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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전주국제영화제 정준호-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 투톱체제 성공을 바라며
    독립영화의 요람 전주국제영화제가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로 전환해 정체성 확립과 대중성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지 관심을 받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는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민성욱 부집행위원장과 정준호 영화배우를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의결했고, 지난 26일 조직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은 시장실에서 위촉장을 전달했다. 마력은 동력의 단위로 높을수록 좋다. 이번 쌍두마차 체제가 앞으로 3년 동안 시너지 효과를 일궈낼 것으로 기대된다. 백제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 교수인 민성욱 신임 공동집행위원장은 전주국제영화제 출범부터 조직위의 사무국장 및 부집행위원장을 역임한 '지킴이'이고, 정준호 신임 집행위원장은 높은 인지도를 가진 대중성을 확보한 영화배우이기 때문. 어떤 조직이나 더 큰 발전과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시점이 있다. 세계 초일류 전자제품 회사로 대한민국을 빛내는 삼성이 만일 제일제당 시절처럼 사카린을 밀수해 설탕을 팔던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면 지금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202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비경쟁 위주로 실시됐고 올해 2022년 23회 영화제는 국제경쟁, 한국경쟁, 한국단편경쟁, 특별부문(한국 장편 다큐멘터리, 지역공모작품, 비경쟁 아시아 영화)로 진행되며 업그레이드 됐다. 2023년 24회부터 3년간 시행될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기존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보다 더 대중성을 일으켜 더욱 큰 소통을 통해 영화계 발전과 주최지인 전주 지역발전에 더 크게 기여하는 영광이 실현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쌍두마차 체제가 된 전주국제영화제는 전주시민의 선택을 받은 우범기 시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이끄는 마차다. 우 조직위원장이 전주시 발전을 위한 고뇌 끝에 내놓은 묘수라고 풀이된다. 시장은 시민의 행복과 시의 발전을 도모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에 대해 기대가 큰 반면에 걱정과 반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수립되자, 권해효 배우, 방은진·한승룡 감독이 이사직을 사퇴했다. 이사회에서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의결되었다고 사퇴하는 것이 영화제에 대한 진정성일 수도 있지만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지점이다. 고 자니윤(고 윤종승) 코미디언은 2013년 2월28일 해외동포들과 판문점을 방문한 후 가진 뒷풀이에서 "한국 사람들은 너무 똑똑해요.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이XX 안돼, 저XX 안돼 하는거에요. 일을 해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한국계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고 그의 인프라를 총동원해 조국 대한민국 관광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었으나 좌절된데 대한 의견으로 들렸다. 대한민국은 625전쟁 후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나라다. 지난 80년간 대한민국이 변화가 없었다면 우리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억압속에서 지옥살이를 하고 있었을 게 자명하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는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임기는 3년이다. 3년간 응원하고 3년 후 큰 성공과 발전을 이루면 박수를 치고, 변화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때 가서 비판해도 늦지 않다. 한국언론인연대 박상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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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30
  • "일본 Z세대 중국에 호감" 중국 호감도 세대별로 다른 원인
    ●오카다 미츠루(일본 저널리스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7일 방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3년 만에 처음으로 중·일 정상회담을 갖고 악화된 양국 관계를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기시다는 대중 관계 개선에서 반중 여론과 대중 강경 자민당 우파의 제약을 받고 있지만 반중 여론을 거론하면 일본의 Z세대(18~29세)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40% 이상으로 다른 연령층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Z세대의 정치적 의지가 선거의 키를 쥐고 있는 세계적 흐름을 보면 '반중 여론'과 '우파'에만 의존하는 기시다 외교가 위태롭다. 45분 동안 진행된 이번 일-중 정상회담은 3시간여에 걸친 중-미 정상회담에 비해 일본의 대중국 중요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일·중 정상은 회담에서 국방부 해상 및 항공 연락 메커니즘의 직통 전화선 조기 개통, 새로운 중일 고위급 경제 대화의 조기 개최, 새로운 중일 고위급 문화교류 협의 메커니즘 회의 조기 개최 등 몇 가지 공감대를 형성했다. 향후 중일관계 개선의 지표 중 하나로 정상 간 상호 방문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의 대중 관계 개선의 한 가지 저항은 '반중(反中)' 여론 고조다. 일본의 대중(對中) 인식 악화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각부가 매년 발표하는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에는 흥미로운 수치가 나온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발표된 조사에서 응답자의 20.66%가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지난해보다 1.4% 증가)고 답했다.그러나 연령별로는 Z세대 중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는 비율이 41.6%로 전체보다 배 이상 많았다. 60~69세 13.4%, 70세 이상 13.2%에 비해 Z세대는 중국에 대한 친근감이 높다. 그렇다면 왜 연령대에 따라 중국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싶다. 나는 젊었을 때(저자는 1948년생) 중국의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있었고,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속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타자' 위에 자신의 생각을 투영해 기대를 부풀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나 구미의 통치체계를 중국의 정치와 사회에 투영해 일본이나 구미의 기준으로 중국을 관찰하고 판단한다. 요즘 60~70대 일본인들이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Z세대는 생각이 다르다. 내가 가르친 대학생의 경우 태어나기도 전에 일본 경제가 침체에 빠졌고,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들이 철들었을 때 중국은 이미 미국을 추격하는 대국이 됐고 IT 기술에서 일본을 앞섰으며 애니메이션과 게임 품질에서도 일본을 추월하고 있다. 또 Z세대가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많은 곳에서 중국 유학생과 접촉할 기회가 종종 있다. 다시 말해 Z세대는 중국을 일종의 '대등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환상은 없다.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의 버팀목이 될 때 일본인 전체의 대중국 관념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쇠락이라는 역사적 변화, '탈아입구((脫亞入歐)'의식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대가 '2선 후퇴'하면 일본의 '반중' 여론도 달라질 것이다. 기시다 정권도 언제까지 반중 익찬 여론에 의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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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 강강술래는 야합(野合)의 축제였다
    한국국어사전은 강강술래와 강강수월래를 같은 말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강강술래는 한문 표기가 없고 강강수월래를 한문으로 ‘强羌水越來’로 표기하고 있다. 强은 강하다는 뜻이고, 羌(중국서부에서 양을 토템으로 삼은 민족이며 세력이 강해 늘 중원을 위협하여 한족정권은 그들을 오랑캐로 취급해왔음)은 오랑캐라는 의미이다. ‘强羌水越來’는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온다는 뜻이다. 필자는 한국국어학자 어르신들에게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즉 강강술래는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온 민속인데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오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아무런 연관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는 걸까? 답이 아닌 답이 하나 있긴 하다. 국어학자들이 강강술래를 한문으로 표기할 방법을 찾지 못해 본래 4음절인 강강술래를 음악의 필요에 따라 5음절로 늘린 강강수월래를 말도 안 되는 ‘强羌水越來’로 표기했을 것이다. 이런 억지춘향 표기현상을 가리켜 사자성어로 견강부회(牽强附會)라고 말한다. 강강술래를 ‘强羌水越來’로 표기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설명하려면 먼저 강강술래의 어원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강강은 본래 감감이다. 감은 감다, 감돌다 등등의 의미이며 감감은 감의 강조이다. 강강술래는 원을 그리며 빙빙 돌아가는 놀이이기 때문에 본래 감감술래였다. 감감술래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강강술래로 변음 되었던 것이다. 술래는 가운데서 눈에 띠를 두르고 숨은 자를 찾아내는 자를 일컫는 말이다. 한국국어학자들은 술래가 한자어인 순라(巡邏)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데 글쎄 썩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강강술래의 어원을 살펴보았으니 이번에는 강강술래란 도대체 어떤 놀이인지? 알아보자. 강강술래는 본래 순수 우리말이고 그 뜻은 원무를 의미한다는 데 포커스를 맞추고 유래를 찾아야 한다. 원무는 고대사회에 수많은 민족들이 보편적으로 추었던 춤이다.『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에서 저자는 원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영지주의자 예수는 미스테리아 입문식에서 원무를 이용하여 제자들을 이끈다. 그러한 입문식 춤은 이교도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두루 나타나는 것이다.” 현대의 한 권위자는 이렇게 말했다. “고대입문식 축제 가운데 춤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엘리우시스에서의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입문식 후보자는 중심에 자리 잡고, 다른 사람들은 둘레에서 춤을 추었다. 그것은 행성과 별들의 궤도를 흉내 낸 것이었다. 미트라스 미스테리아의 의식에서도 미트라스를 상징하는 입문자는 중앙에 자리 잡고, 황도의 12궁을 상징하는 12명이 주위를 돌며 춤을 추었다. <요한행전>에서도 그와 비슷하게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 예수가 신호를 보내면 사도들이 신성한 말 ‘아멘’을 읊조린다. 예수는 이러한 ‘원무’를 통해서 ‘수난’을 나타낸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것을 예수는 ‘신성한 비밀’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원무는 고대사회에 있어서 보편적인 춤이었으나, 그 형식과 내용 및 목적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위의 글에서는 원무가 이교도 입문식과 예수라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의 원무가 행성과 별의 궤도를 흉내 낸 데서 유래되었다면 동양의 원무는 달을 흉내 낸 데서 유래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달을 흉내 내는 원무를 추는 것을 도월(跳月)놀이라 한다. 민속학자 임동권(任東權) 씨는 고대인들의 도월놀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원시시대에 있어서는 달을 중심으로 하여 행사가 많았다. 상원과 추석이 그러했고 달 밝은 밤이면 모두 모여 유희를 즐긴 것은 우리 조상만이 아니고 지금도 미개사회사회에서는 모두 그렇다. 따라서 옛날 1년 중에서 가장 달 밝은 한가윗날 마을의 소녀나 부인들이 모여 만월과 같은 둥근 원을 그리면서 놀이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때에 노래도 부르며 뛰기도 했을 것이니 강강술래가 임진왜란 때에 비로소 창안된 것이 아니고 그 이전에도 민족전래의 유희로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강강술래처럼 대대적인 것은 아니나 달밤에 소녀나 소년들이 손을 잡고 뛰며 노는 유희는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러한 뜻으로 강강술래를 보면 문헌고증을 할 수 없어서 그렇지 함화진(咸和鎭) 씨가 추상한 것처럼 마한 때의 민족유희였을지도 모르며 마한이 아닐지라도 백제 또는 고려시대에 이미 전파되었던 놀이인지도 모르겠다.” 중국소수민족문헌인『묘속기(苗俗記)』에 도월놀이에 관한 기사가 있는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른 봄에 남녀가 들판에 모여 배우자를 찾는 것을 이름 지어 ‘도월(跳月)’이라 한다. 정월 초 3일부터 13일까지 모두 도월놀이 기간이다. 13일 도월놀이가 끝나면 남자는 갈대피리를 불면서 앞장서고 여자가 띠를 끌고 뒤따르며 장내를 세 바퀴 돌고나서 손잡고 대나무숲속에 들어가 먼저 야합하는 바, 이름 지어 ‘라양(拉陽)이라 부른다. 그러고 나서 임신되면 시집가고 임신이 안 되면 이듬해에 또 반복해서 도월놀이에 참여한다. 