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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전주국제영화제 정준호-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 투톱체제 성공을 바라며
독립영화의 요람 전주국제영화제가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로 전환해 정체성 확립과 대중성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지 관심을 받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는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민성욱 부집행위원장과 정준호 영화배우를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의결했고, 지난 26일 조직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은 시장실에서 위촉장을 전달했다. 마력은 동력의 단위로 높을수록 좋다. 이번 쌍두마차 체제가 앞으로 3년 동안 시너지 효과를 일궈낼 것으로 기대된다. 백제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 교수인 민성욱 신임 공동집행위원장은 전주국제영화제 출범부터 조직위의 사무국장 및 부집행위원장을 역임한 '지킴이'이고, 정준호 신임 집행위원장은 높은 인지도를 가진 대중성을 확보한 영화배우이기 때문. 어떤 조직이나 더 큰 발전과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시점이 있다. 세계 초일류 전자제품 회사로 대한민국을 빛내는 삼성이 만일 제일제당 시절처럼 사카린을 밀수해 설탕을 팔던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면 지금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202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비경쟁 위주로 실시됐고 올해 2022년 23회 영화제는 국제경쟁, 한국경쟁, 한국단편경쟁, 특별부문(한국 장편 다큐멘터리, 지역공모작품, 비경쟁 아시아 영화)로 진행되며 업그레이드 됐다. 2023년 24회부터 3년간 시행될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기존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보다 더 대중성을 일으켜 더욱 큰 소통을 통해 영화계 발전과 주최지인 전주 지역발전에 더 크게 기여하는 영광이 실현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쌍두마차 체제가 된 전주국제영화제는 전주시민의 선택을 받은 우범기 시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이끄는 마차다. 우 조직위원장이 전주시 발전을 위한 고뇌 끝에 내놓은 묘수라고 풀이된다. 시장은 시민의 행복과 시의 발전을 도모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에 대해 기대가 큰 반면에 걱정과 반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수립되자, 권해효 배우, 방은진·한승룡 감독이 이사직을 사퇴했다. 이사회에서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의결되었다고 사퇴하는 것이 영화제에 대한 진정성일 수도 있지만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지점이다. 고 자니윤(고 윤종승) 코미디언은 2013년 2월28일 해외동포들과 판문점을 방문한 후 가진 뒷풀이에서 "한국 사람들은 너무 똑똑해요.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이XX 안돼, 저XX 안돼 하는거에요. 일을 해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한국계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고 그의 인프라를 총동원해 조국 대한민국 관광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었으나 좌절된데 대한 의견으로 들렸다. 대한민국은 625전쟁 후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나라다. 지난 80년간 대한민국이 변화가 없었다면 우리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억압속에서 지옥살이를 하고 있었을 게 자명하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는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임기는 3년이다. 3년간 응원하고 3년 후 큰 성공과 발전을 이루면 박수를 치고, 변화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때 가서 비판해도 늦지 않다. 한국언론인연대 박상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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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Z세대 중국에 호감" 중국 호감도 세대별로 다른 원인
●오카다 미츠루(일본 저널리스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7일 방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3년 만에 처음으로 중·일 정상회담을 갖고 악화된 양국 관계를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기시다는 대중 관계 개선에서 반중 여론과 대중 강경 자민당 우파의 제약을 받고 있지만 반중 여론을 거론하면 일본의 Z세대(18~29세)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40% 이상으로 다른 연령층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Z세대의 정치적 의지가 선거의 키를 쥐고 있는 세계적 흐름을 보면 '반중 여론'과 '우파'에만 의존하는 기시다 외교가 위태롭다. 45분 동안 진행된 이번 일-중 정상회담은 3시간여에 걸친 중-미 정상회담에 비해 일본의 대중국 중요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일·중 정상은 회담에서 국방부 해상 및 항공 연락 메커니즘의 직통 전화선 조기 개통, 새로운 중일 고위급 경제 대화의 조기 개최, 새로운 중일 고위급 문화교류 협의 메커니즘 회의 조기 개최 등 몇 가지 공감대를 형성했다. 향후 중일관계 개선의 지표 중 하나로 정상 간 상호 방문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의 대중 관계 개선의 한 가지 저항은 '반중(反中)' 여론 고조다. 일본의 대중(對中) 인식 악화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각부가 매년 발표하는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에는 흥미로운 수치가 나온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발표된 조사에서 응답자의 20.66%가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지난해보다 1.4% 증가)고 답했다.그러나 연령별로는 Z세대 중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는 비율이 41.6%로 전체보다 배 이상 많았다. 60~69세 13.4%, 70세 이상 13.2%에 비해 Z세대는 중국에 대한 친근감이 높다. 그렇다면 왜 연령대에 따라 중국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싶다. 나는 젊었을 때(저자는 1948년생) 중국의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있었고,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속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타자' 위에 자신의 생각을 투영해 기대를 부풀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나 구미의 통치체계를 중국의 정치와 사회에 투영해 일본이나 구미의 기준으로 중국을 관찰하고 판단한다. 요즘 60~70대 일본인들이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Z세대는 생각이 다르다. 내가 가르친 대학생의 경우 태어나기도 전에 일본 경제가 침체에 빠졌고,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들이 철들었을 때 중국은 이미 미국을 추격하는 대국이 됐고 IT 기술에서 일본을 앞섰으며 애니메이션과 게임 품질에서도 일본을 추월하고 있다. 또 Z세대가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많은 곳에서 중국 유학생과 접촉할 기회가 종종 있다. 다시 말해 Z세대는 중국을 일종의 '대등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환상은 없다.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의 버팀목이 될 때 일본인 전체의 대중국 관념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쇠락이라는 역사적 변화, '탈아입구((脫亞入歐)'의식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대가 '2선 후퇴'하면 일본의 '반중' 여론도 달라질 것이다. 기시다 정권도 언제까지 반중 익찬 여론에 의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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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강술래는 야합(野合)의 축제였다
한국국어사전은 강강술래와 강강수월래를 같은 말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강강술래는 한문 표기가 없고 강강수월래를 한문으로 ‘强羌水越來’로 표기하고 있다. 强은 강하다는 뜻이고, 羌(중국서부에서 양을 토템으로 삼은 민족이며 세력이 강해 늘 중원을 위협하여 한족정권은 그들을 오랑캐로 취급해왔음)은 오랑캐라는 의미이다. ‘强羌水越來’는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온다는 뜻이다. 필자는 한국국어학자 어르신들에게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즉 강강술래는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온 민속인데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오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아무런 연관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는 걸까? 답이 아닌 답이 하나 있긴 하다. 국어학자들이 강강술래를 한문으로 표기할 방법을 찾지 못해 본래 4음절인 강강술래를 음악의 필요에 따라 5음절로 늘린 강강수월래를 말도 안 되는 ‘强羌水越來’로 표기했을 것이다. 이런 억지춘향 표기현상을 가리켜 사자성어로 견강부회(牽强附會)라고 말한다. 강강술래를 ‘强羌水越來’로 표기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설명하려면 먼저 강강술래의 어원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강강은 본래 감감이다. 감은 감다, 감돌다 등등의 의미이며 감감은 감의 강조이다. 강강술래는 원을 그리며 빙빙 돌아가는 놀이이기 때문에 본래 감감술래였다. 감감술래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강강술래로 변음 되었던 것이다. 술래는 가운데서 눈에 띠를 두르고 숨은 자를 찾아내는 자를 일컫는 말이다. 한국국어학자들은 술래가 한자어인 순라(巡邏)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데 글쎄 썩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강강술래의 어원을 살펴보았으니 이번에는 강강술래란 도대체 어떤 놀이인지? 알아보자. 강강술래는 본래 순수 우리말이고 그 뜻은 원무를 의미한다는 데 포커스를 맞추고 유래를 찾아야 한다. 원무는 고대사회에 수많은 민족들이 보편적으로 추었던 춤이다.『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에서 저자는 원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영지주의자 예수는 미스테리아 입문식에서 원무를 이용하여 제자들을 이끈다. 그러한 입문식 춤은 이교도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두루 나타나는 것이다.” 현대의 한 권위자는 이렇게 말했다. “고대입문식 축제 가운데 춤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엘리우시스에서의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입문식 후보자는 중심에 자리 잡고, 다른 사람들은 둘레에서 춤을 추었다. 그것은 행성과 별들의 궤도를 흉내 낸 것이었다. 미트라스 미스테리아의 의식에서도 미트라스를 상징하는 입문자는 중앙에 자리 잡고, 황도의 12궁을 상징하는 12명이 주위를 돌며 춤을 추었다. <요한행전>에서도 그와 비슷하게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 예수가 신호를 보내면 사도들이 신성한 말 ‘아멘’을 읊조린다. 예수는 이러한 ‘원무’를 통해서 ‘수난’을 나타낸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것을 예수는 ‘신성한 비밀’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원무는 고대사회에 있어서 보편적인 춤이었으나, 그 형식과 내용 및 목적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위의 글에서는 원무가 이교도 입문식과 예수라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의 원무가 행성과 별의 궤도를 흉내 낸 데서 유래되었다면 동양의 원무는 달을 흉내 낸 데서 유래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달을 흉내 내는 원무를 추는 것을 도월(跳月)놀이라 한다. 민속학자 임동권(任東權) 씨는 고대인들의 도월놀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원시시대에 있어서는 달을 중심으로 하여 행사가 많았다. 상원과 추석이 그러했고 달 밝은 밤이면 모두 모여 유희를 즐긴 것은 우리 조상만이 아니고 지금도 미개사회사회에서는 모두 그렇다. 따라서 옛날 1년 중에서 가장 달 밝은 한가윗날 마을의 소녀나 부인들이 모여 만월과 같은 둥근 원을 그리면서 놀이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때에 노래도 부르며 뛰기도 했을 것이니 강강술래가 임진왜란 때에 비로소 창안된 것이 아니고 그 이전에도 민족전래의 유희로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강강술래처럼 대대적인 것은 아니나 달밤에 소녀나 소년들이 손을 잡고 뛰며 노는 유희는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러한 뜻으로 강강술래를 보면 문헌고증을 할 수 없어서 그렇지 함화진(咸和鎭) 씨가 추상한 것처럼 마한 때의 민족유희였을지도 모르며 마한이 아닐지라도 백제 또는 고려시대에 이미 전파되었던 놀이인지도 모르겠다.” 중국소수민족문헌인『묘속기(苗俗記)』에 도월놀이에 관한 기사가 있는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른 봄에 남녀가 들판에 모여 배우자를 찾는 것을 이름 지어 ‘도월(跳月)’이라 한다. 정월 초 3일부터 13일까지 모두 도월놀이 기간이다. 13일 도월놀이가 끝나면 남자는 갈대피리를 불면서 앞장서고 여자가 띠를 끌고 뒤따르며 장내를 세 바퀴 돌고나서 손잡고 대나무숲속에 들어가 먼저 야합하는 바, 이름 지어 ‘라양(拉陽)이라 부른다. 그러고 나서 임신되면 시집가고 임신이 안 되면 이듬해에 또 반복해서 도월놀이에 참여한다. 『귀주통지(貴州通志)』에도 위의 기사와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다. “화묘(花苗), 매년 이른 봄에 남녀가 들판에 모이는 것을 ‘도월’이라 부른다. 평평한 곳(平壤)을 택해서 월장(月場)으로 삼는다. 남자가 갈대피리를 불고 여자가 방울을 울리며 빙빙 돌면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서 하루 종일 즐긴다. 날이 어두워지면 남녀가 서로 짝을 지어 갔다가 날이 밝으면 헤어진다.” “백묘(白苗), 도월놀이 풍습이 화묘와 같다.” 우리는 전라남도 남해안 여러 지방의 강강술래도 역시 묘의 제족(苗之諸族)과 같은 순수한 도월놀이였으며 따라서 강강술래도 역시 청춘남녀들이 야합을 목적으로 한 놀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인은 야합을 음란행위로 간주하지만 고대인에게 있어서 야합이야말로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는 신성한 의무라고 여겼을 것이다. 중국 유명 학자 이중탠 교수는 이것을 ‘이른 새벽 모닥불 축제’라고 표현한다. 중국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위대한 공자님도 그의 부모가 매신을 제사하는 모임에서 만나 야합해서 탄생되었다고 한다. 『조선의 향토오락』에 의하면, 강강술래는 주로 상원과 추석, 즉 만월 시에 진행했다고 한다. 왜 강강술래놀이는 만월 시에 했을까? 중국신화연구자들에 의하면, 달은 여성의 생래규칙과 닮았다고 한다. 달이 이지러지고 차는 것은 여성의 임신현상과 닮았고, 또 여성의 월경주기는 달의 주기와 같다고 한다. 월경, 월신(月信), 월수라고 부르는 것은 달의 규칙과 같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달 속에는 생식을 주관하는 월정(月精)이 있는바, 개구리의 화신인 상아(常娥)가 곧 월정이라고 한다. 만월 시의 달의 모양이 아름다운 것은 달 속에 아름다운 상아가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며, 따라서 상아의 ‘출현’은 곧 인간의 생식을 관장하고 또 인간의 생식력을 왕성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강강술래가 만월 시에 진행된 것은 곧 고대인의 생식숭배의식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강강술래 참여자들이 본래 소년 소녀들이었다가 여자의 중심으로 된 것은 후대에 내려오면서 유교문화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두어 말하자면 강강술래는 순수한 우리말이며 원무를 뜻하며 원무는 곧 도월놀이며 도월놀이는 곧 남녀야합의 놀이었다. 후대에 내려오면서 소위 학자라는 어르신들이 영웅주의사상, 한문숭배사상, 유교사상의 덫에 걸려든 탓에 강강술래의 본래의 모습을 말살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는 고대문화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민족의 비극이다. 풍류인물이였던 세종대왕이 박연(朴堧)에게 고대로부터 내려온 민속을 채집하여 정리할 것을 부탁해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유생들이 그 귀중한 자료들을 전부 화롯불에 던져버렸다. 결과 오늘날 선조들의 수많은 풍부한 민속 문헌고증이 차단되었다. 그리고 한국인은 다재다난(多災多難) 했던 민족이어서 고유한 민속을 영웅주의에 덧씌워 풀이하다보니 역사가 유구했던 민속의 상한선을 기껏해야 임진왜란시기에 꿰맞추는 경향이 짙다. 이를테면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 여러 지방의 고유민속인 강강술래를 임진왜란시기 의병술에 능하고 전쟁에 공이 많았던 이순신 장군이 창안해낸 것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후세인들이 강강술래놀이를 하는 것은 이순신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한 행사라고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민속학자인 임동권 씨는 1960년대 두 차례나 전라남도 여러 지방을 현지답사 하였는바, 현지고로들은 강강술래를 이순신 장군에 의해 창안되었다고 믿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창호(金昌浩), 어석경(魚錫經) 등 학자들도 현지고로들의 말을 믿고 역시 그렇다고 주장했다. 한 가지 미묘한 것은 강강술래의 전파지가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로서 이순신 장군의 전적지와 맞물린다는 것이다. 허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강강술래는 그 상한선이 마한 혹은 더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결코 이순신 장군이 창안해낸 것이 아니고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한 놀이도 아니다. 다만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이순신 장군이 고유한 민속놀이를 의병술에 이용했을 것이다. 필자는 이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법무부 귀화시험 교재에 역시 강강술래를 이순신 장군이 창안한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이 될 이주민들한테 잘못된 역사교육을 시키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한국사회는 쩍하면 중국과 일본을 향해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하고 있는데 자기네들 역사를 자기네들이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으니 얼마나 비극적인가?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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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50년”을 이야기한다
● 이 성 (By Star Lee) 오늘은 한중수교 30주년이다. 과거의 30년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愛恨情仇(사랑, 원망, 정, 원한)이 뒤섞인 두 연인 간의 멜로드라마와 같았다. 한 때는 서먹서먹했던 맛선 본 선남선녀처럼, 한 때는 애정행각이 지나쳐 주변사람들이 눈쌀을 찌프렸던 연인처럼, 또 한 때는 서로간의 오해와 불만으로 사랑이 식어가며 냉정의 시간을 갖고자 하는 커플처럼…. 어느 중국의 외교관이 사석에서 이런 농담을 하였다고 한다. 한국은 중국에 있어 매력적인 애인과도 같아 항상 그립고 가슴이 설레이지만 저 북방에 사는 본처를 생각하면 가까워지기에는 부담스럽고 떨어지려니 애간장이 탄다고 한다. 조금 불편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그것이 양국간의 애뜻하고 불편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필자는 한국에서 수십년, 중국에서 수십년 살아오면서 ‘한중수교’라는 멜로 드라마를 본방사수하면서 지켜봤던 사람으로 각별한 애착과 소감이 있다. 열혈 팬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평범한 서민의 시각에서 한중간의 과거 30년 미래 20년을 논하고자 한다. 제1화 1992~2002 연모의 시대 30년전 한중수교가 이뤄졌다. 양국 대중에 있어 40년전 전쟁을 했던 ‘적대국가’, 서로 정체성마저 부정했던 ‘괴뢰정부’와 수교한다는 것은 조금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서먹함과 생소함을 덜하게 했던 것은 88 서울 올림픽과 90 북경 아시안게임이였다. 그 당시에 한중수교가 중국인에 가져다준 가장 큰 변화는 경제도 아니고 문화도 아니였다…스포츠 경기에서 국가명칭이 남조선이 대한민국으로 바뀌였고 중공이 중국으로 바뀌였던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의 신북방정책에 힘입어 중국동포들의 한국 친지방문이 한중교류의 물꼬를 텄으며 뒤따라 한국 제조업 기업의 중국진출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동남아국가에 진출하려면 상당히 많은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극복해야 했지만 중국에서 수십년간 정착한 동포들은 한국기업의 중국 진출에 있어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말이 안통해도 현지에서 동포통역, 동포직원을 채용하면 모든 일이 다 순리롭게 풀릴것만 같았고 10억인구 상대로 한사람당 1원만 벌어도 10억원이 벌어진다는 차이나 드림에 벅차 북경, 상하이, 산동성, 요녕성, 강소성, 광동성 등 지역에 줄기차게 태극기를 꽂았다. 시험을 거치지 않고 빽으로 명문대에 입학한 학생이 잔혹한 대학생활을 맞이하게 되는 것처럼…중국진출의 열정과 자신감은 냉혹한 현실속에서 좌절하기 시작하였다. 세계의 역사를 보면 어느 나라도 신하나 내시에게만 의지하는 성군이 없었던 것처럼 언어가 통한다는 이유로 현지 동포직원에게 과도하게 의지하면서 구매관리, 고객관리, 직원관리를 소홀히 하며 많은 기업들의 경영이 난관에 부딪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는 일부 실패의 요인에만 불과하다. 20년전 어느 삼성출신 중국 주재원이 쓴 책을 본적이 있다..중국에서 실패하지 않는 비법 중에서 1위가 중국여인과 거리를 두라는 것이다. 주색을 삼가라는 말이 당연해 보이지만 이 역시 그 시기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의 수준을 여실히 들어냈다. 결국 21세기에 들어서서 많은 제조업기업들이 중국을 탈출(심지어 야반도주)하게 되면서 중국 제조업 진출의 열풍은 서서히 저물어갔다. 이로서 제조업이 테마를 이루던 한중간의 사랑 드라마 1화는 막을 내리며 다음의 10년을 그리는 새로운 막이 열렸다. 제2화 2002~2012 동거의 시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제조업의 중국 정복은 순탄하지 않았지만 한중관계는 갈수록 돈독해졌다. 조심스럽게 상대방을 알아가면서 사랑의 싹을 틔우던 연인은 이제 동거를 하기 시작한 것과 같았다.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10년간의 하드웨어 교류의 시대를 넘어 소프트웨어 교류의 시대가 막을 올렸다. 이때부터 한국음식, 한국문화, 한국패션이 본격적으로 중국에서 대중화되기 시작하였다. 한국 드라마, 한국 음악이 중국에서 서서히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중국보다 더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한국은 중국인이 흠모하는 나라가 되였다. 젊은 층은 한국 현대문화의 모든 것을 따라하고 싶어했으며 우호적인 외교관계도 한중양국 국민감정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북경 올림픽 전까지만 해도 경제력이 3~4위에 불과하던 중국이 미래 G2 가 될 것이라는 예측을 과대평가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때만 해도 중국은 일인당 GDP가 3000달러 조금 넘는 빈국이였고 국민들에 있어 국가가 부강해진다는 기대감만 있을 뿐 미국을 도전할 수 있는 초강대 국으로 성장할 것이란 자신감은 아직 턱없이 부족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한국 학생의 중국유학 붐은 최고조에 달았으며 21세기 초반 월드컵 진출, 올림픽 유치, WTO진입 3대호재가 터지면서 “중국이 미래다”라는 여론이 세상을 뒤덮으며 한국 내 중국어 교육기관들은 최대의 호황을 누렸었다. 북경의 HSK학원에는 한국인 수강자들로 북적였으며 모든 중국의 대학교에는 한국인 유학생이 항상 1위를 차지하였다. 중국인의 해외관광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늘어나면서 한국방문 관광객이 100만명을 돌파하기 시작하였고 재한 화교들은 중국과의 혈연적인 연고를 무기로 내세워 중국인 인바운드 여행과 쇼핑을 거의 독식하다시피 하면서 한중 관광산업의 새 시대를 열어갔다. 이 시기는 한중간의 관계가 가장 안정적인 시기였으며 외교관계, 문화교류, 경제교류 모든 면에서 엄청난 변화와 성장을 가져왔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동거를 겪으면서 서로 간의 단점들이 속속히 들어나면서 한중관계는 새로운 양상을 맞이하기 시작하였다. 제3화 2012~2022 모순의 시대 20년간의 동거동락을 겪으며 한중관계는 새로운 시기에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한국에서의 중국열풍도 만만치 않겠지만 중국에서의 한류는 최고조에 달하며 주변국가의 질투를 살 정도로 뜨거웠다. 외교관계 같은 정치적인 요소를 떠나서 대중문화적인 영향력을 봤을 때 한국을 10으로 보면, 미국이 7, 일본은 4, 기타국가 합치면 3이였다. 이때가 한중 양국은 과거 수천년 교류 역사상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 시기였을 것이다. 