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2-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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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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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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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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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 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②
    1927년, 중국과 독일의 접촉을 시작으로 항일전쟁 직전까지 독일은 중국의 최대 협력 파트너였다. 원래 독일 군사고문은 장개석에게 60개의 독일의 기계사단을 통폐합해 내놓아야 했지만 국민정부는 그렇게 많은 돈이 없었고, 또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았기에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전역에 30개의 ‘조정사’만 있었고 독일은 40만 세트의 장비만 쏟아부었다. 이 정예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거의 소진되었다. 최초의 ‘송호회전’, ‘남경보위전’, 화북전장의 ‘흔구회전’, ‘낭자관전투’;등 전투에는 대량의 독일 기계사단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참혹한 대가를 치렀다. 이들 30개의 ‘조정사’ 중 28개는 사단 전체가 마비됐고, 2개 사단만이 격렬한 전투를 피했기에 그 병력과 장비를 보존할 수 있었다. 또 전쟁 때문에 독일의 무기는 제때 수송되지 못했고, 독일군은 장비를 보충받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국산장비를 갖고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게다가 독일은 일본과 동맹을 맺은 탓으로 독일군은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늦추다가 1938년 7월 중국에 대한 지원을 모두 멈추고 중국에서 철수했다. 독일인들은 철수했고, 중국의 항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중국내 전장은 군사 장비의 보충이 시급했고, 장개석은후원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바로 이때 소련이 나타났다. 소련은 국민정부로 하여금 일본군의 진군속도를 저지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장개석과 합작협정을 맺고 중국에 군사물자를 지원했다. 이에 따라 독일기계사와 미국기계사 사이에 소련기계사가 하나 더 생겼다. 소련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민정부가 농수산물과 각종 금속 원자재만 제공하면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10년 만에 중소 협력은 이렇게 성사됐다. 소련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름대로 성의를 갖고 있었고, 탱크와 비행기 같은 중무기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소련 장비로 20개 사단을 무장시켜 독일군 무기사단의 손실로 생긴 공백을 메우려 했다. 이렇게 양 측이 각각 필요한 것을 취해서 교역은 비교적 만족스럽게 진행 됐다. 하지만 소련 기계사의 배치에 있어서 중·소 양측은 이견이 있었다. 소련 측은 모두 소련군 편제대로 새로 편성된 부대에 장비를 배치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몰래 장비를 따로 빼돌려 포병단을 조직했다. 이렇게 10여 개의 포병단위를 만들면서, 미리 약속했던 대로 소련 기계사단에 이를 전달하지 않았다. 한편 소련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물자 수송도 간단해 1차 소련의 기계장비로 4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었으며 이 중 제200사단은 중국 최초의 기계화사단이 됐다. 그리고 후속으로 소련의 기계화 장비도 육속 도착해 장개석은 18개의 소련 기계화사단을 구성해 일본군과 잘 싸울 수 있었다. 이 보배같은 소련 기계화사단들에 대해 장개석은 독일 기계사단들처럼 잔혹한 전장으로 보내져 소모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1941년에는 15개 사단이 각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이 중립조약을 맺은 뒤 중소 관계가 약화되면서 소련의 군사장비는 보충되지 않았고, 소련의 기계화사단 역시 점차 역사적 명사로 되었다. 미국의 원조는 큰 것을 노린 전략적 움직임 실제로 영국은 독일의 지원이 끊긴 뒤에도 잠시나마 중국에 군사물자를 제공했지만 일본의 압력에 원조를 중단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중영 간 원조가 회복됐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이때 이미 해가 기울어 극동에 전념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소련의 장비가 없어지자 미국은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구세주가 됐고 국민당 군은 미 장비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항일전쟁 단계에서 미국이 실제로 충분한 지원을 하지 않은 데는 객관적인 이유도 있고 주관적인 이유도 있다. 한편으로 운남-미얀마 도로가 끊기자 물자 장비는 험준한 항로를 통해서만 수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적었다. 다른 한편으론 아시아 전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영국과 소련에 많은 장비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인은 통이 컸다. 중국의 해방전쟁 시기까지 22개 군 64개 사단이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장개석에게 보내와 국민당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장개석은 미국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공산당에 의해 대만이란 작은 섬으로 쫓겨나 지내다가 일생을 울적하게 마감했다. 중국은 북벌전쟁 때부터 외국의 군사원조를 대대적으로 받으면서 중간에 공급처를 여러 개 바꿨다. 심지어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 등도 중국에 숟가락을 얹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독일·소련·미국이 더 많이 지원했다. 왜 이런 나라들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중국을 지원했을까? 독일의 속셈은 짐작이 가는 대로 장사를 하러 온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금속과 각종 원자재가 중국에 많고 거기에 무기까지 팔아 큰돈을 벌 수 있는 중국을 싫어 할리가 없는 것이다. 소련은 여러 가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일본을 견제하여 극동에서의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 한편, 당시 소련은 넓은 영토가 독일군에 함락되고 원자재가 부족했기에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나라로 중국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국민정부에 원하는 게 없음에도 속내는 더 흉악했다. 미국이 내놓은 ‘임대법’은 파시스트의 침략을 받는 전 세계 국가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앞에서 이런 국가들이 육탄이 되어 주는 것이고 양쪽이 다 소모되면 그 때에 가서 그들이 나서서 수습하여 이들 국가들을 깊이 통제하겠다는 취지가 있었다. 한마디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변화 속에 있고, 친구와 적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판단되며 이익만이 영원한 것이다. 이들 나라가 중국에게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는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도 약육강식의 규칙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다만 실력이 강해야 비로소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경직된 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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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8
  • 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①
