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01-27(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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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②
    1927년, 중국과 독일의 접촉을 시작으로 항일전쟁 직전까지 독일은 중국의 최대 협력 파트너였다. 원래 독일 군사고문은 장개석에게 60개의 독일의 기계사단을 통폐합해 내놓아야 했지만 국민정부는 그렇게 많은 돈이 없었고, 또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았기에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전역에 30개의 ‘조정사’만 있었고 독일은 40만 세트의 장비만 쏟아부었다. 이 정예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거의 소진되었다. 최초의 ‘송호회전’, ‘남경보위전’, 화북전장의 ‘흔구회전’, ‘낭자관전투’;등 전투에는 대량의 독일 기계사단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참혹한 대가를 치렀다. 이들 30개의 ‘조정사’ 중 28개는 사단 전체가 마비됐고, 2개 사단만이 격렬한 전투를 피했기에 그 병력과 장비를 보존할 수 있었다. 또 전쟁 때문에 독일의 무기는 제때 수송되지 못했고, 독일군은 장비를 보충받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국산장비를 갖고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게다가 독일은 일본과 동맹을 맺은 탓으로 독일군은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늦추다가 1938년 7월 중국에 대한 지원을 모두 멈추고 중국에서 철수했다. 독일인들은 철수했고, 중국의 항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중국내 전장은 군사 장비의 보충이 시급했고, 장개석은후원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바로 이때 소련이 나타났다. 소련은 국민정부로 하여금 일본군의 진군속도를 저지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장개석과 합작협정을 맺고 중국에 군사물자를 지원했다. 이에 따라 독일기계사와 미국기계사 사이에 소련기계사가 하나 더 생겼다. 소련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민정부가 농수산물과 각종 금속 원자재만 제공하면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10년 만에 중소 협력은 이렇게 성사됐다. 소련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름대로 성의를 갖고 있었고, 탱크와 비행기 같은 중무기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소련 장비로 20개 사단을 무장시켜 독일군 무기사단의 손실로 생긴 공백을 메우려 했다. 이렇게 양 측이 각각 필요한 것을 취해서 교역은 비교적 만족스럽게 진행 됐다. 하지만 소련 기계사의 배치에 있어서 중·소 양측은 이견이 있었다. 소련 측은 모두 소련군 편제대로 새로 편성된 부대에 장비를 배치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몰래 장비를 따로 빼돌려 포병단을 조직했다. 이렇게 10여 개의 포병단위를 만들면서, 미리 약속했던 대로 소련 기계사단에 이를 전달하지 않았다. 한편 소련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물자 수송도 간단해 1차 소련의 기계장비로 4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었으며 이 중 제200사단은 중국 최초의 기계화사단이 됐다. 그리고 후속으로 소련의 기계화 장비도 육속 도착해 장개석은 18개의 소련 기계화사단을 구성해 일본군과 잘 싸울 수 있었다. 이 보배같은 소련 기계화사단들에 대해 장개석은 독일 기계사단들처럼 잔혹한 전장으로 보내져 소모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1941년에는 15개 사단이 각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이 중립조약을 맺은 뒤 중소 관계가 약화되면서 소련의 군사장비는 보충되지 않았고, 소련의 기계화사단 역시 점차 역사적 명사로 되었다. 미국의 원조는 큰 것을 노린 전략적 움직임 실제로 영국은 독일의 지원이 끊긴 뒤에도 잠시나마 중국에 군사물자를 제공했지만 일본의 압력에 원조를 중단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중영 간 원조가 회복됐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이때 이미 해가 기울어 극동에 전념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소련의 장비가 없어지자 미국은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구세주가 됐고 국민당 군은 미 장비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항일전쟁 단계에서 미국이 실제로 충분한 지원을 하지 않은 데는 객관적인 이유도 있고 주관적인 이유도 있다. 한편으로 운남-미얀마 도로가 끊기자 물자 장비는 험준한 항로를 통해서만 수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적었다. 다른 한편으론 아시아 전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영국과 소련에 많은 장비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인은 통이 컸다. 중국의 해방전쟁 시기까지 22개 군 64개 사단이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장개석에게 보내와 국민당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장개석은 미국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공산당에 의해 대만이란 작은 섬으로 쫓겨나 지내다가 일생을 울적하게 마감했다. 중국은 북벌전쟁 때부터 외국의 군사원조를 대대적으로 받으면서 중간에 공급처를 여러 개 바꿨다. 심지어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 등도 중국에 숟가락을 얹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독일·소련·미국이 더 많이 지원했다. 왜 이런 나라들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중국을 지원했을까? 독일의 속셈은 짐작이 가는 대로 장사를 하러 온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금속과 각종 원자재가 중국에 많고 거기에 무기까지 팔아 큰돈을 벌 수 있는 중국을 싫어 할리가 없는 것이다. 소련은 여러 가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일본을 견제하여 극동에서의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 한편, 당시 소련은 넓은 영토가 독일군에 함락되고 원자재가 부족했기에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나라로 중국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국민정부에 원하는 게 없음에도 속내는 더 흉악했다. 미국이 내놓은 ‘임대법’은 파시스트의 침략을 받는 전 세계 국가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앞에서 이런 국가들이 육탄이 되어 주는 것이고 양쪽이 다 소모되면 그 때에 가서 그들이 나서서 수습하여 이들 국가들을 깊이 통제하겠다는 취지가 있었다. 한마디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변화 속에 있고, 친구와 적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판단되며 이익만이 영원한 것이다. 이들 나라가 중국에게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는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도 약육강식의 규칙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다만 실력이 강해야 비로소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경직된 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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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8
  • 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①
    [동포투데이 철민] 1937년 8월 13일, 제2차 상해 보위전이 발발하자, 장치중(張治中) 장군의 국민당 제9집단군이 상해에 진주했다. 당시 장개석은 장치중 장군에게 2개의 독일의 기계화사인 87사단과 88사단을 지원하였다. 이어진 남경 보위전에서도 몇몇 개편 완성된 독일 기계화사가 빛을 발산하면서 중국군의 완강함을 보여주었다. 중국과 독일, 양국은 서로 다른 진영에 있었다. 그런데 왜 장개석은 독일 기계화 부대가 소유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두 나라는 또 어떻게 교역했을까? 그럼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의 타산을 알아본다. 국민당이 독일을 처음 접한 것은 손중산(孫中山) 때였다. 당시 혁명을 위해여 손중산은 도처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나라들에 손을 내밀었다. 당시 독일은 공산주의의 발원지로서 손문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 인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독일은 당시 낙후한 중국을 외면했으며 손문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뒤 비로소 제1차 국공합작과 소련이라는 거물이 등장하면서 손문을 후원하게 되었고, 격렬한 북벌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1924년 손중산이 사망하자 장개석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켜 좌익과 공산당 세력을 소탕함과 아울러 소련과 완전히 단절했다. 당시 중국은 가난했고, 전쟁 때는 어쩔 수 없이 장개석은 또 밖으로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남경정부가 직면한 국제 환경은 매우 험악하고 객관적으로도 중국과 독일은 일련의 교류를 촉진하는 것으로 양국의 교역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해야만 했다. 영국과 프랑스 역시 같은 아시아에서의 이익은 대부분 남아시아와 동남아에 있었으며, 중국에 대한 수요는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을 장개석은 명심해야 했다. 한편 그 시기,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강대해졌고, 동아시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영국·프랑스 식민지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일본을 안정시키고 자신의 식민이익을 지키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의 중국 침략을 방임하면서 묵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으며, 중국을 지원하는 물자의 통로를 차단하고 될수록 일본에 아첨했다. 미국은 당시만 해도 그렇게 강하지 않았으며 유럽은 여전히 세계의 중심이었고, 후발주자인 미국은 앞사람의 눈치를 봐야 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모범을 보였고 다른 나라들도 감히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감히 하지 못하자 장개석의 아첨은 ‘장님’에게 던져지면서 이상적 효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다행히 독일은 그 바닥을 지켰다. 1927년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본전을 모두 잃었고, 자신의 군사력이 각종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등으로 나라 전체가 억눌리자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독일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실력을 키웠다. 그중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는 그 일부였다. 영국과 프랑스 등 나라의 요구대로라면 독일은 국방군을 10만 명으로 줄이고 나머지 독일 병사들은 모두 현지에서 전역해야 하며, 방위산업도 모두 전환하여 더 이상 군사 장비를 생산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장개석이 협력 요청을 하는 순간, 이는 독일의 마음에 와 닿은 거대한 군사기구로선 힘겨운 일이었지만 해 볼만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자 중국과 독일은 군사협력을 시작했다. 독일 측은 군사교관을 파견하고 장개석이 군대를 훈련시켜 많은 병사가 전역한 뒤 독일의 국방력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고 전투력을 유지하도록 도왔다. 또 독일 장비를 대량으로 팔아 물자와 돈을 챙기고 노동자를 단련시켜 생산량을 보장하면서 부수입도 챙겼다. 장개석은 유럽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군사 장비를 대량으로 확보해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독일은 이미 무릎을 꿇고 유럽의 2등 국가가 됐지만 그러나 이것이 바로 장개석이 비로소 가격을 낮추고, 최소의 대가로 최대의 이익을 얻는 방법이 되었으며, 그의 장사는 매우 잘 되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고, 서로에게서 이익을 얻을 수 있고, 거래도 오래갔다. 독일은 1927년부터 수백 명의 군사고문을 파견해 40만 세트의 무기·장비를 지원했고, 중국의 군수공장 설립을 도왔으며 독일 무기상들과 연계해 중국 군사물자의 주요 공급국이 됐다. 중국과의 교역에 신경을 쓰는 독일은 다른 대안이 없으니 성의를 보여야 했다. 이들이 차례로 파견한 군사고문은 선발된 엘리트들로, 전임 두 단장은 중국군 지휘중추와 장교 양성제도를 각각 개량해 보병의 지휘를 원활히 하고 산하 각급 병종도 전장에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했다. 3인 군사고문단의 단장인 세케트 장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진이 독일 ‘10만 국방군’ 개편에 착수한 것으로 군을 줄이고 전투력을 높인 경험이 있다. 이 장군은 확실히 힘이 있었다. 그는 전형적인 독일 군인에 속했다. 국민정부 군대의 각종 폐해에 대해 하나씩 해결책을 제시해 장개석에게 많은 유용한 건의를 가져다주어 진정으로 중국군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세케트 장군의 계획대로라면 국민당은 60개의 ‘조정사’와 60개의 ‘정리사’를 개편하는데, 전자는 정당한 독일군 무기사, 후자는 일부 독일군 무장을 한 부대였다. 