지난 역사상 한중관계 가장 가까웠던 시기는 아마 명나라 때였다. 明史를 보면 그때의 한중관계를 이렇게 평가했다 “他國不敢望也”(다른 나라가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밀접했다). 21세기에 들어서 한중관계가 바로 이렇게 “타국불감망야”가 된 것이다. 그러나 중국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物極必反(어떤 사물이든간에 도가 지나치면 그 반대로 바뀐다) 한중관계는 지나친 열정시기를 겪으며 결국 그 반대로 돌변하게 된 것이다. 한중관계는 정치인들과 경제인들만의 파티가 아니라 대중 속에 그 뿌리가 있다. 한중관계의 밀접함은 대중문화에서 여실히 반영 되였다. 중국의 방송을 켜보면 10대 예능프르그램 중 8개 한국 프로그램 포맷을 번안한 것이였다. 한국에서 인기있는 무한도전, 나는 가수다, 복면가왕, 진짜 사나이, 아빠 어디가, 슈퍼맨이 돌아온다, 런닝맨, 히든싱어 모두 중국에서 그 모조품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단순 도용이 아니라 대부분 저작권료를 주고 사들인 것이였다) 저자는 이런 광경을 목격하며…드디어 올 것이 온다는 안좋은 예감이 들었다. 한국 방송에서 중국의 예능 포맷이 80% 차지하고 중국 연예인이 한국 드라마 주연들을 독식한다면 한국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결과는 뻔하다…엄청난 후폭풍이 휘몰아치게 되는 것이다...그러한 전략적인 타산이 없이 2020년 마스크 붐 때 너도나도 마스크 사업하듯이 중국의 방송사들은 무분별하게 한국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결국 경착륙이란 국면을 맞이하게 되였다.. 사드사태는 다들 아는 내용이니 여기서 거론안하겠지만. 사드를 빌미로 행해진 한한령은 사드라는 계기를 이용했을 뿐이지 절대로 사드만이 불러온 결과가 아니라고 본다. 외국의 문화가 본국의 문화 발전공간을 무참히 짓밟고 본국 문화의 생존토양을 파괴했을 때는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전세계 어느 문화도 한류가 중국에 끼친 영향처럼 큰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아무리 미국이 문화 선진국이라고 해도 영국과 멕시코의 문화를 이처럼 송두리째로 바뀌지는 못했지만 이 밀월기의 한국은 중국에서 그런 것을 이뤄냈다. 이는 칭찬이 아니다…오늘날의 국면을 자초한 도화선이라고 본다. 2016년 6월까지만 해도 태양의 후예를 정점으로 한류는 중국을 점령하면서 문화 식민지를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이 과열된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사드’가 그 ‘총알받이’가 된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2016년 7월 사드배치를 발표하면서 중국 정부에 한류를 경착륙시킬 명분을 주었다. 과도한 한류의‘횡포’를 지켜보던 중국 정부는 사드 사태에 대한 1차 타격목표로 한류 문화를 지목하게 되었다. 한중경제교류에 있어 한국문화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중국의 젊은 세대에 미치는 영향은 간과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음으로 부득이 손을 보게 된 것이라고 중국국내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한한령의 실시가 6년 지나면서 중국은 자국문화가 빼앗긴 고지를 되찾으며 포스트 한류시대 중국 본국 문화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주식시장에 청소부 법칙이란 재미있는 룰이 있다. 즉 모 주식을 청소부마저 관심가지고 샀을 땐 그 주식을 과감히 매각해야 한다는 것이다…즉 과열은 과냉을 초래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세번째 10년은 한중관계가 파란만장한 애정 스토리를 전개하는 과정이다. 곧 결혼을 할 것처럼 뜨겁게 사랑하다가 상대방의 단점이 하나 둘씩 보이고 거기에다 양가 부모의 반대, 주변인들의 험담, 자기 정체성의 약화를 겪으며 과연 이런 사랑이 진정으로 행복한지를 느끼게 하는 고비를 겪게 된다. 그 전환점이 사드라는 돌발사태로 인해 발생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계기일뿐 예고된 결과라고 말하고 싶다. 한중관계는 지나칠 정도로 뜨거웠던 것이 문제라고 본다…중국이 소위 혈맹이나 전통우방국가라고 이야기하는 북한, 파키스탄, 라오스 등 국가와의 관계를 보면 한국처럼 가깝게 지낸 적이 없다. 물론 이는 한국의 문화적인 선진성에서 유래되었지만 이러한 과도 밀접한 관계는 서로 간의 기대를 지나치게 부풀리게 되고 판단을 흐트리게 되며 상대방과의 문화적인 차이, 제도적인 차이를 약화시키다가 특정 시기에 특정 계기로 그 모순이 폭발하게 된 것이다. 사드는 한국의 친중파를 피말리고 씨말리게 만들었으며 중국의 민심을 한순간에 떠나게 만들었다. 또한 한국국민도 덩달아 중국을 불신하기 시작하였으며 중국과의 사랑이 결혼대상자에서 그냥 친구로라도 지냈으면 좋겠다는 관계로 강등하게 되었다. 제4화 2022~2032 냉정의 시대 올해가 한중 두 국가의 멜로드라마가 방영 된지 30주년을 맞이하는 시기이다. 공자님은 30이립(三十而立)이라고 이야기하였는데 군자는 서른살이 되면 가정을 이루고 철이 들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30년전 경제적으로 막상막하하던 중국은 이젠 어느덧 한국 경제력의 10배가 된 G2국가가 되었고 중국과 수교하면 큰 이득이 생길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이젠 국운을 좌우지할 만큼 중요한 국가관계로 부상하게 되였다. 중국의 속담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三十年河東,三十年河西(삼십년은 하동에서 삼십년은 하서에서). 이제 한중관계는 30년간의 사랑과 원망을 겪으며 성숙된 어른이 된 것이라 본다. 또한 한중관계라는 고정적인 패턴도 이젠 30년의 역사를 겪으며 새로운 30년을 맞이하게 된다. 미래의 한중관계는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 이 글에서 필자는 단순히 한중관계 과거 30년을 돌이켜 보는 것뿐만 아니라 미래 20년간 한중관계에 대해서도 전망을 적고자 한다. 30년전 한중 수교당시 한국은 미국의 눈치를 볼 필요없이 자유롭게 중국과의 관계를 정립할 수 있었지만 어느덧 미국과 대등한 체격으로 성장한 중국이 미국의 최대 경쟁자가 되면서 한중관계에 있어 새로운 변수로 등장하게 되었다. 현재 한중관계는 항상 미중관계, 한미관계라는 변수들을 고려해가면서 대응해나가는 관계로 변모되면서 한국 정부에게 새로운 숙제를 마련하였다. 한중관계의 30년은 사실 두 연인이 맞선을 보면서부터 사랑에 빠지고 동거하고 서로 의심하고 관계가 나빠지는 식상한 멜로드라마의 스토리를 연출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파혼하게 된 것이다. 앞으로 다시 관계가 좋아질 수 있을까라는 시청자들의 궁금증이 많겠지만 필자는 이제는 과거로 돌아가기 어렵다고 본다…사드문제가 해결되고 양국 국민의 감정이 회복되었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10대부터 시작하여 20대를 겪으며 철없이 사랑에 푹 빠져 정신 못차리던 시기를 넘어서 이젠 성숙해졌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한중양국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서로 다른 가문에서 태어난 연인으로 사랑을 이루기엔 너무나 많은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어찌보면 양국의 관계라는 것은 무거운 결혼보다 서로 애뜻한 정을 주고받는 애인관계가 더 아름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핀란드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어떻게 스웨덴을 평가하냐고 물으니 핀란드 남자는 스웨덴 남자들은 대부분 게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필자가 핀란드 사람은.스웨덴 사람을 좋아하지 않은 것이냐 따지니 하는 말이 “사이좋은 이웃국가가 없잖아요”라고 대답했다. 정말 그런 것인가? 중국의 주변국가 중 중국을 좋아하는 나라는 몇이 되는가? 또한 한국의 이웃국가 중 한국을 좋아하는 나라는 얼마인가? 아마 답은 머리 속에 떠올랐을 것이다. 강대국 속에서 생존과 발존을 모색하는 상황은 21세기 20년대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국왕조의 전환기에 한반도 왕국이 항상 겪던 일이였다. 한나라와 흉노를 사이 둔 고구려, 고구려와 당나라를 사이 둔 신라, 거란과 송나라를 사이 둔 고려, 원나라와 명나라를 사이 둔 조선, 청나라와 명나라를 사이둔, 조선 고비마다 지혜롭게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전략을 모색하며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 사직을 지킨 한반도의 왕국은 이 시대의 미중 양국의 경쟁구도 속에서 슬기롭게 난관을 이겨낼 것이라고 본다. 물론 그 과정이 험난하고 고달프고 마음이 힘들어도 말이다. 그것이 이 반도의 동포들이 회피하기 힘든 숙명일 수 있겠지만 그런 고난 속에서 더 강인해지고 똑똑해지는 법이다…그러한 차원에서 한반도는 중국왕조보다 더 강한 생명력을 가졌었다. 이 10년은 중국이 미국을 초월하여 세계 최대 경제강국으로 부상하는 시기일 것이다. 물론 PPP방식으로는 10년전에 이미 미국을 초과하였지만 허영심이 강한 백인은 실질보다 명목을 더 중요시한다. 그래서 올림픽에서도 자신에게 유리할때는 금메달로 순위 매기지 않고 메달수로 순위를 매긴다. 미쏘 갈등은 백인 내부 이데올로기적인 모순에 불과하다면 미중 갈등은 문명의 시프트를 상징함으로 엄청 신경쓰고 있는 것이다..문제는 이러한 동양 문명의 시프트가 10년 안에 이뤄질 것 같은 두려움에 빠지면서 오늘날의 국제관계를 혼돈에 빠뜨리게 만든 것이다. 서양문명은 중국의 부상을 저지하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겠지만 14억 인구인 중국의 발전 모멘텀을 막기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 있어 설마 중국이 경제적으로 넘버원이 되었다고 하여 엄청난 세계정치경제지형의 변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한국은 수천년간 겪어왔던 것처럼 세계의 정상으로 복귀한 중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지만 이는 하나의 축복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전세계에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4대 강국이 에워싸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거인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총각이라고 생각하기 보다 여러 미남들에 의해 에워싸인 미인이라 정의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는가? 한국은 중국, 미국, 일본, 러시아 모두에 있어 항상 존중하고 아껴주고 자기 편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국가이다…드라마의 한장면이 떠오른다…어느 남자가 미인을 넋이 빠져 바라보다가 그 여성이 불쑥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시무룩해진 장면… 역시 미인은 싱글일 때가 더 매력적이다.. 정치적인 이야기를 조금 가미하자면 이 시기에 한국은 친미, 친중, 친일을 논하기 보다 모든 사안을 개별적으로 쪼개 국익에 부합되고 대다수 국민의 이익에 부합되고 실보다 득이 더 많은 것만 골라서 사안별로 입장을 취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이유는 “미인은 싱글일 때가 더 매력적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전세계의.미인 선발대회엔 미쓰만 참가할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시기는 또한 포스트 코로나의 시기이다. 포스트 코로나의 최대의 수혜주는 무엇인가? 두말할 것 없이 관광일 것이라 본다. 중국의 코로나 봉쇄가 해소되고 해외 관광이 자유로워지면 해외관광시장은 과거의 5배로 커질 것으로 예상하며 연간 5억명의 중국인이 해외 관광을 나설 것으로 본다. 코로나 기간 동안 힘든 민생을 무엇으로 달랠 것인가? 내부적인 지원책과 개혁만으로는 역부족일 것이다…외부적인 힘을 빌어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것이 답이 아닌가 생각한다. 꿈 같은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2023년 중국관광객 5천만명이 한국 방문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때 되면 한국의 대부분 서비스산업, 상당수 제조업이 혜택을 볼 수 있다. 코로나로 인해 식어간 모든 상권이 관광산업의 부흥으로 인해 엄청난 호황을 누릴 것이 틀림없다. 중국이 밉든 곱든, 인접국가로서 최대의 고객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중요한 것은 중국이란 시장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부의 지침대로 움직이는 대형 시장임으로 한중관계의 꽃길 같은 미래만 꿈꿀 것이 아니라 그 꿈이 현실이 되도록 모든 이가 그 밑걸음을 깔아야 한다. 그 사이 맺힌 것도 많고 얽힌 것도 많고 섭섭한 것도 많겠지만…연인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포스트 코로나를 맞이하며 한중 양국이란 연인이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는 시기이다. 농담하나 하겠다. 오래 전에 헤어진 연인이 전화 올 땐? 정답은 “다단계 영업”이라고 한다….이것이 제 4화의 줄거리이다. 제5화 2032~2042 격변의 시대 2032년의 세상은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 10년후의 세상을 예측하긴 쉽지 않겠지만 현실을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중국의 부상은 모멘텀에서 현실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으며 미국은 여러가지 내부/외부적인 요인으로 말미암아 순탄치 않은 10년을 겪으면서 과거와 같은 영광을 누리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북한에 대한 예측은 항상 어긋났음으로 변수가 아닌 그냥 무시해도 좋은 상수로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또한 한국은 일인당 소득이 4만 5천불이상의 선진국으로 도약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한중관계는 10년의 냉정기를 겪으며 새로운 시기에 들어설 것이라 보는데 학계나 정계에서는 여기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사람이 없는 것 같아 좀 안타깝다. 물론 예측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담대한 가정을 전제로 새로운 세상을 분석하며 한중관계를 다시 짚어보고자 한다. 지금 중국은 미국의 압박 속에서 어렵게 생존의 틈을 찾아가고 있는데 가장 큰 아킬레스건은 바로 반도체이다. 그러나 미국의 봉쇄가 과연 주효한지를 심각히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초기에는 중국에 대한 반도체 봉쇄를 통해 중국의 성장을 늦출 수는 있겠지만 중국이란 거대한 공룡의 돌진을 막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10년 후 중국이 만약 반도체의 독립을 이뤘을 때 그때 세계의 패권은 진정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문제는 기술의 초격차를 지향하는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미국의 영향 아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중국의 오기를 불러일으켜 10년의 시간으로 그 기술격차를 극복했을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냐는 고민을 해보았는가? 실제로 지금 중국인 이미 자국기술력으로 7나노 반도체 파운드리를 이뤄냈다. 아직 삼성과 TSMC와 상당한 격차가 있지만 중국 상하이 중심국제반도체 회사의 리더가 바로 TSMC와 삼성의 기술혁신을 이뤄낸 CTO 량멍숭이란 사실이다. 반도체는 하나의 산업기술에 불과하지만 미래 10년 심지어 50년간의 국제관계를 재정립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요소 때문에 미중간의 디커플링이 쉽지가 않고 또한 국제관계의 이합집산이 이뤄지고 있다. 과거 20년간 한국은 항상 중국의 최대 수입국이였으며 중국은 한국의 최대 흑자국이였다. 중국이 미국에서 수천억달러를 벌어오면 거기에 한국이 수백억달러를 인출했던 구도였다. 그러나 올해에 들어서서 한중 교역은 처음 적자로 돌아섰다. 이는 액시던트가 아니라 이제는 자연스러운 모멘텀이라고 본다. 그동안 한국이 중국으로 수출한 제품 중 대다수는 중간재였다. 특히 미국으로 수출하는 비중이 제일 컸다. 그러나 미중갈등으로 인해 미국의 하이테크 중국제품 수입이 줄어들면서 중국의 한국 중간재 수입도 줄게 되었고 중국 자체 생산 원자재의 발전은 한국산의 수요를 감소하게 만들었다. 이런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한국의 산업은 과거의 패턴 그대로 작동하고 있지만 중국은 이미 크게 변하고 있다. 과거 20%이상 차지하던 삼성 핸드폰의 시장점유율은 0.5%로 떨어졌고 인기가 절정에 달하던 현대기아차도 이젠 중국차와 가격을 겨뤄야 하는 현실로 되고 있다. 이마저도 참담한 현실인데 10년 후는 어떻게 될 것인가? 현시점에서도 중국은 세계 최대의 핸드폰, 배터리, 전기자동차 생산국이다. 이는 이미 양적인 우위를 벗어나 질적인 우위라 내달리고 있다. 그럼 10년 후면…믿고 싶지 않겠지만 중국기업은 중국 방방곳곳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의 악몽이 될 수도 있다. 과거 신발이나 가전처럼 말이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도 아직 초격차를 운운하고 있다. 초격차는 이 10년간은 유효하지만 다음 10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초격차가 무격차가 되면 다음은 뭐로 먹고살 것인가? 전세계 역사상 어느 국가도 이처럼 초고속으로 성장하면서 글로벌 시장을 잠식한 이웃국가를 마주한 사례가 없었다… 중국의 위협은 현실뿐만 아니라 미래까지도 커버될 날이 멀지 않다. 삼성보다 싸고 좋은 메모리, 스크린, 핸드폰, 현대보다 싸고 좋은 자동차, 로보트, 한화, SK, 롯데, LG보다 싸고 좋은 화학원료의 메이드 인 차이나가 세계를 석권할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필자는 중국의 위대함을 칭송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 무감각하고 근거 없는 자신감이 팽배한 이 시대의 풍조를 바로잡고 싶을 뿐이다. 미래 10년후의 한중관계는 지금 겪어보지 못했던 심지어 과거 수천년간 겪어 보지 못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것이라 본다. 역사 속에서 한반도는 현재의 중국처럼 나락에 떨어졌다가 다시 정상으로 복귀한 시대를 겪어보지 못했다. 미래의 10년을 대비하려면 대한미국은 어마어마한 중국전문가를 양성해야 하고 중국의 산업구조 산업발전을 제대로 분석하고 대응해야 한다. 중국과 등진 경쟁자가 아닌 중국이란 거대시장과 거대경장 속에서 자신의 포지셔닝을 제대로 하고 변화를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특공대가 되야 한다. 중국시장과 생산과의 융합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분석해야 한다. 이는 특정 기업만이 아니라 전체 국가와 국민적인 차원에서 다뤄야하는 숙제이다. 이 숙제를 잘 푸냐 못 푸냐는 미래 10년뿐만 아니라 미래 100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 현재 반중정서가 팽배해 있는 시기에 중국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날 따라 줄어들고 중국 전문가들도 갈수록 주목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중국은 어둠속의 도둑처럼 조용히 질주하고 있지만…대한민국은 태평성세의 연예가무에 빠져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걱정이 든다. 사드 때가 위기이가? 진정한 위기는 다음 10년이라고 본다. 중국이란 거대 공룡을 옆에 두고 과연 몸집이 작은 파충류가 먹이를 구할 수 있을 것이란 현실적인 걱정이 든다…그러나 이 땅에서 과연 누가 이런 심각한 고민을 해보았는가? “중국은 파멸할 것이다. 분열할 것이다”라는 허황된 꿈으로 자기 위로하면서 살아갈 것인가? 노키아와 모토롤라의 몰락을 보면 경쟁 속에서 잘못된 전략이 얼마나 큰 피해를 초래할 것인가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21세기 30년대의 한중관계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면모를 보일 것이다. 자신감이 넘치고 교만함까지 보이며 실질적인 파워까지 겸비하고 심지어 비민주적이란 프레임마저 사라진 미래의 중국을 다룰 생각을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고 그냥 어영부영 10년을 넘기다가 엄청나게 후회할 것이라 경고하고 싶다. 중국을 경계하고 두려워하기보다 옛정을 그리며 앞으로 어떻게 화합하며 살아가고 중국 부상의 피해자가 아닌 수혜자로 될 수 있는 가가 21세기의 나머지 시간의 테마가 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친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중(知中)이고 중중(重中)이다. 그런 의미에서 친미는 현상유지, 친일은 과거유지, 친중은 미래유지이다...라는 정의를 내릴수도 있다. 이로서 한중양국이 50년간 이뤄진 멜로드라마가 NEXT 시즌을 기대하며 종영이 된다. 한중수교 60주년일때는 환갑의 나이의 두 노인의 사랑 스토리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다...영화 "은교"처럼 될 것인가? "죽여주는 여자"처럼 될 것인가? 그것은 다음세대 출연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필자에 대해 당신이 뭔디 이렇게 거창하고 허황된 이야기를 꾸미는가 질타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나중에 지켜보면 이 드라마가 제가 예상한 각본대로 연출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럼 여기까지…글을 마치고 2032년에 다시 2탄을 올리겠다. 그때까지 이 글의 독자와 한중관계 모두 건강하시기 기원한다. 2022년 8월 24일 서울에서 (By Star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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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의 '정치적 유산'
● 양백강, 로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가 2022년 7월 8일 거리 연설에서 67세의 나이로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아베 신조 피살 사건은 일본 정계는 물론 국제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아베는 전 일본 총리로서 자신의 기록적인 초장기집권과 일본 내 보수세력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전후 일본 정치사, 국가전략 진화의 한 축을 차지하는 등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파장을 남겼다. 아베 자신은 역사가 됐지만 일본의 미래 국가 발전 방향에 대한 조명은 아베의 '정치적 유산'이라는 시각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정치인 가문의 출신인 아베는 1993년 7월 중의원 의원으로 처음 당선돼 당시 최연소 국회의원이 됐고, 2006년 9월 총리가 돼 첫 전후 출생 총리가 됐지만 1년도 안 돼 물러났다.이후 5년간의 칩거 끝에 2012년 9월 자민당 총재에 당선되고 12월 총리에 취임하면서 7년 8개월여의 '아베 시대'가 열렸고, 아베는 헌정 사상 최장수 총리가 됐다. 2020년 8월 퇴임 후 짧은 휴양을 거쳐 정계에 복귀한 아베는 정계 보수세력을 결집했다. 2021년 11월 아베가 자민당 최대 파벌인 호소다파 회장에 취임하면서 아베계로 기치를 바꾸는 등 정치권에서 강세를 보였다. 장기간의 임기를 제외하면 아베의 정치적 위상은 당시의 국제환경과 국내 정치상황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2007년 아베 총리 사임부터 2012년 재집권까지 5년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미·서방 국제체제에 크게 의존하던 일본은 충격을 받았다. 자민당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아소 타로(麻生太郞) 정권, 후속 민주당 3선 내각이 모두 난국에 빠졌다. 상대적으로 미국과 유럽의 패권이 쇠퇴하고,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들이 집단적으로 부상하면서 2010년 중국 경제는 처음으로 일본을 추월하며 격차를 벌렸다. 국제 권력구조, 글로벌 거버넌스 시스템의 심각한 변화, 각 분야의 질서, 규칙, 발언권 다툼이 날로 치열해지고 일본의 대외위기의식, 국제게임의식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어 '강인정치'에 대한 요구가 더욱 절실해졌다. 당시 요미우리신문 사설은 잦은 총리 교체로 일본 지도자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외국 지도자의 모습은 "일본에 수치"라고 했다. 이런 '비정'적이고 대외적인 주장을 더욱 강하게 하는 전략적 마인드와 여론의 분위기는 아베가 재집권해 장기집권을 이어갈 수 있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됐다. 총리 재임 후 아베는 계파적 자원과 정치적 수완을 앞세워 당내 최고 권력을 장악했고, 자민당의 6연속 총선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우경화 보수적 정치관과 국제정세 및 일본 국민의 마음가짐 변화를 긴밀히 결합시켜 전략적 행동을 통해 일본을 '강대하게' 만들겠다는 자신의 정책 철학을 제시했다. 실제로 아베는 초대 총리 시절부터 방위청 승격, 교육기본법·국민투표법 개정, 해양기본법 제정 등을 추진해왔다. 2012년 이후 긴 임기 동안 아베는 정치·안보 분야에서 일본의 '자립'과 '자주'를 체계적으로 강화해 더 큰 '전략적 공간'을 넓히려 했다. 아베가 역사교과서 추가 수정, 무라야마 담화 부인 등 기존 역사 발언, 전후 외교 총결산 추진 등을 통해 일본 정치의 우경화를 가속화하고 아시아 이웃 국가들에서 우려를 낳고 있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아베 시대'는 냉전 이후 일본의 국가전략 전환 발전의 중요한 단계로, 일본이 금융위기 이후 세계구도, 국제질서 변화에 적응하는 데 중요한 시기였다. 이 시기 '아베 노선'은 안보 분야의 '돌파'를 접점으로 국가전략의 전환을 추진하고, 다각화된 외교수단을 활용해 '종합전략의 활성화'를 높이겠다는 것이 기본 발상이었다. 국제사회, 특히 아시아 국가들이 이런 돌파구에 대한 우려와 의구심은 자명하다. 개헌 추진, 자위대 입헌 지원 외에 아베 주도로 2013년 첫 국가안전보장전략, 일본판 국가안보회의(NSC) 설립, 방위계획대강 조기 개정, 2014년 내각 정령으로 집단적 자위권 부분해제, 새로운 방위장비 이전 3원칙 마련, 2015년 평화안보법안과 국제평화지원법안, 이른바 신안보법 제정, 적에 대한 공격능력 보유 및 대형화·공격무기장비 플랫폼 도입 검토, 대외방위협력, 외교정책 안전화 등을 추진했다. 안보 분야에서도 아베가 추진한 '개혁'은 전략체제, 법치의 틀, 집행체제, 역량건설의 모든 측면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어 전후 일본 보수세력의 전후체제 돌파와 '안전 자주' 실현이라는 기본적 발상을 답습할 뿐 아니라 일본 안보전략의 외향성과 공격성을 더욱 가속화했다. 이는 평화헌법의 굴레를 뚫고 일본의 '국방정상화'와 '군사대국화'를 가속화하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일본의 안보정책과 방위정책, 방위력 건설 목표의 대전환을 예고하고 있어 아태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위협이 되고 있다. 외교 분야에서 아베는 '전략적 외교'를 적극 추진했으며, 재임 기간 동안 총 비행 거리는 158만km로 80개 국가와 지역을 방문했으며 이는 지구를 39바퀴 도는 것과 같다. 아베 총리는 또 '지구 외교' '적극적인 평화주의'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 등의 개념을 내세워 '도덕적' 색채를 부각시키려 했다. 