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09-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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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②
    1927년, 중국과 독일의 접촉을 시작으로 항일전쟁 직전까지 독일은 중국의 최대 협력 파트너였다. 원래 독일 군사고문은 장개석에게 60개의 독일의 기계사단을 통폐합해 내놓아야 했지만 국민정부는 그렇게 많은 돈이 없었고, 또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았기에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전역에 30개의 ‘조정사’만 있었고 독일은 40만 세트의 장비만 쏟아부었다. 이 정예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거의 소진되었다. 최초의 ‘송호회전’, ‘남경보위전’, 화북전장의 ‘흔구회전’, ‘낭자관전투’;등 전투에는 대량의 독일 기계사단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참혹한 대가를 치렀다. 이들 30개의 ‘조정사’ 중 28개는 사단 전체가 마비됐고, 2개 사단만이 격렬한 전투를 피했기에 그 병력과 장비를 보존할 수 있었다. 또 전쟁 때문에 독일의 무기는 제때 수송되지 못했고, 독일군은 장비를 보충받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국산장비를 갖고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게다가 독일은 일본과 동맹을 맺은 탓으로 독일군은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늦추다가 1938년 7월 중국에 대한 지원을 모두 멈추고 중국에서 철수했다. 독일인들은 철수했고, 중국의 항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중국내 전장은 군사 장비의 보충이 시급했고, 장개석은후원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바로 이때 소련이 나타났다. 소련은 국민정부로 하여금 일본군의 진군속도를 저지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장개석과 합작협정을 맺고 중국에 군사물자를 지원했다. 이에 따라 독일기계사와 미국기계사 사이에 소련기계사가 하나 더 생겼다. 소련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민정부가 농수산물과 각종 금속 원자재만 제공하면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10년 만에 중소 협력은 이렇게 성사됐다. 소련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름대로 성의를 갖고 있었고, 탱크와 비행기 같은 중무기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소련 장비로 20개 사단을 무장시켜 독일군 무기사단의 손실로 생긴 공백을 메우려 했다. 이렇게 양 측이 각각 필요한 것을 취해서 교역은 비교적 만족스럽게 진행 됐다. 하지만 소련 기계사의 배치에 있어서 중·소 양측은 이견이 있었다. 소련 측은 모두 소련군 편제대로 새로 편성된 부대에 장비를 배치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몰래 장비를 따로 빼돌려 포병단을 조직했다. 이렇게 10여 개의 포병단위를 만들면서, 미리 약속했던 대로 소련 기계사단에 이를 전달하지 않았다. 한편 소련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물자 수송도 간단해 1차 소련의 기계장비로 4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었으며 이 중 제200사단은 중국 최초의 기계화사단이 됐다. 그리고 후속으로 소련의 기계화 장비도 육속 도착해 장개석은 18개의 소련 기계화사단을 구성해 일본군과 잘 싸울 수 있었다. 이 보배같은 소련 기계화사단들에 대해 장개석은 독일 기계사단들처럼 잔혹한 전장으로 보내져 소모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1941년에는 15개 사단이 각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이 중립조약을 맺은 뒤 중소 관계가 약화되면서 소련의 군사장비는 보충되지 않았고, 소련의 기계화사단 역시 점차 역사적 명사로 되었다. 미국의 원조는 큰 것을 노린 전략적 움직임 실제로 영국은 독일의 지원이 끊긴 뒤에도 잠시나마 중국에 군사물자를 제공했지만 일본의 압력에 원조를 중단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중영 간 원조가 회복됐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이때 이미 해가 기울어 극동에 전념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소련의 장비가 없어지자 미국은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구세주가 됐고 국민당 군은 미 장비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항일전쟁 단계에서 미국이 실제로 충분한 지원을 하지 않은 데는 객관적인 이유도 있고 주관적인 이유도 있다. 한편으로 운남-미얀마 도로가 끊기자 물자 장비는 험준한 항로를 통해서만 수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적었다. 다른 한편으론 아시아 전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영국과 소련에 많은 장비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인은 통이 컸다. 중국의 해방전쟁 시기까지 22개 군 64개 사단이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장개석에게 보내와 국민당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장개석은 미국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공산당에 의해 대만이란 작은 섬으로 쫓겨나 지내다가 일생을 울적하게 마감했다. 중국은 북벌전쟁 때부터 외국의 군사원조를 대대적으로 받으면서 중간에 공급처를 여러 개 바꿨다. 심지어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 등도 중국에 숟가락을 얹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독일·소련·미국이 더 많이 지원했다. 왜 이런 나라들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중국을 지원했을까? 독일의 속셈은 짐작이 가는 대로 장사를 하러 온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금속과 각종 원자재가 중국에 많고 거기에 무기까지 팔아 큰돈을 벌 수 있는 중국을 싫어 할리가 없는 것이다. 소련은 여러 가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일본을 견제하여 극동에서의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 한편, 당시 소련은 넓은 영토가 독일군에 함락되고 원자재가 부족했기에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나라로 중국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국민정부에 원하는 게 없음에도 속내는 더 흉악했다. 미국이 내놓은 ‘임대법’은 파시스트의 침략을 받는 전 세계 국가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앞에서 이런 국가들이 육탄이 되어 주는 것이고 양쪽이 다 소모되면 그 때에 가서 그들이 나서서 수습하여 이들 국가들을 깊이 통제하겠다는 취지가 있었다. 한마디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변화 속에 있고, 친구와 적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판단되며 이익만이 영원한 것이다. 이들 나라가 중국에게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는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도 약육강식의 규칙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다만 실력이 강해야 비로소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경직된 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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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8
  • 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①
    [동포투데이 철민] 1937년 8월 13일, 제2차 상해 보위전이 발발하자, 장치중(張治中) 장군의 국민당 제9집단군이 상해에 진주했다. 당시 장개석은 장치중 장군에게 2개의 독일의 기계화사인 87사단과 88사단을 지원하였다. 이어진 남경 보위전에서도 몇몇 개편 완성된 독일 기계화사가 빛을 발산하면서 중국군의 완강함을 보여주었다. 중국과 독일, 양국은 서로 다른 진영에 있었다. 그런데 왜 장개석은 독일 기계화 부대가 소유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두 나라는 또 어떻게 교역했을까? 그럼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의 타산을 알아본다. 국민당이 독일을 처음 접한 것은 손중산(孫中山) 때였다. 당시 혁명을 위해여 손중산은 도처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나라들에 손을 내밀었다. 당시 독일은 공산주의의 발원지로서 손문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 인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독일은 당시 낙후한 중국을 외면했으며 손문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뒤 비로소 제1차 국공합작과 소련이라는 거물이 등장하면서 손문을 후원하게 되었고, 격렬한 북벌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1924년 손중산이 사망하자 장개석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켜 좌익과 공산당 세력을 소탕함과 아울러 소련과 완전히 단절했다. 당시 중국은 가난했고, 전쟁 때는 어쩔 수 없이 장개석은 또 밖으로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남경정부가 직면한 국제 환경은 매우 험악하고 객관적으로도 중국과 독일은 일련의 교류를 촉진하는 것으로 양국의 교역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해야만 했다. 영국과 프랑스 역시 같은 아시아에서의 이익은 대부분 남아시아와 동남아에 있었으며, 중국에 대한 수요는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을 장개석은 명심해야 했다. 한편 그 시기,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강대해졌고, 동아시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영국·프랑스 식민지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일본을 안정시키고 자신의 식민이익을 지키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의 중국 침략을 방임하면서 묵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으며, 중국을 지원하는 물자의 통로를 차단하고 될수록 일본에 아첨했다. 