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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박동웅 구로구의장, “구민과 더불어 외국인 주민도 살기 좋은 구로 만들 것”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한국은 노동력 공백에 따른 이주노동자와 국제결혼에 의한 결혼이민자의 증가로 사실상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월보를 보면 장단기 체류 외국인은 2021년 6월 말 기준 1,981,035명이다. 그중 서울시 구로구에 체류하고 있는 25,316명 외국인 주민 중 18,190명이 중국동포이다. 기자는 지난 4일 구로구의회 7대 후반기 부의장으로 또한 3선 의원으로서 지역발전과 의정활동에 열정을 바치고 이번 제8대 의회에서도 후반기 의장으로 지역주민은 물론 외국인 주민 민원이 발생한 곳은 어디든지 달려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박동웅 의장을 만나 그동안 의정활동 그리고 앞으로의 중국동포 및 외국인 주민 관련 정책과 지원계획에 대해 들어 봤다. 다음은 박동웅 구로구의회 의장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Q. 현재 시행 중에 있거나 계획 중인 중국동포 관련 사업은? A. 한국 국적을 가진 아이들은 보육료를 국가에서 지원을 해주는데 대한민국 국적이 아닌 중국동포 아이들은 어린이집을 다닐 때 보육료를 전액 자비로 부담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안산에서는 아마 시행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제 구로구도 내년부터 보육료 20%가량 지원해주는 사업을 하려고 한다. 현재 한국에 있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외국인 주민 자녀들을 조사해보니 약 천명 조금 넘는데 그 아이들에 대해 우선 보육료 20% 정도 지원해주고 차후에는 그냥 100% 지원하는 쪽으로 준비해 나갈 예정이다. 그래서 올해 최초로 이와 관련한 예산 편성을 준비하려고 한다. 한 해에 7억 정도 예산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Q. 구민들이 반발할 것 같은데? A. 그런 분들도 있지만 우리끼리만 살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글로벌시대,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만으로 먹고사는 것이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서울에서 구로만, 구로구 사람들만 뭉치는 것도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동포분들도 다 같은 한민족이고 외국인이던 한국인이던 차별 없이 함께 사회에 흡수돼서 생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주민들에게 잘 이해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Q. 지역주민과 중국동포 간 소통과 화합에 대한 모범 답안이 있다면? A. 가리봉을 중심으로 구로구는 중국동포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구로구에는 다문화 정책과가 있는데 중국동포들뿐만 아니라 베트남이라든가 필리핀 일본 등 이주민 정책을 총괄하고 있다. 우리 동포들도 명예 통장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고 또 구로구에는 봉사단이 매우 많다. 이를테면 구로 4동 같은 경우는 다문화 봉사자들이 야간 순찰도 하고 있고 다문화 경노당도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는 구로구가 소통을 많이 하고 있는 편이다. 근래 산발적으로 좀 많이 하고 있는데 향후에는 체계적인 시스템 상에서 동포들과 구청 간에 소통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Q. 현재 가장 시급한 현안과 해결책은? A. 현재 구로구에는 이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중에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분들이 중국동포들이다. 과거 코로나 이전에는 우리 동포들이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장사가 잘 안되는 등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에 대한 것은 우리가 추정할 수 있지만 정책은 정확한 수치를 갖고 하는 것이기에 다문화 정책과에서 우리 동포사회 실태 파악을 다시 해서 제도 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 Q. 상호우호도시 연변조선족자치주와 문화교류 계획은? A. 한국의 수출 규모를 보면 중국과의 교역이 미국을 앞서 나가고 있다. 그리고 중국에는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계시고 또한 중국과 한국 사이에 문화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문화적인 이해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연변과 교류(공무원 교류)를 했지만 사실 문화 교류라고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향후에는 여러 중국 도시와 자매결연을 맺어서 서로 간 문화를 교류하고 우리 축제 때 해당 국가 도시의 전통적인 문화행사를 유치할 수 있도록 하고 또 거꾸로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떤 축제라든가 행사가 있을 때 우리 구로구에서도 문화예술단이 가서 공연을 할 수 있는 그런 교류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Q. 임기 내 꼭 이루고 싶은 것은? A. 현재로서는 일단 코로나19 사태가 빨리 안정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대한민국 자체도 K-방역을 통해서 그냥 열심히 뛰고 있지만 우리 구로구에서도 구로구만의 어떤 방향 시스템을 잘 구축해 구로구가 코로나19에서 좀 더 안전한 도시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 할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안정돼야 구로에서 사업하시는 분들도 안정적으로 사업을 할 수 있고 지역경제도 활성화 될 것이다. Q. 중국동포에 대한 이해정도는? A. 한 예로 아마 한국사람 중에서 가장 양꼬치와 고량주를 많이 먹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정말 좋아한다. 젊었을 때 사실 한국에서 투자 목적으로 중국에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여러 가지 어떤 사정 때문에 결국 못 들어간 경험이 있다. 개인적으로 도시계획 전공이다 보니 연변은 물론 선양, 광저우, 칭다오, 상하이, 홍콩, 마카오 등 중국의 많은 도시들을 다녀봤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중국에 대한 이해도는 많다고 생각하고 중국 양꼬치를 중국동포보다도 내가 더 많이 먹는다고 감히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Q. 중국동포에 한 말씀 부탁한다면? A. 한국에서 돈을 벌어서 고향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는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충 그냥 돈을 벌고 살다가 중국으로 가면 된다는 인식보다도 역시 우리 조상의 뿌리는 한국이기 때문에 한국이 잘 돼야 동포사회도 잘 될 수 있다는 생각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은 한민족으로 역할을 한다면 지역주민들과 잘 화합할 수 있고 이제 동포들이 중국에 들어가서도 한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생활할 수 있다고 본다. 구로구의장으로서 향후 그 어떤 정책이나 개인적인 꿈도 있겠지만 중국 동포들이 구로구에 와서 잘 살고 여기에서 내가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그런 도시가 구로구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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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캉테로 불리는 조선족 축구선수 김경도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1992년 11월 18일, 김경도(진징다오·金敬道)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김경도도 매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시절 김경도는 축구에 대해 잘 몰랐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뛰어 노는 과정에서 축구에도 약간의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약간의 재능을 보였다. 연변은 축구의 전반적인 환경이 다른 곳과 다르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방과 후 첫 오락으로 축구를 한다. 이러한 축구 환경에서 많은 우수한 축구인재들이 배출되었다. 김경도는 2003년 옌볜(延邊)의 쑹칭링(宋慶嶺) 축구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인 축구 전문 훈련을 시작했다. 진징다오의 부모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한국으로 떠났으며 이러한 환경에서 김경도는 독립적이고 힘든 일을 잘 견디는 품성을 키웠다. 2008년 청소년대표팀에 뽑혀 첫 국제대회를 치른 김경도는 눈부신 활약으로 그해 U-20 대표팀에 발탁됐다. 2009년에는 U-20 대표팀 주장을 맡아 사상 두 번째로 국가대표팀 소수민족 주장 자리에 올랐다. U-20 대표팀 시절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2009년 김경도는 시리아와의 경기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포지션에서 2골을 넣으며 팀의 다음 라운드 진출을 도왔다. 김경도는 경기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이니에스타라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경기가 끝난 뒤 기자가 이니에스타와 연락해 상대방이 사인 유니폼을 선물한 것도 김경도를 오랫동안 기쁘게 했다고 한다. 2010년 김경도는 연변FC에 입단해 클럽 생활을 시작했다. 부모님도 곁에 안 계시고 이제 막 입단한 뒤라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김경도는 늘 팀 동료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봐야 만 했다. 마침 외사촌형인 박성(퍄오청·樸成)이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동생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퍄오청은 이때로부터 김경도를 돌보기 시작했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한국에 일하러 갔고 나는 연변FC에서 선수로 뛰었지만 돈을 많이 벌지 못했다. 박성은 오래 전부터 축구를 했다. 그는 돈을 괜찮게 벌었고 보너스도 받았다. 그때 나는 그의 집에 짐을 풀었다. 그는 나를 위해 많은 것을 사주었고 체육관에 갈 수 있도록 돈도 대주었다. 그리고 내가 U-20 대표팀에 합류했을 때 그는 다른 선수들이 좋은 휴대폰과 명품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나에게 그것을 다 사주었다. 나중에는 또 휴대폰과 아이패드까지 사주며 축구를 잘하라고 격려 했다” 이는 사촌형인 박성에 대한 김경도의 평가다. 오늘도 두 사람은 여전히 절친한 사이로, 중국 슈퍼리그에서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2011년 코스타리카와의 평가전에서 김경도는 벤치에서 나와 성인 남자 국가대표팀 데뷔를 알렸다. 이번 국가 대표팀 경험으로 김경도는 중국 슈퍼리그에서 쟁탈하는 인기 선수로 됐다. 2013년 이 쟁탈전에서 승리한 산둥 루넝(山東魯能)은 연봉 100만 위안, 이적료 800만 위안에 김경도를 영입했다. 하지만 루넝 합류 이후 김경도는 그렇다 할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고, 궈안과의 첫 경기에서 비정상적인 플레이로 결국 팬들의 욕설이 쏟아졌다. 다행히 동료들이 그를 격려했고 그가 힘을 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익숙한 포지션이 아니다 보니 김경도의 플레이는 매우 어색했다. 김경도의 가장 좋은 포지션은 미드필더와 풀백이다. 하지만 그런 위치에서도 김경도는 팀과 감독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달리기와 부상 스틸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많은 칭찬을 받았고, 팬들은 점차 그를 받아들였다. 그해 그는 좋은 활약을 펼쳤고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했다. 2016년, 마가트 감독은 김경도를 완전히 재탄생시켰다. 마가트는 유명한 "악마 감독"이다. 그는 선수들의 세부 사항에 대한 요구 사항이 매우 높았다. 그는 김경도가 수비형 미드필더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를 풀백으로 변경 시켰다. 김경도는 당시 마가트 감독이 자신에 대한 요구사항이 높았다고 밝혔다. 그는 "내가 공을 빨리 잡아 다른 사람이 못 따라온다며 볼을 잡으면 상대 측면 수비수를 상대로 돌파하라고 했다. 처음에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우싱한(吳興涵)이나 류빈빈(劉彬彬) 같은 빠른 스피드 돌파가 없었다. 나중에 하오준민(蒿俊閔)의 도움으로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해 시즌 김경도는 윙백 포지션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고 루넝에서 가장 빛나는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은사 마가트 감독은 안타깝게도 팀의 부진한 경기력으로 인해 해고되었다. 김경도 역시 그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암울한 순간을 맞았다. 2016년 ACL 8강 1차전 서울 방문경기를 앞두고 몸에 살코기 성분이 들어 있는 것으로 밝혀져 소변검사 양성 판정을 받아 60일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다. 이때부터 고기는 거의 먹지 않고 음식에 신경을 썼던 김경도는 충격도 컸지만 선수 생활과 컨디션 유지에는 큰 힘이 됐다. 그 해 김경도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맞았다. 2016년 11월 13일 김경도가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왕융퍼(王永珀), 왕통(王彤), 송룡(宋龍) 등 동료들이 대거 참석해 축하하였으며 루넝도 공식 홈페지를 통해 결혼 축하와 함께 김경도 부부의 백년해로를 기원했다. 김경도의 감정 또한 매우 로맨틱하다. 그와 그의 아내는 서로를 수년간 알아왔다. 그들은 중학교 동창이었다. 그들은 학교 다닐 때 사귀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들은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났고 서로에게 좋은 감정이 생겨 함께하게 되었다. 2017년 김경도는 징계에서 풀려나 팀에 복귀했고 루넝은 리샤오펑(李霄鵬)감독을 영입했다. 리샤오펑이 부임한 뒤 팀은 파격적인 변신을 하지 않고 마가트 감독의 플레이 스타일을 이어갔다. 김경도 역시 익숙한 윙백 포지션을 유지했다. 이후 두 시즌 동안 김경도는 좋은 활약을 펼치며 타르델리 및 펠레와 매우 묵계적인 관계를 형성했으며 종종 도움을 주거나 득점하며 루넝의 측면에서 날카로운 킬러가 되었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2018시즌 김경도의 수치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시즌 29경기에 출전해 6골 6도움을 기록하며 경기당 평균 고강도 달리기, 스퍼트 횟수 1위, 경기당 평균 거리 2위, 가로채기 3위, 경기당 4위라는 맹활약으로 시즌 최고 인기 본토 선수상을 거머쥐었다. 이로써 김경도는 대표팀의 단골손님이 됐고 리피는 물론 가오훙보(高洪波), 리톄(李鐵) 등 본토 감독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되었다. 다만 리피 시절에는 김경도에 대한 요해가 부족해 기술적인 특성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고 김경도 역시 월드컵 예선경기에서 자신의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리피 감독 후임으로 2021년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리톄 감독은 카타르 월드컵 2차예선 40강전 몇몇 경기에서 김경도의 활용에 신경을 썼다. 김경도는 움직임이 좋고 수비 면적이 넓으며 공격은 날카롭다. 현재 김경도는 대표팀 10번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자격을 갖춘 '프리 맨'이 됐다. 곧 카타르 월드컵 3차예선인 12강전이 시작된다. 12강전에서 절대 주전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김경도는 계속 자신의 색깔을 살려 대표팀을 위해 몇 골을 더 넣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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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급 중국 조선족 무용가 김성
