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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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태일 시/개산툰 구월
    개산툰 구월 박태일 모아산 질러 넘다 왼쪽으로 내려 서면 화룡에서 룡정에서 너른 평강 들 타고 내린 해란강 걸음걸음 고요하다 동성진 너머 리민 너머 옥수수 키잡이로 서서 파랗게 쏘다니는 구릉 마을 집들은 산협의 가난을 풀풀 날리고 창유리 깨진 틈으로 도닥도닥 옛말 드난다 개산툰 개산툰 구월은 두만강 건너 회령 산천 어디서 오득오득 개암이나 씹는 것일까 걸어 내리고 오르는 시장 마당 지난주 건너왔을 북녘 소식은 어느 집 낮술에 비틀거리고 있을까 아는 이 친척도 없이 나는 이 골짝에 갇혔다 장대교회 붉은 십자가가 국경 철책을 바라고 선 뒹겨장 빛깔 어두운 흙길 따라 룡정으로 연길로 나가는 버스는 그치고 택시 기사 둘 버드나무 아래 버드나무 그늘인 양 빈둥거리는 너머 두만강 수척한 물빛을 숨기며 개산툰 구월은 이제 입을 다문다. 박태일의 시집 '연변 나그네 연길 안까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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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9
  • 박태일 시/조양천
    조양천 박태일 마을 이층 숲 참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하양 여우가 존다 배달말 깨우친 누나와 배우는 애토끼 귀엣말 조심조심 걸음 옮긴다 마을 이층 숲 누가 들렀나 누가 한국서도 멀리 부산서 온 너구리 아저씨 여름 물골에 부들처럼 무성한 천자문 배우기 배달말 배우기 책고랑 따라 걷는다 살몃살몃 아침부터 한낮까지 동무들 와도 그만 그만 안 와도 여우는 졸음을 살대발처럼 내렸고 마을 이층 숲 계단 아래로 삼월 고슴도치 찬바람이 구른다 마주 선 소학교와 중학교 사이 전깃줄을 뛰는 참새 떼 양조장 굴뚝은 볼 부어 붉고 높아 집집 지붕 더 눌러 앉힌다 기차역 폐품장 흐린 담길은 부스럭스럭 수수 밭머리로 고개 돌리고 근들이술 두 집만 일찍 등을 밝힌 채 저녁 고양이 기다린다. 박태일의 시집 '연변 나그네 연길 안까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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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9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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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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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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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왕청현에서의 토비숙청- 마희산 비적집단의 괴멸
    ●이강춘 1945년 9월, 마희산은 왕충림, 대청해, 마희귀, 리금희 등과 함께 마을과 삼림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대고 왕청현 춘양향 우권구에서 치안대를 조직하고 10월까지 대오를 400여명으로 확대하였다. 이 때 마희산은 국간경과 단신민을 국민당 목단강시당부 훈련과의 과장인 강학용한테 파견하였다. 강학용은 치안대를 받아들이고 당장에서 마희산을 대장으로, 왕충림을 부대장으로, 국간경을 참모장으로 위임하는 위임장을 써주었다. 1945년 12월, 국민당 동북정진군 사령 정운봉은 또 마희산대오를 국민당 동북정진군으로 개편하였다. 마희산은 자칭 사령이 되고 국간경은 참모장이 되였으며 그 아래에 3개 퇀, 8개 처, 2개 독립영, 1개 특종련, 1개 박격포련, 1개 철도공병기관차대를 두었는데 병력 도합 1,000여명이 되였다. 이와 동시에 녕안, 왕청, 해림 일대의 크고 작은 토비무리들은 모두 마희산의 수하에 귀속 되였는데 5,000여명이나 되였다. 마희산 비적단은 구성된 그 날부터 제멋대로 날치면서 하늘에 사무치는 죄행을 저질렀다. 마희산은 총과 탄알을 얻기 위해 장사인을 데리고 석두하자에 가서 송촌장을 쏴죽이고 권총 1자루와 보총 8자루를 탈취해갔다. 1946년 1월, 마희산 비적단은 기타 비적단과 결탁하여 아미달에서 우리 군 부상병 20명을 수색해냈다. 그중 군관 2명이 있다는 걸 안 마희산은 국간경과 공모한 끝에 사령부에 압송한다는 구실을 대고 도중에 2명 군관을 총살하게 하였다. 그 해 3월에 마희산 비적단은 라자구에서 신화촌에 도망쳐와서 깊이 잠든 조경묵이네 한집식구 세 사람을 쏴 죽였으며 그 이튿날 철퇴할 때 소와 말 84필과 짐마차 30여대를 약탈하고 50여명 군중을 붙잡아갔다. 마희산은 569명 군민을 죽였으며 현금 1억여원(당시 화폐), 입쌀 16만 3,500그람, 소와 말 312필, 닭 1,800여 마리, 이부자리와 옷 등속 1,380여벌을 약탈해갔다. 1946년 2월, 연변경비부대와 왕청보안퇀에서는 목단강군구 산하의 대부분 부대의 배합 하에 마희산 비적단에 대한 공격을 들이댔다. 2월 15일 밤, 아군 주력부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마희산의 사령부가 있는 록도를 포위했다. 여기에 1,000여명이나 되는 토비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동녘이 밝아질 때를 기다려 아군부대는 진공명령을 내렸다. 아군은 20분간의 격전을 벌린 끝에 비적들의 병영을 점령하였으며 전투 중에 정진군 총사령 정운봉을 사로잡았다. 이튿날 아군은 마희산 비적단의 군수창고가 있는 로묘를 포위하고 리금희, 대청해를 두목으로 한 비적 200여명을 생포하였다. 뒤를 이어 비적단이 차지하고 있던 춘양, 락타산, 천교령 등지도 점령하였다. 마희산은 묘령이 함락되자 패잔병 500여명을 이끌고 라자구 일대로 창황히 꽁무니를 빼다가 쌍마가, 서란, 천강 등지를 거쳐 길림에 도망쳐가서는 국민당에 의지해버렸다. 그 후 그 자는 아군에 의해 포로 되였다가 1951년 2월 20일에 녕안에서 총살당했다. 왕경운 비적단의 괴멸 1945년 9월, 왕청현 대흥구에서 위만 경찰 이였던 왕경운과 지주 왕극귀 등이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의로 낙후한 군중 40여명을 농락하여 보안대를 조직하고 왕경운이 대장을 맡았다. 대부는 대흥구에 두었다. 그 해 10월 15일, 일본 특무 요옥령, 왕귀, 상유신 등이 암암리에 국민당 지하건군 조직의 사촉을 받고 일제와 위만주국을 위해 복무하던 자들을 긁어모으고 청년들을 농락하여 보안대에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천교령에 제1퇀, 묘령에 제2퇀, 대흥구에 제3퇀을 두었다. 하마탕, 계관라즈, 묘령 등지의 토비대오가 600여명으로 확대되자 ‘동북 제2정진군 대흥구사령부’를 세우고 대흥구 하북툰(후에 하남으로 옮김)에 사령부를 두었다. 요옥령이 사령으로 되고 아래에 8개 처, 1개 퇀을 두었다. 참모처장에 왕귀, 군수처장에 우도일, 집사처장에 왕흥주, 부관처장에 관춘양이였고 퇀장에 왕경운, 부퇀장에 왕선주, 부관에 정계림이였다. 아래에 3개 영을 두고 영 아래에 11개 련을 두었다. 퇀부는 대흥구에 설치하고 제1영은 묘령에, 제2영은 계관라즈에, 제3영은 하마탕에 주둔시키고 련은 여러 촌에 널려있었다. 산포 1문, 박격포 3문, 평사포 4문, 경 중 기관총 9정, 적탄통 30여개, 보총 600여자루 등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1948년 8월, 토비 부련장 마규 등 10여명이 동양에 가서 백성들의 집을 약탈하다가 김태길 일가 4명을 죽였고 9월에 류록, 염청산이 서양툰에 가서 최창익을 보고 식량을 내라고 하였으나 내지 않으니 당장에서 죽여 버렸다. 10월에 토비영장 류록이 13명을 데리고 아미달에 가서 생아편을 약탈하고 사람을 죽였다. 1946년 1월 13일, 보안대가 영벽, 묘령에서 토비들과 전투하였는데 46명이 전사하였고 2월에 토비들은 친척방문을 온 군중을 팔로군의 밀정이라고 총살하였으며 8월에 후하 상촌에서 툰장 김명창을 붙잡아다 일본 군도로 찔러 죽였다. 이에 왕청보안퇀에서는 대흥구를 공격하였다. 왕경운과 그의 비적단의 제1영, 제2영은 연변경비부대에 귀순하여 재편성되고 제3영은 마희상에게 붙었고 일부분은 길림으로 가 국민당에 붙었다. 요옥령은 우라가전투에서 아군에 포로 되여 처형당했다. 안진유 토비대의 괴멸 1945년 9월 안진유는 특무 장성기, 우헌주, 위만 촌장 류방무와 결탁하여 지방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 하에 라자구 일대에서600여명을 긁어모아 자위대를 조직한 후 대대장이 되고 장성기가 부대대장이 되였다. 대대 아래에 3개 중대를 두었다. 얼마 후 또 준아신을 우두머리로 한 장가점의 토비 100여명을 받아들였다. 1946년 10월, 목단강에 있는 국민당 건군조직에서 연락원 진만기, 주학무를 라자구에 파견하여 ‘자위대’를 받아들이고 ‘국민당 동북정진군 제6사 제16지대 제2려 제5퇀’으로 편성하였으며 안진유를 퇀장으로, 우헌주를 부퇀장으로, 류방무를 부퇀장 겸 구장으로 위임하였다. 이 대오는 700여명으로서 산포 1문, 박격포 3문, 평사포 4문, 경 중 기관총 29정, 적탄통 30여개, 보총 600여자루를 가지고 있었다. 중공왕청현위에서는 이 토비들을 소멸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고 1946년 3월 3일, 보안퇀을 라자구에 보내어 토비들이 미처 손 쓸 새 없이 족쳤다. 영장 김문우가 120여명을 데리고 화전현으로 도망친 외에 나머지는 전부 항복하였다. 