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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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를 살펴보면 왕조가 교체될 따마다 농민봉기가 있었다. 그 중에는 성공한 봉기도 있었고 실패한 것도 있기 마련이다. 봉기가 성공하면 혁명이요, 실패하면 역모다. 또 봉기를 이끈 지도자들은 성공하면 영웅이요, 실패하면 역적이다. 또한 성공하면 봉기라 부르고 실패하면 ‘난(亂)’이다. 불순한 동기와 목적으로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게 했다는 뜻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후한 말기에 있었던 황건적의 난이다.


황건적의 난은 후한 말 여러 전란 중에 가장 큰 전란이었다. 30만의 대군에 대륙의 반을 휩쓸었으니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한정권(漢政權)이 매우 위태로울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은 왜 목숨 걸고 난을 일으켰을까?


앞서 후한 말기 환관들이 천하를 호령했다는 당시 상황을 언급하긴 했는데 여기서 그들의 만행이 어느 정도였나는 데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영제 때 환관 중 최대 실세인 장양이란 자가 있었다. 이 자가 영제의 신임을 어느 정도 받고 있었느냐면 황제가 일개 환관을 아버지라 불렀다.


“황제 폐하, 나라 곳곳에 흉흉한 얘기들로 가득 차 뒤숭숭하기 그지없습니다.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다는 기이한 현상까지 생겨나서 이런 불길한 일들로 백성들이 불안에 떨고 있어 민심이 말이 아니옵니다.”


상소문을 한 보따리 안고 황제를 알현한 관리의 말이다.


“아니 별 일 다 보겠네.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든 수탉이 암탉으로 변하든 그게 짐과 무슨 상관이더냐. 그렇지 않습니까, 아버지?”


영제는 천하의 흉흉한 민심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황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환관 탓이었다.


“네, 황제 폐하, 위대하신 하늘의 아들이신 천자 폐하께서 들을 얘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황제가 다른 일정이 있다면서 자리를 뜨려하자 우직하고 충성스런 관리가 죽을 각오로 머리를 바닥에 박으며 또 한 마디 간언했다.


“하늘의 아들이시라면 제발 이 나라를 돌봐 주소서! 폐하의 아버지는 저 간사한 환관 놈이 아니라 하늘이시옵니다! 하늘이 땅을 굽어 살피듯 천자께서 백성들을 굽어 살피는 것이 순리이지 아니옵니까? 가난과 수탈에 허덕이는 이 나라가 보이지 않습니까? 제발 저 요사한 환관들을 멀리 하시고 들어야 할 것을 똑 바로 들어주시옵소서.”


곁에서 시무룩하게 듣고 있던 환관 장양이 사악한 맘의 결정을 내린다.


“황제 폐하, 또 다른 역적의 무리일 뿐입니다. 저들은 폐하가 행복한 것을 눈 뜨고 보질 못합니다. 처벌하시지요.”


“아버지께서 알아서 하세요.”


충성스런 관리는 곧 끌려 나가 참수 당했다.


당시 장양은 천자를 끼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의 집 앞에는 날마다 뇌물을 싣고 온 가마들이 줄지어 있었고 가마가 없는 자들은 뇌물이 가득 든 보자기 꾸러미를 들고 찾아왔다. 뇌물을 바치는 목적은 관직을 사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뇌물의 값어치에 따라 관직 등급이 달랐다. 심지어 관직을 외상으로 파는 일까지 있었다.


어느 한 번 가산을 몽땅 털어 갖고 온 한 젊은이의 뇌물이 눈에 차지 않자 장양이 잔머리를 굴린다.


“내가 자네 관상이 마음에 들어서 말이야. 정말 아무에게나 주지 않는 기회이지만 하나 방법을 마련해 주겠네. 외상으로 관직을 사게. 물론 갚을 때는 원래 값보다 두 배로 갚아야 하지만 걱정할 필요 전혀 없어. 그 정도는 백성들에게서 충분히 빨아낼 수 있네. 어때 할 수 있겠나? 낙양에 근사한 자리 하나 줌세.”


변변치 않는 뇌물을 들고 온 젊은이는 지옥에서 천당에 옮겨진 듯 갑자기 세상이 훤히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매관매직이라는 비리를 해 먹다 못해 싹수가 보이는 젊은이에게 외상으로 관직을 팔아먹는 일까지 있었으니 그들의 부정부패는 실로 가지가지였다.


후한 말기는 장양을 비롯한 환관들의 전성기이자 전횡기였다. 환관들은 일족이나 양자를 관리로 중용하고 관료나 호족과 결탁하여 중앙이나 지방의 관계에 세력을 확장함으로써 정권을 독점했다. 그들은 뇌물을 받고 부정한 선거로 관리를 등용하였으며 백성들에게는 혹독한 가렴주구로 일관하여 호화 방탕한 생활을 일삼게 되니, 부정과 부패가 사회에 만연했다.


이것이 결국 황건적의 난을 불러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장각(張角)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관직 등극에 실패한 그는 매일 산에 올라 약초를 캐는 것으로 세월을 죽이고 있었다(요즘 대한민국 역사 강의자로 가장 ‘주가’가 높은 설민석 선생은 자신이 지은 <삼국지>에서 ‘장각은 과거시험에 실패한 선비출신’이라고 했는데 당시는 과거시험이 없었고 관직은 효와 예를 바탕으로 하는 윤리도덕을 갖춘 선비들이 천거(薦擧)에 의해 등용되는 것이 제도였다. 환관들이 이 제도를 무시하고 매관매직했으며 진짜 과거시험은 수나라 때 수 문제에 의해 창설된 관리 선발 제도였다).


장각은 어느 날 산에서 남화노선이라는 산신령을 만난다. 산신령은 그에게 책 한 권을 준다.