다만 당시 국민정부의 부정부패가 횡행하고 독일도 제대로 장비를 팔 수 없어 ‘7.7사변’ 직전까지 장개석의 손에는 3개의 완전체 독일 기계화 사단과 1개의 교도총대, 그리고 공상희의 체제 내에 없는 세경 총단 밖에 없었다. 1935년 세케트 장군이 병으로 사임하자 후임자인 파켄하우젠도 국민정부의 군사산업 발전을 적극 도왔다. 독일인의 도움으로 국민당은 정식으로 승마총, 꽃 기관총, 82박격포 등을 본떠 선택적으로 병기공장을 세워 어느 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고, 상황은 곧 호전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생겼다. 당시 중국은 가난하여 대양과 은화를 국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대외 무역에서 다른 나라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화인 달러와 파운드화는 국민정부 스스로도 부족하고 금은과 은 같은 귀금속은 더더욱 내놓지 못했다. 그럼 중국과 독일 간 군사물자 거래는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 답은 텅스텐(钨矿), 석(锡), 안티몬(锑) 등 세 가지 금속이었다. 이 세 가지 금속은 방산 분야에서 널리 쓰이지만 독일 본토에서 생산되지 않아 99%가 외국산이었다. 히틀러가 집권한 뒤 군비확충에 나서면서 이들 금속의 수요가 크게 늘었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은 관리가 철저해 독일은 원료를 충분히 조달받을 방법이 없었다. 이 세 종류의 금속은 중국에서는 오히려 매우 흔히 볼 수 있었다. 호남, 광동 등지에서는 모두 상응하는 광물 매장량이 채굴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은 솔직히 많이 쓰지 않았고 산업용 원자재를 군사장비와 교환하는 것을 선호했다. 독일은 전쟁에 대비해 대규모로 원료를 비축해야 했고, 중국은 물산이 풍부해 독일의 많은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중국은 금속광산을 제외한 농산물·면화·브루마 등의 물자를 돈처럼 쓸 수 있었고, 독일이 국민정부에 지원을 요청한 유일한 품목이다. 다만 장개석의 무기·장비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고 국제정세 변화, 물자수송의 지연, 영국의 봉쇄 등으로 중·독 양국 간 원자재·무기 교역이 이뤄지지 않자 국민정부가 현금·백은을 들고 독일과의 협력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다음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2-08-20
  • 무인도에 갇인 1남 7녀, 그들의 운명은…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이 이야기는 지난 세기 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초반 사이에 있은 한 조선인 남자가 일본인 여성 7명과 동시에 결혼해 도합 27명의 자녀를 낳은 진실한 이야기다. 사람은 사회에서 생활함에 있어서 당연히 많은 욕구가 있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이성과 생기는 감정적 욕구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감정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할 줄 아는 영장 동물이다. 더군다나 특정된 장소에서는 남녀 사이에 이런 감정이 싹트기 쉽다. 대천세계에서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형형색색의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반려자로부터 선택되고 또한 반려자를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딱히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경우에 따라 인간은 반려자를 선택할 수 없거나 감정적인 욕구가 없는 즉 마음에 들지 않는 이성과 함께 사랑을 나눌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래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 증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군사적 큰 착오로 벌어진 태평양 전쟁 말기 남성 1명과 여성 7명이 태평양 가운데의 트루크 군도에 남겨지면서 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초기까지 이 해괴한 일부다처(一夫多妻)의 이야기가 벌어졌던 것이다. 사람들은 태평양 전쟁이라고 하면 모든 전쟁의 근원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사건이라고 말한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여러모로 미국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요행을 바라고 저울질하면서 미국의 태평양 해군기지를 공격했으며 전쟁 초기에는 연전연승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미군이 일본군 약점을 연속 꿰뚫을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미군은 차츰 전쟁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하나둘씩 빼앗겼던 섬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운데 끼인 일본군 점령 섬들은 고립되어 보급은 전혀 없었으며 어떤 경우엔 단 한 명의 병력 손실도 없이 미군은 이 섬들을 스스로 무너뜨릴 수가 있었다. 당시 트루크 제도에는 일본군 병사와 조선인 부역자 및 일본군 위안부가 주둔해 있던 고립된 섬이었다. 미국이 일본의 공급 사슬을 끊자 섬에 갇혀 있던 이들은 고립되기 마련이었고 시간이 흐르자 구원투수들에게 삶의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본 본토에서 구조자를 섬에 보냈을 때 갇힌 사람들은 한동안 삶의 희망을 본 듯 들뜨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는 아주 짧디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일본 본토에서 보낸 구조선은 섬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구조선박은 섬 기슭에 사람이 보이지 아니 하자 무인도로 여기고는 재빨리 선수를 돌려 트루크 섬을 빠져나가면서 아무도 돌아보는 이가 없었다. 그 후 조선인 부역자 김유길과 일본인 위안부 7명이 “사람을 살려요”라고 외치며 해안으로 달려 내려갔을 때는 배가 이미 멀어져 있었다. 그렇게 희망이 깨지자 일곱 여인은 서로 얼싸안고 펑펑 울면서 땅을 쳤고 김유길도 마찬가지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인들처럼 울고불고 할 수는 없었다. 몹시 절망적이었지만 그는 남자로서 좀 강해야만 했다. 그는 엉겁결에 일본 여인들이 흐느끼는 것을 보고는 그녀들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적당한 어구가 없었다. 말문이 막히자 그는 다가가 그녀들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기만 했다. 울음을 터뜨릴 뿐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이었다. 하지만 울음이 그치고 사위가 잠잠해진 뒤에도 이들의 삶은 계속되었다. 이렇게 이들 일남 칠녀는 섬에서 두 달 넘게 함께 생활했다. 이들은 구조를 기다리지도 못한 채 섬에서 먹을 수 있는 열매와 과일은 거의 다 뒤졌다. 그러다가 다행히 그들이 앞날이 막막할 때 뜻밖으로 담수호를 발견하게 되었다. 삶의 빛 한 가닥 생긴 것이다. 한편 섬에서의 유일한 남자인 김유길은 물고기라도 잡아서 모두가 굶어죽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평일에는 고기잡이 말고도 비교적 건장한 여자 몇 명을 데리고 사냥을 했으며 그리고 그 때면 나머지 몇몇 여자들은 나무를 찾아 불을 피우고 빨래 같은 일을 하면서 제각각 자기의 맡은 바의 일에 충실했다. 처음에 김유길과 그녀들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일상적인 교류는 손짓 혹은 몸짓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김유길은 그녀들한테서 일본어를 배웠고 그 또한 그녀들에게 조선말을 배워주었으며 이렇게 되어 그들은 얼마 안돼 서로 정상적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섬에 갇힌 지 1년이 되는 해 봄의 어느 날, 김유길은 섬에서 일본인들이 흘린 것으로 보이는 벼 종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순간, 김유길의 머릿속에서는 기발한 생각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바로 벼농사를 한번 해보자는 결심으로 마음속으로부터 논을 풀었다. 그 해 그는 여인들을 거느리고 열심히 일하면서 논을 풀었다. 논둑을 만들고 논에 물을 가두고…그리고 벼 모종을 논에 심자 과연 벼가 우썩우썩 벼가 잘 자랐다. 그 뒤 가을이 되자 김유길은 또 여인들과 함께 벼를 베어 거두어 들이고 타작을 했다. 타작이 끝나자 이들은 마침내 첫 햇밥을 먹어볼 수 있게 되었으며 더 이상 끼니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김유길은 점차 모든 여자들의 숭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먹는 문제를 해결하자 김유길은 자연스럽게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연상하게 되었다. 바로 빗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집을 짓는 것. 원래 집짓기 같은 것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기에 김유길은 그 실행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는 여자들을 거느리고 연 며칠 나무를 찍어 와서는 서두르지 않고 하나하나씩 기둥을 세우고 벽을 쌓았으며…마침내 지붕까지 얹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집 모양새를 두루 갖출 수 있었다. 집은 비록 허름하고 그닥 크지도 않았지만 이 외딴 섬에 그들도 비바람을 피할 곳이 드디어 생긴 셈이었다. 여성 그 자체가 워낙 감성적인 동물이기에 어려운 상황에서 자기에게 도움을 주는 남성을 사랑하기가 쉬운 것이다. 섬에 버려진 뒤 여자들은 몹시 절망했지만 당시 유일한 남자인 김유길은 그녀들을 책임지고 그녀들에게 정신적 위로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생존환경까지 해결해줬기에 그럴만도 한 것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김유길이라는 유일한 남자에게 마음을 기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갖가지 애로와 언어의 장벽까지 뚫고 나온 김유길은 일본 여자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나중에는 거의 감출 것도 없이 속심을 털어 놓을 때도 많았다. 어떤 경우에는 속된 농담도 거침없이 할 정도였다. 이렇게 한동안 어울리던 중 김유길은 자신이 그 중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몰래 그 여인한테 자기의 마음을 고백했다. 헌데 이 여자가 너무도 기쁜 나머지 이를 다른 여자들한테까지 자랑할 줄이야?! 이러자 이들 여자 모두가 한결같이 김유길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어 김유길은 황제처럼 되어 일곱 명의 여자를 동시에 품에 안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가정을 꾸린 뒤 이들은 아예 귀국할 생각을 접고 살림을 차리고 김유길의 아내로서의 각자의 의무를 다 하였다. 그리고 아내들은 선후하여 스물일곱 명의 자녀를 김유길한테 낳아주었다. 이렇게 그들은 하나의 작은 가정으로부터 하나의 대가족으로 발전했다. 그로부터 8년이 흘러간 뒤 이 35명의 대 가정은 바다에 나타난 미군 순찰함에 의해 발견되었고 오랫동안 귀국생각을 접었던 이들에게 마침내 각자가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며 김유길은 고향으로 즉 한국으로 돌아가게 됐고 그 외의 아내와 자녀들은 모두 일본으로 송환됐다. 김유길은 귀국한 지 몇 년 만에 그 아내들이 그리워났다. 거기에 자녀들이 보고 싶기도 했다. 마침내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처자들을 찾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두루 수소문한 결과 그의 다섯 명의 아내는 이미 재가하여 다시 살림을 차렸고 나머지 2명만이 그래도 김유길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일본 사회는 이미 일부일처제를 시행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특별한 예외의 경우였다. 정부도 이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들은 이렇게 죽을 때까지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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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12
  • 시대를 빛낸 할리우드 여배우- 마릴린 먼로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지난번 계속) 마릴린 먼로의 본명은 노마 진 베이커이다. 그녀의 외할아버지 성은 먼로, 그는 정신 질환으로 앓고 있는 자동차 엔지니어였으며 늘 자신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의 자손이라고 했다. 그리고 외할머니인 델라에게도 정신적인 장애가 있어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하면 매우 격렬했다. 그런가 하면 어머니 글래디스는 MGM 콜롬비아의 한 영화제판공장에서 스크랩 작업을 했으며 어머니 역시 심각한 정신분열증 환자로 평생 수용소 출입이 아주 잦았다고 한다. 1942년 6월 19일, 마릴린 먼로는 제임스 아이젤 돌티와 결혼했으나 1946년 9월 13일 첫 결혼은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 그 뒤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는 1954년 1월 14일 샌프란시스코의 한 모텔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2월 2일 일본 도쿄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이들이 혼인신고를 한 지 274일 만에 마릴린 먼로가 이혼을 제출했고 1954년 10월 31일, 법원은 마릴린 먼로가 조 디마지오와 이혼하라고 판결했다. 뒤이어 마릴린 먼로는 1956년 6월 29일 극작가 아서 밀러와 극비리에 결혼했고 그해 8월 메릴린 먼로는 임신했지만 곧 유산했다. 마릴린 먼로는 1957년 8월 1일 자궁외 임신으로 다시 유산했다. 1961년 1월 20일 두 사람은 멕시코에서 정식 이혼하고 말았다. 18세 때 마릴린 먼로는 기독교인이 됐다. 하지만 1956년 아서 밀러와 결혼하면서 먼로는 유대교로 전향했다. 생전에 마릴린 먼로는 생전에 애완견을 많이 키웠으며 그 중 마지막 한 마리는 시나트라가 선물한 몰타 개로 이름을 지어 ‘마피아(Mafia)’라고 불렀다. 1960년 8월 28일, 마릴린 먼로는 정신과 입원치료를 받았으며 그 뒤 1961년 2월 7일 재차 뉴욕에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3월 5일에 퇴원했다. 1962년 1월, 마릴린 먼로는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으며 7월 20일 자궁내막염으로 또 입원치료를 받았다. 1962년 8월 4일, 마릴린 먼로는 심리치료사와 6시간을 보냈다. 