안진유는 대세가 기울어진 것을 보고 황급히 류방무 등 비적을 데리고 로흑산으로 도망쳐 오삼호 토비대에 가담했다. 1946년 4월 7일 이른 새벽, 아군이 자는 틈을 타서 안진유는 오삼호의 500명 병력과 7문 대포의 배합 하에 라자구를 돌연 습격하였다. 우리 보안퇀 제1영은 미처 막을 사이 없이 흩어지고 말았으며 소영장은 전투 중에서 희생되고 대부분이 전사하였거나 포로 되였다. 토비들은 마을에 들어가 제멋대로 조선민족을 죽였고 조선민족 여성을 강간하였으며 조선민족의 재산을 약탈하였다. 이날 오전에만 64명 조선민족을 죽였다. 그리고 조선민족 200여명을 붙잡아다가 죽이려 하였으나 친형제처럼 지내던 한족 백성들이 거듭 사정을 해서야 전부 내놓았다. 그 해 4월 14일, 보안퇀은 안진유 토비무리에 맹렬한 진공을 들이대여 라자구를 점령하였다. 기지를 잃어버린 안진유는 일부 토비들을 거느리고 다시 호흑산으로 도망쳤다. 4월 20일, 안진유는 또 오삼호와 결탁하여 라자구를 진공하였다. 아군은 적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잠시 라자구에서 물러나왔다가 다시 우세한 병력으로 라자구의 적을 포위 공격했다. 안진유와 잔여토비들은 또 로흑산으로 도망치려 했다. 아군은 바싹 추격하여 5월 5일, 3호 비행장에서 오삼호를 쏴죽이고 로흑산에서 안진유를 부상(후에 병원에서 죽음)입혔다. 류방무는 토지개혁 때 붙잡혀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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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0-05-10
  • 문화는 민족사회의 추진기와 안전띠
    ●김인섭(칼럼니스트) 국내의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즘즈문하다 싶더니 국외에서 일파만파로 확산되며 세상인심이 바늘방석에서 내려 가시방석에 올라앉은 분위기이다. 이 역병이 몰고오는 인명과 재산 피해가 얼마이고 그 파장이 어느 때까지인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남기는 고통과 후유증 무게는 천문학 단위로 헤아려야 할 것만은 틀림없다. 이 초유 병귀(病鬼)의 횡포에 질겁한 인류는 생존과 생업을 위하여 정보통신 시스템과 지능화 기기들과 각종 최신 과학 기술을 리용하며 아득바득 몸부림을 치고 있다.오늘 각 나라마다 국가동원의 체제를 발동하여 전쟁이 방불한 전역을 벌이고 있으니 언젠가 평온한 일상이 돌아올 것이다.다른 일각에서는 코로나 대응 과정에서 형성된 디지털 삶의 양식들이 인간의 일상 생활에 고착되고 있으며 참신한 삶의 모델들이 륜곽을 명료히 드러내고 있다. 신종코로나 바이러스는 호흡도의 비말 전파와 기타 신체적 접촉이 주되는 감염 원인이기에 마스크 착용을 위시한 각종 조치들이 두루 쓰이고 있지만 외출을 자제하고 대소 모임을 최대한 줄이거나 금지하고 사람간 직접 혹은 가까운 접촉을 피하는 이것이 결정적 대책이다.이리하여 정보통신기술과 지능 기기를 리용하여 원격 환경에서 역병을 관리하고 기존 업무를 대체하는 문화가 시운을 타고 확산되게 되는것이다.이것은 이례적인 상황에서 나타난 홀출(忽出) 현상이지만 현대화 정보통신과 디지털 산업의 발전에 따라 구축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플랫홈에서 실재화되고 현상화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오늘의 코로나 초기에 비상대응책으로 활용되던 이 정보사회의 성과들이 실용 과정에서 놀라운 효률성과 실효성을 나타내어 사람들의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현실이다.물론 아직 상당히 미숙한 초기 단계인 관계로 일정한 혼란도 로출되지만 신속히 익숙해 지고 친숙해 지는 단계에 진입하였다.제4차산업혁명의 산물인 정보통신기술이 원격 비접촉 문화라는 혁신적 변혁을 추진하고 있으며 인류사회는 지능화 시대로 급속히 돌입한다는 명증이다. 미증유의 돌림병 공황이 우리 생활에 대한 충격이 장기화되고 있다.금번 사태에 대처하는데서 원격 비접촉이 필수인 원인으로 재래적 대면식 회의와 달리 화상회의와 원격치료와 같은 교류 수단이 광범히 리용되는 것이 새삼스럽다.코로나바이러스는 나라와 국경 그리고 민족을 불문하고 무차별적으로 치명타를 가하는 포악한 괴질이다.그러므로 그의 예방과 치료에서 근본적 효과를 보려면 독자적 국가가 아닌 모든 나라들과 모든 인류가 손잡고 이겨나가야 하는 것이다.그러므로 역병과 싸움에서 자력갱생이나 각자도생이란 시도는 망녕된 시도란 그 이상이 될 수도 없다.이라하여 금번 코로나의 방역 싸움에서 이뤄지는 국제화 교류도 시류를 따르는 원격 비접촉 방식으로 다양하게 이뤄지면서 디지털 문화를 급속히 확산시키고 있다.바로 코로나와의 전쟁이 인류 시대가 지능화 시대에로 비약하는 또 하나의 도약대가 아닌가 본다. 화제를 돌리고.코로나의 방지와 퇴치를 위하여서는 반드시 물리적 거리를 늘여야 하지만 인간 소통이란 사회적 거리는 더욱 가까이 하여야 실효를 보게 된다.위하여 비대면의 상황이라도 사회 교류는 더 활발하고 소통은 더욱 원활하고 협력 폭도 더 확장해야만 소기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이 모순을 해결하는 만능열쇠가 바로 디지털 수단이다.향후의 인간 생활에 미지의 역병이 불시착으로 습격할 것은 의심할 바 없고 폭우,폭설, 가뭄,홍수,지진 등등 천재지변도 불가피적인 것이다.이러한 재난을 순조롭게 넘으려면 비접촉 생존 방식이 여전히 필요가 아닌 필수로 되게 된다.그러므로 비접촉 문화는 향후의 복잡한 경제,정치,문화 환경에서도 더 폭발적으로 보급해야 한다.오늘 코로나 재난을 헤치고 나가는 조선족 사회의 모습을 보면 자신의 문화력을 바탕으로 지능화 도구의 리용 효과를 가배로 늘리고 월등한 효과를 올리고 있다.다시 말하면 민족 사회의 근저에는 우리의 선진 문화가 튼튼한 저력이 된다는 사실이다.그렇다면 조선족은 지능화 시대에 있어서 사회의 재난 및 평온 여부를 불문하고 생존과 발전의 천혜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미증유의 역병이 원격진료, 화상회의, 원격교육, 공장 무인자동화, 물류 배송 체계, 재택근무 같은 디지털 문화를 조기 정착시키는 기폭제이자 신호탄이 되고 있다.오늘의 코로나 재앙의 고비를 우리는 문화력 탄력을 받아 무난히 넘을 수 있다면 향후 비접촉경제 시대에도 문화가 역시 강대한 생산력으로 승화되어 막대한 작용을 발휘할 것이다.우리가 이 새로운 년대에 민족문화로 더욱 큰 민족 활무대를 열어가자고 한다면 결코 '열에 들뜬 헛소리'가 아닌 현실적 가능서을 가지고 있다. 바야흐로 도래하는 비접촉문화와 비대면경제가 흥기하는 이 뉴노멀(新常态) 시대에 이중언어를 위시한 민족문화는 혼란기의 생존 안전띠로, 안정기의 발전 추진기로 되고 남음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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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20-05-07
  • 한국남성과 결혼한 조선족 이주 여성들의 삶의 여정
    ● 방미화 현재 한국사회는 국제결혼의 시대를 맞이하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은 여러 가지 국제적 환경 및 한국의 경제 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1980년대,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에 따라 산업부문 특히 중소기업의 생산 관련 직의 인력부족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남과 동시에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에 따라, 그리고 1987년 이후의 노사분규의 급격한 증가로 인해 노동자의 임금수준은 급상승했다. 이와 같은 경제성장과정에서 1980년대 중반 한국내에서는 ‘3D’직종의 일을 기피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였고 이는 아시아지역 개발도상국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 특히 여성 이주 노동자의 유입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한국노동시장의 소비형 서비스 산업의 증가추세와 한국사회에서의 성차별문화, 가족중심주의 인식은 이 부문에서 선호하는 여성노동자의 인력난을 초래하였다. 거기에 덧붙여 한국여성의 결혼기피 및 만혼, 배우자 선택의 차별화, 남성의 경제력약화, 남성성비의 불균형 등등 사회적 요인으로 말미암아 한국 여성배우자와의 결혼이 힘든 한국남성들은 국제결혼으로 그 모순을 해결하려 하였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소 하에 아시아 여러 국가 및 기타 발전도상국의 여성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한국에 입국하게 되며, 정상적인 경로를 통한 한국으로의 노동이주가 불가능한 여성들은 이주의 수단으로 국제결혼, ‘위장결혼’을 선택하여 한국으로 입국하게 된다. 조선족여성들도 당시의 국제적 환경의 흐름 속에서 한국남성과의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으로 입국하게 되였으며 현재 한국의 국제결혼 여성 가운데서 가장 많은 수치를 차지한다. 조선족여성들이 국제결혼의 방식으로 한국으로 입국하게 된 것은 또한 국제결혼행사에 대한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 및 지원과 갈라놓을 수 없다. 