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Home >  사람들
-
[인터뷰] 박동웅 구로구의장, “구민과 더불어 외국인 주민도 살기 좋은 구로 만들 것”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한국은 노동력 공백에 따른 이주노동자와 국제결혼에 의한 결혼이민자의 증가로 사실상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월보를 보면 장단기 체류 외국인은 2021년 6월 말 기준 1,981,035명이다. 그중 서울시 구로구에 체류하고 있는 25,316명 외국인 주민 중 18,190명이 중국동포이다. 기자는 지난 4일 구로구의회 7대 후반기 부의장으로 또한 3선 의원으로서 지역발전과 의정활동에 열정을 바치고 이번 제8대 의회에서도 후반기 의장으로 지역주민은 물론 외국인 주민 민원이 발생한 곳은 어디든지 달려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박동웅 의장을 만나 그동안 의정활동 그리고 앞으로의 중국동포 및 외국인 주민 관련 정책과 지원계획에 대해 들어 봤다. 다음은 박동웅 구로구의회 의장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Q. 현재 시행 중에 있거나 계획 중인 중국동포 관련 사업은? A. 한국 국적을 가진 아이들은 보육료를 국가에서 지원을 해주는데 대한민국 국적이 아닌 중국동포 아이들은 어린이집을 다닐 때 보육료를 전액 자비로 부담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안산에서는 아마 시행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제 구로구도 내년부터 보육료 20%가량 지원해주는 사업을 하려고 한다. 현재 한국에 있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외국인 주민 자녀들을 조사해보니 약 천명 조금 넘는데 그 아이들에 대해 우선 보육료 20% 정도 지원해주고 차후에는 그냥 100% 지원하는 쪽으로 준비해 나갈 예정이다. 그래서 올해 최초로 이와 관련한 예산 편성을 준비하려고 한다. 한 해에 7억 정도 예산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Q. 구민들이 반발할 것 같은데? A. 그런 분들도 있지만 우리끼리만 살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글로벌시대,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만으로 먹고사는 것이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서울에서 구로만, 구로구 사람들만 뭉치는 것도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동포분들도 다 같은 한민족이고 외국인이던 한국인이던 차별 없이 함께 사회에 흡수돼서 생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주민들에게 잘 이해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Q. 지역주민과 중국동포 간 소통과 화합에 대한 모범 답안이 있다면? A. 가리봉을 중심으로 구로구는 중국동포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구로구에는 다문화 정책과가 있는데 중국동포들뿐만 아니라 베트남이라든가 필리핀 일본 등 이주민 정책을 총괄하고 있다. 우리 동포들도 명예 통장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고 또 구로구에는 봉사단이 매우 많다. 이를테면 구로 4동 같은 경우는 다문화 봉사자들이 야간 순찰도 하고 있고 다문화 경노당도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는 구로구가 소통을 많이 하고 있는 편이다. 근래 산발적으로 좀 많이 하고 있는데 향후에는 체계적인 시스템 상에서 동포들과 구청 간에 소통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Q. 현재 가장 시급한 현안과 해결책은? A. 현재 구로구에는 이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중에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분들이 중국동포들이다. 과거 코로나 이전에는 우리 동포들이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장사가 잘 안되는 등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에 대한 것은 우리가 추정할 수 있지만 정책은 정확한 수치를 갖고 하는 것이기에 다문화 정책과에서 우리 동포사회 실태 파악을 다시 해서 제도 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 Q. 상호우호도시 연변조선족자치주와 문화교류 계획은? A. 한국의 수출 규모를 보면 중국과의 교역이 미국을 앞서 나가고 있다. 그리고 중국에는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계시고 또한 중국과 한국 사이에 문화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문화적인 이해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연변과 교류(공무원 교류)를 했지만 사실 문화 교류라고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향후에는 여러 중국 도시와 자매결연을 맺어서 서로 간 문화를 교류하고 우리 축제 때 해당 국가 도시의 전통적인 문화행사를 유치할 수 있도록 하고 또 거꾸로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떤 축제라든가 행사가 있을 때 우리 구로구에서도 문화예술단이 가서 공연을 할 수 있는 그런 교류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Q. 임기 내 꼭 이루고 싶은 것은? A. 현재로서는 일단 코로나19 사태가 빨리 안정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대한민국 자체도 K-방역을 통해서 그냥 열심히 뛰고 있지만 우리 구로구에서도 구로구만의 어떤 방향 시스템을 잘 구축해 구로구가 코로나19에서 좀 더 안전한 도시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 할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안정돼야 구로에서 사업하시는 분들도 안정적으로 사업을 할 수 있고 지역경제도 활성화 될 것이다. Q. 중국동포에 대한 이해정도는? A. 한 예로 아마 한국사람 중에서 가장 양꼬치와 고량주를 많이 먹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정말 좋아한다. 젊었을 때 사실 한국에서 투자 목적으로 중국에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여러 가지 어떤 사정 때문에 결국 못 들어간 경험이 있다. 개인적으로 도시계획 전공이다 보니 연변은 물론 선양, 광저우, 칭다오, 상하이, 홍콩, 마카오 등 중국의 많은 도시들을 다녀봤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중국에 대한 이해도는 많다고 생각하고 중국 양꼬치를 중국동포보다도 내가 더 많이 먹는다고 감히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Q. 중국동포에 한 말씀 부탁한다면? A. 한국에서 돈을 벌어서 고향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는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충 그냥 돈을 벌고 살다가 중국으로 가면 된다는 인식보다도 역시 우리 조상의 뿌리는 한국이기 때문에 한국이 잘 돼야 동포사회도 잘 될 수 있다는 생각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은 한민족으로 역할을 한다면 지역주민들과 잘 화합할 수 있고 이제 동포들이 중국에 들어가서도 한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생활할 수 있다고 본다. 구로구의장으로서 향후 그 어떤 정책이나 개인적인 꿈도 있겠지만 중국 동포들이 구로구에 와서 잘 살고 여기에서 내가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그런 도시가 구로구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할 생각이다.
-
중국에서 캉테로 불리는 조선족 축구선수 김경도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1992년 11월 18일, 김경도(진징다오·金敬道)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김경도도 매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시절 김경도는 축구에 대해 잘 몰랐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뛰어 노는 과정에서 축구에도 약간의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약간의 재능을 보였다. 연변은 축구의 전반적인 환경이 다른 곳과 다르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방과 후 첫 오락으로 축구를 한다. 이러한 축구 환경에서 많은 우수한 축구인재들이 배출되었다. 김경도는 2003년 옌볜(延邊)의 쑹칭링(宋慶嶺) 축구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인 축구 전문 훈련을 시작했다. 진징다오의 부모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한국으로 떠났으며 이러한 환경에서 김경도는 독립적이고 힘든 일을 잘 견디는 품성을 키웠다. 2008년 청소년대표팀에 뽑혀 첫 국제대회를 치른 김경도는 눈부신 활약으로 그해 U-20 대표팀에 발탁됐다. 2009년에는 U-20 대표팀 주장을 맡아 사상 두 번째로 국가대표팀 소수민족 주장 자리에 올랐다. U-20 대표팀 시절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2009년 김경도는 시리아와의 경기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포지션에서 2골을 넣으며 팀의 다음 라운드 진출을 도왔다. 김경도는 경기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이니에스타라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경기가 끝난 뒤 기자가 이니에스타와 연락해 상대방이 사인 유니폼을 선물한 것도 김경도를 오랫동안 기쁘게 했다고 한다. 2010년 김경도는 연변FC에 입단해 클럽 생활을 시작했다. 부모님도 곁에 안 계시고 이제 막 입단한 뒤라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김경도는 늘 팀 동료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봐야 만 했다. 마침 외사촌형인 박성(퍄오청·樸成)이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동생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퍄오청은 이때로부터 김경도를 돌보기 시작했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한국에 일하러 갔고 나는 연변FC에서 선수로 뛰었지만 돈을 많이 벌지 못했다. 박성은 오래 전부터 축구를 했다. 그는 돈을 괜찮게 벌었고 보너스도 받았다. 그때 나는 그의 집에 짐을 풀었다. 그는 나를 위해 많은 것을 사주었고 체육관에 갈 수 있도록 돈도 대주었다. 그리고 내가 U-20 대표팀에 합류했을 때 그는 다른 선수들이 좋은 휴대폰과 명품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나에게 그것을 다 사주었다. 나중에는 또 휴대폰과 아이패드까지 사주며 축구를 잘하라고 격려 했다” 이는 사촌형인 박성에 대한 김경도의 평가다. 오늘도 두 사람은 여전히 절친한 사이로, 중국 슈퍼리그에서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2011년 코스타리카와의 평가전에서 김경도는 벤치에서 나와 성인 남자 국가대표팀 데뷔를 알렸다. 이번 국가 대표팀 경험으로 김경도는 중국 슈퍼리그에서 쟁탈하는 인기 선수로 됐다. 2013년 이 쟁탈전에서 승리한 산둥 루넝(山東魯能)은 연봉 100만 위안, 이적료 800만 위안에 김경도를 영입했다. 하지만 루넝 합류 이후 김경도는 그렇다 할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고, 궈안과의 첫 경기에서 비정상적인 플레이로 결국 팬들의 욕설이 쏟아졌다. 다행히 동료들이 그를 격려했고 그가 힘을 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익숙한 포지션이 아니다 보니 김경도의 플레이는 매우 어색했다. 김경도의 가장 좋은 포지션은 미드필더와 풀백이다. 하지만 그런 위치에서도 김경도는 팀과 감독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달리기와 부상 스틸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많은 칭찬을 받았고, 팬들은 점차 그를 받아들였다. 그해 그는 좋은 활약을 펼쳤고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했다. 2016년, 마가트 감독은 김경도를 완전히 재탄생시켰다. 마가트는 유명한 "악마 감독"이다. 그는 선수들의 세부 사항에 대한 요구 사항이 매우 높았다. 그는 김경도가 수비형 미드필더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를 풀백으로 변경 시켰다. 김경도는 당시 마가트 감독이 자신에 대한 요구사항이 높았다고 밝혔다. 그는 "내가 공을 빨리 잡아 다른 사람이 못 따라온다며 볼을 잡으면 상대 측면 수비수를 상대로 돌파하라고 했다. 처음에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우싱한(吳興涵)이나 류빈빈(劉彬彬) 같은 빠른 스피드 돌파가 없었다. 나중에 하오준민(蒿俊閔)의 도움으로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해 시즌 김경도는 윙백 포지션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고 루넝에서 가장 빛나는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은사 마가트 감독은 안타깝게도 팀의 부진한 경기력으로 인해 해고되었다. 김경도 역시 그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암울한 순간을 맞았다. 2016년 ACL 8강 1차전 서울 방문경기를 앞두고 몸에 살코기 성분이 들어 있는 것으로 밝혀져 소변검사 양성 판정을 받아 60일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다. 이때부터 고기는 거의 먹지 않고 음식에 신경을 썼던 김경도는 충격도 컸지만 선수 생활과 컨디션 유지에는 큰 힘이 됐다. 그 해 김경도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맞았다. 2016년 11월 13일 김경도가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왕융퍼(王永珀), 왕통(王彤), 송룡(宋龍) 등 동료들이 대거 참석해 축하하였으며 루넝도 공식 홈페지를 통해 결혼 축하와 함께 김경도 부부의 백년해로를 기원했다. 김경도의 감정 또한 매우 로맨틱하다. 그와 그의 아내는 서로를 수년간 알아왔다. 그들은 중학교 동창이었다. 그들은 학교 다닐 때 사귀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들은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났고 서로에게 좋은 감정이 생겨 함께하게 되었다. 2017년 김경도는 징계에서 풀려나 팀에 복귀했고 루넝은 리샤오펑(李霄鵬)감독을 영입했다. 리샤오펑이 부임한 뒤 팀은 파격적인 변신을 하지 않고 마가트 감독의 플레이 스타일을 이어갔다. 김경도 역시 익숙한 윙백 포지션을 유지했다. 이후 두 시즌 동안 김경도는 좋은 활약을 펼치며 타르델리 및 펠레와 매우 묵계적인 관계를 형성했으며 종종 도움을 주거나 득점하며 루넝의 측면에서 날카로운 킬러가 되었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2018시즌 김경도의 수치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시즌 29경기에 출전해 6골 6도움을 기록하며 경기당 평균 고강도 달리기, 스퍼트 횟수 1위, 경기당 평균 거리 2위, 가로채기 3위, 경기당 4위라는 맹활약으로 시즌 최고 인기 본토 선수상을 거머쥐었다. 이로써 김경도는 대표팀의 단골손님이 됐고 리피는 물론 가오훙보(高洪波), 리톄(李鐵) 등 본토 감독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되었다. 다만 리피 시절에는 김경도에 대한 요해가 부족해 기술적인 특성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고 김경도 역시 월드컵 예선경기에서 자신의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리피 감독 후임으로 2021년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리톄 감독은 카타르 월드컵 2차예선 40강전 몇몇 경기에서 김경도의 활용에 신경을 썼다. 김경도는 움직임이 좋고 수비 면적이 넓으며 공격은 날카롭다. 현재 김경도는 대표팀 10번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자격을 갖춘 '프리 맨'이 됐다. 곧 카타르 월드컵 3차예선인 12강전이 시작된다. 12강전에서 절대 주전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김경도는 계속 자신의 색깔을 살려 대표팀을 위해 몇 골을 더 넣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세계급 중국 조선족 무용가 김성
[동포투데이 김다윗 기자] 많은 사람들이 중국 유명 무용가 김성(金星)을 알지만, 그녀의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중국 무용수 중 한 명인 김성은 25세의 나이에 벨기에 왕립 무용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다. 1995년 이미 유명해진 김성은 군구(軍區)예술단에서 퇴직하고 북경향산병원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 수술 과정은 장원 감독에 의해 다큐멘터리 영화 '미스 김성'으로 촬영되었다. 23세에 장가들어 28세에 여자로 태어난 김성은 38세에 독일인 한스와 결혼했다. 현재 54세인 그녀의 인생에는 전설로 가득 차 있다. 김성은 1967년 선양의 한 조선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남자 목욕탕에 데려가 목욕시키자 김성은 매우 불편함을 느꼈다. 이때부터 김성은 자신의 성 인식에 대한 의구심이 생겼다. 아홉 살 때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학교 문예선전대에서 짙은 화장을 하고 춤을 추면서 군구(軍區)예술단의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때로부터 김성은 자신의 내면에 있던 미에 대한 향수가 늘 여성스러움을 깨닫게 되었다. 1985년 군사훈련 멘토 송소원이 제1회 전국 타오리컵(桃李杯) 무용대회에 참가할 것을 권유했다. 그 결과 대회 경험이 전무했던 김성은 탄탄한 기반과 뛰어난 재능으로 400여명이 출전한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무용 ‘목가’로 청소년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고 중국에서는 최초로 발레화 없이 발가락을 사용할 수 있는 무용수가 됐다.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겠다는 결심은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줄곧 성별의 정체성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녀는 내가 언제 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 1986년 광둥현대무용학교에서 국비유학생을 미국에 보내려 한다는 소식을 입수한 그는 무작정 광둥으로 건너가 공부했다. 2년 뒤 뉴욕으로 건너가 무용을 업그레이드하면서 캐롤라인과 첫 결혼을 했다. 1993년 김성은 귀국 후 중국문화부가 주최하는 전국 현대무용수련반에 초빙되어 중국 현대 무용의 창시자가 되었다. 1995년 영혼과 육체의 분열은 그에게 큰 문제를 가져왔다. 김성은 오랜 시간 고군분투하다 결국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장악하기로 했다. 그는 성전환 수술을 결심 했다. 김성의 결정은 어머니가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들이든 딸이든 모두 같은 자식이라며 수술이 건강에 지장만 없으면 된다고 말했다. 1999년 김성은 개인의 이름을 딴 중국 최초의 민간 무용단인 '상해김성무용단'을 창단했다. 중국에서 국제 공연 티켓을 판매할 수 있는 곳은 '상해김성무용단'과 '중국곡예단' 두 곳뿐이다. 2004년 무용단을 이끌고 유럽 순회공연을 마친 김성은 귀국길에 독일 신사인 한스를 만났다. 한스는 독특한 동양 여성에게 깊은 매력을 느꼈다. 1년간의 소통 끝에, 그들은 결혼의 궁전에 들어갔다. 결혼 후 세 아이를 입양한 김성은 이젠 엄마와 딸, 그리고 아내가 되어 남성에서 여성으로의 전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김성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의 의구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사회는 심리적 인내를 반복적으로 질문하고 지침을 제공하는 투명하고 보이지 않는 심리의사와 같다. 김성은 오직 실력만이 유언비어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오늘도 진지하게 춤을 추고 있으며 그녀의 유럽공연 티켓은 구하기 어려울정도다.
