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9-30(수)
 


알고보면 정암촌이라는 이름은 과연 이 마을에 딱 들어맞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정자 바위는 멀리부터 마을의 비석처럼 시야에 안겨온다. 이 바위는 3미터가량의 거리를 두고 동, 서 두 쪽으로 나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바위 사이에 나무가 뉘여져 다리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두 바위를 드나드는 경우를 두고 견우와 직녀의 상봉이라는 말고 가 생겨날 정도이다. 정자 바위는 옛날 군사들이 전망대로 사용하던 곳이다. 정자 바위가 있는 산등성이를 타고 옛 성벽이 울타리처럼 골짜기를 빙 둘러싸고 있다. 산에는 일찍 고구려 때 축성하고 사용하던 천 년 전의 성곽이 있다. 이 성곽에는 온돌 유적이 있는 게 자못 특이하다. 오랜 옛날부터 백의 겨레의 선조들이 이곳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정자 바위 아래의 석두하 기슭에 늘 돼지머리 등 제물을 차려놓고 산신령에게 제를 지냈다고 한다. 옛 고향의 따스한 추억과 인연을 상기시키는 이 민속은 어찌 보면 타향살이의 서러움을 달래는 일종의 의식과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충청도 마을은 함경도 문화권인 연변에서 이 정자 바위처럼 유표했다.


공교롭게 함경도 마을은 바로 남쪽으로 몇 리 되는 곳에 있었다. 일명 석두촌(石头村)으로 부근을 흘러 지나는 석두하 때문에 지은 이름이다. 만주국 강덕(康德) 원년(1934) 함경북도에서 백여 가구의 농부들이 집단 이주하여 이 마을을 세웠다고 한다. 마을은 조선 총독부에서 관리했다고 해서 시초에는 “총독부 부락”이라고 불렸으며 1936년 집단부락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남도 충청도 이민의 집단부락은 북쪽에, 북도 함경도 이민의 집단부락은 남쪽에 위치하면서 남도와 북도는 이 고장에서 서로 자리바꿈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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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정암촌에서 20여 가구가 따로 나와 석두촌의 북쪽에 밭을 일궜다. 이곳에는 소나무가 많다고 해서 솔밭자라고 불렸다. 이 마을은 나중에 소실되고 송전툰(松田屯)이라고 쓴 석물만 외롭게 길가에 남았다. 송전툰은 솔밭자를 중국어로 뜻을 옮겨 쓴 것이다.


아예 송두리째 소실된 마을도 있었다. 번신령(翻身岭)은 벌떡 자빠졌다는 속설 때문에 불리는 지명인데 정암촌에서 왕청으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북쪽 약 3리부터 시작되는 골짜기이다. 세 부락이 있었고 한때 소학교까지 있었지만 지난 세기 60년대 전부 골짜기 밖으로 철거 되였다고 한다.


정암촌도 미구에 새마을 건설을 하면서 남쪽방향으로 약간 자리를 옮긴다. 그래도 정자 바위를 그냥 뒤에 업고 있어서 마을 지명의 근원은 버리지 않은 셈이다.


“충청도 사람들은 지역 우월감이 정말 대단해요.”


심범극옹은 마을의 텃세를 말하면서 연신 혀를 내둘렀다.


“이전에는 함경도 사람이라고 하면 마을에 받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7년 경상도 출신의 심범극옹 가족이 정암촌에 이삿짐을 풀 수 있게 된 것은 그 누구의 의지를 따른 게 아니라 전적으로 정부적인 행위였다.


정암촌은 8.15광복 전까지 북쪽 왕청현 춘방구(春芳区)에 속했으며 훗날 동쪽 훈춘현의 관할에 들어가게 되였다. 이때 이 지역에는 아홉 개의 부락이 있었는데 부락마다 훈춘에서 이주하는 세 가구의 이민을 통일적으로 받게 되였다. 심범극옹의 가족은 마침 이 충청도 마을에 배정을 받았던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난 후 심범극옹은 이 충청도 마을의 토박이로 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충청도가 아닌 “경상도”의 그림자를 떨어뜨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충청도 사람들은 심범극옹에게 예나 제나 “그 사람들”로 통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흥겨울 때는 노래를 했지요. 노래를 참 잘 불렀습니다.”


충청도 사람들의 1번 노래는 “청주 아리랑"이었다고 한다. 심범극옹은 인터뷰 도중에 요청에 따라 노래 한가락을 멋지게 뽑았다.


그는 적어도 노랫가락을 건드려지게 넘기는 이때만은 어김없는 충청도 사람이었다.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세. 울 너머 담 너머 임 숨겨두고 난들난들 호박잎이 날 속였네. (이하 후렴)”


지금도 노인들은 보름 같은 명절 때면 삼삼오오 모여 “청주 아리랑”을 부른다고 한다. 힘든 아리랑고개를 넘으면서 고향에 대한 향수는 그렇게 쉽게 지울 수 없었던 모양이다. 정작 노래의 발원지인 충청도에서 이 “청주 아리랑”은 이미 실전되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청주 아리랑”은 이역의 새 마을 정암촌에 정착하였고 또 정암촌의 이미지로 되고 있다. 구경 이 노래가 이민들의 70년 이주생활에서 어떻게 변형되었고 또 어떻게 본고장의 기억에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충청도 사람들의 운명과 생활의 상징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데는 아무런 온난의 여지가 없다.


중 한두 교전에는 학자들이 와서 남도 방언과 민속을 연구하기도 했다. 학자들의 이런 발길은 날이 갈수록 뜸해지고 있었다.


정암촌은 더는 충청도 사람들만 살고 있는 고도(孤岛)가 아니었다. 지리적으로 함경도와 가깝고 또 함경도 출신의 사람들이 인근에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물결에 잠겨 예전처럼 외롭지 않았지만 남도 충청도의 이름은 북쪽 골짜기의 옛 산성처럼 어느덧 기억 속에서 색이 바래지고 있었다.

 

필자/김호림(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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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고개의 정자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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