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지난번 계속)당시 곽영회를 포함한 중국의 유학파들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임이 인차 증명되었다. 곽영회, 전위장과 임가추 등 3명은 함께 캐나다 토론토대학 응용수학부에 보내져 반년 만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곽영회는 1941년 미국 캘리포니아 이공대학 공기역학연구센터에 입학하여 공부하게 됐다. 당시 이 연구센터의 구겐하임 항공실험실(GALCIT)은 전 세계 최고의 연구센터였다. 왜냐하면 이 센터의 기둥 교수는 세계 기체역학의 신격인 폰 카르멘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곽영회는 훌륭한 교수를 만났고 또한 평생의 지기였던 선배 전학삼을 알게 되었다.
학업기간 곽영회는 ‘초음속류 불연속해결’ 연구를 주도적으로 제안했다. 이는 당시 공기역학 분야에서의 최우선 과제였으며 후에 곽영회는 이 연구로 박사학위를 따냈다.

1946년, 폰 카르멘의 학생 빌럼 힐스는 코넬대학에 항공공학 연구원을 설립하려 했다. 이러자 폰 카르멘은 곧바로 그에게 제자 곽영회를 추천했다. 또한 매사추세츠 이공대학(MIT)으로 강의하러 가려던 전학삼은 직접 차를 몰고 와서는 후배 곽영회를 코넬대학으로 호송하기도 했다.
코넬대학 교수로 부임한 곽영회는 비행기의 초음속 장애 제거를 위한 돌파 연구에 몰두했다. 당시 초음속 비행을 갓 실현한 항공기는 일반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것인즉 일단 비행기가 초음속에 가까워지면 저항이 급증하는 것이었다. 일단 조작이 먹통이 되면 추락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초음속 장애 제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곽영회는 자신의 끈질긴 연구끝에 업계를 떠들썩하게 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완전히 새로운 계산 방법을 창조하여 인류가 음향 장애를 돌파함에 있어서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1946년 5월, 전학삼과 곽영회는 미국 캘리포니아 이공대학을 떠나 미국항공자문위원회(NACA)에 부임했다. 이들 두 사람은 당시의 NASA에 ‘압축이 가능한 무선 아음속과 초음속 혼합형 흐름 및 상임계 마하수(可壓縮無旋亞聲速和超聲速混合型流動和上臨界馬赫數)’란 제목으로 된 논문을 제출해 초음속 흐름에서의 이론과 계산 문제를 해결하고 초음속 비행체 설계를 크게 촉진했다.
공기역학과 응용수학에서 뛰어난 활약과 공로로 곽영회가 미국 업계에서 크게 명성을 얻게 되자 많은 대학에서 강의를 요청했고 관련 기업들도 높은 연봉을 대가로 스카우트했다.
당시 곽영회는 이미 코넬대학의 교수이자 항공공학 연구원의 3명 핵심 중 한 명으로 미국에서 자동차와 집이 있었고 생활도 편했다. 그러나 1949년 이후부터 그의 마음속엔 귀국이라는 욕구가 더 강열해졌다. 그때 어떤 친구가 “장차 아이들도 이곳에서 더 나은 교육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왜 빈곤하고 낙후된 나라로 돌아가야 하는가”며 곽영회의 생각을 돌려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곽영회의 대답은 “가정과 나라가 가난한 것은 아들로서의 무능을 말해줄 뿐이다. 나는 스스로 중국인이라고 자부하며 나한테는 귀국하여 여러분들과 함께 조국을 건설할 책임이 있다”는 몇 마디였다.
그러나 곽영회의 귀국길 쉽지 않았다.
그때 곽영회는 코넬 대학에 도착하자 “내가 이 대학교에 온 것은 그냥 잠깐 온 것 뿐이며 이제 적당한 시기가 되면 곧 떠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국 항공공학연구회에서 근무하면서 곽영회는 많은 기밀자료를 접할 수 있었다. 한번은 곽영회의 테이블 위에 한 장의 등록지가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는 “만약 전쟁이 발발하면 미국을 위해 복무할 의향이 있느냐”는 물음란도 있었다. 그것을 본 곽영회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NO(아니오)’라고 적었다.
그 이후 곽영회는 더 이상 기밀 자료를 열람할 권한을 잃었다.
1950년 전학삼은 미국당국에 귀국 제의를 했다가 수감되었으며 아울러 자택도 검문검색을 받았다. 동시에 곽영회의 출국 자유도 제한되기 시작했다. 곽영회는 영국에 가서 강의하는 것조차 불가능 했다.이런 상황은 1955년까지 지속되었고 중미 양국이 대사급 회담에서 합의를 보고 나서야 미국은 자국 내 중국 유학생과 과학자들의 귀국을 허용했으며 전학삼은 마침내 먼저 귀국할 수가 있었다.
전학삼이 귀국한 후 곽영회는 귀국 욕망이 더욱 강렬해져 매일 아내 이패(李佩)와 귀국 계획 의논했다.
그동안 코넬대학은 곽영회를 잡아 두기 위해 높은 급여를 제시했고 대만 당국도 후한 대우로 그가 대만으로 오기를 희망했다.
드디어 귀국 날짜가 다가왔다. 곽영회는 자신이 10여 년간 심혈을 쏟아왔던 대량의 연구 자료와 강의 원고를 태웠다. 이에 아내 이패의 회억에 따르면 연구자료는 남편의 오랜 정성이란 사실을 알고 말렸지만 당시 남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곽영회 또한 당시를 회상하면서 그렇게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것을 가지고는 미국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이 내 머릿속에 다 들어 있었다”
곽영회가 이렇게 과단한 결심을 내린데는 선배 전학삼이 귀국할 때 갖고 있던 서적과 공책 800킬로그램이 모두 미국 세관에 의해 압수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곽영회가 원고를 태운 바로 다음 날 코넬대학 항공공학 연구원 원장은 곽씨네 부부를 위해 대형 피크닉 파티를 열었다.
파티에서 곽영회는 곧 완성될 원고를 불태워 버렸다. 이에 현장에 있던 교수들과 학생들은 모두 타오르는 불빛을 바라보며 묵묵부답이었다.
1956년 9월 30일, 마침내 곽영회 부부는 몇몇 중국 과학자들과 함께 귀국하는 ‘클리블랜드 프레지던트호’에 탑승했다.
그런데 배가 출항하기 직전 미국 이민국과 연방수사국(FBI) 요원들이 갑자기 배에 올라 귀국하는 모든 중국 과학자들의 짐을 강제로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패는 사전에 남편이 서적을 다 태워버린 것이 얼마나 현명한 것인지에 대해 그때에야 알았다고 회고했다.
2시간여 만에 ‘클리블랜드 프레지던트호’가 드디어 고동을 울렸고 곽영회는 마침내 귀국하게 되었다. 그해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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