“이 책으로 도술과 신통력을 익혀 좋은 곳에 쓰게나. 만약 나쁜 쪽으로 쓴다면 세상이 뒤집어질 것이니 명심하오.”


책 제목은 ‘태평요술’이다.


장각은 태평요술을 익혀 바람과 무술을 관장하는 도력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낭야(산동성)의 우길(于吉)이 창시한 것을 이어받아 부수주설(符水呪說)로 질병치료를 행하여 민심을 얻었다. 장각은 <대현량사(大賢良師)>라고 자칭하고 병자에게 죄의 참회를 구하고, 돈이나 영수를 마시게 하고 주문을 외워서 신의 용서를 청하는, 그런 방법으로 포교를 했는데 십 수 년 사이, 신자는 중국 동반부의 넓은 지역에 걸쳐서 수십만 명에 이르고, 36의 <방(方)>이라고 하는 집단으로 조직되었다. 대방(大方)은 1만여 명, 소방,(小方)은 6000~7000명인 이 조직을 만들었다.


장각이 만든 이 조직을 태평도라 불렀다. 장각은 어떻게 짧은 시간 동안 30여 만이 되는 신도를 모을 수 있었을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환관의 천하가 된 조정은 백성들의 삶을 살피지 않아 그들은 정권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태평도를 유일한 희망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태평도는 말 그대로 세상을 균등하고 평화롭게 한다는 뜻이므로 이것이야말로 백성들이 원하는 바였기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 둘째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궁핍한 백성은 주머니 사정 때문에 병이 나도 병원을 찾지 못하고 민간요법에 의한 치료가 매력적이어서 이에 몰리기 마련이다. 태평도가 바로 이 역할을 했다. 같은 시기 서방의 파촉 및 한중 지역에서 발전한 오두미도(五斗米道)가 삽시간에 들불처럼 번져 세력을 확대해가고 있었는데 좌절과 실의에 빠진 농민들 사이에서 태평도(太平道)와 오두미도의 광신도가 되었다.


신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정치적인 욕심이 생겨난 장각은 184년에 황건적(黃巾賊)의 난을 일으켰다. 장각이 이끈 이 태평도의 각 지부가 군사조직으로 전환되어 일어난 대규모 농민봉기이다. 중국의 전통적 오행설에 의하면 불에서 흙이 생성된다. 이들은 화덕(火德)에 해당하는 한나라는 곧 몰락하고 이어서 토덕(土德)에 해당하는 황건의 세상이 다가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머리에 새 세상을 상징하는 황색의 띠를 동여매었다. 치밀한 사전계획에 의해 한꺼번에 36만이 봉기한 이 전대미문의 항쟁은 들불처럼 광대한 지역에 번져나갔다. 장각은 천공(天公)장군이라고 하고, 아우인 지공(地公)장군 장보, 인공장군 장양과 함께 반란의 지도자가 되었다. 황건군은 그해 가을 주모자 장각이 죽고, 동생 장량, 장보 또한 전사하는 등 유능한 지도자를 잃고 주력군이 쇠미해졌으나, 각지에서 약 30년간 끈질긴 항쟁을 벌였다.


대규모 농민봉기에 봉착한 지배층은 즉시 권력투쟁을 중지하고 당고를 해제하는 등 호족세력을 무마하여 항쟁의 진압에 안간 힘을 썼으나, 유명무실한 왕조체제를 유지할 뿐이었다.


목적이 좋다한들 결과가 좋다는 법은 없다. 장각이 이끈 태평도, 정부 입장에서 말하는 황건적의 난은 1851년 홍수전이 이끈 태평천국운동처럼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농지의 균등 분배, 남녀평등, 사회 악습의 철폐 등 구호를 내세운 태평천국운동은 초기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얻어 성세호대 하였다. 남경에 정부를 세운 이후 승리에 도취되어 기강이 해이해졌고 따라서 금욕정신을 제창하던 홍수전은 황제로 등극하고 전통왕조와 다를 바 없는 정치를 펼치려 하였고 그를 따르던 무리는 백성의 지지를 받고 나서 돌아서서 백성을 수탈하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14년 세월을 가다보니 중도에 초심을 잃은 것이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장각의 태평도도 홍수전의 태평천국처럼 출발은 좋았으나 30년이나 가는 도중에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나쁜 조직으로 변질되었고 내부 조직이 권력다툼으로 와해되어 결국 실패하게 된다.


이것이 태평도의 실패에 있어서 주관적인 원인이라면 외부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아 와해를 앞당기게 된다. 외부세력이란 진압군이다. 옛 유비의 스승이었던 노식과 황보숭, 주준 등 3명의 장수가 황건적과의 전투 부대로 편성되고 조조도 기도위에 임명되어 황건적 토벌에 나선다. 한편 강동의 손견도 하비에서 부하 황개, 한당, 정보, 조무와 함께 15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참여한다. 그리고 유주의 탁현에서는 유비가 장비, 관우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수백 명의 장정들을 모집했는데 모집된 용사 500명을 이끌고 황건적 토벌에 나선다.


<삼국지>는 후한 말기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서술하고 나서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가 도원결의를 맺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이들은 황건적 난에 맞서 싸우려는 결의를 다지는 것이다.


황건적의 난은 진압되고 만다. 하지만 그 근간인 태평도는 오두미도와 함께 도교 형성의 토대가 된다. 무슨 말이냐면 본래 공자의 유학이 한 무제 때 동중서에 의해 통치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유교로 되었고 노자의 도학은 이렇게 후한 말기에 이르러 태평도와 오두미도에 의해 도교로 변화되어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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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재해석④ 황건적(黃巾賊)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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