미국은 당시만 해도 그렇게 강하지 않았으며 유럽은 여전히 세계의 중심이었고, 후발주자인 미국은 앞사람의 눈치를 봐야 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모범을 보였고 다른 나라들도 감히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감히 하지 못하자 장개석의 아첨은 ‘장님’에게 던져지면서 이상적 효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다행히 독일은 그 바닥을 지켰다. 1927년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본전을 모두 잃었고, 자신의 군사력이 각종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등으로 나라 전체가 억눌리자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독일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실력을 키웠다. 그중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는 그 일부였다. 영국과 프랑스 등 나라의 요구대로라면 독일은 국방군을 10만 명으로 줄이고 나머지 독일 병사들은 모두 현지에서 전역해야 하며, 방위산업도 모두 전환하여 더 이상 군사 장비를 생산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장개석이 협력 요청을 하는 순간, 이는 독일의 마음에 와 닿은 거대한 군사기구로선 힘겨운 일이었지만 해 볼만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자 중국과 독일은 군사협력을 시작했다. 독일 측은 군사교관을 파견하고 장개석이 군대를 훈련시켜 많은 병사가 전역한 뒤 독일의 국방력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고 전투력을 유지하도록 도왔다. 또 독일 장비를 대량으로 팔아 물자와 돈을 챙기고 노동자를 단련시켜 생산량을 보장하면서 부수입도 챙겼다. 장개석은 유럽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군사 장비를 대량으로 확보해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독일은 이미 무릎을 꿇고 유럽의 2등 국가가 됐지만 그러나 이것이 바로 장개석이 비로소 가격을 낮추고, 최소의 대가로 최대의 이익을 얻는 방법이 되었으며, 그의 장사는 매우 잘 되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고, 서로에게서 이익을 얻을 수 있고, 거래도 오래갔다. 독일은 1927년부터 수백 명의 군사고문을 파견해 40만 세트의 무기·장비를 지원했고, 중국의 군수공장 설립을 도왔으며 독일 무기상들과 연계해 중국 군사물자의 주요 공급국이 됐다. 중국과의 교역에 신경을 쓰는 독일은 다른 대안이 없으니 성의를 보여야 했다. 이들이 차례로 파견한 군사고문은 선발된 엘리트들로, 전임 두 단장은 중국군 지휘중추와 장교 양성제도를 각각 개량해 보병의 지휘를 원활히 하고 산하 각급 병종도 전장에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했다. 3인 군사고문단의 단장인 세케트 장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진이 독일 ‘10만 국방군’ 개편에 착수한 것으로 군을 줄이고 전투력을 높인 경험이 있다. 이 장군은 확실히 힘이 있었다. 그는 전형적인 독일 군인에 속했다. 국민정부 군대의 각종 폐해에 대해 하나씩 해결책을 제시해 장개석에게 많은 유용한 건의를 가져다주어 진정으로 중국군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세케트 장군의 계획대로라면 국민당은 60개의 ‘조정사’와 60개의 ‘정리사’를 개편하는데, 전자는 정당한 독일군 무기사, 후자는 일부 독일군 무장을 한 부대였다. 다만 당시 국민정부의 부정부패가 횡행하고 독일도 제대로 장비를 팔 수 없어 ‘7.7사변’ 직전까지 장개석의 손에는 3개의 완전체 독일 기계화 사단과 1개의 교도총대, 그리고 공상희의 체제 내에 없는 세경 총단 밖에 없었다. 1935년 세케트 장군이 병으로 사임하자 후임자인 파켄하우젠도 국민정부의 군사산업 발전을 적극 도왔다. 독일인의 도움으로 국민당은 정식으로 승마총, 꽃 기관총, 82박격포 등을 본떠 선택적으로 병기공장을 세워 어느 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고, 상황은 곧 호전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생겼다. 당시 중국은 가난하여 대양과 은화를 국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대외 무역에서 다른 나라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화인 달러와 파운드화는 국민정부 스스로도 부족하고 금은과 은 같은 귀금속은 더더욱 내놓지 못했다. 그럼 중국과 독일 간 군사물자 거래는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 답은 텅스텐(钨矿), 석(锡), 안티몬(锑) 등 세 가지 금속이었다. 이 세 가지 금속은 방산 분야에서 널리 쓰이지만 독일 본토에서 생산되지 않아 99%가 외국산이었다. 히틀러가 집권한 뒤 군비확충에 나서면서 이들 금속의 수요가 크게 늘었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은 관리가 철저해 독일은 원료를 충분히 조달받을 방법이 없었다. 이 세 종류의 금속은 중국에서는 오히려 매우 흔히 볼 수 있었다. 호남, 광동 등지에서는 모두 상응하는 광물 매장량이 채굴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은 솔직히 많이 쓰지 않았고 산업용 원자재를 군사장비와 교환하는 것을 선호했다. 독일은 전쟁에 대비해 대규모로 원료를 비축해야 했고, 중국은 물산이 풍부해 독일의 많은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중국은 금속광산을 제외한 농산물·면화·브루마 등의 물자를 돈처럼 쓸 수 있었고, 독일이 국민정부에 지원을 요청한 유일한 품목이다. 다만 장개석의 무기·장비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고 국제정세 변화, 물자수송의 지연, 영국의 봉쇄 등으로 중·독 양국 간 원자재·무기 교역이 이뤄지지 않자 국민정부가 현금·백은을 들고 독일과의 협력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다음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2-08-20
  • 장개석의 차남 장위국의 생모는 누구일까
    [동포투데이] 중화민국의 대통령 장개석은 장경국과 장위국 이 두 아들을 둔 가운데, 본처가 낳은 장남 장경국은 아버지를 많이 닮았지만 차남 장위국은 아버지를 닮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네명의 부인과도 닮은 곳이 전혀 없었다. 당시 장위국의 신상에 대해 여러 가지 풍설이 나돌았다. 이를 두고 장개석은 송미령조차 호기심에 그한테 추궁할 정도로 대외적으로 극력 말을 아꼈다. 당시 장개석의 대답은 부인 송미령으로 하여금 분노로 인해 가출까지 강행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장위국의 생모는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장개석의 대답은 왜 송미령을 이렇게 화가 나도록 했을까? 사실 장위국도 줄곧 자신의 신상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고 싶어 했다. 1941년 계모 송미령과 친하게 지내던 장위국은 계모의 허락을 받아 송미령의 서재를 마음대로 드나들며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장위국은 우연하게 송미령의 서재에서 ‘아시아의 내막’이라는 책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인차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미국 작가 존 겐실이 쓴 이 책은 한 페이지가 한 귀퉁이로 접혀져 있었으며 장위국은 그대로 읽어 내려갔다가 그 내용에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책에는 장위국이 장개석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적혀 있었다. 장위국은 놀란 나머지 이전에 들었던 소문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아버지와 별로 닮지 않은 생김새로 태어난 그의 신상에 여러 가지 의혹이 있다는 것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장위국은 1916년 10월에 태어났다. 당시 장개석에게는 아들 둘뿐이었지만 작은 아들인 장위국은 어려서부터 떠돌아다니며 여러 곳을 전전했다. 네 살이 되자 장위국은 아버지 장개석에 의해 고향인 봉화(奉化)로 보내지기 전까지 상하이 구(邱)씨와 주(朱)씨 두 집안의 평범한 가정에서 양육됐다. 그가 장개석의 고향인 절강 봉화에 온 뒤 장개석의 본처 모복매(毛福梅)와 첩 요야성(姚冶成)이 번갈아가며 돌보던 중 요야성은 자식이 없었기에 오랫동안 장위국을 돌봐왔다. 장위국은 모복매를 ‘어머니’라고 불렀고, 요야성을 ‘모친’이라고 불렀다. 당시 장개석의 생모인 왕부인이 생존해 있었고, 봉화에 있던 가족들도 모두 장위국을 좋아하며 극진히 잘 대해줬다. 수 십 년 후 장위국은 그 옛일을 다시 들먹이면서 계구(溪口)에 살았던 그 시간을 매우 행복하고도 즐겁게 여겼다. 그러나 이런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장위국은 여덟 살 때 장개석에 의해 광주(廣州)로 가 황포군관학교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당시 장개석은 이미 진결여(陈洁如)와 결혼했기 때문에 장위국을 돌보는 사람은 진결여로 바뀌었다. 그 뒤 장위국이 11살이 되자 장개석은 송미령을 부인으로 맞아들이기 위해 모씨, 요씨와 진씨 이 세 여인 모두와 관계를 끊었다. 장개석은 진결여를 미국으로 보냈으며 장위국을 그의 신임이 두터운 오충신(吳忠信)의 집으로 보내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오충신의 부인이 장위국의 이모로 되었다. 장위국과 송미령이 처음 만난 것은 1940년이었다. 그때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장위국은 스물네 살이었고, 장개석은 둘째 아들과 송미령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어색해질까 봐 어느 정도 걱정하였다. 하지만 장위국은 송미령을 만나자마자 아주 자연스럽고도 친절하게 영어로 ‘어머니’라고 불렀고, 서양식 예의에 따라 송미령의 볼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송미령은 젊은 시절 서양식 교육을 받았기에 장위국에 대한 첫인상도 좋았다. 두 사람은 모두 기독교를 믿었고, 이후 아주 사이좋게 지냈다. 그래도 그 해의 크리스마스 날 밤이 되자 장위국의 생모가 누구인지 궁금했던 송미령은 장개석한테 자꾸만 따지고 캐물었다. 그런데 줄곧 송미령에게 순종하고 질문이 있으면 반드시 대답하군 하던 장개석이었지만 이번에는 매우 내키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송미령의 핍박에 아주 짜증스럽게 “묻지 마, 난 절대 말하지 않을 거야”라고 한마디로 일축하며 내뱉었다. 그러자 이에 몹시 화가 난 송미령은 크리스마스 날 밤 집을 나와서는 홀몸으로 홍콩행을 강행했다. 그녀는 장위국과 사이가 좋았기에 당연히 그의 존재 때문에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송미령이 화가 난 것은 장개석이 자기한테 속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장개석이 직접 시간을 내 홍콩으로 가서 그녀를 찾았고, 두 사람은 곧 다시 사이가 좋아졌다. 아마 장개석도 이때 장위국의 신상을 송미령에게 알렸을 가능성이 컸다. 이후 송미령은 이 문제에 대해 더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장위국을 예전처럼 잘 대해주었다. 장위국은 송미령의 방에서 그 ‘아시아의 내막’을 보고는 계모가 자기한테 뭔가를 암시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다. 그 후부터 장위국은 생모를 찾을 타산을 했다. 장개석은 그 몇 년 동안 손중산(孫中山)을 따르면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를 보아 장위국은 아마도 일본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장위국은 장개석의 권고에 의해 미국으로 연수를 보내진 틈을 타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다 준자부로라는 사람을 찾아냈다. 