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9-18(토)
 

 

●김정룡(多가치 포럼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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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역사를 돌아보면 주나라 초기까지 선비가 고위관료에 등용 되는 현인정치가 아니었다. 우스운 것은 상나라 초대 왕 탕을 보좌한 이윤(伊尹)과 상나라를 뒤엎고 주나라를 세우는데 일등 공신은 강태공은 현인이 아니고 순수 모략가인 데도 유가는 이 두 사람을 자기네 족보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춘추전국시대부터 이어온 선비 관료등용을 합리화 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수법이었다. 유가뿐만 아니라 도가, 병가, 법가들도 이 두 사람을 자기네 족보에 끌어들여 ‘가문’을 빛내기 경쟁을 벌려왔다.


이윤의 생애를 보면 노예 출신으로 이수(伊水) 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원래 유신씨(有莘氏) 군주 곁에서 노복으로 있었는데 상탕과 유신씨가 혼인관계를 맺게 됨에 따라 이윤은 유신씨 딸의 배가(陪嫁) 노예(시집갈 때 함께 딸려 보내는 노예)로 따라와 탕의 '소신(小臣)'이 되었다. 이윤은 요리사이기도 했다. 그는 가마솥을 둘러메고 탕을 보좌했다고 한다.『한비자』에 따르면 이윤이 탕을 무려 70번이나 설득했으나 받아주지 않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이윤은 탕의 눈에 들어 국정을 맡아 상탕이 하걸을 멸망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한편, 하 왕조 내부에 잠입하여 '하나라를 이간시키는' 첩자 노릇을 하기도 했다. 이렇듯 이윤은 선비가 아니었고 그의 몸에서 현인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강태공도 이윤과 마찬가지로 선비도 현인도 아니었다. 그는 동해 바닷가 동이족 출신인 강씨 집안은 귀족이었다가 강자아(강태공의 이름)에 이르러 집안은 거의 천민과 다를 바 없었다. 강자아의 인생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민간에서 밥장사, 도살업에 종사했고, 그마저 여의치 않자 고향을 떠나 상나라의 수도인 조가부근으로 이주했다. 여기서 강태공은 장사와 종업원 생활을 전전하면서 여러 차례 거처를 옮긴 끝에 상나라의 수도 조가에 주점을 열고 많은 사람들과 접촉했다. 그러다 점쟁이 ‘여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상나라 조정의 대신 비간을 만나 주(紂) 임금을 잠깐 섬기기도 했다. 그 후 무제의 눈에 들어 책사를 맡아 모략가로 뛰어나 주나라 창업에 지대한 공을 세운다.


중국역사에서 공자 같은 순수 선비가 고위관료에 등용된 것은 아마 현인정치 선구자 반열에 오르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순수 선비가 고위관료 직책을 수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자가 노나라에서 정치를 할 때는 백성들이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았다. 제나라 경공(景公)은 이것을 알고 걱정했다.


여저(黎且)가 경공에게 말했다.


“공자를 떠나게 하는 것은 털을 부는 것처럼 쉽습니다. 당신은 어째서 공자에게는 두터운 봉록과 높은 지위를 주고 애공(哀公)에게는 음악을 할 줄 아는 여자를 보내 마음을 어지럽히고 미혹되게 하지 않습니까? 애공이 이것을 즐기게 되면 반드시 정치에는 나태해질 것이고 공자는 반드시 간언하게 될 것입니다. 공자는 자신의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반드시 노나라를 쉽게 떠날 것입니다.”


애공이 여저의 말대로 했더니 과연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 초나라에 갔다. 그 후 공자는 여기저기 이 나라 저 나라 떠돌면서 감투를 얻기 위해 무려 14년이란 세월을 분주하게 뛰어다녔으나 끝내 어느 나라의 감투도 그를 외면했다.


선비는 배운 것은 많으나 현실정치에 맞지 않고 너무 이상적인 세계를 추구하다보니 입만 번지르르 했을 뿐 실용적이지 못했다.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자 노나라는 자공(子貢, 공자의 수제자)을 시켜 설득하도록 했다.


제나라 사람이 말했다.


“당신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얻으려고 하는 것은 토지이지 현실을 떠난 메마른 이론이 아니다.”