[동포투데이 김다윗 기자] 많은 사람들이 중국 유명 무용가 김성(金星)을 알지만, 그녀의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중국 무용수 중 한 명인 김성은 25세의 나이에 벨기에 왕립 무용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다. 1995년 이미 유명해진 김성은 군구(軍區)예술단에서 퇴직하고 북경향산병원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 수술 과정은 장원 감독에 의해 다큐멘터리 영화 '미스 김성'으로 촬영되었다. 23세에 장가들어 28세에 여자로 태어난 김성은 38세에 독일인 한스와 결혼했다. 현재 54세인 그녀의 인생에는 전설로 가득 차 있다. 김성은 1967년 선양의 한 조선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남자 목욕탕에 데려가 목욕시키자 김성은 매우 불편함을 느꼈다. 이때부터 김성은 자신의 성 인식에 대한 의구심이 생겼다. 아홉 살 때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학교 문예선전대에서 짙은 화장을 하고 춤을 추면서 군구(軍區)예술단의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때로부터 김성은 자신의 내면에 있던 미에 대한 향수가 늘 여성스러움을 깨닫게 되었다. 1985년 군사훈련 멘토 송소원이 제1회 전국 타오리컵(桃李杯) 무용대회에 참가할 것을 권유했다. 그 결과 대회 경험이 전무했던 김성은 탄탄한 기반과 뛰어난 재능으로 400여명이 출전한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무용 ‘목가’로 청소년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고 중국에서는 최초로 발레화 없이 발가락을 사용할 수 있는 무용수가 됐다.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겠다는 결심은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줄곧 성별의 정체성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녀는 내가 언제 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 1986년 광둥현대무용학교에서 국비유학생을 미국에 보내려 한다는 소식을 입수한 그는 무작정 광둥으로 건너가 공부했다. 2년 뒤 뉴욕으로 건너가 무용을 업그레이드하면서 캐롤라인과 첫 결혼을 했다. 1993년 김성은 귀국 후 중국문화부가 주최하는 전국 현대무용수련반에 초빙되어 중국 현대 무용의 창시자가 되었다. 1995년 영혼과 육체의 분열은 그에게 큰 문제를 가져왔다. 김성은 오랜 시간 고군분투하다 결국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장악하기로 했다. 그는 성전환 수술을 결심 했다. 김성의 결정은 어머니가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들이든 딸이든 모두 같은 자식이라며 수술이 건강에 지장만 없으면 된다고 말했다. 1999년 김성은 개인의 이름을 딴 중국 최초의 민간 무용단인 '상해김성무용단'을 창단했다. 중국에서 국제 공연 티켓을 판매할 수 있는 곳은 '상해김성무용단'과 '중국곡예단' 두 곳뿐이다. 2004년 무용단을 이끌고 유럽 순회공연을 마친 김성은 귀국길에 독일 신사인 한스를 만났다. 한스는 독특한 동양 여성에게 깊은 매력을 느꼈다. 1년간의 소통 끝에, 그들은 결혼의 궁전에 들어갔다. 결혼 후 세 아이를 입양한 김성은 이젠 엄마와 딸, 그리고 아내가 되어 남성에서 여성으로의 전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김성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의 의구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사회는 심리적 인내를 반복적으로 질문하고 지침을 제공하는 투명하고 보이지 않는 심리의사와 같다. 김성은 오직 실력만이 유언비어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오늘도 진지하게 춤을 추고 있으며 그녀의 유럽공연 티켓은 구하기 어려울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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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환자 위해 한국어 배운 의사 선생님
[동포투데이 김다윗 기자] 최근 베이징 지슈이탄(積水潭)병원 안과 병동에 특수 백내장 환자가 입원했다. 환자는 90세 고령의 조선족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귀가 잘 안 들리지 않으며 중국어 대화도 불가능하다. 할머니는 입원하는 동안 딸에 의해 보살핌을 받아왔다. 환자의 딸은 의료진과의 소통을 돕는 '번역기'로 활용할 수 있지만, 가족은 수술실에 들어갈 수 없어 환자가 수술실에 들어간 후에는 언어 장벽이 큰 문제가 된다. 언어 부족으로 수술에 협조하지 못할 것을 우려한 담당 의사 우이(吳怡)는 수술 전 가족들과 반복적으로 소통하며 수술 중 환자의 협조가 필요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을 하나하나 설명해 환자가 수술 과정을 숙지할 수 있도록 했다. 환자의 가족들 또한 환자에게 협조하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종이에 필요한 문구를 쓰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안구 수술의 경우 수술 전 소독을 하려면 환자가 눈을 감아야 하고 수술 중에는 수술 도구가 환자의 눈 안에 있기에 환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으므로 유일한 방법은 언어 소통뿐이다. 고민 끝에 우이는 한국어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수술 중 환자의 협조가 필요할 수 있는 단어를 정리한 후 가족들에게 한국어로 번역해달라고 부탁했다. 한국어 기초가 전혀 없는 그는 발음을 중국어 병음으로 표기하고, 어구의 악센트와 멈춤을 표시할 수밖에 없었다. 몇 번 연습한 뒤 서툰 한국어를 구사하며 환자와 소통하려 했지만 할머니는 알아듣지 못한 채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가족들은 억양 때문이라고 우이에게 말했다. 우이 역시 중국어 병음을 병음해 만든 음조가 원음과 크게 어긋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온 우이는 조선족 친구에게 연락해 '보충수업'을 부탁하며 한마디씩 공부했다. 몇 마디가 아니었지만 정확한 발음을 만들고 모두 암기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날 저녁 공부를 마친 우이는 친구들에게 각 문장의 정상 속도와 느린 버전을 녹음해 검토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수술 당일 우이는 중국어 병음으로 표기한 한국어 문구가 적힌 종이를 수술실 벽에 붙이고 친구가 녹음한 '한국어 속성 교재'를 몇 차례 복습한 뒤 수술 준비에 들어갔다. 간호사들은 침대차에 실려 수술실로 들어온 할머니에게 수술 침대로 옮기라고 손짓했지만 할머니는 간호사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채 침대차 위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수술을 집도한 탕사오화(唐少華)는 우이에게 그동안 학습 성과를 시험해 보라면서 한국어로 환자와 소통하라고 했다. 우이가 환자에게 한국어로 말하자 할머니는 그녀를 쳐다봤지만 옮기지 않았다. 이에 우이는 한국어로 계속 의사소통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탕샤오화는 우이에게 다시 해보라고 격려했다. 할머니가 청력이 좋지 않아 잘 못 들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탕샤오화의 격려에 우이는 환자의 귓가에 대고 두 번 더 큰소리로 말했고 할머니는 결국 움직여 침대차에서 수술 침대로 옮겼다. 이어진 소독과 수술 도중에도 수시로 한국어가 울려 퍼졌고 환자는 우이의 지시에 따라 긴장을 풀고 의사와 호흡을 맞춰 가면서 무사히 수술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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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연예계 ‘조선족 왕자’ 맹서
[동포투데이 김나래 기자] 맹서(孟瑞)는 중국 연예계에서 건강한 이미지와 연기력, 좋은 입담을 겸비한 배우 겸 가수·사회자이다. 그는 조선족이라는 점에서 ‘조선족 왕자’로 불린다. 맹서는 2007년 영화 ‘마석산 10용사’에 출연하며 연예계에 데뷔했다. 그는 선후로 드라마 ‘남좌 여우’, 웹 드라마 ‘이건 두라라가 아니야’, 사극 신화 판타지 드라마 ‘물고기 쫓는 전설’, 도시 정감 드라마 ‘10년만 기다려’, ‘힘내라 인턴’, 청춘 멜로 웹 영화 ‘불가항력 남자 하인의 비밀’, 청춘 캠퍼스 웹 드라마 ‘남북 형제’, 사극 웹드라마 ‘약선’ 등에 출연하면서 인지도를 쌓았다. 그리고 음악 분야에서도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가 부른 ‘갈매기’ 등 영화 주제곡은 여러 차례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다. 맹서는 2018년 드라마 및 드라마 주제곡 분야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올해의 우수 드라마 OST’를 거머쥐었다. 1988년 헤이룽장성 쑤이화(蘇化)시에서 태어난 맹서는 수화 2중에 다녔다. 그 후 대학입시에서 구이저우(貴州)대학 연기학과에 1위로 합격해 구이저우대학에서 2년간 공부한 뒤 베이징(北京) 영화학원에서 연기 공부를 했다. 재학 중 ‘5월의 꽃 전국 대학생 문예공연 사회자 대회’ 우승, 구이저우성 최초 연극 전문 경연 대회 연극 부문 2등상을 받기도 했다. 베이징영화학원을 졸업한 후 맹서는 구이저우 TV방송국에 입사, 음식 프로그램의 외부 진행과 영화 종합 프로그램인 ‘추억 극장’의 진행을 맡았다. 데뷔 이후 꾸준한 노력으로 많은 드라마에 출연할 수 있었던 맹서는 TV·영화에서 다양한 캐릭터와 주연, 조연들을 연기하며 천부적 재능과 근면함으로 시청자들에게 인생의 백태를 보여주며 연기 인생을 평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30%는 운명이고 70%는 노력이다. 충분히 노력해야 행운도 찾아온다. 맹서는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하는 것이 나를 즐겁게 하는 동력”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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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조선족 가수·음악 프로듀서 김지문
[동포투데이 김나래 기자] 중화권의 많은 가수 중 편곡과 가창력을 겸비한 조선족 음악 프로듀서가 있다. 그가 바로 김지문(金志文)이다. 1982년생인 김지문은 지린(吉林)시 출신으로 지린예술학원(吉林藝術學院)을 졸업하고 현재 가수, 음악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다. 김지문은 초·중학교 시절 학급의 문예위원으로 활동하며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그는 우상인 주화건·두덕위·유징칭의 노래를 즐겨 불렀다고 한다. 중학교 졸업이 다가오자 김지문은 어머니의 뜻과 달리 지린예술학원에 진학해 노래를 배웠다. 졸업 후에는 술집에서 기타도 치고 노래도 부르면서 프로 가수에 못지않은 실력을 쌓았다는 후문이다. 김지문은 2002년부터 음악 프로듀서로 활동하면서 많은 인기 클래식을 만들었다. 2006년 그가 작곡한 원 월드 원 드림(One World One Dream)이 올림픽 노래 공모전에서 금상을 받으며 세상에 알려졌다. 2007년 첫 싱글 앨범 '형제 소문'을 시작으로 2009년에는 두 번째 싱글 앨범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외로워’ 그리고 2010년에는 앨범 ‘도문 강 원’을 발표했다. 2012년에는 저장위성TV의 노래 오디션 프로그램 ‘중국의 고운 목소리’에서 뛰어난 가창력으로 ‘사랑에 미쳐’를 각색해 불러 전국 4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 후 2013년 선전위성TV 음악 콩쿠르 프로그램인 ‘중국음초’(中國音超)에 출연해 ‘음초가왕’(音超歌王) 칭호를 수여받은 그는 같은 해 음악선봉차트 올해의 선두 싱어송라이터상을 수상하였으며 2014년에는 앨범 ‘꿈·집’으로 제18회 중화권 차트에서 신인 음악 프로듀서상을 수상했다. 김지문은 탄탄한 편곡과 창작 능력으로 2017년 노래 ‘옛날 일은 되새길 수밖에 없다’ ‘중국 처녀’로 각각 MTV 글로벌 중화음악축제 최우수 편곡상, 베스트 10 금곡상을 수상했다. 올해에는 싱글 ‘겨울철 지린에서 눈 놀이’를 시작으로 저장위성TV 음악프로그램 ‘천혜의 목소리 시즌2’ 그리고 후베이위성TV 춘제롄환야회에 출연하는 등 왕성한 활동으로 연예계의 한 축을 담당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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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외교의 꽃' 미녀 대변인 - 화춘영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의 외교부는 긴장하고도 엄숙하며 또한 민감한 부문이다. 이러한 부문에서 근무한다는 건 분명 영광스럽고도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자랑스럽기에 앞서 자아관리를 철저히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기민하고도 지혜로워야 하며 웅변능력 또한 비범해야 가능한 일이다. 아래에 소개되는 여성은 바로 웬간한 남자들도 능력의 한계를 느낀다는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의 일꾼, 그것도 외교부 대변인이다. 까다롭기도 하거니와 쩍하면 넘겨짚기를 잘하는 중외 기자들 앞에서 때로는 침착하게, 때로는 날카롭고도 당당하게 또한 어떤 경우에는 상냥하고도 겸허하게 기자들 앞에 나서는 그녀 - 화춘영(华春莹)은 지금까지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1970년 화춘영은 중국 강소 회안의 한 간부의 가정에서 태어난 화춘영은 별로 간부가정의 자녀라는 우월감을 별로 느끼지 못하며 자랐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단발머리를 하기 좋아했으며 늘 얼굴에 웃음기를 담고 있는 친절하고도 예의가 바른 소녀였다. 중학교 시절, 화춘영은 학습 성적이 돌출한 편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남한테 뒤지는 편도 아니었다. 당시 그녀는 남자애들이 즐기는 축구운동을 좋아했으며 고중입시를 앞두고는 여학생들을 이끌고 남녀 축구 대 항전을 치르기도 했다고 한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고나 할까? 선생님과 동창생들의 눈에는 조용하고도 기타 사심이 없어 보이는 화춘영 - 그한테는 조용한 가운데 강인한 일면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그녀는 대학교 숙소의 ‘영춘화(迎春花)’로 불렸지만 대학교 4년간 그녀는 연애 한번 해보지 못한 극소수 여학생 중의 한명이었다. 이렇게 아련한 것 같으면서도 강한 일면이 있고 또한 다른 측면으로 보면 부드럽기도 한 것이 화춘영의 과거의 주소라면 후에 외교관이 된 다음의 화춘영은 강자 앞에서는 약하지 않고 약자 앞에서는 또한 절대 강하지 않는 것이 외교부 대변인으로서의 현주소였다. 