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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전주국제영화제 정준호-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 투톱체제 성공을 바라며
    독립영화의 요람 전주국제영화제가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로 전환해 정체성 확립과 대중성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지 관심을 받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는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민성욱 부집행위원장과 정준호 영화배우를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의결했고, 지난 26일 조직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은 시장실에서 위촉장을 전달했다. 마력은 동력의 단위로 높을수록 좋다. 이번 쌍두마차 체제가 앞으로 3년 동안 시너지 효과를 일궈낼 것으로 기대된다. 백제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 교수인 민성욱 신임 공동집행위원장은 전주국제영화제 출범부터 조직위의 사무국장 및 부집행위원장을 역임한 '지킴이'이고, 정준호 신임 집행위원장은 높은 인지도를 가진 대중성을 확보한 영화배우이기 때문. 어떤 조직이나 더 큰 발전과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시점이 있다. 세계 초일류 전자제품 회사로 대한민국을 빛내는 삼성이 만일 제일제당 시절처럼 사카린을 밀수해 설탕을 팔던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면 지금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202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비경쟁 위주로 실시됐고 올해 2022년 23회 영화제는 국제경쟁, 한국경쟁, 한국단편경쟁, 특별부문(한국 장편 다큐멘터리, 지역공모작품, 비경쟁 아시아 영화)로 진행되며 업그레이드 됐다. 2023년 24회부터 3년간 시행될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기존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보다 더 대중성을 일으켜 더욱 큰 소통을 통해 영화계 발전과 주최지인 전주 지역발전에 더 크게 기여하는 영광이 실현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쌍두마차 체제가 된 전주국제영화제는 전주시민의 선택을 받은 우범기 시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이끄는 마차다. 우 조직위원장이 전주시 발전을 위한 고뇌 끝에 내놓은 묘수라고 풀이된다. 시장은 시민의 행복과 시의 발전을 도모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에 대해 기대가 큰 반면에 걱정과 반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수립되자, 권해효 배우, 방은진·한승룡 감독이 이사직을 사퇴했다. 이사회에서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의결되었다고 사퇴하는 것이 영화제에 대한 진정성일 수도 있지만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지점이다. 고 자니윤(고 윤종승) 코미디언은 2013년 2월28일 해외동포들과 판문점을 방문한 후 가진 뒷풀이에서 "한국 사람들은 너무 똑똑해요.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이XX 안돼, 저XX 안돼 하는거에요. 일을 해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한국계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고 그의 인프라를 총동원해 조국 대한민국 관광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었으나 좌절된데 대한 의견으로 들렸다. 대한민국은 625전쟁 후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나라다. 지난 80년간 대한민국이 변화가 없었다면 우리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억압속에서 지옥살이를 하고 있었을 게 자명하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는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임기는 3년이다. 3년간 응원하고 3년 후 큰 성공과 발전을 이루면 박수를 치고, 변화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때 가서 비판해도 늦지 않다. 한국언론인연대 박상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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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30
  • "일본 Z세대 중국에 호감" 중국 호감도 세대별로 다른 원인
    ●오카다 미츠루(일본 저널리스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7일 방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3년 만에 처음으로 중·일 정상회담을 갖고 악화된 양국 관계를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기시다는 대중 관계 개선에서 반중 여론과 대중 강경 자민당 우파의 제약을 받고 있지만 반중 여론을 거론하면 일본의 Z세대(18~29세)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40% 이상으로 다른 연령층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Z세대의 정치적 의지가 선거의 키를 쥐고 있는 세계적 흐름을 보면 '반중 여론'과 '우파'에만 의존하는 기시다 외교가 위태롭다. 45분 동안 진행된 이번 일-중 정상회담은 3시간여에 걸친 중-미 정상회담에 비해 일본의 대중국 중요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일·중 정상은 회담에서 국방부 해상 및 항공 연락 메커니즘의 직통 전화선 조기 개통, 새로운 중일 고위급 경제 대화의 조기 개최, 새로운 중일 고위급 문화교류 협의 메커니즘 회의 조기 개최 등 몇 가지 공감대를 형성했다. 향후 중일관계 개선의 지표 중 하나로 정상 간 상호 방문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의 대중 관계 개선의 한 가지 저항은 '반중(反中)' 여론 고조다. 일본의 대중(對中) 인식 악화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각부가 매년 발표하는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에는 흥미로운 수치가 나온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발표된 조사에서 응답자의 20.66%가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지난해보다 1.4% 증가)고 답했다.그러나 연령별로는 Z세대 중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는 비율이 41.6%로 전체보다 배 이상 많았다. 60~69세 13.4%, 70세 이상 13.2%에 비해 Z세대는 중국에 대한 친근감이 높다. 그렇다면 왜 연령대에 따라 중국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싶다. 나는 젊었을 때(저자는 1948년생) 중국의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있었고,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속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타자' 위에 자신의 생각을 투영해 기대를 부풀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나 구미의 통치체계를 중국의 정치와 사회에 투영해 일본이나 구미의 기준으로 중국을 관찰하고 판단한다. 요즘 60~70대 일본인들이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Z세대는 생각이 다르다. 내가 가르친 대학생의 경우 태어나기도 전에 일본 경제가 침체에 빠졌고,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들이 철들었을 때 중국은 이미 미국을 추격하는 대국이 됐고 IT 기술에서 일본을 앞섰으며 애니메이션과 게임 품질에서도 일본을 추월하고 있다. 또 Z세대가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많은 곳에서 중국 유학생과 접촉할 기회가 종종 있다. 다시 말해 Z세대는 중국을 일종의 '대등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환상은 없다.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의 버팀목이 될 때 일본인 전체의 대중국 관념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쇠락이라는 역사적 변화, '탈아입구((脫亞入歐)'의식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대가 '2선 후퇴'하면 일본의 '반중' 여론도 달라질 것이다. 기시다 정권도 언제까지 반중 익찬 여론에 의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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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 강강술래는 야합(野合)의 축제였다
    한국국어사전은 강강술래와 강강수월래를 같은 말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강강술래는 한문 표기가 없고 강강수월래를 한문으로 ‘强羌水越來’로 표기하고 있다. 强은 강하다는 뜻이고, 羌(중국서부에서 양을 토템으로 삼은 민족이며 세력이 강해 늘 중원을 위협하여 한족정권은 그들을 오랑캐로 취급해왔음)은 오랑캐라는 의미이다. ‘强羌水越來’는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온다는 뜻이다. 필자는 한국국어학자 어르신들에게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즉 강강술래는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온 민속인데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오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아무런 연관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는 걸까? 답이 아닌 답이 하나 있긴 하다. 국어학자들이 강강술래를 한문으로 표기할 방법을 찾지 못해 본래 4음절인 강강술래를 음악의 필요에 따라 5음절로 늘린 강강수월래를 말도 안 되는 ‘强羌水越來’로 표기했을 것이다. 이런 억지춘향 표기현상을 가리켜 사자성어로 견강부회(牽强附會)라고 말한다. 강강술래를 ‘强羌水越來’로 표기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설명하려면 먼저 강강술래의 어원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강강은 본래 감감이다. 감은 감다, 감돌다 등등의 의미이며 감감은 감의 강조이다. 강강술래는 원을 그리며 빙빙 돌아가는 놀이이기 때문에 본래 감감술래였다. 감감술래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강강술래로 변음 되었던 것이다. 술래는 가운데서 눈에 띠를 두르고 숨은 자를 찾아내는 자를 일컫는 말이다. 한국국어학자들은 술래가 한자어인 순라(巡邏)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데 글쎄 썩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강강술래의 어원을 살펴보았으니 이번에는 강강술래란 도대체 어떤 놀이인지? 알아보자. 강강술래는 본래 순수 우리말이고 그 뜻은 원무를 의미한다는 데 포커스를 맞추고 유래를 찾아야 한다. 원무는 고대사회에 수많은 민족들이 보편적으로 추었던 춤이다.『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에서 저자는 원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영지주의자 예수는 미스테리아 입문식에서 원무를 이용하여 제자들을 이끈다. 그러한 입문식 춤은 이교도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두루 나타나는 것이다.” 현대의 한 권위자는 이렇게 말했다. “고대입문식 축제 가운데 춤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엘리우시스에서의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입문식 후보자는 중심에 자리 잡고, 다른 사람들은 둘레에서 춤을 추었다. 그것은 행성과 별들의 궤도를 흉내 낸 것이었다. 미트라스 미스테리아의 의식에서도 미트라스를 상징하는 입문자는 중앙에 자리 잡고, 황도의 12궁을 상징하는 12명이 주위를 돌며 춤을 추었다. <요한행전>에서도 그와 비슷하게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 예수가 신호를 보내면 사도들이 신성한 말 ‘아멘’을 읊조린다. 예수는 이러한 ‘원무’를 통해서 ‘수난’을 나타낸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것을 예수는 ‘신성한 비밀’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원무는 고대사회에 있어서 보편적인 춤이었으나, 그 형식과 내용 및 목적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위의 글에서는 원무가 이교도 입문식과 예수라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의 원무가 행성과 별의 궤도를 흉내 낸 데서 유래되었다면 동양의 원무는 달을 흉내 낸 데서 유래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달을 흉내 내는 원무를 추는 것을 도월(跳月)놀이라 한다. 민속학자 임동권(任東權) 씨는 고대인들의 도월놀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원시시대에 있어서는 달을 중심으로 하여 행사가 많았다. 상원과 추석이 그러했고 달 밝은 밤이면 모두 모여 유희를 즐긴 것은 우리 조상만이 아니고 지금도 미개사회사회에서는 모두 그렇다. 따라서 옛날 1년 중에서 가장 달 밝은 한가윗날 마을의 소녀나 부인들이 모여 만월과 같은 둥근 원을 그리면서 놀이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때에 노래도 부르며 뛰기도 했을 것이니 강강술래가 임진왜란 때에 비로소 창안된 것이 아니고 그 이전에도 민족전래의 유희로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강강술래처럼 대대적인 것은 아니나 달밤에 소녀나 소년들이 손을 잡고 뛰며 노는 유희는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러한 뜻으로 강강술래를 보면 문헌고증을 할 수 없어서 그렇지 함화진(咸和鎭) 씨가 추상한 것처럼 마한 때의 민족유희였을지도 모르며 마한이 아닐지라도 백제 또는 고려시대에 이미 전파되었던 놀이인지도 모르겠다.” 중국소수민족문헌인『묘속기(苗俗記)』에 도월놀이에 관한 기사가 있는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른 봄에 남녀가 들판에 모여 배우자를 찾는 것을 이름 지어 ‘도월(跳月)’이라 한다. 정월 초 3일부터 13일까지 모두 도월놀이 기간이다. 13일 도월놀이가 끝나면 남자는 갈대피리를 불면서 앞장서고 여자가 띠를 끌고 뒤따르며 장내를 세 바퀴 돌고나서 손잡고 대나무숲속에 들어가 먼저 야합하는 바, 이름 지어 ‘라양(拉陽)이라 부른다. 그러고 나서 임신되면 시집가고 임신이 안 되면 이듬해에 또 반복해서 도월놀이에 참여한다. 『귀주통지(貴州通志)』에도 위의 기사와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다. “화묘(花苗), 매년 이른 봄에 남녀가 들판에 모이는 것을 ‘도월’이라 부른다. 평평한 곳(平壤)을 택해서 월장(月場)으로 삼는다. 남자가 갈대피리를 불고 여자가 방울을 울리며 빙빙 돌면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서 하루 종일 즐긴다. 날이 어두워지면 남녀가 서로 짝을 지어 갔다가 날이 밝으면 헤어진다.” “백묘(白苗), 도월놀이 풍습이 화묘와 같다.” 우리는 전라남도 남해안 여러 지방의 강강술래도 역시 묘의 제족(苗之諸族)과 같은 순수한 도월놀이였으며 따라서 강강술래도 역시 청춘남녀들이 야합을 목적으로 한 놀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인은 야합을 음란행위로 간주하지만 고대인에게 있어서 야합이야말로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는 신성한 의무라고 여겼을 것이다. 중국 유명 학자 이중탠 교수는 이것을 ‘이른 새벽 모닥불 축제’라고 표현한다. 중국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위대한 공자님도 그의 부모가 매신을 제사하는 모임에서 만나 야합해서 탄생되었다고 한다. 『조선의 향토오락』에 의하면, 강강술래는 주로 상원과 추석, 즉 만월 시에 진행했다고 한다. 왜 강강술래놀이는 만월 시에 했을까? 중국신화연구자들에 의하면, 달은 여성의 생래규칙과 닮았다고 한다. 달이 이지러지고 차는 것은 여성의 임신현상과 닮았고, 또 여성의 월경주기는 달의 주기와 같다고 한다. 월경, 월신(月信), 월수라고 부르는 것은 달의 규칙과 같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달 속에는 생식을 주관하는 월정(月精)이 있는바, 개구리의 화신인 상아(常娥)가 곧 월정이라고 한다. 만월 시의 달의 모양이 아름다운 것은 달 속에 아름다운 상아가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며, 따라서 상아의 ‘출현’은 곧 인간의 생식을 관장하고 또 인간의 생식력을 왕성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강강술래가 만월 시에 진행된 것은 곧 고대인의 생식숭배의식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강강술래 참여자들이 본래 소년 소녀들이었다가 여자의 중심으로 된 것은 후대에 내려오면서 유교문화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두어 말하자면 강강술래는 순수한 우리말이며 원무를 뜻하며 원무는 곧 도월놀이며 도월놀이는 곧 남녀야합의 놀이었다. 