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01-27(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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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②
    1927년, 중국과 독일의 접촉을 시작으로 항일전쟁 직전까지 독일은 중국의 최대 협력 파트너였다. 원래 독일 군사고문은 장개석에게 60개의 독일의 기계사단을 통폐합해 내놓아야 했지만 국민정부는 그렇게 많은 돈이 없었고, 또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았기에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전역에 30개의 ‘조정사’만 있었고 독일은 40만 세트의 장비만 쏟아부었다. 이 정예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거의 소진되었다. 최초의 ‘송호회전’, ‘남경보위전’, 화북전장의 ‘흔구회전’, ‘낭자관전투’;등 전투에는 대량의 독일 기계사단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참혹한 대가를 치렀다. 이들 30개의 ‘조정사’ 중 28개는 사단 전체가 마비됐고, 2개 사단만이 격렬한 전투를 피했기에 그 병력과 장비를 보존할 수 있었다. 또 전쟁 때문에 독일의 무기는 제때 수송되지 못했고, 독일군은 장비를 보충받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국산장비를 갖고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게다가 독일은 일본과 동맹을 맺은 탓으로 독일군은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늦추다가 1938년 7월 중국에 대한 지원을 모두 멈추고 중국에서 철수했다. 독일인들은 철수했고, 중국의 항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중국내 전장은 군사 장비의 보충이 시급했고, 장개석은후원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바로 이때 소련이 나타났다. 소련은 국민정부로 하여금 일본군의 진군속도를 저지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장개석과 합작협정을 맺고 중국에 군사물자를 지원했다. 이에 따라 독일기계사와 미국기계사 사이에 소련기계사가 하나 더 생겼다. 소련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민정부가 농수산물과 각종 금속 원자재만 제공하면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10년 만에 중소 협력은 이렇게 성사됐다. 소련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름대로 성의를 갖고 있었고, 탱크와 비행기 같은 중무기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소련 장비로 20개 사단을 무장시켜 독일군 무기사단의 손실로 생긴 공백을 메우려 했다. 이렇게 양 측이 각각 필요한 것을 취해서 교역은 비교적 만족스럽게 진행 됐다. 하지만 소련 기계사의 배치에 있어서 중·소 양측은 이견이 있었다. 소련 측은 모두 소련군 편제대로 새로 편성된 부대에 장비를 배치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몰래 장비를 따로 빼돌려 포병단을 조직했다. 이렇게 10여 개의 포병단위를 만들면서, 미리 약속했던 대로 소련 기계사단에 이를 전달하지 않았다. 한편 소련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물자 수송도 간단해 1차 소련의 기계장비로 4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었으며 이 중 제200사단은 중국 최초의 기계화사단이 됐다. 그리고 후속으로 소련의 기계화 장비도 육속 도착해 장개석은 18개의 소련 기계화사단을 구성해 일본군과 잘 싸울 수 있었다. 이 보배같은 소련 기계화사단들에 대해 장개석은 독일 기계사단들처럼 잔혹한 전장으로 보내져 소모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1941년에는 15개 사단이 각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이 중립조약을 맺은 뒤 중소 관계가 약화되면서 소련의 군사장비는 보충되지 않았고, 소련의 기계화사단 역시 점차 역사적 명사로 되었다. 미국의 원조는 큰 것을 노린 전략적 움직임 실제로 영국은 독일의 지원이 끊긴 뒤에도 잠시나마 중국에 군사물자를 제공했지만 일본의 압력에 원조를 중단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중영 간 원조가 회복됐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이때 이미 해가 기울어 극동에 전념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소련의 장비가 없어지자 미국은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구세주가 됐고 국민당 군은 미 장비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항일전쟁 단계에서 미국이 실제로 충분한 지원을 하지 않은 데는 객관적인 이유도 있고 주관적인 이유도 있다. 한편으로 운남-미얀마 도로가 끊기자 물자 장비는 험준한 항로를 통해서만 수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적었다. 다른 한편으론 아시아 전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영국과 소련에 많은 장비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인은 통이 컸다. 중국의 해방전쟁 시기까지 22개 군 64개 사단이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장개석에게 보내와 국민당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장개석은 미국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공산당에 의해 대만이란 작은 섬으로 쫓겨나 지내다가 일생을 울적하게 마감했다. 중국은 북벌전쟁 때부터 외국의 군사원조를 대대적으로 받으면서 중간에 공급처를 여러 개 바꿨다. 심지어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 등도 중국에 숟가락을 얹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독일·소련·미국이 더 많이 지원했다. 왜 이런 나라들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중국을 지원했을까? 독일의 속셈은 짐작이 가는 대로 장사를 하러 온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금속과 각종 원자재가 중국에 많고 거기에 무기까지 팔아 큰돈을 벌 수 있는 중국을 싫어 할리가 없는 것이다. 소련은 여러 가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일본을 견제하여 극동에서의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 한편, 당시 소련은 넓은 영토가 독일군에 함락되고 원자재가 부족했기에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나라로 중국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국민정부에 원하는 게 없음에도 속내는 더 흉악했다. 미국이 내놓은 ‘임대법’은 파시스트의 침략을 받는 전 세계 국가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앞에서 이런 국가들이 육탄이 되어 주는 것이고 양쪽이 다 소모되면 그 때에 가서 그들이 나서서 수습하여 이들 국가들을 깊이 통제하겠다는 취지가 있었다. 한마디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변화 속에 있고, 친구와 적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판단되며 이익만이 영원한 것이다. 이들 나라가 중국에게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는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도 약육강식의 규칙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다만 실력이 강해야 비로소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경직된 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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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8
  • 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①
    [동포투데이 철민] 1937년 8월 13일, 제2차 상해 보위전이 발발하자, 장치중(張治中) 장군의 국민당 제9집단군이 상해에 진주했다. 당시 장개석은 장치중 장군에게 2개의 독일의 기계화사인 87사단과 88사단을 지원하였다. 이어진 남경 보위전에서도 몇몇 개편 완성된 독일 기계화사가 빛을 발산하면서 중국군의 완강함을 보여주었다. 중국과 독일, 양국은 서로 다른 진영에 있었다. 그런데 왜 장개석은 독일 기계화 부대가 소유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두 나라는 또 어떻게 교역했을까? 그럼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의 타산을 알아본다. 국민당이 독일을 처음 접한 것은 손중산(孫中山) 때였다. 당시 혁명을 위해여 손중산은 도처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나라들에 손을 내밀었다. 당시 독일은 공산주의의 발원지로서 손문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 인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독일은 당시 낙후한 중국을 외면했으며 손문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뒤 비로소 제1차 국공합작과 소련이라는 거물이 등장하면서 손문을 후원하게 되었고, 격렬한 북벌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1924년 손중산이 사망하자 장개석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켜 좌익과 공산당 세력을 소탕함과 아울러 소련과 완전히 단절했다. 당시 중국은 가난했고, 전쟁 때는 어쩔 수 없이 장개석은 또 밖으로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남경정부가 직면한 국제 환경은 매우 험악하고 객관적으로도 중국과 독일은 일련의 교류를 촉진하는 것으로 양국의 교역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해야만 했다. 영국과 프랑스 역시 같은 아시아에서의 이익은 대부분 남아시아와 동남아에 있었으며, 중국에 대한 수요는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을 장개석은 명심해야 했다. 한편 그 시기,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강대해졌고, 동아시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영국·프랑스 식민지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일본을 안정시키고 자신의 식민이익을 지키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의 중국 침략을 방임하면서 묵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으며, 중국을 지원하는 물자의 통로를 차단하고 될수록 일본에 아첨했다. 미국은 당시만 해도 그렇게 강하지 않았으며 유럽은 여전히 세계의 중심이었고, 후발주자인 미국은 앞사람의 눈치를 봐야 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모범을 보였고 다른 나라들도 감히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감히 하지 못하자 장개석의 아첨은 ‘장님’에게 던져지면서 이상적 효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다행히 독일은 그 바닥을 지켰다. 1927년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본전을 모두 잃었고, 자신의 군사력이 각종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등으로 나라 전체가 억눌리자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독일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실력을 키웠다. 그중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는 그 일부였다. 영국과 프랑스 등 나라의 요구대로라면 독일은 국방군을 10만 명으로 줄이고 나머지 독일 병사들은 모두 현지에서 전역해야 하며, 방위산업도 모두 전환하여 더 이상 군사 장비를 생산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장개석이 협력 요청을 하는 순간, 이는 독일의 마음에 와 닿은 거대한 군사기구로선 힘겨운 일이었지만 해 볼만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자 중국과 독일은 군사협력을 시작했다. 독일 측은 군사교관을 파견하고 장개석이 군대를 훈련시켜 많은 병사가 전역한 뒤 독일의 국방력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고 전투력을 유지하도록 도왔다. 또 독일 장비를 대량으로 팔아 물자와 돈을 챙기고 노동자를 단련시켜 생산량을 보장하면서 부수입도 챙겼다. 장개석은 유럽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군사 장비를 대량으로 확보해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독일은 이미 무릎을 꿇고 유럽의 2등 국가가 됐지만 그러나 이것이 바로 장개석이 비로소 가격을 낮추고, 최소의 대가로 최대의 이익을 얻는 방법이 되었으며, 그의 장사는 매우 잘 되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고, 서로에게서 이익을 얻을 수 있고, 거래도 오래갔다. 독일은 1927년부터 수백 명의 군사고문을 파견해 40만 세트의 무기·장비를 지원했고, 중국의 군수공장 설립을 도왔으며 독일 무기상들과 연계해 중국 군사물자의 주요 공급국이 됐다. 중국과의 교역에 신경을 쓰는 독일은 다른 대안이 없으니 성의를 보여야 했다. 이들이 차례로 파견한 군사고문은 선발된 엘리트들로, 전임 두 단장은 중국군 지휘중추와 장교 양성제도를 각각 개량해 보병의 지휘를 원활히 하고 산하 각급 병종도 전장에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했다. 3인 군사고문단의 단장인 세케트 장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진이 독일 ‘10만 국방군’ 개편에 착수한 것으로 군을 줄이고 전투력을 높인 경험이 있다. 이 장군은 확실히 힘이 있었다. 그는 전형적인 독일 군인에 속했다. 국민정부 군대의 각종 폐해에 대해 하나씩 해결책을 제시해 장개석에게 많은 유용한 건의를 가져다주어 진정으로 중국군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세케트 장군의 계획대로라면 국민당은 60개의 ‘조정사’와 60개의 ‘정리사’를 개편하는데, 전자는 정당한 독일군 무기사, 후자는 일부 독일군 무장을 한 부대였다. 다만 당시 국민정부의 부정부패가 횡행하고 독일도 제대로 장비를 팔 수 없어 ‘7.7사변’ 직전까지 장개석의 손에는 3개의 완전체 독일 기계화 사단과 1개의 교도총대, 그리고 공상희의 체제 내에 없는 세경 총단 밖에 없었다. 1935년 세케트 장군이 병으로 사임하자 후임자인 파켄하우젠도 국민정부의 군사산업 발전을 적극 도왔다. 독일인의 도움으로 국민당은 정식으로 승마총, 꽃 기관총, 82박격포 등을 본떠 선택적으로 병기공장을 세워 어느 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고, 상황은 곧 호전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생겼다. 당시 중국은 가난하여 대양과 은화를 국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대외 무역에서 다른 나라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화인 달러와 파운드화는 국민정부 스스로도 부족하고 금은과 은 같은 귀금속은 더더욱 내놓지 못했다. 그럼 중국과 독일 간 군사물자 거래는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 답은 텅스텐(钨矿), 석(锡), 안티몬(锑) 등 세 가지 금속이었다. 이 세 가지 금속은 방산 분야에서 널리 쓰이지만 독일 본토에서 생산되지 않아 99%가 외국산이었다. 히틀러가 집권한 뒤 군비확충에 나서면서 이들 금속의 수요가 크게 늘었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은 관리가 철저해 독일은 원료를 충분히 조달받을 방법이 없었다. 이 세 종류의 금속은 중국에서는 오히려 매우 흔히 볼 수 있었다. 호남, 광동 등지에서는 모두 상응하는 광물 매장량이 채굴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은 솔직히 많이 쓰지 않았고 산업용 원자재를 군사장비와 교환하는 것을 선호했다. 독일은 전쟁에 대비해 대규모로 원료를 비축해야 했고, 중국은 물산이 풍부해 독일의 많은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중국은 금속광산을 제외한 농산물·면화·브루마 등의 물자를 돈처럼 쓸 수 있었고, 독일이 국민정부에 지원을 요청한 유일한 품목이다. 다만 장개석의 무기·장비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고 국제정세 변화, 물자수송의 지연, 영국의 봉쇄 등으로 중·독 양국 간 원자재·무기 교역이 이뤄지지 않자 국민정부가 현금·백은을 들고 독일과의 협력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다음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2-08-20
  • 무인도에 갇인 1남 7녀, 그들의 운명은…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이 이야기는 지난 세기 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초반 사이에 있은 한 조선인 남자가 일본인 여성 7명과 동시에 결혼해 도합 27명의 자녀를 낳은 진실한 이야기다. 사람은 사회에서 생활함에 있어서 당연히 많은 욕구가 있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이성과 생기는 감정적 욕구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감정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할 줄 아는 영장 동물이다. 더군다나 특정된 장소에서는 남녀 사이에 이런 감정이 싹트기 쉽다. 대천세계에서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형형색색의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반려자로부터 선택되고 또한 반려자를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딱히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경우에 따라 인간은 반려자를 선택할 수 없거나 감정적인 욕구가 없는 즉 마음에 들지 않는 이성과 함께 사랑을 나눌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래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 증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군사적 큰 착오로 벌어진 태평양 전쟁 말기 남성 1명과 여성 7명이 태평양 가운데의 트루크 군도에 남겨지면서 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초기까지 이 해괴한 일부다처(一夫多妻)의 이야기가 벌어졌던 것이다. 사람들은 태평양 전쟁이라고 하면 모든 전쟁의 근원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사건이라고 말한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여러모로 미국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요행을 바라고 저울질하면서 미국의 태평양 해군기지를 공격했으며 전쟁 초기에는 연전연승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미군이 일본군 약점을 연속 꿰뚫을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미군은 차츰 전쟁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하나둘씩 빼앗겼던 섬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운데 끼인 일본군 점령 섬들은 고립되어 보급은 전혀 없었으며 어떤 경우엔 단 한 명의 병력 손실도 없이 미군은 이 섬들을 스스로 무너뜨릴 수가 있었다. 당시 트루크 제도에는 일본군 병사와 조선인 부역자 및 일본군 위안부가 주둔해 있던 고립된 섬이었다. 미국이 일본의 공급 사슬을 끊자 섬에 갇혀 있던 이들은 고립되기 마련이었고 시간이 흐르자 구원투수들에게 삶의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본 본토에서 구조자를 섬에 보냈을 때 갇힌 사람들은 한동안 삶의 희망을 본 듯 들뜨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는 아주 짧디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일본 본토에서 보낸 구조선은 섬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구조선박은 섬 기슭에 사람이 보이지 아니 하자 무인도로 여기고는 재빨리 선수를 돌려 트루크 섬을 빠져나가면서 아무도 돌아보는 이가 없었다. 