2012년 11월 19일, 당시 42세가 되는 화춘영이 중국외교부 브리핑 장소에 나타나자 장내는 삽시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단발머리 미녀가 외교부 대변인의 신분으로 나섰으니 말이었다. “드디어 중국에도 미녀외교관이 나타났군 그래.” “그래그래, 미녀이면서도 어딘가 카리스마가 있어” 한편 화춘영의 언변과 실력에 대해 시험대에 올려 보려는 외신 기자들도 없지 않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엉뚱한 속셈을 가졌던 외신기자들도 눈알이 동그랗게 되면서 잠잠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날카롭다가도 다시 친절한 화춘영의 언어실력은 장내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긴 화춘영은 외교부에 갓 입문한 햇내기가 아니라 이미 거의 20년간 외교전선에서 단련된 외교능수라는 것을 외신기자들이 어떻게 알 수 있었으랴. 사실 화춘영이 중국 외교부에 첫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3년이었다. 외교부에 입문한 화춘영은 선후로 서 유럽사(司) 과원, 주 싱가포르 대사관 수행인원, 3등비서, 외교부 서 유럽사 3등비서, 부처장, 주 유럽연맹 사절단 2등비서, 1등비서, 참사관, 외교부 유럽사 참사관 등 직에 머물다가 2012년 강유(姜瑜)에 이어 중국 외교부 보도 사 부사장으로 되었다. 그리고 그 해 11월 중국외교부 대변인으로 부임, 중국외교부가 대변인 제도를 건립한 이래 모두 5명의 여성대변인이 탄생했다. 역대 중국외교부의 여성대변인들로는 각각 이금화(李金华), 범혜연(范慧娟), 장계월(章启月), 강유와 화춘영이었다. 알려진데 의하면 화춘영이 외교사업에 종사한 28년 간 유럽사 및 유럽, 아시아 지구에서 근무하면서 비교적 풍부한 외교경험과 양호한 소통능력을 키웠으며 외교부 대변인으로 되기에 매우 합당한 인선이 되었던 것이다. 화춘영은 늘 “나는 최선을 다 하여 모든 이들을 도와 적시 적이고 정확하며 또한 전면 적으로 중국의 외교정책을 요해하게 하는 동시에 나 역시 모든 이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고 평등하게 교류하며 그리고 양호하게 합작하는 것으로 중국과 세계와의 상호 요해와 이해, 신입과 합작을 추진하기에 적극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하군 했다고 한다. 화춘영은 진실로 그렇게 했다. 2012년 11월 16일, 화춘영은 중국외교부에서 개최한 정례브리핑이 거의 마무리가 될 무렵에 중국외교부의 신임대변인의 신임으로 기자들 앞에 나타났다. 그 때 그녀는 외교부의 제 27번째 대변인이자 5 번째 여성대변이기도 했다. 당시 자기의 어깨위의 책임이 중대함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화춘영은 중국과 세계의 관계는 한창 심각한 조정 시기에 있으므로 중국은 세계를 더욱 많이 요해해야 하며 세계 또한 중국을 더욱 많이 요해해야 한다고 표했다. 이어 11월 19일, 화춘영은 정식으로 중국외교부의 정례 브리핑을 주최, 브리핑에서 화춘영은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연임 후 첫 출국방문이 아시아태평양 지구를 선택한 것과 중국공산당 제 18 차 당 대회 이래의 중국의 외교정책 등에 관한 기자들의 물음에 답하면서 논리성이 강한 그녀의 답변과 막힘없는 화술구사는 모든 기자들의 찬탄을 자아내면서 중국의 젊은 여 대변인의 매력과 풍격을 충분히 과시하였다. 그 이튿날 중국 홍콩의 한 매체는 당시의 정경을 두고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1월 19일 오후, 외교부의 신임대변인 화춘영이 첫 브리핑을 주최, 20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내에 화춘영은 선후로 10명에 달하는 중외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주었다. 중일관계로부터 시작하여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지구 전략 및 향후 어떻게 매체를 대하겠는가 하는 것을 두고 경외 기자들은 불쑥불쑥 ‘도전적’이고도 민감한 문제에 대해 질문을 쏟아냈으나 신임대변인 화춘영은 기민하고도 자유자재로, 개방되고도 솔직하게 답했으며 난감한 문제들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대범하고도 상세하게 답변하여 모든 기자들의 긍정을 받았다. 브리핑이 끝난 후 화춘영은 웃음기가 어린 얼굴을 하고는 처음으로 발언대에 올라 기자들한테 진심으로 소통하고 평등하게 교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뒤로부터 중국과 외국의 매체의 기사들에는 중국외교부 대변인 화춘영이란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면서 그 이름은 지구촌 방방곳곳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화춘영은 외교부 대변인이란 본직에는 물론 다른 분야에서도 남다른 모범을 보이어 2020년 1월 1일, ‘중국부녀’ 편집부로부터 ‘2019년 10대 여성인물’로 평선 되었고 2020년 9월 8일에는 전국 코로나 19 대응 선진개인 및 전국 우수 공산당원으로 선정 되기도 했다. 현재 화춘영은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보도사(司) 사장직에서 근무하고 있는 걸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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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의 젊음을 과외교육에 바친 오미화 씨
[동포투데이] 오미화 교원(41세)은 조선족 교육사업에 대한 불타는 신념과 의력으로 장장 12년동안 과외교육에 몸과 마음을 이바지하고 있다. 1997년 9월에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대학사범분원 한어문(중국어)전업을 졸업한 오미화는 선후로 왕청림업국 조선족학교에서 4년, 한국에서 중국어 강사로 6년동안 활약하면서 번 돈으로 연변자치주 왕청현좋은미래과외학습센터를 설립하고 교육 사업에 대한 일편단심과 전력투구로 풍성한 성과를 거두어 학부모와 어린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지니고 있다. ▲왕청현좋은미래과외학습센터 오미화 교원 과외학습센터를 설립한 첫해에 40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중 양부모가 없는 어린이 8명, 홀부모어린이 10명, 한족 어린이 9명으로서 한족, 결손가정 어린이는 인수의 65%를 차지하고 있었다. 대부분 결손가정 어린이들은 친척 집이나 할아버지, 할머니 슬하에서 유치원에 다니고 있으며 성격이 활달하지 못하고 소극적이며 우울하고 괴벽했다. 오미화는 결손가정 어린이들에게 늘 사랑으로 어린이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하나하나 녹여주고 부모들이 외국으로 돈벌이를 가고 외할머니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한 남자애는 늘 집에 가 거짓말을 하여 노인이 교원을 오해하게 하였고 노인이 간혹 어린이의 필기장을 들여다보고는 전후를 알아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담임교원만 탓했다. 오미화는 노인과 어린이에 대한 고까운 생각보다 우선 어린이가 거짓말을 하게 된 원인부터 찾기에 노력했으며 정황을 상세히 요해한 후에는 평소보다 더 따뜻한 사랑을 몰 부었다. 차츰 우울하던 어린이는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 선생님을 잘 따르고 학급활동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으며 하루는 “우리 엄마가 한국에서 오면 꼭 선생님께 고운 옷을 사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해 오미화의 마음을 울려놓기도 하였다. 오미화는 어린이들의 정황을 요해하기 위해 늘 여유시간을 이용해 어린이들과 함께 노래 부르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린이들 특히 결손가정 어린이들의 심리를 장악하였으며 자그마한 우점이라고 보이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신심과 용기를 북돋우어주었다.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한 남자애는 주먹이 세고 남의 음식을 잘 빼앗아먹고 수업시간 규율을 지키지 않았으며 다른 애들이 벗어놓은 신을 변기에 처넣기도 했다. 하지만 이 어린이는 반급 청소와 좋은 일을 하는 습관도 있어 오미화는 이와 같은 우점을 칭찬하면서 남을 때리고 욕하는 나쁜 습관만 고치면 반장감이라고 하였더니 그 애는 신심과 용기가 생겨 나쁜 습관을 차차 고치기 시작하였다. 그 어린이가 된 감기에 걸려 학습센터에 오지 못했을 때에도 오미화는 학급 어린이들의 사랑과 관심을 듬뿍 담은 과일 구럭을 들고 찾아가 집단의 사랑을 느끼게 하였다. 하여 이 어린이는 학습과 생활면에서 많은 진보를 가져왔으며 소학교에 입학해서는 이제껏 반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오미화의 엄마와도 같은 사랑에 받들려 많은 결손가정 어린이들이 제 궤도에 들어섰고 마음껏 배움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어린이들의 매 하나의 성적과 진보에 학부모들은 너무도 고마워 감사의 마음을 금치 못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오미화의 좋은미래강습과외학습센터는 처음의 50평방미터로부터 300평방미터로 늘어나고 어린이도 처음의 50명으로부터 지금의 150명으로 늘어났으며 교원대오도 처음의 2명으로부터 지금은 10명으로 늘어났다. 이외에도 오미화는 빈곤 어린이들의 학비는 면제해 주거나 1년에 300, 500위안씩 면제해 주어 학부모들의 뒷근심을 덜어주고 있으며 왕청현회중아동애심협회, 왕청현애심어머니협회에도 해마다 500, 1000위안씩 기부하고 있다. 오미화는“학부모들의 인정을 받을 때마다 교원 사업의 신성함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고 학부모들의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백배로, 천배로 되는 힘을 얻게 된다”라고 하면서 오늘도 후대 양성사업에 혼신을 다 바쳐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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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주 여성도 한국인 ㅡ 이들 위한 대변도 필요해”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차홍숙 ㅡ 한글로 그녀의 이름은 차홍숙, 국제결혼으로 한국으로 나오기 전엔 중국말 발음으로 그녀의 이름은 처훙수(车红淑)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영어로 부르면 'Hong Sook Cha(홍숙 차)' 불린다.뭐 율무차, 보리차가 있다더니 홍숙차도 있담? 이렇게 같은 사람의 이름이지만 여러 나라의 말로 부르면 달라진다. 그리고 불리기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표정도, 그 말투도 달라질 수 있다. 한 남자의 이름을 김영철이라고 하자. 이 이름은 중국에서도 같은 조선족끼리는 김영철이라고 불리지만 그 남자가 한국에 나오면 김영철이 아닌 진융저(JINYONGZHE)로 불렸었다. 이에 김영철이란 남자는 반발을 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 와서까지 중국발음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 ㅡ 한국인의 시각에는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문명하고 가장 살기좋은 나라로 보여질지는 모르나 제3국에서 온 사람들의 시각 즉 제 3 자한테서는 한국에 대한 시각이 좀 다르다. 좀 이상한 나라인 것이다. 또 한국으로 오기 전에 보던 한국과 정작 한국땅을 밟은 후 실질적으로 보면 한국이 달라도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 3 국에서 온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한국말인가 하면 또 세계에서 가장 거칠고도 쌍스러운 말이 한국말이다”라고 한다. 일리가 있다. 예를 들면 한국 서울이나 여느 대도시의 은행같은 곳에 가서 그런 곳의 직원들의 말씨를 들어보면 얼었던 마음도 다 녹아내릴 정도이다. 친절하고 예의스러우며 거기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차근차근 가르쳐주는 구체적인 봉사성…이러한 언행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두 번 세 번 다시 찾아오고 싶어지고 그 직원이 총각이라면 사위로 삼을 생각이 들고 미스라면 며느리로 맞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다. 반대로 한국의 노가다판이라고 하는 작업현장 즉 건설현장이나 바다에서 작업하는 어선현장 같은 곳에 가면 <개새끼>. <씹팔 놈>…벼라별 추한 말들이 다 오간다. 은행창구의 봉사성과 작업현장에서 오가는 말투, 너무나도 모순되는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한편 한국은 사회적 차별이 심한 나라이다. 상하 급 사이의 차별, 남녀 사이의 차별 그리고 내국인과 외국인과의 차별, 특히 이주 여성에 대한 차별 … 차홍숙 그녀는 이런 차별을 줄이고 없애기 위한 일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이는 자신이 이주여성이어서 더욱 강했을지도 모른다. 1971년생인 차홍숙씨가 중국 헤이룽장성 치치할시(黑龙江省齐齐哈尔市)에서 국제결혼으로 한국땅을 밟은 것은 1997년이었다. 당시는 한국과 중국의 경제수준 차이가 엄청 크게 나던 시기였고 차홍숙씨를 비롯한 많은 중국 조선족 여성들이 한국 남성을 결혼의 선망대상으로 쳐다보던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작 한국으로 와서 보니 비교적 유족한 생활을 한다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그녀 스스로 깨달았다. 한국사회는 차별이 심했다. 심해도 너무 심했다. 중국출신 동포라고 기시하고 업신 보고 비웃고, 또한 이주여성이 낳은 자녀까지도 이런 불행을 당하군 했다. “결혼초기에는 한국과 중국은 사회와 문화가 서로 다르기에 웬간하면 참으면서 한국사회에 적응하려는 여성들이 많았어요. 헌데 서로 문화가 다른 차원이 아니라 너무 심하고 억지였어요. 한국에서 다문화가정들을 보면 폭언 폭행이 비일비재로 나타나고 있었지요. 돈 주고 사왔으니 폭행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한국인 남성들이 많았고 아니 이를 정당화하려고 했어요. 그러다보니 맞아서 얼굴에 멍이 든 여성, 갈비뼈가 부러져 병원으로 실려간 여성 등으로 많은 사건들이 터지고 만거죠.” 하다면 중국에서 남녀평등과 <절반 하늘(半边天)>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또 그 가치관으로 인생을 영위해오던 차홍숙한테 있어서 이러한 것들은 어디까지고 참고 넘어갈 것도, 그냥 보고 지나쳐 버릴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엔 순 자신만을 위해 적당히 참기도 하고 적당히 반발하기도 하였으며 또 적당히 타협하면서 이른바 <이주여성 인권찾기 운동>에 참여한 것도 사실이다. 헌데 이렇게 나서고 보니 주변에는 이렇게 당하며 살고 있는 결혼이주 여성이 너무도 많았다. ● 70대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한 30대의 베트남 여성은 결혼 후 수시로 언어폭행에 시달렸으며 수시로 생활비를 바쳐야 했고 지어는 여성의 동생한테도 생활비를 강요하는 일이 생겼다. 또 겨울에는 뜨거운 물도 못쓰게 했다… ● 2007년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캄보디아 출신 여성 쏙카(가명)는 결혼생활 3년부터 남편의 폭력에 시달렸다. 남편은 결혼 초부터 “밭에서 같이 일하려고 내가 돈 주고 널 데려왔다”며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다 그녀가 아이와 함께 캄보디아 친정에 다녀온 뒤부터 머리카락을 걸머지고 벽에 밀거나 손에 잡히는대로 물건을 던지는 등 폭력을 일삼았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가 울면서 말리자 남편은 밖에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티브이(TV) 볼륨을 크게 높혀 놓고 쏙카를 때리기까지 했다. … 한국인 남성ㅡ 위의 첫 번째 사례로 70대로서 30대 여성을 아내로 맞았으면 오히려 감지덕지 해야 할 일이지 그런 아내를 학대하고 생활비까지 내라고 억지 부리다니?!…그럼 한국 남성은 그렇게 대단한가? 요즘 세월에 한국인 남성이 중국 조선족 여성한테 장가들자고 해보라. 턱도 없는 소리처럼 들린다. 아마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부분적 한국인 남성들한테는 <삼척> 경향이 아주 농후하다고 한다. 강원도의 삼척이 아니라 이런 남성들한테는 <몰라도 아는 척>, <못나도 잘난 척>, <없어도 있는 척>이라는 <삼척>을 말한다. 