하지만 사실 아베 외교는 고도의 현실주의, 실력주의, 지정학적 경쟁 사고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강대국의 게임이 그의 핵심 관심사다. 아베의 입장은 미·중 간 총체적 균형을 유지하며 '좌우를 만나다'는 전략 아래 미·일 동맹의 '체제 내 발전'을 견지하고, 대외정책의 융합을 추진하고 경제·안보·문화적 수단을 통합 운용해 '중등 세력' 특히 유럽·인도·태국과의 전방위적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일본 국내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아베는 그동안 위축되었던 일본 외교를 크게 뒤집고 국제 담론력을 강화했지만 많은 논란과 문제점도 남겼다. 아베는 역대 총리 중 최장수 집권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정치인의 업적은 시차를 두고 평가되지 않는다. 내부적으로는 우익세력의 요구에 부응하고 외부적으로는 미국을 숭배하고 추종했지만, 저출산·고령화, 디지털 시대의 발전, 주요 외교 문제는 제때에 해결되지 않았다. 실제로 아베 총리가 2020년 8월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그의 '정치적 유산'에 대한 논쟁은 계속됐다. 아베의 '정치 유산'은 개인적 색채가 뚜렷하지만 전후 일본 보수 정치세력의 국제질서, 일본 국가 발전에 대한 해석을 대변한다.이런 해석은 1980년대 중후반부터 '정상국가론' '정치군사대국 몽'이라는 형태로 일본의 국가전략 방향에 영향을 미쳤다 아베는 그동안 자신을 '열린 보수주의자'라고 칭하며 자신의 보수적 정치이념을 확산시키고 개인 정치권을 공고히 하는 데 열심했다. 장기 집권을 거치면서 아베 주변에는 보수 정치인이 대거 포진했고, 그 중 적지 않은 수가 자민당과 정부 고위직을 차지하며 '아베 독트린'의 추종자이자 집행자로 자리매김했다. 현 일본 정계의 보수세력의 '정신적 지도자'인 아베의 죽음은 추종자들의 추종을 중단시키기는커녕 이들의 더 집요한 행동을 자극해 아베의 '미완의 의지'를 완성하겠다는 자세로 공감과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 아베의 후계자인 스가 요시히데와 기시다 후미오는 인맥·공직 경력에서 아베와 그의 측근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두 사람 모두 '아베 색채'에서 벗어나 자신의 특색을 살리는 경향이 있지만, 스가 시대 정책이나 지금까지의 기시다 정권의 정책을 보면 전체적으로 '아베 노선'을 답습하고 있다. 기시다가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자주방위정책과 '신시대 현실주의 외교'도 아베의 정책과 유사하다. 기시다가 자신의 특성을 과시하기 위해 제안한 '일본식 신자본주의' 경제·사회 정책도 정책 여백이 부족해 '아베노믹스'로 회귀할 위험이 있다. 동시에 아베의 '정치적 유산'이 일본의 정치적 현실을 완전히 뒤흔들 수는 없다는 점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외교안보정책 분야에서 일본의 '전략적 주관성'과 '역동성'을 모색하겠다는 아베의 제안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길잡이 역할을 계속할 것이다. 대만 문제에 대해 아베 총리의 '대만 공동방위'에 대한 미일군사 개입 등 허위 주장은 일본의 현실적인 정책이 되기는 더욱 어렵다. 한반도와 러시아에 대한 외교 측면에서도 현 정부는 아베 총리의 기존 사고방식을 현 상황에 맞게 바꾸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현재의 러시아-우크라이나 분쟁을 배경으로 일본이 국제위기를 이용하여 국내의 전략적 변혁을 촉진하고 해외의 전략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관행은 아베 시대의 그림자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질서의 변화와 국가의 전략적 변혁에 직면하여 일본의 구체적인 대응책은 변함이 없을 것이며 아베의 '정치적 유산' 중 비합리적이고 비건설적이며 지속 불가능한 내용은 결국 폐기되고 잊혀질 것이다. 작자 양백강(楊伯江)과 로오(盧昊)는 각각 중국사회과학원 일본연구소 소장, 부연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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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는 공산주의에 대해 까막눈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2015~2016년 사이에 있었던 일로 기억된다. TVN방송국에서 세상의 지식을 삶의 지혜로! 프리미엄 특강쇼 <어쩌다 어른>을 시리즈로 방송하고 있었다. 여러 분야의 지식인, 사회에 영향력이 있는 연예인들, 기업 오너들 및 인기 정치인들 등등이 강연자로 출연하였다. 어려운 지식을 ‘연예’로 전환시켜 꽤 인기 높은 프로그램이었고 일부 성공담 강연도 있어 재미있었다. 필자도 거의 빼먹지 않고 매회 시청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최진기라는 강사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강연하는 것을 보고 나서 ‘한심한 엉터리 강연이네.’라고 결론짓고 그 후부터 이 프로를 보지 않았다. 최씨는 스스로 자신을 ‘대한민국 최고의 인문학 강사’라고 자화자찬한다. 대한민국 최고의 인문학 강사가 공산주의에 대해 어떻게 강의했는지? 그날로 채널을 돌려보자.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이론에 ‘사람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노동 분배 원칙이 있는데 이 원칙이 공산주의에 있어서 핵심적인 이념이라고 말해도 전혀 지나치지 않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최씨가 이 찰떡 같은 중요한 이념을 개떡 같이 설명하여 필자를 경악케 했다. 최씨 왈, “마르크스는 아마 일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아버지가 번 돈을 자녀가 학비로 가져가는 패턴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이론을 내놓았을 것이다.”면서 인기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스크린에 띄워 놓고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서 굉장히 비아냥거리는 표정을 짓는다. 마르크스의 이론이 형편없이 한심하다는 표정이다. 필자는 도올 김용옥 교수의 강의부터 모든 TV 강연을 거의 빼먹지 않고 시청해왔는데 그 수많은 강연 중에 최씨의 공산주의이론 강연이 가장 수준이하이고 가장 천박하고 가장 저질스런 강연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사회학을 전공한 사회탐구 강사 최씨는 2016년 OtvN ‘어쩌다 어른'에서 조선시대 화가 장승업의 그림이라며 엉뚱한 현대 미술 작품을 소개한 뒤 하차했다. 설민석을 비롯해 한국 스타 강사들이 얄팍한 지식으로 자신의 전공분야도 아닌 여러 분야 즉 문어발식 강연으로 인기를 끌다가 한 순간 진실을 왜곡해 망신을 사고 있다. 최씨도 그 중 한 사람이다. 마르크스가 말한 능력이란 한국에서 금수저로 태어나 서울대, 고대, 연대 일류대학에 붙고 대기업에 취직하여 승진하고 고액의 연봉을 받는 능력이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알고 있는 능력은 목표로서의 능력주의이지 노동에 있어서 수단으로서의 능력이 아니다. 한국사회는 흔히 이 목표로서의 능력주의와 수단으로서의 능력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최씨와 같이 엉뚱한 천박한 설명이 나오는 것이다. 목표로서의 능력주의는 그 사회에서 최고의 정점을 향해 달려가는 능력이고 이러한 능력을 지닌 인간들은 그렇지 못한 인간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짙다. 이에 비해 수단으로서의 능력은 각자의 능력의 차이를 인정하고 평등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조금 어려운 말인 것 같은데 사례를 들어 설명하자면 같은 회사, 같은 직장에서 A라는 사람은 연간 100만 달러 이익을 창출하는데 비해 B라는 사람은 10만 달러의 이익밖에 창출하지 못한다. 그러나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하는 A라는 사람이 결코 더 적게 창출하는 B를 무시하거나 갑질 하지 않는다. 같은 회사, 같은 직장뿐만 아니라 전반 사회 모든 분야가 똑 같이 능력의 차이를 인정하고 부당한 대우와 부당한 차별로 사람을 대하지 않는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100만 달러의 이익을 창출하는 사람이 10만 달러의 이익을 창출하는 사람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 하여 고의로 능력을 숨기고 10만 달러의 이익을 창출하는 사람만큼 일을 하는 꾀를 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사람마다 각자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면 사회의 부가 고도로 축적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고도의 물질이 발달되면 사람들의 의식수준도 따라서 고도로 발달하게 되어 불필요한 욕심을 버리고 필요할 만큼 분배하는데 사회적 합의가 되어 사회는 평등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마르크스가 말한 능력은 고도의 의식수준을 갖춰야 하고 수요에 의한 분배도 고도의 의식수준이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 가능하다는 것이다. 고도로 발달된 의식을 붉다는 빨강(紅)으로 표현한다. 사회주의중국에서 한 때 사리사욕을 버리고 사회에 헌신하는 사람을 지칭하여 ‘저 사람 빨갛다.’고 말했다. 또 사욕을 버린 사람을 보고 ‘저 사람 철저하게 논다.’고 표현했는데 다시 말하자면 철저하게 노는 사람이 곧 빨갱이라는 것이다. 나의 부친은 공산당 사업에 충성하느라 소가 굶어죽었다고 한다. 어느 해 몸이 편찮아 부친이 참외 밭을 보는 일을 했는데 회의에 참석하느라 휴학하여 집에서 놀고 있는 둘째 아들을 시켰는데 글쎄 아들이 참외를 먹었다고 연말 결산하는 ‘왕래’에 참외 값을 기재해 놓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내가 자랄 시기에 귀가 따갑도록 동네 어른들한테서 들었다. 나의 부친이야말로 진정한 ‘빨갱이’이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한국사회에서는 무릇 공산주의자나 공산주의를 동경하는 모든 사람을 통칭하여 ‘빨갱이’라는 렛델을 마구 붙인다. 이렇듯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는 고도로 발달된 물질문화 토대에서 고도로 발달된 의식수준이 형성된 사회에서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당시 자본주의경제가 가장 발달한 영국에 가서 연구하고 발표했던 것이다. 그런데 공산주의 초급단계인 사회주의가 지구상에서 가장 자본주의 토대가 빈약했던 러시아에서 최초로 실현하게 되었고 중국을 비롯한 여러 사회주의국가들은 자본주의단계를 거치지 못하여 물질적인 토대가 매우 빈약한 상태에서 직접 사회주의체제에 들어갔기 때문에 제도로서의 사회주의 폐단이 컸던 것이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제도로서의 공산주의는 실패하였으나 공산주의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최근 몇 년래 구미(歐美)사회에서는 동유럽 사회주의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과거 실패한 동유럽 사회주의의 체제에서 거울로 삼을 것들을 찾아내 자본주의 부정적인 폐단들을 극복하는데 기여하여 더 나은 삶을 보장하는 사회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극단 보수주의자들의 반발에 부딪히고 있다. 좀비 사회주의라는 말이 있는데 마치 유령처럼 구미사회를 강타하고 있다. 사회주의적인 모든 것들은 스탈린주의의 최악의 범죄와 동일시하기를 고집하고 철의 장막 뒤의 삶이 모두가 화장지를 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결국 굶어죽는 하나의 거대한 굴라크(소련의 강제 수용소)를 떠올린다. 따라서 사회주의가 언제나 필연적으로 기근, 숙청, 굴라크로 이어진다는 생각에 집착한다. 한국사회도 위와 같은 좀비 사회주의 생각이 뿌리 깊다. 이북과의 체제다툼에서 승리했다는 도취에 듬뿍 젖어 있을 뿐 그들한테도 우리보다 나은 것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북에서는 외래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우리 고유 말들을 잘 지켜왔다든지, 이북사람은 자본주의 때가 묻지 않아 순수한 면이 짙다고 말하면 곧바로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한다. “북한이 좋다면 거기 가서 살 것이지.” 한 국가 한 사회 집단의 장단점을 말하는 것과 실제 그 나라에 가서 거주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건만 덮어놓고 못마땅해 하기 때문에 이렇게 극단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사회주의가 모든 면에서 다 나빴던 것일까? 동유럽 국가사회주의국가 붕괴를 연구한 미국인 크리스틴 R. 고드시는 “여성은 자본주의사회보다 사회주의사회에서 더 나은 섹스를 한다.”는 글을 발표해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저자는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에서 절대 평등하지 않고 또 평등할 수가 없다. 양성 평등은 사회주의사회에서만 실천 가능한 문제’라고 주장한다. 인류사회가 원시공동체사회 말기 사유재산의 출현에 의해 지금까지 불평등이 생겨났고 유지되어 왔기 때문에 평등사회 구축이 인류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목표이다. 자유, 평등, 박애는 기독교가 추구하는 이념이다. 서구 여러 나라 국기가 삼색인 것이 곧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그러나 소위 선진국이라 불리는 서유럽국가들은 자유와 박애의 실천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평등문제는 여전히 해결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빈부격차, 인종차별, 종교 갈등, 젠더 갈등이 아직도 심각한 수준이며 그 가운데서 특히 남녀차별은 해결이 가장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다. 왜 이럴까? 자본주의사회 구조상 양성평등은 절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다시 돌아가서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공산주의이념에 대해 말해보자. 이 공산주의 핵심적인 이념이 추구하는 사회는 어떠한 사회일까? 곧 평등사회이다. 노동의 평등과 분배의 평등이 전반 사회 모든 분야에서 평등이 이뤄지는 기본이다. 이것은 인류가 영원히 추구하고 실천해 나아가야 이념이자 목표이다. 공산주의 이념은 이렇듯 훌륭한 것이다. 물질토대가 매우 빈약한 조건하에서 제도로서의 실천은 실패하였으나 그 이념은 영원히 아름다운 것이다. 만약 최씨의 강연처럼 공산주의가 그토록 천박하다면 어떻게 지구상에서 반이 되는 인구가 공산주의를 추종하였겠는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대한민국 최고의 인문학 강사가 공산주의 이념의 진실을 천박하게 왜곡하고 있는 마당에 일반 국민들은 공산주의에 대해 알 리가 만무할 것이 아닌가? 이런 맥락에서 ‘한국사회는 공산주의에 대해 까막눈’이라고 말해도 어폐가 아닐 것이라 보는 것이 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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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의 전략 목표는 러시아 경제를 파괴하는 것
● 포고시안(아르메니아 정치경제전략연구센터장) 최근 러-우 충돌로 국제 언론과 정치인, 전문가들의 관심이 높다. 러-우 전쟁을 정확히 평가하려면 충돌의 근원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1991년 냉전 종식 이후 세계가 '미국의 절대 패권' 시대로 접어들면서 많은 전문가들은 '단극시대'라고 불렀다. 미국은 국제관계의 규칙을 자기식대로 제정하고, 다른 나라들이 이를 지키도록 할 충분한 자원과 권한을 갖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규칙 위에 군림하고 다른 나라들에 국제법과 규칙을 지키라고 요구하면서 자신들은 이를 어기고 있다. 1999년 미국의 세르비아 폭격과 2003년 이라크 침공과 점령 등이 대표적이다. EU와 NATO 확대를 통해 동유럽에서 미국의 전략은 그대로 추진됐다. 2007년에는 이 지역의 거의 모든 구 사회주의 국가와 구소련 발트해 연안공화국이 EU와 NATO의 일부가 됐다. 그러나 1990년대의 혼란 이후 러시아의 경제와 인구는 타격을 입었다. 동시에, 자유민주주의가 다른 형태의 정부보다 우월하다는 서구의 주장은 전 세계적으로 실패했다. 그러나 실제로 단극 세계의 종말을 알린 것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였다. 일반적으로 세계질서의 변화는 수십 년이 걸리므로 새로운 질서의 최종 윤곽은 2030년대 중반까지 명확하지 않을 수 있다. 미국의 외교정책으로 촉발된 세계 불안 속에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서방의 대결 구도로 떠올랐다.중요한 전략적 위치와 넓은 육지 면적, 막대한 경제잠재력을 갖춘 우크라이나를 호시탐탐 러시아에 맞서는 전진기지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크라이나 문제의 근원이다. 2014년 친서방 세력이 야누코비치 당시 대통령을 무너뜨리고 새 지도부가 들어서자 돈바스 지역, 특히 도네츠크와 루간스크는 반정부 시위를 시작했고 크림은 러시아에 국민투표로 합류했다. 사태의 전개는 러우 대전을 격화시켰고, 서방은 우크라이나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긴장 완화를 위해 러시아·우크라이나·독일·프랑스는 민스크 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에 따라 우크라이나는 도네츠크와 루한스크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한다. 그러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폴로셴코 전 대통령과 제렌스키 현 대통령도 민스크 협약를 이행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과 영국은 이 협약의 이행을 둘러싼 협상이 진행되는 시점에 우크라이나 군 재편과 군비 수송, 교관 파견을 지지했다. 그들은 또한 우크라이나가 NATO 회원국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러시아는 미국의 영향, 특히 NATO 가입 이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국익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2021년 12월 중순 미국과 나토에 나토를 향해 동쪽으로 확장하지 않고 러시아 국경에 무기체계를 배치하지 않도록 하는 합의 초안을 보냈다. 미국과 NATO가 일축하자 러시아는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에 대한 '특별 군사작전'을 개시했다. 러-우 전쟁은 중대한 지정학적 영향을 미쳤다. 2000년대 중반부터 유럽 국가들, 특히 프랑스는 유럽 연합의 미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유럽 전략 자치' 이념을 전파하고 있는데, 이는 러시아와의 안보 협력을 심화시켜야만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24일 이후 유럽은 미국의 러시아 제재를 지지했다.미국, 유럽연합, 영국과 그 동맹국들은 러시아에 대해 전례 없는 경제적 압력을 가했다. 그들의 성명은 서방의 전략적 목표가 러시아 경제를 파괴하고 양측의 대결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임을 더욱 시사한다. 경제발전 없이는 어느 나라도 살 수 없다. 서방이 러시아 경제를 무너뜨리는 것은 이 나라를 무너뜨리는 것과 같다. 이들의 최종 목표는 러시아에 친서방 정부를 세워 EU와 NATO의 추가 확장을 위한 길을 터주는 것이다. 사실 서방의 대(對)러시아 경제전을 보면 미국 주도의 서방이 어떻게 상대국가를 무너뜨렸는지 알 수 있다. ※본문은 동포투데이 주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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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대한 부정적 감정 한중 관계 해쳐선 안돼”
● 왕쥔성(王俊生) 최근 들어 국내 대중(對中) 부정 감정이 높아졌다. 한·중 수교 30주년이라는 긍정적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다.이런 정서가 한·중 관계의 건전하고 안정적인 발전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양국은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중국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문화 분야에서 크게 나타난다. 김치, 한방, 한복, 단오절을 놓고 양국 국민들 사이에 분쟁이 있다. 한국과 중국은 일의대수(一衣带水) 인접 국가이기 때문에 양국 모두 유교 문명에 속하며 유사하거나 동일한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축적을 많이 가지고 있다. 전통문화 공유는 양국 관계 발전의 큰 자산이며 수교 이래 양국 관계가 급속히 발전한 동력 중 하나다. 과거에 양국은 이러한 공유 문화 분야에서 모호한 전략을 채택했는데, 이는 양국 간의 전반적인 좋은 정치 및 안보 관계와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양국이 공유하고 특정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의 일부 세력은 중국의 급속한 발전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한국의 일부 세력, 특히 보수 세력이 중국과 달리 이른바 체제와 가치관 분쟁을 조장하려고 한다. 이런 방식이나 성향은 양국 관계의 대세에도 맞지 않고, 양국의 절실한 이익에도 어긋난다.1992년 수교 이후 한·중 관계는 '21세기를 향한 한·중 협력 동반자 관계'에서 '포괄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급부상했다.시 주석은 2014년 7월 방한 당시 한국과 '한·중 공동성명'을 채택해 한·중이 동반성장을 위한 동반자, 지역 평화를 위한 동반자, 아시아 진흥을 위한 동반자, 세계 번영의 동반자가 돼야 한다고 명시했다. 양국은 최근 몇 년간 쿠웨이트 알주르 정유공장, 중국-미얀마 가스관을 둘러싼 제3의 시장 협력 등 지역과 국제문제에서 협력하고 있다. 왕이 외교부장은 2020년 11월 방한 당시 한국 측과 '한·중 외교 안보 '2+2' 대화 본격 개시를 포함해 '10가지 공감대'를 형성했다.2022년은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는 해이다. 양국은 지난 30년간의 양국 관계 성공 경험을 총정리하고 향후 30년간의 로드맵을 수립하기 위해 2021년 8월 한·중 관계 미래발전위원회를 공식 출범시켰다. 한·중 관계는 양자 협력에서 지역·국제 협력으로, 경제·사회·문화 협력에서 안보 협력으로,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더욱 풍부하게 다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중 관계가 급물살을 탄 것은 우선 양국의 이익 때문이다.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 와중에도 의도적으로 중국 경제 의존도를 낮추려는 한국 내 세력의 기세에도 한중 무역이 역성장하는 것은 양국 경제무역 관계가 탄탄한 기반과 비전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반도 문제에서 양국은 한반도 평화와 안정, 대화 해결, 비핵화를 주장하는 등 이익과 입장에 접근하고 있다.이 밖에도 양국은 유엔의 개혁, 개방과 진정한 지역 다자주의 유지, 글로벌 기후변화 대응 등에서도 공통의 이익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양국 고위층은 시종일관 양자관계를 중시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전 7년간 양국 최고 지도자와 총리가 상대국을 방문한 것은 무려 11차례였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양국 정상이 3차례 통화했고, 양국 외교장관은 여러 차례 만났다. 중국은 지난해 10월 국내 에너지 상황을 고려해 요소수를 포함한 전용 원료 수출을 통제했다.한국이 수입하는 요소수 97.6%가 중국에서 나오는 바람에 차량용 요소수 위기가 발생 했다. 이를 파악한 중국 측은 한국의 긴급한 요구를 적시에 해결하기 위해 관련 국내 관리 규정을 신속하게 조정했다. 국가 대 국가 관계에서 다른 나라의 긴급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관련 국내 조치를 신속하게 조정하는 것은 드문 일이며 중국이 한중 관계를 매우 중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 사회의 일부 대중(對中) 부정적인 감정들은 사실과 크게 다르다. 최근 몇 년간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중국에 대한 '악마화'와도 관련이 있고, 국내 일부 정치인들이 투기적으로 표를 얻으려 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또한 복잡한 역사적 기억과 전염병의 영향으로 인한 접촉 감소와도 관련이 있다. 어쨌거나 이런 대중(對中) 부정감정이 한·중 관계 발전까지 납치하는 것을 방치해선 안 된다. 강원도는 2019년 관광객들이 중국의 문화와 전통을 체험할 수 있는 종합문화관광상품화를 목표로 민간기업과 함께 '중국종합문화도시 프로젝트'를 출범한다고 밝혔다. 일단 사업이 완성되면 문화효과와 경제효과를 모두 얻을 수 있다는 게 중론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터져나온 보이콧의 소리에 결국 이 프로젝트는 흐지부지됐다. 양국 관계가 원만히 진전되기 위해서는 특히 한국의 대중(對中) 부정적 정서에 대해 정치인들이 중요한 책임을 지고, 필요하면 선도·조성에 나서야 한다. 대선이 임박한 9일 양당의 주요 후보들이 표를 얻기 위해 '반(反)중국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은 한·중 관계 발전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양국 관계의 장기적 대승적 차원에서 한국 양당 인사들은 대선 기간 동안이라도 중국과 관련된 입장발표는 신중하고 객관적이여야 한다. 정보화 시대에 양국의 언론도 교류와 협력을 강화하고, 양국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릴 책임이 있다. 또한 양국은 불화를 없애고 한중관계를 더욱 증진시킬 수 있도록 정기적인 교류 플랫폼을 구축하여 상호이해를 증진하고 유대감을 높혀야 한다. (저자는 중국사회과학원 아시아태평양 및 글로벌전략연구원 연구원, 중국주변전략연구실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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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가장 무자비한 적은 옛 부하들이다