이 사람은 손중산이 일본에 있을 때 손중산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그리고 장개석이 그 몇 년 동안 일본에서 생활할 때, 두 사람은 왕래가 밀접했다. 장위국은 이 사람이 긍정코 자기의 출생 내막을 알고 있으리라 믿었다. 과연 장위국의 예상대로 야마다는 그의 생모의 이름을 말해줬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내막’에 나오는 설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확신시켰다, 그랬다. 장위국은 확실히 장개석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야마도에 따르면 장위국의 생부의 이름은 대계도(戴季陶)로 국군의 원로 중 한 명이자 중량급 인물이었다. 당시 대계도는 장개석과 함께 손중산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했고, 장개석과는 동향이자 동창으로 친하게 지냈으며 나중에 대계도는 장개석 휘하의 장군으로 되기도 했다. 1913년, 일본에 있던 대계도는 급병에 걸려 현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으며 당시 그는 시게마츠 가네코라는 간호사를 알게 되었다. 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도로 뜨거워졌고, 대계도가 퇴원한 후 두 남녀는 동거하게 됐다. 하지만 당시 대계도는 일찍 결혼한 몸이었고 그의 아내 뉴유항(钮有恒)은 그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대갓집 규수였기에 대계도는 그녀를 사랑하면서 두려워했으며 한 번도 그녀를 화나게 한 적이 없었다. 본인은 한때 국군 고위층의 ‘3대 공처가’ 중 일원으로 꼽히기도 했다. 일찍 대계도는 조카와 사사로운 정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러던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크게 놀란 나머지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까지 하려고 했다. 다행이도 당시 그의 부하가 재빨리 그를 구해 주었으니 말이지 큰 일이 날 뻔 했다. 한편 1916년 대계도가 손중산을 따라 귀국할 때 시게마쓰 가네코는 이미 임신 3개월이었다. 하지만 당시 대계도는 감히 그녀를 데리고 귀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는 고통을 참으면서 시게마쓰 가네코를 일본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시게마츠 가네코는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야마다 준자부로에게 자기가 낳은 아이를 중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이 아이가 바로 장위국이었다. 이렇게 되자 그 몇 년 간 점점 더 아내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대계도는 아내에게 이 아이의 내력을 도무지 설명해야 할 수가 없었다. 이에 대계도의 절친한 친구로서, 장개석은 그를 곤란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 이 아이를 입양할 것을 제의하였다. 대계도는 즉석에서 동의했으며 이렇게 되어 생부가 아이의 의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절친한 친구에 대한 약속 때문에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았고, 송미령이 따져 물었지만 처음에는 말하지 않았다. 장위국은 이때의 실정을 알게 되었고, 마음속으로는 장개석에 대해 몹시 감탄했다. 다른 한편 생모인 시게마츠 가네코는 장위국이 다섯 살 때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장위국은 야마다의 말을 반신반의로 믿다가 장개석의 일기를 읽어본 결과 그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는 확실히 장개석의 아들은 아니었지만, 장제스는 그를 자식처럼 여겼으며 ‘경문위무(经文纬武)’라는 좋은 뜻으로 장경국의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장차 형 장경국(蒋经国)에게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랐으며, 또한 큰 돈을 투입하여 장위국의 마음가짐에 따라 그를 외국에 유학 보내 훌륭한 군인으로 키우기도 했다. 그러나 장위국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장개석과 장경국은 어쩔 수 없이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장개석이 회의나 순시하러 나갈 때면 데리고 가는 사람은 반드시 장경국이었고 정계에서 중점적으로 양성한 사람도 장경국이었으며, ‘호구병변(湖口兵变)’을 틈타서는 장위국의 수중에 있던 병권을 빼앗기도 했다. 장위국은 이때부터 의기소침해졌고, 장경국이 죽은 후에야 사람들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장위국은 자신의 신상을 알고도 장개석처럼 대외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1996년에야 자기가 서술한 책에서 자신이 대계도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장위국은 ‘물방울 같은 은혜도 샘솟듯한 물량으로 갚는다’는 이치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고, 장개석이 혈연관계가 없는 아버지였지만 이미 그 친아버지가 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을 장위국에게 주었다는 알고 있었다. 장위국은 언제 누가 물어도 장개석의 아들이 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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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3
  • 무인도에 갇인 1남 7녀, 그들의 운명은…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이 이야기는 지난 세기 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초반 사이에 있은 한 조선인 남자가 일본인 여성 7명과 동시에 결혼해 도합 27명의 자녀를 낳은 진실한 이야기다. 사람은 사회에서 생활함에 있어서 당연히 많은 욕구가 있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이성과 생기는 감정적 욕구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감정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할 줄 아는 영장 동물이다. 더군다나 특정된 장소에서는 남녀 사이에 이런 감정이 싹트기 쉽다. 대천세계에서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형형색색의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반려자로부터 선택되고 또한 반려자를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딱히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경우에 따라 인간은 반려자를 선택할 수 없거나 감정적인 욕구가 없는 즉 마음에 들지 않는 이성과 함께 사랑을 나눌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래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 증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군사적 큰 착오로 벌어진 태평양 전쟁 말기 남성 1명과 여성 7명이 태평양 가운데의 트루크 군도에 남겨지면서 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초기까지 이 해괴한 일부다처(一夫多妻)의 이야기가 벌어졌던 것이다. 사람들은 태평양 전쟁이라고 하면 모든 전쟁의 근원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사건이라고 말한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여러모로 미국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요행을 바라고 저울질하면서 미국의 태평양 해군기지를 공격했으며 전쟁 초기에는 연전연승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미군이 일본군 약점을 연속 꿰뚫을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미군은 차츰 전쟁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하나둘씩 빼앗겼던 섬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운데 끼인 일본군 점령 섬들은 고립되어 보급은 전혀 없었으며 어떤 경우엔 단 한 명의 병력 손실도 없이 미군은 이 섬들을 스스로 무너뜨릴 수가 있었다. 당시 트루크 제도에는 일본군 병사와 조선인 부역자 및 일본군 위안부가 주둔해 있던 고립된 섬이었다. 미국이 일본의 공급 사슬을 끊자 섬에 갇혀 있던 이들은 고립되기 마련이었고 시간이 흐르자 구원투수들에게 삶의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본 본토에서 구조자를 섬에 보냈을 때 갇힌 사람들은 한동안 삶의 희망을 본 듯 들뜨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는 아주 짧디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일본 본토에서 보낸 구조선은 섬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구조선박은 섬 기슭에 사람이 보이지 아니 하자 무인도로 여기고는 재빨리 선수를 돌려 트루크 섬을 빠져나가면서 아무도 돌아보는 이가 없었다. 그 후 조선인 부역자 김유길과 일본인 위안부 7명이 “사람을 살려요”라고 외치며 해안으로 달려 내려갔을 때는 배가 이미 멀어져 있었다. 그렇게 희망이 깨지자 일곱 여인은 서로 얼싸안고 펑펑 울면서 땅을 쳤고 김유길도 마찬가지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인들처럼 울고불고 할 수는 없었다. 몹시 절망적이었지만 그는 남자로서 좀 강해야만 했다. 그는 엉겁결에 일본 여인들이 흐느끼는 것을 보고는 그녀들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적당한 어구가 없었다. 말문이 막히자 그는 다가가 그녀들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기만 했다. 울음을 터뜨릴 뿐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이었다. 하지만 울음이 그치고 사위가 잠잠해진 뒤에도 이들의 삶은 계속되었다. 이렇게 이들 일남 칠녀는 섬에서 두 달 넘게 함께 생활했다. 이들은 구조를 기다리지도 못한 채 섬에서 먹을 수 있는 열매와 과일은 거의 다 뒤졌다. 그러다가 다행히 그들이 앞날이 막막할 때 뜻밖으로 담수호를 발견하게 되었다. 삶의 빛 한 가닥 생긴 것이다. 한편 섬에서의 유일한 남자인 김유길은 물고기라도 잡아서 모두가 굶어죽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평일에는 고기잡이 말고도 비교적 건장한 여자 몇 명을 데리고 사냥을 했으며 그리고 그 때면 나머지 몇몇 여자들은 나무를 찾아 불을 피우고 빨래 같은 일을 하면서 제각각 자기의 맡은 바의 일에 충실했다. 처음에 김유길과 그녀들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일상적인 교류는 손짓 혹은 몸짓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김유길은 그녀들한테서 일본어를 배웠고 그 또한 그녀들에게 조선말을 배워주었으며 이렇게 되어 그들은 얼마 안돼 서로 정상적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섬에 갇힌 지 1년이 되는 해 봄의 어느 날, 김유길은 섬에서 일본인들이 흘린 것으로 보이는 벼 종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순간, 김유길의 머릿속에서는 기발한 생각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바로 벼농사를 한번 해보자는 결심으로 마음속으로부터 논을 풀었다. 