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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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태일 시/개산툰 구월
    개산툰 구월 박태일 모아산 질러 넘다 왼쪽으로 내려 서면 화룡에서 룡정에서 너른 평강 들 타고 내린 해란강 걸음걸음 고요하다 동성진 너머 리민 너머 옥수수 키잡이로 서서 파랗게 쏘다니는 구릉 마을 집들은 산협의 가난을 풀풀 날리고 창유리 깨진 틈으로 도닥도닥 옛말 드난다 개산툰 개산툰 구월은 두만강 건너 회령 산천 어디서 오득오득 개암이나 씹는 것일까 걸어 내리고 오르는 시장 마당 지난주 건너왔을 북녘 소식은 어느 집 낮술에 비틀거리고 있을까 아는 이 친척도 없이 나는 이 골짝에 갇혔다 장대교회 붉은 십자가가 국경 철책을 바라고 선 뒹겨장 빛깔 어두운 흙길 따라 룡정으로 연길로 나가는 버스는 그치고 택시 기사 둘 버드나무 아래 버드나무 그늘인 양 빈둥거리는 너머 두만강 수척한 물빛을 숨기며 개산툰 구월은 이제 입을 다문다. 박태일의 시집 '연변 나그네 연길 안까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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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9
  • 박태일 시/조양천
    조양천 박태일 마을 이층 숲 참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하양 여우가 존다 배달말 깨우친 누나와 배우는 애토끼 귀엣말 조심조심 걸음 옮긴다 마을 이층 숲 누가 들렀나 누가 한국서도 멀리 부산서 온 너구리 아저씨 여름 물골에 부들처럼 무성한 천자문 배우기 배달말 배우기 책고랑 따라 걷는다 살몃살몃 아침부터 한낮까지 동무들 와도 그만 그만 안 와도 여우는 졸음을 살대발처럼 내렸고 마을 이층 숲 계단 아래로 삼월 고슴도치 찬바람이 구른다 마주 선 소학교와 중학교 사이 전깃줄을 뛰는 참새 떼 양조장 굴뚝은 볼 부어 붉고 높아 집집 지붕 더 눌러 앉힌다 기차역 폐품장 흐린 담길은 부스럭스럭 수수 밭머리로 고개 돌리고 근들이술 두 집만 일찍 등을 밝힌 채 저녁 고양이 기다린다. 박태일의 시집 '연변 나그네 연길 안까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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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9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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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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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4-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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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탐구] 윤동주의 소울메이트 송몽규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용정.윤동주연구회 회장) 올 2월 16일은 민족시인 윤동주 옥사 70주기이다. 그리고 3월 6일은 윤동주가 후쿠오카 일제 형무소에서 한줌의 재로 스러져 고향 용정에 돌아와 장례가 치러진 날이다. 그러면 윤동주의 고향집에서 장례가 치러진 이튿날인 3월 7일은 무슨 날이였을까? 바로 송몽규가 일제 감옥에서 옥사한 날이다. 막상 송몽규하면 누구? 하고 흐릿한 기색을 짓는 이가 많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한 인물의 이름을 거론하면 사람들은 그제야 아! 하고 송몽규라는 인물에 대해 얼추잡아 깨닫게 된다. 송몽규는 바로 윤동주의 고종사촌형이다. 송몽규의 생애에 대해서는 한국의 소설가이자 사학가인 송우혜가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면서 일목료연하게 정리한바가 있다. 그는 송몽규와 인척지간으로서 송몽규의 조카이기도하다. 또 지난 2011년 7월, 일본 교또 검찰청은 송몽규의 재판 판결문을 최초로 전격 공개하였는데 그 기록에서도 우리는 송몽규의 행적을 세세히 살펴볼수가 있다. 꿈꾸는 별, 태여 나다 1917년 파평 윤씨네 가문에서는 겹경사가 났다. 가문의 어른인 윤하현(尹夏鉉, 1875-1947)은 외아들 영석(永錫, 1895-1962)과 딸 신영(信永, 1897-?), 신진(新眞) 둘을 두었는데 명동촌 친정 집에 얹혀있던 큰 딸 신영이가9월 28일 아들애를 낳았고 외아들 영석이네가 12월 30일 또 아들애를 보았던것이다. 석달을 차이두고 태여난 그들이 바로 송몽규와 윤동주이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동갑내기 고종사촌형이 된다. 그들은 다섯살이 될 때까지 한 집에서 자랐다. 송몽규는 1917년 9월 28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이던 송창희(宋昌羲, 1891~1971)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송몽규 가문은 본적이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읍 웅상동이다. 송몽규의 할아버지 송시억(宋始億)은 15세 때에 충청도로부터 연해주로 가다가 그 길목인 웅상에 머물러 가세를 일으켰다고 한다. 아버지 송창희는 웅상에서 서울에 류학하여 신교육을 받았다. 송씨 문중은 웅상동에 “북일학교(北一)”라는 교육기관을 세워 자제들 교육을 담당했다. 그들 가문에는 독립운동에 투신했거나 류학을 떠난 사람이 많았다. 송몽규의 삼촌인 송창빈은 홍범도 부대 소속의 독립군으로 싸우다가 1920년에 전사했고 송창근은 일본을 거쳐 미국에 류학하여 1931년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송창희는 25세에 미혼의 청년으로 명동에 오게 되였다. 송창희는 체격과 인물이 아주 뛰여난 사람이였다. 이런 그를 윤동주의 어머니가 보고 이미 적령기의 규수가 된 큰시누이의 신랑감으로 욕심이 났다. 그래서 집에 가서 이야기했다. 이에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 장로는 서둘러서 자기의 큰딸과 선을 보게 만들어 두 사람을 결혼시켰다. 송창희는 결혼하자 윤장로 댁에서 처가살이를 했다. 동시에 명동학교에 교사로 부임하게 되였다. 학교에서 그가 가르친 과목은 조선어와 양잠이였다. 송창희 선생은 명동소학교 교사를 거쳐서 나중에는 7도구(七道溝)소학교 교장을 지냈고 송몽규가 윤동주와 함께 서울 연희전문에 다닐 무렵에는 대랍자촌(大拉子村)의 촌장을 지냈다. 늘 입에는 파이프 담배를 피워물고 조선인이라기보다는 서구사람처럼 이목구비가 컸던 송창희는 성품이 엄해서 명동학교 생도들 간에 “송호랑이”로 불리웠다고 한다. 하지만 몹시 애처가였고 자식들을 극진히 사랑했다. 문과로 진학하겠다는 동주를 억지로 의과로 진학시키려고 했던 윤씨가문에 비해 그는 “아이들은 그들의 의향대로 키워주어야지 부모 욕심으로 키우려면 안된다”면서 몽규의 의도를 늘 존중했었다. 대바르며 너그러웠던 아버지의 애대속에 구김없이 자라난 송몽규는 아이들중에서 단연 돋보였다. 문학소년이면서도 대범한 성격을 갖고 있고 어려서부터 무서운 활동가의 재질을 보인 야무진 소년이였다. 소학교 5학년때 동주등과 “새 명동”이란 등사판 문예지를 발행했고 성탄절이면 연출 선생님을 모시고 연극을 하곤 했는데 그런 때에도 몽규가 선두주자로 나서 애들을 휘동하곤 했다. 부끄럼 잘 타고 조용한 윤동주와 활달하고 대범한 송몽규는 성정미가 판다르게 대조적이였지만 타고난 혈연 그리고 의기투합으로 서로를 포옹하면서 어릴 적부터 삶과 문학을 거의 같이 했다. 1925년 여덟살인 송몽규는 윤동주, 문익환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교장이자 외숙부였던 김약연 선생의 훈도아래 철저한 반일교육을 받았다. 두 사람이 문학에 뜻을 둔것은 바로 명동소학교 시절이였다. 4학년때 송몽규는 서울의 월간잡지 “어린이”를 구독하고 윤동주는 “아이 생활”을 구독하였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송몽규는 윤동주와 함께 달라자에 있는 당시 화룡현립 제1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동안 한족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소학교 학생의 나이로 말하면 매일 밟아야 하는 20여리라는 등교길은 힘에 부치는 거리였다. 그런 산길을 둘이는 함께 매일이고 걸었다. 윤동주 가(家)는 1931년 늦가을 룡정으로 이사하게 되고 윤동주와 송몽규는 1932년 4월 봄 은진(恩眞)중학교에 함께 입학한다. 이때에도 송몽규는 윤동주네 집에 얹히게 된다. 어린 나이에 서울문단에 등단하다 은진중학교 시절의 송몽규는 상당히 조숙한 문학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문단 진출도 남보다 빨랐다. 송몽규는 1934년 12월 은진중학 3년생으로 열여덟 어린 나이에 서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꽁트 부문에 응모한다. 송한범(宋韓範)이란 아명으로 응모한 작품인 꽁트 “술가락”이 당선되여 간도사람들을 놀래웠다. “술가락(요즘 표기로는 숟가락)”이란 제목의 이 꽁트는 가난한 부부의 애환을 그린 것인데, 몽규의 아명은 “한범(韓範) “이다. 집에서는 물론이고 은진중학교 시절까지 학교에서도 ”한범”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몽규(夢奎)”는 이름 뒤자에 별 규(奎)자를 쓰는 집안 항렬을 따라 지은 이름이다. 그의 어머니가 꿈에 큰 별을 보고 그를 낳은 데서 꿈 몽(夢)자를 쓰게 되였다고 한다. 신춘문예에도 송몽규는 아명으로 투고했다. 그래서 작가의 이름이 송한범으로 표기되여 있다. 우리의 청년문사의 문재를 흔상해 보고자 “술가락"을 전문을 당시 표기법 그대로 옮겨본다. 술가락 송몽규 우리부부는 인제는 굶을 도리밖에 없엇다. 잡힐 것은 다 잡혀먹고 더잡힐 것조차 없엇다. 「아- 여보! 어디좀 나가 봐요!」 안해는 굶엇것마는 그래도 여자가 특유(特有)한 뾰루퉁한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 나는 다만 말없이 앉어 잇엇다. 안해는 말없이 앉아 눈만 껌벅이며 한숨만 쉬는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말할 나위도 없다는 듯이 얼골을 돌리고 또 눈물을 짜내기 시작한다. 나는 아닌게 아니라 가슴이 아펏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럿다. 「아 여보 조흔수가 생겻소!」 얼마동안 말없이 앉아 잇다가 나는 문득 먼저 침묵을 때트렷다. 「뭐요? 조흔수? 무슨 조흔수란 말에 귀가 띠엿는지 나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아니 저 우리 결혼할 때… 그 은술가락말이유」 「아니 여보 그래 그것마저 잡혀먹자는 말이요!」 내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안해는 다시 표독스운 소리로 말하며 또 다시 나를 흘겨본다. 사실 그 술가락을 잡히기도 어려웟다. 우리가 결혼할 때 저- 먼 외국 가잇는 내 안해의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술가락과 함께 써보냇던 글을 나는 생각하여보앗다. 「너히들의 결혼을 축하한다. 머리가 히도록 잘 지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이 술가락을 선물로 보낸다. 이것을 보내는 뜻은 너히가 가정을 이룬뒤에 이술로 쌀죽이라도 떠먹으며 굶지말라는 것이다. 만일 이술에 쌀죽도 띠우지 안흐면 내가 이것을 보내는 뜻은 어글어 지고 만다.」 대개 이러한 뜻이엇다. 그러나 지금 쌀죽도 먹지 못하고 이 술가락마저 잡혀야만할 나의 신세를 생각할 때 하염없는 눈물이 흐를 뿐이다마는 굶은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없이 「여보 어찌 하겟소 할 수 잇소」 나는 다시 무거운 입을 열고 힘없는 말로 안해를 다시 달래보앗다. 안해의 빰으로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잇다. 「굶으면 굶엇지 그것은 못해요.」 안해는 목메인 소리로 말한다. 「아니 그래 어찌겟소. 곧 찾아내오면 그만이 아니오!」 나는 다시 안해의 동정을 살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없이 풀이 죽어 앉어잇다. 