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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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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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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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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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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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 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②
    1927년, 중국과 독일의 접촉을 시작으로 항일전쟁 직전까지 독일은 중국의 최대 협력 파트너였다. 원래 독일 군사고문은 장개석에게 60개의 독일의 기계사단을 통폐합해 내놓아야 했지만 국민정부는 그렇게 많은 돈이 없었고, 또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았기에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전역에 30개의 ‘조정사’만 있었고 독일은 40만 세트의 장비만 쏟아부었다. 이 정예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거의 소진되었다. 최초의 ‘송호회전’, ‘남경보위전’, 화북전장의 ‘흔구회전’, ‘낭자관전투’;등 전투에는 대량의 독일 기계사단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참혹한 대가를 치렀다. 이들 30개의 ‘조정사’ 중 28개는 사단 전체가 마비됐고, 2개 사단만이 격렬한 전투를 피했기에 그 병력과 장비를 보존할 수 있었다. 또 전쟁 때문에 독일의 무기는 제때 수송되지 못했고, 독일군은 장비를 보충받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국산장비를 갖고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게다가 독일은 일본과 동맹을 맺은 탓으로 독일군은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늦추다가 1938년 7월 중국에 대한 지원을 모두 멈추고 중국에서 철수했다. 독일인들은 철수했고, 중국의 항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중국내 전장은 군사 장비의 보충이 시급했고, 장개석은후원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바로 이때 소련이 나타났다. 소련은 국민정부로 하여금 일본군의 진군속도를 저지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장개석과 합작협정을 맺고 중국에 군사물자를 지원했다. 이에 따라 독일기계사와 미국기계사 사이에 소련기계사가 하나 더 생겼다. 소련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민정부가 농수산물과 각종 금속 원자재만 제공하면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10년 만에 중소 협력은 이렇게 성사됐다. 소련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름대로 성의를 갖고 있었고, 탱크와 비행기 같은 중무기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소련 장비로 20개 사단을 무장시켜 독일군 무기사단의 손실로 생긴 공백을 메우려 했다. 이렇게 양 측이 각각 필요한 것을 취해서 교역은 비교적 만족스럽게 진행 됐다. 하지만 소련 기계사의 배치에 있어서 중·소 양측은 이견이 있었다. 소련 측은 모두 소련군 편제대로 새로 편성된 부대에 장비를 배치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몰래 장비를 따로 빼돌려 포병단을 조직했다. 이렇게 10여 개의 포병단위를 만들면서, 미리 약속했던 대로 소련 기계사단에 이를 전달하지 않았다. 한편 소련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물자 수송도 간단해 1차 소련의 기계장비로 4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었으며 이 중 제200사단은 중국 최초의 기계화사단이 됐다. 그리고 후속으로 소련의 기계화 장비도 육속 도착해 장개석은 18개의 소련 기계화사단을 구성해 일본군과 잘 싸울 수 있었다. 이 보배같은 소련 기계화사단들에 대해 장개석은 독일 기계사단들처럼 잔혹한 전장으로 보내져 소모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1941년에는 15개 사단이 각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이 중립조약을 맺은 뒤 중소 관계가 약화되면서 소련의 군사장비는 보충되지 않았고, 소련의 기계화사단 역시 점차 역사적 명사로 되었다. 미국의 원조는 큰 것을 노린 전략적 움직임 실제로 영국은 독일의 지원이 끊긴 뒤에도 잠시나마 중국에 군사물자를 제공했지만 일본의 압력에 원조를 중단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중영 간 원조가 회복됐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이때 이미 해가 기울어 극동에 전념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소련의 장비가 없어지자 미국은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구세주가 됐고 국민당 군은 미 장비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항일전쟁 단계에서 미국이 실제로 충분한 지원을 하지 않은 데는 객관적인 이유도 있고 주관적인 이유도 있다. 한편으로 운남-미얀마 도로가 끊기자 물자 장비는 험준한 항로를 통해서만 수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적었다. 다른 한편으론 아시아 전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영국과 소련에 많은 장비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인은 통이 컸다. 중국의 해방전쟁 시기까지 22개 군 64개 사단이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장개석에게 보내와 국민당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장개석은 미국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공산당에 의해 대만이란 작은 섬으로 쫓겨나 지내다가 일생을 울적하게 마감했다. 중국은 북벌전쟁 때부터 외국의 군사원조를 대대적으로 받으면서 중간에 공급처를 여러 개 바꿨다. 심지어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 등도 중국에 숟가락을 얹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독일·소련·미국이 더 많이 지원했다. 왜 이런 나라들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중국을 지원했을까? 독일의 속셈은 짐작이 가는 대로 장사를 하러 온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금속과 각종 원자재가 중국에 많고 거기에 무기까지 팔아 큰돈을 벌 수 있는 중국을 싫어 할리가 없는 것이다. 소련은 여러 가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일본을 견제하여 극동에서의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 한편, 당시 소련은 넓은 영토가 독일군에 함락되고 원자재가 부족했기에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나라로 중국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국민정부에 원하는 게 없음에도 속내는 더 흉악했다. 