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09-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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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박동웅 구로구의장, “구민과 더불어 외국인 주민도 살기 좋은 구로 만들 것”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한국은 노동력 공백에 따른 이주노동자와 국제결혼에 의한 결혼이민자의 증가로 사실상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월보를 보면 장단기 체류 외국인은 2021년 6월 말 기준 1,981,035명이다. 그중 서울시 구로구에 체류하고 있는 25,316명 외국인 주민 중 18,190명이 중국동포이다. 기자는 지난 4일 구로구의회 7대 후반기 부의장으로 또한 3선 의원으로서 지역발전과 의정활동에 열정을 바치고 이번 제8대 의회에서도 후반기 의장으로 지역주민은 물론 외국인 주민 민원이 발생한 곳은 어디든지 달려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박동웅 의장을 만나 그동안 의정활동 그리고 앞으로의 중국동포 및 외국인 주민 관련 정책과 지원계획에 대해 들어 봤다. 다음은 박동웅 구로구의회 의장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Q. 현재 시행 중에 있거나 계획 중인 중국동포 관련 사업은? A. 한국 국적을 가진 아이들은 보육료를 국가에서 지원을 해주는데 대한민국 국적이 아닌 중국동포 아이들은 어린이집을 다닐 때 보육료를 전액 자비로 부담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안산에서는 아마 시행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제 구로구도 내년부터 보육료 20%가량 지원해주는 사업을 하려고 한다. 현재 한국에 있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외국인 주민 자녀들을 조사해보니 약 천명 조금 넘는데 그 아이들에 대해 우선 보육료 20% 정도 지원해주고 차후에는 그냥 100% 지원하는 쪽으로 준비해 나갈 예정이다. 그래서 올해 최초로 이와 관련한 예산 편성을 준비하려고 한다. 한 해에 7억 정도 예산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Q. 구민들이 반발할 것 같은데? A. 그런 분들도 있지만 우리끼리만 살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글로벌시대,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만으로 먹고사는 것이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서울에서 구로만, 구로구 사람들만 뭉치는 것도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동포분들도 다 같은 한민족이고 외국인이던 한국인이던 차별 없이 함께 사회에 흡수돼서 생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주민들에게 잘 이해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Q. 지역주민과 중국동포 간 소통과 화합에 대한 모범 답안이 있다면? A. 가리봉을 중심으로 구로구는 중국동포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구로구에는 다문화 정책과가 있는데 중국동포들뿐만 아니라 베트남이라든가 필리핀 일본 등 이주민 정책을 총괄하고 있다. 우리 동포들도 명예 통장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고 또 구로구에는 봉사단이 매우 많다. 이를테면 구로 4동 같은 경우는 다문화 봉사자들이 야간 순찰도 하고 있고 다문화 경노당도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는 구로구가 소통을 많이 하고 있는 편이다. 근래 산발적으로 좀 많이 하고 있는데 향후에는 체계적인 시스템 상에서 동포들과 구청 간에 소통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Q. 현재 가장 시급한 현안과 해결책은? A. 현재 구로구에는 이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중에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분들이 중국동포들이다. 과거 코로나 이전에는 우리 동포들이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장사가 잘 안되는 등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에 대한 것은 우리가 추정할 수 있지만 정책은 정확한 수치를 갖고 하는 것이기에 다문화 정책과에서 우리 동포사회 실태 파악을 다시 해서 제도 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 Q. 상호우호도시 연변조선족자치주와 문화교류 계획은? A. 한국의 수출 규모를 보면 중국과의 교역이 미국을 앞서 나가고 있다. 그리고 중국에는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계시고 또한 중국과 한국 사이에 문화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문화적인 이해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연변과 교류(공무원 교류)를 했지만 사실 문화 교류라고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향후에는 여러 중국 도시와 자매결연을 맺어서 서로 간 문화를 교류하고 우리 축제 때 해당 국가 도시의 전통적인 문화행사를 유치할 수 있도록 하고 또 거꾸로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떤 축제라든가 행사가 있을 때 우리 구로구에서도 문화예술단이 가서 공연을 할 수 있는 그런 교류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Q. 임기 내 꼭 이루고 싶은 것은? A. 현재로서는 일단 코로나19 사태가 빨리 안정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대한민국 자체도 K-방역을 통해서 그냥 열심히 뛰고 있지만 우리 구로구에서도 구로구만의 어떤 방향 시스템을 잘 구축해 구로구가 코로나19에서 좀 더 안전한 도시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 할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안정돼야 구로에서 사업하시는 분들도 안정적으로 사업을 할 수 있고 지역경제도 활성화 될 것이다. Q. 중국동포에 대한 이해정도는? A. 한 예로 아마 한국사람 중에서 가장 양꼬치와 고량주를 많이 먹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정말 좋아한다. 젊었을 때 사실 한국에서 투자 목적으로 중국에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여러 가지 어떤 사정 때문에 결국 못 들어간 경험이 있다. 개인적으로 도시계획 전공이다 보니 연변은 물론 선양, 광저우, 칭다오, 상하이, 홍콩, 마카오 등 중국의 많은 도시들을 다녀봤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중국에 대한 이해도는 많다고 생각하고 중국 양꼬치를 중국동포보다도 내가 더 많이 먹는다고 감히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Q. 중국동포에 한 말씀 부탁한다면? A. 한국에서 돈을 벌어서 고향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는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충 그냥 돈을 벌고 살다가 중국으로 가면 된다는 인식보다도 역시 우리 조상의 뿌리는 한국이기 때문에 한국이 잘 돼야 동포사회도 잘 될 수 있다는 생각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은 한민족으로 역할을 한다면 지역주민들과 잘 화합할 수 있고 이제 동포들이 중국에 들어가서도 한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생활할 수 있다고 본다. 구로구의장으로서 향후 그 어떤 정책이나 개인적인 꿈도 있겠지만 중국 동포들이 구로구에 와서 잘 살고 여기에서 내가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그런 도시가 구로구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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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9