한국여성들과 결혼할 수 없는 한국남성들에게 조선족여성과의 결혼은 하나의 대안으로 여겨졌으며 한국정부는 또 그들이 결혼과 관련된 행사에 적극 개입하거나 지원하는 것 외에 노동력이주는 엄격하게 제한하면서 가장 손쉽고 유리한 입국통로로서 결혼을 통한 이주를 허용하고 지원하는 이주정책을 시행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족여성들이 ‘결혼’이라는 이주방식을 선택하게 되는 것은 개혁개방이라는 시대 속에서 부풀어오르는 부에 대한 욕망, 자녀부양 등 개인적 선택, 경제적으로 무능력하여 한국여성과의 결혼이 어려워진 남성들의 수요와 이를 보장해주는 이주정책 그리고 상업화된 결혼시장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남성과의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으로 입국한 조선족여성들의 삶의 여정은 어떠한가. 물론 한국남성과 결혼한 여성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통틀어 살펴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으로 입국한 조선족여성들도 학력, 직업 등에 따라 계층적으로 분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한국남성과 결혼하여 한국에서 살아갔던 조선족여성들의 삶의 여정을 부분적으로나마 살펴보는 것은 이주여성의 능동적인 삶을 드러내고 향후 발전 방향을 가늠함에 있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된다. 우선, 한국으로 이주하기 이전 조선족여성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 살펴본다면, 개혁개방 이전 조선족여성들의 생활과 가치관의 변화를 세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 단계는 19세기 중엽 조선반도의 ‘조선인’들이 대량으로 중국에 이주하면서부터 1949년 새중국 창립 이전까지이고 둘째 단계는, 새 중국 창립 이후부터 문화대혁명 이전까지이고 세 번째 단계는 1966년-1976년 사이의 문화대혁명 기간이다. 먼저, 동북 이주 초기에 봉건적인 ‘삼강오상(三綱五常)’, ‘삼종사덕(三從四德)’의 고정관념을 그대로 지니고 온 조선족여성들은 의식주행용 일체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어른, 남편, 자식을 위하며 오직 가도만을 위하여 노력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봉사하고 희생하는 것을 유일한 미덕으로 간주하였으며 또한 그러한 의식이 몸에 배인 여성들이였다. 그 후, 1919년 신문화운동과 서방의 자유, 평등, 박애 사상의 전파는 민족의식교육과 구국구민(救國救民)운동 등 반일계몽운동의 중요한 사상적 배경이 되였을 뿐만 아니라 장시기 동안 봉건유교사상의 속박하에 있던 조선족여성들로 하여금 ‘남존여비’, ‘삼강오상’, ‘삼종사덕’ 등 봉건륜리도덕규범을 타파하고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며 자신의 독립적인 인격을 갖추도록 추동하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대부분 조선족여성들은 가부장적인 문화 속에서 현처량모를 인생의 최종가치로 간주하며 순종적이고 페쇄적인 삶을 살았다. 다음으로, 새중국 창립 이후 조선족여성들의 사회적 지위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여성들의 가치관 판단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중국은 전반 여성의 노동계급화를 통하여 생산수단을 사회화하였고 가정의 사회화, 집단화를 정책적으로 추진시켜나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족여성들은 남성들과 똑같이 사회에 나가서 생산로동에 참가하였다. 이렇게 본격적인 사회진출을 통하여 조선족여성들은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 지위의 향상은 얻어왔지만 동시에 사회와 가정에서 양립해야 하는 이중적 역할의 부담도 상당히 컸다. 도시나 농촌을 막론하고 여전히 남자중심의 가정생활로서 조선족여성들은 모든 가사노동을 전적으로 부담하면서 사회생산활동에도 참가해야 하였기에 사회와 가정의 이중적 부담으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우 피로하고 힘겨웠다. 그 다음으로, ‘문화대혁명’의 10여 년간 중국의 조선족여성들은 가정생활과 혼인생활도 의식적으로 정치와 연관시키면서 정치운동 참여에서 자기의 사회적 지위, 정치적 가치를 찾으려 하였다. 한마디로 개혁개방 이전 조선족사회에서 여성들은 우선은 가족의 생존이라는 중임을 짊어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여성들이였을 뿐만 아니라 부지런하고 열정적이며 삶에 있어서의 무한한 잠재력을 갖춘 여성들이였으며 또한 변화에 대한 강한 적응력과 생활력, 포용력의 소유자들이였다.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여성들은 상업에 종사하게 되였으며 도시, 해외로 이동하여 경제활동에 종사함으로써 경제적 지위가 향상시킴과 동시에 점차 과거 가정의 현처양모, 사회에서의 종속적 지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모순체로부터 탈리되어 자존, 자주, 자강의 의식을 가지게 되였다. 따라서 혼인관에 있어서도 결혼을 평생 결합으로 간주하고 혼인에 만족하지 않으면서도 이혼하는 것을 명예롭지 못한 일로 여기면서 혼인을 파괴하지 않으려던 의식으로부터 국제결혼도 능히 허용하고 또 출국의 수단으로 국제결혼도 가히 이용하는 혼인의식을 형성하였다. 국제결혼에 나타나는 ‘가짜이혼’ 혹은 ‘위장결혼’ 현상은 그들의 정조관념이 륜리도덕보다 경제를 우선시하는 실용주의에로 변화되였음을 말해준다. 어찌되였든간에 중요한 것은 일부 조선족여성들이 그들이 가족 부양의 의무 때문에 글로벌 차원의 결혼시장으로 편입하기는 했으나 그러한 의무 못지않게 그들 자신의 계층상승이나 새로운 삶에 대한 욕망도 그들이 국제결혼을 선택한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체제의 급격한 변화에 신속히 적응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과감히 과거에 도전하면서 새로운 선택을 하는 적극적 행위자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으로 입국한 후 그들의 삶은 순탄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결혼이란 서로 다른 가정에서 성장한 성인 남녀가 만족스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한 적응과정이기 때문이다. 하기에 어려운 점이 하나도 없는 완벽한 결혼생활을 영위하기란 매우 어렵다. 더욱이 서로 다른 력사적, 문화적 배경을 가진 두 남녀가 맺는 국제결혼은 결혼하는 순간부터 많은 모순들을 내재하고 있다. 조선족여성들의 국제결혼 가정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같은 민족’이라는 점에서 더욱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된다. 예하면, 한중관련 정치적인 뉴스가 나올 경우 남편은 중국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면서 조선족 안해를 ‘무시’하고 ‘비하’한다. ‘같은 민족’이고 ‘같은 가족’이기 때문에 가족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조선족여성들은 이런 남편의 태도에 ‘정말 실망’하게 되며, 이런 부부간의 생활을 체험하면서 조선족여성들은 “내가 왜 한국에 시집왔는지”, “나는 누구인지”에 대한 고민을 가진다고 한다. 국가의 이해관계에 있어서 의견이 다른 경우 한국남성은 조선족여성을 아내라고 생각하지 않고 ‘중국인’이라고 인식하면서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비난한다. 국가관에 있어서 한국남성들은 조선족여성들이 무조건 남성의 국가관을 순응해야 한다는 가부장적 태도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이 한국남성들은 조선족여성들이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더 순종적이고 자신의 말이면 무조건 들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그들은 결혼생활을 통해 사회주의국가인 중국에서의 남녀관계는 한국보다 덜 ‘전통적’이며 상대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조선족여성들은 수십 년 동안 중국이라는 문화권 속에서 사회발전의 흐름에 따라 점차 조선반도의 여성과는 다른, 중국의 한족과도 상이한 조선족특유의 문화를 창조하였고 이중성격의 여성상으로 발전하였다. 그들은 외유내강의 기질과 강한 생활력, 적응력, 포용력의 소유자로서 사업에서는 자신이 자주적이고 남성들과 겨룰 수 있는 강자로 되려고 하며 생활에서도 자신의 생활적 여유와 향수도 누릴 수 있는 삶을 바란다. 하지만 한국 가족구성원들은 조선족여성들의 이러한 고유한 문화특성을 무시한 채 일방적인 적응만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한국에서의 적응기에 있어서 남편으로부터 '소외', 시부모에 대한 '복종', 동서들로부터 받은 '무시'경험, 한국인으로부터 받은 차별적 경험을 하고 있으며, 그들과의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삶의 방식을 재형성함과 동시에 민족정체성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즉 조선족여성들은 다양한 가족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을 버리고 한국 사회에 완전히 적응하기보다는 적절하게 회피하거나 적당히 반항하는 등 자신만의 방어기제와 삶의 전략을 형성하게 된다. 