이는 그녀의 생에 있어서 마지막 하루가 됐다. 그 이튿날 즉 8월 5일, 로스앤젤레스 경찰은 마릴린 먼로가 로스앤젤레스 브라이든무에 있는 자신의 거처에서 36세의 나이로 사망했음을 확인했다. 8월 8일,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마릴린 먼로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마릴린 먼로는 익숙한 이름이었고 익숙한 이미지였다. 그녀는 트레이드마크식의 웃음과 매혹적인 몸짓으로 하나 또 하나의 성감적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감동적인 연기 스타일과 죽음은 영화 팬들의 영원한 성감 적인 아이콘이자 대중문화의 대표주자로 자리 잡았다. 많은 팬들은 살아가면서 그녀의 사진들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아니 보고 또 보았을 것이다. 하얀 치마를 입고 뉴욕 거리에 있는 모습과 땅속 열기에 그녀가 걸친 치마가 나팔을 벌린 듯한 모습의 흑백사진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 눈을 살짝 감은 듯 입술을 감빠는 모습, 소파 위에 하얀 다리를 드러낸 모습 등을 보노라면 사진만이 아닌 특별한 감정의 전달과 순수하고 성감적인 정국이 될 때가 많다. 공개된 사진에서 마릴린 먼로는 이전과는 다른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며 청순하기도 하고 털털하기도 한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좀 길게 땋은 머리 태, 청바지, 리넨 스커트 등은 다양한 스타일링으로 생활 속 먼로의 사랑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먼로는 1962년 8월 5일, 자기의 거처이 로스앤젤레스 브라이든 무브먼트의 거실에서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이후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을 떠올리면 마릴린 먼로의 죽음은 케네디 가문과 정치권의 암막에 휘말렸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그가 죽은지 수 십 년이 넘도록 그녀에 대한 공식 조사서류는 대부분 고급기밀로 분류돼 있었다. 2006년까지 FBI(미 연방수사국)는 미국 자유정보법에 따라 500쪽 분량의 먼로 관련 문건의 비밀을 해제했다. 그러자 마릴린 먼로의 죽음이 그가 적어놓은 비밀일기와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역사 전문가들은 뒤늦게 밝혀냈다. 먼로의 일기에는 먼로와 케네디 형제의 ‘베갯머리 대화’가 다수 기록돼 있었다. 1962년 8월 초, 케네디 형제는 약속이나 한 듯 먼로와의 모든 왕래를 끊었다. 갑작스런 격변에 직면하여 마릴린 먼로 역시 자신의 위험을 의식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8월 4일 오후 9시 반, 그녀는 절친인 시드니 길라로프에게 전화로 케네디 형제와 있었던 자신의 사생활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한 가지 위험한 비밀을 알고 있다”고 했다. 다음날 새벽 LA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된 마릴린 먼로는 공교롭게도 그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비밀 일기’도 신비롭게 사라졌으며 LA지검 사무실 또한 마릴린 먼로가 일기를 썼다는 것과 먼로의 죽음이 모살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부인했다. 2012년 5월 16일, 제65회 칸 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마릴린 먼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제 홍보 포스터가 나붙었고 현장의 대형 스크린에는 마릴린 먼로 주연의 각종 다른 영화의 스틸 사진이 끊임없이 상영되면서 그녀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유명 조각가 수어드 존슨이 만든 마릴린 먼로 조각상 ‘영원한 먼로’가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스에서 전시되기도 했다. 그녀는 줄곧 어떤 남자가 그녀를 사랑하기를 원했고 그녀도 전심으로 상대방을 사랑했지만 안타깝게도 먼로는 평생 이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는 여인으로서 먼로는 전심전력으로 절대적인 관심을 필요로 했다. 이런 100%의 사랑을 남편들은 주지 못했고 애인들은 더욱 주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59년 전, 36세의 마릴린 먼로는 그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하늘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용모를 주었지만 운명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인생을 주지 않았다. ‘세상의 좋은 물건은 견고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구름은 쉽게 흩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아마도 마릴린 먼로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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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01
  • 시대를 빛낸 할리우드 여배우- 마릴린 먼로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그녀는 60년대까지 미국 할리우드의 유명한 여배우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수많은 남자들 마음속에 자리 잡은 ‘유혹의 여신’이기도 했다. 마릴린 먼로-그녀의 별명은 노마 제인 모테이센(Norma Jeane Baker)으로 미국계 유대인이었으며 출생지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다. 마릴린 먼로: 출생일 1926년 6월 1일, 사망일 1962년 8월 5일, 별자리 쌍둥이자리, 혈형 AB형, 키 166cm, 몸무게 53kg, 직업 프로배우, 모델, 대표작 ‘7년차 가려움’, ‘버스터미널’, ‘용놀이’, ‘열정은 불처럼’ 등 다수 주요 성과로는 제9회 영국․TV예술아카데미상 영화상 최우수 외국여배우상, 제14회 미국영화방송 골든글로브 영화부문-뮤직코미디부문 최우수 여주연상, 제11회 영국 영화·TV예술아카데미 영화상 최우수 여배우상, 제17회 미국영화․TV 골든글로브 영화-뮤직코미디 최우수 여주역상, 100년 만의 가장 위대한 여배우 랭킹 6위… 1926년 6월 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본병원에서 태어난 마릴린 먼로는 당시 노마 제인 모태슨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한 차례의 세례 후 그녀는 이름을 노마 제인 베이커로 변경했다. 불행한 것은 그녀가 사생아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멀리 타향으로 떠났으며 먼로는 태어난 지 13일 만에 브라운다이 부부의 집에서 매주 5달러씩 내기로 하고 입양됐다. 1933년 가을, 마릴린 먼로는 어머니 글라디스 바크르에게 인계되었다. 글라디스는 1935년 6월 1일 먼로의 보호자가 됐지만 몇 개월 후인 9월 13일 먼로를 고아원에 보냈다. 이어 먼로는 1937년 11월부터 안나란 여인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고교생이던 1941년 마릴린 먼로는 어린 나이에 결혼과 함께 ‘아름다운 여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결혼 후 마릴린 먼로는 올림픽 챔피언 하워드한테서 역도와 서핑을 배웠으며 1944년 5월부터는 항공기 무전기 제조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45년 6월 26일 마릴린 먼로는 사진작가 데이비드 코너일과 함께 잡지 사진을 찍었다. 그 때 사진작가 데이비드 코너일은 그녀가 사진을 게재하여 미군을 고무시키기를 희망했다. 마릴린먼로는 1946년 5월 26일 ‘가족권’ 잡지 표지를 통해 처음으로 얼굴을 알렸다. 1946년 7월 19일, 마릴린 먼로는 20세기 폭스로 처음으로 가게 되었고 7월 26일 폭스와 첫 6개월 계약을 맺었다. 또 머리를 황금색으로 염색하면서 ‘제인 아델’이라는 예명을 붙이기도 했다. 1948년 마릴린 먼로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슈쿠다, 허!스쿠다, 하이!(It's Shukuda, Huh! It's Shukuda, Hi!)’에서 교회를 달군 여자 역을 맡았지만 그한테 차례진 대사는 한 줄밖에 없었다. 이후 그녀는 한 영화에서 여자아이를 연기하였으나 역시 대부분의 장면은 삭제되었다. 1949년 5월 27일, 사진작가 톰 켈리는 먼로의 누드 사진을 여러 장 촬영하여 골드 미스 드림 달력을 출판했다. 하지만 먼로는 달력에 실린 자기의 사진에 싸인을 하지 않아 50달러만 받게 되었다. 그해의 8월 15일, 먼로는 뮤지컬 영화 ‘토마호크행 티켓(Tickets to Tomahawk)’의 촬영에 참여했고 10월에는 또 범죄영화 ‘밤의 밤’ 촬영에도 참여했다. 1950년 1월 5일, 먼로는 드라마 ‘화구(火球)’의 촬영을 시작했고 4월에는 또 드라마 ‘혜성미인’에서 어느 한 주요 배역을 맡았다. 같은 해 먼로는 잡지 ‘성조기’가 선정한 ‘매력 아가씨’로 뽑히기도 했다. 1951년 4월 18일, 먼로가 출연하는 애정 코미디 영화 ‘사랑의 둥지’ 촬영이 시작되면서 그해 5월 1일, 폭스는 먼로와 6개월 계약 기간을 7년으로 연장했다. 뒤이어 먼로는 1952년 5월 7일 ‘라이프(life!)’지의 표지모델로 데뷔했으며 6월 1일에는 멜로영화 ‘신사는 미인을 사랑한다’의 주역으로 발탁됐다. 그리고 그해 8월 31일 라디오 생방송에 첫 출연 했고 9월 2일에는 ‘미스 아메리카 모델 쇼’에 출연했다. 1953년 6월 26일 마릴린 먼로가 미국 연예계에 짙은 손자국과 발자국을 남겼으며 9월 13일에는 TV에 처음 등장했다. 이어 11월 5일 로렌 바이콜, 로리 캘헌과 함께 출연한 애정 코미디 영화 ‘결혼하고 싶어’가 개봉됐다. 영화에서 먼로는 어릴 때부터 백만장자와의 결혼에 목마른 성감 모델 ‘보라 드 베이워스’ 역을 맡았다. 1954년 4월 30일, 마릴린 먼로가 로버트 미첨과 함께 촬영한 서부 모험영화 ‘동으로 흐르는 강물’이 개봉했다. 이 영화에서 먼로는 팜므파탈의 바 가수 ‘카이’역을 맡았다. 먼로는 9월 1일 로맨틱 코미디 영화 ‘7년차 가려움’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이 영화로 먼로는 제9회 영국영화·텔레비전예술아카데미상 영화상인 외국여우상 후보에 올랐다. 1955년 1월 7일, 마릴린 먼로는 밀턴 그린과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마릴린 먼로 프로덕션 센터’의 설립을 발표하였고 1월 15일 20세기 폭스 프로덕션과의 계약은 종료됐다. 1956년 1월 4일, 마릴린 먼로는 20세기 폭스프로덕션과 재계약을 맺고 2월 25일 할리우드에 복귀했다. 그 때로부터 그녀는 마릴린 먼로로 개명했고 이어 3월 3일에는 주연 로맨틱 코미디 영화 ‘버스터미널’에 출연했다. 그녀는 이 영화로 제14회 미국 영화 TV 골든글로브 영화․TV 부문 여 최우수 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1957년 6월 13일, 마릴린 먼로가 로런스 올리버와 함께 주역을 맡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 ‘드래곤 봉황’이 개봉되었다. 이 영화에서 마릴린 먼로는 관능적이고 매력적인 쇼걸 ‘엘시 마리나’의 역을 맡았으며 이 역할로 제11회 영국영화·TV예술 아카데미상 영화상-외국 여배우상 후보에 올랐다. 1958년 8월 4일, 마릴린 먼로는 애정 코미디 영화 ‘열정은 불처럼’에서 마이애미 악단의 아름다운 관능의 여인 ‘수가’ 역을 맡았다. 1960년 3월 8일 먼로는 영화 ‘열정은 불처럼’으로 제17회 미국 영화․TV 골든글로브 영화 부문-뮤직코미디 부문 여 최우수 주연상을 받았다. 1961년 1월 31일, 마릴린 먼로는 클라크 게이블,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함께 촬영한 서부 애정 영화 ‘난점 원앙보’가 개봉됐다. 1962년 3월 5일, 마릴린 먼로는 ‘세계 최고의 여배우상’을 수상했고 이어서 4월 23일에는 그녀는 주연 코미디 단편 영화 ‘멘붕’ 촬영을 시작했다. 1962년 6월 1일은 마릴린 먼로의 20세기 폭스프로덕션에서의 마지막 출근 날이자 마지막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날이었다. 6월 7일, 20세기 폭스프로덕션은 먼로와 계약을 종료했다. 하지만 그해의 8월 1일, 20세기 폭스프로덕션은 월급을 2배로 주기로 하고 마릴린 먼로를 다시 고용하기로 결정했으며 8월 3일, 먼로는 ‘라이프’지의 표지를 장식하는 ‘멘붕'의 재촬영에 동의하면서 ‘라이프’지의 표지모델이 됐다. 1999년 미국영화학회가 선정한 ‘100년 만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여배우 랭킹’ 6위에 올랐다.
    • 연예·방송
    2021-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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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재] 진의(秦怡)-눈물겨운 김염(金焰)과의 결혼생활⑤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김염의 탈선행위는 왕인미와의 사통관계뿐이 아니었다.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 당시 진의와의 감정모순이 커가던 시기, 김염과 진의는 서로 별거생활을 하던 때가 있었다. 바로 그 시기 김염은 진의의 여동생인 진문(秦文)을 불러들였다는 풍설도 있었다. 이는 우리의 관념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세상사는 가끔씩 이런 일도 생긴다는 것을 우리에게 귀뜸해 주는 것도 사실이다. 헌데 김염과 진의의 여동생 진문과의 관계에 대해 확실한 것은 없다는 것이 또한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 진의는 지금까지도 함구무언이라고 한다. 이러는 진의의 생각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을 것이 아닌가?… 자기의 탈선행위 즉 왕인미와의 사통관계에 대해 김염은 숨기지 않았다는 것이 진의의 말이다. 그리고 진의가 김염한테 이혼하자고 제의하자 김염의 대답은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고 한다. “나의 마음속에는 임자밖에 없어. 내가 사고를 친 건 일시적으로 방황과 고민에서 벗어나기 위한 거였어. 그리고 임자가 나와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하다면 나의 곁을 떠날 수도 있어. 하지만 이혼만은 안 돼!” 김염의 이 말은 그야말로 뻔뻔스러운 것이었으며 웬간한 여인이라면 결코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뻔뻔스러운 남자는 김염 말고는 천하에 있을 수가 없다고 진의는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진의는 김염의 부탁대로 해주었다. 당시 진의가 생각한 것은 그래도 김염의 사회상의 형상이었고 또 자녀들의 앞날을 걱정한 것도 있었다. 결국 진의는 이혼보다는 별거를 선택했다. 많은 사람들로 말하면 별거란 부부로서의 허울뿐이지 이혼이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별거로 있던 상대가 어떤 불행에 빠졌을 때 등 경우에는 부부란 그것이 아주 중요했다. 아니나 다를까 진의와의 별거 후 김염은 과음으로 위출혈이 생겨 병원으로 호송되었다. 