-
조선족 환자 위해 한국어 배운 의사 선생님
[동포투데이 김다윗 기자] 최근 베이징 지슈이탄(積水潭)병원 안과 병동에 특수 백내장 환자가 입원했다. 환자는 90세 고령의 조선족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귀가 잘 안 들리지 않으며 중국어 대화도 불가능하다. 할머니는 입원하는 동안 딸에 의해 보살핌을 받아왔다. 환자의 딸은 의료진과의 소통을 돕는 '번역기'로 활용할 수 있지만, 가족은 수술실에 들어갈 수 없어 환자가 수술실에 들어간 후에는 언어 장벽이 큰 문제가 된다. 언어 부족으로 수술에 협조하지 못할 것을 우려한 담당 의사 우이(吳怡)는 수술 전 가족들과 반복적으로 소통하며 수술 중 환자의 협조가 필요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을 하나하나 설명해 환자가 수술 과정을 숙지할 수 있도록 했다. 환자의 가족들 또한 환자에게 협조하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종이에 필요한 문구를 쓰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안구 수술의 경우 수술 전 소독을 하려면 환자가 눈을 감아야 하고 수술 중에는 수술 도구가 환자의 눈 안에 있기에 환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으므로 유일한 방법은 언어 소통뿐이다. 고민 끝에 우이는 한국어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수술 중 환자의 협조가 필요할 수 있는 단어를 정리한 후 가족들에게 한국어로 번역해달라고 부탁했다. 한국어 기초가 전혀 없는 그는 발음을 중국어 병음으로 표기하고, 어구의 악센트와 멈춤을 표시할 수밖에 없었다. 몇 번 연습한 뒤 서툰 한국어를 구사하며 환자와 소통하려 했지만 할머니는 알아듣지 못한 채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가족들은 억양 때문이라고 우이에게 말했다. 우이 역시 중국어 병음을 병음해 만든 음조가 원음과 크게 어긋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온 우이는 조선족 친구에게 연락해 '보충수업'을 부탁하며 한마디씩 공부했다. 몇 마디가 아니었지만 정확한 발음을 만들고 모두 암기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날 저녁 공부를 마친 우이는 친구들에게 각 문장의 정상 속도와 느린 버전을 녹음해 검토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수술 당일 우이는 중국어 병음으로 표기한 한국어 문구가 적힌 종이를 수술실 벽에 붙이고 친구가 녹음한 '한국어 속성 교재'를 몇 차례 복습한 뒤 수술 준비에 들어갔다. 간호사들은 침대차에 실려 수술실로 들어온 할머니에게 수술 침대로 옮기라고 손짓했지만 할머니는 간호사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채 침대차 위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수술을 집도한 탕사오화(唐少華)는 우이에게 그동안 학습 성과를 시험해 보라면서 한국어로 환자와 소통하라고 했다. 우이가 환자에게 한국어로 말하자 할머니는 그녀를 쳐다봤지만 옮기지 않았다. 이에 우이는 한국어로 계속 의사소통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탕샤오화는 우이에게 다시 해보라고 격려했다. 할머니가 청력이 좋지 않아 잘 못 들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탕샤오화의 격려에 우이는 환자의 귓가에 대고 두 번 더 큰소리로 말했고 할머니는 결국 움직여 침대차에서 수술 침대로 옮겼다. 이어진 소독과 수술 도중에도 수시로 한국어가 울려 퍼졌고 환자는 우이의 지시에 따라 긴장을 풀고 의사와 호흡을 맞춰 가면서 무사히 수술을 마쳤다.
-
중국 연예계 ‘조선족 왕자’ 맹서
[동포투데이 김나래 기자] 맹서(孟瑞)는 중국 연예계에서 건강한 이미지와 연기력, 좋은 입담을 겸비한 배우 겸 가수·사회자이다. 그는 조선족이라는 점에서 ‘조선족 왕자’로 불린다. 맹서는 2007년 영화 ‘마석산 10용사’에 출연하며 연예계에 데뷔했다. 그는 선후로 드라마 ‘남좌 여우’, 웹 드라마 ‘이건 두라라가 아니야’, 사극 신화 판타지 드라마 ‘물고기 쫓는 전설’, 도시 정감 드라마 ‘10년만 기다려’, ‘힘내라 인턴’, 청춘 멜로 웹 영화 ‘불가항력 남자 하인의 비밀’, 청춘 캠퍼스 웹 드라마 ‘남북 형제’, 사극 웹드라마 ‘약선’ 등에 출연하면서 인지도를 쌓았다. 그리고 음악 분야에서도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가 부른 ‘갈매기’ 등 영화 주제곡은 여러 차례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다. 맹서는 2018년 드라마 및 드라마 주제곡 분야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올해의 우수 드라마 OST’를 거머쥐었다. 1988년 헤이룽장성 쑤이화(蘇化)시에서 태어난 맹서는 수화 2중에 다녔다. 그 후 대학입시에서 구이저우(貴州)대학 연기학과에 1위로 합격해 구이저우대학에서 2년간 공부한 뒤 베이징(北京) 영화학원에서 연기 공부를 했다. 재학 중 ‘5월의 꽃 전국 대학생 문예공연 사회자 대회’ 우승, 구이저우성 최초 연극 전문 경연 대회 연극 부문 2등상을 받기도 했다. 베이징영화학원을 졸업한 후 맹서는 구이저우 TV방송국에 입사, 음식 프로그램의 외부 진행과 영화 종합 프로그램인 ‘추억 극장’의 진행을 맡았다. 데뷔 이후 꾸준한 노력으로 많은 드라마에 출연할 수 있었던 맹서는 TV·영화에서 다양한 캐릭터와 주연, 조연들을 연기하며 천부적 재능과 근면함으로 시청자들에게 인생의 백태를 보여주며 연기 인생을 평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30%는 운명이고 70%는 노력이다. 충분히 노력해야 행운도 찾아온다. 맹서는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하는 것이 나를 즐겁게 하는 동력”이라고 말한다.
-
중국 조선족 가수·음악 프로듀서 김지문
[동포투데이 김나래 기자] 중화권의 많은 가수 중 편곡과 가창력을 겸비한 조선족 음악 프로듀서가 있다. 그가 바로 김지문(金志文)이다. 1982년생인 김지문은 지린(吉林)시 출신으로 지린예술학원(吉林藝術學院)을 졸업하고 현재 가수, 음악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다. 김지문은 초·중학교 시절 학급의 문예위원으로 활동하며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그는 우상인 주화건·두덕위·유징칭의 노래를 즐겨 불렀다고 한다. 중학교 졸업이 다가오자 김지문은 어머니의 뜻과 달리 지린예술학원에 진학해 노래를 배웠다. 졸업 후에는 술집에서 기타도 치고 노래도 부르면서 프로 가수에 못지않은 실력을 쌓았다는 후문이다. 김지문은 2002년부터 음악 프로듀서로 활동하면서 많은 인기 클래식을 만들었다. 2006년 그가 작곡한 원 월드 원 드림(One World One Dream)이 올림픽 노래 공모전에서 금상을 받으며 세상에 알려졌다. 2007년 첫 싱글 앨범 '형제 소문'을 시작으로 2009년에는 두 번째 싱글 앨범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외로워’ 그리고 2010년에는 앨범 ‘도문 강 원’을 발표했다. 2012년에는 저장위성TV의 노래 오디션 프로그램 ‘중국의 고운 목소리’에서 뛰어난 가창력으로 ‘사랑에 미쳐’를 각색해 불러 전국 4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 후 2013년 선전위성TV 음악 콩쿠르 프로그램인 ‘중국음초’(中國音超)에 출연해 ‘음초가왕’(音超歌王) 칭호를 수여받은 그는 같은 해 음악선봉차트 올해의 선두 싱어송라이터상을 수상하였으며 2014년에는 앨범 ‘꿈·집’으로 제18회 중화권 차트에서 신인 음악 프로듀서상을 수상했다. 김지문은 탄탄한 편곡과 창작 능력으로 2017년 노래 ‘옛날 일은 되새길 수밖에 없다’ ‘중국 처녀’로 각각 MTV 글로벌 중화음악축제 최우수 편곡상, 베스트 10 금곡상을 수상했다. 올해에는 싱글 ‘겨울철 지린에서 눈 놀이’를 시작으로 저장위성TV 음악프로그램 ‘천혜의 목소리 시즌2’ 그리고 후베이위성TV 춘제롄환야회에 출연하는 등 왕성한 활동으로 연예계의 한 축을 담당해 오고 있다.
-
中 '외교의 꽃' 미녀 대변인 - 화춘영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의 외교부는 긴장하고도 엄숙하며 또한 민감한 부문이다. 이러한 부문에서 근무한다는 건 분명 영광스럽고도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자랑스럽기에 앞서 자아관리를 철저히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기민하고도 지혜로워야 하며 웅변능력 또한 비범해야 가능한 일이다. 아래에 소개되는 여성은 바로 웬간한 남자들도 능력의 한계를 느낀다는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의 일꾼, 그것도 외교부 대변인이다. 까다롭기도 하거니와 쩍하면 넘겨짚기를 잘하는 중외 기자들 앞에서 때로는 침착하게, 때로는 날카롭고도 당당하게 또한 어떤 경우에는 상냥하고도 겸허하게 기자들 앞에 나서는 그녀 - 화춘영(华春莹)은 지금까지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1970년 화춘영은 중국 강소 회안의 한 간부의 가정에서 태어난 화춘영은 별로 간부가정의 자녀라는 우월감을 별로 느끼지 못하며 자랐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단발머리를 하기 좋아했으며 늘 얼굴에 웃음기를 담고 있는 친절하고도 예의가 바른 소녀였다. 중학교 시절, 화춘영은 학습 성적이 돌출한 편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남한테 뒤지는 편도 아니었다. 당시 그녀는 남자애들이 즐기는 축구운동을 좋아했으며 고중입시를 앞두고는 여학생들을 이끌고 남녀 축구 대 항전을 치르기도 했다고 한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고나 할까? 선생님과 동창생들의 눈에는 조용하고도 기타 사심이 없어 보이는 화춘영 - 그한테는 조용한 가운데 강인한 일면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그녀는 대학교 숙소의 ‘영춘화(迎春花)’로 불렸지만 대학교 4년간 그녀는 연애 한번 해보지 못한 극소수 여학생 중의 한명이었다. 이렇게 아련한 것 같으면서도 강한 일면이 있고 또한 다른 측면으로 보면 부드럽기도 한 것이 화춘영의 과거의 주소라면 후에 외교관이 된 다음의 화춘영은 강자 앞에서는 약하지 않고 약자 앞에서는 또한 절대 강하지 않는 것이 외교부 대변인으로서의 현주소였다. 2012년 11월 19일, 당시 42세가 되는 화춘영이 중국외교부 브리핑 장소에 나타나자 장내는 삽시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단발머리 미녀가 외교부 대변인의 신분으로 나섰으니 말이었다. “드디어 중국에도 미녀외교관이 나타났군 그래.” “그래그래, 미녀이면서도 어딘가 카리스마가 있어” 한편 화춘영의 언변과 실력에 대해 시험대에 올려 보려는 외신 기자들도 없지 않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엉뚱한 속셈을 가졌던 외신기자들도 눈알이 동그랗게 되면서 잠잠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날카롭다가도 다시 친절한 화춘영의 언어실력은 장내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긴 화춘영은 외교부에 갓 입문한 햇내기가 아니라 이미 거의 20년간 외교전선에서 단련된 외교능수라는 것을 외신기자들이 어떻게 알 수 있었으랴. 사실 화춘영이 중국 외교부에 첫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3년이었다. 외교부에 입문한 화춘영은 선후로 서 유럽사(司) 과원, 주 싱가포르 대사관 수행인원, 3등비서, 외교부 서 유럽사 3등비서, 부처장, 주 유럽연맹 사절단 2등비서, 1등비서, 참사관, 외교부 유럽사 참사관 등 직에 머물다가 2012년 강유(姜瑜)에 이어 중국 외교부 보도 사 부사장으로 되었다. 그리고 그 해 11월 중국외교부 대변인으로 부임, 중국외교부가 대변인 제도를 건립한 이래 모두 5명의 여성대변인이 탄생했다. 역대 중국외교부의 여성대변인들로는 각각 이금화(李金华), 범혜연(范慧娟), 장계월(章启月), 강유와 화춘영이었다. 알려진데 의하면 화춘영이 외교사업에 종사한 28년 간 유럽사 및 유럽, 아시아 지구에서 근무하면서 비교적 풍부한 외교경험과 양호한 소통능력을 키웠으며 외교부 대변인으로 되기에 매우 합당한 인선이 되었던 것이다. 화춘영은 늘 “나는 최선을 다 하여 모든 이들을 도와 적시 적이고 정확하며 또한 전면 적으로 중국의 외교정책을 요해하게 하는 동시에 나 역시 모든 이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고 평등하게 교류하며 그리고 양호하게 합작하는 것으로 중국과 세계와의 상호 요해와 이해, 신입과 합작을 추진하기에 적극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하군 했다고 한다. 화춘영은 진실로 그렇게 했다. 2012년 11월 16일, 화춘영은 중국외교부에서 개최한 정례브리핑이 거의 마무리가 될 무렵에 중국외교부의 신임대변인의 신임으로 기자들 앞에 나타났다. 그 때 그녀는 외교부의 제 27번째 대변인이자 5 번째 여성대변이기도 했다. 당시 자기의 어깨위의 책임이 중대함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화춘영은 중국과 세계의 관계는 한창 심각한 조정 시기에 있으므로 중국은 세계를 더욱 많이 요해해야 하며 세계 또한 중국을 더욱 많이 요해해야 한다고 표했다. 이어 11월 19일, 화춘영은 정식으로 중국외교부의 정례 브리핑을 주최, 브리핑에서 화춘영은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연임 후 첫 출국방문이 아시아태평양 지구를 선택한 것과 중국공산당 제 18 차 당 대회 이래의 중국의 외교정책 등에 관한 기자들의 물음에 답하면서 논리성이 강한 그녀의 답변과 막힘없는 화술구사는 모든 기자들의 찬탄을 자아내면서 중국의 젊은 여 대변인의 매력과 풍격을 충분히 과시하였다. 그 이튿날 중국 홍콩의 한 매체는 당시의 정경을 두고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1월 19일 오후, 외교부의 신임대변인 화춘영이 첫 브리핑을 주최, 20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내에 화춘영은 선후로 10명에 달하는 중외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주었다. 중일관계로부터 시작하여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지구 전략 및 향후 어떻게 매체를 대하겠는가 하는 것을 두고 경외 기자들은 불쑥불쑥 ‘도전적’이고도 민감한 문제에 대해 질문을 쏟아냈으나 신임대변인 화춘영은 기민하고도 자유자재로, 개방되고도 솔직하게 답했으며 난감한 문제들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대범하고도 상세하게 답변하여 모든 기자들의 긍정을 받았다. 브리핑이 끝난 후 화춘영은 웃음기가 어린 얼굴을 하고는 처음으로 발언대에 올라 기자들한테 진심으로 소통하고 평등하게 교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뒤로부터 중국과 외국의 매체의 기사들에는 중국외교부 대변인 화춘영이란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면서 그 이름은 지구촌 방방곳곳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화춘영은 외교부 대변인이란 본직에는 물론 다른 분야에서도 남다른 모범을 보이어 2020년 1월 1일, ‘중국부녀’ 편집부로부터 ‘2019년 10대 여성인물’로 평선 되었고 2020년 9월 8일에는 전국 코로나 19 대응 선진개인 및 전국 우수 공산당원으로 선정 되기도 했다. 현재 화춘영은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보도사(司) 사장직에서 근무하고 있는 걸로 알려지고 있다.