  • 中, 98세 “쿵푸 할머니” 온라인 돌풍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최근 한 지역 모임에서 무술을 시연하는 98세 중국 “쿵푸 할머니”의 동영상이 유튜브에서 44만 번 이상 조회되고 4,500개 이상의 좋아요가 쏟아지는 등 순식간에 히트를 치고 있다. “쿵푸 할머니”의 팬들은 “98세에도 걸을 수 있을까. 쿵푸가 장수의 관건일지도 모른다”는 메시지를 올렸다. 심지어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도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에 대해 "쿵푸 정신은 늙지 않는다"고 언급하며 주목했다. 본명이 장헥셴(張鶴仙)인 “쿵푸 할머니”는 2017년에 이미 명성을 얻었지만 거의 10년 동안 고향인 저장(浙江)성 닝하이(寧海)현 장컹(張坑)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이 영상이 유튜브에 퍼지자 조카딸은 “할머니는 이제 중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유명하시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키는 약 1.5미터이다. 그의 쿵푸 동작은 유창하고 걸음걸이는 꾸준하다. 할머니의 마을은 쿵푸와 오랜 관계를 맺어왔고 할머니는 5살 때 중국 남부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무술 스타일인 장복싱의 6대 계승자였던 아버지로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어릴 때는 매일 연습했다. 지금은 나이도 들고 힘도 예전보다 줄었지만 아직 원기 왕성하다”고 말했다. “쿵푸는 폭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고 필요할 때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평생 농부인 할머니는 이웃들과도 잘 지낸다. 막내아들인 펑은 “어머니는 항상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어머니는 마을에서 결혼을 앞둔 사람들을 돕고 바느질도 하고 요리도 한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3남 1녀를 두고 있으며 모두 닝하이현에서 근무하고 있다. 닝하이현은 마을에서 차로 약 40분 거리에 있다. 할머니는 남편이 사망한 2012년부터 혼자 살고 있다. 할머니의 삶은 평범하지만 잘 짜여져 있다. 할머니는 아침 5시에 일어나서 매일 세 끼의 요리를 하는데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해산물이다. 점심을 먹고 나서 가끔 친구들을 찾아가서 수다를 떨기도 한다. 오후에는 쿵푸 연습을 한다. 장컹 마을은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할머니의 집은 산비탈에 있기 때문에 식료품을 사러 나가거나 친구를 만나러 갈 때 등산이 필요하다. 언덕을 오르면서 꾸준히 하는 운동이 할머니가 정력이 왕성한 원인일 수 있다. 펑은 “어머니에게 도시에서 함께 살기를 요청했지만 어머니는 혼자 사는 것을 즐겼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어쩌면 할머니를 자유롭고 편안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쿵푸 할머니”는 아버지의 장복싱 스타일을 주말과 휴일에 집에 오는 손주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최근 이웃 마을의 초등학교에서 무술 수업을 개설했다는 소식을 접한 할머니는 자원해서 아이들을 지도하고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 펑은 어머니와 가족들은 “쿵푸 정신을 젊은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고 그것이 그들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 사람들
    2021-08-16
  • 중국에서 캉테로 불리는 조선족 축구선수 김경도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1992년 11월 18일, 김경도(진징다오·金敬道)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김경도도 매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시절 김경도는 축구에 대해 잘 몰랐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뛰어 노는 과정에서 축구에도 약간의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약간의 재능을 보였다. 연변은 축구의 전반적인 환경이 다른 곳과 다르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방과 후 첫 오락으로 축구를 한다. 이러한 축구 환경에서 많은 우수한 축구인재들이 배출되었다. 김경도는 2003년 옌볜(延邊)의 쑹칭링(宋慶嶺) 축구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인 축구 전문 훈련을 시작했다. 진징다오의 부모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한국으로 떠났으며 이러한 환경에서 김경도는 독립적이고 힘든 일을 잘 견디는 품성을 키웠다. 2008년 청소년대표팀에 뽑혀 첫 국제대회를 치른 김경도는 눈부신 활약으로 그해 U-20 대표팀에 발탁됐다. 2009년에는 U-20 대표팀 주장을 맡아 사상 두 번째로 국가대표팀 소수민족 주장 자리에 올랐다. U-20 대표팀 시절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2009년 김경도는 시리아와의 경기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포지션에서 2골을 넣으며 팀의 다음 라운드 진출을 도왔다. 김경도는 경기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이니에스타라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경기가 끝난 뒤 기자가 이니에스타와 연락해 상대방이 사인 유니폼을 선물한 것도 김경도를 오랫동안 기쁘게 했다고 한다. 2010년 김경도는 연변FC에 입단해 클럽 생활을 시작했다. 부모님도 곁에 안 계시고 이제 막 입단한 뒤라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김경도는 늘 팀 동료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봐야 만 했다. 마침 외사촌형인 박성(퍄오청·樸成)이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동생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퍄오청은 이때로부터 김경도를 돌보기 시작했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한국에 일하러 갔고 나는 연변FC에서 선수로 뛰었지만 돈을 많이 벌지 못했다. 박성은 오래 전부터 축구를 했다. 그는 돈을 괜찮게 벌었고 보너스도 받았다. 그때 나는 그의 집에 짐을 풀었다. 그는 나를 위해 많은 것을 사주었고 체육관에 갈 수 있도록 돈도 대주었다. 그리고 내가 U-20 대표팀에 합류했을 때 그는 다른 선수들이 좋은 휴대폰과 명품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나에게 그것을 다 사주었다. 나중에는 또 휴대폰과 아이패드까지 사주며 축구를 잘하라고 격려 했다” 이는 사촌형인 박성에 대한 김경도의 평가다. 오늘도 두 사람은 여전히 절친한 사이로, 중국 슈퍼리그에서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2011년 코스타리카와의 평가전에서 김경도는 벤치에서 나와 성인 남자 국가대표팀 데뷔를 알렸다. 이번 국가 대표팀 경험으로 김경도는 중국 슈퍼리그에서 쟁탈하는 인기 선수로 됐다. 2013년 이 쟁탈전에서 승리한 산둥 루넝(山東魯能)은 연봉 100만 위안, 이적료 800만 위안에 김경도를 영입했다. 하지만 루넝 합류 이후 김경도는 그렇다 할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고, 궈안과의 첫 경기에서 비정상적인 플레이로 결국 팬들의 욕설이 쏟아졌다. 다행히 동료들이 그를 격려했고 그가 힘을 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익숙한 포지션이 아니다 보니 김경도의 플레이는 매우 어색했다. 김경도의 가장 좋은 포지션은 미드필더와 풀백이다. 하지만 그런 위치에서도 김경도는 팀과 감독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달리기와 부상 스틸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많은 칭찬을 받았고, 팬들은 점차 그를 받아들였다. 그해 그는 좋은 활약을 펼쳤고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했다. 2016년, 마가트 감독은 김경도를 완전히 재탄생시켰다. 마가트는 유명한 "악마 감독"이다. 그는 선수들의 세부 사항에 대한 요구 사항이 매우 높았다. 그는 김경도가 수비형 미드필더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를 풀백으로 변경 시켰다. 김경도는 당시 마가트 감독이 자신에 대한 요구사항이 높았다고 밝혔다. 그는 "내가 공을 빨리 잡아 다른 사람이 못 따라온다며 볼을 잡으면 상대 측면 수비수를 상대로 돌파하라고 했다. 처음에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우싱한(吳興涵)이나 류빈빈(劉彬彬) 같은 빠른 스피드 돌파가 없었다. 나중에 하오준민(蒿俊閔)의 도움으로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해 시즌 김경도는 윙백 포지션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고 루넝에서 가장 빛나는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은사 마가트 감독은 안타깝게도 팀의 부진한 경기력으로 인해 해고되었다. 김경도 역시 그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암울한 순간을 맞았다. 2016년 ACL 8강 1차전 서울 방문경기를 앞두고 몸에 살코기 성분이 들어 있는 것으로 밝혀져 소변검사 양성 판정을 받아 60일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다. 이때부터 고기는 거의 먹지 않고 음식에 신경을 썼던 김경도는 충격도 컸지만 선수 생활과 컨디션 유지에는 큰 힘이 됐다. 그 해 김경도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맞았다. 2016년 11월 13일 김경도가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왕융퍼(王永珀), 왕통(王彤), 송룡(宋龍) 등 동료들이 대거 참석해 축하하였으며 루넝도 공식 홈페지를 통해 결혼 축하와 함께 김경도 부부의 백년해로를 기원했다. 김경도의 감정 또한 매우 로맨틱하다. 그와 그의 아내는 서로를 수년간 알아왔다. 그들은 중학교 동창이었다. 그들은 학교 다닐 때 사귀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들은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났고 서로에게 좋은 감정이 생겨 함께하게 되었다. 2017년 김경도는 징계에서 풀려나 팀에 복귀했고 루넝은 리샤오펑(李霄鵬)감독을 영입했다. 리샤오펑이 부임한 뒤 팀은 파격적인 변신을 하지 않고 마가트 감독의 플레이 스타일을 이어갔다. 김경도 역시 익숙한 윙백 포지션을 유지했다. 