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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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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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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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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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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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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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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 공산당과 함께 널 토벌할테다”
    1941년 여름, 중국의 항일전쟁이 가장 간고한 대치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특히 당시 염석산이 담당구역인 중원지구가 일본군에 의해 점령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것은 염석산의 병력이 약해서보다는 이 전구장관인 염석산이 항일에 대해 동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렇듯 관건적인 시각, 염석산의 꿍꿍이를 미리 보아낸 장개석은 자신의 특사 서영창을 제2 전구 즉 염석산이 맡은 전구를 시찰하게 하였다. 이 해 8월 25일, 중경으로 돌아온 서영창은 장개석한테 몇가지 중요한 것을 회보하였다. 첫째, 염석산이 일본과 결탁할 가능성이 있기에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 둘째, 산서의 염석산이 중앙과 오해가 생겨 다른 정권을 세울 우려가 있다. 셋째, 공산당에 대한 염석산이 증오가 극도로 달해 일본군과 함께 공산당을 제거할 가능성이 크다. 8월 29일, 장개석은 염석산한테 편지를 보냈는데 내용은 “존경과 위안의 뜻”이 내포되어 있으면서도 어딘가 다른 뜻이 담겨져 있었다. 특히 서영창이 염석산의 방위지역인 산서성 길현지구를 방문할 때 염석산은 일본과 비밀리에 담판을 진행, 얼마 후 과연 일본과 염석산은 모종의 협의를 달성했는데 당시 협의내용에는 일본측에 기울여지려는 경향이 농후했다. 또한 염석산은 한편으로는 장개석의 동의를 거쳐 “합법”적으로 일본과 연합해 공산당을 토벌하려고 시도했다. 이 해 9~10월 기간 염석산은 연속 3차례 장개석한테 전보를 보내어 “오직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본인은 그 어떤 희생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위원장께서 공산당을 토벌하려면 공산당 소련의 눈치를 봐야 하는 난처한 입장이기에 일본의 힘을 빌어 공산당을 제거하면 위원장의 난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장개석의 특사 서영창은 다르게 생각했다. 즉 염석산이 일본과 연합해 중공을 제거하려고 하는 것은 완전히 일본에 투항하려는 뜻이며 가짜로 공산당을 토벌하는 것으로 자기의 진정한 목적을 가리려는데 불과하다고 분석했다. 당시 염석산에 대한 서영창의 분석은 매우 적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에 대해 염석산은 기본상 저항을 포기하려는 태도였다. 당시 국군이 여러 전선에 거쳐 전면 패하고 있을 때 상당 부분의 국군을 지휘하고 있는 염석산의 음모는 장개석의 중시를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10월 26일, 장개석은 일기를 통해 염석산을 호되게 질책했다. “비열하고 교활한 한간, 왕정위 역도보다 다를바 없도다.” 하지만 장개석은 그냥 혼자서 이빨만 갈뿐 공개적으로 염석산을 질책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염석산의 수십만 대군이 일제한테로 넘어가는 날이면 더욱 큰 손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군은 황하 동안 용문산에 있는 국군을 향해 공격을 발동, 호종남은 한개 사의 병력을 도하시켜 지원하려고 하였다가 염석산의 거절을 당했다. 이유는 중앙군이 도하해오면 후방질서가 혼란스럽게 된다는 것이었다. 기실 당시 중앙군이 황하를 도하하여 협력하면 염석산과 일본과의 협의가 무산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보아 염석산에 대한 서영창의 판단은 적중했다. 1월 6일, 장개석은 염석산에게 명령하여 “중앙군 61사를 반드시 도하시키며 상론한 여지가 없다”고 못박았다. 이날 장개석은 또 자기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최종 이 한간이 적에게 투항할 경우 나 이 중정은 극단의 조치로 한간을 처단하겠노라 한편 장개석은 중앙군 61사를 기어코 도하시킬 결심을 굳히었다. 그 중요한 목적은 압력을 가하는 것으로 일본에 투항하려는 염석산의 의도가 실현되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막부득한 경우 공산당의 팔로군과 협력하여 염석산을 토벌하려는데 있었다. 이어 장개석은 재차 가경덕을 염석산이 맡은 전구에 파견하여 섬서 혹은 감숙 등지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경우 염석산의 책임을 추궁할 것이며 만약 염석산이 일본과 손잡고 공산당을 토벌할 경우 자신이 더욱 큰 토벌대상으로 될 것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고 경고하면서 그 때는 장개석이 직접 공산당을 거느리고 염석산 토벌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당시 장개석은 민족의 운명아에서 추호의 여지도 없이 중공과 함께 한간을 토벌할 것이며 적아사이에는 그 어떤 투기적인 수작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당시 염석산이 문무관원 중에는 일본과 결탁하려는 극소수의 투항주의파 외 대다수 장병들은 모두 항전으로 출로를 찾고 태원을 수복하여 산서군벌의 자존심을 되찾자는 결의로 충만되어 있었다. 거기에 1941년 말 미국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자 염석산은 자기의 판단이 틀렸음을 인식, 1942년 1월 초, 장개석한테 전보를 보내어서는 “위원장과 함께 공산당과 손잡고 항전을 끝까지 견지하겠노라”고 표했다. 이는 일본에 대한 염석산의 큰 태도변화였다. 하지만 염석산은 여전히 장개석한테 완전히 기대를 건 것은 아니었으며 일본에 투항하려는 뜻을 완전히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이해 3월 하순, 장개석은 염석산한테 서안에서 한번 만나자고 제의하였다. 하지만 염석산은 “전방이 긴장하여 떠날 수 없다”고 거절하였고 이해 8월 14일에도 장개석이 서안에서 재차 염석산과 만나자고 제의했지만 염석산은 여전히 각종 이유로 조승수와 왕정국 두사람을 서안에 보내어 장개석과 만나도록 했을뿐이었다. 1943년 12월 29일, 산서성 주석 조대문이 타계하자 이듬해 1월 6일, 장개석은 자기의 일기에서 반간첩 전략에서 큰 기여를 한 조대문을 추모하는 글을 적어두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대문은 장개석의 특사 서영창은 당시 일본에 투항하려는 염석산 시도를 파괴시겼을 뿐만 아니라 한편 염석산을 설득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하였다. 그 뒤 염석산과 일본의 관계는 점차 냉담해지기 시작하였고 장개석도 더는 특별조치를 취하자던 결심을 포기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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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8