『귀주통지(貴州通志)』에도 위의 기사와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다. “화묘(花苗), 매년 이른 봄에 남녀가 들판에 모이는 것을 ‘도월’이라 부른다. 평평한 곳(平壤)을 택해서 월장(月場)으로 삼는다. 남자가 갈대피리를 불고 여자가 방울을 울리며 빙빙 돌면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서 하루 종일 즐긴다. 날이 어두워지면 남녀가 서로 짝을 지어 갔다가 날이 밝으면 헤어진다.” “백묘(白苗), 도월놀이 풍습이 화묘와 같다.” 우리는 전라남도 남해안 여러 지방의 강강술래도 역시 묘의 제족(苗之諸族)과 같은 순수한 도월놀이였으며 따라서 강강술래도 역시 청춘남녀들이 야합을 목적으로 한 놀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인은 야합을 음란행위로 간주하지만 고대인에게 있어서 야합이야말로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는 신성한 의무라고 여겼을 것이다. 중국 유명 학자 이중탠 교수는 이것을 ‘이른 새벽 모닥불 축제’라고 표현한다. 중국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위대한 공자님도 그의 부모가 매신을 제사하는 모임에서 만나 야합해서 탄생되었다고 한다. 『조선의 향토오락』에 의하면, 강강술래는 주로 상원과 추석, 즉 만월 시에 진행했다고 한다. 왜 강강술래놀이는 만월 시에 했을까? 중국신화연구자들에 의하면, 달은 여성의 생래규칙과 닮았다고 한다. 달이 이지러지고 차는 것은 여성의 임신현상과 닮았고, 또 여성의 월경주기는 달의 주기와 같다고 한다. 월경, 월신(月信), 월수라고 부르는 것은 달의 규칙과 같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달 속에는 생식을 주관하는 월정(月精)이 있는바, 개구리의 화신인 상아(常娥)가 곧 월정이라고 한다. 만월 시의 달의 모양이 아름다운 것은 달 속에 아름다운 상아가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며, 따라서 상아의 ‘출현’은 곧 인간의 생식을 관장하고 또 인간의 생식력을 왕성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강강술래가 만월 시에 진행된 것은 곧 고대인의 생식숭배의식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강강술래 참여자들이 본래 소년 소녀들이었다가 여자의 중심으로 된 것은 후대에 내려오면서 유교문화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두어 말하자면 강강술래는 순수한 우리말이며 원무를 뜻하며 원무는 곧 도월놀이며 도월놀이는 곧 남녀야합의 놀이었다. 후대에 내려오면서 소위 학자라는 어르신들이 영웅주의사상, 한문숭배사상, 유교사상의 덫에 걸려든 탓에 강강술래의 본래의 모습을 말살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는 고대문화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민족의 비극이다. 풍류인물이였던 세종대왕이 박연(朴堧)에게 고대로부터 내려온 민속을 채집하여 정리할 것을 부탁해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유생들이 그 귀중한 자료들을 전부 화롯불에 던져버렸다. 결과 오늘날 선조들의 수많은 풍부한 민속 문헌고증이 차단되었다. 그리고 한국인은 다재다난(多災多難) 했던 민족이어서 고유한 민속을 영웅주의에 덧씌워 풀이하다보니 역사가 유구했던 민속의 상한선을 기껏해야 임진왜란시기에 꿰맞추는 경향이 짙다. 이를테면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 여러 지방의 고유민속인 강강술래를 임진왜란시기 의병술에 능하고 전쟁에 공이 많았던 이순신 장군이 창안해낸 것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후세인들이 강강술래놀이를 하는 것은 이순신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한 행사라고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민속학자인 임동권 씨는 1960년대 두 차례나 전라남도 여러 지방을 현지답사 하였는바, 현지고로들은 강강술래를 이순신 장군에 의해 창안되었다고 믿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창호(金昌浩), 어석경(魚錫經) 등 학자들도 현지고로들의 말을 믿고 역시 그렇다고 주장했다. 한 가지 미묘한 것은 강강술래의 전파지가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로서 이순신 장군의 전적지와 맞물린다는 것이다. 허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강강술래는 그 상한선이 마한 혹은 더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결코 이순신 장군이 창안해낸 것이 아니고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한 놀이도 아니다. 다만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이순신 장군이 고유한 민속놀이를 의병술에 이용했을 것이다. 필자는 이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법무부 귀화시험 교재에 역시 강강술래를 이순신 장군이 창안한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이 될 이주민들한테 잘못된 역사교육을 시키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한국사회는 쩍하면 중국과 일본을 향해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하고 있는데 자기네들 역사를 자기네들이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으니 얼마나 비극적인가?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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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2
  • 한중수교 “50년”을 이야기한다
    ● 이 성 (By Star Lee) 오늘은 한중수교 30주년이다. 과거의 30년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愛恨情仇(사랑, 원망, 정, 원한)이 뒤섞인 두 연인 간의 멜로드라마와 같았다. 한 때는 서먹서먹했던 맛선 본 선남선녀처럼, 한 때는 애정행각이 지나쳐 주변사람들이 눈쌀을 찌프렸던 연인처럼, 또 한 때는 서로간의 오해와 불만으로 사랑이 식어가며 냉정의 시간을 갖고자 하는 커플처럼…. 어느 중국의 외교관이 사석에서 이런 농담을 하였다고 한다. 한국은 중국에 있어 매력적인 애인과도 같아 항상 그립고 가슴이 설레이지만 저 북방에 사는 본처를 생각하면 가까워지기에는 부담스럽고 떨어지려니 애간장이 탄다고 한다. 조금 불편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그것이 양국간의 애뜻하고 불편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필자는 한국에서 수십년, 중국에서 수십년 살아오면서 ‘한중수교’라는 멜로 드라마를 본방사수하면서 지켜봤던 사람으로 각별한 애착과 소감이 있다. 열혈 팬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평범한 서민의 시각에서 한중간의 과거 30년 미래 20년을 논하고자 한다. 제1화 1992~2002 연모의 시대 30년전 한중수교가 이뤄졌다. 양국 대중에 있어 40년전 전쟁을 했던 ‘적대국가’, 서로 정체성마저 부정했던 ‘괴뢰정부’와 수교한다는 것은 조금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서먹함과 생소함을 덜하게 했던 것은 88 서울 올림픽과 90 북경 아시안게임이였다. 그 당시에 한중수교가 중국인에 가져다준 가장 큰 변화는 경제도 아니고 문화도 아니였다…스포츠 경기에서 국가명칭이 남조선이 대한민국으로 바뀌였고 중공이 중국으로 바뀌였던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의 신북방정책에 힘입어 중국동포들의 한국 친지방문이 한중교류의 물꼬를 텄으며 뒤따라 한국 제조업 기업의 중국진출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동남아국가에 진출하려면 상당히 많은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극복해야 했지만 중국에서 수십년간 정착한 동포들은 한국기업의 중국 진출에 있어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말이 안통해도 현지에서 동포통역, 동포직원을 채용하면 모든 일이 다 순리롭게 풀릴것만 같았고 10억인구 상대로 한사람당 1원만 벌어도 10억원이 벌어진다는 차이나 드림에 벅차 북경, 상하이, 산동성, 요녕성, 강소성, 광동성 등 지역에 줄기차게 태극기를 꽂았다. 시험을 거치지 않고 빽으로 명문대에 입학한 학생이 잔혹한 대학생활을 맞이하게 되는 것처럼…중국진출의 열정과 자신감은 냉혹한 현실속에서 좌절하기 시작하였다. 세계의 역사를 보면 어느 나라도 신하나 내시에게만 의지하는 성군이 없었던 것처럼 언어가 통한다는 이유로 현지 동포직원에게 과도하게 의지하면서 구매관리, 고객관리, 직원관리를 소홀히 하며 많은 기업들의 경영이 난관에 부딪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는 일부 실패의 요인에만 불과하다. 20년전 어느 삼성출신 중국 주재원이 쓴 책을 본적이 있다..중국에서 실패하지 않는 비법 중에서 1위가 중국여인과 거리를 두라는 것이다. 주색을 삼가라는 말이 당연해 보이지만 이 역시 그 시기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의 수준을 여실히 들어냈다. 결국 21세기에 들어서서 많은 제조업기업들이 중국을 탈출(심지어 야반도주)하게 되면서 중국 제조업 진출의 열풍은 서서히 저물어갔다. 이로서 제조업이 테마를 이루던 한중간의 사랑 드라마 1화는 막을 내리며 다음의 10년을 그리는 새로운 막이 열렸다. 제2화 2002~2012 동거의 시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제조업의 중국 정복은 순탄하지 않았지만 한중관계는 갈수록 돈독해졌다. 조심스럽게 상대방을 알아가면서 사랑의 싹을 틔우던 연인은 이제 동거를 하기 시작한 것과 같았다.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10년간의 하드웨어 교류의 시대를 넘어 소프트웨어 교류의 시대가 막을 올렸다. 이때부터 한국음식, 한국문화, 한국패션이 본격적으로 중국에서 대중화되기 시작하였다. 한국 드라마, 한국 음악이 중국에서 서서히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중국보다 더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한국은 중국인이 흠모하는 나라가 되였다. 젊은 층은 한국 현대문화의 모든 것을 따라하고 싶어했으며 우호적인 외교관계도 한중양국 국민감정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북경 올림픽 전까지만 해도 경제력이 3~4위에 불과하던 중국이 미래 G2 가 될 것이라는 예측을 과대평가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때만 해도 중국은 일인당 GDP가 3000달러 조금 넘는 빈국이였고 국민들에 있어 국가가 부강해진다는 기대감만 있을 뿐 미국을 도전할 수 있는 초강대 국으로 성장할 것이란 자신감은 아직 턱없이 부족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한국 학생의 중국유학 붐은 최고조에 달았으며 21세기 초반 월드컵 진출, 올림픽 유치, WTO진입 3대호재가 터지면서 “중국이 미래다”라는 여론이 세상을 뒤덮으며 한국 내 중국어 교육기관들은 최대의 호황을 누렸었다. 북경의 HSK학원에는 한국인 수강자들로 북적였으며 모든 중국의 대학교에는 한국인 유학생이 항상 1위를 차지하였다. 중국인의 해외관광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늘어나면서 한국방문 관광객이 100만명을 돌파하기 시작하였고 재한 화교들은 중국과의 혈연적인 연고를 무기로 내세워 중국인 인바운드 여행과 쇼핑을 거의 독식하다시피 하면서 한중 관광산업의 새 시대를 열어갔다. 이 시기는 한중간의 관계가 가장 안정적인 시기였으며 외교관계, 문화교류, 경제교류 모든 면에서 엄청난 변화와 성장을 가져왔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동거를 겪으면서 서로 간의 단점들이 속속히 들어나면서 한중관계는 새로운 양상을 맞이하기 시작하였다. 제3화 2012~2022 모순의 시대 20년간의 동거동락을 겪으며 한중관계는 새로운 시기에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한국에서의 중국열풍도 만만치 않겠지만 중국에서의 한류는 최고조에 달하며 주변국가의 질투를 살 정도로 뜨거웠다. 외교관계 같은 정치적인 요소를 떠나서 대중문화적인 영향력을 봤을 때 한국을 10으로 보면, 미국이 7, 일본은 4, 기타국가 합치면 3이였다. 이때가 한중 양국은 과거 수천년 교류 역사상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 시기였을 것이다. 지난 역사상 한중관계 가장 가까웠던 시기는 아마 명나라 때였다. 明史를 보면 그때의 한중관계를 이렇게 평가했다 “他國不敢望也”(다른 나라가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밀접했다). 21세기에 들어서 한중관계가 바로 이렇게 “타국불감망야”가 된 것이다. 그러나 중국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物極必反(어떤 사물이든간에 도가 지나치면 그 반대로 바뀐다) 한중관계는 지나친 열정시기를 겪으며 결국 그 반대로 돌변하게 된 것이다. 한중관계는 정치인들과 경제인들만의 파티가 아니라 대중 속에 그 뿌리가 있다. 한중관계의 밀접함은 대중문화에서 여실히 반영 되였다. 중국의 방송을 켜보면 10대 예능프르그램 중 8개 한국 프로그램 포맷을 번안한 것이였다. 한국에서 인기있는 무한도전, 나는 가수다, 복면가왕, 진짜 사나이, 아빠 어디가, 슈퍼맨이 돌아온다, 런닝맨, 히든싱어 모두 중국에서 그 모조품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단순 도용이 아니라 대부분 저작권료를 주고 사들인 것이였다) 저자는 이런 광경을 목격하며…드디어 올 것이 온다는 안좋은 예감이 들었다. 한국 방송에서 중국의 예능 포맷이 80% 차지하고 중국 연예인이 한국 드라마 주연들을 독식한다면 한국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결과는 뻔하다…엄청난 후폭풍이 휘몰아치게 되는 것이다...그러한 전략적인 타산이 없이 2020년 마스크 붐 때 너도나도 마스크 사업하듯이 중국의 방송사들은 무분별하게 한국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결국 경착륙이란 국면을 맞이하게 되였다.. 사드사태는 다들 아는 내용이니 여기서 거론안하겠지만. 사드를 빌미로 행해진 한한령은 사드라는 계기를 이용했을 뿐이지 절대로 사드만이 불러온 결과가 아니라고 본다. 외국의 문화가 본국의 문화 발전공간을 무참히 짓밟고 본국 문화의 생존토양을 파괴했을 때는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전세계 어느 문화도 한류가 중국에 끼친 영향처럼 큰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아무리 미국이 문화 선진국이라고 해도 영국과 멕시코의 문화를 이처럼 송두리째로 바뀌지는 못했지만 이 밀월기의 한국은 중국에서 그런 것을 이뤄냈다. 이는 칭찬이 아니다…오늘날의 국면을 자초한 도화선이라고 본다. 2016년 6월까지만 해도 태양의 후예를 정점으로 한류는 중국을 점령하면서 문화 식민지를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이 과열된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사드’가 그 ‘총알받이’가 된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2016년 7월 사드배치를 발표하면서 중국 정부에 한류를 경착륙시킬 명분을 주었다. 과도한 한류의‘횡포’를 지켜보던 중국 정부는 사드 사태에 대한 1차 타격목표로 한류 문화를 지목하게 되었다. 