유가의 선비들이 현실정치에서 밀려나 있던 상황을 반전시킨 것이 바로 앞장에서 말했듯이 한무제와 동중서의 덕분이며 관료사회에 전면 포진되어 독점한다. 한나라 때부터 천거(薦擧)와 찰거(찰거)에 의해 관료자리를 채웠고 수나라 때부터는 과거제를 실시하여 관리를 선발했다. 그러나 중국역사 상황은 유불도 삼교 합일에 의해 문화 다양성이 이뤄졌고 관료사회도 유생일색은 아니었다. 물론 과거시험의 주 내용은 사서삼경을 비롯한 유가경전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래도 관료사회는 다양한 인재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이에 비해 조선조 500년은 유교일변도였기 때문에 유가 선비의 현인정치가 판을 쳐왔고 그 영향이 오늘 대한민국까지 이어져 오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사무라이가 관료사회를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을 ‘칼의 역사’라 하는데 한반도는 자신들이 ‘붓의 역사’라는 자부심을 갖고 줄곧 일본을 매우 천박하게 여겨오다가 결국 그들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의 역사를 맞게 되었다.


본장의 주제는 한국에서 현재까지 선비를 고위관료로 중용하는 현인정치의 폐단을 파헤치는 것이므로 이제부터 본론으로 들어가 보려고 한다.


한국의 현재 상황은 고위관료 자리에 대학교 교수와 변호사가 직행하는 것이 다반사인데 이 인사시스템은 문제가 많다. 이런 선비 현인정치는 우선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어 관료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다.


고위관료의 전문성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람을 관리하는 행정력이고 다른 하나는 업무에 대한 전문성이다.


어느 나라든지 어느 민족이든지 사람 사는 동네(직장)는 서로 질투하고 서로 헐뜯고 서로 시기하고 서로 깎아내리고 서로 물어먹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특히 공무원사회가 더욱 심각하다. 오너의 주요역할은 직장 내의 갈등을 최소화하여 업무효율을 높이는 것인데 행정경험이 전혀 없는 교수가 장·차관이 되거나 청와대 수석으로 발탁되어 중임을 맡는다면 사람관리를 제대로 해낼 수가 없다. 아무리 뛰어난 두뇌를 가진 교수일지라도 사람관리는 말단 직원으로부터 위로 단계를 밟으면서 경험에서 노하우가 생기는 것인데 학문의 세계에 파묻혀 있던 교수가 갑자기 ‘흙탕물’과 같은 무리에 들어가 관리해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조국사태에 있어서 한 가지 떠돌아다니는 말(방송에서 패널이 한 말)이 있는데 조국이 민정수석 자리에 있을 때 부하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통제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후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교 교수 출신인 조국이 검찰 출신, 경찰 출신 및 여러 분야에서 모인 민정수석실 부하들을 제대로 관리하고 통제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은 어두운 야밤삼경에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공자도 아마 왕도만 외치면서 현실을 외면했고 메마른 이론에만 매달리고 사람관리행정력이 부족한, 요즘 말로 한심한 ‘꼰대’였기 때문에 노사구(魯司寇, 노나라의 법무장관) 직을 맡았다가 금세 쫓겨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교수뿐만 아니라 변호사도 마찬가지로 행정력이 부족하다. 경험 없는 행정력이란 있을 수가 없다. 어떤 변호사는 판·검사 출신이라 해도 행정경험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교수와 변호사뿐만 아니라 영화감독과 영화배우가 문화관광부 장관 최고급 벼슬자리에 오르는 사례도 있는데 역시 그들의 최대 단점은 행정력 부족일 것이다. 그리고 행정경험이 전혀 없는 국회의원이 장관 자리에 부임하는 것도 역시 폐단이 심각하다고 생각된다.


다음 관련업무의 전문성이 전혀 없는 교수나 변호사가 부처의 장관이나 청와대 수석으로 직행하는 현인정치 인사시스템은 조속히 폐지되어야 마땅하다. 왜냐면 해당 업무에 대해 전문성이 없는 관료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나라 발전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앞서 이웃 나라인 일본과 중국에서는 교수나 변호사가 장·차관이나 주석과 총리의 수석비서관을 맡는 경우가 없다.


먼저 일본의 경우를 살펴보자.