미국이 내놓은 ‘임대법’은 파시스트의 침략을 받는 전 세계 국가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앞에서 이런 국가들이 육탄이 되어 주는 것이고 양쪽이 다 소모되면 그 때에 가서 그들이 나서서 수습하여 이들 국가들을 깊이 통제하겠다는 취지가 있었다. 한마디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변화 속에 있고, 친구와 적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판단되며 이익만이 영원한 것이다. 이들 나라가 중국에게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는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도 약육강식의 규칙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다만 실력이 강해야 비로소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경직된 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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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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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융합'에서 '세계화'로 이끈 역사적 변혁③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의 약속, 그것은 역중천균(力重千钧)이다. 또한 수파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이 말한 것처럼 “중국이 ‘WTO 가입’시 약속한 대외 개방을 이행한 것은 구성원 중 가장 깊고도 광범위하였다” 그리고 진리췬(金立群) 아시아 인프라투자은행 총재는 “‘WTO 가입’ 초기 중국이 발전 배당금을 더 많이 받았더라면 현재와 미래는 세계가 중국의 기회를 더욱 많이 공유할 것”라고 말했다. 중국공산당 제18차 대회 이래 중국은 개방의 역사를 주도적으로 파악하여 대외 개방의 질적 증가속도를 높였다. FTA 시험 구역과 자유무역 항구의 범위를 끊임없이 확대하였으며 외국인 투자 진입 네거티브의 부단한 축소와 ‘일대일로(一带一路)’의 가일층 심화…세계는 중국을 집중 조명하면서 중국 발전의 ‘급행열차’와 ‘편승열차’를 함께 타기도 했다. 푸젠(福建)에서 태어난 ‘중국초(中国草)’는 초대목(草代木)으로 식용균을 재배할 수 있어 경제적 가치와 생태적 효과를 겸비했다. 중국은 이 균초 기술을 전문가 그룹과 더불어 사심 없이 세계, 특히는 저개발국과 공유하고 있다. 현재 ‘중국초’는 세계 100여 개 국가에 뿌리를 내리고 수십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중국초’가 빈곤 지역의 발전 희망을 부풀리는가 하면 ‘중국 도로’, ‘중국 교량’과 ‘중국 열차’도 국경을 넘어 우정과 발전의 맥을 전하고 있다. 지난 12월 3일 중국-라오스 국제철도가 개통됐다. 북쪽 쿤밍(昆明)에서 출발하여 남쪽의 비엔티안에 도착하는 국제 열차이다. 전체 길이는 1035킬로미터이다. 이 ‘강철 실크로드’는 동남아 국가들에 피복되어 번영과 풍요로움을 주는 큰 통로가 됐다. 또한 중국과 아프리카 27억 대중이 손잡고 높은 수준의 중국―아프리카 운명공동체 구축을 추진하고 중국·아세안 협력도 가일층 승화돼 동아시아 경제통합을 이끌고 있다. ‘차이나 기회(中国机遇)’의 스토리가 매일 이어지면서 전 세계 우호 국가가 확대되고 개방과 공영의 굉장한 힘을 모으고 있다. 중국식 다스리기- 개방은 개혁을 추진하고 중국식 현대화의 새로운 길 개척 이는 ‘WTO 가입’의 배당금이자 개혁의 배당금이었다. 개혁은 진통이 있지만 개혁하지 않으면 긴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중국 기적’은 대외 개방과 개혁 심화를 결합한 소중한 경험을 갖고 있다. 왕원타오(王文涛) 중국 상무부장은 “WTO에 가입한 이래 중국은 개방으로 개혁과 발전을 촉진하면서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끊임없이 완전하게 추진해 시장과 사회의 역동성을 불러일으켰다”며 “개방은 체제의 문제점을 표출시키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바로 개혁의 주안점이다”라고 밝혔다. 1986년 중국이 정식으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총 협정 체결국 지위 회복신청을 낸 이래 15년이란 긴 회복기간과 ‘WTO 가입’ 협상이 있었다. 이로 하여 중국은 WTO에 미리 적응하는 시간을 벌었고 국내 경제 개혁에 방향을 제시했다. 장샹천(张向晨) 세계무역기구 사무 부총장은 “다자간 무역체제와 국내 경제체제 개혁을 통합해야 국제무역체제에서 수혜를 볼 수 있다”며 “결재기간은 15개의 영업일에서 3개의 영업일로 압축되었으며 올해 4월 하이난(海南) 해상사무 부문의 개혁으로 하이난 FTA항의 첫 외국인 독자기업인 양푸항(洋浦港) 착지가 빨라졌다”고 평가했다. 20년 동안 중국의 이러한 국내개혁 변화는 끊임없이 일어났었으며 경제 분야의 각종 체제기제의 약점을 부단히 보충했다. 개방하면 늑대와 춤을 추는 업종이 반드시 있을 법이기에 중국은 오히려 개혁을 가속화하면서 ‘굳은 살을 헤치고 다시 태어나라’고 몰아붙이곤 했다. 자동차업계의 경우 더 많은 외국 브랜드를 유치했지만 자국 브랜드에도 기회를 주어 중국 자동차도 경쟁에서 ‘물 대포’를 맞으며 ‘보위전’을 치렀지만 그것이 ‘진급전’을 이어갈 정도로 경쟁이 커졌다. 469만 대와 5000만 대, 이는 2001년과 2020년 중국 자동차생산 판매량의 비율로 거대한 차이가 업계의 변화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2018년 합자주율 제한이 가시화되면서 신에너지 트랙에서 중국산 자동차들이 앞지르기를 준비하고 있다. 외국인 투자 유치 네거티브 리스트 개정(负面清单) ‘감법(减法)’ 하나하나가 더 개방적인 영역을 의미했고 리스트가 적어질수록 관리 틀과 모델상의 개혁 요구는 더 높아졌다. 개방은 제도로 보장하고 개방은 제도로 확대한다는 것이 중국이 세계에 보내는 더 높은 수준의 개방 신호다. 2018년에는 중국의 첫 ‘제도적 개방’을 실시했고 2019년에는 ‘규제·관리·기준 등 제도적 개방 추진’을 명시해 중국의 개방 개혁이 국내제도 차원으로 한 단계 더 확대됐음을 보여주었다. 중국의 ‘WTO 가입’은 중국이 시장경제를 하겠다고 전 세계에 약속하고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강조하고 있는 중대한 돌파구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룽융투(龙永图) 중국의 ‘WTO 가입’ 수석협상대표는 “오늘날 인민 중심으로 된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길이 세계의 모범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20년간 중국은 개발도상국의 발전 수준, 발전 단계, 수용 능력에 입각하여 질서정연하게 시장 개방을 추진하였다. 또 선진국 발전 경험과 사회주의 제도를 유기적으로 결합해 중국식 현대화의 새로운 길을 만들어냈다. 금융업에서 중국은 서방의 100년 간 경험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았으며 한편으로는 열심히 공부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방의 발전 경로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다. 즉 본토와 결합해 제도 혁신을 하였고 나름대로의 세계적 금융허브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도 중국은 반성과 함께 금융업 개혁과 개방을 자국의 절주대로 밀고 나갔다. ‘선위불가승, 이대적지가승(先为不可胜,以待敌之可胜)’이라고 ‘손자병법’의 이 구절은 소박한 진리를 말한다. 자신의 단점을 직시해 약한 부분을 공략하면 후발 강점을 살리고 결국에는 경쟁에서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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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1-12-23