● 쉬리판( 중국 칼럼니스트) 미국 대법원은 19일(현지 시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국가기록원(NSC)의 하원 특별위원회 문서 이관을 저지하려다 낸 소송을 기각하기로 결정했다. 민주당이 주도한 의회 소란 사건 수사에 따른 중대한 진전이자 트럼프의 '중대 실패'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든 정부의 여론 지지율이 계속 떨어지면서 트럼프의 2024년 대선 재출마설이 떠돌고 있다. 최근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딕 모리스 전 선임고문은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과 트럼프 전 대통령이 2024년 미국 대선에서 재대결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미국 정치권은 모리스만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옛 부하 30여명도 트럼프의 부활을 우려해 이번 주 콘퍼런스콜을 열고 전 보스를 저지할 방안을 논의 했다고 비즈니스 인사이더닷컴이 CNN을 인용해 보도했다. CNN에 따르면 이날 '저지' 콘퍼런스콜에 참석한 트럼프 행정부 전 관리는 존 켈리 전 국토안보장관, 스칼라 무치 전 백악관 통신담당관, 멜라니아 전 백악관 공보비서, 그리샴 대변인, 그리핀 전 공보담당관 등 30여 명이다. CNN의 잭 태퍼 앵커는 이번 콘퍼런스콜을 발의·진행한 사람이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 관리이자 국토안보부 비서실장을 지낸 마일스 테일러라고 전했다.테일러의 위상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미국 정가에서 그의 평판은 낮지 않다. 2018년 뉴욕타임스가 '나는 트럼프 행정부 내 저항운동의 일부'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을 때도 트럼프는 주변의 '내부고발자'를 잡아내겠다고 맹세한 바 있다. 테일러가 이 글의 저자라고 한다. 그리샴 전 백악관 공보비서관은 이런 '옛 부하'들로 구성된 반(反)트럼프 조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외부에 알렸다. 그는 6일 CNN에 "트럼프를 저지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뭔가를 할"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 회의를 가졌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들 옛 부하들이 트럼프를 저지하기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테일러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콘퍼런스콜 참가자들이 트럼프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왔다"며 "트럼프의 재정 지지자가 누구인지 파악한 뒤 2022년 중간선거와 2024년 총선에서 트럼프 후보를 이길 방법을 파악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라고 말했다. 테일러의 말대로 이 조직은 적어도 2024년까지는 트럼프와 맞설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이 조직의 이름이 무엇인지, 회원이 몇 명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미 드러난 콘퍼런스콜 명단을 보면 참석자 다수가 트럼프와 원한이 있다. 존 켈리는 전 백악관 국토안보 막료장으로 원래 트럼프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그가 군에서 국토안보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바로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한 것이다.백악관 막료장 자리에서 존 켈리는 트럼프가 배넌을 해고하는 데 일조했다.스칼라무치 전 백악관 통신담당관도 존 켈리의 손을 거쳐 경질됐다.이들은 이제 반(反)트럼프 진영에 서 있다. 2018년 유명 기자 밥 우드워드의 책 '두려움: 백악관의 트럼프'는 존 켈리가 트럼프를 '백치'라고 비난했다고 폭로한 바 있다. 2019년 존 켈리가 퇴임 후에도 트럼프를 "역사는 물론 미국의 기본적인 상황까지 전혀 알지 못한다"고 여러 차례 비난했다. 트럼프는 자신이 한 일 중 일부는 불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스칼라 무치 전 백악관 통신담당관은 백악관 홍보국장으로 부임한 지 2주가 채 되지 않아 해고된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일부 사람들은 '사적인 원한' 때문에 트럼프를 반대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그리핀 전 공보담당관은 공화당이 국회의사당 폭동에 대한 책임을지지 않으려는 데 대해 "당이 도덕이 훼손되었다"라고 비판한 바 있다. 트럼프의 옛 부하였던 이들은 트럼프 시절의 백악관 권력 운용 상황, 정치·비즈니스 관련 정도를 알고 있으며, 트럼프의 정신 상태도 잘 알고 있다.앞으로 이들은 '공포: 백악관의 트럼프' 같은 책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폭로할지도 모른다 다만 이들의 '폭탄'이 반드시 트럼프를 다치게 할 필요는 없다. 1월 15일 트럼프는 애리조나주 피닉스 시골마을 트럼프읍피렌체에서 2022년 첫 유세 집회를 열었다.그는 연설에서 "올해 우리는 하원을 탈환하고 상원을 탈환하며 미국을 탈환할 것"이라며 "우리 나라는 그 어느 때보다 크고, 좋고, 강해질 것이다. 전에 없던 방식으로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집회 현장에서도 트럼프 지지자들은 '트럼프 2024'라는 문구가 새겨진 깃발을 열광적으로 흔들었다. 이 낯익은 장면에서 우리는 미국 극우 정치세력과 현실 상황, 바이든 정부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여전히 트럼프에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는 것이다. 트럼프 옛 부하였던 사람들이 나서서 옛 보스를 저지하겠다고 공언하고 뉴욕 법무장관의 부동산회사 사기 수사 등 관련 조치가 이어지고 있고, 대법원조차 트럼프 편에 서지 않고 있지만, 미국 정치환경이 '당신이 죽고 내가 산다'는 방향으로 계속 분열되는 흐름 속에서 트럼프의 정치적 에너지가 바닥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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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전주국제영화제 정준호-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 투톱체제 성공을 바라며
- 독립영화의 요람 전주국제영화제가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로 전환해 정체성 확립과 대중성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지 관심을 받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는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민성욱 부집행위원장과 정준호 영화배우를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의결했고, 지난 26일 조직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은 시장실에서 위촉장을 전달했다. 마력은 동력의 단위로 높을수록 좋다. 이번 쌍두마차 체제가 앞으로 3년 동안 시너지 효과를 일궈낼 것으로 기대된다. 백제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 교수인 민성욱 신임 공동집행위원장은 전주국제영화제 출범부터 조직위의 사무국장 및 부집행위원장을 역임한 '지킴이'이고, 정준호 신임 집행위원장은 높은 인지도를 가진 대중성을 확보한 영화배우이기 때문. 어떤 조직이나 더 큰 발전과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시점이 있다. 세계 초일류 전자제품 회사로 대한민국을 빛내는 삼성이 만일 제일제당 시절처럼 사카린을 밀수해 설탕을 팔던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면 지금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202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비경쟁 위주로 실시됐고 올해 2022년 23회 영화제는 국제경쟁, 한국경쟁, 한국단편경쟁, 특별부문(한국 장편 다큐멘터리, 지역공모작품, 비경쟁 아시아 영화)로 진행되며 업그레이드 됐다. 2023년 24회부터 3년간 시행될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기존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보다 더 대중성을 일으켜 더욱 큰 소통을 통해 영화계 발전과 주최지인 전주 지역발전에 더 크게 기여하는 영광이 실현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쌍두마차 체제가 된 전주국제영화제는 전주시민의 선택을 받은 우범기 시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이끄는 마차다. 우 조직위원장이 전주시 발전을 위한 고뇌 끝에 내놓은 묘수라고 풀이된다. 시장은 시민의 행복과 시의 발전을 도모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에 대해 기대가 큰 반면에 걱정과 반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수립되자, 권해효 배우, 방은진·한승룡 감독이 이사직을 사퇴했다. 이사회에서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의결되었다고 사퇴하는 것이 영화제에 대한 진정성일 수도 있지만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지점이다. 고 자니윤(고 윤종승) 코미디언은 2013년 2월28일 해외동포들과 판문점을 방문한 후 가진 뒷풀이에서 "한국 사람들은 너무 똑똑해요.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이XX 안돼, 저XX 안돼 하는거에요. 일을 해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한국계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고 그의 인프라를 총동원해 조국 대한민국 관광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었으나 좌절된데 대한 의견으로 들렸다. 대한민국은 625전쟁 후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나라다. 지난 80년간 대한민국이 변화가 없었다면 우리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억압속에서 지옥살이를 하고 있었을 게 자명하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는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임기는 3년이다. 3년간 응원하고 3년 후 큰 성공과 발전을 이루면 박수를 치고, 변화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때 가서 비판해도 늦지 않다. 한국언론인연대 박상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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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전주국제영화제 정준호-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 투톱체제 성공을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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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Z세대 중국에 호감" 중국 호감도 세대별로 다른 원인
- ●오카다 미츠루(일본 저널리스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7일 방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3년 만에 처음으로 중·일 정상회담을 갖고 악화된 양국 관계를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기시다는 대중 관계 개선에서 반중 여론과 대중 강경 자민당 우파의 제약을 받고 있지만 반중 여론을 거론하면 일본의 Z세대(18~29세)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40% 이상으로 다른 연령층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Z세대의 정치적 의지가 선거의 키를 쥐고 있는 세계적 흐름을 보면 '반중 여론'과 '우파'에만 의존하는 기시다 외교가 위태롭다. 45분 동안 진행된 이번 일-중 정상회담은 3시간여에 걸친 중-미 정상회담에 비해 일본의 대중국 중요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일·중 정상은 회담에서 국방부 해상 및 항공 연락 메커니즘의 직통 전화선 조기 개통, 새로운 중일 고위급 경제 대화의 조기 개최, 새로운 중일 고위급 문화교류 협의 메커니즘 회의 조기 개최 등 몇 가지 공감대를 형성했다. 향후 중일관계 개선의 지표 중 하나로 정상 간 상호 방문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의 대중 관계 개선의 한 가지 저항은 '반중(反中)' 여론 고조다. 일본의 대중(對中) 인식 악화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각부가 매년 발표하는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에는 흥미로운 수치가 나온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발표된 조사에서 응답자의 20.66%가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지난해보다 1.4% 증가)고 답했다.그러나 연령별로는 Z세대 중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는 비율이 41.6%로 전체보다 배 이상 많았다. 60~69세 13.4%, 70세 이상 13.2%에 비해 Z세대는 중국에 대한 친근감이 높다. 그렇다면 왜 연령대에 따라 중국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싶다. 나는 젊었을 때(저자는 1948년생) 중국의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있었고,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속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타자' 위에 자신의 생각을 투영해 기대를 부풀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나 구미의 통치체계를 중국의 정치와 사회에 투영해 일본이나 구미의 기준으로 중국을 관찰하고 판단한다. 요즘 60~70대 일본인들이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Z세대는 생각이 다르다. 내가 가르친 대학생의 경우 태어나기도 전에 일본 경제가 침체에 빠졌고,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들이 철들었을 때 중국은 이미 미국을 추격하는 대국이 됐고 IT 기술에서 일본을 앞섰으며 애니메이션과 게임 품질에서도 일본을 추월하고 있다. 또 Z세대가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많은 곳에서 중국 유학생과 접촉할 기회가 종종 있다. 다시 말해 Z세대는 중국을 일종의 '대등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환상은 없다.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의 버팀목이 될 때 일본인 전체의 대중국 관념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쇠락이라는 역사적 변화, '탈아입구((脫亞入歐)'의식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대가 '2선 후퇴'하면 일본의 '반중' 여론도 달라질 것이다. 기시다 정권도 언제까지 반중 익찬 여론에 의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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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Z세대 중국에 호감" 중국 호감도 세대별로 다른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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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강술래는 야합(野合)의 축제였다
- 한국국어사전은 강강술래와 강강수월래를 같은 말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강강술래는 한문 표기가 없고 강강수월래를 한문으로 ‘强羌水越來’로 표기하고 있다. 强은 강하다는 뜻이고, 羌(중국서부에서 양을 토템으로 삼은 민족이며 세력이 강해 늘 중원을 위협하여 한족정권은 그들을 오랑캐로 취급해왔음)은 오랑캐라는 의미이다. ‘强羌水越來’는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온다는 뜻이다. 필자는 한국국어학자 어르신들에게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즉 강강술래는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온 민속인데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오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아무런 연관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는 걸까? 답이 아닌 답이 하나 있긴 하다. 국어학자들이 강강술래를 한문으로 표기할 방법을 찾지 못해 본래 4음절인 강강술래를 음악의 필요에 따라 5음절로 늘린 강강수월래를 말도 안 되는 ‘强羌水越來’로 표기했을 것이다. 이런 억지춘향 표기현상을 가리켜 사자성어로 견강부회(牽强附會)라고 말한다. 강강술래를 ‘强羌水越來’로 표기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설명하려면 먼저 강강술래의 어원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강강은 본래 감감이다. 감은 감다, 감돌다 등등의 의미이며 감감은 감의 강조이다. 강강술래는 원을 그리며 빙빙 돌아가는 놀이이기 때문에 본래 감감술래였다. 감감술래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강강술래로 변음 되었던 것이다. 술래는 가운데서 눈에 띠를 두르고 숨은 자를 찾아내는 자를 일컫는 말이다. 한국국어학자들은 술래가 한자어인 순라(巡邏)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데 글쎄 썩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강강술래의 어원을 살펴보았으니 이번에는 강강술래란 도대체 어떤 놀이인지? 알아보자. 강강술래는 본래 순수 우리말이고 그 뜻은 원무를 의미한다는 데 포커스를 맞추고 유래를 찾아야 한다. 원무는 고대사회에 수많은 민족들이 보편적으로 추었던 춤이다.『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에서 저자는 원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영지주의자 예수는 미스테리아 입문식에서 원무를 이용하여 제자들을 이끈다. 그러한 입문식 춤은 이교도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두루 나타나는 것이다.” 현대의 한 권위자는 이렇게 말했다. “고대입문식 축제 가운데 춤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엘리우시스에서의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입문식 후보자는 중심에 자리 잡고, 다른 사람들은 둘레에서 춤을 추었다. 그것은 행성과 별들의 궤도를 흉내 낸 것이었다. 미트라스 미스테리아의 의식에서도 미트라스를 상징하는 입문자는 중앙에 자리 잡고, 황도의 12궁을 상징하는 12명이 주위를 돌며 춤을 추었다. <요한행전>에서도 그와 비슷하게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 예수가 신호를 보내면 사도들이 신성한 말 ‘아멘’을 읊조린다. 예수는 이러한 ‘원무’를 통해서 ‘수난’을 나타낸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것을 예수는 ‘신성한 비밀’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원무는 고대사회에 있어서 보편적인 춤이었으나, 그 형식과 내용 및 목적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위의 글에서는 원무가 이교도 입문식과 예수라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의 원무가 행성과 별의 궤도를 흉내 낸 데서 유래되었다면 동양의 원무는 달을 흉내 낸 데서 유래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달을 흉내 내는 원무를 추는 것을 도월(跳月)놀이라 한다. 민속학자 임동권(任東權) 씨는 고대인들의 도월놀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원시시대에 있어서는 달을 중심으로 하여 행사가 많았다. 상원과 추석이 그러했고 달 밝은 밤이면 모두 모여 유희를 즐긴 것은 우리 조상만이 아니고 지금도 미개사회사회에서는 모두 그렇다. 따라서 옛날 1년 중에서 가장 달 밝은 한가윗날 마을의 소녀나 부인들이 모여 만월과 같은 둥근 원을 그리면서 놀이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때에 노래도 부르며 뛰기도 했을 것이니 강강술래가 임진왜란 때에 비로소 창안된 것이 아니고 그 이전에도 민족전래의 유희로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강강술래처럼 대대적인 것은 아니나 달밤에 소녀나 소년들이 손을 잡고 뛰며 노는 유희는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러한 뜻으로 강강술래를 보면 문헌고증을 할 수 없어서 그렇지 함화진(咸和鎭) 씨가 추상한 것처럼 마한 때의 민족유희였을지도 모르며 마한이 아닐지라도 백제 또는 고려시대에 이미 전파되었던 놀이인지도 모르겠다.” 중국소수민족문헌인『묘속기(苗俗記)』에 도월놀이에 관한 기사가 있는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른 봄에 남녀가 들판에 모여 배우자를 찾는 것을 이름 지어 ‘도월(跳月)’이라 한다. 정월 초 3일부터 13일까지 모두 도월놀이 기간이다. 13일 도월놀이가 끝나면 남자는 갈대피리를 불면서 앞장서고 여자가 띠를 끌고 뒤따르며 장내를 세 바퀴 돌고나서 손잡고 대나무숲속에 들어가 먼저 야합하는 바, 이름 지어 ‘라양(拉陽)이라 부른다. 그러고 나서 임신되면 시집가고 임신이 안 되면 이듬해에 또 반복해서 도월놀이에 참여한다. 『귀주통지(貴州通志)』에도 위의 기사와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다. “화묘(花苗), 매년 이른 봄에 남녀가 들판에 모이는 것을 ‘도월’이라 부른다. 평평한 곳(平壤)을 택해서 월장(月場)으로 삼는다. 남자가 갈대피리를 불고 여자가 방울을 울리며 빙빙 돌면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서 하루 종일 즐긴다. 날이 어두워지면 남녀가 서로 짝을 지어 갔다가 날이 밝으면 헤어진다.” “백묘(白苗), 도월놀이 풍습이 화묘와 같다.” 우리는 전라남도 남해안 여러 지방의 강강술래도 역시 묘의 제족(苗之諸族)과 같은 순수한 도월놀이였으며 따라서 강강술래도 역시 청춘남녀들이 야합을 목적으로 한 놀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인은 야합을 음란행위로 간주하지만 고대인에게 있어서 야합이야말로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는 신성한 의무라고 여겼을 것이다. 중국 유명 학자 이중탠 교수는 이것을 ‘이른 새벽 모닥불 축제’라고 표현한다. 중국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위대한 공자님도 그의 부모가 매신을 제사하는 모임에서 만나 야합해서 탄생되었다고 한다. 『조선의 향토오락』에 의하면, 강강술래는 주로 상원과 추석, 즉 만월 시에 진행했다고 한다. 왜 강강술래놀이는 만월 시에 했을까? 중국신화연구자들에 의하면, 달은 여성의 생래규칙과 닮았다고 한다. 달이 이지러지고 차는 것은 여성의 임신현상과 닮았고, 또 여성의 월경주기는 달의 주기와 같다고 한다. 월경, 월신(月信), 월수라고 부르는 것은 달의 규칙과 같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달 속에는 생식을 주관하는 월정(月精)이 있는바, 개구리의 화신인 상아(常娥)가 곧 월정이라고 한다. 만월 시의 달의 모양이 아름다운 것은 달 속에 아름다운 상아가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며, 따라서 상아의 ‘출현’은 곧 인간의 생식을 관장하고 또 인간의 생식력을 왕성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강강술래가 만월 시에 진행된 것은 곧 고대인의 생식숭배의식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강강술래 참여자들이 본래 소년 소녀들이었다가 여자의 중심으로 된 것은 후대에 내려오면서 유교문화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두어 말하자면 강강술래는 순수한 우리말이며 원무를 뜻하며 원무는 곧 도월놀이며 도월놀이는 곧 남녀야합의 놀이었다. 후대에 내려오면서 소위 학자라는 어르신들이 영웅주의사상, 한문숭배사상, 유교사상의 덫에 걸려든 탓에 강강술래의 본래의 모습을 말살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는 고대문화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민족의 비극이다. 풍류인물이였던 세종대왕이 박연(朴堧)에게 고대로부터 내려온 민속을 채집하여 정리할 것을 부탁해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유생들이 그 귀중한 자료들을 전부 화롯불에 던져버렸다. 결과 오늘날 선조들의 수많은 풍부한 민속 문헌고증이 차단되었다. 그리고 한국인은 다재다난(多災多難) 했던 민족이어서 고유한 민속을 영웅주의에 덧씌워 풀이하다보니 역사가 유구했던 민속의 상한선을 기껏해야 임진왜란시기에 꿰맞추는 경향이 짙다. 이를테면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 여러 지방의 고유민속인 강강술래를 임진왜란시기 의병술에 능하고 전쟁에 공이 많았던 이순신 장군이 창안해낸 것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후세인들이 강강술래놀이를 하는 것은 이순신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한 행사라고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민속학자인 임동권 씨는 1960년대 두 차례나 전라남도 여러 지방을 현지답사 하였는바, 현지고로들은 강강술래를 이순신 장군에 의해 창안되었다고 믿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창호(金昌浩), 어석경(魚錫經) 등 학자들도 현지고로들의 말을 믿고 역시 그렇다고 주장했다. 한 가지 미묘한 것은 강강술래의 전파지가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로서 이순신 장군의 전적지와 맞물린다는 것이다. 허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강강술래는 그 상한선이 마한 혹은 더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결코 이순신 장군이 창안해낸 것이 아니고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한 놀이도 아니다. 다만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이순신 장군이 고유한 민속놀이를 의병술에 이용했을 것이다. 필자는 이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법무부 귀화시험 교재에 역시 강강술래를 이순신 장군이 창안한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이 될 이주민들한테 잘못된 역사교육을 시키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한국사회는 쩍하면 중국과 일본을 향해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하고 있는데 자기네들 역사를 자기네들이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으니 얼마나 비극적인가?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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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강술래는 야합(野合)의 축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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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50년”을 이야기한다