이후 두 시즌 동안 김경도는 좋은 활약을 펼치며 타르델리 및 펠레와 매우 묵계적인 관계를 형성했으며 종종 도움을 주거나 득점하며 루넝의 측면에서 날카로운 킬러가 되었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2018시즌 김경도의 수치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시즌 29경기에 출전해 6골 6도움을 기록하며 경기당 평균 고강도 달리기, 스퍼트 횟수 1위, 경기당 평균 거리 2위, 가로채기 3위, 경기당 4위라는 맹활약으로 시즌 최고 인기 본토 선수상을 거머쥐었다. 이로써 김경도는 대표팀의 단골손님이 됐고 리피는 물론 가오훙보(高洪波), 리톄(李鐵) 등 본토 감독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되었다. 다만 리피 시절에는 김경도에 대한 요해가 부족해 기술적인 특성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고 김경도 역시 월드컵 예선경기에서 자신의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리피 감독 후임으로 2021년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리톄 감독은 카타르 월드컵 2차예선 40강전 몇몇 경기에서 김경도의 활용에 신경을 썼다. 김경도는 움직임이 좋고 수비 면적이 넓으며 공격은 날카롭다. 현재 김경도는 대표팀 10번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자격을 갖춘 '프리 맨'이 됐다. 곧 카타르 월드컵 3차예선인 12강전이 시작된다. 12강전에서 절대 주전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김경도는 계속 자신의 색깔을 살려 대표팀을 위해 몇 골을 더 넣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스포츠
    2021-07-28
  • 세계급 중국 조선족 무용가 김성
    [동포투데이 김다윗 기자] 많은 사람들이 중국 유명 무용가 김성(金星)을 알지만, 그녀의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중국 무용수 중 한 명인 김성은 25세의 나이에 벨기에 왕립 무용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다. 1995년 이미 유명해진 김성은 군구(軍區)예술단에서 퇴직하고 북경향산병원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 수술 과정은 장원 감독에 의해 다큐멘터리 영화 '미스 김성'으로 촬영되었다. 23세에 장가들어 28세에 여자로 태어난 김성은 38세에 독일인 한스와 결혼했다. 현재 54세인 그녀의 인생에는 전설로 가득 차 있다. 김성은 1967년 선양의 한 조선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남자 목욕탕에 데려가 목욕시키자 김성은 매우 불편함을 느꼈다. 이때부터 김성은 자신의 성 인식에 대한 의구심이 생겼다. 아홉 살 때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학교 문예선전대에서 짙은 화장을 하고 춤을 추면서 군구(軍區)예술단의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때로부터 김성은 자신의 내면에 있던 미에 대한 향수가 늘 여성스러움을 깨닫게 되었다. 1985년 군사훈련 멘토 송소원이 제1회 전국 타오리컵(桃李杯) 무용대회에 참가할 것을 권유했다. 그 결과 대회 경험이 전무했던 김성은 탄탄한 기반과 뛰어난 재능으로 400여명이 출전한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무용 ‘목가’로 청소년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고 중국에서는 최초로 발레화 없이 발가락을 사용할 수 있는 무용수가 됐다.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겠다는 결심은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줄곧 성별의 정체성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녀는 내가 언제 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 1986년 광둥현대무용학교에서 국비유학생을 미국에 보내려 한다는 소식을 입수한 그는 무작정 광둥으로 건너가 공부했다. 2년 뒤 뉴욕으로 건너가 무용을 업그레이드하면서 캐롤라인과 첫 결혼을 했다. 1993년 김성은 귀국 후 중국문화부가 주최하는 전국 현대무용수련반에 초빙되어 중국 현대 무용의 창시자가 되었다. 1995년 영혼과 육체의 분열은 그에게 큰 문제를 가져왔다. 김성은 오랜 시간 고군분투하다 결국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장악하기로 했다. 그는 성전환 수술을 결심 했다. 김성의 결정은 어머니가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들이든 딸이든 모두 같은 자식이라며 수술이 건강에 지장만 없으면 된다고 말했다. 1999년 김성은 개인의 이름을 딴 중국 최초의 민간 무용단인 '상해김성무용단'을 창단했다. 중국에서 국제 공연 티켓을 판매할 수 있는 곳은 '상해김성무용단'과 '중국곡예단' 두 곳뿐이다. 2004년 무용단을 이끌고 유럽 순회공연을 마친 김성은 귀국길에 독일 신사인 한스를 만났다. 한스는 독특한 동양 여성에게 깊은 매력을 느꼈다. 1년간의 소통 끝에, 그들은 결혼의 궁전에 들어갔다. 결혼 후 세 아이를 입양한 김성은 이젠 엄마와 딸, 그리고 아내가 되어 남성에서 여성으로의 전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김성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의 의구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사회는 심리적 인내를 반복적으로 질문하고 지침을 제공하는 투명하고 보이지 않는 심리의사와 같다. 김성은 오직 실력만이 유언비어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오늘도 진지하게 춤을 추고 있으며 그녀의 유럽공연 티켓은 구하기 어려울정도다.
    • 사람들
    2021-07-12
  • 中 유명 거사(居士)화가 탕위밍
    [동포투데이 김나래 기자] 유명한 화가 탕위밍(湯餘銘)은 중국 영화배우 탕웨이의 아버지이다. 탕위밍의 작품은 구하기 어렵다. 탕위밍은 1990년대부터 중국 스타일과 서양 스타일을 결합한 독특한 3 차원 작품을 제작했다. 필명은 북안산(北安山)이다. 원저우(溫州) 러칭(樂淸)출신인 그는 전문 미술가로 현재 거사 전문화가 1인자로 불리며 세계문화유산예술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그가 그린 그림은 매우 높은 예술성을 가지고 있다. 다른 화가들의 귀감이 되고 벤치마킹해 그림 애호가들에게도 큰 도움이 됐다. 탕위밍은 '신부춘강산거도(新富春江山居圖)'에 참여했을 정도로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은 사람이고, 명리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도 가장 돋보이고 존경하는 곳이다. 일부 대가들에 비해 직업적으로 높은 프로정신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탕위밍의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산수화를 그리는 데는 능숙하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그의 거사 회화다. 그의 작품은 불학적인 매력을 주면서도 과장되지 않은 느낌을 준다. 정직한 사람이라 그런지 그의 작품에는 자신만의 매력이 배어 있다. 탕웨이밍으로서도 딸 얘기를 할 때마다 뿌듯했다. 탕웨이는 지금의 이름값도 대단했고, 탕웨이밍에게 딸의 성장과 성취를 보여주기도 했다. 딸이 자신보다 이름값을 많이 한다고 해서 탕웨이밍이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려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탕위밍은 화계의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로, 회화 작품도 많은 기관에서 사랑을 받아 현재 세계문화유산예술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불교문화에 대한 깊은 연구를 하고 있는 그에게 불교문화와 중국 문화유산을 칭송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할 일이다. 탕위밍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단지 돈을 벌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술에 대한 추구나 신앙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탕위밍은 회화 예술에 대해 높은 이해와 추구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 역시 사람들이 존경하는 점이다. 중국 여배우인 탕웨이는 1979년 10월 7일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에서 태어났다. 2000년 중앙연극학원 연출학과 본과에 입학했다. 2007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리안 감독의 '색·계'에서 여주인공을 맡았다. 2010년 미니시리즈 영화 '월만 헤네시'에 출연해 중화권 영화미디어대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탕웨이는 2011년 영화 '만추'로 한국백상예술대상, 한국영화평론가상, 부산영화평론가상 등 10여 개 부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2013년 '베이징에서 시애틀을 만나다'는 중화권 로맨스 영화 흥행 신기록을 세우며 상하이 영화평론가상, 중국영화감독협회, 베이징대학생영화제 여우주연상 등을 수상했다. 2014년 탕웨이는 영화 '황금시대'에 주연으로 출연하였으며 2015년에는 영화 '블랙 코드'에 출연했다. 2016년에는 주연 멜로 영화 '베이징에서 시애틀을 만나다'가 7억 9000만 위안의 흥행 성적을 거두며 중화권 멜로 영화 흥행 기록을 다시 세웠다.