-
12년의 젊음을 과외교육에 바친 오미화 씨
[동포투데이] 오미화 교원(41세)은 조선족 교육사업에 대한 불타는 신념과 의력으로 장장 12년동안 과외교육에 몸과 마음을 이바지하고 있다. 1997년 9월에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대학사범분원 한어문(중국어)전업을 졸업한 오미화는 선후로 왕청림업국 조선족학교에서 4년, 한국에서 중국어 강사로 6년동안 활약하면서 번 돈으로 연변자치주 왕청현좋은미래과외학습센터를 설립하고 교육 사업에 대한 일편단심과 전력투구로 풍성한 성과를 거두어 학부모와 어린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지니고 있다. ▲왕청현좋은미래과외학습센터 오미화 교원 과외학습센터를 설립한 첫해에 40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중 양부모가 없는 어린이 8명, 홀부모어린이 10명, 한족 어린이 9명으로서 한족, 결손가정 어린이는 인수의 65%를 차지하고 있었다. 대부분 결손가정 어린이들은 친척 집이나 할아버지, 할머니 슬하에서 유치원에 다니고 있으며 성격이 활달하지 못하고 소극적이며 우울하고 괴벽했다. 오미화는 결손가정 어린이들에게 늘 사랑으로 어린이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하나하나 녹여주고 부모들이 외국으로 돈벌이를 가고 외할머니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한 남자애는 늘 집에 가 거짓말을 하여 노인이 교원을 오해하게 하였고 노인이 간혹 어린이의 필기장을 들여다보고는 전후를 알아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담임교원만 탓했다. 오미화는 노인과 어린이에 대한 고까운 생각보다 우선 어린이가 거짓말을 하게 된 원인부터 찾기에 노력했으며 정황을 상세히 요해한 후에는 평소보다 더 따뜻한 사랑을 몰 부었다. 차츰 우울하던 어린이는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 선생님을 잘 따르고 학급활동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으며 하루는 “우리 엄마가 한국에서 오면 꼭 선생님께 고운 옷을 사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해 오미화의 마음을 울려놓기도 하였다. 오미화는 어린이들의 정황을 요해하기 위해 늘 여유시간을 이용해 어린이들과 함께 노래 부르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린이들 특히 결손가정 어린이들의 심리를 장악하였으며 자그마한 우점이라고 보이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신심과 용기를 북돋우어주었다.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한 남자애는 주먹이 세고 남의 음식을 잘 빼앗아먹고 수업시간 규율을 지키지 않았으며 다른 애들이 벗어놓은 신을 변기에 처넣기도 했다. 하지만 이 어린이는 반급 청소와 좋은 일을 하는 습관도 있어 오미화는 이와 같은 우점을 칭찬하면서 남을 때리고 욕하는 나쁜 습관만 고치면 반장감이라고 하였더니 그 애는 신심과 용기가 생겨 나쁜 습관을 차차 고치기 시작하였다. 그 어린이가 된 감기에 걸려 학습센터에 오지 못했을 때에도 오미화는 학급 어린이들의 사랑과 관심을 듬뿍 담은 과일 구럭을 들고 찾아가 집단의 사랑을 느끼게 하였다. 하여 이 어린이는 학습과 생활면에서 많은 진보를 가져왔으며 소학교에 입학해서는 이제껏 반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오미화의 엄마와도 같은 사랑에 받들려 많은 결손가정 어린이들이 제 궤도에 들어섰고 마음껏 배움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어린이들의 매 하나의 성적과 진보에 학부모들은 너무도 고마워 감사의 마음을 금치 못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오미화의 좋은미래강습과외학습센터는 처음의 50평방미터로부터 300평방미터로 늘어나고 어린이도 처음의 50명으로부터 지금의 150명으로 늘어났으며 교원대오도 처음의 2명으로부터 지금은 10명으로 늘어났다. 이외에도 오미화는 빈곤 어린이들의 학비는 면제해 주거나 1년에 300, 500위안씩 면제해 주어 학부모들의 뒷근심을 덜어주고 있으며 왕청현회중아동애심협회, 왕청현애심어머니협회에도 해마다 500, 1000위안씩 기부하고 있다. 오미화는“학부모들의 인정을 받을 때마다 교원 사업의 신성함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고 학부모들의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백배로, 천배로 되는 힘을 얻게 된다”라고 하면서 오늘도 후대 양성사업에 혼신을 다 바쳐가고 있다.
-
“결혼이주 여성도 한국인 ㅡ 이들 위한 대변도 필요해”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차홍숙 ㅡ 한글로 그녀의 이름은 차홍숙, 국제결혼으로 한국으로 나오기 전엔 중국말 발음으로 그녀의 이름은 처훙수(车红淑)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영어로 부르면 'Hong Sook Cha(홍숙 차)' 불린다.뭐 율무차, 보리차가 있다더니 홍숙차도 있담? 이렇게 같은 사람의 이름이지만 여러 나라의 말로 부르면 달라진다. 그리고 불리기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표정도, 그 말투도 달라질 수 있다. 한 남자의 이름을 김영철이라고 하자. 이 이름은 중국에서도 같은 조선족끼리는 김영철이라고 불리지만 그 남자가 한국에 나오면 김영철이 아닌 진융저(JINYONGZHE)로 불렸었다. 이에 김영철이란 남자는 반발을 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 와서까지 중국발음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 ㅡ 한국인의 시각에는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문명하고 가장 살기좋은 나라로 보여질지는 모르나 제3국에서 온 사람들의 시각 즉 제 3 자한테서는 한국에 대한 시각이 좀 다르다. 좀 이상한 나라인 것이다. 또 한국으로 오기 전에 보던 한국과 정작 한국땅을 밟은 후 실질적으로 보면 한국이 달라도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 3 국에서 온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한국말인가 하면 또 세계에서 가장 거칠고도 쌍스러운 말이 한국말이다”라고 한다. 일리가 있다. 예를 들면 한국 서울이나 여느 대도시의 은행같은 곳에 가서 그런 곳의 직원들의 말씨를 들어보면 얼었던 마음도 다 녹아내릴 정도이다. 친절하고 예의스러우며 거기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차근차근 가르쳐주는 구체적인 봉사성…이러한 언행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두 번 세 번 다시 찾아오고 싶어지고 그 직원이 총각이라면 사위로 삼을 생각이 들고 미스라면 며느리로 맞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다. 반대로 한국의 노가다판이라고 하는 작업현장 즉 건설현장이나 바다에서 작업하는 어선현장 같은 곳에 가면 <개새끼>. <씹팔 놈>…벼라별 추한 말들이 다 오간다. 은행창구의 봉사성과 작업현장에서 오가는 말투, 너무나도 모순되는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한편 한국은 사회적 차별이 심한 나라이다. 상하 급 사이의 차별, 남녀 사이의 차별 그리고 내국인과 외국인과의 차별, 특히 이주 여성에 대한 차별 … 차홍숙 그녀는 이런 차별을 줄이고 없애기 위한 일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이는 자신이 이주여성이어서 더욱 강했을지도 모른다. 1971년생인 차홍숙씨가 중국 헤이룽장성 치치할시(黑龙江省齐齐哈尔市)에서 국제결혼으로 한국땅을 밟은 것은 1997년이었다. 당시는 한국과 중국의 경제수준 차이가 엄청 크게 나던 시기였고 차홍숙씨를 비롯한 많은 중국 조선족 여성들이 한국 남성을 결혼의 선망대상으로 쳐다보던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작 한국으로 와서 보니 비교적 유족한 생활을 한다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그녀 스스로 깨달았다. 한국사회는 차별이 심했다. 심해도 너무 심했다. 중국출신 동포라고 기시하고 업신 보고 비웃고, 또한 이주여성이 낳은 자녀까지도 이런 불행을 당하군 했다. “결혼초기에는 한국과 중국은 사회와 문화가 서로 다르기에 웬간하면 참으면서 한국사회에 적응하려는 여성들이 많았어요. 헌데 서로 문화가 다른 차원이 아니라 너무 심하고 억지였어요. 한국에서 다문화가정들을 보면 폭언 폭행이 비일비재로 나타나고 있었지요. 돈 주고 사왔으니 폭행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한국인 남성들이 많았고 아니 이를 정당화하려고 했어요. 그러다보니 맞아서 얼굴에 멍이 든 여성, 갈비뼈가 부러져 병원으로 실려간 여성 등으로 많은 사건들이 터지고 만거죠.” 하다면 중국에서 남녀평등과 <절반 하늘(半边天)>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또 그 가치관으로 인생을 영위해오던 차홍숙한테 있어서 이러한 것들은 어디까지고 참고 넘어갈 것도, 그냥 보고 지나쳐 버릴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엔 순 자신만을 위해 적당히 참기도 하고 적당히 반발하기도 하였으며 또 적당히 타협하면서 이른바 <이주여성 인권찾기 운동>에 참여한 것도 사실이다. 헌데 이렇게 나서고 보니 주변에는 이렇게 당하며 살고 있는 결혼이주 여성이 너무도 많았다. ● 70대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한 30대의 베트남 여성은 결혼 후 수시로 언어폭행에 시달렸으며 수시로 생활비를 바쳐야 했고 지어는 여성의 동생한테도 생활비를 강요하는 일이 생겼다. 또 겨울에는 뜨거운 물도 못쓰게 했다… ● 2007년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캄보디아 출신 여성 쏙카(가명)는 결혼생활 3년부터 남편의 폭력에 시달렸다. 남편은 결혼 초부터 “밭에서 같이 일하려고 내가 돈 주고 널 데려왔다”며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다 그녀가 아이와 함께 캄보디아 친정에 다녀온 뒤부터 머리카락을 걸머지고 벽에 밀거나 손에 잡히는대로 물건을 던지는 등 폭력을 일삼았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가 울면서 말리자 남편은 밖에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티브이(TV) 볼륨을 크게 높혀 놓고 쏙카를 때리기까지 했다. … 한국인 남성ㅡ 위의 첫 번째 사례로 70대로서 30대 여성을 아내로 맞았으면 오히려 감지덕지 해야 할 일이지 그런 아내를 학대하고 생활비까지 내라고 억지 부리다니?!…그럼 한국 남성은 그렇게 대단한가? 요즘 세월에 한국인 남성이 중국 조선족 여성한테 장가들자고 해보라. 턱도 없는 소리처럼 들린다. 아마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부분적 한국인 남성들한테는 <삼척> 경향이 아주 농후하다고 한다. 강원도의 삼척이 아니라 이런 남성들한테는 <몰라도 아는 척>, <못나도 잘난 척>, <없어도 있는 척>이라는 <삼척>을 말한다. 자기가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한가?! 팔이 네 개가 달린 것도 아니고 하루 열끼씩 잘 먹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귀가 두 개이고 입이 하나인 건 많이 듣고 적게 말하라고 한 것이고 눈이란 살가죽이 모자라 박아넣은 장식품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조 이삭은 염글수록 머리를 숙인다고 했다. 다시 원 화제로 돌아와 이상 두 가지 사례는 전반 한국사회로 놓고 볼 때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으며 결코 남의 가정의 일로만 볼 것이 아니었다. 차홍숙씨는 자기가 아니더라도 그 누군가는 이런 차별과 편견으로 얼룩진 한국 사회의 현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충동을 가지게 됐다. 현재 차홍숙씨는 서울시 관악구 찾봉사단(찾아가는 봉사단)원으로 활동,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다문화부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관악구을 다문화위원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찾봉사단은 주로 중국동포와 결혼이주여성으로 구성 지역사회에서 찾아가는 봉사를 실시하고 있다. 10년간의 다문화 봉사, 문화활동을 통해 차홍숙씨는 이주여성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고충과 상처를 알게 됐고 그녀 역시 이주여성으로 그들과 똑같은 불행을 겪은 여성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한편 차홍숙씨는 결혼이주 여성들도 자존, 자립, 자강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여기에는 자질향상에도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된다. “모르니까 당하는 거예요. 현재 60% 이상의 이주여성들은 한국어를 보고 쓰고 읽을 줄은 알지만 그 뜻을 몰라요. 예하면 알림장이 오면 읽지만 내용은 몰라요. 그러다보니 학교에서 통지서같은 것이 와도 자녀들의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거죠. 그러면 자녀가 학교에서 다른 애들한테 왕따당하거나 심지어 폭행당하기도 한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들한테 도움을 주려고 손을 내밀어도 잡아주지 않아요. 마음을 열지 않는거죠. 어찌보면 외국인이라서 소외되고 있다는 의식이 강한거죠. 즉 외국인이라서 가정에서도 차별받는데 사회에 나가서야 더 이를데 있냐 하는 것이죠.” 이렇게 언급한 차홍숙씨는 이주여성 즉 다문화 가정과의 1 대1의 맨토링(助言)하면서 1대 1로 그들과 대화하고 김치 등 반찬 만드는 방법같은 것을 가르쳐 주면서 끈질기게 손을 내밀면 그들도 언제가는 마음을 열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고민을 해보군 한단다. “1 : 1 멘토링은 폭언, 폭행과 고부갈등 및 자녀의 진로 해결 그리고 어려운 가정형편을 복지로 연결시켜 주는 주요한 <그린 통로>이죠. 자녀들의 진로문제 등 공지사항을 단톡방에 올리면 일부 한국인 남편들은 ‘이런데는 우린 안가도 돼, 이런데는 못사는 사람만 가는데야’하고 으스대는데 이건 아주 잘못된 생각이예요. 기실 자신도 최하층에서 겨우 버티며 살면서 말이죠. 일각에서는 다문화가정이란 호칭부터가 차별이라고 주장하는데 일리는 있지만 저의 관점은 달라요. 홍길동이면 어떻고 홍길남이면 어떻냐구요. 호칭이 바뀌지만 시선이 바뀌지 않고 인식이 개선되지 않으면 차별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잖아요?!” 요즘들어 자주 이주여성이나 중국동포 출신 여성의 국회의원 비례대표 출마 등 정치참여가 아주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차홍숙씨이다. “앞으로 철저한 선별과 검증을 거쳐 진짜로 자격이 있는 이주여성 후보들이 많이 나와 단 한 분이라도 구의원, 시의원과 더 나아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동포나 이주민 여성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지요. 우리 또한 스스로가 이미지 개선에 힘써야 해야죠. 공익행사, 봉사활동에도 자주 참가하고 베풀 줄도 알아야 한다고 봐요. 또한 동포라서 외국인이라서 깔본다는 등 소외된 감정과 차별과 무시를 받는다는 억울함이 있더라도 당당해야 합니다.” 이러면서 차홍숙씨는 각 국의 문화나 생활을 체험하고 서로가 이해하고 가까워질 수 있는 이주여성들의 시부모 혹은 친정 부모들로 주축이 된 경로당 설립과 그 활성화, 동포나 이주여성들만 끼리끼리 어울리지 말고 본토인들과도 잘 어울리고 서로 도우면서 살았으면 하는 등 이런저런 여러 가지 대안들을 내놓기도 했다. 일개의 결혼이주 여성으로부터 서울시 관악구 찾봉사단 단원,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다문화부 위원장으로 되기까지 처음부터 그 어떤 목적을 갖고 <욕심>을 부린 건 아닌 것 같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러저러한 뜻하지 않던 일에 자주 맞다들게 되고 그것을 타개하면서 사노라니 오늘까지에 이른 게 아닐까? 여하튼 차홍숙씨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다음 부분적 한국인들에게 따끔한 말 몇 마디 하고 싶다. 이는 이 글의 주인공 차홍숙씨의 말이 아니다. 대한민국 ㅡ 역사가 깊고 찬란한 문화도 있다. 하지만 굴욕의 역사도 많다. 특히 근대에 와서 일본한테 36년간이나 짓밟히면서도, 아들딸들이 학도병이나 정신대에 끌려가도 그걸 막지 못하고 울기만 했던 조상들이다. 광복, 그것도 대한민국 자체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강대국들에 의해 이룩되었으며 그 댓가로 나라가 두 동강으로 토막 나기도 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중견으로 되고 있는 한국남성들은 떳떳해야 하지만 거들먹 거리지는 말아야 한다. 특히 적어도 힘없고 나약한 여성들한테 큰 소리 치지 말고 주먹을 휘두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 한국인? 그렇게 대단하고 우월한 것일가. 그제날의 굴욕의 역사는 그만 두고라도 오늘의 한국도 그렇게 행복한 나라가 아닌 것 같다. 집계에 따르면 2017년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OECD 31개 회원국 중 23위였고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꼴지였으며 한국인의 자살률은 2003년 이래로 OECD 회원국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는 한국과 한국인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는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
