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2-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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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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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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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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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 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②
    1927년, 중국과 독일의 접촉을 시작으로 항일전쟁 직전까지 독일은 중국의 최대 협력 파트너였다. 원래 독일 군사고문은 장개석에게 60개의 독일의 기계사단을 통폐합해 내놓아야 했지만 국민정부는 그렇게 많은 돈이 없었고, 또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았기에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전역에 30개의 ‘조정사’만 있었고 독일은 40만 세트의 장비만 쏟아부었다. 이 정예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거의 소진되었다. 최초의 ‘송호회전’, ‘남경보위전’, 화북전장의 ‘흔구회전’, ‘낭자관전투’;등 전투에는 대량의 독일 기계사단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참혹한 대가를 치렀다. 이들 30개의 ‘조정사’ 중 28개는 사단 전체가 마비됐고, 2개 사단만이 격렬한 전투를 피했기에 그 병력과 장비를 보존할 수 있었다. 또 전쟁 때문에 독일의 무기는 제때 수송되지 못했고, 독일군은 장비를 보충받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국산장비를 갖고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게다가 독일은 일본과 동맹을 맺은 탓으로 독일군은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늦추다가 1938년 7월 중국에 대한 지원을 모두 멈추고 중국에서 철수했다. 독일인들은 철수했고, 중국의 항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중국내 전장은 군사 장비의 보충이 시급했고, 장개석은후원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바로 이때 소련이 나타났다. 소련은 국민정부로 하여금 일본군의 진군속도를 저지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장개석과 합작협정을 맺고 중국에 군사물자를 지원했다. 이에 따라 독일기계사와 미국기계사 사이에 소련기계사가 하나 더 생겼다. 소련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민정부가 농수산물과 각종 금속 원자재만 제공하면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10년 만에 중소 협력은 이렇게 성사됐다. 소련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름대로 성의를 갖고 있었고, 탱크와 비행기 같은 중무기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소련 장비로 20개 사단을 무장시켜 독일군 무기사단의 손실로 생긴 공백을 메우려 했다. 이렇게 양 측이 각각 필요한 것을 취해서 교역은 비교적 만족스럽게 진행 됐다. 하지만 소련 기계사의 배치에 있어서 중·소 양측은 이견이 있었다. 소련 측은 모두 소련군 편제대로 새로 편성된 부대에 장비를 배치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몰래 장비를 따로 빼돌려 포병단을 조직했다. 이렇게 10여 개의 포병단위를 만들면서, 미리 약속했던 대로 소련 기계사단에 이를 전달하지 않았다. 한편 소련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물자 수송도 간단해 1차 소련의 기계장비로 4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었으며 이 중 제200사단은 중국 최초의 기계화사단이 됐다. 그리고 후속으로 소련의 기계화 장비도 육속 도착해 장개석은 18개의 소련 기계화사단을 구성해 일본군과 잘 싸울 수 있었다. 이 보배같은 소련 기계화사단들에 대해 장개석은 독일 기계사단들처럼 잔혹한 전장으로 보내져 소모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1941년에는 15개 사단이 각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이 중립조약을 맺은 뒤 중소 관계가 약화되면서 소련의 군사장비는 보충되지 않았고, 소련의 기계화사단 역시 점차 역사적 명사로 되었다. 미국의 원조는 큰 것을 노린 전략적 움직임 실제로 영국은 독일의 지원이 끊긴 뒤에도 잠시나마 중국에 군사물자를 제공했지만 일본의 압력에 원조를 중단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중영 간 원조가 회복됐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이때 이미 해가 기울어 극동에 전념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소련의 장비가 없어지자 미국은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구세주가 됐고 국민당 군은 미 장비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항일전쟁 단계에서 미국이 실제로 충분한 지원을 하지 않은 데는 객관적인 이유도 있고 주관적인 이유도 있다. 한편으로 운남-미얀마 도로가 끊기자 물자 장비는 험준한 항로를 통해서만 수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적었다. 다른 한편으론 아시아 전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영국과 소련에 많은 장비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인은 통이 컸다. 중국의 해방전쟁 시기까지 22개 군 64개 사단이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장개석에게 보내와 국민당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장개석은 미국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공산당에 의해 대만이란 작은 섬으로 쫓겨나 지내다가 일생을 울적하게 마감했다. 중국은 북벌전쟁 때부터 외국의 군사원조를 대대적으로 받으면서 중간에 공급처를 여러 개 바꿨다. 심지어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 등도 중국에 숟가락을 얹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독일·소련·미국이 더 많이 지원했다. 왜 이런 나라들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중국을 지원했을까? 독일의 속셈은 짐작이 가는 대로 장사를 하러 온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금속과 각종 원자재가 중국에 많고 거기에 무기까지 팔아 큰돈을 벌 수 있는 중국을 싫어 할리가 없는 것이다. 소련은 여러 가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일본을 견제하여 극동에서의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 한편, 당시 소련은 넓은 영토가 독일군에 함락되고 원자재가 부족했기에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나라로 중국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국민정부에 원하는 게 없음에도 속내는 더 흉악했다. 미국이 내놓은 ‘임대법’은 파시스트의 침략을 받는 전 세계 국가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앞에서 이런 국가들이 육탄이 되어 주는 것이고 양쪽이 다 소모되면 그 때에 가서 그들이 나서서 수습하여 이들 국가들을 깊이 통제하겠다는 취지가 있었다. 한마디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변화 속에 있고, 친구와 적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판단되며 이익만이 영원한 것이다. 이들 나라가 중국에게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는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도 약육강식의 규칙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다만 실력이 강해야 비로소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경직된 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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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8
  • 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①