    • 사람들
    2021-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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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족 오페라가수 최경해, 국제음악콩클에서 2등상 수상
    [동포투데이 김나래 기자] 지난 10월 25일 저녁에 막을 내린 2018녕파국제성악콩클 무대에서 중국국립오페라단의 전속오페라가수인 최경해가 뛰어난 노래실력으로 2등을 따내여 중국조선족 음악인의 우수성을 또 한번 만방에 자랑했다고 현지 매체 길림신문이 전했다. 2000년도부터 시작된 중국국제성악콩클은 국제음악콩클 세계연맹의 성원행사이고 3년에 한차례씩 개최되는 국제음악행사이다. 다년래 최경해는 풍부한 표현력과 뛰어난 가창력으로 국내외 여러 음악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최경해는 2011년 제15회 CCTV 청년가수상에 입상되였으며 39회 이딸리아 벨리니국제성악콩클 중국구 경연에서 3등, 2011년 평양 ‘4월의 봄’ 국제예술축전에서 금상을 받았다. 2011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한민족국제예술축전에서는 중국 대표로 참석하여 금상을 받기도 했다. 1987년 연길태생인 최경해는 중국조선족 소프라노 림정교수(현 중앙민족대학 음악학원 부원장)의 가르침과 추천으로 선후로 연변대학 예술학원과 중국음악학원 (진연교수 사사)성악학부를 졸업하고 학사학위를 수여 받았으며 한국국립예술종합대학 오페라과와 중앙민족대학 음악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수여받았다. 최경해는 2014년부터 중국국립중앙오페라단 전속오페라가수로 발탁되면서 중국오페라 무대에서 활약하는 메조소프라노로 성장하였고 2016년에는 중국문화부로부터 청년오페라인재 칭호를 수여받기도 했다.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최경해는 수십편의 오페라 주역으로 국가대극원에서 공연하였으며, 천진, 항주,신강, 할빈 등 성시 국내유명필하모니와 성공적으로 협연하였으며, 북경, 상해,천진,장춘 등 중국 주요도시들에서 개인 콘서트를 열어 주목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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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30
  • 허영란 대광인견 대표, 한상네트워크 활용한 해외시장 노린다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풍기지역 대표 브랜드로 꼽히는 대광인견 제품이 '제17차 세계한상대회'에 참가해 전 세계 50개국에서 모여든 해외동포 기업으로부터 많은 관심을 끌었다. 대광인견(대표 허영란)은 지난 10월 23일부터 25일까지 3일간 인천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린 '제17차 세계한상대회'에 여러 가지 ‘속옷과 겉옷, 이불’ 등을 출품, 많은 상인으로부터 관심을 받았다고 25일 밝혔다. 세계한상대회는 재외동포재단이 600만 해외동포의 경제적 교류를 위해 개최한 대규모 행사로, 올해는 ‘하나 된 한상, 함께 여는 대한민국’이라는 주제로 인천 송도에서 세계 50개국에서 모인 경제인 4천여 명이 참가해 성황을 이뤘다. 대광인견은 이번 대회에서 나무와 과학이 만난 환경친화적 자연소재인“인견”은 가볍고 수분 흡수가 빠르고 통기성이 뛰어난 외에 어린아이나 알레르기성 피부 아토피성 피부 등 피부가 약한 사람에게 좋다는 장점을 소개해 참가자들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2대에 걸친 60여 년 전통과 기술력을 자랑하는 대광인견 제품은 경북 영주시 풍기지역에서 다양한 유통망을 확보하고 속옷과 겉옷, 이불 등 제품을 생산, 판매하는 대한민국의 풍기인견 대표 브랜드이다. 대광인견은 1997년 체크(원단) 의장등록을 마쳤으며 2008년에는 영주시 중소기업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 자연을 품은 인견, RAY PARK 상표등록을 출원했다. 허영란 대표는" 이번 세계한상대회에서 대광인견 제품을 체험한 한상들로부터 많은 관심이 잇따르고 있다"라면서 "한상대회에서 알게 된 해외기업과 전 세계 한상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세계시장 진출을 도모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허영란 대표는 해마다 서울에서 열리는 한·중 청소년 문화축제의 후원사로 참여, 청소년들에게도 남다른 애정을 보여 화제가 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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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28
  • ‘몬스터 헌터: 월드’ 게임 BGM 작곡가 강정란 씨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일본의 유명한 컴퓨터게임기업 캡콤(Capcom)이 야심차게 개발한 신작 ‘몬스터헌터: 월드’(MHW)가 발매된지도 벌써 7개월이 훌쩍 지났다. 갈수록 많은 유저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 게임은 기존의 게임에 비해 혁신적이란 호평을 받고 있는데 배경음악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게임속의 BGM 상당수가 한 조선족 작곡가의 손을 직접 거쳐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매우 적을 것이다. 중국 길림성 연길 출신으로 현재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는 강정란(康贞兰) 씨, 2006년 지린성 연변1중을 졸업하고 4년제 대학에서 “조경디자인(景观设计)”을 전공한 후 일본 규슈대학에 유학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음악감각이 탁월했고 일본어 실력도 뛰어난 그는 캠퍼스활동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매우 빠르게 유학생활에 적응했다. 강정란 씨는 캑콤에 입사한 후 처음으로 편곡 맡은 게임 BGM은 ‘몬스터 헌터 : 월드’(MHW) ‘영웅의 증거’였다. 그는 나리타 아키히코 씨 밑에서 수행을 하며 제작하였고, 하나의 큰 과제인 "영웅의 증거"의 편곡을 맡았다. 나리타는 작곡가들의 특징과 개성을 파악하여 이를 최대한으로 살릴 수 있는 지휘를 항상 유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부담감은 있었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의미를 생각하며 제작에 임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지난 6월 일본 “플레이 스테이션 게임 뮤직 大賞” 앨범상과 음악상 부문에서 2위를 차지했다. “플레이 스테이션 게임 뮤직 大賞”은 인기 게임 사운드 트랙을 스포티하이(Spotify).내 재생횟수와 유저들의 투표수로 선정해 수여하는 상이다. 강정란 씨는 “금번 이런 영예로운 상을 주셔서 분에 넘치는 영광이라 생각한다. 많은 유저로부터 사랑 받고 있는 이 타이틀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기쁘지만, 큰 호평을 받아서 매우 놀랐다”며“트로피를 손에 들었을 때 소중한 시간을 내어 ‘몬스터 헌터: 월드’의 음악을 들어주신 여러분의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그 감동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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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8-03