  • 현용선씨 작품집 “옳바른 인생살이란?”을 펴내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중국조선족 과외작가 현용선씨가 최근 작품집 “옳바른 인생살이란?”을 출간했다. 한국 (사)GK희망공동체에 의해 출판된 이 책은 현용선씨의 가정 역사와 현상황, 중국 조선족사회에 대한 시각, 조선족방취제의 득과 실에 대한 분석, 삶의 향로에서의 인간자세 등으로 인간의 인정세태, 윤리도덕, 자아수양 등에 대해 독특한 견해를 서술함과 아울러 우리 조선족과 조선족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고 있다. 현용선씨의 “옳바른 인생살이란?”에는 문체와 내용에 따라 실화편·삶의 자세편·수필/수기편·따뜻한 스토리편·세태공론편 등 테마로 구성되어 있으며 많은 작품들에 사진이 배합되어 있어 생동성을 더해주고 있다. 이 책을 출간하면서 현용선씨는 “작품집을 출간할 수 있도록 많은 배려와 도움을 준 한국 (사) GK 희망공동체의 허을진 이사장과 이 책의 편집을 맡아준 연변일보 종합신문의 김철균 편집장한테 진심으로 되는 감사의 뜻을 표한다”고 밝혔다. 한편 이 작품집이 볕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준 (사)GK 희망공동체 이사장, 중국조선족대모임 대표인 허을진씨는 중국조선족 한국생활수기 모음집 “빵상과 쭝국애 혀네언니”를 출간시킨데 이어 이번까지 두번째로 중국조선족동포의 작품집을 출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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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7
  • 오묘한 세계 대백과(29)
    혹시 그대는 잘 모를 것이다. 세계의 많은 도시들 즉 상해, 북경, 천진, 로스앤젤레스, 베니스, 오사카, 도쿄 등 도시의 지면은 지금도 꺼져내려가고 있으며 그 꺼져 내려가는 속도가 매우 빠르다. 중국의 상해는 1921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면이 줄곧 꺼져 내려갔는데 어떤 지구는 이미 2미터까지 꺼져 내려 앉았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그럼 무엇 때문에 이런 도시들의 지면이 쉼없이 꺼져 내려 앉을가? 이는 우리 인류 자체를 탓해야 한다. 즉 지하수를 과도하게 뽑아 올리는 것이 도시의 지면이 내려가게 하는 직접적 원인이다. 지하수란 인류생존의 자원일뿐만 아니라 지면을 평형을 잡아주는 작용도 한다. 만약 인류가 과도하게 지하수를 뽑아 올린다면 충족한 물로 지면을 도와 도시의 압력을 담당할 수 없게 되며 도시는 자연스럽게 천천히 거져 내려앉게 된다. 지면이 내려 앉으면 위해성이 크다. 일단 도시가 내려 앉는 일이 발생하면 사람들의 생산과 생활에 엄중한 후과를 초래하게 된다. 예하면 시정 기초시설, 도로와 교량 및 항구와 부두, 지하케이블의 손해와 깊은 우물의 사고 및 지면의 갈라지는 등 위해성을 갖다 주게 된다. 편집 :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2-16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29)
    노틀담 대성당의 서류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프랑스, 지점: 파리 세느강 중앙의 시테섬(塞纳中央的西岱岛) 함의: 유럽에서 조기고트식 건축과 조각 예술의 대표임 가령 그대가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유고의 소설 “노틀담 대성당(일명: 파리 성모원)”을 읽어 보았다면 이 노틀담 대성당으로 몹시 가보고 싶을 것이다. 노틀담 대성당은 세계에서 저명한 프랑스의 천주교 성당으로 1163년에 교황 알렉산드르와 프랑스 국왕 루이 7세가 공동으로 손잡고 지은 것으로 공사시일이 200년이 걸렸다고 한다. 노틀담 대성당은 유럽에서 일찍 지은 대표적인 고트식 건축과 조각예술의 건물로서 종교, 문화, 건축예술이 한몸에 집중돼 있으며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걸작으로 되고 있다. 노틀담 대성당의 진면모 노틀담 대성당은 정면이 정방형으로 된 건물로 제일 밑에는 세개의 복숭아형 문이 있으며 전반 건물 중 가장 눈부신 곳이다. 그 중 좌측의 성모마리아문은 3개의 문중 가장 아름답고도 정교한 문으로 중간에 성모마라아와 아이의 조각상이 있으며 양 옆에는 성모 마리아의 생애를 표현한 그림들이 있다. 그리고 문의 양 측에는 1년 12개월의 그림과 신도와 천사의 조각상이 있다. 그 외 문위에는 긴 벽감(壁龛)이 있으며 거기에는 28명의 유대국왕의 조각상이 모셔져 있어 사람들은 이를 “국왕장랑(长廊)”이라고 부른다. 노틀담 성당의 무대 노틀담 성당 중의 무대는 국왕 루이 13세가 자식을 보게 한 성모 마리아를 위해 세운 것이다. 그는 결혼 후 23년만에 자식을 보았다. 그 자식이 바로 후세의 루이 14세였다. 루이 13세는 이 일을 하느님의 은덕으로 생각, 바로 성모 마리아를 가송하기 위하여 이 무대를 세웠던 거이다. 무대의 앞에는 하나의 아름다운 조각상이 있으며 이 조각상이 바로 “성모 마리아가 아기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무대 중의 파이프오르간(管风琴)이 있었는데 이 파이프 오르간은 전 프랑스에서 제일 큰 것이었으며 그 무겁고 폭넓은 음악은 노래에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들려온다. 편집 :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2-16
  • [르포] 언덕 위의 윤동주의 집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용정.윤동주연구회 회장) 필자는 몇해전 부터 “옛 간도의 서울”이었던 용정에 대한 장편기행을 집필, 권위 간행물에 4년째 연재하고 있다. 용정의 역사에 대한 세세한 고증에 빠져 있던 중 필자는 용정에서 익숙한 인물을 다시금 새삼스럽게 만날 수 있었다. 바로 겨레 모두가 애대하는 민족시인 윤동주였다. 2010년 가을 필자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 관심있는 지인들과 더불어 당지 역사에 해박한 향토사학자 최근갑옹을 모시고 용정의 여러 명소와 명물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와중에 유서깊은 사연들이 서린 용정의 동산에 까지 이르렀는데 그곳에서 뜻밖에도 윤동주의 마지막 길을 바래였던 용정자택 옛터를 재 확인할수 있었다. 조선족 문단에서 처음으로 윤동주의 생애를 소설화하여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를 “연변문학지”에 한창 연재 중이던 필자는 격동을 금치못해 했다. 답사가 끝나기 바쁘게 “용정도심에서 윤동주의 집터 확인”,이라는 기행문을 밤도와 써서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0년 11월 22일자 신문에 발표했다. 그 기행문은 발표되자 작지않은 센세이숀을 일으켰다. 여러 간행물과 수없이 많은 사이트, 까페, 블로그들에 전재되였다. 따라서 그동안 잊혀졌던 윤동주의 또 하나의 거처는 사람들의 관심사를 끌기 시작했다. 문의가 빗발쳤고 관광객들이 하나, 둘 그곳을 찾기 시작했다. 윤동주의 집 하면 누구나 할것없이 우선 명동촌의 시인의 생가를 떠올리게 된다. “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있고 지붕 얹은 큰 대문을 나서면 터밭과 타작마당, 북쪽 울밖에는 30주 가량의 살구와 자두의 과원, 동쪽 쪽대문을 나가면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큰 오디나무가 있었다. 그 우물 가에서는 저만치 동북쪽 언덕중턱에 교회당과 고목나무 우에 올려진 종각이 보였고 그 건너편 동남 쪽에는 이 마을에 어울리지 않도록 커 보이는 학교건물과 주일학교 건물들이 보였다. 우리는 이 생가에서 저들 또래들 같이 과수원 울타리로 되여있는 뽕나무 오디를 따 먹기도 하고 깊은 우물 물을 길어 입안을 가셔내면서 우물 속에 대고 소리치며 그 울림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 선생이 그림처럼 묘사한 윤동주의 생가 풍경이다. 연변행차를 하는 외지 사람들이면 선참 찾아보는 관광코스의 일번지로 자리매김 되여있는 생가. 하지만 용정 시가지에 또 하나의 윤동주의 거처가 있고 그 곳에서 윤동주가 가는 마지막 길을 바랜 줄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고 있다. 태어 난 명동에서 명동소학교를 졸업한뒤 윤동주는 명동에서 20리 떨어진 대랍자(大拉子)의 중국인 학교에 편입되여 계속 공부를 했다. 소학교 6학년의 나이로 말하면 매일 밟아야 하는 20여리라는 등교 길은 힘에 부치는 거리였다. 그런 아들의 처경을 안타까이 여기던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은 자식에게 더 좋은 교육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해 당시 연변지역 사람들이면 너나가 선망하던 “서울” 격인 용정으로의 이사를 결심했다.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씨가 생전에 잡지 ”나라사랑”에 기고한 추모문〈윤동주의 생애〉에 따르면 “1931년에 윤동주는 명동에서 북쪽으로 30여리 떨어진 용정이라는 소도시에 와서 캐나다 선교부가 설립한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용정으로 이사하였다” 고 밝히고 있다. 윤동주 일가의 용정 이주는 어찌보면 일대 변혁이였다. 명동에서 일껏 이룬 터전을 버린 것은 당시 36세의 나이였던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의 도시로 향한 새로운 열망도 있었지만 주로는 파평 윤씨 가문의 장남이였던 윤동주에게 더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함이였다. 윤동주 일가는 용정에서 두 번의 이사를 거친다. 1931년 늦가을, 맨처음 이사 온곳은 “용정가 제2구 1동 36호”였다. 