냉전시대 일본외무성 중국담당 사무관을 맡으려면 10여 년의 경력이 필요했다. 우선 자국 내에서 중국어 전공을 졸업하고 대만에 유학 간다. 당시 대만은 대륙과 아주 적대관계에 있다. 대만유학을 마치면 본국으로 귀국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과 역시 최대 적국인 미국에 유학 간다. 그다음에는 유럽에 유학 가고 마지막에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권인 소련에 유학 가서 대만이나 미국이 중국을 보는 시각과 전혀 다른 시각을 경험해 보기위해서다. 이 유학코스를 마치려면 적어도 아무리 짧아도 12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12년 이상의 경력은 진짜 중국을 아는 베테랑급에 오는 진짜 중국통이다.


한국사람들은 중국에 한두 번 말 타고 꽃구경 식으로 다녀와도 중국통이라고 호들갑 떤다. 중국에 가서 주재원이나 유학을 다녀오면 서로 앞다퉈 중국통이라 자랑한다. 필자는 중국에서 태어나 40여 년 살았지만 중국을 잘 모른다고 말한다. 실제로 ‘통’이 될 만큼의 중국을 다 아는 사람이 오리지날 중국인일지라도 없다. 중국이란 나라는 영원히 다 알 수가 없는 나라이다. 상해에 다녀온 한국 사람은 중국이 한국을 앞섰다고 호들갑 떨고 어느 후진 지역을 다녀온 한국 사람은 ‘우리 6·70년대와 같다고 보면 된다고 큰소리친다. 이런 코끼리 장님 만지기로 알면서도 불구하고 저마다 중국통이라 자부한다. 한국 외교부를 비롯해 여러 부처의 중국 담당들이 진짜 중국을 아는 전문가가 얼마나 되는지? 의심스럽다.


중국의 공무원사회 즉 각 부처 수장이 되려면 어떤 코스를 밟고 있는지? 알아보자.


중국에서는 모든 간부는 전부 기층 행정기관의 장으로부터 층층이 사다리 식으로 위로 밟아 올라간다. 향·진 수장부터 현·시급 및 성·부급(省部級)에 오르고 직할시(直轄市 : 북경, 상해, 천진, 중경 등) 수장을 수행하고 더 잘하는 간부는 마지막에 중앙기관의 수장을 맡고 나중에 이중에서 총리가 되고 주석이 된다. 이렇게 층층이 위로 밟아 올라가려면 우수한 자가 점점 더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중도에서 고만고만한 자리에 머무르기 마련이다. 이런 사다리 식 승진시스템을 ‘적우제(積優制)’라고 한다. 이 ‘적우제’를 통해 최고위급에 오르면 그 해당부처에 잔뼈가 굵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중국외교부 수장은 모두 그 부처에서 잔뼈가 굳히고 그 중 가장 우수한 자가 부장(部長, 장관)이 되는 것이다. 해당 부처에서 잔뼈를 굳힌다는 것은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중국 관료들은 두 말 할 것 없이 그 부처의 업무에 대해 눈 감고도 전부 꿰고 있어 전문성이 바싹하다.


한국 사람들은 흔히 중국공산당에 대해 독재만 운운할 뿐 왜 중국공산당이 올해로 100살을 맞이하고 있는지? 이에 대해선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한 정당이 100살을 유지해왔으면 나름대로 그들만의 소이연이 있을 것이 아닌가? 그 소이연 가운데 각 부처의 장들이 전문성이 뛰어난 요소도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 고위관료들은 가뜩이나 해당 행정력과 업무 전문성이 결여된다가 직무 수행시간이 너무 짧아 미처 그 분야의 업무를 읽히기도 전에 물러나니 나라가 어떻게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을까? 한국의 행정시스템은 미국 것을 옮겨다가 시행하고 있는데 미국은 일단 내각이 조성되면 적어도 4년은 함께 간다. 이에 비해 한국 내각은 대통령 5년 임기 동안 적어도 3번, 많게는 5번 이상 바뀐다. 교육은 백년대계라 말하지만 교육부 수장이 대통령 임기 동안 한해 한 번 꼴로 바뀌니 백년대계가 아니라 1년 소계(小計)에도 못 미치는 것이 대한민국의 행정시스템의 현주소이다.


4차 산업혁명시대에 들어섰다. 과거보다 더욱 전문성이 필요한 시대가 도래 하고 있다. 교수나 변호사가 고위관료로 직행하는 현인정치 인사시스템은 이미 적폐가 되고 있다. 대한민국이 세계무대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이 적폐를 반드시 청산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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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인 정치는 적폐청산의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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