자기가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한가?! 팔이 네 개가 달린 것도 아니고 하루 열끼씩 잘 먹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귀가 두 개이고 입이 하나인 건 많이 듣고 적게 말하라고 한 것이고 눈이란 살가죽이 모자라 박아넣은 장식품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조 이삭은 염글수록 머리를 숙인다고 했다. 다시 원 화제로 돌아와 이상 두 가지 사례는 전반 한국사회로 놓고 볼 때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으며 결코 남의 가정의 일로만 볼 것이 아니었다. 차홍숙씨는 자기가 아니더라도 그 누군가는 이런 차별과 편견으로 얼룩진 한국 사회의 현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충동을 가지게 됐다. 현재 차홍숙씨는 서울시 관악구 찾봉사단(찾아가는 봉사단)원으로 활동,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다문화부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관악구을 다문화위원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찾봉사단은 주로 중국동포와 결혼이주여성으로 구성 지역사회에서 찾아가는 봉사를 실시하고 있다. 10년간의 다문화 봉사, 문화활동을 통해 차홍숙씨는 이주여성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고충과 상처를 알게 됐고 그녀 역시 이주여성으로 그들과 똑같은 불행을 겪은 여성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한편 차홍숙씨는 결혼이주 여성들도 자존, 자립, 자강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여기에는 자질향상에도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된다. “모르니까 당하는 거예요. 현재 60% 이상의 이주여성들은 한국어를 보고 쓰고 읽을 줄은 알지만 그 뜻을 몰라요. 예하면 알림장이 오면 읽지만 내용은 몰라요. 그러다보니 학교에서 통지서같은 것이 와도 자녀들의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거죠. 그러면 자녀가 학교에서 다른 애들한테 왕따당하거나 심지어 폭행당하기도 한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들한테 도움을 주려고 손을 내밀어도 잡아주지 않아요. 마음을 열지 않는거죠. 어찌보면 외국인이라서 소외되고 있다는 의식이 강한거죠. 즉 외국인이라서 가정에서도 차별받는데 사회에 나가서야 더 이를데 있냐 하는 것이죠.” 이렇게 언급한 차홍숙씨는 이주여성 즉 다문화 가정과의 1 대1의 맨토링(助言)하면서 1대 1로 그들과 대화하고 김치 등 반찬 만드는 방법같은 것을 가르쳐 주면서 끈질기게 손을 내밀면 그들도 언제가는 마음을 열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고민을 해보군 한단다. “1 : 1 멘토링은 폭언, 폭행과 고부갈등 및 자녀의 진로 해결 그리고 어려운 가정형편을 복지로 연결시켜 주는 주요한 <그린 통로>이죠. 자녀들의 진로문제 등 공지사항을 단톡방에 올리면 일부 한국인 남편들은 ‘이런데는 우린 안가도 돼, 이런데는 못사는 사람만 가는데야’하고 으스대는데 이건 아주 잘못된 생각이예요. 기실 자신도 최하층에서 겨우 버티며 살면서 말이죠. 일각에서는 다문화가정이란 호칭부터가 차별이라고 주장하는데 일리는 있지만 저의 관점은 달라요. 홍길동이면 어떻고 홍길남이면 어떻냐구요. 호칭이 바뀌지만 시선이 바뀌지 않고 인식이 개선되지 않으면 차별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잖아요?!” 요즘들어 자주 이주여성이나 중국동포 출신 여성의 국회의원 비례대표 출마 등 정치참여가 아주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차홍숙씨이다. “앞으로 철저한 선별과 검증을 거쳐 진짜로 자격이 있는 이주여성 후보들이 많이 나와 단 한 분이라도 구의원, 시의원과 더 나아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동포나 이주민 여성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지요. 우리 또한 스스로가 이미지 개선에 힘써야 해야죠. 공익행사, 봉사활동에도 자주 참가하고 베풀 줄도 알아야 한다고 봐요. 또한 동포라서 외국인이라서 깔본다는 등 소외된 감정과 차별과 무시를 받는다는 억울함이 있더라도 당당해야 합니다.” 이러면서 차홍숙씨는 각 국의 문화나 생활을 체험하고 서로가 이해하고 가까워질 수 있는 이주여성들의 시부모 혹은 친정 부모들로 주축이 된 경로당 설립과 그 활성화, 동포나 이주여성들만 끼리끼리 어울리지 말고 본토인들과도 잘 어울리고 서로 도우면서 살았으면 하는 등 이런저런 여러 가지 대안들을 내놓기도 했다. 일개의 결혼이주 여성으로부터 서울시 관악구 찾봉사단 단원,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다문화부 위원장으로 되기까지 처음부터 그 어떤 목적을 갖고 <욕심>을 부린 건 아닌 것 같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러저러한 뜻하지 않던 일에 자주 맞다들게 되고 그것을 타개하면서 사노라니 오늘까지에 이른 게 아닐까? 여하튼 차홍숙씨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다음 부분적 한국인들에게 따끔한 말 몇 마디 하고 싶다. 이는 이 글의 주인공 차홍숙씨의 말이 아니다. 대한민국 ㅡ 역사가 깊고 찬란한 문화도 있다. 하지만 굴욕의 역사도 많다. 특히 근대에 와서 일본한테 36년간이나 짓밟히면서도, 아들딸들이 학도병이나 정신대에 끌려가도 그걸 막지 못하고 울기만 했던 조상들이다. 광복, 그것도 대한민국 자체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강대국들에 의해 이룩되었으며 그 댓가로 나라가 두 동강으로 토막 나기도 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중견으로 되고 있는 한국남성들은 떳떳해야 하지만 거들먹 거리지는 말아야 한다. 특히 적어도 힘없고 나약한 여성들한테 큰 소리 치지 말고 주먹을 휘두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 한국인? 그렇게 대단하고 우월한 것일가. 그제날의 굴욕의 역사는 그만 두고라도 오늘의 한국도 그렇게 행복한 나라가 아닌 것 같다. 집계에 따르면 2017년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OECD 31개 회원국 중 23위였고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꼴지였으며 한국인의 자살률은 2003년 이래로 OECD 회원국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는 한국과 한국인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는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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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박동웅 구로구의장, “구민과 더불어 외국인 주민도 살기 좋은 구로 만들 것”
-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한국은 노동력 공백에 따른 이주노동자와 국제결혼에 의한 결혼이민자의 증가로 사실상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월보를 보면 장단기 체류 외국인은 2021년 6월 말 기준 1,981,035명이다. 그중 서울시 구로구에 체류하고 있는 25,316명 외국인 주민 중 18,190명이 중국동포이다. 기자는 지난 4일 구로구의회 7대 후반기 부의장으로 또한 3선 의원으로서 지역발전과 의정활동에 열정을 바치고 이번 제8대 의회에서도 후반기 의장으로 지역주민은 물론 외국인 주민 민원이 발생한 곳은 어디든지 달려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박동웅 의장을 만나 그동안 의정활동 그리고 앞으로의 중국동포 및 외국인 주민 관련 정책과 지원계획에 대해 들어 봤다. 다음은 박동웅 구로구의회 의장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Q. 현재 시행 중에 있거나 계획 중인 중국동포 관련 사업은? A. 한국 국적을 가진 아이들은 보육료를 국가에서 지원을 해주는데 대한민국 국적이 아닌 중국동포 아이들은 어린이집을 다닐 때 보육료를 전액 자비로 부담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안산에서는 아마 시행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제 구로구도 내년부터 보육료 20%가량 지원해주는 사업을 하려고 한다. 현재 한국에 있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외국인 주민 자녀들을 조사해보니 약 천명 조금 넘는데 그 아이들에 대해 우선 보육료 20% 정도 지원해주고 차후에는 그냥 100% 지원하는 쪽으로 준비해 나갈 예정이다. 그래서 올해 최초로 이와 관련한 예산 편성을 준비하려고 한다. 한 해에 7억 정도 예산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Q. 구민들이 반발할 것 같은데? A. 그런 분들도 있지만 우리끼리만 살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글로벌시대,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만으로 먹고사는 것이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서울에서 구로만, 구로구 사람들만 뭉치는 것도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동포분들도 다 같은 한민족이고 외국인이던 한국인이던 차별 없이 함께 사회에 흡수돼서 생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주민들에게 잘 이해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Q. 지역주민과 중국동포 간 소통과 화합에 대한 모범 답안이 있다면? A. 가리봉을 중심으로 구로구는 중국동포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구로구에는 다문화 정책과가 있는데 중국동포들뿐만 아니라 베트남이라든가 필리핀 일본 등 이주민 정책을 총괄하고 있다. 우리 동포들도 명예 통장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고 또 구로구에는 봉사단이 매우 많다. 이를테면 구로 4동 같은 경우는 다문화 봉사자들이 야간 순찰도 하고 있고 다문화 경노당도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는 구로구가 소통을 많이 하고 있는 편이다. 근래 산발적으로 좀 많이 하고 있는데 향후에는 체계적인 시스템 상에서 동포들과 구청 간에 소통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Q. 현재 가장 시급한 현안과 해결책은? A. 현재 구로구에는 이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중에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분들이 중국동포들이다. 과거 코로나 이전에는 우리 동포들이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장사가 잘 안되는 등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에 대한 것은 우리가 추정할 수 있지만 정책은 정확한 수치를 갖고 하는 것이기에 다문화 정책과에서 우리 동포사회 실태 파악을 다시 해서 제도 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 Q. 상호우호도시 연변조선족자치주와 문화교류 계획은? A. 한국의 수출 규모를 보면 중국과의 교역이 미국을 앞서 나가고 있다. 그리고 중국에는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계시고 또한 중국과 한국 사이에 문화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문화적인 이해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연변과 교류(공무원 교류)를 했지만 사실 문화 교류라고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향후에는 여러 중국 도시와 자매결연을 맺어서 서로 간 문화를 교류하고 우리 축제 때 해당 국가 도시의 전통적인 문화행사를 유치할 수 있도록 하고 또 거꾸로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떤 축제라든가 행사가 있을 때 우리 구로구에서도 문화예술단이 가서 공연을 할 수 있는 그런 교류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Q. 임기 내 꼭 이루고 싶은 것은? A. 현재로서는 일단 코로나19 사태가 빨리 안정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대한민국 자체도 K-방역을 통해서 그냥 열심히 뛰고 있지만 우리 구로구에서도 구로구만의 어떤 방향 시스템을 잘 구축해 구로구가 코로나19에서 좀 더 안전한 도시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 할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안정돼야 구로에서 사업하시는 분들도 안정적으로 사업을 할 수 있고 지역경제도 활성화 될 것이다. Q. 중국동포에 대한 이해정도는? A. 한 예로 아마 한국사람 중에서 가장 양꼬치와 고량주를 많이 먹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정말 좋아한다. 젊었을 때 사실 한국에서 투자 목적으로 중국에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여러 가지 어떤 사정 때문에 결국 못 들어간 경험이 있다. 개인적으로 도시계획 전공이다 보니 연변은 물론 선양, 광저우, 칭다오, 상하이, 홍콩, 마카오 등 중국의 많은 도시들을 다녀봤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중국에 대한 이해도는 많다고 생각하고 중국 양꼬치를 중국동포보다도 내가 더 많이 먹는다고 감히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Q. 중국동포에 한 말씀 부탁한다면? A. 한국에서 돈을 벌어서 고향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는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충 그냥 돈을 벌고 살다가 중국으로 가면 된다는 인식보다도 역시 우리 조상의 뿌리는 한국이기 때문에 한국이 잘 돼야 동포사회도 잘 될 수 있다는 생각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은 한민족으로 역할을 한다면 지역주민들과 잘 화합할 수 있고 이제 동포들이 중국에 들어가서도 한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생활할 수 있다고 본다. 구로구의장으로서 향후 그 어떤 정책이나 개인적인 꿈도 있겠지만 중국 동포들이 구로구에 와서 잘 살고 여기에서 내가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그런 도시가 구로구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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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박동웅 구로구의장, “구민과 더불어 외국인 주민도 살기 좋은 구로 만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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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98세 “쿵푸 할머니” 온라인 돌풍