바로 지금의 길승가로서 용정시 정부 서쪽 용성초대소 부근으로 추정된다. 막상 이사를 단행했지만 거주환경은 크게 변했다. 일가가 이사온 집은 20평방메터 정도의 초가집이였다. 명동에서 터밭과 타작마당, 깊은 우물과 작은 과수원까지 달리고 지붕을 얹은 큰 대문이 있어 마을에서 제일 큰 기와집에서 한껏 넉넉하게 살다가 20평방메터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초가집으로 옮겨온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윤동주, 일주, 광주 3형제, 거기에다 큰 고모의 아들인 송몽규까지 합류한 8명의 식구가 20평방미터의 초가집에서 옹색하게 붐벼야 하는 환경 속에서 윤동주의 용정생활이 시작되었다. 얼마안되어 윤동주 일가는 또 한번 이사를 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룡정 동산의 언덕이었다. (그 언덕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구릉으로 4,5리 가량 더 가면 윤동주의 묘소가 있다.) 용정의 정안구(靖安區) 제창로(濟昌路) 1- 20. 최근갑옹의 회억에 의하면 용정의 동남쪽, 그곳에 일제가 차린 야구니스 진쟈(靖国神社)가 있었다고한다. 정안구란 야구니스의 앞자 정(靖)과 안락할 안(安)자를 붙여 지은 구역이름이고 제창로는 바로 “영국더기”에 제창병원이 서면서 지어진 거리 이름이라고 한다. 2003년 일본 신간사(新幹社)에서 출간된 침략신쟈(侵略神社)라는 책자에서 필자는 당시 용정에 세워졌던 야구니스진쟈의 사진 한장을 발견했다. 간도신사 구만주간도신사 (旧満洲間島神社)라는 이름의 그 진냐사진에서 소재지는 동만총성구간도성용정가제1구 (東満総省旧間島省龍井街第1区)라고 밝혀져 있었다. 제신(祭神)은 천조대신(天照大神) , 창립년(創立年)은 대정(大正) 14년. 이라고 밝혀있었다. 그러고 보면 일본의 식민지화정책이 악랄하게 진행되고 있던 시기 새로운 심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 윤동주의 당시의 처경을 더듬어 볼수 있다.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해 동맹휴학에 가담했던 우리의 저항시인은 일본의 야구니스 진쟈와 멀지 않은곳에 자리한 환경에서 부득불 지낼수 밖에 없었다. 윤동주의 작품중에 “이런 날”이라는 시가 있다. “사이좋은 정문(正門)의 두 돌기둥 끝에서 오색기(五色旗)와, 태양기(太陽旗)가 춤을 추는 날 시의 앞구절이다. 여기서 오색기는 위만주국의 기발, 태양기는 일본의 국기를 말한다. 일제의 식민지나라인 위만주국의 기발과 일제의 국기가 휘날리는 지역에서 윤동주는 심히 수상스러운 시대를 조소하듯 그리고 있다. 시대의 고통을 명민하게 바라보기 시작한 윤동주의 세계관이 엿보이는 시라하겠다. 명동의 생가에 비해 환경은 여의치 못했지만 윤동주는 그에 구애되지 않았다. 윤동주는 명동촌에서 버릇된 바른 신앙과 좋은 성격으로 학업에 열중해 나갔다. 지금 남아있는 은진중학교 학생시절의 윤동주에 관한 증언들을 보면 그 모습이 풋풋하고 싱그럽다. 다시 윤일주 교수의 “윤동주의 생애”에 있는 증언을 보면- “은진중학교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였다.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잡지를 꾸리느라고 등사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기성복을 맵시있게 고쳐서 허리를 잘룩하게 한다든가 나팔바지를 만든다든지 하는 일은 어머니의 손을 빌지 않고 혼자서 재봉기에 앉아서 하기도 하였다. 그는 수학도 잘하였다. 특히 기하를 잘하였다.” 윤동주와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또 숭실중학교 그리고 광명학원 중학부를 같이 다닌 절친한 친구인 문익환 목사는”월간중앙”(1976년 4월)에 실린〈하늘, 바람, 별의 시인 윤동주〉라는 글에서 윤동주와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떠올리고 있다. “동주는 재봉틀질을 참 잘했어요. 그래서 학교 축구선수들의 유니폼에 넘버를 다는 것을 모두 동주가 집에 갖고 가서 제 손으로 직접 박아왔었지.” 익환 목사는 이어 그들의 은진중학교 학창시절의 모습을 이렇게 증언한다. “1932년 봄에 동주, 몽규와 나는 용정 은진중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은진중학교는 한때 모윤숙(毛允淑)씨가 교편을 잡았던 명신여학교와 한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곳에는 또 캐나다 선교부가 경영하는 제창병원이 있고 선교사들 집이 4채가 있었다. 이 언덕은 용정 동남쪽에 있는 언덕으로서 우리는 그 언덕을 “영국더기” 라고 불렀다. 그 지경은 만주국이 서기까지 치외법권지대여서 일본 순경이나 중국관원들이 허락 없이 들어갈수 없는 곳이였다.” 간도일본영사관과 가까이 상거한 이 자택에서 윤동주는 근 8년 간이나 지냈다. 집과 불과 200메터 떨어진 은진중학교에 다니면서 윤동주는 급우들과 함께 학교 내 문예지를 발간하여 문예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교내 웅변대회에서 “땀 한 방울” 이라는 제목으로 1등상을 따내는 등 영광을 지니기도 하였다. 몇해전 타계한 윤동주의 여동생 윤혜원 여사는 2007년 필자의 취재를 접하면서 윤동주의 용정에서의 나날을 떠올렸다. “절구통 위에 귤 궤짝을 올려놓고 웅변 련습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오빠의 손가락에는 늘 등사잉크가 묻어 있었다” 고 윤 녀사는 회상했다. 친지와 친구들의 증언을 따라가며 용정 은진중학에서의 윤동주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축구선수인 문학소년, 잘생긴 외모에 옷차림에도 관심이 커 손수 재봉질을 해서 옷을 맵시나게 고쳐 입는 멋쟁이, 웅변대회에서 1등상을 수상한 경력에다가 문학소년 치고는 의외로 수학마저 잘하고…. 1940년 은진중학 졸업 후 윤동주는 서울의 연희전문을 지망해 고종사촌 송몽규와 당시 간도지역에서는 단 두 사람이 합격했다. 1942년 연희전문을 나와 윤동주는 일본으로 유학, 선후로 도쿄 립교대학 영문과, 도쿄 도지샤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그러다 이른바 “사상범” 으로 체포되어 일본 규슈의 후쿠오카형무소에 갇혔고 생체실험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주사를 맞고 옥사한다. 윤동주가 비명에 간뒤 근 한달이 지나 아버지에 의해 일본에서부터 그의 골회가 제창로에 위치한 윤동주의 집으로 운송되여 왔다. 1945년 3월 6일 눈보라가 몹시 치는 날 집 앞뜰에서 윤동주의 장례가 치러졌다. 윤동주의 절친한 친구 문익환의 부친 문재린 목사가 영결을 집도했다. 장례식에서 연희전문”문우”잡지에 실렸던 윤동주의 시〈자화상〉과〈새로운 길〉이 랑독되였다. 봄이였지만 추위는 가시지 않고 그날따라 눈보라가 몹시 날려서 동주를 보내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춥게 했다고 한다. 윤동주의 장례식광경을 담은 사진이 보존되여 내려오고있는데 그 사진속에서 애통함에 빠진 윤동주의 친지들을 헤아려 볼수 있다.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은 윤동주의 영정 오른쪽에 서있고 아버지 윤영석은 그 두번째, 동생 일주는 세번째, 어머니 김용은 다섯번째, 녀동생 혜원은 여섯번째, 막내동생 광주는 왼쪽으로 네번째에 서있다. 영정 바로 왼편에 선 이는 장례를 집도했던 문재린 목사이다. 사연많은 윤동주의 용정자택에 대한 확인은 역사의 행간에 묻혀졌던 윤동주가 일본 와세다 대학의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에 의해 연변에서 처음 알려지던 1985년에 또 다른 이에 의해 이루어졌다. 윤동주의 은진중학 동기생이었던 서화숙의 동생 서대숙이 용정을 찾으면서 용정에서의 윤동주의 또 하나의 자택이 확인된것이다. 1930∼40년대 용정에 거주했던 서대숙 일가는 윤동주의 용정 자택과 불과 100여 메터 떨어진 길 하나를 사이 두고 살았고 명동학교 설립자인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선생의 자택과도 역시 길 하나를 사이 두고 있었다. 서대숙은 그 후 미국 꼴롬비아대학교 정치학 박사, 연세대학교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정치학 초빙교수, 일본 게이오대학교 정치학 초빙교수를 거쳐 미국 하와이대학교 정치학 석좌교수를 지내면서 조선 문제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인 석학으로 발돋움했다. 그는 명동의 정초인이며 이주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약연에 대한 위인전기를 집필해 출간하기도 했다. 그의 형인 서화숙뉴욕 한인교회 장로)이 1932년 은진중학에서 재학하고 있었는데 바로 윤동주와 동기생으로 되고 있다. 1985년 이들 일행은 용정으로 행차, 옛날 기거하고있던 용정의 동산 언덕을 찾으면서 더불어 용정에서의 윤동주의 자택을 확인했다. 당시 함께 했던 최근갑 옹은 에서 당시 벌채조합의 조합장으로 있는 일본인 오오마가리(大曲)네 집의 급사로 종살이를 한적이 있었다. 