  • 연변대학 최예령, "미스춘향 선"에 뽑혀
    ▲ 88회 춘향제 미스 춘향 선에 선발된 최예령양.ⓒ 남원시청 [동포투데이] 17일 오후 전라북도 남원시 광한루원에서 열린 춘향선발대회에서 최고 전통미인인 "미스춘향 선"에 연변대학 최예령이 뽑혔다. '미스춘향 진'에는 뛰어난 미모와 재치있는 말솜씨로 관객을 사로잡은 김진아(20·경기도 안양시·동아방송예술대)씨가 최고 전통미녀 자리에 올랐다. 올해 춘향선발대회에는 한국과 중국, 카나다 등에서 430명이 참가했으며 이 가운데 32명이 본선에 올라 경합을 벌였다. 최예령양은 중학교 2학년 때 연변예술학교 무용전공에 입학, 4년 후 대학본과생으로 연변대학 예술학원 무용과에 입학하여 재학 중인 것으로 밝혀졌다. 춘향선발대회에서 조선족 물동이춤으로 심사위원들을 홀릭하면서 최종 2등 격인 선의 영예를 수상한 최예령양은 트로피와 상금 300만원을 받았다. ▲ 제88회 춘향제 미스 춘향 입상자들. ⓒ남원시청 진에는 트로피와 시가 2000만원의 승용차가, 미에는 트로피와 상금 200만원이, 정과 숙, 현에는 트로피와 상금 100만원이 각각 전달됐다. 춘향선발대회는 제27회 춘향제가 개최된 1957년부터 춘향제 최대 하이라이트로 그동안 수많은 스타를 배출했다. 한편, 제88회 춘향제는 오는 5월 18일부터 22일까지 5일간 광한루원과 요천 일원에서 전통문화행사, 공연예술행사, 놀이체험행사, 부대행사 등 4개 분야 25개 종목으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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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18
  • 中 90后 몽골족 인기 여가수 울란투아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의 소수민족인 몽골족은 우리 조선족과 더불어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는 민족으로 그 소문이 높다. 몽골족 중에는 명망 높은 가수들이 많다. 푸런파야얼(布仁巴雅尔), 울란치치걸(乌兰齐齐格), 쟝잉줘마(降央卓玛), 쓰친파투(斯琴巴图), 몽골나라(蒙古娜拉)…이들 중 최근 가장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가수가 있다면 아마 섹시한 몸매와 이쁜 얼굴을 가진 여가수 울란투아(乌兰图雅)를 꼽아야 할 것 같다. 울란투아는 1990년 9월 9일, 내몽골 커얼친(科尔沁) 초원에서 태어난 90허우 여성으로 중앙민족대학 학력이다. 일찍 2011년 6월 21살 소녀인 울란투아는 가요 <토우마간(套马杆)>로 가요계에 데뷔, 그 이듬해인 2012년 12월 7일 <초원에서 북경을 바라보며(站在草原望北京)>를 열창해 인기가 급상승했으며 그해 이 노래는 중공중앙 선전부로부터 <중국몽(中国梦)> 우수가요로 선정되었다. 그 뒤 얼짱 소녀가수인 울란투어는 연속 흿트곡을 발표, 2013년에는 <나의 몽골말(我的蒙古马)>, 2014년에는 <초원에 정든 오빠(草原情哥哥)>, 2015년에는 <아얼산의 처녀(阿尔山的姑娘)>를 불러 관중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말아올렸다. 이 중 <아얼산의 처녀>는 중국문예지원자 우수작품으로 선정되었고 울란투어 또한 관광명승지 아얼산의 형상대사로 위촉받기도 했다. 최근 몇 년간 울란투아는 중국 각지에서 각광받는 초대가수로 발 돋음, 2016년에는 상해에서 출발해 전국의 10개 대도시를 순회하며 열창했고 2017년에는 <사계절 피는 꽃>이란 제목을 갖고 전국의 17개 도시를 순회하며 공연의 막을 올리기도 했다. 혈형 O형에 1.68미터인 훤칠한 키, 그리고 더 없이 사랑스럽고 귀여운 얼짱 미모인 몽골족 여가수 울란투아- 그 어디를 평해도 만점이다. 또한 최근 몇 년간의 폭발적인 인기로 향후 한동안 몽골족 가요계에서 울란투아의 시대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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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26
  • 중국 성악계의 조선족 거장- 최경호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 성악계에서 조선족 남성거장들로 보면 김영철, 송일 등 몇 명을 손꼽을 수 있다. 최경호도 이 중 일원으로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중 김영철, 송일은 테너와 베이스라면 최경호는 통속적인 대중가요로 인기몰이를 한 성악계의 거장이며 중국의 영화거나 TV드라마의 주제가 혹은 삽곡에서는 절대로 최경호를 외면할 수 없는 인물이다. 1972년 4월, 중국 흑룡강 성 목릉현의 한 보통 농민가정에서 태어난 최경호의 노래인생은 전문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극히 어렵고 힘든 가정환경에서 각고한 노력을 경주해온 노래인생이었다. 일찍 어린 시절, 천부적인 예술적 자질을 갖고 있었던 최경호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즐겨들으면서 그것을 따라 불러 인근 동네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경호가 9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불치의 병으로 돌아갔고 가뜩이나 어렵던 가정은 자식 6남매를 거느린 나약한 어머니 혼자의 어깨위에 놓여지게 되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최경호는 장차 커서 가수로 되려는 꿈을 꾸게 되었다. 하지만 궁핍한 가정환경은 그로 하여금 예술학교꿈을 접지 않으면 안되게 하였다. 1981년 최경호는 군에 입대, 그한테 있어서 군 생활은 자신의 장끼를 드러낼 훌륭한 활무대였다. 그는 연대에서 전사들 앞에서 음악지도로 활약했고 자주 군민연환모임(军民联欢会)에서 열창하여 인기몰이를 했는가 하면 사단에서 조직하는 문예콩쿠르에서도 여러 번 상을 받아 안았다. 1984년 군에서 제대하자 당시 중국의 호적원인으로 최경호는 본적지인 목릉현 농촌으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수의 꿈을 접을 수 없었던 그는 다시 농촌을 활무대로 노력을 경주, 그해 12월에 있은 현성 문예콩쿠르에서 <전사의 제2고향>과 일본 흑까이도 민요 <그물 당기기(拉网小调)> 등을 불러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으며 당시 현 문화국 국장이던 형탁(邢铎)의 특별 인가로 현문공단에 입단했다. 이어 그는 문공단을 따라 목단강 지구에서 여러 차례 순회공연에 나서는 한편 성급 콩쿠르에도 수차 참가하여 음악전문가들의 인정을 받았으며 1987년에는 흑룡강성 조선족예술관 성악지도로 발탁되었다. 한편 이 시기 최경호한테는 한차례의 풍파가 닥쳐왔다. 당시 중국 내지에서는 기업들에서 예술단을 창립하는 기풍이 불었으며 이는 예술에 대한 갈망과 추구로 불타던 그한테 있어서 일종 매혹이 아닐 수 없었다. 헌데 갖가지 유혹으로 모 기업의 예술단에 입단한 결과, 이 예술단은 예술보다는 모 기업의 홍보작용으로 이용될 때가 많았으며 지어는 몇몇 기업일군들의 적적함을 달래주는 도구에 불과하기도 했다. 몇 번의 실망고비를 넘긴 최경호는 1992년 단연히 모 기업 예술단에서 사퇴하고는 다시 원 사업터였던 할빈시 조선족예술관으로 돌아왔으며 그해인즉 그한테 있어서 가장 많은 성과로 가장 묵직한 상들을 걸머쥐던 해이기도 했다. 최경호한테 있어서 1992년은 성악생애에서 많은 수확을 거둔 한해인 한편 중국의 저명한 작곡가 곡건분(谷建芬) 선생과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되어 성악인생의 일대 전환기를 맞이한 한해이기도 했다. 바로 곡건분 여사의 알선으로 1993년 홍콩에서 <93중국풍>으로 명명된 대형공연에 참가하게 되었고 후에 중국의 10대 작곡가로 평선된 서패동(徐沛东) 선생을 알게 되었으며 곡건분 여사와 서패동 선생을 통해 최경호는 예술수준이 큰 폭으로 제고된 한편 인생의 철리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 때로부터 최경호는 중국 영화와 TV드라마의 주제가 혹은 삽곡을 부르기 시작, <조상지(赵尚志)>, <우리의 아빠와 엄마(咱爸咱妈)>, <삼국연의<三国演义>, <서유기 속집(西游记续集)>, <평화연대(和平年代)> 등 30여부의 영화 및 드라마의 열창가수로 선정되었다. 