-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최근 한 지역 모임에서 무술을 시연하는 98세 중국 “쿵푸 할머니”의 동영상이 유튜브에서 44만 번 이상 조회되고 4,500개 이상의 좋아요가 쏟아지는 등 순식간에 히트를 치고 있다. “쿵푸 할머니”의 팬들은 “98세에도 걸을 수 있을까. 쿵푸가 장수의 관건일지도 모른다”는 메시지를 올렸다. 심지어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도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에 대해 "쿵푸 정신은 늙지 않는다"고 언급하며 주목했다. 본명이 장헥셴(張鶴仙)인 “쿵푸 할머니”는 2017년에 이미 명성을 얻었지만 거의 10년 동안 고향인 저장(浙江)성 닝하이(寧海)현 장컹(張坑)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이 영상이 유튜브에 퍼지자 조카딸은 “할머니는 이제 중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유명하시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키는 약 1.5미터이다. 그의 쿵푸 동작은 유창하고 걸음걸이는 꾸준하다. 할머니의 마을은 쿵푸와 오랜 관계를 맺어왔고 할머니는 5살 때 중국 남부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무술 스타일인 장복싱의 6대 계승자였던 아버지로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어릴 때는 매일 연습했다. 지금은 나이도 들고 힘도 예전보다 줄었지만 아직 원기 왕성하다”고 말했다. “쿵푸는 폭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고 필요할 때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평생 농부인 할머니는 이웃들과도 잘 지낸다. 막내아들인 펑은 “어머니는 항상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어머니는 마을에서 결혼을 앞둔 사람들을 돕고 바느질도 하고 요리도 한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3남 1녀를 두고 있으며 모두 닝하이현에서 근무하고 있다. 닝하이현은 마을에서 차로 약 40분 거리에 있다. 할머니는 남편이 사망한 2012년부터 혼자 살고 있다. 할머니의 삶은 평범하지만 잘 짜여져 있다. 할머니는 아침 5시에 일어나서 매일 세 끼의 요리를 하는데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해산물이다. 점심을 먹고 나서 가끔 친구들을 찾아가서 수다를 떨기도 한다. 오후에는 쿵푸 연습을 한다. 장컹 마을은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할머니의 집은 산비탈에 있기 때문에 식료품을 사러 나가거나 친구를 만나러 갈 때 등산이 필요하다. 언덕을 오르면서 꾸준히 하는 운동이 할머니가 정력이 왕성한 원인일 수 있다. 펑은 “어머니에게 도시에서 함께 살기를 요청했지만 어머니는 혼자 사는 것을 즐겼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어쩌면 할머니를 자유롭고 편안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쿵푸 할머니”는 아버지의 장복싱 스타일을 주말과 휴일에 집에 오는 손주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최근 이웃 마을의 초등학교에서 무술 수업을 개설했다는 소식을 접한 할머니는 자원해서 아이들을 지도하고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 펑은 어머니와 가족들은 “쿵푸 정신을 젊은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고 그것이 그들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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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98세 “쿵푸 할머니” 온라인 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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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캉테로 불리는 조선족 축구선수 김경도
-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1992년 11월 18일, 김경도(진징다오·金敬道)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김경도도 매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시절 김경도는 축구에 대해 잘 몰랐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뛰어 노는 과정에서 축구에도 약간의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약간의 재능을 보였다. 연변은 축구의 전반적인 환경이 다른 곳과 다르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방과 후 첫 오락으로 축구를 한다. 이러한 축구 환경에서 많은 우수한 축구인재들이 배출되었다. 김경도는 2003년 옌볜(延邊)의 쑹칭링(宋慶嶺) 축구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인 축구 전문 훈련을 시작했다. 진징다오의 부모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한국으로 떠났으며 이러한 환경에서 김경도는 독립적이고 힘든 일을 잘 견디는 품성을 키웠다. 2008년 청소년대표팀에 뽑혀 첫 국제대회를 치른 김경도는 눈부신 활약으로 그해 U-20 대표팀에 발탁됐다. 2009년에는 U-20 대표팀 주장을 맡아 사상 두 번째로 국가대표팀 소수민족 주장 자리에 올랐다. U-20 대표팀 시절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2009년 김경도는 시리아와의 경기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포지션에서 2골을 넣으며 팀의 다음 라운드 진출을 도왔다. 김경도는 경기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이니에스타라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경기가 끝난 뒤 기자가 이니에스타와 연락해 상대방이 사인 유니폼을 선물한 것도 김경도를 오랫동안 기쁘게 했다고 한다. 2010년 김경도는 연변FC에 입단해 클럽 생활을 시작했다. 부모님도 곁에 안 계시고 이제 막 입단한 뒤라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김경도는 늘 팀 동료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봐야 만 했다. 마침 외사촌형인 박성(퍄오청·樸成)이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동생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퍄오청은 이때로부터 김경도를 돌보기 시작했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한국에 일하러 갔고 나는 연변FC에서 선수로 뛰었지만 돈을 많이 벌지 못했다. 박성은 오래 전부터 축구를 했다. 그는 돈을 괜찮게 벌었고 보너스도 받았다. 그때 나는 그의 집에 짐을 풀었다. 그는 나를 위해 많은 것을 사주었고 체육관에 갈 수 있도록 돈도 대주었다. 그리고 내가 U-20 대표팀에 합류했을 때 그는 다른 선수들이 좋은 휴대폰과 명품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나에게 그것을 다 사주었다. 나중에는 또 휴대폰과 아이패드까지 사주며 축구를 잘하라고 격려 했다” 이는 사촌형인 박성에 대한 김경도의 평가다. 오늘도 두 사람은 여전히 절친한 사이로, 중국 슈퍼리그에서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2011년 코스타리카와의 평가전에서 김경도는 벤치에서 나와 성인 남자 국가대표팀 데뷔를 알렸다. 이번 국가 대표팀 경험으로 김경도는 중국 슈퍼리그에서 쟁탈하는 인기 선수로 됐다. 2013년 이 쟁탈전에서 승리한 산둥 루넝(山東魯能)은 연봉 100만 위안, 이적료 800만 위안에 김경도를 영입했다. 하지만 루넝 합류 이후 김경도는 그렇다 할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고, 궈안과의 첫 경기에서 비정상적인 플레이로 결국 팬들의 욕설이 쏟아졌다. 다행히 동료들이 그를 격려했고 그가 힘을 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익숙한 포지션이 아니다 보니 김경도의 플레이는 매우 어색했다. 김경도의 가장 좋은 포지션은 미드필더와 풀백이다. 하지만 그런 위치에서도 김경도는 팀과 감독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달리기와 부상 스틸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많은 칭찬을 받았고, 팬들은 점차 그를 받아들였다. 그해 그는 좋은 활약을 펼쳤고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했다. 2016년, 마가트 감독은 김경도를 완전히 재탄생시켰다. 마가트는 유명한 "악마 감독"이다. 그는 선수들의 세부 사항에 대한 요구 사항이 매우 높았다. 그는 김경도가 수비형 미드필더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를 풀백으로 변경 시켰다. 김경도는 당시 마가트 감독이 자신에 대한 요구사항이 높았다고 밝혔다. 그는 "내가 공을 빨리 잡아 다른 사람이 못 따라온다며 볼을 잡으면 상대 측면 수비수를 상대로 돌파하라고 했다. 처음에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우싱한(吳興涵)이나 류빈빈(劉彬彬) 같은 빠른 스피드 돌파가 없었다. 나중에 하오준민(蒿俊閔)의 도움으로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해 시즌 김경도는 윙백 포지션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고 루넝에서 가장 빛나는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은사 마가트 감독은 안타깝게도 팀의 부진한 경기력으로 인해 해고되었다. 김경도 역시 그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암울한 순간을 맞았다. 2016년 ACL 8강 1차전 서울 방문경기를 앞두고 몸에 살코기 성분이 들어 있는 것으로 밝혀져 소변검사 양성 판정을 받아 60일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다. 이때부터 고기는 거의 먹지 않고 음식에 신경을 썼던 김경도는 충격도 컸지만 선수 생활과 컨디션 유지에는 큰 힘이 됐다. 그 해 김경도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맞았다. 2016년 11월 13일 김경도가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왕융퍼(王永珀), 왕통(王彤), 송룡(宋龍) 등 동료들이 대거 참석해 축하하였으며 루넝도 공식 홈페지를 통해 결혼 축하와 함께 김경도 부부의 백년해로를 기원했다. 김경도의 감정 또한 매우 로맨틱하다. 그와 그의 아내는 서로를 수년간 알아왔다. 그들은 중학교 동창이었다. 그들은 학교 다닐 때 사귀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들은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났고 서로에게 좋은 감정이 생겨 함께하게 되었다. 2017년 김경도는 징계에서 풀려나 팀에 복귀했고 루넝은 리샤오펑(李霄鵬)감독을 영입했다. 리샤오펑이 부임한 뒤 팀은 파격적인 변신을 하지 않고 마가트 감독의 플레이 스타일을 이어갔다. 김경도 역시 익숙한 윙백 포지션을 유지했다. 이후 두 시즌 동안 김경도는 좋은 활약을 펼치며 타르델리 및 펠레와 매우 묵계적인 관계를 형성했으며 종종 도움을 주거나 득점하며 루넝의 측면에서 날카로운 킬러가 되었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2018시즌 김경도의 수치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시즌 29경기에 출전해 6골 6도움을 기록하며 경기당 평균 고강도 달리기, 스퍼트 횟수 1위, 경기당 평균 거리 2위, 가로채기 3위, 경기당 4위라는 맹활약으로 시즌 최고 인기 본토 선수상을 거머쥐었다. 이로써 김경도는 대표팀의 단골손님이 됐고 리피는 물론 가오훙보(高洪波), 리톄(李鐵) 등 본토 감독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되었다. 다만 리피 시절에는 김경도에 대한 요해가 부족해 기술적인 특성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고 김경도 역시 월드컵 예선경기에서 자신의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리피 감독 후임으로 2021년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리톄 감독은 카타르 월드컵 2차예선 40강전 몇몇 경기에서 김경도의 활용에 신경을 썼다. 김경도는 움직임이 좋고 수비 면적이 넓으며 공격은 날카롭다. 현재 김경도는 대표팀 10번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자격을 갖춘 '프리 맨'이 됐다. 곧 카타르 월드컵 3차예선인 12강전이 시작된다. 12강전에서 절대 주전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김경도는 계속 자신의 색깔을 살려 대표팀을 위해 몇 골을 더 넣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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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캉테로 불리는 조선족 축구선수 김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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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급 중국 조선족 무용가 김성
- [동포투데이 김다윗 기자] 많은 사람들이 중국 유명 무용가 김성(金星)을 알지만, 그녀의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중국 무용수 중 한 명인 김성은 25세의 나이에 벨기에 왕립 무용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다. 1995년 이미 유명해진 김성은 군구(軍區)예술단에서 퇴직하고 북경향산병원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 수술 과정은 장원 감독에 의해 다큐멘터리 영화 '미스 김성'으로 촬영되었다. 23세에 장가들어 28세에 여자로 태어난 김성은 38세에 독일인 한스와 결혼했다. 현재 54세인 그녀의 인생에는 전설로 가득 차 있다. 김성은 1967년 선양의 한 조선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남자 목욕탕에 데려가 목욕시키자 김성은 매우 불편함을 느꼈다. 이때부터 김성은 자신의 성 인식에 대한 의구심이 생겼다. 아홉 살 때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학교 문예선전대에서 짙은 화장을 하고 춤을 추면서 군구(軍區)예술단의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때로부터 김성은 자신의 내면에 있던 미에 대한 향수가 늘 여성스러움을 깨닫게 되었다. 1985년 군사훈련 멘토 송소원이 제1회 전국 타오리컵(桃李杯) 무용대회에 참가할 것을 권유했다. 그 결과 대회 경험이 전무했던 김성은 탄탄한 기반과 뛰어난 재능으로 400여명이 출전한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무용 ‘목가’로 청소년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고 중국에서는 최초로 발레화 없이 발가락을 사용할 수 있는 무용수가 됐다.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겠다는 결심은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줄곧 성별의 정체성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녀는 내가 언제 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 1986년 광둥현대무용학교에서 국비유학생을 미국에 보내려 한다는 소식을 입수한 그는 무작정 광둥으로 건너가 공부했다. 2년 뒤 뉴욕으로 건너가 무용을 업그레이드하면서 캐롤라인과 첫 결혼을 했다. 1993년 김성은 귀국 후 중국문화부가 주최하는 전국 현대무용수련반에 초빙되어 중국 현대 무용의 창시자가 되었다. 1995년 영혼과 육체의 분열은 그에게 큰 문제를 가져왔다. 김성은 오랜 시간 고군분투하다 결국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장악하기로 했다. 그는 성전환 수술을 결심 했다. 김성의 결정은 어머니가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들이든 딸이든 모두 같은 자식이라며 수술이 건강에 지장만 없으면 된다고 말했다. 1999년 김성은 개인의 이름을 딴 중국 최초의 민간 무용단인 '상해김성무용단'을 창단했다. 중국에서 국제 공연 티켓을 판매할 수 있는 곳은 '상해김성무용단'과 '중국곡예단' 두 곳뿐이다. 2004년 무용단을 이끌고 유럽 순회공연을 마친 김성은 귀국길에 독일 신사인 한스를 만났다. 한스는 독특한 동양 여성에게 깊은 매력을 느꼈다. 1년간의 소통 끝에, 그들은 결혼의 궁전에 들어갔다. 결혼 후 세 아이를 입양한 김성은 이젠 엄마와 딸, 그리고 아내가 되어 남성에서 여성으로의 전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김성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의 의구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사회는 심리적 인내를 반복적으로 질문하고 지침을 제공하는 투명하고 보이지 않는 심리의사와 같다. 김성은 오직 실력만이 유언비어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오늘도 진지하게 춤을 추고 있으며 그녀의 유럽공연 티켓은 구하기 어려울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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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급 중국 조선족 무용가 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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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유명 거사(居士)화가 탕위밍