    [동포투데이 철민] 1937년 8월 13일, 제2차 상해 보위전이 발발하자, 장치중(張治中) 장군의 국민당 제9집단군이 상해에 진주했다. 당시 장개석은 장치중 장군에게 2개의 독일의 기계화사인 87사단과 88사단을 지원하였다. 이어진 남경 보위전에서도 몇몇 개편 완성된 독일 기계화사가 빛을 발산하면서 중국군의 완강함을 보여주었다. 중국과 독일, 양국은 서로 다른 진영에 있었다. 그런데 왜 장개석은 독일 기계화 부대가 소유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두 나라는 또 어떻게 교역했을까? 그럼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의 타산을 알아본다. 국민당이 독일을 처음 접한 것은 손중산(孫中山) 때였다. 당시 혁명을 위해여 손중산은 도처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나라들에 손을 내밀었다. 당시 독일은 공산주의의 발원지로서 손문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 인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독일은 당시 낙후한 중국을 외면했으며 손문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뒤 비로소 제1차 국공합작과 소련이라는 거물이 등장하면서 손문을 후원하게 되었고, 격렬한 북벌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1924년 손중산이 사망하자 장개석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켜 좌익과 공산당 세력을 소탕함과 아울러 소련과 완전히 단절했다. 당시 중국은 가난했고, 전쟁 때는 어쩔 수 없이 장개석은 또 밖으로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남경정부가 직면한 국제 환경은 매우 험악하고 객관적으로도 중국과 독일은 일련의 교류를 촉진하는 것으로 양국의 교역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해야만 했다. 영국과 프랑스 역시 같은 아시아에서의 이익은 대부분 남아시아와 동남아에 있었으며, 중국에 대한 수요는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을 장개석은 명심해야 했다. 한편 그 시기,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강대해졌고, 동아시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영국·프랑스 식민지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일본을 안정시키고 자신의 식민이익을 지키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의 중국 침략을 방임하면서 묵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으며, 중국을 지원하는 물자의 통로를 차단하고 될수록 일본에 아첨했다. 미국은 당시만 해도 그렇게 강하지 않았으며 유럽은 여전히 세계의 중심이었고, 후발주자인 미국은 앞사람의 눈치를 봐야 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모범을 보였고 다른 나라들도 감히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감히 하지 못하자 장개석의 아첨은 ‘장님’에게 던져지면서 이상적 효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다행히 독일은 그 바닥을 지켰다. 1927년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본전을 모두 잃었고, 자신의 군사력이 각종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등으로 나라 전체가 억눌리자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독일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실력을 키웠다. 그중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는 그 일부였다. 영국과 프랑스 등 나라의 요구대로라면 독일은 국방군을 10만 명으로 줄이고 나머지 독일 병사들은 모두 현지에서 전역해야 하며, 방위산업도 모두 전환하여 더 이상 군사 장비를 생산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장개석이 협력 요청을 하는 순간, 이는 독일의 마음에 와 닿은 거대한 군사기구로선 힘겨운 일이었지만 해 볼만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자 중국과 독일은 군사협력을 시작했다. 독일 측은 군사교관을 파견하고 장개석이 군대를 훈련시켜 많은 병사가 전역한 뒤 독일의 국방력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고 전투력을 유지하도록 도왔다. 또 독일 장비를 대량으로 팔아 물자와 돈을 챙기고 노동자를 단련시켜 생산량을 보장하면서 부수입도 챙겼다. 장개석은 유럽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군사 장비를 대량으로 확보해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독일은 이미 무릎을 꿇고 유럽의 2등 국가가 됐지만 그러나 이것이 바로 장개석이 비로소 가격을 낮추고, 최소의 대가로 최대의 이익을 얻는 방법이 되었으며, 그의 장사는 매우 잘 되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고, 서로에게서 이익을 얻을 수 있고, 거래도 오래갔다. 독일은 1927년부터 수백 명의 군사고문을 파견해 40만 세트의 무기·장비를 지원했고, 중국의 군수공장 설립을 도왔으며 독일 무기상들과 연계해 중국 군사물자의 주요 공급국이 됐다. 중국과의 교역에 신경을 쓰는 독일은 다른 대안이 없으니 성의를 보여야 했다. 이들이 차례로 파견한 군사고문은 선발된 엘리트들로, 전임 두 단장은 중국군 지휘중추와 장교 양성제도를 각각 개량해 보병의 지휘를 원활히 하고 산하 각급 병종도 전장에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했다. 3인 군사고문단의 단장인 세케트 장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진이 독일 ‘10만 국방군’ 개편에 착수한 것으로 군을 줄이고 전투력을 높인 경험이 있다. 이 장군은 확실히 힘이 있었다. 그는 전형적인 독일 군인에 속했다. 국민정부 군대의 각종 폐해에 대해 하나씩 해결책을 제시해 장개석에게 많은 유용한 건의를 가져다주어 진정으로 중국군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세케트 장군의 계획대로라면 국민당은 60개의 ‘조정사’와 60개의 ‘정리사’를 개편하는데, 전자는 정당한 독일군 무기사, 후자는 일부 독일군 무장을 한 부대였다. 다만 당시 국민정부의 부정부패가 횡행하고 독일도 제대로 장비를 팔 수 없어 ‘7.7사변’ 직전까지 장개석의 손에는 3개의 완전체 독일 기계화 사단과 1개의 교도총대, 그리고 공상희의 체제 내에 없는 세경 총단 밖에 없었다. 1935년 세케트 장군이 병으로 사임하자 후임자인 파켄하우젠도 국민정부의 군사산업 발전을 적극 도왔다. 독일인의 도움으로 국민당은 정식으로 승마총, 꽃 기관총, 82박격포 등을 본떠 선택적으로 병기공장을 세워 어느 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고, 상황은 곧 호전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생겼다. 당시 중국은 가난하여 대양과 은화를 국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대외 무역에서 다른 나라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화인 달러와 파운드화는 국민정부 스스로도 부족하고 금은과 은 같은 귀금속은 더더욱 내놓지 못했다. 그럼 중국과 독일 간 군사물자 거래는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 답은 텅스텐(钨矿), 석(锡), 안티몬(锑) 등 세 가지 금속이었다. 이 세 가지 금속은 방산 분야에서 널리 쓰이지만 독일 본토에서 생산되지 않아 99%가 외국산이었다. 히틀러가 집권한 뒤 군비확충에 나서면서 이들 금속의 수요가 크게 늘었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은 관리가 철저해 독일은 원료를 충분히 조달받을 방법이 없었다. 이 세 종류의 금속은 중국에서는 오히려 매우 흔히 볼 수 있었다. 호남, 광동 등지에서는 모두 상응하는 광물 매장량이 채굴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은 솔직히 많이 쓰지 않았고 산업용 원자재를 군사장비와 교환하는 것을 선호했다. 독일은 전쟁에 대비해 대규모로 원료를 비축해야 했고, 중국은 물산이 풍부해 독일의 많은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중국은 금속광산을 제외한 농산물·면화·브루마 등의 물자를 돈처럼 쓸 수 있었고, 독일이 국민정부에 지원을 요청한 유일한 품목이다. 다만 장개석의 무기·장비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고 국제정세 변화, 물자수송의 지연, 영국의 봉쇄 등으로 중·독 양국 간 원자재·무기 교역이 이뤄지지 않자 국민정부가 현금·백은을 들고 독일과의 협력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다음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2-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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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묘한 세계대백과(28)
    많은 사람들 심목중의 사막이란 꼭 단조롭고 무더우며 아주 밋밋하겠다고 생각될 것이다. 기실 사막은 변화다단한 “천면여랑(千面女郎)”과 같다. 사막은 끝임없이 변하고 또 변하는바 어제의 소사구 혹은 월아의 형태가 오늘은 별처럼 반짝이는 형태로 변하기도 한다. 그외 사막의 모래색갈 또한 그 전체가 황색인 것이 아니다. 만약 사막의 모래 중에 철함량이 많으면 곧 붉은색을 띠고 만약 석고 함량이 많으면 곧 백색을 띤다. 이 “천면녀랑”인 사막은 도대체 어떻게 왔을가? 기실 바람은 사막을 만드는 “마술사”이다. 바람이 불면 대지의 진흙모래을 날려보내 대지는 나체모양의 암석과 지각만이 남게 하거나 근근히 흩어진 조약돌만이 남게 하여 황량한 사막으로 되게 한다. 동시에 이런 모래알들은 저지를 당했거나 풍력이 약해지면 땅에 내려앉아 모이게 되면서 많은 서로 연결된 사구가 되게 하는데 먼 곳에서 보면 풍랑이 기복을 이루는 바다를 련상케 한다 이런 사막, 사구 거기에 대량의 유사 등이 모인 것이 곧 바로 사막의 주요 면모라고 할 수 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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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5-01-28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4)