이에 힘을 얻은 나는 다시 「여보 갖다 잡히기오 발리 찾어내오면 되지 안겟소」 라고 말하엿다. 「글세 맘대로 해요」 안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힘없이 말하나 뺨으로 눈물이 더욱더 흘러내려오고잇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전재산인 술가락을 잡히기에는 뼈가 아팟다. 그것이 운수저라 해서보다도 우리의 결혼을 심축하면서 멀리 ××로 망명한 안해의 아버지가 남긴 오직 한 예물이엇기 때문이다. 「자 이건 자네 것 이건 자네 안해 것-세상없어도 이것을 없애서 안되네」 이러케 쓰엿던 그 편지의 말이 오히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숟가락이건만 내것만은 잡힌지가 벌서 여러달이다. 술치 뒤에에는 축(祝)지를 좀 크게 쓰고 그 아래는 나와 안해의 이름과 결혼 이라고 해서(楷書)로 똑똑히 쓰여잇다. 나는 그것을 잡혀 쌀, 나무, 고기, 반찬거리를 사들고 집에 돌아왓다. 안해는 말없이 쌀음 받어 밥을 짓기 시작한다. 밥은 가마에서 소리를 내며 끓고잇다. 구수한 밥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그럴때마다 나는 위가 꿈틀거림을 느끼며 춤을 삼켯다. 밥은 다되엇다. 김이 뭉게뭉게 떠오르는 밥을 가운데노코 우리 두 부부는 맞우 앉엇다. 밥을 막먹으려던 안해는 나를 똑바로 쏘아본다. 「자, 먹읍시다.」 미안해서 이러케 권해도 안해는 못들은체 하고는 나를 쏘아본다. 급기야 두 줄기 눈물이 천천이 안해의 볼을 흘러 나리엇다. 웨 저러고 잇을고? 생각하던 나는 「앗!」하고 외면하엿다. 밥 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안해의 술가락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앗던 까닭이다. 마치 단편소설의 대가 오. 헨리의 작품을 읽는듯한 기분이다. 당선작품의 소재와 기법이 제법 성숙되여 지금 읽어도 그 구성이나 반전의 솜씨가 절묘하게 느껴진다. 당시 이주민들이 모여든 중국 변강의 오지- 룡정촌에서 서울의 신춘문예에 그것도 학생의 신분으로 당선된다는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였다. 당시 여러 신문의 신춘문예를 통해 당선된 이들은 황순원, 서정주, 김동리와 같은 그후 한민족 문학을 이끈 기라성과 같은 작가들이였다. 윤동주보다 빠른 문단 진입이였고 이는 윤동주에게 큰 자극이 되였다. 몽규의 수상을 축하해주면서 윤동주는 “아, 나는 아직 멀었구나. 대기만성이라는 말도 있는데…” 하고 부러운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 동주는 몽규를 친겹게 여기고 그의 뛰여난 장점들을 자기 발전의 자극으로 삼았다. 무엇보다도 일찍 민족의식에 눈뜨고 반일에 몸소 투신하는 몽규를 자랑스러워하고 본받으려 하였다. 독립군관학교를 찾아가다 어린나이에 경성의 문단에 등단하여 학교와 고향 사람들을 놀래웠던 송몽규는 어느 날 문뜩 그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결연히 민족독립운동으로 향하는 길에 애젊은 몸을 던진것이다. 송몽규는 1935년 4월에 중국으로 건너갔다. 3월에 은진중학교 제3학년을 수료하고 나서 4학년으로 진급하지 않고 그대로 중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송몽규는 당시 은진중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시던 민족주의자 명희조(明羲朝)선생의 영향을 받고 이 길에 오른 것이였다. 명선생은 도꾜 제대에서 동양사를 전공한 이로서 당시로는 은진중학에서 최고 학벌의 선생이였다. 소동파의 ”적벽부”와 같은 고문도 술술 강의하곤 했는데 한문의 대가였고 그의 동양사와 국사 강의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송몽규, 윤동주등은 명희조 선생을 통해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과 나아갈 방향 등에 대해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송몽규는 어렵게 중국의 내륙으로 들어가 백범 김구선생이 주도하는 림시정부 락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2기생으로 입학하게 된다. 그러면 북간도 룡정촌에 있던 송몽규는 어떻게 낯설고 물설고 언어까지 통하지않는 수천리밖 군관학교의 존재를 알고 거기에까지 찾아 갔던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송우혜가 송몽규의 은진중학교 1년 선배이자 락양군관학교 제2기 동기생인 라사행을 취재하면에서 밝혀 내였다. 1914년 평안남도 개천에서 출생한 라사행(羅士行) 역시 역시 1935년 4월에 락양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룡정에서 무작정 락양을 향해 떠났었다. 거기서 라사행은 송몽규를 만났다고 한다. 아래는 송우혜와 라사행의 문답으로 된 락양군관학교에 대한 증언이다. (“윤동주 평전” 송우혜 지음. 2004년 푸른력사 펴냄) 송우혜: 락양군관학교 이야기는 언제 어떤 경로로 듣게 되셨습니까? 라사행: 제1기생이 교육받고 있던 1934년 당시, 나는 은진중학교 4학년 졸업반이였지요. 그때 우리 력사선생이던 명희조 선생께서 우리들에게 “그런 군관학교가 생겼고 우리 학교 출신중에서도 거기 간 사람이 있다”고 하셔서 알게 되였습니다. 이미 1기생중에 은진 출신이 가 있었던거지요.” 가는 길에 일본측의 취체가 굉장히 심했습니다. 그때는 이미 북경 근처인 천진에까지 일본 군대가 꽉 차 있더군요. ”천진(天津)→ 제남(濟南)→ 서주(徐州)→ 남경(南京)”.. 이런 경로를 밟아 남경에 도착해서 현철진을 만났지요. 현철진 역시 우리 은진 선배였어요. 그가 우리를 김구 주석에게 련결해주었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점조직 같은것을 따라서 북간도로부터 남경의 김구선생에게까지 이르게 된 거예요. 송몽규 역시 같은 코스를 밟은 거지요. 송몽규가 명희조선생의 소개로 중국 내륙으로 출발한 당시, 그의 행선지와 목적은 극비에 속하는것이였다. 그래서 매일 그림자처럼 붙어다녔던 윤동주조차도 죽마고우인 문익환 목사조차도 그의 행적에 대해 감감 몰랐었다. 후일 문익환 목사는 이렇게 증언했다. 은진중학교의 전설적인 로교사 명희조 선생이 몽규를 중국으로 보낸 일이 있었다. 그것이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 아니였나 싶다. 나는 끝내 그가 무슨 사명을 띠고 중국에 갔었는지 묻지 못하고 말았다. 그 일로 해서 몽규는 몹시 고생했고…… 그러다가 송몽규와 윤동주에 대한 일본 특고경찰(特高警察)의 “엄비(嚴秘)”기록인 “취조문서”가 일본에서 공개되여 1977년 12월호 “문학사상”지에 번역, 보도됨으로써 송몽규의 그동안의 행적이 더 상세한 검증을 받게되였다. 취조문서에는1936년에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했던 한인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상황이 “1936년의 재지(在支)불령조선인의 불온 책동 상황”이란 표제 아래 정리되여있다. 이 문서속에 당시 중국에 있었던 한인 군관학교들에 관한 자료들이 상세히 기재되여 있고 “소위 선인 군관학교 사건 관계자 검거 일람표(所謂 鮮人 軍官學校 事件 關係者 檢擧一覽表)”에는 1936년에 검거한 각 한인 군관학교 학생들 38명의 명단이 실려 있다. 이 검거 일람표 속에서 “송몽규”의 이름을 찾아볼수 있었다. 최조문서의 기록을 보면- (송몽규)는 1935년 4월 은진중학교 3학년때 19세의 나이로 당시 남경(南京)에 잠복하고 있던 조선독립운동단체인 김구(金九)일파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참가할 목적으로 동년 11월까지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었다. 그러나 김구 일파의 내부사정으로 말미암아 목적 달성이 어려울것을 알게 되자 다시 제남시(濟南市)에 있는 리웅(李雄)이라는 독립운동자를 찾아가 함께 독립운동을 펴려고 하였으나 사찰(査察)당국의 압박으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1936년 3월 출생지의 부모 곁으로 돌아왔다. 그 기록의 송몽규 관계 부분을 보면 송몽규가 갔던 군관학교의 정식명칭은 “락양군관학교”였다. 그리고 본명 외에 “왕위지(王偉志), 송한범(宋韓範), 고문해(高文海)”라는 세 가지 명칭을 더 사용했다. 당시는 1931년 “9. 18사변” 이래 아주 로골화된 일본의 중국대륙 침략이 시시각각으로 마수를 뻗치고 있던 험악했던 시기, 중국과 일본 량군간의 치렬한 교전으로 흉흉하던 전쟁시국이였다. 하지만 여태 북간도 오지에서 태여나 자란 열여덟의 젊은이는 낯설고 물설고 언어까지도 생경한 거대한 대륙의 땅덩어리를 횡단하며 천진-제남-서주를 거쳐 남경에까지 도착해 백범 김구(金九) 선생을 찾아 뵌것이다. 송몽규등이 다녔던 락양군관학교 한인 특별반에 대해서는 그후로 적지않은 연구물들이 발표되였다. 1933년 봄, 상해 홍구공원 윤봉길 의거를 단행해 세계를 놀래운 김구는 국민당정부의 장개석 군사위원회 위원장과 만난다. 윤봉길 의거의 배후로 지목되어 상해를 탈출한후 가흥에 은둔하던 때였다. 김구는 군사인재 양성을 위한 지원을 요청했고, 그 결실로 중국육군군관학교 락양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이 개설됐다.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장렬한 의거를 성공시키자 “우리가 하지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쾌재를 부르며 림정측에 호의를 보이기 시작한 국민당 장개석 위원장의 신뢰와 관심이 군관학교 한인특별반 설립의 동기가 되였던 것이다. 락양군관학교 한인반이 1933년 12월에 특별히 설치되여 92명의 한인 학생을 비밀히 모집했다. 1934년 2월부터 실제 군사교육이 시작되였다. 그 재정지원은 장개석 정부에서 전적으로 담당했다. 학제는 1년제였다. 한인특별반의 정식 명칭은 “중국중앙륙군군관학교 락양분교 제2총대 제4대대 륙군군관훈련반 제17대”였다. (“백범 김구 평전”. 김삼웅 지음 | 시대의창 | 2004) 김구가 설립을 주도한 중국락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의 교육 목표는 “일본 제국주의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로동자, 농민을 지휘할 수 있는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하는 것”이였다. 이들은 모집한 한인 청년을 주축으로, “9.18사변” 이후 남경으로 이동해 온 전 한국독립군 대원들, 간부학교 2기생 일부, 남화(南華)한인청년련맹 대원 약간 명 등으로 이루어졌다. 김구는 또 1935년 2월부터 한인 청년들을 수용, 교육시키는 학생훈련소를 운영했다. 위치는 남경 동관두(東關頭) 32호였고 “특무대예비훈련소” 또는 “몽장훈련소(蒙藏訓練所)”로 불렸다. 대원들에게는 매월 10원의 급여가 지급됐고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중국어, 기하, 대수등의 학과 교육과 정신 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1935년 6월 22일 일제의 정보망을 피해 강소성 의흥현 장저진 용지산 속에 있는 징광사(澄光寺)로 이동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징광사와의 임대계약 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대원들은 다시 남경으로 이동하여 한국특무대독립군 본부 등지에서 합숙했다. 이후 한국특무대독립군 및 학생훈련소 대원들은 한국국민당청년단으로 재편성된 다음 “통합”한국독립당과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림시정부를 지키는데 자신을 바쳤다. (“중국항일전쟁과 한국독립운동”. 김승일 옮김. 시대의창. 2005) 송몽규는 이곳에서 1년간의 교육을 받았다. 당시 장개석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이 한인 특별반의 존재를 극비에 부쳤다. 중국의 공식 군사교육기관에서 한국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사실이 일본에 알려지면 큰 문제가 되기때문이였다. 그래서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한인을 모두 중국인으로 위장했다. 그래서 학생들은 모두 중국식 이름을 지어 사용했었음이 관련 자료에서 밝혀지고 있다. 송몽규가 중국식 이름인 ”왕위지”를 쓰고 있었음도 그런 사정에서 연유했던것이다. 여기서 그의 또 하나의 가명인 “고문해”를 보면 바로 후일에 호로 썼던 “문학의 바다”라는 뜻의 가명임을 알수 있다. 