- [동포투데이 김나래 기자] 유명한 화가 탕위밍(湯餘銘)은 중국 영화배우 탕웨이의 아버지이다. 탕위밍의 작품은 구하기 어렵다. 탕위밍은 1990년대부터 중국 스타일과 서양 스타일을 결합한 독특한 3 차원 작품을 제작했다. 필명은 북안산(北安山)이다. 원저우(溫州) 러칭(樂淸)출신인 그는 전문 미술가로 현재 거사 전문화가 1인자로 불리며 세계문화유산예술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그가 그린 그림은 매우 높은 예술성을 가지고 있다. 다른 화가들의 귀감이 되고 벤치마킹해 그림 애호가들에게도 큰 도움이 됐다. 탕위밍은 '신부춘강산거도(新富春江山居圖)'에 참여했을 정도로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은 사람이고, 명리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도 가장 돋보이고 존경하는 곳이다. 일부 대가들에 비해 직업적으로 높은 프로정신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탕위밍의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산수화를 그리는 데는 능숙하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그의 거사 회화다. 그의 작품은 불학적인 매력을 주면서도 과장되지 않은 느낌을 준다. 정직한 사람이라 그런지 그의 작품에는 자신만의 매력이 배어 있다. 탕웨이밍으로서도 딸 얘기를 할 때마다 뿌듯했다. 탕웨이는 지금의 이름값도 대단했고, 탕웨이밍에게 딸의 성장과 성취를 보여주기도 했다. 딸이 자신보다 이름값을 많이 한다고 해서 탕웨이밍이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려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탕위밍은 화계의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로, 회화 작품도 많은 기관에서 사랑을 받아 현재 세계문화유산예술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불교문화에 대한 깊은 연구를 하고 있는 그에게 불교문화와 중국 문화유산을 칭송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할 일이다. 탕위밍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단지 돈을 벌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술에 대한 추구나 신앙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탕위밍은 회화 예술에 대해 높은 이해와 추구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 역시 사람들이 존경하는 점이다. 중국 여배우인 탕웨이는 1979년 10월 7일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에서 태어났다. 2000년 중앙연극학원 연출학과 본과에 입학했다. 2007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리안 감독의 '색·계'에서 여주인공을 맡았다. 2010년 미니시리즈 영화 '월만 헤네시'에 출연해 중화권 영화미디어대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탕웨이는 2011년 영화 '만추'로 한국백상예술대상, 한국영화평론가상, 부산영화평론가상 등 10여 개 부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2013년 '베이징에서 시애틀을 만나다'는 중화권 로맨스 영화 흥행 신기록을 세우며 상하이 영화평론가상, 중국영화감독협회, 베이징대학생영화제 여우주연상 등을 수상했다. 2014년 탕웨이는 영화 '황금시대'에 주연으로 출연하였으며 2015년에는 영화 '블랙 코드'에 출연했다. 2016년에는 주연 멜로 영화 '베이징에서 시애틀을 만나다'가 7억 9000만 위안의 흥행 성적을 거두며 중화권 멜로 영화 흥행 기록을 다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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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유명 거사(居士)화가 탕위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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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식품' 김봉규씨, 수년째 이어온 선행…'화제'
- [동포투데이 김다윗 기자]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한 '한중식품' 김봉규씨의 수년간에 걸친 지속적인 선행이 사회의 귀감이 되고 있다. 구로구에서 '한중(韓中)식품'을 운영하는 중국 조선족 출신 사업가 김봉규씨는 지난 25일 깍두기김치 30박스, 대파김치 20박스(150만 상당)를 사회적기업 피플앤컴에 기탁했다. 이날 물품을 기탁한 김씨는 "가정의 달을 맞이해 어려운 여건에 놓여 있는 분들을 위해 정성을 모아 김치를 준비했다”며”이웃사랑 실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이어 "한국으로 귀화한 지 12년째"라며"국적만 바꾸는 게 아니고 진짜 한국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이웃들과 정을 나누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기탁 받은 이달성 피플앤컴 대표는 “각박해져 가는 세상 속에서 일일이 방문해 선물까지 주시고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하다”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이에 앞서 김씨는 지난 19일에도 구로구 구로2동 화원종합사회복지관을 찾아 10㎏짜리 김치 10박스를 전달했다. 김씨는 2013년부터 시작하여 매달 김치100kg을 화원종합사회복지관에 후원하고 있으며 주변 무지개경로당, 행복경로당 등에도 정기적으로 김치와 쌀을 후원하고 있다. 이 밖에 김씨는 소외계층을 위한 봉사활동, 불우이웃돕기, 각종 '공익 행사' 지원 등 사업도 꾸준히 실시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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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식품' 김봉규씨, 수년째 이어온 선행…'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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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식품' 김봉규씨 김치 온정 4년째 이어져
- [동포투데이 김다윗 기자]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한 중국동포 김봉규씨의 김치 온정이 4년째 이어지고 있다. 구로구에서 '한중(韓中)식품'을 운영하는 중국 조선족 출신 사업가 김봉규씨는 지난 19일 서울 구로구 구로2동 화원종합사회복지관을 찾아 10㎏짜리 김치 10박스를 전달했다. 김씨는 "한국으로 귀화한 지 12년째"라며 "국적만 바꾸는 게 아니고 진짜 한국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이웃들과 정을 나누는 것"이라고 말했다. 평소 할머니들과 복지관 직원들은 김봉규 씨를 "우리 동네 '김치 산타'라고 정겹게 부른다. 김씨는 2013년부터 시작하여 매달 김치100kg을 화원종합사회복지관에 후원하고 있으며 주변 무지개경로당, 행복경로당 등에도 정기적으로 김치와 쌀을 후원하고 있다. 또한 소외계층을 위한 봉사활동, 불우이웃돕기 등 다양한 활동을 추진해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주위의 귀감이 되고 있다. 김씨는 "앞으로도 지역사회와 동포사회가 서로 융합하고 화합하는 그런 시대가 하루 빨리 오기를 기대하면서 봉사자로서 계속 노력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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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식품' 김봉규씨 김치 온정 4년째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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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평화작가 한한국 교수, 한글 '말레이시아평화지도' 발표
-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제620돌 세종대왕 탄신일을 맞아 세계평화작가로 널리 알려진 한한국 연변대 예술대학 객좌교수가 세계평화와 한글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기고자 ‘한글 말레이시아 평화지도(Malaysia Peace Map)’를 완성한 가운데 15일 김포 한국갤러리에서 발표해 주목을 받고 있다. ▲ 세계평화작가 한한국 교수가 말레이시아 평화지도 작품 마지막 글자를 쓰고 있다(사진=세계평화사랑연맹 제공) 이번에 발표한 말레이시아 평화지도는 1년에 걸쳐, 한글붓글씨 수천자로, 말레이시아의 지도와 국기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지도안에는 말레이시아의 문화와 역사, 세계유네스코 문화유산, 외교부 개황, 윤소천 시인의 ‘말레이시아의 평화’ 시 등을 기록했다. 평화로운 지구인들을 표현하기 위해 한 교수만의 특유의 손도장 기법으로 인주(印朱)에 수 만 번 손도장을 찍어 가로 2m50cm, 세로 1m80cm 크기로 완성했다. 한 교수는 "620돌 세종대왕 탄신일에 맞춰 말레시아 평화지도 작품을 발표하게 되어 기쁘고, 위대한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님께 감사드린다”며 “세계평화지도는 제작과정 자체가 평화를 위한 기도이고, 염원이다. 세계평화지도의 담긴 염원처럼 하루빨리 세계평화가 실현되기를 바란다”고 심정을 밝혔다. 한 교수는 2008년 뉴욕한국문화원, 2009년 중국북경한국문화원 단독 초대展을 비롯해 G20서울정상회의특별전, G20서울국회의장회의특별전 등 국제적인 행사의 초대작가다. 특히 567돌 한글날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작가로 광화문광장 120M 길이의 한글 세계평화지도 특별전을 통해 ‘대한민국최고기록인증’을 받은 작가로도 유명하다. 현재 그의 평화지도 작품이 소장된 UN 국가로는 미국, 영국, 중국, 러시아, 독일, 스위스, 일본, 노르웨이, 이탈리아, 캐나다, 멕시코, 베네수엘라, 브라질, 스웨덴, 아르헨티나,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리아, 이스라엘, 몽골, 폴란드, 핀란드, 대한민국 등 22개국이고, 21개국으로부터 ‘세계평화지도 기증증서’(World Peace Map Donation Certificate) 외교문서를 받아 외교통상부, 문화체육관부에서 보관중이다. 한편 김포시 홍보대사이기도한 한한국 교수는 6종의 독창성이 뛰어난 한글서체를 개발해 한글·서예·미술·지도·측량을 융합 디자인한 독특한 세계평화지도(World Peace Map)를 세계 최초로 완성하고 있는 국내외 유일의 '세계평화작가'다. 현재까지 200만자의 한글로 전 세계 37개국 대형 평화지도 경기도 김포에서 작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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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평화작가 한한국 교수, 한글 '말레이시아평화지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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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기에 접어든 조선족 음악거장- 장천일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지난 2002년 9월 3일,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 자치주 창립 50주년을 경축하는 연길시 인민경기장에는 명절을 즐기는 시민들이 가득 운집한 가운데 김학봉이 부른 '장백송'이 스피카를 통해 경기장 상공에 울려 퍼지면서 경축활동의 막이 서서히 올랐다. 천년의 적설 왜 이렇듯 희느냐이는 순결한 민족의 깨끗한 마음이라바다의 비취빛 같은 천지의 파란 물이는 푸르른 하늘이 씻어준 흉금이라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이는 조선족 중년작곡가 장천일 선생이 시인 김학천 선생과 합작하여 만든 '장백송(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50주년 경축 헌례작품)'이다. 장천일- 조선족으로 1959년 9월 중국 심양에서 태어난 그는 1976년 심양음악학원 관현악학부를 졸업, 그 이듬해부터 작곡사업에 종사하다가 지난 세기 80년대 초기 교향곡 영상(交响音画) <북방삼림>을 갖고 중국음악계에 데뷔했으며 그것을 계기로 많은 교향악, 실내악, 오페라음악, 뮤지컬 음악, 무용음악, 영화 및 드라마 음악을 창작하였으며 이 중 중국인들한테 친근하게 다가오는 가요들로는 '청장고원(青藏高原)', '패왕별희(霸王别姬)' 등이었고 특히 중국 조선족들한테는 '장백송'이 넓은 폭으로 가슴에 스며드는 가요로 주목을 받고 있다. 가요 '장백송'은 웅위롭고 높은 기상을 지니고 있는 장백산을 우리 민족의 슬기와 용맹 그리고 흉금과 비교하면서 폭이 넓고도 격앙적인 선율로 만들고 있으며 거기에 가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에 민족적 정서를 부여하면서 친절함에 '조미료'를 첨가하고 있다. 근 40년간 장천일이 창작한 음악 프로그램은 수백건에 달한다. 거기에는 '장백송'이나 '청장고원'과 같은 수준급의 가요가 있는가 여러 종류의 협주곡, 교향악과 오페라 음악과 같은 고품격, 고수준의 음악도 있으며 드라마 '조상지','해방', '태양설', '임해설원'. '칭키스칸' 등 수십편에 달하는 영화 및 드라마 음악도 포함되어 있다. 이 중 지난 중국 해방전쟁시기 조선족인민들의 전선지원 문사자료를 소재로 한 '전지 아리랑(战地阿里郎)'이 가장 대표적인 드라마 음악으로 꼽히고 있다. ▲ 중국 유명 작곡가 장천일(張千一) 장천일이 작곡한 가요들 중 많은 가요를 송조영(宋祖英), 대옥강(戴玉强), 담정(谭晶), 왕하(王霞) 등 중국의 유명가수들이 자주 무대에 올렸다는 것에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그만큼 장천일은 받아안은 굵직굵직한 국가급 상도 많다. 2000년, 2005년과 2007년 3번에 거쳐 중국영화절에는 최우수 음악창작상을 획득했고 중공중앙 선전부, 중국 국가문화부, 중국군 총정치부로부터 각각 '5.1공정상', '문화대상', '해방군 문예상'을 받아 안았으며 중국음악가 협회, 중국 무용가 협회, 중국 연극가협회 등으로부터도 여러 가지 명목의 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 중국군 총정치부 가무단 단장으로 무거운 중임을 맡고 있는 장천일은 국무원 수당을 받는 작곡가인 한편 겸직으로 중국음악가협회 부주석도 맡고 있는 바쁜 몸임에도 연변대학 예술학원 석좌교수에 응해 우리민족의 음악발전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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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기에 접어든 조선족 음악거장- 장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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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TV 조선족 미녀 사회자 양아기(杨雅淇)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여성들 중 이쁘고 훤칠한 미녀들이 많다. 