그 해 그는 여인들을 거느리고 열심히 일하면서 논을 풀었다. 논둑을 만들고 논에 물을 가두고…그리고 벼 모종을 논에 심자 과연 벼가 우썩우썩 벼가 잘 자랐다. 그 뒤 가을이 되자 김유길은 또 여인들과 함께 벼를 베어 거두어 들이고 타작을 했다. 타작이 끝나자 이들은 마침내 첫 햇밥을 먹어볼 수 있게 되었으며 더 이상 끼니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김유길은 점차 모든 여자들의 숭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먹는 문제를 해결하자 김유길은 자연스럽게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연상하게 되었다. 바로 빗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집을 짓는 것. 원래 집짓기 같은 것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기에 김유길은 그 실행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는 여자들을 거느리고 연 며칠 나무를 찍어 와서는 서두르지 않고 하나하나씩 기둥을 세우고 벽을 쌓았으며…마침내 지붕까지 얹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집 모양새를 두루 갖출 수 있었다. 집은 비록 허름하고 그닥 크지도 않았지만 이 외딴 섬에 그들도 비바람을 피할 곳이 드디어 생긴 셈이었다. 여성 그 자체가 워낙 감성적인 동물이기에 어려운 상황에서 자기에게 도움을 주는 남성을 사랑하기가 쉬운 것이다. 섬에 버려진 뒤 여자들은 몹시 절망했지만 당시 유일한 남자인 김유길은 그녀들을 책임지고 그녀들에게 정신적 위로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생존환경까지 해결해줬기에 그럴만도 한 것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김유길이라는 유일한 남자에게 마음을 기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갖가지 애로와 언어의 장벽까지 뚫고 나온 김유길은 일본 여자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나중에는 거의 감출 것도 없이 속심을 털어 놓을 때도 많았다. 어떤 경우에는 속된 농담도 거침없이 할 정도였다. 이렇게 한동안 어울리던 중 김유길은 자신이 그 중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몰래 그 여인한테 자기의 마음을 고백했다. 헌데 이 여자가 너무도 기쁜 나머지 이를 다른 여자들한테까지 자랑할 줄이야?! 이러자 이들 여자 모두가 한결같이 김유길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어 김유길은 황제처럼 되어 일곱 명의 여자를 동시에 품에 안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가정을 꾸린 뒤 이들은 아예 귀국할 생각을 접고 살림을 차리고 김유길의 아내로서의 각자의 의무를 다 하였다. 그리고 아내들은 선후하여 스물일곱 명의 자녀를 김유길한테 낳아주었다. 이렇게 그들은 하나의 작은 가정으로부터 하나의 대가족으로 발전했다. 그로부터 8년이 흘러간 뒤 이 35명의 대 가정은 바다에 나타난 미군 순찰함에 의해 발견되었고 오랫동안 귀국생각을 접었던 이들에게 마침내 각자가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며 김유길은 고향으로 즉 한국으로 돌아가게 됐고 그 외의 아내와 자녀들은 모두 일본으로 송환됐다. 김유길은 귀국한 지 몇 년 만에 그 아내들이 그리워났다. 거기에 자녀들이 보고 싶기도 했다. 마침내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처자들을 찾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두루 수소문한 결과 그의 다섯 명의 아내는 이미 재가하여 다시 살림을 차렸고 나머지 2명만이 그래도 김유길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일본 사회는 이미 일부일처제를 시행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특별한 예외의 경우였다. 정부도 이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들은 이렇게 죽을 때까지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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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12
  • 시대를 빛낸 할리우드 여배우- 마릴린 먼로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지난번 계속) 마릴린 먼로의 본명은 노마 진 베이커이다. 그녀의 외할아버지 성은 먼로, 그는 정신 질환으로 앓고 있는 자동차 엔지니어였으며 늘 자신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의 자손이라고 했다. 그리고 외할머니인 델라에게도 정신적인 장애가 있어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하면 매우 격렬했다. 그런가 하면 어머니 글래디스는 MGM 콜롬비아의 한 영화제판공장에서 스크랩 작업을 했으며 어머니 역시 심각한 정신분열증 환자로 평생 수용소 출입이 아주 잦았다고 한다. 1942년 6월 19일, 마릴린 먼로는 제임스 아이젤 돌티와 결혼했으나 1946년 9월 13일 첫 결혼은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 그 뒤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는 1954년 1월 14일 샌프란시스코의 한 모텔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2월 2일 일본 도쿄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이들이 혼인신고를 한 지 274일 만에 마릴린 먼로가 이혼을 제출했고 1954년 10월 31일, 법원은 마릴린 먼로가 조 디마지오와 이혼하라고 판결했다. 뒤이어 마릴린 먼로는 1956년 6월 29일 극작가 아서 밀러와 극비리에 결혼했고 그해 8월 메릴린 먼로는 임신했지만 곧 유산했다. 마릴린 먼로는 1957년 8월 1일 자궁외 임신으로 다시 유산했다. 1961년 1월 20일 두 사람은 멕시코에서 정식 이혼하고 말았다. 18세 때 마릴린 먼로는 기독교인이 됐다. 하지만 1956년 아서 밀러와 결혼하면서 먼로는 유대교로 전향했다. 생전에 마릴린 먼로는 생전에 애완견을 많이 키웠으며 그 중 마지막 한 마리는 시나트라가 선물한 몰타 개로 이름을 지어 ‘마피아(Mafia)’라고 불렀다. 1960년 8월 28일, 마릴린 먼로는 정신과 입원치료를 받았으며 그 뒤 1961년 2월 7일 재차 뉴욕에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3월 5일에 퇴원했다. 1962년 1월, 마릴린 먼로는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으며 7월 20일 자궁내막염으로 또 입원치료를 받았다. 1962년 8월 4일, 마릴린 먼로는 심리치료사와 6시간을 보냈다. 이는 그녀의 생에 있어서 마지막 하루가 됐다. 그 이튿날 즉 8월 5일, 로스앤젤레스 경찰은 마릴린 먼로가 로스앤젤레스 브라이든무에 있는 자신의 거처에서 36세의 나이로 사망했음을 확인했다. 8월 8일,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마릴린 먼로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마릴린 먼로는 익숙한 이름이었고 익숙한 이미지였다. 그녀는 트레이드마크식의 웃음과 매혹적인 몸짓으로 하나 또 하나의 성감적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감동적인 연기 스타일과 죽음은 영화 팬들의 영원한 성감 적인 아이콘이자 대중문화의 대표주자로 자리 잡았다. 많은 팬들은 살아가면서 그녀의 사진들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아니 보고 또 보았을 것이다. 하얀 치마를 입고 뉴욕 거리에 있는 모습과 땅속 열기에 그녀가 걸친 치마가 나팔을 벌린 듯한 모습의 흑백사진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 눈을 살짝 감은 듯 입술을 감빠는 모습, 소파 위에 하얀 다리를 드러낸 모습 등을 보노라면 사진만이 아닌 특별한 감정의 전달과 순수하고 성감적인 정국이 될 때가 많다. 공개된 사진에서 마릴린 먼로는 이전과는 다른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며 청순하기도 하고 털털하기도 한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좀 길게 땋은 머리 태, 청바지, 리넨 스커트 등은 다양한 스타일링으로 생활 속 먼로의 사랑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먼로는 1962년 8월 5일, 자기의 거처이 로스앤젤레스 브라이든 무브먼트의 거실에서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이후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을 떠올리면 마릴린 먼로의 죽음은 케네디 가문과 정치권의 암막에 휘말렸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그가 죽은지 수 십 년이 넘도록 그녀에 대한 공식 조사서류는 대부분 고급기밀로 분류돼 있었다. 2006년까지 FBI(미 연방수사국)는 미국 자유정보법에 따라 500쪽 분량의 먼로 관련 문건의 비밀을 해제했다. 그러자 마릴린 먼로의 죽음이 그가 적어놓은 비밀일기와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역사 전문가들은 뒤늦게 밝혀냈다. 먼로의 일기에는 먼로와 케네디 형제의 ‘베갯머리 대화’가 다수 기록돼 있었다. 1962년 8월 초, 케네디 형제는 약속이나 한 듯 먼로와의 모든 왕래를 끊었다. 갑작스런 격변에 직면하여 마릴린 먼로 역시 자신의 위험을 의식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8월 4일 오후 9시 반, 그녀는 절친인 시드니 길라로프에게 전화로 케네디 형제와 있었던 자신의 사생활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한 가지 위험한 비밀을 알고 있다”고 했다. 다음날 새벽 LA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된 마릴린 먼로는 공교롭게도 그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비밀 일기’도 신비롭게 사라졌으며 LA지검 사무실 또한 마릴린 먼로가 일기를 썼다는 것과 먼로의 죽음이 모살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부인했다. 2012년 5월 16일, 제65회 칸 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마릴린 먼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제 홍보 포스터가 나붙었고 현장의 대형 스크린에는 마릴린 먼로 주연의 각종 다른 영화의 스틸 사진이 끊임없이 상영되면서 그녀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유명 조각가 수어드 존슨이 만든 마릴린 먼로 조각상 ‘영원한 먼로’가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스에서 전시되기도 했다. 그녀는 줄곧 어떤 남자가 그녀를 사랑하기를 원했고 그녀도 전심으로 상대방을 사랑했지만 안타깝게도 먼로는 평생 이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는 여인으로서 먼로는 전심전력으로 절대적인 관심을 필요로 했다. 이런 100%의 사랑을 남편들은 주지 못했고 애인들은 더욱 주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59년 전, 36세의 마릴린 먼로는 그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하늘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용모를 주었지만 운명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인생을 주지 않았다. ‘세상의 좋은 물건은 견고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구름은 쉽게 흩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아마도 마릴린 먼로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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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2-01-01