이처럼 일제와 맞서기 위해 매일이고 땀동이를 흘리며 총칼을 벼리는 긴박한 상황하에도 문학에 대한 그의 열망은 식지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학적인 재능은 그 어디에서도 빛을 발하였다. 락양군관학교에서 송몽규는 군사기능을 열심히 연마하면서 학생들을 조직하여 한인반 잡지를 만들기도 하였다. 등사로 인쇄하여 만든 두툼한 책을 보고 김구선생은 몹시 칭찬하시면서 책이름을 “신민(新民)”이라고 지어주었다. 이 부분은 송우혜가 라사행에 대한 취재에서 상세하게 나온다. 라사행: 제2기생은 처음엔 남경성 내 동관두(東關頭)32호의 커다란 중국식 민가에서 합숙하며 지냈습니다. 송우혜: 학생들 수효는요? 라사행: 삼십 명 정도였어요.” 송우혜: 교육과목은? 라사행: “군사훈련 과목과 중국어 등 어학과목이지요.” 송우혜: 교관은 어떤 분들이셨죠? 라사행: 엄항섭, 안공근 (안중근 의사의 막내동생)선생 등이 우리를 가르쳤습니다. 동관두 32호에서 한 2개월 그렇게 지낸 뒤에 강소성 의흥현 용지산(龍池山)에 있는 용지사(龍池寺)로 옮겨서 거기서 훈련을 받았지요. 남경에서 한 백여 리 떨어진 곳이었지요.” 송우혜: 용지사란 곳은 절인 모양이지요? 라사행: 불교의 절이지요. 중국 절들은 아주 커요. 재산도 많고요. 용지사도 한 3천 명쯤 수용할수 있는 규모였어요. 군인 1개 대대가 예고 없이 들어닥쳐도 한꺼번에 그대로 류숙시킬수 있을 정도지요. 우리는 거기서 6월부터 10월 초까지 지내면서 훈련받았습니다. 그때 특히 김인(김구 선생 장남, 락양군관학교 제1기졸업생)씨가 교관으로 우리를 가르쳤었습니다. 거기도 김구, 안공근 선생 등이 가끔 찾아왔었고 엄항섭 선생이 총책임자로서 우리와 같이 지냈지요. 그렇게 지내다가 10월 초에 용지사에서 다시 남경으로 나왔습니다.” (필자 중략) 송우혜: 군사훈련을 받는 외에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까? “송몽규가 중심이 되어 잡지를 만드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용지사에 있을 때였지요. 송몽규가 우리보고 다들 원고를 써내라고 하여 꽤 두꺼운 책을 만들었었습니다. 한 3백 페이지쯤 됐어요. 송몽규는 문학에 재능이 있었지요. 성격이 쾌활하고 글씨도 잘 썼어요. 그래서 등사판을 새로 사다가 직접 써서 등사로 인쇄하여 만들었었습니다. 김구 선생이 몹시 칭찬하시고 책 이름을 “신민(新民)”이라 지어주셔서 그런 제목으로 책이 되여 나왔지요. 송몽규는 이처럼 잔뜩 달궈진 용광로 속의 쇠물처럼 반일과 독립의 열망으로 들끓던 그 한인특별반에서 1년여동안 교육을 받았다. 제2기생들은 1935년 10월 초에 용지산에서 남경 시내로 들어온 뒤 해산되였다. 여러 관계 자료들을 검토해보면 중국측의 재정지원이 중단된 바람에 이들이 해산된것으로 보인다. 한인특별반에서 나온 송몽규는 1936년 4월 10일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濟南)에서 제남주재 일본령사관 경찰부에 체포된다. 일본 특고(特高)의 리스트에 그 이름이 오른것이다. 이것이 그후 1943년 7월 일본 교또에서 윤동주와 함께 체포되는 한 원인이 된 것이다. 라사행 역시 상해에서 얼마간 지내다가 어느 날 일경에 체포되였다. 일경의 극비문서에 있는 “검거 일람표”를 보면 락양군관학교 출신들은 이미 1935년 10월부터 체포되고 있었다. 그해 6월 27일 송몽규는 웅기경찰서로 이감되여 9월 14일까지 류치되였다. 갖은 고역에 시달리다 겨우 석방되여 나왔다. 일본측이 중국에서 활동한 한인 군관학교 관련 학생들에 대해 일본의 국내법인 치안유지법을 적용하여 실형을 언도하는데 법적인 난관이 있어서 그들을 모두 일단 석방한뒤 요시찰인으로 감시하기로 정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때부터 송몽규에게는 “요시찰인물”이란 딱지가 붙어 늘 일제당국의 감시망속에서 살아야 했다. 당시 웅기읍 웅상동에 살았던 송몽규의 사촌형 송웅규 씨의 증언에 의하면- “웅기경찰서로부터 ‘몽규를 데려 가라’는 연락이 왔어요. 내가 데리러 갔었지요. 가보니 그간 고생해서 아주 바싹 말랐고 얼굴이 오래동안 해빛을 못봐 아주 하얗게 창백한 모습이더군요. 경찰은 풀어주면서 웅기로 거주제한을 했지요.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몽규는 며칠 쉬더니 그대로 만주로 튀여버리더군요.” 일제의 거주 제한에 조소를 날리며 송몽규는 1937년 4월 다시 룡정으로 와서 윤동주와 재회한다. 그리고 룡정대성(大成)중학교 4학년에 편입한다. 대성학교는 4년제 중학교였다. 그는 편입할 때 다시 은진중학교로 돌아가려 했으나 당시 은진중학교가 감시와 사찰을 많이 당하던 중이라 문제학생을 받을수 없었다는데서 대성중학으로 가게된것이였다. 송몽규는 2년만에 다시 중단됐던 공부를 시작했다. 이때의 윤동주의 행적을 보면 또 다른 친구인 문익환과 함께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입학한다. 얼마 다니지도 못한 상태에서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학교에서 자퇴를 하고 룡정으로 되돌아와 윤동주와 문익환은 룡정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 4학년에 편입되였다. 광명학교는 당시 흉년의 여파로 경영난에 허덕이다가 일본인에게 매각되어 친일계 학교가 되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퇴한 윤동주와 문익환은 조선인의 황국화(皇國化)를 위해서 세워진 중학부에서 공부할수밖에 없는 신세에 “솥에서 뛰여 숯불에 내려앉은 격이구나”하고 개탄을 금치 못했다. 여기서 “이런 날” (1936.6.10)이라는 윤동주의 시 한 편을 보자. 사이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끝에서 오색기와 태양기가 춤을 추는 날, ...(중략)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 부르고 싶다. 동주가 다니는 친일계 광명중학교 정문 량쪽 돌기둥에는 만주국 기발과 왜놈들의 일장기가 걸려 펄럭이고있었다. 이런 무가내한 상황에서 동주는 하소연하고 기대고 싶은 존재로 송몽규를 찾고 있었다. 겨우 석달 이상이지만 랭철한 현실 대처의 자세로 언제나 그들의 선두주자였던 의젓한 형 송몽규를 사무치게 그리고 마음으로 부르고있는 것이다. 룡정 대성중학에 입학하여 그동안 그동안 총가목을 잡았던 손에 다시 펜을 들면서 송몽규는 잠시 잊고있었던 문학에 대한 구지욕을 다시 태우기 시작했다. 지금 찾아볼수 있는 그의 졸업일기에는 영어로 “일체는 문학을 위하여”라는 글발이 남겨져 있다. 서울 연희전문에 입학하다 1938년 초봄, 그들은 당시 간도에서는 단 두사람으로 연희전문에 나란히 합격한다. 윤동주는 의사나 고등고시로 출세하라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문과를 택했고 몽규도 같이 문과로 간다. 연희전문 문과에서 두 사람은 기숙사생활을 같이 했다. 이 시기에 최현배,손진태, 리양하 등 훌륭한 스승으로부터 민족문화에 대해서 배고 문학 세계를 심화시켰다. 동기들의 증언에 의하면 송몽규는 나라를 잃은 민족의 현실에 대해 격정을 토로하며 행동반경이 컸다고 한다. 또 윤동주에 대해 끔찍한 우정을 보여줬다. 윤동주가 감성적이고 내성적이며 종교적으로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며 시를 통해 저항의 표현을 했다고 한다면 송몽규는 일찍이 그의 문학적 재질을 드러내면서도 문학보다는 독립운동에 결여된 리론적 보완의 필요성을 느끼고 직접 운동에 뛰여들었고 예리한 시대 상황을 분석하여 민족의 독립에 대처하는 선견지명을 갖고 있었다. 적극적인 성격인데다 달변인 그의 주도하에 문과학생회는 문학동아리들의 잡지 “문우”를 펴냈다. 송몽규는 문예부장으로서 “문우”지의 실무를 맡아 하면서 잡지의 속간을 추진하고 직접 뛰였다. “문우”지는 송몽규의 편집후기로 마감된 1941년도 판을 최종호로 하여 종간되였다가 1960년에 와서야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학생들에 의해 복간되였다. 송몽규는 이 잡지에 그의 시 “하늘과 더불어”를 “꿈별”이라는 필명으로 게재했다. 우리말이 억압당하던 시기 몽규(夢奎)를 꿈별이라 굳이 우리말로 풀어 이름을 단것이다. 하늘—/ 얽히어 나와 함께 슬픈 쪼각하늘/ 그래도 네게서 온 하늘을 알수있어 알수있어…… 푸름이 깃들고/ 태양이 지나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엿보고/ 별이 미소하여 너하고만은 너하고만은/ 아득히 사라진 얘기를 되풀고 싶다. 오오—하늘아—/ 모—든것이 흘러흘러 갔단다./ 꿈보다도 허전히 흘러갔단다./ 괴로운 사념들만 뿌려주고/ 미련도 없이 고요히 고요히…… 이 가슴엔 의욕의 잔재만/ 쓰디쓴 추억의 反芻만 남어/ 그 언덕을/ 나는 되씹으며 운단다. 그러나/ 련이 없어 고독스럽지않아도/ 고향을 잃어 響愁스럽지 않아도/ 인제는 오직—/ 하늘속에 내맘을 잠그고 싶고/ 내 맘속에 하늘을 간직하고싶어. 미풍이 웃는 아침을 祈願하련다./ 그 아침에/ 너와 더불어 노래부르기를 가만히祈願하련다. 시는 비운에 얼룩진 지난날을 되새기며 솟구치는 회한의 정과 더불어 비장한 결의를 토로하고 있다. 그 “문우”지에는 또 윤동주의 시 “새로운 길”과 “우물속의 자화상”도 실려있어 윤동의 장례식때 가족들은 이 잡지를 가져다가 윤동주의 시 를 랑독했다고 한다. 이 무렵에 송몽규는 “문해(文海)”라는 호를 지어 사용했다. 일찍 “고문해”라는 가명을 썼듯이 그가 즐겨 쓴 이 가명과 호는 그의 문학적 원념을 크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 호로 사각도장을 새겨서 자기의 책을 분류, 정리하는데 찍기도했다. 오늘날 윤동주의 유품인 “철학사전”(일어판)속장에 그의 도장 자취가 뚜렷이 찍혀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면서 더욱 암담해 지고 있는 시국에 12월 27일 연희전문 졸업식이 앞당겨 치러졌다. 송몽규와 윤동주등 문과 졸업생은 21명이였다. 졸업식에서 송몽규의 성적은 단연 앞선 2등이였다. 적국 일본으로 송몽규는 1942년 3월, 부산에서 관부련락선을 타고 현애탄을 넘었다. 친구이자 동생인 윤동주와 함께였다. 두 사람은 일본 류학길에 오른것이다. 창궐한 일제는 공공연히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으며 동아시아 제국에 대한 침략야욕을 드러내고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송몽규는 적국인 일본 땅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대학과정으로 진학하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는 일이였다. 사실 경성이나 고향에서 취직자리도 있을리 없었다. 이것은 당시 모든 젊은이들이 고민했던 진로 문제였고 무가내의 선택이였다. 무엇보다 독립에 도움이 되려면 민족문학을 연구하는 한편 아세아 민족문화의 특성에 대한 연구를 더 해야겠다는 웅숭깊은 생각도 안받침 되여 있었다. 그런데 류학을 앞두고 하나의 커다란 관문이 있었다. 바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해야하는 것이였다. 창씨개명은 1939년 12월 26일 시행된 조선인의 씨명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일제의 악랄한 식민지 정책이였다. 류학을 지망하는 청년들은 이를 피할수 없었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미루다 미루다 나중에 끝내는 창씨개명계를 냈다. 그리고 토혈(吐血)하듯한 시발로 적어 내린 윤동주의 그 유명한 “참회록”이 탄생한다. 그들의 창씨개명 이름과 날짜는 다음과 같았다 . 소무라 무게이(송촌몽규, 宋村夢奎); 1942.2.12 히라누마 도쥬(평소동주, 平沼東柱); 1942.1.29 송(宋)은 소무라(宋村)라로 윤(尹)은 히라누마(平沼)로 한것이다. 일본땅에 이르러 송몽규는 1942년 4월 1일 교또(京都)제대 사학과 서양사학 전공(선과)에 입학하고 윤동주는 1942년 4월 2일 이케부쿠로(池袋)에 있는 릿교(立敎)대학 문학부 영문과(선과)에 입학한다. 1940년대에 조선인이 일본의 제국대학에 입학하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하지만 송몽규는 뛰여난 성적으로 단연 제국대학에 입학한것이다. 그런 송몽규에 부러움을 느끼던 윤동주는 그후 도시샤(同志社)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다. 일본에서의 그들의 기숙처를 보면 송몽규는 북백천(北白川) 동평정정(東平井町) 소스이도리(疎水通) 60번지. 청수영일(淸水榮一)의 2층 집이였고 윤동주는 좌경구(左京區) 전중고원정(田中高原町) 27번지. 다케다(武田) 아파트였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한 집에서 지내지 못했지만 두 집 사이는 도보로 5분, 가까운 거리였다. 