다행히도 구급결과 생명은 건지었지만 신체는 이미 폐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걸을 수는 있었지만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숨이 차 헐떡거리군 했다. 한편 이렇게 되자 그제 날 김염의 술친구였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김염의 신변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렇게도 귀와 살쩜을 감빨며 친밀하던 정인들 역시 한명도 찾아와 문방하는 이가 없었다. 그야말로 추풍낙엽이 된 김염은 우정과 애정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사업능력마저 상실하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별거한지 오래되었지만 다시 가슴이 아파하며 다가온 건 선량하고도 정을 중히 여기는 진의였다. 이미 폐인이 된 김염의 앞에서 진의는 더 이상 그를 나무람하지도, 귀찮아도 하지 않고 묵묵히 아내의 역을 맡아하면서 김염의 수발을 들었다. 어찌 보면 진의의 개인 인생은 기구하면서도 첩첩애로였다. 1962년 남편 김염이 병석에 누운 지 2년 만에 아들인 김제(金捷)마저 정신적 충격에 의해 정신분열증에 걸렸던 것이다. 이러자 진의의 어깨위에 있는 부담은 더욱 중해지기만 했다. 집에 있을 때면 두 환자를 돌봐야 했고 또한 수입내원이 끊어지면 안 되겠기에 시간만 있으면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출연무대로 찾아나서군 했다. 1983년 김염은 병고 끝에 사망하였다. 당년 상해탄의 <영화황제>로 름름하던 모습은 찾을 곳 없고 몰골만 앙상히 남은 김염은 임종 전 진의한테 “아직도 날 미워하고 저주하는가?”고 물었다. 이에 진의는 “나 진작 당신을 용서했어요. 기나긴 인생이라 혼인생활에 문제가 생기는 건 정상이죠. 지나간 일은 그냥 흘려 보냅시다”라고 했다고 한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 진의는 김염이 사망하던 당시를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염이 사망한지 얼마 안 되어 한 여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는데 김염의 생전에 내가 그를 잘 돌봐주지 않았다고 책망하더군요. 그래요. 김염한테는 여인이 많았어요. 또한 여인들의 호감을 살만한 매력을 가진 사내다운 남자였고 잘 생겼지요. 나 역시 그의 탈선행위를 알면서도 그를 돌봐준 건 그젯 날 그를 따르던 애모감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죠. 그리고 우리의 딸이 현재 한국에 있는데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참 이쁘게 잘 생겼어요…” 김염이 사망한 후 진의는 모든 정력을 아들 김제한테 쏟아 부었다. 간병인을 쓸 수도 있었으나 모성애 때문에 자신이 직접 아들의 잠자리를 봐주고 밥을 먹여주고, 화장실로 데려가 머리를 감겨주는 등 일들을 맡아하군 했다. 그렇게 고되고도 힘든 나날 속에서도 진의가 사회적으로 이룩한 업적은 놀라울 정도였다. 제1 회 중국 TV 금응상(金鹰奖) 우수 여배우상 획득 제 11 회 상해국제영화제 종신 성과 상 획득 제 27 회 중국 영화 금계 상 종신 성과 상 획득 2009년 2월 중국 부녀연합회와 인민일보 등 11개 중국 매체가 수여하는 <중국 10대 여걸 칭호> 획득 … 어찌 보면 진의의 인생은 2개의 인생이 서로 교차되는, 극히 모순되는 인생이었다. 그녀의 인생을 명암(明暗)으로 평가할 때 사회와 연예 권에서의 그녀 인생은 눈부신 활약과 더불어 명랑과 기백의 인생이었고 가정에 들어가서의 그녀 인생은 사회 최하층 생활을 하는 간병인, 가정주부와 별반 다름이 없는 인생이었다. 지금도 생존해 있는 진의 여사는 아들이 눈 감기 전에 한 말 “어머니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죽어야 한다”는 말을 되 외우며 눈물을 짓는다. 정신분열증 환자라면 이런 말을 못하겠는데 임종을 앞두고 아들 김제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고 하면서 울고 또 울고 한다. 휘황한 인생 그리고 고달프고도 기막힌 인생, 이는 영화배우인 진의의 인생을 놓고 볼 때 그 자체가 기나긴 대하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끝)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8-27
  • [연재] 진의(秦怡)-눈물겨운 김염(金焰)과의 결혼생활④
    ▲김염과 왕인미.ⓒ인터넷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왕인미는 1914년 호남 장사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녀의 부친 왕정권(王正权)은 일명의 교사로서 지식이 연박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고귀한 것은 사상이 아주 개명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왕인미한테 몇 명의 언니가 있었지만 왕정권은 딸들에게 전족(裹脚)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지어는 보모로 들어온 어멈까지도 발이 큰 여인이었다. 그리고 왕인미의 모친 역시 자상하면서도 엄한 민국의 여인이었다. 왕인미가 7살 되던 해 셋째 오빠가 몰래 밖에서 노름을 하다가 모친한테 발각되었는데 원래 몸에 병이 있는데다 아들이 노름을 하는 것을 본 모친은 너무 큰 충격을 받은 탓에 아들의 귀쌈을 세 번 때린 후 그 자리에서 쓰러진 것이 그냥 사망되고 말았다고 한다… 왕인미는 바로 이른 가정의 환경에서 자랐던 것이다… 1934년, 왕인미는 채초생 감독이 찍은 영화 <어광곡(渔光曲)>에서 여 주인공을 맡은 한편 영화의 주제가를 불러 전반 상해탄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고금중외로 연예권에서 관중들을 정복한 여 스타가 탄생하면 이에 뒤따르는 건 당연히 애정거리가 화제로 되기 마련이었다. 왕인미 역시 마찬가지었다. 당시 그녀가 추구한 남자는 바로 당시 상해탄 연예권에서의 풍류남아 김염이었다. 기실 왕인미는 명월가무단에서 가수로 활동할 당시 김염과 합작하여 영화촬영을 한 적이 있었고 당시 김염은 그녀에 대해 아주 호감을 보이기도 했다. 남자는 <영화황제>이고 여자는 <영화여왕>이라 둘은 아주 빨리 애정의 소용돌이 속에 말려들어 갔다. 헌데 왕인미의 가정에서 김염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반대할 줄이야. 하지만 왕인미는 김염이 아니면 그 누가한테도 시집가지 않겠노라며 버티었다. 지어 그녀는 신문에 글을 발표하여 “김염은 중국인이 아니지만 독립사상으로 충만된 청년이다. 때문에 난 나라를 잃은 망국자와 결혼할지언정 절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적과는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렇게 되어 왕인미는 결국 김염과 단란한 가정을 뭇게 되었다. 결혼 후 왕인미한테는 두 가지 선택이 기다렸다. 하나는 예전처럼 계속 연예 권에서 활동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집안 살림에 충실하면서 현모양처로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가정교양의 영향으로 독립자주의 의식이 비교적 강한 왕인미는 결혼 뒤에도 여전히 자기의 두 손으로 생활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 진보단체인 대붕극단(大鹏剧社)과 계약을 맺았고 또 미군 타자원으로 활동하려는 생각도 하였다. 이에 남편 김염은 견결히 반대하였다. 결국 왕인미는 김염과 타협하여 극단과의 계약을 해제하고 전심전의로 가정에 충실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결혼생활이란 일방의 희생으로 원만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결혼 후 얼마 안 되어 왕인미는 임신하였다. 임신초기 여러 가지 활동으로 태아가 위험해지게 되자 그녀는 병원에 입원하여 태아가 안전하게 들어앉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유감스러운 것은 그녀가 병원에서 아기를 출산할 때까지 김염은 겨우 한번 그녀를 보러 온 것이었다. 이는 그녀한테 큰 상처를 남기었다. 그리고 더욱 상심이 큰 것은 아이가 조산하여 8일 만에 요절한 것이었다. 이는 김염과 왕인미의 결혼생활에 어느 정도 결렬이 생기게 했다. 그 뒤 둘은 언짢은 일 같고도 자주 다투었으며 결국 1944년에는 이혼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혼당시 둘은 격렬한 다툼도 정면적인 소통도 없이 그냥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기실 당시 왕인미한테는 이혼은 하였지만 김염에 대한 미련마저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헌데 김염은 그것이 아니었다. 얼마 안 되어 김염은 왕인미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린 듯 재차 다른 여인과 결혼해 버렸다. 그것도 같은 연예권의 동료였고 거기에 왕인미보다 훨씬 젊었으며 당시로는 연예 권에서 한창 잘 나가는 진의와 결혼했던 것이다… …… 한편 그 때로부터 10년이 흐른 뒤 왕인미도 엽전예(叶浅予)란 남성과 결혼하였다. 헌데 두 번째로 결혼한 여인은 늘 알게 모르게 원래의 남자와 현재의 남자를 비교해보는 습관이 생기게 되는 법이다. 하다면 두 남자를 비교해 볼 때 두 남자 모두 사업을 첫째로 놓는 건 같았지만 김염은 직설적이었고 엽전예는 은폐적이었다. 특히 엽전예는 왕인미와 지향하는 세계관이 부동했으며 심지어 생활습관마저 각각이었다… 둘은 상대와의 정감세계에서 점차 서로 멀어져 가면서 방황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럴 즈음, 왕인미는 김염 역시 진의와의 결혼생활이 윤탁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비록 다시 결합하지는 못하더라도 김염과 왕인미의 옛정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가정적 환경이 주어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편 김염의 탈선행위는 왕인미와의 사통관계뿐이 아니었다.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 당시 진의와의 감정모순이 커가던 시기, 김염과 진의는 서로 별거생활을 하던 때가 있었다. 바로 그 시기 김염은 진의의 여동생인 진문(秦文)을 불러들였다는 풍설도 있었다. 이는 우리의 관념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세상사는 가끔씩 이런 일도 생긴다는 것을 우리에게 귀뜸해 주는 것도 사실이다. 헌데 김염과 진의의 여동생 진문과의 관계에 대해 확실한 것은 없다는 것이 또한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 진의는 지금까지도 함구무언이라고 한다. 이러는 진의의 생각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을 것이 아닌가?…(다음에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8-23
  • '삼국지' 재해석④ 황건적(黃巾賊)의 난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중국역사를 살펴보면 왕조가 교체될 따마다 농민봉기가 있었다. 그 중에는 성공한 봉기도 있었고 실패한 것도 있기 마련이다. 봉기가 성공하면 혁명이요, 실패하면 역모다. 또 봉기를 이끈 지도자들은 성공하면 영웅이요, 실패하면 역적이다. 또한 성공하면 봉기라 부르고 실패하면 ‘난(亂)’이다. 불순한 동기와 목적으로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게 했다는 뜻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후한 말기에 있었던 황건적의 난이다. 황건적의 난은 후한 말 여러 전란 중에 가장 큰 전란이었다. 30만의 대군에 대륙의 반을 휩쓸었으니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한정권(漢政權)이 매우 위태로울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은 왜 목숨 걸고 난을 일으켰을까? 앞서 후한 말기 환관들이 천하를 호령했다는 당시 상황을 언급하긴 했는데 여기서 그들의 만행이 어느 정도였나는 데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영제 때 환관 중 최대 실세인 장양이란 자가 있었다. 이 자가 영제의 신임을 어느 정도 받고 있었느냐면 황제가 일개 환관을 아버지라 불렀다. “황제 폐하, 나라 곳곳에 흉흉한 얘기들로 가득 차 뒤숭숭하기 그지없습니다.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다는 기이한 현상까지 생겨나서 이런 불길한 일들로 백성들이 불안에 떨고 있어 민심이 말이 아니옵니다.” 상소문을 한 보따리 안고 황제를 알현한 관리의 말이다. “아니 별 일 다 보겠네.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든 수탉이 암탉으로 변하든 그게 짐과 무슨 상관이더냐. 그렇지 않습니까, 아버지?” 영제는 천하의 흉흉한 민심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황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환관 탓이었다. “네, 황제 폐하, 위대하신 하늘의 아들이신 천자 폐하께서 들을 얘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황제가 다른 일정이 있다면서 자리를 뜨려하자 우직하고 충성스런 관리가 죽을 각오로 머리를 바닥에 박으며 또 한 마디 간언했다. “하늘의 아들이시라면 제발 이 나라를 돌봐 주소서! 폐하의 아버지는 저 간사한 환관 놈이 아니라 하늘이시옵니다! 하늘이 땅을 굽어 살피듯 천자께서 백성들을 굽어 살피는 것이 순리이지 아니옵니까? 가난과 수탈에 허덕이는 이 나라가 보이지 않습니까? 제발 저 요사한 환관들을 멀리 하시고 들어야 할 것을 똑 바로 들어주시옵소서.” 곁에서 시무룩하게 듣고 있던 환관 장양이 사악한 맘의 결정을 내린다. “황제 폐하, 또 다른 역적의 무리일 뿐입니다. 저들은 폐하가 행복한 것을 눈 뜨고 보질 못합니다. 처벌하시지요.” “아버지께서 알아서 하세요.” 충성스런 관리는 곧 끌려 나가 참수 당했다. 당시 장양은 천자를 끼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의 집 앞에는 날마다 뇌물을 싣고 온 가마들이 줄지어 있었고 가마가 없는 자들은 뇌물이 가득 든 보자기 꾸러미를 들고 찾아왔다. 뇌물을 바치는 목적은 관직을 사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뇌물의 값어치에 따라 관직 등급이 달랐다. 심지어 관직을 외상으로 파는 일까지 있었다. 어느 한 번 가산을 몽땅 털어 갖고 온 한 젊은이의 뇌물이 눈에 차지 않자 장양이 잔머리를 굴린다. “내가 자네 관상이 마음에 들어서 말이야. 정말 아무에게나 주지 않는 기회이지만 하나 방법을 마련해 주겠네. 외상으로 관직을 사게. 물론 갚을 때는 원래 값보다 두 배로 갚아야 하지만 걱정할 필요 전혀 없어. 그 정도는 백성들에게서 충분히 빨아낼 수 있네. 어때 할 수 있겠나? 낙양에 근사한 자리 하나 줌세.” 변변치 않는 뇌물을 들고 온 젊은이는 지옥에서 천당에 옮겨진 듯 갑자기 세상이 훤히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매관매직이라는 비리를 해 먹다 못해 싹수가 보이는 젊은이에게 외상으로 관직을 팔아먹는 일까지 있었으니 그들의 부정부패는 실로 가지가지였다. 후한 말기는 장양을 비롯한 환관들의 전성기이자 전횡기였다. 환관들은 일족이나 양자를 관리로 중용하고 관료나 호족과 결탁하여 중앙이나 지방의 관계에 세력을 확장함으로써 정권을 독점했다. 그들은 뇌물을 받고 부정한 선거로 관리를 등용하였으며 백성들에게는 혹독한 가렴주구로 일관하여 호화 방탕한 생활을 일삼게 되니, 부정과 부패가 사회에 만연했다. 