-
[인터뷰] 박동웅 구로구의장, “구민과 더불어 외국인 주민도 살기 좋은 구로 만들 것”
-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한국은 노동력 공백에 따른 이주노동자와 국제결혼에 의한 결혼이민자의 증가로 사실상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월보를 보면 장단기 체류 외국인은 2021년 6월 말 기준 1,981,035명이다. 그중 서울시 구로구에 체류하고 있는 25,316명 외국인 주민 중 18,190명이 중국동포이다. 기자는 지난 4일 구로구의회 7대 후반기 부의장으로 또한 3선 의원으로서 지역발전과 의정활동에 열정을 바치고 이번 제8대 의회에서도 후반기 의장으로 지역주민은 물론 외국인 주민 민원이 발생한 곳은 어디든지 달려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박동웅 의장을 만나 그동안 의정활동 그리고 앞으로의 중국동포 및 외국인 주민 관련 정책과 지원계획에 대해 들어 봤다. 다음은 박동웅 구로구의회 의장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Q. 현재 시행 중에 있거나 계획 중인 중국동포 관련 사업은? A. 한국 국적을 가진 아이들은 보육료를 국가에서 지원을 해주는데 대한민국 국적이 아닌 중국동포 아이들은 어린이집을 다닐 때 보육료를 전액 자비로 부담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안산에서는 아마 시행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제 구로구도 내년부터 보육료 20%가량 지원해주는 사업을 하려고 한다. 현재 한국에 있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외국인 주민 자녀들을 조사해보니 약 천명 조금 넘는데 그 아이들에 대해 우선 보육료 20% 정도 지원해주고 차후에는 그냥 100% 지원하는 쪽으로 준비해 나갈 예정이다. 그래서 올해 최초로 이와 관련한 예산 편성을 준비하려고 한다. 한 해에 7억 정도 예산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Q. 구민들이 반발할 것 같은데? A. 그런 분들도 있지만 우리끼리만 살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글로벌시대,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만으로 먹고사는 것이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서울에서 구로만, 구로구 사람들만 뭉치는 것도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동포분들도 다 같은 한민족이고 외국인이던 한국인이던 차별 없이 함께 사회에 흡수돼서 생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주민들에게 잘 이해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Q. 지역주민과 중국동포 간 소통과 화합에 대한 모범 답안이 있다면? A. 가리봉을 중심으로 구로구는 중국동포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구로구에는 다문화 정책과가 있는데 중국동포들뿐만 아니라 베트남이라든가 필리핀 일본 등 이주민 정책을 총괄하고 있다. 우리 동포들도 명예 통장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고 또 구로구에는 봉사단이 매우 많다. 이를테면 구로 4동 같은 경우는 다문화 봉사자들이 야간 순찰도 하고 있고 다문화 경노당도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는 구로구가 소통을 많이 하고 있는 편이다. 근래 산발적으로 좀 많이 하고 있는데 향후에는 체계적인 시스템 상에서 동포들과 구청 간에 소통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Q. 현재 가장 시급한 현안과 해결책은? A. 현재 구로구에는 이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중에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분들이 중국동포들이다. 과거 코로나 이전에는 우리 동포들이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장사가 잘 안되는 등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에 대한 것은 우리가 추정할 수 있지만 정책은 정확한 수치를 갖고 하는 것이기에 다문화 정책과에서 우리 동포사회 실태 파악을 다시 해서 제도 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 Q. 상호우호도시 연변조선족자치주와 문화교류 계획은? A. 한국의 수출 규모를 보면 중국과의 교역이 미국을 앞서 나가고 있다. 그리고 중국에는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계시고 또한 중국과 한국 사이에 문화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문화적인 이해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연변과 교류(공무원 교류)를 했지만 사실 문화 교류라고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향후에는 여러 중국 도시와 자매결연을 맺어서 서로 간 문화를 교류하고 우리 축제 때 해당 국가 도시의 전통적인 문화행사를 유치할 수 있도록 하고 또 거꾸로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떤 축제라든가 행사가 있을 때 우리 구로구에서도 문화예술단이 가서 공연을 할 수 있는 그런 교류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Q. 임기 내 꼭 이루고 싶은 것은? A. 현재로서는 일단 코로나19 사태가 빨리 안정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대한민국 자체도 K-방역을 통해서 그냥 열심히 뛰고 있지만 우리 구로구에서도 구로구만의 어떤 방향 시스템을 잘 구축해 구로구가 코로나19에서 좀 더 안전한 도시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 할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안정돼야 구로에서 사업하시는 분들도 안정적으로 사업을 할 수 있고 지역경제도 활성화 될 것이다. Q. 중국동포에 대한 이해정도는? A. 한 예로 아마 한국사람 중에서 가장 양꼬치와 고량주를 많이 먹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정말 좋아한다. 젊었을 때 사실 한국에서 투자 목적으로 중국에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여러 가지 어떤 사정 때문에 결국 못 들어간 경험이 있다. 개인적으로 도시계획 전공이다 보니 연변은 물론 선양, 광저우, 칭다오, 상하이, 홍콩, 마카오 등 중국의 많은 도시들을 다녀봤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중국에 대한 이해도는 많다고 생각하고 중국 양꼬치를 중국동포보다도 내가 더 많이 먹는다고 감히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Q. 중국동포에 한 말씀 부탁한다면? A. 한국에서 돈을 벌어서 고향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는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충 그냥 돈을 벌고 살다가 중국으로 가면 된다는 인식보다도 역시 우리 조상의 뿌리는 한국이기 때문에 한국이 잘 돼야 동포사회도 잘 될 수 있다는 생각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은 한민족으로 역할을 한다면 지역주민들과 잘 화합할 수 있고 이제 동포들이 중국에 들어가서도 한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생활할 수 있다고 본다. 구로구의장으로서 향후 그 어떤 정책이나 개인적인 꿈도 있겠지만 중국 동포들이 구로구에 와서 잘 살고 여기에서 내가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그런 도시가 구로구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할 생각이다.
-
- 사람들
-
[인터뷰] 박동웅 구로구의장, “구민과 더불어 외국인 주민도 살기 좋은 구로 만들 것”
-
-
中, 98세 “쿵푸 할머니” 온라인 돌풍
-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최근 한 지역 모임에서 무술을 시연하는 98세 중국 “쿵푸 할머니”의 동영상이 유튜브에서 44만 번 이상 조회되고 4,500개 이상의 좋아요가 쏟아지는 등 순식간에 히트를 치고 있다. “쿵푸 할머니”의 팬들은 “98세에도 걸을 수 있을까. 쿵푸가 장수의 관건일지도 모른다”는 메시지를 올렸다. 심지어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도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에 대해 "쿵푸 정신은 늙지 않는다"고 언급하며 주목했다. 본명이 장헥셴(張鶴仙)인 “쿵푸 할머니”는 2017년에 이미 명성을 얻었지만 거의 10년 동안 고향인 저장(浙江)성 닝하이(寧海)현 장컹(張坑)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이 영상이 유튜브에 퍼지자 조카딸은 “할머니는 이제 중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유명하시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키는 약 1.5미터이다. 그의 쿵푸 동작은 유창하고 걸음걸이는 꾸준하다. 할머니의 마을은 쿵푸와 오랜 관계를 맺어왔고 할머니는 5살 때 중국 남부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무술 스타일인 장복싱의 6대 계승자였던 아버지로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어릴 때는 매일 연습했다. 지금은 나이도 들고 힘도 예전보다 줄었지만 아직 원기 왕성하다”고 말했다. “쿵푸는 폭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고 필요할 때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평생 농부인 할머니는 이웃들과도 잘 지낸다. 막내아들인 펑은 “어머니는 항상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어머니는 마을에서 결혼을 앞둔 사람들을 돕고 바느질도 하고 요리도 한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3남 1녀를 두고 있으며 모두 닝하이현에서 근무하고 있다. 닝하이현은 마을에서 차로 약 40분 거리에 있다. 할머니는 남편이 사망한 2012년부터 혼자 살고 있다. 할머니의 삶은 평범하지만 잘 짜여져 있다. 할머니는 아침 5시에 일어나서 매일 세 끼의 요리를 하는데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해산물이다. 점심을 먹고 나서 가끔 친구들을 찾아가서 수다를 떨기도 한다. 오후에는 쿵푸 연습을 한다. 장컹 마을은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할머니의 집은 산비탈에 있기 때문에 식료품을 사러 나가거나 친구를 만나러 갈 때 등산이 필요하다. 언덕을 오르면서 꾸준히 하는 운동이 할머니가 정력이 왕성한 원인일 수 있다. 펑은 “어머니에게 도시에서 함께 살기를 요청했지만 어머니는 혼자 사는 것을 즐겼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어쩌면 할머니를 자유롭고 편안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쿵푸 할머니”는 아버지의 장복싱 스타일을 주말과 휴일에 집에 오는 손주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최근 이웃 마을의 초등학교에서 무술 수업을 개설했다는 소식을 접한 할머니는 자원해서 아이들을 지도하고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 펑은 어머니와 가족들은 “쿵푸 정신을 젊은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고 그것이 그들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
- 사람들
-
中, 98세 “쿵푸 할머니” 온라인 돌풍
-
-
중국에서 캉테로 불리는 조선족 축구선수 김경도
-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1992년 11월 18일, 김경도(진징다오·金敬道)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김경도도 매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시절 김경도는 축구에 대해 잘 몰랐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뛰어 노는 과정에서 축구에도 약간의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약간의 재능을 보였다. 연변은 축구의 전반적인 환경이 다른 곳과 다르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방과 후 첫 오락으로 축구를 한다. 이러한 축구 환경에서 많은 우수한 축구인재들이 배출되었다. 김경도는 2003년 옌볜(延邊)의 쑹칭링(宋慶嶺) 축구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인 축구 전문 훈련을 시작했다. 진징다오의 부모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한국으로 떠났으며 이러한 환경에서 김경도는 독립적이고 힘든 일을 잘 견디는 품성을 키웠다. 2008년 청소년대표팀에 뽑혀 첫 국제대회를 치른 김경도는 눈부신 활약으로 그해 U-20 대표팀에 발탁됐다. 2009년에는 U-20 대표팀 주장을 맡아 사상 두 번째로 국가대표팀 소수민족 주장 자리에 올랐다. U-20 대표팀 시절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2009년 김경도는 시리아와의 경기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포지션에서 2골을 넣으며 팀의 다음 라운드 진출을 도왔다. 김경도는 경기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이니에스타라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경기가 끝난 뒤 기자가 이니에스타와 연락해 상대방이 사인 유니폼을 선물한 것도 김경도를 오랫동안 기쁘게 했다고 한다. 2010년 김경도는 연변FC에 입단해 클럽 생활을 시작했다. 부모님도 곁에 안 계시고 이제 막 입단한 뒤라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김경도는 늘 팀 동료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봐야 만 했다. 마침 외사촌형인 박성(퍄오청·樸成)이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동생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퍄오청은 이때로부터 김경도를 돌보기 시작했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한국에 일하러 갔고 나는 연변FC에서 선수로 뛰었지만 돈을 많이 벌지 못했다. 박성은 오래 전부터 축구를 했다. 그는 돈을 괜찮게 벌었고 보너스도 받았다. 그때 나는 그의 집에 짐을 풀었다. 그는 나를 위해 많은 것을 사주었고 체육관에 갈 수 있도록 돈도 대주었다. 그리고 내가 U-20 대표팀에 합류했을 때 그는 다른 선수들이 좋은 휴대폰과 명품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나에게 그것을 다 사주었다. 나중에는 또 휴대폰과 아이패드까지 사주며 축구를 잘하라고 격려 했다” 이는 사촌형인 박성에 대한 김경도의 평가다. 오늘도 두 사람은 여전히 절친한 사이로, 중국 슈퍼리그에서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2011년 코스타리카와의 평가전에서 김경도는 벤치에서 나와 성인 남자 국가대표팀 데뷔를 알렸다. 이번 국가 대표팀 경험으로 김경도는 중국 슈퍼리그에서 쟁탈하는 인기 선수로 됐다. 2013년 이 쟁탈전에서 승리한 산둥 루넝(山東魯能)은 연봉 100만 위안, 이적료 800만 위안에 김경도를 영입했다. 하지만 루넝 합류 이후 김경도는 그렇다 할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고, 궈안과의 첫 경기에서 비정상적인 플레이로 결국 팬들의 욕설이 쏟아졌다. 다행히 동료들이 그를 격려했고 그가 힘을 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익숙한 포지션이 아니다 보니 김경도의 플레이는 매우 어색했다. 김경도의 가장 좋은 포지션은 미드필더와 풀백이다. 하지만 그런 위치에서도 김경도는 팀과 감독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달리기와 부상 스틸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많은 칭찬을 받았고, 팬들은 점차 그를 받아들였다. 그해 그는 좋은 활약을 펼쳤고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했다. 2016년, 마가트 감독은 김경도를 완전히 재탄생시켰다. 마가트는 유명한 "악마 감독"이다. 그는 선수들의 세부 사항에 대한 요구 사항이 매우 높았다. 그는 김경도가 수비형 미드필더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를 풀백으로 변경 시켰다. 김경도는 당시 마가트 감독이 자신에 대한 요구사항이 높았다고 밝혔다. 그는 "내가 공을 빨리 잡아 다른 사람이 못 따라온다며 볼을 잡으면 상대 측면 수비수를 상대로 돌파하라고 했다. 처음에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우싱한(吳興涵)이나 류빈빈(劉彬彬) 같은 빠른 스피드 돌파가 없었다. 나중에 하오준민(蒿俊閔)의 도움으로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해 시즌 김경도는 윙백 포지션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고 루넝에서 가장 빛나는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은사 마가트 감독은 안타깝게도 팀의 부진한 경기력으로 인해 해고되었다. 