- ● 이 성 (By Star Lee) 오늘은 한중수교 30주년이다. 과거의 30년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愛恨情仇(사랑, 원망, 정, 원한)이 뒤섞인 두 연인 간의 멜로드라마와 같았다. 한 때는 서먹서먹했던 맛선 본 선남선녀처럼, 한 때는 애정행각이 지나쳐 주변사람들이 눈쌀을 찌프렸던 연인처럼, 또 한 때는 서로간의 오해와 불만으로 사랑이 식어가며 냉정의 시간을 갖고자 하는 커플처럼…. 어느 중국의 외교관이 사석에서 이런 농담을 하였다고 한다. 한국은 중국에 있어 매력적인 애인과도 같아 항상 그립고 가슴이 설레이지만 저 북방에 사는 본처를 생각하면 가까워지기에는 부담스럽고 떨어지려니 애간장이 탄다고 한다. 조금 불편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그것이 양국간의 애뜻하고 불편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필자는 한국에서 수십년, 중국에서 수십년 살아오면서 ‘한중수교’라는 멜로 드라마를 본방사수하면서 지켜봤던 사람으로 각별한 애착과 소감이 있다. 열혈 팬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평범한 서민의 시각에서 한중간의 과거 30년 미래 20년을 논하고자 한다. 제1화 1992~2002 연모의 시대 30년전 한중수교가 이뤄졌다. 양국 대중에 있어 40년전 전쟁을 했던 ‘적대국가’, 서로 정체성마저 부정했던 ‘괴뢰정부’와 수교한다는 것은 조금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서먹함과 생소함을 덜하게 했던 것은 88 서울 올림픽과 90 북경 아시안게임이였다. 그 당시에 한중수교가 중국인에 가져다준 가장 큰 변화는 경제도 아니고 문화도 아니였다…스포츠 경기에서 국가명칭이 남조선이 대한민국으로 바뀌였고 중공이 중국으로 바뀌였던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의 신북방정책에 힘입어 중국동포들의 한국 친지방문이 한중교류의 물꼬를 텄으며 뒤따라 한국 제조업 기업의 중국진출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동남아국가에 진출하려면 상당히 많은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극복해야 했지만 중국에서 수십년간 정착한 동포들은 한국기업의 중국 진출에 있어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말이 안통해도 현지에서 동포통역, 동포직원을 채용하면 모든 일이 다 순리롭게 풀릴것만 같았고 10억인구 상대로 한사람당 1원만 벌어도 10억원이 벌어진다는 차이나 드림에 벅차 북경, 상하이, 산동성, 요녕성, 강소성, 광동성 등 지역에 줄기차게 태극기를 꽂았다. 시험을 거치지 않고 빽으로 명문대에 입학한 학생이 잔혹한 대학생활을 맞이하게 되는 것처럼…중국진출의 열정과 자신감은 냉혹한 현실속에서 좌절하기 시작하였다. 세계의 역사를 보면 어느 나라도 신하나 내시에게만 의지하는 성군이 없었던 것처럼 언어가 통한다는 이유로 현지 동포직원에게 과도하게 의지하면서 구매관리, 고객관리, 직원관리를 소홀히 하며 많은 기업들의 경영이 난관에 부딪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는 일부 실패의 요인에만 불과하다. 20년전 어느 삼성출신 중국 주재원이 쓴 책을 본적이 있다..중국에서 실패하지 않는 비법 중에서 1위가 중국여인과 거리를 두라는 것이다. 주색을 삼가라는 말이 당연해 보이지만 이 역시 그 시기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의 수준을 여실히 들어냈다. 결국 21세기에 들어서서 많은 제조업기업들이 중국을 탈출(심지어 야반도주)하게 되면서 중국 제조업 진출의 열풍은 서서히 저물어갔다. 이로서 제조업이 테마를 이루던 한중간의 사랑 드라마 1화는 막을 내리며 다음의 10년을 그리는 새로운 막이 열렸다. 제2화 2002~2012 동거의 시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제조업의 중국 정복은 순탄하지 않았지만 한중관계는 갈수록 돈독해졌다. 조심스럽게 상대방을 알아가면서 사랑의 싹을 틔우던 연인은 이제 동거를 하기 시작한 것과 같았다.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10년간의 하드웨어 교류의 시대를 넘어 소프트웨어 교류의 시대가 막을 올렸다. 이때부터 한국음식, 한국문화, 한국패션이 본격적으로 중국에서 대중화되기 시작하였다. 한국 드라마, 한국 음악이 중국에서 서서히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중국보다 더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한국은 중국인이 흠모하는 나라가 되였다. 젊은 층은 한국 현대문화의 모든 것을 따라하고 싶어했으며 우호적인 외교관계도 한중양국 국민감정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북경 올림픽 전까지만 해도 경제력이 3~4위에 불과하던 중국이 미래 G2 가 될 것이라는 예측을 과대평가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때만 해도 중국은 일인당 GDP가 3000달러 조금 넘는 빈국이였고 국민들에 있어 국가가 부강해진다는 기대감만 있을 뿐 미국을 도전할 수 있는 초강대 국으로 성장할 것이란 자신감은 아직 턱없이 부족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한국 학생의 중국유학 붐은 최고조에 달았으며 21세기 초반 월드컵 진출, 올림픽 유치, WTO진입 3대호재가 터지면서 “중국이 미래다”라는 여론이 세상을 뒤덮으며 한국 내 중국어 교육기관들은 최대의 호황을 누렸었다. 북경의 HSK학원에는 한국인 수강자들로 북적였으며 모든 중국의 대학교에는 한국인 유학생이 항상 1위를 차지하였다. 중국인의 해외관광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늘어나면서 한국방문 관광객이 100만명을 돌파하기 시작하였고 재한 화교들은 중국과의 혈연적인 연고를 무기로 내세워 중국인 인바운드 여행과 쇼핑을 거의 독식하다시피 하면서 한중 관광산업의 새 시대를 열어갔다. 이 시기는 한중간의 관계가 가장 안정적인 시기였으며 외교관계, 문화교류, 경제교류 모든 면에서 엄청난 변화와 성장을 가져왔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동거를 겪으면서 서로 간의 단점들이 속속히 들어나면서 한중관계는 새로운 양상을 맞이하기 시작하였다. 제3화 2012~2022 모순의 시대 20년간의 동거동락을 겪으며 한중관계는 새로운 시기에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한국에서의 중국열풍도 만만치 않겠지만 중국에서의 한류는 최고조에 달하며 주변국가의 질투를 살 정도로 뜨거웠다. 외교관계 같은 정치적인 요소를 떠나서 대중문화적인 영향력을 봤을 때 한국을 10으로 보면, 미국이 7, 일본은 4, 기타국가 합치면 3이였다. 이때가 한중 양국은 과거 수천년 교류 역사상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 시기였을 것이다. 지난 역사상 한중관계 가장 가까웠던 시기는 아마 명나라 때였다. 明史를 보면 그때의 한중관계를 이렇게 평가했다 “他國不敢望也”(다른 나라가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밀접했다). 21세기에 들어서 한중관계가 바로 이렇게 “타국불감망야”가 된 것이다. 그러나 중국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物極必反(어떤 사물이든간에 도가 지나치면 그 반대로 바뀐다) 한중관계는 지나친 열정시기를 겪으며 결국 그 반대로 돌변하게 된 것이다. 한중관계는 정치인들과 경제인들만의 파티가 아니라 대중 속에 그 뿌리가 있다. 한중관계의 밀접함은 대중문화에서 여실히 반영 되였다. 중국의 방송을 켜보면 10대 예능프르그램 중 8개 한국 프로그램 포맷을 번안한 것이였다. 한국에서 인기있는 무한도전, 나는 가수다, 복면가왕, 진짜 사나이, 아빠 어디가, 슈퍼맨이 돌아온다, 런닝맨, 히든싱어 모두 중국에서 그 모조품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단순 도용이 아니라 대부분 저작권료를 주고 사들인 것이였다) 저자는 이런 광경을 목격하며…드디어 올 것이 온다는 안좋은 예감이 들었다. 한국 방송에서 중국의 예능 포맷이 80% 차지하고 중국 연예인이 한국 드라마 주연들을 독식한다면 한국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결과는 뻔하다…엄청난 후폭풍이 휘몰아치게 되는 것이다...그러한 전략적인 타산이 없이 2020년 마스크 붐 때 너도나도 마스크 사업하듯이 중국의 방송사들은 무분별하게 한국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결국 경착륙이란 국면을 맞이하게 되였다.. 사드사태는 다들 아는 내용이니 여기서 거론안하겠지만. 사드를 빌미로 행해진 한한령은 사드라는 계기를 이용했을 뿐이지 절대로 사드만이 불러온 결과가 아니라고 본다. 외국의 문화가 본국의 문화 발전공간을 무참히 짓밟고 본국 문화의 생존토양을 파괴했을 때는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전세계 어느 문화도 한류가 중국에 끼친 영향처럼 큰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아무리 미국이 문화 선진국이라고 해도 영국과 멕시코의 문화를 이처럼 송두리째로 바뀌지는 못했지만 이 밀월기의 한국은 중국에서 그런 것을 이뤄냈다. 이는 칭찬이 아니다…오늘날의 국면을 자초한 도화선이라고 본다. 2016년 6월까지만 해도 태양의 후예를 정점으로 한류는 중국을 점령하면서 문화 식민지를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이 과열된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사드’가 그 ‘총알받이’가 된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2016년 7월 사드배치를 발표하면서 중국 정부에 한류를 경착륙시킬 명분을 주었다. 과도한 한류의‘횡포’를 지켜보던 중국 정부는 사드 사태에 대한 1차 타격목표로 한류 문화를 지목하게 되었다. 한중경제교류에 있어 한국문화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중국의 젊은 세대에 미치는 영향은 간과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음으로 부득이 손을 보게 된 것이라고 중국국내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한한령의 실시가 6년 지나면서 중국은 자국문화가 빼앗긴 고지를 되찾으며 포스트 한류시대 중국 본국 문화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주식시장에 청소부 법칙이란 재미있는 룰이 있다. 즉 모 주식을 청소부마저 관심가지고 샀을 땐 그 주식을 과감히 매각해야 한다는 것이다…즉 과열은 과냉을 초래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세번째 10년은 한중관계가 파란만장한 애정 스토리를 전개하는 과정이다. 곧 결혼을 할 것처럼 뜨겁게 사랑하다가 상대방의 단점이 하나 둘씩 보이고 거기에다 양가 부모의 반대, 주변인들의 험담, 자기 정체성의 약화를 겪으며 과연 이런 사랑이 진정으로 행복한지를 느끼게 하는 고비를 겪게 된다. 그 전환점이 사드라는 돌발사태로 인해 발생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계기일뿐 예고된 결과라고 말하고 싶다. 한중관계는 지나칠 정도로 뜨거웠던 것이 문제라고 본다…중국이 소위 혈맹이나 전통우방국가라고 이야기하는 북한, 파키스탄, 라오스 등 국가와의 관계를 보면 한국처럼 가깝게 지낸 적이 없다. 물론 이는 한국의 문화적인 선진성에서 유래되었지만 이러한 과도 밀접한 관계는 서로 간의 기대를 지나치게 부풀리게 되고 판단을 흐트리게 되며 상대방과의 문화적인 차이, 제도적인 차이를 약화시키다가 특정 시기에 특정 계기로 그 모순이 폭발하게 된 것이다. 사드는 한국의 친중파를 피말리고 씨말리게 만들었으며 중국의 민심을 한순간에 떠나게 만들었다. 또한 한국국민도 덩달아 중국을 불신하기 시작하였으며 중국과의 사랑이 결혼대상자에서 그냥 친구로라도 지냈으면 좋겠다는 관계로 강등하게 되었다. 제4화 2022~2032 냉정의 시대 올해가 한중 두 국가의 멜로드라마가 방영 된지 30주년을 맞이하는 시기이다. 공자님은 30이립(三十而立)이라고 이야기하였는데 군자는 서른살이 되면 가정을 이루고 철이 들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30년전 경제적으로 막상막하하던 중국은 이젠 어느덧 한국 경제력의 10배가 된 G2국가가 되었고 중국과 수교하면 큰 이득이 생길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이젠 국운을 좌우지할 만큼 중요한 국가관계로 부상하게 되였다. 중국의 속담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三十年河東,三十年河西(삼십년은 하동에서 삼십년은 하서에서). 이제 한중관계는 30년간의 사랑과 원망을 겪으며 성숙된 어른이 된 것이라 본다. 또한 한중관계라는 고정적인 패턴도 이젠 30년의 역사를 겪으며 새로운 30년을 맞이하게 된다. 미래의 한중관계는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 이 글에서 필자는 단순히 한중관계 과거 30년을 돌이켜 보는 것뿐만 아니라 미래 20년간 한중관계에 대해서도 전망을 적고자 한다. 30년전 한중 수교당시 한국은 미국의 눈치를 볼 필요없이 자유롭게 중국과의 관계를 정립할 수 있었지만 어느덧 미국과 대등한 체격으로 성장한 중국이 미국의 최대 경쟁자가 되면서 한중관계에 있어 새로운 변수로 등장하게 되었다. 현재 한중관계는 항상 미중관계, 한미관계라는 변수들을 고려해가면서 대응해나가는 관계로 변모되면서 한국 정부에게 새로운 숙제를 마련하였다. 한중관계의 30년은 사실 두 연인이 맞선을 보면서부터 사랑에 빠지고 동거하고 서로 의심하고 관계가 나빠지는 식상한 멜로드라마의 스토리를 연출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파혼하게 된 것이다. 앞으로 다시 관계가 좋아질 수 있을까라는 시청자들의 궁금증이 많겠지만 필자는 이제는 과거로 돌아가기 어렵다고 본다…사드문제가 해결되고 양국 국민의 감정이 회복되었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10대부터 시작하여 20대를 겪으며 철없이 사랑에 푹 빠져 정신 못차리던 시기를 넘어서 이젠 성숙해졌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한중양국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서로 다른 가문에서 태어난 연인으로 사랑을 이루기엔 너무나 많은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어찌보면 양국의 관계라는 것은 무거운 결혼보다 서로 애뜻한 정을 주고받는 애인관계가 더 아름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핀란드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어떻게 스웨덴을 평가하냐고 물으니 핀란드 남자는 스웨덴 남자들은 대부분 게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필자가 핀란드 사람은.스웨덴 사람을 좋아하지 않은 것이냐 따지니 하는 말이 “사이좋은 이웃국가가 없잖아요”라고 대답했다. 정말 그런 것인가? 중국의 주변국가 중 중국을 좋아하는 나라는 몇이 되는가? 또한 한국의 이웃국가 중 한국을 좋아하는 나라는 얼마인가? 아마 답은 머리 속에 떠올랐을 것이다. 강대국 속에서 생존과 발존을 모색하는 상황은 21세기 20년대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국왕조의 전환기에 한반도 왕국이 항상 겪던 일이였다. 한나라와 흉노를 사이 둔 고구려, 고구려와 당나라를 사이 둔 신라, 거란과 송나라를 사이 둔 고려, 원나라와 명나라를 사이 둔 조선, 청나라와 명나라를 사이둔, 조선 고비마다 지혜롭게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전략을 모색하며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 사직을 지킨 한반도의 왕국은 이 시대의 미중 양국의 경쟁구도 속에서 슬기롭게 난관을 이겨낼 것이라고 본다. 물론 그 과정이 험난하고 고달프고 마음이 힘들어도 말이다. 그것이 이 반도의 동포들이 회피하기 힘든 숙명일 수 있겠지만 그런 고난 속에서 더 강인해지고 똑똑해지는 법이다…그러한 차원에서 한반도는 중국왕조보다 더 강한 생명력을 가졌었다. 이 10년은 중국이 미국을 초월하여 세계 최대 경제강국으로 부상하는 시기일 것이다. 물론 PPP방식으로는 10년전에 이미 미국을 초과하였지만 허영심이 강한 백인은 실질보다 명목을 더 중요시한다. 그래서 올림픽에서도 자신에게 유리할때는 금메달로 순위 매기지 않고 메달수로 순위를 매긴다. 미쏘 갈등은 백인 내부 이데올로기적인 모순에 불과하다면 미중 갈등은 문명의 시프트를 상징함으로 엄청 신경쓰고 있는 것이다..문제는 이러한 동양 문명의 시프트가 10년 안에 이뤄질 것 같은 두려움에 빠지면서 오늘날의 국제관계를 혼돈에 빠뜨리게 만든 것이다. 서양문명은 중국의 부상을 저지하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겠지만 14억 인구인 중국의 발전 모멘텀을 막기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 있어 설마 중국이 경제적으로 넘버원이 되었다고 하여 엄청난 세계정치경제지형의 변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한국은 수천년간 겪어왔던 것처럼 세계의 정상으로 복귀한 중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지만 이는 하나의 축복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전세계에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4대 강국이 에워싸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거인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총각이라고 생각하기 보다 여러 미남들에 의해 에워싸인 미인이라 정의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는가? 한국은 중국, 미국, 일본, 러시아 모두에 있어 항상 존중하고 아껴주고 자기 편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국가이다…드라마의 한장면이 떠오른다…어느 남자가 미인을 넋이 빠져 바라보다가 그 여성이 불쑥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시무룩해진 장면… 역시 미인은 싱글일 때가 더 매력적이다.. 정치적인 이야기를 조금 가미하자면 이 시기에 한국은 친미, 친중, 친일을 논하기 보다 모든 사안을 개별적으로 쪼개 국익에 부합되고 대다수 국민의 이익에 부합되고 실보다 득이 더 많은 것만 골라서 사안별로 입장을 취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이유는 “미인은 싱글일 때가 더 매력적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전세계의.미인 선발대회엔 미쓰만 참가할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시기는 또한 포스트 코로나의 시기이다. 포스트 코로나의 최대의 수혜주는 무엇인가? 두말할 것 없이 관광일 것이라 본다. 중국의 코로나 봉쇄가 해소되고 해외 관광이 자유로워지면 해외관광시장은 과거의 5배로 커질 것으로 예상하며 연간 5억명의 중국인이 해외 관광을 나설 것으로 본다. 코로나 기간 동안 힘든 민생을 무엇으로 달랠 것인가? 내부적인 지원책과 개혁만으로는 역부족일 것이다…외부적인 힘을 빌어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것이 답이 아닌가 생각한다. 꿈 같은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2023년 중국관광객 5천만명이 한국 방문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때 되면 한국의 대부분 서비스산업, 상당수 제조업이 혜택을 볼 수 있다. 코로나로 인해 식어간 모든 상권이 관광산업의 부흥으로 인해 엄청난 호황을 누릴 것이 틀림없다. 중국이 밉든 곱든, 인접국가로서 최대의 고객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중요한 것은 중국이란 시장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부의 지침대로 움직이는 대형 시장임으로 한중관계의 꽃길 같은 미래만 꿈꿀 것이 아니라 그 꿈이 현실이 되도록 모든 이가 그 밑걸음을 깔아야 한다. 그 사이 맺힌 것도 많고 얽힌 것도 많고 섭섭한 것도 많겠지만…연인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포스트 코로나를 맞이하며 한중 양국이란 연인이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는 시기이다. 농담하나 하겠다. 오래 전에 헤어진 연인이 전화 올 땐? 정답은 “다단계 영업”이라고 한다….이것이 제 4화의 줄거리이다. 제5화 2032~2042 격변의 시대 2032년의 세상은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 10년후의 세상을 예측하긴 쉽지 않겠지만 현실을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중국의 부상은 모멘텀에서 현실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으며 미국은 여러가지 내부/외부적인 요인으로 말미암아 순탄치 않은 10년을 겪으면서 과거와 같은 영광을 누리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북한에 대한 예측은 항상 어긋났음으로 변수가 아닌 그냥 무시해도 좋은 상수로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또한 한국은 일인당 소득이 4만 5천불이상의 선진국으로 도약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한중관계는 10년의 냉정기를 겪으며 새로운 시기에 들어설 것이라 보는데 학계나 정계에서는 여기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사람이 없는 것 같아 좀 안타깝다. 물론 예측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담대한 가정을 전제로 새로운 세상을 분석하며 한중관계를 다시 짚어보고자 한다. 지금 중국은 미국의 압박 속에서 어렵게 생존의 틈을 찾아가고 있는데 가장 큰 아킬레스건은 바로 반도체이다. 그러나 미국의 봉쇄가 과연 주효한지를 심각히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초기에는 중국에 대한 반도체 봉쇄를 통해 중국의 성장을 늦출 수는 있겠지만 중국이란 거대한 공룡의 돌진을 막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10년 후 중국이 만약 반도체의 독립을 이뤘을 때 그때 세계의 패권은 진정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문제는 기술의 초격차를 지향하는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미국의 영향 아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중국의 오기를 불러일으켜 10년의 시간으로 그 기술격차를 극복했을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냐는 고민을 해보았는가? 실제로 지금 중국인 이미 자국기술력으로 7나노 반도체 파운드리를 이뤄냈다. 아직 삼성과 TSMC와 상당한 격차가 있지만 중국 상하이 중심국제반도체 회사의 리더가 바로 TSMC와 삼성의 기술혁신을 이뤄낸 CTO 량멍숭이란 사실이다. 반도체는 하나의 산업기술에 불과하지만 미래 10년 심지어 50년간의 국제관계를 재정립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요소 때문에 미중간의 디커플링이 쉽지가 않고 또한 국제관계의 이합집산이 이뤄지고 있다. 과거 20년간 한국은 항상 중국의 최대 수입국이였으며 중국은 한국의 최대 흑자국이였다. 중국이 미국에서 수천억달러를 벌어오면 거기에 한국이 수백억달러를 인출했던 구도였다. 그러나 올해에 들어서서 한중 교역은 처음 적자로 돌아섰다. 이는 액시던트가 아니라 이제는 자연스러운 모멘텀이라고 본다. 그동안 한국이 중국으로 수출한 제품 중 대다수는 중간재였다. 특히 미국으로 수출하는 비중이 제일 컸다. 그러나 미중갈등으로 인해 미국의 하이테크 중국제품 수입이 줄어들면서 중국의 한국 중간재 수입도 줄게 되었고 중국 자체 생산 원자재의 발전은 한국산의 수요를 감소하게 만들었다. 이런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한국의 산업은 과거의 패턴 그대로 작동하고 있지만 중국은 이미 크게 변하고 있다. 과거 20%이상 차지하던 삼성 핸드폰의 시장점유율은 0.5%로 떨어졌고 인기가 절정에 달하던 현대기아차도 이젠 중국차와 가격을 겨뤄야 하는 현실로 되고 있다. 이마저도 참담한 현실인데 10년 후는 어떻게 될 것인가? 현시점에서도 중국은 세계 최대의 핸드폰, 배터리, 전기자동차 생산국이다. 이는 이미 양적인 우위를 벗어나 질적인 우위라 내달리고 있다. 그럼 10년 후면…믿고 싶지 않겠지만 중국기업은 중국 방방곳곳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의 악몽이 될 수도 있다. 과거 신발이나 가전처럼 말이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도 아직 초격차를 운운하고 있다. 초격차는 이 10년간은 유효하지만 다음 10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초격차가 무격차가 되면 다음은 뭐로 먹고살 것인가? 전세계 역사상 어느 국가도 이처럼 초고속으로 성장하면서 글로벌 시장을 잠식한 이웃국가를 마주한 사례가 없었다… 중국의 위협은 현실뿐만 아니라 미래까지도 커버될 날이 멀지 않다. 삼성보다 싸고 좋은 메모리, 스크린, 핸드폰, 현대보다 싸고 좋은 자동차, 로보트, 한화, SK, 롯데, LG보다 싸고 좋은 화학원료의 메이드 인 차이나가 세계를 석권할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필자는 중국의 위대함을 칭송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 무감각하고 근거 없는 자신감이 팽배한 이 시대의 풍조를 바로잡고 싶을 뿐이다. 미래 10년후의 한중관계는 지금 겪어보지 못했던 심지어 과거 수천년간 겪어 보지 못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것이라 본다. 역사 속에서 한반도는 현재의 중국처럼 나락에 떨어졌다가 다시 정상으로 복귀한 시대를 겪어보지 못했다. 미래의 10년을 대비하려면 대한미국은 어마어마한 중국전문가를 양성해야 하고 중국의 산업구조 산업발전을 제대로 분석하고 대응해야 한다. 중국과 등진 경쟁자가 아닌 중국이란 거대시장과 거대경장 속에서 자신의 포지셔닝을 제대로 하고 변화를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특공대가 되야 한다. 중국시장과 생산과의 융합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분석해야 한다. 이는 특정 기업만이 아니라 전체 국가와 국민적인 차원에서 다뤄야하는 숙제이다. 이 숙제를 잘 푸냐 못 푸냐는 미래 10년뿐만 아니라 미래 100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 현재 반중정서가 팽배해 있는 시기에 중국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날 따라 줄어들고 중국 전문가들도 갈수록 주목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중국은 어둠속의 도둑처럼 조용히 질주하고 있지만…대한민국은 태평성세의 연예가무에 빠져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걱정이 든다. 사드 때가 위기이가? 진정한 위기는 다음 10년이라고 본다. 중국이란 거대 공룡을 옆에 두고 과연 몸집이 작은 파충류가 먹이를 구할 수 있을 것이란 현실적인 걱정이 든다…그러나 이 땅에서 과연 누가 이런 심각한 고민을 해보았는가? “중국은 파멸할 것이다. 분열할 것이다”라는 허황된 꿈으로 자기 위로하면서 살아갈 것인가? 노키아와 모토롤라의 몰락을 보면 경쟁 속에서 잘못된 전략이 얼마나 큰 피해를 초래할 것인가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21세기 30년대의 한중관계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면모를 보일 것이다. 자신감이 넘치고 교만함까지 보이며 실질적인 파워까지 겸비하고 심지어 비민주적이란 프레임마저 사라진 미래의 중국을 다룰 생각을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고 그냥 어영부영 10년을 넘기다가 엄청나게 후회할 것이라 경고하고 싶다. 중국을 경계하고 두려워하기보다 옛정을 그리며 앞으로 어떻게 화합하며 살아가고 중국 부상의 피해자가 아닌 수혜자로 될 수 있는 가가 21세기의 나머지 시간의 테마가 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친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중(知中)이고 중중(重中)이다. 그런 의미에서 친미는 현상유지, 친일은 과거유지, 친중은 미래유지이다...라는 정의를 내릴수도 있다. 이로서 한중양국이 50년간 이뤄진 멜로드라마가 NEXT 시즌을 기대하며 종영이 된다. 한중수교 60주년일때는 환갑의 나이의 두 노인의 사랑 스토리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다...영화 "은교"처럼 될 것인가? "죽여주는 여자"처럼 될 것인가? 그것은 다음세대 출연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필자에 대해 당신이 뭔디 이렇게 거창하고 허황된 이야기를 꾸미는가 질타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나중에 지켜보면 이 드라마가 제가 예상한 각본대로 연출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럼 여기까지…글을 마치고 2032년에 다시 2탄을 올리겠다. 그때까지 이 글의 독자와 한중관계 모두 건강하시기 기원한다. 2022년 8월 24일 서울에서 (By Star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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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50년”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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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의 '정치적 유산'