이것이 결국 황건적의 난을 불러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장각(張角)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관직 등극에 실패한 그는 매일 산에 올라 약초를 캐는 것으로 세월을 죽이고 있었다(요즘 대한민국 역사 강의자로 가장 ‘주가’가 높은 설민석 선생은 자신이 지은 <삼국지>에서 ‘장각은 과거시험에 실패한 선비출신’이라고 했는데 당시는 과거시험이 없었고 관직은 효와 예를 바탕으로 하는 윤리도덕을 갖춘 선비들이 천거(薦擧)에 의해 등용되는 것이 제도였다. 환관들이 이 제도를 무시하고 매관매직했으며 진짜 과거시험은 수나라 때 수 문제에 의해 창설된 관리 선발 제도였다). 장각은 어느 날 산에서 남화노선이라는 산신령을 만난다. 산신령은 그에게 책 한 권을 준다. “이 책으로 도술과 신통력을 익혀 좋은 곳에 쓰게나. 만약 나쁜 쪽으로 쓴다면 세상이 뒤집어질 것이니 명심하오.” 책 제목은 ‘태평요술’이다. 장각은 태평요술을 익혀 바람과 무술을 관장하는 도력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낭야(산동성)의 우길(于吉)이 창시한 것을 이어받아 부수주설(符水呪說)로 질병치료를 행하여 민심을 얻었다. 장각은 <대현량사(大賢良師)>라고 자칭하고 병자에게 죄의 참회를 구하고, 돈이나 영수를 마시게 하고 주문을 외워서 신의 용서를 청하는, 그런 방법으로 포교를 했는데 십 수 년 사이, 신자는 중국 동반부의 넓은 지역에 걸쳐서 수십만 명에 이르고, 36의 <방(方)>이라고 하는 집단으로 조직되었다. 대방(大方)은 1만여 명, 소방,(小方)은 6000~7000명인 이 조직을 만들었다. 장각이 만든 이 조직을 태평도라 불렀다. 장각은 어떻게 짧은 시간 동안 30여 만이 되는 신도를 모을 수 있었을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환관의 천하가 된 조정은 백성들의 삶을 살피지 않아 그들은 정권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태평도를 유일한 희망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태평도는 말 그대로 세상을 균등하고 평화롭게 한다는 뜻이므로 이것이야말로 백성들이 원하는 바였기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 둘째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궁핍한 백성은 주머니 사정 때문에 병이 나도 병원을 찾지 못하고 민간요법에 의한 치료가 매력적이어서 이에 몰리기 마련이다. 태평도가 바로 이 역할을 했다. 같은 시기 서방의 파촉 및 한중 지역에서 발전한 오두미도(五斗米道)가 삽시간에 들불처럼 번져 세력을 확대해가고 있었는데 좌절과 실의에 빠진 농민들 사이에서 태평도(太平道)와 오두미도의 광신도가 되었다. 신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정치적인 욕심이 생겨난 장각은 184년에 황건적(黃巾賊)의 난을 일으켰다. 장각이 이끈 이 태평도의 각 지부가 군사조직으로 전환되어 일어난 대규모 농민봉기이다. 중국의 전통적 오행설에 의하면 불에서 흙이 생성된다. 이들은 화덕(火德)에 해당하는 한나라는 곧 몰락하고 이어서 토덕(土德)에 해당하는 황건의 세상이 다가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머리에 새 세상을 상징하는 황색의 띠를 동여매었다. 치밀한 사전계획에 의해 한꺼번에 36만이 봉기한 이 전대미문의 항쟁은 들불처럼 광대한 지역에 번져나갔다. 장각은 천공(天公)장군이라고 하고, 아우인 지공(地公)장군 장보, 인공장군 장양과 함께 반란의 지도자가 되었다. 황건군은 그해 가을 주모자 장각이 죽고, 동생 장량, 장보 또한 전사하는 등 유능한 지도자를 잃고 주력군이 쇠미해졌으나, 각지에서 약 30년간 끈질긴 항쟁을 벌였다. 대규모 농민봉기에 봉착한 지배층은 즉시 권력투쟁을 중지하고 당고를 해제하는 등 호족세력을 무마하여 항쟁의 진압에 안간 힘을 썼으나, 유명무실한 왕조체제를 유지할 뿐이었다. 목적이 좋다한들 결과가 좋다는 법은 없다. 장각이 이끈 태평도, 정부 입장에서 말하는 황건적의 난은 1851년 홍수전이 이끈 태평천국운동처럼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농지의 균등 분배, 남녀평등, 사회 악습의 철폐 등 구호를 내세운 태평천국운동은 초기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얻어 성세호대 하였다. 남경에 정부를 세운 이후 승리에 도취되어 기강이 해이해졌고 따라서 금욕정신을 제창하던 홍수전은 황제로 등극하고 전통왕조와 다를 바 없는 정치를 펼치려 하였고 그를 따르던 무리는 백성의 지지를 받고 나서 돌아서서 백성을 수탈하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14년 세월을 가다보니 중도에 초심을 잃은 것이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장각의 태평도도 홍수전의 태평천국처럼 출발은 좋았으나 30년이나 가는 도중에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나쁜 조직으로 변질되었고 내부 조직이 권력다툼으로 와해되어 결국 실패하게 된다. 이것이 태평도의 실패에 있어서 주관적인 원인이라면 외부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아 와해를 앞당기게 된다. 외부세력이란 진압군이다. 옛 유비의 스승이었던 노식과 황보숭, 주준 등 3명의 장수가 황건적과의 전투 부대로 편성되고 조조도 기도위에 임명되어 황건적 토벌에 나선다. 한편 강동의 손견도 하비에서 부하 황개, 한당, 정보, 조무와 함께 15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참여한다. 그리고 유주의 탁현에서는 유비가 장비, 관우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수백 명의 장정들을 모집했는데 모집된 용사 500명을 이끌고 황건적 토벌에 나선다. <삼국지>는 후한 말기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서술하고 나서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가 도원결의를 맺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이들은 황건적 난에 맞서 싸우려는 결의를 다지는 것이다. 황건적의 난은 진압되고 만다. 하지만 그 근간인 태평도는 오두미도와 함께 도교 형성의 토대가 된다. 무슨 말이냐면 본래 공자의 유학이 한 무제 때 동중서에 의해 통치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유교로 되었고 노자의 도학은 이렇게 후한 말기에 이르러 태평도와 오두미도에 의해 도교로 변화되어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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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0-08-16
  • [연재] 진의(秦怡)-눈물겨운 김염(金焰)과의 결혼생활③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진의와 김염이 결혼하자 모든 친구들이 진의를 대신하여 기뻐해 주었고 진의 또한 이전 혼인의 음영에서 벗어나 진정한 남자다운 남자를 만났다고 내심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김염의 나쁜 습관은 결혼 첫 날부터 드러났다. 결혼식 날 김염은 입이 비뚤어지도록 술을 마셨고 흐트러지게 만취상태가 되었으며 집안 바닥의 여기저기에 토해놓았다. 이러자 진의는 만취한 김염을 달래어 침대에 눕게 하는 한편 난장판이 된 방안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뺐다. 아니 이보다는 심리상의 불안이었다. 전 남편 진천국이 주정뱅이더니 김염도 같은 <술 귀신>이 아닐까? 그녀는 김염만은 진천국 같은 남자가 아니기를 맘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비록 마음속으로는 불안했지만 필경은 신혼이라 진의는 이러한 불안은 피면할 수 없으며 앞으로의 결혼생활은 보다 많은 아름다운 여정이 있을 것이라고 희망했다. 그런데 결혼 후 김염과 같은 방안에서 생활하면서 시간이 길어질수록 진의의 실망은 점점 커가기만 했다. 왜냐하면 김염은 거의 매일 밤마다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는 날이 밝을 녘에야 집으로 돌아 오군 했으며 또한 그럴 때마다 인사불성이 되군 했다. 진천국보다 더 심했지 조금도 나은 점이 없었다. 진의는 어릴 적부터 대 봉건적인 가정에서 자랐기에 여자로서의 어느 정도 인내심이 있었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묵묵히 모든 것을 참으면서 이한 가정을 잘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아울러 자녀 1남 1녀를 낳기도 했다. 한편 김염은 아주 출중한 인재로서 한시기 전체 상해탄을 휩쓸었던 영화황제이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만 해도 술 마시기를 즐기는 것 외 김염은 다른 흠집이 크게 없었으며 진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나이인 것만은 분명했다. 적어도 자기의 자식을 남한테 주려고 한 진천국보다는 인격상 고상하다고 점찍을 수 있었다. 또한 진의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남자의 스타일은 진천국보다는 김염같은 어딘가 고집은 세지만 떳떳한 그런 사나이 스타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의는 가정과 사업을 따로 생각하는 여인이었다. 결혼생활이 그닥 이상적이 되지 못하자 그녀는 사업에 일심의 정력을 몰부었으며 해방 후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을 보면 그녀의 출중한 연기력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었다. 진의는 1961년 중국의 <22대 영화스타> 평의에서 제12위로 입지를 굳혔으며 또한 그 때 그녀의 나이는 39세로 더욱 휘황한 앞날이 기다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당시 이 50살을 넘긴 김염은 여전히 낡은 시대의 생활방식을 고집, 술을 마시고 집에서 꽃을 가꾸고 강아지를 키우는 등으로 남들이 보는 시선이 그닥 곱지를 아니했다. 그리고 가끔씩 성격이 조폭하여 남한테 미움을 사기도 했으며 점차 그 누구도 그와 합작촬영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진의는 자주 김염한테 그런 자본주의 시대식 생활방식을 버리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김염은 외부로부터 오는 시선 때문에 자기의 생활방식을 고치려고는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당시 사회의 환경에서 김염의 이런 아집은 자아고립을 자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적당히 어울릴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렇게 환경에 어울리지 못한 김염은 자연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렇게 되니 그의 인생은 피곤했으며 한편 김염 또한 자신의 인생에 위안이 될 수 있는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 돌파구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바로 이런 시기에 김염의 인생에는 그의 본처 왕인미(王人美)가 다시 뛰어들었던 것이다. 거기에서 김염이 왕인미를 불러들였느냐 아니면 왕인미가 김염을 유혹했느냐 하는 것은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 진의는 사업이 한창 분망한 시기라 늘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촬영을 하였기에 부부 사이에 교류하는 시간이 갈수록 적을 수밖에 없었으며 남편 김염의 신변에서 일어난 변화에 대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는 터였다. 그러다가 타인의 입을 통해 김염의 탈선행위를 알게 되었을 때 진의가 받은 충격은 클 수밖에 없었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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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0-08-15
  • '삼국지' 재해석③ 환관과 선비집단의 싸움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앞서 2부 말미에 삼국시대가 열리기 전 전란이 당시 시대배경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당시 전란은 모두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크게 나누면 모두 네 가지 전란이 있었다. 환관과 외척의 싸움, 환관과 선비집단의 싸움, 황건적의 난, 반동탁의 난이다. 앞부분에서 이미 환관과 외척의 싸움을 자세하게 다뤘기 때문에 본문에서는 주로 환관과 선비집단의 싸움을 다루려 한다. 선진시대(先秦時代)의 관료집단은 두 부류였다. 한 부류는 무관(巫官)이요, 다른 한 부류는 사관(史官)이다. 독자들은 무속인, 무속신앙이란 말을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도대체 뭔 뜻일까? 무(巫)란 글자의 뜻은 위 가로는 하늘을 뜻하고 아래 가로는 땅이며 내리 줄은 하늘과 땅을 만나 교감을 이뤄내는 것인데 누가 이 역할을 담당하나? 바로 내리 줄 양 옆에 있는 두 사람이다. 뭘 어떻게 역할을 수행하나? 노래와 춤을 통해서, 즉 가무강신(歌舞降神)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민속종목에 그네뛰기가 있는데 이 그네뛰기 유래를 아는가? 농경사회에서 강수의 양에 따라 풍년과 흉년이 판가름 난다. 오월단오가 되면 파종이 끝나고 천신에게 제를 올리는 행사가 있었다. 이 행사는 거국적인 이벤트였다. 진수의 <삼국지> 고구려 편에 의하면 “매월 오월과 시월이면 나라에서 군데군데 크게 모여 연일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춘다(國中大會, 連日飮酒歌舞). 남녀 할 것 없이 손에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머리를 땅에 향했다가 하늘을 쳐다보면서 발로 땅을 힘껏 밟는다.” 이 기사에서 우리는 우리 민족이 딴따라민족이 된지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적어도 2천년의 역사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건 그렇고 오월단오에 처녀가 그네 뛰는 것은 여자는 음이고 천신은 양이며 음의 대표자 처녀가 하늘 공종에 치솟아 올라 양신과 결합하면 비를 내를 수 있다는 민속적인 신앙행위였다. 방울을 울리는 것은 처녀가 천신과 교감했다는 것을 대지에 알리는 신호이다. 이 때 여자는 시집갔거나 나이 지긋한 늙은 여인이면 안 된다. 반드시 음기가 왕성한 낭랑 처녀여야 한다. 조선시대까지 기우제 때 거국적으로 300여 명의 무녀(巫女)가 동원되어 속옷을 벗은 채 치마를 벌리고 앞뒤로 가로세로다리를 들었다 놓았다하면서 바람을 일으키는 춤을 추었다. 무녀들의 음기발산을 통해 양신인 천신이 교감되어 비를 내려준다는 것이다. ‘바람피운다.’는 우리말의 유래.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련다. 이런 행사를 관장하는 관리가 천관(天官)이며 <주례>에 의하면 천관은 힘이 센 관직이었다. 천관이 바로 무관이며 무관은 주로 제사를 관장하는 관직이었으며 당시로서는 제사행사가 으뜸의 행사였기 때문에 왕이 제사장을 겸하는 제정일치 시대였다. 이 제사장인 왕을 보좌하는 관료들 다수가 무관(巫官)이며 무관은 당시 정치무대에서 실세였다. 상나라 때까지 귀신의 일이 사람의 일보다 더 중요해서 모든 일에 길흉화복을 알아보는 점을 쳤으니 무관이 얼마나 굉장한 집단이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주나라에 이르러 귀신의 일보다 사람의 일이 더 주목받기 시작했다. 