치다 보면 온몸이 해나른해 나기가 일쑤였으며 노동시간도 보통 15시간 좌우씩 되었다. 이는 일이 없으면 트럼프나 화토치기를 하는 연변의 음식점실태와는 현저한 대조를 이루었는바 그 돈이 진짜 뼈돈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그 곳의 주방장은 자기의 요리기술을 남한테 배워주기를 극력 꺼렸다. 이는 일종 경쟁사회에서의 자아생존수단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요리를 하노라면 알게 모르게 주방조리수한테만은 그 솜씨를 보여주기 마련인바 주방장은 나를 부려먹기 위해서도 칼질하는 법을 배워주고 고기, 야채와 양념은 각각 얼마씩이라고 소리칠 수밖에 없었으며 나 또한 그 것을 머리속에 기억하고는 후에 수첩에 적어두군 했다. 하여 나는 안속을 챙겨 각종 찌개, 불고기, 무침, 김치, 젓갈, 짠지 등을 만드는 법을 익혔으며 웬간한 한식에서의 한식요리 수십가지는 만들 수 있는 자신감도 갖게 됐다. 한편 라스팔마스에 거주하는 한국인 거개가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그것이 아마 그들이 그 생소한 땅에 깊이 뿌리를 박을 수 있는 비결인듯 싶어졌다. 다음으로 라스팔마스 현지인들에 대한 인상이다. 19세기의 한시기 영국이 세계 각 지역에 식민지를 두고 있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불리워졌다면 스페인 역시 그의 버금으로 아프리카와 중남미의 많은 나라들을 강점한 적이 있었기에 그 곳들에서 수탈한 재물로 본토를 살지게 했으며 그 밑천으로 스페인 사람들은 20세기 말엽에 들어서까지도 여유있는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 중 나라의 복리사업이 아주 잘돼가고 있다는 인상을 크게 주었다. 그 실례들로는 일하기 싫어 빈둥거리는 사람한테도 매달 실업수당을 발급했고 범죄자에 대한 사형제도가 진작 취소됐는가 하면 범죄자한테도 매주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휴가를 주어 집식구들과 모이게 했으며 일한만큼의 봉급까지 지불하는 상황이었다. 라스팔마스에서 우리는 한국으로부터 그 곳에 와서 식당일을 하는 박영애라고 부르는 아줌마를 알게 됐는데 그녀의 남편은 살인죄로 당지 교화소에 수용되여 있는터였다. 그 때 그녀는 남편이 맡아준 세집에 들어 일하러 다니면서 1주일에 한번씩 남편을 집에서 맞군 했는데 그것이 감동돼서인지 “스페인사람들은 한국사람보다 억수로 너그러요” 라고 자랑하군 했다. 사회가 이렇게 되자면 우선 국민들의 문명정도가 따라가야 하는 법이란 것이 가장 큰 인상이었다. 우리가 볼 때 그 곳 사람들은 진짜 문명스러웠는바 예하면 택시기사는 거리에서 근본 경적을 울리는 법이 없었고 일단 우리가 거리를 건너려 하면 택시를 세워놓고 먼저 건너가라는 손시늉부터 했으며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 역시 우리가 뭘 좀 물으면 열심히 가르쳐 줬는가 하면 그래도 안되면 꼭 한국인이나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을 붙여 주고야 지나가는 것이었다. 당지의 한국인들의 소개에 의하면 그들은 옛날부터 잘 살았기에 돈에 대한 집념이 옛날 못살던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처럼 강하지 않았으며, 인간이란 금전과 함께 인간자질 및 지식수준까지 함께 같은 차원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관념이라 했다. 