그 후 조선인 부역자 김유길과 일본인 위안부 7명이 “사람을 살려요”라고 외치며 해안으로 달려 내려갔을 때는 배가 이미 멀어져 있었다. 그렇게 희망이 깨지자 일곱 여인은 서로 얼싸안고 펑펑 울면서 땅을 쳤고 김유길도 마찬가지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인들처럼 울고불고 할 수는 없었다. 몹시 절망적이었지만 그는 남자로서 좀 강해야만 했다. 그는 엉겁결에 일본 여인들이 흐느끼는 것을 보고는 그녀들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적당한 어구가 없었다. 말문이 막히자 그는 다가가 그녀들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기만 했다. 울음을 터뜨릴 뿐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이었다. 하지만 울음이 그치고 사위가 잠잠해진 뒤에도 이들의 삶은 계속되었다. 이렇게 이들 일남 칠녀는 섬에서 두 달 넘게 함께 생활했다. 이들은 구조를 기다리지도 못한 채 섬에서 먹을 수 있는 열매와 과일은 거의 다 뒤졌다. 그러다가 다행히 그들이 앞날이 막막할 때 뜻밖으로 담수호를 발견하게 되었다. 삶의 빛 한 가닥 생긴 것이다. 한편 섬에서의 유일한 남자인 김유길은 물고기라도 잡아서 모두가 굶어죽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평일에는 고기잡이 말고도 비교적 건장한 여자 몇 명을 데리고 사냥을 했으며 그리고 그 때면 나머지 몇몇 여자들은 나무를 찾아 불을 피우고 빨래 같은 일을 하면서 제각각 자기의 맡은 바의 일에 충실했다. 처음에 김유길과 그녀들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일상적인 교류는 손짓 혹은 몸짓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김유길은 그녀들한테서 일본어를 배웠고 그 또한 그녀들에게 조선말을 배워주었으며 이렇게 되어 그들은 얼마 안돼 서로 정상적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섬에 갇힌 지 1년이 되는 해 봄의 어느 날, 김유길은 섬에서 일본인들이 흘린 것으로 보이는 벼 종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순간, 김유길의 머릿속에서는 기발한 생각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바로 벼농사를 한번 해보자는 결심으로 마음속으로부터 논을 풀었다. 그 해 그는 여인들을 거느리고 열심히 일하면서 논을 풀었다. 논둑을 만들고 논에 물을 가두고…그리고 벼 모종을 논에 심자 과연 벼가 우썩우썩 벼가 잘 자랐다. 그 뒤 가을이 되자 김유길은 또 여인들과 함께 벼를 베어 거두어 들이고 타작을 했다. 타작이 끝나자 이들은 마침내 첫 햇밥을 먹어볼 수 있게 되었으며 더 이상 끼니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김유길은 점차 모든 여자들의 숭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먹는 문제를 해결하자 김유길은 자연스럽게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연상하게 되었다. 바로 빗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집을 짓는 것. 원래 집짓기 같은 것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기에 김유길은 그 실행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는 여자들을 거느리고 연 며칠 나무를 찍어 와서는 서두르지 않고 하나하나씩 기둥을 세우고 벽을 쌓았으며…마침내 지붕까지 얹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집 모양새를 두루 갖출 수 있었다. 집은 비록 허름하고 그닥 크지도 않았지만 이 외딴 섬에 그들도 비바람을 피할 곳이 드디어 생긴 셈이었다. 여성 그 자체가 워낙 감성적인 동물이기에 어려운 상황에서 자기에게 도움을 주는 남성을 사랑하기가 쉬운 것이다. 섬에 버려진 뒤 여자들은 몹시 절망했지만 당시 유일한 남자인 김유길은 그녀들을 책임지고 그녀들에게 정신적 위로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생존환경까지 해결해줬기에 그럴만도 한 것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김유길이라는 유일한 남자에게 마음을 기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갖가지 애로와 언어의 장벽까지 뚫고 나온 김유길은 일본 여자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나중에는 거의 감출 것도 없이 속심을 털어 놓을 때도 많았다. 어떤 경우에는 속된 농담도 거침없이 할 정도였다. 이렇게 한동안 어울리던 중 김유길은 자신이 그 중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몰래 그 여인한테 자기의 마음을 고백했다. 헌데 이 여자가 너무도 기쁜 나머지 이를 다른 여자들한테까지 자랑할 줄이야?! 이러자 이들 여자 모두가 한결같이 김유길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어 김유길은 황제처럼 되어 일곱 명의 여자를 동시에 품에 안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가정을 꾸린 뒤 이들은 아예 귀국할 생각을 접고 살림을 차리고 김유길의 아내로서의 각자의 의무를 다 하였다. 그리고 아내들은 선후하여 스물일곱 명의 자녀를 김유길한테 낳아주었다. 이렇게 그들은 하나의 작은 가정으로부터 하나의 대가족으로 발전했다. 그로부터 8년이 흘러간 뒤 이 35명의 대 가정은 바다에 나타난 미군 순찰함에 의해 발견되었고 오랫동안 귀국생각을 접었던 이들에게 마침내 각자가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며 김유길은 고향으로 즉 한국으로 돌아가게 됐고 그 외의 아내와 자녀들은 모두 일본으로 송환됐다. 김유길은 귀국한 지 몇 년 만에 그 아내들이 그리워났다. 거기에 자녀들이 보고 싶기도 했다. 마침내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처자들을 찾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두루 수소문한 결과 그의 다섯 명의 아내는 이미 재가하여 다시 살림을 차렸고 나머지 2명만이 그래도 김유길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일본 사회는 이미 일부일처제를 시행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특별한 예외의 경우였다. 정부도 이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들은 이렇게 죽을 때까지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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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12
  • 시대를 빛낸 할리우드 여배우- 마릴린 먼로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지난번 계속) 마릴린 먼로의 본명은 노마 진 베이커이다. 그녀의 외할아버지 성은 먼로, 그는 정신 질환으로 앓고 있는 자동차 엔지니어였으며 늘 자신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의 자손이라고 했다. 그리고 외할머니인 델라에게도 정신적인 장애가 있어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하면 매우 격렬했다. 그런가 하면 어머니 글래디스는 MGM 콜롬비아의 한 영화제판공장에서 스크랩 작업을 했으며 어머니 역시 심각한 정신분열증 환자로 평생 수용소 출입이 아주 잦았다고 한다. 1942년 6월 19일, 마릴린 먼로는 제임스 아이젤 돌티와 결혼했으나 1946년 9월 13일 첫 결혼은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 그 뒤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는 1954년 1월 14일 샌프란시스코의 한 모텔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2월 2일 일본 도쿄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이들이 혼인신고를 한 지 274일 만에 마릴린 먼로가 이혼을 제출했고 1954년 10월 31일, 법원은 마릴린 먼로가 조 디마지오와 이혼하라고 판결했다. 뒤이어 마릴린 먼로는 1956년 6월 29일 극작가 아서 밀러와 극비리에 결혼했고 그해 8월 메릴린 먼로는 임신했지만 곧 유산했다. 마릴린 먼로는 1957년 8월 1일 자궁외 임신으로 다시 유산했다. 1961년 1월 20일 두 사람은 멕시코에서 정식 이혼하고 말았다. 18세 때 마릴린 먼로는 기독교인이 됐다. 하지만 1956년 아서 밀러와 결혼하면서 먼로는 유대교로 전향했다. 생전에 마릴린 먼로는 생전에 애완견을 많이 키웠으며 그 중 마지막 한 마리는 시나트라가 선물한 몰타 개로 이름을 지어 ‘마피아(Mafia)’라고 불렀다. 1960년 8월 28일, 마릴린 먼로는 정신과 입원치료를 받았으며 그 뒤 1961년 2월 7일 재차 뉴욕에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3월 5일에 퇴원했다. 1962년 1월, 마릴린 먼로는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으며 7월 20일 자궁내막염으로 또 입원치료를 받았다. 1962년 8월 4일, 마릴린 먼로는 심리치료사와 6시간을 보냈다. 이는 그녀의 생에 있어서 마지막 하루가 됐다. 그 이튿날 즉 8월 5일, 로스앤젤레스 경찰은 마릴린 먼로가 로스앤젤레스 브라이든무에 있는 자신의 거처에서 36세의 나이로 사망했음을 확인했다. 8월 8일,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마릴린 먼로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마릴린 먼로는 익숙한 이름이었고 익숙한 이미지였다. 그녀는 트레이드마크식의 웃음과 매혹적인 몸짓으로 하나 또 하나의 성감적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감동적인 연기 스타일과 죽음은 영화 팬들의 영원한 성감 적인 아이콘이자 대중문화의 대표주자로 자리 잡았다. 많은 팬들은 살아가면서 그녀의 사진들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아니 보고 또 보았을 것이다. 하얀 치마를 입고 뉴욕 거리에 있는 모습과 땅속 열기에 그녀가 걸친 치마가 나팔을 벌린 듯한 모습의 흑백사진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 눈을 살짝 감은 듯 입술을 감빠는 모습, 소파 위에 하얀 다리를 드러낸 모습 등을 보노라면 사진만이 아닌 특별한 감정의 전달과 순수하고 성감적인 정국이 될 때가 많다. 공개된 사진에서 마릴린 먼로는 이전과는 다른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며 청순하기도 하고 털털하기도 한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좀 길게 땋은 머리 태, 청바지, 리넨 스커트 등은 다양한 스타일링으로 생활 속 먼로의 사랑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먼로는 1962년 8월 5일, 자기의 거처이 로스앤젤레스 브라이든 무브먼트의 거실에서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이후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을 떠올리면 마릴린 먼로의 죽음은 케네디 가문과 정치권의 암막에 휘말렸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그가 죽은지 수 십 년이 넘도록 그녀에 대한 공식 조사서류는 대부분 고급기밀로 분류돼 있었다. 2006년까지 FBI(미 연방수사국)는 미국 자유정보법에 따라 500쪽 분량의 먼로 관련 문건의 비밀을 해제했다. 그러자 마릴린 먼로의 죽음이 그가 적어놓은 비밀일기와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역사 전문가들은 뒤늦게 밝혀냈다. 먼로의 일기에는 먼로와 케네디 형제의 ‘베갯머리 대화’가 다수 기록돼 있었다. 1962년 8월 초, 케네디 형제는 약속이나 한 듯 먼로와의 모든 왕래를 끊었다. 갑작스런 격변에 직면하여 마릴린 먼로 역시 자신의 위험을 의식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8월 4일 오후 9시 반, 그녀는 절친인 시드니 길라로프에게 전화로 케네디 형제와 있었던 자신의 사생활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한 가지 위험한 비밀을 알고 있다”고 했다. 다음날 새벽 LA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된 마릴린 먼로는 공교롭게도 그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비밀 일기’도 신비롭게 사라졌으며 LA지검 사무실 또한 마릴린 먼로가 일기를 썼다는 것과 먼로의 죽음이 모살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부인했다. 2012년 5월 16일, 제65회 칸 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마릴린 먼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제 홍보 포스터가 나붙었고 현장의 대형 스크린에는 마릴린 먼로 주연의 각종 다른 영화의 스틸 사진이 끊임없이 상영되면서 그녀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유명 조각가 수어드 존슨이 만든 마릴린 먼로 조각상 ‘영원한 먼로’가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스에서 전시되기도 했다. 그녀는 줄곧 어떤 남자가 그녀를 사랑하기를 원했고 그녀도 전심으로 상대방을 사랑했지만 안타깝게도 먼로는 평생 이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는 여인으로서 먼로는 전심전력으로 절대적인 관심을 필요로 했다. 이런 100%의 사랑을 남편들은 주지 못했고 애인들은 더욱 주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59년 전, 36세의 마릴린 먼로는 그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하늘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용모를 주었지만 운명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인생을 주지 않았다. ‘세상의 좋은 물건은 견고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구름은 쉽게 흩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아마도 마릴린 먼로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2-01-01
  • 시대를 빛낸 할리우드 여배우- 마릴린 먼로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그녀는 60년대까지 미국 할리우드의 유명한 여배우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수많은 남자들 마음속에 자리 잡은 ‘유혹의 여신’이기도 했다. 마릴린 먼로-그녀의 별명은 노마 제인 모테이센(Norma Jeane Baker)으로 미국계 유대인이었으며 출생지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다. 마릴린 먼로: 출생일 1926년 6월 1일, 사망일 1962년 8월 5일, 별자리 쌍둥이자리, 혈형 AB형, 키 166cm, 몸무게 53kg, 직업 프로배우, 모델, 대표작 ‘7년차 가려움’, ‘버스터미널’, ‘용놀이’, ‘열정은 불처럼’ 등 다수 주요 성과로는 제9회 영국․TV예술아카데미상 영화상 최우수 외국여배우상, 제14회 미국영화방송 골든글로브 영화부문-뮤직코미디부문 최우수 여주연상, 제11회 영국 영화·TV예술아카데미 영화상 최우수 여배우상, 제17회 미국영화․TV 골든글로브 영화-뮤직코미디 최우수 여주역상, 100년 만의 가장 위대한 여배우 랭킹 6위… 1926년 6월 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본병원에서 태어난 마릴린 먼로는 당시 노마 제인 모태슨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한 차례의 세례 후 그녀는 이름을 노마 제인 베이커로 변경했다. 불행한 것은 그녀가 사생아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멀리 타향으로 떠났으며 먼로는 태어난 지 13일 만에 브라운다이 부부의 집에서 매주 5달러씩 내기로 하고 입양됐다. 1933년 가을, 마릴린 먼로는 어머니 글라디스 바크르에게 인계되었다. 글라디스는 1935년 6월 1일 먼로의 보호자가 됐지만 몇 개월 후인 9월 13일 먼로를 고아원에 보냈다. 이어 먼로는 1937년 11월부터 안나란 여인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고교생이던 1941년 마릴린 먼로는 어린 나이에 결혼과 함께 ‘아름다운 여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결혼 후 마릴린 먼로는 올림픽 챔피언 하워드한테서 역도와 서핑을 배웠으며 1944년 5월부터는 항공기 무전기 제조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45년 6월 26일 마릴린 먼로는 사진작가 데이비드 코너일과 함께 잡지 사진을 찍었다. 그 때 사진작가 데이비드 코너일은 그녀가 사진을 게재하여 미군을 고무시키기를 희망했다. 마릴린먼로는 1946년 5월 26일 ‘가족권’ 잡지 표지를 통해 처음으로 얼굴을 알렸다. 1946년 7월 19일, 마릴린 먼로는 20세기 폭스로 처음으로 가게 되었고 7월 26일 폭스와 첫 6개월 계약을 맺었다. 또 머리를 황금색으로 염색하면서 ‘제인 아델’이라는 예명을 붙이기도 했다. 1948년 마릴린 먼로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슈쿠다, 허!스쿠다, 하이!(It's Shukuda, Huh! It's Shukuda, Hi!)’에서 교회를 달군 여자 역을 맡았지만 그한테 차례진 대사는 한 줄밖에 없었다. 이후 그녀는 한 영화에서 여자아이를 연기하였으나 역시 대부분의 장면은 삭제되었다. 1949년 5월 27일, 사진작가 톰 켈리는 먼로의 누드 사진을 여러 장 촬영하여 골드 미스 드림 달력을 출판했다. 하지만 먼로는 달력에 실린 자기의 사진에 싸인을 하지 않아 50달러만 받게 되었다. 그해의 8월 15일, 먼로는 뮤지컬 영화 ‘토마호크행 티켓(Tickets to Tomahawk)’의 촬영에 참여했고 10월에는 또 범죄영화 ‘밤의 밤’ 촬영에도 참여했다. 1950년 1월 5일, 먼로는 드라마 ‘화구(火球)’의 촬영을 시작했고 4월에는 또 드라마 ‘혜성미인’에서 어느 한 주요 배역을 맡았다. 같은 해 먼로는 잡지 ‘성조기’가 선정한 ‘매력 아가씨’로 뽑히기도 했다. 1951년 4월 18일, 먼로가 출연하는 애정 코미디 영화 ‘사랑의 둥지’ 촬영이 시작되면서 그해 5월 1일, 폭스는 먼로와 6개월 계약 기간을 7년으로 연장했다. 뒤이어 먼로는 1952년 5월 7일 ‘라이프(life!)’지의 표지모델로 데뷔했으며 6월 1일에는 멜로영화 ‘신사는 미인을 사랑한다’의 주역으로 발탁됐다. 그리고 그해 8월 31일 라디오 생방송에 첫 출연 했고 9월 2일에는 ‘미스 아메리카 모델 쇼’에 출연했다. 1953년 6월 26일 마릴린 먼로가 미국 연예계에 짙은 손자국과 발자국을 남겼으며 9월 13일에는 TV에 처음 등장했다. 이어 11월 5일 로렌 바이콜, 로리 캘헌과 함께 출연한 애정 코미디 영화 ‘결혼하고 싶어’가 개봉됐다. 영화에서 먼로는 어릴 때부터 백만장자와의 결혼에 목마른 성감 모델 ‘보라 드 베이워스’ 역을 맡았다. 1954년 4월 30일, 마릴린 먼로가 로버트 미첨과 함께 촬영한 서부 모험영화 ‘동으로 흐르는 강물’이 개봉했다. 이 영화에서 먼로는 팜므파탈의 바 가수 ‘카이’역을 맡았다. 먼로는 9월 1일 로맨틱 코미디 영화 ‘7년차 가려움’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이 영화로 먼로는 제9회 영국영화·텔레비전예술아카데미상 영화상인 외국여우상 후보에 올랐다. 1955년 1월 7일, 마릴린 먼로는 밀턴 그린과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마릴린 먼로 프로덕션 센터’의 설립을 발표하였고 1월 15일 20세기 폭스 프로덕션과의 계약은 종료됐다. 1956년 1월 4일, 마릴린 먼로는 20세기 폭스프로덕션과 재계약을 맺고 2월 25일 할리우드에 복귀했다. 그 때로부터 그녀는 마릴린 먼로로 개명했고 이어 3월 3일에는 주연 로맨틱 코미디 영화 ‘버스터미널’에 출연했다. 그녀는 이 영화로 제14회 미국 영화 TV 골든글로브 영화․TV 부문 여 최우수 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1957년 6월 13일, 마릴린 먼로가 로런스 올리버와 함께 주역을 맡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 ‘드래곤 봉황’이 개봉되었다. 이 영화에서 마릴린 먼로는 관능적이고 매력적인 쇼걸 ‘엘시 마리나’의 역을 맡았으며 이 역할로 제11회 영국영화·TV예술 아카데미상 영화상-외국 여배우상 후보에 올랐다. 1958년 8월 4일, 마릴린 먼로는 애정 코미디 영화 ‘열정은 불처럼’에서 마이애미 악단의 아름다운 관능의 여인 ‘수가’ 역을 맡았다. 1960년 3월 8일 먼로는 영화 ‘열정은 불처럼’으로 제17회 미국 영화․TV 골든글로브 영화 부문-뮤직코미디 부문 여 최우수 주연상을 받았다. 1961년 1월 31일, 마릴린 먼로는 클라크 게이블,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함께 촬영한 서부 애정 영화 ‘난점 원앙보’가 개봉됐다. 1962년 3월 5일, 마릴린 먼로는 ‘세계 최고의 여배우상’을 수상했고 이어서 4월 23일에는 그녀는 주연 코미디 단편 영화 ‘멘붕’ 촬영을 시작했다. 1962년 6월 1일은 마릴린 먼로의 20세기 폭스프로덕션에서의 마지막 출근 날이자 마지막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날이었다. 6월 7일, 20세기 폭스프로덕션은 먼로와 계약을 종료했다. 하지만 그해의 8월 1일, 20세기 폭스프로덕션은 월급을 2배로 주기로 하고 마릴린 먼로를 다시 고용하기로 결정했으며 8월 3일, 먼로는 ‘라이프’지의 표지를 장식하는 ‘멘붕'의 재촬영에 동의하면서 ‘라이프’지의 표지모델이 됐다. 1999년 미국영화학회가 선정한 ‘100년 만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여배우 랭킹’ 6위에 올랐다.