실시간 기획/연재 기사

  • [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10)
    ■ 김철균 1 인생의 가치관에 들어서는 사람마다 그것을 가늠하는 표준이 다르기 마련이다. 어떤 이들은 높은 관직에 오르면 가치관을 실현했다고 인정하고 어떤 사람은 한평생 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부(富)를 축적하면 가치관을 실현했다고 자호감을 느끼며 또 어떤 이들은 자기보다도 남을 위하고 사회와 나라에 기여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정한다. 즉 그것으로 인생의 가치관을 가늠한다. 그렇다면 순자는 그 세 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우선 순자는 가정교양을 잘 받았다. 딱히 가정교양이라기보다는 착한 심정을 지난 부모님의 행동에서 많이 배웠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린이들한테는 제일 처음의 선생이 부모라는 말도 나온상 싶다. 특히 딸은 흔히 어머니를 많이 닮는다고 한다. 이는 순자같은 여인을 두고 한말인 것 같다. 순자가 철이 들기 시작해서부터 받은 부모에 대한 인상이라면 아버지는 말수가 적으나 대 바르고 사리가 밝았으며 어머니는 남에 대한 동정심이 많고 맘씨 고왔을뿐만 아니라 역시 사리가 밝았으며 아버지와 어머니 두분이 공동으로 갖고 있는 특점이라면 남한테 좁쌀 한줌, 옥수수 한이삭이라도 주고야 시름을 놓는 그런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것이 요즘 말대로라면 베푸는 인생이라고 할까? 시집와서 애낳고 남편을 섬기고 하는 생활 중에서 순자는 그제날 어머니와 아버지처럼 자기 자식보다 남의 집에서 들어온 자식을, 자기 집보다 남의 집을 먼저 돌보아야 가정과 동네가 화목하다는 것을 더욱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순자의 기억에 따르면 그제날 어머니는 항상 외동딸인 자기보다도, 그것도 자기보다 한창 손우인 올케들을 먼저 생각해주군 했었다. 어쩌다 집에서 돼지고기라도 삶으면 “식솔이 적으만치 열다섯인데 언제 너희들한테 차례지겠냐”며 먼저 며느리들의 입에 고기덩이를 억지로 밀어넣어주군 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하다싶이 둘째 며느리가 물동이를 깼을 때 순자가 올케의 역성을 들며 자기가 깼다고 했지만 기실 부모님들이 이를 모를리 없었다. 그저 순자한테 속히운척 하며 며느리를 책망하지 않았던 부모님들이었다. 또한 딸 순자가 용환총각과 결혼하면 크게 고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용환총각이 살고 있는 환경이 하도 딱하게 보여 그 혼사를 허락한 부모님이기도 했다. 순자는 착한 부모님의 품성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특히 그는 올케들과 어울리기 좋아했다. 공휴일에 집에 오게 되면 늘 올케를 따라 내가에 가서 빨래하는 것을 도와주거나 터밭의 김을 맬 때도 풀을 뽑아주는 것으로 도와주면서 올케들의 말친구가 되어주군 했다. 이렇게 올케와 작은 시누이가 잘 어울리자 동네사람들은 칭찬이 자자했다. “저집 명기 양반네 며느리와 딸을 좀 보오. 어른들이 지체높고 착하게 사니까 며느리와 딸도 그것을 따라배우는구만. 그러니 가정에서는 본보기가 있어야 한다니까.” “저 집의 며느리와 딸은 어쩌면 저리도 사이가 좋누?! 올케와 시누이가 아니라 꼭 마치 모녀사이가 같지를 않쑤?” “명기양반네 딸을 보면 우리 봉녀는 하늘과 땅 차이예유. 저 것 저 년이 언제 철이 들겠는지? 사람의 오복중에 자식복도 들어있다는데 이 팔자는 남정복이 없는데다 왜 자식복마저 없누?!” 순자는 학교에 다닐 때에도 마찬가지었다. 당시 학교로 가는 길 도중에는 정신분열증에 걸린 한 40대의 아낙네가 있었는데 항상 행인들한테 “6전만 주오, 6전만 주오”하며 구걸하고 있었다. 순자네 또래들은 학교에 가고 올 적마다 항상 그 자리에서 그 여인과 맞띄우군 했다. 그 여인을 보고 남자애들은 돌팔매를 놓거나 “정신병자”라고 놀려주었고 여자애들은 그녀가 무섭다고 피해다녔지만 순자는 달리 생각했다. 때는 한창 겨울이라 발가락이 다 보이는 헐망한 신을 신은 그녀를 보고 더욱 가슴이 알작지근해나기도 했다. 순자는 그 이튿날로 헝겊천오리 한뭉터기를 갖고 와서는 사람만 보면 “6전만 주오, 6전만 주오”하면서 헤식게 웃어대는 그 아낙네를 붙잡고는 신안에 넣어주고 해진 곳을 헝겊끈으로 동여주었다. 그 때 동행하던 여자애들은 몹시 의아해했다. “얘, 불쌍한 사람이 따로 있지 왜 저 정신이상증에 걸린 여자한테 그런 선심을 베푼다니?” “그런게 아니야. 아무리 정신병에 걸렸다지만 그 여자도 사람이야. 입장을 바꿔놓고 혹시 네가 저 녀자의 처지인데 남들이 다 배척하면 그 심정이 어떻겠니?” 이렇듯 순자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경우가 허다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착하고 남을 잘 돕는 마음은 중학교에 다닐 때도 그랬고 용환총각과 결혼할 때도 그랬으며 결혼하여 애들을 낳은 지금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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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03
  • 오묘한 세계대백과(19) 바다의 신기루
    맑게 개인 날에 만약 운이 좋다면 그대는 해변가 혹은 사막지구에서 아름답고도 높은 건축물이 서서히 떠오르는 것을 볼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곧바로 기이한 바다의 신기루 풍경이다. 바다의 신기루현상은 기실 신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양빛이 특수한 조건에서 대기층에 형성된 편원형, 삼각형, 타원형 등 부동한 형태로 환영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환영(幻影)의 광선은 일반적으로 밀도가 고르롭고도 평온한 공기중에 직선으로 전파된다. 또한 공기중 각 층의 밀도가 부동할 때 광선은 곧 굴곡을 이루면서 절사현상(折射现象)이 산생하고 공기밀도의 수직변화가 매우 현저할 때면 빛은 대기중에서 전체가 반사 혹은 절사현상이 나타나면서 보이지 않은 먼 곳의 물체가 거울로 비추듯이 공기중에 비껴오는데 사람들한테 환영같은 허상을 주기도 한다. 이런 허상이 바로 신기루이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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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30
  • 민국시기 중국 제1의 여성박사 - 정육수
    정육수(郑毓秀: 1891년 3월 20일 ㅡ 1959년 12월 16일)는 광동성 광주부 신안현(지금의 심천시) 사람으로서 별명은 소매(苏梅)이다. 그는 청조말년과 중화민국의 혁명가이고 정치가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첫 여성박사였고 첫 여성변호사였으며 첫 성급여성정무관이었으며 첫 지방법원의 여성원장이기도 했다. 정육수의 부친은 청조의 호부관료인 정문치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정육수는 동년에 유학(儒学)을 배우고 “사서”와 “오경”을 읽었으며 후에는 천진교회의 숭실여자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05년(광서 31년), 정육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의 길에 들어섰으며 이 기간 그녀는 요중개의 소개로 중국동맹회에 가입한다. 1911년(선통 3년), 정육수는 귀국하여 혁명파(암살조직)조직의 연락원 등 직무를 담당, 경진동맹회에 참가하여 원세개를 암살하는 행동계획에도 참여한다. 1912년(민국 원년) 1월, 정육수 등이 원세개암살계획을 개시하기 직전, 경진동맹회의 긴급지시에 의해 이 계획이 취소되고 대신 정육수 등은 양필(良弼)암살행동에서 성공하며 그 행동에서 정육수는 중대한 공헌을 한다. 그해 여름 정육수는 프랑스로 건너가 근공검학을 하게 된다. 1914년 그녀는 파리에서 법률을 전공하기 시작, 1917년 파리대학에서 법학석사학위를 받고 프랑스법률협회에 가입한다. 1925년 정육수는 파리대학에서 법학박사칭호를 수여받고 중국역사상의 첫 여성법학박사로 된다. 그뒤 그녀는 북경정부로부터 유럽주재 조사위원으로 임명받고 사업하다가 귀국하게 된다. 귀국후 정육수와 그녀의 유학시절의 친구인 위도명은 상해의 공공조계지에서 법률사무소를 차린다. 이것으로 그녀는 중국역사상의 첫 여성변호사가 된다. 1926년(민국 15년), 중국 남방정부파인 대학교수 양향불이 상해당국에 의해 체포되자 정육수는 양향불의 변호사로 되어 법정변론에서 승리해 양향불로 하여금 석방되게 한다. 그해 4월 그녀는 산서회의파의 국민당 제2기 후보 중앙감찰위원으로 된다. 1927년 4월, 정육수는 강소성 정무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고 연말에는 상해임시법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고 동시에 상해법정대학 교장까지 겸하게 된다. 그해 8월 정육수는 위도명과 결혼하였다. 1928년, 그녀는 국민정부 유럽주재 특사로 파견되어 중국과 프랑스와의 쌍방우호사무를 주로 책임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해 11월 귀국해서는 국민정부 입법원 입법위원으로 된다. 그 기간 그녀는 민법편찬위원으로 민법초안을 작성할 때 몇가지 여성권리보호에 관한 조목을 제출해 증가하도록 했다. 그 뒤 정육수는 국민정부 건설위원회 위원, 재해구제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사업한다.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엔 국민정부 교육부 차장으로 되기도 한다. 1942년 남편인 위도명이 주미대사로 임명되자 정육수는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중국지원다국회(各国援华会)의 명예주석으로 된다. 항전승리후 그들 부부는 귀국, 정육수는 재차 국민정부 입법위원으로 된다. 그러다가 대만성정부의 주석으로 있던 위도명이 사직하면서 1948년 그들 부부는 브라질로 이민가게 된다. 그 뒤 사업의 실패 등 원인으로 그들 부부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만년에 정육수는 암병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다가 1959년 12월 16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향년 69세을 일기로 사망한다. <김철균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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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30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19)
