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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4) 버킹엄궁전
    버킹엄궁전의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영국, 지점: 런던 템즈강변 함의: 영국왕실의 최고상징임 18세기 초, 영국의 버킹엄공작은 템즈강변에 한채의 관저를 지었는데 후에 조지 3세가 버킹엄 공작한테서 이 관저를 사서 안해한테 선물, 그 때로부터 이 관저는 “여왕궁”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1825년, 조지 4세가 이 왕궁을 개작하였는데 그 때로부터 버킹엄궁전은 황실가족이 사는 관저로 되었다. 그리고 제일 첫 사람으로 이 궁전에 들어간 사람은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현재 버킹엄궁전은 의연히 영국왕실 성원들이 거처하는 궁전으로 이는 영국왕실이 최고 상징으로 되고 있다. 주체건축물 버킹엄궁전은 “口”자형으로 된 3층 건물로서 주체궁전은 동쪽방향으로 마주 앉았다. 왕궁의 서쪽 측면은 정면 궁전으로 그 중 가장 큰 “황실무도청”은 1850년에 건설된 것이며 전문 빅토리아 여왕을 위해 수건한 것으로 무도청 내에는 대형 수정등이 걸려 있다. 그리고 어좌실(御座室)내에는 당년에 국왕이 쓰던 어좌가 보존돼 있으며 사방 둘레에는 15세기 장미전쟁 때의 장면이 그려져있다. 다음 궁내 음악실의 꼭대기는 정원형으로 돼있는데 상아와 황금 장식으로 조성되었다. 버킹엄궁전의 부대건물로는 황실화랑(皇家画廊), 황가마구간과 화원으로 건설돼 있다. 그 중 화랑과 마구간은 이미 대외에 개방돼 있다. 버킹엄궁전의 광장 버킹엄궁전 정문앞의 광장중심에는 천사의 형상으로 조각된 빅토리아 여왕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또한 영국레알위병대가 보초교체를 하던장소로서 매년 4 – 9월, 레알위병대는 매일 오전 11시 30분부터12시 30분 사이에 보초교체의식을 한다. 그 외의 달에는 2일에 한번씩 하는데 매번 교체의식을 할 때면 군악과 구령소리속에서 머리에 멋진 모자를쓰고 몸에는 붉은 상의와 검은 색 바지를 입은 영국레알위병대가 각종 대렬표현을 하게 되는데 황실분위기가 아주 농후하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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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9
  • 한중 미혼남녀 내 짝 찾기 행사 열린다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국내 중국조선족커뮤니티 중국조선족대모임은 4월 26일(토) 오후 3시부터 영등포구 대림동에서 누군가 만날 기회를 찾지 못하거나 업무에 바빠서 결혼 상대자를 찾지 못한 미혼(돌싱)남녀들에게 만남의 기회를 마련해주고자 사단법인 GK희망공동체와 공동으로 미혼남녀 내 짝 찾기 행사를 개최한다. 행사는 서로의 마음을 열 2시간의 레크레이션과 1시간의 문화 오락 공연을 특별히 준비해 솔로들의 유쾌한 만남의 장을 이끌 예정이다. 참가자는 국적구별없이 30~50 연령대이며 솔로를 탈출해야하는 절절한 이유 등을 고려해 선정할 예정이다. 특히 이번 행사 참가자 중 커플이 성사되면 제주도 vip 관광기회와 무료결혼을 제공할 예정이다. 참여방법은 간단하다. 이번 기회에 솔로 탈출하고 싶은 분들은 4월 20일까지 이메일 hyz7302@hanmail.net 에 메일을 보내거나 행사공지사항 http://cafe.daum.net/yanji123/Jq0S/66 에 비밀 댓글로 신청하면 된다. 행사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02-6013-6635로 문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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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9
  • 광주시, 다문화가정 모국방문사업 추진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광주광역시는 태국에서 태어나 광주로 시집 온 결혼이주여성 5가정이 가족들과 함께 친정을 방문하는 ‘다문화가정 모국방문사업’을 추진한다고 9일 밝혔다. 다문화가정 모국방문사업은 결혼이주여성의 이국생활에 대한 외로움을 해소하고 엄마와 아내 나라를 이해하며 가족간 유대감 증진을 위해 광주시가 지난 2012년부터 실시하고 있는 특수시책이다. 올해는 태국 다문화 5가정 20명을 선정, 6월23일부터 6박7일 일정으로 모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모국방문 신청은 소득수준 최저생계비 150%(4인가구 월 244만6000원)이하인 태국 다문화가정으로 오는 19일까지 해당 자치구에 신청서를 제출하면 된다. 방문 가정에는 왕복 항공료, 교통비, 기념선물비 등 모든 비용이 지원된다. 그동안 광주시는 2012년 베트남 다문화 5가정 20명, 2013년 몽골 다문화 5가정 19명이 모국을 방문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정수택 광주시 사회복지과장은 “다문화가정 모국방문 사업은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친정을 방문하지 못하는 다문화가족들에게 그리운 가족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사업이다”라며 “광주시는 민간 등의 후원을 받아 다문화가정의 모국방문 사업을 계속 지원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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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9