김경도 역시 그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암울한 순간을 맞았다. 2016년 ACL 8강 1차전 서울 방문경기를 앞두고 몸에 살코기 성분이 들어 있는 것으로 밝혀져 소변검사 양성 판정을 받아 60일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다. 이때부터 고기는 거의 먹지 않고 음식에 신경을 썼던 김경도는 충격도 컸지만 선수 생활과 컨디션 유지에는 큰 힘이 됐다. 그 해 김경도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맞았다. 2016년 11월 13일 김경도가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왕융퍼(王永珀), 왕통(王彤), 송룡(宋龍) 등 동료들이 대거 참석해 축하하였으며 루넝도 공식 홈페지를 통해 결혼 축하와 함께 김경도 부부의 백년해로를 기원했다. 김경도의 감정 또한 매우 로맨틱하다. 그와 그의 아내는 서로를 수년간 알아왔다. 그들은 중학교 동창이었다. 그들은 학교 다닐 때 사귀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들은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났고 서로에게 좋은 감정이 생겨 함께하게 되었다. 2017년 김경도는 징계에서 풀려나 팀에 복귀했고 루넝은 리샤오펑(李霄鵬)감독을 영입했다. 리샤오펑이 부임한 뒤 팀은 파격적인 변신을 하지 않고 마가트 감독의 플레이 스타일을 이어갔다. 김경도 역시 익숙한 윙백 포지션을 유지했다. 이후 두 시즌 동안 김경도는 좋은 활약을 펼치며 타르델리 및 펠레와 매우 묵계적인 관계를 형성했으며 종종 도움을 주거나 득점하며 루넝의 측면에서 날카로운 킬러가 되었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2018시즌 김경도의 수치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시즌 29경기에 출전해 6골 6도움을 기록하며 경기당 평균 고강도 달리기, 스퍼트 횟수 1위, 경기당 평균 거리 2위, 가로채기 3위, 경기당 4위라는 맹활약으로 시즌 최고 인기 본토 선수상을 거머쥐었다. 이로써 김경도는 대표팀의 단골손님이 됐고 리피는 물론 가오훙보(高洪波), 리톄(李鐵) 등 본토 감독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되었다. 다만 리피 시절에는 김경도에 대한 요해가 부족해 기술적인 특성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고 김경도 역시 월드컵 예선경기에서 자신의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리피 감독 후임으로 2021년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리톄 감독은 카타르 월드컵 2차예선 40강전 몇몇 경기에서 김경도의 활용에 신경을 썼다. 김경도는 움직임이 좋고 수비 면적이 넓으며 공격은 날카롭다. 현재 김경도는 대표팀 10번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자격을 갖춘 '프리 맨'이 됐다. 곧 카타르 월드컵 3차예선인 12강전이 시작된다. 12강전에서 절대 주전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김경도는 계속 자신의 색깔을 살려 대표팀을 위해 몇 골을 더 넣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
- 스포츠
-
중국에서 캉테로 불리는 조선족 축구선수 김경도
-
-
세계급 중국 조선족 무용가 김성
- [동포투데이 김다윗 기자] 많은 사람들이 중국 유명 무용가 김성(金星)을 알지만, 그녀의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중국 무용수 중 한 명인 김성은 25세의 나이에 벨기에 왕립 무용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다. 1995년 이미 유명해진 김성은 군구(軍區)예술단에서 퇴직하고 북경향산병원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 수술 과정은 장원 감독에 의해 다큐멘터리 영화 '미스 김성'으로 촬영되었다. 23세에 장가들어 28세에 여자로 태어난 김성은 38세에 독일인 한스와 결혼했다. 현재 54세인 그녀의 인생에는 전설로 가득 차 있다. 김성은 1967년 선양의 한 조선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남자 목욕탕에 데려가 목욕시키자 김성은 매우 불편함을 느꼈다. 이때부터 김성은 자신의 성 인식에 대한 의구심이 생겼다. 아홉 살 때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학교 문예선전대에서 짙은 화장을 하고 춤을 추면서 군구(軍區)예술단의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때로부터 김성은 자신의 내면에 있던 미에 대한 향수가 늘 여성스러움을 깨닫게 되었다. 1985년 군사훈련 멘토 송소원이 제1회 전국 타오리컵(桃李杯) 무용대회에 참가할 것을 권유했다. 그 결과 대회 경험이 전무했던 김성은 탄탄한 기반과 뛰어난 재능으로 400여명이 출전한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무용 ‘목가’로 청소년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고 중국에서는 최초로 발레화 없이 발가락을 사용할 수 있는 무용수가 됐다.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겠다는 결심은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줄곧 성별의 정체성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녀는 내가 언제 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 1986년 광둥현대무용학교에서 국비유학생을 미국에 보내려 한다는 소식을 입수한 그는 무작정 광둥으로 건너가 공부했다. 2년 뒤 뉴욕으로 건너가 무용을 업그레이드하면서 캐롤라인과 첫 결혼을 했다. 1993년 김성은 귀국 후 중국문화부가 주최하는 전국 현대무용수련반에 초빙되어 중국 현대 무용의 창시자가 되었다. 1995년 영혼과 육체의 분열은 그에게 큰 문제를 가져왔다. 김성은 오랜 시간 고군분투하다 결국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장악하기로 했다. 그는 성전환 수술을 결심 했다. 김성의 결정은 어머니가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들이든 딸이든 모두 같은 자식이라며 수술이 건강에 지장만 없으면 된다고 말했다. 1999년 김성은 개인의 이름을 딴 중국 최초의 민간 무용단인 '상해김성무용단'을 창단했다. 중국에서 국제 공연 티켓을 판매할 수 있는 곳은 '상해김성무용단'과 '중국곡예단' 두 곳뿐이다. 2004년 무용단을 이끌고 유럽 순회공연을 마친 김성은 귀국길에 독일 신사인 한스를 만났다. 한스는 독특한 동양 여성에게 깊은 매력을 느꼈다. 1년간의 소통 끝에, 그들은 결혼의 궁전에 들어갔다. 결혼 후 세 아이를 입양한 김성은 이젠 엄마와 딸, 그리고 아내가 되어 남성에서 여성으로의 전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김성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의 의구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사회는 심리적 인내를 반복적으로 질문하고 지침을 제공하는 투명하고 보이지 않는 심리의사와 같다. 김성은 오직 실력만이 유언비어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오늘도 진지하게 춤을 추고 있으며 그녀의 유럽공연 티켓은 구하기 어려울정도다.
-
- 사람들
-
세계급 중국 조선족 무용가 김성
-
-
中 유명 거사(居士)화가 탕위밍
- [동포투데이 김나래 기자] 유명한 화가 탕위밍(湯餘銘)은 중국 영화배우 탕웨이의 아버지이다. 탕위밍의 작품은 구하기 어렵다. 탕위밍은 1990년대부터 중국 스타일과 서양 스타일을 결합한 독특한 3 차원 작품을 제작했다. 필명은 북안산(北安山)이다. 원저우(溫州) 러칭(樂淸)출신인 그는 전문 미술가로 현재 거사 전문화가 1인자로 불리며 세계문화유산예술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그가 그린 그림은 매우 높은 예술성을 가지고 있다. 다른 화가들의 귀감이 되고 벤치마킹해 그림 애호가들에게도 큰 도움이 됐다. 탕위밍은 '신부춘강산거도(新富春江山居圖)'에 참여했을 정도로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은 사람이고, 명리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도 가장 돋보이고 존경하는 곳이다. 일부 대가들에 비해 직업적으로 높은 프로정신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탕위밍의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산수화를 그리는 데는 능숙하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그의 거사 회화다. 그의 작품은 불학적인 매력을 주면서도 과장되지 않은 느낌을 준다. 정직한 사람이라 그런지 그의 작품에는 자신만의 매력이 배어 있다. 탕웨이밍으로서도 딸 얘기를 할 때마다 뿌듯했다. 탕웨이는 지금의 이름값도 대단했고, 탕웨이밍에게 딸의 성장과 성취를 보여주기도 했다. 딸이 자신보다 이름값을 많이 한다고 해서 탕웨이밍이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려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탕위밍은 화계의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로, 회화 작품도 많은 기관에서 사랑을 받아 현재 세계문화유산예술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불교문화에 대한 깊은 연구를 하고 있는 그에게 불교문화와 중국 문화유산을 칭송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할 일이다. 탕위밍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단지 돈을 벌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술에 대한 추구나 신앙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탕위밍은 회화 예술에 대해 높은 이해와 추구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 역시 사람들이 존경하는 점이다. 중국 여배우인 탕웨이는 1979년 10월 7일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에서 태어났다. 2000년 중앙연극학원 연출학과 본과에 입학했다. 2007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리안 감독의 '색·계'에서 여주인공을 맡았다. 2010년 미니시리즈 영화 '월만 헤네시'에 출연해 중화권 영화미디어대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탕웨이는 2011년 영화 '만추'로 한국백상예술대상, 한국영화평론가상, 부산영화평론가상 등 10여 개 부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2013년 '베이징에서 시애틀을 만나다'는 중화권 로맨스 영화 흥행 신기록을 세우며 상하이 영화평론가상, 중국영화감독협회, 베이징대학생영화제 여우주연상 등을 수상했다. 2014년 탕웨이는 영화 '황금시대'에 주연으로 출연하였으며 2015년에는 영화 '블랙 코드'에 출연했다. 2016년에는 주연 멜로 영화 '베이징에서 시애틀을 만나다'가 7억 9000만 위안의 흥행 성적을 거두며 중화권 멜로 영화 흥행 기록을 다시 세웠다.
-
- 사람들
-
中 유명 거사(居士)화가 탕위밍
실시간 사람들 기사
-
-
베이징이 낳은 한송이 아름다운 “예술의 꽃”
- 중국명: 金海心 영문명: Hannah Kim 출생년도: 1978.10.30 출생지: 중국 베이징 직업 : 가수, 사회자 혈형: B형 언어: 중,영,한,일 소속: 김해심음악레이블 조선족 가수 김해심은 1978년 베이징의 음악인 가정에서 출생, 부모는 음악교수었으며 일찍 딸 김해심에게 고전음악을 가르쳐 주었다. 어릴 때부터 착실하게 음악기초를 다져온 김해심은 1998년 부모의 학생인 저명한 음악가 싼보리(三宝力)의 추천에 의해 소니레코트회사와 계약을 맺고 가수생애를 시작했다. 이 해 김해심은 저명한 대만시인 리만팅(厉曼婷)이 작사한 “조금도 안남겨(毫无保留)”와 “잠들지 않는 바다(睡不着的海)”를 불렀다. 이 중 “잠들지 않는 바다”는 1999년 10대 골든곡으로 선정되었다. 2000년 김해심은 그녀의 두번째 앨범 “그렇게도 자호감 있어(那么骄傲)”을 출판, 직접 앨범의 노래를 제작하는 사업에 참여했으며 이 중 3수의 노래는 자신이 직접 창작한 것이었다. 2002년 김해심은 중국의 유일한 대표가수로 상하이에서 펼쳐진 한류음악회에 참가햇다. 그 이듬해 김해심은 화나음반회사와 계약을 맺고 앨범 “김해심”을 제작, 이 중 김해심이 선정한 주제곡 “대안(对岸)”은 연속 2주간 중국가요랭킹에서 1위를 차지했다. 2006년 김해심은 독립적인 앨범회사를 창립, 동시에 앨범 “독립일”을 제작했는데 이중 80% 이상의 작품의 작곡은 그녀가 직접한 것이었으며 이 앨범은 음악대상을 받기도 했다. 2008년 김해심은 국내사상 처음으로 있은 대형 패션오락프로 “아름다운 소가인(美丽俏佳人)”의 사회를 맡았으며 베이징올림픽을 맞으면서 “베이징은 그대를 환영한다(北京欢迎你)”를 부르기도 했다. 2009년 김해심은 데뷔 10주년 기념 앨범을 출판, 동시에 음악드라마 “곧 사라지게 될 청춘(致我们终将逝去的青春)”에 출연, 정휘의 역을 맡았다. 2010년 김해심은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사랑은 그대와 나사이에”를 불렀다. 2013년 김해심은 김해심음악레이블 회사를 창립하고 경영주로 되었다. 김해심은 가수일뿐만 아니라 창작일군이며 또한 사회자기도 한 다면수이다. 거기에 중국어와 한국어는 물론 일본어를 정통하고 있으며 중국의 7대 방언중의 하나인 광동어를 특히 잘 구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 사람들
-
베이징이 낳은 한송이 아름다운 “예술의 꽃”
-
-
미소가 아름다운 민요가수- 변영화
- 한국명: 변영화 중국명: 卞英花 출생연월일: 1983년 7월 3일 민족: 중국 조선족 학력: 대학(연변대학 예술학원) 직업: 가수 소속: 중앙민족가무단 주요 성과 2003년 제2회 중화민요콩쿠르 우수상 2004년 CCTV 서부민요콩쿠르 생태 금상 2006년 청년가수 콩쿠르 원생태 은상 우리민족의 전통민요 “아리랑”이 아릿다운 조선족 신세대 여가수의 독특한 목소리에 실려 전 세계에 울려 퍼질 때, 익숙한 이름이 우리 눈앞에 선히 떠오를 것이다. 그가 바로 미소가 아름다운 중국중앙민족가무단의 민요가수 변영화, 그녀는 자신한테 주어진 매 하나의 기회를 빛내면서 10여년간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 세계 무대에서 우리 민요를 널리 알리고 있다. 변영화가 걸어온 성장의 길을 보면 부모의 각고한 노력과 갈라 놓을 수 없다. 일찍 변영화가 어린 시절, 딸애한테서 예술적 재능을 발견한 부모는 딸애한테 정규적인 예술교육을 시키기 위해 변영화가 8살 나던 해에 연길시에서 10여평방미터가 되는 세집을 맡고 전문가 선생을 찾았고 임시일을 하면서 딸의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부모의 사랑과 관심에 감동된 변영화는 꼭 자기의 노력과 성과로 부모한테 보답하리라 결심, 12살에 길림예술학원 연변분원 소학반에 입학, 고심참담하게 노력한 결과 순리롭게 연변대학 예술학원에 입학하면서 자신의 기나긴 예술생애에 발을 들여 놓았다. 이어 변영화는 행운스럽게도 연변대학 예술학원 민족성악 교연실 부교수였던 강신자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당시 부분적 교원들이 변영화의 목소리를 듣고 비관적인 모습을 보이자 강신자 부교수는 “내가 이 학생을 제자로 받아들인 것은 이 학생의 목소리에 대해 개발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목소리란 우선 다른 사람의 목소리보다 달리 개성이 있어야 하고 또한 앞으로 크게 발전할 잠재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그 때로부터 강신자 부교수는 변영화한테 독특한 조선족풍격의 가창법을 주입, 음역에서의 한계를 벗어나게 했으며 독특한 남도민요의 풍격에서의 둘도 없는 가수로 자라게 하였다. 강신자 부교수의 정성어린 지도하에서 변영화의 가창수준은 놀라운 제고와 비약을 가져왔다. ▲민요가수 변영화 변영화는 피타는 노력으로 2000년부터 선후로 연변민족전통음악민요대회 소년조 금상, 전업조 금상, 2002년 8월, 제1기 전국 조선족성악콩쿠르 민족창법 특별상, 9월에는 중국국가민족위원회와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에서 조직한 중국조선족가수콩쿠르에서 민족창법 1등상을 받아안았다. 변영화는 또 2006년 7월 CCTV에서 주최한 CCTV 전국청년가수 콩쿠루에서 원생태조 민요 은상을 수상했다. 당시 평심위원들은 우리 민족복장을 입고 노래를 부른 변영화를 두고 "한국드라마에서 금방이라도 내려온듯한 변영화가수의 ‘아리랑’은 관람객과 평심위원들의 눈과 귀를 번쩍 트이게 하였다."고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연변대학 예술학원을 졸업한 후 변영화는 중국 중앙민족가무단에 입문, 가요계에서 더욱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 국내외 무대에서 관중을 흡인했는가 하면 각종 콩쿠르에서도 묵직한 상들을 받아안기도 했다. 지난 2014년 1월에는 SBS '스타킹'에 출연해 자신만의 독특한 음색으로 '새타령'과 '아리랑', 조수미의 '나 가거든' 등의 무대를 꾸며 MC들과 게스트들을 전율케 했으며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변영화는 현재 중앙민족가무단 국내외 순회공연으로 분주히 보내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저장예술직업학원(浙江艺术职业学院) 캠퍼스에서 열린 축제의 공연무대에서 익숙한 우리민요 “아리랑”“새타령”을 불러 관중들을 열광시켰는가 하면 또 중국대륙을 휩쓴 한국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주제가 “My Destiny”를 불러 관중들의 공명을 일으키기도 했다.