늘 머리를 맞대고 있으면서 그들은 일경이 그를 감사하는 줄 모르고 “우리 민족의 장래”며 “민족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강렬한 민족의식의 지배하에서 민족독립의 래일을 기원하였고 일제당국의 조선민족과 문화에 대한 말살정책을 비난하였다. 송몽규는 자신은 앞으로 연극분야에 투신해 연극을 통한 민족문화운동을 해보겠다는 포부를 토로하기도 하였다. 1942년 7월 여름방학을 맞은 송몽규와 윤동주는 함께 만나 룡정으로 간다.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귀향이였다. 방학을 끝내고 학교로 돌아와 두 사람은 곧 일본 경찰의 마수에 떨어진다. 송몽규는 1943년 7월 10일, 윤동주는 7월 14일 각각 경도에서 특고 형사에게 체포되여 교또 시모가모(下鴨)경찰서 류치장에 감금되였다. 건명은 “재경도(在京都)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이라는것이였다. 그 그룹은 송몽규가 중심 인물이고 윤동주가 이에 동조했고 고희욱등 젊은이들이 관련된 례사로운 모임이였다. 그러나 작은 일도 침소봉대(針小棒大)되는 때라 중국과 조선에서의 활동이 활발한 “요시찰인물”인 송몽규가 가차없이 그 사정권에 들었던 것이다. 이즈음 치안유지법 위반 조선인의 취조상황 례를 보면 이러한것들이 있다. 재판(在阪) 조선인 고학생 민족주의 그룹 “충성회” 사건 재판(在阪) 조선인 고학생 민족주의 그룹 “조선독립청년당” 사건 재경도(在京都)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 재명(在名) 조선인 민족주의 그룹 “와룡회(臥龍會)” 사건 재선교시(在船橋市) 조선인 고학생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그룹 사건 조선인 중등학교 촉탁 교사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분자의 책동사건 그 대부분의 경우가 협의만 가지고 체포하는 상황이였다. 12월 6일 송몽규, 윤동주는 고희욱과 함께 교또 지방 검사국으로 넘겨졌다. 고희욱은 기소유예로 인차 풀려났으나 송몽규와 윤동주는 2월 22일 기소되였다. 1944년 1월 19일 교또 지방재판소에서 첫 재판이 열렸고 이어 결심공판이 있었다. 윤동주는 1944년 3월 31일, 송몽규는 4월 13일에 결심공판이 있었다. 징역은 각각 2년이였다. 형은 같았으나 형 종료 시기는 윤동주는 1945년 11월 30일, 송몽규는 1946년 4월 12일이였다. 송몽규의 형이 더 무거웠다. 지난 2011년 7월, 일본 교또 검찰청은 송몽규의 재판 판결문을 최초로 전격 공개하였다. 물론 윤동주 연구자들에 의해 내용은 이미 알려진 상태지만, 일본의 검찰청 기록과에서 공식적으로 공개한것은 처음이다. 이는 “윤동주시비건립위원회” 위원장을 맡고있는 맡리쓰메이칸대학 종신 석좌교수인 안자이 이쿠로(安濟育郞·71)등 량지가 있는 일본의 학자, 언론인들의 공동의 노력으로 해볕을 보게 됐다. 안자이 교수는 국내외 평화 강연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최근 2∼3년 동안 노벨평화상 후보로도 추천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윤동주 판결문 공개와는 달리 유족의 공개 요구 승낙위임장을 요구해 송몽규의 조카인 송우혜 씨의 승낙서를 받아서 제출하였다. 7매로 된 송몽규에 대한 재판 판결문을 보면 청년문사이며 민족의 독립에 뜻을 둔 한 젊은이의 행보가 오롯이 그려진다. 판결문 내용을 보면 송몽규는 일본의 민족 말살 정책, 특히 언어 문화를 말살하는 사회 상황 구조를 파악하여 지적하고 있고 기존의 독립 운동의 한계를 자성하며 학구적 리론적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일본이 머지않아 대동아전쟁에서 패전을 할것이므로 그 시기에 맞춰 한꺼번에 대세를 몰아 조선의 독립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전략적 방법론도 전개하고 있다. 일제 형무소에서 스러지다 형이 확정된 송몽규와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였다. 쿠슈주에 있는 후쿠오카 형무소는 원나라와 고려의 련합함대가 상륙했던 하카다(博多) 만 앞에 있는 곳으로 서신정(西新町) 108번지였다. 일본의 형무소들 중 한반도에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어 조선인 죄수들이 많아 수감되였다. 이곳은 지금의 후쿠오카 자리하카다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후사키역에서 내리면 10분 거리에 있는데 지금도 후쿠오카구치소로 사용하고 있다. 송몽규는 머리를 깎고 죄수복을 입었다. 사상범인 연고로 다른 죄수들과는 달리 붉은 색 죄수복을 입었다. 감옥에서 그들은 최저의 인간대우도 받지못했고 로역에 시달렸다. 이때 일제는 패망으로 줄달음 치고 있었다. 일본 본토에 대한 미군의 폭격이 한창이였다. 1945년 2월 쏘소련의 대일 참전이 결정됐다. 일본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재소자를 재소자답게 처우할 처지가 아니었다. 감옥에 있는 조선인 복역자들은 일제에 큰 짐이 되고 있었다. 그들은 이들의 처치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생체실험이였다. 의문의 주사를 맞고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절명했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송몽규는 그 며칠 뒤인 3월 7일 윤동주를 따라갔다. 민족에 대한 충정과 민족문화에 대한 수호의 의지를 한 가슴 지녔던 애젊은 나이의 문사는 비참하게 적국의 땅에서 한줌의 재로 스러졌다. 윤동주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죽었고 송몽규는 눈을 감지 못했다. 시신을 거두러 간 아버지 송창희가 통곡하며 눈을 감겼다. 일제의 패망과 광복을 불과 5-6개월 앞둔때, “밤보다 깊은 꿈”을 펼치지도 못한 두사람의 원통한 옥사였다. 이들의 의문사에는 후쿠오카 형무소와 구주제대 의학부의 생체실험의 의혹이 강력히 제기되고있다. 후쿠오카 화장장에서 재로 변한 윤동주의 시신은 고향 룡정으로 돌아 왔다. 가족들은1945년 3월 6일 장례를 치르고 룡정 동산의 교회 묘지에 묻혔다. “시인” 윤동주 지묘라 비석을 새겼다. 한학에 밝은 윤동주 아버지의 친구 김석관이 비문을 썼다. 송몽규의 시신도 후쿠오카 화장장에서 재가 되였다. 명동의 장재촌 뒤산에 묻으며 가족들은 “청년문사(靑年文士)” 송몽규 지묘”라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역시 윤동주의 비문을 작성했던 김석관이 썼다. 1990년 4월 그들을 기리는 이들에 의해 송몽규의 묘는 룡정 동산으로 이전했다. 불과 몇메터 가까이 손잡힐듯한 곳에 친구 윤동주가 묻혀 있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삶과 죽음을 온전히 함께 한 벗이였다. 지성인들에 의해 근년에 송몽규의 “밤” 이라는 시 한편이 또 발굴되였다. “조선일보” 1938년 9월20일자에 실린 작품으로서 연희전문 1학년때 쓴것으로 보인다. 지금 우리가 찾아볼수있는 송몽규의 작품은 동아일보 공모에 입선된 꽁트 “숟가락”과 연희전문 시절 “문우지”에 발표한 시 “하늘과 더불어” 등 두편이 고작이다. 고요히 침전(沈澱)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맑고 고운 결 고운 마음, 잘 옹글은 사색으로 어두운 세상에 대한 고심이 깊은 시다. 벗인 윤동주의 시를 닮은듯 하지만 나름 깊은 시다. 그들은 같은 해에 한 집에서 태여났고 같은해 한 형무소에서 함께 죽는다. 참으로 기이한 운명이였다. 윤동주가 감성적이고 내성적이며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는 글발을 통해 저항의 표현을 했다고 한다면 송몽규는 일찍이 그의 문학적 재질이 인정 받으면서도 시대 상황에 대한 선견지명을 갖고 문학보다는 반일운동에 적극 뛰여 들었고 그 와중에 젊은 몸을 바쳤다. 오늘날 윤동주가 겨례 시인으로 높이 추앙됨은 천행이라 하겠다. 그런데 유감스러운것은 송몽규는 그에 비해 아는이가 적다. 뒤미처 한반도 나아가 그를 숨지게 한 적국에서 까지 사랑 받고 있는 친구의 곁에 우두커니 서있는 송몽규이다. 그러나 차라리 숙명의 동반자였던 윤동주가 옆에 있어 그는 외로웁지 않을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존재가 다시금 각인되는것은 그 역시 친구가 읊조리고 지켜왔던 생의 수칙처럼 “한점 부끄럼없이 주어진 길”을 걸어간 위인이기 때문이다. 소울메이트- 마음의 벗, 성격이 잘 맞는 사람들 사이를 가리켜 말한다. 요즘의 형용어를 빈다면 송몽규와 윤동주는 생사를 함께 한 소울메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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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0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0)
    팔미라유적의 서류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시리아, 지점: 수리아 중부의 한 오아시스함의: 수리아경내 “비단의 길”에서의 저명한 고대도시임 팔미라(巴尔米拉)는 동서의 상업무역통로에 있다. 서기 2-3세기 시기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요한 도시 중의 하나였다. 부유하고 휘황한 궁전은 바로 그 시기에 수건한 것이다. 기원 3세기에 들어 로마인들은 이 팔미라성을 공략한 후 대대적으로 빼앗아 냈으며 마지막엔 불을 질러 이 이름난 도시로 하여금 훼멸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팔미라성은 꽃과 같은 그 영광스러운 역사를 종말짓게 되었다. 지금 여기에는 페허만이 남아 당년의 그 위대하고 화려함을 말해주면서 묵묵히 서있다. 방불히 세인들한테 하나의 오랜 문명도시의 흥망성쇠를 말해주는듯 하다. 여왕의 전기 서기 267년, 팔미라국왕이 암살당하자 그의 미망인 자누비아 여왕은 유공자를 대신하여 집정, 자신을 “동방여왕”으로 자칭하였다. 여왕의 통치하에 나라의 변강지역은 부단히 확대발전하였다. 팔미라가 강대해지자 이는 로마제국의 경각성을 불러 일으켰으며 뒷따라 팔미라는 로마군사에 의해 함락됐고 여왕은 포로되었다가 후에 감옥에서 사망했다. 후에 시리아국민들은 여왕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그들의 화폐에 여왕의 초상화를 새겨넣었다. 아름다운 문명잔해 팔미라가 다종문화의 집중지방에 위치해 있기에 이 곳의 건축물들은 고대그리스풍격, 로마풍격, 이란풍격 및 당지의 전통풍격 등으로 완미하게 융합되었으며 신비하고도 화려하다. 팔미라유적에는 아직도 중앙거리, 석각개선문, 패륵신(贝勒神)무덤, 기둥복도, 왕궁 등 유적이 남아있다. 유적의 중심에 서있는 석각개선문은 “山”자형으로 정문과 부문이 모두 큰 방석을 깎아 만든 것이다. 중앙거리는 길이가 약 2000미터에 달하는데 거리 양측에는 750개의 원형돌기둥으로 구성된 기둥복도가 있어 웅위롭고도 아름답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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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9
  • 오묘한 세계 대백과(30)
    “곧추 날아예서 3000자요, 구천에 떨어지는 은하 믿기 어려워라.” 이는 중국 당조시의 대시인 이백이 폭포를 묘사한 저명한 시이다. 결백한 물이 고공중에서 날아떨어지며 폭포를 형성하는 것은 마치 부드러운 비단대와도 같아 아름답기 그지 없다. 그럼 폭포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폭포란 물흐름이 높은 곳에서 지세가 낮은 곳으로 떨어지면서 형성된 것이다. 이런 낙차가 비교적 큰 지세는 흔히 자연계 중의 높고도 큰 암석이 단렬로 인해 조성된 것이다. 단렬된 암석은 마치 층계와도 같아 한층은 높고 한층은 낮은바 물이 이 곳을 흘러서 지날 때면 날아 떨어지면서 아주 장관을 이루는 폭포가 형성된다. 그리고 위로부터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의 충격력이 매우 크게 되면서 그 물기둥이 아래의 암석을 호되게 내리치게 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암석에는 큰 “凹”자형 구명이 생기며 점차 이 것이 깊은 담으로 되기도 한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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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9
  • [칼럼] 김기종 사건으로 재활용되는 망국의 종북타령, 언제나 끝나려나?
