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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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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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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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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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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 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②
    1927년, 중국과 독일의 접촉을 시작으로 항일전쟁 직전까지 독일은 중국의 최대 협력 파트너였다. 원래 독일 군사고문은 장개석에게 60개의 독일의 기계사단을 통폐합해 내놓아야 했지만 국민정부는 그렇게 많은 돈이 없었고, 또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았기에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전역에 30개의 ‘조정사’만 있었고 독일은 40만 세트의 장비만 쏟아부었다. 이 정예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거의 소진되었다. 최초의 ‘송호회전’, ‘남경보위전’, 화북전장의 ‘흔구회전’, ‘낭자관전투’;등 전투에는 대량의 독일 기계사단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참혹한 대가를 치렀다. 이들 30개의 ‘조정사’ 중 28개는 사단 전체가 마비됐고, 2개 사단만이 격렬한 전투를 피했기에 그 병력과 장비를 보존할 수 있었다. 또 전쟁 때문에 독일의 무기는 제때 수송되지 못했고, 독일군은 장비를 보충받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국산장비를 갖고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게다가 독일은 일본과 동맹을 맺은 탓으로 독일군은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늦추다가 1938년 7월 중국에 대한 지원을 모두 멈추고 중국에서 철수했다. 독일인들은 철수했고, 중국의 항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중국내 전장은 군사 장비의 보충이 시급했고, 장개석은후원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바로 이때 소련이 나타났다. 소련은 국민정부로 하여금 일본군의 진군속도를 저지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장개석과 합작협정을 맺고 중국에 군사물자를 지원했다. 이에 따라 독일기계사와 미국기계사 사이에 소련기계사가 하나 더 생겼다. 소련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민정부가 농수산물과 각종 금속 원자재만 제공하면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10년 만에 중소 협력은 이렇게 성사됐다. 소련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름대로 성의를 갖고 있었고, 탱크와 비행기 같은 중무기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소련 장비로 20개 사단을 무장시켜 독일군 무기사단의 손실로 생긴 공백을 메우려 했다. 이렇게 양 측이 각각 필요한 것을 취해서 교역은 비교적 만족스럽게 진행 됐다. 하지만 소련 기계사의 배치에 있어서 중·소 양측은 이견이 있었다. 소련 측은 모두 소련군 편제대로 새로 편성된 부대에 장비를 배치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몰래 장비를 따로 빼돌려 포병단을 조직했다. 이렇게 10여 개의 포병단위를 만들면서, 미리 약속했던 대로 소련 기계사단에 이를 전달하지 않았다. 한편 소련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물자 수송도 간단해 1차 소련의 기계장비로 4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었으며 이 중 제200사단은 중국 최초의 기계화사단이 됐다. 그리고 후속으로 소련의 기계화 장비도 육속 도착해 장개석은 18개의 소련 기계화사단을 구성해 일본군과 잘 싸울 수 있었다. 이 보배같은 소련 기계화사단들에 대해 장개석은 독일 기계사단들처럼 잔혹한 전장으로 보내져 소모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1941년에는 15개 사단이 각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이 중립조약을 맺은 뒤 중소 관계가 약화되면서 소련의 군사장비는 보충되지 않았고, 소련의 기계화사단 역시 점차 역사적 명사로 되었다. 미국의 원조는 큰 것을 노린 전략적 움직임 실제로 영국은 독일의 지원이 끊긴 뒤에도 잠시나마 중국에 군사물자를 제공했지만 일본의 압력에 원조를 중단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중영 간 원조가 회복됐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이때 이미 해가 기울어 극동에 전념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소련의 장비가 없어지자 미국은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구세주가 됐고 국민당 군은 미 장비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항일전쟁 단계에서 미국이 실제로 충분한 지원을 하지 않은 데는 객관적인 이유도 있고 주관적인 이유도 있다. 한편으로 운남-미얀마 도로가 끊기자 물자 장비는 험준한 항로를 통해서만 수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적었다. 다른 한편으론 아시아 전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영국과 소련에 많은 장비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인은 통이 컸다. 중국의 해방전쟁 시기까지 22개 군 64개 사단이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장개석에게 보내와 국민당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장개석은 미국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공산당에 의해 대만이란 작은 섬으로 쫓겨나 지내다가 일생을 울적하게 마감했다. 중국은 북벌전쟁 때부터 외국의 군사원조를 대대적으로 받으면서 중간에 공급처를 여러 개 바꿨다. 심지어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 등도 중국에 숟가락을 얹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독일·소련·미국이 더 많이 지원했다. 왜 이런 나라들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중국을 지원했을까? 독일의 속셈은 짐작이 가는 대로 장사를 하러 온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금속과 각종 원자재가 중국에 많고 거기에 무기까지 팔아 큰돈을 벌 수 있는 중국을 싫어 할리가 없는 것이다. 소련은 여러 가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일본을 견제하여 극동에서의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 한편, 당시 소련은 넓은 영토가 독일군에 함락되고 원자재가 부족했기에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나라로 중국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국민정부에 원하는 게 없음에도 속내는 더 흉악했다. 미국이 내놓은 ‘임대법’은 파시스트의 침략을 받는 전 세계 국가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앞에서 이런 국가들이 육탄이 되어 주는 것이고 양쪽이 다 소모되면 그 때에 가서 그들이 나서서 수습하여 이들 국가들을 깊이 통제하겠다는 취지가 있었다. 한마디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변화 속에 있고, 친구와 적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판단되며 이익만이 영원한 것이다. 이들 나라가 중국에게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는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도 약육강식의 규칙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다만 실력이 강해야 비로소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경직된 도리가 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2-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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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8)
    ■ 허길성 1 (전번기 계속) 1965년 7월 나는 꿈많고 랑만스럽던 북경공정병학원을 졸업함과 아울러 해방군 총정치부의 발령을 받고 심양군구로 배치되였다. 근무부서는 심양군구 공정병사령부였다. 그야말로 내가 배웠던것을 실제에 써먹을수 있게 되였던것이다. 그리고 당시 내가 근무하는 공정병사령부 기획실의 주요 업무는 전쟁대처용 산굴설계같은것들이였다. 그만큼 당시 동북은 산이 많았고 또 그만큼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대이기도 했다. 나는 사령부 기획실에 출근하자 바람으로 중견으로 독립작업도 할수 있게 되였다. 기획실의 선배군인들은 나를 관심하기도 했고 믿어주기도 했다. 그들은 내가 매 한장의 설계도면을 그려낼 때마다 자기일처럼 기뻐하며 축하해주었고 간혹 부족하고 미비한 부분이 있어도 차근차근 가르쳐주는것으로 나를 이끌어주군 했다. 그리고 같은 부서는 아니였지만 사령부내의 여러 부서들에는 연변에서 간 군인들도 꽤나 있었는데 조선족군인도 몇명 잘되였다. 그러다보니 일요일이 되면 같이 거리구경을 가지 않으면 야외들놀이도 할수 있어 학교시절과 비교하면 생활이 다채로웠거니와 또 로임을 받으니 가끔씩 부모님한테 용돈을 보내주고도 어느 정도 여유로운 생활을 할수 있었다. 한편 고향의 부모님들은 내가 심양군구에 오게 되자 둘째형님한테 촉구하기도 하고 사처로 수소문, 결국 셋째형수님께서 한 처녀를 나한테 소개했다. 그 처녀는 개산툰화학섬유팔프공장 화험실에서 근무하는 송금자라는 이름을 가진 처녀였다. 송금자의 가정을 보면 부친은 개산툰화학섬유팔프공장의 로동자였고 어머니는 가정부녀였다. 당시 그녀는 6남매중 맏이로서 공장의 종업원대학에 졸업했으며 공장화험실에 출근하면서 공장공청단서기로 활약하고있었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그 처녀와 거래를 하면서부터 가끔씩 꿈속에서 나타나군 하던 순자에 대한 련민의 정이 알게 모르게 점차 사라지는것이였다. 사람이란 새로운 사람한테 정이 들면 이전의 사람한테 남아있던 정도 그만큼 멀어지는 모양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기차표를 사려고 심양역에 갔다가 불현듯 그제날 문화학교시절의 동창생 한명을 만나게 됐다. 그날 내가 기차표를 사고 매표구에서 나와 뻐스를 타려는데 어떤 볶은 해바라기씨를 파는 한 남성이 나를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음을 감지할수 있었다. 나 또한 그가 어쩐지 낯이 익어보였다. 나는 뻐스를 타려다 말고 그 해바라기씨 장사군한테로 다가갔다. “여보세요. 해바라기씨 10전어치만 주시오.” 나는 워낙 평소에 군입질을 하는 습관이 없는지라 해바라기씨를 사서 까먹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와 말을 걸려면 해바라기씨를 사는척이라도 해야 했다. “저기 저…해방군동무 어딘가 얼굴이 익은데요?” 그는 해바라기씨를 팔 궁리는 하지 않고 나만 빤히 쳐다보는것이였다. 나는 그한테 담배 한가치를 권하며 물었다. “댁도 혹시 군대에 갔었지 않았어요?” “그랬는데…가만 있자. 어디서 봤더라? 옳지 해방군동무 혹시 무석에 있는 문화학교에 다니지 않았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손으로 무릎팍을 탁 쳤다. “그래그래 맞아요, 맞아. 그럼 우리 한 학교에 다녔구만그래.” 그랬다. 그는 무석에 있는 문화학교의 동창생이 틀림없었다. 다만 같은 반이 아니고 다른 반급이였기에 너무 익숙한 사이는 아니였을따름이였다. 헌데 그 친구를 볼라니 옷매무시나 얼굴모양새 같은것이 어딘가 말이 아니였다. 그래서 그의 생활사정을 물었더니 아니나 다를가 그는 우리 문화학교 동창생중 운이 몹시 나쁜 친구였다. 그에 따르면 문화학교를 떠난 뒤 복건에 가서 1년간 산굴을 파다가 병을 얻게 되여 제대하게 되였는데 후에 국가보조금이 나오긴 하지만 체력로동은 거의 할수 없고 보다싶이 해바라기씨같은것을 팔면서 생계를 유지한다는것이였다. 나는 어쩐지 그가 몹시 측은해났다. 그리고 문득 그에 비해 내가 매우 행운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도 그럴것이 나도 그들처럼 산굴이나 파는 전쟁준비공사장에나 갔더라면 어떻게 되였겠는가! 대학을 졸업하고 심양군구 공정병사령부에 배치받기는커녕 병에 거리거나 사고로 크게 다쳐 장애가 생기고 지어는 죽을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자 크나큰 공포가 온몸에 엄습해오는것 같았다. 한편 나는 혹시나 하여 순자의 행방을 아는가고 그 친구한테 물었다. 이미 약혼까지 한 마당에 아직도 그녀한테 미련이 남아있어서 그런것이 아니라 그냥 그녀의 행방이 궁금해서 물은것뿐이였다. 그러자 그는 생각밖으로 순자의 행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동창생에 따르면 당시 나와 갈라진 후 순자는 역시 복건지구에 나가 위생병으로 근무, 그러다가 아버지인 왕륙삼정위가 힘써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인지 어쨌든 상해군의대학에 입학했다고 한다. 당시 그 동창생을 통해 순자에 대해 들은건 거기까지뿐이다. 후에 그녀가 어디에서 사업에 참가했고 어떤 남자를 만나 결혼했으며 또 자녀는 몇이나 두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미지수이다. 당시 나는 그제날 나와 순자의 로맨스는 한낱 철부지 청춘남녀의 사랑유희에 불과하며 이젠 나의 앞날과 그녀의 장래를 위해서도 순자를 철저히 단념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됐다. 그랬다. 그것이 우리 서로에게 보다 유리할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와 나 모두 로년에 들어선 지금에 와서 순자가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가 어딘가 궁금하기도 하며 또한 순자의 로년생활이 행복하기를 기원하고 싶기도 하다. 2 1966년 중국의 대지에는 이른바 “전례없는 문화혁명”이 터졌다. 그것은 내가 심양군구에 배치받아서 1년이 채 되지 않아서였다. 나의 기억을 더듬으면 문화혁명초기 동북의 여러 지방에서는 대자보를 내붙이고 반란하고 투쟁하고 마스고 부시고 했지만 심양군구만은 지방의 문화혁명에 크게 참여하지 않은것 같았으며 우리는 각자가 자신이 맡은 업무에만 열중했다. 헌데 그러던중 북경으로부터 모원신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동북에 파견돼오면서부터 국방을 지켜야 할 해방군인 우리 심양군구도 이른바 “좌파지지”란 명목을 내걸고 문화대혁명이란 거센 소용돌이에 말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군구정치부 주임의 호출을 받게 되였다. 내가 정치부 사무실문을 열고 들어서자 정치부주임은 앉아있는 군인들한테 “이 동무가 바로 허길성이고 조선족동무요”라고 하며 소개하는것이였다. 알고 보니 그 군인들은 연변군분구에서 온 손님들로서 연변의 문화혁명에 조선족군인이 몹시 수요되기에 심양군구를 통해 조선족군인들을 물색하려던참이였다. 서로간의 인사를 나누고 그 군인들이 찾아온 의향이 밝혀지자 정치부 주임은 단도직입으로 “길성동무, 연변으로 나갈 생각은 없소”라고 묻는것이였다. “제가요?! 제가 연변에 가서 할일이 뭡니까?” “허허 할일이 많지. ‘좌파지지’사업도 해야 하고 한편으로는 또 전쟁준비로 파게 될 산굴들을 설계하기도 해야지 왜 할일이 없겠소? 연변이란 3국변경에 위치한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대라는것을 동무도 잘 알고 있지 않소?” “예,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달갑게 가겠습니다. 아니 명령에 복종하겠습니다.” “허허허…명령은 아니오. 그저 동무의 의향을 물었을 따름이였소.” 기실 나는 그 무슨 “좌파지지”보다는 고향이 연변이고 거기에 약혼녀가 있으며 또 오래잖으면 결혼도 해야 하겠기에 연변에 가겠는가 하는 제의를 달갑게 접수했다. 게다가 연변에서 많은 산굴을 파게 된다고 하니 내가 배운것을 직접 현장에서 활용할수 있어 호기심이 부쩍 동하기도 했다. 헌데 그 며칠뒤 연길에 도착해 형세를 알아보니 연변의 문화대혁명은 내지보다 한발 앞서고 있었다. 이미 대자보, 대변론 단계를 지나 물리적 충돌로 향해지는 단계에도 진입하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이거 잘못 오지 않았나 하며 나 자신의 선택에 대해 급기야 의심하게 되였다. 그도 그럴것이 나는 “좌파지지”의 명목을 내걸고 연변에 나왔는데 나의 둘째형님 허길룡씨는 “좌파”들과 투쟁하는 “보황파” 조직의 일원이였고 그것도 그 조직의 “골수분자”였던것이다. 나는 아주 첩첩한 모순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번민끝에 나는 일절 정치투쟁에는 말려들지 않고 조심스럽게 눈치를 봐가며 산굴설계도를 그리고 또 산굴을 파는 현장에나 뛰기로 작심하였다. 나는 진짜로 한동안 자기가 맡은 업무에만 열중했다. 밖에서는 당시 주당위서기 겸 주장이였던 주덕해동지를 타도하느냐 아니면 보호하느냐를 두고 각 조직들의 갈등과 대립이 몹시 선명했고 부대내부에서도 밖의 사태를 두고 그 대처방안을 연구하느라고 의론이 분분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의론같은건 귀등으로 흘려보내며 그저 설계도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연구하는 작업에만 골몰했다. 