    [동포투데이 철민] 1937년 8월 13일, 제2차 상해 보위전이 발발하자, 장치중(張治中) 장군의 국민당 제9집단군이 상해에 진주했다. 당시 장개석은 장치중 장군에게 2개의 독일의 기계화사인 87사단과 88사단을 지원하였다. 이어진 남경 보위전에서도 몇몇 개편 완성된 독일 기계화사가 빛을 발산하면서 중국군의 완강함을 보여주었다. 중국과 독일, 양국은 서로 다른 진영에 있었다. 그런데 왜 장개석은 독일 기계화 부대가 소유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두 나라는 또 어떻게 교역했을까? 그럼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의 타산을 알아본다. 국민당이 독일을 처음 접한 것은 손중산(孫中山) 때였다. 당시 혁명을 위해여 손중산은 도처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나라들에 손을 내밀었다. 당시 독일은 공산주의의 발원지로서 손문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 인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독일은 당시 낙후한 중국을 외면했으며 손문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뒤 비로소 제1차 국공합작과 소련이라는 거물이 등장하면서 손문을 후원하게 되었고, 격렬한 북벌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1924년 손중산이 사망하자 장개석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켜 좌익과 공산당 세력을 소탕함과 아울러 소련과 완전히 단절했다. 당시 중국은 가난했고, 전쟁 때는 어쩔 수 없이 장개석은 또 밖으로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남경정부가 직면한 국제 환경은 매우 험악하고 객관적으로도 중국과 독일은 일련의 교류를 촉진하는 것으로 양국의 교역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해야만 했다. 영국과 프랑스 역시 같은 아시아에서의 이익은 대부분 남아시아와 동남아에 있었으며, 중국에 대한 수요는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을 장개석은 명심해야 했다. 한편 그 시기,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강대해졌고, 동아시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영국·프랑스 식민지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일본을 안정시키고 자신의 식민이익을 지키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의 중국 침략을 방임하면서 묵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으며, 중국을 지원하는 물자의 통로를 차단하고 될수록 일본에 아첨했다. 미국은 당시만 해도 그렇게 강하지 않았으며 유럽은 여전히 세계의 중심이었고, 후발주자인 미국은 앞사람의 눈치를 봐야 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모범을 보였고 다른 나라들도 감히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감히 하지 못하자 장개석의 아첨은 ‘장님’에게 던져지면서 이상적 효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다행히 독일은 그 바닥을 지켰다. 1927년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본전을 모두 잃었고, 자신의 군사력이 각종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등으로 나라 전체가 억눌리자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독일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실력을 키웠다. 그중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는 그 일부였다. 영국과 프랑스 등 나라의 요구대로라면 독일은 국방군을 10만 명으로 줄이고 나머지 독일 병사들은 모두 현지에서 전역해야 하며, 방위산업도 모두 전환하여 더 이상 군사 장비를 생산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장개석이 협력 요청을 하는 순간, 이는 독일의 마음에 와 닿은 거대한 군사기구로선 힘겨운 일이었지만 해 볼만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자 중국과 독일은 군사협력을 시작했다. 독일 측은 군사교관을 파견하고 장개석이 군대를 훈련시켜 많은 병사가 전역한 뒤 독일의 국방력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고 전투력을 유지하도록 도왔다. 또 독일 장비를 대량으로 팔아 물자와 돈을 챙기고 노동자를 단련시켜 생산량을 보장하면서 부수입도 챙겼다. 장개석은 유럽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군사 장비를 대량으로 확보해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독일은 이미 무릎을 꿇고 유럽의 2등 국가가 됐지만 그러나 이것이 바로 장개석이 비로소 가격을 낮추고, 최소의 대가로 최대의 이익을 얻는 방법이 되었으며, 그의 장사는 매우 잘 되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고, 서로에게서 이익을 얻을 수 있고, 거래도 오래갔다. 독일은 1927년부터 수백 명의 군사고문을 파견해 40만 세트의 무기·장비를 지원했고, 중국의 군수공장 설립을 도왔으며 독일 무기상들과 연계해 중국 군사물자의 주요 공급국이 됐다. 중국과의 교역에 신경을 쓰는 독일은 다른 대안이 없으니 성의를 보여야 했다. 이들이 차례로 파견한 군사고문은 선발된 엘리트들로, 전임 두 단장은 중국군 지휘중추와 장교 양성제도를 각각 개량해 보병의 지휘를 원활히 하고 산하 각급 병종도 전장에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했다. 3인 군사고문단의 단장인 세케트 장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진이 독일 ‘10만 국방군’ 개편에 착수한 것으로 군을 줄이고 전투력을 높인 경험이 있다. 이 장군은 확실히 힘이 있었다. 그는 전형적인 독일 군인에 속했다. 국민정부 군대의 각종 폐해에 대해 하나씩 해결책을 제시해 장개석에게 많은 유용한 건의를 가져다주어 진정으로 중국군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세케트 장군의 계획대로라면 국민당은 60개의 ‘조정사’와 60개의 ‘정리사’를 개편하는데, 전자는 정당한 독일군 무기사, 후자는 일부 독일군 무장을 한 부대였다. 다만 당시 국민정부의 부정부패가 횡행하고 독일도 제대로 장비를 팔 수 없어 ‘7.7사변’ 직전까지 장개석의 손에는 3개의 완전체 독일 기계화 사단과 1개의 교도총대, 그리고 공상희의 체제 내에 없는 세경 총단 밖에 없었다. 1935년 세케트 장군이 병으로 사임하자 후임자인 파켄하우젠도 국민정부의 군사산업 발전을 적극 도왔다. 독일인의 도움으로 국민당은 정식으로 승마총, 꽃 기관총, 82박격포 등을 본떠 선택적으로 병기공장을 세워 어느 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고, 상황은 곧 호전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생겼다. 당시 중국은 가난하여 대양과 은화를 국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대외 무역에서 다른 나라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화인 달러와 파운드화는 국민정부 스스로도 부족하고 금은과 은 같은 귀금속은 더더욱 내놓지 못했다. 그럼 중국과 독일 간 군사물자 거래는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 답은 텅스텐(钨矿), 석(锡), 안티몬(锑) 등 세 가지 금속이었다. 이 세 가지 금속은 방산 분야에서 널리 쓰이지만 독일 본토에서 생산되지 않아 99%가 외국산이었다. 히틀러가 집권한 뒤 군비확충에 나서면서 이들 금속의 수요가 크게 늘었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은 관리가 철저해 독일은 원료를 충분히 조달받을 방법이 없었다. 이 세 종류의 금속은 중국에서는 오히려 매우 흔히 볼 수 있었다. 호남, 광동 등지에서는 모두 상응하는 광물 매장량이 채굴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은 솔직히 많이 쓰지 않았고 산업용 원자재를 군사장비와 교환하는 것을 선호했다. 독일은 전쟁에 대비해 대규모로 원료를 비축해야 했고, 중국은 물산이 풍부해 독일의 많은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중국은 금속광산을 제외한 농산물·면화·브루마 등의 물자를 돈처럼 쓸 수 있었고, 독일이 국민정부에 지원을 요청한 유일한 품목이다. 다만 장개석의 무기·장비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고 국제정세 변화, 물자수송의 지연, 영국의 봉쇄 등으로 중·독 양국 간 원자재·무기 교역이 이뤄지지 않자 국민정부가 현금·백은을 들고 독일과의 협력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다음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2-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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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10)
    ■ 김철균 유엔군 인천상륙 및 인민군의 후퇴 아버지가 고상철에 의해 구원되어 부대로 돌아온 뒤 얼마 안있어 평양의 최고사령부로부터 뜻하지 않던 명령이 하달됐다. 전반 전선에 변수가 생겨 주력부대의 전략적 퇴각이 시작되기에 아버지네 부대는 이튿날 아침 즉 9월 17일까지 진지를 고수하다가 후퇴하라는 것이였다. 그렇찮아도 당시 낙동강전선의 인민군부대들은 마지막 한방울의 전력까지 쏟아가며 전투를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부산쪽으로는 유엔군이 계속 증가되고 있는 한편 인민군은 후방공급이 끊어진데다 인원보충도 되지 않는, 그야말로 억지로 견지하고 있었으며 더는 진공할 수도, 그렇다고 후퇴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후퇴명령은 바로 이러한 때에 떨어졌다. 뒤이어 유엔군의 대규모적인 공습과 포격이 개시됐다. 그 잡도리를 보아 인민군의 진공을 견제하려는 반격과 기습인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인민군을 밀어 붙이려는 전면적인 공세였다. 아버지네 부대는 옹근 하루낮과 하루밤을 이어가며 한국군과 싸웠다. 병력이 모자라자 예비연대는 물론 아버지를 포함한 정찰병 그리고 부상병조차 총을 쏠 수 있는 인원은 몽땅 진지에 배치되었다. 한밤중까지 싸우다가 일단 한국군이 물러가자 인민군은 새벽녘의 어둠을 이용하여 고지에서 물러났다. 고지에서 내려온 아버지네 부대는 주력부대를 따라잡기 위해 죽기내기로 뛰었다고 한다. 이렇게 단숨에 20여리나 뛰고 보니 기진맥진한 나머지 그 때는 호랑이가 달려든대도 까딱 할 것 같지 못했다는 것이 아버지의 회고였다. 한국군 추격부대를 얼마간 떨구어 놓았다고 판단한 뒤에야 숲속에서 휴식명령을 내렸다. 인민군 사병들은 솔잎과 압축과자를 섞어가며 요기를 하였다. 