    김무성은 리퍼트 대사에게 “종북세력이 한-미 동맹 깨려한 사건” 당·정·청 한목소리로 ‘종북!’, 과연 바람직한 나라 운영인가? 문재인 “피습당한 리퍼트 대사 외려 의연한데, 우리끼리 종북몰이?” 국민은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 ‘소통과 화합을 통한 국민대통합 정치를 펼치겠다’는 공약을 믿었다. 또 ‘대탕평책으로 인재를 고루 등용 하겠다’는 의지도 믿었다. ‘증세 없는 복지를 대통령이 되면 시행하겠다’는 약속도 믿었다. 하지만 집권 2년이 지나고 3년차에 들어선 지금 국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은 지역 안배나 고른 탕평은 차치하고라도, 각료 인사와 지역 안배, 지지자와 비지지자를 철저히 편가르는 행보를 보인 것은 아닌가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도는 바닥을 쳤고, 국정원과 검찰의 각종사건의 조작 의혹 내지 편파수사 등 사회적으로 각종 불신을 낳았던 사건과 판결로 인해 민심은 정부조직에 대한 신뢰를 거두어들였으며 연말정산과 대서민 세금폭탄은 급기야 조세저항 등 정권에 대한 저항의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는 현재이다. 이런 시점에서 ‘때마침’ 김기종 사건이 발생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사건 발생 직후 “우리나라에서 백주대낮에 미국 대사가 테러를 당했다는 것은 우리 국민과 정부에 있을 수 없는 충격적인 일”이라며 “어떤 목적에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단독으로 했는지 배후가 있는지 모든 것을 철저히 밝혀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해 이미 이 사건은 ‘테러’이고, 사건의 주모자는 ‘배후’를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규정해버렸다. 이는 대통령이 청와대 안에 있었다던 세월호 참사 때와는 달리, 국외에 있으면서도 대단히 신속하게 쏟아낸 발언이었다. 청와대는 이 사건이 있은 직후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의 주재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를 열고 “이번 사건 범인의 반미, 종북 행적 여부 및 활동에 대해 철저한 조사 및 배후세력 존재 여부 등을 수사할 것”이라는 방침을 정했다. 청와대와 정부 또한 어느 때보다도 민첩하게 움직였다. 우선 이병기 신임 대통령 비서실장은 지난 6일 총리공관에서 열린 고위 당·정·청회의에서 “금번 사건 자행한 범인 김기종의 지금까지 행적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고 배후 세력의 존재 여부 등을 수사를 통해 진상을 규명하며, 그에 따라 엄정한 조치를 취해나가겠다”고 공론을 모았다. 이병기 비서실장은 “우리 사회의 헌법적 가치를 부정하는 세력에 대해서 여러 가지 논의를 했으며, 향후 이를 방지하기 위해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 대목은 이 실장의 향후 행보를 가늠케 하는 잣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의 이같은 움직임이 있자 경찰의 움직임은 거의 반사적이었는데, 경찰은 청와대 방침이 결정된 직후인 이날 새벽 3시 40분쯤, 사건 혐의자 김기종 씨의 주거지와 사무실에 대해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새벽 4시40분에 기습적으로 압수수색을 집행했고, 이 과정에서 검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국가보안법적용’ 카드까지 꺼내드는 과잉충성(?)을 보였다. 새누리당 또한 청과 정의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 김무성 대표가 지난 8일 마크 리퍼트 미국대사를 문병하는 자리에서 “이번 사건은 종북좌파들이 한-미 동맹을 깨려는 시도였지만, 오히려 한-미 동맹의 굳건함을 확인하고 더 결속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언급했음을 박대출 대변인이 밝혔는데, 향후 대선 후보를 꿈꾸는 집권당의 당대표가 국민정서에 반하는 ‘종북좌파’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것은 국민들의 시선을 이끌기 충분했다. 박대출 대변인의 이날 브리핑은 리퍼트 대사 피습을 애둘러 ‘종북세력의 소행’으로 규정한 지난 6일 고위 당·정·청 회의의 기조를 그대로 이어간 것인데, 박 대변인은 김기종씨가 야당 집권 시절 7차례 방북한 사실과 통일부 통일교육위원으로 위촉된 사실 등을 꺼내들고 “김기종씨가 어엿한 시민운동가로 행세한 데는 야당 의원들과의 교류가 한몫을 했다”며 “새정치연합은 ‘종북몰이’ 운운하며 역색깔론을 펼칠 때가 아니라 ‘종북 숙주’에 대한 참회록을 쓸 때‘다”라고 말해, 새누리당은 이번 사건을 기회로 삼아 이용가치를 최대한 부풀려 볼 심산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반면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는 지난 8일 김무성 대표에 이어 리퍼트 대사를 문병 후에 “끔직한 사고를 겪은 리퍼트 대사가 오히려 의연하고 여유 있는 태도로 한국 사람들을 위로하는데, (앞서 문병한 김무성 대표가 ‘종북세력’은 운운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김기종) 사건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려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한-미 양국 관계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해 이번 사건과 종북몰이 프레임에 대해 우려와 경계의 뜻을 분명히 했다. 새정치연합 김성수 대변인 또한 은 새누리당의 ‘종북 숙주’ 공세에 대해 즉각적으로 “김기종의 과거 행적을 들먹이며 어떻게든 야당에 종북 올가미를 씌워보려는 그 속셈이 너무도 뻔하다”며 “(4.29 재보궐)선거가 다가오자 구시대적 종북몰이로 표를 얻어 보려고 하는 것은 매우 비겁한 정치행태”라고 반박과 아울러 맹비난했다. 같은당 오영식 최고위원 역시 9일 제71차 최고위원회의에서 “엊그제까지 머리를 맞대고 국정을 논의하던 제1야당에 대해 이때다 싶어 ‘종북의 숙주’ 운운하는 것은 어이가 없는 망발”이라고 비판했다. 우리나라 ‘현재’라는 브레이크 없는 열차 앞에는 넘어야할 민생의 산도, 건너야할 시대적 과제물도 너무나 많은 이시기에 과연 구시대적 ‘빨갱이론’에서 변종으로 탄생한 ‘종북’이라는 프레임에 누가 누구를 가두려는 것인가? 청와대는 물론이고 정부와 수사기관, 집권여당이 합세해 이번 미국 대사 피습 사건에 대해 미리부터 사건의 먼발치까지 훤히 내다보는 듯한 발언과 행태들을 보이는데, 이들은 수사가 마무리되기도 전에 벌써부터 수사범위와 대상을 포괄적으로 한정지어놓은 듯한 행태를 보이고 있고, 일부 편파적 언론에서는 이에 부창부수라도 하려는 듯 몇 날을 하루 종일 ‘종북타령’으로 일관하는 우리나라 작금의 형세는 망국의 길을 치닫고 있는 듯한데, 이와 같은 우리나라의 국세를 과연 누가 책임질 것인가? 국민은 결코 어리석지 않다. 오늘날의 국민들은 과거 이승만 정권에서 유신시대를 거치는 동안 입맛에 맞게 편작된 언론에 길들여진 그런 국민들이 아니다. 더 이상은 문맹이 이 나라 절반을 차지하던 저학력 시대의 암울한 국민들도 아니다. 이 나라 국민들 평균 학사이상 학력의 소유자이고, 인터넷과 소셜 등 첨단 소통능력과 운용지식을 보유한 세계적 수준의 지식노동자들임을 염두에 둔다면, 이 나라에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여야를 막론하고,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철저하게 국민의 눈높이를 의식해야 할 것이다. 누가 똑똑하고 어리석은 정치를 하는지, 누가 진정 국민을 위하고 대타협, 대화합을 이룰 리더인지, 이제 그 판단은 고스란히 국민들의 몫이라는 것을 아직도 모르는 권력자와 정치인이 있다는 것과, ‘종북몰이’로 표현되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국민들이 분명하게 가려낼 것이다. 즉, 모든 이 나라의 운명의 예측과 과거사에 대한 판단은 모두 고스란히 국민들 고유의 몫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망국의 종북몰이 이제는 끝내야 될 때다. <기사제공: 한국인터넷언론인협동조합>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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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9
  • [김혁 칼럼]“한국의 쉰들러”와 윤동주
    ●김 혁(재중동포 소설가) 1 무조건적인 희생으로 가족을 위해 로심초사하며 한 시대를 묵묵히 살아냈던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영화 “국제시장”이 한국역대영화 2위를 기록하며 흥행신화를 쓰고있는 가운데 영화의 들머리에 재현 된 “흥남대탈출사건”이 다시 회자되고있다. “흥남 대탈출”은 한반도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사(戰史) 중에서도 특별한 역사적 사건이다. 전시의 긴박한 상황에서 민간인의 철수를 돕기 위해 군인들이 자기 목숨과도 같이 여기는 작전용 중장비를 수송선에서 내려놓고 그 공간에 더 많은 피란민을 태워 수송했는데 그 수효가 무려 10만명에 이른다. “쉰들러 리스트”로 잘 알려진 독일인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 1908-1974)가 나치 수용소에서 구해낸 유대인의 수는 약 1,200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흥남에는 10일간의 짧은 기간 동안 10만 명의 피난민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세계 전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민간인을 탈출시킨 작전으로 기록돼 있다. “흥남 대탈출”은 오로지 인종, 국경, 종교, 이념이라는 모든 벽을 훌쩍 뛰어넘은 인간사랑이라는 큰마음이 움직였기에 가능했던 대서사극이었다. 이 “흥남대탈출”의 주인공은 바로 “의인”으로 불리는 현봉학이었다. 2 미군의 철수작전이 펼쳐지던 흥남부두에서 형봉학은 아비규환을 목격했다.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서 울부짖는 피난민들의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미10군단의 아먼드 장군을 붙들고 “저들을 살려달라”고 간청을 거듭했다. 그의 눈물겨운 노력에 감동한 장군은 군수물자를 버리고 피난민들을 태웠다. 이렇게 해서 배 193척에 나눠 타고 목숨을 구한 피난민은 9만8000여명. 마지막 수송선에 탄 1만4000여명은 12월25일 거제에 도착해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리웠다. 이 배에서 5명의 어린 생명이 태어났다.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玄鳳學) 선생은 1922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 모교에서 임상병리학을 강의했다. 미국 리치먼드의대에서 공부한 뒤 1950년 3월 귀국, 석 달 만에 6·25를 맞았다. 전쟁중 한국 해병대사령관 고문과 미10군단 사령관 민사부 고문으로 근무하던중 흥남부두에 이르렀고 10만여명의 피난민을 구하는 신화를 남겼던 것이었다. 휴전 후 다시 미국으로 간 형봉학은 펜실베이니아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토머스제퍼슨의대 등에서 교수를 역임했고, 연세대와 아주대 등 한국의 대학가에서도 후학 양성에 힘썼다. 2007년 86세로 별세했다. 3 윤동주의 묘소가 조선문학에 천착한 일본학자 오오무라에 의해 발견되여 세간에 공개되였음은 일반이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 오오무라 이전에 윤동주의 묘소를 찾으려 시도한 사람이 또 한분 있었다. 바로 현봉학 박사였다. 70세 로인이 될 때까지 윤동주를 전혀 몰랐던 현봉학박사는1984년 봄에 우연히 낡고 바래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초간본을 읽고 크나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해 8월 현봉학 박사는 재미동포 13명을 인솔하고 중국용정행차를 했다. 연변의 유지들과 지치주정부 외사처에 윤동주의 유적, 특히 묘소를 찾아주기를 부탁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윤동주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했다. 실망은 했으나 그들에게 윤동주가 뛰어 난 민족시인이었음을 역설하고 내년에 다시 방문할터이니 꼭 그 유적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오오무라에 의해 윤동주의 묘소가 발굴된 소식을 접한 현봉학박사는 또 서둘러 용정으로 날아왔다. 1988년 6월, 현봉학 선생이 주동이 된 미중한인우호협회의 연증(捐贈)으로 용정중학교 동창회가 수선을 하여 윤동주 묘소의 첫 개수 작업이 이루어졌다. 지금 우리가 용정 동산마루에 가면 볼 수 있는 시인의 유택은 그렇게 많은 “의인”들의 도움으로 세인들과 만났다. 은퇴 후 현봉학 박사는 윤동주 장학회를 설립하고, 용정중학에 윤동주의 시비를 건립하는 등 오직 윤동주 추모사업에 헌신하다가2007년에 타계했다. 지금도 시인의 고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용정중학의 시비를 마주할 때마다 이 의인을 떠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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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8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6)
