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1-19(수)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전번 계속)

 

남침 작전 기간의 장군


1948년 2월, 조선인민군이 창설되고 무정은 포병 총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정식으로 중장 계급장을 달게 됐다. 그해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무정은 민족 보위성 부상(국방부 부부장 격) 겸 인민군 포병사령관을 맡았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해 7월 원래의 계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자 김일성은 김광협의 뒤를 이어 무정을 2군단장으로 임명하고 중국 홍군 명장의 지혜와 기백을 떨칠 것을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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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 2군단장을 맡은 무정은 국지적 포위, 우회와 퇴로 차단 등을 결합하면서 소백산을 지키는 미 8집단군을 격퇴하였으며 7월 말 경에 이르러서는 김천-상주-예천-안동-영덕까지 내려가 낙동강 강행도하를 준비했다.


한편 김일성은 미군 병력이 낙동강 방어권을 형성하고 미 본토로부터 육속 증원군을 부산에 보내는 것을 알게 되면서 충주 남쪽 수안보에 위치한  전선총사령부로 이동해 조선 광복 5주년 기념일인 8월 15일 전으로 부산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무정은 한 달 가까이 미군들과 겨루면서 인민군과 미군의 실력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8월 공세’에 대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김일성은 자신의 고집(실제로는 배수진을 친다는 의미도 있다)을 내세우며 무정을 인민군 동부전선사령관으로 임명하고 6개 사단을 맡겨 ‘8월 공세’의 주공격 임무를 수행하게 했다. 즉 김천 북쪽으로부터 영덕으로 전개하면서 대구, 영천과 포항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구체적인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제15사단: 선산 부근에서 강을 강행 도하한 후 유학산을 거쳐 대구로 진격한다.


13사단: 낙동리 부근에서 강을 도하하여 다부동을 거쳐 대구로 진격한다.


1사단: 신속하게 군위를 점령하고 13사단과의 좌익 배합으로 대구로 진격한다.


8사단: 신속하게 의성의 적을 격파하고 영천으로 진군하여 경주나 대구로 진군할 준비를 한다.


12사단: 태백산맥을 가로질러 포항까지 신속하게 밀고 나가 연일이나 경주를 거쳐 부산으로 진격할 준비를 한다.


5사단: 신속하게 영덕 탈취 후 포항으로 진격하고 이후 12사단과 함께 부산을 향해 진격할 준비를 한다.


무정은 또 제766 유격대에 울진을 출발하여 안강리교(안강리 동면 형산강에 놓인 다리)와 청도 도로를 파괴하도록  명령했다.


1950년 8월 5일부터 1950년 8월 24일까지 계속된 전투로 인민군은 영덕과 군위, 왜관을 점령했다. 그리고 한시기 인민군의 포탄은 대구 시내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12사단은 한국군 제3사단 1만여 명을 포항에서 포위하기에는 성공했지만 해상봉쇄를 하기에는 실패했다. 12사단은 한국군 3사단의 1만여 명을 포항에서 포위했지만 해상을 봉쇄하지 못한 탓에 한국군이 바다로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총적으로 인민군은 약간의 승리는 있었지만 산악지대에서의 작전과 유엔군의 공습으로 후방 보급이 크게 파괴되었다. 또한 동부 전선의 인민군 부대들은 8월 12일 이후 쌀 한 톨도 보급 받지 못했고 현지에서는 보급품을 전혀 징수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8월 15일과 16일 이후로는 전반 부대가 움직일 능력이 없음에도 탄약을 확보하기 위해 무리한 작전을 강행해야 할 때도 있었다.


한편 무정이 기대했던 제766 유격대는 청도터널을 파괴해 연합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임무를 명령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제766 유격대장은 “여러 갈래로 분산 침투해도 전투력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남조선군 경계망을 뚫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정규 부대로 돌진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유격전에 능한 이 부대는 안강리 지대에서 생소한 정규 작전을 수행하는 바람에 큰 타격을 입기 마련이었다.


이에 몹시 분노했지만 어쩔 방법이 없게 된 무정은 유격대를 해체하고 12사단과 병합했다. 하지만 유엔군의 막강한 화력(인민군에서는 ‘잔학한 괴멸적 전술’이라고 불렀음)과 병력의 반격이 끊이지 않았고 뒷심이 결핍한 인민군은 부득불 낙동강 우측 대안으로 후퇴해야 했다.