  • [단독]사진으로 보는 북한인들의 사랑과 혼인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북한에서 연인들 사이에 문안인사를 주고받는데 여러 날이 걸리고 만나서 손을 잡고 키스를 하는데 6년이 걸린다고 중국 텅쉰망이 8일 보도했다. 보도는 북한인들의 연애와 혼인관을 전면 분석하면서 관련 사진들을 모아 발표했다. ▲ 사진은 북한 평양의 연인들이 자전거를 타고 평양 대동강을 달리고 있는 모습. 혼인은 장기간 줄곧 북한인들 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 되어왔다. 인구자료국의 보고서에서 2008년, 25세―29세 북한 처녀들 가운데서 25%만이 결혼하지 않았으며 30세―34세 처녀들 가운데서는 4%만이 결혼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에서는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야만 진정한 성인으로 간주하고 있다. ▲ 사진은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과 아내 리설주가 행사에 참가한 모습. 북한에서 자유연애는 잘 접수되지 않는다. 중학교시절, 지어는 대학교에서도 남녀학생 지간의 연애는 엄히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목전 자유연애로 결혼하는 사람들이 날로 많아지고 있다. ▲ 사진은 한쌍의 연인들이 대동강변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시보”의 기자 바바라가 “탈북자”들을 인터뷰해 쓴 저서 “우리가 가장 행복하다”에서 북한의 연인들은 어둠속에서만 손을 잡는데 최근년에 북한이 점차 현대화됨에 따라 이는 구식으로 되었다고 쓰고 있다. ▲ 사진은 한쌍의 연인이 손을 잡고 평양거리를 거닐고 있다. 북한의 부부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소개로 만난다. 때문에 여러 사람과 선을 보았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대상자를 경상적으로 바꾸는 것은 여성에게 있어 오점으로 된다. 때문에 대부분 여성들은 평생을 함께 할 대상자라는 확신이 있어야만 연애를 시작한다. ▲ 한쌍의 연인들이 평양 대동강변에서 휴식하고 있다. 허다한 서방사회에서 혼인, 성과 자식은 꼭 일체화가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북한과 왕조문화에서 이 3자는 일체화가 되어있으며 완전한 가정의 세 구성부분으로 되어있다. ▲ 사진은 배드민턴 라켓을 든 부부가 평양의 한 공원을 거닐고 있다. 결혼상대를 고르는 표준은 북한에서 시기마다 다르다. 지난 세기 90년대 식량위기 이전에는 당원, 퇴역군인, 대학생 등이 일등 신랑감이였다. 하지만 21세기 이후 북한인들의 의식에는 거대한 변화가 발생했다. ▲ 사진은 2006년 5월 17일, 한쌍의 연인이 평양의 한 공원 의자에 앉아있다. 평양 남성들이 대상자를 고르는 표준은 제1등급은 부모가 권력도, 돈도 있는 집안의 처녀이고 2등급은 직장에 다니는 대학졸업생 처녀이며 3등급은 작은 장사라도 하는 처녀라고 한다. 하지만 가장 선호하는 대상자는 뛰어나게 예뻐 중앙당5과에 선발된 처녀, 영화배우거나 무용배우 및 가수들이다. ▲ 사진은 한쌍의 연인들이 평양의 한 스케이트장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있다. 북한의 법정결혼년령은 남성은 18세, 녀성은 17세이다. 헌데 미국의 한 인구데이터에 따르면 북한 남성들의 평균 결혼년령은 29세, 녀성은 25.5세이며 부부의 년령 차이는 평균 5.5세, 대부분 남성들이 연상이였다. 그 원인은 북한 남성들은 5년―10년간 병역의무를 완수해야 하고 녀성들은 대학을 졸업한 후 2년―3년간 사회봉사를 하며 “조국에 보답”해야 하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사진은 2012년 9월 8일, 한쌍의 연인들이 평양의 한 낙원에서 골프를 연습하고 있다. ▲ 사진은 2012년 4월 7일, 한쌍의 연인들이 김일성대학 수영장에서 수상스키를 타고 있다. 북한인들은 외국인과의 결혼을 상상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명문으로 불법으로 규정돼 있다. 북한국적이 아닌 남성이 만일 북한 여성과 북한법률이 허용하는 결혼을 하려면 우선 국적을 북한공민으로 바꿔야 한다. ▲ 사진은 2012년 10월, 한쌍의 신혼부부가 평양의 한 문화공원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북한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는 합환주를 마시고 맞절을 하며 부모님들에게 큰 절을 올린 후 혼례차로 김일성동상 앞에 와 꽃다발을 드리고 기념촬영을 한다. 