한편 최경호는 각종 명목의 성금활동에도 적극 참가, 1996년 할빈시 조선족예술관의 주최로 개최된 <최경호 음악콘서트>가 끝난 후 자신한테 차례진 수익금 전부를 흑룡강성 오상시 사범학교에 기부했고, 1998년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있은 <이재민 돕기 최경호 콘서트>에서 모금된 200만위안 그 전부를 재해구에 보내주어 국가재해구제사업 선진개인으로 평선되기도 했다. 그리고 2003년 연변에서 있은 <우애의 손 내밀기(伸出友爱之手) 최경호 개인콘서트>에서 최경호는 수익금 그 전부를 연변지구의 빈곤학생 1248에게 기부해 조선족 집거구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표달, 그 중에는 그해 본기 대학신입생 215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자가 최경호 가수를 처음 만나 취재를 한 것은 1998년 9월, 연변축구팬협회의 초청으로 연변체육관에서 <최경호 개인 콘서트> 열릴 무렵이었다. 콘서트가 열리기 전날 기자는 몇몇 축구팬들과 함께 연길시내의 한 규모가 작은 <개고기 전문점>에서 최경호와 만났다. 당시 그는 외관상으로는 아주 깔끔한 모습이었지만 성격상에서는 너무나도 시원시원한 남성으로 보였다. 그는 목청을 보호해야 하는 가수의 신분임에도 열혈축구팬들을 만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배갈 몇 잔 굽 내기도 했으며 “저의 목청을 보호하는 건 저 개인의 사정이고 연변축구를 밀어주는 건 우리 모두의 사정”이라고 하면서 조선족 축구에 대한 강한 애정을 표했다. 그리고 당시 연변오동팀의 감독 고훈과 선수단 전체가 참가한 가운데 콘서트 막이 오르자 중국가무단 가수(1996년 중국가무단 입단)로서 잘 부르는 한족노래가 많았으련만 그가 부른 첫 곡부터 마지막까지 <손에 손잡고>,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 한국가요와 <엄마생각> 등 조선족 가요 일색이어서 각별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최경호가 부른 <엄마생각>은 어릴 때 남편 없이 6남매를 키우며 고생하신 어머니를 그리며 부른 <사모곡>이어서 기자의 가슴을 허비면서 파고 들어서 코마루가 시큰해 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최경호는 지난 30여년간 12회에 달하는 개인콘서트를 가졌으며 명실에 부합되는 중국의 성악대가로 부상하였다. 최경호는 아직 40대 가수에 속한다. 40대라고 하면 인생의 황금기라 할 수 있다. 최경호가 이제 재차 가수생애의 황금기를 맞이하리라 믿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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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24
  • 다재다능한 조선족 여가수- 최연희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최연희(崔莲姬)라고 하면 중국 조선족 연예인들 중 별반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다. 그리고 그의 나이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서류를 보면 최연희는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과는 달리 가창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무용에도 대단한 실력을 갖고 있었으며 중국어와 한국어에 유창한건 물론 일본어 구사에도 막힘이 없다. 또한 시가창작과 복장 코디(服装搭配)와 형상 디자인에 짙은 애착이 있는가 하면 한국어로 된 가이드 생활에도 어느 정도의 경력을 갖고 있어 말 그대로 다재다능한 조선족 인재라 할 수 있다. 그 외 최연희한테 더욱 관심이 가는 것은 그녀가 조선족이 많은 연변이나 동북 3성이 아닌 수도 베이징 태생이며 거기에 그 외모 또한 매우 귀엽고도 사랑스럽다는 점이다. 최연희의 홈페이지를 보면 각종 풍격의 사진이 많다. 무대에서의 현란하고도 미감적인 장면과 생활속의 진실한 모습, 스타들과의 합영모습 그러한 것들은 신중하고도 내성적인 그의 성격과는 달리 그 거개가 활달하고 씩씩한 모습이다. 그리고 그 사진들 중, 가장 흡인력이 있는 사진은 스키를 탈 때의 모습으로 당시 최연희가 입은 주황색의 스키복과 머리에 쓴 하늘색 모자, 손에 든 캐릭터 장갑(卡通手套) 등은 주위의 환경과 잘 어울리면서 너무나도 매력적이다. 최연희의 홈페이지에는 그녀를 찬양하는 글들로 도배되고 있다. 예하면 그녀가 한국가수 이정현(李贞贤)을 많이 닮았고 노래하는 것도 이정현과 너무 근사하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중국의 <보아(宝儿)>라고 찬양하는 글도 있었다. 모두 최연희에 대해 긍정하고 높이 평가하는 것들이었다. 현재 베이징에서 생활하고 있는 최연희는 연습과 공연 그리고 콩쿠르에 참가하는 외 겸직으로 글 번역, 가이드 등으로 자신의 생활을 풍부히 하고 있으며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낙관하는 것도, 그렇다고 비관하는 타입도 아니다. 인생에 대해 그냥 담담한 심태라고 할까? 이 역시 팬들이 그녀를 좋아하는 원인일 수도 있다. 내성적이며 자신에 대해 절대로 크게 떠들어대지 않는 타입인 최연희- 그녀의 향후 목표는 창작형의 여가수로 되는 것이라 한다. 경 력 제1회 베이징시 예술절에서 독무 <부채춤> 1등상 획득, 무용 <여해군의 풍채(女海军的风采)> 2등상 획득 <아름다운 행동> 전국 예술콩쿠르에서 노래 <두이우얼(独一无二)>과 무용 <용감성>으로 청춘미 소녀상 획득 CCTV 3 음악무대에서 1등상 획득 CCTV 3 음악무대에서 우수선수상 특별 프로상 획득 CCTV3 <싱광다도(星光大道)> 춘제만회에서 한국스타 장나라와 함께 아리랑 열창 중국 교육방송국 한국어교육프로 제작 CCTV3 <싱광다도(星光大道)>의 연경연 우수선수로 평선 개인열창집 <1분 1초(一分一秒)> 제작 길림성 제7회 신묘컵 예술계열콩쿠르에서 독무 2등상 획득 2010년 개인음반 출판 제37회 세계 관광아가씨 콩쿠르의 초대가수로 <여자천하(女孩天下)> 열창 앨 범 <1분 1초(一分一秒)> <당신, 당신(是你是你)> <사랑은 나의 공기(爱就是我的空气)> <사랑엔 이유가 없어(爱没什么道理)> <내가 발견한 나의 세계(我发现我的世界)> <나의 사랑은 말한다(我的爱在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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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14