이들은 당시 개혁개방으로 국문을 열어젖힌 중국에서 자주 만날수 있었고 조선족역사에 관한 어제의 “산 증인”으로 학술계에 많은 의거 있는 자료를 제공했다. 그들은 김약연 목사의 용정 자택도 더불어 확인할수 있었는데 1930년대 김약연 목사의 자택은 현재 용정 안민가 “해란의 별” 아파트 접수실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최근갑 옹이 확인하는 윤동주의 자택 옛터는 지금의 안민가 동산사회구역의 용정시 기계수리공장의 뜨락으로 변모해 있다. 동산 아파트 단지의 노인네들을 찾아 기계수리공장에 대해 알아보았다. 60년대부터 이 지역에서 살아왔다는 김정호76세)씨에 의하면 이 공장은 50년대에는 고아원이였다가 “항미원조”전쟁이 일자 전쟁에서 부상입은 병사들을 위한 의족공장으로 변모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의족공장이 1978년 연길로 이사를 가고 지금의 기계공장으로 되였다고한다. 기계수리공장은 성이 조씨인 한족 공장장이 경영하는 작은 규모의 공장으로서 주로 지체장애인을 위해 민정국계통에서 차린 기계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이였다. 지금은 그 공장마저 조업을 중단하고 그 곳에 주차장이 닦여져 있었다. 주차장 남쪽켠에 지어진 공터가 바로 윤동주의 용정 집터라고 한다. 시인을 꿈꾸는 문학청년 윤동주를 보듬어 안고 그의 시상을 유발시킨 동생 광주가 뛰여놀았을 곳, 처음으로 “동주”라는 필명으로 연길에서 발행하는 “카톨릭소년” 에 동시를 발표했던 곳, 그 유명한 동시”오줌싸개 지도” 를 산출시킨 곳, “초 한 대”등 자신의 시 작품에 처음으로 이름과 날자를 명기한 곳, 문학에 뜻을 두고 연희전문을 지망하면서도 아버지와 설전을 벌린 유명한 일화를 남긴 곳이 바로 이 용정의 자택에서였다.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이제 한국, 지어 그를 숨지게 한 “적국” 일본 그리고 아세아를 넘나들며 그의 위상이 재조명되고 있지만 그의 생전 거처를 밝히는 표지석 하나 조차 없어 우리의 마음을 아릿하게 했다. 연변으로 관광 오는 한국 유람객들의 자취를 보면 거의 모두가 장백산, 일송정 그리고 윤동주생가로 루트가 이어져 있다. 그중에서 윤동주생가는 관광객들의 필수루트이다. 요즘 용정시 정부의 관심과 투자에 힘 입어 윤동주생가가 위치한 명동촌은 오래만에 새롭게 거듭났다. 윤동주 생가 한 켠에는 기념관이 서고 뜨락에는 시인의 얼굴과 대표작품들을 새긴 석조물들이 세워졌다. 윤동주 송몽규 등이 다녔던 명동학교도 그 원모습대로 복구되었다. 사실 용정에서 윤동주의 자취는 생가외에도 또 여러군데 찾아볼 수 있다. 용정시 제4중이 위치한곳의 은진중학, 지금의 북안소학이 자리한곳의 광명중학, 윤동주 시비가 섰는 용정중학 그 외에도 동산 언덕아래에 있는 시인의 마지막 길을 바랬던 자택등이다. 이 곳들을 발굴하고 명동촌처럼 관심을 몰붓는다면 그야말로 “윤동주 전문코스”를 기대해봐도 좋을듯하다. 따라서 해내외에서 관심높은 우리의 시인에 대한 기념과 그로 인한 관광산업의 시너지 효과를 거둘지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을 윤동주의 용정자택 옛터에서 가져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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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5
  • [연변FC] “천재일우”의 기회, “동산재기”의 청신호
    ■ 김철균 연변대지에 봄이 서서히 다가서고 있다. 단지 자연계의 봄만이 아닌 연변축구에도 “새봄”이 오는 것 같다. 바로 연변천양천팀의 갑급권 복귀가 연변축구의 “새봄”인 것이 아닐까? 지난해 연변천양천팀이 갑급에서 강등한 것이 너무나도 억울하여 세상은 돌고 돌아 연변팀한테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준 것 같다. 연변축구ㅡ 돌이켜보면 이렇쿵 저렇쿵 할 얘기들이 많고도 많다. 어떻게 보면 조선인들이 쪽박 차고 두만강을 건너왔을 때부터 당시 청국(清国)이라 불렸던 이 땅에는 축구란 것이 있었다고 한다. 누군가 한민족(韩民族)을 놓고 너무 한(恨)이 많아 한민족이 됐다며 농담삼아 말했다 한다. 당시에도 아마 그러했던가 싶다. 한(恨)이 많아 그 걸 해소할 곳을 찾다가 축구란 놀이가 생기자 발끝에 힘을 주어 어금이빨을 옥물면서 공을 찼다는 설도 있다. 그러던 연변축구가 지난 세기 20년대에 들어서는 다른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무쇠골격 돌근육 소년남아야/ 황황한 대한넋 발휘하여라// 다달았네 다달았네 우리 나라에/ 소년의 활동시대 다달았네// 반일대적 연습하세 후일 공훈 세우세/ 절세영웅 대사업이 우리 목적 아니더냐… 이 때의 연변축구는 반일이 목적이였다. 지금 국가간의 축구경기를 놓고 볼 때 한국대표팀은 일본대표팀한테만은 질 수 없다는 굴강함이 알게 모르게 나타나군 한다. 이는 아마도 지난 세기 20~30년대부터 조선인들한테 형성된 일종의 민족적 오기일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만주국축구대회와 일만(日满)축구경기에서 늘 간도성축구팀이 우승을 차지, 이 중 일만축구경기시에는 일본이 형편없이 패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경찰이 권총을 쥐고 심판을 봤다는 설도 있었다. 중국의 현대축구에 “헤이소(黑哨)”라는 것이 있었다면 당시의 축구경기장에는 “권총심판”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러한 연변축구 ㅡ 연변축구는 “8.15” 광복과 더불어 비로서 조선민족축구로서의 기틀을 잡고 볕을 보게 시작, 1949년 공화국의 창립되면서부터는 광활한 중국대지를 주름잡으며 조선민족축구의 위력을 떨치기도 했다. 1952년 상해에서 있는 전국축구선수권에서 준우승, 1957년 길림성 전업축구팀(연변조선족 위주)의 고고성, 1965년 중국축구 갑급리그(1부 리그)에서의 우승고지 점령… 이렇듯 승승장구하던 연변축구는 몇차례의 큰 좌절을 겪기도 했다. 가장 큰 재난은 “문화대혁명”이었다. 당시 “우승신화”를 엮었던 공신들이 모두 농촌과 공장으로 쫓겨갔다. 이들 중 훈춘시 어느 한족부락으로 하향했던 이광수 선생은 연변대학 체육학부로 올라오기까지 거의 10년이란 세월을 농촌에서 땅과 씨름해야 했다. 문화대혁명의 10년, 이는 연변조선족 축구인들한테 있어서도 힘들고 가슴아픈 10년이였다. 그리고 연변축구가 중국의 1부리그 갑급권(지금의 슈퍼리그)에 복귀하여 입지를 굳히기까지 거의 30년(1994년)이란 노력의 과정을 거쳤다. 그 뒤엔 또 경제상의 어려움으로 2000년엔 강등되어 타성에 선수진 전체가 매각되는 재난을 겪었고 다시 2004년에 갑급권에 복귀했다가 2014년에 재강등하는 등을 번복했다. 지난해 우리 연변축구는 다년간에 거쳐 누적되며 “곪고 곪아 오던 것”이 끝내 성적부진, 선수들의 사기저락, 단조로운 감독의 기전술 등이 강등이란 현실로 노출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꼭 나쁜 효과를 나타낸 것만은 아니었다. 피고름을 짜내고 심장이 마르는듯한 고통과 뼈저리는 교훈앞에서 연변의 축구인들은 정신을 차리었다. 연변축구가 지난 세기 50~60연대처럼 중국축구무대를 쥐락펴락하던 시대는 진작 역사로 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였고 구단운영시스템이 내지의 규범화된 구단에 비해 떨어져도 한참은 떨어졌다는 것과 또한 본토감독들의 기전술운영술도 재삼 검토해봐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도록 하였다. 연변의 축구인들은 “산전진통)과 비슷한 몸부림속에서 연변축구의 현유페단을 진단했고 향후 진로를 모색하였다. 또한 국가 및 성 해당부문의 어르신들도 연변축구가 천애절벽 낭떨어지에 추락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는 않았다. 지난해 말 국가체육총국 유붕(刘鹏) 국장이 동북광야의 강추위도 무릎쓰고 연변을 찾아 연변축구를 부활시킬 대책을 강구하면서 많은 관심을 보이었고 성과 주의 지도일군들도 여러 경로를 통해 연변축구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리기도 하였다. 희소식은 연속 뒤를 따랐다. 침체되어 있던 연변 장백산천양천팀에 “기적”이 나타났다. 이는 필경 흔하지 않은 중국축구계에서의 “기적”이었다. 지난 1월부터 연변구단의 갑급복귀설이 솔솔 우리의 귀를 즐겁게 “희롱”하더니 드디어 그것이 현실로 되었다. 말그대로 “하느님”이 연변구단에 하사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었고 “동산재기”의 청신호였다… 올해 연변구단은 일찍2007년부터 2011까지 한국국가축구대표팀의 수석코치었던 박태하 감독이 사령탑을 맡게 되었다. 쟁쟁한 경력의 소유자 박태하 감독이다. 올해는 양띠해다. 필자는 “사자가 이끄는 양떼는 사자무리로 될 수 있다”는 말을 자주 써왔다. 한국대표팀을 맡았던 히딩크가 그랬는가 하면 연변팀을 맡았던 최은택과 고훈이 그랬다. 100%는 아니었지만 대체적으로 그랬다. 하다면 호랑이가 이끄는 양떼 역시 호랑이무리로 될 수 있다는 말로 정리된다. “호랑이가 이끄는 호랑이무리”ㅡ 참 그럴듯한 표현이다. 2015년 중국갑급시즌에서의 연변팀이 명실에 부합되는 “호랑이구단”으로 군림하기를 기대해본다.