그렇기에 이전에도 본선이 입항할 적마다 숱한 교회의 집사들 (한국인 집사 포함)이 찾아와 우리를 위해 기도를 드리고도 돈은 물론 음료수 한모금 마시지 않고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외 현지인과는 달리 그 땅에 사는 외국인들 사이에는 경쟁이 심했다. 20여년 전에는 한국인들이 내노라 하고 우쭐거렸지만 그 때는 라스팔마스에 무리로 쓸어드는 인도인들한테 큰 도전을 받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머리가 좋고 부지런한 반면 노인과 아이들만은 장사에 내몰지 않았지만 당시의 인도인들은 이 두 부류까지 동원되는가 하면 여인들은 드러내놓고 매음을 했으며 또한 라스팔마스로 들어오는 한국물건은 모두 비싼 것들이어서 가격상 벌써 값싼 인도물건한테 우세를 빼앗기고 있었다. 이렇듯 경쟁과 도전의 소용돌이속에서도 축복할만한 것은 라스팔마스란 이 낯선거리에도 “차이나 연변술집”이란 레스토랑이 선 그 것이었다. 이름그대로 이 식당의 마담은 연변 화룡의 여성이었는데 길림성대외경제합자회사 특파원의 신분으로 그 곳에서 일을 보는 한편 장사도 하고 있는 터였다. 이 술집의 출현으로 우리는 기쁘기도 하고 근심스럽기도 했다. 기쁘다는 것은 이 식당을 발판으로 더 많은 연변의 조선족들이 그 곳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근심스럽다는 것은 그 치열한 경쟁속에서의 이 식당의 운명때문에서이다. 물론 나는 이것이 부질없는 근심으로, 그 식당이 인젠 식당만이 아닌 종합서비스센터로 부상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5 라스팔마스에 체류하고 있으면서 나는 늘 그 생소한 땅에서 우리의 고향을 생각하게 되었다. 꿈마다 그리워 가닿게 되는 고향, 허나 고향은 그 곳 라스팔마스에 비해 확실히 뒤떨어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럼 경제적으로 따라잡기는 아직도 기나긴 시간이 수요되는 것, 하다면 목하 할 수 있는 것이란 사상해방과 관념갱신부터일 것이라 느껴졌다. 외국인과 우리와의 사상 및 관념차이, 하지만 그 것도 일조일석에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난제인 것이다. 그 때 연변에서 갓 출국한 선원들한테서 들을라니 연변도 인젠 개방돼서 양고기산적집이나 다른 식당들에서도 아가씨동반을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아가씨동반이라니 그 뜻을 알만하기도 했다. 참, 양고기산적 몇개나 요리를 몇접시 놓고 아가씨를 붙혀 주다니, 그것이 아가씨장사이지 어떻게 음식업이라 하겠는가. 따라서 어떤 곳에서는 아가씨맛을 먼저 본 뒤에야 음식맛을 본다고 하니 정직하고 점잖은 사람은 시름놓고 들어 갈만한 음식점이 없어지고 공연히 남의 오해를 받기가 일쑤인 것이다. 왜냐하면 라스팔마스의 싼따까따리나, 무에그랑데 등 거리는 정부에서 정해놓은 사창가로서 아가씨들이 공개적으로 남자들한테 감겨드는가 하면 정기적으로 종합검진을 하고 건강증이 있어야 손님을 접대할 수 있게 되었지만 우리 연변은 도대체 어디가 “매음굴”이고 누가 창녀인가를 도무지 가릴 수가 없겠으니 말이다. 한편 매음녀들한테서 생계유지같은 것은 아득한 옛말로 되어 매음치부로 되고 있어 점차 금전관념이 정조관념을 대체하는 바람이 일 수밖에 없으며 그 뒤에는 살인, 협잡 등 범죄가 따르기 마련인 것이다. 다음으로 수입과 지출이 정비례되지 못하는 연변의 사회실정이다. 라스팔마스에 거주하는 현지인들을 볼 때 그들은 확실히 돈이 많은 반면 한심한 깍쟁이들이었다. 우리가 한국사람을 서울깍쟁이라고들 했지만 외국인들에 비하면 한국사람은 그래도 외상이라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근성이 조금은 남아있는 듯 했다. 