후대에 내려오면서 소위 학자라는 어르신들이 영웅주의사상, 한문숭배사상, 유교사상의 덫에 걸려든 탓에 강강술래의 본래의 모습을 말살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는 고대문화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민족의 비극이다. 풍류인물이였던 세종대왕이 박연(朴堧)에게 고대로부터 내려온 민속을 채집하여 정리할 것을 부탁해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유생들이 그 귀중한 자료들을 전부 화롯불에 던져버렸다. 결과 오늘날 선조들의 수많은 풍부한 민속 문헌고증이 차단되었다. 그리고 한국인은 다재다난(多災多難) 했던 민족이어서 고유한 민속을 영웅주의에 덧씌워 풀이하다보니 역사가 유구했던 민속의 상한선을 기껏해야 임진왜란시기에 꿰맞추는 경향이 짙다. 이를테면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 여러 지방의 고유민속인 강강술래를 임진왜란시기 의병술에 능하고 전쟁에 공이 많았던 이순신 장군이 창안해낸 것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후세인들이 강강술래놀이를 하는 것은 이순신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한 행사라고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민속학자인 임동권 씨는 1960년대 두 차례나 전라남도 여러 지방을 현지답사 하였는바, 현지고로들은 강강술래를 이순신 장군에 의해 창안되었다고 믿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창호(金昌浩), 어석경(魚錫經) 등 학자들도 현지고로들의 말을 믿고 역시 그렇다고 주장했다. 한 가지 미묘한 것은 강강술래의 전파지가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로서 이순신 장군의 전적지와 맞물린다는 것이다. 허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강강술래는 그 상한선이 마한 혹은 더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결코 이순신 장군이 창안해낸 것이 아니고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한 놀이도 아니다. 다만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이순신 장군이 고유한 민속놀이를 의병술에 이용했을 것이다. 필자는 이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법무부 귀화시험 교재에 역시 강강술래를 이순신 장군이 창안한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이 될 이주민들한테 잘못된 역사교육을 시키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한국사회는 쩍하면 중국과 일본을 향해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하고 있는데 자기네들 역사를 자기네들이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으니 얼마나 비극적인가?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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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2
  • 한중수교 “50년”을 이야기한다
    ● 이 성 (By Star Lee) 오늘은 한중수교 30주년이다. 과거의 30년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愛恨情仇(사랑, 원망, 정, 원한)이 뒤섞인 두 연인 간의 멜로드라마와 같았다. 한 때는 서먹서먹했던 맛선 본 선남선녀처럼, 한 때는 애정행각이 지나쳐 주변사람들이 눈쌀을 찌프렸던 연인처럼, 또 한 때는 서로간의 오해와 불만으로 사랑이 식어가며 냉정의 시간을 갖고자 하는 커플처럼…. 어느 중국의 외교관이 사석에서 이런 농담을 하였다고 한다. 한국은 중국에 있어 매력적인 애인과도 같아 항상 그립고 가슴이 설레이지만 저 북방에 사는 본처를 생각하면 가까워지기에는 부담스럽고 떨어지려니 애간장이 탄다고 한다. 조금 불편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그것이 양국간의 애뜻하고 불편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필자는 한국에서 수십년, 중국에서 수십년 살아오면서 ‘한중수교’라는 멜로 드라마를 본방사수하면서 지켜봤던 사람으로 각별한 애착과 소감이 있다. 열혈 팬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평범한 서민의 시각에서 한중간의 과거 30년 미래 20년을 논하고자 한다. 제1화 1992~2002 연모의 시대 30년전 한중수교가 이뤄졌다. 양국 대중에 있어 40년전 전쟁을 했던 ‘적대국가’, 서로 정체성마저 부정했던 ‘괴뢰정부’와 수교한다는 것은 조금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서먹함과 생소함을 덜하게 했던 것은 88 서울 올림픽과 90 북경 아시안게임이였다. 그 당시에 한중수교가 중국인에 가져다준 가장 큰 변화는 경제도 아니고 문화도 아니였다…스포츠 경기에서 국가명칭이 남조선이 대한민국으로 바뀌였고 중공이 중국으로 바뀌였던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의 신북방정책에 힘입어 중국동포들의 한국 친지방문이 한중교류의 물꼬를 텄으며 뒤따라 한국 제조업 기업의 중국진출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동남아국가에 진출하려면 상당히 많은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극복해야 했지만 중국에서 수십년간 정착한 동포들은 한국기업의 중국 진출에 있어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말이 안통해도 현지에서 동포통역, 동포직원을 채용하면 모든 일이 다 순리롭게 풀릴것만 같았고 10억인구 상대로 한사람당 1원만 벌어도 10억원이 벌어진다는 차이나 드림에 벅차 북경, 상하이, 산동성, 요녕성, 강소성, 광동성 등 지역에 줄기차게 태극기를 꽂았다. 시험을 거치지 않고 빽으로 명문대에 입학한 학생이 잔혹한 대학생활을 맞이하게 되는 것처럼…중국진출의 열정과 자신감은 냉혹한 현실속에서 좌절하기 시작하였다. 세계의 역사를 보면 어느 나라도 신하나 내시에게만 의지하는 성군이 없었던 것처럼 언어가 통한다는 이유로 현지 동포직원에게 과도하게 의지하면서 구매관리, 고객관리, 직원관리를 소홀히 하며 많은 기업들의 경영이 난관에 부딪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는 일부 실패의 요인에만 불과하다. 20년전 어느 삼성출신 중국 주재원이 쓴 책을 본적이 있다..중국에서 실패하지 않는 비법 중에서 1위가 중국여인과 거리를 두라는 것이다. 주색을 삼가라는 말이 당연해 보이지만 이 역시 그 시기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의 수준을 여실히 들어냈다. 결국 21세기에 들어서서 많은 제조업기업들이 중국을 탈출(심지어 야반도주)하게 되면서 중국 제조업 진출의 열풍은 서서히 저물어갔다. 이로서 제조업이 테마를 이루던 한중간의 사랑 드라마 1화는 막을 내리며 다음의 10년을 그리는 새로운 막이 열렸다. 제2화 2002~2012 동거의 시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제조업의 중국 정복은 순탄하지 않았지만 한중관계는 갈수록 돈독해졌다. 조심스럽게 상대방을 알아가면서 사랑의 싹을 틔우던 연인은 이제 동거를 하기 시작한 것과 같았다.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10년간의 하드웨어 교류의 시대를 넘어 소프트웨어 교류의 시대가 막을 올렸다. 이때부터 한국음식, 한국문화, 한국패션이 본격적으로 중국에서 대중화되기 시작하였다. 한국 드라마, 한국 음악이 중국에서 서서히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중국보다 더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한국은 중국인이 흠모하는 나라가 되였다. 젊은 층은 한국 현대문화의 모든 것을 따라하고 싶어했으며 우호적인 외교관계도 한중양국 국민감정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북경 올림픽 전까지만 해도 경제력이 3~4위에 불과하던 중국이 미래 G2 가 될 것이라는 예측을 과대평가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때만 해도 중국은 일인당 GDP가 3000달러 조금 넘는 빈국이였고 국민들에 있어 국가가 부강해진다는 기대감만 있을 뿐 미국을 도전할 수 있는 초강대 국으로 성장할 것이란 자신감은 아직 턱없이 부족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한국 학생의 중국유학 붐은 최고조에 달았으며 21세기 초반 월드컵 진출, 올림픽 유치, WTO진입 3대호재가 터지면서 “중국이 미래다”라는 여론이 세상을 뒤덮으며 한국 내 중국어 교육기관들은 최대의 호황을 누렸었다. 북경의 HSK학원에는 한국인 수강자들로 북적였으며 모든 중국의 대학교에는 한국인 유학생이 항상 1위를 차지하였다. 중국인의 해외관광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늘어나면서 한국방문 관광객이 100만명을 돌파하기 시작하였고 재한 화교들은 중국과의 혈연적인 연고를 무기로 내세워 중국인 인바운드 여행과 쇼핑을 거의 독식하다시피 하면서 한중 관광산업의 새 시대를 열어갔다. 이 시기는 한중간의 관계가 가장 안정적인 시기였으며 외교관계, 문화교류, 경제교류 모든 면에서 엄청난 변화와 성장을 가져왔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동거를 겪으면서 서로 간의 단점들이 속속히 들어나면서 한중관계는 새로운 양상을 맞이하기 시작하였다. 제3화 2012~2022 모순의 시대 20년간의 동거동락을 겪으며 한중관계는 새로운 시기에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한국에서의 중국열풍도 만만치 않겠지만 중국에서의 한류는 최고조에 달하며 주변국가의 질투를 살 정도로 뜨거웠다. 외교관계 같은 정치적인 요소를 떠나서 대중문화적인 영향력을 봤을 때 한국을 10으로 보면, 미국이 7, 일본은 4, 기타국가 합치면 3이였다. 이때가 한중 양국은 과거 수천년 교류 역사상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 시기였을 것이다. 지난 역사상 한중관계 가장 가까웠던 시기는 아마 명나라 때였다. 明史를 보면 그때의 한중관계를 이렇게 평가했다 “他國不敢望也”(다른 나라가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밀접했다). 21세기에 들어서 한중관계가 바로 이렇게 “타국불감망야”가 된 것이다. 그러나 중국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物極必反(어떤 사물이든간에 도가 지나치면 그 반대로 바뀐다) 한중관계는 지나친 열정시기를 겪으며 결국 그 반대로 돌변하게 된 것이다. 한중관계는 정치인들과 경제인들만의 파티가 아니라 대중 속에 그 뿌리가 있다. 한중관계의 밀접함은 대중문화에서 여실히 반영 되였다. 중국의 방송을 켜보면 10대 예능프르그램 중 8개 한국 프로그램 포맷을 번안한 것이였다. 한국에서 인기있는 무한도전, 나는 가수다, 복면가왕, 진짜 사나이, 아빠 어디가, 슈퍼맨이 돌아온다, 런닝맨, 히든싱어 모두 중국에서 그 모조품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단순 도용이 아니라 대부분 저작권료를 주고 사들인 것이였다) 저자는 이런 광경을 목격하며…드디어 올 것이 온다는 안좋은 예감이 들었다. 한국 방송에서 중국의 예능 포맷이 80% 차지하고 중국 연예인이 한국 드라마 주연들을 독식한다면 한국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결과는 뻔하다…엄청난 후폭풍이 휘몰아치게 되는 것이다...그러한 전략적인 타산이 없이 2020년 마스크 붐 때 너도나도 마스크 사업하듯이 중국의 방송사들은 무분별하게 한국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결국 경착륙이란 국면을 맞이하게 되였다.. 사드사태는 다들 아는 내용이니 여기서 거론안하겠지만. 사드를 빌미로 행해진 한한령은 사드라는 계기를 이용했을 뿐이지 절대로 사드만이 불러온 결과가 아니라고 본다. 외국의 문화가 본국의 문화 발전공간을 무참히 짓밟고 본국 문화의 생존토양을 파괴했을 때는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전세계 어느 문화도 한류가 중국에 끼친 영향처럼 큰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아무리 미국이 문화 선진국이라고 해도 영국과 멕시코의 문화를 이처럼 송두리째로 바뀌지는 못했지만 이 밀월기의 한국은 중국에서 그런 것을 이뤄냈다. 이는 칭찬이 아니다…오늘날의 국면을 자초한 도화선이라고 본다. 2016년 6월까지만 해도 태양의 후예를 정점으로 한류는 중국을 점령하면서 문화 식민지를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이 과열된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사드’가 그 ‘총알받이’가 된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2016년 7월 사드배치를 발표하면서 중국 정부에 한류를 경착륙시킬 명분을 주었다. 과도한 한류의‘횡포’를 지켜보던 중국 정부는 사드 사태에 대한 1차 타격목표로 한류 문화를 지목하게 되었다. 한중경제교류에 있어 한국문화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중국의 젊은 세대에 미치는 영향은 간과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음으로 부득이 손을 보게 된 것이라고 중국국내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한한령의 실시가 6년 지나면서 중국은 자국문화가 빼앗긴 고지를 되찾으며 포스트 한류시대 중국 본국 문화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주식시장에 청소부 법칙이란 재미있는 룰이 있다. 즉 모 주식을 청소부마저 관심가지고 샀을 땐 그 주식을 과감히 매각해야 한다는 것이다…즉 과열은 과냉을 초래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세번째 10년은 한중관계가 파란만장한 애정 스토리를 전개하는 과정이다. 곧 결혼을 할 것처럼 뜨겁게 사랑하다가 상대방의 단점이 하나 둘씩 보이고 거기에다 양가 부모의 반대, 주변인들의 험담, 자기 정체성의 약화를 겪으며 과연 이런 사랑이 진정으로 행복한지를 느끼게 하는 고비를 겪게 된다. 그 전환점이 사드라는 돌발사태로 인해 발생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계기일뿐 예고된 결과라고 말하고 싶다. 한중관계는 지나칠 정도로 뜨거웠던 것이 문제라고 본다…중국이 소위 혈맹이나 전통우방국가라고 이야기하는 북한, 파키스탄, 라오스 등 국가와의 관계를 보면 한국처럼 가깝게 지낸 적이 없다. 물론 이는 한국의 문화적인 선진성에서 유래되었지만 이러한 과도 밀접한 관계는 서로 간의 기대를 지나치게 부풀리게 되고 판단을 흐트리게 되며 상대방과의 문화적인 차이, 제도적인 차이를 약화시키다가 특정 시기에 특정 계기로 그 모순이 폭발하게 된 것이다. 사드는 한국의 친중파를 피말리고 씨말리게 만들었으며 중국의 민심을 한순간에 떠나게 만들었다. 또한 한국국민도 덩달아 중국을 불신하기 시작하였으며 중국과의 사랑이 결혼대상자에서 그냥 친구로라도 지냈으면 좋겠다는 관계로 강등하게 되었다. 제4화 2022~2032 냉정의 시대 올해가 한중 두 국가의 멜로드라마가 방영 된지 30주년을 맞이하는 시기이다. 공자님은 30이립(三十而立)이라고 이야기하였는데 군자는 서른살이 되면 가정을 이루고 철이 들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30년전 경제적으로 막상막하하던 중국은 이젠 어느덧 한국 경제력의 10배가 된 G2국가가 되었고 중국과 수교하면 큰 이득이 생길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이젠 국운을 좌우지할 만큼 중요한 국가관계로 부상하게 되였다. 중국의 속담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三十年河東,三十年河西(삼십년은 하동에서 삼십년은 하서에서). 이제 한중관계는 30년간의 사랑과 원망을 겪으며 성숙된 어른이 된 것이라 본다. 또한 한중관계라는 고정적인 패턴도 이젠 30년의 역사를 겪으며 새로운 30년을 맞이하게 된다. 미래의 한중관계는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 이 글에서 필자는 단순히 한중관계 과거 30년을 돌이켜 보는 것뿐만 아니라 미래 20년간 한중관계에 대해서도 전망을 적고자 한다. 30년전 한중 수교당시 한국은 미국의 눈치를 볼 필요없이 자유롭게 중국과의 관계를 정립할 수 있었지만 어느덧 미국과 대등한 체격으로 성장한 중국이 미국의 최대 경쟁자가 되면서 한중관계에 있어 새로운 변수로 등장하게 되었다. 현재 한중관계는 항상 미중관계, 한미관계라는 변수들을 고려해가면서 대응해나가는 관계로 변모되면서 한국 정부에게 새로운 숙제를 마련하였다. 한중관계의 30년은 사실 두 연인이 맞선을 보면서부터 사랑에 빠지고 동거하고 서로 의심하고 관계가 나빠지는 식상한 멜로드라마의 스토리를 연출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파혼하게 된 것이다. 앞으로 다시 관계가 좋아질 수 있을까라는 시청자들의 궁금증이 많겠지만 필자는 이제는 과거로 돌아가기 어렵다고 본다…사드문제가 해결되고 양국 국민의 감정이 회복되었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10대부터 시작하여 20대를 겪으며 철없이 사랑에 푹 빠져 정신 못차리던 시기를 넘어서 이젠 성숙해졌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한중양국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서로 다른 가문에서 태어난 연인으로 사랑을 이루기엔 너무나 많은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어찌보면 양국의 관계라는 것은 무거운 결혼보다 서로 애뜻한 정을 주고받는 애인관계가 더 아름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핀란드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어떻게 스웨덴을 평가하냐고 물으니 핀란드 남자는 스웨덴 남자들은 대부분 게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필자가 핀란드 사람은.스웨덴 사람을 좋아하지 않은 것이냐 따지니 하는 말이 “사이좋은 이웃국가가 없잖아요”라고 대답했다. 정말 그런 것인가? 중국의 주변국가 중 중국을 좋아하는 나라는 몇이 되는가? 