    • 연예·방송
    2021-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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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해탄 청방거두 황금영
    ● 김희수 황금영(黄金荣)은 지난세기 20년대 상해에서 명성이 높은 청방(青帮)두목 이였으며 두월생(杜月笙), 장소림(张啸林)과 더불어 3대깡패거두였다. 그는 1900년에 프랑스 조계지의 순포방에 들어가면서부터 아편 밀매를 일삼고 도박장, 오락장을 꾸려 깡패 세력을 키웠는데 문하생이 1000여 명이나 되였다. 1868년에 강소성 소주시에서 출생한 황금영은 1873년에 상해로 이사 가서 1876년에 서당에서 공부했다. 1881년에 아버지 황병천이 사망되자 맹강당사당에 들어가 잡일을 했다. 1884년에 자형 황전포가 꾸리는 사가당의 표장포(裱褙铺)에 들어가 학도공으로 일하던 그는 1890년에 관아에 들어가 범인을 잡는 하급관리 포쾌(捕快)일을 맡아하다가 2년 후에 프랑스 조계지의 순포방에 3등 중국인 포쾌로 뽑혀들어갔다. 1899년에 사직하고 소주에 가서 노천궁 극장을 꾸린 황금영은 이듬해에 림계생과 결혼했다. 그후 다시 상해로 들어간 그는 1901년에 취보루에 향당(香堂)을 세워놓고 제자들을 받아들였다. 1917년에 송호호군사(淞沪护军使)관아의 상좌독찰에 임명 되였고 1924년에 순포방의 독찰장으로 승진했다. 1927년에 그는 “4.12”반혁명정변을 도와주었고 1928년에 장개석으로부터 “군사위원회 소장참의”, “육해공 3군 총사령부 고문”, “행정원참의”로 임명되였다. 1931년에 황가(黄家)화원이 낙성되였다. 그해 그는 상해대세계오락장을 먹어 치우고 “영계(荣计)대세계”로 이름을 고쳤다. 1936년에는 충신사를 세우고 1945년에는 영사(荣社)를 성립했다. 황금영은 여러 건의 큰 사건을 해명하여 명성이 자자했다. 어느 한번은 프랑스 총영사의 서기관이 동부인하여 태호를 유람하다가 토비를 만나 납치당했다. 프랑스 조계지에서는 그 소식을 들은 후 황금영을 파견하여 그 서기관을 구해오라고 했다. 황금영은 부하들을 시켜 태호의 토비두목 “태보아사”와 “저라 아미”를 찾게 했다. 그 다음 직접 나서서 손쉽게 프랑스 인질을 구해냈다. 또 한번은 복건성 독리(督理) 주음인의 참모장 양지후는 여섯상자의 공동품과 고대서화를 가지고 상해로 왔는데 부두에 도착하자마자 강도들에게 물품을 몽땅 빼앗겼다. 이에 송호호군사 하풍림은 특히 황금영을 청하여 빼앗긴 물건을 찾아달라고 했다. 황금영은 반나절도 되지 않아 그 물건을 찾아주었다. 그 외에도 황금영은 수많은 큰 사건을 해명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공로는 프랑스의 천주교신부 납치사건을 해명한 것이다. 그 공로로 하여 그는 프랑스의 동정전권대신으로부터 특등 금질보성(金质宝星)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1924년에 프랑스 조계지의 순포장에서 유일한 중국인탐정 독찰장으로 승진했다. 황금영은 스승을 모시지 않고 향당을 열어서 청방에서 “빈자리”였지만 세력이 강했기에 자칭 “천자(天字)”서열이라고 하고 청방이 두목으로 되였다. 당시 상해탄(上海滩)청방에서 최고서열은 “대자(大字)”서열이었다. 황금영은 손에 쥔 권력을 이용하여 아편을 밀수하고 도박장을 꾸렸으며 다른 사람과 합작하여 경견장(跑狗场) 등을 꾸려 불과 몇년사이에 상해탄의 거두로 되였다. 황금영은 프랑스조계지의 순포방 중국인 독찰장을 20여년이나 맡아했다. 그는 60돐생일을 쇨 때에야 사직했다. 하지만 프랑스 조계지의 순포장 경무처에서는 계속 그를 고문으로 초빙했다. 노란춘은 황금영의 문하생 장생의 양딸 이였는데 황공관(黄公馆)에 자주 놀러왔다. 그녀는 평소에 희곡을 듣기를 좋아했다. 그녀는 총명하고 영리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회곡을 흉내내여 부를줄을 알게 되였다. 당시 황금영은 이미 50여살이였지만 14살밖에 안 되는 노란춘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는 돈을 아끼지 않고 노란춘을 무대에 오르게 밀어주었다. 그는 직접 나서서 노란춘에게 주역을 맡겨주고 노란춘의 레코드를 출시했다. 상해의 크고 작은 신문에서는 다투어 노란춘의 아름다운 자태를 찍은 사진을 실었다. 노란춘의 명성은 일시에 상해의 이름난 연예인 소금령과 분국화를 능가했다. 황금영은 노란춘을 첩으로 맞아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부인 임계생은 “나를 이 집에서 내보내기 전에는 그 여우년을 들이지 못해요”라고 하면서 반대했다. 화가 난 황금영은 이혼을 제기했다. 그는 임계생에게 거액의 생활비를 줘서 쫓아 보내고 노란춘을 안해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그의 혼인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3년도 안되여 젊은 남자와 눈이 맞은 노란춘은 황금영과 이혼하겠다고 성화를 부렸다. 1923년에 황금영과 노란춘은 프랑스변호사 위안소의 사무소에 가서 협의이혼을 했다. 1920년에 경비가 늘 부족했던 장개석은 몇몇 사람과 함께 돈을 벌기 위해 상해에 증권물품교역소인 “항태호”를 세웠다. 교역소의 업무는 초기에는 경기가 좋았지만 1921년에 상해에 오늘의 소규모 금융위기와 비슷한 “신교폭풍(信交风暴)”이 폭발하여 주식가치는 종이장이나 다름없게 되였다. 억지로 지탱하던 “항태호”는 1922년에 부도가 났는데 숱한 주주들이 주식을 가지고 와서 현금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채권자들은 깡패들을 고용하여 장개석을 위협하면서 돈을 갚으라고 강요했다. 깡패들을 피해 다니느라고 숨을 죽이고 있던 장개석은 상업계에서 비교적 지위가 높은 우흡경을 통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명성이 자자한 황금영을 찾아가 보호해 줄 것을 요구했다. 장개석은 길일을 택해 황금영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날 황금영은 자택의 2층의자에 늠름하게 앉아있었는데 장개석은 붉은색으로 쓴 스승으로 모시는 글을 황금영에게 공손하게 받들어 올렸다. 그 다음 장개석은 황금영에게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렸다. 그 후 황금영은 채권자들을 술집에 청해놓고 옆에 앉은 장개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지청(그 당시 장개석이 늘 사용했던 이름)은 나의 제자입니다. 여러분들이 지청의 빚을 받겠으면 나를 찾아와 요구하시오!” 그제야 채권자들은 황금영이 홍문연을 차린 것을 알았다. 그들은 돈을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이 기회에 황금영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마음먹었다. 이렇게 되여 황금영의 한마디 말로 채권자들을 피하여 다니던 장개석은 숨을 돌리게 되였다. 상해가 해방되기 전야에 사람들이 황금영을 보고 공산당에게 욕을 보지 말고 대만이나 홍콩으로 도망가라고 권고했지만 황금영은 의연히 상해에 남아있었다. 황금영은 “난 이미 여든이 넘어서 오라지 않아 관속에 들어갈 사람이요. 떠나다가 중도에서 급병이라도 생겨 죽기라도 하면 그런 낭패가 어디 있겠소. 내 일생동안 상해에서 살았는데 외지에서 죽고싶지 않소”라고 말했다. 황금영은 저택에 들어박혀 두문불출하면서 밖의 일을 묻지 않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황금영이 이미 대만이나 홍콩으로 도망치지 않으면 인민정부에 체포되여 감옥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51년 초에 반혁명진압운동이 시작되자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황금영의 저택문앞에 모여들어 그에게 비판을 받을 것을 요구했다. 황금영을 검거하는 편지가 눈송이마냥 상해시정부와 공안기관에 날아들었다. 당 중앙에서는 상해를 해방하기 전야에 이미 깡패세력들이 말썽을 일으키지 않고 사회치안을 어지럽히지 않으며 개조를 접수한다면 그들을 다치지 않는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특히 황금영, 두월생과 같은 조직두목들은 한시기 관찰한 후 표현에 따라 다시 처벌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이는 상해경제발전에 유리한 것이다. 상해시 시장 진의는 이 방침과 정책을 엄격하게 집행했다. 상해시인민정부에서 직접 황금영을 만나 이왕의 정책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그에게 “회개서”를 써서 신문에 공개해 줄것을 요구했다. 1951년 5월 20일에 상해의 《뉴스보》와 《문회보》에서 《황금영의 자백서》를 실었다. 황금영은 자백서에 “자수개과”하고 “입공속죄”하며 “정부와 인민에게 용서해줄 것”을 요구했다. 상해깡패거두의 “참회”는 당시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사회질서를 안정시키고 깡패잔여세력을 겁먹게 하는데 매우 큰 작용을 일으켰다. 그 후 황금영은 정부의 개조호소에 호응하여 거리를 청소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황금영이 거리청소를 한다”는 소식은 세계각지에 쫙 퍼졌다. 다른 한 깡패거두인 두월생은 홍콩에서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이 상해에 남지 않는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국내외의 반향을 고려하여 황금영의 이런 “개조”조치는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얼마후에는 그만두게 했다. 필경 황금영은 늙고 병든 노인이였던 것이다. 2년 후인 1953년에 한때 상해탄에서 권세와 명성이 하늘을 찔렀던 풍류인물은 온몸에 열이 나서 며칠동안 혼미상태에 빠져있다가 영영 눈을 감았다. 향년 86세였다. 필자/김희수(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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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7
  • 노르망디 해변 일본군이 지켰더라면?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944년 6월의 노르망디 전역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일장 결정적인 의의가 있는 중대한 전역이었으며 영미동맹군이 상륙작전에서 성공하여 제 2의 전장을 개척한 전역이기도 했다. 하다면 당시 가령 노르망디 해변을 지킨 군대가 일본군이었다면 상황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이 전역에서 영미동맹군은 도합 288만 명의 군대, 1200척의 작전함정, 4126척의 상륙함정, 5000척의 운수선과 1만 3700대의 비행기를 투입, 80킬로미터에 달하는 길이의 5개 상륙 지점에서 제1진으로 상륙한 부대는 5개 사의 약 13만 명이었고 상륙지점 후방 즉 독일군 점령지에 공중 낙하된 3개 낙하산병 사는 약 3만 5000명이었다. 한편 당시 노르망디 해안지역을 수비하는 독일군은 352 보병사와 716 해안방어사 그리고 약 16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캉 지역의 제21 기갑사 이렇게 3개 사의 병력을 다 합쳐도 5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또한 동맹군이 진짜 상륙하던 80킬로미터 해변 정면에 있는 독일군은 352 보병사와 716 해안방어 사의 6개 영 19개 소대로 3000명(이 중 6분의 1은 소련군 포로로 구성된 <동방영>이었음)도 되지 않았고 대포와 반 탱크 포 88문, 평균 매 1킬로미터에 배치된 병력은 40명 정도였으며 매 1킬로미터마다 대포 1문씩 배치된 셈이었다. 당시 독일군 716 해안방어사는 기동차량이 배비되지 않은 <고정사>로서 기동능력이 전혀 없었고 중무기도 아주 적었으며 전투력도 아주 약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서적과 자료들에서는 제 352 보병사를 놓고 독일군의 최정예 부대라고 했지만 기실 이는 2차 대전 시기 독일군에 대한 요해가 흐리멍텅한 것으로 이런 설법은 자연히 웃음거리라는 설도 있다. 왜냐하면 부대번호가 100번 이내이고 아울러 1939년 제 2차 대전의 폭발 전에 창설된 부대가 진정한 최정예였으며 진짜 독일군의 정예부대는 모두 기갑사 혹은 기계화 보병사였다. 일반적인 보병사 즉 352 보병사 같은 부대는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2류 수준의 부대로밖에 될 수 없었다고 한다. 제 352 보병사는 1943년 9월, 프랑스 생로에서 창건, 병력 내원을 보면 소수의 골간 군인들이 동부전선의 전장에서 온 노병이었고 절반 좌우는 모두 갓 입대한 20대의 신병이었으며 거의 3분의 1 가량은 동부전선에서 붙잡힌 소련군 포로로 구성된 이른바 <동방영>이었다. 바로 독일군들이 소련군 포로 중의 소수민족 군인을 집결시킨 것으로 여기에는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그루지아인과 카타르인, 심지어 소수의 조선인도 있었다. 이들 조선인들은 일찍 일본군이었다가 중소 변경지대인 노먼행에서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고 독소전쟁이 폭발하자 소련군에 보충되었다가 다시 독일군에 포로가 되는 등 곡절적인 경력자들로서 후에 재차 독일군으로 되는 해프닝으로 조직된 부대였기에 이들의 전투력이란 보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을 정도였다. 352 보병사는 병력이 도합 1.3만 명으로 기실 이 사단은 정예부대에 속하지 못하는 부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동맹군이 오마하 해변에서 상망한 인수가 전반 상륙한 5개 해변 중 가장 많았다. 사망 약 1500명, 부상 2800명으로 오마하 해변에서의 상망인수가 전체 5개 상륙해안 상망자의 80%를 차지했다. 바로 이것으로 오마하를 수비하던 352 사단이 갑자기 <정예사단>으로 둔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독일군에서 정예사단이라 하면 제21 사단을 꼽을 수 있다. 이 사단은 룸멜의 아프리카군의 제1번 주력이었다. 하지만 당년의 아프리카 왕패군은 기본상 소실되었고 1943년 6월, 프랑스 북으로부터 철거해온 소수의 부대와 귀국해 치료받던 부상병들을 조직해 재건, 노르망디에 올 때 탱크는 거개가 구식으로 된 것으로 대부분은 III호 탱크였고 가장 선진적인 것이래야 IV호 탱크 조기의 G형이었다. 그리고 돌격포 여기 10문의 II호 G형의 돌격포와 몇 대의 <족제비>호 탱크 저격 차였고 자주포는 III호 탱크 밑바닥을 개조한 105밀리 유탄포와 <황소>호 150밀리 자주포였으며 아프리카 시기의 21 기갑사단은 이미 <넘어간 태양인 격>이었다. 동맹군이 상륙하던 날, 제21사단 역시 반격을 조직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투입된 장비와 인수는 50대의 탱크와 1개의 기계화 영뿐으로 동맹군의 공격에 의해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하긴 소수의 부대가 해변까지 반격하여 5킬로미터에 달하는 돌파구를 개척했으나 후근보급이 단절되어 철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날 동맹군은 5개의 상륙 해변에서 모두 성공, 해안에 오른 병력은 13.6만 명이었고 상망자는 6000명뿐이었다. 그럼 노르망디 해변을 일본군이 수비했더라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제 2 차 세계대전 중 일본 육군의 방어 작전능력이 출중했다는 건 누구나 다 공인하는 바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은 미군의 해 공 군 폭격과 포격의 위력을 잘 알고 있는지라 이들이 구축한 방어공사는 견고할 뿐만 아니라 아주 은폐적인 것이어서 어떤 요새는 전문 미군이 지나간 다음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노르망디의 독일군 방어공사는 그 자체가 대서양에서의 독일군 요새 중 가장 박약한 고리였다. 만약 당시 일본군이 노르망디 해변을 수비했더라면 그들은 그 방어요새를 기필코 강화했을 것이 불보듯 뻔했다. 태평양 전장에서 매번 상륙작전을 펼치기 전야마다 미군은 우선 해 공 군의 화력을 집중하여 목표 섬도를 며칠, 심지어 10여일씩 불바다로 만들 군 했다. 당시 미군은 남태평양의 쾌잘린 섬을 공략한 후 전문 일본군 방어공사를 가상으로 한 함포사격 시험을 진행, 시험결과 반드시 203밀리 이상의 대구경 포로 정조준 해야만 일본군 은폐요새를 날려 보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노르망디에서의 동맹군의 해 공 군 포격과 폭격은 몇 시간에 그쳤는 바 이는 근본 태평양 전장과는 비길 수도 있었다. 