한중경제교류에 있어 한국문화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중국의 젊은 세대에 미치는 영향은 간과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음으로 부득이 손을 보게 된 것이라고 중국국내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한한령의 실시가 6년 지나면서 중국은 자국문화가 빼앗긴 고지를 되찾으며 포스트 한류시대 중국 본국 문화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주식시장에 청소부 법칙이란 재미있는 룰이 있다. 즉 모 주식을 청소부마저 관심가지고 샀을 땐 그 주식을 과감히 매각해야 한다는 것이다…즉 과열은 과냉을 초래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세번째 10년은 한중관계가 파란만장한 애정 스토리를 전개하는 과정이다. 곧 결혼을 할 것처럼 뜨겁게 사랑하다가 상대방의 단점이 하나 둘씩 보이고 거기에다 양가 부모의 반대, 주변인들의 험담, 자기 정체성의 약화를 겪으며 과연 이런 사랑이 진정으로 행복한지를 느끼게 하는 고비를 겪게 된다. 그 전환점이 사드라는 돌발사태로 인해 발생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계기일뿐 예고된 결과라고 말하고 싶다. 한중관계는 지나칠 정도로 뜨거웠던 것이 문제라고 본다…중국이 소위 혈맹이나 전통우방국가라고 이야기하는 북한, 파키스탄, 라오스 등 국가와의 관계를 보면 한국처럼 가깝게 지낸 적이 없다. 물론 이는 한국의 문화적인 선진성에서 유래되었지만 이러한 과도 밀접한 관계는 서로 간의 기대를 지나치게 부풀리게 되고 판단을 흐트리게 되며 상대방과의 문화적인 차이, 제도적인 차이를 약화시키다가 특정 시기에 특정 계기로 그 모순이 폭발하게 된 것이다. 사드는 한국의 친중파를 피말리고 씨말리게 만들었으며 중국의 민심을 한순간에 떠나게 만들었다. 또한 한국국민도 덩달아 중국을 불신하기 시작하였으며 중국과의 사랑이 결혼대상자에서 그냥 친구로라도 지냈으면 좋겠다는 관계로 강등하게 되었다. 제4화 2022~2032 냉정의 시대 올해가 한중 두 국가의 멜로드라마가 방영 된지 30주년을 맞이하는 시기이다. 공자님은 30이립(三十而立)이라고 이야기하였는데 군자는 서른살이 되면 가정을 이루고 철이 들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30년전 경제적으로 막상막하하던 중국은 이젠 어느덧 한국 경제력의 10배가 된 G2국가가 되었고 중국과 수교하면 큰 이득이 생길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이젠 국운을 좌우지할 만큼 중요한 국가관계로 부상하게 되였다. 중국의 속담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三十年河東,三十年河西(삼십년은 하동에서 삼십년은 하서에서). 이제 한중관계는 30년간의 사랑과 원망을 겪으며 성숙된 어른이 된 것이라 본다. 또한 한중관계라는 고정적인 패턴도 이젠 30년의 역사를 겪으며 새로운 30년을 맞이하게 된다. 미래의 한중관계는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 이 글에서 필자는 단순히 한중관계 과거 30년을 돌이켜 보는 것뿐만 아니라 미래 20년간 한중관계에 대해서도 전망을 적고자 한다. 30년전 한중 수교당시 한국은 미국의 눈치를 볼 필요없이 자유롭게 중국과의 관계를 정립할 수 있었지만 어느덧 미국과 대등한 체격으로 성장한 중국이 미국의 최대 경쟁자가 되면서 한중관계에 있어 새로운 변수로 등장하게 되었다. 현재 한중관계는 항상 미중관계, 한미관계라는 변수들을 고려해가면서 대응해나가는 관계로 변모되면서 한국 정부에게 새로운 숙제를 마련하였다. 한중관계의 30년은 사실 두 연인이 맞선을 보면서부터 사랑에 빠지고 동거하고 서로 의심하고 관계가 나빠지는 식상한 멜로드라마의 스토리를 연출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파혼하게 된 것이다. 앞으로 다시 관계가 좋아질 수 있을까라는 시청자들의 궁금증이 많겠지만 필자는 이제는 과거로 돌아가기 어렵다고 본다…사드문제가 해결되고 양국 국민의 감정이 회복되었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10대부터 시작하여 20대를 겪으며 철없이 사랑에 푹 빠져 정신 못차리던 시기를 넘어서 이젠 성숙해졌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한중양국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서로 다른 가문에서 태어난 연인으로 사랑을 이루기엔 너무나 많은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어찌보면 양국의 관계라는 것은 무거운 결혼보다 서로 애뜻한 정을 주고받는 애인관계가 더 아름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핀란드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어떻게 스웨덴을 평가하냐고 물으니 핀란드 남자는 스웨덴 남자들은 대부분 게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필자가 핀란드 사람은.스웨덴 사람을 좋아하지 않은 것이냐 따지니 하는 말이 “사이좋은 이웃국가가 없잖아요”라고 대답했다. 정말 그런 것인가? 중국의 주변국가 중 중국을 좋아하는 나라는 몇이 되는가? 또한 한국의 이웃국가 중 한국을 좋아하는 나라는 얼마인가? 아마 답은 머리 속에 떠올랐을 것이다. 강대국 속에서 생존과 발존을 모색하는 상황은 21세기 20년대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국왕조의 전환기에 한반도 왕국이 항상 겪던 일이였다. 한나라와 흉노를 사이 둔 고구려, 고구려와 당나라를 사이 둔 신라, 거란과 송나라를 사이 둔 고려, 원나라와 명나라를 사이 둔 조선, 청나라와 명나라를 사이둔, 조선 고비마다 지혜롭게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전략을 모색하며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 사직을 지킨 한반도의 왕국은 이 시대의 미중 양국의 경쟁구도 속에서 슬기롭게 난관을 이겨낼 것이라고 본다. 물론 그 과정이 험난하고 고달프고 마음이 힘들어도 말이다. 그것이 이 반도의 동포들이 회피하기 힘든 숙명일 수 있겠지만 그런 고난 속에서 더 강인해지고 똑똑해지는 법이다…그러한 차원에서 한반도는 중국왕조보다 더 강한 생명력을 가졌었다. 이 10년은 중국이 미국을 초월하여 세계 최대 경제강국으로 부상하는 시기일 것이다. 물론 PPP방식으로는 10년전에 이미 미국을 초과하였지만 허영심이 강한 백인은 실질보다 명목을 더 중요시한다. 그래서 올림픽에서도 자신에게 유리할때는 금메달로 순위 매기지 않고 메달수로 순위를 매긴다. 미쏘 갈등은 백인 내부 이데올로기적인 모순에 불과하다면 미중 갈등은 문명의 시프트를 상징함으로 엄청 신경쓰고 있는 것이다..문제는 이러한 동양 문명의 시프트가 10년 안에 이뤄질 것 같은 두려움에 빠지면서 오늘날의 국제관계를 혼돈에 빠뜨리게 만든 것이다. 서양문명은 중국의 부상을 저지하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겠지만 14억 인구인 중국의 발전 모멘텀을 막기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 있어 설마 중국이 경제적으로 넘버원이 되었다고 하여 엄청난 세계정치경제지형의 변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한국은 수천년간 겪어왔던 것처럼 세계의 정상으로 복귀한 중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지만 이는 하나의 축복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전세계에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4대 강국이 에워싸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거인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총각이라고 생각하기 보다 여러 미남들에 의해 에워싸인 미인이라 정의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는가? 한국은 중국, 미국, 일본, 러시아 모두에 있어 항상 존중하고 아껴주고 자기 편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국가이다…드라마의 한장면이 떠오른다…어느 남자가 미인을 넋이 빠져 바라보다가 그 여성이 불쑥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시무룩해진 장면… 역시 미인은 싱글일 때가 더 매력적이다.. 정치적인 이야기를 조금 가미하자면 이 시기에 한국은 친미, 친중, 친일을 논하기 보다 모든 사안을 개별적으로 쪼개 국익에 부합되고 대다수 국민의 이익에 부합되고 실보다 득이 더 많은 것만 골라서 사안별로 입장을 취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이유는 “미인은 싱글일 때가 더 매력적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전세계의.미인 선발대회엔 미쓰만 참가할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시기는 또한 포스트 코로나의 시기이다. 포스트 코로나의 최대의 수혜주는 무엇인가? 두말할 것 없이 관광일 것이라 본다. 중국의 코로나 봉쇄가 해소되고 해외 관광이 자유로워지면 해외관광시장은 과거의 5배로 커질 것으로 예상하며 연간 5억명의 중국인이 해외 관광을 나설 것으로 본다. 코로나 기간 동안 힘든 민생을 무엇으로 달랠 것인가? 내부적인 지원책과 개혁만으로는 역부족일 것이다…외부적인 힘을 빌어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것이 답이 아닌가 생각한다. 꿈 같은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2023년 중국관광객 5천만명이 한국 방문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때 되면 한국의 대부분 서비스산업, 상당수 제조업이 혜택을 볼 수 있다. 코로나로 인해 식어간 모든 상권이 관광산업의 부흥으로 인해 엄청난 호황을 누릴 것이 틀림없다. 중국이 밉든 곱든, 인접국가로서 최대의 고객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중요한 것은 중국이란 시장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부의 지침대로 움직이는 대형 시장임으로 한중관계의 꽃길 같은 미래만 꿈꿀 것이 아니라 그 꿈이 현실이 되도록 모든 이가 그 밑걸음을 깔아야 한다. 그 사이 맺힌 것도 많고 얽힌 것도 많고 섭섭한 것도 많겠지만…연인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포스트 코로나를 맞이하며 한중 양국이란 연인이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는 시기이다. 농담하나 하겠다. 오래 전에 헤어진 연인이 전화 올 땐? 정답은 “다단계 영업”이라고 한다….이것이 제 4화의 줄거리이다. 제5화 2032~2042 격변의 시대 2032년의 세상은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 10년후의 세상을 예측하긴 쉽지 않겠지만 현실을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중국의 부상은 모멘텀에서 현실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으며 미국은 여러가지 내부/외부적인 요인으로 말미암아 순탄치 않은 10년을 겪으면서 과거와 같은 영광을 누리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북한에 대한 예측은 항상 어긋났음으로 변수가 아닌 그냥 무시해도 좋은 상수로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또한 한국은 일인당 소득이 4만 5천불이상의 선진국으로 도약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한중관계는 10년의 냉정기를 겪으며 새로운 시기에 들어설 것이라 보는데 학계나 정계에서는 여기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사람이 없는 것 같아 좀 안타깝다. 물론 예측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담대한 가정을 전제로 새로운 세상을 분석하며 한중관계를 다시 짚어보고자 한다. 지금 중국은 미국의 압박 속에서 어렵게 생존의 틈을 찾아가고 있는데 가장 큰 아킬레스건은 바로 반도체이다. 그러나 미국의 봉쇄가 과연 주효한지를 심각히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초기에는 중국에 대한 반도체 봉쇄를 통해 중국의 성장을 늦출 수는 있겠지만 중국이란 거대한 공룡의 돌진을 막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10년 후 중국이 만약 반도체의 독립을 이뤘을 때 그때 세계의 패권은 진정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문제는 기술의 초격차를 지향하는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미국의 영향 아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중국의 오기를 불러일으켜 10년의 시간으로 그 기술격차를 극복했을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냐는 고민을 해보았는가? 실제로 지금 중국인 이미 자국기술력으로 7나노 반도체 파운드리를 이뤄냈다. 아직 삼성과 TSMC와 상당한 격차가 있지만 중국 상하이 중심국제반도체 회사의 리더가 바로 TSMC와 삼성의 기술혁신을 이뤄낸 CTO 량멍숭이란 사실이다. 반도체는 하나의 산업기술에 불과하지만 미래 10년 심지어 50년간의 국제관계를 재정립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요소 때문에 미중간의 디커플링이 쉽지가 않고 또한 국제관계의 이합집산이 이뤄지고 있다. 과거 20년간 한국은 항상 중국의 최대 수입국이였으며 중국은 한국의 최대 흑자국이였다. 중국이 미국에서 수천억달러를 벌어오면 거기에 한국이 수백억달러를 인출했던 구도였다. 그러나 올해에 들어서서 한중 교역은 처음 적자로 돌아섰다. 이는 액시던트가 아니라 이제는 자연스러운 모멘텀이라고 본다. 그동안 한국이 중국으로 수출한 제품 중 대다수는 중간재였다. 특히 미국으로 수출하는 비중이 제일 컸다. 그러나 미중갈등으로 인해 미국의 하이테크 중국제품 수입이 줄어들면서 중국의 한국 중간재 수입도 줄게 되었고 중국 자체 생산 원자재의 발전은 한국산의 수요를 감소하게 만들었다. 이런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한국의 산업은 과거의 패턴 그대로 작동하고 있지만 중국은 이미 크게 변하고 있다. 과거 20%이상 차지하던 삼성 핸드폰의 시장점유율은 0.5%로 떨어졌고 인기가 절정에 달하던 현대기아차도 이젠 중국차와 가격을 겨뤄야 하는 현실로 되고 있다. 이마저도 참담한 현실인데 10년 후는 어떻게 될 것인가? 현시점에서도 중국은 세계 최대의 핸드폰, 배터리, 전기자동차 생산국이다. 이는 이미 양적인 우위를 벗어나 질적인 우위라 내달리고 있다. 그럼 10년 후면…믿고 싶지 않겠지만 중국기업은 중국 방방곳곳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의 악몽이 될 수도 있다. 과거 신발이나 가전처럼 말이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도 아직 초격차를 운운하고 있다. 초격차는 이 10년간은 유효하지만 다음 10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초격차가 무격차가 되면 다음은 뭐로 먹고살 것인가? 전세계 역사상 어느 국가도 이처럼 초고속으로 성장하면서 글로벌 시장을 잠식한 이웃국가를 마주한 사례가 없었다… 중국의 위협은 현실뿐만 아니라 미래까지도 커버될 날이 멀지 않다. 삼성보다 싸고 좋은 메모리, 스크린, 핸드폰, 현대보다 싸고 좋은 자동차, 로보트, 한화, SK, 롯데, LG보다 싸고 좋은 화학원료의 메이드 인 차이나가 세계를 석권할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필자는 중국의 위대함을 칭송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 무감각하고 근거 없는 자신감이 팽배한 이 시대의 풍조를 바로잡고 싶을 뿐이다. 미래 10년후의 한중관계는 지금 겪어보지 못했던 심지어 과거 수천년간 겪어 보지 못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것이라 본다. 역사 속에서 한반도는 현재의 중국처럼 나락에 떨어졌다가 다시 정상으로 복귀한 시대를 겪어보지 못했다. 