    ■ 김철균 3 순자가 문영이란 애를 한번 만나보려고 했으나 기다리던 그 애는 며칠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애들과 물어보아도 그저 그애는 밖에 나다니기를 썩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라는 것만 알려줄뿐 더 이상 아는 것이 없었다. 순자는 한번 위생학교 기숙사를 찾아갈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무턱대고 찾아갈 명목도 없었다. 무턱대고 찾아가면 문영이란 애가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러는 사이 이틀이란 날자가 또 훌쩍 지나갔다. 순자는 이제 하루만 기다려서 오지 않으면 아무런 이유라도 달고 찾아가려고 했다. 순자가 이렇게 궁리하고 있던 찰라 마침 문영이가 찾아왔다. 순자가 “또 우표와 편지봉투를 사려는가”고 물으려 하는데 생각밖에도 문영이는 싸구려 빵 하나를 사려고 했다. 점심을 굶었는지 무척 허기진 모양이었다. “학생, 빵갖고 요기나 하겠어? 마침 상점에 금방 해놓은 뜨근뜨근한 밥과 국이 있으니 그걸 먹으라우.” 이에 문영이는 아주 놀라하며 순자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상점에서 국밥도 파는가 의아해하는 모양이었다. “돈을 받지 않을테니 근심마우. 워낙 내가 먹자고 지었는데 좀 많이 했수다. 다 딸같은 애들인데 그냥 학생한테 먹이고 싶어서 그런다오.” 그제야 문영이는 이것저것 눈치를 보면서 순자가 차려주는 밥과 국에 수저를 대였다. 그러나 의연히 의아해하는 기색이었다. “눈치보지 말고 그냥 먹수. 쯧쯧 얼마나 배고겠수?!” 진짜 몹시 배가 고팠는지 문영이는 제법 밥과 국을 맛스레 먹었다. “이름이 문영이라지? 우리 좀 얘기를 해볼까?” 문영이가 어느 정도 배가 찼겠다고 생각되자 순자는 문영이곁에 다가앉으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문영이도 다소 안심이 되는지 순자를 향해 약간 방그레 웃어보였다. 크게 접촉해보지는 않았지만 얼핏 봐도 순자가 착해보였던 모양이었다. “돈화에서 왔다지?” “예, 돈화 사하연의 산골에서 왔어요.” “집에는 어떤 식구들이 있지?” “어머니는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고 아버지는 장기환자로 힘든 일은 못하고 있어요.” 문영이는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쯧쯧, 농촌살림에 안사람도 없고 거기에 병까지 있다니… 그러구보니 학생도 몹시 외롭구 불쌍하구만.” 문영이를 보니 순자는 어쩐지 자꾸 눈물이 나왔다. 순자는 문영이더러 많이 먹으라며 밥과 국을 더 떠주었다. 문영이가 돌아갈 때 순자는 그녀한테 과자, 사탕 등 먹을 것을 호주머니에 가득 넣어주었다. 문영이가 뿌리치는 것도 “저녁에 허기질 때 요기하라”며 억지로 밀어넣었다. 한편 기숙사로 돌아온 문영이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세상에 아무리 맘씨고운 사람이 많다지만 “북해상점” 조선족 할머니의 거동은 어떻게 봐도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저 어머니가 다른 그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닐까? 그녀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조선족 여인들이 선량하고 동정심이 강하다더니 그렇다면 저 어머니가 서양의 명절 크리스마스에 나타난다는 산타클로스 노인같은 분이 아닐까? 그렇찮으면 조선족 여인들중에서도 남을 즐겨돕는 뇌봉같은 어머니? 맞아 꼭 뇌봉같은 어머니일것야…… 결국 문영이는 긍정적인 면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세상인심이 아무리 박하다 해도 어디에 가든지 좋은 사람은 있기 마련이라고 믿었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니 문영이는 저도 몰래 순자한테 마음이 끌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그 뒤에도 문영이는 몇번 “북해상점”으로 찾아갔다. 웬간해서는 외출하기 싫어하는 그녀었건만 “북해상점”의 김순자를 알고난 뒤에는 틈만 있으면 절로 그 쪽으로 발길이 돌려지군 하는 문영이었다. 결코 의도적이 아니었다. 허기진 배를 달래려고 찾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북해상점”에 가면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특히 순자와 마주할 때마다 문영이는 까마득히 오래되어 가물가물하던 친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면서 무척 따사로움이 느껴지군 했다. 한편 문영이가 찾아갈 때마다 순자는 맛갈스러운 음식을 내놓군 했다. 문영이가 올 것을 미리 알고 몰래 남겨 놓은듯이 말이다. 그것은 문영이를 위해 남겨놓은 것이 분명했다. 당시 문영이는 흔히 주말 저녁이면 순자가 운영하는 “북해상점”으로 찾아갔고 이에 순자 또한 문영이가 찾아올 것을 예견하여 맛있는 것을 만들어서는 남겨놓군 했다. 그러면 문영이가 와서 그 음식을 먹으면서 학교에서 있었던 재미나는 일과 책에서 읽은 장면들을 웃고 떠들고 손질발질하며 이야기했고 그것을 바라보는 순자의 마음은 흐뭇하기가 그지없었다. 그리고 문영이가 기숙사로 돌아갈 때면 순자는 어김없이 호주머니에 당과류같은 것을 불룩하게 넣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 12 회 모성애 1 고생스레 자란 애들이 남의 눈치를 많이 본다는 말이 있다. 이는 이런 애들이 자라온 생활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이런 애들은 자존심이 강하며 쉽게 남을 오해할 때도 많은 법이다. 이 면에서 흔히 여자애들이 더 심한 양상을 보이군 한다. 문영이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문영이가 “북해상점”에서 순자가 해준 국밥을 먹고있을 때 순자의 셋째 딸 영애가 시내로 일보러 나왔던 김에 친정 어머니가 차린 상점에 들렸다. 영애는 밥을 먹고있는 문영이를 보고는 이상해하며 어머니한테 물었다. “어머니, 누구세요?” 하긴 순자가 문영이를 딸처럼 대하면서 자주 밥을 먹이는 것 등에 대해 영감과 자식들한테 일언반구도 한적이 없는지라 영애가 알리 만무했다. “오, 위생학교 학생인데 엄마가 없고 아버지는 장애인으로서 몹시 불쌍한 애란다.” “그래요? 거 참 안됐구나.” 영애는 몹시 놀라는듯 하다가 인차 마음을 가라 앉히고는 문영이한테 다가 앉으며 살갑게 굴었다. 마음이 착하고 동정심이 많기는 영애 역시 마찬가지었다. “얘, 너 올해 몇살이지? 우리 한번 친해보자꾸나!” 하지만 영애가 낯설어서인지 문영이는 물어보는 대답이나 겨우 할 정도였다. 문영이는 어쩐지 순자한테는 어리광을 부릴 정도로 친근감을 느꼈지만 순자의 딸임에도 영애한테만은 저으기 눈치가 보였다. 자기가 불시에 나타났기에 문영이가 불편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영애가 문영이더러 시름놓고 밥을 먹으라고 자리를 피해주었지만 문영이는 그것마저 미안했다. 자기가 상점에 와서 밥같은 것을 먹으면 상점주인의 자식들이 좋아할 수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 뒤부터 문영이가 “북해상점”으로 다니는 차수가 차츰 뜸해졌다. 순자가 잘 대해줄수록 문영이는 자주 다니기가 더욱 무엇했다. 그럴수록 자기를 두고 영애네 형제들이 곱지 않는 시선을 보낼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웬간해서는 “북해상점”에 가서 밥같은것을 먹지 않기로 작심했다. 일부러 자제하기로 했던것이다. 한편 문영이가 상점으로 다니는 차수가 뜸해지고 어쩌다 와서도 웬간해서는 밥술을 들지 않자 순자는 이상스럽게 생각했다. 혹시 그날 영애가 문영이한테 그 무슨 상처가 될 말을 하지 않았나 해서 셋째 딸한테 따져 묻기도 했다. 셋째 딸 영애는 그 날 절대 문영이한테 서운하게 대하지 않았다고 재삼 설명했다. 순자는 여전히 시름이 놓이지 않아했다. “너희들이 앞으로 이 어미가 하는 일에 절대 참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줄줄 모르면 그것은 사람이 할 도리가 아니느리라.” 영애 역시 착하기는 형제들 중 둘째로 가라고 하면 서운해 할 사람이라 어머니의 말뜻을 너무나 잘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가뜩이나 발길이 뜸해지던 문영이는 언제부터인가 일주일 가량 지났어도 상점에 나타나지 않았다. (영애도 그애한테 별다른 소리를 하지 않았다는데…아무렴 영애가 그런 싫은 소리를 할 애가 아니지. 그런데 문영인 웬일일까?) 이제나 저제나 하고 문영이가 나타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려도 오지 않자 어느 날 순자는 상점에 온 학생들한테 문영이가 왜 상점에 오지 않는가고 물었다. “문영이 말인가요? 그앤 요사이에 된감기에 걸렸답니다. 기숙사가 추운데다 입은 옷까지 얇아 감기에 걸린 것이지요.” 그 학생의 말에 순자는 갑자기 속에 맺히는 것이 있었다. (아, 내가 왜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애가 분명 옷을 얇게 입은 것을 보면서도 말이야. 문영이의 엄마로 돼주겠다고 하면서도 애한테 밥이나 먹이는데만 만족하고…) 순자는 등한했던 자신을 책망하면서 내일엔 상점을 딸들한테 맡기고는 기어코 문영이한테 동복을 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순자는 무심중 밖을 내다 보았는데 하늘에서는 눈송이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안되겠군. 오늘 눈이 내리면 내일은 긍정코 눈보라가 터질 것이고 그러면 날씨가 더 맵짜고 추워질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을 굴린 순자는 더이상 지체할세라 상점문을 잠그고는 그 길로 백화상점으로 향했다. 백화상점에서 순자는 문영이가 입을 두터운 솜옷을 샀고 또한 돌아오는 길에 연변병원에 들려 문영이가 먹을 감기약을 샀다. … 그 날 순자가 문영이네 기숙사방에 들어서자 침대에 누운채 눈도 겨우 뜨고 있으면서 신음소리를 내고 있던 문영이는 불현듯 앓던 사람이 같지 않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순자의 품에 안기면서 서럽게 울었다. “마마(어머니),” “너, 정말 멍청하구나. 이렇게 된감기에 걸려갖고도 왜 엄마한테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느냐?! 너 아직도 이 엄마의 마음을 모르겠느냐?” 문영이를 껴안은 순자는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순자가 눈물을 흘리자 문영이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어머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어머니한테 찾아갈 용기가 없었어요.” 문영이는 잠시나마 생각이 짧았던 자신을 탓하며 더욱 소리내여 울었다. 그 날 순자가 문영이한테 가져간건 단지 한벌의 솜옷이나 한봉지의 감기약만이 아니었다. 문영이가 여태껏 받아보지 못했고 꿈속에서도 바라마지 않던 모성애였다. 그 날 문영이는 태어나 처음으로 스스로 자기는 행운아라고 자부해보았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3-06
  • “쌀겨, 비만 억제에 효과 있다”
    [동포투데이] 현미 도정 후 버려지는 쌀겨(미강)는 한 해 약 35만 톤. 이렇게 버려지던 쌀겨의 비만 억제 효과가 밝혀져 식품 소재로 활용이 기대된다. 연간 약 50만 톤의 쌀겨가 발생하는데, 이 중 30% 정도만 쌀겨유나 식용 효소, 화장품 원료, 사료로 이용되고 나머지는 농산 폐기물로 처리돼 쌀겨의 고부가 가치화와 폭넓은 산업적 이용에 대한 연구가 요구돼 왔다. 농촌진흥청(청장 이양호)은 충북대학교 이준수 교수 연구팀과 쌀겨에서 건강 기능 성분을 효율적으로 추출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그 추출물의 비만 억제 효과를 밝혔다. 이번 연구에 사용된 쌀겨 비검화물 추출물(USM)은 쌀겨에 알칼리 처리를 해 가수분해 했을 때, 검화(비누화)되지 않은 비검화 지질만을 핵산으로 추출한 물질이다. 동물실험은 실험용 쥐에게 △고지방 식이 △고지방 식이+저농도 쌀겨 추출물(10mg/kg/1일) △고지방 식이+중간농도 쌀겨 추출물(20mg/kg/1일) △고지방 식이+고농도 쌀겨 추출물(50mg/kg/1일)을 6주 동안 먹인 뒤 몸무게를 측정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실험 결과, 고지방 식이군은 6주간 약 43.5% 체중 증가를 보인 반면, 고농도의 쌀겨 추출물을 함께 섭취한 실험군은 체중 증가율이 약 33.2%에 불과했다. 특히, 부고환 지방 조직의 무게가 고지방 식이를 섭취한 쥐보다 약 60% 적었다. 지방 세포 크기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고지방 식이를 한 쥐는 지방세포의 크기가 눈에 띄게 증가했으나, 쌀겨 추출물을 투여한 쥐의 부고환 지방 세포 크기는 일반 쥐의 세포 크기에 가까웠다. 이같은 효과는 쌀겨에 들어있는 토콜즈(토코페롤+토코트리에놀), 감마-오리자놀, 파이토스테롤, 폴리코사놀 등 생리 활성 성분이 지방이 쌓이는 것을 막고 콜레스테롤을 낮춰주기 때문이다. 농촌진흥청은 충북대학교와 공동으로 ‘미강 유래 비검화물을 포함하는 항비만용 조성물’에 대한 특허를 출원(10-2013-0144154)하고,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LWT-Food Science and Technology 61(2015)’에 발표했다. 앞으로 기술 이전 업체와 함께 소재의 효능과 안정성을 확보한 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개별 인정 원료 인증을 완료할 계획이다. 농촌진흥청 중부작물부 박기훈 부장은 “이번 연구를 통해 쌀겨가 비만을 억제하는 것은 물론, 항비만과 다이어트 식품 소재로도 유용하다는 것이 입증됐다” 라며, “앞으로도 쌀을 비롯해 부산물의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는 연구를 계속해 나가겠다”라고 전했다.