만약 태평양 전장에서의 미군 폭격과 포격이 노르망디에서의 동맹군의 규모였다면 일본군의 방어시설이 적어도 80%는 보존될 수 있었을 것이며 그렇다면 미군의 상륙부대는 일본군한테 더욱 골탕을 먹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음, 방어 전술상 독일군은 해변을 고수하느냐 아니면 포기하느냐를 두고 논쟁이 심했다고 하며 최종 절충방안으로 해변을 방어하되 부분적 병력을 근처의 종심지대에 배치하여 반격을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독일군은 이 두 가지가 다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일본군은 달랐다. 일본군은 전쟁 중에서 전쟁을 배웠다. 이들은 절대적으로 우세한 미군의 화력 앞에서 아예 해변을 포기하고는 지하 갱도공사를 대대적으로 구축했으며 방어의 중점을 섬도의 종심에 두어 미군의 함포 포환이 근본 일본군 진지에까지 와 닿을 수 없도록 하였다. 이런 시각으로 놓고 말하면 당시 노르망디에서의 룸멜과 룬데슈타이트가 우려한 것은 기갑부대를 종심에 배치했다가 적시적으로 해변에 다닿을 수 없을가봐서였고 또한 장갑부대의 위치가 동맹군 함포의 사정거리 내에 들기라도 할까봐서였다. 그 우려는 적중한 것이었다. 전장에서 독일군의 가장 예리한 장비였던 기갑부대는 동맹군의 폭풍우와도 같은 화력 앞에서 집중된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으며 일방적으로 얻어맞기만 하는 신세가 되었다. 독일군 역시 일본군처럼 기갑부대를 종심의 먼 곳에 배치하고 아울러 그 기갑부대를 소규모로 여러 갈래로 나뉘어 보병들의 돌파구를 열어주는 역할을 시키면서 방어의 받침역량 및 소규모 반격의 중견으로 돼 줬더라면 그토록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이로부터 보아 일본군은 방어전술에 있어서 독일군에 비해 보다 실제적이었고 경험도 많았다. 필경 일본군과 미군은 태평양 전장에서 3년간에 거친 공방전을 해왔던 군대였으니 말이다. 이에 비해 독일군은 아프리카 북부에서 미군과 딱 한번 소규모의 전쟁을 해봤으니 경험상 일본군에 비해 뒤지기 마련이었다. 이 외 언급할 것은 전투의지에서도 일본군은 독일군에 비해 더욱 완강했다. 더 정확하게 말해 노르망디를 방어하던 독일군에 비해서는 훨씬 더 완강했다. 왜냐하면 노르망디 해변을 방어하던 독일군 3개 사단은 모두 국방군으로 또 재건된 사단 혹은 새로 건립된 사단이었으며 특히 많은 소련군 포로로 구성되었던 <동방영>은 더욱 전투의지가 자연적으로 높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만약 독일군 중의 <완고파>였던 당위 군이였다면 상황이 크게 달라질 수 있었다. 제 2 차 세계대전 후기 전투에 투입되었던 당위군 제12 <히틀러 청년단> 사단은 대다수가 소년병이었지만 사상 상 매우 완고했고 전투의지도 완강했으며 여기서 영국군은 자주 골탕을 먹군 했었다. 하다면 일본군의 완강한 전투의지를 놓고 보아 당위군에 비해 조금도 차질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노르망디에 상륙하던 미군은 거개가 육군이었다. 해군은 소수의 해변폭파 대대뿐이었고 해군육전대는 없었다. 당시의 미군 부대 중 육군과 해군은 모두 의무병이었고 오직 해군 육전대만이 청일색으로 지원병으로 모두 자기가 자원해서 군 입대를 한 진정한 군인들이었다. 아울러 육전대는 훈련마저도 진짜 전투처럼 진행하는 전투력이 강한 부대였으며 육전대의 전투력이 일반 육군 수준을 크게 능가한다는 것은 모두가 공인하고 있던 바였다. 태평양 전장에서 거의 모든 가열하고 힘든 전쟁은 모두가 육전대가 맡았으며 육군은 기본적으로 보조전투를 치르는데 그치었다. 가령 태평양 전장에서 이런 가열하고 힘든 전투를 미 육군이 맡았더라면 아마도 시간이 더 길었을 것이고 상망도 엄청 더 컸을 것은 불보듯 번연했다. 또한 반대로 노르망디에서 독일군 대신 일본군이 지켰더라면 동맹군 육군은 절대적으로 큰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었다. 재삼 언급하지만 만약 노르망디의 수비군이 일본군이었더라면 긍정코 방어공사가 더욱 공고했을 것이고 전술도 더욱 합리했을 것이며 전투력도 비할 바 없이 완강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동일하게 일본군 역시 2개의 보병사단과 1개의 기갑사단이라고 할 때 상륙 첫 날은 동맹군이 비교적 순리로웠을 것이지만 그 이튿날부터는 긍정코 애로가 첩첩할 것으로 종심으로 들어갈수록 진격속도가 늦어짐과 동시에 상망자도 더욱 많아질 가능성이 컸다. 그 실례를 들자면 태평양의 섬도에 대한 상륙전들을 보면 면적과 종심이 작고 후방 보급이 거의 없는 등 불리한 요소가 많았으나 일본군은 미군으로 하여금 얼굴색이 굳어지면서 혀를 내 돌리도록 했다. 하다면 노르망디 이런 대륙을 끼고 있는 해안을 일본군이 지켰다면 종심이 더욱 크고 후방보급도 원활하기에 동맹군의 상망은 기하급수로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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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7
  • 소가죽 한장의 전설 - 간도일본총영사관
    ▲ 간도일본총영사관 유적지 [동포투데이] 기유년에 생긴 일이다. 일제는 청정부를 윽박질러 용정에 총영사관을 세우기로 했다. 그런데 지을 바에는 크게 지어 한치라도 중국 땅을 더 삼키고 싶었던 영사는 못된 궁리를 꾸며냈다. 일본영사는 국자가에 자리 잡고 있는 청나라 도태부에 있는 윤대인을 만났다. 웃음 속에 칼을 품고 있는 일본영사는 속으로 엉큼한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웃음을 살살 발라가면서 예절스럽게 말했다. “대인도 알다 싶이 우리 두 나라는 자고로 친선적인 이웃이였지요. 내 오늘 대인과 이렇게 자리를 같이하고 나라의 일을 담론하게 되였은즉 그 영광이 하늘에 미치오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왔소?” “귀 정부에서 용정에 우리 총영사관을 두기로 하지 않았소이까.” “그런데?” “영사관원들이 당도하였는데 있을 곳이 없어 걱정이옵니다.” “허허. 나라에서 승낙한 일인데 있을 곳이 없다니 당치도 않은 소리요. 대체 얼마나 큰 집을 세우려 하시오?” 때가 되였다고 생각한 영사는 속으로 너털웃음을 지으면서도 겉으로는 빌붙는 체했다. “우리는 본디 바다 한가운데 사는 소국사람들이라 욕심 부릴줄 모르웨다. 그저 영사관을 지을 터자리로 소가죽 한장 만큼한 땅만 떼여주면 족하옵니다.” “뭐라오? 소가죽 한장 만큼한 땅이랬소?” “예. 소가죽 한장 만큼한 땅이랬소이다. 그만큼하면 족하옵지요.” 아무리 큰 소라도 가죽을 벗겨놓으면 큰 구들에 절반도 펼가 말가 하겠는데 영사관을 지을 자리를 소가죽 한장 만큼 달라니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 없었다. 제 귀를 의심하여 다시 한번 물었지만 그 소리가 그 소리인지라 윤대인은 속으로 소국놈은 소국놈이로구나 하고 비웃으면서도 꼭 간특한 계교가 있을 것 같아 일본영사를 피하라 하고는 관원들을 불러놓고 전후사실을 말했다. “그 자들로 하여금 집을 지으라고 하십시오. 소가죽 한장 만큼한 땅에 집을 짓지 않고 좀이라도 우리 땅을 점하는 날엔 혼쌀을 먹여줍시다”. 한 관원이 이렇게 말하자 모두들 그게 좋겠다고 한물곬을 팠다. 일은 쉽게 낙착되여 일본영사는 물러갔다. 그런데 그 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가 용정에다 으리으리한 총영사관을 지었다는 소문이 윤대인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윤대인은 노기충천하여 닫는 말에 채찍을 갈기면서 용정으로 달려갔다. 도착해보니 과연 높다란 담장이 빙 둘러있는 속에 커다란 층집들이 우뚝우뚝 솟아있었다. “이것이 그래 소가죽 한장 만한 땅이란 말인가? 그대들은 언약도 없고 국제공약도 없단 말인가?” 윤대인의 벼락 터지는 소리에 일본영사는 되려 웃으면서 태연하게 대답했다. “우린 언약 대로 소가죽 한장 만큼한 땅에다 영사관을 지었을뿐이옵니다.” “눈이 먼 줄로 아는가? 이렇게 크게 집을 지어놓고도 소가죽 한장 만큼이라니!” “용정 시장의 소 한마리를 사다 잡아서 가죽을 벗기고 그 가죽을 가지고 재여서 딱 그만한 자리에다 토성을 쌓았습니다.” “당치도 않은 소리로다”! “한번 손수 재여보시지요.” 영사는 미리 준비해놓고 있던 소가죽을 가져오라고 하졸을 시켰다. 그런데 그 자가 가지고 나온 소가죽은 통것이 아니라 실오리처럼 가늘게 오리오리 오려낸 소가죽이였다. 영사가 오려낸 소가죽을 붙여놓으라고 하자 졸개들이 개미떼처럼 모여들어 잠간사이에 소가죽을 붙여놓았다. 틀림없는 큰 소가죽 한장이였다. “이 소가죽 한장을 길길이 늘여놓으면 꼭 우리 영사관의 토성둘레와 같사옵니다. 소가죽을 통채로 놔두어도 소가죽 한장이옵고 오리를 낸 걸 합쳐도 소가죽 한장이오니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소가죽 한장이야 한장이지 두장이나 백장은 아니잖고 뭡니까?” 간특한 영사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아놓고 싶었지만 손수 대답한 말이라 윤대인은 입이 막히고 말았다. 이렇게 되여 용정에 으리으리한 일본총영사관이 들어앉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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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6
  • 중국의 항일명장 왕일서, 그는 한국인이였다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본이 조선을 강점해 버리자 망국노로 되기를 원치 않는 많은 조선인들은 중국이나 러시아로 건너갔으며 이 두 나라를 광복을 위한 기지로 삼고 일련의 굴곡적이고도 간고하게, 그리고 많은 좌절을 겪으면서 조국광복을 위한 피에 얼룩진 범상치 않는 투쟁을 벌였다. 이들한테는 해당 국가와 군대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리하여 많은 조선의 망명자들은 중국의 군대에 참가, 이들과 함께 일본 파시스틈을 소멸하는 투쟁의 제일선에 투신하군 하였다. 왕일서가 바로 매우 대표성을 띠고 있는 그런 조선인 중의 일원이었다. 왕일서(王逸曙)ㅡ 그의 조선이름은 김홍일이다. 그는 1916년 18세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가 길고도 곡절적인 항일구국의 길을 더듬기 시작했다. 당시 약하고 힘없는 망명자로서 왕일서는 그야말로 물에 빠진 익사 전야의 사람마냥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고나 할까? 뭘 보거나 듣거나를 막론하고 상대방한테 도움을 청하군 했지만 무수한 실망과 좌절만을 거듭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거듭되는 좌절 앞에서도 시종 굴하지 않았다. 이는 적지 않은 중국인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1918년 왕일서는 상해에서 귀주의 군벌 유현세(刘显世)의 아들 유강무(刘刚武)를 알게 됐다. 조국광복을 위해 그토록 동분서주하는 왕일서의 일거일동에 탄복했던 것이다. 그 뒤 왕일서는 유강무의 알선으로 귀주 육군강무당에 들어가 군사를 배웠고 졸업 후 유현세의 부대에 들어가 군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의 중국 군벌은 그로 하여금 크게 실망토록 했다. 그야말로 이 군벌과 저 군벌간의 파벌싸움에만 열중하는 무리에 불과했다. 이는 조국광복을 위해 악전고투하는 왕일서의 적성에 너무도 맞지 않았다. 조선의 광복을 위해서는 그래도 우리 민족의 투사들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그가 상해에 한국임시정부가 들어섰다는 소문을 들은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그 뒤 귀주군벌의 유혹을 물리치고 상해로 온 왕일서는 곧추 지금의 상해시 황포구 마당로 306롱-4번지(上海市黄浦区马当路306弄-4号)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당시 임시정부 요원들은 왕일서를 만나자 반겨 맞았으며 그와 함께 대한 독립의 대의를 놓고 여러 가지 의논을 하였다. 그러던 중 왕일서가 군사에 대한 천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임시정부 요원들은 그를 중국 동북에 파견해 대한독립군을 창설하도록 밀어주었고 그 또한 임시정부의 요구에 의해 군대창설 임무를 맡고 만주로 갔다. 만주에서 대한독립군을 조직했다가 후에 항일투쟁의 수요에 의해 독립군 부대를 이끌고 러시아 경내로 들어갔다. 당시 이들은 한 가지 크게 잘못 판단하였다. 1904년부터 1905년 사이에 있은 일러 전쟁으로 러시아와 일본은 숙적이 되었기에 러시아는 이들을 적극 지지해 주리라고 크게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바로 이 때 러시아가 내전에 휘말려 들어가면서 그 광활한 러시아 땅에는 소련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들어서게 되었고 대한독립군은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상대한테 잘못된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러일관계에서 대한독립군은 철두철미하게 러시아 켠에 섰으나 신생의 소련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일본인과 조선인을 같은 종속으로 치부했으며 결국 대한독립군은 러시아 땅에서 축출 당하게 되었다. 대한독립군은 다시 중국 경내로 들어왔으나 거의 붕괴의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이때에 와서야 왕일서는 조국광복이란 일종 장기적이고도 기나긴 노정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조급정서를 버리고 중국에 뿌리박고 중국혁명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왕일서는 이렇게 인정했다. ㅡ 중국군이야말로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주력군이다. 그렇다면 중국혁명에 참가하는 것 역시 간접적으로 조선의 광복을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다. 1926년 왕일서는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혁명군에 투신, 북벌에 참가했으며 후에는 상해 오송요새(吴淞要塞) 사령부의 참모장, 상해 병기공장 군사기계처 주임, 제19로군 후방정보국 국장 등 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1932년 상해에서 <1.28 송호항전(淞沪抗战)>이 폭발하자 왕일서와 상해에 있는 조선의 지사들 그리고 중국 동지들은 국내외를 놀라게 한 한차례의 테러행동을 기획(총책임자 김구), <부두방(斧头帮일명-도끼방)> 두령 왕아초(王亚樵)의 도움으로 조선청년 윤봉길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 육군대장 시로가와를 비롯한 일본군 장병 여러 명을 죽이고 중상을 입게 한 사건이 발생했으며 여기에는 왕일서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그 뒤 왕일서는 또 중국의 동지들과 함께 오송구에 정박해 있는 일본함정 <이즈모(いずも)>호를 폭파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한 사건도 있었다. 1937년, 중국에서 전면 항전이 폭발하자 왕일서는 견결히 자진하여 당시 중국군 중 실력이 가장 막강한 부대의 하나인 백휘장(柏辉章) 장군이 인솔하는 102사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부대는 상해보위전, 만가령 전역, 상고전역 등 중대 전역을 치렀으며 혁혁한 공훈도 많이 세운 부대였다. 이 부대 참모장으로 있는 기간 왕일서는 그의 군사적 재능과 용감성 등으로 장개석의 중시를 받았고 후에는 국민혁명군 육군 중앙대학에 가서 학습하였으며 얼마 안되어 중장참모로 되기도 했다. 1945년 일본이 투항하자 왕일서는 떠난지 수십년이 되는 조국으로 인차 돌아간 것이 아니라 중국 동북에 남아 일하다가 1948년 대한민국이 성립된 후에야 귀국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호국군(护国军)국장, 육군사관학교 학장 등 직을 역임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파죽지세로 쳐내려오는 인민군 앞에서 전투경험이 없는 한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이러자 왕일서는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몇 차례의 섬멸전을 하자고 주장했으나 이는 채납되지 않았다. 결과 한국군은 각각 격파되는 대가를 치렀다. 이렇듯 관건적인 시각에 왕일서는 명령에 의해 한국군 제1군단 사령을 맡게 되었고 그가 인솔하는 제1군단은 한강 이남에 견고한 방어라인을 구축해 이를 사수하면서 미군 스미스 부대가 오산에 도착할 때까지의 시간을 벌어주었다. 하지만 이렇듯 왕일서의 유능한 군사전략도 인정하지 않는 한국군 수뇌부였다. 당시 왕일서는 소위 <중국파>였기에 친미파와 친일파들이 득실대는 한국 군부 내에서 입지가 좁을 수밖에 없었다. 왕일서는 점차 실세에서 밀려났고 나중에는 군부에서 은퇴하기까지에 이르렀다. 후에 왕일서는 한국 외교부 장관, 한국 광복회 회장 등 직을 맡아하다가 1980년에 사망, 향년 8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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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2