  • 中, '융합'에서 '세계화'로 이끈 역사적 변혁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세계경제가 중국을 ‘수용’했기에 새로운 시대에 들어 중국의 더욱 폭 넓은 개방에 더욱 경탄하고 있다. 중국공산당 제18차 대표 대회 이래 중국의 대외 개방은 수동적으로부터 주동적으로 세계 경제를 이끄는 뚜렷한 특징이 나타났다. 지난 12월 1일, 중국-유럽행 열차가 충칭 단결촌에 있는 철도 중심역에서 화물을 가득 실은 채 천천히 빠져나왔다. 충칭세관이 올해 들어 감독관리를 더 한층 풀어준 2191번째 중국-유럽행 열차로 그 옛날 사막의 낙타방울이 오늘날의 ‘강철 낙타 행렬’로 된 셈이다. 10년간 중국-유럽행 열차는 이미 일대일로를 공동 건설하는 중요한 운반체가 되어 중국의 대외개방 판도를 넓혔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경제의 세계화 과정에서도 큰 진전을 보여주고 있다. 충칭이란 이 ‘산성’은 세계에로 통했고 ‘옛 고지’는 다시 새로운 봉우리로 올라가게 되었다. FTA 실험 구역은 수차례 중국의 동서남북에 일떠섰다. 선전 경제특구의 40년 재출발, 하이난 자유무역항은 돛을 올려 항해를 시작했고 광둥, 홍콩과 마카오는 공동으로 국제 일류의 걸프 지역과 세계적인 도시 군을 건설했으며 슝안 신구(雄安新区) 천년대계와 국제소비중심도시 건설은 쾌속 궤도에 진입했다. 이렇듯 하나의 강력한 움직임이 모여 중국경제 총량을 100만 억 위안의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게 했고 1인당 GDP는 1만 달러를 돌파하였다.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면 중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완전한 공업 분야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빠른 걸음으로 고품질 발전을 향해 전력투구하고 있다. 즉 신에너지차, 인공지능(AI), 디지털경제 등 분야에서 대규모의 추월을 야망하고 있다. 중국의 기회, ‘세계시장’을 개방 육성하고 세계경제를 일지춘수(一池春水)로 활성화 시켜 중국은 개방 속에서 스스로를 발전시키고 개방 속에서 세계를 행복하게 한다. ‘중국의 기회’는 세계적인 대 변혁사였으며 4회 연속 거행된 수입품 박람회는 경전적인 주목으로 ‘이전난구(一展难求)’의 큰 인기였다. 곧 바로 세계 각국이 개방 확대와 세계화의 종심(纵深) 발전을 향해 던진 중국의 ‘신뢰표’는 중국 시장의 큰 매력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2018년, 중국은 보호무역주의 역풍에 맞서 세계 최초로 수입을 주제로 한 국가 급 수입품박람회를 상하이(上海)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무역자유화와 경제세계화를 지지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또한 2019년에 있은 제2회 수입품박람회는 신 중국 창립 70주년을 맞아 ‘더 높은 수준의 개방’이라는 시대적 강음을 전했다. 이는 중국의 개혁개방의 재출발 의지를 과시한 것이다. 그리고 2020년에 있은 제3회 수입품박람회는 전 세계 코로나19 상황의 충격에 직면하여 중국은 세계에 향해 “새로운 발전 구도는 결코 폐쇄적인 국내 순환이 아니다”라고 정중히 선언했다. 국내와 국제라는 쌍 순환 트랙을 더욱 활짝 열어놓은 셈이다. 2021년 제4회 수입품박람회의 취지는 ‘개방의 봄바람으로 세계가 따뜻하게 하자’는 대국의 드넓은 도량이었다. 중국은 인구 14억여 명과 중위소득 4억 명 이상으로 연간 약 2조5000억 달러의 수입과 서비스를 제공하였고 시장 규모도 엄청나게 크다. 수입품박람회의 ‘로드맵’중국 시장은 ‘세계의 시장, 공유하는 시장, 우리 모두의 시장’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WTO 가입 20년, 중국은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으로 세계와 시장 기회를 확고히 공유하고 있다. -화물 부문은 전체 관세가 7.4%로 낮아지고 서비스 부문은 120개 가까이 개방돼 모두 ‘WTO 가입’ 시의 약속 수준을 웃돌았다. -중국은 120여 개국의 주요 교역 파트너로 부상해 지난 20년간 세계 경제성장에 대한 연평균 기여율이 30%에 육박했다. -세계적인 수입대국이 되어 42개 최빈 개도국의 97%에 대해서는 관세면제 혜택을 주었고 25%에 해당하는 그들의 수출을 유치하여 최빈개도국의 최대 수출시장으로 되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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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9
  • 53년 전, 생명으로 지킨 中극비문서...22일 후 세계를 진감④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지난번 계속) 1968년의 10월 초부터 곽영회는 핵 실험장에서 중국의 첫 열핵탄두 발사 준비작업에 참여하면서 12월 초까지 머물렀다. 그날 저녁 그는 북경으로 가는 항공편을 알아보고는 곧 비행기를 탈 목적으로 비행장으로 향했다. 당시 야간항공편을 타지 말고 다음날 아침에 출발하라는 동료의 만류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곽영회는 역시 “야간항공편을 이용하면 이튿날 근무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서 고집을 꺾지 않았다.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를 기다리는 사이 곽영회는 과제 연구조 성원의 회보를 받은 후 인차 비행기에 올랐다. 5일 새벽, 곽영회가 탑승한 비행기는 북경 수도공항에 서서히 착륙하다가 지상 400미터 되는 지점에서 갑자기 균형을 잃었으며 한동안 허우적거리다가 공항에서 불과 1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옥수수 밭에 추락했다. 당시 탑승한 승객과 승무원 도합 14명 중 중상자는 단 1명에 불과했다. 그 생존자는 당시 추락 직전의 상황을 떠올리면서 곽영회가 생명의 마지막 시각에 “아, 나의 서류!”라고 소리쳤다고 회고했다. 사고 직후 구조대원들이 추락 현장에 도착했을 때 나머지 13구의 희생자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에 타고 너부러져 있었지만 유독 2구의 시신은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구조대원들은 시커멓게 탄 시신 2구를 떼어내려고 애를 쓰던 중 그 2구의 시체의 가슴사이에서 뭔가를 발견하였다. 거의 멀쩡한 서류 가방이 끼워져 있었던 것이다. 서류 가방을 열자 그 안에는 곽영회가 상급에 보고하려고 했던 그 열핵미사일 시험 데이터 자료가 있었다. 그 시신 2구의 시신은 곧 바로 곽영회와 경호원으로 확인됐다. 열사의 정신은 영생한다 곽영회가 당한 조난은 삽시에 세상을 진동하였다. 주은래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사고 원인을 철저히 조사한 결과 비행기는 내비게이션시스템(导航系统)에 고장이 난 것으로 추정되었다. 곽영회의 비보를 듣고 울음을 터뜨리던 전학삼은 “그냥 10초였다. 생명이 있고 지혜가 있는 사람,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우수한 역학 연구 대가가 세상을 떠났다. 삶과 죽음, 10초였다!”며 몇 번이고 되뇌이었다. 한편 조난 소식을 접한 곽영회의 아내 이패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혼자 베란다로 나와 먼 곳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2007년 이패 여사는 평생 모은 돈 60만 위안을 두 차례에 걸쳐 중국과학기술대학과 중국 과학원 역학연구소에서 설립한 ‘곽영회 장학금’에 기부했다. 들려오는 풍문에 따르면 당시 누군가 이패 여사에게 “왜 기부의식을 차리지 않느냐”고 묻자 이패 여사는 그냥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의식은 무슨 의식? 그냥 원해서 기부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1968년 12월 25일 중공중앙에서는 곽영회에게 열사 칭호를 수여했다. 그리고 12월 27일 즉 곽영회가 사망한지 22일 후, 그가 생명으로 지켜낸 중요한 자료에 따라 중국은 첫 열핵미사일 실험이 성공하여 수소폭탄의 무기화가 실현되었다. 또한 1970년 4월, 곽영회가 직접 설계한 ‘동방홍 1호(东方红一号)’ 인공위성이 성공적으로 발사됐다. 1999년 9월 18일, ‘양탄일성(两弹一星)’프로젝트에 탁월한 공헌을 한 중국 과학자 23명이 국가로부터 ‘양탄일성공훈장’을 수여받았다. 이 23명 중 곽영회는 유일하게 핵폭탄, 미사일과 인공위성 연구개발에 모두 참여하고 이바지한 과학자이자 유일한 열사였다. 2018년 7월, 국제 소행성센터는 국제사회에 정식으로 공지를 발표하여 일련번호 212796과 212797의 소행성은 ‘곽영회성’과 ‘이패성’으로 영구 명명했다. 매번 우리가 고개를 들고 먼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항상 우리의 진로를 안내하는 것은 언제나 빛나는 그 별이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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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8