즉 귀신의 중심문화에서 인간의 중심문화로 전이되는 과정이었다. 요즘 말하는 ‘인문학’은 여러 가지 세상만사가 내포되어 있으나 실제로 인문학의 뿌리는 여기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공자의 어록 중에 이런 말이 있다. “귀신을 경하되 멀리하라(敬鬼神, 而遠之).” 뭘 뜻하는가? 귀신중심시대에서 인간중심사회를 구축하려는 사상과 이념이 담긴 말이었다. 당시 공자 같은 선비들(그의 500년 선배인 주공이 물론 인문학의 창시를 열었던 것), 각 학파들의 논쟁을 통해 확실히 인간중심사회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그 증거 중의 하나가 바로 관직 중에 사관(史官)이란 관직이 주목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공자보다 더 명성이 높았던 당시 최고 엘리트였던 노자 선생이 바로 주주사(周柱史)였다. 지금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중앙도서관의 관장을 맡고 있었는데 주나라에서 기둥역할 하는 사람의 일을 관리하고 기록하는 높은 벼슬자리였다. 잠깐! 사관(史官)이라면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을 떠올리면서 역사책이나 쓰는 별 보잘 것 없는 관직이 아니냐고 생각하기 일쑤인데 노자가 맡은 사관(史官)이란 관직은 역사서를 쓰는 것이 업무인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기록하고 관장하는 관직이었다. 갑골문 학자들의 해석에 의하면 일 사(事)와 역사를 뜻하는 사(史)는 같은 글자에서 분리된 것이라고 한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천하를 제패하고 겸병 전쟁을 벌임에 있어서 선비들이 대거 등용되어 각국의 왕의 책사를 맡았다. 공자님도 무려 14년 동안이나 어디 마땅한 감투가 없을까 하면서 여기저기 머리를 기웃거렸던 것이다. 장자는 머리 쓰고 사람과 사람이 아귀다툼으로 부대끼는 것이 싫어 관직을 주어도 팽개치고 거지 삶을 살았던데 비해 가장 휘황찬란하게 자신의 뜻을 펼친 선비는 바로 상앙이었다. 위(魏)나라 출신이었던 상앙이 자신의 나라에서는 뜻을 펼치지 못하자 진(秦)나라에 가서 꿈을 펼쳤다. 물론 마지막 인생길은 참혹했지만 이 부분은 논외로 하고 그의 개혁업적 가운데 필자가 가장 눈길이 가는 것은 관료세습제를 폐지하고 군공에 따라 사회기여도에 따라 간부임명제를 실시한 것이다. 이는 중국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개혁에 꼽히는 업적 중 하나이다. 당시 주나라 신분은 천자, 제후, 대부, 사인, 서민 등 다섯 계급이었다. 천자가 전쟁을 일으켜 빼앗은 이민족의 땅과 본래 대대로 내려온 토지소유권을 형제, 친인척, 전공이 있는 자들에게 땅을 나눠주고(分封) 제후를 세워 다스리는(建國) 제도 즉 봉건제에 있어서 천자는 천하의 태평을 도모하고 제후는 절대적 세력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치국에 힘쓰고 그 밑에 대부를 두어 채읍을 다스리는 것을 제가(齊家)라 하였고 대부 밑에 사인(士人)이 있는데 이들 집단은 공부하여 즉 수신(修身)하여 대부를 도와 제가에 힘쓰고 혹자는 대부를 뛰어 넘어 제후의 책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라는 유교이념이 이렇게 유래된 것이다. 혹자는 제가(齊家)란 한 가족의 집식구를 다스리는 것으로 착각하는데 역사에서의 제가는 대부의 채읍을 다스리는 것을 뜻한다. 이렇듯 굳건하던 봉건제 타파에 나선 인물이 바로 상앙이다. 그는 그 막대한 권력을 갖고 있는 대부 집단의 기득권을 빼앗고 공에 따른 간부 임명제를 실시하였으니 당연히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부딪히게 마련이고 종당에 가서 편안한 천수를 누릴 수가 없이 참형을 당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상앙의 군현제의 꿈은 진시황이 계승하여 능력에 따른 간부 임명제가 실시된다. 그런데 시황제의 태산에 올라 천신에게 제사를 올린 것에 입을 나불거렸다는 이유로 선비들이 변을 당하는 이른바 분서갱유 사건이 있었고 이때 선비들이 고전을 천정에 감추고 땅에 파묻으며 음지에서 연명하면서 기회를 노린다. 그 결실은 한나라 무제 때에 이루게 된다. 그냥 하늘에서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동중서(董仲舒)라는 최고 엘리트에 의해 선비들이 출세의 길이 열린다. 동중서는 오늘날의 상식으로 말하자면 능력이 뛰어난 장사꾼이었다. 그는 무제와 다음과 흥정을 건다. 제국이 천년만년 가려면 법가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만약 법가에만 의지한다면 앞선 왕조 진나라의 꼴이 된다는 것이다. 그럼 도가의 이념은 어떨까? 무위자연을 이념으로 소국을 지향하는 도가이념으로 한나라 초기 재미를 쏠쏠하게 보았으나 황제는 힘이 없고 주변 오랑캐는 자꾸 시끄럽게 집작 거려 위협이 되고 있으니 강력한 제국 건설이 급선무라고 황제를 선동한다. 황제는 들어보니 들으면 들을수록 그럴듯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임자.” ‘흠, 드디어 황제께서 내가 던진 낚시에 코가 걸렸군.’ 동중서는 속으로 ‘쾌’자를 불렀다. 동중서의 주장은 이렇다. 유가의 선비들이 입을 나불거려 시끄럽긴 하지만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이란 삼강과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오강으로 강력한 사회질서를 구축한다면 제국이 오래갈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황제는 결국 동중서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따라서 선비들의 출세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군현과 주에 간부를 임명함에 있어서 우수한 인재를 추천하는 ‘천거(薦擧)’제에 의해 선비들이 대거 관직에 등용되어 세상을 주름잡기 시작하였다. 동중서의 덕분에 후한에 이르면 유교가 뿌리를 내려 낙양의 태학 학생은 3만 명에 달했고, 태학의 건물도 여러 번 증축되어 말기에는 24동에 1,850개의 교실을 갖게 되었다. 아마 요즘 지구촌의 지식분야의 최대 상징인 하버드를 훨씬 능가하는 규모였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지방에서도 각각 사숙이 만들어져 이름 있는 학자를 스승으로 하는 동문의 학생들이 배출되었다. 그런데 그놈의 환관들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간부로 등용되고 싶다면 뇌물을 바치라고 노골적으로 대놓고 금품사냥에 혈안이 되어 있어 유교적 의식에 고취되고 정상적인 관리 등용문이 가로 막힌 이들은 반환관 운동에 앞장섰다. 환관파와 유생을 주축으로 하는 반환관파의 대립은 '당고의 금(黨錮之禁, '당고의 옥'이라고도 불림)'으로 불리는 2차례의 대탄압으로 청류 지식인(유생들은 자신을 청류, 환관무리를 탁류로 여겼음)들이 관계에서 일소되었다. 그 후 원소가 환관학살에 적극적이었던 이유가 바로 그 자신이 사족가문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환관은 유생집단을 관직에서 씨를 말릴 정도로 몰아냈으나 결국 사족가문 출신인 원소에 의해 다시 자신들이 씨를 말릴 정도로 학살당했다는 것이 참으로 흥미롭기도 하고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이 당시 시대배경 중 한 축이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8-11
  • 中 해방전쟁 시기 실패한 미국의 대 중국 침투 전략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의 국내 해방전쟁은 중국인민이 부패한 장개석 독재정권을 뒤엎고 자유와 독립해방을 쟁취하는 대 결전이었으며 중국의 두 가지 운명, 두 가지 전도를 가름하는 최후의 대 결전이었다. 이 대 결전 중 중국 국민당정권은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컸으며 미국 또한 국민당 정권에 대한 원조를 대폭 늘이기도 했다. 이렇듯 엄준한 정세에 직면하여 중국공산당은 2차 대전 후의 국내 외 형세를 전면 분석, 미국을 두려워하고 미국을 숭배하는 당과 군대 내의 불안심리를 극복하면서 대 미국 투쟁의 책략에 대해 심중하게 정하였으며 일련의 유력한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미국이 중국 내전에 개입하는 것을 될수록 억제시켰으며 최종 미국이 국민당정권에 실망하여 중국 내전에서 손을 떼도록 하였다. <중간 지대> 형성과 <양대 진영> 이론으로 사상을 통일 냉전초기, 미소가 전시 군사실력 균등의 기초에서 건립한 얄타 체계는 실질상 유럽의 정치판도와 미소의 세력범위를 다시 획분하였다. 당시 소련은 종합실력은 미국보다 한참 뒤 떨어졌기에 극동에서 미국과 타협하여 현 상태를 유지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동시에 스탈린은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을 전승할 수 있겠는가를 의심하면서 장개석이 곧 이겨서 중국을 통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중국인민의 해방전쟁은 바로 이런 국제적 환경 속에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러자 당시 국제형세에 대해 확실한 안광을 가진 모택동은 <중간 지대(中间地带)>와 <양대 진영(两大阵营)>의 이론을 제기, 이것으로 전 당과 전 군의 사상을 통일시켰다. 1946년 8월 6일, 모택동은 미국 기자 안나 루이스 스트롱과의 담화에서 “미국과 소련 사이에는 광활한 지대가 가로막혀 있다. 여기에는 유럽,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허다한 자본주의 국가와 식민지 그리고 반 식민지 국가들이 있다. 가령 미국반동파들이 이런 국가들을 힘으로 굴복시키기 전에는 절대 소련을 진공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했다. 모택동은 이 <중간 지대> 이론으로 반소반공을 외치는 미국의 직접적인 목적은 “반소의 구호 아래에 발광적으로 미국 노동자와 민주인사들을 진압하는 것과 대외확장의 일체 대상국으로 하여금 모두 미국의 부속물로 만드는 것”이라고 폭로하면서 미소 양대 진영 사이에는 상대적으로 독립된 역량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냈던 것이다. 모택동은 <중간 지대> 이론을 제기했을 뿐만 아니라 지어는 <양대 진영> 사이의 평행제약 외교를 신봉, 하지만 미소와 중국공산당과의 관계는 본질적인 구별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소련은 중국공산당 지지자였으나 미국은 도리어 중국혁명운동의 반대자였다. 그리고 중국의 정치형세가 격렬하고도 근본적인 변동이 발생할 시기마다 이런 본질적인 구별은 각 일방의 정치적 연변(演变)의 추향을 결정하군 했다. 미국정부가 장개석 정부를 부축하는 정책을 실행하기에 냉전이 폭발하자 모택동은 미국과 관계개선의 노력을 포기했다. 이렇게 중국공산당은 외교정책을 제정하는 관건적인 단계에 들어 미국은 중국의 내부 사무를 간섭할 시도를 포기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간파, 반드시 <양대 진영의 한쪽에 쏠리는(一边倒)> 외교 총 방침을 실행하기로 했다. <일체 반동파는 모두 종이범>이란 전략 논단으로 공미심리(恐美心理) 극복 항일 전쟁 후기와 항일전쟁 이 금방 끝난 뒤 미국정부의 정책과 행동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판단은 “미국은 유럽에서는 그리스를 놓고 영국과 쟁탈전을 펼칠 것이고 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쟁탈전을 벌일 것”이라는 것이었다. 즉 인민해방군이 남경과 상해와 같은 대 도시를 점령하면 미국은 필연코 간섭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미국의 개입은 결정적인바 다르다면 강경개입인가 아니면 <연한 개입>인가 그리고 그 개입 역도의 크고 작기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미국이 생각하는 2차 대전 결속 후의 세계판도 중 중국은 의연히 민국시기의 지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고자원 유출지구에 농부산품을 공급하는 것으로 공업산품의 시장 및 원자재 생산지로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의 피라미드 중 중국은 반드시 최하층에 위치해 있으면서 미국의 이익에 부합되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공산당의 욕망은 혁명을 통해 제국주의의 동방전선을 무너뜨리고 독립지위를 수립하는 것이고 아울러 자주적으로 현대화건설을 진행하는 것으로 피라미드 최하층 같은 지위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는 미국이 추구하는 전략 목표와 매우 심각하게 모순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미국은 악랄하게 중국공산당의 집정을 반대해 왔으며 더욱이는 공산당을 대표로 하는 민족독립의 추구와 국가발전의 염원까지도 한사코 반대해 왔다. 이는 항일전쟁 시기와 전후 초기의 태세가 이것을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당시, 중국공산당의 전쟁 상대는 몹시 강대했다. 2차 대전 후의 미국은 경제 및 군사 실력이 극도로 증강되었고 과학기술 역량 역시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진정한 세계 제1의 군사강국으로 군림하였다. 하지만 1946년 중국의 전면 내전이 폭발한 후 모택동은 “일체 반동파는 모두 종이범”이란 이론을 제기, 전략상에서 적을 무시하면서 적과 날카롭게 맞서 싸울 것을 전국인민들에게 호소하였다. 미국과 장개석의 압력과 무리한 요구 앞에서 모택동은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물론 우리는 어느 정도 양보하여야 한다. 하지만 주요한 정책은 양보가 아니라 투쟁이다. 만약 우리 당이 상당한 양보를 한다고 할 때 우리는 재차 무리한 압박과 요구와 두 번, 세 번이 되는 투쟁을 해야 하고 결과는 더욱 큰 양보를 해야 할 것이며 만약 견결히 투쟁하는 정신마저 없다면 결과는 곧 더욱 나빠지기 마련이다…” ▲1945년 8월 충칭(重慶)에서 열린 국공담판에서 만난 장개석(가운데)와 모택동(오른쪽). 미국이 중국 내전에 개입한 주요한 수단은 물자원조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통계에 따르면 국공 담판이 진행되던 1946년 상반년만 해도 미국정부가 국민당정부에 제공한 각종 물자는 그 가치가 13.5억 달러에 달했다. 그리고 중국 내 전면 내전이 폭발한 후 미국정부는 또 국민당 군에 131척의 함정을 지원하였으며 일본이 투항한 후부터 1946년까지 미국의 해군과 공군이 내전 전선으로 수송한 국민당 군대는 도합 54만 명에 달했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정부의 통이 큰 부축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정부는 부패했고 국민당 군대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으며 이로 인하여 투르먼 정부의 대 장개석정부 지원은 미국 내 여론의 물매를 맞았다. 한편 인민해방군은 방방곡곡에서 승전의 첩보를 올렸으며 특히 1948년부터 1949년의 5개 월 사이에 인민해방군은 전략적 대 결전을 강행, 연속 요심 전역, 회해 전역과 평진 전역을 펼쳐 5개 월 내 도합 154만 명의 국민당 군을 섬멸하였다. 이렇게 되자 미국정부는 부득불 국민당정부가 군사상에서의 실패가 이미 기정사실로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주중 미국대사 존 레이튼 스튜어트(John Leighton Stuart, 1876-1962)가 1948년 미 국무장관 마셜한테 보낸 전보문에서 “우리는 매우 원하지 않는 이러한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민당 현 정부의 붕괴는 조만간 피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라는 형식으로 반영되었다. 그 뒤 미국정부는 국민당정부에 대한 원조의 수량과 차수를 줄이면서 대 중국 정책을 개변하기 시작했다. 한 방면으로 미국은 여전히 매 주 400만 달러 가치에 달하는 군수품을 국민당정부에 제공하는 한편 다른 한 방면으로는 장개석의 일부 요구에 대해 거절하면서 다른 출로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1949년 1월 2일, 미국정부는 국민당 군대에 실시하던 군사훈련을 정식으로 중단한다고 선포, 동시에 주중 미국 연합 군사고문단 단장 파다비를 귀국시켰으며 1월 27일에는 주중 미국 군사고문단을 전부 철수한다고 선포하기도 했다. 미국정부는 장개석을 두고 더 이상 이상적인 인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미국의 대 중국 이익은 이미 성사보다는 망치는 일이 더 많다고 인정하였다. 그 뒤 미국은 <중도환마(中途换马)>를 목적으로 국민당의 2인자 이종인과 접촉, 최종 장개석을 압박하여 은퇴하게 하고 이종인더러 대권을 잡게 했다. 헌데 유감스러운 것은 미국의 부축 하에 대권을 잡은 이종인이었건만 그 역시 국민당의 독재정치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아울러 장개석 또한 진짜 은퇴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되어 1949년 봄에 북경에서 있는 국공 양당의 평화담판은 철저히 파탄되었다. 이와 더불어 미국은 <중국 내정 개입>의 목적이 실패로 돌아가자 백서를 발표하여 책임을 국민당 정권에 떠밀면서 더 이상 중국 내정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고 표했다. 이렇게 되어 중국공산당은 중국내정에 개입하려는 미국의 전략을 억제시키는 역사적인 승리를 취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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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0-08-10