    ■ 김철균 남편 김용환과 결혼할 때부터였다고 할까? 아니 퍽 그전인 소시적 오빠의 색시가 물동이를 깼을 때 자기가 한 것이라고 덤터기를 쓴 것, 추운 겨울 추워하는 옥단이와 옷을 바꾸어 입은 것 등을 비롯하여 순자가 수십년간 살아온 인생사를 보면 한마디로 남을 동정하고 아껴주고 베풀면서 살아왔다는데 총적으로 귀납된다. 또한 그것은 자식들과 며느리와 사위한테만 향해진 것이 아닌 타남한테까지, 심지어 많은 부분이 한족들한테까지 베풀어졌다는데서 더욱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되게 만든다. 김순자의 생활노트를 펼쳐 보노라면 동네의 별의별 일에 다 참여하였다는 것을 알 수 된다. …… ◎ 동네의 한 한족남정이 임신한 안해를 때리는 것을 보고 말리다가 어깨를 크게 다쳤고 그 것 때문에 오래동안 고생했음. ◎ 동네에 도둑질에 이골이 튼 한 남정이 있었음. 남들은 다 그 집을 온역을 피하듯 꺼려했으나 경상적으로 그집에 드나들면서 “사람은 자기의 노력으로 살아야 하지 무작정 남의 것을 탐내서는 안된다”며 교육하는 한편 그 가정을 돕기 시작, 그 집에 아이를 볼 사람이 없자 딸들을 윤번으로 보내어 아기를 돌보게 해 그들 내외가 시름을 놓고 출근할 수 있게 하였음. ◎ 남편의 친어머니가 사망하고 이복형제가 많은 한 여인의 가정에 석탄이 떨어지자 집에 있는 석탄을 날라다 주었으며 그 집 애들한테 공책을 사주었음. 그리고 문화혁명시기 그 집 아들이 상대방 조직원들한테서 맞아서 거의 죽어가는 것을 구해서는 밀차에 실어 집까지 데려 왔으며 후에 또 그 집 딸이 시집가게 되자 소조주민들과 함께 가서 첫날 이불과 요 그리고 기타 베개같은 것을 해주었음. ◎ 남편과 시어머니 사이에서 구속을 받으며 속을 많이 태우는 한동네의 한 여인을 늘 위로해 주었음. 문화혁명때 아들이 맞아서 죽고 남편도 술로 세월을 보내면서 집에 잘 들어오지 않자 이 여인을 위로해 주면서 돈도 손에 쥐어 주었음. ◎ 몹시 가난한 집이 있었는데 콩장같은 색다른 음식을 할 때마다 이 집에 먼저 맛보라고 가져다 주었고 이 집 큰 아들이 결혼하자 한번도 쓰지 않은 큰 늄대야, 사발과 접시 등을 가져다주면서 살림에 보태게 하였음. ◎ 가정식구가 9명이 되고 아버지가 장기환자인 가정에 경상적으로 생선, 김치와 된장같은 것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 집에 베개가 없는 것을 보자 일부러 천을 사다가 베개를 만들어 주었음. ◎ 동네에서 자주 말썽을 일으켜 따돌림을 당하는 늙은 양주가 있었지만 늘 그 집에 드나들면서 약도 사다 드리고 골난도 해결해 주면서 연세가 들수록 동네의 화목을 도모해야 한다면서 설복하여 끝내 늙은 양주가 더는 말썽을 부리지 않게 했음. ◎ 용정에서 온 한 학생이 부모가 늙고 집이 가난하기 때문에 위생학교에서 퇴학하러 하자 돈 10위안(그 때는 명태 한근에 19전씩 했음)을 손에 쥐여주며 “힘을 내라”고 신심을 북돋아 주었으며 후에도 여러모로 도와주었음. ◎ 비가 오는 날 이웃집 바깥에 있는 석탄이 비에 젖자 자기 집 석탄우에 씌웠던 비닐방막을 벗겨다가 이웃집 석탄더미에 씌워 주었음. 이 때문에 집의 석탄이 비에 젖어 이날 저녁 부엌아궁이에 불도 지피지 못했음. …… 이렇게 순자의 노트를 대충 훑어보노라면 일종 감각이 확 든다. 그것을 좋게 말하면 “뢰봉정신”이라 할 수 있었고 거기서 좀 다르게 붙이면 “걱정도감”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대부분 사람들이 이를 보면 “바보”같은 짓으로 취급하기가 일쑤일 것이다. 바보같은 짓, 이렇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순자는 “나 스스로도 내가 바보처럼 여겨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이 사회는 나같은 바보를 필요로 할 때가 늘 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는 내가 바보로 나서지 않아도 누군가는 꼭 바보로 나서야 할 것이 아닌가” 라고 일축해 버리군 했다. 어떤 위태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누군가는 꼭 바보로 나서야 한다는 말, 그런 경우가 가끔씩 있은 것도 사실이었다. 어느 해엔가 순자는 연길개발구에 있는 셋째 딸 영애네 집으로 가있게 되었다. 당시 개발구에 있는 딸 집 근처에는 항주에서 왔다는 한족 노부부가 작고 헐망한 가게를 차려놓고 아들 며느리와 함께 음식장사를 하면서 매우 힘들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이었다. 이 날도 순자가 밖에 나가 바람을 쏘이려는데 불현듯 항주에서 온 그 노부부네 가게 쪽에서 왁작지껄 크게 떠들어 대는 것이었다. 이에 순자가 웬일이 일어났다 싶어하면서 그 쪽으로 가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가 그 노부부네 아들과 며느리가 대판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아들은 식칼을 쥐고 며느리는 돌멩이를 집어들었는데 당장이라도 살인사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얘 영순아, 영애야! 큰일이 났다. 빨리 110에 전화를 걸어라. 이러다간 살인사건이 나겠다.” 큰 소리로 딸들한테 알린 순자는 무작정 식칼을 쥔 아들의 허리를 끌어안은 한편 빨리 돌멩이를 쥔 사람을 제지시켜 달라고 주위의 사람들한테 요청했다. 하지만 모두들 구경만 할뿐 누구도 선뜻 나서주지 않았다. 자기와 상관없는 일에는 참견하고 싶지 않다는 자세였다. 다행히도 얼마 뒤 110특경들이 차를 몰고 나타났고 특경들에 의해 싸움은 인차 제지됐다. 110특경들은 싸움당사자들한테 한바탕 교육을 하면서 그들한테서 더는 싸우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는 차를 몰고 돌아갔다. 하지만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순자는 그 노부부의 아들한테서 빼앗은 식칼 2자루를 딸의 집에 감추어 두었다가 퍽 후에야 돌려주었다. 이날 저녁 크게 놀란 순자는 하루종일 심장이 떨려서 밥술도 제대로 들 수가 없었다. 10년 감수란 말의 진수를 맛보는듯 하기도 했다. 이날 밤 순자는 잠자리에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면서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위태로운 사태가 벌어질 때마다 그것이 왜 유독 자기의 눈에 띄우는가에 대해 생각을 굴려보았다. 예하면 동네에서 한족남정이 임신한 안해한테 폭력을 휘두를 때도 그랬고 여름날 길가에 쓰러진 전간병이 있는 젊은이와 겨울날 저녁 술취한 남성이 길가에 쓰러져있을 때도 그랬으며 낮에 젊은 한족부부가 싸움을 벌였을 때도 그러했듯이 이런 일은 흔히 순자의 눈에 잘 띄웠다. 그렇다면 순자한테 진짜 그가 생각한것처럼 위태로운 사태가 눈에 잘 띄워서였을까. 아니면 순자 본인 스스로 그런 위태한 사태를 목격하면 자기를 돌보지 않고 나서는 습관이 있어서였을까? 그것은 그 후자가 맞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딱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순자는 이른바 부질없는 일에 참여할 때가 많았으니 말이다. 1993년엔가 셋째 딸 영애네가 집수리를 하게 되었다. 당시 영애가 한국으로 가고 없었기에 순자가 딸 대신 사위를 도와 집수리를 하는 13명 인부들의 밥을 해주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하루 인부들 중 나이가 비교적 어린 인부 한명이 부주의로 상해 머리가 터졌으며 얼마간의 피도 흘렀다. 그러자 이를 본 순자는 너무 가슴이 아파하며 자기의 옷을 찢어서는 그 인부의 머리를 동여주었다. 그러고도 “머리가 터져 피를 흘렸으니 닭걀과 돼지고기같은 것을 많이 먹어야 한다”며 돼지고기 요리 등 맛있는 것을 가득 만들어서는 그 머리를 상한 인부는 물론 다른 인부들의 음식그릇에까지 듬뿍듬뿍 담아주었다. 헌데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순자가 사위와 외손주가 먹을 밥과 반찬을 따로 챙겨두지 않고 있는 것 그대로 인부들한테 퍼먹이다 보니 밖에서 들어온 사위 이연규와 외손주는 인부들이 먹다 남긴 찌꺼기로 때를 에우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다른 사람들 같으면 장모의 소행에 속으로 고까운 생각을 했을 수도 있었겠으나 장모의 성미를 너무나도 잘 아는 셋째 사위 이연규는 “이러지 않으면 우리의 장모님이 아니지”라고 우스개로 넘겨버렸다고 한다. 이 외 순자는 그 12명 인부들의 빨래까지 도맡아 해주었다. 아무리 세탁기로 빨래를 한다지만 당시 60세가 넘은 노인이 된 순자로서는 여간만 힘든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 인부들이 입던 작업복은 두껍고도 무거운지라 더욱 힘들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인부들이 높은 곳에서 작업할 때면 밖에 나서서 몸을 조심하라고 항상 걱정해 주었고 날씨가 좀 무덥기라도 하면 자기의 돈으로 광천수나 얼음과자 같은 것을 사서는 인부들의 손에 한두개씩 쥐어 주고야 시름을 놓군 하였다. 순자의 이러한 소행은 외지에서 떠돌이생활을 하면서 품팔이를 하는 인부들한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집수리가 마무리되어 떠나게 되던 날 그 13명의 인부들은 “수십개 지방으로 다니면서 집수리를 하면서도 이렇게 인부들을 친자식처럼 대해준 분은 어머니밖에 없었다”면서 눈물까지 흘렸고 자동차에 앉아서는 오래도록 순자한테 손을 저었다고 한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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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26
  • “흑토지”의 희와 비- 소련이 지배하던 중국 동북의 나날
    1945년 8월 9일, 소련홍군은 유럽전장이 결속된지 3개월만에 중국 동북으로 진출해 위 만주국땅에 주둔해 있던 일본 관동군을 격멸시키면서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미군의 원자폭탄과 더불어 일본의 무조건 투항을 앞당겼다. 최초 동북으로 진출한 소련군은 군 규율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부대였다. 하지만 전쟁 중 상망이 많아지자 소련군은 범죄자 혹은 군입대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 남자들한테 총을 쥐어주며 참군하게 하였다. 그런 소련군은 군규율이란 전혀 없었다. 그들은 거리를 쏘다니면서 술에 취해 물건을 강탈하는가 하면 제멋대로 살인하기도 하였다. 그 외 부녀자들을 능욕하고 강간하고 하여 당시 백성들은 공포에 질려 집문도 감히 열지 못했다고 한다. 위 사진은 당시 중화민국 대표 팽벽생과 심양주둔 소련군 장교가 악수하고 있는 장면이다. 당시의 심양역이다. 역청사 꼭대기에는 중화민국국기와 소련국기가 걸려 있고 출입문 옆의 문주에는 “소련홍군의 영수 스탈린 대원수 만세!”, “소련 노농홍군 창립 28주년 기념 만세!”란 구호가 걸려져 있다. 당시 심양역뿐만 아니라 장춘, 할빈, 여순, 안동 등 대도시의 기차역 청사에는 모두 이런 구호들이 걸려 있었다. 당시 소련홍군은 전패한 일본인에 대해서만 난폭하게 굴었을뿐만 아니라 동시에 동맹국이라는 중국의 백성들한테도 횡포무도하게 굴었다. 위 사진은 심양 거리의 벽에 붙여 있는 소련과 스탈린을 선양하는 포스터이다. 1946년 3월, 심양 제국판점 출입문 위에는 소련과 중화민국의 국기가 걸려 있고 그 위는 스탈린, 레닌, 손중산, 장개석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그리고 그 밑에 중국문과 러시아문으로 “중소 양대 민족은 연합하라!”고 씌어져 있다. 소련 홍군이 동북에 주둔해 있는 몇년간 물건을 강탈하고 부녀를 강간하는 행위로 하여 당지의 백성들은 공포에 떨었으며 아주 나쁜 후과와 영향을 초래하였다. 사진은 미군의 협조대표와 중화민국 정부 및 국군장령이 심양을 접수하기 위하여 심양비행장에 도착한 장면이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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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16