또한 한국의 이웃국가 중 한국을 좋아하는 나라는 얼마인가? 아마 답은 머리 속에 떠올랐을 것이다. 강대국 속에서 생존과 발존을 모색하는 상황은 21세기 20년대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국왕조의 전환기에 한반도 왕국이 항상 겪던 일이였다. 한나라와 흉노를 사이 둔 고구려, 고구려와 당나라를 사이 둔 신라, 거란과 송나라를 사이 둔 고려, 원나라와 명나라를 사이 둔 조선, 청나라와 명나라를 사이둔, 조선 고비마다 지혜롭게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전략을 모색하며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 사직을 지킨 한반도의 왕국은 이 시대의 미중 양국의 경쟁구도 속에서 슬기롭게 난관을 이겨낼 것이라고 본다. 물론 그 과정이 험난하고 고달프고 마음이 힘들어도 말이다. 그것이 이 반도의 동포들이 회피하기 힘든 숙명일 수 있겠지만 그런 고난 속에서 더 강인해지고 똑똑해지는 법이다…그러한 차원에서 한반도는 중국왕조보다 더 강한 생명력을 가졌었다. 이 10년은 중국이 미국을 초월하여 세계 최대 경제강국으로 부상하는 시기일 것이다. 물론 PPP방식으로는 10년전에 이미 미국을 초과하였지만 허영심이 강한 백인은 실질보다 명목을 더 중요시한다. 그래서 올림픽에서도 자신에게 유리할때는 금메달로 순위 매기지 않고 메달수로 순위를 매긴다. 미쏘 갈등은 백인 내부 이데올로기적인 모순에 불과하다면 미중 갈등은 문명의 시프트를 상징함으로 엄청 신경쓰고 있는 것이다..문제는 이러한 동양 문명의 시프트가 10년 안에 이뤄질 것 같은 두려움에 빠지면서 오늘날의 국제관계를 혼돈에 빠뜨리게 만든 것이다. 서양문명은 중국의 부상을 저지하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겠지만 14억 인구인 중국의 발전 모멘텀을 막기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 있어 설마 중국이 경제적으로 넘버원이 되었다고 하여 엄청난 세계정치경제지형의 변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한국은 수천년간 겪어왔던 것처럼 세계의 정상으로 복귀한 중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지만 이는 하나의 축복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전세계에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4대 강국이 에워싸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거인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총각이라고 생각하기 보다 여러 미남들에 의해 에워싸인 미인이라 정의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는가? 한국은 중국, 미국, 일본, 러시아 모두에 있어 항상 존중하고 아껴주고 자기 편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국가이다…드라마의 한장면이 떠오른다…어느 남자가 미인을 넋이 빠져 바라보다가 그 여성이 불쑥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시무룩해진 장면… 역시 미인은 싱글일 때가 더 매력적이다.. 정치적인 이야기를 조금 가미하자면 이 시기에 한국은 친미, 친중, 친일을 논하기 보다 모든 사안을 개별적으로 쪼개 국익에 부합되고 대다수 국민의 이익에 부합되고 실보다 득이 더 많은 것만 골라서 사안별로 입장을 취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이유는 “미인은 싱글일 때가 더 매력적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전세계의.미인 선발대회엔 미쓰만 참가할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시기는 또한 포스트 코로나의 시기이다. 포스트 코로나의 최대의 수혜주는 무엇인가? 두말할 것 없이 관광일 것이라 본다. 중국의 코로나 봉쇄가 해소되고 해외 관광이 자유로워지면 해외관광시장은 과거의 5배로 커질 것으로 예상하며 연간 5억명의 중국인이 해외 관광을 나설 것으로 본다. 코로나 기간 동안 힘든 민생을 무엇으로 달랠 것인가? 내부적인 지원책과 개혁만으로는 역부족일 것이다…외부적인 힘을 빌어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것이 답이 아닌가 생각한다. 꿈 같은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2023년 중국관광객 5천만명이 한국 방문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때 되면 한국의 대부분 서비스산업, 상당수 제조업이 혜택을 볼 수 있다. 코로나로 인해 식어간 모든 상권이 관광산업의 부흥으로 인해 엄청난 호황을 누릴 것이 틀림없다. 중국이 밉든 곱든, 인접국가로서 최대의 고객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중요한 것은 중국이란 시장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부의 지침대로 움직이는 대형 시장임으로 한중관계의 꽃길 같은 미래만 꿈꿀 것이 아니라 그 꿈이 현실이 되도록 모든 이가 그 밑걸음을 깔아야 한다. 그 사이 맺힌 것도 많고 얽힌 것도 많고 섭섭한 것도 많겠지만…연인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포스트 코로나를 맞이하며 한중 양국이란 연인이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는 시기이다. 농담하나 하겠다. 오래 전에 헤어진 연인이 전화 올 땐? 정답은 “다단계 영업”이라고 한다….이것이 제 4화의 줄거리이다. 제5화 2032~2042 격변의 시대 2032년의 세상은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 10년후의 세상을 예측하긴 쉽지 않겠지만 현실을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중국의 부상은 모멘텀에서 현실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으며 미국은 여러가지 내부/외부적인 요인으로 말미암아 순탄치 않은 10년을 겪으면서 과거와 같은 영광을 누리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북한에 대한 예측은 항상 어긋났음으로 변수가 아닌 그냥 무시해도 좋은 상수로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또한 한국은 일인당 소득이 4만 5천불이상의 선진국으로 도약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한중관계는 10년의 냉정기를 겪으며 새로운 시기에 들어설 것이라 보는데 학계나 정계에서는 여기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사람이 없는 것 같아 좀 안타깝다. 물론 예측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담대한 가정을 전제로 새로운 세상을 분석하며 한중관계를 다시 짚어보고자 한다. 지금 중국은 미국의 압박 속에서 어렵게 생존의 틈을 찾아가고 있는데 가장 큰 아킬레스건은 바로 반도체이다. 그러나 미국의 봉쇄가 과연 주효한지를 심각히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초기에는 중국에 대한 반도체 봉쇄를 통해 중국의 성장을 늦출 수는 있겠지만 중국이란 거대한 공룡의 돌진을 막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10년 후 중국이 만약 반도체의 독립을 이뤘을 때 그때 세계의 패권은 진정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문제는 기술의 초격차를 지향하는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미국의 영향 아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중국의 오기를 불러일으켜 10년의 시간으로 그 기술격차를 극복했을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냐는 고민을 해보았는가? 실제로 지금 중국인 이미 자국기술력으로 7나노 반도체 파운드리를 이뤄냈다. 아직 삼성과 TSMC와 상당한 격차가 있지만 중국 상하이 중심국제반도체 회사의 리더가 바로 TSMC와 삼성의 기술혁신을 이뤄낸 CTO 량멍숭이란 사실이다. 반도체는 하나의 산업기술에 불과하지만 미래 10년 심지어 50년간의 국제관계를 재정립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요소 때문에 미중간의 디커플링이 쉽지가 않고 또한 국제관계의 이합집산이 이뤄지고 있다. 과거 20년간 한국은 항상 중국의 최대 수입국이였으며 중국은 한국의 최대 흑자국이였다. 중국이 미국에서 수천억달러를 벌어오면 거기에 한국이 수백억달러를 인출했던 구도였다. 그러나 올해에 들어서서 한중 교역은 처음 적자로 돌아섰다. 이는 액시던트가 아니라 이제는 자연스러운 모멘텀이라고 본다. 그동안 한국이 중국으로 수출한 제품 중 대다수는 중간재였다. 특히 미국으로 수출하는 비중이 제일 컸다. 그러나 미중갈등으로 인해 미국의 하이테크 중국제품 수입이 줄어들면서 중국의 한국 중간재 수입도 줄게 되었고 중국 자체 생산 원자재의 발전은 한국산의 수요를 감소하게 만들었다. 이런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한국의 산업은 과거의 패턴 그대로 작동하고 있지만 중국은 이미 크게 변하고 있다. 과거 20%이상 차지하던 삼성 핸드폰의 시장점유율은 0.5%로 떨어졌고 인기가 절정에 달하던 현대기아차도 이젠 중국차와 가격을 겨뤄야 하는 현실로 되고 있다. 이마저도 참담한 현실인데 10년 후는 어떻게 될 것인가? 현시점에서도 중국은 세계 최대의 핸드폰, 배터리, 전기자동차 생산국이다. 이는 이미 양적인 우위를 벗어나 질적인 우위라 내달리고 있다. 그럼 10년 후면…믿고 싶지 않겠지만 중국기업은 중국 방방곳곳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의 악몽이 될 수도 있다. 과거 신발이나 가전처럼 말이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도 아직 초격차를 운운하고 있다. 초격차는 이 10년간은 유효하지만 다음 10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초격차가 무격차가 되면 다음은 뭐로 먹고살 것인가? 전세계 역사상 어느 국가도 이처럼 초고속으로 성장하면서 글로벌 시장을 잠식한 이웃국가를 마주한 사례가 없었다… 중국의 위협은 현실뿐만 아니라 미래까지도 커버될 날이 멀지 않다. 삼성보다 싸고 좋은 메모리, 스크린, 핸드폰, 현대보다 싸고 좋은 자동차, 로보트, 한화, SK, 롯데, LG보다 싸고 좋은 화학원료의 메이드 인 차이나가 세계를 석권할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필자는 중국의 위대함을 칭송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 무감각하고 근거 없는 자신감이 팽배한 이 시대의 풍조를 바로잡고 싶을 뿐이다. 미래 10년후의 한중관계는 지금 겪어보지 못했던 심지어 과거 수천년간 겪어 보지 못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것이라 본다. 역사 속에서 한반도는 현재의 중국처럼 나락에 떨어졌다가 다시 정상으로 복귀한 시대를 겪어보지 못했다. 미래의 10년을 대비하려면 대한미국은 어마어마한 중국전문가를 양성해야 하고 중국의 산업구조 산업발전을 제대로 분석하고 대응해야 한다. 중국과 등진 경쟁자가 아닌 중국이란 거대시장과 거대경장 속에서 자신의 포지셔닝을 제대로 하고 변화를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특공대가 되야 한다. 중국시장과 생산과의 융합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분석해야 한다. 이는 특정 기업만이 아니라 전체 국가와 국민적인 차원에서 다뤄야하는 숙제이다. 이 숙제를 잘 푸냐 못 푸냐는 미래 10년뿐만 아니라 미래 100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 현재 반중정서가 팽배해 있는 시기에 중국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날 따라 줄어들고 중국 전문가들도 갈수록 주목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중국은 어둠속의 도둑처럼 조용히 질주하고 있지만…대한민국은 태평성세의 연예가무에 빠져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걱정이 든다. 사드 때가 위기이가? 진정한 위기는 다음 10년이라고 본다. 중국이란 거대 공룡을 옆에 두고 과연 몸집이 작은 파충류가 먹이를 구할 수 있을 것이란 현실적인 걱정이 든다…그러나 이 땅에서 과연 누가 이런 심각한 고민을 해보았는가? “중국은 파멸할 것이다. 분열할 것이다”라는 허황된 꿈으로 자기 위로하면서 살아갈 것인가? 노키아와 모토롤라의 몰락을 보면 경쟁 속에서 잘못된 전략이 얼마나 큰 피해를 초래할 것인가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21세기 30년대의 한중관계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면모를 보일 것이다. 자신감이 넘치고 교만함까지 보이며 실질적인 파워까지 겸비하고 심지어 비민주적이란 프레임마저 사라진 미래의 중국을 다룰 생각을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고 그냥 어영부영 10년을 넘기다가 엄청나게 후회할 것이라 경고하고 싶다. 중국을 경계하고 두려워하기보다 옛정을 그리며 앞으로 어떻게 화합하며 살아가고 중국 부상의 피해자가 아닌 수혜자로 될 수 있는 가가 21세기의 나머지 시간의 테마가 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친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중(知中)이고 중중(重中)이다. 그런 의미에서 친미는 현상유지, 친일은 과거유지, 친중은 미래유지이다...라는 정의를 내릴수도 있다. 이로서 한중양국이 50년간 이뤄진 멜로드라마가 NEXT 시즌을 기대하며 종영이 된다. 한중수교 60주년일때는 환갑의 나이의 두 노인의 사랑 스토리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다...영화 "은교"처럼 될 것인가? "죽여주는 여자"처럼 될 것인가? 그것은 다음세대 출연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필자에 대해 당신이 뭔디 이렇게 거창하고 허황된 이야기를 꾸미는가 질타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나중에 지켜보면 이 드라마가 제가 예상한 각본대로 연출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럼 여기까지…글을 마치고 2032년에 다시 2탄을 올리겠다. 그때까지 이 글의 독자와 한중관계 모두 건강하시기 기원한다. 2022년 8월 24일 서울에서 (By Star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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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4
  • 아베 신조의 '정치적 유산'
    ● 양백강, 로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가 2022년 7월 8일 거리 연설에서 67세의 나이로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아베 신조 피살 사건은 일본 정계는 물론 국제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아베는 전 일본 총리로서 자신의 기록적인 초장기집권과 일본 내 보수세력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전후 일본 정치사, 국가전략 진화의 한 축을 차지하는 등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파장을 남겼다. 아베 자신은 역사가 됐지만 일본의 미래 국가 발전 방향에 대한 조명은 아베의 '정치적 유산'이라는 시각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정치인 가문의 출신인 아베는 1993년 7월 중의원 의원으로 처음 당선돼 당시 최연소 국회의원이 됐고, 2006년 9월 총리가 돼 첫 전후 출생 총리가 됐지만 1년도 안 돼 물러났다.이후 5년간의 칩거 끝에 2012년 9월 자민당 총재에 당선되고 12월 총리에 취임하면서 7년 8개월여의 '아베 시대'가 열렸고, 아베는 헌정 사상 최장수 총리가 됐다. 2020년 8월 퇴임 후 짧은 휴양을 거쳐 정계에 복귀한 아베는 정계 보수세력을 결집했다. 2021년 11월 아베가 자민당 최대 파벌인 호소다파 회장에 취임하면서 아베계로 기치를 바꾸는 등 정치권에서 강세를 보였다. 장기간의 임기를 제외하면 아베의 정치적 위상은 당시의 국제환경과 국내 정치상황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2007년 아베 총리 사임부터 2012년 재집권까지 5년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미·서방 국제체제에 크게 의존하던 일본은 충격을 받았다. 자민당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아소 타로(麻生太郞) 정권, 후속 민주당 3선 내각이 모두 난국에 빠졌다. 상대적으로 미국과 유럽의 패권이 쇠퇴하고,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들이 집단적으로 부상하면서 2010년 중국 경제는 처음으로 일본을 추월하며 격차를 벌렸다. 국제 권력구조, 글로벌 거버넌스 시스템의 심각한 변화, 각 분야의 질서, 규칙, 발언권 다툼이 날로 치열해지고 일본의 대외위기의식, 국제게임의식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어 '강인정치'에 대한 요구가 더욱 절실해졌다. 당시 요미우리신문 사설은 잦은 총리 교체로 일본 지도자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외국 지도자의 모습은 "일본에 수치"라고 했다. 이런 '비정'적이고 대외적인 주장을 더욱 강하게 하는 전략적 마인드와 여론의 분위기는 아베가 재집권해 장기집권을 이어갈 수 있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됐다. 총리 재임 후 아베는 계파적 자원과 정치적 수완을 앞세워 당내 최고 권력을 장악했고, 자민당의 6연속 총선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우경화 보수적 정치관과 국제정세 및 일본 국민의 마음가짐 변화를 긴밀히 결합시켜 전략적 행동을 통해 일본을 '강대하게' 만들겠다는 자신의 정책 철학을 제시했다. 실제로 아베는 초대 총리 시절부터 방위청 승격, 교육기본법·국민투표법 개정, 해양기본법 제정 등을 추진해왔다. 2012년 이후 긴 임기 동안 아베는 정치·안보 분야에서 일본의 '자립'과 '자주'를 체계적으로 강화해 더 큰 '전략적 공간'을 넓히려 했다. 