‘8월 공세’가 선승후패(先胜后败)하자 인민군은 앞으로 더 진격하려고 ‘9월 공세’를 준비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 당시 전선의 상황은 이미 유엔군과 한국군에 유리하게 역전되었다. 인민군 병력이 공세를 펴기 어려운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요행 외에는 승리를 기대할 수 없었다. 이는 그야말로 도박꾼의 올인이었다. 이번에도 무정의 부대는 여전히 주 공격을 담당했다. 당시 주 공격을 앞두고 무정은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웠다.


제3공격군단(1사단, 3사단, 13사단, 105 기갑사단 주력)은 미 제1 기병사단과 남조선 1사단 방어망을 뚫고 대구를 점령한다.


제4공격군단(8사단, 15사단, 17 기갑여단)은 남조선 6사단과 8사단의 방어망을 돌파하고 하양과 영천을 점령한 뒤 대구나 경주를 향해 진격한다.


제5공격군단(5사단, 12사단)은 남조선 수도사단과 제3사단 방어망을 뚫고 포항동과 연일비행장을 점령하고 경주 일대에서 부산으로 진격할 준비를 한다.


9월 2일 밤, 무정 지휘사령부의 대대적인 야간공격이 시작되어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으며 특히 제12사단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한국군 수도사단과 5사단을 잇달아 격파하였고 유엔군의 동부전선에는 약 12킬로미터 크기의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9월 5일까지 미 1기병사단과 한국 3사단도 잇따라 패하면서 포항동이 점령당했고 8일엔 인민군이 영천도 점령했으며 미 제8군 사령부와 한국군 사령부는 모두 대구에서 부산으로 철수했다. 하지만 그 시각 서부전선의 인민군은 패배하고 말았다.


무정은 사방에서 밀려오는 유엔군과 한국군의 반격을 막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바로 그럴 즈음,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인천상륙이 성공되면서 남쪽에 있는 인민군한테는 큰 재앙이 들이 닥쳤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으로 인민군은 어쩔 수 없이 철수해야만 했다. 후퇴 명령을 받자마자 유격전의 전략을 잘 알고 있던 무정은 각 사단의 퇴로를 마련한 뒤 모든 무전 연락을 끊었다. 결국 미군은 물론 평양의 김일성도 그가 어디로 숨어들었는지 알 수 없게 됐다.


평양의 김일성은 화가 나서 안절부절을 못했지만 무정의 안동 사령부는 별로 큰 장애가 없이 원주를 거쳐 38선 이북의 김화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무정이 거느리는 몇 개 사단 중 13사단이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것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순조롭게 북쪽으로 돌아감과 아울러 대부분의 골간 장병들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필요한 행동에 평양은 오랫동안 그의 소식이 끊겼기 때문에 극도로 화가 나 있었다. 그들이 오랫동안 무정과 연락이 두절되었다는 소식에 소련 고문들은 공개적으로 무정의 개인주의 성향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어 무정은 평양을 사수하라는 김일성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무정의 수하에는 만 명도 안 되는 예비사단 2개뿐이었고 무정 또한 포위섬멸되거나 포로가 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그는 정부가 북으로 철수하자 비교적 가벼운 저항만 하고는 부대를 이끌고 철수를 했다. 이어 유엔군이 공수부대를 파견하여 그의 퇴로를 차단하려 했고 또한 무정 부대의 철수가 늦어지면서 마지막 1개 연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기실 당시 무정이 평양을 포기하고 유생역량을 보존한 것은 정확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수도를 쉽게 포기한 것은 그의 명성에 큰 타격을 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다른 작은 정절에 있어서 무정이 임명한 한 관원이 정상적인 행정심사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 등으로 무정은 예비군단인 7군단의 군단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말았다. 이는 군인에게는 특히 수 십 년 간 전장을 누빈 군인 무정한테는 큰 실망을 의미했다.


이어 1950년 12월 21일부터 23일까지 있은 조선노동당 2기 3중 전회에서 무정은 ‘전쟁 중에 저지른 엄중한 과오’로 강력한 처벌을 받았다.


이는 무정의 개성에 비추어 볼 때 이는 불평불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처벌이었다. 그리고 이는 정치와 전투장의 이중적 실정으로 인해 이런 비극적 결말이 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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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조선인 혁명가 무정장군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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