  • 오묘한 세계대백과(27)
    대자연 속의 돌은 대부분 움직이기 싫어하며 그것들은 조용히 “누워 있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어떤 돌은 진짜 매우 활발하여 경쾌하게 춤을 춘다. 이는 무엇때문일가? 한번은 과학자들이 금방 바다밑에서 채집해온 돌을 갑판위에 놓았는데 그 중 몇덩어리의 돌들이 돌연히 아래위로 뛰놀기 시작했다. 과학자들은 매우 이상하여 그 돌들에 대해 자세히 연구하였다. 알고보니 모든 돌들이 다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사화산과 활화산이 형성된 바다밑 산맹에 있는 돌만이 “춤”을 출 줄 알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화산용암 암석 중의 돌들은 이산화탄소의 함량이 일반적인 암석에 비해 20배가 높았다. 그 돌들은 바다밑에 있을 때 받는 압력이 특별히 컸다가 일단 바다밑을 떠나 수면에 올라오면 원래 있던 큰 압력이 소실되면서 구속에서 방불히 벗어난 듯 “경쾌”하게 춤을 추게 된것이다. 세상에는 “춤”을 출줄 아는 돌이 있을뿐만 아니라 “노래”를 부를줄 아는 돌도 있다. 중국 절강의 호수에는 세상에 별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황룡동이 있는데 이 작은 동굴의 꼭대기 부분의 암석은 일반적인 돌과는 특별히 다르다. 왜냐하면 그 돌이 바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소리”가 나는 돌이다. 만약 누군가 힘을 주어 이 돌을 두드리게 되면 이 돌들은 곧 소리를 낸다. 가령 음악가가 절주있게 이 돌을 두드린다면 이 돌들은 심금을 울리는 “음악”도 연주할 수도 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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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15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27)
    용문석굴의 자료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중국, 지점: 하남성 낙양시 용문협곡 함의: 중국의 3대 석각예술 보물고의 하나임 용문석굴은 북위시기부터 건설되기 시작, 400 여 년 후에야 비로서 완공이 되었으며 지금으로부터 1500 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용문석굴은 남북의 길이가 약 1000미터이고 2000여개의 동굴 중 불상이 10만 여 개가 있으며 글이 새겨진 돌조각품이 3600여개이고 불탑이 40여개이다. 용문석굴에는 대량의 종교, 미술, 서법, 의약 등 방면의 실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이는 중화민족의 탁월한 창조력을 보여주고 있다. 용문석굴과 막고굴, 운강석굴 등은 중국의 3대 석각예술 보물고로 불리우고 있다. 특색이 각이한 동굴 봉선사(奉先寺) 석굴은 용문석굴 중 규모가 제일 크고 가장 대표성을 띤 노천불감(露天佛龛)이다. 감내에는 형태가 각이하고 석각기술이 신비한 마애석조군(摩崖石雕)으로 조성되어 있다. 고양동굴(古阳洞)은 북위 효문제(孝文帝) 시기에 건설되기 시작, 용문석굴 중 제일 먼저 파기 시작한 것이며 내용이 가장 풍부한 동굴이다. 약방동굴(药方洞)은 북위말기에 파기 시작, 동굴 내에 고대약방문이 많이 새겨지어 그 이름을 따게 되었다. 이 동굴안의 양측에는 140여개의 양방문이 씌어져있으며 어떤 약방문은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대불상 로사나 봉선사 석굴의 중앙에는 용문석굴에서 가장 큰 불상인 노사나(卢舍那)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이 불상의 높이는 17.14미터로 머리 부분의 높이만도 4미터에 달한다. 불경에 따르면 노사나란 “광명의 선물”한다는 뜻이다. 이 불상을 자세히 관찰하면 입에 미소를 담고 있는듯하고 머리를 약간 숙인듯한 것이 속세를 내려다 보는듯 하다. 이 불상을 보면 흡사 고상한 정조와 풍부한 감정 및 정직한 외모 등이 잘 결합되어 하나의 독특한 예술걸작임에 틀림없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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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5-01-15
  • [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3)
    ■ 김철균 1 순자가 가두 적십자회 주임, 중앙소학교와 신흥소학교의 총보도원, 연변건축공사 선진사업자 등 일련의 희로애락을 거쳐오는 사이 춘하추동과 더불어 세월은 빨리도 흘렀다. 그 사이 “소근장 따라 배우기”, “자본주의 꼬리 자르기”, “우경번안풍 반격” 등 정치선풍을 일으키며 이 나라 백성들을 지지리도 괴롭히던 “4인 무리”가 마침내 역사의 심판대에 오르면서 많은 노간부들과 지식분자들은 이전에 맡았던 당과 국가의 주요한 직무를 회복하였고 사회의 모든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하였다. 순자의 가정도 마찬가지었다. 남편 김용환 선생이 모든 직무를 회복하고 연변 위생학교의 중견일군으로 입지를 굳혔는가 하면 노동자 모집에 합격되어 안도에 있는 삼림경영국에서 투시실 의사로 근무하던 큰 아들 김영남이가 연변의학원 통신학부 시험에 합격되어 노임을 받으며 공부하는 대학생이 되었고 해방군에 입대했던 둘째 아들 경남이는 건강한 몸으로 그것도 더욱 성숙된 채 제대했으며 딸들인 영순이, 영옥이와 영애도 선후로 노동자 모집에 합격돼 연길시내에서 직장근무를 하게 되었다. 이쯤 되면 순자는 한시름 덜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순자는 자녀들이 장성할수록 그들에 대한 요구를 더욱 높였다. 얼마 뒤 큰 아들 영남이가 결혼하게 되자 순자는 아들한테 가정과 동네간의 화목을 위한 많은 것을 일깨워 주었다. “곤란이 있을 때면 항상 아내를 먼저 생각해 주고 특히 그 어떤 일이든 아내가 힘들어할 때 혼자서 하게 하지 말고 함께 받들어서 하라”고 타일렀으며 “결혼하면 이웃이 있기 마련이기에 이웃과의 관계를 잘 처리하며 김치라도 나눠어 먹으면서 화목하게 지내며 사노라면 한족들과 이웃으로 살 수도 있는 법, 서로 재미있게 보내면서 민족단결에도 유의하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이어서 큰 딸 영순이가 약혼하여 오래지 않아 결혼하게 되자 또 “넌 남편의 생모가 없는 가정의 맏 며느리이다. 그러니 뭐니 뭐니 해도 먼저 남편의 계모한테 잘해주어라. 남의 말을 열마디 듣고 너 자신은 한두마디만 해야 한다”는 등으로 수십종목에 달하는 주의사항을 적어주었으며 또한 인생의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부생활십계명”과 어렸을 때 외국인들이 꾸린 성당을 다니며 배운 “말 한마디”란 명구들도 적어주기도 했다. 그 “부부생활십계명”이란 명구는 다음과 같다. 부부생활 십계명 1. 부부 두사람이 동시에 화를 내지 마세요. 2. 집에 불이 났을 경우 외에는 부부 사이에 절대 고함을 지르지 마세요. 3. 눈이 있어도 상대방의 흠을 보지 말며 입이 있어도 상대방의 실수를 말하지 마세요. 4. 아내와 남편은 서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세요. 5. 상내방의 아픈 곳을 긁지 마세요. 6. 분을 품고 침실에 들어가지 마세요. 7. 결심한 걸 결코 단념하지 마세요. 8. 처음의 사랑을 잊지 마세요. 9. 모든 것을 숨기지 마세요. 10. 서로의 잘못을 감싸주고 부족한 사랑으로 채워주도록 노력하세요. 이러한 어구들을 보면 지난 세기 70년연대말과 80년대 초기까지만 해도 크게 시대와 떨어진 봉건예의사상이 짙은 어구라는 평가를 받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순자의 이러한 타이름에 영남이와 영순이는 그 마디 마디를 명심해 가슴속에 아로 새겼으며 앞으로 결혼생활에서 모든 일을 잘 처리하여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겠노라고 수십번도 더 맹세했다. 결혼을 앞둔 자식들에 대한 교육은 영남이와 영순이한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 아래로 영옥이, 영애, 경남이와 김진 이렇게 내려가며 모두 순자로부터 이러한 교육을 받은 뒤에야 결혼하게 되었다. 순자는 이렇게 큰 딸은 시어머니가 계모인 가정의 맏며느리로 시집보냈고 둘째 딸은 아들만 6형제인 가정에 시집보냈으며 후날 셋째딸 영애는 신랑이 비록 셋째었으나 큰 시형은 북경에서 사업하고 둘째 시형은 장춘에서 사업하는 가정에 시집갔으니 역시 신랑이 맏 아들 노릇을 하는 가정이었다. 이런 가정에 시집을 가면 고생할 수도 있다는 도리를 모르는 순자가 아니었으나 일처리를 잘 하면 더욱 받들리며 살 수 있고 그만큼 복도 차례진다는 것이 순자의 철리였다. 그리고 딸들이 그렇게 잘 처사하리라고 순자는 믿고 있는 터였다. 한편 순자의 딸들이 이렇게 부담이 많은 가정에 시집갔는가 하면 아들 3형제 역시 그랬다. 큰 아들 영남이는 아들이 없는 가정에 장가를 들었고, 둘째 아들 경남이는 가정의 맏 사위로 장가를 들었으며 막내 아들 김진 또한 둘째 사위로 장가들었으나 처가집의 큰 처형이 장애인이다보니 역시 맏 사위 노릇을 해야 하는 사정이었다. 이러고 보니 순자의 자식 6남매는 모두 처가집이나 시집의 큰 중임을 떼메게 되었는데 당시의 말대로 하면 순자는 그야말로 “남의 좋은 노릇을 해준 셈”이었다. 2 자식들의 부부를 대함에 있어서 순자는 확실히 아들보다는 사위를, 딸보다는 며느리를 더 끔찍하게 사랑하고 생각해주었다. 그것은 셋째 딸 영애, 둘째 아들 경남이와 셋째 아들 김진이가 결혼하면서 더욱 도드라지게 나타났다. 맏아들 영남이와 딸 영순이가 25살을 넘게 되자 순자는 집에 돼지를 치기 시작하였다. 이는 돼지를 키워팔아 생활비로 보태자는 타산도 있었지만 다른 사연도 있었다. 당시 돼지를 치면 배급에 돼지사료몫으로 옥수수를 더 주었기에 그 옥수수나마 식량에 보내여 며느리와 사위들이 들어오면 배를 곯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가 더 큰 목적이였다. 이렇게 돼지를 키우면서 배급으로 옥수수를 더 타서 식량에 보태서일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순자네는 옥수수밥이나마 더 이상 식구들이 배를 곯는 날이 없었다. “딸보다 며느리를 더 아껴주어야 하고, 아들보다 사위를 더 아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그들 부모한테는 귀한 자식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아들과 딸들을 결혼시키면서부터 제정한 순자의 좌우명이었다. 순자는 말을 이렇게 하였을뿐만 아니라 실제 행동상에서 힘들고 무거운 일은 흔히 아들과 딸들한테 시켰고 애로에 봉착하게 되면 아들이나 딸보다 며느리나 사위를 먼저 돌보군 하였으며 색다른 음식이 있으면 며느리나 사위한테 먼저 먹이군 했다. 1989년 겨울의 어느날에 있은 일이다. 