-
- 사람들
-
미소가 아름다운 민요가수- 변영화
-
-
몸매•인물•목소리 그 모두가 매력인 가수 - 김미아
- 편집자의 말: 중국조선족은 근로용감하고 끈질기며 또 총명하고도 지혜롭다. 쪽박을 차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척박하고도 거친 땅에 보습날을 대기 시작해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말, 우리글 그리고 우리의 문화를 지켜왔으며 애초에는 그 거개가 농민의 후손이었지만 지금은 중국의 당정분야, 과학분야 군부대분야, 문화•체육•교육 및 기타의 경제분야를 비롯해 중국의 모든 분야에 분포되어 있다. 이 중 유명한 것은 대부분 우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연변FC, 연변가무단 등이 전형적이라 할 수 있다. 동포투데이는 오늘부터 시리즈 형식으로 중국 대륙무대에서 활약하는 신세대 조선족 가수들을 소개하게 된다. 몸매•인물•목소리 그 모두가 매력인 가수-김미아 한국명: 김미아 중국명: 진메이얼(金美儿) 외국명: (M.KING / MAYER) 출생: 1984년 3월 27일 학력: 中 연변대학 예술학원 음악표연학부 졸업 성좌: 양좌 혈형: O형 신앙: 불교 김미아는 2006년 1월, “환락의 중국행(欢乐中国行)”의 “멈추지 않는 환락(欢乐播不停)” 춘제 특별무대에서 “돌고 도는 행복(转动幸福)”을 열창해 일약 스타행열에 들었다. 이어 김미아는 2008년 1월, 중국 관영 CCTV가 주최한 스타탄생 프로그램인‘싱광다다오(星光大道)’에서 ‘아리랑’을 열창해 13억 대륙을 열광시키며 무려 3000여명의 경쟁자들을 제치고 우승 획득. 심사 위원들의 근래 보기드문 인재라는 평가를 받았다. 2010년 5월에는 한국에서 자신의 첫 음반 “위대한 사랑”을 출판했다. 이어 2010 제 14 회 중국 전국청년가수 대상콩쿠르 통속가요 경연에서 우승, 총결산 8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 이듬해 6월 13일, 김미아는 한국 “세계 신 7대 자연기적 평선” 추천위의 초청으로 한국에 가서 “제주- 세계 신 7대 자연기적 평선활동”에 참가, 중국지역 형상대사로 위촉받았다. 당시 김미아의 외국명은 M.KING / MAYER이었고 별명은 흰돼지었다. 2011년 김미아는 콘서트 “일찍 있었던 사랑(曾经的我)”을 대중들한테 선물했으며 그 이듬해에는 제 30 회 중국 CCTV 음력설야회에서 가요 “겨울의 홰불(冬天里一把火)”을 불러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1984년 3월 27일 생인 김미아는 일찍 5살 때부터 한대의 피아노를 갖고 음악의 꿈을 키웠으며 2000년에 연변대학 예술학원에 입학했으며 졸업한 2005년 7월 북경백첩문화예술유한회사와 계약을 맺고 가수생애를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김미아는 중국 국내는 물론 자주 한국으로 드나들면서 수많은 가요를 열창, 특히 2008년 제29회 북경장애인올림픽 폐막식에서 “멀지 않은 꿈(不远的梦想)”을 열창했고 한국의 사회자 강호동, 가수 인순이 등과 같은 무대에 오르는 행운을 가지기도 했다. 최근년간 김미아의 활동이 어쩐지 즘즘해진듯 싶다. 예술분야의 일군들한테 탐문해도 그렇고 인터넷을 검색해 봐도 점점 궁금해지기만 하다. 하지만 “호랑이가 움츠리고 있는 건 더 멀리 뛰기 위한 것이고 바다가 지나치게 고요한 건 폭풍우가 다가 올 징조”라고 요즘 김미아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건 그가 새로운 “열풍”을 몰고 올 그 무엇인가를 “잉태”하고 있는 것으로 믿어 마지 않는다.
-
- 사람들
-
몸매•인물•목소리 그 모두가 매력인 가수 - 김미아
-
-
중국 가요계에 또 한명의 조선족가수 탄생?
- [동포투데이] 5월 28일 저녁, 안휘위성(安徽卫视) 농민노래자랑 리얼리티쇼 “중국농민가요대회(中国农民歌会)” 첫 회가 방송을 탔다. 북부 구역의 동북, 내몽골 등 지역에서 온 선수들 중 연변 화룡시 팔가자촌에서 온 조선족 박혜자(朴慧子)가 아담한 외모임에도 불구하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왕봉의 “바람처럼 자유롭게(像风一样自由)”를 불러 관중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박혜자의 뛰어난 가창력에 채국경(蔡国庆), 텅거얼(腾格尔), 봉황전설(凤凰传奇)등 맨토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텅거얼은 박혜자씨를 “작은 대포”와 같은 목소리를 갖고있다고 칭찬했다. 박혜자씨는 연변대학 예술학원 졸업생이다. 2012년 음악교육전업을 졸업하고 예술양성학원에서 일년간 피아노를 가르쳤고 후에는 연변을 떠나 외지에서 직장생활을 했으며 최근에 집안사정때문에 연변에 돌아왔다가 지인의 소개로 이 프로에 참가하게 되었다.
-
- 사람들
-
중국 가요계에 또 한명의 조선족가수 탄생?
-
-
김순옥 화백, 휴머니즘과 자연주의 감성을 화폭에 담아 세계 일주
- [동포투데이] 휴머니즘과 자연주의를 바탕으로 인간과 자연의 조화와 행복을 표현해온 김순옥 화백은 부모형제가 살고 있는 파라과이를 중심으로 중남미 교류는 물론 미국,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 전역으로 활동영역을 확대하면서 문화외교관으로 인정받아왔다. 김순옥 화백은 한국문화를 널리 알린다는 사명감을 바탕으로 본인만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국내외 유명장소에서 김 화백의 작품 소장 김 화백의 작품은 해외의 국립미술관, 박물관 및 주요기관과 공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국내에도 서울시립미술관, 전주역사박물관, 국회, 청남대, 경희대, 서울대병원 등 주요장소에 소장되어 있다, 그중에 외교부에서 소장하여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인터뷰를 한 배경으로도 유명한 그의 대표적인 작품 소나무(700호)는 청렴하고 강직한 공무원의 굳건한 의지를 표상한 것이다. 유연성 있게 상대와 협상하면서도 원칙 있게 국익을 추구하는 외교관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이 그림 외에도 맥(脈 120호)은 썩거나 찢어지지 않는 전통소재인 닥나무를 활용, 자연주의 작가에서 오감으로 느끼는 휴머니즘 작가로 발전해 가는 작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경희대에 소장되어 있는 이과수폭포(2000호)와 금강산(2000호)는 거대한 자연의 모습을 웅장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를 받아왔다. ◇재료의 한계로부터 자유로운 작품 활동 김순옥 화백은 오래전에 수년간 몰두하다 손목 인대손상으로 접어뒀던 입체작업을 최근에 다시 시작하였다. 재료의 벽을 뛰어넘어 평면과 입체작품을 동시에 작업하는 김 화백의 작품에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깊게 스며 있다. "창의적인 작품 활동을 하다 보면 재료의 활용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대상을 참신한 소재를 통해 아름답게 승화시키는데 열정을 다하고 있는 김 화백은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기본적인 베이스 아래 색의 조화 및 배려·존중을 통하여 작품의 완성미를 더하는데 노력해 오고 있다. ◇남미의 정열을 담은 대표작품 '이과수 폭포', 그림은 나의 운명이자 열정의 원천 평화의료재단 이사로 재직 당시 작품판매수익금을 바탕으로 스와질란드에 자선병원을 설립, 의료혜택을 받지 못한 환자들을 위한 무상 치료 환경을 마련한 것은 그녀에게 있어 특히 의미 깊은 활동이 되었다. 또한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전시회 개최와 지난 2005년 대한민국 독도전 등은 그녀에게 잊지 못할 기억 중 하나라고. 화가들이 그림 그리는데 몰입하다 보면 자칫 주위에 소홀해지고 고립될 수도 있지만 김화백은 쉼 없이 움직이며 늘 주변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는다. "그림은 저에게 있어 운명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 일주하며 해외전시는 계속할 것 김 화백은 동양인 최초로 파라과이 대통령궁에서 초대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했으며 중남미 가장 큰 전시장소인 아르헨티나 국립미술관 초대개인전, 뉴욕 유엔본부와 워싱턴 국립박물관 등에서의 초대개인전을 통해 세계에 널리 그의 작품을 알릴 수 있게 되었다. 아직 가보지 못한 나라에서 전시하며 한국문화를 알리겠다는 김 화백은 한류의 품격을 높이며 세계인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김순옥 화백은 Norte대학교서 예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홍익대학교 겸임교수, 경향신문사 갤러리관장과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 심사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현재 서울시 미술심의를 맡고 있으며 해외교류작가회 대표로서 세계 일주를 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
- 사람들
-
김순옥 화백, 휴머니즘과 자연주의 감성을 화폭에 담아 세계 일주
-
-
[재중동포 작가 김혁③] 윤동주의 민족애와 문학정신 고양에 앞장서
-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윤동주시인은 천고절창의 주옥같은 시들을 창작하여 우리한테 훌륭한 문화유산을 남겼다. 윤동주의 삶과 그 작품은 시공간과 여러 계층을 초월하여 현대성과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작가 김혁은 우리 민족의 저명한 시인 윤동주에 심취되고 윤동주에 관련된 글을 쓰게 된 계기를 두고 “생래적(生来, 天生的)”에 가깝다 할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중국 연변 용정에서 태어나고 또 학창시절을 포함하여 스무살까지의 많은 시간을 용정에서 보냈던 김혁,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후에 조선족 최초로 윤동주의 일대기를 그린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를 창작하고 윤동주 관련 많은 일들을 하게 된다. 그는 용정에서 어려서 신안소학교(지금의 북안소학교)를 다녔는데 그 전신이 바로 윤동주와 문익환이 다녔던 광명학교였다. 그후 용정중학에서 초중과 고중을 마쳤는데 용정중학교는 바로 윤동주가 다녔던 은진, 대성, 동흥 등 학교가 합병한 학교로 지금 교정에 윤동주의 시비가 우뚝 서있다. 이렇게 윤동주와 ‘지연’, ‘학연’을 가지고 있었다. 그후 기자로 뛰면서 조선족 최초의 윤동주 학술회, 시비 건립, 윤동주 관련 학술저서 출간, 관령 활동들을 빠침없이 취재하였고 윤동주를 중국에 맨 처음 알린 오오무라 마스오, 윤동주의 시를 일본에 번역한 아이자와 가쿠, 윤동주의 여동생 윤혜원 녀사 등 관련 친지, 연구가들도 지난 세기90년대에 이미 만나 많은 교류를 했다. 시인에 대한 경모의 마음으로 오래전에 벌써 윤동주 관련 카페도 개설했다. 한국과 중국에서 윤동주 관련 논문으로 석사, 박사 학위를 딴 된 사람만도 50명이 넘고 윤동주 시인에 대한 연구론문도 수백편이 나왔다. 평전이나 위인전기물도 여러 권 나왔다. 이렇게 논픽션 작품은 많이 나왔는데 그에 비해 픽션작품 즉 소설과 같은 창작물은 전무했다. 너무나 알려져 있는 시인이었지만 그 높은 위상 때문이었던지 윤동주 시인의 생애를 작품화한 사례가 극히 적었다. 소설로는 1992년 경, 한국에서 방송드라마의 시나리오를 개작하여 한부가 나왔다. 그후 구효서와 이정명에 의해 나왔지만 작가 김혁이 장편 “시인 윤동주”를 2010년에 발표한 후의 일이다. 그리고 윤동주의 숨결은 현재에도 용정의 곳곳에서 느껴지는데 이 곳에서의 윤동주에 대한 추모와 연구작업은 미비한 상태. 그같은 공백들은 시인 윤종주의 고향에서 태어나고 윤동주가 다녔던 학교에서 공부했던 작가 김혁에게 그 어떤 사명감과 창작의 충동을 주었다. 작가 김혁은 본격적으로 윤동주를 소설화 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연변작가협회에는 “계약작가”라는 창작제도가 있다. 작가들이 창작기획서(스토리와 창작취지)를 작성해 제출하면 연변의 유명 대학교수들과 평론가, 원로작가들로 구성된 평심단이 제출된 많은 기획서들 중에서 가능성 있는 작품을 엄선해내 1년간 창작기금을 지원하는 것이다. 김혁은 윤동주에 대한 스토리만으로 선정되었다. 그는 조선족 작가들중 유일하게 두 차례나 이같은 계약작가에 선정되었다. 이렇게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가 2010년 조선족의 권위문학지 “연변문학”에 1년간 연재되었다. 한편, 지난해 9월에는 윤동주의 고향 용정에서 사단법인 “용정·윤동주연구회”를 발족시켰다. “용정·윤동주연구회”는 조선족의 작가, 학자, 교직원들로 무어졌으며 윤동주의 민족애와 문학정신을 선양하는데 그 취지를 두고 있다. “윤동주 시인의 고고한 삶과 정신은 내 삶속에 깊게 들어와 있다”고 작가 김혁은 말한다. 윤동주의 민족애와 문학정신 고양에 앞장서 용정윤동주연구회 회장으로서의 김혁은 우리 민족의 저명한 시인 윤동주가 선양하려 했던 민족애와 문학정신을 널리 계승, 발양하기 위해 지난해 9월, 용정윤동주연구회를 설립한 후 짧디짧은 시간내에 많은 일들을 해왔다. 2014년 12월 20일, 명동촌 윤동주 생가에서 윤동주 탄신 97돐 기념행사를 가졌고 2015년 2월 16일에는 윤동주 옥사 70주기를 기념하여 “항일 시인 윤동주 70주기 기념행사”를 가졌다. 