하지만 어떤 일은 자기의 뜻대로 되는것이 아니였다. 특히 명령복종을 천직으로 삼는 군인으로서는 더욱 그랬다. 당시 우리 부대는 연길교 동북쪽의 하북구역(지금의 백산호텔 위치)에 주둔하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볼일이 있어 외출했다가 금방 귀대하자 부대수장이 나를 호출한다는것이였다. 부대수장은 사무실에 들어선 나한테 앉으라는 말도 없이 나를 이상하게 눈여겨보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 연변대학에서 ‘8.27’조직의 모임이 있는데 허동무의 형님도 거기에 참가한다더군. 나 허동무를 생각해서 부탁하오. 허동무 자신을 위해서라도 오늘 가서 형님을 설복해 거기서 빠져나오고 또 그 조직에서 탈퇴하도록 하오. 이는 부탁이라면 부탁이지만 부대규정을 놓고 보면 명령이라고도 할수 있소.” 부대수장의 어조는 낮았지만 말그대로 명령이였고 위엄도 있었다. 그리고 나한테는 그 명령을 거절할 아무런 리유와 권리도 없었다. 하급은 상급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군사규률 때문이였다. 헌데 내가 과연 둘째형님을 설복해낼수 있을가? 그것은 형님을 설복하러 떠나는 나도 자신이 없었다. 그도그럴것이 형님은 연변일보사의 중견기자여서 이미 정치적 립장이 분명히 선데다 나 또한 그 시기 어느 조직이 원칙적이고 어느 조직이 비원칙적인가를 잘 식별할 능력을 구비하지 못했으며 도무지 뭐가뭔지 모르는 판이라 딱히 형님을 설복할 생각도 없었다. 3 부대수장의 명령을 거역할수 없어 주둔지 대문을 나온 나였으나 어떻게 둘째형님을 찾아가야 할지 방법이 잠시 신통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달통되지 않는 걸음을 걷게 되는지라 한동안 나는 그냥 기계적으로 움직이기만 했다. 그러다가 길을 건너 연변일보사를 바라보는 순간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 군복을 입은채(당시 내가 군복을 입은채로 갔더라면 그 후과는 상상할수조차 없었을것임)로 그냥 갈수가 없었고 둘째형님네 집이 생각났다. 그랬다. 형님네 집에 가서 옷을 바꿔입고 가는것이 가장 융통성이 있는 방법인것 같았다. 내가 신문사뒤에 있는 연변일보사 주택구에 가서 형님네 집의 문을 열자 마침 형수가 있었다. 형수는 나를 반겨맞았다. “형님은 어디 나갔어요?” “오늘 연변대학에서 무슨 집단모임이 있는 모양이예요. 그 량반 참 답답하우. 혁명을 혼자 하는지?…쯧쯧쯧.” 그러고보니 부대에서 입수한 정보가 맞는 모양이였다. 그도그럴것이 해방군에서의 정보수집은 그때 그 시기에도 아주 정확하고도 빨랐던것이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내가 심양에서 연변으로 나올 때 부대에서는 벌써 나의 부모정황과 형제관계에 대해 손금보듯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그중에는 연변일보사에서 기자로 근무하는 형님에 대한 정보도 들어있었다. “외부에서 특히 우리 부대에서도 형님에 대한 뒤조사가 심하답니다. 그러니 형수가 설복해 형님더러 그런 정치풍파에 개입하지 말도록 했으면 합니다.” “글쎄 말이우다. 헌데 그 고집을 누가 말린다우. 집안일엔 도끼등처럼 무딘 량반이 그런 일에는 왜 그리도 적극적인지…” 형수는 장판을 닦으며 푸념을 늘여놓았다. 그제야 나는 찾아온 사연을 말하고는 형님의 옷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형수는 제꺽 호응하며 “제발 생원이 좀 가서 그 량반을 설복해주우다” 라고 곱씹었다. 형수 역시 형님의 일에 대해 자못 근심되는 모양이였다. 형님의 옷을 입고나온 나는 곧추 연변대학으로 향했다. 내가 공원교 부근에 이르자 분위기는 자못 심각했다. 안전모를 쓰고 몽둥이를 든 사람들을 실은 트럭들이 가끔씩 오갔고 어느 3층집 창문에서는 누군가 아래에 삐라 뭉터기를 내리 살포하는것도 보이였다. 공원교로는 몇몇 할머니들이 건너다닐뿐 장정들은 별로 보이지도 않았다. 공원교를 건너자 걸려있는 표어들이 벌써 달랐다. “주덕해동지는 당의 우수한 아들이며 조선족의 훌륭한 간부이다!” “주덕해동지를 결사옹호한다!” “‘8.27’조직의 무산계급 혁명사령부를 목숨으로 보위하자!” …… 내가 연변대학 정문가에 이르자 대문에는 건장한 청년 4명이 버티고 서있으면서 들어가는 사람들을 검사하는것이였다. 나한테도 례외가 아니였다. “어디에서 오는 누구인데 누구를 찾아온거요?” “예, 룡정에서 오는 허길성이란 사람인데 연변일보사에 출근하는 허길룡이란 사람의 동생입니다. 오늘 형님이 연변대학에 와있다고 해서요.” “오, 허기자의 동생되는 동무로구만. 환영하오. 어서 들어가시오. 허기자는 지금 학교구락부에 있을거요.” “8.27”조직의 골수간부인 형님에 대해 그들도 잘 알고있는 모양이였다. 내가 연변대학 구락부쪽으로 다가가자 구락부안에서는 연신 구호소리가 터져나왔다.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을 끝까지 진행하자!” “위대한 령수 모주석 만세, 만세, 만만세!” “주덕해동지는 당의 우수한 간부이며 동지이다!” 구락부 출입문에는 또 지키는 사람 2명이 있었다. “누구를 찾소?” “연변일보에 출근하는 허길룡기자를 찾습니다. 전 그분의 동생입니다.” “그렇소? 자 그럼 여기서 기다리오. 나 들어가 확인해 보겠소.” 약 5분뒤 과연 둘째형님이 밖으로 나왔다. 형님은 나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면서 주위부터 살피는것이였다. “너… 너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왔니?” “형님, 사실은 우리 부대에서 형님을 설복해 ‘8.27’조직에서 나오라구 시켜서 왔소. 형님 아무래도 군대가 지지하는 조직에 참가하는것이 좋을것 같소.” “그래 군대에서 시켜서 왔구나. 그러나 넌 이곳의 일을 너무 모른다. 그러니 그냥 돌아가거라. 못들은것으로 하겠다. 넌 그냥 이런 일에 참견말고 네 할일에나 열심히 해라.” “그래도 형님…” “더 길게 말 말구 그냥 돌아가거라.” 나는 더 이상 형님을 설복할수 없었다. 형수의 말과 같이 형님은 고집이 셌으며 나 또한 강경하게 형님과 맞서고도 싶지 않았다. “어서 돌아가거라. 여긴 네가 오래있을 곳이 못된다. 네가 부대에서 온 사람이란걸 알면 크게 봉변을 당한다. 그리고 나한테도 좋지 않고…갈 때 조심해라.” 말을 마친 형님은 재차 주위를 살피는것이였다. 나는 형님과 길게 말을 나누지도 못하고 그냥 돌아서는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저으기 긴장하여 자주 뒤를 돌아보군 했다. 마치 누군가 따라와 방망이로 뒤통수를 치는것 같은 착각이 생겨서였다. 이런 나의 긴장감은 공원교를 건너서야 비로서 풀리였다. 나는 다시 형님네 집에 들려 옷을 군복으로 갈아입은 뒤 부대로 향했다. 주둔지로 돌아온 나는 거짓회보를 하는수밖에 없었다. 즉 연변대학으로 찾아갔으나 형님이 다른 곳으로 일보러 갔기에 만나보지 못했다고 둘러댔다. “그랬소? 동무의 말을 믿어도 되겠소?” 부대수장은 말은 그렇게 했으나 어딘가 나를 의심하는 눈치가 다분했다. 그때를 계기로 부대수장이 나한테 거리감을 두고있는 한편 감시를 붙이고있는것이 육감적으로 느낄수 있었다. 4 1966년 가을, 나는 부모님의 독촉에 못이겨 장가를 가게 되였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신부는 개산툰 화학섬유팔프공장 화험실의 송금자였다. 우리의 결혼식은 너무나도 소박하고 단조로왔다. 문화혁명시기라 낡은 풍속을 타파하고 무산계급의 새로운 풍속을 수립한다면서 나는 양복 대신 그냥 군복차림이였고 신부 송금자는 파마머리를 하지 못했고 너울도 쓸수가 없었다. 그리고 단독으로 자동차를 쓰지 못하고 기차를 타고 개산툰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는 다시 기차를 타고 룡정으로 와야 했다. 결혼한 뒤 우리는 신혼부부였지만 떨어져 살아야만 했다. 안해는 개산툰으로 돌아가 친정집에서 생활하면서 공장으로 출근해야 했고 나 또한 연길로 돌아와 부대생활을 계속 해야 했다. (연재 8)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4-13
  • 해외견문 시리즈 (3) 2년 730여일, 선원생활의 그 나날들
    ■ 김철균 한국사람들은배를 타는 사람들을 두고 거의 한결같이 “배놈”이라고 부른다. 육지의 친구들은 잘 모르겠지만 호화여객선이든작업선이든 여하튼 배를 1년 간이라도 타본 사람이들은 자기들이 그 무슨 으시댈만한 “배님”이 아니라아주 천한 “배놈”이란걸 곧바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배놈의세계도 다층차인 것만은 사실이다. 마구루배라는 “참치선”, “채낚이선”과 “트롤선” 등 작업선을 타는 선원들의 노동강도나 환경조건을보면 하늘아래 저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나 싶게 그들의 생활은 힘들고 지겹고 짜증난다. 그러나 산뜻하게정복을 차려입고 각 부서에 따라 자기의 직책만 수행하는 유람선이나 상선의 근무원들을 놓고 보면 누구나 다 부러워할 정도로 턱이 높고 신사다웠다. 하지만 그들 역시 돈에 얽매여 부모처자를 떠나서 생활해야만 하는 고독하고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바다의 짠물과 해풍에 푹 절어서 육지에서는 도무지 적응할 수 없는 기구한 사람들, 이 모든 것은 작업선의 잡부들이나 여객선의 1등 항해사나 모두 마찬가지였다. 똑같이 “배놈”이란 범주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럼 “배놈”의 세계란 과연 어떠한 것일가? “태풍호”에 있던 나날 우리가 제일먼저 승선한 선박은 한국 선일해운주식회사의 타카뽀트라고 부르는 견인선이었다. 우리가 라틴아메리카의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항에서 구소련선박 “프리오카츄샤”호에 편승하여 포클랜드군도 해상에 도착한 것은 1991년 3월 30일 새벽녘이었다. 그러니깐우리가 3월 18일에 연길을 떠났으니 꼭 13일만이었다. 그 때까지 우리가 침대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데갑자기 소련배의 엔징이 툭 꺼지더니 미구하여 갑판에서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슨 난리가났는나 하여 급기야 갑판으로 뛰쳐 나갔더니 소련배는 이미 파도가 잔잔한 어떤 해협에 들어와 있었고 수십척을 헤아리는 대중형 선박들이 앵카(닻)을 내리우고는 사처에 정박해 있었다. 이 때 누군가 “포클랜드에 다 왔다!”하고 소리질렀다. 순간 나의 가슴은 뭉클해났다. “드디어 올 곳으로 왔으니 2년이란 고역이 곧바로 시작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머리속이 착잡해났다. 그 때 수많은큰 선박들이 정박해있는 가운데 그 사이를 비집고 다니면서 다른 배와 자주 접선하는 작은 배 한척이 보이었는데 소련배에 함께 올랐던 한국선원들의말에 의하면 그 배는 1000톤도 될가 말가하다고 했다. 헌데 그 보잘것 없는 배에 우리가 오를 줄이야 뉘알았으랴. 그 배의 네임(이름)이 바로 “태풍호”였다. 그배는 위낙 부두에서 수만톤씩이나 되는 큰 선박들을 밀어주는데 쓰이게 만들어졌는데 한국 선일해운에서는 그 배를 개작하여 큰 선박들이 실어오는 물, 기름과 부식 그리고 탁송품같은 것을 받아서는 다른 어선에 공급하는데 써먹었다.그런대로 돈벌이는 꽤나 잘 된다고 했다. “배놈”의생활이 고되다더니 그다지도 고될 줄은 우리는 “태풍호”에 승선해서야 절감했다. 그 배의 시스템은 하루 24시간 줄곧 스템바이(대기상태)였는데일단 접선신호가 있기만 하면 밥을 먹다가도 뛰쳐 나가야 하고 잠을 자다가도 일어나야 했다. 그래도 전임선장 강××가 있을 때는 배접선시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필요 없으니 (접선시 선수와 선미에 7~8명이면 충분했는데 그 때 태풍호에는 중국선원과 한국선원 도합 20명도넘었음) A,B조로 나뉘여 6시간씩 교대하여 작업하라고 했기에그닥 고되지는 않았다. 헌데 후임 선장 김××가 부임되어 오면서부터 배 기강을 바로 잡는다면서 무작정그 것을 다시 고쳐 다 함께 대기상태에 있게 했다. 그러다 보니 접선작업을 할라치면 무리지어 나갔지만그저 서있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반면에 한시간도 시름놓고 깊은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자골치거리는 연이어 발생하였다. 무엇보다도먼저 목욕하기가 힘든 그 것이었다. “태풍호”에는 선장방에 딸린 욕실외 욕실이라고는 하나뿐이었는데 20여명이 작업하고 들어오면 욕실앞은 줄을 서야 했다. 거기에 한국선원들이먼저 목욕을 하고 나면 또 접선신호가 울리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갑판장은 우리가 목욕을 자주 하지 않는다면서밥을 먹다가도 수절을 팽개치었고 우리가 들어있는 침실에도 냄새가 난다면서 눈알을 굴려댔다. 우리라고왜 매일 목욕하고 옷을 세탁해 입기가 싫겠는가. 헌데 환경이 도무지 그 것을 허락지 않는데는 무슨 용빼는수가 있는가. 거기에 목욕을 하지 않으면 중국되놈, 돼지같은놈들, 하다가도 또한 물을 많이 쓴다고 자주 욕실에 자물통을 잠궈놓는 것도 갑판장이었다. 하여 우리와 갑판장사이에는 이런 사소한 일로 하여 자주 언쟁이 벌어졌다. 어느날 배에서는 작업이 뜸한 틈을 타서 술파티가 있었다. 술이 몇순배돌아 모두들 얼근히 되자 우리 연변선원들 중에서 나이가 비교적 많은 양일선씨가 갑판장과 걸고 드는 것이었다. “당신들은일본사람들한테서 과학적 관리와 방법을 배운 것이 아니라 사람을 괴롭히는 것부터 배웠다구요.” “너, 이 자식 뭘보고 하는 소리야?” “그래 50년전에 일본 쪽바리들이 당신들을 대하던 식으로 지금 당신들이 우릴 그렇게 천대하는 것이 아닌가요?!” “너 이놈, 뭐 어쩌고 어째? 어디라고 감히 말대꾸질이냐?” 하며 갑판장이 양일선씨의 멱살을 잡고 때리려던 찰나, 갑자기 배접선신호가울렸다. 하지만 일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바로 그날밤 자정이 퍽 지난 뒤 갑자기 울리는 비상벨소리에 우리는 또 접선하는가 해서 뎃기(갑판)로 뛰쳐 나왔다. 허나 접선은 아니고 갑판의 희미한 등불아래에는 갑판장이노기등등해 서있었다. “지난 밤술 처먹은 놈들 몽땅 나왔!” 이에 우리들태반이 모두 술을 마신지라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 속에는 멋을 모르고 나온 한국선원 박영재씨도 끼어들었다. “야 이 놈, 너도 중국 되놈이냐? 어서 침실로 들어가지 못할까?” 이어 갑판장은 양일선씨를 불러 내고는 한바탕 닦아세우는 것이었다. “야, 너 이 개새끼야! 예가 어딘줄 알고 불평 불만이야? 여기가 너희들 중국인줄 아느냐? 한국선박에서 한국사람의 술 처먹고왜 한국사람과 술주정 부리냐 말이야?” 이렇게 한동안일장훈계를 하고 난 갑판장은 우리 모두한테 두시간동안 제자리에 서있게 하는 벌을 주는 것이었다. 얼마나어이없는 일인가?! 설사 양일선씨가 한 말이 예의가 없고 과분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양일선씨혼자서 당해야 할 일이지 우리 중국조선족 선원 모두가 이런 기합을 당해야 하다니. 남극이 바라보이는포클랜드는 우리 연변과는 달리 해마다 이 곳의 봄일 때면 그곳은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겨울의 영하 20도를 오르 내리는 맵짠 날씨에 그것도 모두가 침대에서 겉옷만 입고 나온 몸으로 두시간동안이나기합을 당할라니 우리는 모두 동태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한국선원 김대학씨는 어선에 비하면 그러한 벌은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긴 어선에서는 중국선원들이 꾀를 부리거나 말썽을 일으키면 영하 30도 되는 어창에 한두시간씩 가두어 둔다고 하니까. 그 일이 있은후부터우리는 쩍하면 그와 비슷한 벌을 받군 하였다. 갑판장 먼저 밥술을 들어도 그렇고 그한테 “님”자를 붙이지않아도 그랬으며 한국사람을 조선사람이라 불러도 그랬다. 하지만 참는 것도 한계가 있고 곪으면 터지기 마련이다. 한번은 소련선박에서어선으로부터 냉동물고기를 받아싣게 되었는데 적사일군이 모자라 우리가 거기에 가서 돈벌이 삼아 작업하게 되었다. 헌데소련배에는 침실이 모자라 부득불 통로바닥에서 자야 한다기에 우리는 덮는 모포와 침대에 까는 해면자리를 가져가야 했다. 그래서 우리가 짐을 싸들고 소련선박으로 건너가려 할 때 술에 얼근히 취한 갑판장이 그것을 보더니 노발대발하는것이었다. “야, 이놈 개새끼들아! 좋은 자기의 돈벌이를 하러 가면서 왜 허락도 없이그걸 함부로 갖고 가는거야? 당장 방에 갔다두고 꺼져라.” 우리는 억이막혔다. 본선에서도 자기가 깔고 덮고 하던 것인데 그런 것마저 허락받아야 한단 말인가? 허나 빌붙는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허락없이 가져 가는 건 잘못 되었지만 소련배에 가서 어떻게 맨봉당에서 자겠느냐, 좀 봐달라 하고 사정하였다. 특히 그 때 나는 고질이었던 치질이도졌기에 더구나 찬 곳에서 잘 수가 없었다. 그랬건만 갑판장은 막무가내였다. 참는다고 봐줄 갑판장이 아니었다. 또한 잘못도 없이 계속 굽어들수도 없었다. 나중에 꺾어지고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시비는 캐고 봐야 했다. 나는 튕길듯이 후닥닥 일어나서는 선장방으로 찾아갔다. “우리가 뭐돈에 미쳐서 가는 줄 압니까?! 선박에서 배치하니 가며 또한 그 벌어오는 돈도 우리만이 가지는 것이아니고 전체 선원들이 똑같이 나누는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최저한도로 잠자리 조건만은 보장해야 할 것이아닙니까? 그래 이것도 같은 동포요, 피줄이요 하며 너스레를떨던 한국사람들의 양심입니까?” 이렇게 내가이치에 맞게 따지고 들자 선장도 뜻밖인 모양이었다. “보숭, 보숭(갑판장), 방송을 듣는 즉시 선장방에 올라와 보이소.” 헌데 선장의호출을 받고 올라온 갑판장은 자기는 그런 적이 없다고 한사코 나눕는 것이었다. “김군, 어찌된 영문이야?” 선장은 나를무섭게 쏘아 보았다. 이 때 쏘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기관장이 차마 볼 수 없었던지 일어나며 나를두둔해 주는 것이었다. “보숭, 당신 나살이나 처먹었다는게 이렇게 시치미를 뗄 수가 있어? 당신그러는걸 나도 봤단 말이야. 그래 이 교포친구가 터무니없이 당신을 헐뜯는다고 생각해? 당신 어쩜 그럴 수가 있는가 말이여.” 기관장의 그 말 한마디에시비는 대번에 갈라졌다. 선장은 진짜 노한 것 같았다. “회사본부에서는교포선원이라 해서 절대 차별시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어. 그런 회사정신이 당신같은 사람들 때문에엉망으로 되고 있단 말이야. 앞으로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솔선수범하이소. 알겠습니까?” “예, 예, 알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역시 선장앞에서는쩔쩔매여 급신거리는 갑판장이었다. 기관장, “태풍호”같은 분위기가 험악한 선박에도 좋은 사람은 있었다. 그는이전에도 우리와 가끔씩 팔씨름도 하고 우스개도 곧 잘 했다. 