이 날 큰 딸 영순이는 오전 내내 거리를 돌면서 일을 보다가 점심시간이 좀 지나자 밥 한술 얻어먹으려고 친정집에 들렸다. 헌데 원체 모든 자식들한테 단 한번도 인색하지 않던 어머니가 그 날만은 밥이 없다면서 딸더러 집에 가서 먹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딸 영순이가 둘러보니 집에는 덮개를 꼭 덮은 음식그릇이 하나 있었다. 영순이가 그 덮개를 열어보니 밥은 아니었으나 아주 맛있어보이는 오그랑 팥죽이었다. 며느리한테 남겨놓은 것이 분명하였다. 어머니의 심사를 모르는 영순이가 아니였으나 짐짓 어머니를 떠보려고 한마디 했다. “어머니, 여기에 오그랑 팥죽이 한 그릇이 있네요. 야, 맛있겠다. 밥 대신 먹으면 좋겠구만요.” 그러자 순자는 급기야 부엌에서 올라오며 영순의 손에 있는 죽그릇을 빼앗아냈다. “안된다. 셋째 며느리가 오면 한번 더 먹이려고 그런다.” 기실 영순이도 올케한테 남겨놓은 그 오그랑 팥죽을 먹을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었다. 그래서 슬쩍 건드려본 것인데 진짜 성을 내는 어머니, 그야말로 못말릴 어머니었다. 이렇듯 고부지간에 화목하려면 우선 시어머니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가 순자의 며느리 3명 모두가 시어머니를 친정어머니 이상으로 존경하고 따른다. 거기엔 역시 딸보다도 며느리를 더 아끼고 사랑하는 순자의 마음과 솔선수범이 따라준 결과라 해야겠다. 1980년 셋째 딸 영애가 결혼했다. 당시 순자는 셋째 딸의 결혼시 첫날 이불과 이불장 및 첫날옷과 같은 기본적인것만 해주었을뿐 남들처럼 요란하게 잘해주지 못했다. 더군나나 첫날 이불과 요는 제일 싸구려천으로 해주어 그것이 후일 두고 두고 속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그리고 결혼비용도 모자랐다. 예단감을 갖추고 결혼식날의 부식을 구입하고… 돈이 들 일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가정에는 돈이 나올 구멍이 없지만 결혼식은 치러야 했다. 그러자 결혼 당사자인 영애가 단위의 “호조금(互助金)”에서 100원 정도 앞당겨 꺼내서 쓸 수밖에 없었다. 당시 영애의 한달로임은 겨우 35원이었다. 그러니 영애가 그 100원을 갚으려면 일전 한푼 쓰지 않고 두달 노임을 몽땅 밀어넣어도 모자랄 판이었다. 영애가 결혼할 때 친척과 이웃 그리고 영애네 단위의 직원들로부터 들어온 축의금(부조돈)은 수백원에 달했지만 결혼식 때의 비용을 제하고 나니 남은 돈은 약 160원 정도였다. 모두가 1원, 2원 많아야 5원, 10원씩 들어온 축의금이였다. 순리대로 하면 영애의 결혼 후 순자는 그 축의금 160원을 그대로 영애한테 주어 빚부터 갚게 해야 했다. 하지만 순자는 그렇게 처리하지 않았다. 생각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셋째 딸 영애가 진 빚은 천천히 갚아도 된다는 타산에서였다. 아니 영애의 빚을 갚는 것도 급했지만 더 급히 처리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영애의 결혼식이 끝나고 친척들 거개가 집으로 돌아가고 집안식구들만 남게 되자 순자는 큰 며느리 금봉이를 헛간으로 불러냈다. 순자는 보자기에 꽁꽁 싼 돈뭉치를 내놓았다. 그 돈은 영애가 결혼하면서 친척과 친구 그리고 영애 단위의 직원들로부터 받은 축의금이었는데 도합 160원이였다. 원래 받은 축의금은 1원짜리, 2원짜리, 5원짜리 심지어 50전짜리와 20전짜리도 있었지만 순자가 어느 결에 몽땅 10원짜리로 바꾸었던 것이다. “자네 시누이 셋씩이나 시집보내느라고 정말 수고가 많았네. 가정에서 뭐니 뭐니 해도 큰 며느리가 제일 고생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네. 그러니 자 이걸 받게. 160원인데 많지 못하네. 자네 가정의 수요대로 자전거를 사든, 재봉침을 사든 여하튼 큰 가정기물 하나를 갖추게나. 이 시어미가 진작부터 자네 가정에 뭔가 해주고 싶었었다네.” 금봉이는 깜짝 놀랐다. “아니 어머님, 제가 어떻게 이 돈을 받을 수 있어요?! 그리고 제가 무슨 고생을 했다구 이래요?” 큰 며느리는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는게 아닐세. 내가 줄만하니까 주는 걸세. 그리고 이 시엄마가 주는 성의를 무작정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 순자는 망설이는 큰 며느리한테 마구 돈뭉치를 밀어맡겼다. 결혼하느라고 빚을 낸 영애한테는 매우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 당시로서는 시누이 셋씩이나 시집보내느라고 고생한 맏 며느리가 그만큼 더욱 불쌍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엉결에 시어머니로부터 돈뭉치를 받고난 큰 며느리 금봉이는 한동안 어안이 벙벙해있었다. 무슨 감투끈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뒤 큰며느리 허금봉은 그때의 일을 자주 입에 올리면서 참으로 못말릴 시어머니라고 두고두고 감탄해마지 않았다고 한다. 3 1980연대는 순자네 가정에 있어서 “번창하는 연대”였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간고한 “기아기(饥饿期)”을 넘어 온집식구가 배불리 먹기 시작했고 자식들 모두가 성가하여 손군들이 육속 태여나기 시작하기도 했다. 형제가 많아 거기에 딸린 며느리나 사위들이 여럿이 되다 보면 집안말썽도 가끔씩 생길만도 하지만 순자네 가정만은 말썽은커녕 모든 자식들이 모일 때마다 항상 웃음과 노래 소리가 넘쳐나 동네의 부러움을 사군 했다. 특히 명절 때면 17평방미터밖에 안되는 작은 집이었고 모여서 음식을 해먹거나 잠자리 등 모든 것이 불편했지만 어른과 어른 사이, 어른과 아이들 사이 그리고 아이와 아이들 사이에 한마디의 불평이 없이 서로 양보하고 돌보며 웃음꽃을 피우는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다. 대 가정이 이렇듯 화목하고 아기자기하게 지낼 수 있는데는 작으마한 모순이라도 생길 수 있는 화근을 미리미리 막아버리는 순자의 숨은 노력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모른다. 즉 며느리나 사위를 자기가 낳은 자식보다 더 아끼고 사랑한 것 다시 말하면 자식들한테 덕을 쌓은 결과이기도 했다. 한편 가정범위가 커지니 크고 작은 일들이 속출하기도 했다. 손군들이 앓거나 하는 가정내부의 일들이 생기는 건 물론 멀리로는 며느리나 사위쪽 가정에 바라지 않던 일도 가끔씩 생겨나군 하였다. 사돈쪽에서 그 무슨 불행이 생길 때마다 순자는 한번도 남의 일처럼 등한시하지 않았다. 1987년 겨울의 어느 날, 돈화에 사는 둘째 며느리 제갈영애의 친정어머니가 갑자기 병이 위독하다는 기별이 왔다. 빈혈이 심해 수혈도 해야 한다고 했다. 순자는 그 기별을 받은 그길로 남편이 출근하는 연변위생학교로 종달음쳐갔다. “여보, 둘째네 장모가 병이 도졌는데 몹시 위독하다는구만요. 당신이 어떻게 좀 방도를 강구하시우.” “그래?! 어떻게 위독하기에? 아니 알겠소. 그럼 나 인차 퇴근할테니 당신은 알릴만한 사람은 다 알리구려.” 그 날 순자는 큰 아들과 큰 사위 그리고 작은 아들까지 집에 모이게 했다. 큰 사위 최태호는 어디에서 구했는지 봉고차 한대를 몰고 달려왔다. 미구하여 남편이 금방 퇴근한 연변병원 소화내과의 배봉욱 주임의사을 동행시켰다. 배봉욱 주임의사의 가방안에는 얼음으로 포장한 혈액까지 들어있었다. 일행은 밤도와 돈화로 향했다. 약 4시간 뒤 돈화에 도착한 일행은 즉시 경남의 장모를 살려내는 긴장한 구급치료에 달라붙었다. 점적주사를 놓는 한편 동시에 수혈을 시작했으며 배봉욱 주임의사는 환자의 심장맥박, 혈압 등을 수시로 체크하면서 환자가 이외의 반응을 보일 때마다 긴급조치를 취하군 하였다. 병원의 구급실은 아니었지만 모두가 손발이 척척 맞아돌아갔고 환자의 상태를 관찰하는 배봉욱 주임의사와 김용환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대돋았다… 긴장한 구급과 더불어 수혈이 끝나자 얼마 뒤 백지장같던 환자의 얼굴에는 차츰 피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몇 시간의 구급끝에 환자가 위험에서 벗어나자 어느 덧 새벽이 되었다. 일행은 좀 휴식하다가 아침밥을 드시고 떠나라는 경남이와 제갈영애의 만류도 마다하고 눈 한번 붙이지 못한 채 귀로에 올라야 했다. 낮에 또 출근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친정어머니가 완쾌한 모습을 보인 뒤 연길로 돌아온 둘째 며느리 제갈영애는 순자앞에서 오래도록 감격으로 어깨를 들먹이였다. “어머니, 어머니의 은공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어요. 어머니가 아니었더면 저의 친정어머니가 어떻게 되었겠어요?! 정말이지 어머니의 그 정성이 저의 친정어머니를 구해냈어요.” 그리고 병이 완쾌되자 둘째 며느리 제갈영애의 친정어머니는 큰 사돈인 김순자네 내외와 그 자녀들한테까지 크게 한턱 내겠다고 했다 한다. 그뿐이 아니다. 셋째 며느리 정선희의 친정아버지가 중풍에 걸리자 순자는 사돈이 입원한 날부터 위문을 다니기 시작, 장장 20년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며칠에 한번씩 문안을 다니는것이 일과중의 하나였다. 그 사이 순자 역시 노년기에 접어들었고 누구한테 짝지지 않게 건강하던 몸이 나중에는 지팽이를 짚고 다니는 파파할머니로 되기도 했다. 하지만 사돈의 건강에 대한 관심은 그 사돈이 사망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며느리와 사위들을 아껴주고 지어는 사돈집의 일에까지 참여하는 순자였건만 자기의 몸에 등한시할 때가 많았다. 일찍 지난 세기 80연대 작은 아들 김진이가 결혼하고 거기에 둘째 아들 경남이네가 집이 파가이주되어 임시로 들어와 있다 보니 17평방미터밖에 안되는 집은 터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식사는 교대별로 했고 남편은 학교 사무실에 가서 자야 했으며 순자는 현관에 넢판자를 펴고 쪽잠을 자야 했다. 심지어 온집식구가 몽땅 모여 함께 북적일 때면 순자는 손에 쥐었던 대야를 놓을 자리가 없어 아예 머리위에 이고 있었다고 하니 그 때의 그 광경이야말로 17평방미터밖에 안되는 작은 방안에 콩나물시루처럼 식구가 빼곡히 들어와 있었다는 비유가 딱 들어맞았다. 당시 순자는 저녁에 현관에서 자다가도 새벽이 되면 다시 살며시 들어와 며느리들을 깨울세라 아침밥을 지었고 그 뒤 며느리가 식사할 때면 손주녀석 둘씩 업고 밖에 나가 달래면서 며느리가 제때에 밥을 먹고 출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다 가도 며느리나 사위들 중 누가 앓기라도 하면 모든것을 제쳐놓고 거기에 모든 정성을 쏟는 순자였다. 