또 용정·윤동주연구회의 편찬으로 문화총서 “룡두레”를 출간하기도 했다. 용정·윤동주연구회의 년중행사의 중요한 일환으로 해마다 정기적으로 펴내게 될 이 문화총서 “룡두레”는 문단의 각 장르에서 뛰어난 실적을 올린 작가들과 대학 교수들로 편집진을 뭇고 그 첫 기를 윤동주 추모특집으로 꾸몄다. 향후 지속적으로 출간하게 될 “룡두레” 총서는 윤동주를 연구하고 그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잇는 문헌들과 회원들의 다채로운 창작품들들을 게재할 뿐더러 용정의 역사, 룡정이 배출한 인걸들을 조명하고 진통을 겪고 있는 우리 공동체의 이슈와 현안에 대해 진맥하며 나아가 우리 민족의 비전에 대한 제안 등의 알쭌한 내용들을 여러 코너를 개설해 다양한 문체로 꾸며나갈 계획이다. 올 4월 4일, 청명을 맞아 장춘에서 꾸리는 조선족의 순수문학지 “장백산” 잡지사와 손잡고 윤동주의 묘소를 새롭게 단장했다. 이어 윤동주연구회 사무실을 윤동주의 자취가 서린 용정의 자택 자리에 오픈, 오픈식을 가지고 본격적인 사무에 착수했다. 뿐만 아리라 용정·윤동주연구회에서 주관, 운영하는 사이트가 현재 개설중에 있다. 이 사이트는 윤동주에 대한 연구, 선양과 더불어 그 의미를 넓혀 용정의 역사와 인물에 대해 조명하고 오늘의 이슈와 뉴스를 시효성 있게 다루며 중국조선족공동체의 비전을 알리는 뉴스성, 전문성 종합사이트로 거듭나려 한다. 이제 용정·윤동주연구회 성원들로 구성된 역사답사팀이 본격적으로 역사답사에 나선다. 윤동주의 발자취가 어린 명동, 나아가 조선족역사의 “박물관” 격인 용정 유적지에 대한 계획적인 답사다. 보름에 한번 꼴로 정규적인 답사를 이어갈 것이라고 김혁은 밝혔다. 또 조선족문학의 순문학지인 “도라지” 잡지사, 문화종합지 “문화시대” 등 잡지들과 손잡고 용정·윤동주연구회 회원 특집을 마련했다. 금후에도 여러 간행물과 손잡고 회원들의 우수한 문학작품들을 그에 걸맞는 우수한 지면에 소개할 타산도 해본다. 현재 연구회 회장 김혁이 창작한 조선족 최초의 “윤동주평전”이 대형문학지 “장백산”에 연재중이다.올 하반년에는 윤동주를 위한 인물연구서 “윤동주 코드”를 출간하게 된다. 이 외에도 해당 부문과 손잡고 윤동주 백일장, 윤동주 시랑송대회 등 유익한 행사들을 대거 펼쳐 나갈 예정이다. 에필로그 현재 김혁은 30년 가까이 근무하며 지내왔던 자치주 수부 연길시를 떠나 고향 용정으로 돌아왔다. 윤동주 시인의 용정자택 자리에 앉힌 연구회 사무실에서 창작에 전념하고 있다. 경쟁과 명리만이 난무하는 도시에서 탈출하고 싶었고 수십년 내내 문인들의 “문인상경”의 풍토로 얼룩진 문단에서 탈출해 참된 작가의 기본적인 자세를 갖추고 싶었다. 또 중국조선족 역사와 문화의 발원지인 용정에서 조선족의 역사를 직접 밟아보면서 관련 연구물과 작품 쓰기를 창작성향으로 삼고 십여년간 매일 꼬박 십여시간 가까이 창작과 독서를 견지하고 있다. “종당에는 중국조선족의 생성에 대한 호흡이 긴 소설, 이주와 정착, 개척과 항일, 건국과 ‘문혁’과 개혁, 출국과 이산의 수백년의 역사를 대하소설로 창작하는 것으로 만년을 장식하고 싶다”. “진정성을 가지고 영혼의 울림이 있는 큰 글을 쓰고 싶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 아닌 항상심(恒常心) 하나 가슴에 품고 길을 가려 한다. 그리하여 나중에 ‘민족작가’라는 타이틀로 남고 싶다. 단지 유행을 쫓는 소설가나 칼럼니스트가 아닌 역사에 천착하고 민족을 위해 한 목청 내였던 작가로 기억되고 싶다”. 그의 창작에 대한 지론이다. 김혁 그의 30여년의 작가생애, 그간 그는 실로 우리들 앞에, 우리의 역사 앞에 너무나 많은 작품들을 펼쳐보였고 너무나 많은 일들을 해왔다. 또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 오늘도 쉼모르고 달리고 있다. 재중동포 작가 김혁, 조선족 문단의 갈피에 우렷이 남을 중후한 큰 작가의 앞날을 기대해 본다.
-
- 사람들
-
[재중동포 작가 김혁③] 윤동주의 민족애와 문학정신 고양에 앞장서
-
-
미소가 아름다운 김춘희! 그녀는 우리가 몰랐던 쥬얼리전문가
- [동포투데이] 20여년간 한길만 걸어온 김춘희! 그녀는 우리가 몰랐던 조선족 쥬얼리전문가입니다. 조선족사회에서 외면당한 한 '우물'을 20여년간 파는건 결코 쉬운일이 아니였습니다 올리버 크롬웰의 이런 명언이 떠오릅니다. "성공은 높은 점프도 긴 점프도 아니다. 성공은 마라톤의 발걸음들이다.'...그녀 김춘희(41세)씨가 바로 이 성공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994년 연변대학 리공학원 기능학과 귀금속전문학과를 다닌 그녀는 그때 배운 전문지식을 이순간까지 놓은적 한번도 없습니다. 한창 려행업, 외국어학과, 컴퓨터학과, 회계학과 등등이 인기학과라고 온 중국이 떠들썩하는 90년대에 김춘희씨는 오히려 귀금속전문학과를 선택했고 그 선택에 따라 오늘까지 달려왔습니다. 미래에 대한 100%의 확신이 선것은 결코 아니였습니다. 먼 바다길에 나선 항행사처럼 예측할수 없는 삶의 '바다길'을 그녀는 오직 성실, 노력, 근면함으로 선택을 반복하면서 조심스럽게 헤쳐나왔습니다. 언제 부딛칠지 모르는 삶의 "암초"를 내심 두려워하면서도 한걸음한걸음 열심히 걸어왔습니다. 참으로 참답게 한발한발 걸어온 그녀였습니다. 2000년 류학 떠난 남편 따라 한국으로간 그녀는 자신의 배운 전문지식을 놓지 않았습니다. 대전세이백화점 쥬얼리전문점에 취직한 리유도 쥬얼리탐구를 위한것이였습니다. 귀금속세공, 보석감별을 배웠던 그녀였기에 대전세이백화점에서의 8년동안 근무에서도 막힘이 없었습니다. 매니저직을 마무리로 그녀는 8년동안 머물었던 쥬얼리전문점을 떠나 2008년 귀국하면서 그녀는 차츰 작품연구에 몰입하게 되였습니다. "모든 준비는 조심스럽게 했습니다. 작품만을 연구하고 진주리폼을 하면서 꾸준히 작품만 완성했습니다. 그러다가 번화한 백화점이 아닌 조용하지만 나름 공방으로 리용 가능한 신세기광장 11층 33호에 소은방쥬얼리디자인작업실을 오픈하게 되였습니다. 첨에는 아는 지인분만 찾아오는 작업실이였습니다. 지금은 동호회도 운영하면서 차츰 고객들의 인정을 받게 되였습니다. 혼수장만하는 분들도 저의 작업실에 찾아오셔서 진정한 명품을 구입하시기도 하고 또 제가 여러가지 문의하신 전문지식을 알려드리기도 합니다. 돈보다는 쥬얼리에대하여 우리 조선족들이 좀 더 많이 알고 정확하게 알기를 바라는게 제 소망입니다. " 연변! 쥬얼리문화전파에 평생을 기여할터 "연변 쥬얼리는 아직 원점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남방의 상인이나 한국인들이 하는게 그게 전부인데다가 연변조선족분들은 쥬얼리를 마냥 어려운 상식으로 알고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알아야 하는 쥬얼리지식마저도 우리조선족들은 모르는 실정입니다. 비싼 진주목걸이는 좀 더 이쁘게 착용하면 미적효과를 극대화시킬수 있지만 그냥 년세가 지극한 로인분들이나 착용하는걸로 압니다. 안타까울때 많습니다. " 맹목적인 고가구입을 반대하는 리유도 바로 그것이였습니다. "기본상식이라도 알고 사면 사기를 당하는 일이 적지만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가격에 따라 맹목적으로 구입을 하면 손해를 보는것은 조선족들입니다. " "혼수구입하는 분들은 돈을 아끼지 않더라구요. 관련 쥬얼리지식은 거의 백지라고 봐야하죠. 거금을 쓰면서 준비하는 혼수쥬얼리인만큼 먼저 기본상식이라고 알고 구입을 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조금만 신경쓰고 조금만 귀기울이면 충분히 가능한 지식습득이니 말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작업실에 찾아온 고객들에게 커피 한잔 드리고 여유롭게 이야기를 나눕니다. 서재를 방불케하는 그곳은 쥬얼리를 학습하는 공부방이기도 합니다. 진주관련에 질문을 하자 막힘없이 진주 종류와 간단한 구별법, 진주제품 관리방법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을 하는 그녀입니다. 천연진주, 양식진주, 모패진주, 모조진주 우리가 일상에서 몰랐던 용어들이 쏟아져나옵니다. 김춘희씨는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하게 설명합니다. "상식이 번거로운것 같지만 한번두번 자주 들으면 듣기만 해도 금방 알수 있는 상식들입니다. 저의 작업실이 신세기 11층 33호에 자리를 잡은것도 바로 그 리유입니다. 일보러 나오셨던 분들이 다리쉼도 할겸 물 한잔 마실겸 저의 작업실에 들려 쥬얼리관련 이야기도 듣는 기회를 교통적으로 보다 편하게 만들어들이고저 하는데 있었습니다. 이젠 입소문을 타서 꽤 많은 분들이 찾아오십니다. 쥬얼리를 모르는 분들이라면 망설이지 말고 찾아오셔서 쥬얼리상식을 자신의 지식으로 만들어서 일상에 피해가 없고 더 잘 활용하시길 진심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은 작업실 이름에도 그대로 묻어납니다. 소은방이라는 이름에는 이런 뜻이 포함되여있습니다. "소박한 은혜가 사방에 날리다" 김춘희씨는 큰 욕심이 없다고 합니다. 또 실제로 소은방쥬얼리작업실에 다니셨던 고객분들과 상담을 받아본 분들은 그 부분에 대하여 인정을 합니다. "돈이라는데 초점을 두었다기보다는 그 분야를 즐기는 편이 더 적절한것 같습니다. 정직하고 따듯하게 알려주고 쥬얼리관련 무료상담도 해드립니다. 혼수예물과 진주제품 위주로 주로 맞춤 주문,판매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 맞춤 주문, 판매에 대하여 김춘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객들에게 거품가가 없는 가격을 제시할수 있는 가장 정확한 지름길입니다. 소자본창업이라는 장점도 갖고 있지만 깔린 제품이 많다보면은 거품가격을 선정할 확률이 높습니다. 금, 은, 보석쥬얼리 제품을 판매하지만 주료 맞춤 주문 판매를 하는 리유는 불필요한 자본류실을 줄여 고객부담을 확 줄일수 있을뿐만아니라 천차만별이 고객들에게는 맞춤제품이 최상의 선택이기때문이지요." 오도가다 한번쯤은 발길을 돌려 쥬얼리DTY설계,제작, 수리, 리폼, 리셋팅 분야에서 월등한 전문기술력을 지낸 조선족 그녀 김춘희 소은방쥬얼리작업실(위챗 18943365900)에 찾아가보세요. 누구든 영원한 추억으로 남을 쥬얼리DTY설계, 제작하여 나만의 쥬얼리를 만들어보는것도 삶의 묘미는 아닐까 생각듭니다. 한우물만 판 조선족쥬얼리전문가 그녀가 착한 심성으로 연변사람들에게 다가온건 우리 조선족들에게 있어서 행운이고 행복인것 같습니다. 하물며 평생을 쥬얼리문화전파에 올인한 그녀이지 않습니까? 20여년전 확신이 서지 않았던 귀금속전문학과를 전공했던 20살 애숭이 처녀가 지금은 40대 아름다운 녀인이 되여서 조선족들에게 쥬얼리문화를 정확하게 전파하고 있습니다다. 긴 세월만큼 그녀의 노력과 인내가 오늘날의 쥬얼리전문가라는 막강한 초능력을 가져다준건 당연한 결과인것입니다. 그녀의 바램대로 조선족분들이 쥬얼리 진품명품에 관한 정확한 상식을 모두가 다 아는 그런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김단비
-
- 사람들
-
미소가 아름다운 김춘희! 그녀는 우리가 몰랐던 쥬얼리전문가
-
-
[재중동포 작가 김혁②] 필속에 살아 숨쉬는 역사와 인물들
-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밑바닥인생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작가의 추구와 아픔에 대한 묘파는 지난 세기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그 양상이 변하기 시작한다. 그때를 두고 작가는 다음과 같이 회억한다. “나의 육신밖의 아픔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피부로 느끼면서 갓길에 섰던 나의 필봉은 새로운 좌표를 찾기 시작했다”. 따라서 일부 몰지각한 한국인들의 중국조선족 한국초청사기 사건을 다룬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다”, 도시와 외국으로의 진출 과정에서 조선족 여성들이 겪는 아픔을 다룬 장편소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중국조선족 문제 테마소설”이라는 부제하에 변혁기 중국조선족의 고뇌를 취급한 작품들을 연이어 펴냈다. 특히 1990년대 말의 한국초청사기 사건을 전방위로 다룬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는 진부하기 그지없는 조선어 출판 풍토에서 가장 짧은 시간내에 수천권이 판매되는 기록을 냈다. 그 후, 조선족공동체의 정체성과 위기를 다룬 작품창작이 작가의 창작 주선을 이룬다. 십여년간 “중국조선족문제 테마소설”이라는 부제를 달고 그 시리즈물을 수십편 펴냈다. 올해에는 그 특집을 한데 묶은 소설집이 발간된다. 작가는 여섯 부의 장편소설을 연재, 출간했는데 모두다 민족의 역사와 관련된 묵직한 소재의 작품들이다. 그 가운데서 “마마꽃 응달에 피다”는 문화대혁명에 관한 아픈 기억을,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는 흔들리고 있는 조선족공동체의 아픔속에 스러져가는 여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 조선족 최초 연변지역 위안부의 시선에서 위안부와 남경대학살 제재를 다루고 있다. 김혁 작가의 상술한 작품들을 두고 평론가들은 “묵직한 사건과 인물들을 소재로 서사적 사건 전개의 구조가 선명하고 극적인 이야기성의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들이다”고 높이 평가했다. ↑김혁작가가 펼쳐낸 청소년을 위한 조선족인물전기 "한락연의 이야기" 작가의 필속에 살아 숨쉬는 역사와 인물들 김혁은 다각적으로 조선족공동체의 역사와 면면을 보여주기 위해 소설, 창작 외에도 기행, 칼럼, 영화론문 등 여러 장르를 충분히 동원하여 수년간 관련 연재를 이어가고 있다. 