특히 우리의 봉급이 250달러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자 회사에서 너무한다, 너희들이 진짜욕본다, 너희들이 영국배나 스페인배로 도망가라. 거긴 일도힘들지 않고 급여도 더 많은가 하면 인간사이의 차별도 심하지 않다. 한국사람들의 본질을 몰라서 한국선박에다 올랐느냐. 그것이 바로 잘못됐다며 늘 우리한테 깨우쳐주군 했다. 나는그 말이 어쩐지 나쁘게는 들리지는 아니했다. 좋은 사람은 기관장 한분만이 아니였다. 남몰래 사과 한알이라도 우리들 손에 쥐여주는 주방장 김진해씨, 위험한일에는 우리를 제쳐놓고 자기가 나서는 나어린 제1갑판원 설복진씨 또한 소주 한병이라도 생기면 언제나나부터 찾군 하던 뚱보총각 박영재군, 참 마음씨만은 비단같은 친구였지. 기관장한테서들을라니 갑판장 역시 그닥 독한 양반은 아니라 했다. 듣는바에 의하면 한국선박은 사관선원과 부원선원으로나누는데 해양대학같은 전업을 졸업한 선원은 사관에 속하고 그런 학력이 없이 배를 탄 선원은 부원에 속했다. 그렇다면갑판장과 조기장, 주방장은 부원선원중에서 경력이 제일 긴 선원들로 그 직에 종사하는바 나이는 많지만 (선장보다도 나많은 이들이 많음) 급별과 봉급은 사관의 3항사나 3기사와 같기에 이런 이들의 불평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쩍하면 부하들과 역정을 내군 했는데 “태풍호” 갑판장도 그런 범주에 속했다. 또한 갑판장이 우리 중국선원들과 더욱 호통을 치는데는 그럴만한 다른 사연도 있었다. 그것인즉 갑판장의부친은 6.25 당시 전라도 어느 경찰서의 경찰관이었는데 국군과 연합하여 남로당 빨치산을 토벌할시 그들의기습을 당하는 가운데서 빨치산의 날창에 찍혀 죽었다고 한다. 하여 갑판장은 어릴 적부터 모친한테서 반공선전을들을대로 들은지라 공산당에 대해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원한을 우리한테서풀어서야 될말인가. 하여 갑판장이 우격다짐으로 우리를 억누르려 하였지만 나는 나대로 그한테 굽어들지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선장이나 기관장을 찾아가 시비를 캐군 하여 도리어 그가 골탕을 먹게 하군했다. 물론 한 인간을 고자질한다는 건 그다지 광채롭지 못한 일이긴 하지만 약자가 살고 버티려면 어쩔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힘겨룸을 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헌데 선일해운에서두번째로 큰 선박이라는 “코리안스타(KORAN STAR”호가 포클랜드해상에 들어오자 늘 대바른 소리를잘하던 내가 선참으로 그 배에 추천받아 승선할줄이야 뉘 알았으랴. “코리안스타”호와 그 사람들 “태풍호”에서배척받고 추방당해 다른 배로 전선한줄로만 알았던 것인데 그 “코리안스타”호가 그토록 멋지고 그 곳의 사람들 또한 그다지도 친절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못하였다. 그럼 갑판장의눈밖에 난 내가 어찌하여 제일 먼저 팔리여 그 멋진 선박에 승선하게 되였을까? 알고 보니 누가 어느배에 팔려 승선하는가는 근본 “태풍호”의 갑판장한테는 권리가 없었다. 갑판장이 다 뭔데 그런 권리까지다 있담. 순간 우리 일행중의 어떤 이들이 좋은 배에 팔리려고 갑판장한테 코밑치성을 하던 일들이 생각나(한 친구는 나의 웅담분까지 훔쳐서 갑판장한테 알랑방구를 먹였음)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진상은 이러이러했다. 이 때 “태풍호”와“코리안스타”호가 자주 접선하면서 물건을 주고 받는 사이와 우리가 “코리안스타”호에 가서 전재(转载)작업을 하는 동안에“코리안스타”호의 선장과 기관장이 몰래 우리 일행의 일거일동을 지켜봤는데 진작 누구를 받고 쓰는가 하는 의논까지 있은 모양이었다. 하다면 신장 162센치미터에 불과하고 체중도 55킬로그람 남짓한 내가 어떻게 그들의 눈에 들었을까? 듣는바에 의하면그때 “코리안스타”호에는 싸롱뽀이라고 일컫는 선원자리가 모자랐는데 직책은 주방장의 일을 거들어주는 외에도 선장,기관장의 방청소, 세탁 등을 맡아하는 것이었다. 하기에팔힘이 세고 우람진 사람보다 예의 바르고 깨끗하며 부지런한 사람이 적중했는데 거기에 내가 선정됐던 것이었다. “코리안스타”호에승선하고 보니 배도 현대화한 신조선이었거니와 우선 그 곳의 사람들이 맘에 들었으며 특히 선장이 더욱 좋았다. 한번은 선장인 정유식씨와나 사이에는 이런 대화가 오갔다. “여태껏 우리는공산권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눈도 퉁방울처럼 생기고 웃을줄도 모르며 싸움질만 일삼는 도깨비같이 생겼다고 여겨왔거든. 헌데 자네들을 보니까 군들도 역시 우리와 똑 같은 말을 하고 인정이 넘치는 사람들이었어. 참. 사상과 이념의 차이가 무섭단 말이야.” “하긴 그렀습니다. 저희들도 이전에는 썩고 병든 남조선이요. 미제국주의가 살판치고 거지들이득실거리는 곳이란 선전을 줄곧 받아 왔거든요. 그러다 최근에야 한국이란 어떤 나라인가를 알게 되었답니다.” “그랬었는가? 그럼 피차일반이었구만. 허허허…” 후에 내가정유식선장한테 “청년생활”, “천지(연변문학 전신)” 등 연변의 간행물에 실린 작품들과 한국 “선데이서울”에 발표된 “우리는 백두산에서 아리랑을 함께 불렀다”는수필을 보여 주었더니 그 때로부터 그는 나를 다른 눈길로 봐주었으며 늘 나한테 관심조로 이렇게 말해주군 했다. “어때 할만해? 힘들고 억울하지? 힘들고 억울하면 진급해야 돼. 우리도 다 자네들처럼 힘들고 억울한 가운데서 크며 일해 오늘의 선장, 기관장으로된거야.” 한편 선장의말에 의하면 부원선원 중에서 예하면 갑판장과 기관장은 갑판원, 기관원으로부터 조타수와 조기원을 거쳐그 직에까지 이르려면 보통 10년 이상 배를 타야 하지만 싸롱뽀이는 잘만 하면 바로 주방장으로(필자는 배타서 6개월만에 주방장으로 됐음) 진급한다는 것이었다. 하기에 나는 더욱 최선을 다해 근무했는바 그것은결코 선장한테 알랑방구나 먹이려는 아첨은 아니었다. “코리안스타”호에승선하고 보니 벌써 분위기가 “태풍호”와는 판판 달랐다. 우선 스켓줄부터 “태풍호”는 주로 남미주의포클랜드 해상에서 맴도는 작은 배였지만 “코리안스타”호는 비정기선이었고 본회사의 간판선박으로서 유럽을 비롯한 세계의 그 어느 곳에나 갈 수 있는배였기에 알짜 자질높은 선원들만 승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선장, 기관장으로부터 말단선원에 이르기까지 매일 수없이 만나도 “안녕하십니까?”, “수고들 해요”하는 인사말이 정답게 오갔으며 선원들 모두가 그 누구의 지시가 없어도 자기가 맡은 부서와 직책에따라 열심히 일하는 것이 곧 선박의 기풍이었다. 한편 선박의입출항시의 일체 작업은 군대규율에 못지 않았다. 그럴 때면 한밤중이고 가리지 않고 언제나 선장이 직접조타실에서 지휘하군 했는데 선장이 “우현 10도” 혹은 “좌현 20도”하면 제1조타수가 그것을 복창하며 키를 돌렸고 선수(船着)와 선미(船尾)의 선원들도기계를 잡은 이, 바줄을 준비하는 이들로 분공이 명확했다. 그러다가선장이 일단 “선수, 기계를 돌려 바줄을 감앗!” 하거나“선미, 바줄감기 스톱!”하면 선원들도 그것을 복창하며 긴장하게일했다. 그야말로 인간의 정도 흐르고 엄한 규율도 있는 선박다운 선박의 시스템이었는바 모든 것은 휴식이휴식답지 않고 작업이 작업같지 않은 “태풍”호와는 비교도 안되었다. 참, 같은 회사의 선박을 사이에 이런 현저한 차이가 존재하다니. 그래서“배놈”인 선원들마저 송출시면 회사나 선박을 되게 고른다고 했다. 그외 생활시스템도사람한테 편리하게 꾸며져 있었다. 침실마다 선원 한명씩 들어있게 되여 있고 단독 샤와실이 갖춰졌는가하면 사무용테이블, 전화, 스피카, 벽시계 등 시설에 이불도 여름용과 겨울용이 따로 있었고 거기에 에어콘까지 달리어 날씨변화에 따라 더운 공기와찬공기를 엇바꿔 보내 주었으며 비디오관람실도 사관과 부원이 따로따로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우에서도 언급했지만더 좋은것은 “코리안스타”호의 선원들이었다. 내가 혹간 직책에 따라 고급사관(선장, 기관장, 1항사,1기사 및 통신장)들의 빨래를 하거나 그들의 방을 청소해 줄라치면그들은 매달 두세번씩 10달러 정도의 팁을 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며 하다 못해 깡통맥주나 콜라같은것을몇개씩 안겨 주고야 시름을 놓군 했다. 또한 외출시 택시값은 물론 술값은 언제나 그들이 돌아가며 부담했고혹간 우리가 값을 치를라치면 그들은 매우 언잖아하면서 “자네들이 여기서 남긴 돈을 중국으로 가져가면 큰돈이 되잖아? 남겨갖고 돌아채 아파트 장만한 뒤 장사라도 하면서 잘 살아보라구, 하지만우린 이 돈을 남겨 한국으로 가봤자 아무것도 아니야. 건 그렇다치고 우리가 어떻게 급여가 적은 교포들한테이런 것까지 다 부담시키겠어?!”라고 하며 기어코 제지시키군 했다. 또한선장인 정유식씨는 다른 선박이나 선식회사 및 대리점의 손님들을 접대할 때마다 옆에서 시중을 드는 나를 소개하며 “이 친구는 연변에서 알아주는 소설가라구요. 이 친구가 배를 타는건 단지 돈벌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안계를 넓히기 위해서래요”라고 극구 춰주는 것이었다. 그럴적이면한낱 애숭이문학도인 나는 무척 송구스럽기도 했지만 그 말이 그토록 싫게 들리지는 않았다. 특히 1991년 9월 3일 저녁은나의 “배놈”생활에 있어서 영원히 기념할만한 저녁이기도 했다. 그날이 바로우리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39주년 기념일이었는데 이전에는 그저 예사롭게 보내던 자치주생일이 그날따라웬일인지 자꾸만 뜻깊어 보이고 떠나왔던 고향이 사무치게 그리워났다. 그래서 끝내 참지 못하고 내가 그것을정유식 선장한테 여쭈자 그는 대뜸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반색했다. “우리 한민족동포들이 중국에서까지 민족자치를 실시하며 산다니 참 장하다. 자네들이 그것을 잊지 않고 해외에서까지기념하려 하니 선장인 내가 어찌 보고만 있겠어?!” 그러고는 통신장이덕수씨한테 즉시 선원들을 모여놓고 술파티를 열라고 했다. 그날밤, 우리는 선장, 기관장, 통신장등 사람들이 부어주는 위스키를 돌아가며 받아마시고는 밤새껏 노래하고 춤추며 놀았다. 참, 어둠이 깔린 수평선우로 흰 물갈기를 날리며 미그러져 가는 우리네 선박 “코리안스타”호, 바로 그 일망무제한 바다와 외적선박에서 자치주생일을 쇤는 우리들, 우리가저가락장단을 두드려 대며 연변노래를 부르자 한국선원들은 연변에도 진짜 좋은 노래들이 많다면서 서로 배워달라는것이였다. 하여 우리가 “고향생각”, “동동타령” 등 노래를 그들한테 배워줄수밖에 없었다. 헌데 한수도 아니고 여러수를 어떻게 배워준담? 결국나는 팩시종이에 오선보를 긋고는 거기에 악보를 적기 시작했다. 그러자 고등학교시절에 음악공부를 좀 했다는 1항사 김형훈씨는 나한테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그저 볼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뿐만아니라 나는 또 내친 김에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는 선원 한명을 순식간에 속사해내여 나의 그림그리는 장끼도 펴보이어 그들 모두의 인기를 모으기도했다. 다른 한편“코리안스타호”의 선원들이 거의 하나같이 좋은 사람들이긴 하지만 녀자를 억수로 밝히는데는 다른 선박의 선원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그들 역시 “배놈”이란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듯 싶었다. 1991년 5월, “코리안스타”호가 포클랜드해상을 떠날 때 선원들한테는 모두특수작업비(전재비)가1800딸라씩 지급되었는데 이제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항에 입항하면 그 돈주머니를 풀어놓을 판이었다. 아니나다를가 배가 몬테비데오항에 입항하여 수속 절차를 밟자 선원들은 저녁밥을 먹기 바쁘게 샤와를 마치고는 정해둔세뇨리따(아가씨)한테 “입항신고”하러 간다며 앞다투어 외출길에나섰다. 그도 그럴것이야명주를 뿌려놓은듯 황홀한 몬테비데오의 잠들수 없는 밤, 거리마다 네온싸인이 반짝이고 간드러진 음악이잔잔히 흘러나오는 가운데 우리는 도처에서 아가씨들을 끼고 거리를 누비는 각종 피부를 가진 “배놈”들을 볼 수 있었다. 유흥업으로놓고 말하면 우루과이도 동남아와 마찬가지로 세계에서 이름난 곳이라 할수 있는 바 여자라면 오금을 못쓰는 한국선원들이 그 황홀한 세계를 지척에 두고배에서 외롭게 보낼리 만무했다. 사타구니 사이에 있는 그것이 노하여 저울대처럼 되는 판에. 배가 부두에정박해있는 사이, 그런 날은 계속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저녁, 본선의 한국선원 노주태씨가 나체쇼를 벌리는 위스키바에서 로시오라는 본지아가씨(몬테비데오에선 섹시하기로 이름난 창녀임)와 흥이 도도하게 술을 마시고있는데갑자기 웬 거친 손이 나타나 아가씨를 잡아일으켰다. 엉겁결에 쳐다보니 대만선원이었다. 이에 노주태씨 역시 술을 얼근히 잘된지라 네가 뭔데 하며 걸고 들었다. 이렇게 서로밀고 닥치고 하는 통에 그 안에 있던 한국선원과 대만선원들이 다 모여들면서 삽시에 두 파벌로 갈라졌다. 당장무리싸움이 벌어질 그 일촉일발의 시각에 마침 본선의 연변선원인 이용석씨가 조해사업에 나섰다. 알고 본즉그 로시오란 아가씨를 잡아일으킨 대만선원은 포클랜드해상에서 근무하는 채낚이(오징어낚시선)선의 선장이었는데 입항하든 안하든 그 아가씨한테 매달 미화 1000달러씩주기로 하고는 일잔 입항해서 찾아만 오면 그 아가씨가 모든 것을 제쳐놓고 그한테 “봉사”해야 한다는 “계약”까지 맺았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용석씨는 본선에도 중국선원 몇명 잘 되는데 중국사람들끼리 요만한 오해 때문에 싸우기까지는 할 수는없지 않느냐고 해석해서야 대만선원들도 그 말에 동감을 표시하며 물러가는 것이었다. 물론 그 아가씨를대만선장한테 양도하는 걸로 일단은 아퀴를 짓고 참 창녀 한명 때문에 무리싸움을 할번하다니 사내대장부로서의 제일 큰 수치가 아마 그런 것이 아닌가싶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통신장 이덕수씨가 정해둔 파트너를제쳐놓고 다른 아가씨를 끼고 술을 마시다가 하마트면 두 아가씨가 맞붙어 싸우게 할번 한 일, 2기사서춘철씨가 아가씨와 함께 호텔침대에까지 올랐지만 술을 억수로 마신데서 일을 성사하지도 못한 채 잠에 곯아떨어진데서 그 아가씨가 온밤 뜬눈으로 새게한 어처구니 없는 일, 하긴 고되고 짜증난 바다생활일에 곁에 녀자가 있으면 그 스트레스를 몽땅 줄 수있기에 “배놈”들이 여자를 찾게 된다는 건 남자로서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한국선원들의말마따나 좆빠지게 번돈을 며칠 사이에 몽땅 창녀들한테 처넣는다는건 한국선원 외에는 거의 없을 정도라니 한심하기도 했다. 빠지면 웬간한 기업도 삼킨다는 그 구멍이 어떤 구멍인데… 또한 남미의아가씨건 동남아나 심지어 아프리카아가씨건 모두가 한국선원이라면 미칠 정도로 좋아한다는데 그것은 결코 한국선원들이 멎져서가 아니었다. 그만큼 돈을 잘 쓰니 창녀들의 사냥물로 되었을뿐이다. 또 다른 한편한국선원들도 우리 연변의 조선족들과 마찬가지로 똘똘 뭉쳐 합심이 되는데는 확실히 타국선원들보다 못했다. 싸움이벌어져도 그랬다. 무리싸움만 붙으면 한국사람들중에는 눈치를 보며 살살 피해 도망가는 이가 많았다. 그 실례로 작업선과 화물선이 많이 정박하는 몬테비데오에서는 한국선원과 대만선원들 사이에 충돌이 자주 생겼는데그럴 적마다 한국선원들의 수는 싸움이 지속됨에 따라 줄어드는 반면 대만선원들의 수는 괴상한 휘파람소리만 나면 항구구역의 골목골목에서 뛰쳐나와 점점많아진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선원들도 자기들이 남과 1대 1로 붙으면 그 누구도 남한테 지지 않지만 일단 10대 10일 경우면 틀림없이 패한다고 승인했다. 1대 1과 10대 10의 정반대되는결과, 얼마나 묘한 비유이며 얼마나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가! “카나리아립퍼”호는 노가다배? 내가 선원으로근무하면서 제일 마지막 반년가량 탄 배는 역시 선원해운의 “카나리라립퍼(KANALIA LiPo)”호였다. 1992년 10월 23일, “코리안스타”호가네델란드 로톨담항구에서 소련인들한테 팔리자 우리는 2년이란 선박근무계약기한이 차지 않았기에 비행기로스페인 라스팔마스에서 약 40일간 늘어지게 놀다가 그해 12월 12일에 소련선박에 편승, 대서양을 항행하다가 아프리카해상에서 본회사의 “카나리아립퍼”호에 전선(转船)근무하게 됐다. 그 배의 주요한스켓줄은 라스팔마스와 아프리카를 오고 가는 것이었는데 그 배에 승선하고보니 눈이 감길 지경이었다. 만든지 30년도 넘는다는 배는 외곽부터 원체 고물같아서 “똥배”란 말을 들을만 한데다 선원들 역시 꾀죄죄한 모양이 마치모두들 마약중독자(실제로 대마초나 마리화나 같은 마약복용자선원도 몇명 있었음)같은 상을 하고 있었다. 하긴 듣는바에 의하면 회사에서도 아프리카부근에서 근무하는 선박에는 선장으로부터 선원에 이르기까지 정선하지 않고 되는대로 보낸다고 말했다. 사람이란악렬한 환경에서 살다 좋은 환경으로 전환되면 몰라도 좋은 환결 즉 “코리안스타”호에서 근무하다가 “카나리아립퍼”호로 바꾸니 기분이 좋을리 만무했다. 한편 선원들모두가 게을렀다. 배가 일단 아프리카 나라들에 입항하여 기름을 받을 때면 편안하기를 기름양과 질을 체크하는당직외 모두가 처박혀 자기가 일쑤였는데 밤낮으로 연속 잠이 올리가 없었다. 그러니 선원들 모두가 먹고마실 궁리만 하였다. 얼마나 좋은 배인가! 하지만 당시의주방장인 나한테는 그것이 도리어 고역으로 되였다. 선원들은 먹고마시며 놀다가 자고 한참 실컷 잔 뒤또 먹고 마시고 해서 좋았겠으나 나만은 그 음식들을 만들어 차려주고 설거지하느라고 죽을 지경이었다. 그외아프리카란 동네는 선박으로 올라오는 부식품들이 깨끗이 포장되지 못한 건 물론 종자탓인지 모두 개량종이 아니고 토종이어서 예하면 마늘은 쥐잇빨 같았고배추 역시 시래기같은데다 흙모래가 많아 그것을 다듬노라면 품이 많이 들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그 무슨파티까지 많으니 어찌 짜증나지 않겠는가. 특히 배가 나이지리아의 와리항이나 위스키포항 및 베네트항 같은곳에 입항할 때면 본선 선원들과 깜둥이 아가씨까지 합쳐 보통 30~40명씩 한곳에 어울려 처먹군 했는데매일밤 개나 칠면조같은 것을 잡아놓고 술파티를 벌이기에 하루 네끼씩 음식을 만들리가 일쑤였으며 나는 늘 잠이 모자라군 했다. 그 지긋지긋한 먹고 마시는 배기풍, 선원들의 부식비를 아껴 올라온부식량에 따라 계획적으로 살림살이를 해야만 하는 내가 그것을 좀 제지시키려 해도 선장부터 그토록 먹고 마시기에 악돌이고서야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선장이야기가나왔으니 말이지 그와 함께 근무하는 사이에 그야말로 울지도 웃지도 못할 에피소트들이 많기도 했다. 선박이 일단아프리카로 들어가면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중국에서는 흔해빠진 두부라 할 수 있었다. 하여 배가한국선식점이 많은 라스팔마스에 입항해야 두부란 것을 맛볼 수 있었다. 한번은 라스팔마스에서 본선이 두부딱 한박스(두부란 오래동안 보관할 수 없기에)만 올렸는데선장이 지시하기를 그것을 매일 아침 한모씩 썰어 된장국에 넣으라는 것이었다. 참, 나도 필경은 인간인지라 두부가 긴장할수록 왜 고향서 모두부를 덮혀놓고 배갈을 마시던 생각이 그토록 나던지? 그래서 하루는 야밤중에 몰래 모두부 두모를 덮혀놓고는 중국선원인 양일선씨를 침실로 불러들였다. 