그러다가 서로 마주보는 순간 모두가 웃음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며칠간 세수 한번 못한채 초연에 그을리다보니 원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리 만무했다. 낮이 되자 하늘에는 미군비행기들이 나타났고 모두가 한결같이 기수를 북으로 돌렸으며 남쪽으로부터 들려오는 포소리도 점점 가까워졌다. 부대는 길을 다그쳐 얼마 후 주력부대를 따라잡았다. 주력부대를 따라잡자 새로운 동원이 있었다. 내용인즉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인천으로부터 상륙하여 중부지대를 차단하고 있으니 대부분의 인민군부대가 유엔군의 포위속에 들었다는 것, 유생역량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뒤꽁무니의 유엔군을 뜯어놓고 하루 속히 38선을 넘어 북으로 가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사태는 자못 심각했다. 듣는 바에 따르면 대전을 지키고 있던 인민군대가 전라도 방면으로부터 퇴각하는 인민군주력을 엄호하기 위해 필사적인 저항을 했으나 쌍방의 현저한 전력대비에 힘이 딸려 대전을 내주어 전라도 부대들이 산속으로 들어갔는가 하면 서울을 고수하고 있던 인민군부대 역시 연희고지를 육탄으로 막으며 저항하고 있으나 미군부대의 막강한 화력을 막을 수 없어 서울함락 역시 일보직전이라 했다. 서울이 함락되기 전에 시간을 다투어 38선쪽으로 퇴각해야 그만큼 손실을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퇴각하는 길도 쉬운 것이 아니였다. 아니 지난 2 개 월 전 남진할 때보다 더 힘겨운 노릇이었다고 한다. 낮에는 공습이 피해 산에 숨어야 했고 또한 꼬리를 물로 달려드는 한국군과 싸우면서 퇴각해야 함과 아울러 후방보급은 물론 최사령부와의 모든 연락을 할 수 없었기에 곱절 간고했다. 이렇게 자체로 모든걸 분석하고 장악하면서 겨우내 원주부근까지 다 닿았지만 그 때의 원주 역시 한국군의 수중에 넘어간 뒤었다. 가뜩이나 얼마 되지 않았던 인민군 원주수비부대가 서울쪽으로부터 밀려드는 유엔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퇴각했던 것이다. 원주의 유엔군들이 바로 인민군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었다. 그야말로 인민군은 앞 뒤로 협공을 받는 극히 불리한 상황에 처했다. 그 때 인민군의 원 계획은 될수록 원주의 유엔군을 피해 에돌아 북으로 가기로 돼있었지만 식량과 약품이 거덜난 상황에서 그대로 행동하다가는 당장 굶어죽을 사병이 반수 이상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한편 정찰결과 원주에 유엔군이 들어오긴 했으나 시간이 길지 않아 발을 튼튼히 붙이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그 수자도 얼마되지 않았다. 그리고 인민군 역시 38선을 넘기 전야의 마지막 전투를 치러볼 욕심도 없지는 않았다고 한다. 인민군은 일부 부대를 배치하여 남쪽으로부터 오는 유엔군을 견제하는 한편 병력을 집중하여 불의습격으로 원주에 돌입했다. 아니나 다를가 원주의 유엔군들 역시 인민군이 그렇게도 빨리 원주 부근에 나타나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한 모양, 미처 진지에 들어가 보기도 전에 인민군에 의해 섬멸되고 말았다. 그 전투에서 인민군 부대는 얼마간의 탄약과 식량 등을 로획하여 자신을 무장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전투에서 아버지는 불행하게 부상당하여 평양에 후송됐다가 다시 신의주를 거쳐 당시 교하에 있은 조선인민군 제 2 야전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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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6-20
  • 오묘한 세계대백과(14)지구 “몸체”속의 비밀
    장엄하고 아름다우며 또한 자태가 다양한 산과 물, 오색영롱한 식물 그리고 활발하고 사랑스러운 동물들로 아름다운 지구의 표면을 장식하고 있다면 그대는 지구에 “몸체”속에는 무엇들이 들어있는지 아는가? 지구의 구조는 우리가 늘 먹는 닭알과도 같아 지각, 지만과 지핵이 있다. 지구의 외면에는 하나의 각(壳)이 있는데 이를 “지각”이라 부르며 이는 지구의 표면을 말하는바 대륙의 지각과 해양의 지각이 포함된다. 그 중 대륙의 지각은 비교적 두터운바 평균 두께가 35킬로미터가 되고 해양의 지각이 비교적 얇아 일반적으로 5-10킬로미터에 달한다. 지만은 지각과 지핵 사이에 있는 부분을 말하는데 닭알속의 흰자위와 비슷하다. 지만은 상지만과 하지만으로 나뉜다. 상지만의 윗 부분에는 한갈래이 “연류층”이 있으며 뜨거운 용암의 대부분이 여기에서 산생한다. 지구의 중심부분에는 지핵이 있다. 지핵은 액체상태의 외핵과 고착상태이 내핵 등 두가지 부분으로 나뉘며 주요한 성분은 철과 니켈(镍)로 구성되어 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6-18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14)예루살렘
    예루살렘의 서류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이스라엘, 지점:지중해 동안의 유대아산(犹地亚山) 의의: 유대교, 기독교와 이슬람교 등 세가지 종교가 공존하는 성지 예루살렘은 지중해 동쪽해안에 위치, 세계에서 저명한 종교성지이다. 수천년래 예루살렘은 선후로 37차 정복된적이 있고 일찍 8차에 거쳐 전화에 훼손되었었다. 하지만 매번의 재난속에서도 이 성지는 기적적으로 폐허속에서 재생하군 하였다. 역사가 유구한 석조건물은 예루살렘의 수천년 역사의 상처를 견증하고 있으며 수없이 많은 흔적과 성지 등은 예루살렘이 유대교도와 기도교도 및 이슬람교도들한테 중요한 의의가 있음을 말해준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와 이슬람교 교도들의 마음속에는 그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신성한 지위를 갖고 있다. 유대교는 하느님인 여호와가 이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을 유대인조상들한테 주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성경”의 전설 중에는 예루살렘은 예수가 생활하고 전도하고 재해를 피할 수 있는 지방으로 씌여져 있어 예루살렘의 신성한 지위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또한 무슬린교도들의 마음속에는 예루살렘이 모함모드를 먼저 알고 천국으로부터 신비한 야간행으로 이 목적지에 이르게 했다고도 한다. “통곡의 벽”과 암석원주의 청진사 예루살렘의 옛성에는 유대구내에 저명한 “통곡의 벽”이 있다. 이 벽은 유대인들한테 놓고 말하면 신앙과 단결의 상징으로 되고 있다. 매번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되면 많은 유대인들이 이 “통곡의 벽”앞에 집결하여 묵묵히 경문을 읽고 기도하기도 한다. 암석과 원주기둥으로 된 청진사는 이슬람교의 성지로서 “통곡의 벽”과 이어져 있는데 거대한 도금한 둥그런 지붕아래에는 거대한 암석으로 바닥을 깔았으며 거기에는 아름다운 도안과 “고란경” 경문이 새겨져 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6-18
  • [연재] 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9)
    ■ 김철균 1950년 8-9월은 낙동강 유역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을 일방으로 하고, 인민군을 일방으로 하는 쌍방간의 격전이 가장 치열하던 시기였다. 쌍방은 고지 하나를 두고도 몇 번씩 빼앗기고 빼앗는 공방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전투상황을 보면 낮이면 주로 한국군 혹은 유엔군이 고지를 점령하였다. 미공군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밤에는 주로 인민군이 침투공격을 하면서 고지가 자주 인민군의 수중에 장악되군 했다. 인민군이 야간기습에 유능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전투부대가 아닌 정찰소조에 자주 편입되어 낙동강 유역의 지형정찰에 나가군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하루 아버지는 한국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한국군의 추격을 받던 중 함께 나간 동료가 한국군의 총에 뒤잔등을 맞아 부상당하는 통에 둘 다 포로가 되었다. 부상당한 동료가 자기의 머리에 한방을 쏜 후 혼자서 도망치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부상당한 동료를 두고 혼자 도망칠 수 없었으며 더더욱 그한테 총알을 먹일 수는 없었다. 성격이 좀 거칠었지만 독하지는 못한 아버지었다. 아버지가 부상당한 동료를 붙안고 어쩔 바를 몰라하는 사이에 한국군들의 총부리는 점점 다가왔다. 아버지의 정찰병 동료는 한국군한테 포로되자 10분도 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포로가 되어 살아남은건 아버지뿐이었다. 순간, 아버지의 뇌리에는 이젠 끝장이구나 하는 무서운 생각이 엄습해왔다고 한다. 고국땅이라 하지만 처자가 없는 고국땅 – 그 때에 와서야 아버지는 고향 중국 훈춘에 둔 마누라와 자식 생각이 나면서 그들한테 미안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한국군은 아버지를 즉석에는 죽이지 않았다. 뭔가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 빨갱이 녀석을 연대본부로 수송한다. 누가 가겠는가?” “옛, 이병 고상철, 제가 이 자를 압송하겠습니다.” 순간, 고상철이란 이름이 아버지의 뇌리에 충격적으로 안겨왔다. 무의식간 아버지가 고개를 들고 보니 비록 철갑모를 썼지만 어딘가 낯익은 얼굴임에 틀림없었다. 그야말로 거짓말 같고 영화의 한 장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만대행으로 한국인 장교는 고상철이 아버지를 압송하는 것을 허락했다. “두 손을 어깨위로 올리고 걸엇!” 고상철의 말투는 단호한듯이 들렸다. 하지만 개활지대를 지나 숲속에 들어서자 고상철은 인차 다가와 아버지를 끌어 안았다. “이 자식, 너 나를 알만해? 내가 바로 고상철이야…” 극적인 만남이었다. 고상철이란 바로 그제날 아버지가 일본군 공사장에서 부역할 때의 동료였는데 후에 광복과 함께 한국(당시는 남조선이라 불렀음)으로 나왔던 것이다. 그러던 친구를 전쟁터에서 적아 상대방 신분으로 만나다니 극적이래도 너무 극적이었다. 