  • 아프리카서 가장 아름다운 '흑진주'-로리타
    ▲아프리카서 가장 아름다운 '흑진주'-로리타ⓒ차트망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지금까지 사람들은 <하얗고 뽀얀 피부>를 가장 인정하는 <미(美)>의 표준요소로 삼아왔다. 그리고 중국에는 <햐얀 피부 한가지로 못생긴 세 곳을 감출 수 있다(一白遮三丑)>는 명언도 있다. 하지만 얼마 전, 피부색깔이 극히 검은 한 소녀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흰 피부를 가져야 비로서 아름답다>는 고유의 관념에 일타를 안기었다. 그럼 이 소녀의 얼굴은 구경 어떤 매력을 가졌을까? 중국 차트망에 따르면 이 소녀의 이름은 로리타(Lolita)로서 진짜 오리지널 아프리카 흑인이다. 절대 다수 사람들의 심미 관념에서 흑인의 미는 진짜 감상가치가 없을 지경이지만 로리타 소녀의 용모는 그야말로 이목 일신(耳目一新)으로 너무도 아름답다. 사진으로부터 볼 수 있다 싶이 로리타의 피부는 여느 아프리카 여성보다도 오히려 더 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그녀의 정교롭게 생긴 오관에서 뿜겨나오는 미감에 영향을 주지 않고 있다. 약간 높다란 콧마루, 짙은 눈썹과 사람의 심령을 사로잡는 그윽한 두 눈, 이런 것들을 하나로 조합하여 구성된 얼굴은 피부의 국한 성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정교한 얼굴 외 로리타의 몸매 역시 쭉 빠지고도 건강미가 넘친다. 거기에 평소 치장에 아주 신경을 쓰고 있는 로리타이다. 때문에 네티즌들은 그녀를 두고 <가장 아름다운 흑진주>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한편 평소의 로리타는 사교적인 자세로 자기의 일상생활을 친구들과 공유하기를 즐긴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사람들은 점차 이 소녀가 갖고 있는 자신감 넘치는 일면을 보아낼 수 있었으며 로리타 역시 이 때문에 재빨리 많은 팬을 가질 수가 있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로리타가 남들한테 많이 알려지게 되자 그녀의 부모는 딸의 인신안전을 위해 그녀가 단독으로 집문 밖으로 나가는 것을 극력 제한, 매번 외출 시마다 배동인이 있어야 가능했다. 또한 로리타의 <미적 매력>으로부터 알 수 있는바 미감이란 정교한 오관 및 하얗고 뽀얀 피부로 과시하는 외에도 다른 요소로 체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다. 많은 사람들 인상 속의 아프리카인은 천성적으로 검기에 아프리카의 여자애들도 모두 이쁘지 않은 것으로 각인되어 왔다. 하지만 인간은 절로 자신의 이모저모를 결정하지 못하는 것이 많다. 예하면 성별, 피부와 용모 등을 말이다. 반면에 평온하게 자신의 숙명을 접수하고 동시에 자신감을 드러낼 수도 있으며 또한 이것이 다른 수확으로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바로 아프리카의 로리타란 소녀처럼 비록 피부는 검지만 오히려 그것으로 자신감을 드러낼 수 있었으며 그리고 오관이 정교하기에 대뜸 18만 명에 달하는 팬을 가지는 <흑진주> 즉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흑인 미녀로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한테 보이는 로리타는 용모가 아주 출중한 소녀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쵸콜렛 판>의 <바비소녀>로,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녀한테 잡지 표지의 모델로 시험해 보라고 건의하기도 한다. 현실 생활에 있어서 흑인은 흔히 기시를 받고 있으며 불공정한 대우를 받기도 하지만 로리타만은 다르다. 그녀는 자신이 검은 색 피부를 가진 것으로 하여 오히려 긍지감과 자호감을 갖고 있다. 로리타가 자신의 사진을 인터넷에 올린 후 그녀한테 차례지는 것은 경멸이나 조소인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네티즌들의 댓글은 모두 로리타에 대한 찬미였으며 그녀를 아프리카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네티즌들은 “진정한 아름다움은 피부를 갖고 가늠하는 것이 아니다. 로리타한테는 사람을 흡인하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정교한 오관과 완미한 몸매 등은 미녀 표준 잡기에 있어서 부인할 수 없는 조건이다. 아울러 로리타는 아프리카 흑인한테는 그닥 흔치 않은 높다란 콧마루와 아시아인의 심미표준에도 잘 부합되는 조건도 어느 정도 구비되어 있다. 그러나 이윽토록 그녀를 뜯어보노라면 역시 일종 아프리카 여인의 독특한 미감을 보아낼 수 있다. 그것은 그녀가 아프리카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기 때문이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6-17
  • [역사산책] 훙커우 공원 그리고 매헌 윤봉길 ②
    ●강순화 “사람의 자유와 인류의 평등을 실현하고 세계평화를 달성하는 것이 지상(至上)의 정의이고 정의를 위하여 삶을 희생한 이를 의사(義士)라 한다. 영웅과 성인군자는 살아서 명예가 있지만 의사는 죽어서 말한다.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을 의사로 흠모하는 뜻이 거기에 있다.” 위의 글은 서울 양재동소재 윤봉길의사기념관 뜰에 세운“숭모비”에 새긴 비문의 첫 구절이다. 매헌 윤봉길은 겨우 24년 6개월의 짧은 삶을 살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순국하기 8개월 전에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으킨 역사적 의거로 그는 청사에 길이 빛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만민의 마음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오만한 일본, 천장절(天長節)행사에서 폭탄공격을 받다 상해사변은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끝날 무렵에 정전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의기양양한 일본군은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虹口)공원에서 그들의 소위 천장절행사를 크게 열어 승전기념을 겸한 군사적 시위를 펼치고자 획책하였다. 천장절이란 일본왕의 생일로 군국주의 일본의 우두머리들이 일본인들에게 맹목적인 충성심을 강요하고 그들을 전쟁마당에 끌어낼 목적으로 왕을 신격화하고 왕의 생일을 일본의 최대의 명절이자 신성한 날로 지켰던 그들의 국경일이다. 일본은 마치 1871년 프로씨야군대가 파리를 점령하고 베르사이유궁전(凡爾賽宮)에서 윌헬름 1세 독일황제 대관식을 연 것을 흉내라도 내듯이 남의 나라에서《만세 일본》이라는 플래카드를 붙이고 오만한 행사를 펼친것이다. 당시 홍구공원안은 상해거주 일본인 1만여명, 상해 침략 일본군 1만여명, 그밖에 각국 사절과 각계 초청자 등 2만여명 인파가 회집하여 성황을 이루고있었다. 여기에 한국의 청년 윤봉길이 일본 국기를 들고 도시락과 물통을 메고 잠입한 것이다. 일본군은 오전 10시부터 분열식과 사열식을 마치고 기념식을 시작하였다. 높은 단위에 상해파견군 총사령관 시라가와 요시노리(白川義則)대장을 비롯한 고관들이 도열하고 그 오른쪽에 도모노(友野) 거류민단 서기장이 닭벼슬모자를 쓰고 사회를 봤다. 식이 시작되고 오전 11시 40분쯤 되여 윤봉길은 성난 사자처럼 뛰어나가 지니고 있던 도사락을 던졌다. 중국군 병공장(兵工廠)에 근무하던 김홍일(金弘壹-중국 귀주의 륙군강무학교를 졸업한 독립운동가)이 만든 폭탄은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을 내며 작렬하였다. 단상에서 기고만장하게 서있던 원흉들이 엎어지며 연단 아래로 쓰러졌다. 제국주의가 쓰러지는 모습이었다. 축하객으로 참석했던 한 쏘련 인이 촬영한 현장필림을 보니 일본뿐아니라 세계 제국주의가 무너지는 모습 같았다. 이때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가와 요시노리대장과 상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定差) 등은 즉사하고 일본 제3함대 해군사령관 노무라 기찌사부로(野村吉三郞)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등 나머지 놈들도 눈과 다리를 잃었다. 당시 주중(駐中) 일본공사였던 시게마쯔(重光葵)는 왼다리를 잃은 채 13년 뒤인 1945년 9월 2일 패전 일본의 외무대신으로 미주리함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했다. 윤봉길은 거사후 군 경찰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쓰러졌다. 주먹질, 발길질, 몽둥이가 그의 몸으로 퍼부었다. 그가 입고 있은 회색정장은 갈기갈기 찢어졌고 몸의 형태는 알아볼수 없게 되여 땅바닥에 쓰러졌는데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군경들은 경계선을 치고 그를 감시하다가 이윽고 차가 와서 머리와 다리를 집어 들어 짐짝처럼 차 뒷좌석에 처넣었다. 윤봉길의사의 최후를 기록한 일본 륙군성 극비문서 만밀대일지(滿密大日記)에는 이렇게 기록되여있다. 4월 29일 상해에서 시라가와 군사령관 등에게 폭탄을 던져 상해파견군 군법회의에서 5월 25일 살인, 살인미수, 상해, 폭발물 단속벌칙위반으로 사형이 선고된 범인 윤봉길은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가나자와(金澤)시 교외 육군 공병작업장내의 서북쪽 골짜기에서 제9사단 군법회의 검찰관 겸 육군 감옥장 네모토 소타로의 지휘하에 사형이 집행되였다. 사형집행이 끝나자 유해(遺骸)를 씻고 납관(納棺)한 다음에 가나자와시 공동묘지의 서쪽에 깊이 약 6척을 파서 매장하여 오전 10시 30분 모두 종료되었음. 처형 직전의 윤봉길의사:“사형은 미리 각오한 것이니 지금에 임하여 아무것도 해야 할 말이 없다.” 일본어로 하는 말이 명료하고 미소를 짓는 등 그 태도가 극히 담력이 굳세고 침착하였다. (일본 헌병사령관 보고서) 꼭 실현되고야말 대한독립 “아직은 우리가 힘이 약하여 외세의 지배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세계대세에 의하여 나라의 독립은 멀지 않아 꼭 실현되리라 믿어마지않으며 대한 남아로서 할 일을 하고 미련 없이 떠나가오.” 이는 1932년 12월 19일 윤의사의 희생직전 마지막 유언 이였다. 중국 연안에서 조선의용군으로 활략하던 김학철씨는 그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동기는 바로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 의거에 충격을 받아서였다고 하였다. 홍구공원의 정의로운 죽음은 우리 계레의 갈 길을 밝혀주었을뿐아니라 당시 중국의 젊은이들에게도 커다란 자극과 공명을 남겼다. 이 쾌거로 인하여 수괴를 잃은 일제는 기세가 크게 꺾기여 급진적침략행보를 늦추지 않을 수 없었으며 중국은 민족적 자각의 계기로 삼아 일제침략에 대처할 준비를 서두름과 동시에 한국을 동반자로 재인식하게 되였다. 또한 전 세계가 베르사이유(凡爾賽) 체제의 무력함을 인식하고 피압박민족의 해방 없이는 세계평화를 기대할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였다. 림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중국의 적극적인 지원도 시작되었고 독립을 기다리다 지친 세계 모든 약소민족의 가슴에 확고한 신념과 희망을 심어주게 되었다. 일제가 윤봉길의사를 가두고 처형하여 땅에 매장해도 윤봉길의사의 기개는 싹이 트고 일제의 모든 것을 태워버릴만한 폭발적이고 값진 민족의 에너지로 작동 되였다. 윤의사의 의거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을 새롭게 한 통쾌한“독립전쟁”의 한 장면 이였으며 민족자존을 세계만방에 선양하는 계기가 되였음도 당연한 리치였다. 당시 세계 언론들은 이를 일제히 보도하였고 그 정의의 기록은 지금도 역사속에서 살아숨쉬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할빈 의거와 더불어 한국독립운동사상 2대 쾌거인 상해의거가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을“백범일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이 의거로 말미암아 한인들에 대한 중국인의 감정은 놀랄 만큼 호전되었다. 특히 이 의거를 계기로 중국 국민당정부는 임시정부에 대한 물심 양면으로의 협력과 원조를 베풀기로 다짐했다. 둘째, 이 거사로 말미암아 미국, 하와이, 메히코, 쿠바 등에 사는 한인교포들의 애국열정은 전무후 무했으리만큼 높아졌고 그리하여 임시정부에 대한 납세와 백범에 대한 후원이 격증했다. 초대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省齋 李始榮)도 조국광복 이후 출판한“도왜실기”에서 상해의거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우리가 조국을 되찾고 조국 땅을 밟게 된 것이 모두가 윤의사의 덕이요. 우리 임시정부와 윤의사를 비겨서 말하자면 갓 난 어린이가 깊은 연못에 빠져서 금방 가라앉는 위급한 찰나에 윤의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물속에 뛰어들어 이 어린이를 번쩍 건져 구해놓았소. 이 어린이가 자라서 오늘 삼천리강산을 달리고있는 것이요. 조국독립투쟁이 우로부터의 부과된 의무조항이 아니라 밑으로부터 광범위하게 솟아오르는 민중의식의 일환이기에 윤봉길의사의 쾌거는 결코 일회적 투쟁의 뜻이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항일투사의 출현과 열렬한 투쟁의 지속과 확산을 예고하는 것이였다. 윤의사의 의거이후 중국 국민당은 적극적인 지원책을 모색하여 김구와 장개석은 중앙육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의 후신)에서 영수회담을 갖고 군사교육에 관한 지원을 협의했다. 어쨌든 한국독립군의 본격적 편성을 위해 독립군장교양성에 착수했다는 것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획기적인 일이였다. 이 획기적 조치가 마련된 촉매제는 바로 홍구공원 의거이며 그 주인공은 윤봉길의사였던 것이다.” 김구-장개석 회담의 산물로 낙양군관학교에 한인반을 설치하여 광복군조직의 기간요원 확보책이 마련된 이후 중국대륙에서의 독립운동은 새로운 국면에 진입하였다. 그것은 전적으로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가 직접적 도화선이 된 것이다. 상해의거로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이 주로 하게 되였다. 한인애국단의 윤봉길의사의 의거로 20년대 이후 침체상태에 있던 임시정부의 기능을 회복하는 작용을 하였다. 그후 중국정부의 지원이나 동포들의 지원도 모두 한인애국단의 김구를 통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하게 되여 자연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이 주도하게 되었다. 임시정부의 기반은 굳어졌고 체제가 강화되었다. 독립 운동가는 모두 살신성인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지만 의열투쟁자(義士)처럼 죽음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윤봉길의사의 길은 그래도 죽음의 길이다. 그 죽음의 길에서 보여준 윤봉길의사의 용기와 여유, 그야말로 순결무구한 애국애족의 정신과 태도는 누구보다 먼저 독립운동자 모두가 따라 배웠다. 윤봉길의사는 무식하거나 천박한 청년이 아니므로 그의 상해의거는 충동적이거나 감상적 행동에 의한것이 아니였다. 그는 식민지하 청년의 역사의식이 투철하였고 배웠기에 자유 아니면 죽음을 택한다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윤의사의 활동은 일제가 지적하는 것처럼 단순한 테러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임시정부에 의한 의열투쟁의 일환이였다. 이와 같이 임시정부의 기반이 굳어짐에 따라 임시정부가 초기처럼 전체 독립운동계의 주심적위치를 회복한 점이다. 임시정부는 상해의거를 계기로 만주와 미주 동포사회의 독립운동을 포용 통일하게 되여 그 수립초기처럼 독립운동의 구심체 또는 통합기능을 회복하였고 특히 미주지방의 동포들은 초기처럼 다시 임시정부에 재정지원활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한중연합 항일운동전선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였다. 완바오산 사건 등으로 한중민족감정이 소원하던 무렵이고 더우기 상해사변 등으로 중국인의 배일감정이 팽배한 시점에서 윤의사의 의거로 한중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 상해의거 직후 각 신문에서는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중국청년의 행동이라고 잘못 보도하였는데 김구의 성명서가 발표된 뒤에야 전 세계가 진상을 알게 되였다. 