  • '삼국지' 재해석② 한나라 말기 환관과 외척의 권력 다툼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삼국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선 먼저 한나라 말기 시대배경부터 알아야 한다. 실제로 <삼국지>는 한나라 말기 시대배경을 그리고 있긴 한데 역사지식이 없으면 이해가 어렵다. 그래서 당시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삼국지> 재해석 제2편으로 ‘한나라 말기 환관과 외척의 권력 다툼’을 잡았다. 여느 왕조가 다 그러했듯이 왕조말기에 천하가 대혼란 상태에 빠져 있긴 했으나 한나라 말기 시대배경은 굉장히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중국역사에서 통일제국의 문을 연 것은 진(秦)나라이지만 천년만년 이어가리라던 진 왕조는 15년 만에 홀딱 망해버렸다. 진 제국이 망하고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유방과 항우의 땅 따먹기 게임인 초와 한의 싸움에서 유방이 승자가 되어 한나라를 건립한다. 한나라는 서한과 동한을 전후하여 거의 400년 가까이 수명을 유지한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화폐, 도량형, 차바퀴 등 일련의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15년이란 세월이 너무 촉박하여 완전한 통일은 한나라에 이르러 이뤄졌던 것이다. 중국문자를 한자, 중국말을 한어, 중국 주체민족을 한족이라 부르는 것이 바로 유방이 세운 한나라에서 유래된 것이다. 왕조라는 개념은 왕족혈통의 세습제를 의미한다. 유씨가 나라를 세웠으면 유씨 혈통이 황위(皇位)를 이어받는 것이 바로 세습왕조이다. 그런데 문제가 복잡하다. 황제가 아들이 있는데 너무 어려 황제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더라도 황제로 등극시키는데 아들이 없으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이 경우 붕어한 황제의 친동생을 황위에 앉히느냐, 조카 중 서열을 따져 앉히느냐는 쟁투가 벌어진다. 또는 종실의 번왕(藩王)들 중에서 후계자를 찾기도 하였다. 유씨 가문의 왕조를 이어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후한의 황제 13명 중 10명이 마흔 살도 못 살았고 4명은 아들이 없었다. 또한 제위를 계승할 때 11명이 20살 이하였으며 그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이가 19살의 장제(章帝), 가장 어렸던 이가 100일도 안 된 상제(傷帝)였다. 충제(冲帝)는 겨우 2살, 질제(質帝)는 겨우 8살이었다. 황제가 나이 어려서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면 그 어미인 태후가 섭정한다. 태후가 섭정하게 되면 정권은 자연스레 외척이 잡게 된다. 한 화제(和帝) 때는 두태후(竇太后)가 국정을 맡고 두헌(竇憲)이 정권을 잡았고, 한 안제(安帝) 때는 등태후(鄧太后)가 국정을 맡고 등즐(鄧騭)이 정권을 잡았으며, 북향후(北鄕候) 때는 염태후(閻太后)가 국정을 맡고 염현(閻顯)이 정권을 잡았다. 또 한 환제(桓帝) 때는 양태후(梁太后)가 국정을 맡고 양기(梁冀)가 정권을 잡았고 한 영제 때는 두태후가 국정을 맡고 두무(竇武)가 정권을 잡았으며 소제(少帝) 때는 하태후(何太后)가 국정을 맡고 하진(何進)이 정권을 잡았다. 이렇듯 태후가 여섯 번 국정을 맡고 역시 여섯 번 외척이 정권을 잡았던 것이다. 태후가 섭정하고 외척이 정권을 잡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선 황제가 기분이 나쁘다. 어미와 외삼촌한테 휘둘리다 보니 자신의 의도대로 되는 것이 없게 된다. 이 문제는 황제가 나이를 먹어 성인으로 향해 성장해가면서 더욱 심각해진다. 즉 황제는 자기주장을 세우려는데 어미와 외척이 양보를 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서 권력의 맛이란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다. 이렇게 되면 황제는 어미와 외척을 제거하려 들기 마련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원한 허수아비가 되기 때문이다. 권력 구조에서 세력이 없는 어린 황제는 누구한테 기대야 자신의 야망을 실현할 수 있을까? 그 대상이 바로 환관 무리다. 밤낮으로 황제 곁에 붙어 있는 것은 환관들이이니까 그들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환관의 역사는 지구상 중국만의 특이한 현상이었다. 물론 이웃나라인 조선에도 환관역사가 있긴 하지만 ‘흉내’를 내는데 그칠 뿐 중국처럼 환관이 역사를 바꿀 만큼의 세력으로 역사무대에서 쥐락펴락하지는 못했다. 진 시황 때 환관 조고는 황제가 궁녀들과 운우지정을 나누는 장소에서 한쪽 모퉁이에서 쪽걸상에 앉아 지켜볼 정도로 하루 12시진(지금의 24시간)을 황제에게 붙어 있었다. 황제가 죽자 결국 조고가 천하를 쥐락펴락하였고 심지어 황제의 유서를 조작하여 장자를 밀어내고 둘째 호해(胡亥)를 황위에 앉힐 만큼 세도를 부렸던 것이다. 그 유명한 사슴보고 말이라고 하는 ‘지록위마’ 고사의 주인공이 바로 조고였다. 진나라가 15년 만에 망한 이유 중에 환관 조고의 탓이 크다고 필자는 본다. 당나라가 전성기를 달리던 때 당 현종은 양귀비한테 빠져 정사를 뒷전으로 하고 환관 고력사(高力士)가 황제의 옥쇄를 쥐고 국정을 맡아보기까지 했다. 명나라 때는 10만의 환관도 모자라 조선에서 빌려 갔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환관은 생리상 불구로 남자의 구실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권력과 재산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여 왔고 눈에 밟히는 가족(처자)이 없기 때문에 권력다툼에서 마음이 독하다는 속설이 있다. 어찌되었든 환관들은 황제의 신변에 늘 머물고 있기 때문에 황제의 믿음을 얻고 있었다. 한 순제(順帝) 때 외척 두목인 염현을 환관들이 황제와 논의도 없이 자기네들이 알아서 죽였던 것이다. 한 환제의 어미 양태후는 황제가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독살했다. 뿐만 아니라 황제가 28살이 되도록 국정을 맡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황제는 더는 참을 수 없어 손을 써야 했다. 그런데 외척의 세력이 얼마나 강했던지 황제는 비밀모의를 화장실에서 꾸밀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 비밀모의는 성공했다. 천하를 호령하던 외척 양기 부부는 자살했고 양씨 가문은 전부 참수되어 조리돌림을 당했다. 그리고 양기와 관련 있는 관리 300여 명을 파면하고서야 정권을 바로 잡을 수가 있었다. 2015년 12월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정윤회 문건’ 파동 사건이 있었다. 당시 대통령 주변에서 국정을 농단한 자들을 가리켜 ‘십상시’라는 말이 등장했다. 이 ‘십상시’의 유래가 바로 한나라 영제(靈帝) 때에 환관(宦官) 장양(張讓)·조충(趙忠)·하운(夏惲)·곽승(郭勝)·손장(孫璋)·필남(畢嵐)·율숭(栗嵩)·단규(段珪)·고망(高望)·장공(張恭)·한리(韓悝) 등 10인을 가리키는데 영제는 어린 나이로 황제가 되어 전혀 통치 능력이 없었으므로, ‘십상시’는 영제의 관심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하여 주색에 빠지게끔 만들고, 하진(何進)의 누이를 바친다. 장성한 뒤에도 십상시의 농간에 놀아나 정치를 돌보지 않자,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그 중에서도 장각(張角)이 이끄는 황건적(黃巾賊)의 세력이 가장 컸고 황건적의 난이 평정되자 ‘십상시’는 모두 열후(列侯)에 봉해진다. 십상시가 멋대로 천자의 칙명을 내리자, 하진이 누이의 세력을 빌려 ‘십상시’와 권력을 다투게 되고, 하진이 제후(諸侯)들을 불러 모아 ‘십상시’를 제거하려 하다 오히려 죽임을 당하게 된다. 남을 물에 빠뜨리려다가 자신이 물에 빠진 격이었다. 환관무리와 외척 사이 권력투쟁에 ‘보리알’처럼 끼어든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영제를 지키던 근위군의 두 번째 인물인 원소이다. “장군이 천하를 위해 그 화근을 제거하신다면 틀림없이 길이 이름을 남길 겁니다.” 원소가 환관을 모조리 죽이라고 하진을 선동한 말이다. 그러나 하진은 망설였다. 이유가 있었다. 원래 돼지백정이었던 하진은 누이동생이 황후가 되는 바람에 대장군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 하진이 환관무리를 몰살할 배포도 그럴만한 간도 크지 못했다. 하진의 누이동생 하태후도 환관을 죽일 마음이 없었다. 그 이유는 환관들한테 빚진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그녀가 유협의 생모 왕미인을 독살했을 때 환관들이 황제에게 사정해 겨우 재난을 모면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항상 마음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하태후는 이렇게 말했다. “환관이 황궁을 관리하는 것은 전래의 법이자 제도인데 어떻게 바꾸겠습니까? 하물며 선제가 막 붕어하셔서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못했는데 내가 어떻게 노골적으로 사대부의 편에 서겠습니까?” 태후가 허락하지 않자 하진은 더욱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 살벌한 권력다툼에서 과감히 결단을 내리지 못한 하진은 결국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진의 죽음은 일개 대장군의 개인의 목숨이 아니라 사대부 집단과 군벌들의 분노를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하진이 피살된 후 혼란에 빠진 낙양성에서 하씨와 원씨 두 가문이 각기 군사를 일으켰는데 원소가 더 적극적이었다. 군대를 이끌고 성 안에서 환관들을 색출해 죽였다. 수염 안 난 남자만 보면 칼을 휘두르는 바람에 많은 젊은이가 부득이하게 바지를 벗어 보여야 했다. 마치 나치 독일에서 유태인과 비유태인을 가리는 방법인 ‘바지 벗기 증명’과 비슷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환관 중에도 선행을 베푼 환관들도 있었고 기타 좋은 일을 남긴 환관도 있었건만 물불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학살하여 죽은 자가 모두 2000여 명에 달했다. 환관도 죽고 외척도 죽었다. 이 두 집단의 다툼은 장장 90여 년간 벌어졌다. 매번 외척의 패배로 투쟁이 끝났지만 이번에는 양쪽 다 파멸되었다. 문제는 어린 황제였다. 외척도 환관도 모두 죽었으니 누구에게 기대야 하나? 천하지존이었던 대제국의 천자가 졸지에 몸도 의탁할 곳 없는 구차한 ‘난민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때 원소의 부름을 받고 성으로 향해 진군하던 서량(西涼)의 호족 동탁(董卓)이 칠흑 같은 야밤에 황하의 강 언덕에서 우연하게 피난길에서 방황하던 황제 변(辯)을 발견한다. 이 발견이 동탁에게는 로또를 맞은 셈이었다. 하늘이 준 기회를 동탁이 놓칠 리가 없었다. 그는 재빨리 황제를 모시고 입성하여 궁정을 장악하고 횡포를 부리게 된다. 이때부터 천하는 대혼란에 빠지게 되고 지방 호족과 권력의 제3의 세력인 사족(士族) 집단 및 군벌들의 군웅할거의 대전란이 시작된다. 여기까지가 한 나라 말기 시대배경이고 삼국시대가 열리는 서막을 알리는 ‘종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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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08
  • [연재] 진의(秦怡)-눈물겨운 김염(金焰)과의 결혼생활②