  • [단독 인터뷰] ‘인생연습’ 한가빈, “따뜻한 가수로 남고 싶어요”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동장군의 기세에도 기죽지 않고 기세등등한 가수가 있다. 지난 상반기 유튜브 조회수 100만을 기록하며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는 트로트계의 ‘한가인’ 한가빈(27) 씨가 주인공. 최근에는 한 씨를 위한 전국 규모의 팬클럽이 생겼고, 네이버밴드 등 SNS에 그의 이름이 수 없이 올라 화제가 됐다. 방송사로부터 연일 러브콜을 받으며 주가도 크게 올랐다. 데뷔 후 어느 때보다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 한가빈 씨를 만났다. Q : 안녕하세요. 최근 ‘한가빈 효과’라고 할 정도로 온·오프라인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 같아요. 방영 중인 드라마 '밥상 차리는 남자' OST를 불러 많은 시청자들의 호평도 받았죠. 그간 소회와 OST ‘인생연습’에 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A : 포털이나 방송사 홈페이지를 보면 저를 응원하는 분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어요. 제 노래를 듣고 ‘펑펑 울었다’는 댓글을 보면 절로 힘이 납니다. 많은 분들이 좋게 봐주셔서 이게 꿈 인가 생신가 싶기도 하죠. 제가 부른 곡 ‘인생연습’은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데뷔 6개월 만에 드라마의 OST, 그것도 공중파 드라마를 맡았다는 건 큰 영광이죠. 물론 처음에는 긴가민가 했어요. ‘제가 잘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호응은 어떨까’라고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감독님이 타이틀 곡 ‘꽃바람’을 들으신 후 “이 친구 OST 시켜야겠다”마음 먹으셨다고 하시더라고요. 트로트 앨범에는 유일무이하게 기타 반주 하나로만 부른 어쿠스틱 발라드 버전이 있거든요. 그 버전이 너무 좋으셨다고 했습니다. Q : 다른 분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A : 작곡하신 김종천 선생님도 곡 쓰시기 전부터 “한가빈에게 꼭 맞게 써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쓰셨다고 했어요. 그래서인지 저와 찰떡궁합입니다. 녹음 전까지 크게 고민 하지 않았고, 술술 풀렸으니까요. 음악이 공개된 후 방송국 게시판에 이 노래가 뭐냐는 문의가 폭주했다고 합니다. 그날 밤 종합 차트에서 아이유, 빙탄소년단을 제치고 1위를 하기도 했고요. 처음으로 비명이라는 걸 질러 봤습니다. Q : ‘인생연습’에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하던 데 어떤 내용인가요? A : 방송이나 행사에 가면 꼭 인생연습 불러달라는 요청이 많아요. 그때 마다 노래만 하지 않고 가사를 설명 드리곤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보통 인생을 얘기할 때, 인생에 연습이 어딨어 인생은 생방송이지… 이렇게 말씀을 많이 하시잖아요. 그런데 이 노래가 그 정의를 바꿉니다. 인생에도 연습이 있다고. 지금까지 아파했던 날 들은 인생의 연습이었다치고 이제부터 행복한 실전을 살아 갈 거야하고 다짐하는 곡입니다”라고 말하죠. 몇 마디로 전달 할 수 없지만 조금 이라도 더 와 닿으시라고 항상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요. 인생 연습을 들으시고 조그마한 위로가 됐다면 저는 행복합니다. 수많은 날들이 인생연습이겠지만, 저 역시 그때마다 제 노래를 부르면서 이겨내려고 합니다. Q : 가수로 데뷔는 때는 언제 인가요? A : 중3 때 음악을 처음 접한 후 몸과 마음이 들떴습니다. 노래를 해볼 까 하다가 이게 꿈이 돼버렸죠. 인기가요를 보고 화려한 무대에 오른 가수와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본격적으로 가수 길을 걷기로 했어요. 그러다 중 3때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고, 21살 때 트로트계에 발을 디뎠습니다. 그때부터 말 그대로 고생길이 열렸죠. 이 회사 저 회사 돌아다니다 현재 소속사 마이클미디어를 만나 6년 간 산전수전 다 겪고 2015년 10월 “꽃바람”을 발표했죠. 다른 사람들은 첫 앨범을 내면 감격해 눈시울을 붉힌다고 하던데 저는 ‘이제 고생이다’는 생각에 기뻐할 시간도 없었어요. Q : 처음 무대에선 기분은 어땠나요? A : 솔직히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대신 아마추어 가수로는 수 없이 많이 무대에 올랐지만 대중가수로는 처음이었으니 긴장이 컸던 것 같아요. 한편으론 가수로서 무대에 오르는 일이 이렇게 힘들구나라는 생각에 슬프면서도 기쁘고 복잡한 심정이 들었습니다. Q : 가장 좋아하는 가수와 즐겨 듣는 음악 장르는? A : 저는 시실 이런 질문이 가장 힘들어요. 다양한 장르의 가수와 음악을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콕 집어 얘기하면 제 감성과 가장 잘 통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트로트보다 발라드입니다. 대표적으로 린, 박화요비 선배님을 들 수 있죠. 그래서 제가 부른 트로트 음악은 감성적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아마도 이 두 가수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Q : 가수로 활동하면서 보람 있었던 때는 언제인가요? A : 어린 친구들로부터 쪽지와 메일을 종종 받아요. 그 중 “언니 같은 가수가 될 거에요”라는 내용이 많은데요. 저도 어릴 때 다른 가수를 보고 꿈을 키웠듯 이제 나도 누군가의 꿈이 되었구나 생각하면 기쁘고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 친구들 때문에 더 잘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Q : 앞으로 어떤 가수로 기억되고 싶은가요? A : 따뜻한 느낌의 가수가 되고 싶습니다. 노래 잘하는 가수, 예쁜 가수보다 누군가 저를 봤을 때 “저 가수는 잘은 몰라도 참 따뜻해 보여”하는 말을 듣고 싶어요. 그래서 많은 분들에게 추운 겨울 따뜻한 난로처럼 항상 곁에 두고 싶은 가수로 기억됐으면 좋겠습니다. Q : 끝으로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A : 제가 항상 팬들에게 이렇게 얘기해요. “우리는 서로 가수와 팬으로 만나지만 궁극적으론 가족입니다”라는 말입니다. 누구를 동경하고 가까이하지 못하는 사이가 아니라 함께 힘을 주고 기뻐하는 사이가 되고 싶어요. 그래서 가수와 팬은 함께 성장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팬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겠습니다. 트로트 계에 입문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그동안 숨어있던 내공이 한 번에 분출한 것일까. 그만큼 기대되는 가수다. 머지않아 한국 트로트 계를 주름 잡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 사람들
    2017-12-11
  • [단독 인터뷰] ‘한류 MC’ 임정은 “한·중 문화콘텐츠 가교 역할 해요”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최근 한중관계가 복원되면서 중국 내 한류바람이 불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간 문화콘텐츠가 두 나라의 우애를 다지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기에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 가운데 스타와 팬 사이 가교역할을 했던 MC도 관심의 대상이다. 기상청 사내 방송국 아나운서 출신인 임정은 씨는 한국어와 중국어에 능통한 전문 MC로 두 나라를 오가며 한류문화콘텐츠 지킴이로 나섰다. 학업과 일을 병행하면서도 늘 마음에는 한류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 ‘한류 MC’로서 겪은 갖가지 에피소드를 들어봤다. Q : MC로 데뷔한 계기는 언제였고, 주로 어떤 작품을 주로 맡았나요? A : 2008년 기상청 아나운서로 데뷔했어요. 첫 방송은 사내 방송국에서 진행한 ‘오늘의 날씨’ 프로그램이었어요. 매일 기상정보를 파악하며 바쁜 하루를 보냈지만 그만큼 의미있는 활동이었습니다. 이후 신화, 소녀시대 등 걸출한 한류 스타들과 중국을 오가며 콘서트, 팬 싸인회, 팬미팅 등의 MC를 맡았어요. 한류스타와 중국 팬의 가교 역할을 하며 우리나라의 문화콘텐츠를 알리는 데 앞장섰습니다. Q : MC로 활동하기 전에는 어떻게 지냈나요? A : 데뷔 전에는 학교에 전념하는 평범한 대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춤과 노래에 재능이 있었고, 남들 앞에서 스스럼없이 말하는 성격 탓에 여러 동아리에서 활동했지요. 