예하면, 중국어구사능력으로 자신만의 우월감을 형성하며 ‘중국인’ 정체성을 형성하기도 하고 또 완전히 ‘한국인’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불가능함을 인식하고 조선족단체에 귀속되여 ‘중국조선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한국에서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사회적 활동에 참여하는 여성들도 있다. 요컨대, 한국남성과 결혼한 국제결혼 이주 여성들은 새로운 미래와 비젼을 위해 국제결혼 이주를 선택한 능동적인 행위주체들로서 그들은 계층상승 혹은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과 강한 생활력의 소유자들로서 남편과 가족 및 한국 사회의 차별과 편견에 맞서, 완전히 복종하지 않으면서 또 완전히 파괴하지 않는 유연성과 포용력으로 스스로의 삶의 전략을 구사하면서 한국사회에서 가정을 영위해나갔으며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기에 다양한 사회적 활동을 전개하면서 조선족여성만의 독특한 삶의 단면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조선족 국제결혼 이주 여성들의 삶의 여정은 세계 각국 이주 여성들의 초국적인 경험과 삶을 조명하고 향후 이주 여성들의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 좋은 일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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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20-05-06
  • 마중물
    ●김경화(재중동포작가) 얼마 전, 시내로 갔다가 어느 한정식 집 앞에서 녹이 쓴 뽐프(펌프)를 보게 되었다. 공능을 상실한 뽐프는 불그스름한 녹을 온몸 가득 바른 채 우두커니 서서 식당 앞에서 하나의 풍경으로, 누군가의 향수를 자극하는 관상용으로 돼있었다. 녹 쓴 뽐프를 마주하고 순간, 내 마음 밑바닥에서 무엇인가 울컥하는걸 어쩔 수 없었다. 고향을 수천리 등진 한국땅에서 마주한 녹슨 뽐프는 시공을 가로질러 아련한 향수를 자극했다. 어린 시절, 물 한바가지 부어넣으면 이내 콸콸 시원한 맑은 물을 올려주던 시골 고향집뽐프가 생각났다. 상수도가 없던 그때 그 시절의 사람들에게 뽐프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마시고 쓰는 가정용에 필요한 모든 물이 뽐프를 통해 얻어졌지를 않았던가. 알뜰한 집에서는 뽐프에 뼁기칠도 자주 해주고, 먼지 들어가지 말라고 손수건만큼한 천도 씌워놓았었다. 한참을 녹슨 뽐프를 마주하고 우두커니 바라보며 나는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한국땅에서 재한동포로 불리며, 현대판 이산가족을 앓고 있는 우리는, 누군가의 마중물일수는 없습니까. 저 녹슨 뽐프에 물 한바가지 부어넣고 지레대질을 하여 맑은 물을 콸콸 나오게 하듯,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수는 없습니까 라고. 언제부터인가 시작된 우리 중국조선족의 한국행은 이제 수십만이라는 수자를 기록하고 있다. 중국에서보다는 좀 더 많은 돈을 벌수 있다는 것이 그래서 좀 더 현대적이고 윤택한 삶을 살수 있다는 것이 어제도, 오늘도, 중국 조선족이 한국진출을 하는 가장 주되는 목적이다. 돈을 벌어 잘사는 것, 얼마나 밝고 긍정적인 일인가, 하지만, 이 밝고 긍정적인 화면 뒤에는 수많은 어둠이 드리워져있는것 또한 현실이다. 오랫동안 떨어져있는 관계로 부부사이가 소원해지고, 불신이 깊어지고, 수많은 가정이 해체되거나, 해체위기에 서있다. 중국에 있는 가족은 한국에 있는 가족이 돈을 적게 보낸다고 원망하고 전화가 자주 안온다고 원망한다. 반면 한국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돈을 벌고 있는 동포들은 스트레스와 고된 일에 시달리는 자기들을 가족이 이해하여주지 못하고 자기들의 고생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불만한다. 이런 것들이 쌓이다보면 전화상으로도 좋은 말들이 오가지 못하고 점차 서로가 소원해질 수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아이들을 옆에서 돌보지 못하는 부모는 그저 미안한 마음에 금전으로 모든 것을 보상하려 하고, 아이는 부모가 돈 이외에 해준게 머가 있냐고 소리 지른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부를 포기할 수 없다. 돈이 대체 뭐냐고 하지만, 돈이 없으면 생존조차 할 수 없는게 현실이 아니던가. 결국, 우리는 이것도 저것도 확실하지 못한 채, 모순 속에서 서로를 원망하고 불신하고, 상처만 입어가면서 오늘도 내일도 불안하고 위태위태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중국조선족의 뼈아픈 삶의 현실이다. 나는 조선족의 한국진출을 긍정적으로 본다. 마침내 우리는 한국행을 통하여 부를 얻었고, 많은 것을 배웠고, 소중한 경험을 쌓았고, 내 고향에서는 미처 몰랐던, 많은 소중한 것들을 새삼 깨우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나 역시 너무나도 고생스럽고 힘들어서 다시 떠올리기조차 싫을 정도로 한국생활이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얻은 것이 더 많은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가정들은 지금 위기에 직면해있는것 또한 현실이다. 가족이란 한집에서 한솥밥을 먹고 함께 잠을 자면서 알콩달콩 부대끼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 서로 헤여져있으니 아무래도 라는 말,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말, 참으로 말하고 들을수록 맥만 빠지는 소용없는 말들만 주절주절 어제도 오늘도 되풀이하고 있다. 깊은 한숨을 쉬고 맥 빠진 탄식을 한다. 어쩌면 우리는 뽐프가 아닐지 모르겠다. 누군가 나라는 뽐프에 부어줄 마중물을 바라고있는건 아닐지 모르겠다. 한꺼번에 충분한 량의 마중물을 받았을때에야만 비로소 작동하는 저 뽐프처럼, 조금씩 찔끔찔끔 넣어서도 안 되고 한꺼번에 충분한 량을 넣어주는것과 동시에 지렛대를 반복적으로 작동시켜야만 밑에 있는 물을 끌어올릴 수가 있는 뽐프처럼, 물 넣는 것만 생각하고 지레대질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되고 무작정 지레대질만 힘차게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닌, 마중물의 량과 지레대질의 빈도와 강약, 모든 것이 맞물릴 때 비로소 자기 기능을 발휘하여 저 땅 밑에서 물을 끌어올려주는 뽐프가 아닐까 모르겠다. 누군가 마중물을 넣어주고 지레대질을 해줘서 보기만 해도 시원해질 것 같은 맑은 물을 콸콸 뿜어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괴로운 뽐프가 아닌지 모르겠다. 마중물을 기다리는 뽐프이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마중물이 되는 건 어떨까. 저 땅속 맑은 물을 끌어내는 뽐프의 지혜를 다 배우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뽐프와 마중물의 그 끈끈한 애정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현실을 바로 보고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인지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뜨거운 가슴을 열어 내 사랑하는 사람과 내 가족과, 내가 뜨거운 눈물을 가슴으로 삼키며 지키고자 떠났던 것들을, 지키고자 떠나보내야 했던 그 사람을, 그 사랑하는 것들을, 그 목마른 애정과 그리움들을, 그 눈물겨운 것들을 인내해야 하는 그 이유를 한번쯤 다시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냉정하고 차가운 머리로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과연 무엇인지, 내게 가장 소중했던 건 과연 무엇이였는지, 지금 나는 무엇을 지키고, 또 무엇을 위해 마음을 다잡고 눈물을 삼켜야 하는지 한번쯤 생각해보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녹슨 모습으로 의연히 서서 풍경이 되고 누군가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고 마음을 울려 나를 되돌아보게 해준 뽐프를 다시 바라본다. 햇빛에 반사된 녹이 진 붉게 빛난다. 나는 한발 가까이 다가가 손가락을 내밀어 녹을 문질러본다. 깔깔한 감촉이 손가락을 타고 온몸 가득 스며든다. 햇빛이 찬연하다. 녹슨 뽐프가 햇빛아래 반짝반짝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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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01
  • 윤동주를 기리는 사람들