    • 스포츠
    2015-02-14
  • 상처한 뒤 처제와 재혼한 중국 영화배우 김산
    편집자의 말: 중국의 저명한 영화배우 김산(金山)은 1911년 절강태생으로 본명은 조묵(赵默)이다. 1920년대 김산은 상해에 가서 시화를 배우는 한편 아마추어로 경극공연에 참가하다가 1936년부터 영화계에 입문, 선후로 “광환지야(狂欢之夜)”, “밤중의 노래소리(夜半歌声)” 등 여러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1946년 김산은 장춘영화촬영소 건립사업에 착수, 촬영소 창립자로 되었으며 이 해에 영화 “송화강에서”의 감독을 맡아하였다. 그는 선후로 중국희극가협회 부주석, 전국 문련위원, 전국정협위원 등 직을 맡았었다. 1982년 7월, 김산은 병으로 타계하였다. 향년 71세었다. ▲ 김산과 손유세 1950년 10월 14일, 북경청년궁은 등불이 찬연하고 음악소리가 흥겹게 울려퍼졌다. 이 날 이 곳에서는 29세의 여인 손유세와 39세의 남성 김산의 결혼식이 있었다. 결혼식에는 북경에 있는 각계 명류인사들이 분분히 찾아와 이들의 결혼을 축하해주었으며 주은래의 부인 등영초도 찾아왔다. 이날 등영초는 이들에게 아주 진귀한 선물을 주었다. 이 선물인즉 새로 출범된 “중국 국가혼인법”으로 이를 선물한 것은 현시대의 부부답게 “혼인법”에 충실하라는 이었다. 결혼 후 김산과 손유세는 중국청년예술극원에서 김산한테 분여해 준 숙소에 신혼살림을 차렸는데 당시 손유세의 여동생 손신세(新世)가 언니와 함께 있다보니 매우 불편해하였다. 그러자 주은래와 등영초는 손신세의 고충을 헤아려 주어 자기네가 살고 있는 서화청에 와 함께 살도록 하였다. 당시 주은래와 등영초는 손신세를 월생녀(粤生女儿)라고 친절하게 불러 주었다. 그리고 주총리가 외국방문을 갈 때마다 등영초는 손신세를 집에 불러 함께 자게 하면서 주로 총리에 침대를 사용하게 하였다. 이 시기 손신세는 매우 유쾌한 나날을 보냈으며 생활도 아주 안정되였다. 헌데 그 때 언니 손유세의 혼인생활이 풍파를 겪게 되었다. 1951년 김산과 문화예술위문단이 북한에 나가 위문활동을 하게 되었다. 당시 김산이 6.25를 소재로 한 씨나리오를 쓰겠다고 하자 김일성은 대단히 기뻐하면서 자기의 여비서로 하여금 김산의 가이드 겸 통역을 맡게 하였다. 헌데 얼마 되지 않아 김산과 김일성의 여비서가 눈이 맞아 탈선행위를 저지른 것이 탄로되어 그 여비서가 총살형에 언도되고 김산은 당적을 직무를 박탈당하는 처분을 받았다. 이 일은 손세유로 하여금 크나큰 충격에 빠지게 했다. 하지만 결국 손세유는 김산을 양해해 주었고 이것으로 하여 김산은 아내한테 크나큰 감동을 받기도 했다. 그 뒤 손신세는 소련 레닌드라드대학에 유학하여 러시아문학을 저공하게 되었다. 이러자 등영초는 손신세가 조국을 멀리 떠나 고독해 한다고 경상적으로 책을 보내주고 편지를 써주면서 관심하군 하였다. 그러자 손신세 또한 모든 일을 등어머니한테 회보, 자신이 남친인 이종창을 사귀게 되자 이런 소식도 등영초어머니한테 알려주군 하였다. 이에 등영초 또한 손신세가 자기의 반려를 찾은데 대해 진심으로 축하해주군 하였다. 1957년 2월, 손신세는 소련에서 결혼식을 올리었고 또 얼마 되지 않아 귀국해 북경대학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손신세는 등영초어머니와 총리아버지를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어 무등 기쁘기만 했다. 그 뒤 손신세가 아이를 출산하자 등영초와 주은래는 아이를 이뻐해하는 한편 더욱 이들 부부를 아껴주었다. 특히 어린 것이 말을 하게 되어 TV를 통해 영초할머니 혹은 총리할아버지를 보았다고 하면 총리네 노부부는 아이가 기특하다고 하면서 자주 어린 것의 볼에 뽀뽀를 해주군 하였다. 헌데 이런 날을 그닥 오래가지 못하였다. 얼마 안되어 문화혁명 폭풍우가 도래하자 이들 부부는 총리네 부부를 더는 볼 수가 없었다. 문화혁명이 시작되자 강청은 손세유가 이립삼(李立三)한테 극장티켓 한번 선물한 것을 이유로 억지로 손세유한테 “소련수정주의 간첩”이란 죄명을 씌웠으며 장기간 조리돌림을 시키기도 하였다. 손세유는 자기가 잡혀가기 전에 어느 금요일 저녁 여동생 손신세와 비밀리에 천안문앞에서 만났다. 그녀는 여동생한테 “난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절대 자살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내가 죽게 되면 이는 타인한테 박해를 받아 죽은 것으로 될 것이다. 너는 이것만은 꼭 믿어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과연 얼마 뒤 손세유는 반란파들의 시달림을 받아 억울하게 죽게 되었다. 언니의 죽음은 손신세로 하여금 비할데 없는 분노를 느끼게 하였다. 손신세는 그 누구보다도 언니 손세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희생된 후 손유세는 어머니와 함께 상해에서 숨어살다가 16살이 되어서야 겨우 조직을 찾았고 후에 주은래와 등영초의 추천으로 소련 동방예술학교에 입학했던 것이다. 소련에서 손세유는 소련의 위국전쟁에 참가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기에 1950년 모택동과 주은래 등이 소련을 방문했을 때 모택동과 스탈린, 주은래와 스탈린 사이의 통역을 담당하기도 했었다. 이렇듯 당과 국가의 지도일군한테 충직한 언니가 어떻게 수정주의 간첩으로 될 수 있단 말인가?! 문화혁명시기 손신세 역시 “현행 반혁명분자”란 감투를 쓸 수 밖에 없었다. 헌데 이상하게도 몇차례의 비판과 투쟁을 받은 뒤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후에 알고 보니 당시 북경대학에 진주한 군대표는 손신세에 대한 자료를 근본 “중앙 문화혁명소조”에 바치지 않았던 것이었다. 한편 문화혁명시기 손세유와 마찬가지로 박해를 받다 감옥으로 갔던 김산은 1975년 4월에야 만기석방되었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서 아내 손세유는 일찍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손신세는 옥살이를 하고 나온 김산을 돌보기 위해 김산으로 하여금 자기의 집에 와 거처하게 하는 것으로 아내를 잃은 김산의 만년생활이 안위를 얻도록 하였다. 얼마 후 문화혁명이 결속되자 손신세는 20여년간 사업해온 북경대학을 떠나 중국TV예술위원회로 전근하였다. 이어 손신세의 남편 이종창이 병으로 세상뜨자 이 가정에는 오직 김산과 손신세만이 친인으로 남게 되었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 미묘할 때가 많다. 손신세의 남편 이종창은 임종시 아내한테 자기가 죽은 후에도 김산을 잘 돌봐주라고 부탁했고 그가 죽은 뒤 김산 역시 손신세의 집에서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얼마 안되어 김산은 당조직에 편지를 보내어 그와 손신세가 결혼하도록 비준해줄 것을 희망하였다. 1976년, 50세가 된 손신세와 나이 65세가 된 김산은 손잡고 서로 상대방 심령을 위로해주면서 새로운 인생길에 들어섰다. 1978년 김산은 중앙희극학원 원장 겸 중국TV예술위원회 주임직을 맡게 되였다. 1982년 7월 7일, 김산은 돌발성 뇌익혈로 타계, 향년 71세었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손신세 노인의 친인들은 모두 한명씩 저 세상으로 떠나갔다. 현재 손신세의 자식들은 모두 해외에 체류, 노인은 경상적으로 출국하여 자녀와 손군들을 만나보군 한다. 하지만 노인은 여전히 북경의 옛집을 잊지 않고 있으며 청명절이 돌아올 때마다 북경의 공동묘지에 가서 친인들을 찾아보군 하고 있으며 몇개의 기념일을 잊지 않는다. 주은래총리가 서거한 날, 등어머니가 별세한 날, 언니가 순직한 날과 김산이 타계한 날… 그리고 “문회보”에 추억록을 발표하여 돌아간 친인들에 대한 그리운 정을 담기도 했다. 현재 손신세 노인은 한권의 회억록을 준비, 생전에 이를 완수하지 못하면 친인들한테 미안한 노릇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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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2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