둘은 풀밭에 주저앉아 한동안 그동안 살아온 인생사를 얘기하다가 고상철이 시계를 보더니 후닥닥 놀라며 “우리 지금 이리고 있는게 아니야”하며 무릎을 치는 것이었다. 고상철로는 차마 아버지를 연대까지 압송해갈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놓아주기도 어려운 입장이었다. 미구하여 고상철은 허리의 뒤춤에서 비수를 꺼내더니 아버지한테 넘겨주며 자기의 다리쪽을 두어번 찌르고 도망가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안돼,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어! 그것만은 안돼…” 아버지가 머뭇거리자 고상철은 아버지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아서는 지체없이 자신의 허벅지 안쪽을 향해 두번이나 힘있게 찔렀다. “이 자식아 아직도 모르겠느냐?! 빨리 도망가라. 이제 내가 생각을 바꾸면 너를 찌를 수도 있다. 그리고 나한테 총도 있다. 내가 생각을 바꾸기 전에 빨리 도망가라. 어서!” 고상철의 말은 단호했다. “야 이놈아, 이제 북으로 가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라. 여긴 사람 살 곳이 못된다. 중국에 가서 농사를 짓고 마누라와 함께 농사나 지으며 살아라. 그게 맘 편한거다!” 아버지는 더는 대꾸할 엄두도 못내고 돌아서서는 마구 냅다 뛰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정신없이 뛰면서 개활지대를 넘어서자 고상철이 있던 쪽에서 총소리가 한방이 울렸다. 그것은 자기의 부상을 한국군한테 알리려고 고상철이가 공중총을 쏜 것이 분명했다. 고상철의 자아희생 정신으로 아버지는 생명을 건졌을뿐만 아니라 한국군점령지대를 안전하게 벗어날 수 있었다 한다. 그 뒤 아버지는 고상철이란 한국군 이등병을 만나지 못했거니와 만날 수도 없었다. 썩 후에 아버지는 자주 고상철이란 이름을 떠올리며 그를 잊지 못해했다. 그리고 고향인 한국 울산에 가보고 싶어했던 것도 아마 고상철을 행여나 만날 수 있을까 해서라 짐작된다. 필자 역시 고상철이란 그 분한테 감사를 드리고 싶다. 당시 그 분이 아버지를 살려주지 않았더라면 필자같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날 수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 현재 고상철이란 그 분은 살아계실리 만무하지만, 여하튼 그 분이 자녀 혹은 손군들이라도 살아 있을게 아닌가? 그 분들이라도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다. 고상철- 그 분의 명함은 분명 고상철이었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6-14
  • 해외견문 시리즈(10)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
    ■ 김철균 포클랜드에서 곧추 부산으로 가는가 했더니 거치는 곳도 많았다. 라스팔마스, 마린, 비고, 사우디, 방콕 이렇게 거쳐오다가 이번에는 또 중국 대만의 고웅항에 입항하여 2박 3일을 머무르게 됐다. 대만에서의 일정은 포클랜드에서 싣고온 냉동오징어 800톤을 하역하는 것이었다. 대만 - 나의 머리속에서는 그때까지도 이전에 우리가 불렀던 “중국인민은 대만을 꼭 해방할 것이다”란 구호와 대만어선들에서 본 “삼민주의로 중국을 통일하자!”란 글발이 새겨진 기발들이 맴돌고 있었다. 하기에 대만 고웅항에 입항하자 우리 중국조선족선원 4명한테는 위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국민당과 공산당은 지난 세개 20연대부터 40연대말까지 줄곧 20여년간이나 싸우다가 결국 국민당이 대만섬까지 쫓겨가지 않았던가. 그 후에도 국민당은 계속 “반공대륙”이요, “대륙광복”이요 하면서 대륙을 적대시하는 정책을 실행해 왔은즉 그들이 공산당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또 그 천하에서 온 우리를 반겨줄리가 없겠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위구심은 지나친 것이었다. 당국의 요인들은 어떤 정책을 강요했든지 우리가 본 대만사람들은 그렇게도 인자하고 민족을 중히 여기는 이들이었다. 우선 입항수속을 수속을 할 때 본선에 4명의 대륙선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자 세관일군은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수속을 끝내자바람으로 우리를 하나하나 찾아보는 것이었다. 나를 찾아 주방까지 찾아온 세관원 한명은 오래도록 나의 손을 잡고있으면서 이렇게 만나니 정말 반갑고 기쁘다고 곱씹어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대륙에서 사는 것은 어떠한가?”, “밥은 배불리 먹는가”하며 이 것 저 것 관심조로 묻는 것이었다. 그들 역시 대륙상황이 무척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 뒤 그는 갖고온 선물이 없어 미안하다면서 어디서 구했는지 대만산 “장수표”권연 한보루를 기어코 나한테 밀어맡기었다. 그날저녁, 우리는 국민당의 천하라는 위구심보다 대만 한구석의 이모저모에 대한 궁금증으로 하여 외출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렴 대만 역시 사람이 사는 동네이겠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공교롭게도 그날 밤 우리가 찾아간 술집인즉 “몽강술집”이란 간판이 걸려있는 레스토랑이었다. 아니 그렇다면 몽강이란 지금 우리 길림성 정우현의 전신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내가 술집주인하고 여쭤봤더니 아니나 다를가 술집주인 부친의 고향이 곧바로 옛날의 몽강현이라는 것이었다. 즉 주인의 부친한테는 노모와 3남 2녀의 형제, 그리고 그 본인보다 네살이나 이상인 안해까지 있었는데 1940년대 말기에 국민당군의 패망과 함께 대만으로 건너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부친은 1년전부터 대륙의 고향과 편지래왕이 있는데 노모와 형님 한분은 진작 저 세상의 고인으로 되었고 안해는 다른 곳으로 개가했으며 나머지 형제들은 제각기 흩어져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또한 노인은 이미 당국에 고향방문 신청까지 해놓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술집주인은 알려주었다. 그날 밤 우리는 오래도록 술잔을 나누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특히 술집주인은 술이 거나하게 되지 몹시 흥분하면서 언제라고 딱히 말할 수는 없으나 자기도 한번은 꼭 대륙에 다녀올 것이며 고향사람들한테도 기념으로 될만한 좋은 일을 해놓겠노라고 했다. 참, 고향이라 하지만 생소한 고장, 그럼에도 마음이 가는 곳, 사람의 정이란 과연 이상하기도 했다. 그 이튿날저녁, 뜻밖에도 그 “몽강술집” 주인의 부친이 글쎄 아들을 앞세우고 선박에까지 찾아온 것이 아니겠는가. 노인은 배에 오르자마자 우리 네사람과 선장, 기관장과 통신장을 기어코 청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사절끝에 그들 부자가 갖고온 봉고차에 나누어앉아 노인의 거처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노인의 저택은 고웅시 중심에서 퍼그나 떨어진 해변가의 녹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새 건물은 아니었으나 담장에 둘러쌓인 것이 퍼그나 고풍스럽고도 아늑한, 전통적인 중국식 별장이었다. 호텔, 술집과 나이트클럽 등 많은 재산을 갖고 있다는 노인이었으나 여전히 헝겊신에 다부산즈차림을 한 것이 더욱 풍채가 돋구어져 존중이 갔다. 헌데 그런 틀거지와는 달리 노인은 자주 주전자의 술을 부어 굽내면서 말이 많아졌으며 한담 중에도 가끔 경극노래 한곡조씩 머리를 흔들며 뽑군 하였다. 노인을 보면 어쨌든 옛날 국민당군의 한자리쯤은 한 것 같았는데 정치와 시국에 대한 얘기는 한마디도 없고 가금씩 우리의 손을 잡으니 눈물까지 보이는 것이었다. 같은 민족 사이에 서로 맞대고 총포를 쏘며 싸우던 그제날이 무척 후회하는 모양이었다. 자리를 파할 때 노인은 정유식 선장한테 영어로 “이 애들을 잘 돌봐주시오”하고 몇번씩이나 부탁하면서 손수 대문밖까지 따라나오시는 것이었다. 그날 우리 선박에서는 냉동오징어 열박스를 노인네 집에 드렸고 우리는 또 노인으로부터 만리장성을 그린 유화 한폭과 중국선원 4명한테 특별히 선물하는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받았다. 대만에 체류하는 사이에 우리는 2박 3일이라는 그 짧은 시일에도 불구하고 사상과 이념의 계선을 벗어나 다 같은 중화민족이란 공동관심사를 갖고 세관일군과 몽강술집의 부자간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과 그토록 진지하게 마음과 마음을 나눌 수 있었다. 하다면 우리 동족이 살고 있는 반도는 과연 어떠한가? 아직도 동족상잔의 “6.25”때의 상처를 끄집어내며 남과 북이 서로 상대방을 괴뢰라고 욕하는 한편 전쟁준비에 광분하는 사람들, 그래 아직도 피의 대가가 적단 말인가?! 지금도 반도의 남북은 화해를 위한 대책마련에 뇌즙을 짜는 것이 아니라 서로 헐뜯지못해 광분하는 양상이다. 우선 말부터가 상대방의 비위를 상하게 한다. 이른바 “북한”이 뭐고 “남조선” 또한 뭐란 말인가? 통일이란 외쳐대서만이 되는 것이 아니다. 통일이란 상호 존중하는 전제하에서 그것을 이룩할만한 토대를 하나하나, 작은 것부터라도 쌓아가야 함이 바람직한 것이다. 그럼 반도의 남과 북은 대륙인들인 중국사람들한테서 무엇부터 배워야 하겠는가! 속이 검고 “만만디”라고 비웃지 말고 대국인들의 “커이커이 왠량바(可以可以,原谅吧!)” 하는 것부터 배워야 할 것이며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동포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모든 알륵을 풀어야 할 것이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6-14
  • [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4)