그리고는 다시 혼례차에 앉아 평양시내 여러 곳에 다니며 기념사진을 찍고 녹화를 한다. ▲ 사진은 2012년 4월 17일, 한쌍의 신혼부부가 김정일과 김일성 초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건당기념탑, 5.1경기장, 주체사상탑, 만수대예술극장 등 곳들은 주요 기념촬영장소들이다. 이런 곳들을 선택하는 것은 정치적인 의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런 곳들은 시설들이 좋고 찍혀 나온 결혼사진 효과도 좋기 때문이다. ▲ 사진은 2003년 10월 24일, 한쌍의 신혼부부가 북한 개성의 한 공원에서 결혼사진을 찍고 있다. 결혼사진을 찍은 후 결혼 피로연을 베푸는데 피로연에는 친척, 친구들과 신랑, 신부의 동료들이 초청을 받고 참가한다. 최근년에는 흔히 DVD기기와 노래기기들을 볼 수 있는데 신랑, 신부도 초청에 응해 노래 한곡을 부른다. ▲ 사진은 한쌍의 신혼부부가 가족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북한에서 중년부부들은 혼인이 파렬됐다 하더라도 감히 이혼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것은 이혼에 대한 전반 사회의 부정적인 평가 때문이다. 일단 이혼이 알려지기만 하면 “자산계급의 부패사상에 물젖었다”는 꼬리표가 붙는가 하면 아이의 전도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준다. ▲ 사진은 신혼부부가 평양 만수대 김일성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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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9
  • 서울시, 유명 외국인주민과 함께 다문화 이해교육 실시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서울시는 서울생활에 성공적으로 적응하며 사회적 인지도가 높은 외국인주민을 초청해 특강 형식으로 ‘교실로 찾아가는 다문화 이해교육’을 분기별로 실시한다고 밝혔다. 유명 외국인주민 초청 특별 강연은 작년부터 시작되었으며 반응이 좋아 금년부터 분기별 연 총 4회로 횟수를 늘려 실시할 계획이다. 유명 외국인주민의 강연은 단순한 자국문화소개 수업이 아닌 강연자 삶의 연장선상에서 생생한 경험담과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통해서 진솔한 한국정착기를 들려줄 예정이다. 4월 11일(금) 서울대학교사범대부설중학교 강당에서 800여명 대상으로 대규모 수업을 진행하며 참여 학생들이 외국인과 직접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예정이다. 올해 첫 번째 강연자는 스리랑카 출신인 이레샤 페레라씨로 이주여성자조단체 ‘톡 투 미’ 대표이자 KBS 1TV 러브인 아시아 고정 패널 등 다양한 방송 활동으로 이름을 알렸다. 또한, 2013년 KBS 다문화대상 한울타리상을 수상한 바가 있으며, 항상 유쾌·상쾌·통쾌한 이미지로 사랑을 받고 있다. 서울시는 이같이 유명 외국인주민 강연시리즈 추진을 통해 서울 거주 외국인에 대한 글로벌문화교육을 강화해 성숙한 다문화 시민의식 함양에 한발 더 다가선다는 계획이다. 윤희천 서울시 외국인다문화담당관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사회적으로 잘 알려진 외국인과 교류·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이를 통해 문화 다양성에 대한 이해력 및 다문화 감수성을 키우는 데에 도움을 주겠다.”며 “이와 함께 서울 거주 외국인들이 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소통의 장을 만들어 서울시민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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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9
  • [단독] "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 7 )
    ■ 허길성 (전번기 계속) 중앙군위 문화학교에서 나온 우리는 군용트럭에 앉아 무석시구역을 빠져나와서는 서쪽을 바라고 그냥 달리기만 했다. 달리는 중도에서 학생들은 여러가지 추측을 하였지만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만약 복건쪽으로 간다면 반드시 기차에 올라야 하겠건만 트럭에 앉은대로 계속 달리는데다 서쪽을 향해 달리니 뭐가뭔지 도무지 추측할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인솔하는 군관이 알려주는것도 아니였다. 이것도 군사비밀에 속했으니 말이다. 그뒤 드디여 우리가 탄 군용트럭은 약 반나절 달리던 끝에 남경에 당도, 하지만 시내로 들어가지 않고 시외곽도로를 한참 달리더니 장강부두가에 가서 멈춰서는것이였다. 장강부두에서 우리는 트럭에서 내린 뒤 약간의 휴식을 취하고는 다시 륜선에 올랐다. 륜선에 오르게 된것은 당시 장강에 다리가 없었기 때문이였다. 우리가 배에 다 승선하자 륜선은 고동을 길게 뽑더니 북을 향해 선수를 향하는것이였다. (드디여 갈곳으로 가는구나.) 나는 이번에야 제딴에는 어디로 간다는 판단을 내릴수 있었다. 북이라면 분명 중조변경지구로 가는것이 틀림없는것 같았다. 그리고 동북쪽으로 간다면 분명 조선정세가 복잡해진것이라 판단했다. 