    ●김 혁(재중동포소설가) 윤동주 연구의 결정판 "윤동주 평전"의 저자 한국 소설가이자 사학가인 송우혜.宋友惠와 윤동주의 릿쿄대학 후배이자 연구자인 야나기하라가 만난 자리에 나의 인물전 "윤동주"가 등장했다. 송우혜는 1947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대 간호학과에 입학하여 중퇴하고 한신대 신학과에 편입하여 졸업했다. 이화여대 대학원 사학과(한국사 전공)에서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1982년 한국문학 신인상, 1984년 삼성문예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눈이 큰 씨름꾼 이야기≫, 장편소설 ≪남도행≫, ≪저울과 칼≫, ≪투명한 숲≫, ≪하얀 새≫, 산문집 ≪서투른 자가 쏘는 활이 무섭다≫ 등이 있고, 평전으로 ≪윤동주 평전≫, ≪송창근 평전≫ 등이 있다. 또 연변지역 동포들의 삶 등 다양한 소재를 통해 우리의 시대정신을 탐구하는 『스페인 춤을 추는 남자』(1998) 등이 있다. 한국사 관련 논고와 학술논문으로는 「청산리전투와 홍범도 장군」, 「북간도 대한국민회의 조직형태에 관한 연구」, 「대한독립선언서(세칭 무오독립선언서)의 실체」,「이은. 李垠의 정략결혼연구─언론보도 (1907~1920)를 중심으로」(석사학위론문) 등이 있다. 역사적 소재 및 당대의 사회상을 통해 인간의 삶과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는 평을 받고 있다. 각종 언론매체에서 예리하게 시사문제를 논하는 칼럼니스트로서도 이름이 높다. 송우혜가 되살려낸 윤동주의 순결한 초상 『윤동주 평전』은 다양한 주변 인물들과 함께 살아간 다채로운 삶의 자취, 북간도의 역사와 당시의 시대상황, 일경의 극비취조문서, 일본 경도재판소의 판결문 등을 비롯한 각종 자료들에 대한 예리하고 집요한 추적과 분석을 통해 민족시인 윤동주의 삶과 시를 정리한다. 야나기하라 야스코.楊原泰子는 1946년생으로 릿쿄 대학 문학부 사학과 졸업했다. 야나기하라 씨는 릿쿄대학 사학과 졸업생으로 윤동주 시인의 후배가 된다. 20여 년 전 시인 이라바키 노리코의 에세이에서 '릿쿄대학에 유학했던 시인 윤동주'에 대한 문장을 읽고 윤동주 시인의 발자취를 좇기 시작했다. 시인이 일본에 남긴 발자취를 조사하고 체포시 압수당한 장서 찾기를 계속하고 있다. 2008년 릿쿄대 졸업생, 교직원과 함께 ‘윤동주 시인을 기념하는 릿쿄 모임’을 설립하고, 시인의 기일인 2월 16일 전후로 ‘윤동주 시인과 함께’를 매년 개최해 왔다. 윤동주가 숨진 곳에서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기억하고 미래지향적인 자세를 보여준 이들의 행보는 우리에게 많은 귀감으로 되고 있다. 기라성 같은 윤동주 연구의 장인들 앞에서 필자의 작은 책자가 초라할 뿐이다. 격동의 지난 세기, 북간도 용정에서 태어나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자취를 고루 남긴 윤동주는 아시아 문인들중 유일하게 한국, 중국, 일본에 모두 기림비가 세워진 시인이다. 이에 연구가들은 "세계가 서로 다른 가치관으로 충돌하고 있는 오늘날 윤동주는 오욕의 역사를 씻고 한, 중, 일의 새로운 유대를 잇는 문화사자의 역할을 은연중 하고 있다"고 정평한다. 시인이 그 고난과 격변이 세월에 쓴 시는 시대와 국경, 언어의 벽을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다. 시 속에 담긴 하늘과 바람과 별의 의경.意境은 중국의 "북간도",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넘어 같은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아시아 사람의 생각을 대변한다고도 할 수 있다. 윤동주의 고향 용정에서 십 수 연간 오롯이 시인에 대한 연구와 기림사업에 몰두 해온 필자로서는 이념과 역사의 벽을 넘어 한. 중. 일에서의 윤동주 연구가 더 활발하게, 더 협력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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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01
  • [김정룡 칼럼] 변소간보다 더 많은 사장님, 회장님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도시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전인 1980년대까지 중국 도시골목마다 공용변소가 많았고 아침이면 줄 서 순번을 기다리던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정확한 통계는 모르겠으나 당시 연길시에 1천여 소에 달하는 공용변소가 있었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정확한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무튼 공용변소가 그만큼 많았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중국 개혁개방 직후인 1980년대 중후반부터 경제 분야에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남에 따라 독립적인 경제활동이 법적 인가를 받은 00꿍스(公司)가 자고 깨면 생겨날 정도로 우후죽순마냥 많이 나타났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당시 다수 꿍스(公司)들을 내실도 실적도 없고 하여 허수아비라는 뜻이 담긴 피바오꿍스(皮包公司)라 불렀고 꿍스(公司)의 법인(法人) 경리(經理)들을 빗대어 “경리가 변소간보다 더 많다.”고 비꼬았다. 당시 피바오꿍스(皮包公司) 중국식 경리들을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사장님들이다. 그러니까 바꿔 말하자면 “사장님이 변소간보다 더 많았다”는 말이 성립된다. 중국에선 독립적인 경제활동을 하는 업체의 법인을 경리 혹은 규모가 크면 총경리라 부르고 규모가 굉장히 작은 업체 혹은 구멍가게의 법적등록인은 보편적으로 ‘라오반(老板)’이라 부르고 개별적으로 ‘짱꾸이(掌櫃)’라 부른다. 한국은 규모가 크든 작든 하다못해 부부가 운영하거나 심지어 혼자 운영하는 구멍가게 책임자조차도 전부 사장이라 부른다. 거기에 한국식 특유 경어를 붙여 ‘사장님’이라 부른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선 길가에서 낯선 사람과 대화할 경우 상대를 높여 사부(師傅)라 부르는데 비해 한국에선 이럴 경우에도 상대를 ‘사장님’이라 한다. 한국엔 ‘사장님’이 어떻게나 많은지 인파가 북적거리는 동대문상가에서 “감사장!”라고 부르면 열에 다섯이 머리를 돌린다고 한다. 이 경우 김씨가 많다는 말이 되겠지만 그만큼 ‘사장님’의 호칭이 남발되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중국과 한국에서 사장이란 호칭이 서로 다르게 사용될 뿐만 아니라 회장이란 호칭도 사용법이 엄청 다르다. 중국에선 계열사를 갖고 있는 대기업 오너를 ‘동사장(董事長)’이라 부르는데 비해 한국에선 ‘회장님’이라 부른다. 그리고 중국에서 말하는 주임(主任)이 한국에선 회장이 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이를테면 시골마을이나 도시 부녀회 책임자를 중국에선 ‘주임’이라 부르고 한국에선 ‘회장’이라 부른다. 정부기구도 중국에서는 인대(人大) 책임자를 중앙기구는 위원장이라 부르고 성급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주임이라 부른다. 화교사무실, 외사사무실 등등의 많은 기구의 책임자도 주임이라 부르는데 비해 한국에선 정부기구의 모든 직책에 거의 다 ‘장(長)’자를 붙이는 호칭이 보편적이다. 전형적인 실례로서 중국에선 가도(街道) 책임자를 주임이라 부르는데 비해 한국에선 ‘장(長)’자를 붙여 ‘동장(洞長)’이라 부른다. 중국과 한국에서 사장과 회장이란 호칭이 왜 이토록 다르게 사용되고 있을까? 그 이유를 알려면 먼저 사장이란 ‘사(社)’의 역사적인 의미부터 살펴보고 또 회장이란 말의 유래를 알아야 한다. <설문해자>에 의하면 ‘社’는 “흙을 뫼어놓아 사가 되었다(堆土爲社).”고 한다. 그런데 아무 사람이 아무 곳에서 아무렇게나 흙을 뫼어놓으면 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 개 부족이 조상을 기리기 위한 징표로 흙을 쌓아놓았고 그 징표를 중심으로, 즉 사(社)를 중심으로 족장이 백성을 거느리고 생산 활동을 진행하고 제사를 지내며 종교 활동을 하면서 삶을 영위한다. 사회란 이 사(社)에 모여서 삶을 영위한다는 뜻에서 유래된 말이다. ‘사(社)’란 뜻이 워낙 이렇듯 거창하기에 중국역사엔 ‘사장(社長)’이란 말이 없었다. 지금 한국에서 남발로 사용하고 있는 사장이란 호칭은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다. 일본이 동양 삼국에서 서양의 근대화를 따라 배우는 선두에 섰고 많은 서양의 어휘들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지어낸 것들, 이를테면 과학, 화학, 물리, 지식인 등등이 일본이 지어낸 어휘들이 중국에 수출되었고 따라서 한반도에도 전해졌던 것이다. 그 중에 사장이란 호칭도 포함되어 있다. 변소를 화장실(けしょうしつ:化粧室)이라 하는 용어도 일본인이 지어낸 어휘이다. 일본이 사장이란 말을 지어낸 것은 중국식 번역인 서양식 꿍스(公司)를 일본인은 중국역사문화에 결부시킨 결과였다. 즉 사람이 모여 기도 올리며 종교 활동을 진행하는 곳을 ‘신사(神社)’라 부르는 것처럼 사람이 모여 경제활동을 벌이는 업체를 ‘회사(會社)’라 지어내고 그 책임자를 사장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일본인은 중국역사문화적인 용어인 사회를 거꾸로 하여 회사란 용어를 지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즉 사회를 거꾸로 하면 회사가 되는데 사회는 ‘사(社)’가 포인트이며 사를 중심으로 모인다는 뜻이라면 회사는 ‘회(會)’가 포인트로서 사람이 모여 ‘사(社)’를 꾸린다는 의미이다. 일본인은 이 사람이 모이는 것을 여러 포기라는 표현을 빌려 ‘주식회사(かぶしきかいしや(株式會社)’라고 불렀다. 사장이란 호칭은 본래 이렇듯 주식회사 대표자를 부르는데서 유래되었는데 지금 한국에선 구멍가게 주인, 길 가는 아저씨한테도 사장님이라 남발하고 있다. 