미래의 10년을 대비하려면 대한미국은 어마어마한 중국전문가를 양성해야 하고 중국의 산업구조 산업발전을 제대로 분석하고 대응해야 한다. 중국과 등진 경쟁자가 아닌 중국이란 거대시장과 거대경장 속에서 자신의 포지셔닝을 제대로 하고 변화를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특공대가 되야 한다. 중국시장과 생산과의 융합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분석해야 한다. 이는 특정 기업만이 아니라 전체 국가와 국민적인 차원에서 다뤄야하는 숙제이다. 이 숙제를 잘 푸냐 못 푸냐는 미래 10년뿐만 아니라 미래 100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 현재 반중정서가 팽배해 있는 시기에 중국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날 따라 줄어들고 중국 전문가들도 갈수록 주목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중국은 어둠속의 도둑처럼 조용히 질주하고 있지만…대한민국은 태평성세의 연예가무에 빠져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걱정이 든다. 사드 때가 위기이가? 진정한 위기는 다음 10년이라고 본다. 중국이란 거대 공룡을 옆에 두고 과연 몸집이 작은 파충류가 먹이를 구할 수 있을 것이란 현실적인 걱정이 든다…그러나 이 땅에서 과연 누가 이런 심각한 고민을 해보았는가? “중국은 파멸할 것이다. 분열할 것이다”라는 허황된 꿈으로 자기 위로하면서 살아갈 것인가? 노키아와 모토롤라의 몰락을 보면 경쟁 속에서 잘못된 전략이 얼마나 큰 피해를 초래할 것인가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21세기 30년대의 한중관계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면모를 보일 것이다. 자신감이 넘치고 교만함까지 보이며 실질적인 파워까지 겸비하고 심지어 비민주적이란 프레임마저 사라진 미래의 중국을 다룰 생각을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고 그냥 어영부영 10년을 넘기다가 엄청나게 후회할 것이라 경고하고 싶다. 중국을 경계하고 두려워하기보다 옛정을 그리며 앞으로 어떻게 화합하며 살아가고 중국 부상의 피해자가 아닌 수혜자로 될 수 있는 가가 21세기의 나머지 시간의 테마가 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친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중(知中)이고 중중(重中)이다. 그런 의미에서 친미는 현상유지, 친일은 과거유지, 친중은 미래유지이다...라는 정의를 내릴수도 있다. 이로서 한중양국이 50년간 이뤄진 멜로드라마가 NEXT 시즌을 기대하며 종영이 된다. 한중수교 60주년일때는 환갑의 나이의 두 노인의 사랑 스토리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다...영화 "은교"처럼 될 것인가? "죽여주는 여자"처럼 될 것인가? 그것은 다음세대 출연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필자에 대해 당신이 뭔디 이렇게 거창하고 허황된 이야기를 꾸미는가 질타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나중에 지켜보면 이 드라마가 제가 예상한 각본대로 연출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럼 여기까지…글을 마치고 2032년에 다시 2탄을 올리겠다. 그때까지 이 글의 독자와 한중관계 모두 건강하시기 기원한다. 2022년 8월 24일 서울에서 (By Star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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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4
  • 아베 신조의 '정치적 유산'
    ● 양백강, 로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가 2022년 7월 8일 거리 연설에서 67세의 나이로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아베 신조 피살 사건은 일본 정계는 물론 국제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아베는 전 일본 총리로서 자신의 기록적인 초장기집권과 일본 내 보수세력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전후 일본 정치사, 국가전략 진화의 한 축을 차지하는 등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파장을 남겼다. 아베 자신은 역사가 됐지만 일본의 미래 국가 발전 방향에 대한 조명은 아베의 '정치적 유산'이라는 시각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정치인 가문의 출신인 아베는 1993년 7월 중의원 의원으로 처음 당선돼 당시 최연소 국회의원이 됐고, 2006년 9월 총리가 돼 첫 전후 출생 총리가 됐지만 1년도 안 돼 물러났다.이후 5년간의 칩거 끝에 2012년 9월 자민당 총재에 당선되고 12월 총리에 취임하면서 7년 8개월여의 '아베 시대'가 열렸고, 아베는 헌정 사상 최장수 총리가 됐다. 2020년 8월 퇴임 후 짧은 휴양을 거쳐 정계에 복귀한 아베는 정계 보수세력을 결집했다. 2021년 11월 아베가 자민당 최대 파벌인 호소다파 회장에 취임하면서 아베계로 기치를 바꾸는 등 정치권에서 강세를 보였다. 장기간의 임기를 제외하면 아베의 정치적 위상은 당시의 국제환경과 국내 정치상황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2007년 아베 총리 사임부터 2012년 재집권까지 5년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미·서방 국제체제에 크게 의존하던 일본은 충격을 받았다. 자민당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아소 타로(麻生太郞) 정권, 후속 민주당 3선 내각이 모두 난국에 빠졌다. 상대적으로 미국과 유럽의 패권이 쇠퇴하고,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들이 집단적으로 부상하면서 2010년 중국 경제는 처음으로 일본을 추월하며 격차를 벌렸다. 국제 권력구조, 글로벌 거버넌스 시스템의 심각한 변화, 각 분야의 질서, 규칙, 발언권 다툼이 날로 치열해지고 일본의 대외위기의식, 국제게임의식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어 '강인정치'에 대한 요구가 더욱 절실해졌다. 당시 요미우리신문 사설은 잦은 총리 교체로 일본 지도자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외국 지도자의 모습은 "일본에 수치"라고 했다. 이런 '비정'적이고 대외적인 주장을 더욱 강하게 하는 전략적 마인드와 여론의 분위기는 아베가 재집권해 장기집권을 이어갈 수 있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됐다. 총리 재임 후 아베는 계파적 자원과 정치적 수완을 앞세워 당내 최고 권력을 장악했고, 자민당의 6연속 총선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우경화 보수적 정치관과 국제정세 및 일본 국민의 마음가짐 변화를 긴밀히 결합시켜 전략적 행동을 통해 일본을 '강대하게' 만들겠다는 자신의 정책 철학을 제시했다. 실제로 아베는 초대 총리 시절부터 방위청 승격, 교육기본법·국민투표법 개정, 해양기본법 제정 등을 추진해왔다. 2012년 이후 긴 임기 동안 아베는 정치·안보 분야에서 일본의 '자립'과 '자주'를 체계적으로 강화해 더 큰 '전략적 공간'을 넓히려 했다. 아베가 역사교과서 추가 수정, 무라야마 담화 부인 등 기존 역사 발언, 전후 외교 총결산 추진 등을 통해 일본 정치의 우경화를 가속화하고 아시아 이웃 국가들에서 우려를 낳고 있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아베 시대'는 냉전 이후 일본의 국가전략 전환 발전의 중요한 단계로, 일본이 금융위기 이후 세계구도, 국제질서 변화에 적응하는 데 중요한 시기였다. 이 시기 '아베 노선'은 안보 분야의 '돌파'를 접점으로 국가전략의 전환을 추진하고, 다각화된 외교수단을 활용해 '종합전략의 활성화'를 높이겠다는 것이 기본 발상이었다. 국제사회, 특히 아시아 국가들이 이런 돌파구에 대한 우려와 의구심은 자명하다. 개헌 추진, 자위대 입헌 지원 외에 아베 주도로 2013년 첫 국가안전보장전략, 일본판 국가안보회의(NSC) 설립, 방위계획대강 조기 개정, 2014년 내각 정령으로 집단적 자위권 부분해제, 새로운 방위장비 이전 3원칙 마련, 2015년 평화안보법안과 국제평화지원법안, 이른바 신안보법 제정, 적에 대한 공격능력 보유 및 대형화·공격무기장비 플랫폼 도입 검토, 대외방위협력, 외교정책 안전화 등을 추진했다. 안보 분야에서도 아베가 추진한 '개혁'은 전략체제, 법치의 틀, 집행체제, 역량건설의 모든 측면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어 전후 일본 보수세력의 전후체제 돌파와 '안전 자주' 실현이라는 기본적 발상을 답습할 뿐 아니라 일본 안보전략의 외향성과 공격성을 더욱 가속화했다. 이는 평화헌법의 굴레를 뚫고 일본의 '국방정상화'와 '군사대국화'를 가속화하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일본의 안보정책과 방위정책, 방위력 건설 목표의 대전환을 예고하고 있어 아태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위협이 되고 있다. 외교 분야에서 아베는 '전략적 외교'를 적극 추진했으며, 재임 기간 동안 총 비행 거리는 158만km로 80개 국가와 지역을 방문했으며 이는 지구를 39바퀴 도는 것과 같다. 아베 총리는 또 '지구 외교' '적극적인 평화주의'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 등의 개념을 내세워 '도덕적' 색채를 부각시키려 했다. 하지만 사실 아베 외교는 고도의 현실주의, 실력주의, 지정학적 경쟁 사고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강대국의 게임이 그의 핵심 관심사다. 아베의 입장은 미·중 간 총체적 균형을 유지하며 '좌우를 만나다'는 전략 아래 미·일 동맹의 '체제 내 발전'을 견지하고, 대외정책의 융합을 추진하고 경제·안보·문화적 수단을 통합 운용해 '중등 세력' 특히 유럽·인도·태국과의 전방위적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일본 국내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아베는 그동안 위축되었던 일본 외교를 크게 뒤집고 국제 담론력을 강화했지만 많은 논란과 문제점도 남겼다. 아베는 역대 총리 중 최장수 집권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정치인의 업적은 시차를 두고 평가되지 않는다. 내부적으로는 우익세력의 요구에 부응하고 외부적으로는 미국을 숭배하고 추종했지만, 저출산·고령화, 디지털 시대의 발전, 주요 외교 문제는 제때에 해결되지 않았다. 실제로 아베 총리가 2020년 8월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그의 '정치적 유산'에 대한 논쟁은 계속됐다. 아베의 '정치 유산'은 개인적 색채가 뚜렷하지만 전후 일본 보수 정치세력의 국제질서, 일본 국가 발전에 대한 해석을 대변한다.이런 해석은 1980년대 중후반부터 '정상국가론' '정치군사대국 몽'이라는 형태로 일본의 국가전략 방향에 영향을 미쳤다 아베는 그동안 자신을 '열린 보수주의자'라고 칭하며 자신의 보수적 정치이념을 확산시키고 개인 정치권을 공고히 하는 데 열심했다. 장기 집권을 거치면서 아베 주변에는 보수 정치인이 대거 포진했고, 그 중 적지 않은 수가 자민당과 정부 고위직을 차지하며 '아베 독트린'의 추종자이자 집행자로 자리매김했다. 현 일본 정계의 보수세력의 '정신적 지도자'인 아베의 죽음은 추종자들의 추종을 중단시키기는커녕 이들의 더 집요한 행동을 자극해 아베의 '미완의 의지'를 완성하겠다는 자세로 공감과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 아베의 후계자인 스가 요시히데와 기시다 후미오는 인맥·공직 경력에서 아베와 그의 측근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두 사람 모두 '아베 색채'에서 벗어나 자신의 특색을 살리는 경향이 있지만, 스가 시대 정책이나 지금까지의 기시다 정권의 정책을 보면 전체적으로 '아베 노선'을 답습하고 있다. 기시다가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자주방위정책과 '신시대 현실주의 외교'도 아베의 정책과 유사하다. 기시다가 자신의 특성을 과시하기 위해 제안한 '일본식 신자본주의' 경제·사회 정책도 정책 여백이 부족해 '아베노믹스'로 회귀할 위험이 있다. 동시에 아베의 '정치적 유산'이 일본의 정치적 현실을 완전히 뒤흔들 수는 없다는 점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외교안보정책 분야에서 일본의 '전략적 주관성'과 '역동성'을 모색하겠다는 아베의 제안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길잡이 역할을 계속할 것이다. 대만 문제에 대해 아베 총리의 '대만 공동방위'에 대한 미일군사 개입 등 허위 주장은 일본의 현실적인 정책이 되기는 더욱 어렵다. 한반도와 러시아에 대한 외교 측면에서도 현 정부는 아베 총리의 기존 사고방식을 현 상황에 맞게 바꾸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현재의 러시아-우크라이나 분쟁을 배경으로 일본이 국제위기를 이용하여 국내의 전략적 변혁을 촉진하고 해외의 전략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관행은 아베 시대의 그림자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질서의 변화와 국가의 전략적 변혁에 직면하여 일본의 구체적인 대응책은 변함이 없을 것이며 아베의 '정치적 유산' 중 비합리적이고 비건설적이며 지속 불가능한 내용은 결국 폐기되고 잊혀질 것이다. 작자 양백강(楊伯江)과 로오(盧昊)는 각각 중국사회과학원 일본연구소 소장, 부연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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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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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호원 칼럼] 연변조선족자치주 인구