    퐁텐블로궁전의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프랑스, 지점: 파리 세느강의 퐁텐블로 함의: 유럽 18세기 실내장식예술의 박물관 프랑스어로 퐁텐블로의 뜻은 “아름다운 샘”으로 일찍 이곳에 있은 팔각형의 작은 샘에 따라 지어진 이름이다. 일찍 12세기경 프랑스 궁왕인 루이 6세가 이 궁전을 짓고는 사냥하면서 휴식할 때 이용하군 했으며 사람들은 이 성곽을 퐁텐블로궁전(枫丹白露宫)이라고 불렀다. 이 궁전은 무성한 수립속에 있는데 부지면적은 84만제곱미터에 달한다. 궁내에는 저명한 백마광장, 프랑소와 (弗朗索瓦) 1세가 쓰던 긴 복도, 무도청 등 건물이 있으며 궁전밖에는 아름다운 디아나화원이 있다. 백마광장과 프랑소와 1세가 쓰던 긴 복도 백마광장은 프랑소와 1세가 재건한 것으로 궁내로 들어가는 긴 복도의 입구에 있다. 입구에는 거대한 말제형 계단이 있는데 이는 이 건물의 주요한 특색이다. 1814년 패전한 나폴레옹이 바로 이 퐁텐블로궁전 대문앞 말제형 계단의 오른쪽에서 거닐렀다고 하며 이로하여 백마광장은 영별광장으로도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 다음 저명한 프랑소와 1세의 긴 복도는 벽에 많은 아름다운 벽화들로 하여 전체의 복도가 휘황하고도 우아하게 만들고 있다. 디아나화원 전형적인 유럽성곽식건물이라 할 때 모두 성곽과 거기에 배비된 정원이 있는데 퐁텐블로궁전도 예외가 아니다. 궁전의 서북쪽에는 아름다운 다아나(黛安娜)화원이 있는데 이를 “황후화원” 혹은 “등원(橙园)”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화원의 중앙에는 디아나 여신상이 세워져있으며 그것이 분수와 함께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여신은 활을 들고있는데 동작이 우아하고 매우 활력이 있어보인다. 그리고 네마리의 사냥개가 여신 디아나의 발밑에 엎드려있는데 분수가 사냥개의 몸으로부터 뿜겨져나와 분수와 여신상이 조화를 이루게 하고 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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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28
  • 해외견문 시리즈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15) 한국인의 삶의 자세와 중국의 조선족
    ■ 김철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세히 관찰해보면 중국인들이 “망썬머?(忙什么?)”하는 말을 잘 하는 반면 한국인들은 어디서나 “빨리 빨리”라는 말을 밥먹듯 한다는 것을 어렵잖게 보아낼 수 있다. “빨리 일어나라”, “빨리 세수하고 밥먹어”, “빨리 끝내고 한시간쯤 푹 쉬자”, 여기서 푹 쉰다는 것도 한시간 정도니 역시 쉬는 것도 빨리 쉬라는 뜻인데 여하튼 한국인들의 생활은 빨리를 떠날 수 없다. 또한 한국인들의 행동도 명실에 부합되게 빠르기 그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국인들의 생활근성을 자상히 관찰해보면 남들한테 뒤떨어지는 것을 아주 큰 수치로 여김이 분명했다. 그 실례로 스페인 라스팔마스에서 사는 한국교민들을 내세울 수 있다. 그들의 거개가 한국에서 사업을 벌이다가 망한 뒤 이민으로 온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라스팔마스로 온 뒤 그들은 동산재기의 정신으로 열심히 일하여 경쟁에서 본토사람들을 능가하고 있었는데 실로 감탄할만했다. 필자가 스페인 라스팔마스에서 만나 알게 된 이횡권, 유혁선 부부가 라스팔마스로 올 때만 해도 빚을 잔뜩 지고 거의 도망치다싶이 온터였다. 그러다보니 집은 물론 내일 먹을 빵을 살 돈마저도 없었고 집은 물론 내일 먹을 빵을 살 돈마저 쪼개써야 하는 형편이었다. 다행히도 그때 당지의 스페인 사람들은 부두의 잡부나 거리의 청소부같은 일을 꺼렸었다. 그들 부부는 천한 직업이나마 일자리는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러자 그들은 잡부나 청소공 샅은 임시일을 맡아하는 한편 한국선박들이 자주 들이닥치는 실정에 따라 김치나 두부 같은 것을 만들어 선박에 가서 팔았는데 장사가 아주 잘되었다. 이렇게 몇년간 고생하여 돈이 모여지자 식당 하나를 세맡고 한식관을 차렸었다. 그것이 바로 “호텔강촌”의 전신인 “강촌식당”이었다. 그 뒤 그들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트롤선 세척을 세맡아 아프리카 해상에서 어로작업을 벌였으며 몇년간의 만선기를 날린 끝에 자기의 트롤선 세척을 새로 갖추고도 4층으로 된 “호텔강촌”을 일떠세웠다. 한편 부지런히 일하는 기질은 그들 이횡권, 유혁선 부부한테서도 얼마든지 보아낼 수 있었다. 우선 이횡권씨는 호텔의 사장이고 선박회사의 보스였으며 또 한국순복음교회 라스팔마스지부의 지부장으로 일하는 몸이었건만 일단 식당으로 들어서면 요리를 날라주고 마늘을 바르고 남새를 다듬는 것과 같은 일들을 꺼리낌없이 하였으며 유혁선 여사의 요리 만들기와 김치 담그는 솜씨는 웬간한 주방장은 뺨칠 정도로 수준급이었다. 그의 주방일군들은 역시 손님이 없으면 트럼프나 고스톱을 치면서 흥얼거리는 것이 아니라 손에 일감을 떨구지 않았으며 하다 못해 유리를 닦거나 솥밑의 때를 벗기거나 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군 하였다. 라스팔마스에서 이렇게 열심히 사는 이는 이횡권네 부부만이 아니었다. 자상히 살펴보면 “무궁화백화점”, “대서양상회”, “불꽃나이트클럽” 등 한국인 업체들에서도 모두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들은 삶의 시스템부터 당지의 스페인 사람들과는 근본 달랐다. 첫째, 스페인 사람들은 겉치레로 크고 호화로운 건물에서 일을 보면서 하인부터 쓰지만 한국인들은 작은 건물에서도 큰 효과를 보려 하며 될수록 자체로 모든 일을 대체했는바 구멍가게 같은 곳에서도 별의별 사업을 다 벌일 수 있었다. 둘째, 스페인 사람들은 언제나 앉은 자리에서 손님이 찾아들기를 기다리며 값도 할인해줄줄도 모르지만 한국인들은 손님이 있는 곳이면 그 어느 곳이든 찾아간다. 그 실례로 우리 선박이 그곳에 입항할 적마다 많은 한국인 업체들이 다투어 선박에 찾아와서는 물건을 예약하거나 식당으로 청하군 했는데 혹간 선박에서 부식물같은 것을 올리거나 하면 라이타나 볼펜을 선물로 주고 한끼 청해먹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또한 상점 같은 곳에 들어서면 서비스가 어찌도 좋은지 콜라나 커피같은 것을 공짜로 마음대로 마시게 하여 그걸 먹고 물건을 사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렇게 열심히 하노라니 같은 한국인 사이에도 경쟁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그 곳에서 망하는 한국인들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라스팔마스에서 망하는 한국인들은 재차 미개척지인 아프리카로 진출했다. 그래서 라스팔마스의 한국인들은 “한국에서 라스팔마스로, 라스팔마스에서 아프리카로” 라는 말도 나왔는데 경쟁에서 적수였지만 누가 일단 아프리카로 간다면 다시 사업을 벌이라고 한인회에서 의연금을 모아 챙겨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가 아프리카 코트디바르(상아해안)의 아비쟝에는 라스팔마스로부터 건너온 이씨 성의 한국선식상 한명 있었다. 한국에 늙으신 모친과 아내 그리고 자식 셋까지 두고 왔다는 그는 당지의 흑인여인과 동거하면서 또 혼혈아 둘을 낳아키우고 있었다. 그토록 열심히 일했건만 자주 사업이 망해 이러구 저러구 하여 한국으로 갈 수 없었던 사나이, 그래서 그가 제일 즐겨부르는 노래가 바로 “머나먼 고향”이였다. 머나먼 남쪽하늘아래 그리운 고향 사랑하는 부모형제 이몸을 그리워 천리타향 낯선거리 헤매는 발길 한잔술에 설음을 타서 마셔도 마음은 고향하늘로 달려갑니다 … 이렇게 망하고 또 망하는 지겨운 해외생활 끝에 머리에 흰서리가 한 벌 덮인 사나이었건만 그의 신념은 변함이 없었다. 그것인즉 언젠가는 꼭 돈 많이 벌어 조상의 뼈가 묻힌 조국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가 그는 검은 피부를 가진 애들한테 한국말과 한글을 열심히 가르치고 있었다. 그 애들 또한 그렇게도 정확하게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등의 한국말을 번지였다. 특히 그 애들이 부르는 “반달”, “바다가 육지라면”, “고향의 봄” 등 노래 중에서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란 대목을 듣노라면 옆에 있는 우리들까지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아, 얼마나 고향이 그리웠으면 저 깜둥이 자식에게까지 그런 노래를 배워주었으랴. 그렇다. 잠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이지만 언젠가는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 소원성취하고 금의환향하겠다는 그 정신과 자세가 소중했다. 여기서 우리는 실패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실패로 인해 붕괴되는 정신적인 실패가 더 무섭다는 철리를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실례로 모진 실패와 시련을 거듭하면서도 끝내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막에 남새재배로 성공한 “사막에 피는 꽃”의 한국인 주인공인 김용복씨를 들 수 있다. 스톱, 여기까지 쓰고 나니 우리 중국 조선족들의 삶에 대한 자세를 반성해보지 않을수 없다. 집에서는 부모한테 의뢰하고 밖에서는 공짜가 생기기만을 바라는 삶의 방식, 여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위에서도 언급하다싶이 라스팔마스의 이횡권씨 부인인 유혁선 여사는 아무리 간고하고 힘든 때도 남편을 배반할 엄두도 못냈거니와 사업에서 실패한 남편이 불쌍하기만 했으며 그럴수록 남편을 도와주어 성공하도록 하고 싶었단다. 아비쟝의 이씨 사나이의 한국부인 역시 남편이 아비쟝에서 깜둥이 여인과 여차여차한다는걸 번연히 알면서도 운명에 순종하면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악착스레 살고 있다고 했다. 하다면 이에 반해 우리의 여인들가운데 남의 남자가 남편보다 더 우월해보이고 혹간 남편이 사업에서 망하면 그런 남편한체 아이들까지 떠맡기고 도망가는 여인들이 수두룩하다. 이는 머나먼 한국여인들을 말고라도 우리의 지난 세기 60 ㅡ 70연대에도 거의 볼 수 없었던 상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기에 오늘 두번째 아이의 출생을 거부하는 남편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그들의 말을 빈다면 자기의 여편네도 건사하기 어려운 세월에 두번째 아이를 어떻게 낳느냐는 것이다. 하다면 조선족의 인구장성 먼저 조선족의 자질제고가 급선무라는 필자의 주견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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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7-28
  • 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13)
    ■ 김철균 지금의 분열로 두개 나라가 된 한반도의 현실에 대해 구태어 길게 언급할 필요가 없겠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듣고 또 나름대로 분석하고 있으니 말이다. 언급하고 싶은 것은 지금의 한반도 현실 역시 다 우리 민족이 약하고 힘이 없는데다 강대국들의 욕심과 아귀다툼으로 인한 비극이란 것을 강하게 언급하고 싶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일본천황 히로히토의 항복성명으로 광복이 됐다. 헌데 광복이란 얻어진 것이지 우리 민족이 자체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에 의해 남한테 빼앗겼던 집이나 물건을 되찾게 되면 그 사람의 말을 잘 듣기 마련이다. 이는 사람으로 생겨서의 이치이다.”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지리적 위치를 놓고 볼 때 한반도는 중국대륙과 러시아 극동지구와 붙어있고 미국과는 세계에서 가장 큰 해양인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다. 그러니 제 2 차 세계대전의 종말 당시 미국의 입장으로서는 모든 방면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장악하고 발을 붙여야 할 지역이 바로 한반도였다. 하지만 제 2 차 세계대전의 종말을 앞두고 미국 혼자의 힘으로 일본을 굴복시키자면 막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그 당시 미국은 또 다른 강대국으로 떠오른 소련의 힘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1945년 7월 26일에 있은 포츠담회담에서 미국은 소련의 대일작전을 적극 요청하기까지에 이르렀다. 동시에 대일작전에 대한 스탈린의 동의를 얻어낸 후 미국대통령 투루먼은 돌이킬 수 없는 한가지 큰 과오를 저질렀음을 인차 깨달았다. 