회장이란 말도 중국역사에선 그다지 사용되지 않는 어휘인데 일본이 동양에서는 매우 낯설었던 서양의 상공회 같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조직의 책임자를 회장, 또 NGO단체 같은 사람이 많이 모여 시민 활동하는 조직의 책임자를 역시 회장이라 지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과 한국은 일본의 영향에 의해 사장, 회장이란 호칭을 도입하였으나 중국에선 그다지 사용되지 않고 있는데 반해 한국에선 진짜 변소간보다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를테면 중국에선 큰가마밥 제도가 실시되던 인민공사 책임자를 사장이라 불렀고 당시 사장이 관할하는 인구는 적어도 수천 명이었다. 또 신문사, 출판사 책임자를 사장이라 부르기는 하였으나 사장보다 편집과 편제(編制)를 총괄한다는 의미로서 총편(總編)이란 호칭을 더 선호하였던 것이다. 신해혁명 전 역사에 없었고 겨우 수십 년 전의 일이다. 그렇다면 왜 중국은 사장과 회장 호칭을 적게 사용하는데 비해 한국에선 남발로 사용하고 있을까? 첫째 한국은 중국보다 일본문화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둘째 한국인은 멋을 추구하는 겉치레 문화를 즐기기 때문에 아무데나 무작정 ‘長’을 붙이기를 굉장히 선호한다. 셋째 양반과 상놈의 문화에 한이 맺혔던 한국인은 일단 ‘長’을 붙이면 출세의 의미가 다분하기에 사장, 회장을 남발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자유 민주사회에 진입함에 따라 각종 비영리단체 등록이 쉬워지고 따라서 그 단체들을 협회라 부르는데서 회장이란 호칭이 남발되고 있는 것이다. 재한조선족사회는 상기 한국사회 물에 듬뿍 젖어 역시 중국에서 사용하지 않았던 사장, 회장 호칭을 남발하고 있다. 조선족이 한국에서 업체를 꾸려봤자 무역업체나 제조업체는 매우 적고 또 대규모의 음식점이 없고 절대다수가 소규모의 음식점이나 식품상점 등 구멍가게를 운영하면서 명함에 사장이라 박고 공중장소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스스로 ‘사장’이라 말한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한국인은 보편적으로 스스로에게 사장을 붙이지 않고 “00를 운영하고 있는 00입니다.”라고 겸손하게 자아소개 한다. 그리고 한국식을 따라 배워 영양가 없는 협회들을 잔뜩 만들어 놓고 실체도 내실도 없이 회장님이랍시고 어깨에 힘주고 남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재한조선족사회 다수 사장님, 회장님들은 중국에선 상상도 못할 일들, 즉 한국에서 ‘長’을 스스로 붙이고 아Q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정신건강에 유리하므로 무조건 나쁜 일이라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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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01
  • [기고] 북한영화와 배우들
    ▲영화 '꽃파는 처녀' 꽃분이역을 맡았던 북한스타 홍영희 중국에서 어릴 적에 북한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예를 들면 꽃파는 처녀, 꽃피는 마을 등의 영화가 인상적이었다. 영화 속 많은 이야기들은 다 잊혔지만, 배우들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아마도 영화 속 처녀들의 예쁘고, 용감하며, 터프한 인상이 깊었기 때문인가 싶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즐겨 보고 있으나 북한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사람은 매우 적다. 북한은 매년 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촬영하고 있으며 평양영화성 역시 비교적 규모가 큰 영화타운이다. 북한에서는 영화나 드라마를 촬영할 때는 강력한 스타 캐스팅도, 첨단 장비도 없고 설비도 단순하다. 그러나 배우나 스태프나 굉장히 열심히 하고 있다. 설비가 단순하고 특수효과도 별로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북한이 좋은 영화를 출품 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전에 많은 영화들을 특수효과도 없고 첨단 기술 설비도 없는 환경에서 촬영했다. 사람들은 북한 배우들은 모두 소박해서 주연배우라고 해도 스타다운 구석이 전혀 없다고 말한다. 또한 북한 연예계는 노이즈 마케팅도 비즈니스 포장도 숨은 룰도 없어 순수한 느낌을 준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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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5
  • [유래상식] 찰떡에 깃든 이야기
    ‘찰떡’이란 찹쌀로 만든 떡을 말하는데 일명 ‘인절미’라고도 합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전통음식으로 불리는 ‘찰떡’의 유래에는 이런 이야기가 담겨있답니다. 옛날 공산성이라고 부르는 곳의 어느 한 시골에 임씨 성을 가진 마음씨 고운 한 농군이 아들 삼형제와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연속 3년째 농사가 되지 않아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정도였습니다. 그해 겨울 임씨는 셋째 며느리를 맞아들였는데 셋째 며느리는 인물도 절색이지만 음식을 만드는 솜씨도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비록 산나물로 끼니를 에우더라도 그 맛이 때마다 다르고 구수했습니다. 하루는 가마 목에 앉은 셋째 며느리가 기장쌀로 밥을 짓게 되였는데 밥이 다 되였는데도 밥을 풀 념을 못했습니다. 죽밥이 되면서 한 덩어리가 되여 버린 것입니다. 셋째 며느리는 그런대로 식구들에게 그 떡이 된 밥을 골고루 나누어주었습니다. “덩어리가 된 죽밥이라도 식기 전에 어서 잡수세요.” “음, 어서 먹고 밭으로 나가자구나.” 시아버지 임씨가 이렇게 말하면서 수저를 먼저 들자 모두 따라들었습니다. 그날 아침 비록 모두 배부르게는 먹지 못했지만 그런대로 산으로 일하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다른 날에 비하여 늦게까지 일했는데도 모두 배고파하는 눈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웬 일일가? 셋째 며느리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찰밥덩어리를 먹은 것이 원인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튿날 아침에 밥을 지을 때 의식적으로 기장밥을 뭉개서 떡을 만들어 식구들에게 대접했습니다. 그날도 역시 저녁 늦게까지 일했지만 누구 하나 배가 고프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비결을 알아차린 셋째 며느리는 혼자 빙그레 웃었습니다. 바로 그 떡이 된 찰밥덩어리를 먹은 것이 효과를 본 것이었습니다. 그해 임 씨네는 셋째 며느리의 제의 하에 기장쌀, 차수수, 찰옥수수 등을 많이 심었는데 생각 밖으로 대풍년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셋째 며느리는 기장쌀을 씻어 한가마를 찐 후 그것을 퍼내 절구에 넣고는 남편더러 찧게 했습니다. 잠시 후 저녁상이 갖추어졌습니다. 셋째 며느리는 잘 찧어진 기장쌀떡을 칼로 저미여 밥상에 올려놓고 또 어느새 만들었는지 콩가루를 사발에 담아 올려놓으면서 말했습니다. “떡이 목에 붙지 않게 이 구수한 콩고물을 묻혀 잡수세요.” “아니, 이것이 별맛이로구나.” 떡 한 덩이를 맛보던 임씨가 엄지를 내들었습니다. “찰 붙이로 만든 떡이라 이것을 찰떡이라고 하면 되겠다.” 이때로부터 ‘찰떡’이라는 이름이 생겨나게 되였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시일이 지난 후의 일입니다. 당시 조정에 반란이 일어나서 인조임금님이 공주의 공산성으로 피난을 오게 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임씨는 아침 일찍 셋째 며느리더러 찰떡을 하라고 하고는 그것을 임금님께 바쳤습니다. 난생처음 먹어보는 쫄깃쫄깃하면서도 구수한 음식의 맛에 놀란 임금님이 떡의 이름을 묻자 병졸은 임씨 성을 가진 백성이 만들어왔다고 아뢰었습니다. “허허… 임서방이 가져온 떡이 절세의 맛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 떡의 이름을 임절미라 하면 되겠구나.” 인조임금님의 명명으로 그날부터 ‘찰떡’은 또 ‘임절미’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게 되였답니다. 세월이 가면서 임이 어음 적으로 쉽게 불리는 인으로 변하여 ‘인절미’로 되였다고 합니다. 그 후 찰떡소문이 온 나라에 퍼지게 되였는데 후세사람들은 점차 지역별로 찰떡을 만드는 방법을 기발하게 바꾸어 방아에 찧고 절구에 찧고 들판에 놓고 나무로 떡메를 만들어 치고 또 전문 떡구유를 만들어 치게 되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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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5