    ■ 김철균 제11회 북해상점 1983년 순자는 연변위생학교 남쪽 거리의 길옆에 식료품상점을 차렸다. 순자가 차린 상점은 개혁개방과 더불어 연길시에서는 가장 선참으로 나온 개체상점 중의 하나였다. 순자가 상점을 차린 것은 딱 돈을 벌자는 것만은 아니었다. 점차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전처럼 임시공으로 공사장으로 다니면서 막일을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집에서 놀자니 아직 그 나이까지는 된 것 같지 않아서었다. 또한 상점으로 드나드는 학생애들과 얘기같은 것을 나누면서 학생시절의 옛추억을 떠올리는 것도 일종의 즐거움으로 될 것 같아서였다. 순자가 차린 식료품상점의 간판이름은 “북해상점”이었다. 그닥 크지 않은 상점이었지만 순자는 영업을 시작한 날부터 상점안팍을 매우 깨끗하게 거두었다. 특히 상점하게 들어서면 벽에 붙여놓은 “위생공약”이 유표하게 안겨왔다. 이는 상급 해당부문에서 요구하여 써붙인 것이 아니고 순자 스스로 제정한 것이었다. 위생공약 위생청결은 본인과 찾아오는 손님의 신체건강에는 물론 주위환경도 깨끗하게 하는 아주 훌륭한 일이다. 본 상점은 상급 해당부문에서 상점내외의 위생을 검사감독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환영하며 한편 아래와 같은 자체공약을 제정한다. 첫째: 천정, 벽과 방바닥 등 곳에 구멍같은 것이 전혀 없어야 한다. 둘째: 모기장, 파리채, 파리약, 가래통, 위생복과 위생종이를 놓는 철망통은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셋째: 맥주통, 맥주컵은 3일에 한번씩 소독해야 한다. 특히 상점이 결핵병원 근처에 있기에 더욱 이에 유의해야 하고 여름철에는 철저히 질병예방에 신경써야 한다. 넷째: 돈을 담는 그릇, 거울, 간장그릇과 형광등은 자주 닦아야 한다. 다섯째: 상점 문앞엔 항상 깨끗한 물을 떠놓아야 한다. 그래야 상점으로 드나드는 손님들이 수시로 손을 씻을 수가 있다. 여섯째: 상점주위와 큰 길 등을 매일 2차 내지 3차 정도 쓸어야 한다. 왜냐하면 상점주위엔 몰래 소변을 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연길 북해상점 1983년 ×월 ×일 이렇게 위생공약을 제정한 외 순자는 자신의 개인위생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그는 항상 새하얀 위생모자와 위생복을 착용, 그것을 이틀에 한번씩 갈아입었으며 하루에도 수십번씩 손을 씻었고 아무리 손으로 쥐여도 될 음식물이라 해도 손으로 쥐지 않고 항상 소독을 한 집게로 집어 그릇에 담군 하였다. 봉사자세에도 신경을 썼다. 남녀노소를 막논하고 일단 상점에 들어서면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란 인사를 하였으며 설사 손님이 물건을 사지 않고 그냥 나가더라도 “편히 나가십시요. 또 오세요”란 말로 손님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였다. 그리고 상점에서 맥주를 청해마시는 손님들한테는 김치나 기타 짠지같은 안주는 그냥 공짜로 주었는데 손님들이 부담스러워하면 “장려음식”이라고 했다. 그 뒤 연길시에는 상점이나 식당들 거개가 손님들이 매상을 많이 올리면 이른바 “장려음식”이란 것을 음식상에 많이 올리군 했는데 이 “장려음식”이 아마도 순자가 운영하는 “북해상점”으로부터 첫 스타트를 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상점이 깨끗하고 순자가 친절해서일까? 상점에는 위생학교 교직원들도 자주 들려서는 맥주잔을 나누군 했다. 처음에 그들 거개가 이 상점이 김용환 교수의 부인이 차린 상점인줄을 몰랐었다. 그러다가 언젠가 김용환 교원과 함께 이 상점에 와서 맥주를 마시면서 이 상점의 주인이 김용환 교원의 부인인 것을 알고는 모두가 놀라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김용환 교원을 부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상점이 참 깨끗하고 좋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김선생님은 진짜 사모님복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얼핏 선생님이 입고 다니는 옷만 봐도 그렇습니다. 우린 선생님께서 주름살이 간 옷을 입고 다니는걸 정말 한번도 본적이 없다니까요.” “그렇다오. 아무리 마누라자랑을 하면 상등바보라고 하지만 난 정말 마누라를 잘 만난 것 같수다. 일찍 툭 털면 먼지밖에 없는 나와 결혼해줘서 고맙고 후에 문화혁명 때 그 고생을 하면서도 자식들을 잘 키워줘서 또 고맙고… 바른대로 말해 이 마누라가 아니었더면 오늘의 나를 상상도 못할 일이지…” 이에 순자는 눈을 곱게 흘겼으나 자기의 노력을 긍정해주고 또 고맙게 생각해 주는 남편이 슬며서 고맙기만 했다. 한편 순자는 상점의 손님뿐 아니라 기타의 상점에 물건을 나르는 일군들한테도 잘해주었다. 다른 상점들에서는 물건을 날라주는 사람한테 고작해 냉수나 한고뿌를 대접하는데 그쳤으나 순자는 이런 사람들한테 냉장고 안에서 얼음과자나 사이다같은 것을 꺼내주기도 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점심밥을 공급하기도 했다. 그 중에는 부모가 없이 살면서 상점에 물건을 날라주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보일이라고 불리우는 한 조선족 총각이 있었다. 순자는 그 총각한테 특별히 잘해주었다. 남편도 고아로 자랐던터라 부모가 없이 자란 젊은이들을 보면 그냥 남의 일 같지 않아서였다. 그 와중 보일이란 젊은이가 날라오는 물건에는 간혹 요구했던 수자가 모자랄 때도 있었는데 특히 맥주같은 것이 한두병씩 모자라는 일은 흔히 있었다. 보일의 말로는 운수도중 쏠쏠이패들한테 빼앗겼다고 했다. 헌데 거의 번마다 이런 일이 생기니 어느 정도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순자는 “맥주같은 건 마시고 싶을수가 있지만 운수도중 술을 마시면 사고가 날 수 있으니 다 날라온 후 상점에서 안주를 먹으면서 마셔야 한다”고 일깨워주었을뿐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그리고 진짜 보일이더러 자주 상점에서 밥술을 들게 했으며 자식들이 몇번 입지 않아 거의 새 것이나 다름이 없는 옷을 가져다는 그 보일이란 총각한테 몇번 주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 총각은 순자네 상점의 물건을 날라주기를 각별히 좋아했으며 순자네 상점의 물건을 날라주는 날인즉 그가 상점에서 점심밥을 공짜로 얻어먹는 날이었고 뭔가를 얻어가지는 날이기도 했다. 순자는 길가는 행인들한테도 아주 잘해 주었다. 그는 길가는 노인들이 몸이 불편한 모습이라도 보이면 항상 상점안에 들어와 휴식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노인들이 마실 수 있는 사이다 혹은 기타 노인들이 즐기는 귤같은 식품을 공짜로 대접하군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한 할머니가 역시 순자의 부축으로 상점안으로 들어와 휴식하게 되었는데 이말 저말을 하던 중 순자가 신흥소학교 부근에서 살고 있고 이름이 아무개라고 하자 “난 임자가 뢰봉처럼 좋은 일을 많이 한다는 소문은 들었어도 이렇게 얼굴을 처음 보는구려”하고 하며 기뻐하면서 후에는 이 거리를 지날 때마다 상점에 들려서는 한참씩 한담하군 하였다. 이렇게 순자가 상점을 하게 된 후에야 순자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는 사람은 그 할머니뿐이 아니라 몇명 잘되었다. 2 순자가 상점을 시작한지도 어언간 2년철을 잡았다. 그 동안 순자는 새벽마다 맥주공장에 가서 생맥주를 받아 밀차에 밀어오는 등으로 몹시 바삐게 보냈지만 낮이 되여 찾아오는 위생학교 학생들과 얘기같은 것을 나누노라면 시간이 가는줄도 몰랐고 별로 피곤하지도 않았다. 한편 순자는 자신이 어렵고도 힘들게 공부하던 옛날과 그리고 비록 해방후였지만 없고 가난하던 그세월 자식들한테 배불리 한번 먹이지 못하면서 키우던 그제날을 생각하니 상점으로 찾아오는 모든 학생들한테 뭐든지 공짜로 주고 싶었다. 그만큼 순자한테 있어서 돈버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있었으니 그것이즉 바로 매일 그 학생들이 상점으로 찾아오는 것이었다. 생각밖으로 상점으로 찾아오는 학생들 거개가 가정생활이 비교적 풍족한 모양이었다. 여학생들은 대부분 털실적삼에 오리털 방한복을 입었었고 남학생들도 용돈을 귀하지 않게 썼으며 일주일에 한두번씩 맥주놀이를 하는 남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물어본즉 학생들 거개가 가정으로부터 용돈을 비교적 넉넉하게 보내준다는 것이었다. (세월이 좋아졌구나! 이전에 우리가 공부할 때와는 판이하구나!) 순자는 웃고 떠들며 좋아하는 학생애들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며 “개혁개방이 좋긴 확실히 좋은 모양이야”라고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순자는 위생학교 학생들의 가정형편을 다는 알 수 없었다. 기실 위생학교에는 가정생활이 부유한 집의 애가 있었는가 하면 가난한 집의 애들도 있었으며 지어 어떤 가정의 학생들은 집이 가난한 시골에 있는데다 한쪽 부모 혹은 부모 양쪽이 다 없는 불쌍한 애들도 있었다. 상점으로 다니는 애들한테서 알아본즉 가난한 가정의 자식들은 일요일날에도 기숙사에 있으면서 아주 드물게 시내로 나온다는 것이었다.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말구. 