  • 中, '융합'에서 '세계화'로 이끈 역사적 변혁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일전, 중국 관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지난 11일은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20주년을 맞은 날(이하 ‘WTO 가입’으로 약칭)이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나무채 하나, 사인펜 하나로 중국은 세계 무역의 대 가정에 ‘입성’, 카타르의 도하 만에서 이를 지켜보며 글로벌 산업 고리의 가치 고리를 공유하는 역사적 기회를 얻게 되었다. 20년 간 중국은 개방으로 개혁을 촉진하고 개혁으로 발전을 촉진해 ‘세계의 공장’과 ‘세계의 시장’으로 도약하겠다는 ‘WTO 가입’ 약속을 전면적으로 이행했다. 전면적으로 샤오캉 사회(小康社会)를 건설하는 첫 번째 100년 분투 목표의 실현을 추진하였다. 그 20년 후, 역사의 새로운 길에 들어서면서 중국은 ‘탈군(退群)’, ‘탈연(脱钩)’이라는 세계화의 역류 앞에서 강대국의 담당과 역사의 주도권을 보여주었으며 '융합'에서 '세계화'로 이끄는 역사적 변혁을 맞았다. “군자는 근본에 충실하고 그 본은 도생으로 일어선다(君子务本,本立而道生)”. 100년 만의 큰 변화에 직면한 중국은 더 높은 수준의 개방을 추진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했으며 인류 운명공동체 구축의 발걸음은 지축을 울렸다. 중국의 기적: 개방은 ‘세계의 공장’을 만들었고 중국 발전의 도도한 물결을 격발시켰다 현재의 중국으로 된 데는 개방전략의 힘이 컸다. “‘WTO 가입’이 분수령이었다.” 중국 대외경제무역대학 세계무역기구연구원 도신취안(屠新泉) 원장의 말이다. 그렇다면 1971년 유엔에서의 합법적 지위가 회복된 것이 중국의 ‘정치적 신분’이었다면 2001년 세계무역기구 가입은 중국의 ‘경제적 신분’을 해결한 것이다. 세계경제가 중국을 ‘수용’했기 때문에 세계는 곧 급성장하는 ‘중국의 기적’을 맞이했다. 거시적 안광으로 보면 중국 경제는 후발 우세와 비교 우세를 과시했다. 2010년 경제 총량은 일본을 앞지르면서 6위에서 10년 만에 2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WTO 가입’ 전까지 4%에 불과했던 중국의 GDP가 2020년에는 전 세계 17%를 점했다. 다음 미시적 안광으로 보면 ‘늑대가 왔다’는 경고에 중국 업체들은 늑대와 함께 춤을 추며 국제경쟁의 시련을 이겨내면서 큰 잠재력을 발휘했다. ‘WTO 가입’ 전까지 세계 500대 기업 중 10여 개에 불과했던 중국 기업이 2021년에는 143개의 기업이 명함장을 올렸다. 그리고 효율적 안광으로 보면 20년 전 중국에서 하룻동안 드나들던 수출입 물량을 지금은 3시간 남짓하면 완료할 수 있고, 20년 전 중국이 1분 동안 일궈내던 GDP 수치는 지금은 7초면 충분하다. “큰 보폭으로 시대를 성큼 따라갔다.” 왕원타오 중국 상무부 부장에 따르면 지난 20년 간 중국의 경제 총량과 화물 무역은 모두 8배나 증가하면서 중국은 세계 1위의 무역대국이 됐으며 대외직접투자는 세계 26위에서 1위로 성큼 올라섰다. 세계경제가 중국을 ‘수용’했기 때문에 중국이 ‘WTO 가입’ 약속을 전면 이행했음을 세계가 증명하고 있다. "‘WTO 가입’ 3년이 지나자 중국은 무역 경영권을 개방할 것을 약속했다. 2004년 7월 새 무역법을 시행하여 반년 앞당겨 실현했다. ‘WTO 가입’ 약속을 이행하여 3년 동안에 증권회사 주식 3분의 1을 외국인이 차지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지식재산권 보호를 약속하면서 중국은 ‘국가 지식재산권 전략요강’을 제정, ‘중국 지식재산권 보호 행동계획’ 등을 잇따라 발표하면서 다양한 분야로부터 1000여 건의 구체적 조치를 시행했다. 사실 중국은 WTO 가입 약속을 10년 만에 모두 이행했으며 많은 부분에서 초과기여를 했다. 전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 라미 등 유지인사들은 모두 중국에 ‘WTO 가입’ 답안지에 ‘A+’라는 높은 점수를 주었다.(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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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8
  • 53 년 전, 생명으로 지킨 中극비문서...22일 후 세계를 진감③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지난번 계속) 곽영회는 귀국하자 모택동 주석과 주은래 총리의 직접적인 접견을 받았다. 접견 장소에서 주은래가 곽영회에게 “무슨 요구가 있는냐”고 묻자 곽영회는 머뭇거리지도 않고 “하룻 빨리 업무에 임하고 싶다”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조국이 수요하는 사업에 투신 1956년 말, 중국역학연구센터가 설립되자 전학삼이 소장을 맡았고 곽영회가 상무부소장이 됐다. 그 이듬해에는 역학연구센터와 청화대학이 공동으로 공학역학 연구반을 운영하였으며 곽영회가 담임교원과 강사를 맡았다. 1958년 중국 과학기술대학에서 화학물리학과를 설치했으며 초대 학과장에는 곽영회가 부임했다. 그러는 동안 곽영회는 ‘역학보’와 ‘역학번역총서’를 창간하였으며 동시에 많은 역학학술 명작을 번역 출판하였다. 이렇게 곽영회는 전학삼과 더불어 중국 근대 역학사업의 창시자로 되었다. 이후 곽영회가 참여하는 모든 프로젝트는 교수나 연구보다 어렵고 간고하였으며 또한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인 즉 중국이 자체로 핵무기를 만드는 것이었다. 당시 소련은 중국과의 관계 파탄으로 관련 전문가와 기술 장비 및 관련 자료를 모두 철수해 중국의 ‘양탄 프로젝트(원자폭탄과 수소탄 프로젝트)’는 심한 난항을 겪었다. 당시 곽영회는 도면과 자료도 없는 상황에서 위기 앞에서 왕감창(王淦昌), 팽항무(彭桓武) 등과 함께 중국 핵무기 연구의 최초 3대 기둥을 형성, 당시 중국과학원 제9연구원(현재의 중국공정물리연구원)에는 4개의 첨단기술위원회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그 중 곽영회가 장외 실험위원회를 이끌면서 핵무기 개발의 실험과 무기화를 담당했다. 원자폭탄 연구 과정에서 곽영회는 한편으로는 과학자들을 위해 폭발역학과 탄두설계의 기본 이론을 전수시킴과 아울러 신속하게 실험실을 건립하여서는 구조의 강도와 진동과 충격 등의 데이터를 연구했다. 특히 대잠 핵무기의 수중폭발역학과 수역학 등에 관한 연구도 담당, 거기에 폭발 물리 실험에서 곽영회는 연구팀을 이끌고 실험을 거듭하면서 여러 어려움을 극복했으며 ‘두 가지 방법을 병행해 최종 우열을 가리는 것’으로 중국의 첫 원자폭탄 폭발을 위한 최선의 방안이 결정됐고 이후 이는 중국의 1세대 핵무기에 사용됐다. 1963년, 곽영회는 핵무기 개발 연구진과 함께 핵무기 연구 기지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이미 반백이 넘은 곽영회는 중국의 1세대 핵무기 연구자들과 동고동락을 함께 했다. 영하 40도의 혹한과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황량한 대지 그리고 고지대 반응으로 인한 두근거림과 가슴의 답답함, 부종을 견뎌야 하고 밤낮없이 계산하고 연구, 실험과 폭파를 반복하면서 곽영회는 중국의 원폭 실험을 성공에로 몰고 갔다. 1964년 10월 16일, 중국 신강의 뤄푸버(罗布泊) 상공에는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중국의 첫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했던 것이다. 