  •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 김경화 내 휴대폰화면에 슬라이드로 지나가는 문구다. 한국에 온지 얼마 안 되던 어느 날엔가 나는 이런 문구를 휴대폰화면에 넣고 있었다. 서로 다른 문화에 차이에 부대끼고, 힘든 일에 지쳐가고, 가족도 그립고, 설상가상으로 한국에 온 이튿날에 화장실문에 새끼손가락을 끼여 손톱 하나가 빠져나간 채로 일을 해야만 하던 극한의 상황속에서였다. 중국조선족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꿈꾸어봤을 코리안 드림, 열악한 환경속에서 고된 일을 해야 하고, 수모와 냉대가 아무리 빗발친다고 떠들어도 코리안 드림을 향한 그 거센 물결을 막을 수 없는 것은 아무래도 임금의 차이가 아닐까, 거기에 내 조상의 뿌리가 있는 고국이라는 점이 포인트를 더해 코리안 드림의 유혹은 한국 문이 열려서부터 지금까지 빛을 바래지 않고 있지를 않는가!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다섯 살 배기 아들애의 손을 놓기가 죽기보다 싫었음에도 나는 사증도장이 찍힌 여권을 들고 회심의 미소를 짓지 않았던가?! 사람이 살아가는데 돈보다 소중한건 얼마든지 있다는 말을 나는 찬성한다. 그렇지만 또한 돈보다 더 소중한 것도 없다는 말도 반대하지 않는다. 그만큼 돈이라는 이 매개물은 때론 어마어마한 위력을 갖고 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튼 나의 한국행도 예외는 아니였다. 과연 내가 한국이라는 땅에 가서 가장 힘든 3D업종 밑바닥에서 적응해 낼 수 있을 거라는 걱정도 앞섰지만 남하는데 내가 못 하랴는 배짱 하나를 가지고 떠난 터였다. 이제 활은 이미 시위를 벗어 난지 오랜 터, 내겐 앞으로의 질주만 있어야 할뿐 후퇴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이였다. 하지만 처음 해보는 식당일, 그것도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정신없이 뛰어야 하는 자장면 집 서빙일, 손님들의 이런저런 잔소리와 뜬금없이 툭툭 쏘아대는 주인들의 핀잔에 몸과 마음이 매일 매일 혹독한 고문을 견디는 격이였다. 잠간 짬이 나서 밖을 내다보면 엄마가 가는 뒤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아들애를 재워놓고 밤중에 도망치다 싶이 비행기를 타버린 생각에 가슴이 미여졌다. 당금이라도 엄마 하고 아들애가 달려올 것만 같아 눈물이 나던 그 나날, 나는 나 스스로 희망의 빛을 내게 던지기로 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그것은 그 혹독한 시련 같은 나날을 견디어 내야 한다는 나 스스로의 각오이기도 했고, 나보다 더 마음이 아플 아들애와 남자의 몸으로 아들애를 돌보며 나 못지않게 고생하고 있을 남편에게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오늘을 이겨나가야만 내일에 웃을 수 있다는 어떤 결의 같은 것이였다. 그럭저럭, 눈이 내리던 새벽에 길을 떠난 지가 어제 같은데 봄, 여름 가을이 지나고 또 다시 눈발이 흩날리는 겨울이 도래했다. 한국 땅에 발을 들여 놓은 지도 십여개월, 이제 환경에도 적응이 되었고 일도 손에 익었다. 새끼손톱도 새로 자라나 거짓말같이 원상복귀 되었다.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이리라. 지금 한국에 온 중국조선족을 비롯하여 세계가 경제위기로 고난을 겪고 있다. 특히 한국에 있는 중국조선족들은 지난해에 비해 반으로 훌쩍 줄어든 환율로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고 있다. 나 역시 같은 처지이기에 그 마음을 잘 안다. 하지만 걱정한다고, 한숨을 쉰다고 머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나 혼자의 고난도 아닐진대, 우리가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한, 내가 맡은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한, 모든 것은 지나가고 반드시 밝은 빛이 우리 앞에 도래할 것임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행복도 영원한 슬픔도 없지 않을까?! 모든 건 잠간 우리 곁에 손님처럼 머물고 지나 가는게 세상사가 아니던가? 행복에도 100% 도취되지 말고, 슬픔에도 완벽하게 절망하지 않는, 모든 건 지나가리라는 0도 심리로 세상을 사는 것 또한 삶의 한 지혜가 아닐까?! 힘든 오늘을 사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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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20-04-22
  • [김정룡 칼럼] 코로나19와 21대 총선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때는 2016년 3월 21일 저녁, 서초구에 위치한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사무실에서 독서모임이 있었다. 토론지정 책은 미국 대법관을 40여년 지낸 더글라스의 인물평인 <더글라스 평전>이었고 직접 저자가 참석하여 강의했다. 여느 모임도 마찬가지. 처음에는 ‘주제’를 둘러싸고 한참을 얘기를 나누다 나중에는 시국에 대한 담론이 오가기 마련이다. 그날 시국담론은 다가오는 4.13 제20대 총선이었다. 그로부터 2년 전인 2014년 ‘4.16 세월호 사건’을 겪고 나서 민심이 크게 등 들리고, 2015년 12월 말경 정윤회 문건 파동이 있었고 그때부터 최순실 이름이 슬슬 거론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대통령은 서열 3위라는 충격적인 말까지 나돌았는데도 보수정권은 전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오히려 아주 잘하고 있다는 도취에 빠져 있었다. 20대 총선을 앞두고 보수당은 180석 확보는 따 놓은 당상이라는 듯 오만에 빠져 있었다. 설마 설마하면서 불안감을 느끼는 쪽은 당연히 진보진영이었다. 민변은 진보단체이기 때문에 그날 모임에서 진짜 그렇게 된다면 나라 앞날이 암울하다고 큰일이라는 반응들이었다. 이에 대해 <더글라스 평전>의 저자인 안경환 교수 왈,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나라 국민의 의식수준이 나라가 망가질 지경으로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과연 안경환 교수의 예언대로 보수당은 패배했고 진보당이 이겼다. 20대 총선 결과를 통해 필자는 안경환 교수의 탁월한 식견에 탄복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생활에서 교수, 변호사, 고급관료들을 많이 접촉했어도 안경환 교수의 식견을 초과하는 엘리트를 만나보지 못했다. 민주당은 20대 총선의 순풍을 타고 그 후 있은 2017년 제19대 대선, 2018년 제7회 지방선거, 이번 21대 총선까지 승리해 4연승을 달려왔다. 이 4연승 중에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이 1987년 민주화 운동 이래 가장 좋은 성적을 거뒀다. 이렇듯 민주당이 연승가도를 달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일각에서는 민주당이 잘해서가 아니라 보수당이 너무 못해서 민주당이 반사이익을 얻은 결과라고 주장한다. 박근혜 탄핵 이후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에 대해 반성도 성찰도 없고 변화도 없고 혁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보수당은 그 동안 변화와 혁신을 입이 아프도록 외쳤으나 그것은 눈속임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적인 행동은 없었다. 총선을 앞두고 보수당은 물리적인 통합은 이뤄냈으나 화학적인 결합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또 당명은 미래통합당이지만 실제로는 ‘과거통합’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치9단으로 불리는 박지원 의원은 21세기 국회의원이 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의원직을 사퇴한다는 말을 함부로 던지지 말 것. 둘째, 삭발하지 말 것. 셋째, 단식투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황교안 통합당 대표는 국회의원이 아니기 때문에 던질 의원직이 없지만 머리 깎고 밥을 먹지 않는 운동을 여러 번 했고 쩍하면 광화문에 가는 장외정치를 감행하여 낡은 정치, 구태정치라는 이미지로서 국민들의 마음을 떠나게 했던 것이다. 게다가 보수당은 과거 낡아빠진 정치 수단이었던 ‘좌파 빨갱이’ 이념공격이 유권자들에게 전혀 먹히지 않는 시대가 왔으면서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효할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듣기 거북한 공격을 퍼붓는 바람에 유권자를 등 돌리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정녕 빨갱이란 무엇인지? 보수당 국회의원 중에 제대로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도 모르고 그냥 빨갱이 공격이 여전히 난무하니 국민들을 식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외적 요인은 변화의 조건이고 내적 요인이야말로 변화의 근거라는 철학적 논리가 있다. 야당이 잘못해 여당이 어부지리를 얻은 부분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없는 사실이나 어디까지나 당사자가 잘해야 큰 성과를 이룩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뭘 잘했나? 크게 두 가지로 접근할 수 있다. 하나는 투명성이고, 다른 하나는 시민의식 강화이다. 굳이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국가의 존재이유인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의무를 지킨 것이다. 아주 상식적인 얘기지만 전 정권은 국민의 안전에 소홀했다. 