아베가 역사교과서 추가 수정, 무라야마 담화 부인 등 기존 역사 발언, 전후 외교 총결산 추진 등을 통해 일본 정치의 우경화를 가속화하고 아시아 이웃 국가들에서 우려를 낳고 있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아베 시대'는 냉전 이후 일본의 국가전략 전환 발전의 중요한 단계로, 일본이 금융위기 이후 세계구도, 국제질서 변화에 적응하는 데 중요한 시기였다. 이 시기 '아베 노선'은 안보 분야의 '돌파'를 접점으로 국가전략의 전환을 추진하고, 다각화된 외교수단을 활용해 '종합전략의 활성화'를 높이겠다는 것이 기본 발상이었다. 국제사회, 특히 아시아 국가들이 이런 돌파구에 대한 우려와 의구심은 자명하다. 개헌 추진, 자위대 입헌 지원 외에 아베 주도로 2013년 첫 국가안전보장전략, 일본판 국가안보회의(NSC) 설립, 방위계획대강 조기 개정, 2014년 내각 정령으로 집단적 자위권 부분해제, 새로운 방위장비 이전 3원칙 마련, 2015년 평화안보법안과 국제평화지원법안, 이른바 신안보법 제정, 적에 대한 공격능력 보유 및 대형화·공격무기장비 플랫폼 도입 검토, 대외방위협력, 외교정책 안전화 등을 추진했다. 안보 분야에서도 아베가 추진한 '개혁'은 전략체제, 법치의 틀, 집행체제, 역량건설의 모든 측면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어 전후 일본 보수세력의 전후체제 돌파와 '안전 자주' 실현이라는 기본적 발상을 답습할 뿐 아니라 일본 안보전략의 외향성과 공격성을 더욱 가속화했다. 이는 평화헌법의 굴레를 뚫고 일본의 '국방정상화'와 '군사대국화'를 가속화하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일본의 안보정책과 방위정책, 방위력 건설 목표의 대전환을 예고하고 있어 아태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위협이 되고 있다. 외교 분야에서 아베는 '전략적 외교'를 적극 추진했으며, 재임 기간 동안 총 비행 거리는 158만km로 80개 국가와 지역을 방문했으며 이는 지구를 39바퀴 도는 것과 같다. 아베 총리는 또 '지구 외교' '적극적인 평화주의'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 등의 개념을 내세워 '도덕적' 색채를 부각시키려 했다. 하지만 사실 아베 외교는 고도의 현실주의, 실력주의, 지정학적 경쟁 사고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강대국의 게임이 그의 핵심 관심사다. 아베의 입장은 미·중 간 총체적 균형을 유지하며 '좌우를 만나다'는 전략 아래 미·일 동맹의 '체제 내 발전'을 견지하고, 대외정책의 융합을 추진하고 경제·안보·문화적 수단을 통합 운용해 '중등 세력' 특히 유럽·인도·태국과의 전방위적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일본 국내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아베는 그동안 위축되었던 일본 외교를 크게 뒤집고 국제 담론력을 강화했지만 많은 논란과 문제점도 남겼다. 아베는 역대 총리 중 최장수 집권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정치인의 업적은 시차를 두고 평가되지 않는다. 내부적으로는 우익세력의 요구에 부응하고 외부적으로는 미국을 숭배하고 추종했지만, 저출산·고령화, 디지털 시대의 발전, 주요 외교 문제는 제때에 해결되지 않았다. 실제로 아베 총리가 2020년 8월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그의 '정치적 유산'에 대한 논쟁은 계속됐다. 아베의 '정치 유산'은 개인적 색채가 뚜렷하지만 전후 일본 보수 정치세력의 국제질서, 일본 국가 발전에 대한 해석을 대변한다.이런 해석은 1980년대 중후반부터 '정상국가론' '정치군사대국 몽'이라는 형태로 일본의 국가전략 방향에 영향을 미쳤다 아베는 그동안 자신을 '열린 보수주의자'라고 칭하며 자신의 보수적 정치이념을 확산시키고 개인 정치권을 공고히 하는 데 열심했다. 장기 집권을 거치면서 아베 주변에는 보수 정치인이 대거 포진했고, 그 중 적지 않은 수가 자민당과 정부 고위직을 차지하며 '아베 독트린'의 추종자이자 집행자로 자리매김했다. 현 일본 정계의 보수세력의 '정신적 지도자'인 아베의 죽음은 추종자들의 추종을 중단시키기는커녕 이들의 더 집요한 행동을 자극해 아베의 '미완의 의지'를 완성하겠다는 자세로 공감과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 아베의 후계자인 스가 요시히데와 기시다 후미오는 인맥·공직 경력에서 아베와 그의 측근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두 사람 모두 '아베 색채'에서 벗어나 자신의 특색을 살리는 경향이 있지만, 스가 시대 정책이나 지금까지의 기시다 정권의 정책을 보면 전체적으로 '아베 노선'을 답습하고 있다. 기시다가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자주방위정책과 '신시대 현실주의 외교'도 아베의 정책과 유사하다. 기시다가 자신의 특성을 과시하기 위해 제안한 '일본식 신자본주의' 경제·사회 정책도 정책 여백이 부족해 '아베노믹스'로 회귀할 위험이 있다. 동시에 아베의 '정치적 유산'이 일본의 정치적 현실을 완전히 뒤흔들 수는 없다는 점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외교안보정책 분야에서 일본의 '전략적 주관성'과 '역동성'을 모색하겠다는 아베의 제안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길잡이 역할을 계속할 것이다. 대만 문제에 대해 아베 총리의 '대만 공동방위'에 대한 미일군사 개입 등 허위 주장은 일본의 현실적인 정책이 되기는 더욱 어렵다. 한반도와 러시아에 대한 외교 측면에서도 현 정부는 아베 총리의 기존 사고방식을 현 상황에 맞게 바꾸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현재의 러시아-우크라이나 분쟁을 배경으로 일본이 국제위기를 이용하여 국내의 전략적 변혁을 촉진하고 해외의 전략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관행은 아베 시대의 그림자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질서의 변화와 국가의 전략적 변혁에 직면하여 일본의 구체적인 대응책은 변함이 없을 것이며 아베의 '정치적 유산' 중 비합리적이고 비건설적이며 지속 불가능한 내용은 결국 폐기되고 잊혀질 것이다. 작자 양백강(楊伯江)과 로오(盧昊)는 각각 중국사회과학원 일본연구소 소장, 부연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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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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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재인 정부에 ‘주공’이 없다
    ●김정룡(多가치 포럼 위원장)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도시 서울과 부산 두 곳 시장 자리가 불미스럽게 성추행 사건에 의해 공백이 되어 보궐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여당이 당헌·당규까지 바꿔가면서 후보를 내는 등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4.7보궐선거가 끝났다. 선거결과는 보수당의 압승, 진보당의 참패였다. ‘한 집은 환락, 다른 한 집은 울상(一家歡樂, 一家愁)이다. 환락을 맞은 야당은 잔칫집이고 울상에 빠진 여당은 초상집 분위기이다. 선거활동 막바지에 이르러 여당이 질 것이라는 짐작은 있었지만 미세한 표차가 아닌 격차가 너무 큰 패배여서 천만의 촛불로 탄생된 정권, 180석 국회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 여당이 받아든 성적표라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다. 매번 선거가 끝나면 다음번의 선거를 위해 승리와 패배의 원인을 분석하기 마련이다. 야당이 자기네가 잘해서라기보다 문재인 정권이 하도 잘못해서 어부지리를 얻은 결과라는 견해에는 일치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렇다면 문재인 장권이 뭘 잘못했나? 1년 내내 지루하게 질질 끌어온 조국 사태와 추·윤 갈등, 시장경제와 엇박자 소지가 다분한 잘못된 부동산 정책, 공정해야 한다는 의미로 호칭된 공무원 LH직원들의 투기사태에 플러스 이 정권의 특유한 내로남불 등등이 여당 참패 원인 메뉴에 등장한다. 십분 맞는 얘기다. 그런데 ‘치표불치본(治表不治本)’란 말이 있듯이 이러한 참패 원인 메뉴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에 지나지 않아 정녕 환골탈태하려면 문제의 근원을 찾아야 한다. 모든 병은 병인(病因)을 치료하지 않고 증상만 치료한다면 그때그때 증상 억제 효과만 있을 뿐 완치가 안 된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초기부터 첫 단추를 잘못 꿰서 삐걱하기 시작했고 4년을 맞은 현재 이 시점에 이르러 바닥까지 추락하게 된 그 병원인 ‘첫 단추’에 대한 분석은 이번 선거 참패 메뉴에 오르지 않고 있어 아무리 반성하고 머리를 조아려도 획기적인 변화가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대저 그 병인인 ‘첫 단추’가 무엇이냐? 결론부터 말하자면 문재인 정부에 ‘주공’이 없었다는 것이 그 병인으로 지목하는 ‘첫 단추’이다. 주공은 강태공, 소공 석(奭)과 함께 주나라를 창건한 공신이다. 주나라 땅에 봉해졌기 때문에 주공(周公), 혹은 주공단(周公旦)으로 일컬어진다. 주 문공(文公)으로도 불리며 산둥(山東)성 취푸(曲阜)에 봉해져 제후국 노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무왕을 도와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紂)를 멸망시키고, 동이(東夷)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무왕이 죽은 뒤에는 어린 조카 성왕(희송)을 도와 주 왕조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여기서 잠깐 주(周)가 어떻게 상(商)을 멸망시켰는지? 그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자. 상나라는 하나라에 이어 600여 년을 지속한 두 번째 왕조였다. 중국문자 갑골문이 그 시기에 생겨났고, 제례문화가 발달했으며, 수공업이 발달했고, 따라서 장사가 활성화 되어 나라 이름을 상업이란 ‘상(商)’으로 불렀고, 지금도 중국에서 장사에 종사하는 사람을 ‘상인(商人)이라 하는 것은 상나라 국호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토록 잘나가던 상나라가 3천 년 전 마지막 왕인 주(紂)에 이르러 몰락했다. 주왕(紂王)에게는 달기(妲己)라는 미녀 애첩이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주왕은 애첩 달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 술이 못을 이루고 고기가 숲을 이룬다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을 지었다고 한다. 제사 철이 되면 수일동안 밤낮 없이 연이어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발가벗고 쫓고 쫓기는 춤을 연출하면서 질펀하게 놀았다. 장야의 음(長夜之飮)이 하도 즐거워서 상나라 관료들이 날이 가는 줄 몰라 오늘이 몇 월 며칠인 줄도 몰랐다고 한다. 주왕이 주지육림에 나라 재정을 거덜 내는 바람에 강대했던 상나라가 망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전설은 믿을 바가 못 된다. 중국역사를 돌아보면 하나라 마지막 왕인 걸왕(桀王)도 왕비 말희(妺姬)한테 빠져 주지육림 때문에 망했다고 하고, 서주(西周)는 유왕(幽王)이 좀처럼 웃지 않는 애첩 포사(褒姒)를 웃기려고 거짓 봉화와 봉수를 올려 군사와 제후들을 놀라게 하여 웃겼다고 한다. 결국 서주가 망한 것은 포사 때문이었다고 하니 중국역사는 나라가 망하면 여자들의 탓으로 돌리는 관습이 생겨났다. 주는 본래 상에 속하는 하나의 작은 ‘제후국’이었다. 상나라 주왕(紂王)의 신하였던 주무왕(周武王)이 상나라 토벌에 나설 때 군사들에게 달기를 겨냥하여 ‘암탉이 울면 천하가 망하는데 지금 상이 그렇다.’라고 호소했다. ‘여자의 목소리가 크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이것은 주무왕이 상을 토벌하는데 있어서 명분(사실상 핑계)일 뿐 상나라는 이미 기울어 구제 못할 지경에 이르러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주왕이 하도 민심을 잃어 주왕의 장수들이 주무왕의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을 두 손 들어 열렬하게 맞이하면서 칼을 자기네 주군을 향해 겨누었기 때문에 소국이 대국을 무너뜨리는데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듯 주나라는 너무 쉽게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식은 죽 먹기로 정권을 잡게 되었던 것이다. ‘너무 쉽게 얻으면 너무 쉽게 잃는다.’는 속담이 있다. 무엇이든 너무 쉽게 얻었으면 너무 쉽게 잃지 않을까, 마땅히 걱정해야 한다. 『주역』에 64괘가 있는데 마지막 괘가 끝났다는 의미인 기결(旣決)인 것이 아니라 제 63괘가 기결이고 마지막 제64괘를 미결(未決)로 남겨두었다. ‘끝난 게 끝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주공은 이『주역』의 원리를 빠삭하게 터득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은 상나라를 뒤엎고 중원의 주인이 되었다는 승리의 과실에 기쁨으로 도취되어 정신없이 축배를 들 때 주공만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 쉬면서 천하를 걱정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주공의 근심을 기우(杞憂, 이 말은 주공 이후에 생겨난 것이지만 여기서 문맥상 사용했다는 점 밝혀둔다)라 비웃었으나 주공만은 아주 진지했다. 무슨 일에 부딪히면 앉아서 한숨만 쉬면 해결되나? 행동에 나서야 한다. 주공은 팔을 걷어 부치고 행동에 나섰다. “천하를 다스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자.” 이것이 주공의 마인드였다. 정치적으로 왕실 친인척과 나라 창건에 공이 큰, 예를 들어 강태공 같은 사람 및 전쟁에 공이 큰 장수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제후를 세우는 이른바 ‘봉토건국’인 봉건제(封建制)를 시행하였고, 경제적으로 공유지와 사유지를 분명하게 나눠 경작하는 분봉제(分封制)를 실시하였으며, 사회적으로 예악제(禮樂制)를 마련하여 전반 사회 질서를 바로 잡았고 문화를 활성화시켰다. 그는 또 상나라가 수공업을 비롯한 상업중심이었다면 주나라를 농업중심 사회로 바꿔놓았고, 상나라가 귀신숭배문화가 중심이었다면 주나라를 성인숭배문화로 전환시켰다. 공자가 가장 숭배해마지않던 주공이 창안한 이러한 새로운 치국 패러다임이 무려 3천년 동안이나 지속되어 왔으니 중국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평가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위대한 인물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나에게 가끔 ‘중국국가는 왜 싸움에 돌격하는 멜로디인 전투곡인가?’ 묻는다. 나는 앞서 말한『주역』제63괘와 제64괘의 원리로 설명한다. 1949년 새로운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와의 투쟁이 끝난 게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모택동 주석께서 지나치게 과거와의 투쟁을 강조한 탓에 무리하게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는 등 부작용도 있긴 했지만 정권초기에는 반드시 주공처럼 심각한 걱정과 근심에 빠져 새로운 치국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정권을 오래 유지할 수가 있다. 이쯤해서 눈치 빠른 독자께서는 아래에 무슨 얘기를 이어가려고 하는지 알아차릴 것이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자 당시 나는 주나라가 떠올랐고 주공이 떠올랐다. 왜냐? 문재인 정권은 주나라가 너무 쉽게 정권을 잡은 것과 아주 흡사하게 촛불혁명에 의해 너무 쉽게 얻었다는 것이 양자가 심통하게 닮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데 대한민국 사상 최초로 대통령이 탄핵을 당한 어수선한 분위기에 탄생된 문재인 정부에 주공 같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안해내는 위대한 인물이 나타날 것을 혹시나 해서 바랐건만 역시나 이 정부에는 ‘주공’이 없었고 새로운 치국 패러다임도 없었다. 이 정부에는 ‘주공’ 같은 인물도 새로운 치국 패러다임은 고사하고 모두 승리에 도취되어 축배를 드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문재인 정권 초기 여당 대표의 입에서 나온 ‘20년 장기 집권설’은 ‘주공’이 없는 풍토에서 이젠 자신들의 천하가 된 세상이 ‘영원하리라’는 한심한 착각에 빠진 결과가 아닐까? 00역사학자가 유시민의 ‘알릴레오’ 유튜브에 출연하여 이렇게 말했다. “박근혜 탄핵으로 보수가 완전히 괴멸된 줄 알았다.” 이런 인식은 당시 보편적인 사회 분위기였으니 정권 일선에 앞장선 ‘어르신들’이야 더 승리에 도취되어 앉아 죽을 써도 20년은 쉽게 가지 않겠느냐는 착각에 빠질 만도 했을 것이다. ‘새로운 술은 새로운 부대에 담아야 한다.’ 민초들도 다 아는 아주 간단한 도리이자 기본 상식이다. 유감스럽게도 너무 쉽게 정권을 잡은 문재인 정부는 이 간단한 도리이자 기본 상식마저 유념하지 않았다. 기나긴 역사흐름에서 4년이란 시간은 별이 반짝거리는 순간보다 더 짧다. 진보당은 먼 미래를 지향하려면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주공’이 나오고 새로운 치국 패러다임을 창안해낸다면 앞으로 정권 잡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큰 도움, 아니 결정적인 요소로 될 것이지만 이번 선거에서 보여주었던 상대방을 쓰레기 취급이나 하고 자신들을 정의의 천사로 여기는 망상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마인드로는 희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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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21-04-14
  • 한국인도 친중(親中)하면 조선족?