- ● 양백강, 로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가 2022년 7월 8일 거리 연설에서 67세의 나이로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아베 신조 피살 사건은 일본 정계는 물론 국제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아베는 전 일본 총리로서 자신의 기록적인 초장기집권과 일본 내 보수세력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전후 일본 정치사, 국가전략 진화의 한 축을 차지하는 등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파장을 남겼다. 아베 자신은 역사가 됐지만 일본의 미래 국가 발전 방향에 대한 조명은 아베의 '정치적 유산'이라는 시각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정치인 가문의 출신인 아베는 1993년 7월 중의원 의원으로 처음 당선돼 당시 최연소 국회의원이 됐고, 2006년 9월 총리가 돼 첫 전후 출생 총리가 됐지만 1년도 안 돼 물러났다.이후 5년간의 칩거 끝에 2012년 9월 자민당 총재에 당선되고 12월 총리에 취임하면서 7년 8개월여의 '아베 시대'가 열렸고, 아베는 헌정 사상 최장수 총리가 됐다. 2020년 8월 퇴임 후 짧은 휴양을 거쳐 정계에 복귀한 아베는 정계 보수세력을 결집했다. 2021년 11월 아베가 자민당 최대 파벌인 호소다파 회장에 취임하면서 아베계로 기치를 바꾸는 등 정치권에서 강세를 보였다. 장기간의 임기를 제외하면 아베의 정치적 위상은 당시의 국제환경과 국내 정치상황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2007년 아베 총리 사임부터 2012년 재집권까지 5년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미·서방 국제체제에 크게 의존하던 일본은 충격을 받았다. 자민당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아소 타로(麻生太郞) 정권, 후속 민주당 3선 내각이 모두 난국에 빠졌다. 상대적으로 미국과 유럽의 패권이 쇠퇴하고,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들이 집단적으로 부상하면서 2010년 중국 경제는 처음으로 일본을 추월하며 격차를 벌렸다. 국제 권력구조, 글로벌 거버넌스 시스템의 심각한 변화, 각 분야의 질서, 규칙, 발언권 다툼이 날로 치열해지고 일본의 대외위기의식, 국제게임의식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어 '강인정치'에 대한 요구가 더욱 절실해졌다. 당시 요미우리신문 사설은 잦은 총리 교체로 일본 지도자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외국 지도자의 모습은 "일본에 수치"라고 했다. 이런 '비정'적이고 대외적인 주장을 더욱 강하게 하는 전략적 마인드와 여론의 분위기는 아베가 재집권해 장기집권을 이어갈 수 있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됐다. 총리 재임 후 아베는 계파적 자원과 정치적 수완을 앞세워 당내 최고 권력을 장악했고, 자민당의 6연속 총선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우경화 보수적 정치관과 국제정세 및 일본 국민의 마음가짐 변화를 긴밀히 결합시켜 전략적 행동을 통해 일본을 '강대하게' 만들겠다는 자신의 정책 철학을 제시했다. 실제로 아베는 초대 총리 시절부터 방위청 승격, 교육기본법·국민투표법 개정, 해양기본법 제정 등을 추진해왔다. 2012년 이후 긴 임기 동안 아베는 정치·안보 분야에서 일본의 '자립'과 '자주'를 체계적으로 강화해 더 큰 '전략적 공간'을 넓히려 했다. 아베가 역사교과서 추가 수정, 무라야마 담화 부인 등 기존 역사 발언, 전후 외교 총결산 추진 등을 통해 일본 정치의 우경화를 가속화하고 아시아 이웃 국가들에서 우려를 낳고 있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아베 시대'는 냉전 이후 일본의 국가전략 전환 발전의 중요한 단계로, 일본이 금융위기 이후 세계구도, 국제질서 변화에 적응하는 데 중요한 시기였다. 이 시기 '아베 노선'은 안보 분야의 '돌파'를 접점으로 국가전략의 전환을 추진하고, 다각화된 외교수단을 활용해 '종합전략의 활성화'를 높이겠다는 것이 기본 발상이었다. 국제사회, 특히 아시아 국가들이 이런 돌파구에 대한 우려와 의구심은 자명하다. 개헌 추진, 자위대 입헌 지원 외에 아베 주도로 2013년 첫 국가안전보장전략, 일본판 국가안보회의(NSC) 설립, 방위계획대강 조기 개정, 2014년 내각 정령으로 집단적 자위권 부분해제, 새로운 방위장비 이전 3원칙 마련, 2015년 평화안보법안과 국제평화지원법안, 이른바 신안보법 제정, 적에 대한 공격능력 보유 및 대형화·공격무기장비 플랫폼 도입 검토, 대외방위협력, 외교정책 안전화 등을 추진했다. 안보 분야에서도 아베가 추진한 '개혁'은 전략체제, 법치의 틀, 집행체제, 역량건설의 모든 측면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어 전후 일본 보수세력의 전후체제 돌파와 '안전 자주' 실현이라는 기본적 발상을 답습할 뿐 아니라 일본 안보전략의 외향성과 공격성을 더욱 가속화했다. 이는 평화헌법의 굴레를 뚫고 일본의 '국방정상화'와 '군사대국화'를 가속화하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일본의 안보정책과 방위정책, 방위력 건설 목표의 대전환을 예고하고 있어 아태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위협이 되고 있다. 외교 분야에서 아베는 '전략적 외교'를 적극 추진했으며, 재임 기간 동안 총 비행 거리는 158만km로 80개 국가와 지역을 방문했으며 이는 지구를 39바퀴 도는 것과 같다. 아베 총리는 또 '지구 외교' '적극적인 평화주의'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 등의 개념을 내세워 '도덕적' 색채를 부각시키려 했다. 하지만 사실 아베 외교는 고도의 현실주의, 실력주의, 지정학적 경쟁 사고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강대국의 게임이 그의 핵심 관심사다. 아베의 입장은 미·중 간 총체적 균형을 유지하며 '좌우를 만나다'는 전략 아래 미·일 동맹의 '체제 내 발전'을 견지하고, 대외정책의 융합을 추진하고 경제·안보·문화적 수단을 통합 운용해 '중등 세력' 특히 유럽·인도·태국과의 전방위적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일본 국내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아베는 그동안 위축되었던 일본 외교를 크게 뒤집고 국제 담론력을 강화했지만 많은 논란과 문제점도 남겼다. 아베는 역대 총리 중 최장수 집권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정치인의 업적은 시차를 두고 평가되지 않는다. 내부적으로는 우익세력의 요구에 부응하고 외부적으로는 미국을 숭배하고 추종했지만, 저출산·고령화, 디지털 시대의 발전, 주요 외교 문제는 제때에 해결되지 않았다. 실제로 아베 총리가 2020년 8월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그의 '정치적 유산'에 대한 논쟁은 계속됐다. 아베의 '정치 유산'은 개인적 색채가 뚜렷하지만 전후 일본 보수 정치세력의 국제질서, 일본 국가 발전에 대한 해석을 대변한다.이런 해석은 1980년대 중후반부터 '정상국가론' '정치군사대국 몽'이라는 형태로 일본의 국가전략 방향에 영향을 미쳤다 아베는 그동안 자신을 '열린 보수주의자'라고 칭하며 자신의 보수적 정치이념을 확산시키고 개인 정치권을 공고히 하는 데 열심했다. 장기 집권을 거치면서 아베 주변에는 보수 정치인이 대거 포진했고, 그 중 적지 않은 수가 자민당과 정부 고위직을 차지하며 '아베 독트린'의 추종자이자 집행자로 자리매김했다. 현 일본 정계의 보수세력의 '정신적 지도자'인 아베의 죽음은 추종자들의 추종을 중단시키기는커녕 이들의 더 집요한 행동을 자극해 아베의 '미완의 의지'를 완성하겠다는 자세로 공감과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 아베의 후계자인 스가 요시히데와 기시다 후미오는 인맥·공직 경력에서 아베와 그의 측근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두 사람 모두 '아베 색채'에서 벗어나 자신의 특색을 살리는 경향이 있지만, 스가 시대 정책이나 지금까지의 기시다 정권의 정책을 보면 전체적으로 '아베 노선'을 답습하고 있다. 기시다가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자주방위정책과 '신시대 현실주의 외교'도 아베의 정책과 유사하다. 기시다가 자신의 특성을 과시하기 위해 제안한 '일본식 신자본주의' 경제·사회 정책도 정책 여백이 부족해 '아베노믹스'로 회귀할 위험이 있다. 동시에 아베의 '정치적 유산'이 일본의 정치적 현실을 완전히 뒤흔들 수는 없다는 점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외교안보정책 분야에서 일본의 '전략적 주관성'과 '역동성'을 모색하겠다는 아베의 제안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길잡이 역할을 계속할 것이다. 대만 문제에 대해 아베 총리의 '대만 공동방위'에 대한 미일군사 개입 등 허위 주장은 일본의 현실적인 정책이 되기는 더욱 어렵다. 한반도와 러시아에 대한 외교 측면에서도 현 정부는 아베 총리의 기존 사고방식을 현 상황에 맞게 바꾸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현재의 러시아-우크라이나 분쟁을 배경으로 일본이 국제위기를 이용하여 국내의 전략적 변혁을 촉진하고 해외의 전략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관행은 아베 시대의 그림자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질서의 변화와 국가의 전략적 변혁에 직면하여 일본의 구체적인 대응책은 변함이 없을 것이며 아베의 '정치적 유산' 중 비합리적이고 비건설적이며 지속 불가능한 내용은 결국 폐기되고 잊혀질 것이다. 작자 양백강(楊伯江)과 로오(盧昊)는 각각 중국사회과학원 일본연구소 소장, 부연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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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의 '정치적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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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이 말하는 '조선족문제'
- ■시냇물/ 그동안 조선족이 누린건 권리가 아니라 특혜였다. 전세계적으로 소수민족언어로 대학시험을 칠 수 있는 나라는 중국밖에 없다.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은 중국이 소수민족에게 베푼 특별혜택이다. 권리가 아니다. 이 점을 알아야 한다. 다들 교육정책의 변화를 마치 권리를 박탈당한것처럼 착각하고 떠드는데 제대로 잘 알아둘 필요가 있다. 혜택이란 원래 없어질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특혜가 없어지는 과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공식 문건에 의하면 조선족학교들에서 3가지 즉 중국어(어문), 정치, 역사를 전국통일교재로 교체하고 중국어로 강의하고 기타 과목은 예전처럼 한다고 한다. 중국 입장에선 당연한 조치이다. 조선족은 백년 넘게 중국에서 살았지만 물 위에 뜬 기름방울이었다. 우리의 문화권은 중국이 아니라 한국(조선)이었다. 계속해서 중국에서 살아갈거면 중국 주류사회에 편입돼야 한다. ■백양나무/ 고향이 싫어서 떠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들 먹고 살기 위해 외국으로 외지로 떠났다. 우리한테는 생계가 우선이다. 뜬 구름 잡는 민족 구호보다 경제적 뉴대감 형성이 정체성 보존에 실질적으로 도움 된다. 전국 곳곳의 각 아파트 단지마다 모두 둥지를 튼 회족의 란주라면을 보라. 이런식의 민족경제 체인점은 연대 역할을 할 뿐만아니라 경제적 실익도 가져다 주기에 동력이 달린다. 동력이 있기에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으며 눈덩이 구불듯 확대와 재생을 반복해 나갈 수 있다. 조선족도 민족 브랜드를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 우리 조선족은 외국으로, 외지로 나가서 돈을 벌었지만 이 돈을 크게 부풀리는 방법을 아직 잘 모른다. 벌어서 다 써버리거나 기껏해야 유지할 뿐이다. 어려서부터 자녀들에게 재테크와 투자를 가르쳐야 한다는걸 느꼈다. 조선족은 상업적 두뇌가 미숙하고 지나치게 상업적인 걸 부끄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농경민족의 체질이 많이 남아있다. 생각을 바꿔야 한다. ■소나무/ 조선족 정체성 유지를 위해서는 첫째도 교육, 둘째도 교육이다. 조선족은 조선족자치주도 있고 조선족대학도 있는데 왜 무너져가는가. 소를 팔아서라도 자식공부를 시킬정도로 소문이 자자한 교육열을 자랑하는 우리민족이 아니였던가? 허나 결과는 어떠한가? 문제는 우리교육에서 우리민족역사도 없고 조선족역사도 없기 때문이다. 민족혼이 없는데 민족의 미래가 있을까? 우리민족역사를 모르면 제대로 지켜질 수가 없다. 어렸을 때 읽었던 민족역사책들이 다 사라졌다. 중국 조선족이 항일전쟁에서 큰 역할을 해 신중국 설립을 위해 공헌함으로써 떳떳이 중국 공민 자격을 누릴 수 있었던 역사를 잘 아는 이*인 교수같은 분을 초청해 특별강의를 많이 열어야 한다. 자기민족 역사를 알아야 한다. 조선족이라는 명칭을 단 조선족단체들이 많지만 조선족역사에 관심가지고 후대들을 위하여 얼마나 고민하는가?... 입이 즐겁고 눈이 즐겁고 귀가 즐거운 일은 성수나게 잘하는데 영혼과 정신이 즐거운 일엔 관심이 없다. 이런 정신상태를 가지고 조선족정체성을 지켜야한다고 큰소리만 빵빵 치니 참으로 무지하고 가소롭게 느껴진다. 역사를 배워야 한다. 역사학자나 교육자들은 투철한 사명감이 있다. 하지만 이런 분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거의 대부분 사람들은 그런 사명감이 없다. 다른 민족과 비교했을 때 별로 내 세울게 없으면 민족에 대한 열정도 사라진다. 그래서 역사를 기록하여 전할 필요가 있다. 후세들이 그 역사를 공부하는 과정에 민족적 자부심이 생기고 민족 언어와 문자의 필요성도 느끼는 것이다. 그다음은 가정교육이다. 큰 틀에서 우리힘으로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라의 교육정책을 바꿀수 있는가? 없다. 교과서 통일을 막을 수 있는가? 없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오직 한가지, 가정에서 우리말로 대화하고 글을 익혀주고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는 방법밖에 없다. 더우기 한어(중국어) 교과서 통일은 좋은 일이다. 한어가 약해 바보처럼 살아온 조선족이 어디 한둘인가, 특히 연변출신 조선족일 경우 대학에 입학해서 한어가 약해 모든걸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현재 대부분 조선족은 중국말은 중국사람보다 못하고 조선말은 한국사람보다 못한다. 제아무리 똑똑해도 언어가 버벅대면 좀 모자라보인다. 조선족역사 공부외에도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중국사람 못지않게 정통하고, 모어를 모국사람 뺨치게 잘하고, 그외에 영어, 일어, 로어까지 4-5개국어를 어릴때부터 기본적으로 배워 구사한다면 그 누구도 쉽게 볼 수 없는 조선족만의 경쟁력과 정체성이 자리잡으리라 확신한다. 시대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는 민족만이 살아남는다. 우선 개인적으로 성장과 발전을 이루어야 민족도 지켜진다. 개인이 약한데 뭐로 어떻게 민족을 지킬것인가? ■상수리나무/ 교재를 전국통일교재로 통일하는 걸 찬성한다. 연변에서 쭉 조선족학교를 다니다 대학에 붙고보니 한어를 몰라 손해를 봤다. 선생님이 화학을 강의하는데 화학명사가 전혀 들어도 못 본 것들이고, 조선어로 배운 화학명사와는 발음이 하나도 비슷한데가 없었다. 처음부터 하나씩 익히느라 고생 했다. 외지 대학을 다니기 전까지 중국이 이렇게 큰 줄 몰랐다. 중국어를 제대로 못배운게 유감스러웠다. 조선족학교들에서는 조선어도 꼭 가르쳐야 하지만 기타 과목은 모두 중국어로 가르쳐서 학생들의 중국어 능력을 높이기 바란다. 나처럼 대학에 붙은 후 애먹는 일이 없길 바란다. ■버드나무/ 동감한다. 처음 외지에서 대학 다닐 때 한어를 몰라 대화가 안 돼 오해가 생긴 경우도 많고 싸운 적도 있다. 말이 잘 안 통하니 툭 하면 열 받고 제풀에 쌍소리부터 나가더라. 선생님의 말을 못 알아들어서 교과서만 들여다 봤다. 그나마 중문 글은 알기에 교과서 내용을 익히며 공부했다. 우리 애는 외지에서 조선족학교를 다녔다. 조선어 과문 빼고 모두 중국어 통일교재를 배웠고 강의도 조선어 빼고 모두 중국어로 했다. 평소 애들끼리는 중국어로 대화하고 집에선 우리말로 한다. 중국어 소통에 막힘이 없고 우리때보다 훨씬 더 잘한다. 우리말도 한다. 대학은 한국으로 유학갔다. 우리 아이 교육에 만족한다. ■봇나무/ 고향이 흑룡강성인데 연변에서 봤다는 민족역사책들을 나는 듣도 보도 못했다. 우리민족에 관해 배운 거라곤 오직 조선족학교에서 배운 조선어문 교과서 뿐이다. 또한 민족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본적도 고민해본적도 없다. 주변 친구들도 대부분 한족이다. 누가 만약 나한테 설득될만한 논리로 민족성을 지켜야 된다고 설득해 준다면 그 말을 따르겠다. ■비술나무/ 나도 마찬가지다. 길림성의 산재지역에서 살아서 민족역사책들을 하나도 모른다. 지금 민족성을 강조해도 주변에서 관심갖는 사람 하나 없다. 오직 나혼자만 떠든다. 우리애는 외지에서 쭉 한족학교를 다녔다. 집에서는 우리말로 대화하며 나름 애쓰고 있다. 티비에서 조선족이 나오면 나는 환성을 지르는데 우리애는 무덤덤하다. 그게 뭐가 어때서 하는 식이다. 하지만 나름 우리말을 약간 안다고 좋아할 때도 있다. 일본만화를 보면서 우리말과 일어가 비슷한데가 많고 우리말 밑천으로 일어를 쉽게 익힐 수 있어 좋아한다. 한족친구들에 비해 여러가지 언어를 안다는 점이 강점임을 인식하고 좋아한다. ■대나무/ 스위스는 관방언어만 4가지이며 스위스 아이들은 어려서 부터 학교에서 4개국어를 배운다. 유럽에서 스위스사람들은 인기 만점이고 몸값이 비싸다. 여러가지 언어를 안 다는 것은 강점이다. 개인능력을 높여준다. 정체성과 무관하게 언어를 하나 더 배워둔다는 것은 다 약이 되는 일이다. 개인을 위해서라도 우리말을 버리지 말고 잘 배워둬야 한다. ■시냇물/ 인민대표대회를 열 때 동시통역을 조선어로 한다. 대단한 대우이다. 신중국 건립 시 조선족은 항일투쟁에서 세운 공을 인정받아 큰 지분을 갖게 되었다. 마땅한 대우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현재 이 대우를 스스로 포기한 건 우리 자신이다. 가장 최근 인구조사에서 조선족은 인구가 10만명 감소됐다. 소수민족자치권리를 누리려면 소수민족 인구 비례를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이 비례를 스스로 깬 건 바로 우리 자신이다. 돈을 번답시고 외국으로 외지로 많이 떠났지만 경제 기반은 아직 다져지지 못한 상황이고, 대신 역사를 지키지 못했고, 문화를 잃어가고 있다. 모국이 있고 모국 문화권에 젖어있는 관계로 나라의 신임을 얻지 못하기에 정치권에서도 큰 제한을 받고 있다. 오직 할 수 있는 건 경제성장이지만 이마저도 아직 기반을 잡지 못한 상황이다. 그동안 기대왔던 한국기업이 유실되면 그다음 조선족 공동체는 또 어떻게 될지 심히 우려된다. ■박달나무/ 길림성 산재지역에서 조선족학교를 다닐 때 시험지는 조선어로 나왔지만 답안은 중문으로 썼다. 다들 큰거 얘기하는데 난 작은 거,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거 얘기하고 싶다. 민족어를 왜 배워야 하며, 민족어가 우리에게 어떤 이득을 가져다 주며, 민족성을 위해 개인적으로 작게 할수 있는 일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정책이나 교재 외 가장 쉽게 할 수 있는게 뭐가 있는지 그걸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냇물/ 유태인은 가족 중심적이다. 가족 중심으로 정체성을 지켜왔다. 조선족도 가족 중심의 민족 교육 운동을 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우선 민족 역사책이 필요하다. 우리말 도서관도 필요하다. 단체에서 우리말 도서를 기증받은게 있으면 전 구성원에게 개방하고 우리 아이들이 우리말 책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일어도 조선족의 경쟁력 제고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항일전쟁 때 조선족 군인들이 일어를 알았기에 전쟁의 승리에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었다. 우리말 주말 학교들에서 일어도 가르치면 좋겠다. 그러면 중영조일 4개국어를 장악하게 된다. ■뿌리있는나무/ 언어, 문자, 민족정체성을 왜 지켜야 하며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 우리가 지향하는 조선족의 공동체는 어떤 것인가? 구심점은 무엇으로 할 것인가? 많은 이들이 고민하고 갈등하는 문제다. 특히 구심점은 어려운 과제다. 다른건 모르겠고 한가지만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상이 있고 뿌리가 있다.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중국은 근성 없는 사람을 잡종 취급한다. 중국에서 사람 대접 받고 싶으면 꼭 자기 뿌리를 알아야 한다. 주류에 합류하고 동화되면 나라에서 관리하기는 좋겠지만 내심 뿌리를 모르고 근성 없는 족속이라고 우습게 볼 것이다. 중국의 이런 문화를 잘 알아야 한다. 이미 근성을 잃은 소수민족들이 있다.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떤가? 우리가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을 떠올려 보자. 별로 어렵지 않게 답이 나온다. 조선족은 우리세대까지는 정체성을 그나마 보존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진실된 시각엔 "쉽게 동화 안되는 뼈대있는 민족이다, 만만히 볼 족속이 아니다" 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며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또한 우리 아이들이 뭐로 벌어먹고 살건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조선족의 우세는 무엇인가? 인구수, 지능, 상술, 정치, 문화의 넓이와 깊이... 거의 모든 면에서 다른 민족에 비해 우세가 없다. 단 한가지 언어능력만큼은 '우세'가 가능하다. 우리 아이들은 경계인 조상의 유전자를 물려 받아 다른 민족에 비해 언어 습득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인지하자! 우리 아이들은 다중언어 능력자가 될 수 있다. 주류 편입이 모어 포기의 원인이 될 수 없다. 되어서도 안된다. 오히려 언어우세를 살려 주류에 들어가야 그 속에서 자신만의 자리를 만들 수 있다. 모어를 언어능력에 보탬이 되게 하라. 주의! 보탬이다. 아는거라곤 조선말 밖에 없는 경우와 중국어, 영어를 잘 하면서 조선어(한국어) 하나를 더 얹고 간다는 건 다른 얘기다. 후자의 경우 다른 사람들보다 날개 하나가 더 달린다. 그게 어디 쉽냐고 하겠지만 가정에서 부모 하기 나름 아니겠는가! 현재 외지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 아이들은 중국어 영어는 기본이고 좀만 부모들이 신경쓰면 모어까지 얹고 갈 수 있다. 동시에 여러가지 언어를 배운다는 건 어쨌거나 일정한 어려움이 존재하기에 언어에 순서를 매기면 된다. 1순위 중국어: 중국이란 대환경에서 우리 아이들이 가장 잘 통달할 수 있는 언어가 중국어다. 필수언어이며 한족처럼 해야 한다. 2순위 영어: 학교 환경이 있기에 2순위로 잘 배울수 있다. 중국어 처럼 통달할 가능성은 없겠지만 숙련되게 할 수 있다. 3순위 모어: 외지에서 한족학교를 다니는 이상 사회적으로나 학교에서 배우지는 못하지만 가정 환경이 있기에 모어도 배움이 가능하다. 중국어 통달, 영어 숙련, 모어 기본. 셋만 가져가도 어딘가. 주변에 이런 아이들이 많다. 그 속엔 우리애도 포함된다. 중국의 여러 중점대학교에 한국어 학과가 설치되어 있다. 남들은 머리 터지게 공부해서 대학에 가서 한국어를 배우는데 우린 왜 태어날때 부터 갖고 나온 멀쩡한 모어를 버려려 하는가? 왜 남을 주려 하는가? 바보짓이다. 스위스 4개국어의 경쟁력? 멋있다! 중국어, 영어, 조선어(한국어), 일어? 두말 필요없이 매우 이상적인 시나리오다. 가능만 하다면 적극 지지한다. 필요없는 언어는 버려지기 마련이다. 언어는 필요에 의해 존재하지 민족성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지는 않는다. 만들어질때부터 필요에 의해 만들어 진게 언어다. 민족성을 위해 배워야 한다고 창백하게 외치지 말고 우리 어른들이 아래 세대들에게 다중언어(모어포함)라는 경쟁력의 날개를 달아주어야 한다. 모어가 개인의 성장에 도움이 되고 실리를 가져다 준다면 누구나 버리지 않고 잘 배울 것이다. 조선족 아이들이 다중언어 능력을 살리면 기본상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본다. 창백한 구호를 외치기 보다 차분하게 따져가며 모어를 실리가 되는 쪽으로 인도하면서 민족성도 함께 살리는 노력을 해보자. ★모두가 인정하며, 실행 가능한, 조선족 구심점 만들기에 도움 되는 일 3가지★ 1) 우리 개인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 가정 내 민족 교육 실시하기(언어,역사, 문화) 2) 여러사람의 힘을 합쳐 할 수 있는 것: 민족브랜드를 만들어 경제적 뉴대감 형성하기(란주라면 참고) 3) 사회적으로 도움 받을 수 있는 것: 단체들에서 기증 받은 한국도서를 전 구성원 특히 아이들에게 개방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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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칼럼/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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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이 말하는 '조선족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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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여자를 건드리지 말라