그러고는 금방 위스키병을 터쳤는데 문득 선장이 문을 노크(선장은밤중에 속이 촐촐할적마다 주방장인 나를 찾았음)하는 것이었다. 선장이니문을 열어주지 않을 수 없어 들어오게 했더니 두부를 본 선장은 대뜸 눈알부터 굴리였다. “너, 이 자식들 하긴 잘한다. 선장도 먹지 못하는 두부를 너희들이 처먹어?! 왜 시말서라도 쓰고 싶어그래, 이 놈팽이들!” 하지만 말을그렇게 해도 선장 역시 군침을 꼴깍 넘기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찮아도 진작 선장님을모실 타산이었습니다”, “선장님, 술 한잔 드십시요”하고알랑방구를 먹였더니 그것을 마다할 선장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공짜라면 양재물이라도 마실 양반이 그 귀한두부안주를 물리칠손가. 선장은 연해연방 “그 두부 참 맛좋네. 자, 캪틴(선장)앞이라 주저말고어서 드이소”라고 하며 우리가 아까와서 조금씩 뜯어먹는 두부를 숟가락으로 뭉텅뭉텅 떠서는 자기 입에 처넣는 것이었다. 두부 두모는 삽시에 거덜이 났다. 그러자 선장은 또 두부를 덮혀오라고호령했다. “주방장, 아까와할 것 하나도 없어요. 내 이 캪틴이 두부 좀 먹는 걸로 어느간이 큰 놈이 감히 말해.” 선장을 놓고말할라치면 종래로 호주머니에 담배를 넣고 다니는 법이 없었다. 그러다가 누가 담배를 피우면 “그 담배한가치 주이소”라고 했다가 상대가 담배곽을 넘기면 “뭐, 한가치면 되는데” 하면서도 능청스럽게 그것을그채로 호주머니에 넣고가기가 일쑤였다. 아마 1993년 초쯤으로 기억된다. 그때 본선은 아프리카에서 오래동안 떠돌아다니다가금방 라스팔마스로 선수를 돌렸는데 당시 선내상황은 부식은 물론 술과 담배마저 거덜이 날 지경이었고 밥은 나이제리아에서 올린 밭벼쌀(알량미)로 겨우 지어먹으며 항행했다.헌데 방정맞게도 항행도중 기관실의 발전기가 고장났는데 좀처럼 수리되지 않았다. 선내는 밤마다까막나라였고 선원들은 선수와 선미에 우등불을 지펴 타선의 항행에 신호를 보내었으며 밥조차 프로팬가스로 겨우 지어먹는 형편이었다. 그러다보니 담배는 진작 꽁초까지 주어서 피우는 신세였다. 헌데 파도세찬 포클랜드바다같으면 진작 배가 파도에 뒤집혀질 상황에 처했음에도 공짜를 좋아하는 선장의 악습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던 하루는 내가 선원들을 골려줄 심산으로 빈 “말보로”표 담배곽을 반팔샤쯔의 웃호주머니에 넣고 갑판으로나갔더니 선원들이 욱하고 몰려들어 한가치씩만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선장이 선손을 써서 갑채로 그것을채갔다. 헌데 맹랑하기로 그것은 빈갑이었다. 그통에 나는선장한테서 볼기짝 한매를 얼얼해나게 얻어맞았다.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담배가 있는 곽이든 빈곽이든 넣고 다니는건 나의 자유이고 또한 내가 뭐 선장한테 그걸 주자고나 했던가. 하지만 육지와 동떨어진 해상에서 그것도 선장이면 왕이고 법보다 주먹과 계급이 중요한 곳에 선장이 돼지라면 돼지이고선장이 죽으라면 죽는 흉내를 내야 하며 선장의 한마디면 내일이라도 보따리를 싸들고 강제귀국을 당하는 판에 억울한대로 참아야 했다. 억울한대로참고 열심히 돈벌이하다가 만기되어 귀국한 다음 내노라 하며 활개치면서 살고 싶었으니 말이다. 특히 나한테는하마터면 강제귀국을 당할 침통한 교훈까지 있었으니 말이다. 그것은 그때로부터 약 한달 전의 일이었다. 하루는 아프리카 해상에서 떠돌던 본선이 남미쪽에서 온 “사랑”호와접선했다. 그 때 나는 그 배에 친구인 최용식씨가 있기에 그한테로 건너가서 함께 술잔을 나누게 됐다. 그 때 나는 “카나리아핍퍼”호가 어떤 배란것을 알려주고 나서 주방장인 나의 고충을 토로하면서 어떤 배든 주방장끼리서로 바꾸어 갖고 근무환경을 좀 개변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동석했던 나의 주방조리원 녀석이 글쎄 그 후에 모든것을 고해바칠줄이야. 그런데서 나는 본선 선원들의 흉을 봤다는 이유로 기관장과 조기장을 비롯한한국선원들한테서 실컷 얻어맞고도 주방의 국자로 조기장을 때려 얼굴에 흉터를 만들어놓은데서 선장의 제의하에 강제귀국처분을 받게 됐다. 후에 알고 보니 나의 주방조리원 녀석이 그 주방장자리와 주방장이 매달 더 받는 수당금 100달러가 탐나서 중국선원끼리 금이 가는 그 따위 짓을 했던 것이다. 괘씸한녀석, 하지만 그따위 강제귀국결정에 순순히 두손을 들 내가 아니었다. 나는 일단은사건의 전부를 써서 보관한 뒤 그날 밤부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물론 그 때까지도 주방창고의 열쇠가나의 손에 있었던만큼 남몰래 사전에 숱한 라면과 빵과 과일 및 음료수따위를 침대밑에 감춰둔 뒤 그랬으니 단식은 무슨 말라빠진 단식, 그러자 과연 바빠난 것은 선장이었다. 선박이 항구에 입항하여 나를강제하선 시키려면 일주일은 더 있어야 할텐데 내가 단식에 들어 갔으니 인명사고라도 나면 도리어 강제소환될건 선장(회사준칙에 의하면 일단 선박에서 인명사고가 나면 사고원인을 밝힌 뒤면 선장의 책임범위내의 사고라면 선장의 강제소환은 물론 몇년간의 본회사 선장자격을취소함)이었으니 말이다. 하기에 그 이튿날부터 갓 주방장으로진급한 녀석이 선장의 령을 받고 일은 하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밥만은 먹어달라고 끼니마다 나의 침실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허나 거기에 넘어갈 나인가. 너 이 놈들 나를 알기를 뭘로 아는건고? 나는 방문을 기어코 열어주지를 아니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통신장, 그 다음에는 1항사…그러다가끝내 선장이 내 방문앞에 다가섰던 것이다. “여보게 김군, 이런 일에 생명까지 내걸 필요는 없잖아. 우리도 교포들이 강제귀국을당하면 어떻게 된다는걸. 다 잘 알고 있어요. 김군이나 나이 캡틴이나 모두 문화인이니까 이번 일을 없었던 걸로 치고 다시 손잡고 잘해 봅시다.” 선장까지 이렇게나오니 더는 버틸 필요가 없었다. 후에 알고 보니 회사의 압력도 있었거니와 갓 진급한 주방장 녀석의밥하는 솜씨가 영 말이 아니어서 선원들이 늘 제때에 식사하지 못했는가 하면 선밥 혹은 죽밥을 먹어 불평이 많았기에 선장도 부득불 이 중국교포선원한테두손을 든 모양이었다. 이렇게 소위단식이란 허울밑에 밀렸던 잠까지 실컷 자면서도 끝내 “승리”하여 다시 주방장자리를 되찾은 나였건만 그런 방법은 계속 취할 것이 못된다는 걸 나는잘 알고 있었다. 선장 역시자존심이 있는 인간이니 악이 나면 나중엔 무슨 짓인들 다 할 수 있겠으니 말이다. ……화제는 다시 돌아와 그렇게 해상에서 하루하루를 표류하던 중의 어느 날 본선은 근처로 항행하는 러시아 선박(그 때는 소련이 해체된 뒤)에 구조신호를 보낸 뒤 그들과 접선해서는약간의 부식을 보충받게 되었다. 접선작업이 끝나 부식을 넘겨받은 뒤 미구하여 모두들 한쉼 쉬려는데 불현듯러시아선박의 선교에는 선글라스를 낀 한 어여쁜 금발머리아가씨가 나타났다. 치마바람을 날리며 배전에 기대선그 모습, 툭 튀어 나올듯한 가슴과 둥근 히프, 첫눈에 벌써매우 성감이 짙은 여인임이 확연했다. 아, 사막의 오아시스런가. 얼마나 보고 싶었던 아가씨었더냐, 더군다나 아프리카에서는 보기 힘든젊고 아름다운 백인아가씨, 그러자 그 미끼를 놓칠 선장 강아무깨가 아니었다. 선장이 미화 100달러짜리 한장을 흔들어 보이자 그녀도 대뜸 반응을보이며 건너 오라고 손짓하는 것이었다. 헌데 전기가 없는 본선인지라 크레인(기중기)을 돌릴수 없었고 러시아 선박에서도 곯려 주느라고 그러는지그 때만은 도와주지 않았다. 선장은 자그마한 체구에 빼빼 마른 사내였는데 여러 선원들이 극구 말리는데도불구하고 배와 배틀 연결하는 바줄에 매달렸다. 하건만 에익, 세상에어디에 이런 망신이다 있담, 글쎄 술과 여자를 되게 밝히는 선장한테 팔다리힘만은 없었던지 그는 인차첨범하고 바다물속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본선의 선원들은 구명대를 던져준다 줄사다리를 드리워 준다하며 선내가 들썽하게 법석댔지만 러시아선원들은 웃음보를 터뜨리며 손벽을 쳐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느 곁에 카메라까지 들고 나온 이까지 다 있었다. 선박에서의선장은 일개 사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선박의 형상이고 존엄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선장은 선박의 아버지라는설도 있다. 헌데 선박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선장이 그러할진대 그 배의 분위기를 구태어 더 설명해 무엇하랴. 그리고 선원들 거개가 여자를 좋아하듯이 말이다. 선장도 필경육욕을 가진 사내인만큼 그 예외일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선박들에서는 선장이 직접 여자들 찾아헤매는실례가 극히 적었다. 예하면 1991년 6월말 내가 승선했던 “코리안스타”호가 태국의 방콕에 입항했을 때 아가씨 60여명이배에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선장은 3층에 있는 자기의 침실에서 근본 내려오지를 않았다. 그러다가 1항사가 이쁜 여자 한명을 물색해서 보내니 선장 역시 모르는척하며그날밤을 즐겼던 것이다. 하다면 선장이란 그만한 무게가 있어야 할텐데 “카나리아립퍼”호의 선장한테서는도무지 그런 무게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가씨들이 배에 오르면 자기가 나서서 이쁜 여자를 골라 챙긴다거나아가씨와 관계할 때 쓴 콤돔을 아무곳에나 나뒹굴게 한다거나 지어는 빵과 커피를 가져다 달라는 아가씨의 심부름을 자기가 직접 한다거나 하는 행위를보면 저 사람 머리가 돌아도 크게 돌고 있다는 느낌부터 들군 했다. 특히 본선의 발전기가 고장나 기관장과그 부하들이 플래시(전지불)를 켜들고 밤낮으로 땀을 흘리며일하는 그 비상시기에 그랬으니 선장으로는 크게 실망가는 인간임에 분명했다. 글쎄 지나치게 나쁜 사람이라고는할 수 없었으나 여하튼 선장감은 아니었다. “배놈”생활의 그제날을 추억하며 배를 여러번타보노라면 참 육지에서는 도무지 믿기 힘든 희한한 일도 많이 겪게 되고 따라서 배울 것도 많으며 또한 회사별로,선박별로 제각각 자기 선박으로서의 특점이 따로 있었다. “태풍호”을 타고 보면 일이 힘든반면에 돈벌이가 좋았고 “코리안스타”호를 타고 보면 돈벌이는 그닥지 않지만 일이 신사스럽고 세계 각지를 메주밟듯 주름잡기에 안계를 넓힐 수 있었으며“카나리아립퍼”호는 돈벌이나 구경할거나 다 그닥잖지만 먹고마시고 오입질하기는 천하제일이라 할만치 좋은 배였다. 작업선 즉우리가 말하는 어선일 경우도 마찬가지라 한다. 어선이란 일단 출항만 하면 보통 반년 이상씩 부두로 입항하지않는 것이 특징이고 생활 또한 고되기가 말이 아니란다. 어선을 타는 “배놈”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그들의손바닥에 썩살이 배겨 곰의 발처럼 두꺼워 주먹마저 쥘수 없게 된 것은 노상 그물을 당기는 작업만 하는데서 그렇게 된 것이고 그 작업의 힘든 정도를말한다면 그물을 당기느라 기운을 쓸적마다 뒤가 풀리어 방구가 절주있게 뿡뿡 하고 나온다 했다. 또한마구로배(참치선)에 승선한 선원들은 맞아대기를 하루 세끼밥먹듯 하는데 그것은 단지 선원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작업시간에 조는 선원들로 하여금 전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서란다. 그도그럴 것이 어떤 경우엔 2~3일씩 눈한번 붙히지 못하고 연속작업을들이대니 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외 침실안에 다락을 매고 한 침실에 10여명씩 처넣는 거주환경과 남새맛을 보려 해도 어쩌다 물고기를 받으러 오는 냉동운반선들이 날라줘야 가능한 식사조건 및 세상과 동떨어져사는외로운 생활,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어선을 타려 하는지? 알고보니어선을 타는 사람들의 속궁리 역시 따로 있었다. 우선 먼바다에 나가 오래있으면 여자가 없기에 돈쓸 곳이없어 돈이 모아지고(기실 일이 너무 고되기에 여자생각이 날리가 없고 그들의 제일 큰 소원은 잠이라도한번 싫컷 자보는 것임), 다음으로 한국선원들을 놓고 보면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경우엔 기본급여외에도많은 조합금(상여금)이란것이 붙는데 그 액수가 흔히 급여를초과하거나 그것의 몇배 될 때가 많기에 1~2년만 배를 타서 돈을 모으면 수수한 아파트 한채는 장만할수 있다 하니까 말이다. 헌데 중국선원들한테는 기본급여만 있고 조합금이 일절 없다고 하니 어쩐지 그것이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것 같았다. 그 것마저 없으니 중국선원들은 늘 물고기가 적게 잡히기를 바랐으며혹간 많이 잡히면 몰래 도로 그것을 바다에 처넣는다고 했다. 왜 그러질 않겠는가. 고기가 많이잡혀 보았자 한국선원들한테만이 좋을 뿐이지 그것을 정선하고 포장하고 냉동하면서 이득없이 고생만 죽게 하니 말이다.그러니 중국선원들이 몸을 아끼고 말썽을 부린다는 책망만을 하지 말고 그네들한테도 일정한 조합금제도를 실시하는것이 현명하고 바람직한처사라고 보아진다. 그것은 돈을 벌려는 중국선원들의 이익에는 물론 물고기를 많이 잡아 작업효율을 올리려는회사리익과도 관계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참, 돈 때문에 인간등급을매기는 제도,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독종이 인간이고 인간사회를 속세라고 하는 걸가? 총적으로 보아유람선을 타든 화물선이나 어선을 타든간에 그 승선한 선원의 흥취와 목적이 따로 있는 것이다. 마치 육지에서의탄광일이 위험하고 힘들어서 돈버는 재미에 일하는 탄부도 그렇고 나처럼 풋돈벌이도 되지 않는 글쟁이는 그 명예와 애착 때문에 머리를 쓰고 글을 만드는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육지의그 어떤 작업보다 “배놈”의 직업은 불쌍한 것이다. 하긴 옛날 한국이 못살 때는 “배놈”들도 그야말로멋진 마도로스답게 “배님”처럼 떠받들렸고 시집오려는 처녀들이 줄을 쳤다고 했으나 지금은 영 딴 세상으로 되었다.그 “배님”이 언제부터 “배놈”으로 됐는지는 알바 없으나 목하 한국에서는 선원이라 하면 “배놈, 배놈”하며시집오자는 여자가 거의 없는 상황이다. 하여 한국선원들한테는 장가 못간 남자들이 수두룩했는데 어떤 이들은아예 장가가는 것을 포기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하긴 장가들어 봤자 여자는 인차 도망갈 것이고 설사 도망가지않더라도 시름을 놓지 못하는 것이었다. 또한 “배놈”한테 시집오려는 여자가 있더라도 그 여자들의 자질과차원은 어느 정도이겠는가. 내가 승선했던 선박들에도 장가 못간 선원들이 수두룩했는데 그들 거개가 30대를 벗어난 상황이었다. 그들은 귀국할 때마다 임시여자를 데리고 몇달씩 동거하다가는 돈잎이떨어지면 또 다시 배타러 나오는데 그렇다고 배타기를 포기하고 육지에 발을 붙이려 해도 장기간의 “배놈”생활에 육지의 실정을 알지 못하기에 도무지적응할수 없었던 것이다. 개인사업을 벌려도 용두사미처럼 실패하기가 일쑤이고 많은 회사들에서도 “배놈”은쌍놈이라는 눈치를 보이며 잘 받아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선박을 비롯한 많은 선박들마다 다시는배타지 않겠다고 맹세를 30번도 더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배를 30년도 더 탔다는 해석으로 되는것이 아니겠는가. 여하튼 억울한 일이다. 아무리 “배놈”이라지만 마누라도 없이 육지를 떠나 한평생 바다생활만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배놈”은 불쌍하다. 우리 모두가밥먹을 때 농민형제들을 잊지 말듯이 물고기를 맛볼 때마다 일망무제한 바다에서 신고하는 “배놈”형제들을 다문 한번이라도 머리속에 떠올렸으면 하는마음과 기대이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4-11
  • 오묘한 세계 대백과(4) 태양계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태양계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자고로 태양계의 기원에 관한 문제를 두고 사람들은 많은 가설을제기했었다. 그 중 영향력이 비교적 큰 것이 성운설(星云说)과 재변설(灾变说) 등이다. 성운설은 전반 태양계의 물질은 모두 동일한 원시성운으로 형성된 것으로서 성운의 중심부분이 태양으로 형성됐고성운의 외곽부분이 행성으로 형성됐다고 인정하고 있다. 다음 재변설은 태양이 먼저 형성되고 후에 항성하나가 태양의 신변을 스쳐지나면서 태양의 일부분을 뜯어 냈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것이 곧 태양이받은 조력의 작용으로 표면으로부터 뿜어 나온 강한 기류가 생겼는데 그 기류가 응고된 후 행성으로 형성됐다는것이다. 목전 태양계의 탄생에 관해 다른 부획설(浮获说)도 있다. 태양이어느 한 시기에 기체먼지로 쌓인 성운을 지날 때 성운중의 물질로 태양을 태우면서 도는 성운판을 만들었으며 이 것이 점차 각개 항성과 기타의 위성들을만들었다고도 한다. 태양의 빛과 열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류를 놓고 말하면 찬란한 태양이 의심할 바 없이 전반 우주에서가장 중요한 천체에 속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태양의 질량은 약1989×1030킬로그람로서 지구의 33만여배에 달한다. 태양의 물질은 수소(71% 점함)와 헬리움(26% 점함) 등경원소로 구성돼 있다. 이러한 경원소를 업신 여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극도로 높은 높은 태양중심의 온도와 압력의 조건에서 격열한 핵취변반응(核聚变反应)을 진행하면서 대량의 빛과 열을 복사해 낸다. 태양은 이러한 빛과열을 산생하기 위해 초당 약 400만톤의 물질을 소모하지만 이는 전반 태양질량으로 놓고 말하면 아주작고도 미약한것이다. 빛과 열을 발산하는 외 태양은 또 평균 초당350킬로메터에 달하는 속도로 전기를 담고 있는 미립류(微粒流)를 내뿜는데 이를 태양풍이라고 한다. 태양에 자라나는 “깃털”같은 것은? 태양의 직경은 달에 비해 약 400배 가량 크며 태양과 우리의 거리 또한 우리와 달과의 거리보다 400배가멀다. 이는 기묘한 교합으로 되며 사람들로 하여금 지구에서 보는 태양과 달의 크기가 비슷해 보이게 한다. 이리하여 지구에서 일식현상이 나타날 때면 달은 완전히 태양의 “얼굴”을 가리게 된다. 그리고 평소에 태양의 빛아래 숨겨져 있던 태양의 대기층(일명: 일면)이 이 때면 그 것의 “노산의 진면모”를 드러내게 된다. 일면현상은 태양의 검은 원의 주기발생에 따라 변화하기도 한다. 또한제일 마지막 시기의 일면현상은 떨기 떨기의 “깃털”처럼 태양의 양극에 나타난다. 만약 우리가 일식현상을제대로 볼 수 있다면 태양에서 자라나는 “깃털”같은 것을 볼수가 있을것이다. 2006년 미국의 연구일군들은 계산기모형 하나를 만들어놓고 전례없는정확도로 일주일간 태양에서 나타나는 일면의 활동정황을 예측, 그뒤 어느 한차례의 일식중 실제로 관측했던결과가 계산기모형으로 예측했던 결과와 매우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이 성과는 태양풍을 예측하는것과태양 그 자체를 가일층 인식함에 있어서 모두 크나큰 도움이 될것으로 분석되고있답니다.