이전에도 조선전쟁이 터지자 하남성에서 농업생산을 지원하던 진갱의 제13병퇀이 정주로부터 압록강연안에 집결되지 않았던가! …… 나는 배란간을 부여잡고 배전을 철썩철썩 갈기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결국 조선으로 가는구나. 내가 태여났던 고국에 나가 싸우게 됐고 또한 싸우고 또 싸우다가 내가 태를 묻었던 조선땅에서 희생될수도 있으며 고국에서 이내 인생을 마감할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군인으로 돼갖고 가렬처절한 전쟁터에 한번 나가보는것도 어찌보면 영광스러운 일인것 같았다. 하긴 부모한테 효도 한번 크게 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좀 아쉽고 미안한 구석도 없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전쟁터에서 군인답게 살다가 군인답게 희생되는것 역시 인생이라면 괜찮은 인생인것 같았다. 얼마뒤 륜선이 장강북안에 가닿게 되였고 륜선에서 내린 우리는 다시 군용트럭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한참 달리다가 어느 한 자그마한 진의 기차역에서 북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한편 기차에 올라 북으로 향하면서 우리는 줄곧 문화교관의 선창에 따라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들로는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 “3대규률과 8항주의”, “공산당이 없으면 새중국이 없다네” 등 혁명가요였다. 당년에 압록강을 뛰여넘던 지원군용사들의 모습이라고나 할가? 혁명가요를 씩씩하게 부르는 우리는 진짜 전선으로 향하는 대오와도 같았다. 헌데 2일후 우리가 탄 기차는 북경 풍태역에서 멈춰섰고 우리가 그곳에서 내리게 될줄이야. 나를 포함한 모두가 오리무중에 빠졌다. 아무래도 조선으로 갈것 같다던 나의 판단이 틀렸던것이다. 그리고 많은 전사들이 도대체 어디로 가느냐고 인솔자 군관한테 물었으나 그 군관은 그저 시무룩히 웃으며 자기도 북경까지 따라온다는것만 알았지 구체적으로는 모른다고 했다. 북경 풍태역에서 장군별을 단 군관이 우리를 마중했고 우리는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트럭에 다시 올라탔다. 그뒤 우리가 탄 트럭은 시내안이 아닌 교외쪽으로 향하더니 약 한시간뒤 장평현에 있는 북경공정병학원이란 간판이 달린 어느 한 건물의 대문앞에서 멈춰서는것이였다. 트럭에서 내린 우리는 한줄로 서서 대문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대문안에서는 숱한 군인들이 모였고 그들은 북과 꽹과리를 두드리며 우리를 환영하는것이였다. 그리고 건물벽에는 “신입생들을 열렬히 환영한다!”는 프랑카트까지 걸려 있었다. 너무나도 뜻밖의 광경에 나는 머리가 어정쩡해나면서 한동안 뭐가 뭔지에 대해 알수가 없었다. 썩 후에야 알게 된 일이였지만 당시 중앙군위에서는 문화학교의 대부분 학생들을 복건에 보내 땅굴을 파고 또치까를 구축하는 등 전쟁준비에 투입시켰으나 순자를 포함한 녀학생들은 상해군의대학에 보냈고 또 우리 소수민족 학생들은 북경공정병학원에 보내 계속 공부를 할수 있게 했던것이였다. 2 이렇게 우리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북경공정병학원의 학생 즉 의젓한 대학생이 되였던것이다. 나는 코마루가 찡해나도록 감격을 금할수가 없었다. 당시는 국내외 정세가 진짜 복잡한 상황이였다. 대만의 장개석군대는 매일같이 “대륙수복”을 웨쳐대면서 도발을 끊임없이 감행했고 중쏘관계 또한 그닥 여의치 않았으며 조선반도에서도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긴장한 시기였다. 하지만 중앙군위에서는 우리 무석문화학교내의 소수민족학생들만은 별도로 전쟁준비 일선에 내보내지 않고 계속 공부를 할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번 우리 나라 소수민족정책의 우월성을 감지할수 있었다. 한편 내가 행복해질수록 산굴을 파지 않으면 그와 비슷한 전쟁준비 제1선에서 고생하고 있을 순자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더군다나 그녀와의 일체 련락이 두절되니 더욱 시름을 놓을수가 없었다. 하긴 상해경비사령부의 정위인 그녀의 부친이 어련히 알아서 딸한테 관심을 돌릴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을 어찌 장담하랴. 얼마전에도 우리 문화학교 학생들이 사처로 이동된다는것에 대해 왕륙생정위는 깜깜부지였지 않았던가?! 나는 마치도 순자한테 큰죄를 진듯한 생각이 자꾸 갈들었다. 내가 그녀를 고생스러운 곳으로 직접 보낸것 아니였지만, 또한 군사명령이라 어쩔수 없는것이였지만 그래도 어쩐지 내가 순자를 힘들고 어려운 곳으로 보낸것 같은 자책감이 자주 들었다. 그래서 어느날 나는 함께 무석의 문화학교로부터 동행한 만족전우한테 그 고민을 털어놓았다. “쑈쪼, 나 지금 큰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단 말이야. 사실 나 우리 한반의 왕순자란 녀자애와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어.” “아니, 그건 이미 공개된 비밀이 아니야. 새삼스럽게 그걸 왜 끄집어내?” 쑈쪼는 의아해하며 나를 바라봤다. “그건 그런데 나 지금 순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또 그의 집주소도 적어두지 못했다구.” “저런, 이 친구야! 