순간, 환호하는 인파 속에서 곽영회는 격정의 눈물을 쏟으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한 뒤에도 곽영회의 사명은 끝나지 않았다. 수소폭탄과 미사일 개발에 관한 작업 외 1965년 9월부터 곽영회는 중국 최초의 인공위성 개발 중 위성 본체가 지구로 귀환하게 하는 연구팀을 지휘하게 됐다. 고강도, 고밀도 작업을 오랫동안 하다 보니 곽영회한테는 여가시간이란 전혀 없었다. 그는 워낙 음악 감상을 좋아했다. 미국에서 귀국할 때 음반 두 상자를 가져왔지만 오랫동안 봉투도 뜯지 않고 있다가 결국에는 몽땅 중앙인민방송에 보냈다. 그리고 그는 우표 수집을 좋아했으며 그한테는 수집해 놓은 우표만도 책 세 개에 달했다. 그러나 이 역시 국가 우정총국에 몽땅 보내졌다. 그는 또 촬영도 좋아했으나 결국에는 렌즈를 만질 틈조차 없을 정도로 바빴다. 당시 곽영회는 실험기지와 북경을 자주 오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늘 비행기를 탔다. 당시 중공중앙은 그의 안전을 위해 늘 걱정했으며 주은래 총리 역시 곽영회 같은 과학자들의 비행기 탑승을 아주 못 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시간을 쫓기 위해 늘 비행기에 탑승했다. 1968년 12월 4일, 그날도 곽영회는 야간항공편을 이용했다.(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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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7
  • 53 년 전, 생명으로 지킨 中극비문서...22일 후 세계를 진감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지난번 계속)당시 곽영회를 포함한 중국의 유학파들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임이 인차 증명되었다. 곽영회, 전위장과 임가추 등 3명은 함께 캐나다 토론토대학 응용수학부에 보내져 반년 만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곽영회는 1941년 미국 캘리포니아 이공대학 공기역학연구센터에 입학하여 공부하게 됐다. 당시 이 연구센터의 구겐하임 항공실험실(GALCIT)은 전 세계 최고의 연구센터였다. 왜냐하면 이 센터의 기둥 교수는 세계 기체역학의 신격인 폰 카르멘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곽영회는 훌륭한 교수를 만났고 또한 평생의 지기였던 선배 전학삼을 알게 되었다. 학업기간 곽영회는 ‘초음속류 불연속해결’ 연구를 주도적으로 제안했다. 이는 당시 공기역학 분야에서의 최우선 과제였으며 후에 곽영회는 이 연구로 박사학위를 따냈다. 1946년, 폰 카르멘의 학생 빌럼 힐스는 코넬대학에 항공공학 연구원을 설립하려 했다. 이러자 폰 카르멘은 곧바로 그에게 제자 곽영회를 추천했다. 또한 매사추세츠 이공대학(MIT)으로 강의하러 가려던 전학삼은 직접 차를 몰고 와서는 후배 곽영회를 코넬대학으로 호송하기도 했다. 코넬대학 교수로 부임한 곽영회는 비행기의 초음속 장애 제거를 위한 돌파 연구에 몰두했다. 당시 초음속 비행을 갓 실현한 항공기는 일반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것인즉 일단 비행기가 초음속에 가까워지면 저항이 급증하는 것이었다. 일단 조작이 먹통이 되면 추락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초음속 장애 제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곽영회는 자신의 끈질긴 연구끝에 업계를 떠들썩하게 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완전히 새로운 계산 방법을 창조하여 인류가 음향 장애를 돌파함에 있어서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1946년 5월, 전학삼과 곽영회는 미국 캘리포니아 이공대학을 떠나 미국항공자문위원회(NACA)에 부임했다. 이들 두 사람은 당시의 NASA에 ‘압축이 가능한 무선 아음속과 초음속 혼합형 흐름 및 상임계 마하수(可壓縮無旋亞聲速和超聲速混合型流動和上臨界馬赫數)’란 제목으로 된 논문을 제출해 초음속 흐름에서의 이론과 계산 문제를 해결하고 초음속 비행체 설계를 크게 촉진했다. 공기역학과 응용수학에서 뛰어난 활약과 공로로 곽영회가 미국 업계에서 크게 명성을 얻게 되자 많은 대학에서 강의를 요청했고 관련 기업들도 높은 연봉을 대가로 스카우트했다. 당시 곽영회는 이미 코넬대학의 교수이자 항공공학 연구원의 3명 핵심 중 한 명으로 미국에서 자동차와 집이 있었고 생활도 편했다. 그러나 1949년 이후부터 그의 마음속엔 귀국이라는 욕구가 더 강열해졌다. 그때 어떤 친구가 “장차 아이들도 이곳에서 더 나은 교육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왜 빈곤하고 낙후된 나라로 돌아가야 하는가”며 곽영회의 생각을 돌려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곽영회의 대답은 “가정과 나라가 가난한 것은 아들로서의 무능을 말해줄 뿐이다. 나는 스스로 중국인이라고 자부하며 나한테는 귀국하여 여러분들과 함께 조국을 건설할 책임이 있다”는 몇 마디였다. 그러나 곽영회의 귀국길 쉽지 않았다. 그때 곽영회는 코넬 대학에 도착하자 “내가 이 대학교에 온 것은 그냥 잠깐 온 것 뿐이며 이제 적당한 시기가 되면 곧 떠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국 항공공학연구회에서 근무하면서 곽영회는 많은 기밀자료를 접할 수 있었다. 한번은 곽영회의 테이블 위에 한 장의 등록지가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는 “만약 전쟁이 발발하면 미국을 위해 복무할 의향이 있느냐”는 물음란도 있었다. 그것을 본 곽영회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NO(아니오)’라고 적었다. 그 이후 곽영회는 더 이상 기밀 자료를 열람할 권한을 잃었다. 1950년 전학삼은 미국당국에 귀국 제의를 했다가 수감되었으며 아울러 자택도 검문검색을 받았다. 동시에 곽영회의 출국 자유도 제한되기 시작했다. 곽영회는 영국에 가서 강의하는 것조차 불가능 했다.이런 상황은 1955년까지 지속되었고 중미 양국이 대사급 회담에서 합의를 보고 나서야 미국은 자국 내 중국 유학생과 과학자들의 귀국을 허용했으며 전학삼은 마침내 먼저 귀국할 수가 있었다. 전학삼이 귀국한 후 곽영회는 귀국 욕망이 더욱 강렬해져 매일 아내 이패(李佩)와 귀국 계획 의논했다. 그동안 코넬대학은 곽영회를 잡아 두기 위해 높은 급여를 제시했고 대만 당국도 후한 대우로 그가 대만으로 오기를 희망했다. 드디어 귀국 날짜가 다가왔다. 곽영회는 자신이 10여 년간 심혈을 쏟아왔던 대량의 연구 자료와 강의 원고를 태웠다. 이에 아내 이패의 회억에 따르면 연구자료는 남편의 오랜 정성이란 사실을 알고 말렸지만 당시 남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곽영회 또한 당시를 회상하면서 그렇게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것을 가지고는 미국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이 내 머릿속에 다 들어 있었다” 곽영회가 이렇게 과단한 결심을 내린데는 선배 전학삼이 귀국할 때 갖고 있던 서적과 공책 800킬로그램이 모두 미국 세관에 의해 압수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곽영회가 원고를 태운 바로 다음 날 코넬대학 항공공학 연구원 원장은 곽씨네 부부를 위해 대형 피크닉 파티를 열었다. 파티에서 곽영회는 곧 완성될 원고를 불태워 버렸다. 이에 현장에 있던 교수들과 학생들은 모두 타오르는 불빛을 바라보며 묵묵부답이었다. 1956년 9월 30일, 마침내 곽영회 부부는 몇몇 중국 과학자들과 함께 귀국하는 ‘클리블랜드 프레지던트호’에 탑승했다. 그런데 배가 출항하기 직전 미국 이민국과 연방수사국(FBI) 요원들이 갑자기 배에 올라 귀국하는 모든 중국 과학자들의 짐을 강제로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패는 사전에 남편이 서적을 다 태워버린 것이 얼마나 현명한 것인지에 대해 그때에야 알았다고 회고했다. 2시간여 만에 ‘클리블랜드 프레지던트호’가 드디어 고동을 울렸고 곽영회는 마침내 귀국하게 되었다. 그해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12-10