    •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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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9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4) 버킹엄궁전
    버킹엄궁전의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영국, 지점: 런던 템즈강변 함의: 영국왕실의 최고상징임 18세기 초, 영국의 버킹엄공작은 템즈강변에 한채의 관저를 지었는데 후에 조지 3세가 버킹엄 공작한테서 이 관저를 사서 안해한테 선물, 그 때로부터 이 관저는 “여왕궁”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1825년, 조지 4세가 이 왕궁을 개작하였는데 그 때로부터 버킹엄궁전은 황실가족이 사는 관저로 되었다. 그리고 제일 첫 사람으로 이 궁전에 들어간 사람은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현재 버킹엄궁전은 의연히 영국왕실 성원들이 거처하는 궁전으로 이는 영국왕실이 최고 상징으로 되고 있다. 주체건축물 버킹엄궁전은 “口”자형으로 된 3층 건물로서 주체궁전은 동쪽방향으로 마주 앉았다. 왕궁의 서쪽 측면은 정면 궁전으로 그 중 가장 큰 “황실무도청”은 1850년에 건설된 것이며 전문 빅토리아 여왕을 위해 수건한 것으로 무도청 내에는 대형 수정등이 걸려 있다. 그리고 어좌실(御座室)내에는 당년에 국왕이 쓰던 어좌가 보존돼 있으며 사방 둘레에는 15세기 장미전쟁 때의 장면이 그려져있다. 다음 궁내 음악실의 꼭대기는 정원형으로 돼있는데 상아와 황금 장식으로 조성되었다. 버킹엄궁전의 부대건물로는 황실화랑(皇家画廊), 황가마구간과 화원으로 건설돼 있다. 그 중 화랑과 마구간은 이미 대외에 개방돼 있다. 버킹엄궁전의 광장 버킹엄궁전 정문앞의 광장중심에는 천사의 형상으로 조각된 빅토리아 여왕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또한 영국레알위병대가 보초교체를 하던장소로서 매년 4 – 9월, 레알위병대는 매일 오전 11시 30분부터12시 30분 사이에 보초교체의식을 한다. 그 외의 달에는 2일에 한번씩 하는데 매번 교체의식을 할 때면 군악과 구령소리속에서 머리에 멋진 모자를쓰고 몸에는 붉은 상의와 검은 색 바지를 입은 영국레알위병대가 각종 대렬표현을 하게 되는데 황실분위기가 아주 농후하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4-09
  • [단독] "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 7 )
    ■ 허길성 (전번기 계속) 중앙군위 문화학교에서 나온 우리는 군용트럭에 앉아 무석시구역을 빠져나와서는 서쪽을 바라고 그냥 달리기만 했다. 달리는 중도에서 학생들은 여러가지 추측을 하였지만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만약 복건쪽으로 간다면 반드시 기차에 올라야 하겠건만 트럭에 앉은대로 계속 달리는데다 서쪽을 향해 달리니 뭐가뭔지 도무지 추측할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인솔하는 군관이 알려주는것도 아니였다. 이것도 군사비밀에 속했으니 말이다. 그뒤 드디여 우리가 탄 군용트럭은 약 반나절 달리던 끝에 남경에 당도, 하지만 시내로 들어가지 않고 시외곽도로를 한참 달리더니 장강부두가에 가서 멈춰서는것이였다. 장강부두에서 우리는 트럭에서 내린 뒤 약간의 휴식을 취하고는 다시 륜선에 올랐다. 륜선에 오르게 된것은 당시 장강에 다리가 없었기 때문이였다. 우리가 배에 다 승선하자 륜선은 고동을 길게 뽑더니 북을 향해 선수를 향하는것이였다. (드디여 갈곳으로 가는구나.) 나는 이번에야 제딴에는 어디로 간다는 판단을 내릴수 있었다. 북이라면 분명 중조변경지구로 가는것이 틀림없는것 같았다. 그리고 동북쪽으로 간다면 분명 조선정세가 복잡해진것이라 판단했다. 이전에도 조선전쟁이 터지자 하남성에서 농업생산을 지원하던 진갱의 제13병퇀이 정주로부터 압록강연안에 집결되지 않았던가! …… 나는 배란간을 부여잡고 배전을 철썩철썩 갈기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결국 조선으로 가는구나. 내가 태여났던 고국에 나가 싸우게 됐고 또한 싸우고 또 싸우다가 내가 태를 묻었던 조선땅에서 희생될수도 있으며 고국에서 이내 인생을 마감할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군인으로 돼갖고 가렬처절한 전쟁터에 한번 나가보는것도 어찌보면 영광스러운 일인것 같았다. 하긴 부모한테 효도 한번 크게 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좀 아쉽고 미안한 구석도 없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전쟁터에서 군인답게 살다가 군인답게 희생되는것 역시 인생이라면 괜찮은 인생인것 같았다. 얼마뒤 륜선이 장강북안에 가닿게 되였고 륜선에서 내린 우리는 다시 군용트럭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한참 달리다가 어느 한 자그마한 진의 기차역에서 북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한편 기차에 올라 북으로 향하면서 우리는 줄곧 문화교관의 선창에 따라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들로는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 “3대규률과 8항주의”, “공산당이 없으면 새중국이 없다네” 등 혁명가요였다. 당년에 압록강을 뛰여넘던 지원군용사들의 모습이라고나 할가? 혁명가요를 씩씩하게 부르는 우리는 진짜 전선으로 향하는 대오와도 같았다. 헌데 2일후 우리가 탄 기차는 북경 풍태역에서 멈춰섰고 우리가 그곳에서 내리게 될줄이야. 나를 포함한 모두가 오리무중에 빠졌다. 아무래도 조선으로 갈것 같다던 나의 판단이 틀렸던것이다. 그리고 많은 전사들이 도대체 어디로 가느냐고 인솔자 군관한테 물었으나 그 군관은 그저 시무룩히 웃으며 자기도 북경까지 따라온다는것만 알았지 구체적으로는 모른다고 했다. 북경 풍태역에서 장군별을 단 군관이 우리를 마중했고 우리는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트럭에 다시 올라탔다. 그뒤 우리가 탄 트럭은 시내안이 아닌 교외쪽으로 향하더니 약 한시간뒤 장평현에 있는 북경공정병학원이란 간판이 달린 어느 한 건물의 대문앞에서 멈춰서는것이였다. 트럭에서 내린 우리는 한줄로 서서 대문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대문안에서는 숱한 군인들이 모였고 그들은 북과 꽹과리를 두드리며 우리를 환영하는것이였다. 그리고 건물벽에는 “신입생들을 열렬히 환영한다!”는 프랑카트까지 걸려 있었다. 너무나도 뜻밖의 광경에 나는 머리가 어정쩡해나면서 한동안 뭐가 뭔지에 대해 알수가 없었다. 썩 후에야 알게 된 일이였지만 당시 중앙군위에서는 문화학교의 대부분 학생들을 복건에 보내 땅굴을 파고 또치까를 구축하는 등 전쟁준비에 투입시켰으나 순자를 포함한 녀학생들은 상해군의대학에 보냈고 또 우리 소수민족 학생들은 북경공정병학원에 보내 계속 공부를 할수 있게 했던것이였다. 2 이렇게 우리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북경공정병학원의 학생 즉 의젓한 대학생이 되였던것이다. 나는 코마루가 찡해나도록 감격을 금할수가 없었다. 당시는 국내외 정세가 진짜 복잡한 상황이였다. 대만의 장개석군대는 매일같이 “대륙수복”을 웨쳐대면서 도발을 끊임없이 감행했고 중쏘관계 또한 그닥 여의치 않았으며 조선반도에서도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긴장한 시기였다. 하지만 중앙군위에서는 우리 무석문화학교내의 소수민족학생들만은 별도로 전쟁준비 일선에 내보내지 않고 계속 공부를 할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번 우리 나라 소수민족정책의 우월성을 감지할수 있었다. 한편 내가 행복해질수록 산굴을 파지 않으면 그와 비슷한 전쟁준비 제1선에서 고생하고 있을 순자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더군다나 그녀와의 일체 련락이 두절되니 더욱 시름을 놓을수가 없었다. 하긴 상해경비사령부의 정위인 그녀의 부친이 어련히 알아서 딸한테 관심을 돌릴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을 어찌 장담하랴. 얼마전에도 우리 문화학교 학생들이 사처로 이동된다는것에 대해 왕륙생정위는 깜깜부지였지 않았던가?! 나는 마치도 순자한테 큰죄를 진듯한 생각이 자꾸 갈들었다. 내가 그녀를 고생스러운 곳으로 직접 보낸것 아니였지만, 또한 군사명령이라 어쩔수 없는것이였지만 그래도 어쩐지 내가 순자를 힘들고 어려운 곳으로 보낸것 같은 자책감이 자주 들었다. 그래서 어느날 나는 함께 무석의 문화학교로부터 동행한 만족전우한테 그 고민을 털어놓았다. “쑈쪼, 나 지금 큰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단 말이야. 사실 나 우리 한반의 왕순자란 녀자애와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어.” “아니, 그건 이미 공개된 비밀이 아니야. 새삼스럽게 그걸 왜 끄집어내?” 쑈쪼는 의아해하며 나를 바라봤다. “그건 그런데 나 지금 순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또 그의 집주소도 적어두지 못했다구.” “저런, 이 친구야! 꼼꼼하기로 소문난 자네가 그런 실수를 범하다니?! 그래 아직 그녀와 편지거래도 하지 못했단 말인가?” “그렇다네. 휴ㅡ 다 내잘못이야…” “아니 아니야. 그걸 어떻게 되여 자네의 잘못이라고 하겠나! 다 그 삶아 튀해버릴 장개석이 ‘대륙수복’이요 뭐요 하며 지랄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왜 문화학교에서 여기로 왔겠고 또 자네과 순자가 갈라지게 됐겠나. 하긴 여기로 온 우리는 아주 행운스럽다만…” 장개석?! 쑈쪼의 말에 나는 큰 힌트를 받았다. 그랬다. 모두 장개석 때문이란 말에 일리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되자 나는 장개석과 국민당에 대한 분노로 이발을 갈았다. 장개석, 너 이놈 우리의 사랑에까지 방애작용을 하는구나!!! 그때로부터 순자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때마다 장개석과 국민당에 대해 일장저주를 퍼붓군 하였다. 동시에 나는 이미 20살을 넘긴 청년이라 셈이 들대로 들었기에 지식의 중요성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순자를 만나면 꼭 어깨에 별이 많은 군관이 되여 나타나리라 결심하고는 머리를 싸동이고 공부에 열중했다. 그만큼그때까지만도 나는 순자와의 재상봉이 이루어지리라 믿어의심치 않았었다. 3 북경공정병학원에서 내가 배치받은 학부는 기계및건축설계학부였다. 이 전업은 말그대로 기계와 건축 등을 설계하는것을 배우는 전업이였는데 그중 건축설계에는 전쟁준비에 필수적인 갱도와 또치까 및 방공호 등 학과들로 구성되여 있었다. 참, 같은 문화학교시절의 동창들이 갱도를 파고 나는 그런 갱도를 설계하는것을 배우다니… 운명의 대비란 그야말로 묘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 나의 제대로 된 학력은 룡정에서 초중에 다닌것이 전부였다. 하긴 부대에 간 뒤 나름대로 글공부에집념하면서 몇년간 자습하기도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체계적인 공부가 아니였고 문화학교에 다녔으나 그것은 2년도 안되였다. 그러니 순 시험을 쳐 대학에 간다는건 거의 어림도 없는 일이였다. 그리고 북경공정병학원같은 학부에 입학한다는것은 더욱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었다. 이러한것들에 대해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주어진 운명을 기꺼히 받아들이면서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고 공부에 열중했다. 여기서 보충해서 말하고 싶은것은 다들 이성에 빠지면 공부에 집념할수 없고 성적도 하강된다고 하지만 나만은 그렇지가 않았다. 나는 순자가 생각날 때마다 공부를 잘해 그녀의 의젓한 남편이 되겠다는 결심을 굳히군 했으며 그녀에 대한 사랑이 나한테 있어서 도리여 동력이 되게 했다. 그러던중 내가 입학해 약 한달이나 됐을가 할 때의 어느날 갑자기 북경대학의 지도일군들이 우리 북경공정병학원을 찾아왔다. 나라에 수요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조선족학생을 모집하러 왔다는것이였다. 력사적으로 볼 때 조선은 중국의 린국으로서 중국의 어느 조대를 막론하고 조선과의 관계에 대해 중시를 돌렸던것이다. 특히 해방후 중조 두 나라는 모두 사회주의와 무산계급 국제주의 원칙에 따라 여러 명목의 우호협력관계를 맺어왔는바 그러한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는 조선어와 조선의 력사에 대해 능통한 인재가 대량 수요됐던것이다. 북경대학 지도일군들이 그 무슨 국무원의 소개장이라도 갖고왔는지 우리 학교지도부에서는 그분들을 깎듯이 대했고 그들이 찾아온 사연에 대해 알아보고는 이에 적극 호응하는것이였다. 학교지도부에서는 인차 전 교내에 있는 조선족학생들에게 통지해서는 학교인사처로 가도록 했다. 당시 북경공정병학원에는 나 그리고 흑룡강성이 고향인 량희원과 리종률 이렇게 도합 3명이였는데 이 3명 모두 학교인사처에 가서 면접시험을 보게 됐다. 그날 우리 3명이 학교인사처에 들어서자 북경대학에서 파견돼온 일군들은 우리 셋을 아래우로 까근하게 뜯어보는것이였다. 그러더니 그중 한분이 나한테 먼저 말을 건네는것이였다. “저기 저 키가 큰 동무, 여기와 앉소.” 내가 그분이 가르키는 걸상에 앉자 그분은 재차 나를 유심히 뜯어보는것이였다. “이름이 뭐요?” “허길성입니다.” “고향은?” “길림성 룡정입니다.” “오, 그럼 연변에서 왔구만. 조선족들이 많은 지방에서 왔다면 조선어기초가 어느 정도 있겠구만…” “예, 저도 나름대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분은 기타의 량희원과 리종률한테도 똑같게 묻더니 수첩에 적는것이였다. 그러고 나서 그분은 그제야 우리 학교로 찾아온 목적을 밝히였다. “저 다름이 아니라 현재 우리 나라에서는 외교부문에서 근무할 조선족인재들이 몹시 수요되고있는 상황이요. 그래서 우리가 직접 조선족인재들을 선택해서는 한동안 북경대학에 데려가 학습하게 하고는 나중에 외교부와 국방부 등 부서에 인재들을 수송하게 되오. 어떻소? 북경대학에 가서 공부한 뒤 외교관이라도 될 생각들이 없소?” 이에 우리 셋은 서로 번갈아 쳐다보기만 할뿐 쉽게 대답할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분은 나를 지명했다. “그럼 저기 저 아까 이름이 뭐랬더라? 오 그렇지 허길성동무라 했지. 허동무가 한번 시원하게 속심말을 한번 해보오.” “글쎄 고맙습니다만 너무 급작스레 들이닥친 일이라 저한테 생각해볼 시간을 좀 줄수 없겠습니까?” 나외 기타 2명의 조선족학생들도 똑같은 대답을 했다. “좋소. 오히려 쉽게 대답하는것이 경거망동하는거지. 그럼 우리 2일간의 시간을 주겠소. 생각이 있는 학생은 다시 인사처로 찾아와 신청하면 되오.” 숙소로 돌아온 뒤 나는 여러모로 생각을 굴려보았다. 외교관이 된다? 유혹이 없는건 아니였다. 헌데 모순되는건 군복을 벗기 싫은것이였다. 그리고 이제 조선어를 더 전공하는건 어이없는 일인것 같기도 했다. 지금까지 배운 조선어실력으로도 문장쓰기나 통역같은데는 막힘이 없을것 같았다. 또한 현재 나한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기술을 배우는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드디여 나는 아주 큰 결단을 내리고 북경대학에 가지 않고 본교에 계속 남기로 했다. 그러니 학교인사처로 찾아갈 필요조차 없게 됐다. 다시 찾아가지 않으면 북경대학 지도일군들도 포기하리라 여겼던것이다. 그런데 그 3일후 북경대학의 그 지도일군이 나의 숙소까지 찾아올줄이야. “허길성동무,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소? 우리는 허동무가 제일 선참으로 달려올줄 알았는데…” “미안합니다. 생각이 없으면 인사처로 찾아가지 않아도 될것 같아서…” “아니 허길성동무, 이런 기회는 자주 생기는것이 아니란 말이요.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보오.” “글쎄 저는 그냥 이 학교가 좋고 지금 배우고있는 전업을 계속 잘 배우고 싶을뿐입니다.” “이 동무가 이거 고집이 세구만. 허허 할수 없지. 평양감사도 제가 싫으면 그만이라고 본인이 싫다면야 어쩔수 없지…” 그 지도일군은 어딘가 아쉬운지 입을 쩝쩝 다시는것이였다. 그뒤 나는 북경대학 지도일군들의 말을 듣지 않은것에대해 아주 잘한 일로 간주하면서 여전히 본 전업을 배우는데 정력을 쏟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여전히 순자의 소식을 기다렸다. 4 우리가 북경공정병학원에 입학한 이듬해인 1963년의 8월 중순쯤으로 기억된다. 그때 중앙군위로부터 우리 학교에 새로운 명령(북경공정병학원은 기타 대학교와는 달라 상급의 지시는 군사명령식으로 집행됨)이 떨어졌다. 그 명령인즉 오는 10월 1일 중화공화국 창건일을 경축하면서 북경의 천안문광장에서 대형검열식이 있게 되는데 우리 북경공정병학원이 검열대렬에 선택됐다는것이였다. 이 명령소식을 접하는 순간 나는 몹시 흥분되였다. 이전에 영화를 통해 우리 중국의 천안문광장에서의 열병식을 보아왔고 또 쏘련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거행되는 열병식도 가끔씩 보았었기에 나도 언젠가 한번은 그런 열병식에 참가해 봤으면 하는 마음도 없았다. 선배들에 따르면 기실 북경공정병학원은 건국이래 해마다 천안문광장에서 있게 되는 열병식 혹은 검열식에 참가, 교관들과 선배학생들은 이미 경험이 있었기에 그닥 흥분하지 않았지만 우리 신입생들은 그저 신기하고 궁금하기만 했다. 처음에 나는 우리가 참가하게 될 검열식을 열병식으로 여겼었다. 선배들에 따르면 열병식과 검열식은 성질상에서 근본 달랐다. 열병식은 각종 신식무기를 과시하는 한편 열병대오도 전신무장한체 검열을 받는것이고 검열식은 그냥 군복이 아닌 다른 단체복장을 하고는 표어같은것을 메거나 들고서 행진하는것이였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1949년의 공화국창건날부터 1959년 10월 1일까지 해마다 열병식을 해오다가 1960년부터는 각종 국내사정에 의해 잠시 열병식을 중단한터였다. …… 중앙군위의 명령이 떨어지자 학교에서는 즉각 검열식에참가할 훈련에 돌입, 오전에만 수업에 참가하고 오후시간은 전문 이 훈련에만 정진했다. 훈련은 내가 사전에 상상했던것과는 엄청 다르게 힘들고도 고되였다. 쨍쨍 내리쬐는 8월의 해볕아래에서 정복을 입고 행진훈련을 하는 강도에 대하여 그 훈련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근본 알수 없을것이다. 특히 정보행진을 30분 이상씩 훈련하노라면 땀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뒤잔등이 흠뻑 절기가 일쑤였으며 나중에 숙소로 돌아와 씻자고 보면 소금기가 하얗게 돋아있군 하였다. 훈련개시 며칠후부터 우리는 발에 물집이 생겼고 어떤 학생들은 코피를 흘리기도 했으며 훈련이 지속됨에 따라 모진 더위에 게거품을 물며 쓰러지는 전사와 아예 병원으로 실려가는 학생들까지 속출했다. 특히 우리 신입생들이 더 애를 먹었다. 웃학년의 선배들은 이미 경험이 있는지라 제법 요령이 있어서 인차 힘든 고비를 넘었지만 우리 애숭이들은 여러번 번복해도 늘 교관한테 훈계만 당했으며 한가지 훈련을 여러날씩 번복해 할 때도 자주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이를 악물고 견지했으며 쓰러지고 병원에 실려가면서도 끝끝내는 모든 훈련관을 하나하나 넘기는데 성공했다. 