꼼꼼하기로 소문난 자네가 그런 실수를 범하다니?! 그래 아직 그녀와 편지거래도 하지 못했단 말인가?” “그렇다네. 휴ㅡ 다 내잘못이야…” “아니 아니야. 그걸 어떻게 되여 자네의 잘못이라고 하겠나! 다 그 삶아 튀해버릴 장개석이 ‘대륙수복’이요 뭐요 하며 지랄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왜 문화학교에서 여기로 왔겠고 또 자네과 순자가 갈라지게 됐겠나. 하긴 여기로 온 우리는 아주 행운스럽다만…” 장개석?! 쑈쪼의 말에 나는 큰 힌트를 받았다. 그랬다. 모두 장개석 때문이란 말에 일리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되자 나는 장개석과 국민당에 대한 분노로 이발을 갈았다. 장개석, 너 이놈 우리의 사랑에까지 방애작용을 하는구나!!! 그때로부터 순자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때마다 장개석과 국민당에 대해 일장저주를 퍼붓군 하였다. 동시에 나는 이미 20살을 넘긴 청년이라 셈이 들대로 들었기에 지식의 중요성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순자를 만나면 꼭 어깨에 별이 많은 군관이 되여 나타나리라 결심하고는 머리를 싸동이고 공부에 열중했다. 그만큼그때까지만도 나는 순자와의 재상봉이 이루어지리라 믿어의심치 않았었다. 3 북경공정병학원에서 내가 배치받은 학부는 기계및건축설계학부였다. 이 전업은 말그대로 기계와 건축 등을 설계하는것을 배우는 전업이였는데 그중 건축설계에는 전쟁준비에 필수적인 갱도와 또치까 및 방공호 등 학과들로 구성되여 있었다. 참, 같은 문화학교시절의 동창들이 갱도를 파고 나는 그런 갱도를 설계하는것을 배우다니… 운명의 대비란 그야말로 묘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 나의 제대로 된 학력은 룡정에서 초중에 다닌것이 전부였다. 하긴 부대에 간 뒤 나름대로 글공부에집념하면서 몇년간 자습하기도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체계적인 공부가 아니였고 문화학교에 다녔으나 그것은 2년도 안되였다. 그러니 순 시험을 쳐 대학에 간다는건 거의 어림도 없는 일이였다. 그리고 북경공정병학원같은 학부에 입학한다는것은 더욱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었다. 이러한것들에 대해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주어진 운명을 기꺼히 받아들이면서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고 공부에 열중했다. 여기서 보충해서 말하고 싶은것은 다들 이성에 빠지면 공부에 집념할수 없고 성적도 하강된다고 하지만 나만은 그렇지가 않았다. 나는 순자가 생각날 때마다 공부를 잘해 그녀의 의젓한 남편이 되겠다는 결심을 굳히군 했으며 그녀에 대한 사랑이 나한테 있어서 도리여 동력이 되게 했다. 그러던중 내가 입학해 약 한달이나 됐을가 할 때의 어느날 갑자기 북경대학의 지도일군들이 우리 북경공정병학원을 찾아왔다. 나라에 수요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조선족학생을 모집하러 왔다는것이였다. 력사적으로 볼 때 조선은 중국의 린국으로서 중국의 어느 조대를 막론하고 조선과의 관계에 대해 중시를 돌렸던것이다. 특히 해방후 중조 두 나라는 모두 사회주의와 무산계급 국제주의 원칙에 따라 여러 명목의 우호협력관계를 맺어왔는바 그러한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는 조선어와 조선의 력사에 대해 능통한 인재가 대량 수요됐던것이다. 북경대학 지도일군들이 그 무슨 국무원의 소개장이라도 갖고왔는지 우리 학교지도부에서는 그분들을 깎듯이 대했고 그들이 찾아온 사연에 대해 알아보고는 이에 적극 호응하는것이였다. 학교지도부에서는 인차 전 교내에 있는 조선족학생들에게 통지해서는 학교인사처로 가도록 했다. 당시 북경공정병학원에는 나 그리고 흑룡강성이 고향인 량희원과 리종률 이렇게 도합 3명이였는데 이 3명 모두 학교인사처에 가서 면접시험을 보게 됐다. 그날 우리 3명이 학교인사처에 들어서자 북경대학에서 파견돼온 일군들은 우리 셋을 아래우로 까근하게 뜯어보는것이였다. 그러더니 그중 한분이 나한테 먼저 말을 건네는것이였다. “저기 저 키가 큰 동무, 여기와 앉소.” 내가 그분이 가르키는 걸상에 앉자 그분은 재차 나를 유심히 뜯어보는것이였다. “이름이 뭐요?” “허길성입니다.” “고향은?” “길림성 룡정입니다.” “오, 그럼 연변에서 왔구만. 조선족들이 많은 지방에서 왔다면 조선어기초가 어느 정도 있겠구만…” “예, 저도 나름대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분은 기타의 량희원과 리종률한테도 똑같게 묻더니 수첩에 적는것이였다. 그러고 나서 그분은 그제야 우리 학교로 찾아온 목적을 밝히였다. “저 다름이 아니라 현재 우리 나라에서는 외교부문에서 근무할 조선족인재들이 몹시 수요되고있는 상황이요. 그래서 우리가 직접 조선족인재들을 선택해서는 한동안 북경대학에 데려가 학습하게 하고는 나중에 외교부와 국방부 등 부서에 인재들을 수송하게 되오. 어떻소? 북경대학에 가서 공부한 뒤 외교관이라도 될 생각들이 없소?” 이에 우리 셋은 서로 번갈아 쳐다보기만 할뿐 쉽게 대답할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분은 나를 지명했다. “그럼 저기 저 아까 이름이 뭐랬더라? 