- ●김희수(중국) 어릴 때 내가 살던 마을의 어느 한족 부부가 늘 싸움을 했는데 승자는 항상 아내였다. 그 시기에 조선족 여성들이 남편 앞에서 찍소리도 못했지만 한족들은 달랐다. 한족들의 경우 남자들이 아내 앞에서 찍소리도 못했다. 그 한족 부부는 싸운다 하면 동네가 떠들썩하게 싸우군 했다. 처음에는 집에서 싸우다가 아내가 매를 들면 남편은 무서워 밖으로 달아나군 했다. 나는 그 집의 아내가 남편을 밖에까지 쫓아오며 구타하는 장면을 서너 번 목격했다. 아내는 달아나는 남편을 따라잡은 후 한 손으로 남편의 멱살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남편의 뺨을 짝짝 소리 나게 때렸다. 그 시기에 한족 남자들이 아내에게 쥐여사는 공처가였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아내에게 폭행을 당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조선족의 경우 여자가 남편을 구타하는 일은 더구나 보고 죽자 해도 없었다. 그런데 개혁개방 후 세상이 달라졌다. 조선족 남자들도 아내에게 쥐여사는 과거의 한족 남자들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간 큰 남자 시리즈까지 나왔다. 반찬 투정하거나 아내에게 말대꾸를 해도 간 큰 남자가 되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여자들은 무섭게 변하고 있다. 1990년대에 연변에서 잠자는 남편을 도끼로 찍어 죽인 사건이 있었는데 지금도 생각하면 여자가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오죽했으면 남편을 죽였겠는가?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하고 그 여자의 입장에서 이해해 보려고 해도 그 잔인한 살인까지 용납할 수는 없다. 어느 날 퇴근하는데 한 20대의 여자가 길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때 지나가던 40대의 남자가 몇 초동안 그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담배 피우던 여자가 그 남자를 쏘아보면서 “보긴 뭘 봐?”하고 꽥 소리 질렀다. 여자의 고함소리에 겁에 질린 남자는 찍소리도 못하고 도망치듯 가버렸다. 작년의 어느 날 새벽 3시쯤에 떠드는 소리에 잠에서 깨여나 창밖을 내다보니 세 청년이 한 청년을 사정없이 구타하고 있는데 한 젊은 녀성이 곁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청년이 맞아서 반죽음이 되여서야 세 청년은 손을 떼고 가는데 그중 한 청년이 구경하던 젊은 여성을 보고 “저쯤 패주면 되니?”하고 물었고 그 여성이 흡족하다는 듯 “만족이요!”하고 대답했다. 작년의 어느 날 밤에 술자리가 끝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20대의 세 여성이 한 남성을 주먹으로 치고 발길로 차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금년 여름의 어느 날 밤에 또 한 20대의 여성이 손으로 한 남자를 가리키며 “이 아새끼, 죽여 버린다!”하고 고함치는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여자가 남자를 구타하는 건 일도 아니다. 이제는 여자가 어린이의 눈알을 뽑기도 하고 자신이 갓 낳은 핏덩이를 가차 없이 창밖으로 던져버리기도 한다. 중국에서 남편이나 동거남의 생식기를 잘라버리는 것은 희귀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여자가 남자를 구타하는 것쯤은 여기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여자가 무섭다. 여자에게 죄를 짓지 말라. 여자를 화나게 하지 말라. 함부로 여자를 건드리지 말라. 섣불리 여자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말라. 잠을 자다가 어느 순간에 여자의 가위에 거시기가 잘리거나 여자의 도끼에 죽음을 당할지 모른다. 폭력은 남자들만의 소유물이 아니다. 여성의 지위가 높아진 오늘날에는 여자도 폭력을 휘두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남녀평등을 주장한다고 해도 여성들이 남자들과 폭력 따위를 공유해서는 안된다. 남존여비사상이 지배하던 과거에 여자들이 아무리 수난을 당했다고 해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으로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 되며 그런 폭력을 정당화해서는 더구나 안된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 해도 남자는 남자다, 여자는 여자답게 온순해야 한다, 이런 뜻이 아니다. 남자가 담배를 피운다고 해서 여자도 평등을 주장하며 같이 담배를 피운다면 자신의 건강만 해칠 뿐이다. 마찬가지로 남자가 폭력을 휘두른다고 해서 평등을 주장하며 같이 폭력을 휘두른다면 결국 감옥행, 자신만 해칠 뿐이다. 그럼 여자들보다 10배, 100배는 더 많고 악렬한 남자들의 천인공노할 폭행은 묵과해도 좋단 말인가?! 단죄하려면 남자들부터 단죄해야 할 게 아닌가? 그래서 하는 말이다. 남자들의 폭행은 더없이 잔인하고 악렬하기에 본받지 말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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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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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여자를 건드리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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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화에 대한 긍정적 사고
- ●김인섭 중국의 개혁개방에 가속이 붙은 가운데 조선족 인구 감소는 여전히 현재진행형 일로를 걷고 있다. 이 현상을 두고 중국 정부는 의사일정에 상정시킨 지 오래고 여러 사회조직들과 수많은 지성인들이 부동한 분야에서 관심을 쏟고 있지만 뭇사람들은 막연히 지켜볼 뿐이다. 인구 급감으로 하여 많은 민족 관련 정책과 조치들이 늘 효과 반감이 되면서 민족자치지역의 존폐까지 의심하는 쑥덕공론 소문도 들려온다. 그러나 그 갈음으로 민족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이중 언어를 위시한 민족문화 무게가 더해지는 것이다. 현재 나타난 조선족 인구는 통계상의 수자로서 인구구조에서 혈연적으로 조선족이지만 민족교육을 이탈 하였거나 민족어를 상실한 인구는 반영하기 어렵게 되여 있다. 이들은 아직도 실질적 조선족으로 남았지만 민족문화생활이 어려운 상당수의 부류이다. 허나 민족문화가 아직 몸에 배어 있으면서 민족문화 완전 이탈의 한계선을 밟고 좌우동(左右动)하는 세대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엄연히 직시해야 할 중대 사항으로서 전사회가 염두에 두고 하나의 중요 과제로 삼아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민족교육 정책 수립에는 일반적 민족교육, 문화이탈의 방지, 산재인구의 문화교육, 여가의 문화교육, 탈 민족문화 가능의 동아리들에 대한 문화교육이 병행하는 대책을 세워야 하고 문화문맹들을 민족문화 반열에 복귀시키는 복합적 시책이 마련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조선족 문화인구의 실질적 감소를 억제하는 조치로서 인구감소를 방지하는 중요한 대비책이 된다. 인구의 절대적 감소와 민족문화 이탈로 민족사회는 공동체의 공동화, 민족교육의 위축, 민족문화 쇠락이라는 3중 위기를 맞고 있다. 이것은 사회 발전에 따른 시대적 아픔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적극적으로 그 발생을 최소화하고 미래지향적 전략을 펴야 한다. 지금 시급한 것은 아이들을 인위적으로 타민족 학교에 진학시키거나 또 교육 환경의 부족으로 아이들이 민족교육에서 제외되는 현상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이것이다. 조건이 구비되었음에도 아이들을 민족문화와 격리시키는 단 시적 행위와 어쩔 수 없이 후대의 민족교육을 포기하는 이 두 과제는 민족사회의 존속에 직결되는 중대사로서 장기적이고 치밀한 사업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 세차게 일고 있는 제4차 산업 혁명은 바야흐로 지능화 시대를 당겨오고 있다. 매개인은 자기의 개성과 장점을 키우며 자기만의 정체성을 가진 플랫폼(平台)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변혁의 혼돈 속을 무난히 통과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그렇다면 거기에 가장 필요한 정보력, 사고력, 팀워크(团队合作) 력, 리더십(领导力) 등 기질을 육성하는 데는 민족문화가 가장 적합한 정신 인프라(基础设施)라는 이 긍정적 인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새 시대에는 고학력이나 고 학위가 아니라도 여러 문화 터전에서 원활한 교류를 진행할 수 있는 유연한 정서 지능을 지닌다면 어느 분야에서 최고로 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적어도 생계 걱정을 해소할 수 있다. 한족과 조선족 이중 문화가 생존과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이 우세는 조선족만의 우수한 민족성이다. 우리 조선족은 나라에 기여하면서 중한 교류의 교두보 작용을 발휘하였고 민족사회도 발전시켜왔는바 이것은 우리 민족문화를 긍정할 수 있는 충족조건이 된다. 그런데 인구의 절대적 감소와 대량의 후대가 민족문화를 이탈한 결과로 인재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하는 수급 모순(需给矛盾)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이것은 인재의 양적 부족과 민족문화 수준의 저하라는 이중 부족 현상이 가져온 직접적 결과이다. 이것을 효용가치라는 측면에서 고찰한다면 민족문화와 민족 인재의 희소성 가치가 급등한다는 반증인 것이다. 인간은 교류 기능이 능란하고 범위가 넓을수록 더 보람 있는 삶을 영위하게 된다. 때문에 우리는 민족문화의 수용 능력, 자정 능력과 창조 능력을 지속적으로 키워야 한다. 기성세대는 후대들에게 민족문화의 길을 개척해 주기 위하여 물심양면의 노력을 쏟아야 한다. 진입 가능한 문화 세계가 넓다는 의미는 목표 선택에서 선택지가 많고 성공 확률이 그만큼 높아진다는 현실적 가능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조선반도(한반도) 남북과 동시에 교류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조선족만의 지정학적 강점으로서 반드시 반도의 평화 추세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불원한 장래 이 시대가 오면 조선족 사회는 새로운 전기를 맞아오게 된다. 그렇다면 민족사회 위기는 전화위복(转祸为福)이 되여 새 번영을 이룩하는 천재일우(千载一遇)의 호기로 되리라 확신하는 바이다. 전제는 민족문화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확립하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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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화에 대한 긍정적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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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 모국어에 대한 생각을 말한다
- ●김호웅(연변대학조한문학원교수) 요즘 인터넷을 달구고 있는 <<안티 이오스와 조선족>>(최학송, <<안티 이오스와 조선족>>, 길림신문, 2019.3.4.)이란 글과 <<우리말 굳이 배워야 하나>>(대가 숲을 이룰 때, <<우리 말 굳이 배워야 하나>>, zhixinzhe512.)라는 글을 읽었다. <<우리말 굳이 배워야 하나>>의 작자는 <<안티 이오스와 조선족>>라는 글에서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안티 이오스 장군의 이야기를 통해 연변을 비롯한 조선족 공동체의 붕괴 또는 부재를 기성사실화하고 있다. 안티 이오스는 천하의 장사였지만 대지에서 발을 떼는 순간 힘이 빠져 웬만한 상대에게도 번쩍 들려 바다에 처박힌다고 한다. 조선족 사회도 대지를 떠난 안티 이오스가 되어 버렸으니 우리 족보와 같은 것들을 일찌감치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 저장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조선족 공동체 재건을 위한 움직임이 들불처럼 타오르는 마당에 이런 말을 하는 친구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오늘은 주로 <<우리 말 굳이 배워야 하나>>라는 글에 대해 토론하고자 한다. 이 글은“누구도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두 번 발을 담글 때 강은 같은 강이 아니고, 그도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고대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리투스의 만물류전(万物流转)의 사상에 철학적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역사는 반복되며 역사는 오늘의 거울이 된다는 진리도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산해관이남의 대도시에 자리 잡은 젊은이들이 그 옛날 선비족(鲜卑族)처럼 강세문화 속에 깊이 들어가 스스로 발을 빼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전철을 밟지 않을까 생각한다. 선비족은 옛날 북방에서 우리민족과 이웃해 살았고 종횡무진으로 맹활약을 했다. 그들은 선후로 10여개의 나라를 건립했고 중국의 절반 강산을 통치했다. 하지만 오늘 중국의 56개 민족 중에는 선비족이 없다. 지금 선비족의 일부 후예들이 시버족(锡伯族)이라는 이름으로 신강, 요녕성과 길림성의 일부 지역에 남아있다만 그들은 이미 망망대해와 같은 중국에서 창해일속과 같은 존재로 되여 버렸다. 물론 <<우리 말 굳이 배워야 하나>>의 작자는 자신의 절실한 체험을 통해 산해관 이남의 대도시에 있는 조선족 젊은이들의 고충을 대변하고 있다. 현지에 조선족 유치원이나 소학교가 없으니 자녀를 다른 민족의 유치원이나 소학교에 보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설사 가정교육을 통해 우리말과 글을 배웠다해도 초급중학교, 고급중학교에서 대학교까지는 어차피 한어를 써야 하고 한어의 수준여하가 학업성적과 졸업배치를 좌우지하게 된다. 그러니 어차피 다른 민족의 유치원이나 소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키는 게 현명한 처사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절해고도와 같은 상황에서도, 디아스포라로 천애지각을 떠도는 경우에도 자식들에게 모국의 언어와 문화를 가르쳐준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유태인이 그러하고 중국인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제가 <<새는 좌우 두 날개로 하늘을 난다>>(김호웅, <<경계의미학과창조력>>, 연변인민출판사, 2019년 판.)라는 글에서 사례로 든 연변대학의 유일한 러시아인교수 다위도브선생의 자녀들이 그러하고 한국대전의 홍문장 중화요리집주인 왕 씨네 자녀들이 그러하다. 이중언어 구사 능력을 글로벌시대의 중요한 자본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대도시에서 끝끝내 자식들을 모국어를 아는 사람으로 키워냈다. 자식들에게 모국어를 배워주자면 적어도 자식을 가정에서나마 모국어환경에 노출시켜야 하는데 이는 우리 젊은 부모들의 목표와 의지여하에 달린 문제이다. 우리 젊은 부모들이 가정에서 중국어로 대화를 하기 때문에 자식을 모국어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드는 이다. 그런데 <<우리 말 굳이 배워야 하나>>라는 글을 보면 논리적으로 앞뒤가 서로 모순이다. 전반부에서는“이제 우리와 조선어의 관계는 가부장제혼인에서 벗어난 자유연애가 되는 셈”이라고 했다. 그러나 후반부에 와서는‘엄마의 언어’즉 모국어의 가치와 문화의 다양성에 대해 강조했다. 참으로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모국어를 버리고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게 바람직하다는 말인지, 아니면‘엄마의 언어’모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말인지 앞뒤가 서로 모순된다.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작자의 논지는 분명하다.‘강물’이 바뀌었고‘사람’도 바뀌었다는 것이다. 즉 세상이 변한 것만큼“누구도 우리에게 민족주의를 강요할 권리가 없으며 더욱이 우리 자녀들에게‘민족’을 부담으로 넘겨줄 필요는 없다”, “민족주의를 벗어날 때 우리는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주체성을 잃고 주류문화에 두 손을 들고 나앉은 사람들, 달갑게 주류문화에 동화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민족이란 역사성을 띤 개념이요, 민족주의 역시 모든 역사단계에서 다 부정해야 할 명제가 아니다. 민족이란 개념을 두고 많은 견해들이 대립, 충돌하고 있다. 원초론과 근대론이 대표적이다. 스딸린은 원초론적 관점에서 민족이란 역사적으로 형성 되였으며 공통의 언어, 공통의 지역, 공통의 경제생활 및 공통의 문화생활에서 보여준 공통의 심리자질을 가진 안정된 하나의 공동체라고 하였다. 하지만 베네딕트앤더슨은 민족은 근대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생겨난 역사적 구성물로서 그것은‘상상의 공동체’라고 하였다. (베네딕트앤더슨 저, 윤형숙 역, 〈상상의 공동체〉, 나남, 2003.) 앤서니스미스 같은 학자는 원초론과 근대론의 종합과 절충을 시도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원초적 요소에 기반을 둔 근대적 민족을 강조했다. 즉“민족은 공간적으로 위치 지어진 과거를 공유하는 전통을 기반으로 형성된 집단적 정체성”을 그 표지로 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민족은 근대에 와서 갑자기 나타난 이 아니라 근대 이전의 시간 속에 뿌리박은‘손에 잡히는 민족정체성’의 재료로부터 구성된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는 신화의 공유뿐 만아니라 역사적 기억의 공유가 있고 언어적, 문화적 전통의 공유라는 요소들이 있다고 하였다.(앤서니스미스 저,이재석 역, <<민족과 인종의 기원>>, 그린비, 2018.) 민족이란 이렇게 숙명적인 존재인가 하면 또 오랜 세월을 거쳐 그 구성원들의 삶의 둥지로, 운명공동체로 되여 왔다. 하기에 이어령선생은 민족은 옷처럼 추우면 입고 우면 벗어던지는 그러한 편의적인 존재가 아니라 잘리면 병신이 되는 손과 발과 같은 소중한 존재라고 하였다. 민족공동체를 잃었을 때, 자기의 민족적정체성을 확인할 없을 때 인간은 무서운 고통과 고뇌를 경험하게 된다. 조선왕조 인조왕시기 연경(燕京)에 파견 되였던 사신들이 이러한 아픔과 치욕을 경험한바 있고 알제리인의 후예이며 마르티니크 출신인 프란츠파농(1925~1961)이 이러한 아픔과 고뇌를 경험한바 있다.(프란츠파농 저, 이석호 역, 〈<은 피부 하얀 가면>>, 인간사랑, 1998.) 또한 김사량의 단편 <<뱃속으로>>, 이창래의 장편<<영원한 이방인>> 허련순의 장편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에 오는 주인공들이 그러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민족이 보존되고 그 민족이 강해야 그 구성원은 안정된 삶을 살 수 있고 사람답게 살수 있다. 민족 또는 민족국가를 잃었을 때 우리는 창씨개명, 치발역복과 같은 치욕을 받아야 했다. 민족이란 이처럼 소중한 이기에 우리 민족의 선열들은 민족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자기의 목숨마저도 서슴없이 바쳤다. 우리 조선족의 선인들도 중국의 자유와 해방, 모국의 국권회복이라는 이중 역사사명을 짊어지고 피 흘리고 목숨을 바쳐 싸웠다.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은 연변 땅에서 일어났고 우리의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은 항일부대의 주요한 성원들이였다. 이러한 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우리 후세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없고 공연히 우리 자식들에게‘민족’이란 부담을 떠넘기지 말아야 한다니 이게 말이 될까? 민족과 언어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언어는 사물에 이름을 부의하고 불명확한 상황을 명료하게 정리하며 애매모호한 대상을 분명하게 규정해주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1889~1976)는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해 "언어는 존재가 드러나는 장소다. 언어를 어떤 장소라고 한다면 존재는 그 안에 거주한다. 고 하면서 언어를‘존재의 집’라고 했다. 즉 모든 사물은 언어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고 보존할수 있다. 이처럼 언어는 민족의 역사를 담는 그릇이요, 민족의 얼을 담는 항아리이며 한 민족을 다른 민족과 구별짓는 가장 중요한 징표다. 하기에 외솔 최현배(1894~1970)선생은 "우리 말과 글은 우리의 얼”이라고 했고 당신에게는 "한글이 목숨”이라고 했다. 언어는 민족구성원들간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 될 뿐만 아니라 해당 민족의 사고방식과 심성(心性)을 가장 잘 드러낸다.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역사와 얼은 바로 우리의 말과 글에 고스란히 담겨져 살아 숨 쉬고 있다. ‘구술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도 있지만 말과 글이 없으면 우리의 유구한 역사도 내 가슴에서 너의 가슴으로 전달될 없고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얼도 그 모습을 갖출 수 없다. 언어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역사도, 문화도, 정신도 잃게 되고 그 어디에도 몸담을 수 없는 벌거벗은 존재로 된다. 중국의 주체민족인 한족은 서로 다른 방언계통을 갖고 어 남북 사이에 서로 말로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지금도 간혹 복건성 남부(闽南) 출신의 인사가 북방에 와서 연설을 하면 상용중국어(普通话)를 하는 사람이 옆에 앉아 통역을 해야만 현지 청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다. 그런데 한족이 어떻게 이 세계에서 가장 큰 민족으로 되였을까? 그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한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자는 지극히 중요한 문화통일의 역할을 했다. 한자에 내재한 일맥상통하는 안정된 계승성, 공용성과 민족성은 거대한 응집작용을 했다. 한자가 없다면 한족이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만약 한자가 표의문자가 아니고 표음문자였더라면 역시 강대한 한족이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유럽처럼 몇십개 민족으로 갈라졌을 것이다. 이처럼 말과 글은 그 민족의 흥망성쇠와 직결되는 문제다. 물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세계화의 바람이 거세차게 불어치고 있다. 지금 적지 않은 사람들은 바야흐로 국경이 없고 민족의 계선이 없는 대동세계가 된 줄로 착각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너나없이 한집이 되는 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아름다운 이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멀고먼 미래의 일이지 현실의 일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보면 세계화의 진전이 빨라질수록 그만큼 민족주의 물결이 거세차게 일고 있다. 세계화는 개별국가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반면, 민족주의를 야기하고 다문화주의와 병행하게 한다. 따라서 세계화와 민족주의(또는 다문화주의)는 오늘의 세계를 움직이는 두 바퀴 구실을 하고 있다. <<우리 말 굳이 배워야 하나>>라는 글에서도‘다양화 자체가 미덕’이라 했다. 그렇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은‘세계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이중변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켜든지 오보에를 불든지 팀파니를 치든지 자기특유의 개성을 갖고 독특한 소리를 내면서도 다른 악기들과 하모니를 이루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민족도 자기 문화의 독특한 개성을 갖고 독특한 소리를 내면서도 다른 민족들과 조화를 이루야 한다. 공자의 말 그대로 동이불화(同而不和)의 세계가 아니라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민족마다 최선의 민족국가를 이룩하고 최선의 문화를 일구어내서 다른 민족과 서로 교류하고 서로 도와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바라는 세계주의와 민족주의의 이중변주곡이요, 우리가 동경하는 미래상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훌륭한 민족정책을 펴고 있다. 우리 조선족만 해도 민족자치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고 민족의 언어와 문자의 사용을 법적으로 보장받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자신이 편의주의적인 발상을 가지고 스스로 굴러들어온 복을 차버리고 있다. 사실 우리말과 글처럼 아름답고 과학적이고 배우기 쉬운 언어와 문자도 세상에 별로 많지 않다. 총명한 사람은 하루아침에 깨칠 수 있고 설사 머리가 좀 둔한 사람이라 해도 열흘이면 깨칠 수 있다. 또한 컴퓨터에 기초프로그램을 깔아야 기타 프로그램을 깔수 있듯이 먼저 모국어를 확고하게 배워두어야 다른 언어도 쉽게 배울 수 있다. 이렇게 갈고 닦은 이중 언어의 능력은 우리 조선족의 양 날개로 된다. 그런데 일부 젊은 부모들은 모국어라는 한 날개를 애초에 꺾어버리는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정판룡 선생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게 바로 다문화주의 사상이다. 다문화주의는 전통적으로 공약(公約)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다름과 평등’이라는 가치의 조화를 추구한다.‘다름’을 이유로 차별하지 않고‘평등’을 이유로 동화를 강조하지 않는 사회, 다시 말하면 사회구성원 각자가 자기의 개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되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공유하는 사회이다. 요즘 말로 하면 다원일체의 조화로운 사회이다. 선생은 다문화사회에서 소수자는 다수자와 담을 쌓고 협소한 민족주의를 고수해서도 아니 되고 그렇다고 해서 그냥 낙후된 상태에서 다수자의 도움만 받을게 아니라 다수자와 적극 교류하고 힘을 비축하여 다수자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의 존중을 받는 존재로 부상해야 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이른바 평등을 이룸에 있어서 소수자의 주체적인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선생은 이러한 사상을 보다 널리 확산하고 우리 조선족의 피와 살로 되게 하기 위해‘며느리론’을 내놓았다.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중국에 시집은 왔으되 허구한 세월 친정 생각만 하고 시집살이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시집동네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 이와는 달리 시집어르신을 잘 모시고 남편공대를 잘하면서 아들딸을 많이 낳아 훌륭하게 키워내서 시집마을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이때라야만 비로소 친정을 도울 수 있고 친정마을과 시집마을에서 모두 사랑과 존중을 받을 수 있다.(정판룡,<<중국조선족문학의 성격문제>>,<<정판룡문집>>제2권, 연변인민출판사, 1997년 판.) 우리 조선족의 이중문화 신분을 염두에 둘 때, 또 디아스포라의 현지화는 역사의 필연이라고 할 때 정판룡선생의‘며느리론’은 우리 조선족의 바람직한 삶의 자세와 진로를 가장 형상적으로 풀이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다문화주의 사고방식에 입각해 정판룡선생은 중국의 거물급 학자들과 널리 교류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 나가서도 금발 머리든 까만 머리든, 파란이든 까만 눈이든 폭넓게 친구를 사귀이었다. 또한 제자를 끝까지 옆에 두고 싶어 하는 스승들과는 달리 그들이 자기의 날개를 키워 중국 유수의 대학이나 연구소에 훨훨 날아가 자리를 잡게함으로써 중국 경내 조선-한국학의 발전에 기여하고 우리 연변대학의 위상을 높이고 문화령토를 넓혀나갔다. 가는 떡이 커야 오는 떡도 큰법, 밤낮 우는 소리만 하고 받아먹기만 한다면 절대로 다문화사회의 주체가 될 수 없다. 허구한 세월 자포자기하고 주류사회에 얹혀사는 존재가 될 것이 아니라 자기의 정체성을 당당히 지키면서도 총명과 지혜, 헌신성으로 중화민족의 대가정에 기여를 함으로써 이 공동체의 존경받는 구성원으로 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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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 모국어에 대한 생각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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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정책과 이민정책