훈련이란 신체가 건장하다고 해서 다 그것을 소화해내리라고 여겼다가는 큰 오산이였다. 즉 사회청년들은 신체가 아무리 건장하다고 해도 그 훈련강도를 이겨내지 못할수도 있었으나 북경공정병학원의 학생들은 아무리 허약한 체질의학생도 모두 그 훈련을 이겨냈다. 그것은 우리 학생들한테 그만큼 높은 사상경계, 의악성과 그리고 인간자질이 있었기때문이라는것을 나는 그번 훈련에서 충분히 감지할수가 있었다. …… 드디여 1963년 10월 1일, 북경 천안문광장은 국경 14주년을 경축하는 군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방방곡곡에서 각양각색의 채색기가 날렸으며 그 어디를 보나 꽃바다를 이루었다. 그날 우리는 아침 5시에 북경공정병학원에서 출발하여 6시가 되자 천안문광장의 지정지점에 도착해 대기하게 되였다. 크게 움직이지 못하고 고정된 지점에서 몇시간씩 서있는다는것도 고되기는 훈련이나 마찬가지였다. 다행히도 그날 우리가 서있는 북경 장안가의 곳곳에 림시이동변소가 있어 학생들이 볼일을 보는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오전 9시 30분이 되자 전체 횡렬종대(方队)는 변소출입도 금지되였고 줄을 맞춘대로 움직일수 없게 되였다. 이어서 여러개 진으로 구성된 횡렬종대로 군수장들이 몇차례씩 와서 점검하였으며 그때마다 반복적으로 조직규률성을 강조하였다. 드디여 오전 10시가 되자 1000여명에 달하는 중국인민해방군 군악대의 취주악속에 검열이 시작되였다. 전진 전진 전진 태양을 따라 나간다 조국의 대지를 밟으며 민족의 희망을 품었다 우린 하나의 필승불패의 대오 … … 전반 천안문광장 상공에 울려퍼지는 “중국인민해방군행진”의 주악에 맞춰 우리의 검열대오는 차례대로 행진하기시작했다. 그때 우리 학교의 횡렬종대는 제일 앞에 “모주석 만만세”란 대형표어판을 메고 나아갔는데 그속에는 나도 포함되였다. 키가 1.75메터 이상의 군인들로 그 표어판을 메게 하다보니 내가 선택됐던것이다… 우리의 횡렬종대는 천안문성루가 정면으로 보이는 광장중심에 이르자 발을 높게 들며 정보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눈결로 얼핏 천안문성루를 올려다보자 모택동주석을 비롯한 중앙지도동지들의 모습이 보이였다. 모택동주석, 류소기주석, 주덕총사령과 주은래총리…뚜렷하지는 않았지만 중앙지도동지들은 검열을 받는 우리를 향해 손을 저어 사의를 표하는것이 분명했다. 순간 나의 가슴은 격동으로 차넘쳤다. 한낱 변방지구의 이름없는 농민의 자식이였던 내가 오늘 의젓한 해방군전사가 되여 천안문광장에서 모택동과 중앙수장들의 검열을 다 받다니 꿈만 같았고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조국만세!”, “공산당만세!” 그리고 “모주석만세!” 등 구호를 웨치며 보무당당히 행진하면서 천안문앞을 지났다. 하나의 흐트러짐도 없이 질서정연하게 검열을 받았던것이다. 그날밤 학교숙소로 돌아온 후 나는 온밤 흥분으로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수십일에 달하는 훈련피로도 가뭇없이 사라졌고 낮에 있었던 그 순간 순간들이 자주 영화의 장면처럼 떠오르면서 가슴은 흥분으로 들먹이군 했다. 나는 수첩을 꺼내 그날의 모든것을 일기로 적었고 편지로 집에도 이 사실을 알렸다. 1963년 10월 1일, 그날의 검열식 ㅡ 그 이전에도 1949년부터 묵경 천안문광장에서는 해마다 열병식 혹은 검열식이 있었지만 나는 조선족군인이 그 대오속에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었다. 그렇다면 아마 내가 조선족군인으로서는 제일 처음으로 북경 천안문광장에서의 검열식에 참가해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그날의 일을 영원히 기억하기로 맘먹었다. …… 북경에서의 3년간 학교생활, 그 3년사이 나한테는 추억거리도 많이 남았다. 그 3년 사이 나는 한낱 애숭이군인으로부터 보다 성숙된 중견군인으로 성장했다. 그동안 두번 천안문광장(1963년과 1964년)에서 모주석과 중앙수장들의 검열을 받는 영광을 지녔고 학습면에서는 반급에서 항상 우수생으로 그 립지를 굳혔으며 집단활동에서도 늘 학생들앞에서 그들을 인솔하는 리더십이 강한 혁명군인으로 자리매김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날의 일을 영원히 기억하기로 맘먹었다. …… 북경에서의 3년간 학교생활, 그 3년사이 나한테는 추억거리도 많이 남았다. 그 3년 사이 나는 한낱 애숭이군인으로부터 보다 성숙된 중견군인으로 성장했다. 그동안 두번 천안문광장(1963년과 1964년)에서 모주석과 중앙수장들의 검열을 받는 영광을 지녔고 학습면에서는 반급에서 항상 우수생으로 그 립지를 굳혔으며 집단활동에서도 늘 학생들앞에서 그들을 인솔하는 리더십이 강한 혁명군인으로 자리매김을 하기도 했다. (연재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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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4-09
  • 해외견문 시리즈(2) 쿠바에서의 20일
    ■ 김철균 일전 중앙CCTV를 통해 중남미의 쿠바를 소개하는 뉴스를 시청하게 되었다. 내용인즉 쿠바도 이제는 대외로 개방하고 있으며 미국을 포함한 서방나라들에서 각종 제재를 취소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순간 나의 뇌리에는 한국상선 “코리안스타(KOREAN STAR)”호를 타고 쿠바의 항구도시 산타아고데쿠바(圣地亚哥)에 입항해 있을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1991년 9월,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거의 20여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말이다. 그때 중남미의 알루바도섬(阿鲁巴岛)해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본선이 그리스(希腊) 나비니아 대리점으로부터 쿠바에 가서 밀감 3000톤을 적재하라는 팩스를 받은 것은 9월18일 오후였다. 그러자 뒤따라 선내방송은 쿠바 입항시의 유의할 점과 선원마다 갖고 있는 일체의 소지품과 달러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신고할데 관한 지시를 하달했다. 그만큼 그 때까지도 꾸바입항절차가 까다로왔던 모양이었다. 까다로운 입항절차 한편 쿠바에 대한 주변국가의 감시와 봉쇄도 강화되는 실정, 그날 밤 본선이 쿠바를 향해 닻을 올리고 3 ~ 4시간쯤 향행했을 무렵 갑자기 선박상공에서 헬리꼽터의 동음소리가 요란스레 울리더니 선박기관실의 엔징이 문뜩 멈춰서는 것이었다. 이어서 미국경찰의 헬리꼽터 한대가 거센 선풍을 일으키며 뎃기(갑판)에 내려 앉더니 전신무장한 경찰 5명이 뛰어내렸다. 그들은 내리자 바람으로 선원마다 침실의 문을 열게 하고는 측정의기로 한바퀴 검사하였으며 나중에는 기관실과 냉동창고까지 낱낱이 수색하고야 손을 뗐다. 듣는 말에 의하면 미국경찰의 이런 검사는 명목이 마약밀매를 사출하기 위한 것이라지만 쿠바에 무기가 들어가는 것을 막자는 뜻도 포함된다고 했다. 하긴 남의 나라로 입항하는 선박까지 수색하는 걸 보면 미국은 경찰마저 세계패권을 부리는 것이 분명했다. “코리안스타”호가 산따아고데꾸바항에 입항한 것은 이튿날 점심무렵이었다. 아니나다를가 쿠바의 세관경찰 역시 지나치게 까근할 정도로 우리들의 신분을 남김없이 확인하고는 일체 소지품과 돈까지 체크하였는데 그 것은 그 어떤 나라보다도 엄한 입항절차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그 때 본선에는 무협지를 비롯한 많은 한국 도서와 잡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런 인쇄물까지도 차봉하고는 출항 후에야 개봉할 수 있게 했다. 중국산 자전거천국 그날 저녁 우리는 밥술을 놓기 바쁘게 외출했다. 우리가 항구입구에서 외출등녹을 하고 밖에 나서자 곧바로 시내로 통하는 공공버스가 있었다. 버스에 오르자 세관경찰들과는 달리 버스의 승객들은 우리한테 매우 우호적이었으며 우리들속에 나를 포함한 몇몇 중국선원이 있음을 알자 “닌호우?(您好)”하고 중국말로 인사하며 악수를 청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의 자리를 내주는 사람도 있었다. 헌데 이상한것은 우리가 버스표를 떼려고 달러를 내밀자 승무원은 한사코 받지 않 것이었다. 다른 나라들 같으면 외국인들한테 바가지를 씌우는 것이 상투적 수단이겠는데 그들은 왜 그러는지? 후에 볼라니 승객들은 모두 작은 카드 하나만 보이고 내렸는데 우리에게 그런 카드가 없고 하니 그대로 내버린 모양이었다. 우리는 스페인어로 (쿠바는 스레인어가 통용됨)술마실 곳이 어디인가를 물은 뒤 버스가 제일 호화로운 섭외호텔인 하와호텔에 도착하자 그 곳에서 곧바로 내렸다. 아무리 봉페정책을 실행한 쿠바였지만 하와호텔만은 디스코바, 커피점, 슈퍼마켓, 전자유희청 등 있을 것이 다 있어 이른바 “자본주의 세계”였으며 이를 이용하는 이들 또한 거개가 외국인들이었고 국내손님은 특수카드에 의해서만 출입이 허용됐다. 우리는 그 곳에서 거의 세시간이나 술을 마시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듣는 말에 의하면 그 곳의 양주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값도 싸고 또한 가짜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땅콩과 건포도로 안주해서 마시는 술맛은 각별히 좋은듯 했다. 밤 10시가 좀 지나자 우리는 소풍하러 밖으로 나왔다. 중국같으면 그 시간에는 행인이 적으련만 열대국가인 그 곳은 그 때가 제일 흥성할 때였다. 특히 여느 나라들과는 달리 그 곳도 중국처럼 자전거행렬이 물결쳤는데 자세히 볼라니 그 자전거의 절반 이상이 우리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영구(永久)”, “비둘기(飞鸽)”, “봉황(凤凰)” 등 명표들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중국과 쿠바사이도 무역래왕이 잦음을 알 수 있었다. 후에 볼라니 본선선원들이 하와호텔 슈퍼마켓에서 산 침대카바와 운동화 등도 모두 중국제품임이 확인되자 우리는 또 한번 놀랐다. 쿠바의 자전거타기열은 경제위기로 석유가 긴장하여 많은 기동차들이 뛰지 못하자 일기 시작했고 자전거수입 파트너도 중국으로 됐다고 한다. 한편 우리가 호텔을 나와 얼마 안되어 불현듯 본선의 제3기관 조리수인 박치국씨가 헐레벌떡 달려오며 “저 담장밑에 아가씨들이 줄쳐 앉아 있어요”라고 흥분되어 부르짖었다. 그러자 모두들 그 쪽으로 쓸어갔는데 아니나 다를가 키가 그리 크지 않은 남미계의 세뇨리따(아가씨) 5~6명이 얌전히 앉아서 뭔가 기다리는 듯 했는데 모두가 하나같이 그토록 이쁠수가 없었다. 선원들은 대뜸 아가씨들한테 달라붙어 찧고 박고 했다. 여자를 되게 밝히는 한국의 “배놈”들, 어쩔 수 없었다. 헌데 이튿날 오전에 들을라니 그들 모두가 단속 때문에 호텔행을 하지 못하고 바다가나 길가의 잔디밭속에서 뒹글었다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값이 싸고 순진해서 좋았어”, “여기선 에이즈는 근심할 필요가 없어”라고들 하는 것이었다. 밀감 상역작업은 9월 20일부터 시작됐다. 헌데 수송시설이 낙후하여 차량속에 마차까지 동원되다 보니 작업효율이 빠를리 만무했다. 그런즉 작업양 체크만 하는 본선 선원들도 팔자가 늘어져 교대로 낮잠 자기가 일쑤였다. 그러니 저녁엔 뭘하랴. 또 외출해야지. 술 처먹고. 아가씨를 찾아 눈에 불을 켜고… 그날 저녁 우리는 길도 익숙하기에 버스를 타지 않고 구경삼아 걷기로 했다. 그래서 전날에 스쳐지났던 거리풍경들을 더욱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듣는바에 따르면 쿠바는 물산이 매우 풍부한 나라이다. 지하에는 철, 동, 아연 등이 풍부하여 중공업발전에 유리했고 지상은 커피, 사탕수수, 여송연, 코카인 등을 대량 재배할 수 있는 산지이다. 헌데 이렇듯 경제발전의 우세를 갖고 있는 나라였으나 수백년에 달하는 스페인사람들의 통지와 그 후에 있는 전쟁의 세례 또한 사회주의에 진입하여서도 오래동안의 봉쇄정책으로 말미암아 그 때의 쿠바현실은 그닥 낙관할 바가 못되었다. 하긴 구소련이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을 때만도 구소련의 보호밑에 그닥 어려움이 없었다 한다. 대외무역의 80% 이상이 구소련을 상대로 했다니까. 하지만 냉전이 결속된 후 구소련의 세계적 패권이 약화되면서 쿠바경제도 위기를 겪게 되였는바 이를 두고 한국인들은 사회주의국가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했다. 허나 사회주의국가라고 낙후하다는 법은 없는 것이다. 개혁개방을 실시하는 우리 중국만 봐도 얼마나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가. 한편 거리를 도보로 걸으면서 느낀 인상을 적어 본다면 야자수가 늘어선 거리의 양켠에 일떠선 건물들은 대부분 지난 세기 60~70년대에 지은듯 했는데 그 때는 중국에 비해 꽤 번영한듯 했고 거리의 도처에 쿠바수령 카스트로의 초상화가 있어 중국의 문화혁명시기를 방불케 했으며 달리는 차량도 적지만 택시는 더욱 적어 대부분 등불을 달고 깜찍하게 만든 마차가 택시대용으로 쓰이었다. 그외 빵점이나 야채가게마다 늘어선 행열과 어린이들이 맨 붉은넥타이를 볼 때마다 우리의 1970년대를 더욱 떠올리게 했다. 손님을 따뜻이 대하는 쿠바인 하와호텔밖은 그 전날보다 확연히 달랐다. 해가 지기도 전부터 어디로부터 모여들었는지 수많은 아가씨들이 향해 눈을 깜빡여 보였는데 여하튼 그 곳의 미녀들은 다 모인 것 같았다. 한편 아가씨를 전문 소개하는 거간군이 나타 났는가 하면 이를 감시하는 경찰들도 출동했다. 보아하니 “배놈”들의 외출은 거리구경이나 답사도 아닌 아가씨사냥에 불과했고 그 아가씨들 역시 여자라면 돈을 아끼지 않는 한국선원들의 돈주머니를 노리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쿠바사회의 한측면일뿐 외국인들을 위해 성실하게 봉사하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가 산따아고데쿠바항에 입항해 있던 중 10월 3일(음력 8월 26일)은 바로 나의 생일이었다. 그날밤 따라 바깥날씨가 하도 청신했기에 우리는 호텔밖 잔디밭에서 나의 생일파티를 열었다. 내가 호텔에서 산 “JB”표 위스키 네병과 배에서 갖고간 말린 오징어 따위의 안주를 내놓고 한순배 돌렸는데 불현듯 멋진 옷차림을 한 단체가 다가와 공연요청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에 우리가 일제히 좋다고 박수를 쳐주자 그들은 곧바로 야외공연을 시작했다. 사람의 심금을 울려주는 바이올린독주, 벨칸토창법의 여중음독창 그리고 스페인군무 비슷한 남녀쌍쌍의 민속춤…거기에서 알만한 음악은 녀중음가수의 “모스크바교외의 밤”뿐이었지만 음악이란 국경이 없다고 해외에 가있는 우리의 마음을 그토록 흥분시켰다. 특히 여중음가수의 매력은 이성에서가 아니라 예술이란 이 미적매력으로 우리가 감화되게 했다. 그날 본선의 정유식 선장이 그들한테 수고비로 200달러를 내놓았다. 하지만 그들은 딱 잘라 100달러만 받고 영수증까지 남겼는데 그것 또한 인상 깊었다. 그밖에 우리가 그 곳에 머물러 있는 기간 구소련선박 네척과 중국선박 두척, 그리고 조선의 선박 한척이 선후로 입항하는 걸 볼 수 있었다. 구소련배는 목재와 기름을 하역하는 잡화선과 기름배였고 중국배 두척은 다 목화를 하역하는 컨터이너선이었으며 조선배는 시멘트를 하역하는 밀봉선이었다. 이로 보아 그 때까지도 쿠바의 대 무역국가가 몹시 제한되어 있는듯 했다. ※ ※ ※ 사람은 모든 것이 지난 뒤에야 이전의 유치함과 아둔했던 것을 깨닫는 법이다. 마치 우리가 30년전 강냉이죽을 먹으면서도 제일 잘 산다고 으시대던 것처럼 20여년전의 쿠바 현실도 마찬가지었다. 저로동효율에 단조로운 인민의 물질문화생활, 세계가 점점 하나의 지구촌으로 둥글어 가고 있다. 하다면 쿠바 역시 자본주의국가를 포함한 모든 나라들을 상대로 바다와 하늘 그리고 모든 시장까지 풀어 놓아야 한다고 느껴진다. 나의 일생에서 어쩌다 인연을 맺게 된 쿠바와 그 곳의 후더운 사람들, 후에 다시 가볼 수나 있을는지?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4-06
  • 오묘한 세계 대백과(3) 천태만상의 외성계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광활한 우주에서 은하계는 하나의 작은 매생이에 불과하다고 한다. 은하계 이외 인류가 관측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성계의 총수는 가능하게 수천억개에 달할 수도 있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은하계는 그 수많은 성계중의 보통 일원에 불과할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는 천문학가 허블의 분류 방법과 성계의 형태 특정에 따라 성계를 타원성계(椭圆星系), 선와성계(漩涡星系), 봉선성계(棒旋星系), 투경성계(透镜星系) 및 불규칙적인 성계 등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있다. 저명한 선녀좌하(仙女座河) 외성계와 은하계는 매우 흡사한 바 역시 선와성계에 속하며 더욱 흥미가 있는 것은 그 신변에 또 다른 두개의 작은 성계가 있으며, 그 것들이 모여서 하나의 3중 성계를 이루기도 한다. 하다면 사람들은 성계의 운동법칙으로 전반 우주의 결구 형태에 대해 추측할 수 있으며 성계에 있는 모든 원형선와결구가 전반 우주의 축도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4-05
  • [단독]"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 6 )