    장백산 아래 오붓한 백도라지마을이라면 당연히 연변조선족자치주 판도를 지칭하는 상징패턴이라겠다. 치마저고리, 열사탑, 민속촌, 용드레우물, 만무과원, 백옥미, 인삼, 담비가죽, 녹용···조선족집단지의 외곽 이미지이다. 허나 최근 들어 인구감소가 급격하다고 아우성이다. 인구규모, 인구구성, 인구동태 등과 같은 인구의 특성은 경제성장, 건강, 교육, 가족구조, 범죄유형, 언어,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인류사회의 거의 모든 면들이 인구추세에 관련되여있다고 일찍 인구학은 제시했다. 2000년 11월 1일 0시까지 연변 상주인구는 220만 9646명이다. 돈화시 48만 834명, 연길시 43만 239명, 용정시 26만 1551명, 왕청현 25만 5882명, 안도현 22만 315명, 화룡시 21만 5266명, 훈춘시 21만 1091명, 도문시 13만 2368명이다. 도합 71만 1845세대의 가정이 있으며 남자가 113만 4382명으로 51.34%이다. 특기할 것은 한족인구가 134만 3239명으로 60.79%를 차지하며 여러 소수민족인구가 86만 6407명으로서 39.21%를 점한다. 2000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족인구는 80.12만명이다. 1990년 제4차 조사 때와 비하면 한족인구가 15만 5977명으로 13.14% 증가하고 여러 소수민족인구가 2만 6233명 줄어들어 2.9% 감소되었다. 여러 소수민족인구의 범위는 물론 조선족이 절대 다수 비중을 점함을 알아야겠다. 도시인구가 148만 5483명으로 67.23%이고 농촌인구가 72만 4163명으로 32.77%를 차지한다. 이 공보는 인공수표 방법으로 쾌속 종합한 총수자이다. 그러나 꼭 주해로 제기하고픈 건 상기 조선족인구수자 속에 몇십년 전에 연변내의 한족들이 사사로이 암거래로 배우자 일방을 소수민족으로 고쳐 자식을 조선족, 만족, 회족, 몽골족, 쫭족, 시버족, 묘족… 등 15개 소수민족 일원으로 출생신고를 등록했다는 사실이다. 결과 86만 6407명 여러 소수민족인구 속엔 한족개입이 호적화, 법률화, 합헌화됐다는거다. 2010년 전국인구조사 수자에 의하면 연변의 상주인구는 227만 1600명이 된다. 2000년 11월 1일 0시의 제5차 전국인구 조사와 대비할 때, 십년간 모두 6만 1950명이 증가되였고 2.80% 증장되였으며 년평균 증장률은 0.28%였다. 연변상주인구 중, 모두 84만 8380가구가 있는데 인구는 219만 4868명이며 평균 매 가구의 인구는 2.59명이다. 이는 2000년 제5차전국인구조사 중의 2.99명보다 0.40명 감소된 셈이다. 2010년말까지 연변에는 조, 한, 만, 회 등 20여개 민족이 살고 있다. 조선족인구는 82만명으로 37.7%를 차지하며 한족이 59.29%를 차지하고 기타 소수민족이 3.01%를 차지했다. 2013년말 기준 연변주 인구 227만 6000여명중 조선족은 79만 9000여명으로 전체의 35.1%를 차지했다. 2016년말, 호적 총인구는 146.6만명으로서 총인구의 69.2%를 차지했다. 인구 출생률은 8.36%, 사망률은 6.87%, 자연증장률은 1.49%였다. 2016년말, 총인구중 조선족인구는 75.9만명으로서 총인구의 35.8%를 차지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인구감소는 흑룡강성, 요녕성 산재지역과는 다른 그 자체의 특수한 시대적 배경이 있다. 한국을 비롯한 기타 우리 민족이 집중한 여느 나라에서도 동포인구 감소가 비일비재라는 보도가 나돌고 있으나 필경 연변 경우와는 이질적으로 다르다. 자치주인구라는 통계수치가 시사하는 바를 결코 간과해선 안될 줄 안다. 조선족이 주축의 35.8%라는 집계는 수자열세, 인구감소라는 위기에 몰닉했음을 판정한다. 패밀리 사이즈가 국가제정의 생육지표도 완성 못해 ‘낙제생’부부들이 부지기수렸다. 현행 ‘연변조선족자치주 위생 및 계획생육위원회’라는 간판의 내함을 체크하지 않을 수 없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인구감소가 주는 충격 내지 화제는 왜라서 이처럼 심각하고 민감한가?! 그것은 바로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중국권내에서 제일 처음 조선족자치주라는 민족공동체 패찰을 단 종족집단 부호의 위력 때문일 것이고 다음은 전반 연변판도가 조선족이 제일 많이 모여사는 집거구라는 데서일 것이다. 이 양자의 우세특징으로 규정된 연변이미지는 집중과 중심의 매력으로 각광을 받았기에 그만큼 오늘날 실망감 역시 큰 걸로 해석된다. 단순한 자치주인구라는 통계이지만 공동체의 존재가치를 시사한 까닭도 역시 세대교체의 사명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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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19
  • 항일‘여장군’- 허성숙의 발자취를 찾아서
    [동포투데이] 연변대학 새일대관심사업위원회(약칭 ‘관공위’关心下一代工作委员会) 에서는 2017년 가을 어느 주말에 대학 공청단위원회와 함께 안도현 혁명교육기지 참관 행사를 마련하였다. 대형버스를 탑승하고 고속도로 한 시간 정도 주행해 안도현 정부 소재지 명월진에 이르렀다. 지난 여름에 홍수 피해로 이곳 주민들이 많이 고생하였다고 들었는데 복구사업을 잘 해서 2,3개월 지난 뒤에 그 피해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안도현 인민대표대회 부주임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고 동행하면서 오늘 행사의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 많은 수고를 하였다. 안도현 소재지를 벗어나 버스로 약 30분 정도 달리니 신합향십칠가(新合乡十七街)에 이르렀다. 아스팔트 포장도로 옆에 있는 모 기관 청사 정원에 동북항일연군 2군 지도부 장령들의 늠름한 모습이 커다란 조각상으로 제작되어 높이 세워져 있었다. ▲ 사진제공 : 김병활 동북항일연군 제2군(약칭 2군)은 중국 공산당의 영도 하에 조직된 항일무장대오로서 주로 한족, 조선족 등 민족으로 구성되었다.2군은 1936년 3월에 안도 신합향 미혼진(新合乡迷魂阵)에서 원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을 동북항일연군 제2군으로 개편했다. 2군 군장으로는 왕덕태(王德泰), 정치위원은 위증민(魏拯民), 참모장은 류한흥(刘汉兴)이었다. 산하에 3개 사가 있었고 병력은 대략 2천여명이였다. 2군은 주로 길림성과 흑룡강성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혁혁한 전공을 이룩하였다. 2군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항일투사로는 조선족 <여장군>이라고 불리운 허성숙(许成淑)이다. 조각상을 측면으로 보니 뒤에 군복 차림을 한 여성이 씩씩한 자태로 서 있는데 이 분이 아마 <여장군> 허성숙일 것이다. ▲ 사진제공 : 김병활 기념촬영을 마친 뒤 다음 목적지 - 영경향 대사하툰(大沙河屯)에 위치한 2군 밀영유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버스는 먼저 민속촌으로 유명한 만보향홍기촌에 이르러 잠간 휴식하였다. 그리고지난 세기 노동모범 류창은씨가 고산지대에 적응된 벼 품종을 개발했다는 사적을 떠올리면서이 지역에서 보기드믈 정도로 넓은 만보향 수전 벌판을 차창 너머로 바라보며 갈길을 재촉했다. 대사하툰 2군 밀영유적지에 이르니 규모가 큰 민속박물관이 나타난다. 지금 지방 정부에서는 여기에 홍색 관광과 만족민속관광을 결합해 규모가 꽤 큰관광지를 조성하였다. 입장료는 120 위안이라고 밝혔는데 안도현 인대회 부주임의 도움을 받아 우리 일행은 특수 할인을 받은 것 같았다. ▲ 사진제공 : 김병활 밀영유적지에 복구된 당시 항일 전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던 허름한 집들을 보면서 그들이 겪었던 어려움과 그런 환경에서 용감히 항일 무장투쟁에 떨쳐나선 영웅 기개와 완강한 의지력에 가슴이 찡해났다. 여기서 남달리 눈에 띄었던 것은 바로 대사하전적 기념관 앞마당에 세워진 항일 <여장군> 허성숙의 조각상이다. ▲ 사진제공 : 김병활 허성숙 조각상 뒤에 있는 기념관 안에는 아주 큰 편폭으로 허성숙의 영웅적 사적을 소개하고 있다. 허성숙, 여, 조선족, 1915년 안도현 중평촌 출생, 허성숙은 어려서부터 중평촌 농민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항일구국사상을 받아들였고 마을에서 전개되고 있는 반일활동에 적극 참가하였으며 1931년에는 소년선봉대에 가입하였다. 1933년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면서 반일투쟁에 적극 투신하였다. 1933년 허성숙은 연길현유격대에 가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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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4-01
  • 중국의 고정관념과 중국 여인
    ● 철 민 그대는 중국 여인을 아는가? 안다면 얼마나 알고, 또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 고정관념으로 말하면 중국 여인은 나태하고 구질구질하며 담배 질을 잘하는가 하면 마작 쪽이나 만지면서 노상 노름에 빠져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입이 쌍스러워 못하는 말이 없으며 남편을 걸레짝으로 아는가 하면 시부모한테도 입에 담지 못할 막말로 욕을 해대며 남편한테 귀 쌈을 후려갈기는 행위에도 서슴없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중국 여인은 독하고도 무서우며 또한 구역질이 나면서, 사랑은커녕 상대하기조차 싫어진다는 느낌이 든다. 헌데 중국 남성들은 자국의 이런 여인들을 반기고 아끼며 자못 애지중지 사랑한다고 한다. 그네들의 말을 빈다면 “어떻게 여자를 욕하거나 때리겠는가?”, “어떻게 여자를 소나 말처럼 부릴 수가 있는가”, “여자한테 져주는 것이 남자다” 라는 것 등등이다. 중국은 5000년의 전통을 가진 봉건국가였다. 자고로 나라적으로는 여성을 기시하고 학대해왔다. 그 사례로 여인한테 쫑발(전족)을 하도록 했고 황제가 죽으면 그 궁녀들도 함께 매장다는 관례도 있었으며 여성을 크게 중용도 하지 않았었다. 중화민국이 건립되기 전 청조말년까지 중국에는 크게 벼슬을 한 여성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공화국 시대인 20세기에 와서도 정부나 사회적으로 크게 활약하는 여성거두들이 많지 않았으며 지금까지도 중국의 공산당 중앙이나 국가정부내의 여성지도일꾼 비율은 아주 가련할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 정부나 정당 내에서 내노라 하는 위인들도 가정 내에서는 부인의 말을 곧 잘 듣는 <로봇>으로 되기가 일쑤이다. 언젠가 한편의 글을 번역하다가 이런 내용을 본적이 있다. “민국의 첫 외교장관의 부인 황혜란은 남편 고유균의 내연녀한테 질투한 나머지 마작을 놀고 있는 고유균의 머리에 찻물을 쏟아 던졌다. 이에 고유균은 그녀의 그런 막된 행위에도 꾸중 한번 하지 않았으며 그냥 마작 쪽만 만지었다고 한다.” 그럼 나라 적으로는 크게 중용하지 않으나 왜 가정 내에서는 여성한테 고분고분할까?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중국 남성들은 여인을 감상용으로 볼 때가 많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민국의 외교장관 고유균의 경우만 해도 그랬다. 그리고 여인에 대한 남편들의 기대란 밤생활 배동을 잘해주고 자녀나 잘 낳아주는 것이라는 분석이다. 중국 남성들의 말을 따르면 중국 여인은 밤 생활에서 아주 주동적이고도 적극적이어서 남편한테 아주 큰 즐거움과 만족을 준다는 것이다. 이는 낮에 남편을 대하는 행위와는 정반대되는 중국여인들의 밤생활 모습이다. 또한 중국 여인들의 말을 빈다면 낮에 보는 남편은 마치 자신의 남동생이나 아들 같기에 욕도 하고 심지어 때리기도 한단다. 이 외 역시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중국 여인들은 남편만 요구하면 언제든지 애를 낳아줄 각오로 산다고 한다. 이렇듯 중국 여인들이 자녀출산에 적극적이기에 중국 인구가 14억으로 육박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죽했으면 중국에는 <생육유격대>란 소품도 있다. 즉 계획생육을 제창하던 시기, 산아제한을 피해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출산을 견지했다는 이야기다. 이는 아내의 동조가 없으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중국 여인들은 남편을 버리고 도망가는 경우가 아주 드물다. 지금은 많이 개방되었지만 아직도 그 옛날 전족전통의 뿌리가 남아있는 모양이다. 이는 쩍하면 <이혼>이요, <졸혼>이요 하면서 가출을 밥먹 듯 하는 한국 여인(조선족 여인 포함)들과는 판판 다른 모습이다. 현재 중국에는 결혼적령기 독신자가 약 2억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전체 인구 14억의 약 7분의 1에 달한다. 아직 통계를 보지 못했으나 이런 폐단은 한국이나 중국 조선족의 경우는 몇 배 더 심각하다는 분석이다. 이 외 중국인들 중에는 용감하고 견정하며 재능이 출중한 여인들이 많다. 그제 날 항일전쟁 시기에는 유격대 대장으로 조일만(赵一曼)처럼 모젤 권총을 뽑아들고 진격에 앞장서는 여장군을 흔히 볼 수 있었는가 하면 그 뒤 제4차 국내전쟁 시기에는 강죽균(江竹筠)이나 유호란(刘胡兰)같은 견정한 의지의 여 영웅이 자주 나타나기도 했다. 또 있다면 건국 후에는 수많은 여성 노동모범 혹은 선진일꾼이 출현했으며 특히 문화예술 및 스포츠 분야에는 출중한 여 스타들이 많았다. 이 중 중국이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 같은 대형 경기에 나가 따낸 메달 가운데서 여성선수들이 따낸 메달(금, 은, 동)이 3분의 2정도가 된다는 집계도 있으니 중국 여인들의 활약상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남자배구나 남자축구와는 달리 중국의 여자축구와 여자배구는 그래도 한동안 세계를 석권한 자랑할 만한 역사도 있었다. 이 글의 서두에서는 고정관념으로 말하면 중국 여인들은 나태하고 구질구질…어떻고 어떠한 것으로 전해져 왔다고 썼다. 헌데 이렇게 전해온 것과는 달리 현재의 중국여인들은 대단히 부지런하다. 중국 여인들이 게으르다는 것은 그제 날 부지런해도 그 수입, 게을러도 그 수입이던 때의 얘기다. 지금의 중국 여인들은 대단히 부지런하다. 그 사례로 중국 연변의 서시장이란 곳에 가보면 곧 알게 된다. 새벽부터 도매시장에 가 물건을 구입해서는 하루 동안 매장에서 부지런히 물건을 팔며 조선족을 대상으로 “아바이(할아버지), 물고기를 삽소”, “아재(이모), 이 옷을 사우다”라고 하며 조선말도 아주 유창하게 잘한다. 이런 중국 여인들을 두고 근로하고 부지런하다고 칭찬은 못해줄망정 게으르다고 비양 댈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중국 여인들이 입이 쌍스럽다는 말도 주로 북방의 여인들을 두고 하는 얘기지 남방으로 가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여러 가지 사례를 들었지만 중국에서의 여인의 역할은 대단하다. 각 분야별로 보면 특히 경제 ‧ 서비스 분야 ‧ 문화스포츠 분야와 교육 ‧ 의료 ‧ 위생 분야 등은 여성인구가 50% 혹은 그 이상의 비율을 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죽하면 중국의 건국 수령 모택동도 <여성은 절반 하늘>이라고까지 평가했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중국 인들은 여성한테 큰 벼슬은 주지 않는다. 의심이 많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의 많은 나라들에서 여성 대통령 혹은 여성 총리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봉건전통이 심했던 한국에서도 여 대통령(박근혜)이 선거된 적이 있다. 그럼 개혁개방이 된지도 40년이 된다는 중국에서도 여성 주석이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어림도 없다는 분석이다. 지금 중국에서는 자주 모 기관의 여성간부 비율이 얼마요 하며 그 집계를 공개하고 있지만 그것은 기층의 집계이지 당 중앙이나 국가정부 기관의 여성 지도자 비율은 그저 <흉내>를 내는데 그치고 있다는 분석이 좋다. 그것도 정급은 별로 없고 부급(한국의 차관)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다반사다. 중국 남성들은 여인을 감상용으로 대할 때가 많다고 위에서도 언급됐다. 그네들의 말을 빈다면 화를 내는 여인을 보면 귀여우며, 우는 여인을 보면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 남성들은 “당신의 부인은 진짜 아름답습니다”란 말을 들으면 매우 기뻐한다. 부인이 아름답다는 말을 들으면 기뻐하지 않을 남편이 어디 있으련만 중국 남성들은 각별하다. 반면에 중국 남성들은 “당신의 부인의 실력이 대단합니다”라는 말에는 썩 내켜하지 않는다. 중국 남성들은 의심이 많으며 속이 검은 사람이 적지 않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직설적인 여성의 성격에 비해 중국 남성들은 흔히 속이 좁고 음흉하며 말을 해도 에둘러대기가 일쑤이다. 중국에는 <남자의 재능에 여인의 미모(男才女貌)>란 사자성구가 있다. 하다면 의심이 많고 속이 좁으며 음흉하고 말을 에둘러대는 것도 남자의 재능이라면 그 범주에 속할 수도 있으리라. 지난 세기 80년대 초까지도 중국의 연변에서 조선족 여인이 한족남성과 결혼하는 경우는 종종 있어도 한족여인과 결혼하는 조선족 남성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젠 한족여인과 결혼하는 남성의 사례는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더 이상 뉴스거리도 아니다. 그건 조선족 여인의 유출인구가 많아지는 원인도 있겠지만 한족여인을 보는 조선족 남성들의 고정적인 관념이 그만큼 깨어졌으며 또한 그만큼 한족여인이 좋아서이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필자는 동포투데이 논설위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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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08
  • 한반도의 봄 이제 진짜 오는가?