    ■ 김철균 전반 태평양상공에 전운이 감돌고 간도의 가는 곳곳마다 전쟁소동이 광분하는 가운데 순자는 어느덧 14살을 먹었고 그해 즉 1944년 12월에 소학교졸업을 맞게 되었다. 졸업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오후수업까지 마치자 담임교원이 순자를 부르더니 일본인 교장이 찾는다면서 어서 가보라는 것이었다. (웬일인가?) 순자는 웬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겼다고 수군덕거리는 애들의 눈길을 피하며 머리를 수그리고 교장실로 찾아갔다. 교장은 노크하고 들어와 곱게 인사를 올리는 순자를 유심히 뜯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나다노, 나마에와 기슈구데쓰까?(네이름이 기숙이 맞느냐?)” “하이, 소우데스(예, 그렇습니다.)” 순자는 깍듯이 머리를 쪼아리면서 일본말로 대답했다. “너의 집에 돈이 얼마나 있느냐?” 도수 높은 안경너머로 교장은 순자의 얼굴을 넌지시 쓸어보다가 다시 물었다. “돈, 돈 말입니까?” 순자는 가슴을 파르르 떨면서 쥐구멍으로 기여들어가는 소리로 다시 반문했다. “귀가 멀었느냐? 돈이 얼마 있는가말이다.” 교장은 권연을 꼬나물고 신경질적으로 성냥을 홱 그어댔다. “지금은 한푼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방학이 되어 제가 벌어 월사금만은 꼭 내겠습니다.” 순자는 나직히 힘주어 대답했다. 돈없는 사람을 업신여기고 기시하는 교장이 아직 채 물지 못한 월사금을 내라고 압력을 들이대지 않는가 하는 위구와 의심이 갔기 때문이다. “그런게 아니다. 현재 우리 대일본제국은 천황의 대령을 받고 아시아 민족의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마련해주려고 위대한 성전에 뛰어들었다. 현재 이 성전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돈과 재물, 인력을 지원하고 있단 말이야. 그래서 우리 학교 많은 학생들도 이미 돈을 헌납했단다. 돈없는 사람들은 인력을 지원하며 근로봉사에 가고…그래 너는 돈을 헌납하겠느냐 아니면 근로봉사로 육체를 헌납하겠느냐?”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던 교장은 눈총을 쏘며 순자한테 질문했다. “근로봉사에 가겠습니다.” 순자는 별로 긴 생각을 하지 않은채 대답했다. “부모의 허락도 없이 네 마음대로 결정할만하냐?” “할만합니다.” 가난한 가정형편을 잘 아는 순자는 진작 마음의 준비가 돼있었던 것이다. “소까. 너, 참으로 훌륭한 황국신민답구나. 넌 아직 잘모르겠지만 우리 일본의 황군은 천하무적으로서 도처에서 승전에 승전을 거듭하고 있단다. 이제 오래잖아 우리 일본황군이 최후의 승리를 이룩하면 아시아에 새로운 평화가 깃들 것이다. 그때면 너희들처럼 대일본제국에 충성한 황국신민들은 반드시 천황페하의 특수혜택을 받을 것이다. 알겠느냐?” “예, 잘 알겠습니다.” 당시 순자는 일본이 망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독립선언에 서명했던 춘원 이광수같은 인물도 일본이 천하무적이라고 인정하며 친일파가 되는 세월에 순자같은 애숭이가 당시의 전황을 판단할 수 있을리 만무했다. “좋다. 아주 좋아. 기슈구양, 그럼 여기에 손도장을 찍거라.” 순자는 깊은 생각도 하지 않고 선뜻이 손가락을 내밀어 일본인 교장이 가리키는 자리에 지장을 꾹 찍었다. 천진하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어린 순자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던 일본인 교장은 순자가 나가자 저로서도 한심한듯 머리를 가로 저었다. 자기한테도 순자만한 자식이 있었던지, 아니면 일본인이었지만 아직 꼬물만한 양심은 있었던지 제법 긴 한숨까지 지으며 “참, 망할 놈이 세상! 조센징 불쌍한 민족이군”하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날 저녁 순자는 대문동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서 이 사실을 부모님앞에서 털어놓았다. 그러자 집에서는 또 한바탕 난리가 났음은 구태어 더 말할 것도 없다. 조선에서는 수많은 애어린 처녀들에게 직업을 얻어준다며 사탕 발린 말로 구슬려서는 생뚱같은 곳으로 끌고 간다는데 인간의 탈을 쓴 일본놈들이 또 어떤 수작을 부릴지 누가 안담? 어머니는 윤씨는 나 죽는다고 아우성을 쳤고 아버지는 화가 난 나머지 “죄꼬만 계집애가 담도 크게 그게 어디라고 지장을 찍느냐”며 순자의 귀쌈을 치기도 했다. 이는 순자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한테서 맞아보는 매였다… 이튿날 순자의 아버지는 어린 순자를 이끌고 그 일본인 교장을 찾아가 사정하였다. “교장선생님, 어린것이 철없이 지장을 찍었으니 한번만 봐주십시요. 어린 것이 뭘 알겠습니까? 돈은 제가 2-3일내로 어떤 방법을 대든지 마련해 올테니 근로봉사대 명단에서 우리 기슈구의 이름만은 빼주십시요.” “기규구 부친의 심정을 잘 알겠다만 이미 명단이 위로 올라갔으니 나로서도 어쩔 수 없구만요. 그리고 근로봉사대에 가서 대 일본제국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도 일종 영광으로 여겨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걸 모르는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지요. 이 어린 것이 어떻게 일을 한다고 그럽니까?” “근심마십시오. 여덟시간 근무에 아주 편하며 먹는 것도 아마 집에서보다는 훨씬 영양가가 있고 맛있는 걸로 공급된다고 합니다.” … 순자의 아버지가 아무리 애걸복걸하며 사정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당시 학교마다에 근로봉사로 보낼 학생들의 모집명액이 확정되었은즉 그 명액을 다 차게 하지 못해 안절부절하던 일본인 교장이 순자의 아버지라고 그 사정을 봐줄리 만무했다. 순자의 아버지 명기 어른은 그저 한심한 세상과 나라를 빼앗긴 약소민족의 운명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6 그때로부터 며칠 뒤, 당시 간도의 서울로 불리는 용정의 역광장. 순자가 또래들과 함께 떠나던 날이 됐다. 그날도 그 일본군가 “마모루모 세무루모 구로가네노”가 주악되는 가운데 그닥 크지 않은 용정역은 울음바다로 되었다. 부모들은 자기 자식을 붙안고 아우성을 쳤고 일본헌병들은 그러는 부모와 자식을 총칼로 위협하며 뜯어 놓았다. 순자와 그 또래들은 총창을 꼬나든 일본군헌병들의 감시속에 줄을 서서 열차에 오르기 시작했다. 미구하여 뿡 ㅡ하는 기적소리가 길게 울렸고 열차의 둔중한 바퀴는 천천히 움직이었다. “아버지, 엄마ㅡ 제가 꼭 돈을 많이 벌어갖고 효도할게요ㅡ” 순자는 차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두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채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말았는지 멀리서 어머니 윤씨가 뭐라고 넉두리를 하다말고 땅에 풀썩 주저앉는 것이 보이더니 인차 순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제야 순자는 어머니가 왜 저렇게 쓰러지는가를 좀 알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전 엎질러진 물,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보는 기차였지만 신기하다는 기분도 들지 않았다. 열차는 해란강 철교를 넘어서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 이튿날 아침, 열차는 만주에서 가장 크고 인구도 가장 많은 봉천(지금의 심양)에 도착했다. 봉천은 제법 큰 도시였다. 봉천역 광장에 나오니 용정이나 연길과는 달리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붐비었으며 기차처럼 레루우에서 달리는 전차가 신기하기도 했다. 또한 그 곳에서도 일본군의 태평양전쟁을 가송하는 군악이 울리고 고약딱지같은 일장기를 든 일본군 대오가 행진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으며 거리에서 백성들한테 구두발로 차고 욕질을 해대는 일본헌병들의 행패는 여전했다. 봉천에 도착한 날로 순자네가 끌려간 곳은 “도요다이야 고죠”라고 부르는 어느 한 방직공장이었다. 공장에는 순자처럼 끌려온 아동공이 아주 많았다. 조선인 외에도 만주인, 몽골인과 지나인(중국인)으로 수백명에 달했다. 순자네는 여러 작업반으로 나뉜 뒤 인차 근무에 들어갔다. 소년공들이 근무하는 시간은 아침 7시부터 이튿날 아침 7시까지었다. 말하자면 24시간 작업하고 24시간 휴식하였으며 휴식하는 낮에는 밥도 공급되지 않았다. 여덟시간 근무제이고 먹는 것도 영양가치가 높고 맛있는 것으로 공급된다던 일본인 교장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출퇴근을 할 때는 물론 심지어 식당으로 밥먹으러 갈 때도 군대식으로 줄을 서서 “일본군가”를 부르며 행진해야 했으며 모든 생활이 엄한 규율이 강요되었다. 작업은 지루하고도 몹시 힘들었다. 24시간씩 근무하노라면 자주 졸음이 왔고 졸음이 와서 간혹 끊어진 실오리가 생겨나면 일본인 십장한테서 귀쌈을 맞으면서 욕보고 야단맞기가 일쑤였다. “칙쇼! 황국신민이 되어 2등 국민의 대우를 받으면서 이 따위로 근무해?! 이래서 조센징은 안된다는거야!” “너희들이 왜 나라를 빼앗겼는지 알만해? 바로 이런 정신상태를 가졌기 때문이야. 이런 정신상태를 갖고 나라를 운영할 수 있겠어?” … 이렇게 억울하게 욕볼 때마다 순자는 비록 가난하긴 했지만 어머니와 함께 있었을 때가 좋았고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집이 사무치게 그리워났다. 또한 돈벌어 빚도 갚고 부모님한테 효도하겠다는 단순한 생각에 봉사단에 참가한 자신이 괘씸하도록 얄밉기도 했다. (아, 지금쯤 동네애들은 앞내가 얼음강판에서 썰매를 타고 팽이를 치면서 신나게 놀겠지? 헌데 난 이게 무슨 꼴이람.) 그리고 때는 한창 한겨울이라 추운날 밤 살얼음이 낀 물에 두손을 넣고 태실을 씻을 때면 손이 시리다 못해 숨이 넘어가는듯 했으며 어떤 여자애들은 진짜 견디기가 힘들어 엉엉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러면 또 일본인 십장이 달려와 그런 애들의 귀쌈을 사정없이 후려치군 했다. “바가, 너희들의 요만한 곤난도 이겨내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천황페하의 황국신민이라고 할 수 있소까?!” 감옥같은 생활, 맘놓고 울 수도 없는 것이 당시 나어린 소년공인 순자네가 직면한 운명이었다. 한편 공장에서는 끌려온 아동공들한테 집에 편지를 쓰도록 했다. “근로봉사대에 와서 배불리 잘 먹고 있으며 일도 힘들지 않다”, “하루 근무시간은 여덟시간이고 매주 하루씩 휴식하며 휴식하는 날에는 단체로 도시구경도 한다”는 등으로 좋은 말만 골라서 쓰도록 했다. 그러고는 십장 혹은 감독한테 검열을 거친 뒤에야 편지를 발송하도록 허락했다. 순자도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한테 편지를 썼다. 존경하는 아버지 어머니 전상서 제가 부모님 슬하를 떠나 봉천에 온지도 거의 한달이 돼가는군요. 그동안 저희들은 공장측에서 배치해준 따뜻한 숙사에 들어있으면서 하루 세끼 이밥에 돼지고기 혹은 물고기국을 먹으면서 아주 유쾌히 잘 보내고 있답니다. 이 곳의 작업은 힘들지 않고 그 작업량도 많지 않답니다. 하루 8시간 근무에 매주 하루씩 휴식하는데 휴식하는 날이면 단체로 활동사진구경(영화관람)을 가기도 하고 공장측에서 주는 상여금으로 맛있는 것을 사먹기도 해요. 