    ■ 허길성 4 (전번기 계속) 어느덧 가을이 되였다. 가을이란 수확의 계절을 말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와 순자의 사랑도 마찬가지라 할수 있었다. 나와 순자는 일요일마다 만났다. 우리는 함께 영화구경도 하고 사진도 함께 찍군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는 재차 학교뒤 공원의 그 홰나무밑을 찾았다. 벌써 10번도 더 찾아온 홰나무밑이였다. 그런데 그날 그 홰나무를 올리쳐다보는 순간 나의 감회는 여느 때보다 달랐다. 말없이 서있으면서 공원을 지키고있는 홰나무 ㅡ 홰나무는 우리의 모든것을 지켜보았을것이고 또 모든것을 알고있을것만 같았다. “순자, 이 홰나무가 우리 사랑을 수없이 지켜본 견증인이라 할수 있소.”나의 말에 순자는 더욱 흥분되여 부르짖었다.“그래요. 이제 우리 결혼해 아들딸을 낳으면 애들을 데리고 꼭 한번 이 홰나무밑으로 찾아오자요. 그리고 애들한테 이 홰나무에 대해서도 얘기해주자요.”“그렇소. 이 홰나무가 땅에 뿌리내린 뒤 조금도 변함이 없이 이 땅을 지키고 있듯이 우리의 마음도 이 홰나무처럼 영원히 변치 말았으면 하오.”“어머, 나의 류쾌이챈! 시인이 다 되셨네…”……그날 우리는 또 여러장의 사진을 찍었다. 서로 상대방을 찍어주기도 하고 공원을 찾은 다른 유람객들한테 부탁하여 홰나무를 배경으로 함께 손잡고 찍기도 했다. 헌데 그 홰나무밑에서의 우리의 랑만은 그날이 마지막으로 될줄이야. 그야말로 자신의 한치 앞날도 예측할수 없는것이 인생이였다.그 며칠뒤의 어느날 밤, 자정을 앞두고 갑자기 집합나팔소리가 울리였다. 부대를 놓고볼 때 야밤중집합은 흔히 있는 일이였지만 문화학교로 온 뒤엔 처음으로 있는 일이였다. 웬일일가?… 변방지구도 아닌 무석에서, 그것도 문화학교에서의 야밤중집합을 두고 학생들은 옷을 주어입으면서 수군대기 시작했다. “혹시 중앙군위에서 검사단이 내려오는것이 아닐가?”“하필이면 야밤중에 검사단이 내려온다고 그래?! 아니 아닐거야.”“거 모르는 일이지. 상급에서 내려오면 언제 예고라도 하고 내려온적이 있었던가!”……1000여명의 사생들이 모두 모이자 교장과 정위가 사생들의 앞에 있는 높은 상단에 올라서는것이였다. 이상했다. 일반적으로 정위가 사생들앞에 나서는 일이 거의 없었으나그날은 교장과 나란히 나섰으니 아무래도 일반적인 일이 발생한것이 아닌것 같았다. 미구하여 정위가 문건같은것을 들고 한발 나서며 입을 여는것이였다. “전체 차렷!”“다시 쉬였다가 차렷!”“쉬엿!”…“전체 사생들!오늘밤 긴급집합을 한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현재 우리는 이곳에서 아주 평화롭게 글을 가르치고 공부하고 있지만 조국의 동남지구와 동북지구는 형세가 자못 준엄한 상황입니다. 즉 정세는 우리를 평화롭게 공부할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고있습니다. 즉 형세는 우리를 핍박하고 있단 말입니다.지금 이 시각도 남해안인 복건지구에서는 대만의 장개석군대가 간첩을 파견하고 무장도발을 하는 등으로 전쟁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으며 동북변방지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전쟁은 지난 1953년에 결속되였지만 이는 정전협정이지 평화협정이 아니였습니다. 현재 남조선에서는 계속 미군이 주둔해 있으면서 전쟁을 획책하고 있기에 전쟁이란 언제 어떻게 다시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이렇듯 복잡한 형세하에서 중앙군위에서는 본교의 수업을 잠시 중단하고 국내 여러곳에 배치되여 전쟁준비에 종사키로 결정하였습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군인은 명령에 복종하는것을 천직으로 삼아야 합니다…”정위의 연설에 이어 교장이 제1진으로 떠날 학생들의 명단을 공포, 어느 한 반급을 단위로 뽑은것이 아니였다. 제1진으로 뽑힌 학생은 약 300명에 달했다. 이어서 제1진으로 뽑힌 학생들한테 명령이 하달, 그들은 이불짐과 간단한 생활필수품만 지니고 재집합하라는것이였다. 그리고 평소에 읽던 책과 옷 등은 포장한 후 거기에 집주소와 이름을 밝혀 써놓으라는것, 학교에서 책임지고 집에 부쳐준다고 했다. 약 20분 뒤 제1진으로 뽑힌 학생들이 재집합했다. 재집합이 완료되자 제1진으로 뽑힌 학생들에 대한 재점명이 있었고 재점명을 마치자 그들은 이미 대기하고있던 군용트럭에 나뉘여 올라 어디론가 떠나는것이였다. 5 그날밤 나는 다행히도 제1진으로 떠나는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물론 순자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제1진에는 녀학생이 단 한명도 없었다. 제1진이 떠난 후 이튿날부터 학교의 모든 수업은 중단됐다. 수업마저 중단되자 우리는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순자가 학교지도부의 말미를 맡고 우체국에 가서 상해경비사령부에 있는 부친한테 문의했다. 하지만 순자의 아버지 왕륙삼정위 역시 중앙군위의 밀령에 대해 알지 못했고 우리 학교의 수업중단소식에 대해서도 깜깜부지였다. 아무리 경비사령부의 정위라 해도 중앙군위의 행동포치에 대해서는 알수 있을리 만무했던것이다. 우체국에서 돌아온 순자는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초조하게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길성동무(그때는 류쾌이챈이라고 별명을 부르지 않았음), 어쩌죠? 아빠도 모르는 일이군요…”“글쎄…”“글쎄가 무슨 글쎄인가요?! 우리 사이가 이 정도로 됐다가 어떻게 갈라진단 말인가요?”“갈라지긴 왜 갈라진다고 그러오. 하지만 우리 둘 다 군인으로서 상급의 명령에는 복종해야 할게 아니오?! 그리고 그 어디에 가도 우리의 마음이 변하지만 않으면 되는거요.”순자는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때 마음이 불안하기는 나도 순자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남자대장부로서 나마저 순자처럼 울먹거릴수는 없었다. 나는 애써 마음을 눅잦히며 울먹거리는 순자를 달랬다. “순자,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마오. 뭐나 다 잘될거요.”우리는 학교대문을 나와 그저 발길이 닿는대로 걷기 시작했다. 한동안 둘은 별로 대화도 없이 그저 각자의 생각에만 골몰했다. 그러다 우리는 부지중 약속이라도 한것처럼 학교뒤 공원에 있는 그 아름드리 홰나무밑에까지 가게 되였다. 순자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홰나무를 보자 갑자기 참았던 감정이 북받쳤던 모양이였다. 그녀는 나무를 붙안고는 오래동안 흐느꼈다. 그도그럴것이 그동안 그 아름드리 홰나무한테도 정이 들었다고나 할가? 나는 한동안 그녀한테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적당한 말구절을 생각해낼수가 없어 그냥 그녀가 우는대로 내버려두는수밖에 없었다. 한편 순자가 울고있는 사이에 나는 칼로 나무껍질에 글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내가 새긴 글자는 다음과 같았다. “이 마음 영원토록 변치 말자!(永不变心!)”한동안 실컷 울고난 순자는 내가 새긴 글자를 보더니 그제야 머리를 끄덕이며 나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는것이였다. 이에 나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는것으로 위안의 말을 대신하는수밖에 없었다. 그날 우리는 이제 누가 여기를 먼저 찾아오게 되면 나무에 자기의 이름을 새기는걸로 상대방한테 사랑의 마음을 알리자고 한 다음에야 그 자리를 떴다. 그뒤 또 며칠이 지난 어느날 밤 아니나다를가 집합나팔소리가 울리더니 역시 전체 학생들을 학교마당에 집합시켰으며 지난번과 같은 명령이 하달되였다. 헌데 이번에는 생각밖으로 내가 아닌 순자가 이동명단에 포함될줄이야. 이는 너무나도 우리의 상상밖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순자를 포함한 녀학생들만은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지 않으리라 여겼던것이다. “길성동무, 우리 이제 어떻게 되죠?”전번처럼 흐느껴 울지는 않았지만 순자는 여전히 울먹울먹한 목소리였다. 옆에 숱한 학생들이 있는지라 극력 자제하는것이 분명했다. “순자, 어디로 가든간 도착하자마자 인차 편지를 쓰오. 나도 여기에 있다가 언제 떠날지 모르니까 말이요.”순자는 말보다는 고개를 끄덕이는걸로 모든것을 대신하였다. 순자는 마지막으로 조용히 나의 손을 잡았다. 평소같으면 가슴팍에 안길 그녀였으나 가까스로 리지를 잃지 않고있는것이 분명했다. “부디 몸 조심하세요.”“순자도 마찬가지요. 녀자의 몸으로 더욱 건강에 류의하길 바라오.”우리는 서로 상대방을 향해 군례를 붙였다. 순자는 떨어지지 않는 발길로 돌아서더니 제일 마지막으로 군용트럭에 올랐다. “부르릉” 하고 엔진소리가 나더니 군용트럭은 자리를 떴고 순식간에 학교대문을 빠져나갔다. 순자를 떠나보낸 나는 한동안 학교마당에 우두커니 서있다가 겨우 묵직한 발걸음을 옮기며 숙소로 향했다. 순간, 나는 나자신이 울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때까지 성장해오면서 나는 거의 눈물이라고는 모르는 인생을 살아왔었다. 부모님한테서 욕을 먹거나 매를 맞는 일이래야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몇번 안되였기에 울 일이 별로 없었거니와 아주 힘들거나 역경속에서도 눈물이라고는모르고 살아왔다. 그만큼 나는 의지가 견강하거나 지독한 사람같기도 했고 목석같은 인간이기도 했다. 헌데 그런 내가 그 시각 울고 있었던것이다. 왕왕 소리내여 운것이 아니라 몰래 조용히 굵직한 사나이의 눈물을 떨구고 있었던것이다. 아, 사랑이란 과연 이런것이였던가! 그날밤 나는 그만 실면하고 말았다. 순자를 전쟁터 아니면 아주 어렵고 힘든 곳으로 보낸것만 같았다. 그녀가 가는 곳은 과연 어디인지? 복건인지 아니면 동북변방의 어느 한 두메산골에서 벌여놓은 전쟁준비공사장인지? … 그 이튿날에도 나는 여전히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책을 들어도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숙소청소를 하려고 비자루를 잡아도 정신을 집중할수가 없었으며 자꾸 어두커니 서있기가 일쑤였다. 머리속에는 온통 순자에 대한 생각뿐이였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번씩 학교뒤 공원의 홰나무아래를 찾아가서는 홰나무에 새겨진 “영원히 변치 말자!”란 글을 어루쓸기도 하고 홰나무주위를 몇번이고 배회하기도 했다. (지금쯤 순자는 어디에 있을가? 그도 지금 나를 생각하고있을가?…)드디여 어느날, 나를 포함한 마지막 진의 학생 10여명도 떠나는 날이 되였다. 역시 밤중에 집합나팔이 울리고 정위의 명령하달이 있는 등으로 그 절차는 종전과 같았다. 다르다면 마지막 진으로 떠나는 학생들은 거개가 조선족인 나를 포함한 위글족, 몽골족, 만족 등 소수민족 학생들이였으며 이전에 떠난 학생들과는 달리 책이나 옷 그리고 가질수 있는 생활용품들을 다 가질수 있게 한것이였다. 그러자 나는 다른건 다 제쳐놓고 다른 학생들이 버리고 간 책까지 트렁크에 넣다보니 트렁크 두개가 책으로 꼴똑 찼었다. 군용트럭에 앉아 학교대문을 빠져나가는 순간 나는 학교건물과 교정 그리고 학교뒤 공원쪽을 한번 바라보았다. 특히 학교뒤 공원을 바라보니 공교롭게도 그 아름드리 홰나무가 보이였다. 나와 순자의 사랑을 견증하며 땅에 버티고 서있는 아름드리 늙은 홰나무 ㅡ 순간, 나는 “아차”하며 하마트면 소리를 내지를번 했다. 글쎄 순자와 재상봉할만한 그 어떠한 여건도 마련하지 못했던것이다. 그녀한테서 온 편지를 받지 못했는가 하면 상해에 있는 순자네 집 주소도 적어두지 못했고 또한 나의 집주소를 순자한테 적어주지 못했으니 말이였다. ※ ※ ※ 순자와 서로 주소교환을 하지 못한것, 그것은 오래도록 나의 후회거리로 됐다. 모든것이 나의 불찰과 실수로 빚어진것만 같았다. 몇년뒤 나는 요행 기회가 생겨 상해로 갔던 걸음에 상해경비구사령부 근처에 있는 순자네 집으로 찾아갔었으나왕륙생정위는 이미 은퇴하였고 집주인도 진작 바뀐 뒤였다. 이어 나는 또 나와 순자가 늘 만나군 하던 학교뒤 공원의 아름드리 늙은 홰나무 밑으로 찾아갔으나 나무에 새로 글을 새긴 흔적은 발견할수가 없었다. 순자가 찾아오지 못한것이 분명했다. ……(연재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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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4-05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 윈저성
    윈저성의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영국, 지점: 런던 서쪽의 원저진 함의: 세계상 현존하고 있는 가장 큰 거처로 제공되고 있는 고대성곽 위저성은 템즈강변의 한 산정에 자리잡고 있다. 1070년, 로만디공작(후세의 월럼 1세)가 이 산정에 성곽을 건설했는데 이름을 윈저성이라고 달았다. 그 뒤 역대의 군주들의 수건을 거쳐 윈저성은 규모가 5.3만평방미터에 달하는 영국에서 가장 큰 성곽으로 되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윈저성은 일부 국왕들이 혼례와 장례를 치르던 곳이기도 했고 왕실 성원들이 거처하는 곳이기도 했다. 오늘날 영국여왕 및 그 가족들은 아직도 이 곳에서 주말을 보내기도 한다. 그리고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왕실성원들이 이곳에 모여 경축활동을 벌이기도 한다. 3대 정원 윈저성에는 서, 중, 동으로 세개의 정원이 있는데 도합 수천개의 방이 있다. 그리고 정원 중 서쪽 정원은 하원이라고 하고 성곽의 가장 외곽위치에 있는데 정원을 한바퀴 도노라면 고색이 완연한 방들이 가득하다. 중간의 정원에는 아름다운 상 조르제성당 (圣. 乔治小教堂)이 있는데 이 곳은 역대의 군주들이 “가터시사(嘉德骑士)”의 훈장수여식을 거행하는 장소이였으며 영국의 많은 국왕과 왕후들이 세상을 떠난 뒤의 안식처이기도 했다. 다음 동쪽 정원은 주로 내빈들이 활동하던 곳으로 접대청, 객실, 화랑, 왕의 음식청 등 방들로 구성되였다. 축소판왕궁 윈저성내에는 또 인형궁이 있는데 이는 흡사 축소판의 영국왕궁을 방불케 한다. 이 궁전은 높이 4미터, 너비 2미터, 사람모양새 또한 모두 15센치미터를 초과하지 않으며 전반 궁전의 원형보다 12배로 축소된 것이다. 인형궁은 설계가 정교하고 매개 세절마다 그 제작이 한치의 오차도 없다. 심지어 비례에 따라 축소된 엘리베이터와 보험궤 등도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사용할 수 있다. <리포터 김철균>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4-05
  • 해외견문 시리즈(1) 대서양의 진주 - 라스팔마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남아프리카공화국 항구도시 더반에서 출항해 희망봉기슭을 에돌아 북쪽으로 계속 항행하노라면 대서양 바다의 진주로 불리우는 카나리아군도의 라스팔마스를 거치게 된다. 라스팔마스 아름다운 항구도시이다. 유럽땅이지만 위도가 아프리카주와 가까이에 있고 또한 대서양난류의 영향으로 사시장철 꽃이 필수 있는가 하면 눈내리는 날을 거의 볼 수 없는 것이 이 곳이 특징이다. 한편 라스팔마스는 대서양에서 조업하는 수많은 작업선과 이 곳을 지나는 원양화물선들이 반드시 거치게 되는 관문으로서 한국선원들은 이를 두고 “제2의 부산”이라고 친절히 불러주기도 한다. 라스팔마스 – 아름다운 항구도시이다. 바다에서 해가 뜨고 바다에서 해가 지는 곳, 아열대기후의 영향으로 사시절 따스한 날씨가 계속되고 야자수가 우거진 거리를 벗어나면 곧 해안선과 해수욕장이 펼쳐지며 무역선이 드나드는 항구에 들어서면 낭만과 로맨스가 엮어지는 청춘의 도시이다. 1990연대초 내가 승선했던 선박 “코리안스타”호의 스켓쥴이 라스팔마스와 아프리카 및 유럽 쪽이 비교적 많은 까닭에 우리는 그 곳에 자주 입항했고 인상 또한 꽤나 깊었다. 본선이 라스팔마스항에 처음 입항한 것은 1991년 6월초의 어느 날 저녁 무렵이었다. 배가 부두에 대이기 전 그닥 멀지 않는 해상에서 보는 라스팔마스는 한폭의 화려한 수채화를 방불케 했다. 노란색, 분홍색, 새하얀 색의 건물들은 산기슭과 산꼭대기까지 올리뻗으며 지은데서 일종 입체형태를 이루고 있었고 저 멀리 해수욕장에는 수많은 남녀들이 한데 어울려 노니는 것이 보이었다. 그 때 본선은 라스팔마스항 빤따랑부두에 정박하였다. 그날 저녁 우리 일행이 아무런 상육수속도 없이 항구입구를 벗어나자 곧바로 시내가 펼쳐졌는데 이럴 변이라구야. “대서양상회”, “민족촌식당”, “무궁화 백화점” 등 수많은 우리 글 간판들이 유표하게 한눈에 안겨와 진짜 한국의 어느 한 항구도시에 오지 않았나 하는 착각을 줄 지경이었다. 일명 “코리아타운”이라고도 하는 이 거리에 들어서자 아니나 다를가 숱한 한국선원들이 활개치며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어느 상가의 스피카에서는 한국가수 설운도의 “떠나가는 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등대불이 깜빡깜빡 배길따라 춤을 추는 밤/ 쌍고동을 울리며 가는 배 현해탄을 떠나가는 배// 자갈집아줌마가 손흔드는 밤/ 내 친구 다시 돌아 손 흔드는 밤// 정이 들었어 정이 들었어 눈물지으며 떠나가는 배/ 또 만나요 또 만납시다 손흔드며 떠나는 형제… 뒤이어 우리가 들어선 곳은 대서양상회였다. “아이구, ‘코리안스타’호의 아저씨들이군요. 어서 오세요.” 주인아줌마는 본선의 한국선원들을 잘 아는 듯 했다. 이어 우리가 차탁에 둘러앉자 그녀는 우리한테 커피와 맥주 중 요구대로 공급했는데 돈 한푼 받지 않았다. 대서양상회에서 우리 일행은 많은 선박에서의 생필품과 도서 등을 사고는 그 아줌마와 굳바이를 했다. 거기서 나오자 날은 이미 어두워져 거리는 황홀한 등불들로 오색영롱했다. 우리는 그 길로 택시에 앉아 싼타까따리나 공원광장으로 향발, 그 곳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시계초침이 8시 30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그 때의 공원광장은 이미 숱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로천에 식탁을 둘러놓고 술을 마시며 여가수의 팝송을 듣는 손님들과 맨봉당에 돛자리를 펴고 앉아서는 목사의 설교를 듣는 신자들, 또한 현지처와 함께 배회하는 선원들로 밤분위기는 짙어만 갔다. 그날 밤 우리는 싼따까리나 공원광장에서 자정까지 술을 마시며 팝송과 쏘프라노 가수의 노래를 흠상하다가 귀선했다. 2 그 이튿날 오후 1항사가 식당안에 있는 공고란에 뭔가 써내려 갔다. 그 것을 읽어본즉. 금일 저녁 갑판 및 기관 부서당직자와 전체 선원들은 단체행동을 할 것이오니 식사 후 선원마다 샤와들 마치고는 외출복 차림으로 대기하여 주십시오. 1항사 6월 ×일 나는 그 집단행동이란 것에 대해 몹시 궁금했다. 1항사한테 물어봤으나 그가 가보면 알 것 아니냐면서 알려주지 않았다. 혹시 교회같은 곳에 가려는 것은 아닌지? 그러다가 뒤 따라온 통신장한테 물어봤더니 오늘밤은 좀 자극적인 곳을 찾을 것이니 가보면 끝내줄 것이라 했다. 저녁식사 후 내가 주방장 함께 부랴부랴 설걷이를 마친 뒤 샤와하고 외출복차림으로 나가보니 진작 버스 한대가 대기하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둘이 오르자 마자 버스는 “부르릉”하고 시동을 걸었다. 버스가 당도한 곳은 싼타까따리나쪽에 있는 호텔강촌의 한식관, 거기서 우리는 또 띠를 풀어놓고 마시기 시작했다. 모두들 저녁식사 뒤라 입맛이 별반 당기지 않으련만 그곳의 불고기와 참치사시미 그리고 깍두기 등은 어찌도 맛있게 만들었던지 주방장조수인 나는 진짜 두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음식을 파한 뒤 우리는 또 버스에 앉아 진정한 목적지인 무에그랑데쪽의 소극장으로 갔다. 거기에 도착하자 번쩍번쩍하는 네온싸인속에 여자나체광고가 유난히도 안겨왔다. 티켓은 인당 2000페스타(20불), 좌석에 앉자 요구에 따라 콜라나 맥주 한깡통씩 차례졌다. 듣는 바에 따르면 그 외 더 요구하면 한 깡통에 또 1000페스타씩 받는다기에 우리는 될수록 깡통맥주 하나를 갖고 조금씩 입에 대는 시늉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대는 여느 극장의 무대와는 달리 원탁형으로 꾸며졌는데 출연자들의 탈의실, 휴식실외 3면에 관중들이 앉기로 되어 있었으며 그 곳에서의 촬영은 일절 엄금이었다. 공연이 시작됐다. 첫 종목은 10여쌍의 남녀가 나와서 추는 스페인 민속춤이었고 그 다음의 것은 스프라노가수의 독창이었다. 특히 그 쏘프라노가수의 두번째의 노래는 어딘가 듣던 곡이었다. 자세히 생각을 더듬은즉 그 것이 유명한 “선구자”가 아닌가.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이는 일종 한국선원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종목임에 틀림없었다. 비록 스페인어로 번역했지만 가사중 “일송정”, “해랑강”, “선구자” 이 세 단어만은 음역한 것으로서 그 것이 같은 곡에 다른 가사를 붙인 것이 아니란 것을 인차 알 수 있었다. 참, 그 옛날 간도의 용정에서 불려졌다는 그 “선구자”의 노래, 그 것을 오늘 대양 건너 그 스페인땅에서 듣노라니 자못 감개무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헌데 한국선원들의 자극적인 것이란게 고작 이 것인가? 양대가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파는 격이 아닌가? 하지만 그 것은 착각이었다. 몇 종목의 춤노래가 끝난 뒤 무대가 차츰 어두워지더니 드디어 알몸으로 실 한오리 걸치지 않은 아가씨가 무대에 나타났다. 금발머리에 곡선미가 뚜렷한 체형, 뭘 발랐는지 그 흰 피부는 왜 그리도 윤기나는지?… 뒤이어 검은 협객복장을 한 사나이 한명이 숱한 칼을 철사끈에 꿰매들고 나타나서는 그 알몸아가씨를 널판자가 대인 벽에 세우는 것이었다. 