- ●김도균 우리 민족처럼 디아스포라를 이루고 사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역사적, 경제적 심지어 정치적 이유로 조국을 등지고 전세계 곳곳에 흩어져 부평초 같은 삶을 사는 동포가 750만 명에 이른다. 실무상 동포는 재외국민과 외국국적 동포로 나뉘는데 이는 국적 기준이다. 이런 배경으로 우리에게 동포정책은 각별한 관심과 포용 나아가 활용이 필요한 데 해외거주 동포는 외교부에서, 국내거주 동포는 법무부에서 어떤 경우는 서로 하겠다고 나서고 어떨때는 서로 자기 부처 일이 아니라고 우긴다. 법무부만 해도 동포업무를 전담하는 '외국적동포과'가 잠깐 생겼다가 사라지고 지금은 '체류관리과'에서 담당자 2명이 동포정책을 담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국내 동포정책이라야 비자정책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비자정책 하나 하나에 동포사회가 일희일비 하였고, 그나마도 출신국 동포간 차별과 불편으로 점철된 것이 동포정책의 현실이다. 동포들의 출신국에 따라 비자발급을 달리하는 재외동포법이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고나서 노무현 대통령과 (당시 문재인 민정수석)의 지시로 방문취업제를 시행한지도 14년이 지났지만, 동포들의 불편은 여전하고 최근에는 오히려 동포들에 대한 비자정책이 역행하고 있다. '이민동포청'을 만들어 동포라는 자산을 이민정책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활용하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정치인들 표 계산과 정부부처의 이해관계를 뛰어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여러번 입법을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현실 대안으로 법무부에 동포정책을 전담하는 '외국적동포과'를 부활시키고 동포들의 비자체계라도 서둘러 합리적으로 개편해야 한다. 외국 국적의 동포들을 이민정책의 틀 나아가 남북경협 분야에서 활용하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있음에도, 동포를 정부 부처의 업무활용이나 정치적 거래 대상쯤으로 치부하여 정책 후순위에 두는 것은 너무나도 국익에 반하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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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정책과 이민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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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농예인의 동상 그리고
- ●김 혁 찜통더위에 꺼둘린 7월 22일, 용정시 로투구진 용진촌 소기마을에서 최창호 선생 조각상 설립식이 조촐하게 펼쳐졌다. 허물어져가던 ‘사과배선조나무기념비’가 보수되었고 최창호 선생의 100년 고택도 다시 손길이 닿아 초옥의 운치를 보이는 가운데 그 고택의 뒤쪽 언덕배기에 ‘사과배의 선구자’로 정평되는 농예인 최창호 선생의 한백옥 흉상(胸像)이 건립되었다. ▲22일 오전 용정시 로투구진 용진촌에서 최창호선생의 조각상 (낙성) 및 사과배 종나무(宗树) 기념비 확장공정 준공식을 가졌다. 최창호는 1897년 조선의 함경북도 경성군 주남면 용정동에서 살고 있는 가난한 선비 최병일의 아들로 태어났다. 20세기 초, 일제의 탄압에 조선 리씨 왕조의 운명이 다해가자 최병일은 일가식솔을 거느리고 중국으로 이주, 1916년에 드디어 다다른 곳이 바로 그 지형이 버치 모양을 닮은 형국이여서 ‘작은 버치골’로 불리는 용정 로투구진 소기(小箕)촌이였다. 최 씨 일가는 화전을 일구어 첫해 농사를 지었고 지세 높고 양지바른 곳에 8칸 초가집을 지었다. 최창호네 집 뒤편에는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언덕이 있었다. 최창호는 그 언덕에 살구, 오얏, 배, 복숭아, 찔광이와 돌배나무를 서렬열로 심었다. 그로부터 소기골에 처음으로 과수원이 들어서게 되였다. 1921년에 최창호는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가져온 여섯 대의 배나무 가지를 김치움에 넣어 잘 보관하였다가 이듬해 봄이 되자 배나무 가지를 돌배나무에 접지하였다. 짚으로 싸고 삼으로 동여서 겨울나기를 시켰다. 그렇게 6년째 되던 해의 봄 3그루의 과일나무 가지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 세 그루의 과일나무가 연변에서 생성된 사과배의 단초(端初)를 열어놓았다. 이로부터 사과배는 연변은 물론 동북지역과 내몽골, 화북지역에 널리 전파되었고 아시아에서 가장 큰 사과배기지인 연변과수농장 만무과원이 용정에 조성되었다. 사과배는 국내외에 소문 높은 브랜드상품으로 자리매김했고 사과배산업은 연변 농업경제의 중요한 기둥 산업으로 간주되었다. 한 농예인이 접목의 힘으로 거칠고 바람 세찬 이 땅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주렁지게 한 새로운 품종이 바로 사과배이다. 150여년의 이민 정착 역사를 경유해온 조선족이 황무지를 눈물로 개척하면서 만들어 낸 지역 특산물로서의 사과배에는 조선족의 피와 땀, 애환이 담겨있다. 이렇듯 이민 민족인 조선족은 중국 문화의 가지를 자기 민족 문화의 뿌리에 접목시켜 새로운 문화를 창출시켰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중국 조선족을 사과배에 곧잘 비유한다. 사과배는 어찌 보면 자체의 특유의 생존 이념을 키워온 조선족 문화를 형상화한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년 세월을 경유해오면서 사과배는 중국 조선족의 개척정신과 창조정신의 상징물로 부각 되였고 사과배선조나무는 연변의 중요한 역사, 경제, 문화 유산으로, 소중한 향토교재로 각광받게 되였다. 이에 용정시정부에서는 지난 1987년 최창호 선생의 호흡이 서린 소기촌에 ‘사과배선조나무기념비’를 세웠고 1998년에는 연변주정부와 용정시정부에서 ‘사과배소개기념비’를 세웠으며 오늘에는 드디어 그 사과배의 ‘산파’인 최창호 선생의 기념석상을 세우게 된 것이다. 이로써 조선족 문화의 발상지 용정지역에는 모아산 기슭에 과수원을 건설할 구상을 무르익혀 오늘의 만무과수원을 일구어낸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임 주장 주덕해, 연변의 첫 반일시위운동의 선두에 섰던 조선족 화가 한낙연, 조선족 교육의 일번지 명동학교의 창시자 김약연, 겨레가 애대하는 민족시인 윤동주 등 명사, 명류들의 기념 동상이 들어서게 되였다. 이러한 동상들은 지역사회의 역사와 정체성을 우렷이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기념물들은 지역사회의 둘도 없는 랜드 마크가 될 것이다. 이는 단순히 돌을 쫏고 나무를 깎아 형상 하나를 세우는 행위가 아니다. 선대 혹은 당대 사람들이 이룩한 업적을 기려 정성껏 세운 동상은 역사를 기억하려는 지성인들의 정열과 민족심의 발현이다. 현실을 직시하면서 민족의 정체성을 새롭게 살리고 글로벌 시대 세계로 가는 조선족으로서의 자긍심을 높이는 일이다. 명예와 공훈에 걸맞은 기념비, 동상을 적지에 건립하는 일은 이곳을 찾는 시민, 타지의 관객들에게 지역사와 현대사의 산 교육의 장으로 될 것이다. 민족역사의 보존, 전승, 특히 지역사회의 위상에 걸맞은 기념물의 건립은 역사관, 민족관, 국가관을 제대로 정립하게 해주며 우리의 미래를 굳건히 다지는 찬란한 기념비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필자/김혁(재중동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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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과 그것이 남긴 미스터리
- ●김성훈 지난 10일 새벽, 서울 북악산 와룡공원에서 발견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죽음은 서울시뿐만 아니라 전반 한국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고 있다. 그것도 <3선에 성공하며 잘 나가던 박원순>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박원순ㅡ서울시장으로 3선에 성공한 이는 대한민국 사상 그 유례가 없었다. 그만큼 그는 대다수 서울시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인물이다. 또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거론될 만큼 그의 리더십은 인정받기도 했다. 2011년 10월 27일부터 3180일간 마라톤식 시장직을 수행해온 박원순은 안전과 복지를 최우선으로 하는 자신의 시정철학을 구축, 세인들을 놀래 울만한 굵직굵직한 큰일을 했다기보다는 <아름다운 재단>이나 <아름다운 가계> 등을 만드는 등으로 작은 일부터 시작하여 그 시정철학이 시민들의 피부에 와 닿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회의 복지개선에 왼심을 쓰면서 스스로 자신을 <최초의 복지 시장>이라고 선포하며 한국의 <기본소득정책(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균등하게 소득을 지불하는 정책 및 부동산 정책 및 기타 초점 문제)>를 추진했으며 반값 수업료, 무료급식, 청년수당, 도시재생, 사회 및 경제 기업의 조율된 조합과 원자력 발전소 수자 감소 등 많은 사회 혁신정책을 시행하여 온 것을 알려지고 있다. 이는 박원순 전 시장에 관해 필자가 대충 얻어들은 것들이다. 박원순 시장의 공적은 이 외에도 더 있으리라. 아니 엄청 헤아릴 수 없이 더 많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2014년과 2018년에 각각 재벌 정몽준과 김문수 전 경기도 지사를 따돌리면서 서울의 3선 시장이 될 가능성이 없었을 것이고 유망한 차기 대선 후보로 거론될 수도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런데 그렇게 <잘 나가던 박원순 시장>이 실종 7시간 만에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보도에 따르면 그가 성추행 사건에 연루되어 실종 하루 전에 경찰에 고소되었다. 그럴 수가?! 믿어지지 않았다. 필자는 지금도 그것이 믿겨지지 않는다. 만일 피해를 호소했던 전 여비서가 제공한 모든 것들이 사실이라면 이는 박원순 전 시장의 생애에서의 가장 큰 오점이 아닐 수 없을 것 같다. 현재 박원순 전 시장에 관한 각종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경찰의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때문에 경찰의 수사결과가 발표되기 전에는 아무도 섣부른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분석이다. 아니, 경찰의 수사결과가 발표되더라도 그것을 100%로 믿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이러한 미스터리적인 사건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 사회가 남녀 사이의 스캔들만 생기면 남자는 가해자로, 여자는 피해자로 거의 판에 박은 듯 떠들어대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전 여비서 사이의 성추행을 보면 지금까지 확실한 증거로 될 만한 것은 별로 없다는 생각이다. “마라톤을 할 때 여비서가 옆에 있으면 기록이 잘 나온다”, “나 혼자 혈압을 체크하면 혈압이 올라간다”, “속옷을 봉투에 넣어 집에 보내는 것을 여비서한테 시킨다”, “이상한 동영상을 보낸다” 등 이런 언행은 사회생활에서 너무나도 흔하게 파급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여자들한테서도 이와 비슷한 말들이 튕겨 나오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럼 여자들한테서 이와 비슷한 언행이 나와도 성추행이라고 몰아붙일 수 있단 말인가?! 필자는 오히려 이러한 것들을 끄집어 내여 쳐드는 사람들의 목적이 의심된다. 그리고 이번 사건의 막후에 그 어떤 정치적 세력이 개입되고 있다는 의혹도 배제할 수가 없다. 만약 필자의 의혹대로 정치적 세력이 개입되고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끝까지 수사하면서 까밝혀야 할 일이라는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이른바 성추행 사건을 보면 도덕적으로는 자아반성할 일이나 정치적으로 또한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일은 결코 아니라는 분석이다. 그리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이미 죽었다. 만약 그한테 용서 못할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죽는 것으로 자기의 <죄>를 이미 씻은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그가 왜 죽음을 선택했나 하는 것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주 : 본문은 본지의 주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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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과 그것이 남긴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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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어를 위한 시대적 도전
-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중앙민족대학에 조선어 문학과가 설립되었다. 그동안 조선어 문학과는 조선어 문학부로 성장하였고, 우리가 조선족일 수 있게 하는 우선 조건인 민족 언어와 문학을 지켜가기 위해 지금까지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민족은 역사적 기원, 생산방식, 언어, 문화, 풍속 습관과 심리적 정체성 등에서 나타난 공동 특징을 말한다. 통계에 따르면 문화 인류학자들이 제시한 민족 구성의 요소는 27개나 된다. 그중에 빈도가 높은 것이 5개인데 즉 “공동의 지역적 기원” 혹은 “공동의 조상”, “동일한 문화 또는 관습”, “종교”, “언어”, “인종 또는 형질적 특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민족을 형성하는 5대 요소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언어다. 언어는 문화현상 중에서 민족의식을 갖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된다. 언어 인류학자 사피어와 워프의 언어 상대성 가설에 따르면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일 뿐 아니라 의사소통을 통하여 감정을 공유하고 유사한 사유체계를 형성하게 한다. 언어는 인간과 동물을 구별시키는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다. 통신 전달의 체계는 동물들에게도 있지만 언어는 인간만이 소유하고 있는 고유 속성이다. 민족 언어는 민족문화를 민족 구성원들에게 공유하게 하고, 또 그것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해 주는 가장 중요한 매체이다. 문화와 언어의 관계에서 문화가 언어의 구조와 내용에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언어구조가 문화의 다른 측면과 사고방식에 미치는 영향도 매우 크다. 따라서 우리는 한 민족의 언어 행위를 통해서 그 민족의 사회관계와 사회구조 및 사고의 구도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 언어와 문화는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그만큼 언어의 중요성은 크다. 이민연구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다른 민족 지역으로 이주한 이민 집단이 민족 특성을 상실하는 순서는 제일 먼저 민족의 언어를 상실하고 그다음에 음식습관을 상실하며 마지막으로 가치관을 상실한다고 한다. 대도시로 들어온 조선족 가정의 청소년들이 제일 먼저 상실하게 되는 것이 바로 민족 언어이다. 150년이 넘는 이민 역사에서 조선어를 잘 공유해온 중국 조선족이 개혁개방을 맞이하여 대도시로 진출하면서 중국의 주류문화인 한족 문화와의 접촉과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민족 언어와 전통적인 가치관과 생활양식 등 문화의 유지와 보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모어(母語)를 사용할 때 가장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소수민족들의 언어가 보존돼야 세계적 인류의 지적 자산이 보존될 수 있다고 한다. 개혁개방이래 조선족 민족교육은 점점 위축되어가고 있다. 아직도 “중국에서 좋은 대학을 가려면 조선 어보다는 한어를 잘해야 한다."라는 생각 때문에 자식들을 어려서부터 한족 학교에 보내는 학부모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민족교육의 ‘불편한 현실’이다. 사실 대학 진학뿐만 아니라 대학 졸업 후 취직하는데도 조선어를 아는 학생이 모르는 학생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학부모들이 ‘조선어 무용론’이라는 함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대학 졸업생들의 취직률이 70%를 밑도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중앙민족대학 조선어 학부 졸업생들의 취직률은 계속 100%를 자랑하고 있다. 21세기는 다양한 민족문화의 가치들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시대여야 한다. 비록 세계화가 피할 수 없는 역사의 추세라 할지라도 그것은 여러 민족의 언어나 문화가 어느 한 언어나 문화에로의 접근이나 동화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다양한 민족들의 언어와 문화는 그 문화의 자주성에 바탕을 둔 동참과 협력이 토대가 되어 모든 민족들의 미래를 위한 생존전략으로서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언어와 문화의 획일화가 인류 문명에 끼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부작용은 인류문화가 갖는 언어, 문화적 다양성을 말살시킴으로써 인류가 선택할 수 있는 문화적 대안을 제한시킨다는 점이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150년 이상의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의 일개 소수민족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보했다. 이제 21세기에 진입하면서 조선족 사회가 살아남는 길은 세계화에 걸맞게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가는 동시에 민족 언어와 문화를 지켜가면서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출해가는 길밖에 없다. 그것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우리는 도전해야 한다. 필자/황유복 (베이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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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어를 위한 시대적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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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간부 앞에 왜 조선족이 붙었을까
- ●김희수(중국) 이미 많은 사람들이 언급했지만 일부 조선족 간부들은 자신이 조선족인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 같다. 그들은 조선글로 발언 고를 쓰고 조선말로 발언하면 자신의 문화 수준이 낮아지고 체면이 깎이고 명예가 손상되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반면에 한어로 발언하면 문화 수준이 높아지고 체면이 서고 명예가 빛나는 것으로 인지하고 있다. 조선족 간부는 조선족을 위해 일해야 하고 조선족을 대변하여 말해야 한다. 이는 조선족 간부로서 응당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질이다. 조선족인 것을 체면이 깎이는 것으로 여기는 순간부터 조선족 간부는 조선족이 아니다. 조선족 간부가 조선족이 아니면 간부로 존재할 수 있을까? 조선족 사회가 있어야 조선족 간부가 존재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있어야 조선족 간부가 존재할 수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있기에 민족 정책에 따라 조선족 간부는 소수민족간부 비례의 혜택을 받는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없다면 그 많은 조선족 간부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아닌 한족 지구를 살펴 보라. 조선족 간부가 몇이나 되는가? 조남기, 이덕수, 전철수 등 조선족 간부는 모두 연변조선족자치주 출신이다. 조선족 간부는 자신이 조선족이기에 그 자리에 간부로 설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조선족이 아니라면 한족들과 동등하게 경쟁해야 하는데 그 결과는 밀릴 것이 뻔하다. 하기에 아무리 한족말(중국어)로 발언해도 소수민족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에는 조선족은 간부로 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것을 깨닫는다면 더는 자신이 조선족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을 깨닫는다면 조선글로 글을 쓰고 조선말로 발언하는 것을 더는 체면이 깎이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을 깨닫는다면 자신이 조선족임을 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을 깨닫는다면 조선족을 위해 일하고 조선족을 대변해 말하려고 할 것이다. 조선족 간부는 단순한 간부가 아니라 간부 앞에 조선족이라는 무겁고도 영광스러운 이름이 붙어있는 간부이다. 조선족 간부, 왜서 간부가 뒤에 있고 조선족이 앞에 있는가? 이는 간부인 나보다 조선족이 먼저라는 것이다. 즉 조선족 간부는 조선족을 위해 일하는 간부, 조선족을 대변해 말하는 간부라는 것을 말해준다. 조선족 간부는 항상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간부 앞에 조선족을 붙여주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를 망각하면 자신이 간부로 설자리가 없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앞에 조선족이라는 무겁고도 영광스러운 이름을 달고 있는 조선족 간부라면 항상 조선족 간부로서의 사명감과 도의적 책임감을 느끼면서 조선족 사회의 언어, 교육, 문화 등이 발전하고 연변조선족자치주가 건재하도록 일조해야 하지 않을까. 조선족 간부들에게 간부 앞에 조선족이 붙어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또 명심할 것을 부탁드리고 싶다. 필자/김희수(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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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간부 앞에 왜 조선족이 붙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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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고국이 있어 동화되지 않는가
- ●김희수(중국) 고국(한국과 조선)이 있어 중국 조선족은 동화되지 않는다고 낙관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그럴까? 사실 중국 조선족은 지금 경제, 문화, 언어, 문자, 풍속 습관 등에서 주류 민족에 서서히 동화되여가고 있다. 농촌에서는 이농현상으로 농촌 경제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땅을 지키지 못하면서 우리 삶의 터전을 잃어가고 있다. 도시에서도 조선족의 민영경제는 매우 취약하다. 물론 대도시에는 비교적 큰 조선족 기업도 있지만 전국적으로 굴지의 기업이 없다. 더구나 연변에는 조선족 사회의 견고한 토대로 될 중대형 기업이 별로 없다. 조선족 대부분은 외국 돈벌이에 의거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족 경제의 취약한 상태는 경제동화를 보여주고 있으며 조선족의 취업, 교육, 과학기술, 문화 등에 영향을 주고 있다. 과거에는 우리 민족이 문화 수준이 높고 민족의식이 강했기에 우리 민족의 문화, 언어, 문자, 풍속 습관을 지키고 중국 땅에서 우수한 민족으로 당당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개혁개방 후 중국 조선족 사회는 급변하면서 인구이동, 인구감소로 민족교육체계가 붕괴되고 민족문화가 상실되어가고 있다. 동화를 막는데 가장 중요한 조선족 학교도 줄어들고 있다. 농촌학교는 물론 도시학교도 하나둘씩 폐교되고 있다. 조선족 공동체를 이루는데 가장 중요한 인구도 급감세를 보이고 있다. 우리 말과 글보다 한족 말과 글을 더 잘하는 아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조선족 신문, 잡지도 하나둘씩 줄어들고 있다. 이렇게 조선족 사회가 동화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지만 현재 중국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세대만큼은 동화되지 않는다. 우리 세대는 동화되지 않지만 다음 세대 혹은 그다음 세대에 가서는 주류 민족에 동회 될 수 있다. 우리 조선족에게 고국이 있어 동화되지 않는다고 낙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말 그럴까? 앞으로 우리의 아들이거나 손자, 증손자가 학부모가 된다고 하자. 그리고 그때에 가서 중국 조선족 인구가 줄고 줄어 자치주가 없어지고 조선족 학교도 폐교되고 우리 말로 된 방송, 텔레비전 방송도 없어지고 우리글로 된 신문 잡지도 자취를 감춘다고 하자. 이런 상황에서 미래의 아이들이 학교도 없는 우리글을 배우려고 하겠는가? 신문 잡지도 없는 우리글을 사용하려고 하겠는가? 그때 가서 우리글은 완전히 외국어(한국, 조선)로 된다. 우리의 아이들은 외국어를 배운데 해도 고 국어보다 영어를 먼저 선택할 것이다. 고국이 있어 동화되지 않는다고 낙관하는 사람들은 또 그때 가서 조선족들이 한국이나 조선으로 이민 가서 살면 되지 않겠는가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전체 조선족들이 모두 고국(남북통일이 된다고 해도)으로 가서 산다는 것은 현실적이 못된다. 그때 가서 고국으로 가서 사는 조선족들이 많아질 수는 있지만 중국에 남아서 사는 조선족들도 적이 않을 것이다. 비록 우리에게 고국이 있다고 하지만 앞으로도 중국 땅에 계속 남아서 사는 조선족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중국 땅에 조선족이 존재하는 한 조선족은 고국이 있다고 해도 언젠가는 만족처럼 동화될 것이다. 중국에 살면서 중국 말을 하고 중국어를 써도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면 되지 않겠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미 경제, 문화, 언어, 문자, 풍속 습관 등에서 완전히 동화된 상태에서 관념도 점점 희박해지면서 결국에는 동화되고 말 것이다. 만주족의 경우를 놓고 보아도 그렇다. 지금 만주족은 말로는 만주족이지 한족이나 다름없다. 이제는 200여 년 동안 중국을 통치한 과거를 자랑하면서 “나는 만주족이다”라고 하는 만주족은 없다. 대부분 만주족은 자신이 만주족이란 관념도 상실하고 있다. 동화는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우리는 지금 자기의 민족학교를 갖고 있고 자기의 자치주를 갖고 있고 자기의 방송, 신문, 잡지를 갖고 있어서 동화되지 않고 조선족으로 떳떳이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앞집 처녀 믿다가 장가 못 가듯이 고국만 믿고 동회 위기에 철저히 대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완전히 동화될 수 있다. 그때 가서 “중국 조선족”이라고 말할 사람, 불러줄 사람이 있을까? 필자/김희수(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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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고국이 있어 동화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