그리고 시간이 날적마다 축음기에서 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그것을 배우기도 하고 그것이 갑갑하면 밖에 나가 친구들과 함께 제기도 차고 숨박꼭질도 놀면서 아주 재미있어요. 그렇게 유쾌하게 지내서인지 지금 저의 얼굴엔 살이 포동포동 올랐어요. 이제 제가 집으로 돌아가면 부모님들도 몰라보실거예요. 아버지, 어머니, 그러니 저한테 대한 근심을 일절 하지 마시고 부모님의 건강만 챙겨주세요. 그리고 임금은 공장측에서 단체로 저축했다가 1년 만기 후 저희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한푼도 곯지 않게 내준다고 했으니 그때에 제가 많은 돈을 벌어가지고 가서 부모님께 효도 한번 잘할게요. 아버지 어머니, 건강하세요. 딸 기슈구(기숙) 올림 1945년 1월 ×일 봉천에서 순자는 일본십장이 시키는대로 편지를 썼다. 순자는 일본십장이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쓸 타산이었다. 자기 때문에 부모님들이 가슴이 아파하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편지를 쓰면서 순자는 눈물을 흘렸는데 그것이 편지종이에 떨어지면서 여러곳이 얼룩졌다. 순자네가 근로봉사대에 끌려온지 약 한달이 지나자 공장내에는 “상한병(伤寒兵)”이라고 하는 전염병이 나돌기 시작했다. 병은 숙소에서 단체로 먹고 자고하는 애들한테 급속도로 확산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나가는 애들도 하나둘 생겨났다. 전염병은 순자가 가엽다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어느날 순자는 갑자기 몸에 열이 오르면서 으슬으슬 추워나기 시작하더니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으면서 저녁밥 한술도 넘길 수가 없었다. 그날밤 순자는 옷을 입은채로 누워 이불을 머리꼭대기까지 뒤집어썼으나 온몸이 그냥 와들와들 떨리기만 했다. 그러다가 밤중에 일본인 의사가 주는 알약 한알을 먹은 순자는 새벽녁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이튿날 말째인 몸을 갖고 직장에 나간 순자는 근무도중에 열이 불덩이처럼 오르고 눈앞이 노랗게 되면서 사위가 빙글빙글 돌아갔고 도무지 몸을 가늘 수가 없었다. 그 한몸을 갖고 휘청거리며 작업대앞에 나서서 일하던 순자는 끝내 현훈증을 일으키며 쓰러지고 말았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가? 순자가 눈을 떠보니 자기가 중국식 온들로 된 숙소에 홀로 누워있었는데 입에서는 겨불내가 나는 것이 목구멍이 타들어가는듯 했다. “게 누구 없어요? 물…물 좀 주세요.” 입을 열었으나 목이 꽉 막히면서 소리가 나가지 않았다. 아니, 소리를 친다고 해도 텅빈 방안에는 도와줄 이도 없었다. (내가 이러다 부모님도 뵙지 못하고 죽는 건 아닐가?) 이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슬퍼지면서 눈물이 양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구멍이 난 창호지로 밖을 내다보니 마침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은 꽤나 많이 내려 발목만큼의 두께가 되는듯 싶었다. 순자는 밖에 나가서 눈이라도 먹으면 나을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순간 재차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목안은 계속 침 한방울 넘길 수 없을 정도로 타들어갔다. 일어날 수 없는 순자는 기여서 바닥에 내려가려다가 쿵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중국식 온들이 꽤나 높은지라 엉덩이쪽으로부터 떨어졌건만 그 부위가 한동안 얼얼해났다. 그는 안간힘을 써가며 출입문쪽을 향해 기고 또 기였다. 그가 가까스로 출입문을 열자 찬기운이 쓸어들어오면서 정신이 좀 개운한듯 했다. 순자는 다시 기운을 내어 밖으로 기여나간 후 두손으로 눈을 움켜쥐고 입안에 밀어넣었다… 한편 순자가 일하러 나가지 못하게 되자 공장측에서는 간도에 있는 용정영사관을 통해 순자가 전염병에 걸렸으니 그를 데려가고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도록 순자네 집에 통지하게 하였다. 이에 집에서는 또 큰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는 한탄하며 땅을 쳤고 어머니는 아예 기혼해 넘어지고 말았다. 순자의 처지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으나 순자의 편지를 받고 어느 정도 안심(편지종이에 얼룩진 눈물자국을 보고는 순자가 그냥 부모가 그리워 운 것으로 오산)하였는데 이런 기막힌 일이 발생하다니… 집에서는 셋째오빠 구완이를 대신 보내고 순자를 데려왔다. 그때는 순자의 목숨이 한창 경각을 다툴 때였다. 집으로 돌아온 순자는 일주일동안 혼미상태에 있다가 어머니 윤씨의 병구완끝에 가까스로 의식을 회복했다. 한편 얼마 안있어 순자 대신 봉천에 간 오빠마저 그 몹쓸 상한병에 걸려 결국 드러눕게 되었다는 기별이 또 일본영사관을 통해 전해왔다.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집에 있는 돈푼이 갈만한 물건을 몽땅 팔아 겨우 노비와 벌금돈을 마련해 갖고 봉천으로부터 오빠를 데려오게 됐다. 인사불성인건 오빠 구완이도 마찬가지었다. 어머니 윤씨가 하도 의악스럽게 아들과 딸의 병구완을 한덕에 그들 오누이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가정에 액운이 거듭되던 그 세월, 참으로 갑갑하고 암울한 연대었다. 그 때가 바로 1945년 4월, 일제의 패망을 몇개월 앞두고 있던 나날이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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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6-14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 (13) 런던타워
    런던타워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 영국, 지점: 런던 템즈강 북안 함의 : 영국황실의 중요한 상징 런던타워는 영국 런던의 동남각의 탑산에 위치, 이미 9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런던타워는 비록 “탑”으로 명명되었지만 기실 이는 성곽식으로 된 건축물이다. 영국역사상에 있어서 런던타워는 일찍 방어가 엄밀한 요새였으며 국왕가족의 거처지었지만 어찌보면 감옥과도 같은 곳이기도 했다. 현재 런던타워는 하나의 저명한 박물관으로 되었는데 박물관내에는 역대 국왕들의 왕관, 왕포(王袍), 금은진주와 생활용기들이 진열돼 있다. 런던타워의 웅위로운 건축풍격과 유구한 역사는 이를 영국의 중요한 문화재의 하나로 되게 하고 있다. “보루”와 런던타워 런던타워는 두개의 방어담장을 갖고 있다. 즉 외부성벽 남쪽의 방어호로서 성벽밖을 둘러싸고 있는데 사병들이 그것을 지키노라면 방어로를 쉽게 통제할 수가 있었다. 다음 내부성벽은 비교적 높고 성벽을 따라 13개의 보루가 있으며 제 2 의 방어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보루는 凸형으로 밖으로 돌출되었으며 사병들은 높은 곳에서 성곽밖의 모든 구석들을 살필 수가 있다. 또한 각 곳으로부터 오는 진공을 제지시킬 수가 있다. 이 보루들은 전쟁시에는 방어로 쓰이고 평소에는 거주장소로 이용되었다. “감옥”과 런던타워 런던타워는 일찍 적지 않은 명인들을 수감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 명인들 중에는 공상식 사회주의의 조상 토마스 몰과 국왕 헨리 8세의 두 왕후, 에드워드(爱德华) 4세의 두 유공자 등이 수감되던 곳이었다. 당시 대영제국은 국내치안에 타당한 방법이 있었고 대외로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대패시킨 엘리자베스 1세를 이 곳에 수감하기도 했다. 현재 런던타워는 그 어떤 사람도 가두어놓지 않지만 성곽내부에는 아직도 고대형법의 지하감방, 보검, 도끼 등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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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6-10
  • 오묘한 세계대백과(13) 혜성의 긴 꼬리
    하늘의 어떤 별들은 매우 “장난기”가 심한바 그것들은 긴 꼬리를 끌고 태공중에서 쉬임없이 이리 날고 저리 날고 한다고 한다. 이 별들의 이름이 바로 “혜성”이라고 한다. 그것들은 종래로 가만있지 않고 있는데 아마 자기의 아름답고도 긴 꼬리를 자랑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혜성은 얼음입자와 결빙된 먼지기체로 구성, 그것의 중심이 바로 혜핵이다. 혜성이 태양신변에 날아가면 태양이 열량은 혜성자체내의 먼지와 결립입자기체를 운무로 만들어 혜핵의 주위를 감싸게 했다가 혜성의 “털”로 되게 하며 뒷따라 태양풍이 이런 “털”을 불어버리면 커다란 꼬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혜성이 태양신변에 가면 그 꼬리가 길어졌다가 태양과의 거리가 멀어지면 그 꼬리가 짧아진다고 한다. 한편 혜성의 꼬리는 빛을 낼뿐만 아니라 태양의 빛을 반사하기도 한다. 때문에 지구에서도 혜성의 꼬리를 똑똑히 볼 수 있는 것이다. 혜성중에는 유기분자가 함유돼있는데 이는 생명의 기원과 중요한 연계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과학자들의 관측에 따르면 지구가 형성되던 초기에 가능하게 혜성에서 작은 비 내리듯이 일종 유기물질을 지구에 내려보냈는데 이것이 지구에서 생명의 기원으로 되었을 수 있다고 한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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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6-10
  •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 (3)