한 때 창작가요 동아리에서 노래 하고, 작곡 공부도 했습니다. 대학가요제에 나가 남다른 노래 실력도 뽐내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론 얇은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아르바이트 현장에도 나갔습니다. 백화점, 마트 등에서 소고기와 각종 생필품을 판매하며 용돈을 벌었어요. 복학 후에는 전공인 중국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했습니다. 어학연수와 교환학생으로 중국 땅을 밞으며 담금질을 했습니다. 이를 발판 삼아 중국어 말하기 대회에 나가 유창한 어학실력을 발휘했고, 갖가지 에피소드로 청중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습니다. Q : 처음 관중들 앞에선 기분은 어땠습니까? A : 데뷔 후 방송 프로그램 진행을 위주로 활동하다가 2010년부터 국제무대에 올랐습니다. 당시 중국 칭하이에서 열린 한중가요제의 모습은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칭하이 성에서 가장 큰 한중콘서트 무대로 출연진과 팬, 담당자 모두가 기대했던 행사였습니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했던지, 당일 비가 오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중국 팬들은 돌아서지 않았어요. 함께 노래 부르고 응원하며 모두가 한 마음이 됐습니다. 저는 한복을 입고 진행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많이 떨렸지만 현장의 분위기는 어느 때 보다 뜨거웠습니다. Q : MC를 하면서 하길 잘했다 싶을 때는 언제인가요? A : 무대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청중들이 저를 향해 볼 때 마다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물론 대본 준비는 물론, 번역과 자료 준비로 바쁜 시간을 보내지만 청중들과 만난다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더 좋은 모습을 선보이기 위해 지금은 통번역대학원 학생으로서 학업에 매진하고 있는데요. 후회 없이 열심히 공부해서 통역사 그리고 MC로 멋진 모습을 보여줄 예정입니다. Q : 반대로 힘들 때는 언제인가요? A : 일을 좋아하는 만큼, 바쁘지 않을 때가 가장 힘들어요. 의뢰가 많지 않을 땐 제 실력이 부족한 건 아닌지, 사고는 치지 않았는지 복기하곤 합니다. 한편으론 기다림 또한 제 직업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대본 번역이나 자료준비를 하지 않을 때는 도서관에서 중국 관련 자료를 보거나 중국 방송 프로그램을 시청합니다. 요즘은 매일 학교에서 책을 보느라 정신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Q : 현재의 활동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A : 학업과 일을 병행하는 편이에요. 우선 통역번역대학원 학생으로 통역 공부를 열심히 하고있고요. 또 한중 국제행사, 한류콘서트, TV나 라디오 프로그램, 생방송, 홈쇼핑 등을 진행하거나 게스트로 출연하고 있습니다. Q : 수많은 공연이나 행사를 진행하였는데,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특히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한류에 대해 보고들은 느낌 등이요. A : 작년 이맘때 배우 이민호 씨 팬미팅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중국에서 1만 5천명의 팬들이 단체로 찾아 열기는 어느 때 보다 뜨거웠습니다. 팬 미팅 당일에는 지상파 방송 3사 프라임타임 뉴스에 보도되기도 했어요. 또 빅뱅과 신화, 엑소 같은 한류 그룹과 함께 할 때는 팬 분들이 직접 제 블로그나 웨이보에 와서 잘 봤다고 댓글을 남겨주시기도 합니다. MC로서 한류의 핵심 축을 담당했다는 생각을 하면 그것보다 뿌듯한 경험은 없을 겁니다. Q : 무대에 서서 공연에 열광하는 팬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A : 팬들의 환호와 열기는 한류스타뿐만 아니라 진행자인 저 게도 큰 힘이 됩니다. 13억의 중국인들이 한 마음이 돼 저를 응원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데요. 그런 모습을 볼 때 마다 중국인은 물론 한류 스타들에게 무한한 존경심이 듭니다. Q : 중국 팬들의 에티튜드는 어떤가요? A : 배우 분들의 팬 미팅을 진행하면,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도 많이 찾아옵니다. 소규모로 진행하는 행사는 가족 같은 분위기에요. 오랫동안 참가한 분들은 서로 누군지 알고 친분을 쌓기도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 마다 한류스타가 진정한 문화콘텐츠로 자리 잡았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Q : 앞으로의 꿈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A : 매일 카메라 앞에 서고, 마이크를 잡는 일이 꿈이에요. 나아가 통역 MC로서 더 다양한 국제무대에도 서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소통하는 저만의 콘텐츠를 만드는 엔터테이너로 거듭하는 것도 목표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더 잘 챙기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한·중 양국을 넘나들며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한류 전문 MC 임정은, MC로서 걸어갈 그녀의 창창한 앞날을 기대해 본다.
    • 사람들
    2017-11-06
  • 안혜령, 김은이 어린이 CCTV "비상 6+1" 무대에 오른다
    [동포투데이] 요녕성 심양 캐논예술학원 안혜령(9), 김은이(9) 학생이 중국 CCTV "상6+1(非常6+1)"무대에 오르게 된다. 현지 매체 요녕신문에 따르면 지난 6일, 캐논예술학원 김선화 원장은 "상6+1(非常6+1)" 제작진으로부터 캐논예술학원의 안혜령, 김은이 이 두 학생을 초청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지난 6월 17일, 캐논예술학원 안혜령학생과 김은이 학생은 3,000여명 선수들이 참가한 가운데 CCTV에서 주최하고 요녕텔레비죤방송국 동성대련프로그람(辽宁广播电视台童星大联栏目)에서 협조한 CCTV "상6+1(非常6+1)" 요녕지역 예선을 거쳐 7월 29일의 준결승(200명이 참가)에서 진출했고 또 50명이 참가하는 7월 30일의 CCTV "상6+1(非常6+1)"요녕지역 총결선에 참가했다. 이날 그들은 우리 민족 특색이 짙은 물동이춤, 아리랑노래, 장고춤 그리고 활력이 넘치는 현대무용을 선보여 장내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을 과시하였다. 김선화 원장은 “사상 처음으로 학생을 CCTV "상6+1(非常6+1)"무대에 올려 기쁘다"며 북경에 가서 더 좋은 성적을 따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혜령과 김은이 학생은 여러해 동안 캐논예술학원의 무용교원 황진향씨와 성악교원 김순화씨의 지도를 받아왔다. 안혜령은 지난해 KBS홀에서 열린 “재외동포와 함께 하는 KBS전국노래자랑세계대회”에서 최우수상과 제9기 ”교정의 새별” 전국경연에서 피아노 금상과 물동이춤 금상을 받았고 김은이는 올해 특장생 중국 경연에서 현대무용 “희나리”을 추어 금상을 받기도 했다.
    • 사람들
    2017-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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