    ● 철 민 3월이 왔다. 꽃이 핀다는 춘삼월이다. 이제 곧 저기 제주도 한라산 기슭으로부터 훈훈한 봄바람이 불면서 버들개지 움트고 유채꽃이 만개될 것이다. 그리고 봄은 서서히 북상하면서 광주, 청주, 서울을 거슬러 올라가다 다시 휴전선을 넘어 평양, 함흥을 거쳐 북단의 신의주에도 가닿을 것이다. 봄, 반도의 봄은 철따라 분명 오고 있다. 아니, 지난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과 북(북과 남)의 고위급 회담이 재개되면서, 또한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한 북측고위급 대표단, 응원단 및 예술단과의 만남을 통해 꽁꽁 얼어붙었던 대한민국의 최북단 강원도 땅에도화기애애한 봄소식은 진작 전해졌다. 그렇다. 다가오는 한반도의 봄은 계절 따라 오는 자연계의 봄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하나>라며 서로 손잡은 사람들, 손에서 흐르는 난류를 통해 계절보다 앞당겨 오는 봄을 느꼈을 것이며 또한 모두들 이를 기다렸을 수도 있다. 이젠 평창 동계올림픽은 막이 내렸다. 북측대표단은 돌아갔다. 하지만 화해의 무드는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이란 <단기행위>로 끝나지 말아야 하며 자연계의 봄과 더불어 남북교류의 새봄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기대감이다. 즉 봄처럼 훈훈하고 여름처럼 뜨겁다가, 다시 가을처럼 쌀쌀하고 겨울처럼 얼어붙는 현상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 민족은 슬기롭고 위대한 민족이다. 스포츠에 자질이 뛰어나고 노래와 춤에도 인기가 있는 민족이며 남성은 용맹하고 여성은 부드럽다.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도 한국은 금메달 5매, 은메달 8매, 동메달 4매로 종합순위 7위를 기록, 11위인 일본과 16위인 중국을 훨씬 추월해 아시아 국가로서는 최강자 위치를 확립했다. 인구 5000만 명에 불과한 대한민국이 인구 1억 2000만 명을 가진 일본과 인구 14억 명을 가진 중국을 제치고 동계올림픽에서 아시아의 최강자로 군림했다는 현실, 그리고 몇 년 전 기네스북에도 오른 북한(조선)의 대형집단예술체조 공연(10만 명 출연) 역시 웬만한 국가나 민족으로서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인구 2500만 명밖에 안되는 북한이 창출해낸 세계적인 예술로 주목을 받았었다. 그 외에도 세계적으로 위치를 굳힌 한국의 반도체 제조업, 선박제조업과 자동차공업 등 이루다 자랑할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우리 민족은 싸움도 잘 한다. 헌데 싸움이라면 별로 자랑거리로 될 것 같지 못하다. 옛날 이순신 장군처럼 왜적과의 싸움에서 용감한 것을 사례로 들라면 자랑거리겠으나 반대로 자기 민족끼리도 잘 싸운다는 점, 이는 자랑거리보다는 수치이며 치명적인 약점이다. 크게는 남과 북으로 마라톤식 싸움이 계속 이어져 왔고 작게는 지역끼리 싸움이 잘 날이 별로 없었다. 남한만 보더라도 지역끼리, 정당끼리 곧 잘 싸웠으며 더 작게는 잘 어울려오던 친구끼리도 돈 때문에 싸우고, 여자 때문에 싸우고, 함께 술 마시다가 싸우고 등을 반복한다. 우리 민족은 1945년 미소(美苏)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된 뒤 지금까지 70여 년간 통일을 부르짖어 왔다. 통일의 기회가 없은 것도 아니라는 분석이다. <평화통일>이란 목소리가 높았고 염원도 같았으나 그 목소리가 합치지 못했으며 그 방법과 수단이 각각 달랐기에 이념과 체제가 다른 두 개의 정부가 나타났고 대화와 타협에 의한 <평화통일>에 실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동족상잔의 <6.25>가 터졌고 300만 명의 수난자와 1000만 명의 이산가족이 생기었으며 오히려 분단의 골을 더욱 깊어만 갔다. <6.25>란 화제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당시 <통일전쟁>이란 슬로건은 죄악의 계기었지만 전쟁초기 남측 정부가 진정 민족을 생각했더라면 북측과 타협해 전쟁을 멈추고 유엔군 참여도 없게 만들어 통일을 완수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반대로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할 때 북측 정부 역시 맥아더 장군의 투항제안을 받아들였더라면 중국군의 참전을 막고 통일이 가능했을 수도 있었다는 안타까운 마음에 엉뚱한 분석도 해보았다. 적절한 추리인지 모르겠다. 옛날 필자는 부친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가장 살기 힘들고 고달픈 곳이 조선(반도)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일본이 중국을 치자면 반드시 거쳐할 관문이 조선이고 또한 중국이 일본을 막자면 반드시 조선에서 일본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리가 있었다. 옛날에 그랬는가 하면 오늘까지도 미국은 반도를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중국 역시 반도땅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래서 군사학자 및 역사학자들은 반도를 <완충지대(缓冲地带)>라고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객관요소 등으로 반도의 통일이 그만큼 힘들고 어려워지고 있는 것 같다. 한편 주관적으로 볼 때 우리 민족은 남비처럼 빨리 끓고 빨리 식는 성격을 갖고 있다는 자아분석이다. <6.25> 이후 남과 북이 마주 앉아 통일과제를 추진한 적도 몇 번 있은 걸로 알고 있다. 특히 1972년에는 이른바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면서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고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도 갈망하던 통일이 당장 다가오는 줄로 여기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불과 1년 뒤 한동안 북적이던 통일의 열은 급기야 식으면서 원점으로 돌아갔다. 남비 식으로 빨리 달아올라 끓었고 또 인차 식으면서 겨울처럼 결빙되었었다. 그리고 그 뒤 전두한 및 노태우 정부 시절에도 남북의 화해시도는 있은 것 같았으나 여전히 별다른 결과가 없었으며 2000년에 있은 <6.15> 남북공동성명이 있은 후 남북관계는 급물살을 탄 듯 개선되는 양상을 보이었다. 그것을 계기로 노무현 정부시대에는 개성공단 가동, 남북철도연결 등 일련의 대형사항들이 이뤄지면서 역시 통일이 멀지 않겠구나 하는 기대감도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이것이 이명박 정부 시대에 들어서면서 180도로 바뀌었다. 남과 북(북과 남)이 재차 급속도로 냉전 상태로 돌아갔고 이어 <천안함 사건>, <연평도 포격사건> 등이 터지면서 박근혜 정부 시대에는 판문점 전화선 차단, 휴전선 대북방송 재개 및 개성공단 중단 등으로 그 동안 통일을 위해 양측이 들였던 노력이 물거품으로 되고 말았다. 지금은 이미 서기 2020년을 향해 육박하고 있다. 분단의 역사도 세기를 뛰어넘어 70년을 넘기고 있으며 1945년 이전 비록 일제의 치하에서 생활했지만 남과 북을 넘나들며 살았던 세대들도 한 두 명씩 우리의 곁을 떠나고 있다. 통일의 중요성을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세대들이다. 반대로 이들에 비해 필자와 비슷한 나이의 세대는 통일의 절박성에 대해 어느 정도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며 지금 한창 자라고 있는 세대들은 더욱 분단의 아픔이란 뭔지도 모르는 세대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이들은 북한이란 <국가>가 있으며 그 곳에서도 우리와 같은 민족이 살고 있다는 정도로 알고 있을 것이고, 70여 년 전에는 분단된 반도가 아니었다는 것도 역사교과서를 통해서나 배웠을 뿐 그것을 정녕 피부로는 느끼지 못했을 세대들이다. 우리 나이의 세대보다 더욱 모호하다는 뜻이다. 맹목적인 통일을 갈망하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통일이난 먼 앞날의 일로 될 수도 있다. 때문에 우선 통일을 위한 인프라구축부터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남과 북 서로에 유리한 행사들을 자주 만들고 교류를 벌이며 또한 이러한 것들을 통해 가까워져야 한다. 큰 갈등은 작은 갈등으로 취급하고 서로간의 신뢰를 보여주고 그것들을 이행해야 할 것이며 또한 그것이 세대가 바뀌고 정부가 교체되더라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분석이다. 필자는 반도인 혈통의 중국인이다. 이전에는 이북에도 가보았고 지금은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몸이다. 이렇게 북과 남을 오가면서 남측에 대한 북측 사람들이 보는 시각, 북측을 보는 남측사람들의 시각 등을 모두 체험했으며 중국 본토인들이 남과 북을 보는 분석도 자주 들어보군 했다. 총적으로 북측을 보는 시각이 남측 사람들보다 더 객관적이고도 합리적이며 남측을 보는 북측 사람들보다 더 객관적이고도 합리적일 수 있다. 현재 남측이나 북측 사람들은 <평화통일>을 부르짖으면서도 서로 간 상대방을 과장하여 비난하고 또한 이빨을 갈기도 하는 현상이 비교적 심하다. 이에 중국 본토인들은 어찌 보면 잘코사니를 부르는 양상이다. 아니 비웃는 것이 분명했다. “서로 <개싸움>을 하는 꼬리방즈(高丽棒子)들”이라고 비꼬아대는 사람도 보았다. 이럴 때마다 필자로서는 수치감과 더불어 안타깝기만 했다. 그것은 필자 자신이 중국인이 아닌 <반도인>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중국인으로 생각하면 그런 것에 신경 쓸 필요조차 없을 것이 아닌가?! 바로 반도인으로, 또한 한반도가 나의 모국(조국?)으로 생각하기에 울화가 치밀어 중국 본토인들과 언쟁을 벌이고 그들한테 한대 갈겨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했으며 오늘은 또 말밥에 오르거나 큰 비난을 당할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지난 세기 90년대엔가 일본에서 활동하는 문인 김문학씨가 <한중일 삼국지>를 펴내어 화제에 올랐다. 가령 필자가 김문학씨처럼 자신의 <한중일 삼국지>를 쓴다면 일본인은 섬나라에서 호시탐탐 바다 건너 그 뭔가를 노리는 <열도(列岛)인>으로, 14억을 품고 있는 중국인은 그들 내속을 알기 어려운 <대륙인(大陆)인>으로, 한국인은 각각으로 외세를 등에 업고 감정풀이나 잘하는 <반도(半岛)인>으로 묘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지나온 역사가 그것을 잘 증명하고 있으니 말이다. 요즘 필자는 이런 한탄도 자주 해본다. 지난 세기 70년대 베트남 사람들은 전쟁으로 통일을 했고, 독일 사람들은 하룻 새에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면서 통일에 성공하였지만 우리 민족은 왜 1950년대의 전쟁통일에도 실패하였고 오늘까지도 그 통일에 전전긍긍만 하고 있는 걸까?! 한반도의 통일이 힘든 것이 외세 때문인가 아니면 우리 민족 자신 때문일까?! 가령 독일 사람들 같은 성격이라면 한반도의 통일이 지금까지 지연되었을까?! 그러면서 지금까지 내려온 비극적 역사를 개변시키는 것이 반도의 지금의 세대 혹은 아래 세대 사람들한테 맡겨진 역사적 사명이라는 생각이다. 통일된 한반도는 만들지 못하더라도 계속 전쟁위기를 겪는 반도를 세세대대로 물려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요즘 반도는 어렵게 찾아온 화해적인 분위기인 것 같다. 상대방에 대한 고강도 비난도 한결 누그러들었고 계절적인 봄도 다가오고 있다. 이를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통일을 위한 다음 단계의 일에 착수하는 것이 우선인 것 같다. 계절과 함께 찾아온 남과 북의 <화해의 봄> 이는 이제 진짜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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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01
  • 헐, 바닥이 드러나네
    ●진 언 국민일보, 뉴스시 등 신문에 “北 선수만 '삼성 올림픽 스마트폰' 못 받는 이유”라는 제목의 글이 났기에 스쳐보니 기자의 저의도 비리거니와 북에 관한 기사라고 범벅이에 쉬파리떼 같이 달려들어 댓글(1636개)을 단 애국지사들의 쾌거가 어처구니 없다 못해 우습게도 눈물겨워질가 한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하는 3000명가량 선수들은 삼성 갤럭시 S8 스마트폰과 나이키 유니폼 등을 선물로 받는다. 하지만 북한 선수 22명은 이 선물을 받을 수 없다. 북한이 유엔 안보리와 미국 등의 제재 대상 국가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북한 선수단에 편의를 제공하면서도 각종 제재에 위반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쓰고 있다.…이에 여자 아이스하키팀의 유니폼은 미국의 나이키사가 제작한 것이 아닌 핀란드 회사가 만든 유니폼을 사용하도록 했다. 하키 스틱 역시 핀란드 회사가 제작한 것을 사용하는데 ‘임대’ 형식이며 북한 선수들은 한국을 떠나기 전에 이를 반드시 반납해야 한다.…” ▲ 북선수단과 응원단 기자씨가 모쪼록 이런 글을 올린 것이 선각자의 발견인지, 악어의 눈물인지 직접 물을 수는 없으나 그 저의가 참 비릿함은 분명 느낄 수 있다. 그건 그렇고, 댓글을 다느라 팔을 걷어부친 누리꾼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해서 경이원지하게 되는데 입을 벌리면 평화통일이니 민족융합이니 떠들어치는 국내상황에 비추어 보면 일본놈들이 이래서 “반도인”은 안된다구, 죠센징은 몽둥이로 다스려야 한다고 나발분 근거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아래에 참으로 경탄스러운 댓글 1351개 중에서 일부를 베껴본다. ※ 개불쌍 뭐하러 줘? 가면 다 뺏어서 못된일에 사용할텐데. ※. 고마움도 모르고 또 뒤통수 칠 것들이다..줄 필요없다. 우리 국민들 냐눠줘라~~ ※ 줘봤자 외화벌이용으로 수거해 되팔겠지. 아님 고위간부가 가져다 쓰거나. ※ 지상낙원에서 왔는데 그게 무슨 소용있나 ※ 한창 휴대폰에 관심이 많을 세대인데 마음이 야좋네요. ㅠㅠ ※ 줘도 쓰지도 못하는 동네고 줘봤자 간부들에 뺏겨서 다 팔리고 그돈은 ○○은 사치품 사가는데 쓰이는데 당연하지. ※ 이젠 무상 지원 없애야 한다. 핵무기 만드는 잘사는 나라에 왜 공짜로 주는지 참 알수가 없다. 북한 선수들 잘 먹고 잘 산다. ※ 그렇게 퍼줄돈 있으면 국내어려운 가정이나 불우아동들에게 사용해라! ※ 저것들한테 숙소랑 식사제공하는것도 짜증난다 ※ 구충제나 주자 초코파이좀 던저주고 ※ 줘도 쓸줄도 모르고 가져가봐야 다 뺏긴다 외화벌이 해서 핵탄두 만드는데 보태 겠지,,, ※ 올림픽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 하면서 이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건 뭔데? 니가하면 무죄이고 내가 하면 유죄냐? 뭐 이런 개 같은경우가 다 있냐?(량지가 있음) ※ 주지마 가져가봐와 ○○이줄텐데 왜주냐 북한애들주느니 우리영세민주시오 ※ 미친 빨괭이 따위에게 핸드폰이 가당키나 하나 옥수수나 던져줘 ※ 이런 취급을 받는 무리들을 상전으로 주공으로 모시니 나라의 운이 다 되었다.... ※ 걍 돌려보내 시끄럽게 하지말구 ※ 주는거 없이도 너희들 북한은 시르다 ※ 짝짝짝 지금 이라도 ♬♬ 는 쫓아버리자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걸치는 양아치 한테 무슨 대접을 해 ※ 초코파이나 처먹으라고 던져줘라 ※ 줄 필요없다 폰 아깝다 차라리 자원봉사에게 주라 ※ 아니 유니품도 대주냐 북이할수있는것이 뭐냐 그런걸왜 우리가 대주냐 이해불가다 ※ 이럴꺼면 뭐하러 올림픽 불러 참가하도록 한거니(어쩌다 인물났네) ※ 적국인 북한놈들한테 왜 비싼 삼성스마트폰을 준단 말인가? 