술집같은 곳에 가면 한국인들은 그래도 불고기에 소주라도 마시지만 라스팔마스의 현지인들은 흔히 맥주 두 깡통에 땅콩 한접시면 2~3시간씩 앉아 면담하군 했는데 처음에 우리는 그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차츰 날이 감에 따라 우리는 그들의 작법에 대해 인정하게 되었는바 배불리 먹고 술주정하는 것보다 조용히 앉아 일처리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일어서는 것이 퍼그나 신사스러웠다. 하다면 그들한테 돈이 없어서일가? 그 것이 절대 아니었다. 이는 라스팔마스뿐 아니라 유럽인들 거개가 그런 것 같았다. 네덜란드의 로톨담 항구에서 있은 일이다. 그 때 본선은 꾸바에서 싣고 온 밀감을 하역하게 됐는데 게으른 흑인인부들이 말썽만 일으키면서 일을 하지 않아 작업이 계획보다 얼마동안 더 늦어질지 모를 상황이었다. 그러자 안달아난 선장은 인부들을 바꿔줄 것을 강력히 항구측에 요구했다. 허나 항구측에서는 인건비가 싼 흑인인부들을 바꾸기 아쉬워 본선 선장과 1항사를 식당에 청하는 것으로 아퀴를 지으려 했다. 그런데 만포식하고 돌아올 줄 알았던 두 분은 맥주 두깡통씩만 마셨다는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주인측에서 맥주 한컵을 갖고 두 시간씩 끌어 대는 통에 아무리 손님측이라고 해도 그렇지 도무지 마구 마실 수가 없더라는 것이었다. 하다면 이런 일처리가 중국에서는 통할 수가 있을까? 당시 금방 출국한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동북아 금삼각지인 훈춘개방바람에 사람마다 통이 커져 이전에는 순두부집이나 양고기산적이면 고작이던 것이 인젠 중식이요, 양식이요 하면서 하루에 수백원 혹은 수천원씩 탕진한다고 했다. 그리고 친구나 손님한테 아가씨를 붙여줘야 제일 성의있는 것으로 인정받는다니?! 헌데 그러자면 매일같이 그만한 돈이 있어야 할텐데 그렇게 돈이 많을 수 있을까? 그럴리 만무하다. 그러면 남을 협잡하기 마련, 사업을 위해 협잡하면 몰라도 술먹고 즐기기 위해 인격을 팔면서 협잡이고 그 협잡도 못하면 또 외상으로 된단다. 그러면 그 외상 때문에 피해 다니고 얻어 터지며 싸울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라스팔마스의 현지인들한테는 술 때문에 외상이란 있을 수 없거니와 술 때문에, 외상때문에 싸우는 일은 더욱 있을 수 없었다. 라스팔마스에서 술먹고 주정하고 싸우는 건 거의 모두가 우리 동양인들이었는데 현지인들은 그들을 온역 피하 듯 피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현지인 택시기사를 칼로 찍어 죽인 한 연변선원이 법정에 나서게 되었는데 그 피해자의 아내가 하는 말이 “저 동양야만인들한테서 무슨 보상금을 받겠는가. 다만 저 놈들더러 이 섬에 상육하지 못하게 하라”고 절규했다 한다. 그러니 동양인의 이미지가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가 라스팔마스를 떠날 때만 해도 그 곳에는 배에서 도망친 연변의 젊은이들이 10여명씩 줄쳐 다니며 거리를 휩쓰는 걸 볼 수 있었다. 일자리도 돈도 없는 그들이 매일 매일을 어떻게 보낼까? 그 뒤에는 분명 절도와 강탈같은 범죄가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우리 연변인들은 어디가나 표가 난다”고 자랑같이 말했지만 그것이 어떻게 자랑거리인가? 조선, 한국이나 러시아에 가서도 꼭 말썽과 골치거리를 만드는 연변사람들의 이미지, 뒤떨어진 사회에서의 저질교육과 낮은 인간자질 등 이 모든 것이 대양건너 대륙 지나 저 유럽땅에까지 루가 미치고 있으니 연변의 젊은이들여, 정신차릴 때가 왔는가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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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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