또 시중군 한명이 나와 사나이의 눈에 검은 천을 두르는 것이었다. 아니 저 아가씨를 과녁으로 삼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 천사같은 아가씨를 향해 칼을 뿌리다니. 소름이 꽉 끼쳤다. 그러건 말건 그 사나이는 아가씨를 향해 칼 재주를 피워대기 시작했다. 첫 칼은 머리위에 꽂히고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칼은 목 양측에 박히고 그 다음의 칼들은 양측 겨드랑이밑과 허리양쪽켠 그리고 양쪽다리 사이로 면바로 실수없이 가 박히었다. 그 아슬아슬한 종목이 막을 닫자 그 다음은 웬 한국아가씨가 역시 알몸으로 서커스표현을 했고 뒤이어 아까 그 칼앞에 섰던 아가씨가 또 나와 갖가지 해괴망칙한 기교를 피워냈다. 그 것은 주로 그녀의 성기를 이용하여 표현하는 기교였다. 그 걸로 맥주병 뚜껑을 따는가 하면 거기에 전등알을 밀어넣어 불이 반짝하고 켜지게도 했으며 또 거기에 노끈 한오리가 달려 있었는데 글쎄 그 것을 당기니 그 노끈을 따라 숱한 대못, 가위, 면도날 등이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음 그녀는 어떤 둥근 탁자같은데 눕는 것이었다. 그러자 누군가 나와 그녀의 성기속에 닭알 하나를 밀어 넣었는데 이윽해서 그녀가 소리를 지를 적마다 닭알 하나씩 빠져 나오더니 나중에 한바구니가 꼴똑 차는 것이었다… 공연의 마지막 종목은 두 남녀의 사랑을 제재로 한 무지컬이었다. 그 슈제트는 다음과 같았다. 남편있는 한 여인이 몰래 군사내와 사랑을 속삭인다. 하루는 남편이 없는 틈을 타서 그녀는 그 사내를 집으로 끌어 들이기고는 벌고 벗고 섹스파티를 벌인다. 그런데 그 시각 남편이 돌아와 문을 두드리니 사내는 옷장 뒤에 숨는다. 남편이 들어오자 바람으로 옷을 벗으며 안해한테 덮쳐 들었고 이에 그녀는 거의 순종적으로 몸을 맡긴다. 다음 순간 옷장 뒤에 서서 둘의 섹스장면을 보는 사내는 불타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뛰쳐나와 도전을 건다. 둘은 칼 한자루씩 나누어 갖고 격투를 벌인다. 치열한 맞칼질 중 군사내가 점점 수세에 처하여 지게 될 무렵, 여인은 도리어 어떤 물건으로 남편의 머리를 까부신다. 쓰러져 죽는 남편과 깜짝 놀라 서있는 군사내, 마침내 엄연한 현실앞에서 그 남녀는 한차례의 격열하게 포옹을 한 뒤 함께 그 곳에서 탈출한다. …… 옛날의 강제혼인같은 것에 반항하여 참된 사랑을 추구하는 것을 담은 무지컬 같았는데 섹스장면같은 것은 직접 남녀가 어울려하는 것으로서 관중을 많이 끌기 마련이었다. 이로보아 전반 라스팔마스의 문화산업이란 것도 고상한 것과 방탕한 것이 “동거”하는 혼합체라고 해야 하겠다. 그외 라스팔마스에 대한 깊은 인상이라면 1992년 4월에 있은 등대탑해수욕장 견문이었다. 라스팔마스는 워낙 따스한 곳이었지만 본선선원들이 1박 2일을 목적으로 남쪽 등대탑쪽으로 갈수록 날씨는 점점 무더워났다. 듣는 말에 따르면 라스팔마스 도심과 등대탑쪽과의 기온차이는 10도 좌우라 했다. 그 것은 일명 라체해수욕장이라는 그 곳이 폭이 수백미터, 길이 20여리나 되는 백사장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해수욕장으로 되었고 숱한 관광객들이 모여들기 마련이었는데 그 거개가 서부유럽에서 온 관광객들이었다. 우리는 에이젠트가 알선해 준 호텔에서 행장을 푼 뒤 인차 수영복을 갈아입고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가 그 때는 이미 숱한 벌거벗은 남녀들로 해수욕장은 그 매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태양산밑의 둥근탁자에 앉아 커피나 음료를 마시는 나체의 남녀들, 자기의 성기를 활짝 드러낸 채 모래밭에 반듯이 누워 있는 아가씨들, 또한 나체의 몸으로 남녀가 뒤섞여 배구, 탁구, 배드민톤 등을 치는 이들도 있고 숱한 사람들이 둘러보는 가운데 백일하에 섹스쇼를 벌이는 곳도 있었다. 헌데 이상한 것은 서양인들은 타인의 성기에 대하여 그저 사람한테 달린 입, 코, 눈이나 귀처럼 생각하면서 음욕과 대상으로는 여기지 않는 것처럼 보이었으나 우리가 여인들의 나체를 갑자기 보니 왜 사타구니에 있는 그 것이 자꾸만 고개를 쳐들던지? 또한 섹스쇼같은 것을 벌이는 곳이 보이면 우리는 서로 더욱 잘 보려고 우르르 몰켜들기가 일쑤였고 서로 밀치면서 목을 빼들고 발굽치를 쳐들군 했다. 순간 나는 우리 연변에도 이런 나체해수욕장이나 나체쇼를 벌이는 곳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번 굴려 보았다. 보나마나 수습못할 치안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이 뻔했다. 그리고 소위 성해방에 대해서도 그랬다. 서양에서는 부부가 서로 성해방을 해도 별문제였지만 중국사회에서는 벌써 관념상 자신은 성해방하려 하나 자기의 안해나 남편이 성해방하는 것은 용서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왜냐하면 서양사회의 성해방은 흔히 부부사이의 만족되지 못한 부분을 타인을 통하여 향수하는 의식형태였지만 우리의 성해방은 부부일방에 대한 직접적인 배반으로 표현되며 그 뒤에는 치고 박고하는 싸움과 가정파산, 죄없는 고아의 출현 등 사회의 골치거리를 초래하기 때문이었다. 나체해수욕장을 거닐노라니 우습고도 재미나는 일도 가끔씩 생기군 했다. 글쎄 한번은 웬 서양인부부 비슷한 남녀가 다가오더니 그중 여인이 우리 일행중 한 선원의 남근을 가르키며 웃으면서 뭐라고 씨벌이는것이었다. 그것은 요렇게 작은 물건이 남자구실을 어떻게 할 수 있으며 여자한테 만족줄 수 있느냐 하는 모양, 헌데 그 뒤를 이어 그의 그 것이 급기야 발딱하며 버섯모양의 대가리를 쳐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자 이에 재미있다고 더욱 깔깔대며 웃어대는 여인과 한쪽 켠에 물러서서 흥미있게 구경하는 그 사내, 하긴 그 사내의 물건과 우리의 것을 비교해 볼라니 그 싸이즈가 확실히 먹음직한 가지와 고추의 차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그외 성기도 성기라겠지만 우리의 몸과는 달리 그들은 팔다리와 배꼽아래뿐 아니라 가슴팍까지 온통 털로 뒤덮여 있는 것이 우리보다는 퍽 사나이다와 보이기도 했다. 내가 만약 여인이라 해도 그런 품에 한번 안겨봤으면 하는 충동을 느낄만 했다. 그날 저녁, 선장은 우리한테 그 누구건 오늘밤 아가씨를 꼬셔 오기만 하면 섹스화대는 자기가 부담하겠노라고 했다. 그러자 선원들은 좋아서 득의양양해했다. 그도 그럴것이 낮에 나체해수욕장에서 본 여인들중 이쁘고 섹시한 아가씨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대낮이었으니 그렇지 밤이라면 몇번이고 아가씨를 골라잡고 덮쳐들었을 선원들이었다. 헌데 이 곳에서만은 선원들이 착각해도 크게 착각했다. 우리가 나이트클럽으로 간 뒤 선원들이 혼자있거나 순 아가씨들로 군체를 이룬 좌석에 찾아가서 꼬셨으나 극상해서 함께 촬영하거나 물마시는 것까지는 응했으나 섹스요청에는 한결같이 거부해 나섰다. 특히 2항사의 말은 좀 속되었던지 독일에서 왔다는 한 아가씨는 마시던 맥주를 그대로 2항사의 얼굴에 확 치는 것이었다. 보아하니 여기로 모여든 여인들 중 섹스를 목적으로 한 여인은 기본상 없는듯 싶었다. 이 것으로 우리의 선원들은 처음으로 이렇듯 훌륭한 곳에서 가장 고독한 밤을 보내게 되었다. 4 1992년 10월 네덜란드의 로톨담에서 본선 “코리안스타”호가 러시아인들한테 팔린 뒤 중국 조선족선원 4명은 또 다시 항공편으로 라스팔마스에 날아와 대기하면서 재 승선을 기다리게 되었으며 그 수십일간의 체류로 라스팔마스에 대해 더욱 고찰할 수가 있었다. 우선 라스팔마스에 거주하는 수천명의 한국인들에 대한 삶의 실태였다. 라스팔마스에 도착하자 그 곳의 이탈만대리점에서는 우리의 식사를 호텔강촌의 한식관에 배치하였다. 하여 오래간만에 팔자가 늘어져 하루 세끼 해주는 밥을 먹으면서 시내구경이나 하며 놀아 대는데 하루는 호텔강촌의 이횡권 사장님이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 뜻인즉 일당 3000페스타(30불)씩 줄테니 한식관 주방장 조수로 일할 수 없느냐는것, 이에 선박의 주방장출신인 내가 마다할 것이 아니었다. 헌데 육지에서의 그 일이 해상선박에서의 주방일보다 곱절 힘들고도 피곤할 줄이야. 그때 우리는 오전 9시가 좀 넘어 출근해서는 주방과 식당청소를 한 뒤 10시부터 정식 근무를 시작했는데 내가 맡은 분야는 마늘껍질을 발라내고 야채를 다듬고 고기를 썰어놓는 등 진짜 주방장이 요리를 하는데 있어서의 시중군이었다. 그러다가 일단 손님들이 들이닥치면 주방장의 요구에 따라 일하는 외에도 요리를 나르고 그릇을 씻기도 했으며 또한 그런 일도 없으면 하다 못해 유리를 닦거나 냉장고안의 얼음까기 등 일손을 놓을 사이가 없었다. 이렇게 자정까지 맴돌아치다 보면 온몸이 해나른해 나기가 일쑤였으며 노동시간도 보통 15시간 좌우씩 되었다. 이는 일이 없으면 트럼프나 화토치기를 하는 연변의 음식점실태와는 현저한 대조를 이루었는바 그 돈이 진짜 뼈돈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그 곳의 주방장은 자기의 요리기술을 남한테 배워주기를 극력 꺼렸다. 이는 일종 경쟁사회에서의 자아생존수단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요리를 하노라면 알게 모르게 주방조리수한테만은 그 솜씨를 보여주기 마련인바 주방장은 나를 부려먹기 위해서도 칼질하는 법을 배워주고 고기, 야채와 양념은 각각 얼마씩이라고 소리칠 수밖에 없었으며 나 또한 그 것을 머리속에 기억하고는 후에 수첩에 적어두군 했다. 하여 나는 안속을 챙겨 각종 찌개, 불고기, 무침, 김치, 젓갈, 짠지 등을 만드는 법을 익혔으며 웬간한 한식에서의 한식요리 수십가지는 만들 수 있는 자신감도 갖게 됐다. 한편 라스팔마스에 거주하는 한국인 거개가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그것이 아마 그들이 그 생소한 땅에 깊이 뿌리를 박을 수 있는 비결인듯 싶어졌다. 다음으로 라스팔마스 현지인들에 대한 인상이다. 19세기의 한시기 영국이 세계 각 지역에 식민지를 두고 있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불리워졌다면 스페인 역시 그의 버금으로 아프리카와 중남미의 많은 나라들을 강점한 적이 있었기에 그 곳들에서 수탈한 재물로 본토를 살지게 했으며 그 밑천으로 스페인 사람들은 20세기 말엽에 들어서까지도 여유있는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 중 나라의 복리사업이 아주 잘돼가고 있다는 인상을 크게 주었다. 그 실례들로는 일하기 싫어 빈둥거리는 사람한테도 매달 실업수당을 발급했고 범죄자에 대한 사형제도가 진작 취소됐는가 하면 범죄자한테도 매주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휴가를 주어 집식구들과 모이게 했으며 일한만큼의 봉급까지 지불하는 상황이었다. 라스팔마스에서 우리는 한국으로부터 그 곳에 와서 식당일을 하는 박영애라고 부르는 아줌마를 알게 됐는데 그녀의 남편은 살인죄로 당지 교화소에 수용되여 있는터였다. 그 때 그녀는 남편이 맡아준 세집에 들어 일하러 다니면서 1주일에 한번씩 남편을 집에서 맞군 했는데 그것이 감동돼서인지 “스페인사람들은 한국사람보다 억수로 너그러요” 라고 자랑하군 했다. 사회가 이렇게 되자면 우선 국민들의 문명정도가 따라가야 하는 법이란 것이 가장 큰 인상이었다. 우리가 볼 때 그 곳 사람들은 진짜 문명스러웠는바 예하면 택시기사는 거리에서 근본 경적을 울리는 법이 없었고 일단 우리가 거리를 건너려 하면 택시를 세워놓고 먼저 건너가라는 손시늉부터 했으며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 역시 우리가 뭘 좀 물으면 열심히 가르쳐 줬는가 하면 그래도 안되면 꼭 한국인이나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을 붙여 주고야 지나가는 것이었다. 당지의 한국인들의 소개에 의하면 그들은 옛날부터 잘 살았기에 돈에 대한 집념이 옛날 못살던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처럼 강하지 않았으며, 인간이란 금전과 함께 인간자질 및 지식수준까지 함께 같은 차원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관념이라 했다. 그렇기에 이전에도 본선이 입항할 적마다 숱한 교회의 집사들 (한국인 집사 포함)이 찾아와 우리를 위해 기도를 드리고도 돈은 물론 음료수 한모금 마시지 않고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외 현지인과는 달리 그 땅에 사는 외국인들 사이에는 경쟁이 심했다. 20여년 전에는 한국인들이 내노라 하고 우쭐거렸지만 그 때는 라스팔마스에 무리로 쓸어드는 인도인들한테 큰 도전을 받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머리가 좋고 부지런한 반면 노인과 아이들만은 장사에 내몰지 않았지만 당시의 인도인들은 이 두 부류까지 동원되는가 하면 여인들은 드러내놓고 매음을 했으며 또한 라스팔마스로 들어오는 한국물건은 모두 비싼 것들이어서 가격상 벌써 값싼 인도물건한테 우세를 빼앗기고 있었다. 이렇듯 경쟁과 도전의 소용돌이속에서도 축복할만한 것은 라스팔마스란 이 낯선거리에도 “차이나 연변술집”이란 레스토랑이 선 그 것이었다. 이름그대로 이 식당의 마담은 연변 화룡의 여성이었는데 길림성대외경제합자회사 특파원의 신분으로 그 곳에서 일을 보는 한편 장사도 하고 있는 터였다. 이 술집의 출현으로 우리는 기쁘기도 하고 근심스럽기도 했다. 기쁘다는 것은 이 식당을 발판으로 더 많은 연변의 조선족들이 그 곳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근심스럽다는 것은 그 치열한 경쟁속에서의 이 식당의 운명때문에서이다. 물론 나는 이것이 부질없는 근심으로, 그 식당이 인젠 식당만이 아닌 종합서비스센터로 부상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5 라스팔마스에 체류하고 있으면서 나는 늘 그 생소한 땅에서 우리의 고향을 생각하게 되었다. 꿈마다 그리워 가닿게 되는 고향, 허나 고향은 그 곳 라스팔마스에 비해 확실히 뒤떨어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럼 경제적으로 따라잡기는 아직도 기나긴 시간이 수요되는 것, 하다면 목하 할 수 있는 것이란 사상해방과 관념갱신부터일 것이라 느껴졌다. 외국인과 우리와의 사상 및 관념차이, 하지만 그 것도 일조일석에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난제인 것이다. 그 때 연변에서 갓 출국한 선원들한테서 들을라니 연변도 인젠 개방돼서 양고기산적집이나 다른 식당들에서도 아가씨동반을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아가씨동반이라니 그 뜻을 알만하기도 했다. 참, 양고기산적 몇개나 요리를 몇접시 놓고 아가씨를 붙혀 주다니, 그것이 아가씨장사이지 어떻게 음식업이라 하겠는가. 따라서 어떤 곳에서는 아가씨맛을 먼저 본 뒤에야 음식맛을 본다고 하니 정직하고 점잖은 사람은 시름놓고 들어 갈만한 음식점이 없어지고 공연히 남의 오해를 받기가 일쑤인 것이다. 왜냐하면 라스팔마스의 싼따까따리나, 무에그랑데 등 거리는 정부에서 정해놓은 사창가로서 아가씨들이 공개적으로 남자들한테 감겨드는가 하면 정기적으로 종합검진을 하고 건강증이 있어야 손님을 접대할 수 있게 되었지만 우리 연변은 도대체 어디가 “매음굴”이고 누가 창녀인가를 도무지 가릴 수가 없겠으니 말이다. 한편 매음녀들한테서 생계유지같은 것은 아득한 옛말로 되어 매음치부로 되고 있어 점차 금전관념이 정조관념을 대체하는 바람이 일 수밖에 없으며 그 뒤에는 살인, 협잡 등 범죄가 따르기 마련인 것이다. 다음으로 수입과 지출이 정비례되지 못하는 연변의 사회실정이다. 라스팔마스에 거주하는 현지인들을 볼 때 그들은 확실히 돈이 많은 반면 한심한 깍쟁이들이었다. 우리가 한국사람을 서울깍쟁이라고들 했지만 외국인들에 비하면 한국사람은 그래도 외상이라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근성이 조금은 남아있는 듯 했다. 술집같은 곳에 가면 한국인들은 그래도 불고기에 소주라도 마시지만 라스팔마스의 현지인들은 흔히 맥주 두 깡통에 땅콩 한접시면 2~3시간씩 앉아 면담하군 했는데 처음에 우리는 그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차츰 날이 감에 따라 우리는 그들의 작법에 대해 인정하게 되었는바 배불리 먹고 술주정하는 것보다 조용히 앉아 일처리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일어서는 것이 퍼그나 신사스러웠다. 하다면 그들한테 돈이 없어서일가? 그 것이 절대 아니었다. 이는 라스팔마스뿐 아니라 유럽인들 거개가 그런 것 같았다. 네덜란드의 로톨담 항구에서 있은 일이다. 그 때 본선은 꾸바에서 싣고 온 밀감을 하역하게 됐는데 게으른 흑인인부들이 말썽만 일으키면서 일을 하지 않아 작업이 계획보다 얼마동안 더 늦어질지 모를 상황이었다. 그러자 안달아난 선장은 인부들을 바꿔줄 것을 강력히 항구측에 요구했다. 허나 항구측에서는 인건비가 싼 흑인인부들을 바꾸기 아쉬워 본선 선장과 1항사를 식당에 청하는 것으로 아퀴를 지으려 했다. 그런데 만포식하고 돌아올 줄 알았던 두 분은 맥주 두깡통씩만 마셨다는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주인측에서 맥주 한컵을 갖고 두 시간씩 끌어 대는 통에 아무리 손님측이라고 해도 그렇지 도무지 마구 마실 수가 없더라는 것이었다. 하다면 이런 일처리가 중국에서는 통할 수가 있을까? 당시 금방 출국한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동북아 금삼각지인 훈춘개방바람에 사람마다 통이 커져 이전에는 순두부집이나 양고기산적이면 고작이던 것이 인젠 중식이요, 양식이요 하면서 하루에 수백원 혹은 수천원씩 탕진한다고 했다. 그리고 친구나 손님한테 아가씨를 붙여줘야 제일 성의있는 것으로 인정받는다니?! 헌데 그러자면 매일같이 그만한 돈이 있어야 할텐데 그렇게 돈이 많을 수 있을까? 그럴리 만무하다. 그러면 남을 협잡하기 마련, 사업을 위해 협잡하면 몰라도 술먹고 즐기기 위해 인격을 팔면서 협잡이고 그 협잡도 못하면 또 외상으로 된단다. 그러면 그 외상 때문에 피해 다니고 얻어 터지며 싸울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라스팔마스의 현지인들한테는 술 때문에 외상이란 있을 수 없거니와 술 때문에, 외상때문에 싸우는 일은 더욱 있을 수 없었다. 라스팔마스에서 술먹고 주정하고 싸우는 건 거의 모두가 우리 동양인들이었는데 현지인들은 그들을 온역 피하 듯 피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현지인 택시기사를 칼로 찍어 죽인 한 연변선원이 법정에 나서게 되었는데 그 피해자의 아내가 하는 말이 “저 동양야만인들한테서 무슨 보상금을 받겠는가. 다만 저 놈들더러 이 섬에 상육하지 못하게 하라”고 절규했다 한다. 그러니 동양인의 이미지가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가 라스팔마스를 떠날 때만 해도 그 곳에는 배에서 도망친 연변의 젊은이들이 10여명씩 줄쳐 다니며 거리를 휩쓰는 걸 볼 수 있었다. 일자리도 돈도 없는 그들이 매일 매일을 어떻게 보낼까? 그 뒤에는 분명 절도와 강탈같은 범죄가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우리 연변인들은 어디가나 표가 난다”고 자랑같이 말했지만 그것이 어떻게 자랑거리인가? 조선, 한국이나 러시아에 가서도 꼭 말썽과 골치거리를 만드는 연변사람들의 이미지, 뒤떨어진 사회에서의 저질교육과 낮은 인간자질 등 이 모든 것이 대양건너 대륙 지나 저 유럽땅에까지 루가 미치고 있으니 연변의 젊은이들여, 정신차릴 때가 왔는가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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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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