    ●김정룡(多가치 포럼 위원장) 지난 22일 SBS가 ‘조선구마사’라는 드라마(사극)를 방송하자 대한민국이 한바탕 떠들썩하게 비판에 들끓었다. 드라마 속에서 조선 기생집이라고 설정된 배경이 있는데 전형적인 중국식 가옥의 형태를 띄고 있고 식탁에는 중국 음식인 월병, 피단, 양갈비, 중국식 만두, 중국술이 올라 있었다. 그리고 OST(드라마 주제곡) 월아고-고쟁독주, 고산류수-고금독주에 사용되는 현악기가 고쟁, 고금 등 중국전통 악기로 연주된 장면을 문제 삼아 드라마 작가를 친중작가로 낙인찍고 비판에 열을 올리고 있다. ‘조선구마사’ 작가 박계옥 씨(이하 박 작가로 칭함)가 친중혐한 작가로 공격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박 작가의 전작 tvn에서 방송된 ‘철인왕후(2021.2.14. 종영)에 대해서 시청자들의 비판이 있었다. '철인왕후'는 중국에서 소설로 먼저 출간된 뒤 제작된 웹드라마 '태자비승직기'를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이 드라마를 쓴 작가의 전작 '화친공주'에서 고려인을 비하하는 '빵즈' 표현이 쓰인 사례가 있고 박 작가는 실존인물인 순원왕후와 신정왕후를 우스꽝스럽게 표현하고,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을 두고 '지라시네'라는 표현 등으로 논란이 되었다. '철인왕후'의 각본을 맡은 박 작가와 중국 콘텐츠 제작사 쟈핑픽처스가 집필 계약을 체결한 것도 친중작가로 공격하는데 큰 빌미를 제공한 것 같다. 박 작가가 친중하든지, 혐한하든지 나의 입장에서 왈가왈부 할 일 아니다. 다만 요즘 한국 온라인에서 박 작가를 조선족이라고 주장하는 글들이 떠돌아다니고 이를 근거로 일부 언론들이 나서 기사화하고 있는데 왜 한국인들(일부이긴 하지만)은 한국인이 친중혐한해도 조선족이라고 낙인찍는지? 의문스럽다. “충신? 하이고 충신이 다 얼어죽어 자빠졌다니? 그 고려 개갈라 새끼들이 부처님 읊어대면서 우리한테 소, 돼지 잡게 해놓고서리...개 백정새끼라고 했지비아니?!!” “그 목사 충신 최영장군의 먼 일가친척인데.. 그래도 됩니까?” “충신이 다 얼어죽었다니? 우래보고 소돼지 잡게 해놓고 개 백정새끼라고 했지비아니? 드라마 ‘조선구마사’에 등장하는 대사인데 일부 한국인들은 이 대사가 연변조선족 사투리 극형이라면서 이를 근거로 박 작가를 조선족이라고 단정한다. 진짜 유치하고 어처구니없어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어느 지방의 사투리든지 무릇 사투리란 억양과 어휘 두 가지로 구성된다. 한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연변사투리는 진짜가 아니라 99% 짝퉁이다. 아마 10여 년 전으로 기억되는데 고 최진실 씨가 주연한 연변여자(옥화) 역에서 그녀의 말투는 평양말에 플러스 평안도, 황해도 말이지 연변사투리와는 거리가 10만 8천리나 된 것을 연변사투리랍시고 연출한 것이다. 그 후 조선족을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한 연변사투리는 진짜 연변사투리가 아니라 이북말을 흉내 내는 짝퉁일 뿐이다. 진짜 연변사투리가 등장한 영화가 딱 한 편 있다. 위안부를 소재로 다룬 영화 ‘소리굽쇠’에서 조안 씨가 한 대사는 진짜 연변사투리가 맞다. 왜 그 많고 많았던 드라마나 영화중에서 조안 씨만이 연변사투리를 구사할 수가 있었을까? 그 영화 조안 씨와 함께 주연을 맡은 위안부 역 이옥희 씨가 연변 유명 코미디 배우이기 때문에 조안 씨에게 정확한 연변사투리를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살펴보자. 박 작가를 조선족이라고 근거로 삼고 있는 드라마 ‘조선구마사’ 대사에서 ‘했지비아니?’ 라는 말은 연변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는 말이다. ‘했지비’ ‘먹었지비’ ‘갔지비’ 등등 동사 뒤에 ‘지비’를 붙이는 것은 함경남도에서 사용하는 방언인데 연변사람 절대다수는 함경북도 출신이고 소수 함경남도 사람이 있긴 하지만 이 ‘지비’란 말을 유행시키지 못해 연변에는 ‘지비’란 말이 없다. 게다가 뒤에 ‘아니’를 붙여 ‘했지비아니?’는 연변사람에겐 생소하기 그지없는 말이다. ‘우리보고’를 ‘우래보고’라고 한 것 같은데 이 말도 연변에는 전혀 없는 말이다. 혹시나 해서 연변출신 지식인들에게 여러모로 알아보았으나 전부 난생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는 똑 같은 대답이다. 문제는 드라마나 영화에 이북 말씨가 등장하면 그것을 연변사투리라고 단정하고 심지어 작가를 ‘조선족’이라고까지 왜곡하여 공격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허무하고 무모하고 유치한 ‘씹어 치기’인가? 박 작가는 분명 한국인이다. 그가 조선족일 수가 없는 것이 1970년에 태어나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고 1995년 캐치원 시나리오 공모에 ‘돈을 갖고 튀어라’로 입선하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그 후 현재까지 영화 12편, 드라마 10편을 발표했다. 만약 그가 조선족이라면 25세 나이에 데뷔하여 그 많은 영화와 드라마 시나리오를 쓸 수가 없다. 한국영하와 드라마 시나리오를 쓰려면 한국사회 온갖 문화, 한국인의 생활정서에 이르기까지 전부 마스터해야 하는데 일부 유치한 한국인들의 주장처럼 그가 조선족이라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필자도 한국에서 15년 동안 글을 써왔지만 영화와 드라마 작가 데뷔는 엄두도 못 내고 아예 꿈도 못 꾸고 있다. 여느 한국인은 박 작가가 드라마 ‘댄스의 순정’에서 주연을 연변처녀(문근영)로 설정한 것을 겨냥해 작가를 조선족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런 식의 주장이 맞다고 가정한다면 지금까지 조선족을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 작가들이 전부 조선족이라는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삼단논법’이 성립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듯 전혀 근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온라인에서 박 작가를 중국인, 화교, 연변인, 귀화한 조선족 등 온갖 의혹, 그 가운데서 박 작가가 ‘조선족’이 아니냐는 의혹이 가장 거세지자 23일 SBS ‘조선구마사’ 측 관계자는 이데일리에 “박 작가는 조선족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에 한 누리꾼은 “박 작가 작품들은 다른 작가들의 비해 텀이 너무 짧다. 철인왕후 끝난 지 한 달 밖에 안 됐는데 조선구마사까지. 박 작가의 팀이 조직적으로 시나리오를 쓰는 것 같다”라며 “박 작가가 중국, 조선족과 관련 없다면 박계옥 작가 팀 또는 서브작가들의 국적이 의심된다.”라며 또 다른 의혹을 제기했다. 문제는 왜 한국인이 친중혐한해도 조선족이라고 공격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 조선족은 의례 한국을 싫어한다는 전제를 바탕 깊숙이 깔고 색안경을 끼고 평소에도 삐뚤어진 시선으로 조선족을 바라보고 있는 결과가 아닌지? 이쯤 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요즘 미국에서 아세아계 출신들을 마구 혐오하는 것과 비슷하게 한국에서도 조선족을 혐오하는 바람이 거세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일부 한국인이 조선족을 혐오하는 이유 중에 피해의식의 작동결과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한반도는 수천 년 동안 지리적인 원인에 의해 중국의 영향을 심각하게 받아왔다. 이 과정에 피해의식이 뼈가 저리게 각인되어왔다. 본문과 관련하여 한 가지 사례만 들어보자. 박 작가를 혐한한다고 주장하는 근거 중 고려인을 ‘빵즈’라고 한 대목을 두고 ‘한국인을 몽둥이로 때려죽일 놈’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서 작가를 혐한한다고 비판한다. ‘빵즈’란 도대체 무슨 뜻일까? 몽둥이를 뜻하는 ‘빵즈(棒子)’의 유래에 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수나라와 당나라 초기 고구려를 수차례 침략했을 당시 고구려인들이 몽둥이를 잘 휘둘러 혼난 기억 때문에 ‘까오리빵즈(고려몽둥이)’라 불렀다는 것. 둘째 만주에 거주한 조선여인들이 하도 방치질을 열심히 해서 ‘까오리빵즈’라는 별명을 붙였다는 것. 셋째 어느 특정 집단의 사람들을 비하하는 말로서 우리말 그냥 ‘놈’에 해당된다는 것. 예를 들어 중국 드라마 ‘관동진출’에서 동북에 온 산동사람들은 하남사람들을 ‘허난빵즈’라 부르고 하남사람들은 산동사람들을 ‘쌍둥빵즈’라 부르는 대사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따라서 후에 조선인들이 만주에 오게 되자 산동사람들은 ‘까오리빵즈’라 부르고 조선인도 따라서 산동사람들을 ‘싼둥빵즈’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고로 ‘빵즈’란 그냥 민간에서 하나의 비하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유행어로 치부할 뿐 굳이 서로 몽둥이로 때려죽일 만큼 적개심에 차서 하는 말이 아니다. ‘까오리빵즈’와 ‘싼뚱빵즈’라는 말은 지금까지도 연변에서 가끔씩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까오리빵즈’를 ‘몽둥이로 때려죽일 한국사람’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터무니없는 상상의 확대적 산물이다. 그렇다면 왜 한국인은 ‘빵즈’란 말을 견강부회해가면서 또 굳이 살의(殺意)가 내포된 의미로까지 해석할까? 역시 답은 수천 년 쌓여온 피해의식 때문이 아닐까? 판단된다. 10위 안에 드는 세계 경제 대국인 대한민국,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다고 자부하는 대한민국, 하지만 한국인의 머릿속에는 중국이란 대국에 대한 두려움이 여전히 크게 남아 있어 사소한 일도 확대해석하여 크게 만들고 말도 안 되는 선제공격으로 피해의식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의도가 훤히 보여 안타깝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해보자. 아리랑을 비롯한 우리민속문화는 한반도 남북한뿐만 아니라 해외 750만 동포의 공동문화유산이다. 조선족의 경우 해외 750만 동포 중에서 고국의 민속문화를 가장 잘 계승 발전시켜왔다. 이런 맥락에서 조선족 민속문화가 중국국가급과 성급 무형문화재로 등재되고 심지어 조선족의 농악무는 세계유네스코에 등재되기까지 한 상황이다. 이를 두고 한국에서 거센 반발이 일고 있다. ‘우리 한국문화를 중국에 빼앗기게 생겼다.’고 난리다. 정인갑 전 청화대 교수에 의하면 농악무의 경우 유네스코의 무형문화재로 등재될 때 그 발원지를 한반도로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의 출처를 밝힌다면 문제 될 것이 없지 않는가? 사실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반발이 일고 있는 것은 아리랑을 비롯한 우리민속문화를 남한만이 소유해야 하는, 즉 다시 말하자면 해외동포는 소유와 계승 발전의 자격이 없다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갑자기『택리지』가 떠올랐다. 1751년에 출간된 이중환이 지은『택리지』란 책이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조선반도는 삼면이 바다인데다 산이 많고 평야가 적어 사람들의 세상을 보는 식견이 좁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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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7
  • 과학은 편견을 용납하지 않는다
    ● 레이중저(雷钟哲·산서작가협회 회원) 3월 30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제네바에서 중국과 세계보건기구가 공동 작성한 코로나19 발원 관련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연합 전문가 팀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전파하게 된 4개의 경로에 대해 탐색하고 평가, 첫째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중간숙주를 거쳐 사람한테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고 둘째는 가능성이 비교적 높게 직접 사람한테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셋째는 콜드 체인 식품(冷链食品)을 통해 사람한테 전파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며 넷째는 실험실을 통해 사람한테 전파되었을 가능성은 극히 적다고 인정했다 올해 1월 14일부터 2월 10일까지 17명으로 된 중국 측 전문가 및 17명으로 된 외국 측 전문가들은 공동 전문가팀을 구성, 각각 유행병학, 분자역학과 동물 및 환경 등 3개 소조로 나뉘어 중국 우한(武汉)에서 28일간에 달하는 글로벌 바이러스 기원 중국 조사(全球溯源研究中国部分工作)를 전개했으며 이에 기초하여 장장 120페이지에 달하는 연구 보고서를 집필했다. 다시 말하면 이 보고서는 세계 정상급 유행병 전문가들의 심혈과 지혜를 집중한 것으로 권위성, 과학성, 믿음성은 의심할 바 없는 것이다. 바이러스의 근원지를 밝혀내는 것은 과학적인 문제이고 또한 세계적인 책임이고 의무로서 마땅히 전 세계 과학자들이 협력하여 해당 연구 사업을 전개하고 마땅히 여러 개 국가와 여러 개 지역 특히는 코로나19 확산세가 심각한 지역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바이러스 발원지 문제를 정치화하는 그 어떤 행위와 쇄국 적이고 협조를 거부하는 자세는 바이러스 발원지 추적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글로벌 방역 노력을 파괴하여 더욱 많은 생명 손실을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번에 중외 전문가팀은 코로나19 발생 초기의 많은 확진 사례가 우한 화난 해산물 시장(武汉华南海鲜市场)과 연관이 있었지만 그 뒤엔 다른 많은 사례가 기타 시장과 연관이 있었으며 또 초기의 어떤 사례는 시장과는 그 어떤 연관도 없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외 중외 전문가팀은 일찍 2019년 12월, 더 넓은 지역의 사회 구역 내에서 바이러스가 전파된 것은 화난 수산물 시장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었다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다. 이러한 증거들을 보면 ‘화난 해산물 시장은 코로나19 최초의 발원지’가 아니란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중외 전문가팀은 또 많은 국가들이 이미 발표한 연구 데이터를 분석, 다른 나라에서 코로나19 샘플이 우한 현지에서의 발견보다 몇 주 먼저 발견되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는 기타 국가에서는 전파는 있었지만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는 것이다. 보고서는 또 조기에 발견된 코로나19 전파 사건에 대해 조사해 볼 중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런 결론은 ‘중국 바이러스(中国病毒)’ 혹은 ‘우한 바이러스(武汉病毒)’라고 한사코 떠들어대는 미국 및 서방 국가들의 편견에 대한 논박할 수 없는 일격으로 된다. 회고해보면 코로나19의 만연이 전 세계를 휩쓰는 긴급한 관두에 서방의 일부 정객과 매체들에서는 의식형태의 편견으로부터 출발하여 코로나19를 정치화하는 한편 과학적인 대응과 강력한 방역 대신 책임을 중국에 미루면서 온갖 중상을 다 쏟아붓곤 했다. 특히 미국을 위수로 한 일부 서방국가들은 줄곧 코로나19 발원지에 관련한 요언을 날조하여 왔다. 지난해 3월 16일, 미국의 전 대통령 트럼프는 소셜미디어에 극단 적 종족주의에 해당하는 성명을 발표, 코로나19를 ‘중국 바이러스’라고 규명했다. 트럼프는 “미국은 이제 중국 바이러스(Chinese Virus)의 영향을 받는 업종 예하면 항공사와 기타 업종을 적극 지원할 방침이며 그리고 미국은 다른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대해질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코로나19 앞에서 미국은 강대해진 것이 아니라 반대로 코로나19로 사망한 인구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로 되었다. 2021년 2월 말까지 미국의 코로나19 누적 확진자는 세계 총 확진자의 25%를 초과했고 사망인구 또한 세계 총 사망자의 20%에 근접, 50만 명을 초과하는 인구가 코로나19로 귀중한 생명을 잃었다. 유감스러운 것은 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편견의 ‘색안경’을 벗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며칠 전 제네바에 상주하는 미국 대표단의 임시 대리 공사(临时代办)는 의연히 세계보건기구는 우한에서 원시 데이터와 독립적인 평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접촉하고 전문가 팀이 발표할 보고서는 과학 연구에 기초해 보다 나은 대응을 준비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뜻인즉 전문가팀의 공동 연구 보고서의 과학성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코로나19 발원지의 일부 핵심 쟁점을 연구할 때마다 미국 측은 과학자도 아니고 보건 분야의 전문가도 아닌 사람들이 나서서 이러쿵저러쿵하며 정치적 농단을 남긴다는 것이다. 중국 측의 투명하고 당당하며 개방적인 자세는 이미 많은 외국전문가들의 일치적인 공명을 자아냈다. 최근 세계보건기구의 많은 성원들은 중국에서 공동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우리는 이미 중국 측과 전면적인 솔직하고도 담백한 토론을 진행하였으며 전체 과정을 핵심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기에 중국 측에 신뢰와 개방성을 느낄 수 있었다고 밝혔다. 국제 전문가 팀 성원인 다삭은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코로나 19 발원지 연구가 고도로 집중화가 될 수 있은 배경에는 우한 바이러스연구소 등과 함께 해당 전문가들이 심입되어 토론에 개입했고 개방된 교류를 가졌다. 이는 그야말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고 감탄했다. 이는 중국 측이 발원지 연구에 최대한의 협력을 했고 전문가팀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나 다 찾아갈 수 있었으며 만나고 싶은 사람은 한 명씩 다 만났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바이러스 발원지 연구는 복잡한 과학적인 과제이며 코로나19는 인류 공동의 적이다. 희망하건대 서방국가들은 세계보건기구의 연구에 방해나 조작 그리고 잡음을 일으키지 말고 중국처럼 개방적이고도 투명하게 국제 전문가팀을 자국에 초청하여 조사 연구하고 전문가들의 일은 전문가들에게 맡겼으면 한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명지한 선택으로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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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1