    • 오피니언
    2015-03-05
  • [김혁 칼럼] 김학철을 다시 읽다
    ●김 혁(재중동포 소설가) 우리앞에 한 거인이 우람하게 뻗쳐 서 있다. 양쪽 겨드랑이에 목발을 짚은 척각의 로인, 하지만 깨끗이 늙은 강파른 얼굴에 사려 깊고 슬기가 넘치는 한쌍의 눈. 그이가 바로 중국조선족문단의 맨 들머리에 우뚝 각인된 김학철 옹의 모습이다. 어제 저녁(3월1일) 우리는 또 오랜만에 그이의 거룩한 형상과 마주할 수 있었다. SBS방송에서 스페셜 “나의 할아버지 김학철,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이 방영된 것이다. 스페셜은 선생이 끔찍이도 아꼈던 손녀 김서정양이 할아버지를 되돌이켜보며 그이의 려정을 따라 중국의 하북성, 한국의 밀양, 일본의 나가사키를 순례하는 과정을 통해 할아버지가 스스로 삶을 마감하면서까지도 끝까지 지키고자 한 것은 무엇이였는지? 그 답을 찾는 려정을 선생의 많은 영상기록물과 더불어 보여주었다. 평생 펜으로 불의와 싸웠던 “조선의용대 마지막 분대장”, “조선족 문단의 거목” 김학철의 파란많은 삶을 다시 돌이켜 본다. ▲조선의용대 마지막 분대장 김학철ⓒSBS 김학철은 1916년 11월 4일 북조선의 함경남도 원산에서 누룩제조업자의 둘째 아들로 태여났다. 본명은 홍성걸(洪性杰.).7세에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원산에서 제2공립보통학교를, 서울에서 보성고등학교를 다니다 1932년 약관 17세에 빼앗긴 조국을 찾겠다는 웅지를 품고 중국으로 들어왔다. 처음 상해에서 의렬단에 가입. 무정부주의자로 탈바꿈하여 반일지하테로활동 종사했다. 흰 셔츠에 검은 넥타이, 뒤주머니에 권총 한자루- 전형적인 당시 아나키스트들의 행색으로 쿨하게 상해의 황포강변을 누볐다. 1936년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했다. 1937년 중앙육군군관학교 (황포군관학교, 교장 장개석)에 입학하였다. 제1대대 제4중대에 편입되였으며 여기서 맑스주의사상과 접촉하면서 단순한 민족주의자로부터 맑스주의자로 변신하였다. 중일전쟁으로 3년제과정을 1년간 앞당겨 미친 김학철은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전신, 대장 김원봉)에 가입, 창립대원으로 제1지대 소속되었다. 창립대회 당시 주은래와 국민혁명군사위원회 정치부 제3청 청장 곽말약도 참석했다. 그해에 김학철은 화북항일전장에서 분대장으로 활약, 1939년 호남성 북부일대에서 항일무장선전활동을 전개했다. 1940년 가을에는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팔로군에 참가했다. 태항산에서 조선독립동맹 선전부의 선전간사로 일하였다. 부대의 수요에 따라 신문편집, 연극 극본, 가사집필도 하면서 문학적 끼를 선보였다. 이시기 단막극 “서광”, “승리”, “등대”등을 창작하여 무한, 류양, 태항산 등지에서 공연하였다. 1941년, 여름 김학철은 화북 팔로군 지역으로 들어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제2분대장으로 참전, 그해 12월 12일 하북성 원씨현 호가장(胡家庄)전투에서 대퇴골관통상을 입고 일본군에 포로되었다. 약 5개월간 석가장의 일본총령사관 경찰서 류치장에 갇혀있다가 그후 예심에서 치안유지법위반죄라는 판정을 받고 1942년 5월 일본의 나가사끼형무소 이시하야 본소에 이송되었다. 1943년 4월 29일 나가사끼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 미결가산 200일 언도를 받았다. 김학철은 나가사키형무소에서 원폭피해는 요행 면할수 있었으나 감옥에서 치료를 받지 못했다. 단지 전향서를 쓰지 않는다는 리유로 총상당한 왼쪽 다리를 치료받지 못하여1945년 2월 감옥에서 다리절단수술을 받았다. 김학철은 전쟁포로가 아니라 정치범으로 인정되여 나가사끼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 미결가산 200일을 언도받았다. 1945년 10월 6일 정치범을 무조건 석방할데 관한 맥아더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석방되었다. 해방받은 몸으로 서울로 돌아와 조선독립동맹 서울위원회 서울시 위원으로 활동했다. 1945년 12월 “주간건설” 잡지에 소설 “지네”를 발표했으며 그 후 1년간 육속 “문학”지에 “담배국”, “신문학”에 “균렬”, “서울문학”에 “어간유정” 등 10편을 발표했다. 1946년 조선으로 건너가 “로동신문”기자, 외금강휴양소 소장, “민족군대”주필등 직을 지내기도 했다. 조선전쟁이 일자 중국으로 들어와 저명한 여류작가 정령이 소장으로 있는 북경 중앙문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지냈다. 이동안 중편소설 “범람”, 단편집 “군공메달”을 중문으로 출판했다. 1952년 12월 자치주 주장 주덕해의 요청으로 연길로 와서 연변문학예술련합회 준비위원회 주임으로 임명 되였으나 반년만에 사직하고 전업작가로 맹활동했다. 1953년 9월 단편집 “새집 드는 날”을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출간했으며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 1, 2, 3부와 소설집 “고민” 중편소설 “번영”을 출간했으며 로신의 “아Q정전”을 번역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로신의 작품을 맨처음 조선문으로 번역한 작가이다. 1957년 중국 전역에서 불어친 반우파투쟁 속에서 “반동분자”로 획분되었다. 1964년부터 문제작인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를 창작하기 시작하여 1965년 5월에 완성했다. 1966년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이 폭발하자 그해 12월 반란파들에게 “20세기의 신화”원고가 발견되면서 필화를 입어 10년 유기징역 으로 판결, 추리구(秋梨沟)감옥에서 복역했다.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자 1977년 12월에 만기석방되었다. 하지만 그 후 3년간 의연히 반혁명전과자 취급을 당하는 신세였다. 1980년 12월 연변주법원에서 “원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로 선고한다”고 선포되여 1983년에 정식으로 루명을 벗었다. “20세기의 신화”는 미발표작인만큼 사회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원고의 집필 자체는 범죄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변주법원에서는 원 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로 선고했다. 무죄를 선고받는 공판정에서는 김학철은 “나는 일찍이 이 북간도땅에 이렇게 긴 땅굴이 있으리라군 꿈에도 생각을 못했었습니다. 이 “반동”이라는 무시무시한 명칭으로 불리는 땅굴은 사람이 한번 들어가기만 하면 강산이 두 세번씩 바뀌여서야 겨우 벗어날 수 있습니다.”고 감개에 넘쳐 당시의 심정을 밝혔다. 1983년 김학철은 국적문제를 철저히 해결하고 중국국적을 가졌으며 정식으로 공직에서 리직하였다. 1989년 12월에는 49년만에 당적을 회복하였으며 항일로간부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장장 24년의 정치박해로 상처받은 몸을 추슬리고 김학철은 다시 일어섰다. 이미 65세의 나이였지만 녹쓴 펜을 닦고 만강의 열정으로 창작활동을 재개했다. 1983년 항일회상기 “항일별곡”을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출간했으며, 1985년 “김학철단편소설집”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1986년 3월에는 장편소설 “격정시대”가 료녕민족출판사에서 출간되였으며 1987년 6월에는 “김학철작품집”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1994년에 한국 KBS로부터 “해외동포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이밖에 자서전인 “최후의 분대장”이 한국의 문학과 지성사에 의해 1995년에 출간되였고 1996년과 2001년에 걸쳐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와 산문집 “우렁이속 같은 세상” 한국의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되었다. 수백편의 수필과 잡문을 여러 신문, 잡지에 발표.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다권집 “김학철문집” 을 출판하면서 중국조선족문단은 물론 세계 한겨례 문단에서도 한획을 그었다. 학계는 “김학철선생의 문학은 우리가 세계문학과 대화할 수 있는 하나의 큰 창구인바 이 책이 우리 민족의 정신사에 있어서의 하나의 이정표로, 영원한 고전으로 될것”이라 내다보았다. 2001년 9월 25일 오후 3시 39분, 김학철은 85세를 일기로 연길에서 타계했다.   타계 20일전부터 자기의 병이 완치될 가망이 없음을 알고 가족의 부담을 덜기 위하여 자진 절식을 단행,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깨끗한 모습으로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 본인의 소원대로 유체는 화장해 두만강에 뿌려졌고 일부는 우편함에 담아 동해바다로 띄워 보냈는데 우편함에는 “원산 앞바다 행 김학철(홍성걸)의 고향 가족, 친우 보내드림” 이라고 적었다. 유언으로 자신이 평생 지켜온 생활신조를 남겼는데 바로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그것이였다. 김학철은 반일투사이며 중국조선족을 대변하는 민족작가로서 일평생 곡절많은 인생길을 걸어왔다. 식민지시대의 고난을 눈물겹도록 맛보면서 지낸 비애의 소년시절, 항일전쟁의 피와 불의 세례를 겪은 격정의 청춘시절, 일제침략자의 감옥에서의 인고의 시간, 서울, 평양, 북경, 연변에서의 지역을 넘나든 폭넓은 문필생활… 이렇게 파란많은 인생길을 걸은 작가는 고금중외에 드물다고 해야할것이다. 우리 문단의 지성인들이 정평하다싶이 “세상에 실로 열화 속에서 아홉 번 나보고 빙설 속에서 아홉 번 얼어보고 피못속에서 아홉 번 목욕해본” 작가가 있다면 그가 곧 김학철일 것이다. 잘 아는듯, 하지만 잘 아지 못한 김학철의 삶을 다시금 읽으며 우리의 작은 문단에 세계적인 지성들과 비견(比肩)할만한 인물이 있다는데서 큰 자호감을 머금었다. 전통의 연속과 재발견의 필요성은 지금 흔들림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환기시켜 준다. 지금 우리 조선족 공동체는 격변의 물굽이에서 미중유의 파고(波高)를 경험하고있다. 불굴의 저항의식으로 강렬한 비판정신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려던 김학철의 행보는 리뉴얼을 요구하며 고심하는 우리의 상황을 풀어갈수 있는 코드가 될 수 있고 우리 사회와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낼 수 있는 계시로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김학철의 올곧은 궤적은 오늘날에도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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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15-03-02
  • 해란강가에 울려 퍼진 봄날의 함성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조선 3.1운동의 연장선 1919년, 경성 탑골 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은 온 한반도를 휩쓸었고 그 충격파는 드디어 간도지역에까지 미쳤다. 간도지역 조선인들의 망국의 한이 어렸던 반일열조에는 불이 확 달렸다. 그 무렵 간도지역에서는 반일계몽교육운동의 심입과 반일단체의 흥기와 더불어 반일군중운동이 점차 온양되고 있었다. 간도의 반일지사들은 울라지보스토크와 니꼴리스크 등지를 중심으로 한 연해주와 연계를 가지고 공동으로 반일운동준비를 비밀리에 추진하고있었다. 연해주에 파견된 간도 간민회 회장 김약연 등은 그곳에서 대한국민의회를 성립하면서 국내외 각지에서 파견된 민족운동자와 회합하여 독립선언서의 작성과 그 선포에 관한 합의를 하였다. 2월 18일과 20일에는 국자가(연길) 장하리의 박동원의 집에서 구춘선, 김영학, 고평, 등 연변의 주요 반일지사 33인이 모여 비밀리에 회합하여 반일운동방략을 결의하였다. 이와같이 조직적인 준비를 다그치던 중 3월 7일 조선의 “3.1”운동 소식이 간도에까지 전해졌다. 이는 타향에서 망국의 설음에 떨고있는 이들로 말하면 하나의 강심제가 아닐 수 없었다. 간도의 지사들은 다시 협의를 거듭하여 용정촌 서전대야(瑞甸大野)에서에서 “조선독립선언서발표축하회”를 거행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용정을 집회장소로 정한 것은 용정촌이 당시 간도의 서울 격으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것도 있겠지만 더욱이 용정에 일본영사관이 자리 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영학과 배형식을 대회 집행회장과 부회장으로 추천하고 회의순서, 시위 노선 및 대회의 구호 등 문제를 세세하게 상의하였다. 날짜는 3월 13일로 정했다. "3.1"운동의 소식을 접한 용정 동명중학교의 교원 최봉익이 조선에서 "조선독립선언서"를 가져왔다. 3월 8일부터 간도의 독립운동가들은 최봉익이 갖고 온 "조선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인쇄하여 사람들 속에 산포하였다.1919년 3월 1일, 즉 조선에서 "3.1"운동이 발생한 당날 북경주재 일본공사는 중화민국정부 외교부에 “중국정부는 일본의 ‘우방’으로서 마땅히 조치를 대어 간도 지역에서 일어날 반일운동을 제지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만일 중국측에서 이 직책을 이행하지 못하면 일본은 중국을 돕는 견지에서 간도지역에 파행할 것이다."라고 경고를 내렸다. 3월 10일 일본영사관 국자가 분관에서도 총영사의 영을 받고 용정에서 있게 될 집회문제를 가지고 연길 도윤공서 외교과와 교섭하였다. 교섭에서 일본측은 중국측에서 군경을 파견하여 이번 집회를 제지시킬 것을 요구하면서 "만일 중국측에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일본은 자체로 군대를 파견하여 탄압할 것이다."라고 위협에 찬 언사를 던졌다. 원래 간도의 지방관부와 주둔군은 동병상련을 느껴 조선인들의 반일활동에 대해 방임하거나 동정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나 일본영사관으로부터 압력이 가해오자 어쩔 바를 몰라 했다. 이에 연길 도윤 장세전과 육군퇀장 맹부덕(孟富德)은 3월 12일 저녁 간도지역 조선인 반일단체지도자들을 불렀다. 그들이 천방백계로4시간 정도 권유하였으나 끝내는 설복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장세전과 맹부덕은 길림성 독군과 성장에게 처리방법에 대하여 지시를 바라는 동시에 군경들에게도 준비태세를 명령했다. 일본정부의 공갈에 맹부덕은 부대를 거느리고 용정으로 와서 일본인 상부지를 지키게 되었다. 이리하여 용정촌은 12일 저녁부터 중국 군대와 경찰, 일본영사관 경찰들의 삼엄한 경비로 무시무시한 공포의 분위기로 가득 찼다. 3.13대회의 준비처에서는 상부지 안에서 집회를 한 다음 그 길로 시위행진을 하여 일본영사관으로 쳐들어가기로 계획하였으나 지방당국의 태도가 갑자기 변하는 바람에 모든 것이 엉망으로 되었다. 