  • 中, 유엔 평화수호 행동의 관건역량으로③
    [동포투데이] 중국은 30년 넘게 유엔 평화유지 활동에 참여하면서 유엔 평화 유지부대의 핵심 역량으로 됐으며 말리, 콩고 등 임무 수행 지역에서도 그랬고 갑작스런 코로나19 사태 시에도 중국 평화유지군은 ‘대국의 담당역할과 세계 평화 수호’란 초심과 사명감을 안고 실제 행동으로 전란 충돌 지역 주민들에게 평화와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중국 평화유지군 참모 장교, 평화유지활동 차질 없이 진행 ● 쥐환레이(勾焕蕾) 1990년 4월, 유엔 정전감시기구에 군사관찰원 처음 파견하면서 중국군이 유엔 평화유지 활동에 참가하는 길이 열렸다. 30여 년간 25개의 유엔 평화유지 활동에 참가한 중국군은 매년 말리, 남수단과 콩고 등 위험한 전란국가와 뉴욕 유엔본부에 군사관찰관, 참모장교, 기간제 장교를 파견해 휴전, 연락협상, 행동지휘, 조직계획 등을 관찰, 감독했다. 우리가 평화 유지의 길에 오른 것은 인류의 평화를 지켜낸 것이자 세계에 중국을 알리고 책임 있는 대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3년 전 평화유지 임무를 맡고 콩고로 떠난 데 이어 2020년 3월 6일, 우리는 사명감과 영예감을 안고 다시 평화유지 일선인 서아프리카의 말리로 향했다. 말리는 사하라 사막과 가깝기에 날씨가 무덥고 늘 황사가 하늘을 뒤덮었으며 무장충돌이 빈번히 발생했다. 자료에 따르면 2013년 이후 말리에서는 247명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순직했으며 2020년 3월,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유엔 평화유지군은 13차례나 공격을 받아 7명이 숨지고 66명이 다쳤다. 당시 말리에는 중국 평화유지군의 공병, 의료분대가 일선에서 안전보호, 공사건설, 의료보장 등 평화유지 활동을 원만히 수행하고 있었다. 말리에서 다 층차의 유엔 종합안정특파단(이하 유엔 안정단으로 약칭)에 배치된 중국군 참모장교는 모두 13명으로 업무는 인사, 작전, 훈련, 공사 등 다양한 직종에 널려 있었다. 우리는 처음 도착하자 사령부 업무 영역 내에 빨리 편입되기 위해 선배들이 남긴 경험을 배우는 한편 프로세스를 익히기에 주로 노력했다. 동시에 영어 대화 연습을 추가하는 등 대외교제를 능력 제고에 힘썼다. 2020년 3월 25일, 말리에서는 처음으로 코로나19 확진자가 보고됐으며 4월에는 유엔 안정단에서도 확진자가 나왔다. 당시 사령부 내의 방역조치에는 손 씻기와 재채기를 할 때면 팔꿈치로 가려야 하는 등이 있었다. 우리는 국내 효과적인 방역 경험을 주둔지와 공유하기 위해 코로나19 방역 지도팀을 구성하자는 제안을 채택했다. 또한 군인 전원에게 마스크 착용과 방역 방법 홍보, 밀접촉 상황 추적과 통계 작성, 격리병동 건립 등 많은 일을 하였지만 모두들 이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낌새였다. 그래도 성과도 있어 6개월 후 1만3000여 명의 주둔지에서 확진 자 제로(0)를 달성하였으며 코로나19 1차 확산 사태를 이겨내고 작전 능력을 최대한 보장했다. 초심을 잊지 않으면 사명은 반드시 달성되는 법이다. 참모 장교는 개인이 아니라 평화를 사랑하는 중국의 목소리를 세계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명감이 곧바로 스트레스를 동력으로 삼아 도전장을 내밀고 평화유지 활동에 적극 기여하게 한 것이다. 말리 수도에서 400킬로미터 떨어진 동부의 중등 도시 자오에서 나의 동료인 리윈강(李云钢)은 유엔 안정단 동부 전구 훈련처 수석 참모장교로 근무했다. 해마다 7월에서 9월까지는 말리는 우기여서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도로가 질척거려 열악한 자연환경이 후방 수송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훈련과 실전을 결합하기 위해 리윈강은 공병부대를 조직하여 숙영지내에 깊은 도랑을 파서 물이 무릎까지 올라오는 하천을 만들었다. 이어 도하전술 동작에 대해서는 안전 경계, 팀 편성, 위험 제거 등을 보급했다. 이 도하 훈련 방법은 유엔 안정단 총사령관의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동부 전구 의료처 참모 장교인 장웨이(张伟)는 작전 중 부상자 이송과 의료기재 후송 등을 조율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수년간 무전기를 들고 다니다가 돌발상황이 닥치면 정신적으로 대처했으며 늘 “사람의 생명이 달린 문제라 한치의 소홀함도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해 6월 1일 새벽, 다급한 전화 소리에 잠들었던 장웨이는 잠을 깼다. 독일 평화유지군 작전 소대가 자폭공격을 받아 6명이 다쳤던 것이다. 부상자 후송이 시급했다. 장웨이는 즉시 구조에 응하는 절차를 개시하여 작전지휘센터에 연락해 헬리콥터가 사고 지점으로 출동하도록 조정하고 아울러 중국 2급 병원에 즉시 진료준비를 하도록 통지하여 부상자가 제때에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우리는 직책에서 빈틈없이 성실히 업무를 수행하고 사령부의 기능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적극 추진했다. 평화 유지 임기는 짧은 것이다. 나는 훈련담당 사령부 전투준비처 처장에서 훈련평가를 담당하는 부참모장으로 성장하면서 잊지 못할 경험을 많이 했다. 이렇게 우리는 30여 년 간 평화를 지켜온 릴레이 바통을 이어받아 분쟁지역 주민들에게 믿음과 힘을 불어넣었으며 평화의 희망을 심어주었다. (작자는 유엔 말리 다층차 통합 안정특파단 사령부 전 부참모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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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0
  • 53 년 전, 생명으로 지킨 中극비문서...22일 후 세계를 진감①
    [동포투데이] 1968년 12월 5일, 중국 중남해 회인당, 비서 1명이 부랴부랴 들어오더니 외빈을 접대하고 있는 주은래 총리에게 귓속말로 몇 마디 건네였다. 그러자 웬간해서는 놀라지 않던 주은래 총리는 갑자기 안색이 달라지면서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당시 비서가 주은래 총리한테 보고한 것은 북경 수도 공항에서 착륙하던 비행기가 한 대가 추락하면서 탑승해 있던 인원 13명이 조난당했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주은래 총리에게 큰 충격을 준 것은 조난자 중 1명인 과학가 곽영회 때문이었다. 주변 일꾼들의 회고에 따르면 이후 주은래는 오열하며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1968년 12월 25일, 중공중앙은 과학가 곽영회에게 혁명열사 칭호를 수여했다. 그 후 12월 27일 곽영회가 사망한 지 22일 만에 그가 생명으로 지킨 중요한 자료에 의해 중국의 첫 번째 열핵미사일 시험 폭발이 성공하여 수소폭탄의 무기화가 실현되었다. 1999년 9월 18일, ‘양탄일성(两弹一星: 원자폭탄, 수소폭탄 그리고 인공위성)’ 프로젝트에서 탁월한 공헌을 한 중국 과학가 23명이 국가로부터 ‘양탄일성 공훈상’을 수여받았으며 곽영회 열사는 이 군체에서 유일하게 핵폭탄, 미사일과 인공위성을 성공시키는 데 모두 이바지한 과학가이자 유일한 혁명 열사였다. 그럼 지금까지 유일하게 ‘열사’로 ‘양탄일성’ 표창장이 수요된 과학가 곽영회에 대해 그 인생을 더듬어 보자. 놀라운 천부 곽영회는 1909년 중국 산동(山東)의 영성(榮成)등가(滕家)진 곽가(郭家)촌에서 곽씨 가문의 넷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세세대대로 농사를 지어왔으나 아버지 곽문길은 그래도 어느 정도 문맥을 익혔기 때문에 곽영회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다. 그러나 곽영회는 아홉 살 되던 해에야 삼촌 곽문수(郭文秀)가 차린 학당에서 글을 읽을 기회가 생겼다. 곽영회는 책 읽을 기회가 생기면 놀라운 재능을 보이군 했다. 1922년, 13살의 곽영회는 부지런하고 학업을 좋아한 덕에 석도진의 명덕소학교 고급학년에 보내져 공부하게 되었다. 