    ■ 김철균 “고운 사람 미운데 없고 미운 사람 고운데 없다”는 속담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려서부터 순자는 매우 이쁘게 생긴데다 거기에 마음이 착하고 활달했으며 노래도 잘 불렀다. 그 때도 동네 사람들은 농촌의 힘든 모내기나 가을걷이 그리고 낟알털기같은 일을 할 때마다 여러 집 일군들을 합쳐서 한집 한집씩 돌아가며 일을 해주군 했다. 그렇게 모두들 함께 뭉쳐서 일을 하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 해도 그닥 힘들지 않았고 그만큼 빨리 축 났으며 또한 여럿이 어울려서 일을 하면서 농담도 하고 노래도 부르니 그만큼 일터의 분위기도 좋아졌기 때문이다. 마을사람들은 힘든 일을 할 때마다 순자를 불러서는 노래를 부르게 했다. 그것은 순자가 그만큼 노래를 잘 불렀거니와 이쁘게 생겼고 또한 마음씨가 착해 동네사람들과 잘 어울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마을사람들이 부를 때마다 순자는 한번도 짜증을 내지 않고 동네사람들앞에 자주 나서군 했다. 당시 순자는 아는 노래들이 많기도 했다. 민요로는 “도라지”, “노들강변”, “아리랑”, “조선팔경”으로부터 현대계몽기가요인 “고향의 봄”, “반달”, “고향하늘”과 “오빠생각” 등으로 아는 노래가 부지기수었다. 그 중 그래도 아주 잘 부르고 즐겨부르던 노래가 바로 “오빠생각”이었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타고 서울 가면서 / 비단구도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울건만 서울가신 오빠는 소식이 없고 / 나무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 이렇게 순자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일군들속에서는 박수소리와 더불어 “재청”소리가 함성처럼 터져나왔다. 그러면 순자는 주저없이 그 “재청”에 응해 계속 노래를 불렀는데 어떤 날에는 10컬레 이상이나 불러 목이 쉴 때도 있었다. “명기어른, 딸 하나를 정말 잘 키웠수다.” “아이구, 윤씨! 저 애가 크면 총각들 애간장이나 태우게 만들겠수그려.” “참, 나두 저런 딸 한명 있었으면 좋겠구만. 저 윤씨, 저 딸애를 우리 집에 주지 않을려우?” 마지막으로 딸비위를 하는 여인은 아들만 5명이나 있는 아낙네었다. 이렇게 마을사람들이 찧고 박고 하는 동안 순자의 어머니 윤씨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수걱수걱 일만 했다. 기실 순자의 어머니 윤씨는 딸애가 노래부르기에 재미를 붙이는 것에 대해 조금도 달갑지가 않았다. 아니, 한사코 뜯어말리는 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보, 딸년한테 소리(노래)나 하게 하고 앞으로 풍각쟁이로 만들겠수? 아니면 가야금을 뜯는 기생년으로 만들겠수?” 윤씨의 말에 김명기어른도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동감이었다. “그러게 말이우다. 나도 걔가 풍각쟁이로 되는 걸 원치 않는다만 자기가 그렇게 좋아하는걸 어떻게 하겠수? 다 팔자소관이 아니겠수? 옛날에 아버지가 남한테 퍼만 주면서 가산을 다 말아먹더니 나도 그렇고 저 애도 아마 그런가 보구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앤 고생할 팔자인 것 같수다. 그리고 사람의 팔자란 하늘이 정했다 하거늘 어떻게 사람의 힘으로 고칠 수 있겠수?” “글쎄 말이웨다.” 어머니 윤씨는 점도 치고 사주팔자도 보면서 무던히도 딸의 팔자때문에 속을 말없이 썩이군 했다. 이상한 것은 어떤 점쟁이들은 “애가 고생할 팔자”라고 했으나 사주팔자를 보는 어떤 미신쟁이들은 “애가 고생은 하겠으나 남편과 자식복은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말속에 말을 남기군 하였다. 그러건 말건 순자는 순자대로 여전히 노래에 큰 취미를 가지고 용정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마을의 언니와 오빠들한테서 자주 졸라 노래를 배우군 했다. 그리고 워낙 총명해서인지 몇번 따라하지 않고도 가사를 암송내고 곡도 제대로 넘길 수가 있었다. 노래를 잘하는 강점은 순자가 학교에 붙을 때도 큰 작용을 했다. 육도소학교에 가서 입학시험을 치던 날 순자는 웬간한 산수문제를 풀고 간단한 문장을 줄줄 읽은 외에도 교장선생님이 노래를 불러보라고 하니 연속 세컬레나 불러 교장선생님과 기타 선생님들의 인상속에 남게 했다. 3 순자가 공부를 할 수 있은 건 결코 집이 유족해서가 아니었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순자의 아버지 김명기 어른은 조선에서 살 때인 부친세대시기부터 가세가 기울리기 시작했고 간도 대문동에 정착할 때는 완전히 평민과 다름없는 계층으로 되었다. 그 때만 해도 여자애들한테 공부를 할 수 있게 하는 건 용정이나 국가가(연길)같은 도회지에서 사는 가정들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고 가난한 시골에서는 거의 꿈도 꿀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독립활동가의 후손인 김명기 어른은 부친으로부터 받은 영향때문에서었던지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죽은 큰 딸 숙자한테도 서당공부를 하게 했고 어린 딸 순자도 글공부를 할 수 있게 하였다. 그것도 대문동에 학교가 없기에 학교가 있는 육도촌(지금의 신화촌)에 방을 얻어주면서까지 말이다. 그만큼 전주 김씨 양반후손인 김명기 어른은 어리무던하면서도 뼈대가 있는 남정이었다. 소학교에 붙어서 처음에 순자를 포함한 조선인 자식들은 그래도 조선글을 배울 수 있었다. 아름다운 우리 나라/ 살기 좋은 우리 나라// 금은보화 넘쳐나는/ 3천리 금수강산… 그리고 조선 경성으로부터 왔다는 한 총각선생님으로부터 몰래 조선의 “태극가”를 배우기도 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무궁화 3천리 화려강산/ 조선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존하세… 당시 간도에서 사는 조선인들은 몸은 비록 간도에 담고 있었지만 하루 빨리 망국노의 삶을 끝내고 독립된 조선에 돌아가 살아야 한다는 협애한 민족주의 의식이 농후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 중에는 간도땅이 기름져 농사가 잘되며 조밥이나마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해서 두만강을 건너온 사람도 있었지만 조선이 일본에 의해 병탄된 후 왜놈들의 등살에 못이겨 피해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기에 반일정서가 아주 강한 편이었다. 그러나 간도 역시 1931년의 “9.18사변”이후 일제의 천하가 되었다. 일본이 싫어 그들을 피해 두만강을 건너왔지만 간도땅에 와서까지도 왜놈들의 수모를 당해야 했다. 작고 힘없는 약소국가의 백성들이라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일제한테 그저 당하고만은 있지 않았다. 밤만 되면 동네사람들은 가끔씩 그제날 조선독립을 위해 간도지방의 산야를 주름잡던 홍범도, 김좌진 등 독립군장군들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반일투쟁과 조선독립을 연결시키군 하였다. (생략) …… 한편 지난 세기 40연대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침략행위는 극에 달하였다. 일제의 침략정책이 가심화 됨에 따라 재만조선인들의 처지는 더욱 비참하게 이그러져갔다.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약탈에 이어 이제는 인권말살도 노골화되어갔다. 순자가 소학교 4학년이 되자 학교에는 일본인 교장이 부임됐다. 이와 더불어 학교의 분위기는 더욱 험하게 변했다. 교직원은 물론 학생들까지 항일에 대한 말은 일절 입밖에 내지 못하였다. 지어 조선글을 쓰고 조선말을 입에 올리는 것마저 허락되지 않았으며 이를 위반하면 귀쌈을 맞거나 벌을 서군 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몰래 진주항을 기습하여 미국의 태평양함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으며 이것을 시작으로 태평양전쟁이 전면적으로 폭발하였다. 이와 더불어 학교내에서는 일본의 대륙진출과 “대동아성전”을 가송하는 이른바 웅변모임이 도처에서 있었고 대 일본제국의 군가들이 보급되었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학도병으로 전쟁터에 끌려나가기 시작했다. “천황페하의 황국신민으로 된 젊은이들이여, 지금 천황페하의 무적의 황군은 넓고 넓은 지나(중국)대륙의 절반 이상과 동남아의 많은 지역은 물론 저기 저 남태평양의 인도네시아, 필리핀과 사이판 등 나라와 많은 섬들을 점령하였고 지금 바야흐로 대양주의 오스트랄리아에로의 진격 전야에 있다. 천황페하의 황군은 승전에 승전을 거듭하고 있으며 아메리카의 양키군대는 무적황군에 쫓겨 풍지박산이 되고 있다. 천황페하의 황국신민으로 된 젊은이들이여, 태평양성전은 서방열강들의 속박과 억압에서 아시아 민족을 해방시켜주는 정의의 전쟁이다. 태평양 성전의 최후 승리는 눈앞에 박두해있다. 아시아인종이 열강들의 속박과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모두가 일본의 성전에 궐기하라. 천황페하 반자이! 대 일본제국황군 반자이!” 守るも攻むるも黒鉄の まもるもせめるもくろがねの 浮かべる城ぞ頼みなる うかべるしろぞたのみなる 마모루모 세무루모 꾸로가네노 우카베루 시로조따노 미나루 (싸움도 지킴도 떠오르는 강철성의 힘이요) 浮かべるその城日の本の うかべるそのしろひのもとの 皇国の四方を守るべし みくにのよもをまもるべし 독우까베루 소노 시로 히노모토노 미쿠니노 요모오 마모루베시 (떠오르는 그 성의 힘으로 태양의 근본 황국의 사방 지킬것이리) 真鉄のその艦日の本に まがねのそのふねひのもとに 仇なす国を攻めよかし あだなすくにをせめよかし 마가네노 소노 후네 히노모토니 아다나스 꾸니오 세메요까시 (강철의 그 함선은 우리 황국 위협하는 적 격멸할것이리) 石炭の煙は大洋の いわきのけむりはわだつみの 竜かとばかり靡くなり たつかとばかりなびくなり 이와기노 께무리와 와다츠미노 따츠카또 바카니 나비쿠나리 (석탄의 연기는 떠오르는 룡처럼 나붓길것이고) 弾撃つ響きは雷の たまうつひびきはいかずちの 声かとばかり響むなり こえかとばかりどよむなり 따마우쯔 히비키와 이카즈찌노 꼬에가또바까리 도요무나리 (발포음은 천둥소리 되어 대양에 울려퍼지리) 万里の波濤を乗り越えて ばんりのはとうをのりこえて 皇国の光輝かせ みくにひかりかがやかせ 망리노 하토오 오 노리코에떼 미쿠니노 히카리 카가야카세 (만리의 파도를 타고넘어 우리 황국의 빛을 밝혀나가세) …… 당시 조선에는 물론 간도의 곳곳에서도 이와 같이 목에 피대를 세워가며 이른바 “대동아성전”을 위해 “열변”을 토하는 자들과 “일본군 군가(일명: 군함행진곡)”를 부르며 광란적으로 설쳐대는 자들이 많았다. 모두가 단말마적인 발악이나 다름이 없었다. 또한 조선에서는 “내선일체(内鲜一体)”란 슬로건(口号)으로 수많은 남성청년들과 처녀들이 학도병, 정신대로 되여 전선에 끌려가기도 했다. 놈들의 총알받이와 수욕해소 도구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 한편 조선에 이어 간도에서도 해괴한 일이 발생했다. 