가난한 집 자식들이 어떻게 상점으로 드나들 수 있겠는가?!) 그도 그럴 것이 이는 순자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순자의 “북해상점”에도 옷을 아주 남루하게 입은 한 여학생이 찾아왔다. 수심이 가득한 얼굴에 피기가 별로 없이 해쓱한 모습으로 상점에 들어선 그 여학생은 순자한테 약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8전짜리 우표와 편지봉투 몇 개 씩만 산 뒤 다시 약간 고개를 숙여 인사를 남기고는 인차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순자는 그 여학생이 나간 문 쪽을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단지 가난 때문만이 아닌 것 같았다. 꼭 다른 말못할 사연이 있는 여학생임에 틀림없었다. 순자는 어쩐지 이상한 예감이 들어 상점에서 음료수를 마시는 다른 학생들한테 물었다. “학생들은 아까 우표와 봉투만을 사간 학생을 아우?” “예, 돈화에서 온 이문영이란 앤데요.” “돈화에서 왔다구? 그런데 너무 측은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래요. 저 애는 엄청 불쌍한 애예요. 엄마가 일찍 세상을 뜬데다 70세가 되는 아버지는 또 심한 장애인이고 말예요. 때문에 그애는 얼마 안되는 조학금마저 남겨서는 아버지한테 약도 사서 보내드린답니다.” “그래? 참 안됐구나!” 순자의 짐작은 맞아 떨어졌다. 이어서 다른 애가 “문영인 언니 한명이 산동에 있고 오빠 한명이 돈화 시내에 있으나 모두가 사는 꼴이 여의치 않아 모두 여동생의 뒤를 대줄 형편이 못된다”고 덧붙였다. 순자는 또 그제날 의지가지가 없는 고아의 몸으로 어렵게 어렵게 자라며 공부해온 남편을 머리속에 떠올렸다. 순자는 없고 외로운 사람한테 주는 정신적 위안과 사랑이 얼마나 큰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순자는 언제 한번 기회가 있으면 문영이란 그 애를 직접 만나보리라 생각을 굴렸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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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2
  • 그 사람과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18가지 이유
    불편한 인간관계의 주범은 ‘나쁜 의사소통’ [동포투데이] 만족스러운 인간관계의 핵심이 효과적인 의사소통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단순히 상황에 맞게 말을 한다고 관계가 좋아지지는 않는다. 임기응변식으로 내뱉은 대답에서는 진심이 느껴지지 않고, 배려 없이 건넨 조언은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내기 일쑤다. 세계적인 인지심리학자이자 관계회복전문가인 데이비드 번즈 박사(스탠퍼드 의과대학 심리행동과학과 명예교수)는 저서 ‘관계 수업’(흐름출판)에서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할 때 흔히 범하는 오류를 제시했다. 오랜 임상치료 결과를 바탕으로 도출한 이 항목들은 상대방과 대화를 할 때 수시로 맥이 끊기고, 초점이 흐려지고, 결국에는 마음을 닫아버리게 만드는 이유들이다. 번즈 박사는 이 오류 항목들이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조언한다. 18가지 오류를 살펴보자. 1. 진실 따지기: 자기는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고 주장한다. 2. 탓하기: 모든 문제의 원인을 상대방 탓으로 돌린다. 3. 방어적 태도: 자기 잘못이나 약점 잡힐 만한 실수가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4. 순교자 노릇 하기: 상대방이 제멋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자기가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5. 깎아내리기: 상대방의 열등감이나 수치심을 자극하기 위해 거칠고 상처 주는 말을 내뱉는다. 6. 낙인 찍기: 상대방을 ‘멍청이’, ‘인생 낙오자’, 혹은 이보다 더한 말로 부른다. 7. 비꼬기: 행동, 말, 말투 속에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훈계하는 태도가 담겨 있다. 8. 반격하기: 상대방의 비판에 비판으로 맞받아친다. 9. 희생양 만들기: 상대방을 문제 많고 쓸모없는 사람으로 몰아간다. 10. 회피하기: 대화의 초점을 피하거나 예전에 섭섭했던 일들을 끄집어낸다. 11. 자기 탓: 남이 비판하지 못하도록, 먼저 자기가 형편없는 사람인 듯 행동한다. 12. 희망 버리기: 온갖 노력을 해봤는데도 안 되더라고 주장한다. 13. 요구 늘어놓기: 자기 뜻대로 상대방이 해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불평한다. 14. 부인: 자신은 그 문제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하거나, 화가 잔뜩 났으면서도 전혀 화가 안 났다고 주장한다. 15. 도와주기 선수: 귀담아듣지 않고 충고를 늘어놓거나 도와주겠다며 나선다. 16. 문제 해결 선수: 다른 사람의 감정은 무시하고, 그 사람이 겪는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며 나선다. 17. 수동적 공격: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입을 삐쭉이거나 문을 쾅 닫아버린다. 18. 독심술 오류: 자기감정을 털어놓지 않았으면서도 상대방이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기대한다. 번즈 박사는 효과적인 의사소통법에 대단한 비밀이 있거나 아주 힘든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상대방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자기 감정을 부드럽게 털어놓고, 진심으로 애정과 존중심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인간관계 회복의 핵심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 감정, 행동은 우리의 통제 밖에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상대방을 바꿀 수는 없지만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는 있다. 위의 18가지 오류를 체크하고 개선하는 것만도 좋은 출발이 될 것이다. 출처: 흐름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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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0
  • 중국 ‘홍색연안’의 10대 미녀들의 운명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지난 세기 40년대, 중국의 연안은 중국혁명의 “성지”었다. 당시 수많은 열혈청년들은 천리길도 멀다 하지 않고 또한 온갖 험난도 무릎쓰고 연안을 찾아와 구국의 길과 인생의 이상을 찾으려 시도하였다. 이 중에는 여성청년들도 근 50%를 차지, 또한 이들 여성청년들 중에는 남성들의 이목을 끄는 미녀들도 일부 있었으며 후에 사람들은 취미로 이들 여성들중에서 “10대 미녀”를 선정, 당시 이들은 연안의 인기인물들이기도 했다. 하다면 이들은 모두 누구와 결혼했으며 어떠한 인생의 길을 걸어왔을까? 소비 : 소비(苏菲)는 당시 연안 노신예술학원 “교정의 꽃”으로 원명은 주소진(周素珍)이었으며 원적은 절강 정해였다. 소비는 15살 되던 해에 강청, 조단 등과 함께 상해에서 연극 “대뢰우(大雷雨)”에 출연, 강청이 여주인공 카싸리나 역을 맡고 조단이 카싸리나 남편 역을 맡았으며 소비는 카싸리나의 시녀 역을 맡았다. 이 해 소비는 영화 “해장(海葬)”에도 출연했다. 1939년 10월, 소비는 19살 나이에 연안에 와 노신예술학원에 입학했다. 당시 연안성에서는 연안으로 온 그녀를 두고 강청의 여동생이 왔다고 했으며 소비는 일약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인물로 되었고 사람들은 분분히 누가 강청의 여동생인가 하고 탐문하기도 했다. 1940년 구정 전야에 노신예술학원 예당에서는 무도회가 열렸다. 그 때 코가 큰 미국인 하드무가 대담히 소비한테 춤을 청했다. 이에 소비가 춤 출줄 모른다고 사절했지만 그는 배워주겠다고 하면서 지꿎게 달라붙었다. 이렇게 하드무는 소비의 섬섬옥수같은 손을 잡고 놓을줄 몰랐다. 이 날 밤, 소비와 같은 움막에서 거주하는 한 여성이 출산하게 되자 모두들 소비더러 하드무 의사를 청해오도록 하였다. 