그 뒤 1926년 곽영회는 17살 나이에 우수한 성적으로 청도대학 부속중학교에 우수한 합격하여 고향 최초로 국비 중학생이 되었다. 이어 1929년, 곽영회는 다시 남개 대학 예과 이공반에 합격되어 고향의 첫 대학생으로 되었다. 계속하여 1931년 곽영회는 본과로 편입되어 물리학 전공을 선택, 당시 중국 국내에서 유명 교수였던 고정미(古靜尾)의 제자가 되었다가 2년 뒤 고정미는 다시 곽영회에게 북경대학 물리학부 진학을 추천했다. 그러던 중 1938년 여름, 곽영회의 운명을 바꿀 시험이 다가왔다. 당시 ‘중영 경모관리 이사회(管理中英庚款董事会)’는 제7회 영국 유학생 모집을 실시해 20명을 뽑으려 했지만 지원자가 3000명이 넘었으며 곽영회가 지원한 항공공학 공기역학과는 1명만 모집함에도 50명이나 지원했다. 그 시험에서 곽영회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5개 과목의 총점수는 350점을 초과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곽영회와 똑같은 점수를 받아 공동 1위를 한 수험생이 2명이나 되었다. 학생 1명만 모집하는 시험에 세 사람이 동점이니 어떻게 처리하는가? 이사회는 충분한 논의를 거쳐 이들 3명을 모두 채용하기로 하였다. 이는 그야말로 파격적이었다. 당시 곽영회와 동점이었던 두 학생, 한명은 전위장(錢偉長·나중에 저명한 과학자, 교육자가 됨)이었고 다른 한명은 임가추(林家翘 ․ 나중에 저명한 수학자, 천체물리학자로 됨)였다. 1941년 1월, 곽영회는 선발된 학생 수십 명과 함께 상해에 모여 해외유학을 준비할 때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이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이렇게 되자 이 학생들을 영 연방의 각 국가에 보내 공부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친인척들과의 작별 후 배에 승선한 곽영회는 자신의 여권이 일본 정부로부터 발급받은 것임을 알게 됐으며 여권에는 또 “여행 도중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3일간 머물며 뭍으로 놀러 가는 것도 허락된다”고 씌어져 있기도 했다. 이러자 학생들은 즉각 영국 대리 점원에게 항의하며 여권 변경을 요구했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절대 안된다면서 “내키지 않으면 유학을 포기하라”고 했다.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앞에 두고 적지 않은 학생들은 침묵에 빠졌다. 그러자 평소 말이 없던 곽영회가 나섰다. “출국하지 못하게 하면 출국하지 말자. 중국인은 기개가 있어야 한다.” 이어 몇몇 학생들이 닻을 올리는 배에서 짐을 들고 내렸으나 곽영회는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중국은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고전을 거듭하고 있었다.(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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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5
  • 中, 유엔 평화수호 행동의 관건역량으로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은 30년 넘게 유엔 평화유지 활동에 참여하면서 유엔 평화 유지부대의 핵심 역량으로 됐으며 말리, 콩고 등 임무 수행 지역에서도 그랬고 갑작스런 코로나19 사태 시에도 중국의 평화유지군은 ‘대국의 담당역할과 세계 평화 수호’란 초심과 사명감을 안고 실제 행동으로 전란 충돌 지역 주민들에게 평화와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평화유지군 신분에 부끄럽지 않게 행동 ● 짱민(张 珉) 2020년 9월, 중국 티베트 군구가 처음으로 유엔 평화유지 임무에 참가하면서 우리 일행 43명은 중국평화유지군 제24진으로 구성되어 콩고로 파견됐다. 당시 콩고는 에볼라, 말라리아 등 전염성 질병과 코로나19 확진자도 계속 늘고 있어 우리 모두의 앞에 놓인 어려움과 안전 위험는 유례없이 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우리의 임무수행 지역에는 여러 개 나라에서 온 4000여 명의 평화유지군들이 의료 보장 업무를 담당하였고 코로나19 검사와 백신 접종 등은 우리가 담당했다. 임무수행 지역인 부카부에서 중국 2급 병원을 인수하는 첫날부터 우리는 국내에서 쌓은 성숙한 방역 경험을 활용하였다. 대원들은 코로나19 방역 요구에 따라 군복을 방호복 안에 입고 파란 헬멧 대신 보호 마스크를 착용하고는 매일 진료를 진행했다. 옷이 땀에 흠뻑 젖었고 신체적 및 심리적 압박감이 컸지만 각국 평화유지군의 생명을 건지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시작은 순리롭지 못했다. 당시 “중국 2급 병원의 진료 방역이 과도하게 까다롭다”는 환자가 있었다. 우리가 방역기간 동안 2급 방역 기준을 적용해 분리와 직접 진료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의료 분대의 책임자인 나는 신속하게 회의를 소집하여 연구하는 한편 모든 방문환자와 소통하기로 했다. 그리고 상급 의료진에게 2급 방역 진료의 필요성을 주동적으로 설명하고 유엔 콩고 안정화 특파단(이하 유엔 콩고 안정단으로 약칭)에서 조직한 각종 학술 세미나에서 중국의 성공적인 방역 경험을 소개했으며 또 별도의 격리 진료실을 신설해 환자들이 더 나은 진료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강구하였다. 우리는 창고에서 이미 준비된 야전 텐트 몇 개를 갖고 와서는 병원 입구에 80㎡ 면적에 가까운 독립 진료실을 설치하였다. 진료기기, 물자 등은 제한적이지만 방역상 우리의 일상적인 진료 수요를 거의 충족시켰다. 그 후 환자들은 점차 우리가 진료하는 과정에서 취한 2급 방역 조치와 과학적인 태도에 대해 이해와 지지를 표하였다. 그리고 진료를 받으러 온 환자한테도 교차 감염 사례가 발생하지 않았으며 유엔 콩고 안정단 각급 지도자들도 여러 차례 병원을 방문해 업무 지도를 하면서 우리의 행동과 성과에 대해 “중국 2급 병원의 방역 진료 업무는 완전히 방역 수요에 부합하며 환자나 의료진 모두에게도 최선의 보호”라고 강조했다. 임무는 하나에 이어서 또 생기고 도전 역시 하나에 이어서 재차 하게 된다. 2020년 10월 26일, 유엔이 전 세계 평화유지 임무지역에 바이러스 핵산검사 실험실을 18개 추가하기로 결정하자 우리는 신속하게 대응하면서 그 임무를 원만히 수행했다. 당초 상급부서는 방 하나와 테이블 하나만 구하면 측정작업을 할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에 대해 우리는 교차 감염을 피할 수 있는 전문 핵산검사 실험실을 건립할 것을 제안했다. 검사결과가 정확하고 검사인원의 안전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당시의 조건 하에서 완벽한 실험실을 건설하는 것은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에 나는 대원들을 이끌고 유엔의 코로나19 측정 표준 조작 수첩과 국내 핵산측정 실험실 건설 표준 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뒤 국내에 있는 군사 과학원, 해방군 총병원 등 의료부문의 전문가들과 원격 화상연계를 통해 실험실 건설의 안전성을 논의하는 등 학습에 매진하였으며 한차례 또 한차례의 노력을 거쳐 마침내 기능을 모두 갖춘 과학적이고도 합리적인 핵산검사 실험실을 마침내 완공하였다. 12월 12일, 브라이트 당시 유엔 사무총장 특별대표 집무실 주임이 중국의 2급 병원을 찾아왔다. 그가 코로나19 핵산검사 실험실 건설과 의료사업 진행상황을 둘러본 것은 이 실험실이 공식적으로 평화유지군 의료 분대의 사용관리로 이관됐음을 보여줬다. 