준비처의 지도성원 사이에도 의견분쟁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원 계획대로 상부지 안에서 떳떳하게 회의를 하자고 주장하였고 어떤 성원은 필요없이 모험하지 말고 안전한 곳에서 집회하자는 의견을 견지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은 원계획대로 아침에 개회를 선포하자고 우기고 어떤 사람은 맹부덕과 담판하자고 하였다. 결과 준비처에서 대표를 파견하여 맹부덕과 담판하느라고 시간을 자연 지체되어 정오 12시에 집회를 시작하기로 결정지었다. 역사의 종소리 드디어 1919년 3월 13일, 결전의 날이 밝아왔다. 전날까지만 해도 아무일 없던 하늘이 갑작스레 흐려졌고 굵은 모래알을 동반한 모진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침부터 용정거리는 수런거리는 소요와 팽만한 기운으로 늠실이기 시작했다. 간도 각지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용정의 서전(瑞甸)벌판으로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흰두루마기며 치마저고리를 입은 남정네들과 여인들 지어 백발 로인들과 삼척동자들도 가세하여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이날 개산툰 지방의 사람들은 정동학교 교원과 학생들과 함께 12일 밤중부터 주먹밥을 만들어 가지고 80여리 밤길을 걸어 명동학교에 도착하였으며 달라자의 사람들은 새벽에 출발하여 명동학교에 도착하여 명동학교학생들과 함께 북과 나팔을 울리며 용정으로 행진 해 들어갔다. 동성용, 조양천, 차조구, 동불사, 루투구, 명월구, 장인강, 두도구, 의란구, 월청구, 위자구, 화전자, 석현, 연길 등지의 민중들도 대열을 지어 용정에 도착하였다. 간도 각 지역에서 사람들은 냇물의 지류가 강을 바라고 흘러들듯이 사면팔방에서 용정이라는 이 “간도의 서울”이자 조선인들의 의지를 대변하는 구심점을 향해 흘러 들었다. 원래 집회의 예정지점은 상부지 밖에 예수교 부속 영신학교 앞 공지였다. 11시부터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며 회장에 흘러 들었다. 이때 맹부덕이 거느린 보병과 기병들이 앞을 막아 나섰다. 이리하여 집회대오는 부득불 원래의 지점에서 동북쪽으로 700여 미터 되는 곳으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바로 당시 간도보통학교 뒷쪽(지금의 용정제1유치원마당) 부근 이었다. 회장 중앙에는 "정의인도", "조선독립 만세!"라는 오장기를 세웠다. 사방에서 모여 온 3만 여명에 달했다. 당시 용정의 인구가 9,000여명밖에 안되었던 실정을 감안해 보면 그 광경은 실로 미증유의 장관이었다. 이때 천주교회당의 종소리가 울렸다. 이 종은 당시 15세의 소년 림민호가 쳤다. 당년의 “종치기 소년” 림민호는 그 후 연변대학의 부총장을 지냈다. 그는 연변대학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 민족대학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 받고 있는 민족교육자이다. 림민호선생은 그날의 감격에 대해 이렇게 더듬었다. “…나는 그해에 15살밖에 안되었고 우리 집은 바로 용정촌 천주교교회당 울안에 있었다. 이날 나는 동네의 한 친구와 함께 교회당 종루로 올라가 있었다. 용정에서 전에 없었던 장관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대회장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대회는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이에 나는 친구와 함께 종을 번갈아가면서 힘껏 쳤다. 그때 우리가 종을 울린것은 우리 대회의 시작을 독촉하기 위한것이였다.” 홍안소년에 의해 울려퍼진 이 종소리는 지난 세기 10년대 우리 민족투쟁사에서 가장 뜻깊은 반일집회의 개막을 이끌었다. 이 력사적인 종소리와 함께 김영학이 대회를 선포했다. 우선 "간도거류 조선민족일동" 명의로 된 "독립선언서포고문"이 낭독되었다. "우리 조선족은 해방을 선언하노라. 지위를 선언하노라. 정의를 선언하노라. 인도주의를 선언하노라! 우리는 영광스런 력사를 지닌 민족이요, 또한 근로한 민족이 노라. 그런데 우리를 훼멸하고 타파하려는 자가 있도다. 우리 조선족은 강권의 기반하에서 신음하고 농락 된지도 어언간 여러 해 열력하였도다. 이는 부정이라 할 수도 없겠다. 위미부진한 약소인생의 자연화원이라 뉘를 원하며 뉘를 탓하리오. 그러나 지사의 눈물은 바다를 채웠고 우민의 원한은 창천에 미쳤도다. 하늘의 귀가 백성의 목소리에 향하고 하늘의 눈이 백성의 시야로 향하여 세운이 일변하고 일도가 갱신할 제 정의의 종소리는 큰 거리에 울리고 자유의 항선은 앞 나루에 닿았도다. 강국의 비행기, 잠수함은 바다 속에 침몰되고 약자의 기발은 춘풍에 나붓기누나. 오인(吾人)은 천민 속의 한 사람이오, 약자 속의 한 사람이라. 오늘 천명에 순종하고 인심에 응하여 천만 민중이 일제히 한 입 같이 자유찬가를 부르며 쌍수를 굳게 쥐고 평등의 태도로 전진하는 바이로다. 저 동양문명의 수뇌, 동양평화의 보루라고 자처하는 일제의 침략으로 하여 현 정세에 변천을 가져왔도다. 오인은 이를 회고 하야 문득 깨달음이 있으니 오인이 성의를 량찰하야 묵인 특허하리라. 민중들은 한 맘 한 뜻으로 단합 하야 침략자들이 간도 땅을 짓밟지 못하도록 할지어라. 모든 사람은 다 이런 신성한 책임이 있거늘 우리 간도의 80만 조선족 민중은 황천의 명소에 갈지 언정 인류의 평등을 위하여 있는 힘을 다 바칠 바이어라." 포고문을 읽은 다음 3장공약이 발표되었다. "첫째, 오인들의 이 거동은 정의, 인도, 생존, 존엄을 위하는 요구인 즉 배타적 감정으로 광분치 말라. 둘째,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발표하라. 셋째, 일체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오인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데까지 든지 광명정대케 하라." 공약이 다 낭독되자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으며 머리위로는 태극기가 수풀처럼 나붓겼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곳으로 이주한 이들은 한민족의 뿌리와 력사적 소명의식을 자각하고 목청껏 만세를 외치고 또 외쳤다. 만세소리는 해란강가에서 오래도록 메아리 쳤다. 이어 시위행진이 거행되었다. 시위대오 맨 앞장에 명월구에서 온 공덕흡이 "조선독립을 성원"이라는 오장기를 들고나섰고 큰 폭의 태극기를 추켜든 명동학교, 정동중학교의 교원과 학생들로 구성된 300여명의 충열대가 앞장에 섰다. 그리고 그 뒤로 각지에서 모여온 군중대오가 따라 섰다. 시위자들은 "조선독립만세!", "일제의 침략을 반대한다!", "친일주구를 타도하자!"라는 구호를 높이높이 외치면서 호호탕탕하게 상부지 안의 일본 간도총영사관을 향하였다. 시위군중들의 행동에 감화 된 일제경영학교인 간도보통학교의 200여 명 학생들도 교장과 교원들의 제지를 물리치고 학교 문을 뛰쳐나와 시위행렬에 뛰어들었다. 이에 관해 당시 "독립신문"의 생생한 기재가 있다. "3월 13일, 보통학교 왜놈교장이 반일군중대회를 거행한다는 소식을 탐지하고 전교학생을 교실 안에 가두어 놓고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하늘땅을 울리는 '조선독립만세!'의 구호소리를 듣자마자 학생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팔을 휘두르며 '만세'를 외치면서 유리창문을 부수고 뛰쳐나와 거리에 달려가 시위 행렬에 참가하였다. 이 광경을 본 왜놈교장은 저도 모르게 '10년 교육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되었구나.'라고 탄식하였다."("독립신문"1920년 1월 1일) 상부지 가까이에서 시위군중들과 막아서는 군경들 사이에 몸 싸움이 시작되었다. 격노한 군중들은 돌멩이를 가로막는 군경들을 향해 뿌리면서 계속 밀고 나갔다. 그 긴박감과 결연함에 왜놈들은 질겁했다. 땅! 이때 총성이 울렸다. 맨 앞장에 오장기를 들고 나섰던 기수 공덕흡이 쓰러졌다. 이날의 거사를 암묵적으로 지지했지만 일제의 강요에 못이긴 중국경찰대장 맹부덕 부대는 당황한 나머지 시위대를 향해 일제히 발포하기 시작했다. 총소리는 연이어 울렸고 앞장 선 사람들이 하나 둘 쓰러졌다. 적수공권의 시위대오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흩어졌다. 혼란 속에서 주도자들은 즉시 시위대오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사람들을 휘동하여 쓰러진 사상자들을 “제창병원”으로 호송하였다. “제창병원은 1914년 캐나다 선교사 바커(A.H.Barker)부부가 용정촌 동산(東山)에 설립한 병원으로 독립운동가의 정치적 피난처로 역할을 담당하였던 곳이었다. 이 병원 지하실에서 북간도의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이 인쇄되기도 했었다. 마진, 김영학, 김병흡 등 주도자들은 일부 군중들을 거느리고 여전히 상부지에 남아 사건의 시말을 열거하면서 사후대책을 대기전에는 물러서지 않겠다고 강력히 항의하였다. 그들과 더불어 구춘선, 리봉우, 고용환, 강구악, 박승필등 간부들은 국자가에 가서 중국정부는 마땅히 사상자에게 치료비와 배상금을 지불하며 사건을 조작한 자들을 엄벌할 것을 연길도윤공서에 제출하고 항의를 표시했으며 길림성 성장과 북경정부에 향해 지방군경들이 시위군중들에 대한 탄압에 항의를 표시하고 나서 정부에서 이번 사건을 책임지고 처리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지방정부에서는 14일에 용정에 60여명의 군경을 증파하고 엄밀히 경계하면서 사건이 눅잦혀 질 때까지 현장을 유지하도록 명령하였다. 3월 13일에 일제와 지방군경들의 탄압으로 당장에서 희생된 사람은 10명으로서 공덕흡, 박상진, 정시익, 김태균, 김승록, 현봉률, 리균필, 박문호, 김흥식, 장학관이었다. 13일 후 17일 사이에 최익선, 현상호, 리유주, 차정룡 등 4명이 희생되었다. 이밖에 17일 후에 희생된 이들로는 김병영, 채창헌, 김종묵, 원용서, 허준언 등이었다. 13일 시위에서 남성 36명, 영성 12명 도합 48명이 부상을 입고 남성 84명, 여성 10명이 체포된 것으로 이 숫자는 1920년 1월 22일 "독립신문"에 집계되어 실렸다. 3월 17일, 용정의 각계인사들은 의사회를 조직하였다. 3천여 명의 애국청년들과 민중들이 날창과 몽둥이를 휴대하고 다시 용정에 집결하여 열사들의 시체를 메고 가두행진을 하면서 희생된 열사들을 추모하고 일제와 반동군경들의 탄압에 항의해 나섰다. 그들은 용정 제창병원 앞에 모여 발인제를 지내고 "조선독립수난자"란 현수막과 14명 수난자들의 령구를 메고 용정 동남교회에 있는 합성리 공동묘지에 가서 안장했다. 묘소에 "충렬자제공지묘"라는 묘비를 세웠다. 용정의 3.13반일시위 운동의 함성은 간도 각지는 물론 북만과 남만일대까지 울려 퍼지여훈춘, 화룡, 개산툰, 삼도구 등 북간도 각 지역에 들 불처럼 번져 5월 1일까지 30여 곳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오늘날 학계에 의해 “해란강반의 봄우뢰”라고 지칭되고 있는 용정의 3.13반일시위 운동은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반일투지를 크게 고무해 주었고 앙양된 반일정서를 불러 일으켰다. 이는 간도지역 조선인민대중의 첫번째로 되는 대규모적인 반일투쟁사건이었다. 이는 조선인민대중들의 불요불굴의 반일정신과 힘을 과시하였을 뿐더러 일제의 미친듯하던 기염을 여지없이 꺾어놓았다. 3.13반일시위운동은 일제와 그 사촉을 받은 중국 군경들의 총칼에 무자비하게 진압당했지만 이 의거는 그 이듬해 1920년 용정에 있은 간도 일제은행의 15만원 탈취사건과 봉오동, 청산리투쟁으로 이어진다. 비무장 독립운동의 한계를 인식하고 바로 무장독립투쟁으로 전환했던 것이다. 반일의사능을 조성 오늘날 용정의 도심이 되어 제일유치원이 들어서 있는 그 날의 집회장소에는 “서전대야유적지(瑞甸大野遺跡地)”라고 쓰여진 기념비가 외롭게 서있다. 또 용정에서 남녘 삼합 쪽으로 미루나무가 늘어선 논둑 길을 따라 차로 5분정도 가면 큰 길곁에13기의 묘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광신향 합성리묘지, 3.13반일의사릉(3.13反日義士陵)이다. 이 묘역의 조성은 용정시 대외경제 문화교류협회 회장 최근갑 옹(90)의 공로와 갈라놓을 수 없다. 윤동주가 다닌 은진중학의 후배로 용정의 “산 증인”으로 불리는 그는 다년간 “용정 3.13”기념사업회의 회장 직을 맡고 3.13운동에서 희생 된 반일의사들의 묘지를 성역화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1989년 최근갑 옹은 “3.13의사릉 수복위원회”를 설립하고 다섯 차례의 현지답사를 거쳐 1990년 4월 10일에 의사들의 묘소를 확정했다. 이어 5월에 “3,13반일 의사릉묘 수복 및 순난의사 추모식”을 장중하게 거행했다. 1994년 이 묘역은 용정시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3.13반일의사릉에는 그날 만세를 목청껏 부르다 순직한 13인 열사의 봉분이 두 줄로 안장돼 있다. 그앞에 서면 민족독립의 결연한 의지로 고결한 생명을 바쳐가며 외쳤던 영령들의 기개에 찬 함성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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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1
  • 영화“국제시장”을 보지 않은 이유
    기성세대는 물질적 성과로 자만하지 말고 國家價値 퇴보에 자괴감 느껴야 시내의 극장을 지나가며 그 김에 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는데도 일부러 그 말 많은 국제시장을 안 봤다. 언론에서는 연거푸 가난 속에 나라소득을 높인 기성세대를 젊은 세대가 이해하도록 기여했다며 찬사를 늘어놓고 있지만 사회의 가치는 쌓아놓은 물질소득이 전부가 아니다.국제시장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대한민국이 건국과정에서 이룩된 기존의 민주주의 국가제도를 하나하나 무너뜨려 오늘날의 불평등사회로 바꿔오던 기간이었다. 그 세월동안 살아왔던 기성세대는 민주사회를 말아먹은 장본인들이었다. 초기의 민주사회가 불평등사회로 바뀐 것에 대해 진보라는 자들이 큰소리칠 자격이 없는 것은 그들이 그 과정의 가장 큰 협력자이었기 때문이다.대표적인 국민기회균등파괴는 중고교평준화와 한글전용이었다. 이것은 진보라는 자들이 주도하고 보수기득권은 못이기는 척 따른 것이다. 가진 것이나 배경 아무것도 없는 집안의 아이라도 오직공부만 열심히 하면 공립의 영재학교에서 길러주는 제도를 없앴다. 조선시대와 달리 국민 모두가 知的언어를 배우고 사용할 수 있었던 시대도 얼마안가 단절되고 말았다. 자기들은 윗세대가 이뤄놓은 민주제도의 혜택 속에서 당장 가진 것은 없어도 노력과 능력만 있으면 삶을 개척할 기회를 가졌지만 자기들이 누린 민주제도를 말아먹어 노력을 해도 앞길이 보이지 않는 세상을 만든 것을 기성세대들은 과연 功致辭할수 있을까. 그렇다면 모아둔 재산을 물려줄 자식에게나 할 것이지 기회를 박탈당한 다른 젊은이들 앞에서 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국제시장은 민주주의 기회균등의 국가에서 국민기만적인 봉건주의 신분사회의 국가로 몰락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기에 그 괴로운 과정을 굳이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연변통보 朴京範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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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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