각 신문에서 중국청년이라고 오보할 만큼 상해전쟁 뒤 중국국민의 항일감정이 치솟아있었던 것이다. 동북의 땅(만주)을 빼앗기고 또 상해에서 굴욕을 당한 중국이였다. 그런데 상해의거 후 장개석정부와 중국국민은 일변하여 장개석이 김구를 초청하여 양자 단독회담이 이루어질 정도로 중국정부와 중국국민은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게 되였고 그들의 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해주기까지 하였다. 임시정부가 중국에 있으면서 그들의 지원이 없이 활동할 수 있는 일은 아니였다. 물론 그들도 일제의 침략을 받고있었으니 당연한 것으로 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를 통하여 장개석을 비롯한 그의 정부가 한국 임시정부에 대한 인식을 달리했던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상해의거는 국제적으로 전례 없는 외교적 효과를 올렸다. 상해의거는 전 세계의 각광을 받은 것이 사실이고 그 충격적인 사건에 전 세계가 놀랐다. 임시정부 수립후 어느 외교활동보다도 한국인의 독립항쟁이 한낱 감상적구호가 아니라는 점을 명백하게 입증하고 과시한 것이 상해의거였으니 그 외교적 성과는 가히 짐작될 것이다. 세계 모든 신문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를 다루었고 오랫동안 친일노선을 택하던 영국에서도“런던 타임스”를 비롯한 언론이 일본을 규탄하였다. 상해의거는 한국민족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의거이후의 항일독립투쟁은 비밀결사적인 투쟁이 지닌 의의를 계승함과 동시에 그것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여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후일의 한국광복군 성립으로 이어졌고 군관양성에 주력하여 한국독립운동은 다시 무력항쟁의 실마리를 풀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임시정부에서는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내막을 기록한 소책자를 만들어 각국 역사관과 단체에 배포하였다. 이 소책자의 표지에는 김오연이라는 사람이 두동강난 일본도(日本刀)를 그려놓아 통쾌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더욱 통쾌하고 신선한 반응은 국민당정부의 장개석의 언급이였다.“중국의 백만대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윤봉길의사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놓았다.” 중국인들의 감정과 감탄을 너무나 잘 집약해서 표현한 말이였다.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의거가 한 의혈남아의 의협적테러가 아니라 일본에 대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한국인들의 의지를 단적으로 표상하는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1946년 6월 30일, 윤봉길의사에게 해방 후 첫 국민장이 엄수 되였고 서울 효창공원에 그의 유해가 안장 되였다. 1962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였고 1988년“상해인민혁명사화책”에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윤의사를 크게 소개하였다. 맺 음 말 민족의 독립을 갈구하는 시대상황과 관련하여 역사적 인물을 평가한다면 매헌 윤봉길이 걸어간 역사의 길은 항일독립투사의 길이였다고 감히 결론 짓고 싶다. 사람과 사회, 사람과 시대를 매개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시대정신일진대 윤봉길의사의 행위와 발자취는 역사의 발전방향에 크게 이바지한 것이었다. 매헌 윤봉길은 일신의 안일과 가족의 평안을 돌보지 않고, 일생을 항일독립운동가로서 일관하였다. 매헌은 멸사봉공의 원칙을 벗어난 일이 없었고 평생을 민족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 헌신하였다는 점이다. 지적방황과 고뇌와 충절의 길을 걸어온 의사의 신념과 행동을 관통하는 기본적전제가 애국충절이였다. 매헌의 고결한 일생은 개인의 영광이라기보다는 조국광복의 정의를 위해,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더 나아가 자라나는 후손들을 위해 영원한 귀감이 아닐 수 없다. 매헌 윤봉길은 조국광복의 순교자이기에 앞서 농촌부흥운동의 선구자였다. 매헌은 선각적지식인이요, 동시대인을 뛰어넘는 식견과 신조를 지닌 인격자요, 양심가였다. 그는 농촌을 배우기 위하여 살고 농민을 살리기 위하여 배웠다. 매헌 윤봉길은 입으로만 독립을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불의를 철저히 거부하는 비타협주의와 민족의 독립을 찾고야말겠다는 살신성인의 정신을 지녔다. 즉 매헌은 양심과 행동을 겸비한 항일독립운동가였으며 정녕“민족정기의 화신이며 행동적지성의 본보기이며 구국애족의 영원한 사표”였다. 윤봉길의사의 생애를 둘러싼 자기희생과 처형의 비장성(悲狀性)은 한민족의 숙명 또는 한반도의 상황이 지닌 독특한 비극성(悲劇性)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윤봉길의사의 정신은 언제나 구국의 길이자 통일의 길임을 굳게 믿기에 윤의사의 충의 혼을 기려 민족정기 함양의 산 교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요약하면 윤봉길의사는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아 한 가닥의 부끄러움이 없는 길을 걸어 소신과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단 한 번도 한 일이 없거니와 추호도 량심의 가책을 받을 일이 없었다. 그는 식민지 민중의 사표요, 한국독립운동사의 화신이며 조국광복의 초석인 것이다. 나라와 민족독립의 틀과 뼈를 세운 열사였다고 하겠다. 어두운 역사의 하늘에 한때 찬란하게 수놓은 광망(光芒)의 상해의거를 감행한 윤봉길의사의 생애는 너무나 짧았다. 그러나 그가 이룩한 장거가 한민족독립운동의 기관차 역할을 하였고 그 우에 대한민국이 섰다. 이렇게 보면 의사는 결코 죽지 않았다. 의사는 이 땅의 역사, 이 땅의 민중과 더불어 늘 푸르게 살아있음을 의심치 않는다. 조국광복의 밑거름이였고 조국광복의 홰불을 들었던 의사가 오늘날에도 길이 추모되여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6-14
  • [역사산책] 훙커우 공원 그리고 매헌 윤봉길 ①
    ●강순화 “사람의 자유와 인류의 평등을 실현하고 세계평화를 달성하는 것이 지상(至上)의 정의이고 정의를 위하여 삶을 희생한 이를 의사(義士)라 한다. 영웅과 성인군자는 살아서 명예가 있지만 의사는 죽어서 말한다.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을 의사로 흠모하는 뜻이 거기에 있다.” 위의 글은 서울 양재동소재 윤봉길의사기념관 뜰에 세운“숭모비”에 새긴 비문의 첫 구절이다. 매헌 윤봉길은 겨우 24년 6개월의 짧은 삶을 살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순국하기 8개월 전에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으킨 역사적 의거로 그는 청사에 길이 빛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만민의 마음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출신과 교육 20세기 초, 기울대로 기운 한말의 풍운은 마침내 나라마저 무너져내려앉으려는 피빛노을녘이였다. 한반도의 운명이 경각에 달해 이른바 을사5조약을 빌미로 설치한 일제의 통감부가 한반도 강점준비의 그물을 쳐나가기에 혈안이 되여 있던 숨 가쁜 위기의 나날, 어두컴컴해지는 한민족의 역사의 박명기에 한 줄기 빛이 이름없는 농가에서 쏟아져나왔다. 1908년 6월 21일 저녁 8시경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은 그 생애의 고고성을 우렁차게 울렸다. 산지수명(山地秀明)한 두메산골, 청풍명월(淸風明月)의 수려한 예향(禮鄕) 충청도 예산땅 한 촌락에서의 일이다. 일명《목발이》라고 하는 이 마을의 한미한 농가에서 듬직한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목계천 건너 섬속의 섬, 도중도(島中島)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오늘의 광현당(光顯堂)에서 갓 20세의 어머니 경주김씨(慶州金氏) 새댁이 첫 옥동자를 분만하자“대장감이로구나!”하며 할머니가 제일 먼저 반겼다. 덕산“목발이”마을에서는 이 가문이 5형제씩 두게 되여 마침 앞산인 수암산(修岩山)에《5형제바위》가 있으므로 수암산 5형제바위의 정기를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곳 뒷산 가야산(伽倻山)줄기에 장군봉(將軍峯)도 있어서 장군감이 또 태어났다고 반겨마지않았다. 갓난아이때 부터 대장감이라 해서 집안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부모님들은 첫아들을 무척 대견스럽게 여겼고 앞날에 대한 기대 또한 남달랐다. 이렇게 열여덟된 아버지 윤황(尹璜)씨와 두살우인 어머니 김원상(金元祥)사이에서 태여난 윤봉길, 자(字)는 용기(鏞起)요, 본명은 우의(禹儀)이고 봉길(奉吉)은 별명이었다. 서당을 마칠즈음 스승인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이 자기 아호에서 글자를 취하여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후일 망명지 중국 상해에서 대의거에 성공하고 투옥되였을적에 옥중의 가명으로 희의(熙儀)를 쓴적이 있다. 윤봉길이 태어난 집안은 몰락한 양반가문으로서 전형적인 농가였다. 평생 땅만 파는 할아버지는 마을에서“윤두더지”로 통했고 억척스런 성미와 철저한 근면 성실에 하늘도 감동했던지 마침내 벼 백여 석을 거둬들이는 풍수를 이루었다. 흙에서 태여나 생애를 마치기까지 오로지 흙의 주인으로서“목발이”마을“내 건너”에 농사왕국을 꾸민 할아버지는 그처럼 당찬 농민의 본보기였다. 그래서 가문의 택호가“내 건너”로 통하기도 했다. 윤봉길은 1913년 다섯 살 때부터 큰아버지 경(坰)의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으며 1918년에는 덕산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어려서부터 유학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는 가운데 애국심을 키웠는데 열두 살 때인 1919년에 일어난 거족적 민족운동인 3·1운동의 자극을 받으면서 민족적 분노를 목격하였다. 그 충격으로 일제의 제국신민(帝國臣民)으로서의 식민지노예교육을 거부하고 학교를 자퇴하였다. 그 후 최병대(崔秉大)의 문하에서 동생 성의(聖儀)와 함께 한학을 배웠다. 1920년경"동아일보",“개벽” 등을 통하여 새 사상에 접하면서 겉보기에는 평범한 농가에서 자라면서도 남달리 비범한 기상을 보였다. 1921년부터는 고명한 유학자 성주록(成周錄)이 개설한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공부했는데 총명하여 신동(神童)이라 불렸고 뛰어난 시재를 보여 약 300여 편의 자작한시를 수록한"명추(鳴推)","옥수(玉睡)》,《임추(任椎)" 등 시문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산천초목도 서광어린 정기를 어린 심신에 불어넣어 어두움으로 치달리는 역사에 새 불씨를 심어 일으키도록 해주는 듯 싶었다. 어린시절부터 척박한 산골, 한미한 시골집을 배움터로 삼아 심신을 연마하는 한편 농촌계몽활동을 전개하면서 점차 농민들의 가엾은 생활에 눈을 뜨게 되였다. 경제적으로 빈곤할 뿐만아니라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해 문맹으로 생활하는 농촌사회의 참경은 그에게 깊은 동정심을 갖게 하였으며 스스로 시련을 극복해 나가는 슬기와 용기를 익혀 체질화해 나갈 수 있었다. 1926년 19세 되던 해 “학문이 학문으로 그 가치를 나타내는 일은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행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 그는 서숙생활을 마치고 고향 목바리마을 49가구 200여명을 상대로 하여 문맹퇴치운동을 시도하고 사랑방에 야학을 개설했다.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한글, 역사, 산수, 과학, 농사지식 등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체험과 지식을 총동원하여 농민계몽, 농민부흥운동, 독서회운동 등으로 농촌부흥에 전력하였다. 다음해에는 이를 더욱 이론적으로 뒤받침하기 위하여 3편으로 된 “농민독본”을 저술하여 유인물책자도 펴냈다. 제1편은 현전하지 않고“계몽편”,“농민의 앞길” 2편이 남아있는데“계몽편”은 예절 등 개인의식으로부터 시작해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을 비유법으로 일깨워주었고“농민의 앞길”은 농민본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길, 즉 농민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는바 20세 청년으로서는 너무나도 초시대적인 선진적사회의식과 투철한 독립정신을 보여주었다. “농자 천하지대본이요, 농심은 천심이라 했거늘 잠들었던 가난한 농민들을 흔들어 깨워야 산다, 알아야 산다, 협동해야 산다”라고 생각한 그는 1929년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하여 농촌부흥운동을 본격화하였으며 그해 1월초부터 1년간 기사일기(己巳日記)를 쓰기 시작하였다. 2월 18일에는 부흥원에서 학예회를 열어 우화극《토끼와 여우》를 공연하였는데 여우같이 교활한 일제를 풍자했기에 관중의 대환영을 받자 곧 일본 놈들의 주목을 받게 되였으며 경찰에 불려가서 추궁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윤봉길은 이에 구애받지 않고 계속 지방농민들을 규합하여 자활적농촌진흥을 위하여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 되였다. 한편 수암체육회(修巖體育會)를 설치 운영하면서 건실한 신체로서의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후 서울 시조사잡지 기자 이흑룡(李黑龍)이라는 독립운동공작원과 자주 접촉하게 되면서 그의 활동은 본격적으로 항일의 성격을 지닌 농민운동으로 바뀌었다.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 다짐한 순국의 정신 1929년 11월에 일어난 광주학생사건은 매헌 윤봉길로 하여금 민족혁명투쟁의 길에 들어서게 했다.“농민이 우매하기 때문에 우리가 못사는 줄 알고 농민운동을 펴왔는데 알고 보니 그 왜놈들때문에 못사니 이 불효자식 갈길이 무엇인가는 아시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을 어머님전상서에 올리고 23세 때인 1930년 3월 6일에 만주로 망명하이었다. 그의 책상에는“사내대장부로 집을 나가 뜻을 이루지 않고는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丈夫出家生不還)”는 결연한 의지를 담은 휘호 한폭을 남겼다. 1930년 10월 18일 망명지 청도에서의 서신에는 “사람은 왜 사느냐? 이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더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라고 썼다. 이 처연한 글귀들에는 당시 나라와 민족을 위한 불같은 신념으로 항일운동에 나선 한 젊은 독립투사의 단호함과 비장함이 서려있다. 중국으로의 망명 도중 선천(宣川)에서 미행하던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45일간이나 옥고를 치렀다. 그 뒤 만주로 탈출하여 그곳에서 김태식(金泰植), 한일진(韓一眞) 등 동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그해 단신으로 대련(大連)을 거쳐 청도(靑島)에 도착한 윤봉길은 1931년 여름까지 현지를 살펴보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하였고 이곳에서 세탁소 회계원, 모직공장 직공 등으로 취직하면서 돈을 벌어 야학과 농민운동으로 빌린 돈을 갚으라고 고향에 송금하기도 하였다. 1931년 8월 활동무대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옮겨야 보다 큰일을 수행할수 있을것이라 믿고 그곳으로 갔다. 우선 상해 프랑스조계 하비로화합방(霞飛路和合坊) 동포석로(東浦石路) 19호 안공근(安恭根)의 집 3층에 숙소를 정하였다. 생계를 위하여 동포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미리공사(美利公司)에 직공으로 종사하면서 상해영어학교에서 수업하는 한편 로동조합을 조직하여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이 1월 8일 일본 동경에서 일본왕을 폭살하려다가 실패하자 상해일대는 복잡한 정세에 빠지게 되였다. 