이렇듯 가정에서 순자가 모범을 보이기에 가정성원들 사이가 화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자네 가정의 화목함을 두고 당시 많은 사람들은 부러워하면서도 왜 그렇듯 화목할수 있었는가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순자를 찾아와서는 “며느리를 잘못 맞아와 부산해죽겠소”, “아들도 장가를 가더니 남이 돼가오”, “손자손녀를 키워주어도 차례지는 것이란 그저 그렇소”하며 불평을 부리기가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순자는 아주 설득력이 있게 그런 사람들을 감화시키군 했다. “가정관계도 대괄호, 중괄호, 소괄호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우다. 대괄호 【 】가 로인들이 있을 위치라면 중괄호{ }는 젊은이들이 있을 위치이고 소괄호 ﹝﹞는 손군들이 있을 위치라우. 그런데 노인들은 자기들이 있어야 할 대괄호안에 있지 않고 자꾸 중괄호안이거나 소괄호안에 비집고 들어가려고 하니까 인간위치 관계가 혼돈이 생기면서 망썽이 생기는 법이 아니겠수?!” 순자의 이론을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할아버지{ 아들 ﹝손자, 손녀﹞ 며느리 }할머니】 이는 어찌보면 소괄호안의 문제부터 풀이하는 수학법칙과도 같았다. 즉 소괄호풀이부터 시작하여 중괄호와 대괄호의 문제를 풀이하는 법칙 말이다. 이렇게 보면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아들과 며느리가 있는 중괄호안에 들어가려고 해도 어긋나거니와 손자와 손녀가 있는 소괄호안에 들어가 손자나 손녀들과 똑같은 배려를 요구하면 더욱 안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렇다면 순자의 솔선수범이 전반 가정의 화목을 촉진시켰다고 해도 실로 과언이 아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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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10
  • 민국일화 - 귀족후손들과 양공주들의 풍류사
    한 나라로 놓고 말하면 조대의 개방정도에 따라 섭외혼인의 수량과 활약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중국의 당조시기, 허다한 본토 여자들이 해외에 정착했고 동시에 역시 수많은 요염한 양공주들이 당조의 남자들과 짝을 맺아 인륜사를 창조, 이는 당시 당조의 일종 아름다운 풍경으로 되었다. 당조 이후 중국은 점점 대내외적으로 봉쇄정책을 실시하면서 이러한 풍경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편전쟁을 계기로 서양인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시각은 부동한 두가지 부류로 나뉘게 되었다. 즉 전자는 오만하고 후자는 공포감에 시달리는 것 등이었다. 청나라의 도광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크고 작은 관원들은 마치 서양인들을 보면 마치 “온역”을 피하듯 멀리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서양인을 별로 “인간취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청조말기와 민국초기에 와서 이러한 현상이 개변되면서 중국은 다시 얼굴을 해외로 돌리고 서양인들과의 교류를 활발하게 진행하기 시작하였으며 따라서 중국남자와 서양여자, 서양남자와 중국여자들 사이의 혼인현상도 종종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때에 와서야 사람들은 인간의 정감이란 민족과 종족을 떠나 세계의 그 어느 곳에도 가 닿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른바 귀족후손들이 섭외혼인에서도 선도작용을 했다. 육정상(陆征祥), 장백리(蒋百里), 호적(胡适), 부걸(溥杰), 장위국(蒋经国)…그들은 청조말기부터 민국초기 사이의 풍류남아들로서 이들 모두는 출신이 우월했고 전통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대담히 전통과 문화의 장벽을 허물고는 한명, 또 한명의 이국소녀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했다. 육정상과 벨지크 여인 페더 베르트 1895년 러시아 상테페테르부르그 차르궁정의 무도회에서 아주 뜻하지 않던 일이 발생했다. 러시아 주재 청정부 대사관의 통역관 육정상이 양복을 입고 숙련된 프랑스어로 신사숙녀들 속에서 통역을 담당해 인기를 끌었다. 그의 세련된 예의, 서방남성한테서 볼 수 있는 풍도와, 동방남성한테서 볼 수 있는 우아함에 많은 숙녀들이 가슴을 부둥켜안군 했다. 이 중에는 벨지크 숙녀 페더 베르트도 있었다. 페더 베르트는 벨지크의 한 장군의 손녀였다. 베르트의 부친은 벨지크 국왕의 시종무관이고 육군대령이었다. 당시 베르트는 러시아 주재 벨지크 대사관에 거주하는 친척 로크의 집에 머물고 있었으며 친척관계를 통하여 경상적으로 궁정 연회 및 무도회에 드나들군 하였다. 그녀는 말씨가 친절하고 자태가 아름다워 늘 사교계의 화제로 되군 하였다. 얼마 뒤 육정상과 베르트는 서로 사랑하기 시작, 당시 육정상은 24세였고 베르트는 40세였다. 1899년 2월 12일, 상테 페테르부르크의 성카리나 대성당에서 서양식 결혼식을 거행, 천주교 교부 라클랑르가 주례를 섰다. 그 뒤 27년간의 결혼생활에서 이들 남녀는 결혼선언을 완벽하게 이행하였다. 결혼후 이들은 비록 서로 끈끈히 사랑했지만 세속은 그들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았고 각종 적의적인 유언비어들이 난무하였다. 그러자 남편의 압력을 덜어주기 위하여 낭만적이고 떠들기를 좋아하던 베르트는 늘 집안에 들어박혀 있으면서 외출을 삼가하였다. 러시아 생활의 8년간 육정상은 4등 통역관으로부터 2등 참사관으로 되었다. 그가 순리롭게 출세할 수 있은데는 역시 베르트의 공로가 아주 컸다. 이들은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면서 27년간을 함께 생활, 1926년 베르트가 사망할 때까지 줄곧 결혼시의 언약을 잘 이행해왔다. 베르트가 사망한 이듬해 육정상은 스위스주재 중화민국 공사관의 직무에서 사퇴하고는 벨지크로 이민하였다.    호적과 미스 에디스 윌리엄스의 사랑 중국 신문화운동의 기수로서 호적은 일생동안 사랑과 도덕의 십자가를 등에 지고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호적은 자신의 전족부인 강동수와 함께 정이 없는 부부로 “백년해로”했지만 그 역시 “남자로서는 모두가 범할 수 있는 착오”를 범했다. 이 중 하나는 그와 이종사촌 여동생 조성영간의 혼외연이었고 다른 하나는 장장 반세기에 달하는 그와 미국연인 월리엄스와의 플라톤 사랑이었다. 호적과 월리엄스가 서로 알기 시작한 것은 1914년이었다. 당시 월리엄스의 부친은 미국 예일대학과 코넬대학의 지질학 및 고생물학 교수였고 당시 월리엄스는 뉴욕의 한 예술전문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 때 월리엄스는 귀가해 휴가를 보내던 중 처음으로 호적과 만나게 되었다. 당시 월리엄스의 평범하지 않고 명랑한 성격은 호적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는 그로 하여금 비상한 용기로 전문 월리엄스를 방문하도록 하였다. “서양부호”의 딸 월리엄스는 호적보다 6살 연상이었다. 그 때 월리엄스의 고결한 인품과 풍부한 학식 등은 호적으로 하여금 그녀를 사모하게 하였다. 아울러 호적의 넘쳐나는 재능 또한 월리엄스로 하여금 “인생지기를 얻은듯한 쾌락”을 가지도록 하였다. 또한 유능인과 유능인의 만남은 마음속에 가졌던 모든 방선이 무너지도록 하였다. 하지만 그들 남녀의 내왕은 호적의 부모로부터 강한 반대의 벽에 부딪쳤다. 원래부터 호적의 미국생활을 반대해온 부모는 기어코 호적으로 하여금 억지로 미국으로부터 돌아오게 하였고 귀국하자 바람으로 강동수와 결혼하도록 강요하였다. 어찌보면 호적 역시 흉금이 넓은 군자였다. 그는 종래로 강동수와의 혼약을 월리엄스한테 숨기지 않았으며 지어 강동수의 사진을 월리엄스한테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서신거래로 맘에 들지 않는 강동수와의 결혼에 대해 고민을 털어놓으면서 월리엄스의 조언을 요청하기도 했다. 비록 자신의 미혼녀에 대해 만족해하지 않았지만 호적은 자기가 좋아하는 여인앞에서 자기 자신은 봉건세속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결국 강동수와 결혼할 수밖에 없노라고 고백했다. 이에 월리엄스는 조금도 호적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묵묵히 호적의 고충을 이해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지지하고 달갑게 호적의 “학술상의 반려”로 되어 주었다. 그리고 월리엄스는 종신토록 출가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소현미와 항미려의 로맨스 소현미(邵洵美)라고 하면 현재의 중국 문학권에서는 아는 사람이 별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세기 30~40연대의 중국문단에서 그는 명성이 아주 대단하던 사람으로 일찍 수차 노신(鲁迅)으로부터 풍자와 공격을 받았었다. 당시 노신으로부터 비판을 받은 사람들을 놓고 보면 모두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소현미는 출신부터 평범하지 않았다. 그의 조부는 일찍 청조시기 대만의 제2임 순무관 소우겸이었고 외조부는 만청시대의 제1 관상으로 “중국의 상부(中国商父)”로 불렸던 성선회었다. 이러한 출신은 그로 하여금 부잣집 도련님으로 될 확율이 아주 높게 하였다. 하지만 그는 인생을 옳바르게 인식하고 남들이 먹고 마시고 창기 놀음을 할 때 문학의 길에 들어서서 시를 쓰고 서점과 잡지사를 만들면서 자신의 가치관을 수립했다. 한편 그의 인생에서 전기적인 색채로 보면 미국 여작가 항미려와 한단락의 연애사가 있은 그 것이었다. 항미려의 원명은 에밀리 하은으로, 1905년 미국 중서부의 생루이 주에서 태어났으며 소현미보다는 한살 위었다. 그녀는 어릴적부터 독립성이 강했고 위스콘신 대학 광야금공업공정학부를 졸업한 뒤 이 학교의 첫 광야금공업공정부야 학위를 딴 졸업생으로 되었다. 에밀리 하은은 자기의 전업에 대해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오직 종래로 여학생을 모집하지 않는 이 학부에 도전해보았을 따름이었다. 졸업 후 에밀리는 자신이의 성격이 “오전 9시에 출근하고, 오후 5시에 퇴근하는 생활”에 적합하지 않음을 깨닫고는 직업을 포기, 아프리카 콩고의 열대우림에서 생활하면서 미국 뉴욕의 한 간행물에 글을 보내는 작가로 되었다. 1935년 에밀리는 중국 상해로 향하는 윤선에 올랐다. 상해에서 그녀는 재빨리 싸롱과 나이트클럽 등 밤무대의 총아로 되었다. 이 시기 에밀리는 이름을 항미려로 바꾸었고 소현미와 한단락의 로맨스를 엮기도 하였다. 하지만 레온사인의 황홀함 역시 그녀한테는 원시삼림의 유혹보다는 크지 못했다. 그녀 즉 항미려- 에밀리가 상해를 떠나기로 했던 그 시각, 소현미와 에밀리의 사랑도 막을 내렸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역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1-05
  • 장개석의 투항 유도하려 했던 모택동의 “실수”?