  • 사람들은 왜 좋은 이름에 집착할까
    ●김희수(중국)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마음에 안 들어 개명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애초에 그 이름을 지었을 때는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아름다운 축복이 깃들었을 것이다. 부모가 고민하면서 숱한 이름 가운데서 골랐을 좋은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지으려고 할 때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다른 아이들이 놀려준다거나 흔한 이름이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남이 고치니 덩달아 고친다거나 또는 이름을 고쳐야 출세한다는 점쟁이의 말을 믿는다거나 등등 나름대로의 이유는 있겠지만 과연 이름을 고친다고 운명이 달라질까? 모택동은 1947년 3월 13일에 호종남(胡宗南)이 쳐들어왔을 때 연안을 떠나야 승리한다는 뜻인 리득승(离得胜)과 음이 같은 리덕승(李德胜)으로 개명했기에 전국을 해방하고 승리했다. 하지만 대립(戴笠)은 사주팔자에 좋다는 우롱(雨农)이라고 개명했지만 결국 좋은 끝장을 보지 못하고 1946년 3월 17일에 비행기 추락 사고로 빗속(雨中)에서 죽었다. 성공했거나 출세한 사람들은 이름을 잘 지어서 출세한 것일까? 정말 그렇다면 이름을 지을 때 출세한 사람들의 이름을 따서 지으면 출세는 근심하지 않아서 될 것이다. 이 세상에 동성동명이 많다. 그러나 같은 성과 같은 이름을 가졌다고 해도 운명은 서로 다르다. 동성동명이라고 해도 출세한 사람과 출세하지 못한 사람이 있을 것이고 장수한 사람과 단명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이름 탓이 아니다. 한마디로 성공한 사람들이 이름을 잘 지어서 출세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세상에 이름 하나 잘 지어서 성공했거나 출세한 사람이 없다. 물론 개명한 후 성공했거나 출세한 사람들은 적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개명한 후 손 놓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다면 출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단순히 좋은 이름을 지어서 출세한 것이 아니다. 반면에 개명 후 실패한 사람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개인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자녀에게 좋은 이름을 지어주겠다는 부모의 마음 지극히 옳은 것이고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개명하려는 사람의 마음도 나무람 해서는 안 된다. 다만 이름에 너무 집착해 자주 개명하려고 하고 일이 뜻대로 안되면 이름 탓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만은 바꿔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을 만족시키고 충족시키는 좋은 이름은 없다. 절대적으로 좋은 이름은 없다는 뜻이다. 어떤 이름이 좋다고 너도나도 그 이름을 지으면 중복이 생기고 개성이 없어지게 된다. 작명소가 생겨나고 이름 짓기에 도움을 주는 이름 짓기 프로그램이 나오면서 좋은 이름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름은 이름일 뿐 운명을 개변하지 못한다. 운명을 개변하는 것은 좋은 이름이 아니라 자신의 두 손이다. 이름 없이 마당쇠로 살다가 죽은 사람도 있고 이름 석 자로도 모자라 자, 호까지 달고 숱한 별명까지 길게 붙여서 자신을 나타낸 사람들도 있다. 이름이 없건 이름이 하나이건 이름이 여러 개이건 또는 좋은 이름이건 수수한 이름이건 모두 죽으면 후세에 이름이 남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대부분은 죽음과 함께 그 이름도 사라진다. 이름을 바꾼다고 운명이 바뀌지 않는다. 아무리 좋다고 하는 이름으로 개명해도 자신의 노력이 없이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개명의 좋은 점도 있다. 이름을 바꾸면 자신심이 생겨날 수 있다. 이제야 자아를 찾은 것 같고 이제야 진정한 내가 된 것 같아 날것만 같은 심정 일수 있다. 이런 자신심에 날개를 달고 훨훨 날려면 자아도취에 취해 꿈만 꾸지 말고 꾸준한 노력의 날갯짓을 힘차게 해야 한다. 개명이 헛되게 되지 않으려면 원대한 포부는 아니어도 자신만의 당찬 포부를 품고 참다운 인생관을 세우고 자신의 웅대한 목표를 위해 꾸준히 날갯짓을 해야 좋은 이름에 걸맞은 결과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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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1
  • 잃어버린 조선족의 역사
    ● 김 규 조선족은 중국에 살고 있는 한민족으로 대개 조선시대 말부터 중국으로 이주하여 생활하면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형성된 역사가 짧기에 여기서 잃어버린 역사 얘기를 하게 되면 대부분 조선족 지식인들이나 역사학가들은 실소를 금할 수 없을 것이다. 백여 년밖에 안되는 조선족 역사에 그 무슨 비밀 같은 것이 있으며 잃어버린 것이 있을쏘냐고... 역사는 예전에나 지금이나 잃어버리고 고쳐지고 망각되는 일이 허다하다. 중국 조선족의 역사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잃어버리게 되었을까? 1931년 중국은 동북의 만주국 통치를 인정하면서 일본에 동북을 빼앗기고 만다. 동북을 강점한 일본은 바로 중국 동북의 길림성 조선 접경지대의 백두산 일대에서 맹활약하던 조선독립군(조선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군대로 잠시 지칭하며 당시 이 군사력의 정확한 명칭은 모른다)을 첫 타깃으로 삼는다. 사실 1931년 전까지 동북은 중국 땅이어서 일본은 영사관의 병력과 현지 경찰 등으로는 조선독립군을 제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31년 이전의 조선독립 세력은 이미 중조 접경 지역에서 이십여 년간 발전을 하여 대규모의 병력을 가졌던 것이다. 그 예로 최서해 강경애 등 당시 프롤레타리아 계열의 작가들을 보면 모두 중국 땅으로 이동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의 검열로 다만 중국 땅을 생존과 기회의 땅으로 묘사하였지만 실제는 백두산 일대에는 조선의 독립투사들이 대거 포진하여 있었다. 그중에는 파산된 농민도 있었겠지만 땅과 집을 팔고 구국 운동을 하려는 조선의 의로운 사대부 귀족과 의인들도 많았었다. 하여 연변과 동북에는 그 당시 애국지사들이 세운 학교가 많았다. 그 예로 윤동주는 심지어 기독교 계열의 학교를 용정에서 다니며 애국주의를 전수받았다. 1931년은 중국 조선인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한 해였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그냥 일본의 동북 강점으로 나온다. 중국 조선인의 역사에서 백두산 일대에서 총칼을 갈며 광복을 꿈꾸는 피 끓는 인생들을 그냥 별 볼일 없는 사람들로 취급하고 있을 때 중국공산당은 당시 그렇게 보지 않았다. 중국 역사에서의 항일연군은 곧 조선독립군과의 연합을 의미한다. 정사에서는 지금 그 누구도 당시 조선독립군의 세력이 어떠했는가가 나오질 않는다. 다만 중국공산당의 영도하에서의 항일연군의 활동이 부각될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역사적 환경하에서의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해석되지만 결코 우리가 망각해서는 안 될 역사이다. 조선독립군의 군사세력은 당시 동북에서 으뜸가는 위치에 있었으며 이 사실을 잘 아는 중국공산당은 조선독립군에 연합 제의를 한다. 그 당시 중공은 중국 전역에서 국민당에게 잔혹하게 탄압을 당해 겨우 수만 명이 정강산에 오를 때라 동북지역은 군사력과 당조직이 상대적으로 약해있었다. 일설로 양정우가 동북으로 올 때에도 단신으로 왔었다. 그만큼 동북의 중공의 조직과 군사력은 약했다. 1931년 일본의 동북 강점 이후 연변 일대 조선독립군에게 있어서 중국공산당과의 연합 유혹은 컸다. 다만 조선독립군은 성분이 복잡했는데 독립군 중 젊은층은 소련 사회주의 혁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나이가 있는 일부는 서방 민주주의 혁명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대체로 소련의 혁명 성공을 인정하는 편이었으며 소련이 이끄는 국제공산당과 연계를 가지고 있었다. 국제공산당은 조선독립군의 현 병력으로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소련 접경지대로 이동하여 세력 보전하라고 조선독립군에 제의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조선독립군이 중국 경내에 남아서 같이 항일연군을 성립하여 일제와 싸울 것을 요구하였다. 1932년, 일제는 동북 강점을 마치고 백두산 일대의 조선독립군에 대한 정벌을 준비한다. 조선독립군은 연변과 동북 각지에 산재하여 있는 독립군 우두머리들을 모아서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회의를 연다. 즉 소련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중국에 남아서 유격전을 할 것인가? 이 고위층 회의가 반역자 혹은 간자에 의하여 일본군에 알려지며 조선독립군의 각 지대의 중대장들과 수령들이 포위를 당해 전부 희생된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어랑촌 13용사가 나타나게 된 전말이다. 어랑촌 13용사는 사실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유격대원들의 희생이 아니고 동북 일대 조선독립군 영수들의 마지막 울부짖음이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김구를 말하고 이승만을 알지만 이들을 모른다. 어랑촌 13용사는 유격대원으로 포장이 되었으며 그들의 이름도 사적도 전부 허구로 되어있으며 심지어 이 사건이 발생된 시점도 전부 허구로 되어있다. 우두머리들을 전부 잃은 조선독립군은 일부분은 소련으로 들어갔으며 (김일성) 일부분은 중국공산당과 합병하여 항일연군을 이루었다. 후에 이들의 대부분은(일설에 6개 사단 6만 명이라고 함) 김일성을 따라 조선군으로 편입되었으며 나중에 조선전쟁에서 대부분이 사라졌을 것으로 믿는다. 하여 오늘날에 와서 백두산 조선독립군의 역사는 영원히 미제로 남아있으며 전부 김일성 주석(그 당시 나이가 십 대)이 한 일로 역사를 쓰게 되었다. 1957년에 조선에서 사람이 와서(옛 조선독립군으로 추측이 된다) 어랑촌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사적을 묻는다. 이때에서야 중국에서는 이 부분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이들의 이름을 복구하려 했으나 이미 이십여 년이 흘렀는지라 어려웠다. 문화대혁명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연변에 어랑촌 13용사의 기념비가 세워진다. 그러나 그중의 인물들은 이젠 더는 알 수 없었으며 심지어 살아있는 사람이 용사에 들어가고자 하는 일이 발생했다. 역사는 똑똑히 적은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만약 중공의 유격대와 유격대원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수십 년간 방치할 수도 없었으며 죽은 뒤에도 사적이 모호한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오늘날에 우리가 보는 어랑촌 13용사는 일개인의 서술에 의하여 역사를 이용하는 자들에 의하여 가공이 되고 흐트러진 것이지만 역사의 진면모는 그 자리에 있었으며 지나간 역사는 결코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 백 년이 다 돼가는 이 시점.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고 그걸 증명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아마 우리의 후대들은 지금 역사책으로 전해져오는 어랑촌 13용사 이야기를 알고 믿으며 자랄 것이다. 조선족의 역사는 이렇게 영원히 잃어버렸다. 주 : 본문은 본지의 주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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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2
  • 조선의용군과 만주독립군 활동
    ● 김 규 한국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조선의용군’을 검색해보면 만주에서 싸우던 독립군 부대라고 버젓이 나온다. 해서 만주에서 조선의용군 혹은 조선 의용대가 싸웠거니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조선의용군이 곧 조선독립군이고 만주에서 만들어진 조선독립군 백두산 독립군이나 만주 독립군이라고 생각하고 나아가서 항일연군에도 가담하지 않았나 혹은 항일연군에 속하거나 관련된 거 아닌가 하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국 모처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 건 맞으나 조선의용군은 1920년 좌우부터 진행된 만주의 독립운동 독립혁명 독립군 그리고 항일연군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조선의용군은 1938년경에야 만들어졌으며 즉 급조한 것이며 광복이 될 때까지 300명 좌우였으며 게다가 대부분이 비전투원이었다. 조선의용군을 조선독립군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주의 조선 독립 세력은 훨씬 전에 이루어졌다. 1938년이면 김좌진이 가담한 청산리 전투도 끝난지 십수 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장소도 틀린다. 만주가 아니라 한구 즉 오늘의 중국 후베이성 무한시에서 의용군을 설립했다. 설립한 배경에는 장개석은 상하이에 있는 김구와 호흡이 맞았고 조선 독립을 돕고자 했으나 김원봉 같은 좌파랑은 맞지 않았다. 그래서 국공합작을 빌미로 김원봉 세력을 연안에 보냈는데 그게 조선의용군이다. 그 당시 동북의 항일연군에는 만주의 조선독립군 세력이 절반 넘어 포진해 있었으며 중국공산당의 입장으로 볼 때 조선인은 모두 한민족이고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였기에 김원봉의 조선의용군에 대해 접대를 잘해줬다. 1945년 항일 전쟁이 끝나자 항일연군에 속해있던 수만 명의(일설에 6개 사단 6만 명) 조선독립군과 화북 일대의 조선의용군이 조선 김일성 휘하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중 대표적인 게 정율성이라고 봐야겠다. 하여 모택동이나 중공의 입장에서는 조선인은 대단히 고마운 존재로 그것이 조선 의용대이든 만주 독립군이든 모두 동일시 하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김학철에 대한 예우이다. 김학철은 나이를 보나 독립활동에 가담한 시기나 시간을 보나 항일연군과 다른 조선의용군에 비겨도 한참 떨어진다. 그러나 김학철이 중국에 왔던 시기는 중국에서 공을 세웠던 조선인들이 대거 조선반도로 회 괴하던 시기였으며 중국은 아직 그 감사함이 따뜻하게 몸에 배어 있던 시기였다. 그래서 분대장에 불과한 김학철은 버젓이 모택동과도 이웃으로 잠깐 산 적이 있다. 그리고 해방 후 행정구역을 정할 때 원체 연변은 조선인의 공헌으로 볼 때 연변조선족 자치구로 해줄 수 있다는 게 중공의 공론이었지만 그 당시 주덕해를 비롯한 혁명가들은 비교적 적은 조선족 인구와 지역을 감안하여 조선족 자치주로 하겠다고 겸손하게 결정하였으며 이것이 그 후 중공에서 조선족이라면 소수민족 중 최고로 취급하는 결정적 계기다. 말이 엇나갔지만 조선의용군은 만주 독립군 혁명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김원봉이 개인적으로 만주에는 자주 다녀갔지만 조선의용군은 한날한시라도 만주 땅을 디딘 적이 없었으며 전투나 혁명은 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만주의 독립군이 조선의용군으로 버젓이 나오는데 이는 역사 왜곡이다. 만주의 독립군은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한 1912년경부터 중국과 조선의 접경지대인 백두산 약수동 근처에서 태동을 하였으며 1931년 만주가 일본의 손에 들어가자 일본 관동군을 상대하여 소탕당할 험악한 상황에 맞닥뜨려 일부는 소련 경내로 이동을 하였으며 대부분은 중공과 연합하여 항일연군으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서 항일연군 중의 조선인이 곧 만주의 독립군 활동을 한 장본인이란 말이다. 조선 의용대는 그냥 조선인이라는 것 외에 활동 무대는 중국 화북 일대였으며 최고 인수가 300명에 그쳤다. 항일연군 중의 조선인은 나중에 조선에 들어간 것만 6만 명이다. 개중에 안 간 사람과 군인이 아니어서 못 간 사람(중국공산당 지하당원) 등을 포함한다면 만주 독립군 활동 세력은 십수만도 가능하다. 중국에서는 항일연군의 조선인 사적을 최대한 줄여 중공의 업적을 과시하는데 유리하므로... 이 세 세력은 조선족이라는 근대의 가장 위대한 한민족의 역사적 업적을 가로채였으며 김원봉 같은 300명 부하를 거느린 하루라도 제대로 된 전투도 못해보고 테러분자 비스름한 행적을 기록한 사람에게 영광을 주었다. 누구를 탓하랴 우리 조선족 자신도 우리의 역사를 모르고 있지 않는가? 그것이 설령 눈앞에 있다고 하여도 ……. 주 : 본문은 본지의 주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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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20