그 예가 바로 세월호 사건이다. 박근혜 정부가 밀리게 된 계기가 바로 세월호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메르스 사태 때도 전 정권은 대응이 미진해 말밥에 올랐던데 비해 이 정부는 정신을 차리고 국민 안전 지키기에 최선을 다 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의 대응에 있어서 한국은 지구촌의 스승으로 급부상했다. 여러 가지 이유 중에서 필자는 한국은 정보를 투명성 있게 국민들에게 공개한 점을 높게 평가하고 싶다. 지금까지 선진국이라고 동경을 받아왔던 미국과 서구 여러 나라들 및 일본은 이번 사태에서 정보가 투명하지 못했다. 물론 속이고 싶어 속인 것은 아니겠지만 의료시스템문제와 국가 방역시스템이 낙후되어 투명하지 못한 것도 있고 일본처럼 천방백계로 올림픽을 치르려는 욕심에 일부러 숨겨온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정보가 투명하지 못하면 국민들의 신뢰를 받지 못한다. 이들 선진국에 비해 한국은 정보의 투명성을 확보했고 이로서 국민은 정부를 믿고 관과 민이 정보를 공유하고 협력하는 좋은 방향으로 흘러왔기 때문에 한국이 외신의 찬양을 높게 받고 있는 것이다. 아주 상식적인 말로 하자면 정보가 투명하다는 것은 솔직하다는 얘기이고 인간은 부부, 부모와 자식, 형제, 친구 사이에 서로 솔직하지 못하면 거리가 멀어지고 솔직해야 마음으로 가까워진다. 비즈니스조차도 서로 진정성이 있어야 오래간다. 한국국민은 정부의 정보 투명성을 좋게 여기고 믿고 따르고 심지어 이번 총선에서 정부가 여러모로 허물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믿어주자는 심리 덕분에 표를 많이 주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겨왔던 사람이다. 한국 민주주의는 너무 시끄럽다. 사회주의체제하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모두 같은 생각일 것이다. 너무 시끄러운 나머지 나라가 별로 나라 같지 않다는 생각마저 들 때가 많았다. 예를 들어 야당은 반대만 있고 대안은 전혀 없이 시비만 걸고 국민을 불안하게 만든다. 대통령을 함부로 하야하라고 외치고, 대통령 외교를 천렵질(낚시질)이라고 비하하고 심지어 대통령을 아주 막말로 ‘동네 강아지’ 대하듯 함부로 하는 저질 행위도 그 어떤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아 나라가 시끌벅적해서 불안해 날 때가 많다. 물론 정권의 성향에 따라 시끄러운 상대를 대하는 방법과 방식이 다를 수 있다. 보수정권 같으면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언론을 장악해서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든다든지, 정부에 지극히 맞서는 집단에 물대포라도 쏠 사건을 이 정부는 전혀 물리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시끄럽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태극기가 나라의 상징이지만 일부 보수단체가 애국이란 명분으로 태극기부대를 만들어 정권을 흔들어도 정부는 물리적인 탄압이 없었다. 정부가 도가 지나친 반대 세력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점잖아서 무능하다는 소리까지 들어왔다. 이 정부가 도가 지나친 반대 세력에 잠잖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대한민국 인권신장을 취지로 만든 ‘민주주의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창업 맴버이고, 지금 문재인 대통령, 경관(京官)인 박원순 서울 시장, 인구가 가장 많은 경기도 이재명 지사 모두 민변 출신이다. 그래서 이 정부가 더욱 점잖다. 그렇기는 하지만 한편 정권이란 힘이다. 정권을 갖는다는 것은 힘을 발휘하라는 의미이다. 그런데도 힘을 전혀 쓰지 않고 저토록 점잖게 대하면 앞으로 극단적인 반대 세력들을 어떻게 이겨내려고 저럴까? 하는 의문을 수없이 해왔다. 아무리 자유민주주의라 하지만 무슨 정당들이 그토록 많은지 정당투표용지가 48센티이고 비례정당이 35곳이 기재되어 있다. “키 작은 사람은 감당키 버거울 것”이란 발언을 해 여론의 물매를 맞아 이미지에 손상을 입은 통합당 황교안 대표의 말처럼 선거민주주의 이래 투표용지가 가장 길었다. 35곳 정당 중에 들어본 정당은 거푸 대여섯 곳 넘지 않고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정당들이 선거를 앞두고 임시 창당한 것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무리 자유민주주의라도 거를 것은 거르고 국민들의 눈 높이에 맞는 정당을 투표용지에 올리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닌가는 의문을 가졌었는데 그런 작업은 전혀 없었다. 아니 그런 작업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만18세부터 전체국민에게 매달 150만원 준다고 하고 코로나환자는 1억씩 준다는 정당을 누가 믿을 것인가? 그러나 전혀 말이 안 되는 이런 황당무계한 장당조차 이름을 올렸으니 투표용지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선거를 앞두고 공영방송인 KBS선거방송 타임에 기독교당 후보인 탈북자 여성이 출연하여 정권을 함부로 매도하고 구속된 전광훈 목사를 ‘영웅’으로 칭송하는 목소리를 함부로 발설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만약 조선족 후보가 그 탈북여성처럼 공영방송에 출연하여 함부로 정권을 매도하고 구속된 목사를 찬양한다면 한국사회의 반응이 어떨까? 그 결과는 뻔하다. 정신병 취급을 받지 않으면 당장 추방하라고 한바탕 난리일 것이다. 여기서 탈북자와 조선족을 비교하자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어떻게 ‘굴러온 돌’이 대한민국의 은혜에 대해 ‘원수’로 갚을 수 있는가는 것이다. 보수정부든 진보정부든 모두 대한민국 정부다. 탈북자는 대한민국 정부의 혜택을 입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현재 무슨 정부든 간에 정부를 매도하는 행위는 어쩐지 용납이 가지 않는다. 또 국민들이 아파하는 세월호 사건을 막말로 대한다든가, 5.18광주항쟁을 폄하한다든가, 대통령을 너무 막말로 공격한다든가 하는 정치인이 보수진영에 많아서 다수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어왔다. 어중이떠중이 정당들, 태극기부대로 불리는 애국당, 기독교당이라 불리는 극단보수단체, 막말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지 못하는 막말 정치인들은 모두 이번 총선에서 궤멸 당했다. 만약 정부가 공권력을 투입하여 제거하려고 한다면 큰 파장을 불러올 것이고 후유증이 심각할 것이다. 이번 총선은 정부의 공권력이 아닌 국민의 한 표 한 표로서 이들 세력들을 말끔하게 정리해버렸던 것이다. 만약 정부의 힘으로 탄압한다면 반발이 엄청 셀 것이지만 국민의 표로서 심판 받으니 할 말을 잃고 조용히 지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대로 된 민주주의 1인1표의 정치의 본질이자 기본 정신이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의 표현을 빌자면 이것이 바로 ‘시민적인 역량강화’ 정치시스템이다. 14세기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은 5천만의 목숨을 앗아갔다. 당시는 국가적인 방역시스템도 없었고 마스크도 없는 상황에서 교회에 모여 예배를 계속 강행한 결과 감염이 더욱 심각했던 것이다. 이렇듯 큰 전염병을 겪고 나서 생각 없이 감성적으로만 믿어왔던 신에 대해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고 따라서 르네상스의 바람을 일으켰던 것이다. 한국도 이번 코로나19를 통해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생겨났다. 우선 정부의 대응에 국민이 이번처럼 신뢰를 가져본 적이 없다. 시민의식이 이번처럼 강화된 적이 없다. 시민의식 강화라는 이 훈풍은 매우 힘든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치르게 되는 21대 총선까지 이어져서 또 한 번 지구촌을 깜짝 놀라게 했다. 미국은 오는 11월에 대선이 있다. 은근히 한국 총선을 지켜봤다. 결과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나서 아주 성공적으로 질서정연하게 치른 한국총선을 따라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이번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거둔 것에 나는 별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번 총선을 통해 정부의 공권력이 아닌 시민의 역량으로 부정세력을 정화하는 정치시스템에 매우 높은 점수를 부여하고 싶다. 더불어 이번 총선을 통해 한국사회는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가져올 것이고 나라가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업그레이드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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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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