오 그렇지 허길성동무라 했지. 허동무가 한번 시원하게 속심말을 한번 해보오.” “글쎄 고맙습니다만 너무 급작스레 들이닥친 일이라 저한테 생각해볼 시간을 좀 줄수 없겠습니까?” 나외 기타 2명의 조선족학생들도 똑같은 대답을 했다. “좋소. 오히려 쉽게 대답하는것이 경거망동하는거지. 그럼 우리 2일간의 시간을 주겠소. 생각이 있는 학생은 다시 인사처로 찾아와 신청하면 되오.” 숙소로 돌아온 뒤 나는 여러모로 생각을 굴려보았다. 외교관이 된다? 유혹이 없는건 아니였다. 헌데 모순되는건 군복을 벗기 싫은것이였다. 그리고 이제 조선어를 더 전공하는건 어이없는 일인것 같기도 했다. 지금까지 배운 조선어실력으로도 문장쓰기나 통역같은데는 막힘이 없을것 같았다. 또한 현재 나한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기술을 배우는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드디여 나는 아주 큰 결단을 내리고 북경대학에 가지 않고 본교에 계속 남기로 했다. 그러니 학교인사처로 찾아갈 필요조차 없게 됐다. 다시 찾아가지 않으면 북경대학 지도일군들도 포기하리라 여겼던것이다. 그런데 그 3일후 북경대학의 그 지도일군이 나의 숙소까지 찾아올줄이야. “허길성동무,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소? 우리는 허동무가 제일 선참으로 달려올줄 알았는데…” “미안합니다. 생각이 없으면 인사처로 찾아가지 않아도 될것 같아서…” “아니 허길성동무, 이런 기회는 자주 생기는것이 아니란 말이요.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보오.” “글쎄 저는 그냥 이 학교가 좋고 지금 배우고있는 전업을 계속 잘 배우고 싶을뿐입니다.” “이 동무가 이거 고집이 세구만. 허허 할수 없지. 평양감사도 제가 싫으면 그만이라고 본인이 싫다면야 어쩔수 없지…” 그 지도일군은 어딘가 아쉬운지 입을 쩝쩝 다시는것이였다. 그뒤 나는 북경대학 지도일군들의 말을 듣지 않은것에대해 아주 잘한 일로 간주하면서 여전히 본 전업을 배우는데 정력을 쏟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여전히 순자의 소식을 기다렸다. 4 우리가 북경공정병학원에 입학한 이듬해인 1963년의 8월 중순쯤으로 기억된다. 그때 중앙군위로부터 우리 학교에 새로운 명령(북경공정병학원은 기타 대학교와는 달라 상급의 지시는 군사명령식으로 집행됨)이 떨어졌다. 그 명령인즉 오는 10월 1일 중화공화국 창건일을 경축하면서 북경의 천안문광장에서 대형검열식이 있게 되는데 우리 북경공정병학원이 검열대렬에 선택됐다는것이였다. 이 명령소식을 접하는 순간 나는 몹시 흥분되였다. 이전에 영화를 통해 우리 중국의 천안문광장에서의 열병식을 보아왔고 또 쏘련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거행되는 열병식도 가끔씩 보았었기에 나도 언젠가 한번은 그런 열병식에 참가해 봤으면 하는 마음도 없았다. 선배들에 따르면 기실 북경공정병학원은 건국이래 해마다 천안문광장에서 있게 되는 열병식 혹은 검열식에 참가, 교관들과 선배학생들은 이미 경험이 있었기에 그닥 흥분하지 않았지만 우리 신입생들은 그저 신기하고 궁금하기만 했다. 처음에 나는 우리가 참가하게 될 검열식을 열병식으로 여겼었다. 선배들에 따르면 열병식과 검열식은 성질상에서 근본 달랐다. 열병식은 각종 신식무기를 과시하는 한편 열병대오도 전신무장한체 검열을 받는것이고 검열식은 그냥 군복이 아닌 다른 단체복장을 하고는 표어같은것을 메거나 들고서 행진하는것이였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1949년의 공화국창건날부터 1959년 10월 1일까지 해마다 열병식을 해오다가 1960년부터는 각종 국내사정에 의해 잠시 열병식을 중단한터였다. …… 중앙군위의 명령이 떨어지자 학교에서는 즉각 검열식에참가할 훈련에 돌입, 오전에만 수업에 참가하고 오후시간은 전문 이 훈련에만 정진했다. 훈련은 내가 사전에 상상했던것과는 엄청 다르게 힘들고도 고되였다. 쨍쨍 내리쬐는 8월의 해볕아래에서 정복을 입고 행진훈련을 하는 강도에 대하여 그 훈련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근본 알수 없을것이다. 특히 정보행진을 30분 이상씩 훈련하노라면 땀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뒤잔등이 흠뻑 절기가 일쑤였으며 나중에 숙소로 돌아와 씻자고 보면 소금기가 하얗게 돋아있군 하였다. 훈련개시 며칠후부터 우리는 발에 물집이 생겼고 어떤 학생들은 코피를 흘리기도 했으며 훈련이 지속됨에 따라 모진 더위에 게거품을 물며 쓰러지는 전사와 아예 병원으로 실려가는 학생들까지 속출했다. 특히 우리 신입생들이 더 애를 먹었다. 웃학년의 선배들은 이미 경험이 있는지라 제법 요령이 있어서 인차 힘든 고비를 넘었지만 우리 애숭이들은 여러번 번복해도 늘 교관한테 훈계만 당했으며 한가지 훈련을 여러날씩 번복해 할 때도 자주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이를 악물고 견지했으며 쓰러지고 병원에 실려가면서도 끝끝내는 모든 훈련관을 하나하나 넘기는데 성공했다. 훈련이란 신체가 건장하다고 해서 다 그것을 소화해내리라고 여겼다가는 큰 오산이였다. 즉 사회청년들은 신체가 아무리 건장하다고 해도 그 훈련강도를 이겨내지 못할수도 있었으나 북경공정병학원의 학생들은 아무리 허약한 체질의학생도 모두 그 훈련을 이겨냈다. 