  • 추악한 위선, 드러난 이중잣대
    ●천웨이화(차이나데일리 EU 사무국)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이 1월 6일 워싱턴에서 미 국회 의사당을 습격한 사건은 미국과 전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자는 "폭동, 폭도, 반란군, 국내 테러리스트"라고 불렀다. 그리고 CNN 방송은 미국인들은 "공포"와 "혐오"로 국회 의사당 폭동을 지켜봤다고 전했다. FBI는 화요일에 160 건의 사건 파일을 열었고 워싱턴 DC 마이클 셔윈 (Michael Sherwin) 미국 변호사 대행은 이미 70 건의 사건이 접수되었다고 밝혔다. 상원 민주당 지도자 척 슈머는 미국 국회 의사당을 습격한 폭도들의 항공기 탑승을 금지하고 정부 "항공기 탑승 금지"명단에 추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부 폭도들은 이미 탑승 금지 명단에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폭동에 대응하여 트위터는 8천8백만 명 이상의 팔로워를 보유한 트럼프의 계정을 영구적으로 정지했다. 또한 큐아논(QAnon, 극우음모론집단)과 관련된 7만 개 이상의 계정을 폐쇄했다. 다른 소셜 미디어 플랫폼도 그 뒤를 따랐다. 애플, 구글 및 아마존은 폭력적인 콘텐츠를 유포 한 혐의로 팔러(Parler)에 대한 서비스를 중단했다. 팔러는 미국 극우 세력이 선호하는 소셜 미디어 플랫폼이다. 그리고 수요일 유튜브는 "계속되는 폭력의 가능성"을 인용하면서 적어도 일주일 동안 트럼프의 계정을 정지하는 최신 온라인 플랫폼이 되었다. 메르켈 총리 대변인은 “기본권으로서 표현의 자유는 입법기관이 제한할 수는 있지만 특정 기업이 이를 제한해선 안 된다”라며 “메르켈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계정이 영구 차단된 데 대해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설득하여 트럼프를 해임하기 위한 제25차 수정안을 촉구하는 데 실패한 하원은 수요일에 두 번째로 트럼프를 "폭란 선동"혐의로 탄핵했다. 게다가 2020년 선거 결과에 도전한 테드 크루즈와 조쉬 하울리와 같은 미국 의원들도 폭동 이후의 폭풍을 주시하고 있다. 독일의 도이치 은행과 뉴욕에 본사를 둔 시그니처 은행은 트럼프의 가업에 대한 대출을 중단하거나 계좌를 폐쇄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미국 프로 골프협회(PGA America)는 2022년 챔피언십이 뉴저지의 트럼프 내셔널 골프 클럽에서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번 폭동 사태와 관련해 미국과 대부분의 서방 언론 매체와 정치인들의 반응은 2019년 7월 1일 폭도들이 홍콩 입법회를 습격한 후 보여준 반응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홍콩특별행정구 입법부 건물과 기물은 폭도들의 석유, 폭탄 등 투척으로 훨씬 더 심각하게 파괴되고 폭력적이었지만 BBC와 CNN과 같은 언론 매체는 폭도를 "폭도"라고 부르지 않고 시위대라고 불렀다. 뉴욕 타임스는 그날 보고서에서 그들을 "활동가 집단"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크루즈, 홀리, 톰 코튼, 마르코 루비오와 같은 미국 의원들은 폭도들을 비난하는 대신 홍콩 당국의 법적 대응에 대해 비난을 아끼지 않았다. 미 국회 의사당 습격은 비난받을 수 있으며 책임자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미 의회에 대한 공격은 서구 언론과 정치인의 위선과 이중 기준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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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21-01-17
  • 중국 고대 4대 추녀
    중국고대사에는 서시(西施), 초선(貂蝉), 양귀비(杨贵妃), 왕소군(王昭君) 4대미녀가 있었을 뿐만아니라 모모(嫫母), 종리춘(钟离春), 맹광(孟光), 완씨(阮氏) 4대 추녀도 있었다. 원고시대 황제(黄帝)의 넷째부인 모모 5000년 전에 황제는 치우와 싸워 이겼고 신농을 항복시켜 3대부락을 통일했다. 그때로부터 인류는 야만시대를 결속 짓고 문명사회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 시기에 살았던 모모는 외모가 매우 추하여 낯선 사람들이 그녀를 한번 보기만 하면 놀라서 몸을 돌려 달아났다고 한다. 가련한 모모는 어려부서부터 남들에게 우롱을 당하고 부모에게 내버려지고 이웃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자매들이 피해 다녔지만 선량하고 부지런하고 사리에 밝고 진심으로 사람을 대했을 뿐만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을 낙으로 여겼기 때문에 사람들은 점차 그녀를 좋아하게 되고 그녀와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그녀가 20살이 되여도 데려가려는 남자가 없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저 불쌍한 못생긴 처녀가 한평생 시집을 못가게 되겠구나”하고 탄식했다. 어느 날에 황제가 지방을 순시하다가 여성들이 뽕을 따고 있는 것을 보게 되였다. 그런데 갑자기 한 여성이 “아이구”하고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더니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였다. 원래 그 여성은 뱀에게 물렸던 것이다. 숱한 여성들은 곁에서 구경만 할뿐 누구도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했다. 그때 저쪽켠에서 뽕을 따고 있던 처녀가 고함소리를 듣고 달려오더니 신속하게 두 여성에게 맑은물을 떠오라고 이르고 다른 여성들에게는 몇가지 약초이름을 알려주면서 약초를 캐오라고 시켰다. 그리고는 자신의 치맛자락을 찢어서 뱀에게 물린 여성의 다리 상처의 윗쪽을 꽉 동여맨 후 머리에 꽂았던 비녀로 상처를 벌려놓았다. 다음 엎드려서 입으로 상처의 독을 빨아내기 시작했다. 황제는 그 처녀가 외모는 몹시 추하게 생겼으나 용감하게 나서서 남을 도와줄 뿐만아니라 조직능력이 강한 것을 보고 신하들에게 그녀가 누군가를 알아오게 했다. 신하들이 달려가 물어보더니 그 처녀가 추녀 모모라고 알려주었다. 황제는 온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을 했다. 황제는 모모를 궁으로 데리고 가서 비로 맞아들이고 그녀더러 후궁의 모든 비빈들을 관리하게 했다. 제나라 제선왕의 왕후 종리춘 종리춘의 이야기는 서한 유향이 쓴 “열녀전” 중의 “변통전”에 기록되어있다. 종리춘은 춘추전국시기의 제나라 무염현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름을 종무염이라고도 불렀다. 그녀는 덕행과 재주를 겸비했지만 외모가 너무 못생겨서 마흔살이 되도록 시집을 가지 못했다. 그녀의 이마와 두 눈은 모두 아래로 오목하게 들어갔고 상하비례가 맞지 않았다. 콧구멍은 위로 잔뜩 치켜졌고 목에는 남자보다 더 큰 울대뼈가 자랐으며 머리가 큰데다가 머리카락은 몇오리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피부는 숯보다 더 검었다. 종리춘은 비록 보기 흉하게 생겼지만 원대한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제나라를 집정하고 있는 제선왕은 정치상에서 부패했고 나랏일을 잘 돌보지 못했으며 성질이 불같았다. 종리춘은 나라와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제선왕을 만나서 “지금 제나라는 사방에서 위험에 처해있나이다. 빨리 정신을 차리고 돌아서지 않는다면 나라가 멸망되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위험을 해결할 방법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제선왕은 나라를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에 감동되어 그녀의 의견을 받아드렸다. 그리고 그녀를 왕후로 봉하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정력을 몰 부었다. 그 후 제선왕은 나라가 위급할 때에는 추녀 종리춘을 총애했고 나라가 태평할 때에는 미모가 뛰어난 하영춘을 총애했다. 종리춘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진나라, 연나라와 싸워서 이기기도 했다. 동한시기 현사 양홍의 안해 맹광 맹광은 거안제미(举案齐眉)라는 성어의 주인공이다. 거안제미는 안해가 남편을 깍듯이 존경하다는 뜻이다. 맹광은 남편 양홍이 집에 돌아올 때마다 밥상을 눈섭위까지 치켜올릴 정도로 존중했다고 한다. 동한 평릉사람인 맹광은 뚱뚱하고 피부가 검고 매우 못생겼지만 힘이 매우 세서 돌절구를 머리우까지 들어올렸다. 숱한 사람들이 중매를 서주려고 했지만 그녀는 모두 거절했다. 그러다보니 나이 서른살이 되도록 시집을 가지 못했다. 맹광의 부모는 딸한테 “왜서 시집을 가지 않으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그제야 맹광은 오래전부터 마음에 둔 남자가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원래 명광은 양홍이라는 선비가 비록 집은 가난하지만 품행이 고상하고 박학다식하다는 말을 듣고 양홍이 아니면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양홍도 청혼하는 처녀들이 많있지만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아서 거절했다. 그러다가 맹광의 말을 전해드고 그녀의 뜻이 기특해 맹광과 결혼을 하였다. 결혼한 첫날밤부터 맹광은 못생긴 얼굴이 근심되어 옷치장과 얼굴화장에 신경을 썼다. 그런데 양홍이 며칠이 지나도 신부와 잠자리를 같이하려고 하지 않았다. 맹광은 궁금하여 그 까닭을 물었다. 이에 양홍은 “내가 원했던 부인은 비단옷을 걸치고 짙은 화장을 하는 여자가 아니라 누더기옷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깊은 산속에서라도 살 수 있는 여자였소”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맹광은 “이제 당신의 마음을 알았으니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 후부터 맹광은 화장도 않고 누더기차림으로 생활하다가 남편의 뜻에 따라 산속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고 베를 짜면서 살았다. 맹광이 남편의 인품을 존경하고 그의 의지를 따르며 극진한 내조로 집안을 화목하게 꾸렸기에 양홍이 마음놓고 학문을 파고들어 수많은 명작을 저술할 수 있었다. 동진시기 명사 허윤의 안해 완씨 조위(曹魏)의 허윤은 완덕위의 딸을 안해로 맞아들였다. 첫날밤에 화촉동방을 밝히려고 신부가 머리에 쓴 붉은천을 벗긴 허윤은 신부의 못생긴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서 달아났는데 다시는 신방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 후 허윤의 친구 환범이 놀러왔다가 허윤을 보고 “완씨가 추한 외모로 자네한테 시집을 온데는 반드시 연고가 있을 거야. 그러니 잘 관찰해보게”라고 말했다. 허윤은 환범의 말을 듣고 그날밤에 신방으로 들어가보았다. 그러나 신부의 못생긴 얼굴을 보자 또 달아나려고 했다. 그때 신부가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허윤은 못생긴 안해한테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면서 말했다. “여인에게는 부덕(妇德), 부언(妇言), 부용(妇容), 부공(妇功) 4덕이 있어야 하는데 당신은 어느 조건에 부합되오?” 그러자 신부가 말했다. “저에게 모자라는건 용모뿐이예요. 그런데 선비한테는 백행(百行)이 있어야 한다는데 당신은 어느 조건에 부합되는가요?” “난 백행이 모두 구비 되었소.” “백행에서 첫 번째로 구비 되어야 할 것은 덕행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색을 좋아하고 덕을 좋아하지 않으니 어떻게 덕행이 구비 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허윤은 말문이 막혔다. 그때로부터 그들 부부는 서로 존중하고 서로 사랑하는 금슬이 좋은 부부로 되었다. 허윤이 리부랑이 되었을 때 등용한 지방관리는 모두 그와 한고향사람이였다. 그 때문에 위명제는 사람을 파견하여 그들을 붙잡아갔다. 허윤이 무사에게 끌려갈 때 완씨는 맨발바람으로 뛰어가서 “명군에게는 사정을 보아달라고 애걸하지 말고 도리로 설득해야 해요”라고 부탁했다. 허윤이 잡혀간 후 시댁식구들이 우는 것을 보고 완씨는 “별일 없을거예요. 그이는 인차 돌아올거예요”라고 위로하면서 좁쌀죽을 끓여놓고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허윤은 위명제가 아는 사람만 등용한 일을 따져묻자 안해의 부탁대로 “페하, 나라를 위해 인재를 등용하려면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나이다. 신이 한고향사람을 쓴 것은 신이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페하께서 알아보고 그들이 그 직위에 알맞지 않다고 한다면 신은 죄를 달갑게 받겠나이다”라고 아뢰였다. 위명제가 알아본 결과 허윤이 등용한 그의 고향사람들이 모두 직위에 알맞은 인재들이였다. 허윤은 정말로 완씨의 말대로 인차 풀려나서 집에 돌아와 좁쌀죽을 먹게 되었다. 그 후 허윤은 진북장군으로 승진했다. 허윤은 기뻐서 부인을 보고 “이제는 베개를 높이 베고 근심걱정이 없이 자게 되였소”라고 말했다. 그러자 완씨는 “기쁜 일이 온 뒤엔 화가 따를 수 있으니 조심해야 돼요”라고 주의를 주었다. 과연 그후 사마사는 허윤이 가까운 관리들과 밀모하여 반역음모를 꾸민다고 의심했다. 사마사는 없는 죄를 씌워 허윤을 악양으로 귀양을 보낸 후 도중에 죽여버렸다. 사마사는 부하를 시켜 허윤이 아들이 허윤처럼 총명하면 죽여버리라고 명령했다. 완씨는 허윤의 부하한테서 사마사의 부하가 찾아온다는 말을 전해듣고 급히 두 아들을 불러놓고 “너희들은 아버지의 죽음에 슬퍼하거나 분개하지도 말고 조정일에도 관심이 없는 척 해야 한다”고 부탁했다. 사마사의 부하가 허윤의 두 아들을 만나보고 사마사한테 “허윤의 두 아들은 평범하여 후환이 없겠다고 아뢰였다. 그리하여 허윤의 두 아들은 살아남게 되였다. (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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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16
  • 한국 재계의 거목 ‘故 이건희 회장’을 기리며