    1950년 5월 16일, 국민당군이 주산(舟山)에서 철거한 뒤 장개석한테는 금문도와 마조군도에 대한 수비문제가 골치거리로 나섰다. 당시 이 2개의 섬도를 사수하느냐 아이면 포기하느냐를 두고 국민당군 내부에서는 논쟁이 가시화되었다. 장개석과 국민당의 고위층은 확실한 계획을 잡지 못하였고 이 2개 섬의 백성들은 불안과 공포에 시달렸다. 바로 이 때 모택동과 중공은 이미 대만을 해방할 결심을 확정하였다. 중공중앙에서는 1950년의 해방군 임무를 해남도, 대만과 서장을 해방하고 이 경내의 국민당 잔여세력을 소멸하는 것이라고 명백히 규정하였다. 하지만 당시 외계에서 알지 못하고 있은 것은 모택동은 일을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않은 바로 그 것이었다. 아울러 모택동은 장개석에서 회생의 길을 마련해 주려고 했었다. 당시 해방군이 한창 전쟁준비를 진행하고 있을 때 모택동은 적당한 인물을 파견하여 장개석과 접촉함과 동시에 평화담판의 가능성을 탐색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그 때 모택동이 선택한 인물은 장치중 장군이었다. 장치중 장군은 원 국민당의 고위관원으로서 육군 2급 상장이었고 선후로 호남과 신강 등 2개 성의 성주석이었으며 장개석의 위원장 비서실 주임까지 한적이 있었기에 장개석과 사인관계가 아주 밀접했다. 한편 그와 중공과의 관계 또한 양호하였는바 일찍 국민당을 대표하여 국공 양당간의 담판에도 수차례 참가하였었다. 1950년 3월 11일, 모택동은 화남지구에서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장치중한테 “대만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데 관한 장치중 선생에게 보내는 전보”에서 “선생이 대만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 매주 적합하고 중요할 것 같습니다. 희망을 버리지 말고 고심히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생각밖의 효과를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썼다. 그 뒤 3월 20일, 모택동은 재차 장치중한테 전보를 보내어 한번 만나 구체적으로 연구해보자고 제의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엽검영한테 지시하여 장치중의 경호사업을 잘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 뒤 장치중이 북경으로 오자 모택동은 직접 중앙군위의 모 책임자를 배치하여 장치중의 경호사업을 책임지게 하였으며 한편 장치중과 회담하면서 일단 대만이 평화적으로 해방될 수만 있다면 장개석의 인신안전은 물론 기타의 정치와 행정분야에서도 출로를 마련해줄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려 주었다. 그러자 장치중은 모택동의 계획에 좇아 장개석한테 마지막 회생의 기회를 줄수 있는 내용을 편지에 담아 정성들여 썼으며 홍콩의 한 유명인사를 통해 편지가 대만의 장개석한테 전해지도록 부탁하였다. 헌데 이 편지가 장개석의 손에 들어간 것은 수개월 뒤인 7월 19일이었다. 국민당군이 주산군도에서 철수한 뒤 장개석과 대만의 군민들은 의연히 중공측에서 평화담판의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크나큰 공포와 긴장속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후에 원 국민당군의 장령이었던 주굉도는 장개석이 이 편지를 받았을 때의 정경을 다음과 같이 회억하였다. 1957년 7월 27일, 이 날은 한반도 내전이 발발한지 1개월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 장개석은 연회를 차려 국민당군의 여러 원로들을 청해서는 한국전에 개입할 뜻을 전달하였다. 연회도중 국민당 장령인 하응흠이 돌연히 장치중이 3월 16일에 쓴 편지가 7월 19일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공개하였다. 하응흠은 “67페이지에 달하는 이 편지는 참모총장 주치유를 통해 장개석한테 전달되었다가 19일 다시 나한테 보내졌다”면서 장개석은 당장에서 중공의 제의를 거절하였다고 밝히었다. 그러면서 하응흠은 장치중의 편지내용을 공개,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았다. 국민당은 10여년간 “공산비적토벌”에 나왔지만 정치의 부패로 필연적인 실패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현재 국공간의 힘을 비교해볼 때 인민해방군은 긍정코 대만을 해방할 수 있으며 아울러 국민당은 대만을 지킬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대만은 필연코 국민당의 무덤으로 될 수밖에 없다. 장치중은 편지에서 또 만약 위원장께서 원한다면 자기 자신이 홍콩에서 만날 수가 있으며 이 편지는 모택동의 동의하에 작성한 것이라고 밝혔다. …… 하응흠의 보고가 끝나자 진성, 장군, 오충신 등은 모두 이는 대만공격 전야에 있게 되는 중공의 상투적인 정치공세라고 하는 한편 장치중을 혁명의 배반자라고 하면서 마땅히 제재하여야 한다고 흥분해하였다. 주굉도는 그 때의 정경을 회상하면서 장개석이 당시 사적으로 편지를 처리하지 않고 하응흠더러 공개장소에서 읽게 한 것은 자신이 복국중임(复国重任) 을 짊어졌기에 자신이 중공한테 머리를 돌린다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지 그한테 평화담판의 생각이 없은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였다. 한편 장개석이 모택동의 평화담판제의를 거절한 것은 다른 두가지 방면의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한반도전쟁이 발발하고 대만을 돕지 않던 미국정부의 태도가 크게 전변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장개석 본인이 장치중과의 개인감정에서 크게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장치중으로 놓고 말하면 1949년 북평에서 있은 국공양당간의 평화담판시 북평에 간지 얼마 안되어 공산당쪽으로 기울어지면서 국민당내에서 공산당에 투항한 장령중의 일원으로 되어 장개석한테는 가장 큰 수치이기도 했다. 한편 장치중이 쓴 편지가 4월이나 5월에 대만에 도착했더라면 역사는 혹시 다르게 씌여질 수도 있었는바 이는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당시 해방군은 주산군도와 해남도를 해방한 후 즉시 대만에 대한 공격준비를 다그쳤다. 당시 해방군은 화남 각지에 30개에 달하는 군용비행장을 수건하여 400대의 전투기가 이미 비행장에 진입했으며 복주, 하문, 산두 등 항구에 대량의 등륙정 및 기타 군함을 배치해 놓고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장개석 등 국민당 수뇌부는 7월경에 이르러 대만해협의 풍랑이 적게 일 때 중공의 수십만 대군이 해협을 건너오면서 공격을 개시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 5월말의 대만은 완전히 미국의 “제28호 특별명령”에서 지적한 것처럼 “모두들 이 섬이 곧 함몰되고 중화민국이 섬도에서 기타 지구와 마찬가지로 쉽게 공략된다”고들 했다. 한편 5월 27일, 대북의 “중앙일보”는 사론을 발표하여 대만이 이미 전례없는 위기가 도래하였다고 승인, “중앙일보”의 이사장 동현광 역시 “중국이 이미 이 지경에 도달했으니 오직 의지상의 기적만이 이를 만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 와중 오직 장개석만이 매우 견정했다. 당시 장개석은 “만약 대만을 지키지 못해도 나는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미 “살신성인(杀身成仁)”의 각오를 가졌다고 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만약 당시와 같은 사태가 재차 벌어져 모택동이 장치중이 아닌 다른 사람한테 위탁해 “살신성인”이 지경에 이른 장개석에게 편지를 쓰고 또한 한반도 전쟁같은 “대사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 결과의 역사는 긍정코 다시 씌어질 수도 있겠다는 결론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2-28
  • 1949년 겨울 북경의 ‘금창(禁娼)운동’ 내막
    중국의 민국초기 사창업은 규모화를 형성하기 시작, 가장 번창하던 1917년 북경에 등록된 기방은 도합 391개에, 기생 3500명에 달했으며 암암리에 사창업에 종사하는 기생은 적어도 7000명이 되었다고 한다. 항전시기 북평의 매 250명의 여성중 1명은 기생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1) 북평이 해방된 후 사회는 복잡하였다. 당시 정부에서는 비록 기방들에 대해 즉각적인 차압을 강행하지는 않았지만 사회의 치안을 정돈하면서 기방들을 관제범위내에 넣었고 각 공안분국과 파출소들에서는 경상적으로 기방의 표객(嫖客)들을 검사하고 나쁜 분자들을 추적하군 하였다. 당시 기방은 흔히 국민당 특무들이 숨어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분간 차압할 수 없는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북경시 공안국에서는 사회치안을 수호하는 각도에서 기방들에 대해 약간의 잠정규정을 정해놓고 관제하고 있었다. 당시 북경시 정부의 규정에는 해당 공안국과 파출소에서는 우선 각 기방들에 대해 등록하고 각종 방식으로 해결방식을 탐색하군 하였다. 한편 어떤 공안분국에서는 표객들의 기방으로 드나드는 것을 제한하기 위하여 “표객검사” 도장을 만들어서는 파출소들에 발급, 표객이 발견되면 우선 교육을 하였으며 나중에는 표객의 신분증과 영수증에 도장을 찍군 하였다. 한번은 50세 가량의 한 남성이 기방에 들어왔다가 파출소 일군들한테 잡히게 되었는데 그한테는 그 어떤 증건도 없었다. 그러자 파출소 경찰은 그 남성의 와이셔츠에 “표객검사”란 도장을 찍어보내였다. 그 뒤 기방마다 “도장일군이 왔다”고 하면 모든 표객들은 도망가군 하였으며 기방은 썰렁하기 그지 없었으며 어떤 업주들은 문을 닫고 폐업하였고 적지 않은 기생들은 기타 지구의 기생방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암암리에 몸을 팔며 생계를 유지하군 하였다. (2) 1949년 5월, 북경의 사회치안은 혼란현상이 기본상 청리되었다. 