    ▲진의와 유명 영화배우 김염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이혼 후 진의는 다시는 결혼하지 않고 모든 정력을 쏟겠노라고 맹세했다. 하지만 맹세는 어디까지나 맹세에 그쳤고 실행은 아니었다. 그리고 진의의 그러한 맹세는 조선인 남자 김염(金焰)의 등장으로 크게 흔들렸다. 김염(원명: 김덕린) ㅡ 1910년 조선 서울에서 태어난 김염은 1912년 한의사이며 독립운동가인 부친한테 지명 수배령이 떨어지자 가족을 따라 중국 흑룡강성 치치할시에 이주, 1919년 부친이 사망되자 상해에 있는 고모한테로 가서 의탁했다. 그 뒤 고모가 천진으로 이주하자 김염은 천진 남개 중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혁명사상을 접수하게 되었고 남개 중학교를 졸업한 후엔 홀로 배에 올라 다시 상해로 향발, 상해에서 그는 소설도 써보고 영화회사의 잡부로 일하기도 하면서 유랑걸식 생활을 하다가 1934년 영화계에 입문했다. 영화 <대로(大路)>에 출연하면서 자기의 예술적 재능을 과시했으며 뒤이어 영화 <야초한화(野草闲花)>, <신도화선(新桃花扇)>, <들장미(野玫瑰)>와 <장지능운(壮志凌云)> 등 수많은 영화의 주인공으로 출연하면서 1930연대부터 상해의 <영화황제>로 입지를 굳혔던 김염이었다. … 이러한 김염이었으니 진의한테 있어서 우상이나 다름이 없었으며 그녀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그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기실 진의가 김염을 알게 된 것은 1941년 김염의 생일연회에서였다. 당시 진의한테 있어서 김염은 우상같은 인물이었으나 둘 다 가정이 있는 상황이어서 진의는 김염에 대해 별다른 감정같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일본이 패망하고 김염과 진의가 선후로 상해로 다시 왔을 때는 이미 둘 다 가정이 없는 상황이었다.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는 이런 짤막한 스토리도 있었다. 당시 김염과 진의는 영화 <망망한 대해(海茫茫)>를 함께 촬영하면서 함께 있을 기회가 많았다. 그리고 홀아비로 된 김염은 자주 진의 집에 가서 진의의 어머니와 언니 등과 함께 마작도 두고 한담도 하고 음식도 얻어 먹 군 했다. 그럴 때마다 진의보다도 진의 어머니가 김염을 더 반겨 맞 군 했으며 맛나는 것을 감췄다가는 김염이 올 때마다 내놓군 했다. 그러고는 김염의 눈치를 보아가면서 “내 딸이 자네를 좋아하는 것 같아. 자네 생각은 어때?”라고 하면서 김염의 속마음을 떠보기도 했다. 이러자 진의는 “엄마, 난 결혼하지 않을 거야”라고 하군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진의는 혼자서 전 가정의 11명 식구들의 호구를 책임져야 했다. 그러니 결혼보다는 일심전력으로 영화나 희곡에 출연하여 돈을 버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의 역시 여인이었으며 더군다나 사랑을 알고 사랑을 갈망하는 젊은 여인이었다. 거기에 김염같은 대 스타가 나타났으니 흔들리고 설레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기, 진의는 홍콩에 가서 자주 연예활동을 하군 했다. 그러면 홍콩의 거리에는 김염도 나타 나군 했다. 하긴 김염의 영화계 동료들이 홍콩에 많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김염의 진정한 홍콩행 목적은 진의와 함께 있고 싶어한다는 것을 그의 동료들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김염의 옛 동료 오조광(吴祖光)이 불쑥 진의 앞에 나타나더니 “당신들은 왜 아직도 결혼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 뒤부터 오조광은 더욱 열성스레 앞뒤를 뛰어다니며 동료들을 선동, 나중에는 문예계의 거장 곽말약까지 설복하여 두 사람 결혼의 증명인으로 나서게 했다. 이렇게 1947년 25세의 진의와 37세의 김염은 결혼에 올인하였고 곽말약 선생을 청해 결혼 증명인을 맡게 했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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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0-08-07
  • 용이 살던 마을 와룡동
    ●김호림 창동학교는 8.15광복을 맞은 후 다시 와룡동에 부활한다. 이때 마을 사람들은 서쪽 산비탈의 옛 터를 버리고 마을 북쪽의 평지에 따로 학교 건물을 세웠다. 김동욱옹은 어릴 때 새로 지은 이 창동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그때 그가 학교를 내놓고 또 과외처럼 즐겨 다니던 곳이 있었다. 그와 또래들은 예배를 보는 날이면 학교 북쪽에 있는 교회당으로 반달음을 놓았다. “전 씨 성의 집사가 우리 아이들을 모여 놓고 재미있는 옛말을 들려줬지요.” 교회의 전 집사는 조선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으로 일본 전함을 물리치던 이야기 등을 구수하게 풀어놓았다고 한다. 서적이 금처럼 귀하고 별다른 문화생활이 없었던 시골에서 정말 하늘에서 들려오는 복음과 같았다. 조선인 이민들의 최초의 민족계몽운동과 반일운동은 이처럼 신앙공동체를 통해 구현되였던 것이다. 간도에서 선교활동은 조선인 간민들의 대량 이주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캐나다 장로회는 북간도에 선교사와 전도자를 파송, 1906년 광제암교회를 설립하였다. 뒤미처 용정의 기독교인이 간도의 조선인 전도를 위해 멀리 함경도 원산까지 가 기독교 서적을 구입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도가 본격 시작되었다고 한다. 1907년 남감리회는 이화춘과 이응현, 캐나다 장로회는 김문삼을 간도에 파송한다. 이화춘은 와룡동교회, 이응현은 모아산 교회를 설립하며 장로회는 용정교회를 설립하였다. 모아산은 와룡동 골짜기에서 바로 정남쪽 방향으로 보이는 둥그런 산이다. 1915년경 간도에 36개 교회가 개척되며 또 교회의 주도로 많은 학교가 세워진다. 간도 지역 최초의 민족운동 단체인 “연변 교민회”(훗날 국민 회로 개칭)는 기독 인사들에 의해 세워졌다. 국민회를 통한 기독인들의 반일운동은 군자금 모금, 독립군 양성 등으로 이어졌다. 바로 창동 학교에 국민회의 외곽단체인 간도 대한 청년회 본부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학교의 많은 교원과 학생, 졸업생들은 철혈 광복단에 참가하여 희생적으로 싸웠다. 1920년 용정 선바위 부근에서 조선은행권 15만 원을 탈취한 “15만 원 탈취사건”의 골간 임국정, 최봉석, 한상호 등 반일 지사들은 모두 와룡동 출신이다. 와룡동에서 교세는 연변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8.15광복 후 내리막길을 걸으며 미구에 철거의 파국을 맞는다. 그러나 김신숙(1938년 출생) 노인이 와룡동으로 시집을 오던 1956년에만 해도 와룡동 교회의 건물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때 김신숙 노인은 바로 와룡동 교회의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목사가 그들의 결혼 주례를 선 것은 아니었다. “그때 교회는 이름뿐 이였지요. 벌써 예배를 보지 않고 있었습니다.” 수십평 크기의 교회건물은 사람 하나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김신숙 노인의 시집은 마침 길 건너 바로 서쪽에 있는 이 널찍한 교회당을 예식장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우리 일행이 발길을 멈춘 곳은 와룡동의 제일 북쪽이었다. 거기에는 고층건물의 휴양소가 땅을 박차고 일어서고 있었다. 이 휴양소 앞마당의 동쪽 귀퉁이가 바로 교회당 옛 터였다. 옛 터에는 시공현장의 철근과 나무쪼각따위가 지저분하게 널려있었다. 와룡동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던 와룡동교회는 그렇게 역사의 흔적을 서서히 지워가고 있었다. 지난 세기 80년대까지 민흥촌의 직속 마을이였던 과수마을도 어느덧 집단기억에서 소실되고 있었다. 과수마을은 일명 5대 마을로 서쪽의 고개 너머 산등성이에 있었는데 예전에 동쪽의 와룡동과 짝을 맞춰 와호동(卧虎洞)이라고 불렸다는 속설이 있다. 이쯤 하면 누군가는 대뜸 와룡동과 와호동을 두고 좌청용이요, 우백호요 하면서 풍수설을 들먹거리겠지만 실은 이 지명이 용과 호랑이가 서로 싸운다는 용호상박(龙虎相搏)의 기세를 은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 와룡동 마을에 영웅호걸이 많이 배출되였다는 것이다. 옛날의 샘물은 와룡동의 동쪽 골짜기에서 예나 제나 변함없이 퐁퐁 솟아나고 있었다. 그러나 샘물을 마시던 용은 단지 지명에 화석으로 외롭게 남아있을 뿐이였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8-06
  • [이슈 분석]체육강국 중국, 왜 축구만 약한가?
    ●리병천 올림픽 등 국제체육대회의 모든 종목에서 메달을 석권하고 있는 중국이지만 왜 유독 축구에서만 세계적으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일가? 정말로 팬들의 씁쓸한 우스개처럼 메시가 될 인물이 시골에서 밭을 갈고 있기 때문일가. 중국축구가 아직도 부진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분석해본다. ◆중국, ‘체육강국’으로 우뚝 서다 2008년, 북경올림픽에서 중국은 성공적 올림픽 개최와 세계 최강 미국을 꺾고 종합 1위를 달성하는 등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올림픽 역대 종합순위를 살펴보면 각국의 국력과 세계 질서의 변화가 고스란히 반영되어있다. 1940년대 이전에 프랑스, 영국, 독일이 각각 한차례씩 종합 1위를 차지한 적이 있고 1948년 이후 대회부터는 미국과 소련이 종합 1위를 양분했으며 소련 붕괴 이후 1996년 이후는 미국이 종합 1위를 독차지하고 있다. 메달수가 국력을 직접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2008년 당시 중국은 금메달수에서 51대36으로 미국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종합 1위를 차지했고 종합 1위의 이 막강한 상징성은 중화민족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작동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 차이로 종합 2위를 하면서부터 2008년 북경올림픽에서는 종합 1위를 차지해 이미 세계의 강자가 됐음을 보여줬다. 비록 중국은 2012년 런던올림픽과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는 2, 3위를 기록, 종합 1위는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세계적 체육강국임은 증명됐다. 당대 스포츠에서나 국제질서에서 미국의 독주에 유일하게 도전장을 내고 있는 중국이다. ◆왜 축구에서만 유독 두각을 드러내지 못할가? 지난 7월, 국제축구연맹이 발표한 세계축구 랭킹에서 중국은 세계 76위, 아세아 9위를 기록했다. 일본, 한국, 이란 등 전통 강호들은 물론 카타르, 이라크 등 나라들에도 밀리고 있다. 2022 카타르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에서 중국은 2승, 1무, 1패를 기록, 필리핀과 승점은 7점으로 같지만 골 득실에 앞서 간신히 조 2위를 유지, 수리아(4승, 승점 12점)와는 어느덧 승점 5점 차로 벌어지며 최종예선 진출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지난해 11월 U-19팀은 26년 만에 아시아축구연맹 U-19 챔피언십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근래 중국축구가 각 대회에서 보인 성적은 그야말로 암울, 그 자체이다. 올림픽 등 국제체육대회의 모든 종목에서 메달을 석권하고 있는 중국이지만 왜 유독 축구에서만 지금까지도 제자리 걸음, 아니 후퇴를 하고 있을가? ◆‘한 자녀 정책’의 부작용 중국은 1980년대부터 정책적으로 인구억제를 실시했다. 바로 ‘한 자녀 정책’이다. 축구가 조직력의 스포츠이기 때문에 개인 기량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탁구나 체조 등에서 중국이 세계 최정상을 달리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11명이 하나로 묶여 움직여야 하기에 누구 한명의 기량으로 승부를 뒤집기가 쉽지 않다. 또 80년대 이후 출생한 자녀들에 대해 부모들은 투자는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프로선수가 돼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축구에 대한 인식하에 부모들이 하나밖에 없는 자식에게 축구를 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또 한 자녀 가정이 늘어남에 따라 개인주의 성향이 짙어지게 됐고 축구와 같이 조직력을 요소로 하는 종목에서 약세를 보이고 있다. ◆젊은 선수들의 프로의식 부재 중국 프로축구리그는 자금적인 면으로만 볼 때 세계 5대 리그중 하나라고까지 할 수 있다. 최근 몇년간 거액의 투입을 해오며 외국인 용병들에게 엄청난 돈을 투자해 그 지명도를 높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토종 선수들의 실력은 리그 수준과는 왼전히 동떨어져 있다. 젊은 선수들이 외국 리그에 대한 도전에는 눈을 돌리지 않고 국내에 안주한 것 역시 높은 년봉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굳이 험한 길을 가지 않아도 엄청난 년봉이 보장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중국축구의 자국내 인기와 대우는 좋아졌지만 자국 선수들의 성장에는 오히려 독으로 작용한 측면도 있다. 한국이나 일본이 최근 몇년간 무수한 자국 유망주들을 유럽무대로 진출시켜 급격한 기량 향상을 일궈낸 것과 달리, 중국 선수들의 해외 진출은 무뢰(에스파뇰) 등 일부를 제외하면 극히 드물고 성공 사례도 부족하다. 과거 사우디아라비아나 카타르 같은 부유한 중동팀들이 겪었던 문제처럼 현재의 중국 프로 선수들은 높은 몸값과 스타대우를 받고 있는 자국리그에서의 성공에 안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중국 선수들 특유의 개인주의 성향도 팀플레이와 높은 전술 이해도를 요구하는 현대축구의 기준과 맞지 않는다는 평가이다.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를 개선하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중국축구가 아시아에서조차 경쟁력을 가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런 문제점들을 감지한 중국축구협회는 최근 거품 빼기에 나섰다. 슈퍼리그에 년봉 상한제를 도입해 국내선수 년봉 상한을 1200만 위안으로 규정했다. ◆공격형 용병들 국내선수 발전 공간 점령 근래 중국 프로축구에 세계적인 공격수들이 몰려들면서 국내 공격수들이 설자리가 없게 됐다. 이는 그대로 축구 유망주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최근 슈퍼리그, 갑급리그 각 팀들을 살펴보면 공격수들은 전부 이름값 비싼 용병들을 쓰고 있다. 국가팀 역시 전방에 엘케손 등을 귀화시켰다. 때문에 젊은 유망주들도 공격수보다는 미드필더나 수비수가 되기 위해 훈련한다. 엄청난 재부를 상징하는 프로 무대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공격수보다는 수비수가 가능성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젊은 선수들이 국내에서 공격수로서는 프로 무대의 경쟁을 이겨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헐크, 자하비 등 세계급 용병들보다 잘할 수 없다면 그냥 미드필더나 수비수가 되는 게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다. 세계적인 공격수들이 계속 중국으로 모여들고 있는 상황이 끝나지 않는다면 아마도 중국축구의 공격수 부재는 앞으로도 더 심해질 것이다. 어쩜 메시와 같이 천성적 공격수 자질을 갖춘 국내 유망주가 이미 헐크와 자하비 등 세계급 공격수들 때문에 수비수가 돼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체계적으로 축구팀 만들기 위한 인내심 결핍 세계의 그 어느 프로리그든 경쟁은 치열하다. 하지만 중국리그에서의 경쟁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더 심각하다. 국내 구단들은 감독을 기다려주는 인내심이 없다. 대기업이 축구를 좌지우지하다 보니 인내심이 극히 부족하고 성적에 따라 감독을 갈아치우는 게 전통이다. 이런 상황에서 감독들이 전술실험을 할 수도 없고 새로운 선수에게 기회를 줄 수도 없다. 이름값 비싼 용병들을 최전방에 배치해놓고 그들의 능력을 믿으면서 나머지 선수들은 안정적인 수비를 하는 것 뿐이다. 때문에 국가팀에서도 자유롭게 실험하고 도전하는 분위기가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세계가 공인하는 스포츠 강국이다. 인구 14억의 거대한 인적자원을 배경으로 다양한 스포츠 분야에서 초강세를 보여왔다. 때문에 왜 축구에서 만큼은 ‘중국산’이 전혀 통하지 않는지, 중국축구협회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중국축구는 언젠가는 국력처럼 세계적 최강이 될 것임을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주어진 숙제가 너무도 많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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