바로 이 때 투루먼은 본국으로부터 “아기는 무사히 태어났다”란 전보를 받게 됐는데 그 “아기”란 바로 원자폭탄이었다. 워낙 그 “아기” 즉 원자폭탄이 좀만 더 일찍 태어났어도 미국은 근본 소련의 힘이 필요없이 혼자서도 일본을 굴복시킨 뒤 보다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첫 원자폭탄을 투하한 3일 뒤인 8월 8일 소련홍군은 도합 157만 7700여명의 막강한 병력으로 운집, 세갈래로 나뉘여 만주와 조선 지역으로 진출하며 파죽지세로 일본군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들이댔다. 소련홍군의 공세는 그해 4월 독일 본토인 베를린을 진격할 때의 속도를 초과하였다. 이는 미국도 미처 예상치 못하던 일이었다. 미국은 조선 전체를 소련홍군한테 넘겨줄 수는 없었다. 조선 전체가 소련의 지배로 넘어가면 미국은 아시아의 극동지구에서 발붙일 곳이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소련홍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방법이란 한반도의 중간지역에 경계선을 긋는 것이었는데 마침 그 중간지역에 38도선이 지난 것이 있었고 미국은 이 38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이 조선 남과 북에서 일본군의 투항을 접수하자고 제안하기에 이르렀으며 마침 소련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당시 소련이 왜 미국의 이 제안을 받아들였는지는 알바가 없다. 다만 2 차 대전에서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군사적 지원을 받아온 소련으로서는 미국의 제안을 거절할 적당한 이유가 없었던 모양이었으나 이는 다만 추측에 불과하다. 이렇게 생겨난 38선 - 그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은 각각 미국과 소련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고 또 그것을 계기로 여러 가지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선은 힘이 없었다. 소련군이 ‘해방자’란 명목으로 북에 진출할 때와 미군이 ‘점령군’이란 명목으로 등륙할 때에도 모두 구경밖에 할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약소국가와 약소 민족의 운명이었다. 그리고 북쪽은 소련을 등에 업었고 남쪽은 미군을 등에 업었으니 ‘통일’이란 구호는 같았으나 목소리의 내용은 제각각이었다. 그리고 통일과는 점점 멀어져가는 정치적 이념속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말대로라면 2차대전의 종말 당시 통일된 한반도가 탄생할 기회가 없은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북측의 뜻대로라면 소련이 38도선을 경계로 하자는 미국의 제안을 듣지 않고, 또한 머나먼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이 “남조선”에 발붙이기 전에 한반도 전체를 점령했더라면 그때에 통일된 조선이 탄생했을 것이고 남측의 뜻대로라면 미국이 보다 일찍 원자폭탄을 만들어 소련의 힘을 요청하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일본을 굴복시켰더라면 역시 미국의 지배하에 있는 통일된 한국이 탄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약소국가인 한반도는 그러한 선택권은 물론이고 그러한 요구를 미국 혹은 소련에 제기할 권리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한편 중국은 달랐다. 한시기 중국도 남북으로 분단될 위기가 있은 적이 있었다. 즉 1949년 당시 미국과의 협의를 거친 스탈린이 모택동한테 장강이북을 차지하고 장강이남을 장개석한테 양보하라고 제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택동은 스탈린의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모택동한테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전쟁속에서 쟁쟁 소리나게 단련된 600만명의 군대가 있었고 공산당의 세뇌교육을 받은 2억만여명의 인민들이 있었으니 스탈린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고도 남음이 있었다. 반대로 한반도는 광복조차 외세에 의해 이룩된 것이었고 소위 한국독립군, 항일빨치산과 조선의용군 등 민족의 군대가 있었지만 그들은 조선에서 일본군의 투항을 접수할 권리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아버지의 얘기처럼 남들의 신세로 광복을 맞았으니 남의 말을 고분고분 들어야 했다. 그렇게 생겨난 38선, 이는 결국 1950년의 6.25동난을 초래했고 전반 7000여만의 겨레가 지금까지 분단의 설음을 안고 사는 고통속에 몰아넣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7-26
  • [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9)
    ■ 김철균 결혼 뒤 남편은 자기의 주견이 세울 때도 있었지만 많은 방면에서 아내인 순자가 하자는대로 따라주었다. 그것은 자기한테 바친 아내의 자아희생적인 선택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거니와 가정생활을 포함한 모든 생활에서 아내의 뜻과 주장이 그만큼 정확하고 “진리”였기 때문이었다. 우선 순자는 민족단결을 도모하는 측면에서 각별한 신경을 기울였다. 특히 당시는 연변조선족자치구가 갓 창립된만큼 민족단결을 각별히 강조해야 할 시기이기도 했다. 연변은 조선족과 한족을 비롯하여 만족, 회족, 몽고족 등 여러 민족이 어울려 사는 고장이다. 이렇게 여러 민족이 함께 사는 고장인만큼 여러 민족이 친 형제처럼 화목해야 한다. 만약 여러 민족 사이에 단합이 잘 되지 않고 서로 흉보고 물어뜯고 하는 현상이 비일비재로 나타난다면 외래침략자가 쳐들어오지 않아도 내부적으로 분열이 생겨 붕괴되기가 쉽다. 나라에서 연변에 자치권리를 부여한 것은 바로 여러 민족이 손잡고 공동으로 잘 살라는 것이지 결코 조선족들만이 특수화를 부리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 연변지구에서는 반드시 조선족은 한족을 떠날 수 없고 한족 또한 조선족을 떠날 수 없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순자는 한족을 비롯한 기타 소수민족과의 민족단결을 위한 일련의 언행지침을 제정하였다. 절대적은 아니지만 한족들은 너그럽고 순박한 반면 위생지키는 면에서 좀 지저분하고도 부족함이 노출되고 있다. 우리 조선족 또한 절대적은 아니지만 친절하고 활발한 반면 사람과 사람사이, 가정과 가정사이에서 남의 험담을 늘여놓는 열근성이 노출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조선족과 한족들 사이에서 서로 상대방의 우점을 따라배우고 자기의 열근성을 극복하면서 손을 잡아야 민족단결을 운운할 수 있고 자기 민족한테 30%의 배려를 쏟았다면 한족한테는 70% 혹은 그 이상의 배려를 쏟아야 한족들의 긍정과 신뢰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한족들을 위해 많이 봉사하고 그들의 신뢰를 받는 것 역시 결국은 우리 조선족을 위하는 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순자는 민족단결이란 쉽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민족단결의 성과도 나무위의 배가 익어 절로 떨어지기를 기다리듯이 그냥 자연스럽게 이룩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많은 면에서 한족들을 위해 봉사를 해주었는데 실례로 조선족가정과 한족가정에서 같은 일에 봉착하였다면 될수록 한족집부터 도와주군 했다. 여기에 한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순자네 이웃에는 성이 진씨인 한족집이 있었다. 어느 날 이집 주인 진씨가 마당을 쓸려고 문을 나섰는데 벌써 누가 말끔하게 쓸어놓은 것이 아닌가? 그래서 진씨는 한뉘 자기의 몸도 가꿀줄 모르는 마누라가 마당을 다 쓸다니 해가 서쪽에 뜰 일이라고 희한해했다. 그리고 그채로 집에 들어오면서 아직도 잠자리에 누워있는 마누라를 보며 “오래 살다보니 마누라가 마당을 쓰는 것을 다 본다”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마누라가 잠꼬대를 하듯 “내가 왜 당신을 두고 마당을 쓸어?!”하고 한마디 하고는 홱 돌아눕는 것이었다. 그럼 그렇지. 아직도 잠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마누라가 마당을 쓸 일은 없지. 그렇다면 과연 누가 몰래 남의 마당까지 쓸어놓았단 말인가?… 다음날 아침, 2-3일에 한번씩 아침시장에 다녀오는 습관이 있는 진씨는 그날 아침도 하남시장에 나가 콩물과 기름튀기떡을 사들고 집마당에 들어서다가 이웃집 김선생네 색시가 자기 집 마당을 쓸어주는 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아이유 색시, 색시가 우리 집 마당을 다 쓸어주다니 웬일이유? 나는 또 게을러빠진 우리 마누라가 마당을 쓸었다 하고 칭찬까지 해줄번 했는데…” “아주버님, 어디 아침장마당에 다녀오는 길이세요? 아침에 우리 집을 마당을 쓸겸 먼저 아주버님댁네 마당부터 쓸었어요.” “그래도 그렇지. 우리 집 마누라는 아직 꿈속에서 깨여난 것도 같지 않수다 허허허” “괜찮아요. 이웃집 마당이 깨끗해야 우리 집 마당도 깨끗하고 온 동네가 깨끗할 것이 아니예요?!” 그러자 진씨는 “당신네 조선족들은 정말 깨끗하여 항상 위생모범우다. 정말 깨끗해…”라고 하며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순자는 한족가정에 환자가 생겼을 때도 그러했고 한족집 가정에 반찬이 떨어졌을 때도 그러했으며 하다 못해 조선족애와 한족애가 다툼질을 하거나 싸울 때도 먼저 조선족애를 교육하고 나중에 한족애한테 타일러주군 했다. 이를 두고 한시기 많은 조선족들은 이해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순자가 한 것이 옳다는 것이 증명이 되었다. 많은 한족들이 조선족들을 우러러 보게 되었고 조선족가정에 변이라도 생기면 적극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보내오기도 했다. 한편 순자는 남의 마당을 쓸고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갖다던지기도 하였는가 하면 위생이 좀 불결한 집은 집안청결까지 도와주면서 개인과 가정 그리고 동네와 거리의 위생을 잘 지킬데 관한 선전도 잘 하였다. 그래서인가 일단 아침만 되면 순자가 동원하지 않아도 동네사람들은 스스로 비자루를 들고 위생청결에 떨쳐나서군 하였으며 순자네가 사는 동네는 연길시의 그 어느 동네에 비해서도 위생청결이 잘되여 늘 가두판사처의 표창을 받군 하였다. 그러자 거민위원회에서 선진일군을 선거하거나 소조의 조장을 선거할 때면 모두들 한결같이 순자를 선거하였는데 거기에는 한족주민들이 거의 과반수를 차지하군 하였다. 그리고 1953년말 순자네가 연변위생학교 사업의 수요로 집을 하남가로부터 신흥가로 이사할 때 많은 사람들이 순자와 갈라지기 아쉬워하며 눈물까지 흘렸다. 그중에도 한족로인들과 한족아낙네들이 적지 않았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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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25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18) 루브르궁