그것은 우리 학생들한테 그만큼 높은 사상경계, 의악성과 그리고 인간자질이 있었기때문이라는것을 나는 그번 훈련에서 충분히 감지할수가 있었다. …… 드디여 1963년 10월 1일, 북경 천안문광장은 국경 14주년을 경축하는 군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방방곡곡에서 각양각색의 채색기가 날렸으며 그 어디를 보나 꽃바다를 이루었다. 그날 우리는 아침 5시에 북경공정병학원에서 출발하여 6시가 되자 천안문광장의 지정지점에 도착해 대기하게 되였다. 크게 움직이지 못하고 고정된 지점에서 몇시간씩 서있는다는것도 고되기는 훈련이나 마찬가지였다. 다행히도 그날 우리가 서있는 북경 장안가의 곳곳에 림시이동변소가 있어 학생들이 볼일을 보는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오전 9시 30분이 되자 전체 횡렬종대(方队)는 변소출입도 금지되였고 줄을 맞춘대로 움직일수 없게 되였다. 이어서 여러개 진으로 구성된 횡렬종대로 군수장들이 몇차례씩 와서 점검하였으며 그때마다 반복적으로 조직규률성을 강조하였다. 드디여 오전 10시가 되자 1000여명에 달하는 중국인민해방군 군악대의 취주악속에 검열이 시작되였다. 전진 전진 전진 태양을 따라 나간다 조국의 대지를 밟으며 민족의 희망을 품었다 우린 하나의 필승불패의 대오 … … 전반 천안문광장 상공에 울려퍼지는 “중국인민해방군행진”의 주악에 맞춰 우리의 검열대오는 차례대로 행진하기시작했다. 그때 우리 학교의 횡렬종대는 제일 앞에 “모주석 만만세”란 대형표어판을 메고 나아갔는데 그속에는 나도 포함되였다. 키가 1.75메터 이상의 군인들로 그 표어판을 메게 하다보니 내가 선택됐던것이다… 우리의 횡렬종대는 천안문성루가 정면으로 보이는 광장중심에 이르자 발을 높게 들며 정보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눈결로 얼핏 천안문성루를 올려다보자 모택동주석을 비롯한 중앙지도동지들의 모습이 보이였다. 모택동주석, 류소기주석, 주덕총사령과 주은래총리…뚜렷하지는 않았지만 중앙지도동지들은 검열을 받는 우리를 향해 손을 저어 사의를 표하는것이 분명했다. 순간 나의 가슴은 격동으로 차넘쳤다. 한낱 변방지구의 이름없는 농민의 자식이였던 내가 오늘 의젓한 해방군전사가 되여 천안문광장에서 모택동과 중앙수장들의 검열을 다 받다니 꿈만 같았고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조국만세!”, “공산당만세!” 그리고 “모주석만세!” 등 구호를 웨치며 보무당당히 행진하면서 천안문앞을 지났다. 하나의 흐트러짐도 없이 질서정연하게 검열을 받았던것이다. 그날밤 학교숙소로 돌아온 후 나는 온밤 흥분으로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수십일에 달하는 훈련피로도 가뭇없이 사라졌고 낮에 있었던 그 순간 순간들이 자주 영화의 장면처럼 떠오르면서 가슴은 흥분으로 들먹이군 했다. 나는 수첩을 꺼내 그날의 모든것을 일기로 적었고 편지로 집에도 이 사실을 알렸다. 1963년 10월 1일, 그날의 검열식 ㅡ 그 이전에도 1949년부터 묵경 천안문광장에서는 해마다 열병식 혹은 검열식이 있었지만 나는 조선족군인이 그 대오속에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었다. 그렇다면 아마 내가 조선족군인으로서는 제일 처음으로 북경 천안문광장에서의 검열식에 참가해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그날의 일을 영원히 기억하기로 맘먹었다. …… 북경에서의 3년간 학교생활, 그 3년사이 나한테는 추억거리도 많이 남았다. 그 3년 사이 나는 한낱 애숭이군인으로부터 보다 성숙된 중견군인으로 성장했다. 그동안 두번 천안문광장(1963년과 1964년)에서 모주석과 중앙수장들의 검열을 받는 영광을 지녔고 학습면에서는 반급에서 항상 우수생으로 그 립지를 굳혔으며 집단활동에서도 늘 학생들앞에서 그들을 인솔하는 리더십이 강한 혁명군인으로 자리매김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날의 일을 영원히 기억하기로 맘먹었다. …… 북경에서의 3년간 학교생활, 그 3년사이 나한테는 추억거리도 많이 남았다. 그 3년 사이 나는 한낱 애숭이군인으로부터 보다 성숙된 중견군인으로 성장했다. 그동안 두번 천안문광장(1963년과 1964년)에서 모주석과 중앙수장들의 검열을 받는 영광을 지녔고 학습면에서는 반급에서 항상 우수생으로 그 립지를 굳혔으며 집단활동에서도 늘 학생들앞에서 그들을 인솔하는 리더십이 강한 혁명군인으로 자리매김을 하기도 했다. (연재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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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4-09
  • 러시아, 북한 나진항 통해 중국으로 석탄 운송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러시아철도공사 자매회사인 '로기스티카' 철도공사가 북한 나진항을 통해 아태지역국가들에 석탄 운송 작업에 착수했다고 러시아 언론이 보도했다. 전체 무게 9천 톤 용량의 첫 쿠즈바스 석탄 운송 작업은 130개 화물객차에 나눠실려 3월 말 북한 나진항을 향해 서시베리아 철도역에서 시작됐고 나진항을 거쳐 중국 상하이, 양양강, 광주 항으로 최종 운송된다. 이와 관련해 전문가들은 향후 2030년도까지 아태지역으로 운송될 석탄량이 약 2.5배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또한 현재 극동 항구 지역 화물량 증가를 고려할 때 새로운 운송 방향 모색은 향후 러시아 석탄 및 금속 관련기업 수출 성장에 기폭제가 될 것으로 러시아철도공사는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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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