    ●이치수(사단법인 세계언론협회 회장)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5일 향년 78세로 타계했다. 2014년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져 투병해온 지 6년 만이다. 고 이건희 회장은 32년간 삼성(三星)을 사명에 걸맞게 가전과 모바일, 반도체 부문에서 글로벌 1위로 올리며 세 개의 별을 만들었다. 2006년 글로벌 TV 시장을 장악했던 일본 소니를 제치고 1위로 앞섰고, 미국 애플의 막강한 기세마저 꺾은 채 스마트폰 시장 1위를 차지했다. 이어 메모리 반도체 부문까지 ‘삼성’의 이름을 전 세계에 각인시킨 채 20여개 품목에서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으로 우뚝 솟았다. 삼성그룹의 초석을 다진 이병철 회장에 이어 46세에 그룹을 승계한 이 회장은 혁신과 성공을 강조하며 저력을 발휘해 왔다. 삼성전자 임원들에게 ‘바꾸려면 철저히 바꿔야 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어록을 남길 만큼 기업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품질과 디자인의 가치, 인재를 중심으로 한 경영가치를 강조했다. 특히 2002년 6월 인재 전략 사장단 워크숍에서 이 회장은 "200∼300년 전에는 10만∼20만 명이 군주와 왕족을 먹여 살렸지만 21세기는 탁월한 한 명의 천재가 10만∼20만 명의 직원을 먹여 살린다"라고 했다. 이 회장의 이러한 경영철학은 국내•외 임직원 50만 명을 거느린 삼성으로 사세를 확장하며 전 세계에 맹위를 떨치는 기업으로 가시화시켰다. 이 회장은 1987년 1조원이던 삼성의 시가총액을 2012년에는 390조 원대로 성장시켜 총 자산 500조 원으로 일구어냈다. 그야말로 짧은 기간 동안 기업을 초일류로 탈바꿈해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다. 삼성을 통해 한국을 고부가가치 첨단산업의 산업구조를 가진 기지로 변모시킨 이 회장이지만 사업 과정에서 불거진 정경유착 논란과 무노조 경영 등은 과오로 남았다. 이 회장은 삼성비자금 사전과 관련해 특검 조사 이후 배임 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2008년 경영일선의 퇴진과 전략기획실 해체 등을 선언했다. 이후 대통령의 단독 사면을 받고 2010년 경영일선에 복귀해 다시 한 번 대한민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삼성의 재도약이 이어진다. 삼성 성공의 신화에 따르는 공과는 이제 이재용 부회장이 짊어질 시대적 사명이 되었다. 사실상 이 회장이 와병상태로 지낸 6년 동안 이 부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선대의 사업을 도맡아 추진했다. 할아버지 이병철 회장과 아버지 이 회장의 업적과 과제를 이어받는다는 건 단순한 부회장으로서 전면에 나서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일이다. 특히 이 부회장은 코로나19 펜데믹으로 불어닥친 전 세계적인 경제 불황 속에서 이 모든 불확실성을 해결해야 한다. 이 부회장은 2016년 국내 인수합병(M&A) 최대 금액인 9조원을 투입해 미국의 자동차 전자장비(전장) 전문기업 '하만'을 인수했다. 2018년에는 '180조원 투자 4만 명 채용'을 목표로 AI•5G•바이오•전장부품 사업을 미래 성장사업으로 보고 투자에 나섰다. 지난해에는 '2030년 시스템반도체 세계 1위'의 비전을 발표하며 133조원을 투자를 선언했고, 차세대 프리미엄 TV 시장의 기술력 강화를 위해 세계 최초로 'QD(퀀텀닷, 양자점 물질) 디스플레이' 투자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올해에는 삼성전자와 삼성디스플레이 사업을 위해 네덜란드와 베트남 등 출장업무를 이어가며 경영 과제를 발 빠르게 해결해나가고 있다. 이 부회장이 해결해야 할 중요 당면과제가 있다. 그의 앞날에는 2016년부터 약 4년간 매달려온 사법리스크가 여전히 존재한다. 이 부회장은 삼성물산-제일모직 불공정 합병과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부정을 주도한 혐의로 지난 22일 기소되어 재판 과정을 앞두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과 관련된 파기환송심은 오는 26일 재판이 재개된다. 코로나 19 팬데믹과 미•중 무역전쟁 영향으로 경제 성장의 불확실성이 매우 커진 상황이다. 이때 대한민국 경제의 축을 견인하는 삼성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는 매우 클 수밖에 없다. 글로벌 지각변동 속에서 이 부회장의 경영공백은 세계 반도체산업을 주도하는 삼성의 행보를 늦추고 향후 몇 년간 떠안아야 할 사법적 리스크는 거액의 투자와 인수합병 추진 과제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재판과정은 법리 검토를 최우선으로 삼되 합리적인 판단이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더불어 삼성의 초고속 성장으로 미처 강화하지 못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경영의 투명성은 반드시 모든 국민의 눈높이에 맞게끔 정비해야 한다. 나라가 부강해지는 것은 상생과 합리적인 경영 철학을 실천하는 기업이 늘어날수록 실현되고 더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로 창사 82주년이 되기까지 삼성을 있게 한 고 이건희 회장의 유익한 가치를 우리 사회가 조명하고 널리 알려 발전해 나갈 수 있는 미래의 토양이 되기를 바란다. 삼가 조의(弔意)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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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26
  • 한국전쟁 70주년, 숫자로 되돌아보는 6·25
    ●철 민 금년 10월 25일은 중국군의 압록강을 넘어 한국전에 뛰어든 지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일전,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70년 전 중국군이 한국전에 참가하게 될 당시의 미국과 중국의 경제적 대비, 미군과 중국군 사이의 역량 대비를 하면서 쌍방 간의 현저한 역량 적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군이 압록강을 넘어 한국전에 뛰어들었고 또한 미군을 38선 부근까지 밀고 내려간 원인과 요소 등을 분석하면서 이를 통해 현재 제멋대로 거들먹거리며 중국을 비방하는 미국에 뭔가를 암시했다. 그럼 아래에 한국전 당시 미군과 중국군 사이의 역량 대비를 살펴본 다음 필자의 일가견을 피로해보기로 하자. 1950년 한국전이 발발하자 미군은 며칠 내로 참전했고 중국군 즉 중국인민지원군은 그 해 10월 19일부터 압록강을 넘어서기 시작했으며 10월 25일부터 정식으로 미군 및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과 교전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철두철미한 세계 제1의 강대국이었고 중국은 건국된 지 만 1년밖에 안 되었으며 거기에 폐허 속에서 갓 일떠서기 시작한 공화국에 불과했다. 그래서일까? 이 전쟁은 전 세계 모든 군사전문가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당시 미국과 중국, 미군과 중국군의 역량 대비를 보면 너무나도 현저했다. 국민생산 총액(GDP) 15 : 1 1949년 미국은 제2차 공업혁명을 완수하면서 국민생산ㅊ총액이 약 2700억 달라가 되었지만 갓 건국된 중국의 국민생산 총액은 180억 좌우밖에 되지 않았다. 강철 생산량 146 : 1 1950년 미국의 강철 생산량은 8772만 톤이었고 공업 총 생산치는 서방세계의 50% 이상을 차지했지만 1950년 중국의 강철 생산량은 61만 톤으로 미국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되었다. 알곡생산 대비 1.4 : 1 미국과 중국의 인당 알곡생산 대비는 5 : 1 이었다. 1949년 미국의 알곡 생산량은 1억 5740만 톤으로 인당 평균 생산량은 약 1000킬로그램에 달했지만 1949년 중국의 알곡 생산량은 1억 1318만 톤으로 인당 알곡 생산량은 약 208 킬로그램 정도에 불과했다. 군사력 대비 공군 비행기 대 수 대비 3.6 대 : 1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가장 최신식인 분사식 전투기 F - 86을 사용했으며 경상적으로 전투에 투입된 전투기 대수는 1100대에 달했다. 하지만 중국군은 참전 초기 공군은 공백이었고 후에 소련의 지원으로 무장한 작전 기 역시 300대 미만이었다. 해군 대비 100 : 0 2차 대전 후 미군은 항공모함과 항공모함 호위함 근 100척을 갖고 있었고 항공모함을 호위하는 편대가 20여 개가 있었지만 당시 중국군은 배수량이 1만 톤을 초과하는 군함은 1척도 없었고 한국전에 참가한 해군함정은 더욱 없었다. 기계화 부대 대비, 1000 : 0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1000여 대의 탱크를 투입하고 지면부대 전부가 기계화 혹은 오토바이 부대였으나 중국군 초기 입조한 6갈래 부대는 1대의 탱크도 없었고 후기에 와서야 기계화 부대 영이던 국면이 결속되었다. 보병 무기 대비 한국전 당시 미군은 말 그대로 ‘발톱까지 무장’한 부대로 주요 보병 무기로는 갤런트 M 1 반자동 소총 등으로 모두 2차 대전 시기의 중, 경무기 걸작으로 성능이 우수하고 믿음직했으며 아울러 공급도 아주 충족하였다. 하지만 당시 중국군의 주요 무기 내원은 여전히 전쟁에서 노획하는 것, 수량 상 중국군은 매 군단 급에 70밀리 이상의 포가 190문으로 미군 1개 사단의 50%밖에 되지 않았다. 복장 대비 한국전에서 중국군과 접전 당시 미군은 보온 성능이 좋은 방한모에다 양털 내의와 바지를 착용했으며 겉옷 또한 두꺼운 외투 같은 것을 입었는가 하면 갓 연구개발에 성공한 방탄조끼까지 껴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중국군은 선두 부대는 창졸하게 압록강을 넘은 남방 부대이다 보니 방한장비가 엄청나게 부족, 입은 옷들이 얇은 탓에 장진호 전투 중에서 대량의 동상자 및 동사자가 출현했으며 보급이 정상화된 후에도 중국군의 옷 장비는 면 상의와 면 하의가 위주로 된 차림이었다. 식물 보급의 대비 한국전에 참가한 미군의 식품은 신선한 육류와 야채 그리고 초콜릿, 과자, 코카콜라 등이었다. 미군은 육류, 계란 ‧ 우유 류가 공급이 충족하였고 거기에 담배, 사탕 등도 정기적으로 공급되었다. 반면에 중국군의 주요 식품은 볶은 미시 가루, 볶은 콩 혹은 콩 등이었고 그마저도 공급이 두절될 때가 많았으며 도한 눈으로 물을 대신하고 들나물로 기아를 달랠 때도 있었다. 군사적으로 볼 때 사람들은 늘 중국군은 ‘좁쌀에 보총’으로 무장한 군대로서 실제상에서는 그 ‘좁쌀’도 공급이 충족하지 못할 때가 많았고 그 ‘소총’ 또한 부동한 연대의 부동한 유형으로 구성된 것들이었다. 그럼 ‘자기들밖에 없노라’고 뽐내는 미국과 가난하기를 ‘백지밖에 없는 중국’ ㅡ 그렇다면 중국군은 어떻게 되어 감히 출병하여 조선을 도와 미국과 싸울 수 있었을까? 그것은 사악과 귀신을 믿지 않는 대국의 기개였고 조국의 안전을 위해 이웃 국가를 지원하는 애국주의 정신의 표현이었고 평화와 정의를 위하는 국제주의 정신이었으며 영용 완강하고 승리를 위해 싸우는 혁명영웅주의 정신과 애로와 난관에 굴하지 않는 충천한 혁명 낙관주의 정신이었다. 위대한 항 미 원조의 정신은 반드시 중국인민과 중화민족을 격려하여 일체의 간난신고를 극복하고 일체의 강대한 적도 전승할 수 있다는 자신심을 심어주고 있었다고 중국은 자평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70년 전 한국전쟁의 승패를 두고 많은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전쟁 당사자들인 남과 북은 서로 자기네들이 승리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중국 또한 미국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주장이며 이에 미국은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이는 이기지 못했다는 것을 묵인하는 셈으로 해석된다. 왜냐하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시 유엔군 측 수석대표 해리슨 장군은 “미군이 승리하지 못한 협정에 조인해 보기는 처음”이라고 말한 것이 충분히 미국 측의 주장을 대변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럼 당시 어느 측이 승리하고 어느 측이 패했는가?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쟁 초기, 즉 1950년 6월 25일부터 9월 초까지는 한국군과 유엔군이 인민군한테 패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지리상 38선에서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갔으니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수가 없으며 그 뒤 유엔군과 한국군에 의해 인민군이 38선을 내주고 압록강까지 쫓겼을 때를 보면 인민군이 미군(유엔군)과 한국군에게 패했다고 할 수 있는 것 또한 충분한 사실적 근거이다. 그렇다면 그럼 중국군은 미군과 맞다들어 패했는가 아니면 승리했는가? 이를 두고 많은 군사전문가들은 “승자도 패자도 없다”라고 분석했다.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한국전 총체를 볼 때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보면 중국군은 압록강으로부터 미군을 내밀기 시작하여 한 달 여 만에는 경기도 평택 즉 38선을 넘어 37도선 부근까지 쳐 내려갔다. 그리고 1951년 3월 유엔군의 재 반격으로 후퇴하기는 했으나 전선은 38선 부근으로 거의 고착상태로 되어버렸다. 하긴 1953년 정전협정에 이르기까지 이 전선에서는 밀고 밀리는 시소게임(拉锯战)은 자주 있었으나 그 대치적 위치는 큰 변동이 없었다. 그러니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군사전문가들의 분석이나 “미군과는 승리한 전쟁”이라는 중국의 주장 모두가 일리가 있으며 틀리지는 않았다는 일가견이다. 그리고 이기고 지고 하는 설전보다는 ‘좁쌀에 보총’인 중국군이 세계 최강대국인 미군과 감히 싸울 수 있었다는 것이 중요하며 또한 승리했다기보다는 패하지 않았다는 것이 중국한테 있어서는 승리한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분석이다. 다음, 한국전을 통해 한반도 남북과 미국, 중국과 소련 등 각 측이 얻어진 것과 잃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즉 이익을 본 측과 손해를 본 측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선 전쟁의 당사자인 남과 북을 놓고 말해보자. 1950연대의 한국전에서 한반도 남과 북은 잃은 것은 엄청 많으나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북 3000천리에 잿더미만 남았고 1000여만 명의 이산가족과 300여만 명의 희생자 그리고 수많은 미망인과 고아가 생겼다. 얻고자 하던 통일은 이루지 못하고 분단의 골은 더욱 깊어져만 갔으며 남과 북은 서로가 상대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날카로워지기만 했다. 또한 그 전쟁은 동서방의 힘을 겨루는 전쟁터를 한반도가 제공한 셈으로 됐으며 그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측은 남과 북이었으나 서로가 이겼다면서 자축하는 분위기였다. 특히 북에서는 이른바 7월 27일을 전승의 날로 규정하면서 ‘전승 절’ 기념행사를 해마다 대대적으로 거행하고 있는 양상이다. 참으로 가소롭고 어이가 없으며 심지어 불쌍하다는 감까지 든다. 이어서 미국과 중국이다. 이 전쟁에서 미국이나 중국 모두가 막대한 대가를 치렀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을 볼 때 쏟아붓은 달러도 막대했지만 정치와 외교 적으로는 꼬물만큼의 이득도 없었다. 그리고 그 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처음으로 ‘이기지 못한 전쟁’을 치르기 시작, 이어서 20여 년 뒤엔 베트남 전에서도 전쟁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베트남에서 철수하는 ‘제1의 강대국’ 답지 못한 양상을 출연했다. 그리고 한국전에서 중국 역시 막대한 대가를 치렀지만 장진호에서 ‘승전만을 거듭했다’는 미 해병사를 만신창으로 되게 만들었다. 그것은 상대가 한국군도 다른 유엔군도 아닌 미 해병사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었으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한국전을 계기로 세계의 많은 군사전문가들은 중국의 군사력을 재평가하기 시작했고 중국은 공산진영의 새로운 리더로 자리매김을 하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이 외 소련을 볼 때 많은 전쟁 물자를 지원했지만 다른 대가는 거의 없는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소련은 미국의 역향력이 유럽 쪽에 지나치게 집중되는 걸 와해시키는 것과 동서방의 군사균형을 이루게 하는 목적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었다. 전쟁은 그 어떤 나라도 바라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 남과 북이 그런가 하면 미국이나 중국도 마찬가지라고 판단된다. 전쟁을 치르고 상대를 무너뜨리자면 자신 역시 어느 정도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쟁은 가끔씩 일어난다. 그리고 세계의 많은 전쟁은 미국과 연관되고 있다. 미국이 직접 참여하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키도록 다른 나라들을 꼬드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최근 들어 미국은 또 이것저것 트집을 잡으며 중국을 헐뜯고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중국을 비방하고 또한 이른바 인권, 환경 등을 두고도 중국에 모든 죄명을 들씌우고 있다. 이 외에도 이른바 ‘미국 우선주의’를 떠들면서 일방주의를 주장하면서 모든 나라 특히는 중국을 배척하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객관적 요인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미국은 잘못 판단하는 것 같다. 세계의 모순과 갈등을 전쟁으로 해결하는 시대는 이미 지난 지 오래된다. 그리고 미국은 중국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즉 중국의 왕의 외교부장이 언급하다 싶이 중국은 100여 년 전의 중국이 아닌 것이다. 미국은 판단착오를 잘 범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맥아더가 중국을 아주 우습게 보는 판단착오를 범했다면 현재 미국의 정계 인물들인 트럼프, 폼페이오 등이 한심한 판단 착오를 범하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이 계속 판단 적 착오를 고집한다면 70년 전의 장진호만이 아닌 더 많고 더 가혹한 장진호가 열 개, 스무 개 아니, 백 개도 나타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는 지금 강대해진 중국이 거만한 아메리카에 보내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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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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