뺨을 서너차례 때려주고 싶은데..... ※ 비용한푼안들이고 오는주제에도 모가지 힘주고 다니는데 안주는게 맞다.. 여기서 민족이란 단어 씨부리는넘들 아가리를 찟어버린다..민족이 뭐냐??? 족발이냐?? ※ 북한은 외국이라 본다. 언제까지 외국 북한에게 퍼주고 끌려 다닐건지?? ※ 적국국민을 왜 줌? 동맹국 미국민한테나 하나 더 주지 ※ 북괴놈들 폰 못 가져가는 것도 걱정이냐 별 더러운 기레기를 다보겠네 너 문빠냐 북한놈 챙기게 ※ 추운데 고생한 자원봉사자들에게 하나씩 선물로 주었으면 좋겠다. ※ 누구누구의 논리라면, 북한 선수단 밥도 주지 말아야 한다. 식사를 제공하면 밥 먹은 힘으로 ○○은 동지를 위해 충성하면서 핵무기 만드는 데 힘을 합해서 우리의 종주국 미국, 일본에 위협이 된다. 따라서 밥도 주지 말아야 한다. ※ 전세기허용,공연장 무료제공,유니폼 제공,체제비 all 부담하면 됐지,, 갤S8까지 줄 필요는 없어! 문재앙 주사파 촛불폭도들! UN제재 결의안 반하는 꼼수 부리지마라,, 국제신뢰 바닥인데 한미동맹마저 완전 파괴돼 수습불가능한 고립무원 국제왕따 된다! 이번올림픽으로 북한이 얼마나 괴씸하고 이기적인 놈들인지 다시한번 느낀다. ※ 당연하다 ᆢ적국 이라는것 잊지마라 ※ 하여간 희한한 짓거리 해대는 이상한 것들 땜시 대한민국이 엿같은 짓하는 나라가 됐으니...(그래도 생각이 올똘한 사람이 있네) ※ 잘한다 선은 확실히 긋는게 좋다 ※ 빨 개이라 재앙이가 줘라 같은 빨개이 고향 ※ 추접구로 뭐하는짓이고? 선수들한테 그럴거 뭐있냐? 초코파이 던져주라는것들 ~ 저질인지 ,수준이 낮은건지,어린애 인지...( 량지가 있는 사람의 당연한 질타) ※ 그 넘들 먹여 주고 재워 주는것 만도 고맙지 그런걸 왜 줘 ! 주면 그게 걔덜꺼 되니 ? 전부 압수 해서 똥돼지 떨거지 넘들이 가져 가겠지 ! 못 줘서 아쉽냐 ? ※ 주지마라. 임대형식이라도 줘서는 않돼. ※불쌍한 북괴선수!가장 좋은 휴대폰 갖을수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태여난 땅이 문제구나.그래도 몇일간 잘먹고 잘놀았잔여.... 중구난방의 고견들을 여기까지 옮기고 접어두련다. 썩은 나무 몇그루를 보고 온 수림이 썪었다고 말하면 안되지만 일엽지추라고 작은 남녘땅에 “나라의 흥망성쇠는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고염무의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자기 국가앞에 책임지고 나서는 우국지사들이 저리도 많음에 감탄이 묻어나오고 한편 저리도 잘난 똑똑이들이 왜 댓글질이나 하면서 표현욕망을 만족시키는지 곤혹스럽기만 하다. 미운정도 고운정도 정이란다. 미워도 무서워도 한피줄 겨레이다. 장기간의 분단상황에서 이질화되었더라도 피는 영원히 물보다 진하건만 오히려 불구대천의 원쑤로 절치부심하며 이를 뿌득뿌득 가는 양자가 대견스럽지가 않지만 수많은 인재들이 초야에 묻혀 육도삼략을 썩인다고 생각하니 싱거운 개탄이 나온다. 옆구리 터진 도토리만큼한 그릇들이니 그럴 수 밖에 있겠냐 하면서도… 조선민족의 전통속담에 동냥은 주지 못할망정 쪽박은 깨지 말라고 했거늘, 주지도 않겠다며 웬 성화인가? 아무리 삼성스마폰이던들 그것으로 일국의 재정을 보탤 수 있단말인가? 스마트폰 22개 값이 얼마냐? 중국에서 웬간만한 사람이면 단번에 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따위로 네티즌들이 앞다퉈 목에 핏대를 세우고 쾌지나 칭칭하며 멋에 겨워있다만 인간성의 밑바닥을 드러냈다고 생각못하는가? 말한마디에 천냥빚도 갚는다고 한다. 그러나 말한마디로 말하는 자의 위인됨이 확인된다. 아무튼 그 놀라운 동족증오병에 열뜬 투사들을 두고 혀가 홰홰 내둘러진다. 트럼프가 알고 찾아와 어깨를 도닥여주고 엄지를 내흔들며 치하를 하지 않으면 공념불이 될듯, 그리고 한다하는 삼성이 고작 22개의 스마폰을 못주는 이유를 무슨 제재타령으로 뭉그리지만 결국 세계인들이 짝이 없는 쪼잔함에 갈채를 보낼만도 하겠다. 유엔총부에서도 유엔결의를 잘 집행한다고 큼직한 상장을 보내줄가? 아무튼 이를데 없이 찌질한 그 작태에서 국민의식 수준을 가늠하게 된다. 어이 없지만 감탄하던차 동족증오병 환자들에게 곰팡이 낀 말로 일침을 가하고싶다. 알만한 사람이 다들 알고 있고 정설이 아니라 와전된 것이라 하지만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의 소름끼쳤던 “예언”을 여기에 옮기나니 그저 코웃음만 치고 그냥 간과할 것이 아니라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한번 다시 읽어 보시라. 그래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면 구제불능이구,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민이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한 위대했던 옛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놓았다. 결국 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日本は敗れたが、朝鮮が勝利したわけではない。大言壮語ハゴンデ朝鮮が第我に返ってきらびやかで偉大な昔の朝鮮の栄光を取り戻すには、100年という歳月がはるかにかかるだろう。私たち日本は、朝鮮国民に銃と大砲よりも恐ろしいの植民地教育を植えて置いた。結局、朝鮮人たちはお互いに仲違いし、奴隷的な生活を送るのだ。見よ!実に朝鮮は偉大した絢爛だったが、現在の朝鮮は結局日本の植民地教育の奴隷に転落した。そして、私の阿部は再度もどって来る” 아베 노부유키가 패망하면서 조선국민에게 쏜 저주의 화살이 자신으로 향하도록 정신 똑바로 차리고 보여줘야 하건만 오히려 그들과 합창하고 있지는 않는가 한번 생각해 보라!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은 우리 선조님들이 오늘을 내다 본듯 경계하여 남기는 경세지언일진대 일심전력하여 단합된 배달민족의 홍익인간을 세계만방에 떨친다면 아니 좋은 일인가? 모래알은 아무리 많이, 높이 쌓여도 그냥 모래무지이지 장성이 못된다. 뭉쳐도 어떨가 하는 위태위태한 판에 호시탐탐하는 외세에 어부지리를 마련하려고 광분하며 기세충천하니 타국에 백발로옹이라도 넘 감격해서 즉흥적으로 끄적거려 본다. 시끌한 인간세상 탈도 많다만 분단족 어쩌다 잘해 보자는데 천하에 몹쓸 잡것들 납뜨누나 옆구리 터진 도토리 심통이라 그리 보채며 성화를 부리느냐 뿌리 깊은 노예근성 못말려도 열강들 멋대로 가지고 노는데 자존은 없더라도 치욕도 없냐 ※ 본지에 기고되는 논문이나 나의주장, 칼럼은 순수한 기고자의 주장임으로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8-02-15
  • 남의 눈으로 본 “청년경찰”
    ●김인섭 영화 “청년경찰”이 빚어낸 논란이 그냥 발효하고 있다.한국 땅에서 차별과 수모를 받으며 누적된 상처가 긁히어 발로되는 아픔일 것이다.   영화가 조선족을 악역으로 내세우고 애꿎은 대림동마저 마적굴로 만들어 500만의 관객에게 전염성 메시지를 건넸으니 혈한을 쏟던 조선족들이 침묵으로 일관할 수 없다. 그들은 이미 한국 생활의 부조화 단계를 뛰어넘어 지역 사회에 융합되고 지역민들과 화합을 이루는 새 시대를 열었는데 이 친구들이 지엽으로 나무숲을 가리는 시나리오를 꾸민 편협한 사고가 이상하다.꺼지는 불에 기름을 쏟고 ‘동족상잔’ 정서를 부추기는 행태이니 피해 당사자들과 지성인들의 반발은 리유가 충분하다. 이 작품을 반민족적이라 문책하면 도를 넘지만 그의 사촌 친척이라면 모자람도 없다.   대림동은 재한 조선족들이 ‘코리안 드림’을 펼치며 일궈낸 집거지로서 한국에서 일명 차이나타운이라고도 부른다. 그들은 몇십년간 설음을 이겨내며 생계 전쟁을 거치면서 여기는 이미 한국,중국,조선족 문화가 어울린 독특한 문화지역으로 변신하였으며 미래 한국의 다문화사회 모델이라는 긍정적인 기대도 부풀고 있다. 물론 조선족들의 범죄나 후진적 작태들이 오래동안 이슈화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초기 적응이라는 원시 수준을 뛰어넘어 지역사회 건설에 책임지는 성숙된 이방인으로 변신하고 있다.그런데 “청년경찰”이라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다.   오늘 한국 속의 조선족 사회 형성은 주류사회의 드팀없는 지원,지지와 지도가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단언한다. 조선족들도 병주고향(竝州故鄕)을 건설한다는 진지한 감정으로 자체 도덕 개선의 절박성을 인식하며 주인적 자태로 나서고 있다. 현실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단점을 들추고 침소봉대식으로 과장하며 동족 화합의 숲에 악병(恶病) 바이러스를 뿌려댄다.자기보다 나은 사람이면 환대하고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이면 멸시하는 한국 사회의 저급문화의 발현이라고 지성인들이 말하고 있다.   지난 50,60년대 한국이 어렵던 시기 수많은 한국 남녀들이 독일에 건너가 그 나라 사람들이 기피하는 광부와 간호사로 되어 핏땀을 쏟으면서 가난한 조국에 종잣돈을 만들어 보냈다. 수만으로 헤아리는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에 매혹되어 쓸만한 수단은 다 부려가며 가난한 조국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또 중국을 내놓고도 미국,유럽 지역에서 한국인들의 범죄가 쟁점으로 되어 한국에 먹물을 들씌우던 무색할 통양(痛痒)도 수없이 있었다. 이것은 오늘 조선족의 '코리안 드림'과 궤적(轨迹)을 같이 하는 한국 역사의 단면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제작진들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명철한 사고로 조선족의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각설하고, "청년경찰"을 도문질타(到门叱咤)할 때 삶의 개선을 위해 찾아간 조선족들은 그 나라의 법질서와 국민들에 책임을 지는 신실한 자태가 있었던가 성찰이 있어야 한다. 지연,혈연,인연 등등 연고 문화가 뿌리깊고 혹독한 상하서열과 위계질서를 지켜야 하는 한국 땅이었다. 자기 치부를 감추는 가추불외양(家丑不外扬)심리와 아니꼬운 남이면 흉을 가배로 불궈놓는 속심은 인간 본성의 일부분이다. 어느 외인이던 그 공동체 속에서 불미스런 행위를 저지른다면 냉대는 말말고 공격의 과녁이 되고 동네북이 되는 현실은 자연스러운 인간세태이다. ‘한가마밥을 먹은 사람이 한울음을 우는’ 필연성도 당연한 인지상정으로 각인되고 있다. 그럴진대 재한 조선족들고 같은 처지면 똑 같아 진다는 역지개연 (易地皆然) 의 당위성으로부터 영화의 매개 측면을 고루 인식하고 만약 내라면 어떻겠나 관대하게 헤아려봐야 할 것이다.   현재 조선족 사회는 한국에 정착하는 추세를 이루고 있으며 많은 경제,문화,예술 단체들도 이미지 개선과 소통,상생,화목을 위하여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대림동이 ‘조선족 수도’로 격상한다는 소문도 파다하다. 뭐라해도 한국 땅은 조선족들에게 있어서 매력이 넘치는 땅이 틀림없다. 그렇다면“청년경찰”을 향해 진상 규명과 시비 판단을 호소할 때 영화 소재를 제공한 당신은 무었이었던가를 동시 고민해야 마땅하다. 특히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종시속(从时俗)의 고마운 실천이 관철되였던가를 내성(内省)하고 반성해야 한다.    언행범절의 곱냐밉냐에 따라 ‘주러 와도 미운 놈 있고, 가지러 와도 고운 놈 있다’는 세속의 도리는 따져볼 만한 리치이다. 조선족들에게 ‘가지고도 고운 놈’이 되는 지혜가 없을 것인가.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7-12-31
  • 연집강과 연길지명
    ● 허 성 운 지금까지 연길지명을 두고 많은 국내외 학자들은 나름대로 의미를 풀어내고 그 안에 담긴 뒷이야기를 적어왔었다. 하지만 연길지명에는 사람을 경악케 하는 섬뜩한 이미지가 음밀하게 숨겨져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일본어로 연길을 음역하면 엔기쯔로 발음되나 훈독하면 노부요시로 발음된다. 여기서 말하는 노부요시라는 단어는 옛날에 보검을 만드는 일본장인 이름으로서 그가 만든 류몬노부요시라는 보검은 일본에서 오래전부터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노부요시라는 언어에는 무사가 기를 칼끝에 응집시켜 그 기가 검을 타고 밖으로 뻗어 나오게 되어 예리한 칼날이라는 숨은 뜻이 배여 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광복 전에 룡정에 별명이 노부요시라는 한 일본 경찰서서장이 있었는데 늘 자신의 군도가 노부요시 보검처럼 단단하고 예리하여 대적할 적수가 없다고 자랑하며 다녔기에 그 별명이 붙여졌다. 1945년 가을 소련군에게 잡혔다가 구치소에서 남모래 뛰쳐나온 경찰서장은 집으로 돌아와 어린 딸을 총으로 쏴 죽인 후 주택에다가 불을 지른 후 군도로 할복하여 자살하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그가 놓은 불은 이튼 날에 가서야 겨우 진화되었다. 그럼 이런 일본 검의 섬뜩한 그림자는 어떻게 되어 연길지명에 비껴졌을까. 역사를 거슬러 연길지명을 꼼꼼히 캐고 보면 1900년 로시아가 만주에 침입하여 중국동북지구를 짓밟고 1901년 일본을 비롯한 열강 세력이 청 정부를 압박하여 신축조약을 체결한 뒤 이듬해 10월 26일 청 정부가 연집강(煙集崗)에 연길청(延吉廳)을 세우면서 연길이란 지명이 등장한다. 연집煙集이라는 한자음의 소리를 바탕으로 연길(延吉)이라는 문자로 고치여 표기한 것이다. 그리고 연길이라는 지명이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09년 연길청을 연길부로 고치고 1912년 연길현으로 개명한 후에 여러 역사 기록에 대량으로 나타난다. 연자延字가 길자吉字가 연희延喜정 연평延平교 등 연길의 주요 거리 다리 건축물 이름도 일본인들의 속셈에 따라 연길지명에 초점을 맞추어 표기되어 있다. 사실 연길의 최초의 지명을 따지고 보면 개척초기에 화전민들이 화전 밭을 일구면서 연기와 안개가 자오록이 덮여 있었다는 의미로 연집강煙集崗이란 땅 이름이 기원되어 있는데 그 후 사용한 연길지명과 뒤섞이면서 화전민의 역사는 운무 속에 가리어 오늘날까지도 이렇다 할 역사기록 한줄 남기지 못한 채로 세월의 비바람 속에 씻기여 사라지어 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 예로부터 연집강 구역은 뒤로 깃대봉을 사이에 두고 두 평풍(병풍의 방언)산이 둘레를 감싸고 바람을 막아주는데다가 그 안에 경사도가 완만한 구릉지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어 그야말로 천혜의 화전적지로 손꼽힌다. 완만한 경사지를 따라 개척초기에는 땅막집들이 감자처럼 여기저기에 박혀있고 그 사이로 석인골 태암 등지에서 흘러내리는 냇물이 남계마을 부근에서 연집강을 이루며 굽이굽이 휘돌아 남으로 부르하퉁하에 흘러든다. 경사진 화전 밭은 한쪽 발을 아래로 펴 딛고 한쪽 발은 구부려 허리를 펴고 일하는 모양이 되어 일 하는데 덜 피로 할뿐만 아니라 땅의 경사도에 따라 화전 불길이 세어지거나 약하게 조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세기말 뾰죽산아래 안방마을이라는 옛 동네에는 불붙이고래 라고 부르는 지명이 있었는데 최씨 성을 가진 사람이 화전을 하다가 산불을 내여 그 불이 평풍산을 타고 타올라 몇 십리까지 불길이 번진 적이 있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마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화전을 할 때 습기가 있는 눅눅한 날 밤을 골라 불꾸러미를 만들어 불을 지른다. 밤바람이 산 정상에서 아래로 불기 때문에 그리고 날이 어두워야 날아오르는 불티가 보이여 불길을 공제하기가 쉽다고 한다. 불을 생솔가지로 두드려서 막는데 밭 절반 넘어 불이 내려가면 밑에서 위로 맞불을 놓아 불이 잘 타오르게 하고 두 불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저절로 불이 꺼지게 하였다. 개척 초기에 화전민은 산신령을 절대적인 존재로 믿어 왔었다. 지금의 리민촌은 지난세기 30년대에 일제가 신흥촌 집단부락을 만든 곳인데 그 전에는 채영이라고 불렸다. 마을 부근에 큰 복개산 작은 복개산이라 부르는 곳이 있었는데 본래 산신령에게 고사를 지내던 곳인데 그 후에 공동묘지로 변하였다. 연집강 구역은 화전민의 삶의 문화가 무르녹아 흐르던 곳이다. 이 지역의 숫둘고래 부싯돌밭 삼밭고래와 같은 명칭들은 지난세기까지 해도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널리 알리어졌던 땅 이름들이다. 그 옛날 화전민은 떠돌이 삶을 살면서 약초도 캐고 짐승도 잡았다. 이 지역 황초고래 방초고래 같은 지명은 오래전부터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생겨난 명칭들이다. 연집강 구역은 두만강 강변과는 달리 생산된 작물을 회령 종성 온성으로 옮기는데 시간과 비용 그리고 위험이 따르기에 아예 산 여불때기(함경도 방언 비탈진 산기슭)밭 가장자리에 감자 움 같은 굴을 깊이 파서 저장하였고 겨울철에는 잡은 곰 가족을 벗겨 옷을 해 입고 곰처럼 구새 먹은 통나무 속에 들어가 잠을 자기도 하였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연무가 자오록이 뒤덮여 있는 연집강 지명에는 혹독한 세상과 맞서 치열하게 살아왔던 옛 선인들의 꺼지지 않는 삶의 불씨가 깜빡이고 빨갛게 연분홍 천지꽃이 물드는 산언저리에 안녕을 기원하던 화전민의 그 순박한 눈동자가 어리여 있다. 만일 석인골에 묻혀있던 돌사람이 입이 달려서 엉키고 설키여 있는 연길지명을 묻는다면 과연 어떤 답이 나올까. 하지만 석인골 있던 그 돌사람도 반세기 전에 어디론가 가뭇없이 사라지어 행적조차 묘연하니 연길지명 속에 감추어진 그 정체는 언제가야 사람들 앞에 드러날까. 화전민들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아로새겨진 연집지명이 일제 침략자의 칼자루에 휘둘리어 연길지명으로 뜯어 고쳐지는 과정은 서글픈 우리 과거사가 숨겨지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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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0-13