그 중 5년간의 답사를 거쳐 용정의 역사를 60여만자로 다룬 장편역사기행 “일송정 푸른 솔, 해란강 깊은 물”은 조선족문화의 발상지 용정의 생성과 지금까지의 역사에 대한 완결판 같은 작품이라고 격찬받고 있다. 이 작품은 이미 중문으로도 번역되여 출간을 앞두고 있다. 3년반 째 연재되고있는 문화역사시리즈 “영화로 읽는 중국조선족”은 스크린의 각도에서 조선족의 백여년 역사를 다른 텍스트로 연구한 작품이다. 2년째 연재되고 있는 “소설가 김혁의 인물시리즈”는 조선족 수십명 인걸들의 생애를 사전형식으로 가나다라 순으로 짧고 명료하게 다루고 있는 소전기물이다. 작가는 근년래 인물전기 창작에 거의 모든 시간을 바치고 있다. 민족의 정체성 확인과 자부와 비젼을 위한 작업—조선족인물전 시리즈를 사회와 약속하고 그 결과물들을 육속 펴내고 있다. 그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제반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주덕해, 한락연, 김염, 김약연, 윤동주, 김학철, 리홍광, 리화림, 양림, 정판룡 등 우수한 인걸들의 전기를 이미 펴냈거니와 앞으로도 지속 펴내는 작업을 그의 창작스케줄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고 있다. 한편, 그는 기행문, 인물전이라는 논픽션물 외에도 소설이라는 픽션으로 조선족 인걸들을 조명하는 작업을 펼쳐나가고 있다. 문단 처음으로 소설화한 “시인 윤동주”는 연변이 낳은, 겨레가 애대하는 시인 윤동주의 문학적 삶을, “완용 황후”는 연변에서 숨진 청나라 황후를 통해 근대 동북의 근대사를 조명하고 있다. 현재 집필을 마치고 출판을 앞두고 있는 “무성시대”는 “중국 영화의 황제” 김염의 영화인생을 그린 장편소설로서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 지지작품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매체의 기자와 소설가로서의 삶을 병행해 살았던 김혁에게 있어 “문학적 다큐멘터리”로 특징지을수 있는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남들과 차별화된 창작성향이다. “대서사적인 작품을 다루는 것이 나의 근년래 그리고 향후의 창작방향”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끊임없는 창작과 그 작품들 작가 김혁, 올해만도 여러 권의 작품이 나오게 된다. 그의 수백편의 칼럼중에서 역사칼럼만 추려 묶은 칼럼집 “리얼하게 그리고 치열하게”가 곧 출판된다. 윤동주 연구서인 “윤동주 코드”의 집필을 이미 마무리했다. 조선의용대 분대장 김학철에 관한 청소년 전기도 년내로 출판되게 된다. 현재 연재중인 “윤동주평전”의 집필과 병행한 명동학교 교장 김약연에 관한 평전 “규암 김약연전”도 집필중이다. 빠르면 년내로 출간되게 된다. 연변대학교 교수들과의 공저로 연변대학의 정초자 “정판룡평전”도 몇해 전에 이미 집필에 착수, 곧 결과물이 나오게 된다. 10여년 지내면서 용정체험을 소설로 펴냈던 녀류작가 강경애의 일대기도 소설화하는 중이다. 연변의 첫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의 설립자이자 고종황제의 밀사였고 독립운동가였던 보재 이상설에 관한 장편소설도 그이의 타계 100주년을 맞아 출간 예정이다. 특히 지난 몇년간 김구의 비서로 지냈고 윤봉길과 이봉창의 작탄의거를 도왔지만 이데올로기의 차이로 해외에 알려지지 못했던 의용대 출신의 여걸 리화림에 대한 전기물 집필작업을 몇해간 꾸준히 해왔다. “꼭 그 결과물을 내놓으련다”고 김혁은 말한다.
-
- 사람들
-
[재중동포 작가 김혁②] 필속에 살아 숨쉬는 역사와 인물들
-
-
[재중동포 작가 김혁①] 작가의 성장과 탐색
-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김혁 1965년 중국 룡정에서 출생, 연변대학 조문학부 석사연구생, 북경 로신문학원을 졸업(수료). 열하홉살이 되던 해, 단편소설 “피그미의 후손”, “노아의 방주” 등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 그로써 문재를 인정받고 스무살 어린 나이에 “길림신문”의 기자로 파격 발탁되였고 그 후로 “길림신문”, “연변일보” 등 조선족의 주요 매체와 인터넷 미디어에서 25년간 언론인으로 활약했다. 십대에 데뷔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난 25년간 “마마꽃, 응달에 피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완용 황후”, “시인 윤동주”, “춘자의 남경” 등 장편소설과 “천재 죽이기”,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불의 제전”, “뼈”, “피안교” 등 중단편소설 수십편,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 “주덕해의 이야기”, “한락연의 이야기”, “윤동주 평전” 등 인물전기, 평전, 장편역사기행 “일송정 높은 솔, 해란강 푸른 물”, 문화역사시리즈 “영화로 읽는 중국조선족” 등 역사문화연구저서 외에 시 수백수, 칼럼 200여편을 창작, 발표해 “쟝르를 초월하는 작가”, “조선족 다산작가”로 불리고 있다. 상술한 성과와 기여로 하여 윤동주문학상, 김학철문학상, 연변문학상, “해란강” 문학상, 자치주정부 “진달래” 문학상 등 각종 묵직한 문학상을 30여회 수상했다. 현재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이사,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위원장), 용정윤동주연구회 회장 등 직무를 맡고있다. 원로 평론가가 평가하는 김혁 전임 연변작가협회 주석이며 원로 평론가인 조성일 선생은 재중 동포 대형문학지 “장백산” 2014년 2월호에 게재한 글 “뒤에 난 뿔이 우뚝하다-작가 김혁 인상기”에서 김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사람들이 김혁이 누구냐고 물으면 소설가 하나의 타이틀로는 부족하다. 그의 문학은 소재나 형식, 그 어느 면에서나 문학예술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있다. 그는 문학의 거의 모든 분야, 이를테면 소설, 시, 수필, 칼럼, 르포, 다큐멘터리, 아동문학…등을 섭렵하면서 글쓰기를 계속해 왔고 문학이라는 전당의 구석구석에 이름을 남겨 독자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그는 소설가일 뿐만 아니라 시인, 수필가, 칼럼리스트, 아동문학가이고 지어 ‘이디어 뱅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소설가 김혁’이보다 ‘작가 김혁’이 더 잘 어울린다. 그는 다쟝르작가로,다면수로 우리 앞에 당당하게 서 있으며 그만큼 우리 조선족문학예술에 대한 기여가 다방위적이다.” 작가의 성장과 탐색 작가 김혁은 1985년에 데뷔하여 소설과 시를 발표, 신출내기 기자, 문학도로서의 습작기를 걸쳐 지난 세기 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그야말로 맹렬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남에 비해 불운한 특유의 인생경력과 오래동안 언론사에 근무했던 언론인의 안광을 지녔던 관계로 애초의 작품부터 무거운 소재에 천착하게 되었다. 창작 작법을 잘 모르고 썼던 초기의 작품부터라도 그는 시종 그 “무거움”을 의식해 왔었다. 열아홉에 낸 두 편의 처녀작품 역시 중국 개혁개방 초기, 변혁기의 취업대기 청년들의 문제를 반영했고 거기에 제목이 종교색채까지 띠어 화제가 됐었다. 이 시기의 작품에서 작가는 자기 자신의 불우한 운명과 처절한 인생체험을 회피하지도 숨기지도 않고 자기 작품에 반영했다. 이 비정한 세계에서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성장기에 자기가 겪어야 했던 가혹한 체험들을 독자들에게 설파했으며 가슴속에 고여있는 한과 서러움과 괴로움을 이야기했다. 작가의 소설 “적”, “바람속에 지다”, “바다에서 건져올린 바이올린”, “천재 죽이기”, “불의 제전”을 비롯한 많은 작품들을 보면 그 소설들에 부각되고 있는 거의 모든 주인공들은 죄다 방황과 좌절을 거듭하고 근원적인 아픔에 시달리면서 죽어가는 비극적인 인물들이다. 작가는 이런 인물형상들을 통해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불안의 정조” 속에서 비장한 혈투로 몸부림치는 사회의 저층에 깔린 인간들의 영혼을 보여주려 했고 자기의 실존을 위해 약속 없는 미래를 향해 힘겨운 행보를 하고 있는 “소인물”들의 불안과 실망, 소외와 고독, 아픔과 슬픔을 반영하려 했으며 나아가 빛에 가려진 어둠속 약자들과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이야기 하려 했다. 이 모든것은 남과 다른 작가의 불우했던 인생경력과 밑바닥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들이었다. 한편, 작가는 새 것에 부단히 도전하며 과감하게 새로운 실험을 한다. 작가는 국내외 문학사조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자기 나름의 개성적인 작품을 창출해 냈다. “천재 죽이기”, “신오감도”를 비롯한 초현실주의 계열시, 신사실주의 소설 “라이프 스페이스”, 황당파 소설 “바다에서 건져올린 바이올린”, 사이버 소설 “병독”, 판타지 소설 “불의 제전” 등 동포 문단에서 쟝르와 문체실험을 가장 많이 하고 가장 먼저 한 작가로 기록되고 있다. 김혁은 한국 작가 박경리를 흠모한 나머지 십여년 전, 사비를 팔아가며 그이를 찾아 한국 원주로 가기도 했다. 좋아하는 작가를 단 한사람 뽑는다면 단연 “중국 조선족 문학의 대부” 김학철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칼럼이라는 장르에 환혹되여 거의 일주일에 두세편꼴씩 수백편을 써 나가고 있는 것도 기자생활이라는 체질화된 문체의 작법에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김학철 선생의 창작중에 가장 빛나는 다량의 잡문에 매료되여서 부터이다. 작가 김혁은 말한다. “김학철 선생은 나를 문학의 길로 인도해 주고 아픔과 상처를 보듬어 주며 노는 법을 일러주신 분이다. 나에게 있어 그 분은 너무나 아득해서 도저히 흉내낼수 없이 높은 경외의 대상이다. 그이의 넓이와 깊이의 사범(師範)은 내가 영원히 본받고 내가 궁극적으로 닿고저 하는 목표이다.” 김혁은 현재 김학철 관련 인물전기 집필을 마무리, 출간을 앞두고 있다.
-
- 사람들
-
[재중동포 작가 김혁①] 작가의 성장과 탐색
-
-
꼬마 발명가 강승호 군 제7회 유럽창의력발명혁신전시회 금상 수상
- - 바지 폭에 따라 걸이 홀더가 조절되는 ‘다용도 옷걸이’ - 엄마를 위한 ‘주방 조리 도구 장착 기능을 갖는 손잡이’ - 폐렴 걸린 동생을 위해 ‘빗물효과를 이용한 미세먼지 제거장치’ 등 발명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한국 초등학생이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개최된 총 31개 국가에서 427점을 출품한 루마니아 제7회 유럽창의력발명혁신전시회 ‘유로인벤트’에서 금상·은상·특별상을 수상했다. 서울 삼릉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인 강승호 군이 금상을 수상한 발명품은 ‘다용도 옷걸이’이다. 또 함께 출품한 ‘주방 조리 도구 장착기능을 갖는 손잡이’도 은상을 수상했다. 강군이 발명한 ‘다용도 옷걸이’는 옷걸이 하나에 상의와 하의를 함께 걸어 보관할 수 있는 옷걸이로 바지의 크기에 따라 매번 집게의 간격을 조절해야하는 불편함이 없도록 한 발명품이다. 옷걸이의 양측 날개 프레임에 바지걸이 회전홀더를 결합시켜 크기에 상관없이 모든 바지를 간편하게 보관할 수 있는 ‘다용도 옷걸이’는 바지 구김이나 변형 없이 장기간 보관이 가능하며 옷의 무게에 의해 이탈되는 것을 방지하는 장점이 있다. 강군이 발명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아픈 동생 때문이었다. “동생이 폐렴에 걸려 병원에 입원한 후에 집안에 공기청정기를 사용했는데 황사가 너무 심해 한 대로는 미세먼지를 제거할 수 없었다”면서 “비가 오면 먼지가 씻겨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빗물효과를 이용한 미세먼지 제거장치를 발명한 게 첫 발명의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강군의 또 다른 발명품인 ‘주방 조리 도구 장착 기능을 갖는 손잡이’는 프라이팬의 손잡이 상단에 회동 브래킷을 장착해 뒤집개 등의 다양한 조리도구를 끼워서 고정할 수 있도록 한 발명품이다. 엄마가 자신을 위해 돈가스를 요리하다 뒤집개에서 떨어진 기름방울로 인해 화상을 입고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발명한 이 발명품은 프라이팬 손잡이 위에 스프링 장력을 이용해 뒤집개를 끼우고 조절볼트로 고정할 수 있어 조리테이블 주변에 기름이 묻지 않아 청결하게 조리가 가능하며 화상방지에도 효과적이다. 어른이 되면 환자들이 집에서도 진료를 받을 수 있는 핸드폰처럼 작은 원격 진료 기계를 꼭 만들고 싶다는 강군은 이미 지난해 제36회 강남학생과학발명품경진대회 은상, 올해 제1회 인도네시아 국제디자인창의공학전시회 금상 등 국내∙국제발명대회에 참가해 5회 수상한바 있으며 옷걸이와 주방도구는 특허출원한 상태다. 강승호 학생 발명품 도면 1. 다용도 옷걸이 2. 주방 조리도구 장착 기능을 갖는 손잡이
-
- 사람들
-
꼬마 발명가 강승호 군 제7회 유럽창의력발명혁신전시회 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