이 실험실은 우리가 철수한 뒤에도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으며 임무 구역의 코로나19 발생 예방과 통제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유엔 의료 분야를 담당한 인사도 특별히 우리 의료분대에 찾아 “중국 군의관들 참 훌륭하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매번 급하고 위험천만한 임무에 봉착하면 우리 의료 분대는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되었고 번마다 당원들이 앞장서 난제를 해결하곤 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분자생물학 조작 프로그램을 전개한 검험사 라오제(罗杰), 정형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한 차례, 또 한 차례의 수술을 마친 외과 의사인 허얜린(贺焱林)…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유엔 평화유지군 의료진의 진료를 받고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현지 아이들을 보면 우리는 평화유지군 신분에 부끄럽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유엔 콩고 안정단 남전구 평화유지군 합동 수훈식에서 유엔 콩고 안정단 사령관 마르코스 데사 알폰소 코스타 중장은 “중국 의료 분대는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는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평화유지군 장병들을 위한 친절 전문의료 서비스를 고집하면서 아낌없는 봉사정신과 최고의 직업성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티베트 고원에서 콩고 강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중책을 맡고 용감하게 분투하는 정신을 발휘했으며 코로나19 사태와 현지 불안에 직면해 중국의 방역 경험을 평화유지군으로 적절하게 확산시키면서 인심인술(仁心仁术)로 각국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지켜 주었다. (저자는 중국 24진 콩고 평화유지군 의료 분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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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5
  • 中, 30여 년간 산속에서 숨어 지내다 숨진 女매국노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이 근 현대에 들어서면서 직면한 가장 큰 위기는 일본 침략자들이 중국 전체를 차지하려고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931년 9.18사변이 발발한 후부터 일본군은 동북 3성을 교두보로 전반 중국 영토를 향해 침략 확장에 나섰다. 이러자 위기에 처한 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수많은 지사들이 끊임없이 용솟음쳐 나왔다. 그들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생명의 최후 순간까지 일제와 싸웠다. 하지만 일본군의 위협과 회유에 의한 매국노들도 적지않다. 이들 매국노들은 자신의 생명과 이익을 위해 조국과 동포를 팔아 먹었으며 결과는 아주 수치스러운 끝장을 보기도 했다. 당시 중국 내의 매국노는 적지 않았다. 크게는 위 국민정부를 세운 왕정위(汪精卫)였고 작게는 보통의 촌락의 악질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라와 민족의 역적들이었다. 그들은 보기도 구차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동포와 형제의 목숨을 마구 팔아 먹었지만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동맹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이들 매국노들은 그 대부분이 응분의 처벌을 받았다. 그중 한 미모의 여 매국노가 있었다. 그녀의 경력은 비교적 기구했다. 한 사냥꾼에 의해 발견될 때까지 처벌을 받지 않기 위해 산속에 숨어 살았다가 숨졌으니 말이다. 중국 동북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 장기(张琦)는 당시의 동북 군벌 장작림(张作霖)의 가문과 약간의 연계가 있었다가 장작림이 일본군에 의해 음해된 후 이는 그녀의 가정에까지 영향을 미쳐 명문가도 살기가 어렵게 됐다. 그렇게 되자 장기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친구였던 장경혜(张景惠)를 찾아가게 되었다. 장경혜는 자기를 찾아온 그녀를 잘 대해 주었다. 시간이 흐른 뒤 두 사람은 연인으로 되었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장경혜는 일본군의 앞잡이로 되었다. 그러나 장기는 장경혜의 선택에 반대하지 않았다. 반면 장경혜의 권유에 꺼리낌 없이 일본군 진영에 가담하였으며 결국 매국노가 되고 말았다. 일본군이 동북을 점령한 10여 년 동안 일본군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그녀는 처음에는 어딘가 양심가책을 받았을지는 모르지만 그 횟수가 잦아짐에 따라 매국 매족의 일에 익숙해졌다. 그 댓가로 장경혜와 장기 두 사람 모두 일본군 밑에서 상금도 조금씩 받았고 근사한 생활을 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일본군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그들은 정부와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장경혜는 일본군이 중국 대륙에서 철수 한 뒤 현지 정부에 의해 나포되었지만 장기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당시 그녀가 어디로 도망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장기는 자신이 그동안 한 짓거리들은 하늘이 천인공노할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자기의 얼굴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면 자신은 곧 죽는 길밖에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고민 중 그녀는 다른 도시로는 도망가지 않고 황량하고 인적기가 드문 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현지 정부와 주민들은 그녀의 행방을 한참 동안 추적했만 결국은 실패하고 그녀에 대한 수색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 때로부터 30년이 흐른 뒤의 어느 날 산속으로 사냥하려고 들어온 한 사냥꾼이 장기의 거처를 발견하였지만 그 때는 그녀가 이미 죽은 뒤였다. 장기는 산속의 어느 한 동굴 내에 있는 헐망한 침대에서 죽었다. 신고를 받은 현지 공안은 즉각 산속에 있는 그 동굴로 찾아갔으며 장기의 죽음을 확인한 뒤 현장에서 발견된 그녀의 유품들을 정리했다. 장기의 유물 중에는 일본군을 위해 일했던 당시의 정경을 담은 사진과 함께 장기 자신이 직접 쓴 일기도 적지 않았다. 그것들을 보노라면 당시 그녀는 말 그대로 의기양양했고 대단했다. 그가 쓴 일기에 담긴 내용에는 허무맹랑한 대목도 여러 곳이 있었다. 원래 집안 형편이 넉넉했던 장기는 의지가 나약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장경혜한테 찾아가 의탁했고 또한 그와 함께 일본인 대오에 가담했던 것이다. 그리고 일기에는 정의적 심판이 두려워 산속의 깊은 곳에 숨어 있어야 했던 선택에 대한 뉘우침을 전달했다. 30년이라는 긴나긴 세월을 혼자 보내야 했고 음식과 옷가지 등의 부족은 그닥 힘들게 하지 않았지만 정말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것은 끝없는 외로움과 얘기를 나눌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감옥 생활이 무서웠기에 그녀는 깊은 산속에서 홀로 지내야 했다. 그러나 이는 모두 그녀의 선택이었다. 그녀한테 있어서 당시의 선택은 확실히 그녀를 후회하게 했다. 그것은 장기, 그녀의 일기장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으며 이는 결코 감옥생활보다 편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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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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