그러자 북경시 정부에서는 회의를 열고 전문 기생들에 대한 문제를 연구하였다. 당시 북경시 시장이었던 엽검영은 “기방에 대한 처리는 반드시 먼저 사람을 파견하여 정황을 요해한 후 처리방침을 결정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5월 23일, 북경시에서는 민정국, 공안국과 부련회 등 기관의 일군들로 구성된 사업조가 조사사업에 착수, 전 시 200여개의 크고 작은 기방의 기생들을 대상으로 공안국과 민정국에서 각각 조사자료를 작성, 기방의 역사, 분포상황, 등급, 시설, 영업상황 및 기생들의 종류, 내원, 생활상황과 윤락원인 등을 시정부와 중앙공안부에 바치었다. 한편 민정부문에서는 기생들을 집합시킬 장소를 선택하고는 일부 생필품을 구전하게 갖추어놓았으며 시부련회 간부가 직접 각 부문으로부터 뽑아온 간부들에게 정책선전 훈련을 시켰고 위생국의 의사를 초청해 성병방지지식강좌를 조직했다. 또한 기업국에서는 수용된 기생들이 해야 할 일, 즉 털실옷 뜨기 등 일거리를 마련하군 하였다. 10월 15일, 북경시위와 북경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공안국, 민정국, 부련회 등 부분에서는 “기방 봉폐행동 총지휘부”를 내왔으며 시공안국 국장 나서경이 총지휘를 맡았다. (3) 행동시간: 1949년 11월 21일 오후 6시 책임부문: 북경시 공안총국 총지휘: 나서경 행동방식:3명씩 1개 소조로 배비, 1명의 여간부 5개 내지 10개의 기방 조사기록. 조사대상: 주인, 마담 및 대리인, 기생, 심부름꾼 등 행동을 통일하기 위하여 오후 6시를 행동시간으로 규정, 집합시켜 회의를 여는 방식으로 주인, 마담을 집중시키고 오후 8시에 기생과 심부름꾼 등을 집중관제에 들어간다. 행동지휘부는 기방 분포상황에 따라 도합 5개의 소지휘부로 설치, 기방이 비교적 집중된 5개 지역에 각각 설치하였고 행동소조는 27개로 구성되었으며 도합 81명으로 매 소조마다 3명씩이었다. 그리고 매 소조마다 1명의 성격이 드세고 사업능력이 비교적 강한 여간부와 정책선전수준이 뛰어난 과장급 이상의 간부를 두었다. 행동소조의 임무는 지정된 기방에 도착하여 북경시 각계대표회의의 결의를 선포한 뒤 기생들을 집중시키고 심부름꾼과 마담 및 표객을 해산시키고 기방 재산을 차압하는 것 등등이었다. 이 날 어느 한 행동소조가 소상루(潇湘樓)에 도착하자 한 심부름꾼이 문어구에 앉아 안쪽에 대고 소리쳤다. “기방검사단이 왔다. 손님이 있든 없든 모두 자기의 문어구에서 검사를 받으라!” 그러자 일부 요염하게 생긴 기생들이 엉덩이를 휘두르며 자기의 문앞에 나타났다. “기방검사단이 아니야, 우리는 너희들 기방을 차압하러 온 사람들이다.” 행동조 조장이 웨쳤다. 이어 머리에 철갑모를 쓰고 몸에 녹색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총에 장탄한채 기방의 문어구에 버티고 서자 그제야 도고하던 기방의 주인과 심부름꾼 등은 사태의 엄중성을 느꼈던지 행동조장의 말에 고분고분해지기 시작했다. 몇시간 뒤 기생들을 가득 실은 자동차들이 전문밖, 숭문문밖, 서교백방자와 동교로부터 한가담과 백순골목에 자리잡은 8개의 부녀노동교양소에 도착하였다. 이 곳에서 기생들은 각각 여러 뜨락에 배치되어 학습하는 한편 노동개조를 하게 되었다. (4) 1949년 11월 23일, 북경내 기방들이 차압된지 3일 후 북경의 8대 골목중의 하나인 한가담(韩家潭)의 대문에는 “북경시 부녀생산교양원”이란 간판이 걸리었으며 역시 철갑모를 쓴 공안총대의 전사가 총을 쥐고 보초를 서고 있었다. 1949년 11월 29일, 북경대학병원 성병방치소 등 6개 의료부문의 57명의 의료일군들이 육속 부녀생산교양원에 파견되어 기생들에 대해 신체검사를 하고 성병에 걸린 기생들에 한해서는 무료로 치료해주었다. 교양원에서는 기생출신의 여성들의 출로문제를 두고 아주 심중하게 처리하였다. 이 교양원에서 개조를 마치고 나가는 여성들에게는 아래와 같은 수속을 밟아주었다. 첫째, 정부의 증명신을 발급, 증명서가 있는 본인은 정당 직업이 있는 주민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둘째, 생활보장을 해주는 기초상 몇가지 보증을 하게 하였는바 그것들로는 교양원에서 나간 뒤 노동이거나 가무에 종사하고 더는 창녀생활에 종사하지 않는 것, 정부의 혼인법에 따라 혼인하되 변상적인 매매혼인행위가 있어서는 안되며 결혼시 반드시 위생부문을 통해 신체검사를 받아야 하는 것 등등이었다. 한단계의 학습과 개조를 통하여 도합 1077명 여성들이 교양원에서 나가게 되었다. 헌데 대부분 여성들은 집이 없기에 자원하여 교양원에 남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교양원에서는 그들에게 82대에 달하는 직포기, 양말편직기 등을 사줌과 아울러 그녀들을 위해 신생 편직물공장을 차려 주었다. 한편 교양원에서는 북경에 있는 희곡인원들을 초청하여 그녀들을 도와 일부 소형연극을 자체로 창작해 출연하게 하였다. 이 중 연극 “천년 빙하의 해동(千年冰河开了冻)”은 금교라는 여자가 기방에 팔려가 기생으로 전락되었다가 해방을 받는 내용을 주선율로 낡은 사회 창기제도의 잔혹성과 암흑성을 폭로하였다. 교양원에서는 또 특별히 극단을 조직, 한단계의 연습을 거쳐 1950년 춘절이후 이 극단에서 출연한 연극 “천년 빙하의 해동” 북경성내에서 대 환영을 받았는바 1일주일간 출연하는 동안 극장안은 번마다 초만원을 이루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2-27
  • [연재] 동년을 회억하여 ( 3 ) 할아버지편
    저자: 리락용(1946~현재) 전주리씨43세, 의안대군파 21대손 2. ‘땅과 농사는 天下之大本’이다. 농사는 天下之大本이다. 할아버지는 밭이 일체를 결정하며 밭이 없으면 설 자리도 말할 자리도 없으며 밭이 있으면 근본을 바꿀 수 있다고 여기였고 또 한 평생 그 밭을 위하여 분투하시였다. 할아버지는 후세에 다시는 밭이 없는 치욕을 물려 주려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아름드리 나무를 베여 내고 그 자리에 그 재료로 집을 짓고 그 주위에 밭을 개간했는데 지금 보면 그 밭 면적은 한상(垧)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아래 마을 강변을 개간하여 수전을 만들었는데 그 면적도 반상(垧)은 되는 것 같다. 이로서 그때에도 의식주 문제는 기본상 해결된 것 같다. 그 후에도 할아버지는 계속하여 유동촌 밭에 백여메터 되는 수로를 파서 장풍동 하천과 봉암동 하천을 끌어들여 수전을 만들었다. 할아버지는 여기에도 만족하지 않고 봉암동 하천 량쪽 황무지를 계속 개간하였으며 땅 한 뙈기라도 사들여야 마음을 놓았다. 우리 집이 전부의 주요 재산은 밭과 농기구 였다. 할아버지는 돈을 모아 밭만 사들였다. 특히 일본이 망한 후 연변 조선 사람들중 돈과 땅이 있고 공산 혁명의 형세를 아는 사람들은 헐 값으로 밭을 팔고 조선에 갔다. 이리하여 밭 값이 눅어 지자 할아버지는 형세를 모르고 땅이 눅다고 많이 샀다. 그후에 광복을 맞아 외지에서 일하던 둘째 셋째 아들들이 집이 돌아와 장풍동 집에 식구가 많아지자 번동에 밭을 사고 집을 지었다. 그리고는 둘째 숙부에게 장풍동 집과 주위의 밭을 주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 할아버지 토지 구매욕은 형세를 모르고 48년 토지개혁 이후에도 계속 되였다. 하여 가을이 되면 앞마당에 낟가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졌다. 할아버지는 밭을 부치기 위해 자식들이 집을 떠나 직장을 찾는 것도 반가워 하지 않았다. 45년 8.15광복후 도문철로 기관차 부사수로 일하다 일본 놈이 감방에1년2개월 갇혀 있으면서 전념병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기적같 이 살아온 둘째 숙부와 도문철도 기무단에서 일하다 광복을 맞으며 잠시 돌아온 셋째 숙부에게 정부에서 복귀 통지서를 보냈지만 할아버지는 그들을 꽁꽁 묶어두고 보내지 않았다. 만약 그때 숙부들이 복귀했다면 오늘 같은 신세가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셋째 숙부가 조선에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토지개혁 이후까지 밭을 사들여 아버지가 안 계시는 우리 집에 밭이 너무 많아 할아버지 혼자서 부치기에는 아주 힘들었을 것이나 할아버지가 밭에 못 나가게 하여 할아버지가 일하던 기억은 없다. 다만 넓은 앞마당에 집채 보다 더 높은 벼 낟가리 조 낟가리 콩 낟가리가 줄지어 있었던 기억만 생생하다. 남들이 낟가리는 이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우리 집 앞마당은 아주 넓었는데 봄에는 오이 고추 가지 마늘등 채소를 심어 먹고 가을이면 탈곡장으로 사용했다. 인상 깊은 것은 벼 조 콩등의 탈곡이였다. 벼 탈곡은 어른둘이 발판을 밟아 고리가 달린 원통을 돌리면서 벼를 탈곡했는데 힘들어 할 때에 한사람이 두 사이에 끼여 들어 밟아주군 했다. 호기심이 많고 작난꾸러기인 나는 어른들이 말도 듣지 않고 어른들 사이에 끼여들어 발판을 밟기도 했는데 도움은 커녕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조 탈곡은 할아버지가 얇은 철판으로 만든 가리개를 사용하였으며 어머니와 삼촌들은 자작나무를 곱게 가공하여 만든 가리개를 사용 했다. 혹시나 어떤 때에 할머니도 참여했는데 앉아서 무딘 칼로 조 이삭을 자르곤 했다. 이렇게 잘라낸 조 이삭은 마당에 펴놓고 소가 군재를 돌리며 끌고 다녔다. 어른들이 마당 복판에서 소를 몰았는데 나도 끼여 들어 소를 몰기도 했다. 군재가 끝나면 도리깨로 낟알을 철저히 털어냈다. 이미 60이 넘으셨고 중병에 계신 할아버지는 이 모든 일을 주관하셨으며 손수 다 하였다. 사랑채에는 큰 뒤주가 세 개 있었는데 널판으로 만든 뒤주에는 벼와 조, 조짚으로 만든 뒤주에는 콩을 보관했다. 벼 뒤주는 너무 높아 나는 무서워 올라 가지도 못했다. 당시4-50년대에 장풍동 골안에서 입쌀밥을 먹는다는 것은 정말 희한한 대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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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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