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5-26(목)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석산린(石山麟), 남, 조선족, 중국 길림성 동풍 현 사람. 1945년 9월생, 1968년 중국 할빈 공업대학(哈尔滨工业大学) 핵물리학과를 졸업, 문화혁명 기간 ‘반당, 반사회주의 분자’로 낙인되어 징역 15년 선고…


1978년 누명을 벗고 출옥한 후 공개초빙에 성공해 흑룡강 상업학원 강사가 됐다.


대학 강사란 일반인 거개가 우러러 보는 직업인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당시 중년에 접어들기 시작한 석산린한테는 그것이 그냥 ‘사치한 직업’에 불과했다. 그는 어딘가 남 다른 인생을 살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호텔에 투숙한 석산린은 샤워하려고 호텔방 욕조에 들어갔으나 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럴 경우, 웬간한 사람 같으면 그냥 투덜대거나 호텔 지배인을 찾아가 항의 했겠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순간 한 가지 아이디어가 섬광처럼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것인 즉 높은 건물에 물을 공급하는 시스템이다. 그렇다. 그것은 일종의 혁명이다.


석산린은 즉시 학교에 사표를 내고는 옥중에서 자습한 기계학, 유압학, 금속소재역학, 열역학 등으로 밤을 새가며 도면그리기에 열중했다. 당시 그가 그린 도면은 말 그대로 한아름 되었다고 한다. 드디어 그가 설계해낸 물 고압펌프는 특허를 받아냈으며 석산린은 이를 바탕으로 창업에 나섰다.


1985년 석산린은 중국에서 ‘동방의 모스크바’로 불리는 할빈에서 급수설비공장을 설립했다. 상호는 할빈 창녕급수설비공장이다. 창녕이란 조상의 고향 한국 경상남도 창녕의 이름을 본 따서 명명한 것으로 그 창녕급수설비공장은 1992년 창녕그룹으로 발전 되었으며 1995년에는 국가상공행정관리총국으로부터 전국 제3위 민간기업으로 선정됐다.


그 후 성공과 재부는 끊임없이 흐르는 물처럼 석산린한테로 밀려들었다. ‘빠른 절주와 높은 효율’은 석산린의 일처리 스타일이었고 창녕그룹의 슬로건으로 개혁의 흐름에 맞춰졌다. 당시 창녕의 급수설비는 전통적인 고층 물탱크나 물탑보다 50~85% 정도 투자가 절감되어 사회 전반에 큰 효과를 냈다.


1989년 석산린은 자금과 인원을 투입해 할빈 공업대학이 고안한 발포식 니켈카드뮴 고 에너지 급속충전조라는 과학기술 성과를 가장 빠른 속도로 생산으로 전환했다. 토지 매입, 공장 건설, 중간 시제와 양산까지 16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1990년 석산린은 또 무압 온수 보일러 개발에 성공해 2 건의 국가 특허를 획득했으며 이와 더불어 전자동 기압 급수설비 비상제어장치에 대한 국가특허도 취득했다.


1991년부터 1992년까지 석산린은 초고층 건물 전자동 기압 급수장치 개발에 성공해 재차 국가 특허를 획득했다.


1992년 말 석산린은 북경에 9000만 위안을 연속 투자해 1993년 창핑테크노파크에 첨단기술기업인 북경 창녕산업회사를 세웠다. 그 뒤 고층 급수설비, 무압 온수보일러와 고에너지 급속충전조 등 3개 첨단기술제품은 멀리 23개국과 지역에 판매되었으며 생산 5개월 만에 생산액 5000만 위안을 창출했다.


1994년 석산린과 그의 회사는 생산액은 4.2억 위안, 납세 8000만 위안을 실현하였다.


한시기 창녕그룹은 할빈, 진황도, 무한, 해구와 북경 등지에 5대 생산기지를 두고 있었으며 고정자산 3억 위안, 종업원 3000여명, 부지 600여무에 달하는 중국 최대의 민간 과학기술기업 중 하나로 부상했다.


개혁의 풍랑 속에서 석산린은 모든 것을 스스로 이룩하고 세상 사람들도 행복하게 만들었다. 창녕그룹은 점차 중국 최대의 급수설비 공급업체로부터 기계, 전자, 식품, 경공, 건설 등 5대 업종으로 확대됐으며 석산린 본인 또한 중국 부호 100인에 이름을 올렸다.


받아 안은 영예도 한 아름 되었다. 1988년 초, 석산린은 전국 제1회 경제개혁인재 상금배 획득 인물로 1989년, 전국소수민족우수기업가로 선정되었고 1992년 국가과학기술위원회로부터 중국우수민영과학기술실업가로 선정되었다. 같은 해 그는 국가교육위원회로부터 ‘존사중교, 중화진흥’영예증서, 1994년 제5회 전국우수기업가상과 제4회 중국 전국 과학기술실업가 창업 상금상을 수상했고 1990년 ‘세계지구환경보전협회’ 국제명예총재로 영입됐으며 당시 중국기압급수공업협회 부이사장, 중국인재연구회 특약이사, 중국기계공업기업관리협회 이사, 흑룡강상업학원 교수, 할빈공업대학 겸임교수, 흑룡강성 정부 경제고문, 흑룡강성사회과학경제연구소 겸임연구원을 맡기도 했다.


그 외 한시기 석산린은 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8기 전국위원회 위원, 중화전국상공회의소 상무위원으로 활약했다.


석산린- 최근 년 들어 ‘철의 사나이’이었던 그에 대한 기별은 거의 없다. 그리고 그가 창립했던 기업 관련 뉴스도 마찬가지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와서 보면 석산린을 추월하는 중국 기업과 기업인은 기수부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석산린 그 역시 이젠 80세 고개를 바라보는 인생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중국의 개혁개방 초기 석산린이 이룩한 성과와 그의 인생사는 앞으로 적어도 한동안은 우리의 거울로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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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조선족 저명 기업가 - 석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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