조선인의 이름을 몽땅 일본식이름으로 바꾸는 이른바 창씨개명으로 “황국신민”이 되는 추태까지 벌어졌다. 그 창씨개명에 대한 선전 또한 한시기 3.1운동시 조선독립선언에 서명했던 춘원 이광수 등 이른바 유지인사들까지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으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순자도 창씨개명 때문에 당시의 이름인 기숙(순자의 원래 이름)으로 불리우지 못하고 기슈구로 고쳐졌다. 조선인으로서 당당한 조선이름이 있어도 그 이름을 쓸 수 없는 황당한 시대, 그것이 바로 당시 나라를 잃은 조선인들의 운명이었다. 또한 학교에서는 공부하는 시간보다 군사훈련을 내용으로 하는“체육시간”이 더 많아졌다. 워낙 달리기, 그네뛰기와 널뛰기 등 체육운동에는 취미와 소질이 있었고 교내의 대열검열 시마다 늘 학생대표로 선발되어 검열대에 올라가 교장선생님한테 경례를 올린 후 검열대호를 지휘하군 하던 순자였지만 어쩐지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하는 대열짓기, 날창찌르기, 포복전진과 방공호 들어가기 등 훈련만 강요하는 “체육시간”이 점점 싫증이 났다. 취미성이 없는데다 너무나도 엄격하고 포악성이 내포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학하여 하숙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순자의 몸은 먼지투성이 아니면 진흙투성으로 되기가 일쑤였고 그 지친 모습은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순자의 아버지 김명기 어른은 육도촌에 있는 세방에 왔다가 순자가 온몸이 먼지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참, 세상이 망할려니 별 해괴한 일을 다 보는군, 학교라는 것이 웬 당치도 않는 군사훈련이란 말이냐? 그리고 계집애들이 군사훈련을 해서는 쌈터로 나간단 말이냐?! 안되겠다. 너 내일부터 학교에 나가질 말거라.” 아버지 김명기 어른은 이렇게 왜놈의 말을 하고 왜놈의 글을 배우는데다 이번에는 왜놈의 군사훈련까지 강요하는 학교가 점점 못마땅한지라 딸을 순자를 퇴학시킬 타산까지 하고 있던터라 드디어 퇴학이란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 순자 역시 군사훈련이 힘들고 싫증나는 건 마찬가지었다. 훈련이 서툴어도 매맞았고 일본군가를 잘 부르지 못해도 욕을 얻어먹기가 일쑤였으며 일본인교관의 험상궂은 낯판대기는 보기만 해도 무서워났다. 하지만 순자는 퇴학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비록 이전에 비해 공부하는 시간이 현저하게 줄어든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공부하는 시간만은 재미가 있었다. 일본어로 공부하는 것도 상관없는 것 같았다. 그만큼 순자는 공부에 푹 빠져 있었다. 성적도 매우 우수했다. 언젠가 한번은 순자가 전 학급에서 종합 1등을 하였었다. 헌데 당시 일본인 교원은 조선인 학생이, 그것도 여학생한테 1등을 주기 몹시 싫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2등을 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머리를 썩썩 긁으며 궁리해낸 것이 2등을 한 일본인 학생 교쇼진과 순자한테 공동 1등이란 점수를 주는 것이었다. 이렇듯 순자가 공부에서 전 학교적으로 독특하게 우수한지라 결국 아버지도 순자를 퇴학시키려던 마음을 접게 되었다. 소학교를 다니는 6년간 순자는 공부를 잘하기도 했거니와 지각과 조퇴란 단 한번도 없었으며 6년간 만개근생으로 표창받기도 했다. 이는 전 교내적으로 순자가 유일한 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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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6-10
  • 해외견문 시리즈 (9)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
    ■ 김철균 여기는 태국의 수도 방콕 – 섹스서비업으로, 마약밀매로 세계에서 유명해진 나라, 나라의 경제진흥을 위해서 한 세대의 소녀들을 희생시킨다는 명목 아래 창녀들이 출국해서 외화를 벌어들이고 매 가정 4명의 여자 중 1명은 창녀라는 오입쟁이들의 천국 - 타일랜드. 1991년 6월 29일, 우리네 선박 “코리안스타”호가 태국의 수도 방콕항에 입항하자 아니나 다를가 그날 저녁으로 에이젠트라고 하는, 전문 선박입항시의 모든 일을 대신 처리해주는 대리점 일군이 거의 60명이나 되는 아가씨들을 이끌고 배에 오르는 것이 었다. 선내는 삽시에 경사가 난 것 같았다. 참, 포클랜드로부터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와 스페인의 라스팔마스, 마린, 비고 이렇게 입항할 때마다 여자들을 찾군 하던 한국선원들이었건만 아직도 직성이 안풀렸단 말인가! 하긴 정력제라고만 하면 오징어의 입과 생식기마저 돌아가며 뜯어내군 하던 “배놈”들이었으니까 그럴만도 했다. 우리 선박에는 박치국이라는 한국선원 한명이 있었는데 총각인 그는 그 누구보다도 여자를 밝히는데 이골이 든 녀석이었다. 그의 얼굴은 전형적인 여드름투성이었다. 그래서 그 여드름을 두고 선장과 그한테는 자주 이런 대화가 오가군 했다. “박군, 너 얼굴의 여드름은 왜 그리도 많이 돋아났지?” “선장님도 참, 그걸 번연히 알면서도 왜 묻습니까? 그건 아래로 빠져야 할 것이 제때에 빠지지 못하니까 우로 뻗은거지요.” “에익 이 사람아, 검은 말, 흰 말 가리지 않고 타면서도 채 빠지지 않았다니 너의 몸뚱아리에 도대체 그것이 몇동이나 고여 있는거냐?” “허허허, 그래 저의 몸에 피만 몇동이 고여 있는가 하세요? 그것도 몇동이씩 고여있어 매일 한글라스씩 뽑아도 석달 열흘은 뽑아야 할 겁니다.” … … 아가씨들이 선박에 올라 미구하여 1항사인 김형훈씨가 나타났다. 그가 호르래기를 후르륵 하고 불자 아가씨들은 미리 훈련이라도 걸친 것처럼 갑판위에 두 줄로 행열을 짓는 것이었다. 이어 1항사가 영어로 뭐라고 꼬부랑소리를 하자 아가씨들은 원, 투, 쓰리, 포, 파이브, 식스, 세븐 … 하면서 인원수를 보고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1항사는 흡족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가씨들의 주위를 돌며 하나 하나 체크하더니 그 중에서 제일 젊고 이쁘게 생긴 아가씨를 골라잡은 뒤 나를 불렀다. “주방장 김군, 이 아가씨를 선장방까지 모셔가도록 하이소.” 그 아가씨는 20살쯤 되어보이는데 진짜 이쁘게 생겼다. 얼굴도 이뻤지만 미니스커트를 입은 다리도 미끈했으며 가는 허리에 반해 히프와 가슴은 어찌도 건뜻 쳐들고 팽팽했는지 진짜 한번 쓰다듬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허나 내가 뭔데 감히 선장의 파트너를 다치겠는가! 선장은 진작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침대위에 펴놓은 이불과 방안의 향수냄새 그리고 차탁위에 놓여있는 위스키병 등이 그걸 말해 주었다. 그럼에도 짐짓 시치미를 떼는 엉뚱한 선장님. “뭐 아가씨?! 참 너나 데리고 놀지 그래?!” “저야 뭐 나중에 좀 보지요.” “그래그래 고맙다. 그럼 이걸 갖고가서 술 한잔 하던지 아가씨 한명 골라잡던지 하이소.” 선장이 넘겨준 봉투에는 미화 50불이 들어 있었다. 한편 내가 3층에 있는 선장방에 갔다오는 사이에 벌써 얼굴이 반반한 아가씨들은 한명도 없고 남은 년들은 말짱 나먹은 들말같은 아줌마들과 겨릅대처럼 깡깡 마른 아가씨들뿐이었다. 창녀들은 대뜸 나를 둘러쌌다. “오빠, 내가 이쁘지요? 어때요, 날 가지겠어요?” “아저씨, 참 멋져. 난 아저씨가 좋아.” 가뜩이나 기분이 잡치던 판에 그녀들이 한국말로까지 지껄여대자 나는 더욱 그년들이 곱지를 아니했다. 그래서 침실로 들어가 잠간이라도 누었다가 저녁밥 지으려는데 2기사인 서춘철씨가 찾아왔다. 아가씨가 배고프다기에 먹을 걸 좀 챙겨달라는 것이었다.그러면서 왜 혼자나며 눈이 휘둥그래지는 것이었다. “아니, 주방장 김상, 아직도 한명 골라잡기 못했능기여? 김상은 바보요 바보, 김상이 정조를 지킨다 해서 부인이 믿기나 할줄 아능겨?! 뱃놈은 뱃놈 배짱대로 오입도 해야 하능기라.” “마누라가 겁나서가 아니라 에이즈가 무서워서 그래요.” “아이고 이 사람아 , 사내로 태어나 에이즈에도 걸려보지 못하면 그게 무슨 사내인고?! 자 우리 함께 에이즈에 걸려보자잉께. 알겠습니꺼?” 그도 그럴 것이 서춘철씨는 일도 잘하고 술도 잘 먹고 의협심도 강하고 뭐나 다 좋았지만 그 역시 여자를 좋아하는 범주만은 벗어나지 못했다. 하긴 그의 말을 빈다면 술담배와 여자도 모르는 사내는 세상에서 제일 옹졸하고 깍쟁이고 지독한 놈이라고 했는데 그 말도 조금은 일리가 있는듯 싶었다. 그러나 서춘철씨는 마누라만은 지극히 사랑했는바 침실에 늘 마누라와 자식의 사진액틀을 걸어주었는데 배가 입항할 때마다 꼭꼭 집에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군 했다. 또한 그의 마누라 역시 남편의 성미를 잘 아는지라 그가 승선한 뒤 여자한테로 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부탁이란 그저 에이즈에만 걸리지 말라는것이었다. 하기에 그녀는 남편이 출국할 적마다 “여보, 장화”하며 콘돔 여라문곽씩 짐속에 챙겨 넣어주군 했다는데 그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남편을 그건 곳으로 보내면서 오입조차 하지 말라는 부탁조차 어리석은 노릇이며 남편을 잡아둘려면 그런 곳으로 보내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녀의 말마따나 기계는 돌려야 녹 쓸지 않는다나?! 방콕에 머무르는 사이에 매일같이 여자를 갈아대는 다른 선원들과는 달리 서춘철씨만은 줄곧 아가씨 한명과만 거래를 했는데 그러면 병에 걸릴 근심도 덜하고 돈을 적게 쓸 수도 있었다. 며칠간 도맡으면 몸값도 할인되니까. 헌데 맘씨고운 그는 자주 아가씨와 함께 거리에 나가서는 옷도 사주고 술을 마셨기에 나중에 계산을 때려보니까 돈을 제일 많이 처넣은 이가 다름 아닌 서춘철씨었다. 그래서 매번 아가씨를 사고난 뒤면 그는 언제나 “에익! 정들어 흠뻑 빠지기 전에 훌쩍 떠나버려야지”라고 투덜댔지만 이튿날이면 또 생각나는 걸 어떻게 하지? 참 여자의 몸뚱아리가 과연 무엇인지 밥한끼 굶은 건 괜찮아도 그것만은 떠날 수 없어 늘 사나이의 애간장만을 태우는지?… 방콕에서의 다른 한 인상은 말린 악어몸뚱아리와 상아를 파는 것이 각별히 많았는데 악어는 일반적으로 20~30불 상아는 200불 정도면 살 수 있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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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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