더욱이 일제는 1월 28일 고의로 죽인 일본승려사건을 계기로 상해사변을 도발하였다. 중일 양군의 총소리를“민족과 민족이 부딪치는 소리”로 들은 윤봉길은 자신의 길을 찾은 듯 결심하였다. 그래서 그해 겨울 마랑로(馬浪路. 지금의 馬當路) 보경리 4호에 있는 림시정부를 찾아갔다. 그리고 백범 김구를 만나“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임”을 호소하였고 1932년 4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한인애국단은 임시정부의 행동단체였다. 김구가 직접 지휘하여 이미 이봉창, 류상근, 최흥식을 일본과 만주로 파견하여 큼직큼직한 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본이 1931년 9.18사건을 일으켜 이른바 만주사변을 도발한데 대한 임시정부의 대책이기도 했다. 임시정부에서는 리봉창을 적의 심장부에 파견하여 일본왕 히로히또(裕仁)를 폭살하는 한편 류상근과 최흥식은 만주 방면의 고관을 저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것은 만주의 한, 중련합군의 중요한 지원작전이였다. 이에 일본은 만주의 확보를 위하여 중국의 후방을 교란하고 한국독립운동의 거점을 공격하는 계획을 세워 반격해왔다. 그것이 이른바 상해사변이고 윤봉길은 그 흉계를 다시 뒤집어 응징한 것이다. “제가 큰뜻(大志)을 품고 상해에 천신만고로 왔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다녔던 것입니다. 그럭저럭 중일전쟁도 중국에 굴욕적인 정전협정으로 결착되는 형세인즉, 아무리 생각해봐도 죽을 자리를 구할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에게 동경사건과 같은 경륜이 계실 줄 믿고 찾아왔습니다. 지도해주시면 은혜 백골난망입니다.”라고 하는 윤봉길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해보니 평시에 보아온 학식있고 착실한 청년로동자뿐이 아니라 정녕 살신성인의 대의(大義), 대지(大志)를 품은 의기남아였다고 백범 김구는 말했다. “뜻이 있으면 일도 이룬다(有志者事竟成)고 안심하시오. 내가 근일에 연구하는바가 있으나 마땅한 사람을 구하지 못해 번민하던참이였소. 전쟁 중에 연구 실행코자 경영하던 일이 있으나 준비부족으로 실패했는데 지금 신문을 보니 왜놈이 전승한 위세를 업고 4월 29일에 홍구공원에서 이른바 천왕의 천장절 경축례식을 성대히 거행하며 요무양위(耀武揚威)를 할 모양이요. 그러니 군은 일생 대목적을 이날에 달함이 어떠하오?” 하는 물음에 윤군은“저는 이제부터는 흉중에 일점 번민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해집니다. 준비해주십시오.”라고 쾌히 승낙했다. 그는 한인애국단 단장인 김구 앞에서 혈서로 다음과 같은“선서문”을 써 이 사명을 수행할 것을 맹세하였다. “나는 赤誠으로써 祖國의 獨立과 自由를 回復 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여 중국을 침략하는 敵의 장교를 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 大韓民國 14년 4월 26일 선서인 尹奉吉 한인애국단 앞" 역사적인 순간인 4월 29일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윤봉길은 말쑥한 일본식양복으로 갈아입고 날마다 홍구공원에 가서 식장 설비하는 것을 살펴보며 그날 자기가 거사할 위치를 점검했다. 한편으로 시라가와(白川)대장의 사진을 구하고 태양기(일본기)를 사는 등등의 일로 매일 홍구에 내왕하면서 듣고 본 것을 김구에게 회보하였다. "오늘 홍구에 가서 식장설비를 구경하는데 시리가와 이놈도 왔습니다. 제가 그 놈의 곁에 섰을 때에 어떻게 내일까지 기다리는고, 오늘 폭탄을 가졌더라면 이 자리에서 당장 쳐 죽일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것이 무슨 말이요? 포수가 꿩을 쏠 때는 날게 하고 쏘아 떨어뜨리는 것이나 숲속에 자고 있는 사슴을 쏘지 않고 달리게 한 후에 사격하는 것 모두가 쾌미(快味)를 위함인것이요. 군은 내일 성공의 자신감이 박(薄)하여 그러는 거요?"라고 물으니"아닙니다. 그 놈이 내곁에 선것을 보았을 때 문뜩 그런 생각이 나더란 말씀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번에 성공할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군이 일전에 내 말을 듣고서 한 얘기 중에 이제는 가슴의 번민이 그치고 편안해진다는 것이 성공의 철증으로 믿고 있습니다. 내가 치하포에서 쓰지다를 죽이려 했을 때 가슴이 몹시 울렁거렸지만 고능선선생으로부터 들은 득수반지무족기(得樹攀枝無足奇), 현애살수장부아(懸崖撒手丈夫兒)란 구를 생각하니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군이 결심하고 일을 행하려는 것과 똑같은 이치요." 윤봉길은 김구의 말을 깊이 마음에 새기는 낯빛을 가지는 것이였다. 4월 29일 새벽, 김구는 윤봉길과 함께 김해산 집에 갔다. 최후로 식탁에 앉아 아침밥을 먹는 윤봉길의 모양은 담담하고 태연하였다. 시계가 7시를 치는 종소리가 들렸다. 윤봉길은 자기 시계를 꺼내 김구에게 주면서 그의 시계와 바꾸기를 청했다. "선서식 후에 선생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산 것입니다.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나에게 주십시오. 나는 한 시간밖에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그것을 기념품으로 받고 내 시계를 내주었다. 윤봉길은 식장으로 떠날 때 자동차를 타면서 소지한 돈을 꺼내 김구의 손에 쥐어 주었다. "약간의 돈을 갖고있는것이 무슨 방해가 되는가?" "아닙니다. 자동차 삯을 주고도 5, 6원은 남겠습니다." 그러자 곧 자동차가 움직인다. 김구는 목멘 소리로 말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윤봉길이 차창으로 김구를 향해 머리를 숙일 때 자동차는 큰 소리를 내며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공원으로 향했다.(다음에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6-14
  • 홍색 연안 시절의 조선민족 여성들
    “아, 연안! 너 장엄하고 웅위로운 옛성이여 가는 곳마다 항적의 노래 울려 퍼지고 아, 연안! 너 장엄하고 웅위로운 옛성이여 끓는 피 네 가슴에서 용솟음친다. ... ... ... 아, 연안! 너 장엄하고 웅위로운 성벽은 철같은 항적의 전선 이루었나니 너의 그 이름 세월과 더불어 역사에 찬란히 길이 빛나리.“ 이는 우리 민족의 천재적 성악가이며 작곡가인 정율성(1918.7--1976.12)이 스무살 때 창작한 "연안송(가)"의 한 구절이다. 1938년부터 항일근거지에서 가장 많이 불렸던 "연안송(가)"! 장개석통치구의 수많은 열혈청년들과 학생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국민당의 봉쇄선을 목숨 걸고 뚫고 넘어 만난을 무릅쓰며 혁명의 성지-연안으로 찾아왔다. 그중에는 우리 조선민족의 열혈청년들도 있었다. 연안성에서 동쪽으로 연하강을 따라 10여리 걷느라면 쵸얼거우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과 연하강을 사이 둔 건너편엔 리가평이란 마을이 있었다. 바로 이곳에 조선의 우수한 아들딸들을 교양하는 조선혁명군정학교와 조선독립동맹이 있었다. 그때 그곳에 있은 조선 사람은 약 200여 명 되었는데 그중에는 여성들도 있었다. 그 여성들 중에서 명망이 높았던 이로는 허정숙(许贞淑)이였다. 허정숙은 당시 연안군정학교의 조직교육을 책임진 부과장이었다. 조선의 유명한 애국자 허현선생의 큰딸로 태어난 허정숙은 서울에서 소학과 중학을 마치고 일본에 가 대학문과를 공부하고 “동아일보”기자로도 활약하였고 후엔 잡지“신여성”을 편집하며 사회활동에 투신하였다. 1925년엔“서울여자청년동맹”을 조직한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되었다. 1927년 5월엔 기독교, 불교, 천주교 등 각 종교단체와 통일전선조직-“근우회(槿友会)”를 창립하고 서울의 여자학생운동을 지도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중심으로 각 여자학교의 학생시위를 지도한 것으로 하여 일제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2년만에 석방된 그녀는 다시 항일활동을 하다가 재차 체포되어 1936년에야 석방되었다. 출옥 후 허정숙은 최창익, 한빈 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들은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청년들을 조직하여 선후로“조선공산주의청년전위동맹”,“조선청년전지(战地)복무단”을 건립하였으며 활발한 항일 활동을 진행하다가 1939년 6월 연안으로 들어갔다. 연안에서 그녀는 항일군정대학을 다녔고 졸업 후에는 팔로군 120사에서 정치지도원 등 사업을 하다가 1944년 태항산조선혁명청년학교가 연안에 옮겨와 군정학교를 성립할 때 허정숙은 조직교육과 부과장으로 임명 되였고 직접 정치과목 강의도 맡아하였다. 그의 이론수양이 높은 강의는 언제나 생동하고 실제적이여서 학원생들의 환영을 받았다. 8.15 후 허정숙은 연안에서 나와 심양을 거쳐 조선(북한)에 귀국했으며 그 후 수차 조선당정대표단의 일원으로 중국을 다녀갔고 조선대표로 국제여성회의에 출석하기도 했다. 허정숙과 때를 전후하여 연안에 들어선 다른 한 여성으로는 난영(김영숙)이였다. 조선 함경북도의 한 지주집 딸로 태여 난 그는 망명한 연인을 따라 중국에 들어와 혁명에 참가하였다. 그는 일본어에 능숙하여 중경에 있을 때엔 일본어방송 아나운서까지 담당하였다. 후에 연안에 들어간 그녀는 태항산 129사에 배치되어 사업하였다. 당시 팔로군 115사가 산동성 양산에서 평형관 전투의 승리로 일본군을 포로하였는데 그중에는 일본동경대학출신인 고급군의가 있었다. 팔로군전선총사령부에서는 그 고급군의를 태항산에 호송하여 난영에게 교육임무를 주었다. 난영의 도움 밑에 그 고급군의는 “일본인반전동맹”의 중요한 간부로 성장하였다. 1941년 1월 무정이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창설할 때 난영이는 129사의 조선인 대표로 회의에 출석하였고 그 후 조선혁명청년학교와 독립동맹의 도서관관리원 겸 무정의 비서로 있었다. 성격이 활달하고 활약적인 난영이는 예술에서도 장끼를 보여주었다. 학교에서 신입생환영식이나 기념일 공연에는 그가 당연히 주역이 되었으며 김창만 편극으로 된 대형화극“조국의 딸”의 여주인공 역도 그녀가 맡았고 의용군이 화북에서 처음 겪은 호가장전투를 반영한 극“태항산우에서”의 여병 역도 그녀가 맡았다. 1944년 음력설 직전 난영(김영숙)은 조선독립동맹 조직부 조직과장으로 승진 되었고 8.15 후 조선(북한)에 귀국하여 무정과 결혼하였다. 6.25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북경대학 유학생으로 파견되여 전문적으로 중국과 조선의 문화교류와 역사를 연구하였다. 조명숙(赵英)은 현처양모형의 여인으로서 비행사 출신인 윤공흠(尹公钦)의 부인이다. 항전 전에 남편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는데 1941년 조선청년연합회 창립활동에 참가하였고 그 후 줄곧 태항산에 있다가 1944년초에 연안에 들어가 독립동맹의 간부로 되었다. 8.15후에는 조선(북한)으로 귀국하여 어느 도의 당책임 일군으로 있었다. 이 외에도 연안에 들어가 항일전쟁에 참가한 조선민족 여성들이 적지 않았다. 미인으로 불리던 석영(石英, 조직교육과 주춘길과장의 부인), 그리고 1938년 10월10일 한구(汉口)에서 조선의용대의 유일한 여성으로 참가했던 김위나(金威娜)는 중국 영화계의 황제로 불리우는 김염의 누이동생이였다. 그리고 독립동맹의 간부였던 최의(崔毅,연안군정학교 부교장이며 조선의용군 부사령원 겸 정치위원인 박일우의 부인)도 있었는데 8.15 후 연변에 왔다가 남편과 함께 조선(북한)으로 나갔다. 이 외에도 “조선공산주의청년전위동맹”의 한 지도자인 한빈 동지의 부인 문정원(文贞元), 민족주의자 김두봉선생의 딸 김귀숙(金贵淑, 여성대대 부대장)과 김해엽(金海烨)이 있었고 태항산“3.1병원”에서 간호부사업을 하다가 조직의 파견을 받고 의과대학 공부까지 한 이화림 등 20여 명의 조선민족 여성들이 있었다. 일제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우리민족의 독립을 위해 단연 혁명의 길에 나선 겨레의 여성들, 그 가열처절한 전쟁의 년대에 그들은 남성들과 어께곁고 국경을 넘나들며 이국땅에서 청춘을 바쳤다. 그녀들의 장거는 청사에 길이길이 빛날 것이며 우리민족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류동호)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6-13
  • 중국 영화 100년 사상 절세의 미남배우 ㅡ 왕심강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지난 세기 70년대, 중국대륙에서는 영화관람은 아주 즐거운 일종의 향락이 아닐 수 없었다. 돌이켜 보면 국산영화나 수입영화가 많지 않던 그 시절, 그래도 깊은 인상을 남겼던 국산영화는 <정찰병>이었다. 특히 영화 중에서 해방군 정찰연장이 새햐얀 장갑을 낀 손으로 국민당군의 포구를 만지고는 국민당군 퇀장한테 “당신들은 포를 어떻게 정비했는가” 라고 훈시할 때 그 연장의 동작과 자태 그리고 그 어투 등은 상대방을 기죽게 말들었다. 그리고 그 정찰연장의 모습은 너무나도 멋졌다. 하다면 그 정찰연장 역을 맡은 배우가 바로 이 글의 주인공 왕심강(王心刚)이었다. 영화가 많지 않던 그 시절, 많은 영화애호자들은 몇 번이고 이 영화를 보았다고 한다. 특히 어떤 처녀애들은 순 왕심강의 멋진 모습을 보기 위해 이 영화를 7-8번이나 보았다고 하는데… 우리는 미녀들에 한해서는 절세의 미녀라는 말을 잘 붙이지만 남자에 한해서는 <절세의 영웅>이란 말은 잘 붙여도 <절세의 미남>이란 말을 잘 안 붙인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 전례를 깨뜨리고 영화 <정찰병>의 주인공역을 맡은 배우 왕심강을 두고 <절세의 미남>이라고 부르기로 해본다. 사람은 아무리 잘 생긴 사람이라 해도 성격이 조폭스럽고 품행이 저질이며 허풍이나 친다면 남한테 잘 보일 리가 없다. 잘 생긴 얼굴에 똥칠을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왕심강은 그런 유형에 속하는 남성이 아니었다. 왕심강은 실력파 배우였고 거기의 남성적 매력의 <최고 소유자>였지만 매우 겸손했고 정직했으며 또한 매우 내성적이기도 했다. 1932년 1월 1일, 요녕성 대련 출생인 왕심강은 1956년 스릴방첩영화 <고요한 삼림>에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입문, 그 뒤로 <바다의 매(海鹰)>, <홍색낭자군(红色娘子军)>, <옛성에 휘몰아치는 불길(野火春风斗古城)>, <비밀설계도(秘密图纸)>, <남해장성(南海长城)>, <열화 속에서 영생하리라(烈火中永生)>, <정찰병(侦察兵)>, <지음(知音)> 등 수십 부에 달하는 영화에 육속 출연하면서 중견 남성 영화배우로서의 입지를 굳게 다졌으며 중국 영화계의 정상에 우뚝 서기도 했다. 특히 그가 출연한 영화 중 1961년에 촬영한 <홍색낭자군>, 1974년에 촬영한 <정찰병>과 1982년에 촬영한 <지음>은 출중한 인물매력과 성숙된 연기력으로 거의 모든 영화관객들을 매료시키면서 왕심강은 번번히 영화계의 <만인 탐닉 스타(万人迷)>로 되군 했다. ▲ 왕심강이 출연한 영화<정찰병>의 한 장면ⓒ스타자료집 다음 1959년에 촬영된 영화 <바다의 매>에는 왕심강이 무개로 된 찦차에 왕효당(王晓棠)을 앉히고 빗바람 속을 달리는 장면이 있었다. 아주 멋지고 왕심강의 용감성이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은 당시로 말하면 꿈많은 중국의 많은 소녀들을 설레이게 했다고 한다. 그 뒤 왕심강과 왕효당은 <옛성에 휘몰아치는 불길>을 포함한 몇 부의 영화에서 각각 남녀 주인공을 맡게 되었고 모두 성공적이어서 당시 중국인들한테서는 <남자는 왕심강, 여자는 왕효당>이라는 말이 유행될 정도였었다. 왕심강이 많은 영화에서 성공적으로 인물부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갈라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의 각고한 노력도 많은 분량을 점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문화혁명> 후기, 중국에서는 영화 <남해장성(南海长城)>을 다시 촬영하게 되었고 왕심강은 영화의 주인공 구영재(区英才)의 역을 다시 맡게 되었다. 헌데 당시 왕심강은 40살을 훌쩍 넘긴 중년이었고 체중도 많이 나갔으나 그가 맡게 될 주인공은 30살도 안되는 건강하고 용감한 젊은이었다. 이러자 왕심강은 식사량을 엄격히 통제하면서 아령, 평행봉 등 운동을 열심히 하였으며 2개월 후 20대의 날쌘 젊은이처럼 영화촬영에 돌입할 수 있었다. 