    2014-04-09
  • 윈도우 xp 기술지원종료에 따른 보안 비상대응체계 강화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미래부와 한국인터넷진흥원은 윈도우 XP 기술지원 종료에 따른 보안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악성코드에 대한 집중 모니터링을 실시하고, 전용백신을 즉시 제작·보급할 수 있는 비상대응반을 24시간 가동한다고 밝혔다. 보호나라(http://www.boho.or.kr) 및 118센터를 통하여 해킹 및 악성코드에 대한 신고를 받고 있으며, 사이버 보안 관련 커뮤니티·취약점 DB 등을 대상으로 모니터링 활동을 강화할 계획이다.또한 윈도우 XP의 취약점을 악용하는 악성코드를 발견하는 즉시 전용백신을 제작하여 보호나라 홈페이지를 통해 보급 할 예정이다.아울러 미래부는 윈도우 XP의 취약점을 이용한 악성코드를 발견하는 즉시, 보호나라 및 118센터에 신고하고 치료를 받을 것을 당부했다.윈도우 XP 전용백신의 다운로드와 자세한 사용 방법은 보호나라의 ‘윈도우 XP 전용백신’ 안내페이지(포탈사이트에서 ‘윈도우 XP 전용백신’ 검색 후 바로가기 클릭)에서 확인할 수 있다.미래부는 윈도우 XP 기술지원 종료에 따른 사이버 위협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하는 한편, 이를 계기로 특정 솔루션에 대한 의존도 탈피를 위해 국가ㆍ공공기관 대상으로 개방형 운영체제(OS) 개발을 검토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안행부ㆍ국정원 등 관계부처와 산학연 전문가로 구성하여 지난달 발족한 태스크포스(T/F)를 통해 공개 SW기반 개방형 컴퓨팅 환경 도입 전략 등에 대해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있으며 T/F 결과를 반영하여 필요시 내년도 연구개발(R&D)에 반영할 예정이다. 문의 : 소프트웨어정책과 김도균 과장(02-2110-1810), 류대규 사무관(02-2110-1849)정보보호정책과 홍진배 과장(02-2110-2920), 이지형 사무관(02-2110-2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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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9
  • 한국 전통주, 외국에서도 통했다!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농림축산식품부(장관 이동필, 이하 농식품부)는 세계 3대 주류품평회* 중 하나인 샌프란시스코 주류품평회(Spirits, 증류주 부문)에서 우리 전통주 ‘타미앙스’가 대상인 더블골드메달을 수상하는 등 총 6개의 우리술이 수상명단에 포함되었다고 밝혔다. (3대 주류품평회 : 샌프란시스코 주류품평회(SWSC), 국제주류품평회(IWSC), 몽드셀렉션(Monde-Seletion)) 특히 이번에 수상한 제품 중 추성고을의 ‘타미앙스’(더블골드), ㈜유토피아의 ‘로얄안동소주’(실버), 더한의 ‘매실원주’(실버), ㈜태평주가의 ‘진심홍삼주’(브론즈) 등 4개는 지난해「대한민국 우리술 품평회」수상 제품으로, 농식품부가 출품비를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농식품부는 우리술의 세계화 및 경쟁력 강화를 통해 전통주 시장을 확대하고 우리 농산물의 고부가가치화를 도모하고자 영세한 전통주 업체들이 독자적으로 해외 주류품평회에 자사제품을 출품하는 것이 어려운 점을 감안하여, 농식품부와 aT가 실시한「대한민국 우리술 품평회」수상 제품에 대해 작년부터 세계주류품평회에 출품을 지원하고 있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앞으로도 우리 전통주의 세계화를 위해서 국제적인 인지도를 높이고, 현지 식문화와 접목하는 것이 필요하므로 이를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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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9
  • 中 , 늪에 추락한 음주운전차량 전원 사망
    [동포투데이=징강] 봉황넷에 따르면 6일 새벽, 중국 저장성 징강시 외칭훙쵸오진 얜토우촌(乐清虹桥严宅村)의 늪에 검은 색 찦차가 추락해 차안에 있던 5명 청년들이 모두 사망하였다. 경찰에 따르면 사고전 이들은 인근에서 새벽까지 맥주 18병을 마셨다고 한다. 그들이 음주운전으로 어떻게 차를 몰았고 또 차가 늪에 추락하게 된 경과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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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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