    루브르궁의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프랑스, 지점: 파리의 세느강변 함의: 인류고대예술진품을 대량 수집한 박물관임 루브르궁(卢浮宫)은 프랑스의 파리 세느강 오른쪽에 위치, 1204년에 최초로 지어졌는데 최기에는 하나의 성곽에 불과했다가 후에 재건을 거쳐 궁전으로 됐으며 지금은 세계에서 이름난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루브르궁의 총체 건물은 “U”자형으로 부지면적이 18만평방미터에 달하는데 정교한 건축예술로 하여 사람들한테 고풍스러우면서도 청신한 감을 주며 장엄하고도 숙연한 감을 주기도 한다. 루브르궁에는 대량의 인류의 고대예술진품들이 소장되여 있어 건축과 예술의 완미한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인류 문명발전의 총색인”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루브르궁의 박물관 목전 루브르궁에는 세계 각국으로부터 가져온 도합 40여만건의 예술진품이 소장되어 있다. 박물관은 또한 나라 및 품종에 따라 분류되어 진열되어 있다. 예하면 동방예술관, 고대애급예술관 고대그리스ㅡ고대로마 예술관, 진주보석관, 그림예술관 및 조각예술관 등으로 진여되었다. 그 중 고대그리스와 고대 로마예술관이 가장 먼저 세워졌으며 고대애급예술관이 가장 특색있는 진품들로 진열되었고 그림예술관은 품종이 가장 많은 바 35개 전람청에 2200여폭의 그림진품이 소장되어 있다. 루브르궁의 세가지 보물 루브르궁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루브르궁의 세가지 보물”로서 즉 “모나리자”, “승리의 녀신”과 “미로의 비너스” 등이다. 그 중 “모나리자”의 그림은 그 신비한 미소로 일찍 세계에 알려졌다. 그리고 “승리의 녀신”은 돌우에 세워진 여신의 조각으로 비록 머리부분과 두팔이 없어졌지만 사람들이 보는 여신조각은 의연히 가장 완미한것이다. “미로의 비너스”는 기원전 2세기 말에 창작된 것으로 조각이 단정하고도 자연스러웠으며 신체선이 우아하고도 아름답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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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21
  • 오묘한 세계대백과(18) 천태만상의 구름
    하늘의 구름은 장난기가 심한 “녀석”으로 하냥 천태만상의 변화를 일으키기 좋아하는 “성미”를 갖고 있다. 구름은 어떤 때는 얇다란 면사포 모양을 하다가도 어떤 때는 두텁고도 무겁게 전반 하늘을 뒤덮기도 한다. 대낮의 구름은 깨끗한 깃털 같다가도 아침과 저녁이면 붉게 물들기도 한다. 그럼 구름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가? 대자연을 보면 하천과 호수 및 바다와 토양의 수분 등이 끝임없이 증발해 하늘로 올라간다. 이런 수증기들은 일정한 고도로 올라간 후 공기 중의 흑먼지에 붙으면서 갈수록 많아지다가 나중에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구름으로 된다. 그리고 어떤 지방엔 수증기가 많고 또 어떤 수증기는 높게 올라가고 어떤 수증기는 낮게 올라감에 따라 구름형태도 부동하게 형성된다. 또한 일출 때와 일락 때면 태양빛이 비춰주면서 그 구름들은 아름다운 채색노을로 되기도 한다. 대기 중에서 뭉쳐진 작은 얼음 입자들은 쉽게 소실되지 않는바 물처럼 쉽게 증발하는 것도 아니다. 지면으로부터 더 높은 고공일수록 풍력도 더욱 강해지는바 그 곳에서의 구름이 일단 얼음덩어리로 되면 그것이 쉽게 소실되지 않으며 그것이 강풍에 의해 밀려가고 밀려오고 하는데 높은 하늘의 구름떼들은 바로 이렇게 형성된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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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21
  • 해외견문시리즈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14)
    ■ 김철균 (첫 부분) 요즘 들어 보도매체와 여성단체 및 전반 중국의 동포사회가 조선족인구의 마이너스장성을 두고 깊은 우려를 표시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 우려의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농촌에서는 어린이들의 생일떡을 먹어보기가 힘들다”, “학생수의 감소로 조선족학교가 문을 닫고 있다”, “이제 수십년만 지나면 연변조선족자치주란 이름도 명색일뿐일 것이다”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조선족인구보존을 위한 해결책이 하루속히 나와야 한다고 보면서 한편 우리 조선족의 현재의 삶의 환경에서 인구감소에 대한 우려보다도 조선족인구의 자질제고, 생존공간의 마련 및 삶의 자세를 바로잡아 주는 것이 선차적인 과업이 아니겠는가 하는 견해도 피로하고 싶다. 툭 까놓고 말하자면 자꾸만 아이를 낳으라고만 선동할 것이 아니라 조선족으로 하여금 자존, 자립, 자강의 정신을 키우게 한 다음 인구장성에 관심을 돌렸으면 하는 마음이다. 왜냐하면 중국조선족이 멀리는 서양인, 가까운데는 동족인 한국인과 본토의 한족들에 비해 확실히 생존력 차이가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 아래에 한국 본토와 세계 여러 곳에 널려있는 한국인들의 생활이야기를 통해 우리 자체의 삶의 배경을 검토해보기로 하자. 한국인들한테 주어진 삶의 배경 주지하다싶이 36년간의 일제통치시대의 뒤를 이어 지난 세기 50연대초기의 “6.25”전쟁은 갓 독립된 대한민국땅으로 하여금 쑥대밭이 되게 했다. 페허로 된 공장건물과 황폐해진 전야, 거기에 수백만을 헤아리는 이산가족과 부모를 잃은 고아들, 전쟁의 포성은 멎었지만 그 후유증은 오래갔다. 사람들은 분분히 살길을 찾아 정든 고향을 떠났고 복지라고 모여든 곳이 바로 서울이었다. 부푼 가슴을 안고 서울을 찾아왔건만 서울은 역시 그들이 바라던 “천국”은 아니었다. 인구과잉으로 인한 공급의 부족과 실업율의 급상승, 성행하는 범죄활동과 매음업, 모든 것은 정부의 커다란 부담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하여 후에 모든 매스컴들의 추적화제로 됐지만 당시의 정부는 그 위기를 모면하려고 유럽 나라들을 중심으로 세계 각국에 “유아수출”을 시작, 그것이 바로 한국이 일으킨 이른바 첫 “산업혁명”이었다. 그 목적인즉 한 세대의 대한민국 아동들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는 중국에 사는 우리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짐승도 새끼를 고와한다는데 천하의 어머니들의 마음이란 다 같은 법이라 어느 여인인들 자기의 살점과 같은 자식을 외국에 팔기를 원했으랴. 하지만 굶은채 드러누워있는 시부모님과 노무시장에 갔다가 한숨 쉬며 돌아온 남편, 하여 부득불 수많은 여인들은 어머니로서는 천하에서 제일 독한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끼고 있어봤자 굶어죽을 것이 번연한 판에 외국에라도 보내면 어린 것도 살고 자식을 판 외화로 시부모한테 보리밥이라도 대접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연고로 해서 30년이 지난 뒤 한국에는 그 때의 생활을 소재로 한 영화들도 적지 않게 나왔다. 필자가 본 “수잔”이란 영화가 바로 그런 부류에 속하는 스토리었다. 그 줄거리를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지난 1960연대 초기 한국의 한 농촌에는 정아라고 부르는 한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가정에는 부모외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공부하는 두 오빠에 젖을 먹는 어린 남동생을 두고 있었다. 가정상황이 빈곤하기를 말이 아니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병으로 드러누워있고 두 오빠 또한 학비를 대지 못하여 퇴학맞을 위기가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굶기를 하루 세끼 밥먹듯하고 병마는 그칠 사이가 없고… 바로 이렇 상황에서 어머니는 독한 마음을 먹고 오스트리아의 한 젊은 부부한테 정아를 입양보낸다. 쌀 두가마니를 살 수 있는 값으로 외화를 받고 말이다. 이렇게 오스트리아의 젊은 부부의 딸이 된 정아는 이름을 “수잔”으로 바뀌었고 한동안 이들 부부의 귀여움을 받으며 행복하게 자란다. 그러다가 이들 부부한테도 아들애가 생긴다. 아들애가 생기자 부부는 더는 수잔을 귀여워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때로운 미개한 동양인종자라고 기시도 한다. 그러다가 수잔은 점점 크면서 자기의 모습이 그들 서양인과는 다르며 출생국가도 머나먼 한국이란 것을 알게 됐고 자기를 버린 부모와 낙후한 한국을 저주하기도 한다. 약 20년뒤 성개방이 일찍 된 유럽, 바로 수잔의 남동생이 자기의 누나를 좋아하면서 그녀와 성관계를 발생한다. 그러나 그 뒤 수잔이 남동생과의 결혼을 결심하자 그 남동생은 “널 좋아한 건 잠시뿐이고 너같은 동양인과 절대 결혼은 할 수 없다”고 등을 돌렸고 서양인 부부 역시 수잔이 결혼을 거들자 더는 집에 둘 수 없다면서 이젠 독립하라고 집에서 내몬다. 집에서 나온 수잔은 얼마 후 자기가 임신했음을 알게 되고 빈민구의 어느 한 찌그러가는 방에서 아들애를 출산한다. 그 뒤 어릴 때 서양인 부모한테서 배운 피아노의 연주로 어린 아들애를 돌보며 어렵게 살아가던 중 수잔은 오스트리아주재 한국대사관 일군을 알게 되고 그를 통해 자기가 입양될 때의 한국의 사정도 듣게 되었으며 “아리랑”이란 노래도 배우게 된다. 또한 한국대사관을 통해 오랜 수소문 끝에 한국에서 살고 있는 친 부모까지 찾게 되며 얼마 후 김포공항을 통해 한국행을 하게 된다. 한편 김포공항에서 딸과의 극적인 상봉을 한 정아의 엄마는 피부색은 한국인이 분명하나 한국말이라고는 한마디도 모르는 딸을 두고, 또 딸이 낳은 혼혈남아를 보면서 넉두리를 하며 통곡한다… 이 영화를 통해서도 우리는 그 때 한국사회의 생존환경을 한 측면이나마 알 수 있다. 그 후 두번째로 되는 한국의 산업혁명이라면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노무송출이라 할수 있었다. 주지하다 싶이 인구가 많고 경제가 발달하지 못한 한국으로서는 정부적 차원으로부터 출발하여 잉여로력의 눈길을 해외에 돌리고 세계시장을 개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독일의 노천탄광과 리비아의 관개수로건설을 비롯한 해외건설과 외적송출선 선원 등 수많은 잉여로력을 외국에 송출하여 국내부담을 줄이는 한편 외화를 벌어들이도록 했다. 특히 1960년대까지도 한국에서는 배를 타는 직업이 매우 인기가 높았는바 당시의 선원인수가 무려 70만명에 달했으며 마도로스라 하면 돈도 많고 아가씨들도 줄쳐서 따랐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한국에는 마도로스에 대한 노래가 많이 유행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잘 있거라 부산항구”, “이별의 인천항구”, “원양개척가”, “아메리칸 마도로스” 등이 있는데 여기서 “원양개척가”의 가사만 읽어봐도 우리는 기세높이 바다로 진출하는 그 때의 기상을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사나이몸 태어나서 할 일도 많지만너와 나 원양개척의 사명을 받았다폭풍우 훈련속에 맺어진 동지애수평선에 해가 뜨고 해가 질 때면부모형제 나를 믿어 성원을 보낸다 … 이렇듯 고생과 역경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계를 정복하려는 정신이 있었기에 후일 한국인들은 아주 빠른 시일내에 무지몽매하던 한국땅에 선진적인 물질문화의 뿌리가 내릴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 실례로는 낡은 흔적을 가시기 위한 새마을운동과 세인을 놀래웠던 8.8올림픽을 들 수 있으며 또한 1997년부터 있은 아시아금융위기에 휘말려들어갔어도 재빨리 헤어나와 2002년 월드컵 주최국의 하나로까지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이러한 한국인들에 비해 중국 조선족을 반추해본다면 한국이 가장 간고할 때 우리는 잘 살지는 못해도 나라의 덕분에 땅을 분여받을 수 있었고 나이가 차면 직장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여하튼 큰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먹고 살 수는 있었던 것이다. 이는 우리의 경쟁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시장경제체제로 진입하니 남한테 먹히우고 갈팡질팡하는 것도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보아진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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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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