또한 미모에 재능까지 겸비한 여성도 많다. 하지만 미모에 말 잘하고 노래도 잘 부르는가 하면 영화배우에 서예까지 능한 이쁘고도 매력적인 여성, 그것도 중국 조선족 젊은 여성중에 이런 출중한 여성이 있으니 그녀가 바로 중국 베이징TV방송국 사회자인 양아기(杨雅淇)이다. 중국 흑룡강성 가목사시 태생인 양아기는 베이징미디어대학 방송학부를 졸업, 1.68미터에 달하는 신장에 사진에서 보다싶이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베이징시 TV방송국의 조선족 사회자이다. 양아기가 사회한 유명 프로그램들로는 <지나온 청춘의 60년(青春走过六十年)-2009년>, <청춘대변인 찾기(寻找青春代言人)-2009년>, <"중화송¨ 거인컵 전국서예콩쿠르시상식(2010년)>, 베이징시 부녀연합회 주최 학교 들어가기 공익활동 및 베이징 캠퍼스공연시즌 개막식(2010년), <글로벌 새해맞이 생방송>(2012년), <환구춘만(环球春晚)-2013년> 생방송 등 베이징 TV방송프로가 있는가 하면 2010년에는 구이저우 위성방송에서 주최한 대형도박방지 공익프로인 <그대가 내보인 비장한 카드(亮出你的底牌)> 의 사회를 맡았었고 2011년에는 윈난 위성방송에서 주최한 <양생회(养生汇)> 프로의 사회를 성공적으로 맡았다. 그리고 한국 현지에서는 유창한 한국어로 사회를 맡아 한국 방송계의 절찬을 받기도 했다. 그 프로그램들로는 2008년 한국대형가정오락 프로그램인 <아빠힘내>와 2014년 한국 스타음악회 사회를 맡은 것 등이다. 양아기가 다재다능한 조선족 여성이라는 것은 아래와 같은 성과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서예 애호자인 양아기는 선후로 30여차에 거쳐 국제 및 국내의 서예상을 획득, 이 중에는 금상도 포함되고 있으며 그녀의 서예작품은 <당대 중국청소년 정영록(中国当代青少年精英录)> 제5부에 수록되었다 . 현재 양아기는 경필서예(硬笔书法) 최고단자인 9단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중국 베이징TV방송국의 조선족 女사회자 양아기(杨雅淇) 이 외 양아기는 2016년에 가요 <봄날 그대를 기다릴거야(我在春天等你)>를 발표하여 가창실력을 과시했고 영화 <내일>, 연극 <리레이와 한메이메이(李雷和韩梅梅)>, 연극 <천세를 사랑하기(爱上千岁)> 등에 출연하기도 했다. 사회자인 양아기한테 있어서 2015년부터 최근 2년여간은 사회자로서의 황금기이기도 하다. 그녀는 2015년 7월 중국인민 항일전쟁 승리 및 세계반파쇼 전쟁 승리 70년 기념 시낭송회의 사회를 맡았고 그 해 10월에는 중국 국무원에서 주최하고 베이징시 화교연합회에서 대행한 <중화문화대낙원(中华文化大乐园)> 활동의 사회자로 독일과 네덜란드로, 2016년 10월 역시 국무원에서 주최하고 베이징시 화교연합회에서 대행한 <중화문화 대낙원> 우수재예학생교류단 공연야회 사회자로 북미방문을 하였다. 한편 사회 공익사업에 헌신적으로 나서기도 한 양아기는 흑룡강성 가목사시 홍보대사, 베이징시 3.8 홍기수, 세계무역연합회 애심대사 등많은 영예를 획득했으며 얼마전에는 중국 라디오TV협회 아나운서 위원회 100명 신세대 아나운서로 등극하기도 했다. 사회자로서 중국어와 한국어로 유창하게 사회를 담당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서예와 노래, 그리고 배우로서도 출중한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조선족 미녀- 양아기는 전반 우리 한민족의 자랑으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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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TV 조선족 미녀 사회자 양아기(杨雅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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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 北피아니스트, 눈부신 연주로 국제콩쿠르 우승
- [동포투데이 김나래 기자] 북한 피아니스트 최장홍(13세)이 모스크바에서 개최되는 제 2회 블라디미르 크라이네프 국제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머쥐는 쾌거를 날렸다고 러시아 언론 스푸트니크 통신이 전했다. 주북 러시아대사관 페이스북에 최장홍이 대회 주요상인 '발굴' 상을 수상했다고 공개됐다. 3월 30일 열린 본선대회에서 북한 어린이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으로 기막힌 연주를 선보이며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며 4월 6일 평양 순앙 국제공항에서 환영 속에 그를 맞이했다고 소개했다. 블라디미르 크라이네프(1944~2011)는 소련, 러시아, 독일 피아니스트로 불리며 음악교육자이자 사회활동가였다. 소련 국민예술인이자 소련, 러시아 국가공로상을 수상했다. 이 대회는 일찍이 1992년 크라이네프가 생전에 고안해 만들었으며 이전에는 우크라이나에서 치러지다가 2년 전부터 모스크바에서 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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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 北피아니스트, 눈부신 연주로 국제콩쿠르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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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한동포사회를 빛낸 중국동포 여성들
- [동포투데이 김다윗 기자] 재한중국동포사회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동포여성들의 공로가 크다. 한중포커스신문은 UN이 정한 3.8 세계여성의 날을 맞이해 재한동포사회를 빛낸 봉사, 학자, 언론, 문화예술, 법률, 사업가 등 다양한 분야의 여성 리더들을 소개했다. 김영희 - 한중다문화봉사회 회장 무려 21년간 지역사회와 동포사회 이미지 개선을 위해 묵묵히 봉사활동을 해온 중국동포 출신인 한중다문화봉사회 김영희 회장이 동포사회는 물론, 한국사회에서도 본보기가 되고 있다. 지난 1990년대 초 한국에 들어온 김영희 회장은 처음 정착지인 서울 마포구 신촌 동교동에서부터 인천 남동구, 부천 심곡동, 그리고 다시 서울 구로구 구로4동으로 이사하여 살아오면서 줄곧 봉사활동을 해왔다. 그는 매년 명절이나 어버이날, 삼복철 등이 오면 송편, 만두, 삼계탕 등 음식을 만들어 지역 어르신들을 모시고 식사대접과 불우이웃 후원금 전달과 김장나눔 봉사 등을 해오고 있으며 주기적으로 지역 골목 청소를 해오고 있다. 그의 이같은 공로가 인정되어 서울시 모범 외국인주민 표창장, 국회의원상, 구청장상, 경찰청장상 등을 수두룩이 받았다. 한중다문화봉사회 사무실에는 상장과 상패, 사진들이 빼곡히 있다. 지난 21년간 김영희 회장이 해온 봉사활동을 증명해주는 증거물들이다. 김숙자 - 재한동포연합총회 회장재한동포총연합회 김숙자 회장은 재한 중국동포의 인권 보장과 복지·문화지원을 위해 노력해왔다. 연합회는 재한 중국동포가 겪는 고충 상담에서부터 ‘금천구 재한동포 경로당’ 등도 운영해오고 있다. 중국 연변에서 출판사에 근무하다 베이징에서 번역 일을 했던 김 회장은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싶다는 생각에 지난 2004년 가족과 함께 귀화했다. 김 회장은 재한 중국동포들이 한국인과 어울려 살 수 있는 사회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해응 - 前 서울시 명예부시장 “중국동포를 포함한 모든 이주민들을 위해 열심히 발로 뛰겠습니다.” 지난 2014년 9일 서울시 외국인명예부시장으로 위촉된 중국동포 이해응씨의 각오였다. 실제로 그는 임기 중 중국동포들과 이주민들의 불편과 다양한 목소리를 귀담아듣고 전달하여 시정에 적극 반영하도록 많은 정책제안을 하기도 하였다. 중국연변대학 중문학과를 졸업한 후 한국 이화여대에서 여성학 석·박사과정을 마친 이해응씨는 이주민들의 한국 정착을 돕는 ‘생각나무 BB센터’ 공동대표, ‘한중커뮤니티리더스포럼’ 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문민 - 서울국제학원 원장 서울국제학원 문민 원장은 중국 흑룡강성 출신으로 중국 현지 소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지난 1995년 한국에 와 서울대학교 교육행정학 석사를 졸업한 뒤 귀화시험 대비교육, 중국동포 대상 취업교육 등을 해왔다. 지난 2014년 서울국제학원을 개원하고 현재 원장으로 있으며 또 어울림주말학교 교장, 재한동포교사협회 회장 등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동포어린이 교육에 앞장서고 있다. 그는 교육활동 외에도 중국동포들을 위한 사업에도 힘쓰고 있다. 그의 논문으로는 ‘중국 조선족학교 통폐합의 원인 분석’이 있으며 저서로는 ‘대한민국 귀화시험 한권으로 합격하기(2011. 크라운출판사)’, ‘이웃나라 생활문화 알기 중국 편’(2013. 생각나무, BB센터)공저 등이 있다. 이옥희 - 중국 국가1급 배우 중국 연변가무단의 국가1급 배우 이옥희씨가 지난 2014년 영화 ‘소리굽쇠(감독 추상록)’에 출연하면서 한국 스크린 진출 첫 중국동포 배우로 기록됐다. 그는 영화 ‘소리굽쇠’에서 일제강점기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주겠다는 거짓말에 속아 중국까지 끌려간 후 일본군 위안부로 극한의 고통을 겪은 귀임 할머니 역을 맡아 먹먹함을 안겨주며 관중을 매료시키기도 하였다. 현재 이옥희씨는 한국과 중국을 넘나들며 각종 공연에 참가하며 한중문화교류에 큰 역할을 하는 한편 중국 ‘전국애심 공익기금회’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의 1인극으로는 ‘새시발 노친’, ‘응원대장’, ‘영감 내가왔소’, 등이 있으며 단막극으로는 ‘사촌언니’, ‘경계선’, ‘장 과부’, ‘가짜 일본사람’, ‘썩장’ 등이 있다. 이옥희 배우는 또 드라마 ‘몽당치마’와 ‘황혼무렵’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다. 특히 그의 1인극 ‘새시발 노친’은 중국 CCTV에 출연하여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안순화 - 생각나무 BB센터 대표 지난해 10월 서울시가 소외 이웃을 돕는 데 헌신한 시민 10명을 선정해 동판 부조상을 나란히 새겨넣은 공간으로 제막한 ‘서울시 명예의 전당’에 중국동포 출신인 ‘생각나무 BB센터’ 안순화 공동대표가 포함됐다. 100명이 넘는 후보 가운데 꼼꼼한 심사를 거쳐 ‘서울의 얼굴’로 뽑힌 안순화 공동대표는 올해로 12년째 결혼이주여성의 서울살이를 돕는 ‘맏언니’이자 한국 사회에 건강한 다문화 정책을 제안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12년째 외길을 걸어온 그는 각계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 지난 2014년 이주여성으로는 처음 ‘서울시 봉사상’ 대상을 받은 것을 포함해 2013년 ‘LG와 함께하는 동아 다문화상’, 2015년 ‘세계인의 날’ 법무부 장관상 등 민관을 넘나드는 수상 목록을 쌓았다. 현재 그는 서울시 외국인주민대표자회의 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안유화 - 성균관대 중국대학원 금융학 교수 중국 길림성성 연길시 출신인 안유화 박사는 길림화공대 화학공정학과를 졸업하고 연변호리대(현재 연변대 편입) 화학과 교수로 근무하다가 2001년 상하이 푸단대에서 경제학 석사과정을 이수하고 연변대학 경제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그후 2003년 서울로 건너왔고, 2013년 2월에 고려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안 박사는 현재 성균관대 중국대학원에서 금융학 교수로 재무관리, 중국 자본시장 이론, 금융 중국어, 금융 세미나 등 4과목을 가르친다. 한국예탁결제원 객원연구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지금까지 연구한 성과물의 제목들은 그가 ‘중국 금융 전문가’임을 한눈에 보여준다. ‘중국발 금융위기 어디로 갈 것인가?’, ‘위안화의 역외 사용 확대와 한국의 대응’, ‘중국 주식시장 특성과 외국기업의 활용방안’, ‘중국 지방채(국유기업 프로젝트 발행채권 포함)의 한국 내 발행과 유통 활성화에 관한 연구’ 등 60여 편을 발표했다, 그의 목표는 한국과 중국을 넘어 글로벌 시장을 타깃으로 자산운용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다. 박옥선 - 서울 구로구 상공인회 이사중국 식품 도매업으로 시작해 여행사와 학원, 매니지먼트사까지 운영하면서 재한동포사회의 여성사업가로 성장한 박옥선씨. 중국 흑룡강성 벌리(勃利)현 출신인 그는 1992년 11월 한국 땅을 밟았다. 지난해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후보 31번에 배정받았던 그는 비록 금배지는 달지 못했지만 ‘중국동포 출신 첫 국회의원 비례대표 후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는 지난 2012년 7월부터 2013년 6월까지 국제라이온스협회 354-D 지구 회장으로 활동해 오다가 2014년 12월 중국동포 출신 여성들로 구성된 ‘CK여성위원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으로 활동해 오다가 지난해 말 임기를 마치고 현재 서울특별시 서남권 글로벌센터 명예센터장, 사단법인 서울 구로구 소상공인회 이사 등을 맡아 동분서주하고 있다. 정경화 - 동포투데이 대표정경화 대표는 인터넷 매체인 ‘동포투데이’를 발행해 한국과 중국의 현지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하고 있으며, 남편 허을진 씨와 함께 재한중국인의 최대 커뮤니티 공간인 ‘중국조선족대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사)GK희망공동체를 설립해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오해와 편견을 해소하고 상호 이해와 화합을 도모하기 위한 민간외교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도전 골든벨’ 행사 등을 개최해서 한·중 양국 청소년들의 인성함양에도 기여하고 있다. 김애란 - 북경전화국 대표 올해로 10년째 ‘북경전화국’ 매장을 운영 중인 김애란 대표. 중국 훈춘 출신인 그는 1999년 한국에 와 한국인 남편과 가정을 꾸렸고 현재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영등포구 대림동 등에 6개의 매장을 운영중이다. 김 대표는 중국동포의 한국 정착을 돕는 일에도 힘쓰고 있다. 실제로 그는 남편 차재봉씨와 함께 2014년 400여 만 원을 기부해 대림동에 외국인자율방범연합회 초소를 지었고, ‘북경전화국배 장기대회’ 등도 여러번 개최하였으며 동포관련 행사에도 적극 후원 협찬하고 있다. 그는 또 2015년부터 영등포구청의 ‘푸드마켓’을 통해 저소득층 주민을 위한 식료품 나눔에도 동참하고 있다. 조은정 - 법무법인 정세 한중법률지원센터장 법무법인 정세의 한중법률지원센터를 이끄는 조은정 센터장은 국내 중국동포는 물론 한국에 진출하려는 중국 기업이나 중국으로 영역을 확장하려는 한국 기업의 법률 도우미로 활약하고 있다. 법무법인에서 일하며 안타까운 사례를 많이 봤기 때문에 한중법률지원센터를 만들었다는 조은정 센터장. 올해는 생활에 필요한 법률 상식을 알려주는 법률 아카데미를 개설할 예정이라고 한다. 연변대학을 졸업한 조은정 센터장의 관심사는 중국동포들에 대한 법률 지원과 상담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 기업과 중국 기업 간의 상호 교류나 공동 협력을 중개하는 것이 주요 업무다. 장래 목표는 한중 기업 교류의 플랫폼을 만들어 모든 관련 서비스가 원스톱으로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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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한동포사회를 빛낸 중국동포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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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년째 이어온 훈훈한 이웃사랑