  • '청년경찰'과 조선족의 자세
    ● 김인섭 영화 "청년경찰"이 남긴 어두운 여운이 아직도 남아있다. 영화 제작자들은 흥행 효과와 인기 영합에 무게를 두고 사회적 후과에 대한 참작이 부족하였다며 모호한 사과도 표시한다. 그러나 조선족을 어두운 이미지로 포장하고 애꿎은 집거지마저 범죄의 소굴로 묘사하면서 500만 관객을 낚아내여 동족 화합을 꺼꾸로 돌리는 악효과를 초래하여 대중의 분노를 유발하고 이성을 흐리게 하였다. 색안경이 걸린 시선과 무리한 추리로 작성된 시나리오다. 고난에 찬 조선족 생활상에서 부정적 일면을 골라내여 과장기법을 기묘하게 써가며 사회 전체에 먹물을 뿌려댄다. 자기보다 약한 타민족과 이방인을 차별시하는 제노포비아(仇外心理) 요소가 아직도 한국사회 저변에 뿌리가 깊다며 지성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질타한다. 그러나 서로간의 이해와 양해가 깊어가는 오늘에도 구시대 배타주의가 문화시장에서 유령처럼 떠다니는 현실은 우리의 고민을 부르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동향에 대하여 과분한 감성적 해석이 필요없다. 그것은 한국사회에서 점멸(点灭)하는 편협한 사고로서 민족 화합과 세계화를 지향하는 주류사회에 휘말려있을 뿐이다. 시대 흐름이 이러하니 우리는 되술래잡기나 ‘이에는 이(以牙还牙)’ 식 앙갚음 역공을 들이댈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에게 보내는 하나의 비판 정보로 수용하는 것이 성숙된 사고가 아닐가 본다. 필경 한국땅에서 현지인들의 눈을 수없이 찌프리게 하였다는 전력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특히 립장을 바꾸어 생각한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철학으로 "청년경찰" 사건을 냉철히 생각해야 한다. 지난날 한국에서 발생하였던 여러건의 조선족 강력범죄는 조선족 이미지에 사정없이 악영향을 끼치였고 그 여파가 상당히 남아있다. 어느 사회에도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개별건이지만 타인에 대비하여 범죄 비례가 낮고 극소수라는 사실로 자신을 위안할 수 없다. 우리는 현지인들과 권익이 부동한 이국의 집단으로서 내국인과 비동류 관계에 처한 ‘손님’임을 명기해야 한다. 손님이 주인집에서 악행을 저질렀다면 주인보다 천백배의 질책을 받을 것은 인간세상의 지극한 당연지사이다. "청년경찰"은 민족 화합과 중한 두 나라 공동 발전을 저애하는 반작용적 문화상품이다. 여기서 묘사된 조선족의 일그러진 모습은 순수한 파괴적 비판으로서 우리가 뜨거운 항의를 제출하는 건설적인 반비판도 지극히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의 창을 활짝 열고 비판, 반비판과 자기비판을 동시 진행하는 개명하고 정의로운 행동으로 생동한 조화마당을 조성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이렇다면 조선족은 숙성한 모습으로 세인 앞에 용립(耸立)할 것으로 보아진다. 비판을 거부하는 심리는 인간이 고유한 본능이다. 그러나 ‘비판이 싫다면 비판을 달갑게 받으라’는 이성적 교시가 우리 민족 비판의 문화 속에 뿌리 내리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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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0-12
  • 민족문학사의 텃밭에 더불어 피고지고- 김혁
    ● 김 혁(재중동포소설가) 8월 15일 그날, 문인들과 함께 윤동주 생가에서 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활동을 마치고 돌아 오던 귀로에서 수상소식을 접했습니다. 10대에 등단하여 문단이 제정 한 문학상을 두루 수상했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해외에서 날아 온 희보(喜報)에 또 한 번 문학도 시절 첫 문학상을 수상했을 때처럼 저으기 격정에 꺼둘리는 나를 느꼈습니다. 금번의 수상작인 “춘자의 남경”은 조선족 문단에서 처음으로 되는 위안부 소재의 장편소설입니다. 불과 수십 년 전에 한국과 중국의 우리의 할머니 세대들은 일본군의 추악한 만행의 희생자로 전락되었습니다. 수십 만의 여린 하얀 꽃들은 누런 제복의 일본군에 끌려가 청춘을 검게 유린당했습니다. 소설의 들머리에 나는 지난 세기 일제가 자행한 북간도 지역에서 일어난 장암동 대참안을, 말미에는 고도(古都) 남경에서의 대학살사건을 필묵으로 세세히 재현했습니다. 그 나락에서 몸부림쳤던 우리 겨레의 수난을 눈물로 적었습니다. “춘자의 남경”은 중국작가협회에서 번역지지작품으로 선정되여 이미 번역을 마쳤으며 곧 우리말과 중국말로 출간되게 됩니다. 한국에서도 일전 출간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동안 오로지 문학에 매진하면서 느낀 바이지만 우리 조선족은 비록 광대한 중국땅에서 변강의 오지에 위치해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 문학의 지정학적 위치는 “변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주민족으로서의 중국조선족은 지난19세기 후반부터 고향을 잃은 설음을 안고 통한의 강을 건너 중국으로 이주하여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청국인들의 땅에서 개간을 시작하고 일제와 항쟁하면서 새로운 기원을 열었습니다. 거치른 땅의 개척과 피어린 항쟁의 와중에도 “이역 하늘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들의 “거친 꿈”은 문학의 한 형태로도 만개되었습니다. 이 무렵 안수길, 강경애, 최서해 등이 이 곳을 주무대로 문학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온 겨레가 애대하는 윤동주도 바로 이 곳에 태줄을 묻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족 작가 김창걸과 시인 이욱 등을 배출했으며 이들이 바로 조선족 문학의 비조(鼻祖)로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문단에는 또 “조선족의 루쉰”으로, “구 소련의 량심” 솔제니친과도 비견되는 “조선족문학의 거목” 김학철 옹이 있습니다. 이들이 이룩한 눈부신 문학적 유산은 한민족 디아스포라 문학의 한 전형이 되였고 이들은 한민족 문학사의 텃밭에 더불어 장려(壯麗)한 꽃으로 피어 올랐습니다. 조선족 문학은 한민족 문학과 정신적, 문화적 연계를 확보해 오면서 중국의 역사 변천과 그 속에서 영위하고 있는 조선족의 삶을 나름의 서정과 서사의 힘으로 보여주어 왔습니다. 그러할진대 이질적 문화를 수용하면서도 우리 문화를 승계하고 다시 모어로 담아내는 우리 조선족문인들의 고심이야말로 더욱 값진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의 수상에 저는 더 다른 가치와 소중함을 부여 해 봅니다. 그날 우리 문인들은 복원 된 명동학교 옛 터에서 윤동주네가 불렀던 교가를 목청껏 열창했습니다. 이 시각 그 교가의 한 구절이 떠 오르는군요. 흰 뫼(백두산)가 우뚝 솟아 은택이 호대한/ 한배검(단군)이 깃 치신 이 터에 /그 씨앗 크신 뜻/ 넓히고 기르는... 필대를 올곧게 고누고, 민족을 위한 일에 일필(逸筆)하고저 하는 저의 소명의 의지에 격려의 감로수를 부어준 한국문인협회에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7년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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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17-09-03
  • 청년경찰과 조선족
    ●석운우 어김없다. 한국영화에 또 다시 조선족이라는 클리셰가 사용됐다. 지난 수년간 한국영화에 등장하는 조선족은 어김없이 범죄자였으며 그 모습 또한 점점 뚜렷하고 과감하게 묘사되고 있다. 결국 한국영화에서는 어째서 조선족을 악랄한 범죄자로 묘사해야 하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고 이성적인 판단이 조금은 흐려지는 분노감마저 유발한다. 무책임하게 자행하고 있는 한국영화의 조선족 이미지 사용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얼마 전 액션/코믹 장르라는 '청년경찰'이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액션과 코미디라는 장르를 이해하고 아무리 웃음으로 장면들을 승화시키려고 해도 쉽게 되지 않았다. 불가능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청년경찰은 무례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지독하게 무례한 영화다. 영화 줄거리는 두 명의 경찰대생이 납치당하는 여자를 구출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담고 있다. 물론 여기에도 문제는 존재한다. 남자의 도움이 없으면 탈출이 불가능한 여자를 내세움으로써 여성을 사회적 약자로 치부하는 이 영화는 젠더 평등을 실현하고자 하는 현대 사회의 방향성과 정반대를 보고 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인종이나 민족을 차별하는 제노포비아(Xenophobia) 요소에서 기인한다. 위에 말한 대로 이 영화는 액션 장르가 포함되어 있다보니 주인공과 싸울 악당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 악당이 뜬금없이 조선족이라는 것이다. 대체 조선족을 사람이나 납치하고 죽이려고 하고 장기적출까지 서슴지 않는 대상으로 보는 것은 이 영화를 제작한 감독이 생각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라는 물음이 들게 한다. 조선족은 영화 '황해'를 시작으로 한국 영화에서 그릇된 시선을 받으며 등장했다. '황해'의 주인공이 돈을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살인청부업자의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다. 영화 '신세계'에서는 이름도 없는 그냥 연변 거지다. 이 인물들 역시 돈을 위해서 여자를 잔인하게 폭행하고 납치에 살인까지 자행하는 인물들이다. 다른 영화에서도 조선족의 역할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쯤 되니 문제가 심각해졌다. 조선족을 멋대로 인식하고 판단하고 잣대질하면서 전부를 싸잡아 시궁창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자국인을 해하는 악당이 타국인이었으면 하는 이기적이면서 터무니없는 욕심으로 만들어진 피해자는 조선족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황해'나 '신세계'가 제법 잘 만들어진 영화임에는 이견이 없다. 인간의 본성과 탐욕, 배신 등 감정표현들이 괜찮은 방식으로 나열되어 있으며 배우들의 열연은 영화와 잘 어울렸다. 그렇다고 하여도 영화를 보고 난 뒤에 남았던 찝찝함은 가시지를 않았다. '황해', '숨바꼭질', '신세계'로 이어진 조선족의 악당 이미지는 이번 청년경찰에 들어서서 결국 정점을 찍어버렸다. 애꿎은 대림동까지 범죄자들이 거주하는 소굴로 만들어버렸다. 이러한 각인을 누구도 책임지지는 않고 있다. 물론 조선족을 경계하는 한국사회의 사고를 전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 한국에서 일어난 끔찍한 살인 사건이 조선족 출신에 의해 자행됐다는 사실을 묵과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 사건이 조선족의 연대책임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을 지금의 한국영화에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자행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이러한 상처는 다른 영화를 통해 약간이나마 치유를 받는 것이 전부이다. '내 이름은 칸'이라는 영화는 인종이나 민족이 차별을 당함으로써 겪는 아픔에 대해서 조선족을 대신해 말해준다. '9.11 테러' 이후 미국 내에서 무슬림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고 주인공과 가족들은 그로 인해 피해를 보게 된다는 줄거리의 영화로써 악행을 저지른 그 당사자나 집단이 아님에도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탄압과 멸시를 받는 사람들이 겪는 아픔을 묘사한 이 영화야 말로 한국영화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다. '청년경찰'을 연출한 김주환 감독은 시사회 때 “냉전 때의 미국은 늘 구소련을 적대자로 그려냈다. 지금 한국 사회를 얼어붙게 하는 대상을 찾다 보니 극적 구조상 이렇게 됐다. '신세계' 이후 많은 영화들에서 이런 묘사들이 등장한다. 편견이라기보다는 영화적 장치로 너그럽게 봐주시길 바란다.”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김 감독은 본인이 만들어 놓은 무책임한 장치가 조선족에게 얼마나 큰 아픔을 주고 있는지 모른다. 그 영화적 장치로 인하여 생긴 편견들과 싸우는 것은 온전히 조선족의 몫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냉전시대의 미국이 소련을 바라봤던 시점을 한국이라는 국가가 조선족을 바라보는 시점에 대입하는 것 또한 비이성적인 대입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조선족을 무너뜨려야 할 적으로 보는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국영화는 진지하게 그에 대한 대답을 내놓아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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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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