당시 하드무는 자기가 산부인과 의사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소비와 함께 임산부한테로 달려왔다. 새벽이 되어 아기는 순리롭게 태어났다. 그 뒤 소비는 하드무더러 돌아가 휴식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도리어 소비와 함께 밖에 나가 산보하고 싶다고 하였다. 밖에서 거닐면서 하드무는 소비한테 프로포즈를 하였고 소비는 하드무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였다. 일직 “연안정풍” 기간 “간첩”혐의를 받은 하드무는 문화혁명기간에도 가산을 몰수당하고 감옥에 갇히었다. 하지만 소비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이들은 첫날의 언약을 잊지 않고 그 사랑을 종신토록 이어갔다. 포안수: 1938년 북평사범대학 학생 포안수(浦安修)가 연안에 도착했고 북평사범학원 부속중학교를 졸업한 엽정의(후에 엽군으로 개명)도 연안에 도착했다. 그리고 설명과 주은래의 앙녀 손유세 역시 선후로 연안으로 달려왔다. 이렇게 되어 연안에는 남평(강청), 유지란, 엽정의, 포수안 등으로 1938년판 연안의 “10대 미녀”로 되었다. 1938년 4월, 연안에 도착한 포수안은 팽덕회의 눈에 들어 20살 나이에 팽덕회와 결혼하였다. 당시 두 사람의 나 차이는 아주 현저했다. 1949년 건국후 포수안은 중국 국가경공업부 노동노임사(司) 사장, 북경사범대학 당위 부서기 등 직을 역임하였다. 팽덕회가 평판된 후 그의 추도회를 준비하는 기간 팽매괴 등 사람들은 포수안이 “부인”의 신분으로 추도활동에 참가하는 것을 견결히 반대했다. 하지만 최종 중앙에서는 포수안의 이혼보고가 비준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포수안을 여전히 팽덕회의 부인으로 인정했다. 1991년 포수안은 유선암으로 북경에서 타계하였다. 증헌식: 증헌식(曾宪植)은 호남 상향(지금의 쌍봉)사람으로 엽검영 원수의 첫번째 부인이었다. 증헌식은 1926년 중앙 군사정치학교 무한분교의 여성대에 가입해 북벌전쟁에 참가했고 1928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29년에 일본유학길에 올랐다가 다시 1941년에 연안으로 돌아왔다. 1946년 증헌식은 중경과 남경에서 중공대표단 성원 등영초의 비서로 있었고 건국후엔 중화 전국 부련회 부비서장, 부련회 제3기 서기처 서기, 제4기 전국부련회 집행위 부주석직을 역임했고 제4기, 제5기 전국 정협 상무위원으로 있었다. 증헌식은 1989년 10월 11일, 북경에서 타계하였다. 1938년 초, 증헌식은 임신한 몸으로 홍콩으로 갔다. 그 해 10월 증헌식은 홍콩에서 그녀 일생에서의 유일한 자식인 엽선녕을 낳았다. 1941년 증헌식은 재차 연안으로 돌아와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원에서 학습하다가 후에 당조직의 배치에 의해 부녀통일전선 등 방면의 사업을 하였다. 당시 그녀는 엽검영의 아들 엽선녕을 홀로 키우며 엽검영과의 결혼을 기다렸으나 엽검영은 끝내 그녀를 아내로 맞지 않고 다른 여인한테 장가들었다. 오광위: 연안시기 중공의 수령 모택동이 부인 하자진과 한번 크게 싸운적이 있다. 그것인즉 바로 그들 사이에 “제3자”가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1937년 1월, 미국 작가 스미들리가 독일 “프랑크 푸트 데일리(法兰克福日报)” 기자의 신분으로 연안에 왔을 때 그의 비서 겸 통역을 선 중국여인이 있었다. 이름은 오광위(吴光伟)었고 오리리(吴莉莉)로 불리기도 했으며 당시 그녀는 연안의 제1 미녀로서의 손색이 없었다. 그 뒤 모택동과 스미드들리 및 오광위 사이에 내왕이 밀접해지자 마침내 참고 참았던 하자진이 큰 반응을 보였다. 한번은 모택동과 스미들리 그리고 오광위가 친절하게 한담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하자진이 뛰어들더니 오광위와 트집을 잡기 시작했고 나중에 두 여인은 몸싸움까지 벌였다. 이것이 바로 당시 연안성을 놀래운 “오광위 사건”이었다. 그 뒤 오광위와 하자진은 선후로 연안을 떠났다. 듣는바에 따르면 후에 오광위는 남편을 따라 대만으로 건너갔다고 하지만 그 뒤의 일은 종무소식이다. 손유세: 1921년생인 손유세(孙维世)는 황포군관학교 교관이었던 손병문(孙炳文)의 딸이다. 손유세의 부친 손병문은 일찍 주덕과 함께 독일유학을 하였다. 당시 그는 주은래의 소개로 주덕과 함께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25년, 손병문은 귀국해 국민혁명군 정치부 비서, 광동대학 교수, 황포군관학교 교관 등 직을 맡았고 북벌전쟁에 참가하였다가 1927년 대혁명 시기에 희생되었다. 당시 손병문의 딸 손유세는 5살에 불과하였다. 1938년 손유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 그 뒤 주은래를 따라 연안에 왔으며 주은래의 양딸로 되었다. 연안에서 손유세는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원에서 공부하면서 “홍색공주”로 불리었다. 사진은 1930연대의 손유세(중간 사람)이다. 문화혁명기간 손유세는 잔혹한 비판투쟁을 받았으며 당시 주은래마저 손유세를 보호할 수가 없었다. 손유세는 1968년 반란파들의 박해로 사망, 당시 47밖에 되지 않았다. 사진은 남편 김산과 함께 있는 손유세이다. 유지란: 북경사범대학 시절 유지란(刘志兰)과 포안수는 친구사이었다. 당년에 유지란은 허다한 남학생들의 애모를 받았었다. 연안으로 온 뒤 유지란은 중공북방국 부녀사업을 책임졌었고 섬북 공학분교 교도원으로도 있었다. 1939년, 팔로군 총부가 있는 노성북촌에서 좌권과 결혼하였다. 결혼 1년후 유지란은 딸 좌태북(左太北)을 출산하였다. 1942년 좌권과 결혼할 때 유지란의 나이는 25세였다. 좌권과 결혼한 후 1년여만에 좌권의 희생으로 이들은 영별하였다. 유지란이 비통에 잠겨 있을 때 팔로군 총사령 주덕이 자주 그녀를 찾아 위안하군 했었다. 설명: 설명(薛明)은 1916년 생으로 하북성 패현의 한 빈고농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원명은 왕애진(王爱真)이었으나 후에 모친의 성을 따르면서 설명으로 이름을 고쳤다. 설명은 1936년 비밀리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1938년 여름에 연안으로 갔으며 1942년 8월 1일에 하룡과 결혼하였다. 그 뒤 설명은 하룡을 따라 남정북전을 하면서 장기간 군대직을 맡았다. 그러다 선후로 서남국 부녀복리부 부장, 총참모부 판공청 당위 위원을 맡았고 선후로 전국 정협 제6기, 제7기 상무위원으로 되었으며 중공 제12차 대회 대표로 선출되기도 했다. 설명은 2011년 8월 31일, 북경에서 병으로 타계하였다. 향년 95세로 신중국 개국원수의 부인 중 제일 마지막으로 타계한 노인이었다. 범원견: 범원견(范元甄)은 일찍 강청, 엽군, 손세유와 더불어 연안의 “4대 미녀”에 속했었다. 범원견은 일찍 학생운동시절 왕명의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연안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학원을 다닐 때에는 모택동마저 그의 이름을 기억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었다. 1939년 범원견은 중경 팔로군 판사처에서 이열(李锐)과 결혼했다. 결혼 뒤 둘은 함께 연안으로 갔다. 1943년 봄 이열은 간첩혐의로 연안 보안처에 의해 감금되었고 그 뒤 이열과 범원견은 이혼했으나 이열이 출옥하자 복혼하였으며 얼마 후 두번째로 이혼하기도 했다. 이어서 각종 정치운동이 있을 때마다 범원견은 미친듯이 이열을 적발했다. 그녀한테는 오직 당성만 있고 인성은 없었으며 나중에는 뭇사람들의 버림을 받기에까지 이르게 됐다. 범원견의 비극은 그 시대의 비극이었다. 사진은 인생만년의 범원견이다. 엽군: 1938년 4월 북경사범대학 부속중학교를 졸업한 엽군(원명 엽정의)이 연안에 도착, 남평(강청), 유지란, 포안수 등과 더불어 연안의 “10대 미녀”로 되었고 팔로군의 유명한 장군 임표의 부인으로 되었다. 결혼 뒤 임표는 “부드럽고 호방하며 이지적인 여인”이란 글로 엽군을 평가했었다. 하지만 임표 역시 대도시에서 온 이 인테리형 여성한테 허영적인 일면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1971년 9월 13일, 엽군은 결국 남편 임표와 함께 비행기에 앉아 외국으로 도망가다가 몽고국 언더르한에 추락되어 허영심 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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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5-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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