- [동포투데이] 의지할 데가 없는 늙은 한족 부부를 장장 31년을 하루와 같이 친부모처럼 모시면서 미담을 엮어온 여성이 있는데 그가 바로 길림성 왕청현 서성가두 동진 사회구역에 살고있는 최해순(62세)이다. 1985년 11월, 최해순은 사업의 수요로 현성으로부터 서성가두 동진사회구역으로 전근해 리연청, 왕숙연 (李延清,王淑艳) 양주와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으로 되었다. 리씨 노인은 귀가 왕씨 노인은 몇 년째 심한 골 결핵으로 앓아누워 있었다. 최해순은 그때부터 나무를 패고 집안을 거두는 일을 도와주고 부엌일까지 도맡아 해주면서 두 집은 한집처럼 지냈다. 리씨 노인네가 일이 있어 벽만 두드리면 최해순은 인차 달려나갔다. 한번은 너무 피곤해 일찍 잠들었던 최해순이 벽두드리는 소리에 소스라쳐 깨어나 달려나가 보니 리씨 노인이 급성위장염에 걸려 아픔을 참지 못해 마구 뒹굴고 있었다. 급해난 최해순은 노인을 업고 병원에 달려가 호주머니를 털어 노인을 사경에서 구해냈다. 최해순 부부는 모두 일반 종업원인데다 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있고 이웃의 늙은 부부까지 부양하다보니 생활이 몹시 어려워 텔레비죤마저도 없었다. ▲31년째 늙은 한족 부부를 친부모처럼 모시면서 미담을 엮어온 최해순 씨 2001년에 아들애가 우수한 성적으로 중앙민족대학으로부터 입학통지서를 받았지만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애간장을 태웠다. 부모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잘 알고있는 아들애는 "어머니, 너무 속태우지 마세요. 전 대학에 가지 않겠어요."라며 그녀를 위안했다. 콧마루가 찡 해난 그녀는 "얘야 미안하다. 이번에는 내가 가산을 다 팔아서라도 널 대학에 보내겠다."고 아들에게 말하였다. 최해순은 보름 동안 동분서주하면서 끝내 3,500위안의 학비를 마련해 아들애의 대학 꿈을 이루어줬다. 2002년 초, 리씨 노인은 간암으로 진단받았다. 최해순은 10 여리 되는 산속에 들어가 약재를 캐다가 노인의 병 치료를 하였다. 리씨 노인은 최해순의 효성에 받들려 치료 받다가 그해 3월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하늘나라로 갔다. 리씨 노인이 세상뜨자 최해순의 부담은 더욱 과중해졌다. 척주결핵으로 생활을 자립할 수 없는 왕씨 노인은 아프거나 소변을 보아도 벽을 두드리고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파도 벽을 두드렸다. 그동안 최해순네는 아들 신세로 시내에다 아파트까지 사놓았다. 하지만 최해순녀성은 자기가 편안하자고 생활을 자립할 수 없는 왕씨 노인을 두고 갈 수 없었다. 가정토론을 거쳐 최해순은 현재 남편이 아빠트에서 살고 그는 아직도 왕씨 노인네와 벽을 하나 사이둔 단층집에서 살면서 노인을 보살피고 있다. 최해순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던 동진사회구역에서는 여러차례 왕씨 노인을 사회복리원이나 경로원에 보내려고 했지만 왕씨 노인은 "나는 친딸보다 더 지극한 해순이곁을 떠나서는 하루도 살 수없다"며 고집을 부렸고 최해순 역시"나도 친부모와 같은 왕씨 노인을 절때 포기할 수 없다"고 한다. 최해순은 이렇게 장장 30년을 하루와 같이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는 이웃 한족 늙은 부부 돌봐주면서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전통미덕을 실천했고 민족단결의 미담을 엮어 가고 있다. 1994년부터 최해순은 선후하여 "길림성민족단결진보상", "전국경로아들딸금상", "왕청감동인물" 등 영예를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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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년째 이어온 훈훈한 이웃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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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상모춤이 있어 행복한 그녀
- [동포투데이] “상모춤의 고향”으로 불리우는 길림성 왕청현 배초구진에는 아이들에게 상모춤을 전수해 가며 역경속에서도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켜가기 위해 애써 온 한 시골학교 여교원이 있다. 그녀가 바로 길림성 왕청현 배초구 제2소학교에서 30여년 동안 학생들에게 “상모춤”을 가르쳐 온 김수금 교원이다. 교육사업에 종사한 이듬해인 1985년부터 아이들에게 상모춤을 가르치기 시작한 김수금 교원은 시골학교였기에 어쩔수 없이 겪어야 했던 고충이 많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전교 학생수가 고작 50여 명밖에 안되는 시골학교에서 30여 명의 학생을 조직해 상모춤을 춰야 하는 일은 말 그대로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습 도중에 상모대에 맞혀 부상을 입는 아이들까지 하나, 둘 늘면 연습은 더 이상 진행키 어려운 일로 될 때도 있었다. 따라서 자식걱정에 공부에만 열중하면 된다는 보수적 관념을 가진 부모들의 반대 목소리도 커졌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한집 한집 가정방문을 다니며 민속문화를 지켜가야 하는 의미를 강조했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엄마 마음”으로 그들을 감화시켰다. 경제형편이 어려운 시골학교였기에 어렵게 공연준비는 했지만 아이들에게 입힐 변변한 공연복장 한벌 없어 속상할 때도 많았다. 누구보다 강했던 그녀지만 아이들을 위해선 자존심까지 버리기로 했다. 워낙 신체가 허약한 그녀였지만 매일 왕복 몇시간의 노정을 버스로 오가며 도시학교들에 찾아가서는 손발이 닳도록 싹싹 빌어서 복장을 빌려왔다. 그런 자신이 때로는 보따리 장사로, “구걸”하는 사람으로 비참하게 느껴져 서럽게 혼자 눈물을 훔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빌려온 복장은 아무리 다림질을 해도 빛이 나지 않는 헌 옷들이었기에 그런 옷을 입고 무대에 오른 아이들을 촌놈들이라고 놀려주는 도시아이들을 보면서 이를 악물고 더 열심히 가르쳤다.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동안 그녀는 웬만한 도시학교들에서도 그저 바라만 보는 수두룩한 영예를 받아 안는다. 2005년 그녀가 인솔한 배초구제2소학교는 연변중소학생예술전시공연에서 유일한 향진 학교대표팀으로 단연 1등의 월계관을 받아 안았다. 그외 2008년 연변민족예술 전시공연에서 금상을, 2012년 7월,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 맞이 연변 제3차 중소학생예술전시공연에서 금상을, 2013년 12월, 길림성 왕청현 제3회 중국조선족상모춤경연에서 최우수상을 받아안았다. 상모춤의 최고지도교원으로 실력을 인정받게 되자 현성 학교들에서도 중요한 경연이 있으면 그녀를 찾아왔다. 2014년 4 월, 그녀는 왕청현 제2소학교로 전근했다. 상모춤 인재를 더 많이 육성하라는 상급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녀는 계속해 도시학교에서 상모춤을 전수하기 시작했고 아이들을 이끌고 크고 작은 경연에 참가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이들과 리허설을 하기 위해 공연장을 찾은 그녀는 새끼 병아리마냥 우루룩 모여와 자신의 품에 안기는 아이들로 밤잠을 설친다. 바로 자신과 오랜 시간 울고 웃으며 상모춤을 연습해 오던 시골학교 천진난만한 학생들이었다. “선생님, 다시 배초구에 와서 우리들을 가르치면 안됩니까? 우린 선생님이 없으니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아이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후볐다. 그래, 다시 돌아가자! 도시학교는 내가 아니어도 다른 무용선생님이 계시는데 시골아이들은 내가 없으면 아예 춤을 배우지 못하니깐... 그녀는 도시의 우월한 대우를 뒤로 한채 2년반이란 시간을 보낸 도시학교를 떠나 꿈에도 그리던 시골학교 아이들 곁으로 다시 돌아갔다. 하지만 그녀가 잠시 떠난 2년반 사이, 시골학교는 학생수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더는 상모춤을 조직하고 배워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선 30여년 동안 제대로 된 방학이 뭔지도 모른채 숨가쁘게 달려온 그녀지만 열정만 쏟아부어서는 안되는 “참혹한” 현실앞에서 뾰족한 수가 없었다. 고민끝에 상모춤이 아닌 노래와 피아노를 가르치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재간 하나 더 익혀 시골아이들도 도시아이들 못지 않은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하고 또 그들의 예술감성과 특기를 키워주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춤이 전공인 그녀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일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여 50이 넘는 나이에 그녀는 요즘 아이들을 위해 전문가를 찾아다니며 피아노 공부를 한다. 그러는 그녀를 두고 지인들은 이제 상모춤을 배워줄 수 있는 날이 언제 또 오겠냐며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도시학교로 돌아가라고 권고하지만 그때마다 암 선고를 받고도 작곡가로 있으면서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곡을 쓰던, 살아만 있으면 뭘 못하겠냐며 아이들을 위해 끝까지 열정을 다하라던 친정오빠의 말을 되새기며 끝까지 믿고 버텨보기로 결심한다. 티없이 맑고 깨끗한 시골아이들 마음속에 소중한 꿈 하나라도 더 심어주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노력 중인 그녀, 누군가의 눈에는 안타깝게 비쳐질 수도 있는 그녀의 값진 노력이 꼭 헛되지만은 않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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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상모춤이 있어 행복한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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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영화계의 반짝이는 새별 양영
- ▲중국 영화계의 반짝이는 새별 양영 첫 연속극으로 인기몰이 중국 영화배우 양영(杨颖— 예명은 Angelababy)이 주역을 맡은 사극 《대한인연— 운중가(大汉情缘之云中歌)》가 방송된 후 양영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특히 극중에서 선보인 내시분장이 팬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전 작품에 비해 내시차림의 양영은 특별히 활발하고 영리해 보였다. 얼마전에 양영은 출연 중인 예능프로그램 《달려라, 형제(奔跑吧兄弟)》에도 내시차림으로 출연하여 화제를 모았다. 그는 “나처럼 이렇게 영준하고 소탈하며 름름하고 씩씩한 내관을 본적이 있어요?”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대한인연— 운중가》는 육의(陆毅)가 맡은 인물 유불릉이 동년시절에 초록색 옷차림의 소녀 운가(양영 분)으로부터 구원되고 두 사람은 10년후에 장안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지만 이리저리 어긋나면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는 사랑이야기를 다룬다. “운가”라는 인물에 대해 양영은 “사랑을 굳건히 지키려는 운가한테 큰 감동을 받았다. 나는 이런 약속을 줄곧 믿어왔다”면서 맡을 역할에 대한 사랑을 표시했다. 양영은 이런 극중인물 운가를 아주 섬세하게 그려내며 시청자들로부터 합격점을 받았다. 그는 한 여인의 사랑에 대한 갈망과 또한 사랑에 대한 무기력함도 생동하게 그려내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유불릉역으로 함께 출연한 육의는 “대중들은 일반적으로 잘생긴 배우는 연기력이 별로이라고 하면서 이런저런 병집을 끄집어내는 경우가 많은데 양영의 연기는 대중들의 호평을 받았다. 이는 그녀의 노력과 갈라놓을 수 없다. 솔직히 말해 나와의 호흡도 아주 잘 맞아서 유쾌하게 촬영했다”고 밝혔다. 연예계 데뷔 양영은 1989년 2월 28일 상해서 출생, 13살에 향항으로 이민을 갔다. 2003년에 모델로 된 그는 일본의 한 중개회사와 계약을 맺고 시대잡지 《Ray》와 《Dear》의 전용모델로 활동했다. 2007년 12월, 주걸륜의 요청으로 《07-08 세계순회음악회향항(07-08世界巡回演唱会香港站)》에 무용배우로 출연한 양영은 2009년10월에 희극편 《화전경사2010(花田囍事2010)》에서 운명이 기구한 화전국 군주역을 맡으며 연예계에 정식으로 데뷔했다. 2010년 7월 27일, 양영은 국제의류잡지 《VOGUE》의 총편집 안나 윈투어(Anna Wintour)의 초청으로 일본 동경에서 진행된 《Fashion's Night Out》국제대형패션쇼무대에 첫 향항모델로 섰고 일본 매체로부터 “향항녀신”으로 인정받았다. 7월 30일에는 일본 웹드라마 《사랑대화(恋爱对白)》에서 주역을 맡았다. 영화 촬영으로 바삐 보낸 5년 양영은 2011년에 처음으로 동작영화 《건달영웅— 전투를 개시(痞子英雄之全面开战)》에 출연했고 2월에는 영화 《전성이 뜨겁게 사랑하다(全城热恋)》에서 정백연과 호흡을 맞추었다. 9월에는 마촉성 감독의 영화 《느긋한 여름날(夏日乐悠悠)》에서 처음으로 여주역을 맡았다. 2012년 6월 양영은 화의형제그룹과 계약을 맺고 안젤라 베이비 작업실을 설립하고 량가휘(梁家辉), 팽우안(彭于晏)과 합작한 세편의 태극계열영화에 출연하며 많은 인기를 끌었다. 그해 양영은 한연 감독의 애정영화 《처음(第一次)》에 출연하면서 여러차례 부상을 입었는데 각막까지 다치기도 했다. 후에 그는 이 영화로 제13기 중국 영화대상에서 제일 주목을 받는 여배우상을 수상했다. 2013년 양영은 영화 《화조풍월이야기(一场风花雪月的事)》로 런던 국제 중국어 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주역상을 수상했다. 그후에도 여러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2013 시나블로그 년도여신(2013新浪微博年度女神)의 영예를 얻었다. 2014년 양영은 영화 《사랑은 점입가경(微爱之渐入佳境)》과 첫 할리우드진 영화 《번호47(代号47)》외에도 영화 《임시동거(临时同居)》 등 6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5월 10일에는 《적인걸: 신도룡왕》으로 제21기 북경대학생영화제에서 제일 환영받는 여배우로 선정되였다. 올해도 양영은 년초에 출연한 영화 《봉신방(封神榜)》을 시작으로 3편의 국내영화에 출연한 외에 두번째 할리우드영화 《독립일2(独立日2)》에도 출연했다. 연예계에 데뷔해서부터 양영은 자신의 각종 결함들을 고쳐서 만능연예인이 되려고 피타는 노력을 했다. 특히 그의 연기력은 언제나 지적받은 약점이었다. 그는 대량의 작품과 서적들을 보면서 연기력을 익히려고 했다. 연기가 무엇인지를 모를 때 “죽을 힘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덕에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그의 연기력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사랑과 결혼 영화 《임시동거》에서 양영은 못생긴 여자역을 맡았다. 그는 대중들이 자신의 못생긴 분장을 즐겁게 보고 있다고 밝혔다. “감독이 입술연지를 바르지 못하게 하고 눈화장도 못하게 했을 뿐더러 반점을 만들어넣었다. 그리고 맡은 역할이 우편배달원이었기에 손에 많은 상처가 있어야 했다.” 그는 “촬영당시 감기에 걸려 코물범벅이 되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코물감기에 걸리면 종이로 코구멍을 틀어막는 습관이 있었다. 한번은 촬영할 때 코안에 밀어넣은 종이를 꺼내지 않았는데 감독이 보고는 좋다고 했다. 우스운건 연기할 때 툭 튀어나왔지만 누구도 감히 줏지 못했다”고 회억했다. “이전과 달리 과감하게 못생긴 여자역할을 하게된 것은 남자친구를 찾지 못할 우려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황효명의 못난 역할을 더욱 좋아한다. 그는 못생긴 이미지(《중국합작인》)로 상을 타기도 있다. 때문에 그의 추남형상이 미남형상보다 더욱 성공적이지 않나 생각한다.” 그럼에도 황효명(黄晓明)이 자신의 여신같은 모습을 더 좋아할 것이라고 여긴 양영은 언제나 남자친구앞에서 여신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양영과 황효명은 2014년 2월에 연인사이임을 밝히고 공개연애를 즐겼다. 당시 앙영은 “두 사람 모두 온정되었기에 연인사이를 공개했다. 몰래 만나는 것이 힘들어서 여러분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기로 마음먹었다”고 밝혔다. 2015년 10월 8일, 황효명과 양영은 상해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많은 연예계 동료들이 참가한 가운데 주례는 저명한 감독 오우삼이 맡았다. 《대한인연— 운중가》의 제작인 우정(于正) 은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운가, “중국 제일 아름다운 여인” 양영를 위해 “양영이 남편 황선생과 영원히 행복하고 달콤하게 백년해로하기를 바란다”고 축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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