그 때의 일을 회고하면서 왕심강은 이렇게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영화배우는 일종 특수한 직업으로서 스크린(银幕)을 통해 그 형상은 수천만의 관중들에게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때문에 영화배우는 반드시 관중한테 책임져야 하고 영화사업에 지출한 나라의 투자에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직위의 높고 낮음과 인격의 여하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랬듯이 왕심강 역시 사업에서의 아쉬움과 개인생활에서의 좌절과 고충들이 적지 않았다. 1961년 그가 출연한 영화 <홍색낭자군>에는 워낙 홍상청과 오청화 사이에는 혁명적인 우정으로부터 애정으로 승화되는 장면들이 있었다. 헌데 후에 이 영화를 최종 심의할 때 이런 애정표현 장면들은 모조리 삭제되었다. 영화제작에 있어서 최종 심의 때 장면의 삭제는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더군다나 당시 지난 세기 60연대 초기, <계급투쟁>과 <자본주의 생활의 꼬리>를 자르던 시기엔 애정표현이 나타나는 장면이 삭제되는 건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의 효과 면에서 그것이 아쉬웠다. 오청화와 애정 관계였던 홍상청이 나중에 적들에게 체포되어 화형을 당하는 걸로 마무리되었다면 그 결과가 안타까워 관중을 더 울리게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런 장면 또한 개혁개방의 오늘에 와서는 아무렇지도 않는, 결코 문제로 될 것이 한 장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65년에 촬영한 <열화 속에서 영생하리라>에서 왕심강은 원래 허운봉, 강설금, 성강 이 3대 주역 중 성강(成岗)의 역을 맡게 되었다. 헌데 <3가지 돌출>을 내세우던 그 시기, 허운봉과 강설금을 돌출하게 내세우기 위해 씨나리오를 수개하면서 성강의 전부의 장면은 삭제되었으며 왕심강은 보조역인 유사양(刘思扬)의 역을 맡았었다. 헌데 최종 심의결과 허운봉역을 맡은 조단(赵丹)보다 유사양의 역을 맡은 왕심강한테 시선이 더 집중된다는데서 영화에는 유사양마저 사라졌다. 큰 유감이었다. 어찌보면 왕심강의 출중한 인물과 뛰어난 연기력이 이런 경우에는 더 <장애>가 되었다. ▲왕심강과 그의 아내 왕소채ⓒ스타자료집 한편 왕심강은 자신의 애정에 아주 충실한 사나이었다. 왕심강의 아내 왕소채(杨绍采)는 워낙 중국인민해방군 제38군 문공단의 단원으로 1961년 영화 <오강천험을 돌파(突破乌江)>에서 홍군 위생원역을 맡았던 배우기도 했다. 왕심강과 결혼한 후 남편을 지극히 사랑했던 그녀는 왕심강의 뒤심으로 되어주기 위해 주동적으로 자신의 문예활동권에서 퇴출하여 가정의 현모양처로 되어주었다. 이에 왕심강이 아내한테 감동을 받은 것은 두말을 할 것도 없었다. 그러던 아내 왕소채가 문화혁명 중 홍위병들의 물리적 운동에서 강렬한 충격을 받고 쓰러졌다. 진단결과 정신분열증이었다. 그러자 왕심강이 받은 충격 역시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왕심강은 아내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를 더욱 극심히 보살폈고 외부로부터 오는 갖은 유혹들을 물리치면서 아내의 곁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묵묵히 가정의 중임을 떠메고 도처에 수소문하면서 용하다는 명의를 찾아 다니며 아내를 치료해 주었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위에도 꽃이 핀다>고 이렇듯 왕심강이 보살펴 준 결과 왕소채는 점차 정신분열 상태에서 원래의 정신상태로 되돌아왔고 건강을 회복하였다. 이 글의 앞머리에서도 언급하다싶이 아주 영준하고도 <귀공자>티가 나는 왕심강이었지만 그는 아주 소박하고도 겸손한 영화예술일꾼이었다. 왕심강은 군대 내의 문관직 일꾼이었다. 그의 어깨에 달린 계급장은 소장급이었지만 실제로 그가 받는 대우는 부군장급 대우였다. 하지만 왕심강은 관료행세를 하는 것이 아주 <체질>과 성격에 맞지 않은 모양 새였다. <문화혁명> 후기에 왕심강은 상급의 지령에 의해 8.1영화촬영소의 업무 부소장으로 진급, 주택도 촬영소의 집단숙소에서 나와 북경 백광로 1번지(北京白广路一号)에 있는 고급군관 주택구로 옮기게 됐고 전문 개인용 차량도 있게 됐다. 하지만 그는 자기한테 차례진 차량에 앉아 다닐 때가 아주 드물었다. 회의에 참가할 때를 제외하고 그는 늘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였으며 촬영소의 일반 직원들과도 아주 잘 어울렸다. 그래서일까? 그의 오랜 이웃인 영화배우 리파(坡都)마저 “왕심강은 관료로 될 스찔이 아니다” 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혹시 기자들이 찾아와 왕심강의 성공담을 취재하면 늘 “기실 나는 영화라는 무대를 통해 그 <빛>을 빌었을 뿐이고 바로 그 <빛>으로 인해 사람들은 나를 기억하고 있다”라며 겸손하게 나오군 했었다. … 노년기에 들어서자 왕심강한테서는 당년의 <영준군인> 및 <백마왕자>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고 머리에 백발이 무성해진 왕심강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생활과 인생에 충실했다. 그는 몸이 허약한 아내 왕소채를 돌보는 한편 멀리 미국에서 생활하는 자식한테도 자주 다녀오기도 한다. 이렇게 중국과 미국 사이를 오가다가도 가끔씩 손자와 나란히 앉아 담소하는 것을 일종 향수로 여기고 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6-08
  • [특별기획] 장백산하 해란강반에 울려 퍼지는 '탈빈공략'의 새노래
    편집자의 말: 6월 3일, 중국 관영 매체인 신화통신은 탐방기 <장백산하의 새 노래 편 ㅡ 길림성 연변주 탈빈공략 관찰(长白山下唱新篇——吉林延边州脱贫攻坚观察)>를 큰 편폭으로 할애하여 실었다. 연변 조선족의 <탈빈공략> - 이는 오래 전부터 꿈꿔왔던 프로젝트였지만 잘 안되던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이다. 우선 환경적으로 그닥 부유하지 못한 북한이나 러시아와 인접되어 있다. 이런 나라들과의 무역에서는 상품가치 등가교환에서만 이익을 볼 뿐이지 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상 조선족에 한해서만은 큰 중시를 돌리지 않는다고 해도 큰 과언이 아니었다. 조선족이 <당의 말>을 너무나도 잘 들으니 말이다. 그제 날의 항일전쟁과 해방전쟁 시기에는 그 어느 민족에 비해도 공산당을 위해 목숨을 잘 바치는 민족이 조선족이었고 신 중국이 탄생한 후에도 <대약진>, <인민공사> 등 당의 총 노선을 가장 잘 관철한 민족이 조선족이었으며 <문화혁명> 시기에는 또 <계급투쟁>에 제일 앞장선 민족도 우리 조선족이었다. 어디 그 뿐이랴. 나라에 공량을 바칠 때에는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라도 그 임무를 초과 완성했었고 나라에서 <계획생육정책>을 제정하자 어느 여성이 임신했다고 하면 쫓아다니면서까지 낙태시키군 하던 우리 조선족이었다. 그래서 아주 영예롭게도 연변주는 거의 해마다 전국의 <모범자치주>로 되기도 했다. 그럼 아주 잘 살았는가? 글쎄다. 굶어죽었다는 사람이 없었으니 <번영하는 우리 연변>, <살기 좋은 조국 변강>이란 어구들이 기사를 통해, 노래를 통해 많이 나가기도 했다. 이렇게 <당의 말>을 너무나도 잘 들으니 나라에서 특별히 달래줄 필요도 없었을 것임은 불 보듯 번연했다. 연변에 대한 보도기사ㅡ 이전에 우린 그걸 잘 믿지를 아니했다. 수분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어느 아무깨 기자가 뭘 좀 받아먹고 허풍을 떨었구나 하고 말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 간은 보도기사를 믿어서가 아니라 연변 농촌 사람들의 말에서 이전에 비해 확실히 좋아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농촌의 주택건설이며 도로건설이며가 확실히 잘 되어있고 국가에서 연변농촌에도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나마 기쁘고 좋은 일이며 앞으로도 바라마지 않는 일이다. 현재 연변 조선족들한테는 산재되어 있는 문제들이 많다. 인구의 마이너스 성장 문제, 이로 인한 학교들의 폐교되는 문제, 노총각들이 장가가지 못하는 문제와 조선족들이 개변해야 될 음주문화 문제 등으로 수두룩하다. 단꺼번에 다 해결할 사항들도 아니다. 그럼 오늘 신화통신의 탐방기를 실으면서 연변의 애로사항들이 하나씩 풀리면서 더 좋은 앞날이 다가오기를 기대한다. ▲화룡시 <진달래> 민속촌 전경ⓒ신화통신 아래의 글은 신화통신의 탐방기 <장백산하 새 노래편 ㅡ 길림성 연변주 탈빈공략 관찰>이다. 봄 파종철이 지나자 장백산하 해란강반에는 나뭇잎들이 푸르고 꽃들이 만개하면서 생기로 차 넘친다. 50여년 전, 연변에서 태어난 노래 <붉은 해 변강을 비추네(红太阳照边疆)>는 전국인민들로 하여금 변강건설에 뛰어든 연변의 각민족 아들딸들의 앙양된 투지에서 감동을 받게 했다. 당의 18차 대표대회 이래 이곳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각민족 인민들은 지속적으로 분투하여 오늘날 모든 <빈곤현(贫困县)>들이 <빈곤모자>를 벗어던졌다. 전통 맛 여전하나 삶의 나날 날로 풍족해져 화룡시 동성진 동광촌은 포장이 된 마을길과 집집마다의 울안이 매우 깨끗했다. 조선족촌 박춘자 여성은 주방에서 작으마한 밥상을 들고 나왔다. 상위에는 배추김치, 된장과 소고기, 명태 등이 깨끗한 접시에 담겨져 있었다. "우리의 생활은 아직도 된장을 떠날 수 없어요. 하지만 삶의 나날은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죠. 모든 것이 날로 풍족해지고 있는거죠." 박춘자 여성의 기억에 따르면 연변 조선족의 노동과 생활은 많은 변천을 겪어 왔다. 그것은 현재 연변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에서도 보아낼 수 있다. 가대기에 소를 메워 밭갈이를 하고 바지가랭이를 걷어 올리고 모내기를 하고 또한 낫을 들고 벼 가을을 하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야말로 이 땅에 첫 보습 날을 박던 그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삶의 희노애락은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진달래 민속촌에서 촌민들이 휴식의 한때를 즐기는 장면ⓒ신화통신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인구는 214만명, 이 중 조선족은 36.3%를 차지하며 길림성 2대 특별 빈곤지구 중 하나였다. 연변의 8개 현,시 중 4개가 국가 부축 빈곤현이었으며 2012년 말에는 빈곤 발생율이 29%에 달하였다. 연변의 변화는 빈곤부축사업의 항목의 겨냥조치로부터 추진되었다. 왕청현 조원 소목이산업원(桃源小木耳产业园)의 넓고 밝은 직장 내에 들어서면 로봇이 물건을 나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왕청현은 장백산 임구에 위치해 있어 역사적으로 <흑목이버섯 천담현(黑木耳千担县)>이란 명칭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날에는 주로 수 작업식 생산으로 이뤄졌기에 생산량이 적고 질 보장이 잘 되지 않았기에 훌륭한 자원으로 훌륭한 수입을 바꾸어 오지 못하였다. 최근년래 왕청현에서는 종식표준화 시범기지(种植标准化示范基地)를 하나하나씩 건립, 도합 45개의 기지로 점차 국내 흑목이버섯 고가시장으로 만들었으며 목이버섯을 상품화하여 북경, 상해와 광주에까지 판매, 촌민들의 연 평균 수입이 3000-4000위안씩 증가되게 하였다. 이 외 용정시 동성용진 용성촌에서는 당지 용두기업으로부터 빈곤부축항목의 혜택으로 촌민 유경의가 사육하는 연변황소 고기가 호텔에 납품, 황소고기 매 킬로그램 당 150위안에 달했고 안도현 합신향에서는 <삼림황금>으로 불리는 상황버섯이 온도가 맞춤한 비닐하우스 안에서 자라고 있었다. 이 상황버섯은 킬로그램당 600위안 내지 700위안으로 그 비닐하우스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용정시 삼합진 천불지산(天佛指山)은 해마다 송이 따는 계절만 되면 일본과 한국으로부터 많은 상인들이 찾아와 값은 크게 따지지 않고 적극 주문하고 있단다… ▲화룡시 남평진 유동촌의 조선족 주택들ⓒ신화통신 다시 화룡시 동성진 동광촌의 박춘자 여성한테로 돌아온다. 충분한 해빛을 받아 이슬 머금고 자라는 농가원의 야채들, 박춘자 여성은 문턱에 앉아 마당 내 비닐하우스에서 자라는 매 한포기의 야채를 바라보면서 손가락 꼽으며 뭔가를 계산하고 있는 듯 했다. 50여년 간 노래소리 울리고 호매한 발걸음은 계속돼 연변 시인 한윤호가 노랫말을 만들고 연변적 작곡가 김봉호가 선율을 만든 <붉은해 변강을 비추네>란 노래는 50여 년간 불리워 왔다. 그리고 이 노래속의 <강물을 끌어올려 산에 올리네>란 놀라운 일은 오늘날 화룡시 숭선진 상천촌에서 현실로 되고 있었다. 당년에 이곳의 촌민들은 <사이펀(倒虹吸)> 원리를 이용하여 두만강의 물을 60미터 높이에 있는 산위에 끌어올려 그 곳을 비옥한 논으로 되게 했다. 상천촌 당지부서기 박동섭에 따르면 지금 상천촌의 입쌀은 브랜드로 되어 높은 가격으로 내지에 팔리고 있다. 하지만 이 촌에서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전자상거래, 된장 가공과 향촌관광업의 발전을 탐색하고 있는 중이었다. ▲도문시 석현진 합흠 농민전업 합작사 농민들이 비닐하우스 안에서 작업하는 장면ⓒ신화통신 화룡시 남평진 유동촌에 가보면 85후의 청년 김호가 대졸 후 주동적으로 귀농, 촌민들을 이끌고 오미자 재배, 민속관광지 건설 등을 추진, 촌민들을 위해 농구장과 게이트볼 경기장(门球场)을 앉혔으며 집집마다 수세식 변기를 갖춘 화장실을 갖추게 했고 노인들로 하여금 매일 점심 때마다 노인들한테 영양식을 무료로 제공하군 했다. 그리고 왕청현 천교령진 천평촌에서는 뭔가를 해야겠다고 작심한 촌 당지부서기 윤학의는 자기의 아내를 촌으로 <초대>했다. 부부가 손잡고 탈빈 목표를 이룩하자는 심산이었다… 변강의 한 모퉁이에 위치해 있었지만 연변의 빈곤탈퇴 사업은 고군작전이 아니었다. 2016년 10월, 절강성의 녕파와 연변은 동서부 빈곤부축 협력을 갖기로 하고 22개 기업이 육속 연변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논공유(共享稻田)>란 명목으로 빈곤부축 항목을 제정, 연속 2년간 화룡시 1.4만 뙈기의 논에서 생산된 입쌀을 도맡아 인수하는 것으로 2000여명 빈곤인구의 수입증장에 크게 이바지했다. 2019년 4월, 연변의 화룡시, 용정시와 도문시가 <빈곤모자>를 벗었고 올 4월에는 안도현과 왕청현이 <빈곤모자>를 벗으면서 연변의 모든 시현들이 빈곤탈퇴에 성공, 2016년 이래 전 주적으로 304개의 빈곤촌이 <빈곤행열>에서 나왔고 2.9만호, 4.9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빈곤에서 벗어나면서 연변의 각민족 인민들은 새로운 출발을 할 기점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남평진 유동촌 촌민이 집에서 벽에 장식품을 걸어놓는 장면ⓒ신화통신 피어난 꽃 특별히 붉고 <실크로드(丝路)> 천하로 통한다 빙설중에도 꽃은 피어나고 산비탈의 진달래는 더더욱 아름다워라. 이는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조선족 인민들의 무한한 추구를 뜻한다. 용-포 고속도로(용정으로부터 돈화시 대포자하진에 이르는 고속도로)의 한 중간 대교 아래에는 백년 역사를 갖고 있는 조선족 마을 ㅡ <진달래> 민속촌이 있다. 현재 이 마을은 <연변속의 민속촌>보다는 <중국속의 민속촌>으로 더욱 통한다. 이 마을에서는 떡볶이, 냉면과 장고춤, 가야금 등 조선족 특색 관광상품으로 지난해만 해도 국내외 관광객 40여만 명을 유치했다. 이 마을의 촌민 이월순 여성은 원래의 주택을 개조해 민박을 차렸는데 이로부터 나오는 수입은 그야말로 쏠쏠했다. “반평생 농사만 해오다가 오늘 와서 사장님(老板)으로 불리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죠.” ▲화룡시 숭선진 상천촌 촌민이 밭에서 트랙터로 작업하고 있는 장면ⓒ신화통신 화룡시에는 일명 <진달래실크로드(金达莱丝路)>란 전자상거래 플랫폼이 있으며 실체의 가게에는 상황버섯, 꿀, 목이버섯 등을 진열, 모두 조선족 특색의 <포장>을 하였다. 예하면 입쌀은 월병처럼 조선족 특색의 선물세트로 포장했고 쿠션(抱枕), 벼짚 수공업품 등에도 조선족 특색의 글발이 아주 선명하게 새겨 넣었다. 이는 북경에서 온 어느 한 작은 젊은 지원팀에서 모색해 낸 아이디어로 이들은 당지의 빈곤부축 특산으로 조선족 특색의 브랜드를 창출, 전자거래의 플랫폼을 통해 전국에 판매했다. 이렇게 하찮고 고생스럽게만 보이던 것이 빈곤부축의 아름다운 산업과 창업의 낙원으로 되었던 것이다. 연변에는 <진달래 실크로드>만 있은 것이 아니었다. 지난 5월 15일, 220개의 컨터이너에 옥수수를 실은 <바다실크로드 1호>가 청도항에 입항했다. 이는 <훈춘-자르비노(러시아)-청도> 항선의 첫 항행으로 <훈춘-자르비노-주산> 항선이 개통된 후에 있은 또 한 갈래의 국내 무역화물이 국경을 벗어나 운송하는 항선이었다. <항구를 빌어 바다로 나가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일찍 개방발전의 <제한적 구역>에 있던 연변으로 놓고 볼 때 이는 대해로 향하는 새로운 발걸음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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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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